불교

불교 교리의 전개

수선님 2019. 6. 2. 12:02

불교 교리의 전개

연기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란 것은 앞서 밝혔다.

앞으로 전개되는 대승불교의 큰 물줄기라고 할 수 있는 중관 과 유식, 화엄과 정토 등의 불교 교리도

이 연기법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각 교리들은 저마다 고 유의 특징이 분명히 있으므로, 이를 파악하는 것은 마치 연기법이라는 바다로

흘러가는 다양한 물줄기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교단은 계속적인 발전을 하다가, 100년쯤 되면서부터 교리와 계율에 대한

교단 내 구성 원들의 엇갈린 견해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마침내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갈라지면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분열에서부터, 계속적인 교리와 계율의 해석을 둘러싼 또 다른 분열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부처님 불멸 후 약 500년경(B.C 1세기경)에는 20부파가 형성된다.

이러한 시기의 불교를 ‘부파불교’시대라고 부른다.

부파불교 시대의 각 부파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부파불교 시대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교설이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 그에 알맞은 법을 설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산만하고 단편적인 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러한 교설을 분석하여 체계화할 필요가 생 긴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 시대의 연구를 아비달마(阿毘達磨) 교학이라고 부른다.

아비달마 시대의 각 부파는 자 신의 아비달마 교학의 성과를 결집하여 경, 율과 함께 성전으로서 간직하게 되는데,

이것을 경()ㆍ율()ㆍ론() 의 삼장(三藏)이라고 하여 부파불교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교학은 초기불교의 교설을 체계화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학 의 논쟁이 너무나 엄밀하고 치열한 것이 지나쳐 어렵고 번쇄하기 짝이 없다는 혹평을 듣게 된다.

즉 전문적으로 교학을 연구하여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승이 아니고는 이제 불교를 제대로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파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을 때, 교계의 한편에서는 부처님이 뜻한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되찾으려는 사상 운동이 발생하였다.

때문에 부파불교의 흐름은 점차 재가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고 결국 새로운 불교운동인 대승불교를 낳게 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붓다관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끌었다.

대승에서는 신앙의 대상인 붓다의 본원(本願)과 정토(淨土)를 설하고 자비를 찬탄하며, 불신론(佛身論)을 그 중심에 두었다.

대승의 불신론은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붓다, 즉 법신(法身)과 중생 제도를 위한 붓다의 시현, 즉 색신(色身)

강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시방삼세(十方三世)에 수많은 붓다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또한 대승불교에서는 신앙적 실천의 주체로서의 보살을 강조했는데, 보살이란 보디삿트와(bodhisattva)라는 말을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원래 성불하기 이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고 입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승화시킨 데에는 대승의 구도자에게 붓다를 닮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대승 불교의 실천이 기반이 되었던 진리관은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설하는 공성(空性)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보살은 무주처(無住處) 열반을 이상으로 하여 이타행을 실천하며, 미혹과 깨달음의 동일한 근거로서의 마음에 대해서도

공성에 의해 본질이 해명되어, 여래장(如來藏)이라든가 유심(唯心) 또는 유식(唯識)의 이론을 낳았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을 원점으로 하여 제법(諸法)의 연기가 곧 진여(眞如)이며 법계(法界)라고 하며,

그 특색을 공 () 내지 공성(空性)이라 파악하여, 반야바라밀에 의해 이것을 체득하는 것을 깨달음으로 삼는다.

이후 서술되는 불교 교리의 전개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교리적 특징과 함께 불교 교리 전개의 큰 축을 형성했던

주요 종파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중관

반야 공사상과 중관학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이며, 수와 상과 행과 식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색, , , , 식은 5 (五蘊)이기에, 이 구절은 ‘5온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5온이다’로 풀이된다.

그리고 5온이란 나와 나를 둘러 싼 이 세계의 모든 것을 가리키기에 이 구절은 다시 ‘모든 것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모든 것이다’로 바꿔 쓸 수 있다.

‘공’이란 말은 쑤냐(Su-nya)라는 범어를 한자로 번역한 것인데, 쑤냐는 ‘텅 비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대로 공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그대로 텅 비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경지에 5온도 없고 12처도 없으며 18계도 없고 12연기도 없으며

사성제도 없다고 설한다[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5온이나 12, 18계는 모두 세상만사에 대한 불교적 분류 방식들이다.

동일한 세상만사를 간략히 분류하면 5온이 되고, 더 세분하면 12처가 되며, 좀 더 세분하면 18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5, 12, 18계설은 모두 부처님께서 무아의 진리를 설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교리들이었다.

12연기와 사성제는 깨달음과 관계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궁극적 경지에는 5, 12, 18계와 같은 세상만사는 물론이고, 12연기와 사성제와 같은

불교의 핵심교리조차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겉보기에 이 세상도 부정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부정하는 듯하다.

그러면 『반야심경』에서는 어째서 이렇게 세상만사가 텅 비어 있고 불교의 핵심교리들이 모두 없다고 부정하는 것 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흔히 뗏목에 비유된다.

세찬 물살이 흐르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뗏목과 같은 배가 필요하다.

강의 이쪽 언덕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윤회의 세계에 비유되고, 강의 저쪽 언덕은 열반의 세계에 비유된다.

윤회의 강둑[此岸]에서 열반의 강둑[彼岸]으로 건너가기 위해 우리는 뗏목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널 경우 뗏목에서 내린 후 저쪽 강둑으로 올라가야 강을 건너는 일이 끝나듯이, 불교 신행자의 경우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뗏목을 타고 피안의 열반에 도달한 후에는 그 가르침의 뗏목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저 쪽 강기슭에 도착했는데도 뗏목을 타고 있으면 아직 열반의 언덕에 완전히 도달한 것이 못 된다.

진정한 열반의 언덕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궁극적 경지인 열반의 경지, 다 시 말해 공의 경지에는 ‘5온도 없고, 12처도 없고 …

사성제도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 세상만사를 설명하는 불교 교학의 한 분야가 바로 중관학(中觀學)인 것이다.

중관학의 성립과 중관논서
중관학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나가르주나 : 150~250)에 의해 창안되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500여 년이 흐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생겨

인도불교 내에는 약 20여 종의 교단이 난립하게 된다.

이들의 불교는 종파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부파불교, 경전을 체계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아비달마불교, 대승불교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소승불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런 아비달마불교는 『아함경』 등에 흩어져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각 부파에서 자신들이 구성한 교학 체계만이 진실이라고 고집하는 경우에 문제가 된다.

이는 앞에서 설명했던 ‘가르침의 뗏목’에 대한 집착에 비교된다.

중관학의 창시자인 용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이들의 아비달마교학이었다.

용수는 반야경의 공사상과 『아함경』의 연기사상에 토대를 두고, 중관적 논법을 창안한 후 이를 구사하며

갖가지 아비달마 교학에 내재하 는 모순을 지적하였다.

중관적 논법, 즉 중관 논리란, 모든 것이 공하다는 점을 논증한다는 점에서 ‘공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고,

갖가지 개념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해탈의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일상적 사유를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해체의 논리’라고 부를 수도 있고,

논리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반 논리(反論理)’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중관 논리는 용수의 『중론』, 『회쟁론』, 『십이문론』, 『광파 론』, 『대지도론』 등과

그 제자 아리야제바(170~270)의 『백론』, 『사백관론』 등에 잘 표출되어 있다.

중관 논리
‘중관(中觀)’이란 용어는 『중론』에 대한 주석서인 길장(吉藏 : 549~623)의 『중관론소(中觀論疏)』에서 나온 것으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 또는 ‘중도적으로 분석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데 중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불고불락(不苦不樂)과 같이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적 수행관 모 두를 비판하는 ‘실천적 중도’이고,

다른 하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유 비무(非有非無)와 같은 ‘사상적 중도’이다.

중관 논리에서 ‘중도적으로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이 중 후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불생불멸, 불상부단 등의 경구에서 보듯이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가운데의 길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생과 소멸, 상주와 단멸, 있음과 없음 등은 우리 생각의 양극단이다.

우리의 생각은 극단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있는 것을 부정하면 없는 줄 알고, 발생을 부정하면 소멸인 줄 알며, 상주함을 부정하면 단멸인 줄 안다.

이것이 소위 흑백논리이다.

흑을 부정하면 백인 줄 아는 것이다.

우리의 일반적 생각은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중관학에서는 흑과 백의 양극단 모두를 부정한다.

흑도 틀리고 백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흑과 백이 혼합된 회색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흑과 백이 모두 틀렸음을 알려 줄 뿐이다.

새롭게 알려 줄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삼론종의 길장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불렀다.

파사현정이란 잘못된 것을 파하는 행위 자체가 그대로 옳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중관학에서 말하는 중도의 진정한 뜻이다.

중도의 ‘중’자에는 이렇게 ‘양극단 모두 틀렸다’는 비판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하는 ‘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중관학에서는 흑백 논리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에서 모순을 지적해 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과거의 아비달마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분다’거나 ‘비가 내린다’, ‘내가 살아 있다’는 등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도 논리적 모순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일 상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관학 논서가 난해한 이유는, 반논리(反論理)인 중관 논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관 논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난해하기 그지없는 아비달마 교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중관 논리의 난해한 교리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연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중관학의 견지에서 볼 때, 비단 아비달마 교학만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사유 전체가 모순에 빠져 있다.

아비달마 교학의 모순은 우리의 사유가 갖는 총론적 모순의 각론에 해당할 뿐이다.

중관적 방식, 중관 논 리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사유, 우리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논리적 사유란, 개념을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된 개념들을 연결하여 ‘판단’을 만들고,

판단들을 모아 삼단논법과 같은 ‘추론식’을 작성함으로써 진행된다.

그러나 반논리학인 중관학에서는 공과 연기의 교설에 의거하여 개념의 실재성을 비판하고,

사구부정(四句否定)의 논리에 의해 모든 판단의 사실성을 비판하며, 상반된 추론을 제시함으로써 어떤 추론의 타당성을 비판한다.

결국 논리적으로 작동되는 우리의 사유 그 자체를 모두 비판 한다.

그러면 이러한 비판 중 일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지금 우리 눈앞에 어떤 길이의 막대기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누군가가 이 막대기의 길이가 어떠하냐고 우리에게 물었을 때, 우리는 길다고 대답할 수도 있고 짧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이보다 짧은 막대를 염두에 두고, 비교했다면 ‘길다’고 대답할 것이고, 이보다 긴 막대를 염두에 두었다면 ‘짧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동일한 막대기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막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 이렇게 그 대답이 달라진다.

이것이 연기와 공의 의미다.

긴 것이 있기 때문에 짧은 것이 있는 것이고, 짧은 것이 있기에 긴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막대의 길이는 원래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이 막대의 길이는 공하다.

‘이 막대의 본래적 길이는 없다’는 것을 ‘이 막대의 길이에 자성이 없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길이, 모든 크기가 이와 마찬 가지다.

작은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큰방이 되고, 더 큰방을 염두에 두면, 이 방은 작은방이 된다.

이 방의 원래 크기는 공하다.

잘 생김과 못 생김, 부유함과 가난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등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동일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이쪽으로 분류되기도 하고 저쪽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상과 같이 상대적인 개념들을 예로 들어 공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마치 수학문제에서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가 있듯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때

그 모든 것들 중에는 공함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반야심경』에서는 ‘눈도 없고, 그 대상인 색도 없다’고 설하는데,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해명한다.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마치 칼날로 칼날 자체를 자르지 못하듯이, 나의 눈으로 나의 눈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

불은 뜨거운 것이 그 본성 이고, 물은 축축한 것이 본성이듯이 눈은 ‘보는 힘’을 본성으로 갖는다.

혹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거울에 비친 눈은 ‘대상세계인 색[色境]’의 일부이지,

‘보는 힘[能見性]’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진정한 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스스로 보려 하든, 거울에 비추어 보든 나의 눈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눈[能見]이 없기에 그 대상[所見]인 색도 있을 수 없다.

마치 짧은 것 을 염두에 두어야 긴 것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듯이, 눈을 염두에 두어야 눈에 비친 대상이라는 생각이

발생하게 되는데, 눈이 없다면 그 대상도 있을 수 없다.

또 눈[能見인 眼根]도 없고 대상[所見인 色境]도 없다면, 그 양자의 관계인 봄[眼識]도 있을 수가 없다.

위에 인용한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는 반문은 이를 의미한다.

4. 공의 자가당착과 이제설
중관학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일체의 존재는 물론이고 일체의 판단, 일체의 사유를 모두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아비달마 교학에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내는 중관학이지만,

아비달마 교학의 효용성조차 부정하 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관학에서는 아비달마 교학을 대하는 실재론적 태도가 범하는 논리적 오류를 지적 할 뿐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살은 모든 존재가 사연(四緣)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여 알지만 사연이 확고히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반야바라밀에서는 다만 사견(邪見)을 제거하는 것이지 사연을 파하는 것은 아니다.

아비달마 교학 역시 부처님의 교설을 담고 있는 훌륭한 뗏목인 것이다.

뗏목이 없다면 우리는 강을 건널 수조차 없다.

그리고 중관학에서 ‘언어와 생각에 의해 구성된 모든 것은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가르치긴 하지만,

중관학 역시 ‘언어와 생각’을 이용하여 공을 논증하기에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회쟁론』의 적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일 모든 것이 공하다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그 말도 공할 테니 논리적 모순에 빠진다.

다시 말해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고 할 경우 ‘모든 이론이 다 틀렸다’는 말도 ‘이론’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역시 ‘틀 린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지적이다.

용수는 이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해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깨끗한 벽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 그 말도 낙서에 속하기에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벽에 낙서를 해 놓 았을 때, 그 위에 ‘낙서금지’라는 말을 쓸 경우에는 그 ‘낙서금지’라는 말 역시

낙서이기에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말 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다른 낙서를 금지시켜 주는 효용이 있다.

다른 모든 불교 교리가 그러하듯이 중관학 역시 응 병여약(應病興藥)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중론』의 적대자는 ‘모든 것이 공하다’고 주장할 경우 사성제도 부정하고 삼보도 부정하게 된다고 말하며

공의 교리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사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계율도 공하기에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고, 보시도 공하기에 남에게 베풀 필요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삼보도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수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는 이제설(二諦說)을 제시하며 이를 비판하고 있다.

진제란 깨달음에 관한 진리로 구극의 진실의 말하며 속제는 세속사람의 아는 바 도리를 일컫는다.

즉 계율을 지키고, 남에게 베풀고, 사성제를 관찰하고, 삼보를 공경하라는 것이 속제적 교설이라면,

그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진제적 교설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를 균등하게 실천해야 진정한 불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속제를 모르고 진제만 추구할 경우 가치판단이 상실되는 공견에 빠져 막행 막식하는 폐인이 되기 쉽고,

진제를 모르고 속제만 추구할 경우 기껏해야 하늘나라에 태어날 뿐 결코 해탈할 수 없다.

『중론』에서는 이러한 공견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사견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 자가 있다면, 어떤 부처님께서도 그런 자를 구제하지 못하신다.

유식

유식학의 출현과 문헌
앞에서 공사상을 설명하면서, 공견 또는 공병의 위험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유식학은 중관학에서 말하는 공견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공을 잘못 파악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악취공적 세계관, 허 무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마음인 식()에 근거하여 세상만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유식학에서는 만법유식의 교리를 통해 악취공적 무견(無見)도 비판하지만, 아비달마교학의 유견(有見) 역시 비판한다.

이와 같이 만법유식은 유견과 무견을 떠난 중도적 가르침인 것이다.

『유가사지론석』에서는 유식학의 출현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파불교도들의 실재론적 불교관[有見]을 시정해 주기 위해, 용수와 그 제자인 아리야제바는 대승경전에서 추출한

공의 교리를 퍼뜨리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이런 공의 교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공견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무착(無着, 395~470)보살이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 신통력을 얻어 도솔천의 미륵보살로부터

『유가사지 론』 등을 전수 받았다.

이후 소승불교도였던 세친(世親, 400~480)이 그 형인 무착의 설득에 의해 대승으로 전향하였고

『유식삼십 송』 등을 저술하여 유식학의 교리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유식의 교리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해심밀경』을 들 수 있으며, 『화엄경』이나 『입능가경』 등도

넓은 의미에서 유식학의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논서로는 미륵의 『유가사지론』 외에, 무착의 『섭대승 론』, 세친의 『유식삼십송』이 있다.

또 호법(6세기경)의 설을 정통으로 삼아 『유식삼십송』에 대한 십대 논사의 주석들을 비판적으로 재편집한 『성유식론』이 있다.

모든 존재에 대한 유식학적 분류 - 8식설과 5 100법설
『아함경』 등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우리의 마음, 즉 식()을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6가지로 분류 하였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이 중 의식을 다시 ‘의식과 마나식, 아뢰야식’으로 세분하여 우리의 마음을 8가지로 분류하였다.

대개 ‘의식’은 따지거나,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등의 기능을 하며, ‘마나식’은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我癡],

‘내가 있다는 착각[我見], ‘내가 잘났다는 교만심[我慢], ‘착각된 자아에 대해 애착하는 마음[我愛]’ 등을 유발하는 것으로

우리의 자의식과 이기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세상만사를 수렴하고 방출하는 가장 근원적인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이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우리가 체험하는 과보가 되어 나타난다.

우리가 짓는 업들은 아직 덜 익은 풋과일과 같은 모습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된다.

그리고 이후에 새로 짓는 업 들은 마치 비료의 작용과 같이 덜 익은 그 업의 열매(= 씨앗)가 성숙하도록 돕는다[現行熏種子].

그리고 열매가 완 전히 성숙하면 씨앗은 과보의 싹으로 변화하여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이다[種子生現行].

이와 같은 업과 과보에 대한 설명을 ‘아뢰야연기론(阿賴耶緣起論)’이라고 부른다.

유식학에서는 앞서 설명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마나식, 아뢰야식의 8가지 마음을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굵은 마음’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런 심왕 내에서는 분노, 느낌, 질투, 집중, 탐욕, 우울, 추구, 믿음 등 갖가지 마음작용이 일어난다.

이런 ‘작은 마음작용들’을 심소(心所)라고 부르는데 『성유식론』에서는 심소의 종류를 총 51가지로 분류하였다.

51가지 심소법 중 느낌[]과 생각[]을 제외한 49가지는 모두 5온 중 행온(行蘊)에 해당 한다.

그런데 심소에 소속된 이런 49가지 행은 마음과 관계된 행, 다시 말해서 유정류(有情類)에게만 존재할 수 있는

[조작]이지만 이 중에는 마음과 무관한 행들도 있다.

이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문장 []’이나 ‘발생[]’과 같은 행법(行法)은 유정류에게도 있을 수 있고, 무정물(無情物)에게도 있을 수 있다.

‘문장’의 경우 유정류인 우리가 입으로 작성할 수도 있으나 무정물인 책에 글로 쓰여 있을 수도 있으며,

발생’의 경우, 우리 에게서 아픔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무정물인 번개 역시 발생할 수 있기에 이런 행법들은

‘반드시 마음과 함께 해야 만 존재할 수 있는 행법’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 마음과 무관한 행법)이라고 부르며 『성유식론』에서는 ‘문장’과 ‘발생’을 포함하여

24가지 종류를 들어 설명하였다.

또한 물질 또는 형상을 의미하는 색법(色法)으로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5근과 감각대상인 5, 또 지계(持戒)나 파계(破戒)를 다짐할 때

6의식 내에 형성되는 색법인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 생각의 영역에 존재하는 물질) 11 가지가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법들은 소위 ‘인연이 모여 형성된 법’이라 하여 이를 유위법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인연소생의 법’이 아닌 것들을 무위법이라고 하는데, 『성유식론』에서는 무위법으로 허공과 진여 등 6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이상에서 세상만사에 대한 유식학의 분류법인 5100법 이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세상만사는 8가지 심왕법, 51가지 심소법, 11가지 색법, 24가지 심불상응행법 그리고 6가지 무위법 등

다섯 부류의 총 100가지 법들이 얽혀서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맛있는 떡을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을 때, 심왕법 중 안식과 의식과 마나식과 아뢰야식이 작용하고

심소법 중에서는 느낌[], 생각[] 등과 욕망[], 집중[] 등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소승 부파 중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세친의 『구사론』에서는 모든 존재를 ‘5 75 법’으로 분류하는데,

그 취지 역시 유식의 ‘5 100법’ 이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체험을 법의 조합으로 분석해 내기 위해서’였다.

우리의 체험을 법의 조합으로 분석한 후 그런 법들 중에서 ‘번뇌’나 ‘착하지 못한 마음[不善]’에 해당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경우 우리의 인격은 향상하며 궁극적으로 성인의 길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에 대한 3가지 조망 -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의 3성설
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사상은 법( :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의 구성요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소승 교학서인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75가지 법들 하나하나가 모두 실체[自性]가 있다고 간주하는 반면,

중관학에서는 그런 모든 법들이 궁극적으로는 무자성(無自性)하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이런 법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자성이 있음을 조망하였다.

이런 세 가지 자성을 삼성(三性)이라고 하는데,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고,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성 (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이란 우리말로 ‘두루 분별된 자성’이라고 풀이되며,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존한 자 성’, 원성실성은

‘완전히 성취된 자성’으로 풀이된다.

그러면 이런 삼성의 의미를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누군가가 ‘긴 막대’가 실제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 그에게 원래 ‘긴 막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 줄 수 있다.

긴 막대가 있다는 생각은 짧은 막대와의 대비를 통해 발생한 것이다.

더 긴 막대와 비교할 경우에는 동일한 막대가 짧은 막대가 된다.

따라서 어디서나 항상 긴 막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애초에 ‘긴 막대’가 실재한다고 착각했던 사람은 ‘긴 막대’란 것이 공하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실제 있다고 착각된 ‘긴 막대’는 ‘변계 소집된 것’이며, 다른 짧은 막대와의 비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긴 막대’는 ‘의타기한 것’이다.

그리고 길이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기에 그 막대에 본래적 길이가 없다는 진실은 ‘원성실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중관학에서 논증하는 공성(空性)은 삼성 중 원성실성에 해당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갖가지 법들은 변계소집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중관학에서는 변계소집된 자성을 비판하며 원성실한 진제적 공만을 추구할 뿐이었는데,

유식학에서는 양자를 매개하는 것으로 모든 법들의 자성에 대한 의타기적 조망을 추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타기적 조망은 연기적 조망이다.

그리고 ‘아뢰야식’과 ‘갖가지 법들’의 연기적 관계에 의해 세상만사를 상세하게 해석하는 이론이

바로 유식학의 아뢰야연기론인 것이다.

아뢰야연기론 - 두 가지 인과응보

그러면 이러한 아뢰야연기론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착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우리가 짓는 모든 업들은 씨앗[種子]으로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성숙한 후 적정 한 시기가 되면 다시 우리가 체험하는 길흉화복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자업 자득적인 인과응보이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이 이외에 또 다른 인과응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인지적(認知的) 성향이 겪게 되는 인과응보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은연중에 갖게 된 세계관과 자아관(自我觀)은 씨앗과 같은 상태로 아뢰 야식 내에 저장되었다가,

미래 혹은 내생에도 우리로 하여금 그와 동일한 세계관과 자아관을 갖게 한다.

이는 우리 의 인지(認知)에서 일어나는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업의 씨앗이 초래하는 인과응보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지의 씨앗이 야기하는 인과응보가 그것 이다.

업의 씨앗은 문자 그대로 ‘업종자’라고 불리고, 세계관이나 자아관과 같은 인지의 씨앗은

우리의 언어적 능력과 관계되기에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불린다.

‘전생에 남을 많이 해친 사람은 삼악도에 떨어져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남을 많이 도운 사람은

삼선취에 태어나 행복한 삶을 산다’는 말은 업종자와 관계되고, ‘전생에 이기적이었던 사람은 현생에도 이기적이다’라거나,

‘전생에 물을 무서워하던 사람은 현생에도 물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명언종자 와 관계된다.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세상만사, 즉 만법은 선(), (), 무기(無記)의 세 종류로 분류된다.

이 중 무기법은 선법도 악법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업종자는 선인락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응보를 발생케 하고 명언종자의 경우는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惡因惡果)의 인과응보를 발생케 한다.

업종자의 경우 인()은 선 악이나 과()는 무기성(無記性)인 육도(六道)의 고락이고,

명언종자의 경우 인도 선악이고 과도 선악이다.

그래서 업종자를 ‘이숙습기(異熟習氣 : 성질을 달리하여 익은 습기)’라고 부르고 명언종자를

등류습기(等流習氣 : 같은 흐름을 갖는 습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습기란 아뢰야식에 훈습된 기운으로 종자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이숙 습기와 등류습기는 아뢰야식 내에 형성된 후 우리가 짓는 갖가지 업의 기운을 받아 성숙해 가다가[因能變]

시기가 무르익으면 발현되어[果能變] 우리가 체험하는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의 세상만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수행과 깨달음
유식학에서는 연기된 세계, 즉 의타기한 법들의 세계를 아뢰야식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한다.

그리고 그런 법들 중 번뇌에 해당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법이다.

번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자아에 대한 집착인 번뇌장(煩惱障)이고

다른 하나는 갖가지 법들에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소지장(所知障)이다.

번뇌장은 정서적 장애, 소지장은 인지적 장애라고 풀이할 수 있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포괄하는 ‘근본 번뇌’에 해당하는 것은 ① 탐욕, ② 분노, ③ 어리석음, ④ 교만, ⑤ 불교에 대한 의심,

⑥ 몸이 있다고 생각하는 유신견(有身見), ⑦ 전생과 내생에 대해 갖가지로 생각하는 변집견(邊執見),

⑧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사견(邪見), ⑨ 잘못된 종교의식을 신봉하는 계금취견(戒禁取見),

⑩ 이런 세계관들을 의식화하여 집착하는 견취견(見取見)인데, 이런 10가지 근본번뇌는 5100법 중 심소법에 속한다.

이런 번뇌들을 하나하나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성불의 길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성불을 위한 보살의 길을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수행의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자량위(資糧位), 주관과 객관이 각각 공함을 관찰하는 가행위(加行位),

만법유식을 체득하고 사성제를 관찰하는 통달위(通達位), 십 지(十地) 수행에 들어가는 수습위(修習位),

그리고 보리와 열반을 얻어 성불하는 구경위(究竟位)가 그것이다.

이 중 자량위에서 시작하여 통달위를 마치기까지 1아승기겁(= 1무량겁)의 세월이 걸리고, 수습위의 십지 중

초지에서 제7지까지 이르는데 1아승기겁이 걸리며, 8지에서 제10지까지 향상하는데 다시 1아승기겁이 걸린다.

자량 위 이후 총 3아승기겁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세월이 흘러야 보살도가 완성되어 성불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하게 되면 안식에서 아뢰야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총 8식은 모두 부처의 지혜로 바뀌는데,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 고 부른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5식은 신구의(身口意)로 신통력을 보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

6의식은 변재 (辯才)가 출중한 묘관찰지(妙觀察智), 7마나식은 자타평등의 대자비심을 발하는 평등성지(平等性智),

8아 뢰야식은 세상만사를 비추는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되는 것이다.

천태

천태종의 성립
천태종의 초조는 혜문(慧文)인데, 자세한 전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6세기 중엽에 수백 명의 무리를 엄격하게 지도한 사람이고, 『대지도론』에 의지해서 선관(禪觀)을 닦았다고 한다.

2조는 혜사(慧思: 515~577)이다.

그는 혜문의 제자이고, 『법화경』을 독송하고 좌선을 매우 충실하게 해서, 결국 법화삼매(法華三昧)라는 경지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3조 지의(智剡: 538~597)는 실제로 천태종을 일으킨 인물이다.

지의는 23세 때 혜사의 문하에 들어가 법화삼매를 배웠으며, 그의 대표적 저술은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이다.

천태대사 지의 이후에 천태종은 다소 부진한 편이었으나 당나라 중기에 들어서면서

담연(湛然 : 711~782)에 의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담연은 화엄종과 선종에 대항해서 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송나라에 들어 서서 천태종은 산가파(山家派)와 산외파(山外派)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국은 천태종이 비교적 늦게 성립된 편이었다.

고려초에 체관(諦觀)이 중국에 들어가서 천태종을 연구하여, 『천태사교의』라는 천태학의 명저를 남겼으며,

의천(義天 : 1055~1101)에 이르러 비로소 한국에 세워졌다.

이런 천태종의 흐름은 요세(了世 : 1163~1245)의 백련사결사에 와서는 실천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 결사는 원나라 간섭기에 활동한 운묵(雲默)에 의해서 그 근본정신이 더욱 발휘되었다

천태교학의 중심 사상
천태교학의 중심 사상에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실상론(實相論)이라고 불리는

일념삼천설렝絿? 銓喚구체적 수행법으로서 십경십승관법을 검토해 보자.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과 일심삼관(一心三觀)

‘일념삼천설’은 사람의 한 마음에 삼천 가지의 가능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삼천’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삼천은 전체를 의미하는 숫자라고 한다.

따라서 ‘일념삼천설’은 사람이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실의 사람은 가능성으로는 부처도 될 수 있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지만, 현실에는 인간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일념삼천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체적 모습이다.

이 ‘일념삼천설’의 내용은 천 태대사 지의의 『유마경현소』에 따르면 관조할 대상이고, 관조할 내용은 ‘일심삼관’이라고 한다.

그러면 일념삼천설과 일심삼관의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자.

일념삼천은 일념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 진다는 것이다.

삼천의 숫자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십법계(十法界)가 십법계를 갖추고, 다시 일법계가 십여시(十如是)를 머금어서, 백법계(百法界)ㆍ천여시(千如是)가 되고,

여기다 세 종류의 국토(三種國土)를 곱하면 삼천이 된다.

우선, 십법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 전생에 악업을 짓고 탐욕을 부린 자가 아귀로 태어나 배고픔과 목마름에 괴로워한다),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 고대 인도에서는 싸움을 일삼는 악신으로 생각했다), 인간(人間), 하늘, 성 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이다.

앞의 여섯가지는 6(六道)라고 하는데 윤회하는 세계이고, 성문, 연각, 보살은 대승불교의 삼승(三乘)이다.

천태대사 지의는 여기다 불계를 더 보태서 십계를 만들었다.

이는 불교사 상에 근거해서 세계에 대해 가치를 매긴 것이다.

이 십법계가 다시 십법계를 머금는다.

그래서 인간계도 십계가 존재하고, 지옥계도 십계가 존재하고, 불계도 십계가 존재한다.

이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선심(善心)과 악심(惡心)이 존재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선심과 악심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가능성으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법계가 십여시를 갖추고 있다.

십여시는 여시상(如是相), 여시성(如是性), 여시체(如是體), 여시력(如是力), 여시작(如是作), 여시인(如是因), 여시연(如是緣),

여시과(如是果), 여시보(如是報),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이다.

()은 바깥의 모습이고, ()은 내면의 본성, ()는 사물의 주체, ()은 잠재적인 힘과 작용,

()은 드러난 힘과 작용, ()은 직접적인 원인, ()은 간접적인 원인, ()는 직접적인 원인의 결과,

()는 간접적인 원인의 결과,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은 형상에서 결과까지 통괄하는 평등의 원리이다.

그리고 삼세간(三世間)은 오음세간(五陰世間), 중생세간(衆生世間), 국토세간(國土世間)인데,

오음세간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물질이고, 중생세간은 거기에 안주하는 인간과 생물이며,

국토세간은 그 인간과 생물이 살고 있는 환경이다.

앞에서 소개한 ‘일념삼천설’은 관조할 대상에 속하는 것이라면, 일심삼관(一心三觀)은 관조할 내용에 속하는 것이다.

천태대사 지의가 말하는 일심삼관은 공()?)?)이 한 마음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공()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불교의 일반적 이론이다.

이 공을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자면 내면의 집 착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집착의 대상인 객관세계도 집착하는 것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도불교에서도 공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중국불교로 넘어오게 되자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사바세계를 초월하자는 이야기로는 중국인의 마음에 맞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래서 공의 세계에 철저히 파고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세계는 우리가 집착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존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그것 이 가()이다.

현실의 대상은 범부가 집착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고,

여기서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공()과 가()의 두 관점을 종합하는 것이 중()이다.

이는 공()이라고 해서 없다는 쪽에 치우치지도 말 고, ()라고 해서 있다는 편에도 비중을 두지 말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 이다.

그래서 일심삼관의 의미는 공()ㆍ가()ㆍ중()의 의미가 한 마음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공()의 의미를 가()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십경십승관법(十境十乘觀法)
‘십경십승관법’은 깨달음을 이루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가령, 수행을 하는데 번뇌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수행 중에 병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시 수행하다가 적은 것을 얻고서 완전한 도를 얻었다고 잘못 생각하면 어떻게 하는가?

이런 점 때문에 천태대사 지의는 10(十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십승관법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10가지 방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의 경지가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방법이 명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그 방법에 대해 열 가지로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십승관법의 의미는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지식 또는 지혜만 가지고는 곤란하고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 지관을 닦아야 하고

넷째, 자기가 어느 정도 수행이 익었는지 알아야 하며

다섯째, 진리에 대한 애착마저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넷째와 다섯째 내용이다.

넷째 내용은 보통 수행자가 조그마한 경지를 얻고서 쉽게 만족해 버리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한국 선종의 풍토는 대체로 이론적인 것을 분별 집착으로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최소한 자기가 어느 정도 수행이 완성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교학(敎學)의 지식은 필수적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다섯째 내용은 불교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불교의 궁극경 지에 이르러서는 불법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십경십승관법에서 ‘십경’은 지관(止觀)의 대상이 되는 10가지 경계를 말하는 것이고,

‘십승’은 지관을 닦는 사람이 행하는 10가지 방법이다.

‘십승’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마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경의 하 나 하나에 대해서 십승관법을 행하는 것이 십경십승관법이다.

십경(十境) _ 관찰할 대상 십경은
『마하지관』에서 관조할 대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중에서 처음에 말하는 음계입경(陰界入境)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9가지 경계는 생길 때마다 관조하는 대상이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

첫째, 음계입경(陰界入境)이다.

‘음()’은 오음(五陰)이고, ‘계()’는 십팔계(十八界)이며, ‘입()’은 십이입(十二入)이다.

이 ‘음계입경’이 맨 처음에 제시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늘 눈앞에 펼쳐 있어서 항상 관조할 대상이 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경전에서 음계입경이 맨 처음에 관조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번뇌경(煩惱境)이다.

이는 오음(五陰)의 과()를 관찰할 때 번뇌가 발동하는 것이다.

보통 때에도 우리 마음 속에 번뇌가 움직이고 있지만,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음을 관찰할 때, 그 속에서 번뇌가 활동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음계입경’ 다음에 ‘번뇌경’이 일어나는 것이다.

셋째, 병환경(病患境)이다.

병을 이루는 요소를 살펴보면, ()ㆍ수()ㆍ화()ㆍ풍() 4(四大)는 몸의 병 을 이루는 것이고,

()ㆍ징()ㆍ치() 3(三毒)은 마음의 병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 이 평소에는 잘 섞여 있어서 느끼지 못하다가 ‘번뇌경’으로 인해서 4대가 어지럽게 날뛰게 되어

맥과 장기에 충격을 주게 되면 병환이 생기는 것이다.

넷째, 업상경(業相境)이다.

이는 병환이 제거되어서 몸이 튼튼해지면, ()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기도 해서, 결국 업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환경’ 다음에 ‘업상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업상경’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업()이 있다고 한다.

다섯째, 마사경(魔事境)이다.

이는 도()를 가로막는 경계이다.

앞의 ‘업상경’에서 수행자는 악()이 생기면 없애려고 하고, ()이 생기려고 하면 더욱 확장하려고 한다.

이 때 마()는 그러한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유혹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업상경’ 다음에 ‘마사경’을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 선정경(禪定境)이다.

이는 정신 통일된 삼매의 경지에서 생기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마사경’을 넘어서면 공덕이 생기게 된다.

이미 마()의 유혹을 이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선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은 과거의 생()에 닦은 수행의 힘에 근거해서 생기기도 하고, 금생(今生)의 수행에 의지해서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선정에 들어가는 모습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일곱째, 제견경(諸見境)이다.

이는 ‘선정경’에서 삿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수행자는 사물을 잘못 보게 되어서 뒤집어진 생각, 곧 전도망상(顚倒妄想)을 하게 된다.

이처럼 삿된 생각이 넘쳐흐르는 것을 ‘제견경’이라고 한다.

여덟째, 증상만경(增上慢境)이다.

이는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앞의 ‘제견경’에서 생긴 치 우친 견해가 잘못된 줄 알아서 집착을 그치면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지만,

근기가 둔한 사람은 이 탐욕과 성냄이 없는 상태를 불교의 최고 경지인 열반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잘 못 생각해서 교만한 마음을 낸다.

이것을 증상만경(增上慢境)에 빠졌다고 하고, 이런 부류의 사람을 ‘증상만인(增上慢人)’이라고 한다.

아홉째, 이승경(二乘境)이다.

이는 2승의 견해에 떨어지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제견경’과 ‘증상만경’을 넘어서서 마음이 고요한 경지에 들어갔더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세(過去世)에 익힌 소승 (小乘)의 기질이 생겨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승(大乘)의 마음을 일으킨다고 주장하지만, 결국 에는 2승의 경지에 떨어지고 만다.

이것이 ‘이승경’이다.

열째, 보살경(菩薩境)이다.

이는 보살이 떨어지지 쉬운 경계이다.

원래 보살이라면 서원(誓願)이 있기 때문에 공 ()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방편을 중시하기 때문에 유혹에 떨어질 수 있다.

더구나 보살에 도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미혹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을 넘어서기 위해서 ‘보살경’을 말하는 것이다.

십승관법(十乘觀法) _ 관찰하는 방법

첫째,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의 내용은 앞에서 소개한 ‘일념삼천설’과 ‘일심삼관’이다.

둘째, 발진정보리심(發眞正菩提心)이다.

앞에서 말한 ‘부사의경’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하고 바른 보리심을 일으킨다.

그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정리된다.

이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 겠다는 것, 모든 번뇌를 끊겠다는 것, 모든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것,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이다.

셋째, 선교안심(善巧安心)이다.

이는 지관(止觀)으로 진리의 본성인 법성(法性)에 안주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원()을 세우고 지관수행을 뜻하는 실천에 힘쓰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파법편(破法遍)이다.

이는 중생이 전도(顚倒)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물론 앞의 ‘선 교안심’의 단계에서 지관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였다면, 선정과 지혜가 열리어

다시 번뇌를 깨뜨린다고 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법성(法性)과 상응하지 못한 수행자가 있다면, 선정을 함축한 지혜를 잘 활용해서

번뇌를 제거해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뒤집힌 생각을 깨뜨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섯째, 식통색(識通塞)이다.

앞에서 말한 ‘파법편’이 철저하였다면, 생겨남이 없는 본래의 경지 곧 무생(無生)에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도 그렇듯이 수행도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 경우 무생(無生)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 한 이유를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르다는 분별의 생각에 막혀서 진리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통색’에서는 자기가 어디서 막히고, 어디는 통했는지를 돌이켜 보아 수행에 힘쓰는 것이다.

여섯째, 도품조적(道品調適)이다.

이는 37도품(道品)으로 번뇌를 다스리는 것이고 소승의 수행방법을 활용하는 것 이기도 하다.

대승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소송의 방법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이 안에 숨어 있다.

37도품은 지혜를 얻기 위한 부파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다.

일곱째, 조도대치(助道對治)이다.

근기가 둔하고 번뇌가 두터운 사람의 경우, 37도품으로도 공()ㆍ무상(無相)ㆍ 무언(無願)

3해탈문(三解脫門)을 곧 열지 못하여 수행의 길을 전념할 수 없게된다.

이 때, 번뇌를 끊는 대치(對治)의 도()로써 번뇌의 장벽을 깨뜨릴 필요가 있고,

그러면 해탈문에 편안히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덟째, 명차위(明次位)이다.

이는 자기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대승과 소승의 수 행방법을 모두 사용하였는데도 크게 진전이 없다면, 자신이 어디에서 막혀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기가 증득한 것과 증득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하기 위해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홉째, 능안인(能安忍)이다.

처음 ‘관불가사의경’부터 ‘명차위’의 단계까지 수행해서 장애를 지혜로 바꾸었다고 하자.

여기서도 사람에 따라 처하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도 어떤 사람은 수행단계의 하나인 ‘초품 제자위(初品弟子位)’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초품제자위’에 들어가서 지혜가 밝고 분명하기도 하다.

초품제자위는 범부가 닦는 다섯 단계의 수행 중 처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사람에 따라 수행의 내용이 달라진다.

지혜가 밝고 분명한 수행자라면, 마치 큰 코끼리가 무리를 단 속하듯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나서지 말고 삼매를 닦는 데 전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행이 완성되어서 깨달음의 힘이 드러날 때, 교화를 행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외부의 유혹에 대해서는 사양하고 은둔하고 떠나게 되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고,
내부의 번뇌에 대해서는 공()ㆍ가()ㆍ중()의 일심삼관의 이치를 관찰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열째, 무법애(無法愛)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애착(愛着)이 없는 것이다.

위의 9가지 관법을 잘 닦으면, 모든 장애를 넘어서서 참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9가지 관법을 닦고도 참된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애착해서

거기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다.

이 때에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애착, 곧 법애(法愛)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그것을 깨뜨리면 3해탈에 들어가 진정한 중도를 일으킬 것이고 그 때 자연히 모든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서

불교 최고의 경지인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머물게 된다.

『법화경』의 해제
불교는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의 삼승(三乘)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이것들이 궁극에는 근본적인 가르침인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법화경』 사상의 핵심이다.

삼승이 존재하는 이유는 중생의 소질을 의미하는 근기(根機)가 여러 종류이므로,

거기에 맞추어서 부처님이 설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 든 가르침의 목적은 중생을 부처가 되게 하는데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일승의 가르침이다.

이점을 『법화경』 에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비유를 살펴본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 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 것이고, ‘여러 가지 초목’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중생을 비유한 것이다.

가섭이여!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강과 계곡과 땅에서 자란 나무와 수풀과 약초가 여러 종류이고 이름과 그 색깔이 각 기 다르다.

비를 머금은 구름이 널리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에워싸서 한꺼번에 비가 내린다.

그 비가 널리 내리 면 나무와 수풀과 약초 중에서 작은 뿌리와 줄기, 작은 가지와 잎, 중간의 뿌리와 줄기,

중간의 가지와 중간의 입, 큰 뿌리와 줄기, 큰 가지와 입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비를 맞는다.

한 가지 구름에서 생겨난 비에 의해 각각의 나무가 자 기의 성질에 맞추어서 자라난다.

그래서 꽃과 열매가 맺어진다.

이렇게 비록 한 가지 땅에서 생기고, 한 가지 비에 의해 적셔졌지만 모든 초목은 다 차이가 있다.
『법화경』

그리고 그와 상응해서 그 가르침을 말씀하시는 부처님도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부처님으로 바뀐다.

그 가르침이 일승 이어서 모든 중생을 부처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가르침을 말씀하신 부처님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아가 일승의 가르침을 듣는 중생도 모두 부처가 된다.

긴 세월을 두고 본다면, 모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바달다’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였던 극악한 사람도 결국 부처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여인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사가라 용왕의 여덟 살 난 딸을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일승의 가르침과 그것을 전해 주는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님과 궁극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중생의 존재,

이 삼각관계가 『법화경』의 핵심이다.

한편 이러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법화경』에는 여러 가지 원본이 존재한다.

첫째, 산스크리트어본(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본이 발견된 지방에 따라 네팔계, 카쉬미르계, 중앙아시아계로 구분된다)

둘째, 축법호(竺法護) 번역의 『정법화경(正法華經) 10(286)

셋째,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406 ) 넷째, 사나굴다(淞那堀多) 등이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 (601) 다섯째, 티베트어본 등이다.

이 가운데에서 한역경전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경전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이고,

이것에 일부분을 보충하고 정정한 것이 『첨품묘법연화경』이며, 『정법화경』은 난해한 번역으로 알려져서 잘 읽혀지지 않는다.

화엄

화엄경의 해제
원래 경이름[經名]에는 그 경이 지니는 전체의 내용이 잘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경이름 풀이를 잘 하면

그 경의 반()은 해석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경』의 갖춘 이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해제를 먼저 살펴보자.

먼저 대()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인데 단순히 작다고 하는 소()에 대한 상대적인 대가 아니라 절대적인 ‘대’로 써,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는 의미의 극대(極大)를 말하고 있다.

이어서 ‘방()’이란 방정하다ㆍ바르다 뜻이 고 ‘광()’은 넓다는 의미이니까 합하여 ‘대방광’하면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있다는 뜻이 되고, 거기에 불()을 붙 여 ‘대방광불’하면 시ㆍ공을 초월한 부처님이라는 뜻이 된다.

그 다음 ‘화엄(華嚴)’은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하고, 꾸민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화’는 깨달음의 원인으로서의 수행에 비유한 것이고 ‘엄’은 수행의 결과로서 부처님 을 아름답게 장엄하는 것,

즉 보살이 수행의 꽃으로써 부처님을 장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때 중요한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만을 뽑아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까지도 모두 다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을 일명 『잡화경(雜華經)』이라고 부르 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화엄경』의 산스크리트 원본은 산실되어 버리고 단지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이 현존하고 있는데, 한역은 두 가지의 대본(大本), 즉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와 실차난타(實叉難陀)의 번역본이 있다.

전자는 번역된 권수가 60권이기 때문에 『60화엄』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번역된 시대가 동진(東晋)이므로 『진경(晋經)』이라 부르는 반면, 후자는 권수가 80권이라서 『80화엄』 또는 당나라 때의 번역이기 때문에 『당 경(唐經)』이라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반야(般若)가 번역한 『40화엄』이 있으나, 이것은 대본(大本)의 「입법계 품」에 해당하는 부분적인 번역이다.

그리고 9세기 말에 번역된 티베트본인 『서장화엄경(西藏華嚴經)』도 현존하고 있다.

이렇게 판본이 몇 가지나 되다 보니 자연히 구성조직도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60화엄』은 칠처팔회(七處八會 : 일곱 장소에서 여덟 번의 법회) 34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80화엄』은 칠처구회(七處九會 :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의 법회) 3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삼분(三分)하여 지상편(地上篇), 천상편(天上篇), 지상회귀편(地上回歸篇)으로 나누기도 한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현재의 체제로 만들어진 경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상을 같이 하는

여러가지 단독 경전을 모아 집대성한 것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학자들은 그 장소를 서역(西域)의 우전국(于猊國)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엄종의 성립
화엄학이란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성립한 『화엄경』을 종()으로 하고, 『화엄경』에 전념한 조사들의 견해를

()으로 삼아서 만들어 놓은 큰 체계이다.

따라서 화엄조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화엄종의 성립과 한국 화엄종의 성립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중국화엄종의 초조(初祖)는 두순(杜順, 557~640)이다.

그의 사상적 입장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저작으로 정되고 있는 『법계관문(法界觀門)』조차도 오늘날 진찬(眞撰)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저서가 많은 사 이 반드시 훌륭한 사상가는 아니듯이 저술이 전해지지 않는 것과 종교자로서의 비중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겠다.

지엄(智儼, 602~668)은 두순의 법맥을 잇고, 화엄교학의 대성자 법장을 길러낸 과도기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것은 두순이 실천적이고 관행적(觀行的)이었던 성격에 비해 화엄학의 중요한 사상적인 문제의 소박한 원형이

거의 지엄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엄이 남긴 저술로는 『60화엄』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인 『수현기( 搜玄記)』를 비롯해서 『공목장(孔目章)』 등이 있다.

법장(法藏, 643~712)은 제3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화엄교학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다.

화엄종을 현수종 (賢首宗)이라 부르는 것도 그의 호인 현수(賢首)에서 유래되고 있는 별칭이다.

그는 지엄 이상으로 유식(唯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지만,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이것을 흡수 융합시킴으로써 자신의 화엄교학을 한차원 높게 완성시켜 나갔다.

법장이 세운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은 물론이거니와 법계연기(法界緣起)ㆍ성기사상(性起思想)ㆍ육상원융(六相圓融) ,

그 어느 것도 화엄의 지상성(至上性)을 드러내기 위한 교리들이다.

그의 화엄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저술 가운데, 화엄학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오교장(五敎章)』과 『60화엄』 의 주석서인

『탐현기(探玄記), 그리고 『기신론(起信論)』 주석의 백미라고 하는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등이 유명하다.

징관(澄觀, 738~839)은 당나라 초기 때 전개된 학문불교가 중엽에는 실천불교로 변모해가는 바로 그 시대에

활약하던 인물로서 화엄과 선()을 융합시키고자 노력한 스님이다.

종밀(宗密, 780~841)은 징관이 화엄 속에 선을 융합시키고자 한 반면, 그는 선()과 교()를 완전히 대등한 위치로 보고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자장(慈藏)에 의해 처음으로 『화엄경』이 전래된 이래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원효(元曉, 617~686), 의상(義湘, 625~702) 두 스님에 의해 화엄사상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국한시킬 수 없을 만큼 불교전반에 걸쳐 사상적 폭이 크기 때문에

역시 해동초조(海東初祖)는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는 의상의 화엄사상이 잘 압축되어 드러나 있다.

고려시대에는 균여(均如, 9 23~973)가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를 위시하여 여러 편의 저술을 남겼고,

이어서 지눌(知訥, 1158~1210)은 『화엄절요(華嚴節要)』를 통하여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화엄선을 선양하였다.

조선조 초기는 김 시습(金時習)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후기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등 화엄조사들이

후학들을 위해 사기(私記)를 지었다.

화엄교학의 중심 사상
『화엄경』은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리불 이나 목련과 같은 훌륭한 제자까지도 벙어리와 귀머거리처럼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 방울의 거품을 보고서 바다 전체를 보았다고 한다거나 반대로 바닷물을 다 마신 후에야 그 맛을 알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이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의 낱말에 구애받지 않고 좀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화엄경』 전체를

하나의 대 서사시(敍事詩)나 대 드라마로 이해한다면, 보다 좀 더 친근감이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엄교학이라는 입장에서 살펴볼 때, 성기사상(性起思想)과 법계연기(法界緣起)가 화엄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법계연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법계연기는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계를 사()와 이()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 사법계설(四法界說)이다.

첫째, 사법계(事法界)는 모든 현상적이고 차별적인 세계를 말한다.

둘째, 이법계(理法界)는 사법계를 성립시키는 본체적이고 평등한 세계를 가리킨다.

셋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는 이와 사, 즉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닌 것임을 설명한다.

마치 파도와 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넷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현상계가 그대로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연기의 세계는 현상적으로 보면 개개의 사물들이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개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가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설명이다.

마치 바다의 섬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다 밑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것과도 같다는 뜻이다.

이를 인다라망(因陀羅網)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소위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고 표현되는 사상 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서 우주 전체의 모습을 보고 그 풀잎에 맺혀있는 한 방울의 작은 이슬에서 온

중생의 아픔을 느끼는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화엄사상에만 국한되고 있는 이론이 아니라, 현대물리학에서도 충분히 입증이 되고 있어 더욱 공감이 간다.

예를 들면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는 우리 몸을 복제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기 때문에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세포 하나만 있으면 우리 몸 전체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세포 하나를 통해 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이를 사회생활속에 적 용시켜보면 우리는 서로가 연관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할

존재라는 것이 화엄사상 의 기본 입장임을 알 수가 있다.

정토

정토교의 성립
중국 정토교(淨土敎)는 교리적으로 볼 때 다소의 차이점이 있는 세 유파가 있으나 그다지 명확한 구별을 하지 않고

모두 혜원(慧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토교를 명실공히 집대성한 사람은 선도(善導)이다.

먼저 담란(曇鸞, 476~542)은 보리유지(菩提流支) 삼장으로부터 『관무량수경』의 가르침을 받고 오로지 염불에 입각하여

정토교의 기초를 다졌으며 『왕생론주(往生論註)』를 남겼다.

도작(道綽, 562~645)은 현중사(玄中寺)에서 담란의 비명(碑銘)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정토교에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관무량수경』을 강의하는 한편, 하룻동안 콩을 헤아리는 소두염불(小豆念佛) 7만 번씩 하였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 『안락집(安樂集)』이 남아 있다.

선도(善導, 613~681)는 중국 정토교의 대성자로 알려져 있다.

선도는 극락의 즐거움과 지옥의 고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정토변상도(淨土變相圖)를 그려 민중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오늘날의 시청각 교육과도 같은 방법으로 교화 하였다.

일화에 따르면 그가 권한 칭명염불(稱名念佛)의 가르침에 따라 장안(長安)의 집집마다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대표적인 저술로 『관무량수경소(觀無量壽經疏)』가 현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정토교가 하나의 종파로 형성되면서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눈에 띌 만 큼 종파로서의 형성은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경흥(憬興)과 의적(義寂)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으나, 정토신앙 보급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할

원효에 대해서만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모든 불교 교학에 능했던 원효는 『화엄경』에 주석을 달다가

크게 깨친 바가 있어 스스로 파계를 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다.

세속의 복장을 하고 머리를 기르고 ‘아무 걸림이 없는 박’이라는 뜻의 무애포(無碍匏)를 매고

같은 뜻의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무애춤을 추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때 원효가 민중들에게 가르쳤던 불교는 아미타신앙이었다.

원효가 이렇게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니, 산골에 사는 백성들까지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울 줄 알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정토삼부경의 세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범본과 티베트본은 산실되어 버리고, 오직 5세기 경에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한역본만이 현존하기 때문에 그 성립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정토삼부경’ 중에서 가장 발전된 사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성립시기를 4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명(經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경전은 극락정토의 장엄함과 그 곳에 주재하시는 무량수불(無量壽佛)

좌우에서 보좌하는 관음(觀音)ㆍ세지(勢至)보살을 생각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경전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사상은 매우 비극적인 사건을 배경에 깔고 있는데 바로 ‘왕사성의 비극’이라고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 의도 하는 바는 왕사성의 비극을 주제로 하여 위제희 왕비가 고뇌를 떨치고 서방정토로 구제되어 가는 순서를

관불(觀佛), 관상(觀想)의 설법으로 명백히 밝혀, 타력구제의 진실성을 범부중생들에게 알려주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전에서는 범부왕생의 십육관법(十六觀法)을 통해서 설사 악인이라도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악한 사람에게도 불성은 있고 또한 그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구제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 미타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극락세계는 불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바로 그 극락세계를 건설하게 된 원인과 그곳에 가는 방법을 설한 경전이 바로 『무량수경』이다.

『무량수경』은 『아미타경』과 범본의 경명(經名)이 똑같기 때문에 『아미타경』을 ‘소경(小經)’이라 부르고 『무량수경』을

‘대경(大經)’이라고 하며, 때로는 『대무량수경』 혹은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여 『쌍권경(雙卷經)』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그리고 『무량수경』은 여러 종류의 범본과 티베트 번역본 및 5종류나 되는 한역본이 현존하고 있다.

특히 범본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네팔 주재의 영국 공사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서 14, 5세기 무렵의 필사본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티베트 번역본은 이보다 훨씬 앞선 8세기 경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5종류의 한역본 중에서는 강승개(康僧鎧)가 번역한 『무량수경』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런데 『무량수경』의 내용은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만 부르면 곧바로 정토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선인과 악인,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오직 일심(一心)으로 염불만 하면

임종 때에 아미타불이 내영(來迎)하여 정토로 인도해 간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무량수경』은 아미타불이 과거세에 법장 비구로 있었을 때 세운 48대원, 현세에 있어서의 정토사상이

잘 조화를 이루면서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설명되어 있는 경전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과 그 분이 계시는 정토의 장엄한 세계를 설하고, 그러한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관무량수경』과 『무량수경』의 내용을 요약한 경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미타경』의 범본(梵本)은 네팔과 일본 등지에서 여러 가지 사본(寫本)이 전해지고 있고,

8세기 무렵에 번역된 티베트본도 현존하고 있다.

한역본은 모두 세 종류가 있는데 우리가 주로 독송하는 경전은 간결하고 수려한 문체로 유명한

구마라집이 402년에 역출한 번역본이다.

그뿐 아니라, 이 경전은 영역(英譯)으로도 나와 있고 주석서와 연 구서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한 『아미타경』은 일명 『사지경(四紙經)』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비록 그 분량이 적지만,

그러면서도 아주 쉽게 정토사상을 설명해 놓고 있다.

먼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서 장로 사리불을 위시한 여러 제자들과 문수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설법하시는 법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이어서 극락세계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모두 가보고 싶은 마 음이 우러날 정도로 실감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1일 또는 7일 동안 일심(一心)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토교학의 중심 사상
부처님이 일생 동안 설한 교설은 한마디로 ‘진실한 자신에게 눈뜨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정토에서는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이세상(사바세계)이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세계를 정토(淨土), 즉 극락세계라 한다.

이 진실한 세계를 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먼 길을 가는데 혼자 힘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어렵게 찾아가는 것과, 다른 하나는 같은 목적지를 자동차를 타고 쉽게 가듯이

남의 힘을 빌려서 찾아가는 것이다.

정토사상이란 후자(後者)와 같이 아미타불의 힘에 의지해서 진실한 정토를 쉽고도 빨리 찾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토교에서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이 강조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염불은 타력이라 하고, 참선은 자기 힘에 의지하는 '자력(自力)'이라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ㆍ타력을 나누어서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자력 과 타력,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이라는 대립적 개념으로

불교를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일심으로 염불하는 수행 그 자체가 이미 자력적인 것이고, 참선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 속에

타력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극락이란, 말 그대로 즐거움이 극에 달해 있는 세계를 말하는데 불교에서 말할 때 우리들이 사는 이 사바세계는

예토(穢土), 즉 더럽고 고통스러운 땅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수많은 정토, 즉 깨끗한 세계이면서 즐거움만이 있는 불국토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에는 극락정토 이외에도 미륵정토ㆍ약사정토ㆍ화엄정토 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극락정토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토삼부경’에서는 특히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만을 주제로 설명 하고 있다.

따라서 아미타불을 어떻게 보느냐, 또 정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소위 불신관(佛身觀)과 정토관 (淨土觀)

정토사상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 한편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교리가 발달하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수많은 불보살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

불보살들은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사상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바로 ‘본원(本願)’이나

‘서원(誓願)’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것이다.

이때 불보살님 한분 한분이 가지는 원을 ‘본원(本願)’ 또는 ‘별원(別願)’이라고 하며, 모든 불보살님이

다같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원을 ‘총원(總願)’이라 하는데, 예를 들면 사홍서원(四弘誓願)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같 이 본원의 대표적인 경전이 위에서 살펴본 ‘정토삼부경’인 것이다.

특히 법장비구의 48원 가운데 제18, 즉 ‘십념 왕생(十念往生)의 원’이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데,

원효는 십념에 현료(顯了)와 은밀(隱密)의 두 뜻이 있다고 하였다.

즉 현료는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소리내어 외우는 것이고,

은밀은 초지(初地)인 환희지 (歡喜地) 이상의 보살이 아니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회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살에서 범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미타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대에 이 정토신앙은 더욱 극단화되어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이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소리내어 외우면

곧바로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와 숫자개념은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으로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정토 또한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유심정토(唯心淨土)’설도 나오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바로 극락이기 때문이다.

‘번뇌(煩惱) 가 바로 보리(菩提)’라는 주장을 하는 대승불교다운 해석이다.

밀교

밀교의 성립과 역사
‘밀교(密敎)’는 ‘비밀불교(秘密佛敎)’를 줄여 부른 말인데, 깨달음을 위한 수행도로서의 밀교를 진언승(眞言乘),

또는 진언문(眞言門)이라고도 한다.

또한 밀교를 표현하는 다른 용어로는 금강승(金剛乘), 구생승(俱生乘), 시륜승(時輪乘) 등이 있다.

서양에서는 밀교를 딴뜨릭부디즘(Tantric Buddhism), 또는 불교딴뜨라(Buddhsit Tantra) 등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8, 9세기경 인도의 후기 밀교시대에 성립된 밀교경전을 딴뜨라(Tantra)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 불교딴뜨라를 좌도밀교(左道密敎)라고 오해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좌도는 힌두딴뜨리즘 가운데

샤끄따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의 범주인 밀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성립 이후 4, 5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의 불공(不空)은 불교를 현교(顯敎)와 밀교로 나누고,

밀교에 대해 부처님의 삼밀(三密)과 상응하는 수행문에 의지하여 많은 겁의 난행과 고행을 하지 않고 신속히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밀은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보이신 세 가지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신밀(身密), 구 밀(口密), 의밀(意密)을 뜻한다.

삼밀을 간략히 설명하면 신밀은 부처님의 신체적 비밀로 부처님의 상호(相好) 32 80종호와 함께 보살,

수호존 등의 형태와 색깔, 장신구, 수인(手印) 등을 말한다.

구밀, 또는 어밀(語密)은 부처님의 언어적 비밀로 진언, 다라니, 종자(種字) 등을 가리킨다.

의밀, 또는 심밀(心密)은 부처님의 마음의 비밀로 곧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 또는 삼매를 말한다.

즉 밀교는 진언(眞言), 다라니(陀羅尼)를 비롯해 다양한 불ㆍ보살의 형태와 수인(手印), 그리고 만다라(曼茶羅)

대부분의 불교의식 등을 포함하면서 이것을 방편삼아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경전의 경우 대승불교의 성립과 함께 경전의 수지, 독송을 돕기 위해 경전의 축약된 의미를 지닌

진언과 다라니가 등장하고 이에 의지한 수행이 일찍이 등장하였다.

정토(淨土)계 경전에는 불상이나 불ㆍ보살의 정토를 관하는 수행이 존재하였으며, 3, 4세기 경에는

불교경전에 많은 주와 다라니, 그리고 점성술과 제의 등이 출현, 정비되었다.

이것은 밀교가 불교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한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가 인도대륙의 종교환경에서 성장 하면서,

인도의 종교문화에 의지한 외형적 소재들을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을 통해 인도대중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또한 중생구호라는 불교의 본래적 정신을 구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성립한 밀교는 불교경전의 전래와 함께 중국에 전해졌는데, 처음에는 진언과 다라니 등의

밀교적 소재가 대승경전에 섞인 채 전해졌으나, 정비된 의궤(儀軌)에 입각해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화된 중기밀교는

8, 9세기경 당 시대에 전해져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에 전해졌다.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북방 대승불 교권에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 교학과

수행체계가 유행되고, 정비된 반면 인도와 티베 트에서는 딴뜨라를 중심으로 한 인도 후기밀교가 크게 유행하였다.

한반도의 경우 불교가 전래될 때 밀교가 치병과 호국 등의 방편을 보임으로써 불교를 영험한 종교로 인정받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티베트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공통된 것으로

불교의 전 파에 밀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밀교의 중심 교리
석존의 입멸 후 불교경전에 나타난 붓다관은 부처님에 대해 역사적 인물인 석존(釋尊)에 국한하지 않고,

삼세에 걸쳐 타방정토에 무수히 존재한다고 설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인연에 따른 생멸(生滅)의 존재가 아니라 시공(時空)을 초월한 절대세계에 변함없이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붓다의 절대성과 영원성은 대승불교에서는 법신(法身)불로 나타나 『화엄경』의 경우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존재로서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위해 영원히 설법한다고 설하여 법신불이 지닌 신앙적 의미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승불교의 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중생구호를 위해 마지막 중생이 남을 때까지

자신은 영원히 성불치 않는다고 하여 대승정신의 구현자 로서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밀교의 붓다관은 이러한 대승불교의 붓다관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붓다와 대보살의 경계를 허물어 진언문의 수행자가 성불하여

자신이 곧 절대 법신의 붓다로서 중생구호를 위해 영원히 노력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밀교경전인 『대일경』에서 비로자나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대해 ‘보리심이 원인이 되고, 자비심이 뿌리가 되고,

방편을 구경으로 한다’고 정의하여 밀교의 궁극적 성불이 중생구호의 방편적 구현을 궁극적 목표로 정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밀교에는 수행의 이상적 성취자로서 금강살타(金剛薩豊)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지금강(持金剛)ㆍ집금강(執金剛)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명칭이 의미하듯 절대법신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금강과 보리살타의 살타가 결합된 말로서 절대법신이면서 대보살의 중생구호이념을 실현하는 실천자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열반관 등의 사상을 계승한다.

용수의 『대지도론』에서 ‘깊은 깨달음은 세간적 현실과 열반을 다르지 않게 본다’라고 한 반야사상과 『열반경』에서

열반은 영원한 안락이며 청정한 자성임을 뜻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근본 이념을 계승하였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반야의 지혜에 의해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지 않고 열반과 생사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입각해,

자신은 공성에 머물면서 중생구호를 위해 현실세계에서 노력하는 성취자의 이상을 금강살타를 통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밀교경전인 『이취경』에는 ‘수승한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중생의 윤회 생사(生死)가 다하도록

언제나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반야와 방편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제법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청정한 것이다.

탐욕으로 가득한 세간을 청정케 하며, 유정과 악취를 존재의 삶이 다하도록 조복시킨다.

마치 연꽃의 줄기가 진흙에 묻더라도, 그 자체는 더러워지지 않는 것처럼 모든 탐욕인 번뇌의 성품도

그와 같이 오염되지 않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큰 탐욕이 청정하기 때문에 크게 안락하고, 풍요로우며, 삼계에 자재함을 얻어 능히 견고한 이익을 성취한다’라고 하여

대승불교의 붓다관과 반야와 열반 등의 제반 사상에 근거하여 현실 세간의 살아 있는 실천자에 대한 교리적 기반을 이룩하고 있다.

밀교의 수행이념
밀교수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대승적 이념의 실현에 있지만 밀교의 수행을 진언문(眞言門)으로 설정한 것과 같이

밀교는 현교와 다른 독특한 수행방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수행자가 밀교를 구성하는 진언, 다라니와 수인, 불형(佛形) 등을 소연(所緣)으로 관()하여

내면적인 심식(心識)의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성불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연의 대상인 여래의 불형에 대해 『대일경』에는 진언과 수인, 형상의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다.

같은 경전의 「무상염송문(無相念誦門)」에는 ‘진언행자가 성불의 마음을 결정할 때 먼저 한마음으로 본존을 관해야 한다.

진언과 비밀한 수인을 수호함으로써 유가수행의 본존상을 짓는다.

본존의 색상과 위의(威儀)와 같이 진언행자의 마음도 그와 같다.

본지(本地)신과 상응하는 불신(佛身)에 머물러 비록 복이 적은 자라도 성불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유가수행은

곧 수행자의 심식(心識)을 붓다의 의식으로 전환하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이념에 근거한 것이다.

밀교의 유가수행은 중생의 의식변화를 통해 중생자신의 현실을 붓다의 절대적 현실로 실현하는 것으로

중생의 신어심(身語心)은 곧 붓다의 신금강ㆍ어금강ㆍ심금강으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수행이념은

인도 후기밀교의 수행으로까지 전개되어 생기차제(生起次第)와 구경차제(究竟次第)의 독특한 수행체계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후기밀교의 수행이념은 중생의 신어심의 영역을 중생의 세 가지 존재인 삼유(三有), 즉 생유(生有)와 중유(中有)와 사유(死有)

붓다의 화신과 보신, 그리고 법신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밀집회딴뜨라』에는 ‘진언을 관연(觀緣)한 몸은 말과 마음에 의지하며, 마음은 안락하고 즐거워 수승한 실지 (悉地)를 성취할 것이다.

마음에 관연한 무아를 말과 몸에 대해서도 관할 것이니 평등한 공성을 삼밀에 상응하여 성취한다.
신어의를 관연할 때 그 자성은 관연함이 없을 것이니 진언에 의해 몸을 상응함에 있어 보리도 없고 수행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밀교의 수행이 어떤 생리적이거나, 외적인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사상이나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등의

불교의 근본적 교리에 입각해 이것을 철저히 수행자의 내면세계에 반영하는 유가수행임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밀교의 교리와 수행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생의 현실세계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실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한 불교 교단의 경험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의 기원
‘선은 고대 인도의 명상법인 요가(yoga)에서 비롯되어 붓다의 명상과 정각(正覺)을 통하여

새로운 불교의 실천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요가의 기원은 B. C 3000년 경 고대 인도의 원주민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따라서 요가 명 상인 선()은 약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가라는 말은 사유(思惟) 혹은 명상(冥想)이라는 의미인데 ‘명상을 통하여 오감(五感)을 제어하고 산란한 마음을 정지시키는 것,

즉 모든 감각기관을 움직이지 않고 집중(執中)하여 마음을 통일시켜 적정상태에 머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가는 삼매(三昧, sama-dhi), 선 나(禪那, dhya-na)라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선나(禪那)로 사용되어 오다가

()이라는 말로 일반화 되었으며, 대승불교에서는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고 하였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설하는 브라흐만교에서는 요가의 명상을 통하여 브라만과 아트만이 본래 하나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를 체득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붓다의 선정(禪定)은 제법의 본질인 연기(緣起)의 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여러 수행자를 찾아 수행하는 가운데 수정주의(修定主義) 사상가를 찾아가 선정법을 닦았다.

이들의 주장은 요가의 선정을 통하여 정신집중을 이루어 일체의 정신적인 작용이 정지되어 적정(寂靜)의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처님은 이 선정법을 차례로 닦아 최고의 경지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선정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선정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선정의 상태에 있을 때는 일체의 고에서 해탈된 경지를 얻을 수 있으나 선정에서 벗어나면 또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의 상태로 돌아오게 됨을 알고, 이러한 수정주의의 수행으로는 결코 완전하고 안온무고(安穩無苦)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수정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다시 고행주의(苦行主義) 수행자를 찾아가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혹독한 고행을 닦았다.

고행주의자들은 인간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육체가 있기 때문이며 육체를 괴롭혀 최극한의 경지에 이르면

정신적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온갖 어려운 최고의 고행을 모두 경험하였으나 육체적인 고행으로는 정신적 해탈의 경지를

얻을수 없다고 결론내리고 고행주의를 버렸다.

그리고 네란자라 강물에서 목욕하고 수자타에게 우 유죽을 공양 받고 보리수나무 아래에 금강보좌를 만들어 깊은 선정에 들어갔다.

생로병사의 인간의 근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깊이 명상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새벽하늘의 샛별을 보고 스스로의 힘으로 연기의 법을 깨달았다.

부처님은 선정의 실천구조를 지(, Samatha)와 관(, vipasana)으로 설명하고 있다.

보통 ‘지관(止觀)’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지는 사마타, 즉 삼매(三昧)로서 마음을 집중하여 산란심이 없는 경지를 말하고,

관은 비파 사나로서 만법의 근원인 진리[緣起]를 관찰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지는 번뇌가 없는 정적(靜的)인 마음상태인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며,

관은 선정에서 일어나는 동적(動的)인 상태인 지혜를 나타내는 말이다.

부처님이 수정주 의의 선정설(禪定說)을 버렸다는 것은 그것이 지의 상태에 머물러 버리는 선정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에 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지()의 선정에서 더 나아가 연기의 법을 관찰하는 지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지관쌍수(止觀雙修)의 선정설을 확립하였다.

원시불교의 주요한 선정설로는 사선(四禪), 팔등지(八等持),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사선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선정이 가미되어 성립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

*사선(四禪) : 초선(初禪), 제이선(第二禪), 제삼선(第三禪), 제사선(第四禪).
*
팔등지(八等持) : 사선+사무색정(四無色定 :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
구차제정 : 팔등지+멸진정(滅盡定). 부파불교의 대표적 선정설로는 사념처관(四念處觀)과 오정심관(五停心觀)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염처(念處)란 곧 정신통일을 말한다.

사념처관
① 신념처관(身念處觀) : 이 몸이 부정(不淨)하다고 관함.
② 수념처관(受念處觀) : 고락(苦樂) 등 감각 작용이 모두 고()라고 관함.
③ 심념처관(心念處觀) : 의식[識心]이 생멸하여 항상하지 않음을 관함.
④ 법념처관(法念處觀) : 제법이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무자성(無自性)임을 관함.

오정심관
① 부정관(不淨觀) : 탐욕이 많은 사람들이 닦음.

육체의 부정한 모양을 관찰하게 하여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탐욕심 과 집착심을 끊게 만드는 선정의 수행.
② 자비관(慈悲觀) :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중생이 과거생으로 보면 모두가 나의 부모 형제 아님이 없음을 관찰하여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분노와 화내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선정의 수행.
③ 인연관(因緣觀) : 전도(顚倒)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도리에 맞는 마음을 가지기 위한 선정의 수행.
④ 계분별관(界分別觀) : 모든 존재를 실체로 보는 사람들이 닦음.

일체의 현상하는 모든 존재는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여, 모든 존재를 바르게 보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선정의 수행.
⑤ 수식관(數息觀) : 마음이 산란한 사람들이 닦음.

자연계의 대기호흡을 관찰하고, 자신의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선정의 수행.

대승불교의 경전 가운데 선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경으로서는 대략『금강경』, 『화엄경』, 『유마경』, 『능가 경』 등을 꼽을 수 있다.

반야의 공사상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설하고 있는데, 일체 모든 것은 연기하여 자성이 없으므로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무자성의 공을 체득하는 것이 대승선이다.

『금강경』에서는 ‘즉비(卽非) 의 논리’로 공이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다.

즉 ‘불법은 불법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불법이다[佛法者卽非佛法 是名佛法]’라고 즉비의 부정의 논리를 전개하여 공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하는

무주(無住)사상 역시 선사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화엄경』의 해인삼매를 통하여 설하고 있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논리는

중생이 바로 부처[衆生卽佛]라는 돈오선의 이론적 기초가 되고 있다.

『유마경』의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은 선의 실천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능가경』에서는 자각성지(自覺聖智)의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나는 최정각(最正覺)을 이룬 그 날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일자(一字)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일자불설(一字不說)’설을 주장하여 ‘이심전심, 불립문자 (以心傳心 不立文字)’의 선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선종과 선의 종류
선종(禪宗)이란 인도의 선이 중국에 전래되어 선 수증(修證)의 종지를 가지고 형성된 종파를 말한다.

선종의 초조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이며,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을 거쳐 신수와 혜능에 의해 북종과 남종으로 나뉘어져서

북종은 점수선, 남종은 돈오선을 각각 선양하였다.

남종 계통인 마조의 홍주종에 이르러 조사선의 생활종교로 발전하여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발전되고 그 중 조동종과 임제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선종에서는 자파(自派)의 종지로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고 있다.

교외별전이란 선의 입각처(깨달음)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의 길이 없어진 [心行處滅] 경지임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언어와 문자에 의지하는 교종(敎宗)의 가르침에 대해 이심전심의 마음을 강조하여

말보다 마음이 우월하다는 종파주의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립문자란 앞에서 말한 “언어문자를 초월 한 선의 경지를 나타내기 위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불립문자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언어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직지인심의 가르침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부처의 성품을 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달마는 ‘성품이 곧 마음[卽性卽心]’이라고 말하고, 마조는 ‘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말하고,

임제는 ‘사람이 곧 부처[卽人卽佛]’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참성 품을 보게 되면(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의미로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선불교는 대승불교의 실천적 계승이다.

대승불교는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즉 부파불교가 부 처님의 근본 종지를 오해하고 생사를 떠나 단멸공(斷滅空)에 안주하는 것으로 열반을 삼음에 대해

무주생사(無住生死 : 생사에 머물지 않음), 무주열반(無住涅槃 : 열반에도 머물지 않음)의 무주행,

즉 반야바라밀의 보살행을 근간으 로 근본불교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다.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마저 버리는 대승보살행은 중국선종에 서 견성성불(見性成佛), 요익중생(饒益衆生)

역동적 실천사상으로 계승되어 진다.

‘견성성불, 요익중생’이 선의 정신이다.

선의 내용에 따른 분류는 『대지도론』 17권에서는 외도선(外道禪), 성문선(聲聞禪), 보살선(菩薩禪)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에서는 사종선(四種禪)을 설하고 있다.

첫째,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은 성문ㆍ연각ㆍ외 도 수행자의 선정으로서 자기의 이 몸은

무상ㆍ고ㆍ무아ㆍ부정한 것이라고 관하고 인무아(人無我)라는 입장에서 설해진 선을 말한다.

둘째, 관찰의선(觀察義禪)으로 의( : 意味)를 관찰하는 대승공관의 선정을 들고 있다.

여기의 ‘의’란 법( : 사물, 존재)이라는 의미로서, 자기의 몸[]과 일체의 객관 존재[]도 공ㆍ무아라고 관하여

인법이무아(人法二無我)를 깨닫는 선을 말한다.

셋째, 반연여선(攀緣如禪)은 진여(眞如)를 소연(所緣)으로 하는 선이다.

일체의 존재는 공한 것이다라고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여래의 법신인 진여불성은

()ㆍ락()ㆍ아()ㆍ정 ()인 것으로 관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은 일체의 삼매를 총괄하는 선정으로, 여래의 깨달음의 경지인

자각성지(自覺聖智)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자비 행화에 대해 전념하는 선을 말한다.

종밀『도서』에서 종래의 여러 선정설을 종합하여 외도선ㆍ범부선ㆍ소승선ㆍ대승선ㆍ최상승선(最上乘禪 : 여래 선)

5종선으로 분류하고 있다.

훗날 선종에서는 여래선과 조사선으로 나누어 여래선에 대한 조사선의 우위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여래선을 중국적 조사불교의 관점에서 조사선이라 부르는 것이다.

중국 선종사상의 전개
중국에 선()이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이래 선경(禪經)이 번역된 이후의 일이다.

안세고가 소승계의 선경인 『안 반수의경』 및 『선행법상경』 등을 번역하였으며, 지루가참이 대승계의 선경인

『반주삼매경』과 『도행반야경』 등을 번역하였다.

특히 수식관을 주로 설하고 있는 『안반수의경』은 달마가 중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중국 선종이 흥기되기 이전에

초기 중국의 습선자(習禪者)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중국 선종은 초기에 천태선과 달마선으로 출발하였으나 뒷날 달마계통의 선종으로 통합되었다.

보리달마에 의해 시 작된 달마선은 『능가경』의 ‘불어심위종(佛語心爲宗)’의 ‘불심제일(佛心第一)’로

그 사상적 근간을 삼았기 때문에 능가사(楞伽師) 혹은 불심종(佛心宗)이라고 부른다.

달마 능가선의 핵심사상으로는 ‘이입사행(二入四行)’설을 들 수 있는데, 즉 도에 들어가는 두 종류의 문(二入)에는

이치로 들어가는 ‘이입(理入)’과 실천행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이 있다고 설한다.

이입이란 ‘경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종( : , )을 깨달아[藉敎悟宗], 궁극에는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참성품 [眞性],

즉 불성을 깨달음을 말한다.

행입에는 네 가지의 실천행이 있는데, 보원행(報怨行 : 빚을 갚는 행), 수연행 (隨緣行 : 인연에 따르는 행),

무소구행(無所求行 : 구하는 바가 없는 행), 칭법행(稱法行 : 법에 합일된 행)을 말한다.

그리고 달마의 독창적 선법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을 들고 있는데 ‘이입(理入)이란 안심(安心)이며,

안심이란 벽관(壁觀)이다’라는 말에 기인한다.

벽관의 벽()이란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벽관이란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심불기(心不起)의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본래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달마의 벽관을 위주로 한 선법은 혜가에게 전해지고, 혜가는 승찬에게 전하여 능가종을 이루게 된다.

승찬은 『신심명』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

능가사들이 남천축일승종(南天竺一乘宗)의 입장에서 무득정관(無得正觀)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을때

황매(黃梅)의 쌍봉산(雙峰山)을 중심으로 달마선종의 4조 도신 (道信)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불교를 선양하여

그 문하에 500여명의 수선자들이 운집하였으니 이로부터 명실상부한 선종(禪宗) 교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또 도신의 제자 홍인(弘忍)이 쌍봉산의 동산으로 옮겨 수선도량을 개창하여 천여 명의 대중이 모여 수선하였는데

도신, 홍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부른다.

동산법문의 핵심사상은 도신의 ‘수일불이(守一不移)’사상이다.

수일불이란 “공정(空淨)의 눈을 가지고 주의하여 일체를 관하며, 낮과 밤의 구별없이 오로지 모든 정력을 쏟아

항상 동요함이 없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데, 마음을 하나의 사물에 집중시켜 관()하게 하는 구체적인 좌선 실천 법이다.

홍인은 도신의 수일불이의 좌선법을 계승하여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의 본 심이 바로 부처임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이 각자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守本眞心)만 못하 다”고 설하여 수본진심을 강조하고 있다.

도신, 홍인의 동산법문의 교단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좌선과 노동을 병행한 생산적 교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는 훗날 백장청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홍인의 문하에는 뛰어난 십대제자가 있는데 그 중 북종의 신수와 남종의 혜능을 대표하여 ‘남능북수(南能北秀)’라 일컫는다.

낙양과 장안을 중심으로한 제도(帝都)불교를 이끈 북종의 신수는 양 수도의 법주[二京法主],

세 황제의 국사[三帝國師]로서 달마 이래의 안심법문을 계승하여 점수(漸修)에 의한 이념선(離念禪)을 선양하고 있다.

『육조 단경』에 나타난 신수의 게송, 즉 “몸은 보리의 나무요[身是菩提樹],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時時勤拂拭],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莫使有塵埃]”는 가르침은

북종의 점수선적 가풍 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반면 남종의 혜능은 남방(광동 소관)을 중심으로 한 서민불교를 지향하고 있는데, 무념(無念), 무상(無相) , 무주(無住)

종지로 하는 식심견성(識心見性)의 돈오(頓悟)적 무념선(無念禪)을 주창하였다.

『단경』의 혜능의 게송, 즉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菩提本無樹],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明鏡亦無臺],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佛性常淸淨 : 이 본에는 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何處有塵埃]”라는 구절은

남종의 돈오선적 가풍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시 정통과 주류의 위치에 있던 북종 신수계를 향해 “사승은 방계요(師承是傍), 법문은 점수(法門是漸)”라고 공격하며

혜능을 달마선의 6조로 현창한 인물이 신회이다.

사실 돈오선은 혜능에 의해 주창되었지만 돈오선의 지위는 신회의 육조현창운동에 의해 확립된다.

혜능 사후 남종선은 신회의 하택종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다가 곧이어 마조의 홍주종과 석두의 석두종 계통으로 넘어가게 된다.

즉 달마, 혜가로부터 비롯되는 중국 선종은 초기의 능가종, 동산법문, 북종선과 남종선의 시대를 거쳐 9세기를 전후하여

강서(江西)의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호남(湖南)의 석두 희천(石頭希遷) 및 그들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선승들의 활약에 의해

조사선(祖師禪)의 생활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마조계 선종의 특징의 하나는 그 문하에 용상대덕(龍象大德)이 수없이 많이 배출되고 다양하고 조직적인 교단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당집』에는 친승제자가 88, 현도(玄徒)가 천여 명, 『전등록』에는 입실제자가 139 인으로 각기 한 지방의 종주로서

행화를 펼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선종이 이미 마조계 홍주종(洪州宗)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혜능으로부터 시작된 조사선의 종지는 마조계 홍주종에 이르러 만개하게 되는데, 그 주요 사상으로는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이 부처이다)’과 ‘비심비불(非心非佛 :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

그리고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 평상심이 도이다)’ 등 조사선 특유의 일상성의 선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홍주종의 뛰어난 선승으로는 서당 지장, 백장 회해, 남전 보원, 대주 혜해 등 수없이 많다.

그 중 백장은 선종 최초로 『선원청규(禪苑淸規)』를 제정하여 이전의 율종(律宗)으로부터 선종교단을 독립시키고 있다.

사실 중국 선종의 비약적인 발전은 선승들이 집단적인 수행생활의 규범과 주체적인 교단의 조직 및 운영 등을 위해

체계적으로 성문화 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제정과 더불어 정착되었다.

오늘날 『백장청규』의 전모는 알 수 없으나 선수행자를 위한 중국 특유의 선문규식(禪門規式)으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 대중이 생산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보청(普請)의 법을 제정한 것이다.

유명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명구도 이로부터 나오게 된다.

백장의 뛰어난 제자로는 위산과 황벽을 들 수 있다.

위산(噴山)은 제자 앙산(仰山)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 중 가 장 먼저 위앙종(噴仰宗)을 개창하고 있으며,

황벽은 ‘직하무심(直下無心)’의 무심법문을 강조하였으며, 그 문하에 유명한 임제가 배출되어 임제종(臨濟宗)이 탄생된다.

임제의 사상으로는 ‘무위진인(無位眞人 : 아무 가식이 없는 참 사람), ‘평상무사(平常無事 : 할 일을 다 마친 일없는 경계),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곳에 따라 주체적인 삶을 살면, 어느 곳이나 진실의 세계)’ 등

수연자재한 대자유인으로서의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석두 문하에 조동종(曹洞宗)과 운문종(雲門宗) 및 법안종(法眼宗)이 개창되어 마조(馬祖) 문하의

위앙종(噴仰宗), 임제종(臨濟宗)과 더불어 선종 오가(五家)가 펼쳐지게 된다.

아울러 임제종에서 분파된 황룡종(黃龍宗)과 양기종(楊岐宗)을 더해 선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 부른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조동종 계통의 굉지정각(宏智正覺)에 의해 묵조선(默照禪)이 제창되고, 임제종 양기파 계통의

대혜종고(大慧宗豈)에 의해 간화선이 집대성 된다.

묵조선의 묵()은 묵묵히 좌선하는 것이며, ()는 비추는 작용(照用)으로서 심성(心性) 의 영묘한 깨달음의 작용을 말한다.

즉 묵묵히 좌선하는 그 가운데 영묘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있음의 좌선을 매우 중시한다.

간화선은 옛 조사들의 깨달음의 기연(機緣 : 因緣)인 공안(公案: 話頭)을 참구하는 선수 행법이다.

공안이란 ‘관공서 의 문서’라는 뜻으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대성의 법칙을 말한다.

선문에서는 불조(佛祖)가 개시한 불법의 도리를 의미하며, 수선자들이 분별의식을 떨쳐버리고

조사들의 공안을 참구하여 깨달아야 할 문제의식(現成公案)으로 보고 있다.

즉 인식주관과 객관대상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을 떨쳐버리고 그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는 일체의 허구적이고 비실제적인 의식의 작용을 끊는 절대적인 참선의 방편이며,

이러한 화두 참구의 목적과 방법은 화두에 대해 간절한 의심을 일으켜 이 의심에 모든 의식작용을 집중시켜

바깥 경계로 의식이 지향하는 것을 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직관(直觀)하는 것이다.

한국선(韓國禪)의 전개
한국선의 정신은 원효의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이라는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 선 ()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는 신라 말 시작하여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구산(九山)으로 대표되는

선문(禪門) 이 개창되는 때의 일이다.

구산선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처음으로 법랑(法朗)이 중국 선종 4조 도신의 법을 전해 왔고, 그의 제자 신행(信行)이 또한 신수 보적 계통의 북종선을

전수받아 와서 준범(遵範)에게 전하고, 혜은(惠隱)을 거쳐 뒷날 지선(智詵)에 의해 문경 봉암사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이 건립된다.

그리고 도의(道義)는 마조계통의 홍주종 서당 지장에게 남종선법을 전수받아 귀국하여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였으며,

그 문하의 염거(廉居)련 셋(體澄)에 의해 장흥 보림사에서 가지산문(迦智山門)이 건립되고 있다.

홍척(洪陟) 또한 서당 지장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귀국하여 남원 실상사에서 실상상문(實相山門)을 개창하였으니

연대적으로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빠르다.

혜철(慧哲) 역시 서당 지장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아 곡성 태 안사에서 동리산문(桐裡山門)을 건립하였으며

문하에 도선국사가 있다.

현욱(玄昱)은 마조의 다른 제자 장경회 휘의 법을 이었으며, 그의 제자 심희(審希)에 의해 창원 봉림사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이 건립된다.

무염(無染) 은 마조 문하의 마곡 보철의 법을 이어서 보령 성주사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하였으며,


범일
(梵日)은 마조 문하의 염관 제안의 법을 받아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淞堀山門)을 건립하였다.

도윤(道允)은 마조의 제자 남전 보원에 사사하고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선법을 폈으며,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 의해 영월 법흥사에서 사자산문(獅子山門)이 건립되었다.

이엄(利嚴)은 조동종의 운거 도응에게 심인을 받아 해주 광조사에서 수미산문(須彌山門)을 개창했다.

이로써 구산선문이 모두 건립되는데 실제로는 구산선문 이외에도 혜소(惠昭), 순지(順之) 등이

산문을 건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산선문이 표방하는 선의 종지는 ‘무위임운(無爲任運), ‘무념무수(無念無修)’로서

남종선의 ‘마음 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하는 돈오견성의 무념법문을 토대로 하고 있다.

나말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한 선불교가 고려 중기에 이르러 보조 지눌에 의해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보조는 길상사(, 송광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근본도량으로 하여

참선을 위주로 한 결사불교를 전개하였다.

정혜결사의 이념은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힘 쓰고 예불전경(禮佛轉經)으로

노동운력하며, 인연 따라 어느 곳에서나 성품 단련에 힘을 쓰며, 진인달사(眞人達士) 들이

세상을 통쾌하게 살다간 고행(高行)의 길을 본받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혜결사의 수행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 등이며,

성적등지문에서 정혜쌍수, 돈오점수(頓悟漸修), 원돈신 해문에서 화엄과 선의 일치인 선교회통(禪敎會通),

경절문은 화두 참구에 의한 간화선의 수행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보조는 『간화결의론』을 저술하여 한국불교 최초로 간화선을 선양하고 있다.

보조가 결성한 수선사에는 이후 혜심(慧諶), 몽여(夢如), 혼원(混元) 16국사를 차례로 배출하게 되는데

이로써 송광사는 승보사찰이 된다.

고려 말에 선을 중흥하고 있는 선사로는 태고 보우(太古普愚), 나옹 혜근(懶翁慧勤), 백운 경한(白雲景閑)을 들 수 있는데,

세 사람 모두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정맥을 이어 간화선풍을 진작시키고 있다.

태고는 가지산문에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다시 원나라로 건너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참문하여 인가를 받았다.

태고는 임제의 정종 (正宗)을 해동에 전해 간화선을 불러일으켜 송의 대혜 종풍을 계승했다.

그의 선풍은 ‘인간 본연에 돌아가 불조의 본지(本旨)에 의거하여 시방세계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서원력을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고와 함께 석옥의 법을 이어받은 사람이 경한인데, 그는 무심무위(無心無爲)의 선지를 강조하고 있다.

나옹은 공 덕산 요연에게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개오하고, 원나라로 들어가 연경의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에게 참배하고, 임제의 정맥을 계승한 평산 처림(平山處林)에게 입실하여 불자(拂子)와 법의를 받았다.

나옹의 선사상은 “선수행자가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여일하게 화두만을 참구한다면 승속과 노소, 또는 초참후학에 관계없이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체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의 불교를 한마디로 특징 지워 말하면 산중불교(山中佛敎)라 할 수가 있다.

조선의 숭유배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종파가 강제로 통폐합되어 11종이 7종이 되고, 7종이 다시 교종과 선종의 양종으로 재편되었다.

결국 산중에 은거한 선종만이 남게 되었으니 오늘의 조계종이 바로 이 통불교(通佛敎)적 선종에 해당된다.

이런 폐불의 시기 에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출세하여 한 때 선을 부흥시켰다.

『선가귀감』에서 휴정의 선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그는 선교관에 대하여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을

()라 하고,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이 선()”이라고 규정하고,

“누구나 말에서 잃어버리면 염화미소가 모두 교적(敎迹)이 되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다

교외별전의 선지(禪旨)가 된 다”라고 하여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화두 참구에 의한 공부(간화선)를 강조하고 있는데, 참구 방법에 대해 “대저 학자는 모름지기 활구(活句)만을 참구할 것이며,

사구(死句)는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화두 에는 어구(語句)와 의의(意義)의 두 가지 문이 있다.

어구를 참구한다는 것은 경절문의 활구이니, 마음의 길도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모색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의의를 참구한다는 것은 원돈문의 사구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참선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하는데, 삼요란 첫째, 대신근(大信根)이 있어야 하며

둘째, 대분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 대의정(大疑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삼요가 갖추어지면 화두를 결택하여야 하는데 화두에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는가?),

‘시심마(是甚匿 :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 뜰 앞에 잣나무),‘마삼근(痲三斤 : 삼 서 근),

‘건시궐(乾屎猛 : 마른 똥막대기)’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 본래 모습)’ 등

1700가지 공안이 있다.

그는 참선하는 사람의 정신에 대해 “한 생각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생사라 하는데, 이 생사의 사이에 있으면서

모름지기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에 간단(間斷 : 사이가 끊어짐)이 있으면 곧 생사라 하고 번뇌라 한다.

화두가 불매(不昧)하면 곧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며, 스스로의 집이 된다.

사대(四大)로 된 이 추한 몸이 찰나 찰나에 쇠하고 썩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은(四恩)의 깊고 두터움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일어나고 앉기가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참선하는 사람의 일과로 삼아야 할 일이므로 또한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라고 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정신으로 선지를 삼고 있다.

그는 또한 출세 자유인의 깨달음의 경지를 “신령스러운 빛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길이 빛난다[神光不昧 萬古徽猷]”라고 설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 활약한 경허(鏡虛)는 쇠미해진 선풍을 다시 진작시키고 있으며,

그의 문하에 만공, 해월, 수월, 한암 등 의 걸출한 선승이 배출되어 근대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용성(龍城)은 대각운동과 생활선을 주창하며 독립운동과 교화에 진력하고 있다.

그의 제자로는 동산, 인곡, 동헌, 고암, 자운 등이 있으며, 성철 또한 그 문손이다.

만공, 용성은 근대 한국선(韓國禪)을 중흥시킨 양대 산맥이다.

()과 현대 현대사회에 있어서 왜 선수행이 필요한가.
인간성 상실, 물질지상주의, 환경오염, 전쟁과 기아 등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선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빈곤을 느끼며 정체성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문화가 있기 때문이지만, 현대의 과잉 문화현상 속에서 인간은 먹고, 놀고, 마시는

소비적 향락문화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

소비와 향락은 물질만능주의의 필연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생은 무의미하다.

소위 먹고, 자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 등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도 할 줄 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아름다운 영혼과 이성을 가꾸고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영혼과 이성을 가진 사람 을 참사람[眞人]이라 한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육체적 욕망과 허위의식을 비우고 인간의 본래모습인 참사람(순수인간)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순수인간은 마음이 텅 비어 일체 물질경계에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을 알기 때문에 허위의식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 선()이다.

선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 쓰레기(얻음의 세계)를 말끔히 쓸어낸 ‘빈 마음’에 서 있기를 권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무한욕망으로 가득 채우는 것만을 미덕으로 여긴다.

물질과 허위의식으로 채워진 현대인은 가장 중요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는데,

인간성은 객관경계에 오염된 허위 의식을 비워버림으로써 다시 회복할 수 있다.

텅 비워버린 마음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나오게 되며, 굳은 의지가 창출된다.

비운 마음이 청정한 본성이요, 불성이요, 부처이다.

따라서 선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부처(衆生本來佛)임을 강조하고,

본래 부처인 인간이 무한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편리한 것이 반드시 행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편리함은 더욱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현대인은 밀려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식작용이 더욱 복잡해져서 번민과 고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생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면적인 스트레스, 즉 마음의 얽매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내적 자유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러한 때 선은 우리에게 절대자유의 경지인 해탈의 방법을 일러준다.

직하에 무심하라[直下無心], 즉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일체 경계에 얽매인 마음을 일시에 놓아라[放下着]’고 가르친다.

무심이란 아무 생각이 없는 목석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무심이란 일체를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음[於念而不念]이다.

다시 말하면 분별하되 분별하지 않음이요, 분별하지 않되 잘 분별함이 무심의 상태이다.

즉 마음이 일어나지도 않고[無生心], 멸하지도 않는[無滅心]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중도정심(中道正心)이 무심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객관대상[境界]을 대하여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생하지 않음[不生] 이라고 하며,

생하지 않는 것을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고,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해탈이란 궁극적인 내적 자유와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선은 ‘일체 존재가 모두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고 가르친다.

모든 생명이 부처이며 모든 국토가 정토임을 설파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

따라서 ‘직심이 도량이며[直心是道場], 직심이 정토[直心是淨土]’라고 말한다.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이니 상호 존중할 수밖에 없으며, 일체 사물과 국토가 정토이니 아끼고 가꾸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현대인은 마음 밖의 대상을 소유함으로 행복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다른 인간과 사물(자연)에 대한 참된 이해와 관계가 상실되었다. ()을 통하여

‘인간이 바로 부처’라는 주체적 삶을 회복하고, ‘모든 사람이 불성의 존재’라고 하는 인간 신뢰와 존중을 확립하며,

‘우주(자연)와 인간이 하나’라는 생명 공 동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선은 항상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질, 사람과 우주 사이에 항상 깨어있고 열려있는 사람이 바로 선을 닦는 사람[禪師]이다.

 

 

 

 

 

 

 

 

 

 

 

 

 

 

 

 

제이제이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jj-maumdaro/76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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