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알려진 인도의 대표적 위인으로 간디, 네루, 타고르 등을 꼽을 수 있다.
헌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상위 카스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간디는 바이샤, 네루와 타고르는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이었다.
인도의 카스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최상위 계층인 성직자 브라만, 귀족 크샤트리아, 상인인 바이샤, 평민인 수드라.
힌두교의 경전인 <리그 베다>에 따르면 브라만은 창조주인 브라마의 입에서, 크샤트리아는 브라마의 팔에서, 바이샤는 넙적다리에서, 수드라는 그의 발에서 나왔다고 한다. 카스트 제도는 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카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불가촉 천민(Untouching Caste)이다.
'이티 수드라(수드라 밑의 인간들)' 또는 '달리트(Dalit)' 라고 불리는 이들을 보거나 만지는 것은 부정읕 탄다고 해서, 사람들은 멀리 했다.
불가촉 천민이 우물물을 마셨다하면, 그 우물을 즉각 메워버리는 정도였으니 불가촉 천민은 인간이 아닌게다.
이러한 불가촉 천민으로서, 인도의 법무부 장관에 올라 헌법을 제정하고, 불가촉 천민의 해방을 위해 힘쓴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암베드카르(B. R. Ambedkar) 박사이다.
(1) 암베드카르의 성장기
암베드카르는 1891년 4월 14일 인도 중부의 마드야 프라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종족은 마하르 족인데, 종족 전체가 불가촉 천민이다.
마라티 민족의 일파로서 지금의 뭄바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마하르 족이라 하며, 뭄바이가 있는 주 이름이 마하라시트라이다.
아마도 아리안 족의 인도 정벌 당시 원주민으로서 불가촉 천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짐작된다.
마하르 족은 용병으로 생활하였는데,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영국 식민지 군대의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학교에서 불가촉 천민은 왕따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를 놀아주지도, 끼워주지도 않았다. 수레차를 타고 학교를 가는데, 불가촉 천민이라 수레에서 내릴 것을 강요받고, 아예 수레를 대신 몰고 간 적도 있었다.
이러한 수모를 겪은 암베드카르는 공부로서 그들을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공부에 매진했다. 그의 아버지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도와줬다고 한다. 아마 집안의 희망인 아들에게 아낌없이 지원하고픈 마음이었으리라.
이리하여 1907년에 봄베이 대학에 합격한다. 그리고 1913년에는 주지사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딴다. 그리고 영국 런던 정경대학에 가서 경제학 석사 학위도 딴다.
인도 사회 최하층민 출신으로서 세계의 명문대학에서 세 개의 학위를 딴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2) 불가촉 천민을 위한 투쟁
초다르 저수지에서의 암베드카르
그가 박사가 되어도 불가촉 천민이라 멸시받는 것은 여전했다. 교수로 취직해도 다른 교수들이 그를 모두 피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직면하고 불가촉 천민을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1927년에 '초다르 저수지'를 불가촉 천민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자, 정통파 힌두교도들이 반대한다. 여기서 암베드카르의 투쟁은 시작되었다.
그는 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저수지 물을 떠마시는 의식을 한다. 그리고 힌두교의 경전인 '마누 법전'을 붙태워버린다.
불가촉 천민이 힌두교 경전을 읽으면 귓구멍에 쇳물을 붓는 형벌이 인도 전승에 있었다.
그러한 차별의 근거인 힌두교 경전을 불태움으로써 불가촉 천민이 힌두 전통에서 탈피해야함을 선언한다.
1935년에는 이렇게 선언한다.
"저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힌두교인으로 죽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3) 간디와의 갈등
이 당시 간디는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간디는 암베드카르보다 20년 이상 나이가 많았고, 그의 말과 행동은 영향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외국 유학과 변호사 경력 등 삶의 궤적은 비슷했다.
간디는 민족주의적이었고 힌두 전통을 존중했다. 그의 주된 적은 영국 식민당국이었다. 그리고 현대문명에 대한 간디의 관점은 "자연으로 돌아가라."였다.
간디는 불가촉 천민에 동정심을 나타냈지만, 힌두 전통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 사람은 누구나 조상 대대로 물려 오는 직업에 따라 밥벌이를 해야 한다. "
아예 그는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카스트 제도를 파괴하는 것이 인도 전통에 대한 훼손이라고 했다.
이에 반해 암베드카르는 영국 식민당국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의 인습이 개혁되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문명의 폐해는 인정하나, 현대문명의 혜택이 특권층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원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사회 조직을 갖출 것을 주장했다.
" 카스트 제도에 의해 형성된 상하 계층의 신분 구조는 한 사회가 공통의 이상과 공통의 비전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처음부터 말살시킨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중들의 마음이 방황하기 마련이며, 국가의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1932년에 영국 식민정부가 식민지 의회에 불가촉 천민 대표를 뽑을 수 있도록 독자적인 분리 선거권을 주려고 했다. 간디는 이것이 힌두교 전통을 흔들고 인도인들을 분열시킨다는 명목으로 단식을 한다.
이에 암베드카르와 의회 지도자들은 협상을 통해 독자적인 분리 선거는 하지 않되 일정 수의 대표를 불가촉 천민들에게 배정하기로 합의를 본다.
간디의 단식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우리가 간디를 평가할 때,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평가하지만, 간디는 힌두 우익의 뿌리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많다. 그는 불가촉 천민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을 정도였다. 간디는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되 불가촉 천민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자는 정도였고 너무 심한 경멸에 반대했을 뿐이다.
암베드카르는 개개인의 생활에서 선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던 간디와 달리, 투쟁을 통해 불가촉 천민의 권리와 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데 노력했다.
(4) 정치 활동
독립 노동당을 만들어 정치에 진출한 암베드카르는, 1942년 총독부 행정위원회 밑의 노동 문제 담당관이 되었다.
4년간 재임하면서 노사정 협의회, 노동 판무관 제도 신설, 직업소개소 설치, 최저임금 제도, 사회보험 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초대 법무장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된다.
인도의 헌법 초안에서, 인도의 전통적인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도록 명시해놓았다. 이로써 카스트는 인도에서 법적으로 없어졌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인도의 국장(국가상징)에 불교를 숭상했던 아소카 왕의 상징인 세 마리 사자를 채택하는데, 박사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1951년에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하지 않고 여성 평등을 골자로 한 '힌두 법전(사회법)'을 제정한다. 하지만 보수파 의원들의 반대로 발효되지 못했고, 암베드카르는 사임하기에 이른다.
바쁜 정치활동 와중에도 암베드카르 박사는 교육 진흥에도 힘쓴다. 1920년 당시 불가촉 천민으로서 대학 진학자는 암베드카르를 포함해 겨우 일곱 명뿐이었다. 불가촉 천민에게 있어 교육이 절실함을 느낀 암베드카르 박사는 배움을 성스러운 길로 여겼다.
1946년에 '싯다르타 대학'을 설립하고, 1951년에 '밀린드 마하 비디야라야 대학'을 창설하였다. 대학 설립의 목적은 불가촉 천민들이나 피압박 계층의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저는 힌두 사회의 최하층민 출신이기 때문에 교육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최하층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물들어 온 노예로서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 떨쳐버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조국에 대한 사명감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고등 교육입니다. 저는 오직 고등 교육만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라고 믿습니다."
- 1951.9.1 밀린드 대학 설립사에서
(5) 불교로의 개종
불교개종의식에 모인 사람들
암베드카르 박사는 1935년에 이미 힌두교를 포기한다. 그 뒤 신분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진리를 찾던 박사는, 불교를 접하게 된다.
불교는 4세기 쿠샨 왕조의 멸망 이후 인도 땅에서 폐허가 된 불교 유적과 극소수의 신도들만이 남아 명맥만 유지하던 상태였다.
그에게 불교를 일깨워준 사람은 놀랍게도 이탈리아 출신 승려 로카난타였다. 그의 권유에 따라 박사는 불교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다.
그는 <붓다와 다르마>, <붓다와 마르크스> 등의 불교 관련 저서를 펴내며, 불교가 진리임을 설파한다.
오랜 연구와 고민 끝에 박사는 불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게 된다. 1956년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불교로의 개종 의식을 거행한다.
"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환희와 만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치 지옥에서 풀려난 듯한 느낌입니다." - 개종의식 연설문에서
이 자리에는 무려 50만명의 군중이 참석했다. 50만명의 군중과 그 외 많은 사람들이 불교로의 개종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천년간 죽어있던 인도 불교의 맥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1951년 18만 명이었던 불교 인구가 3그의 개종이 있은 직후, 25만명으로 증가했고, 그의 고향 마하라시트라 주에서는 2500명이었던 불교도가 무려 280만명으로 불어나기에 이른다.
그의 불교 개종은 차별의 굴레를 만든 힌두교 전통과의 결별이었고, '모든 사람의 유익과 복지(바후자나 히타야)'를 목표로 삼았던 삶의 여정의 종착역이었다.
불교로의 개종이 있은지 두달 후인 1956년 12월 6일, 암베드카르는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6) 평가
암베드카르 박사는 비인격적인 수모와 차별을 감내하고 성공하였고, 그 성공을 개인의 성공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속해잇던 피압박 민중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라 하겠다.
나라면 그러한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나쁜 길로 빠졌을 것 같다. 설령 내가 그처럼 성공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낮은 출신을 비관하여 오히려 이를 감추려고 급급한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일부 불가촉천민 출신 엘리트들이 불가촉 천민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불가촉 천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위와 재능을 바쳤다.
또한 간디가 개인의 자각과 절제에 의한 도덕적 인간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암베드카르는 불가촉 천민의 지위 향상과 생활 개선을 위해, 이를 방해하는 인습과 외부환경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간디는 '위대한 영혼'으로, 암베드카르는 '위대한 발자취'라고 말하고 싶다.
암베드카르는 타고난 행동가였다.
" 압제자들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박탈당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굴의 투지로 끈질긴 투쟁을 벌여야만 그 권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암베드카르 주의'는 '용기의 대담성과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압제자에게 구걸하기보다는 당당하게 투쟁해 나가는 정신'을 뜻한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다른 인도 지도자들과 달리 파키스탄의 분할에 찬성했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분리도 인정했다.
미국을 경시하고 중국을 가까이했던 네루 수상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또한 중화학 공업의 진흥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조심스러운 결론이지만, '귀족적'이었고 '원칙적'이었던 네루보다는 '중도좌파'적이고 '실용적'인 암베드카르가 인도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인도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암베드카르 박사는 가식적이지 않았고, 의지도 강했고, 유연했다.
이러한 박사의 헌신과 덕목이 아직도 인도 민중의 추앙을 받게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과 운동장이 있으며, 그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될 정도이다.
암베드카르 박사. 그를 통해 차별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배울 수 있었다.
<참고문헌>
디완 찬드 야히르, <암베드카르>, 2005, 에피스테메
게일 움베트, <암베드카르 평전>, 2005, 필맥
레오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tiger7701/16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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