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고승 33인 법어집]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12. 탄허 스님 (2)

수선님 2019. 6. 16. 11:48

‘삶과/죽음’

 

 

이 세상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즉 생사문제야말로 그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풀어내야 할 중심문제이다. 인간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생사문제를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해결한다. 마음에 생사가 없다고. 부연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구멍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디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道通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 찾아보라. 마음이나 구멍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구멍이 없으므로 죽는 구멍도 없다. 그러니까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그렇지만 어린 중생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고 싶어 하지, 도인이나 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 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하고있으므로 굳이 때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뭇 중생들의 어리석은 견해일 따름이다.

 

 

도를 통한 사람은 몸뚱아리를 그림자로밖에 보지 않는다. 다시 말 하면 우리의 삶을 간밤에 꿈꾸고 다닌 것이나 같이 생각한다고 할까. 간밤 꿈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선 무언가 분명히 있 긴 있었으나 헛것이듯 그렇게 삶을 본다.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이 육신을 굳이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들면 향 한 대 피워 놓고 향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죽음)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에게는 나서 멸함이 있고 (生住異滅), 몸뚱이에는 나 고 죽음(生老病死)이 있으며, 일년에는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세계에는 일었다가 없어짐(成住壞空)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도인에겐 생사가 붙지 않는다. 혹자는 그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 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곁을 보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옷 벗는 것 보고 죽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옷’ 을 자기 ‘몸’ 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고 하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의 몸, 육신 밖의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이 끊어진 자리, 그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가 생기기 전의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란 뜻이다.

 

 

부처란 바로 이 ‘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의 한마 당 삶이 ‘꿈’ 이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덥고 춥고 괴 로운 경험을 꿈속에서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이 육신이 일점도 안 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 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백 년을 산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주체가 ‘나’ 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곧 ‘내’ 가 우주 를 만드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의 어리 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 줄 안다. 현실도 꿈인 줄 모르고. 다시 말하거 니와 성인이 도통 했다는 것은 이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 것을 말한다.

 

 

우리는 간밤 꿈만 꿈으로 보고 현실을 현실로 보니까 몇백 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며 아등바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눈엔 현실이 꿈, 즉 환상이므로 집착이 없다. 그러니까 천당 지옥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이 정도로 말해 놓고 나서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하고 찰나 로 보면 찰나일 수 있다고 말하면 좀 수긍이 될지 모르겠다. 요컨대 우주 창조주, 즉 하느님이라는 것은 우주 생기기 전의 면목을 타파한 것을 ‘하느님’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란 하늘 어느 한 구석 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는 어떤 실재 인물이 아니란 말도 이해가 될 것이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3천만, 5천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 잘못이 3천만 5천만 명에게 영향 이 미친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갖추며 살 일이다.

 

 

청년은 그런 자신을 길러야 한다.

1980.3.23.

윌정사 주지 재직시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Hqs/8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