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수선님 2019. 6. 30. 11:27

<청화(淸華)큰스님 친필 유고에서>


*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차음(此陰;이 망념(妄念)덩어리)이 멸(滅)하면 피음(彼陰)이 상속(相續)할 뿐이다.


* 우리가 나의 존재(存在)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삶의 그림자가 모여 있는 망념(妄念)덩어리다.


* 불꽃이 타면서 나오는 빛은 있지만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는 촛불은 존재(存在)하지 않듯이 업보(業報)는 있으나 업(業)을 지어 과보(果報)를 받는 나의 존재(存在)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아(無我)이고 우리 존재(存在)의 실상(實相) 즉(卽) 현재(現在)이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 있을 때 욕탐(欲貪)이 생(生)겨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의 세계(世界)가 벌어지는데 이것은 세속(世俗)의 법(法)이다.


* 우리 참 모습은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현재(現在)이다.


* 우리가 사는 삶의 세계(世界)는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緣起)한 법계(法界)이다.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는 시간(時間)도 없고 공간(空間)도 없고 존재(存在)도 없다. 나의 존재(存在)가 삼세(三世)라는 시간(時間)과 세계(世界)라는 공간(空間)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世界)는 항상 한 곳에 함께 나타난다. 내가 있는 곳에 나의 세계(世界)가 있고 내가 나타날 때 나의 세계(世界)가 나타난다. 이것이 연기(緣起)하는 법계(法界)의 모습이다. 이 때의 나는 존재(存在)하는 나가 아니라 행위(行爲)하는 나이다. 나의 세계(世界)는 내가 짓고 있는 업(業)의 과보(果報)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업보(業報)의 인과관계(因果關係)는 필연적(必然的)이며 무시간적(無時間的)이다. 업(業)을 짓는 나와 그 과보(果報)로서의 세계(世界)가 시간적(時間的)으로 분리(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기(緣起)한다. 우리 모두는 절대(絶對)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지닌 자유(自由)로운 존재(存在)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다. <390>


* 사랑하지 않는 자(者)는 신(神)을 모른다. 신(神)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요한”


* 현재(現在)를 자각(自覺)하면 욕탐(欲貪)이 곧 원(願)이 된다.


* 실로 새로 구(求)하고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으면 그대로 해탈(解脫)이요 자유(自由)이다. 이와 같이 자유(自由)는 경쟁(競爭)과 투쟁(鬪爭)을 통(通)해서 쟁취(爭取)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現在)의 자각(自覺)을 통(通)해서 발견(發見)된다.


* 이와 같은 절대자유(絶對自由)의 현재(現在)에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 죽음이란 허망(虛妄)한 자기존재(自己存在)를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게만 존재(存在)한다.


* 법계(法界)와 연기(緣起)하는 현재(現在)에게 죽음이란 인연(因緣)이 변(變)하는 하나의 사건(事件)일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행위(行爲) 가능성(可能性)을 추구(追求)하는 하나의 새로운 계기일 뿐이다.

작업(作業)자(者)는 없으나 업보(業報)는 있으므로 죽음을 통(通)해서 사라지는 것은 망념(妄念)에 의(依)해서 취착(取着)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일 뿐 법계(法界)와 함께 연기(緣起)하는 현재(現在)는 항상 법계(法界)와 함께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하나의 착각(錯覺)일 뿐 현재(現在)의 종점(終點)이 아니다.


* 원(願)을 축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괴로움이 있을 수 없다.


* 존재(存在)는 아무리 짧은 시간(時間)이라도 자유(自由)동일성(同一性)을 유지(維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自己) 동일성(同一性)(상일주재(常一主宰)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존재(存在)는 어디에도 없다. <391>
그것은 모든 존재(存在)는 주변(周邊)의 조건(條件)과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存在)의 동일성(同一性)은 외부(外部)의 사물(事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존재(存在)하고 있는 개념(槪念)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槪念)은 사실(事實)이 아니라 허위(虛僞)이므로 존재(存在)의 동일성(同一性)은 그 자체(自體)가 허위(虛僞)이다.


* 무위(無爲)는 허구적(虛構的)인 개념(槪念)이 사라진 상태(狀態)에서 인식(認識)되는 연기(緣起)하는 법(法)이다. 따라서 이 법(法)은 생주이멸(生住異滅)도 인식(認識)되지 않는다.


* 모든 법(法)은 언제나 조건(條件)만 갖추어지면 주변(周邊)의 조건(條件)과 함께 나타난다. 이렇게 연기(緣起)하는 법(法)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無爲)이며 연기법(緣起法)이다.


* 반야(般若)는 연기법(緣起法)을 바르게 아는 지혜(智慧)이다.


* 연기법(緣起法)은 모든 법(法)이 조건(條件)에 따라 나타난다는 법칙(法則)이다.


* 무위(無爲)의 세계(世界)는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충만(充滿)한 세계(世界)이다.


* 자기(自己)존재(存在)라 인식(認識)되는 존재(存在)를 개별(個別)의 존재(存在)로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원(願)하는 것을 소유(所有)하고자 한다. 이렇듯 존재(存在)하려는 것이 욕탐(欲貪)이다. 곧 욕탐(欲貪)은 식(識)으로 허망(虛妄)한 존재(存在)을 인식(認識)하기 때문에 생긴다. 존재(存在)는 본래(本來)허망(虛妄)한 것이기 때문에 소유(所有)할 수 없다. 중생의 모든 고뇌(苦惱)는 소유(所有)할 수 없는 것을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自己)의 존재(存在)를 영원(永遠)히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이 생(生)기고 원(願)하는 것을 영원히 소유(所有)하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투쟁(鬪爭)과 불만(不滿)이 사라지지 않는다. <392>


* 반야(般若)에 의(依)해서 인식(認識)되는 것은 법(法)이다.


* 존재(存在)의 허구성(虛構性)을 자각(自覺)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림으로써 모든 법(法)은 연기(緣起)하고 있음을 통찰(洞察)하는 것이 반야(般若)이다.


* 원(願)하는 법(法)은 그 법(法)이 나타날 수 있는 조건(條件)을 만들어야 한다.


* 소유(所有)하려 하지 않고 창조(創造)하려고 하는 것이 원(願)이다.


*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의 차이(差異)는 무명(無明)의 상태(狀態)에서 욕탐(欲貪)이라는 의지(意志)를 미래(未來)의 자기존재(自己存在)를지향(志向)하는 축으로 삼느냐 반야(般若)로 법(法)을 통찰(洞察)하면서 원(願)이라는 의지(意志)를 미래(未來)의 자기존재(自己存在)를 지향(志向)하는 축으로 삼느냐의 차이(差異)뿐이다.


* 행(行)에 의(依)해서 조작(造作)된 존재(存在)를 대상(對象)으로 인식(認識)하는 가운데 존재(存在)의 생멸(生滅)과 자신(自身)의 생사(生死)를 인식(認識)하는 것이 오취온(五取蘊)의 식(識)이고, 연기(緣起)하는 일체(一切)의 법(法)은 무아(無我)이고 공(空)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업보(業報)만 있을 뿐 작자(作者)는 없기 때문에 자신(自身)은 본래(本來) 생사(生死)에서 해탈(解脫)해 있음을 확실(確實)하게 인식(認識)하는 것이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 의(依)하면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은 함께 연기(緣起)하면서 공존(共存)하고 있다.


* 본다는 업(業)에 의해 그 과보(果報)로서 나타난 것이 눈(眼)과 색(色)이다.
<393>

* 중생(衆生)을 떠나 따로 부처나 보살(菩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중생(衆生)이라 불리고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이 중생(衆生)의 마음이며,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마음을 구(求)할 수 없으며 어리석은 마음이 지혜(智慧)가 되고 탐(貪)내는 마음이 원력(願力)이 되며 성내고 사나운 마음이 자비심(慈悲心)이 된다.


* 법계(法界)는 존재(存在)의 세계(世界)가 아니라 무아(無我)의 세계(世界)이며 업보(業報)의 세계(世界)이다. 우리 행위(行爲)는 개인적(個人的)인 행위(行爲)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법계(法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 하나의 돌이 호수(湖水)의 수면(水面)에 떨어지면 호수(湖水)의 모든 수면(水面)으로 물결이 퍼져나가듯 우리가 짓는 업(業)은 온 법계(法 界)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變化)시킨다.
법계(法界)는 우리의 업(業)을 인연(因緣)으로 하여 연기(緣起)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삶은 법계(法界)를 인연(因緣)으로 하여 연기(緣起)한다.


* 우리 업(業)은 법계(法界)를 변화(變化)시키고 법계(法界)가 변(變)하면 그에 따라 우리도 변화(變化)한다. 이와 같이 법계(法界)와 우리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업(業)이 인연(因緣)이 되어 법계(法界)라는 보(報)가 나타나고 법계(法界)가 인(因)이 되어 그 보(報)로써 우리의 업(業)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법계(法界)가 무아(無我)의 세계(世界), 업보(業報)만 있고 작자(作者)는 없는 무아(無我)의 세계가 바로 공(空)의 세계(世界)이다. 공(空)의 세계(世界)에는 존재(存在)는 없고 행위(行爲)만 있다.

* 공(空)의 세계(世界)에서 행위(行爲)는 무한(無限)한 선택(選擇)의 가능성(可能性)과 무제약적(無制約的)인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依)하여 이루어진다. <394>


* 업보(業報)의 인과율(因果律)에 의해 확정(確定)되어 있는 행위(行爲)의 결과(結果)를 지혜(智慧)로 통찰(洞察)하여 원(願)하는 결과(結果)에 상응(相應)하는 행위(行爲)를 자유(自由)롭게 선택(選擇)함으로써 원(願)하는 결과(結果)를 성취(成就)할 수 있는 곳이 공(空)의 세계(世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世界)의 진실(眞實)된 모습이 이러한 공(空)의 세계(世界)이다.


* 허위(虛僞)의 세계(世界)인 존재(存在)의 세계(世界)에서 “행위(行爲)하는 자아(自我)”는 “존재(存在)하는 자아(自我)”로 전락(轉落)한다. 이래서 우리는 자유(自由)를 상실(喪失)한다. 존재(存在)의 세계(世界)에서는 자유(自由)가 상실(喪失)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行爲)가 괴로움으로 귀착(歸着)된다.


* 가치(價値)는 행위(行爲)에 있는 것이요 존재(存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幸福)은 존재(存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소유(所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存在)는 본래(本來) 우리의 소유(所有)가 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진정(眞正)한 소유(所有)는 우리의 업(業)이다.


* 무아(無我)는 존재(存在)하는 자아(自我)를 부정(否定)하는 말임과 동시(同時)에 행위(行爲)하는 자아(自我)를 긍정(肯定)하는 말이다.


* 가치(價値)는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를 통(通)해서 창조(創造)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自身)의 노력(努力)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 수 있으며 많은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 수록 나와 남이 모두 행복(幸福)해진다.
공(空)의 세계(世界)에서는 이렇게 자리(自利)와 타리(他利)가 대립(對立)하지 않고 자신(自身)의 이익(利益)이 곧 남의 이익(利益)이 된다. 이것이 보살행(菩薩行)이며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된다.
<395>

* 실(實)로 세계(世界)의 모든 것은 공(空)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自由)롭게 가치(價値)를 창조(創造)할 수가 있다.


* 불교(佛敎)의 무아(無我) 설(說)이 단순(單純)히 자아(自我)의 부정(否定)을 의미(意味)한다면 불교(佛敎)는 단견(斷見)이 되고 한편 불교(佛敎)의 업설(業說)이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자아(自我)를 중심(中心)으로 이루어진 이론(理論)이라면 불교(佛敎)는 상견(常見)이 된다.
그러나 불교(佛敎)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다 같이 부정(否定)하는 중도(中道)이다. 불교(佛敎)의 근본(根本)입장(立場)이 중도(中道)요 작자(作者)는 부정(否定)하나 업보(業報)는 긍정(肯定)하는 연기법(緣起法)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은 시공(時空)속에 존재(存在)하는 자아(自我)를 전제(前提)로 하기 때문에 나타난 견해(見解)이다. 모든 존재(存在)는 무명(無明)에서 비롯한 허위(虛僞)이다.


* 존재(存在)는 연기(緣起)하는 법(法)을 욕탐(欲貪)으로 구성(構成)한 허구(虛構)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단견(斷見) 상견(常見)에 떨어져서 무아사상(無我思想) 업보사상(業報思想)을 모순(矛盾)된 사상(思想)이라고 생각한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업보(業報)는 모순(矛盾)된 개념(槪念)이 아니라 무아(無我)가 곧 업보(業報)이다. 그리고 무아(無我)의 실천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다.


*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선업(善業)과 수행(修行)을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다. 선업(善業)이 자기존재(自己存在)를 위(爲)한 것이라면 천상(天上)에 가는 업(業)이 되나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한 것이 될 경우에는 그대로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修行)이 된다.
보시(布施)가 무아(無我)의 자각(自覺)에서 실천(實踐)될 때는 보살(菩薩)의 수행(修行)이 된다. <396>


* 존재(存在)의 세계(世界)에서 살아가는 중생(衆生)들에게는 삶은 필연적(必然的)으로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을 일으키게 된다.


* 우리는 독자적(獨自的)으로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연(因緣)에 의하여 살고 있다. 우리가 개체적(個體的)인 자아(自我)에 의한 집착(執着)만 버리면 우리의 세계(世界)는 인연(因緣)으로 연결(連結)된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다가오며 개별적(個別的) 존재(存在)로 인식(認識)될 때 생기는 모든 모순(矛盾)과 갈등(葛藤)은 헛된 망상(妄想)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 주는 자(者)도 없고 받는 자(者)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物件)도 없어야 진정(眞正)한 보시(布施)이다. 하나의 생명(生命)속에는 나와 남이 없기 때문이다. 보시(布施)를 통(通)해서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가게 되며 하나의 생명(生命)으로 돌아 갈 때 우리는 너와 나가 함께 생존(生存)의 괴로움과 생존(生存)의 투쟁(鬪爭)에서 벗어나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성취(成就)할 수가 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삶의 본질(本質)을 회복(回復)하여 자타(自他)가 일시(一時)에 성불(成佛)하는 삶을 바라밀(波羅蜜)이라 한다.


* 우리는 모두 인연(因緣)의 끈으로 연결(連結)되어 함께 연기(緣起)하고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事實)을 알아야 한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서 본다면 살생(殺生)은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 되고 거짓말은 자기(自己)를 속이는 것이 된다.


* 계율(戒律)은 한 생명(生命) 한 존재(存在)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方式)이다. 계율(戒律)은 모든 생명(生命)이 화합(和合)하여 공존(共存)하는 원리(原理)이다. <397>


* 모든 생명(生命)을 한 생명(生命)으로 보고 살아간다면 죽이는 자(者)도 죽는 자(者)도 없게 된다. 보살행(菩薩行)은 모든 생명(生命)을 나의 생명(生命)과 한 생명(生命)으로 보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나와 남을 분별(分別)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계율(戒律)도 지킬 수 없다. 나와 남을 분별(分別)하지 않고 한 몸 한 생명(生命)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모든 삶이 곧 지계(持戒)의 삶이 된다.


* 지계(持戒)의 바라밀(波羅蜜)은 자타(自他)을 분별(分別)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삶을 의미(意味)하며 모두가 함께 평화(平和)롭게 공존(共存)하는 평화(平和)의 원리(原理)이다.


* 불교(佛敎)의 업설(業說)은 물질적(物質的)인 인과구조(因果構造)가 아니라 생명의 인과구조(因果構造)이다. 인과(因果)는 우리의 의도(意圖)에 의해 다양(多樣)한 가능성(可能性)을 갖는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環境)이 아니라 업(業)이다. 사람은 자신(自身)의 생각과 행위(行爲)에 의(依)해서 곧 자신(自身)이 짓는 업(業)에 의해서 자신(自身)의 모습을 결정한다.


* 인욕(忍辱)은 우리에게 어떤 환경(環境)이 주어질 지라도 악업(惡業)을 짓지 않고 선업(善業)을 짓는 행위(行爲)을 의미(意味)한다. 화가 나면 바른 선택(選擇)을 할 수 없다.

* 업(業)은 원한과 미움 속에서는 무서운 과보(果報)로 자라고 인욕(忍辱)과 자비(慈悲)속에서는 아름다운 과보(果報)로 자란다.


* 인욕(忍辱)은 업보(業報)의 법칙(法則) 아래서 악연(惡緣)을 좋은 선연(善緣)으로 전환(轉換)하는 계기(契機)가 된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무아(無我)와 업보(業報)의 사상(思想)을 토대(土臺)로 하는 자비(慈悲)의 구체적(具體的)실천(實踐)이다. <398>



* 부처님은 진리(眞理)를 찾기 위해서 수행(修行)했으나 우리는 드러난 진리(眞理)를 체험(體驗)하기 위해서 수행(修行)한다.


*.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가 없다는 공(空)한 입장(立場)에서 보면 우리의 모든 행위(行爲)는 그 목적(目的)이 자기(自己)자신(自身)의 존재(存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그 자체(自體)와 그것이 가져다줄 결과(結果)에 있다.


* 진정(眞正)한 보살(菩薩)은 거짓된 자아(自我)의 부정(否定)을 통(通)해서 허무(虛無)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眞正)한 자아(自我)인 무아(無我)를 실현(實現)한다.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나 공(空)이 추상화(抽象化)되고 신비화(神秘化)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적(日常的) 삶이나 수행(修行)의 영역(領域)으로 이해(理解)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오온(五蘊)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임을 깨달아 오온(五蘊)에 대하여 욕탐(欲貪)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오온(五蘊)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 원리(原理)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이나 실천(實踐)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업(業)의 결과(結果)로 나타난다.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이 아니라 실천(實踐)의 이념(理念)이다.


* 연기법(緣起法)의 진리(眞理)에서 보면 인(因)과 과(果)가 분리(分離)되어 있지 않다.
<399>
* 성불(成佛)은 수행(修行)의 종점(終點)이 아니라 수행(修行)의 완성(完成)이며 이것이 무소득(無所得)이다.


* 본래(本來) 무아(無我)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존재(自己存在)라는 허망(虛妄)한 생각에 집착(執着)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생사(生死)이다. 오온(五蘊)이 무상(無常)임을 알아 무아(無我)로 살아간다면 그대로
열반(涅槃)을 얻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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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18;20”


* 명상(瞑想)이나 수련(修練)은 도피(逃避)가 아니라 사회(社會)속에 들어가 행동(行動)하는 에너지를 축적(蓄積)하고 보급(普及)하는 것이다.


* 불교인(佛敎人)과 그리도 인들 사이에 생긴 경계선들의 대부분(大部分)은 인위적(人爲的)인 것들이다. 진리(眞理)에는 경계(境界)가 없다. 이 두 종교(宗敎)들이 다른 것은 결국(結局)대부분 강조점(强調點)의 차이(差異)일 뿐이다.


* 원자물리학자(原子物理學者)들도 원소이하(原素以下)의 세계(世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물(事物)이나 물체(物體)에 대한 그 들의 개념(槪念)들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프랑스의 물리학자(物理學者) 카슬러(Alfred Kastler)는 “우리가 언제나 자연(自然)의 구성요소(構成要素)라고 생각(生覺)해 오던 물체(物體)나 사물(事物)들을 방기(放棄)해야 한다.”고 했다.


* 아무도 외딴 섬일 수 없다. 모두가 다른 것들과 얽히고설켜서 서로 관계를 지으며 어울려 있으며 이것이 무아(無我)이다.
<400>

* 의식(意識)의 변화(變化)를 통(通)해서 새로운 눈으로 세상(世上)을 보게 되는 깨침의 경험(經驗)이야말로 불교(佛敎)의 알파요 오메가요 진수(眞髓)이다. 핵심(核心)이며 존재이유(存在理由)인 것이다. 불교(佛敎)에 이것을 빼면 빛과 열(熱)이 없는 태양(太陽)과 같다.


* “한스큉”은 세계적(世界的)인 윤리(倫理) 없이는 인류(人類)의 생존(生存)이 불가능(不可能)하다. 종교(宗敎)들 간(間)의 평화(平和)없이는 세계평화(世界平和)가 불가능(不可能)하고 종교(宗敎)들 간(間)의 대화(對話)없이는 종교(宗敎)들 간(間)의 평화(平和)가 불가능(不可能)하다고 하였다.


* 만약(萬若) 서양(西洋)이 동양(東洋)의 정신유산(精神遺産)을 과소평가(過小評價)하거나 등한시(等閑視)하기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인류(人類)와 인류문화(人類文化)를 위협(危脅)하는 비극(悲劇)을 촉진(促進)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20세기(世紀) 가장 위대한 미국(美國)의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성서(聖書)의 하느님은 아버지․아들․성령(聖靈)이라는 세 가지의 위격(位格)과 하나의 실체(實體)에 있어서 존재(存在)한다는 것이 삼위일체(三位一體)인데, 그 제2 위격(位格)인 아들이 나시렛 예수라는 역사적(歷史的) 인간성(人間性)을 취(取)했다고 하는 교리(敎理)를 말함. 화신(化身), 신자성육(神子成肉), 수육(受肉)
<401>

* 중도(中道)라는 입장(立場)은 존재(存在)라는 개념(槪念)이 망념(妄念)에 의(依)해 허구적(虛構的)으로 구성(構成)된 관념(觀念)이라고 보는 입장(立場)이다.


* 종교(宗敎)는 한 시대(時代) 앞을 내다보고는 지혜(智慧)를 가지고 오늘의 현실문제(現實問題)를 진단(診斷)하고 방향감각(方向感覺)을 심어야한다.


* 차라리 선교(宣敎)를 포기할지언정 비방은 하지 않겠다.


* 위대(偉大)한 종교(宗敎)의 기준(基準)은
1) 어느 종교가 더 깊은 실재적(實在的)인 체험(體驗)으로 우리를 인도(引導)하는가.
2) 어느 종교(宗敎)가 사람사이에서 더 사랑과 자비(慈悲)를 실천하는가가 되어야한다.

* 사랑은 섬김이며 섬김이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信仰人)은 섬김의 역사(歷史)에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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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불(成佛)에 있어서 가장 방해되는 요소(要素)는 바로 오온(五蘊)을 나라고 여기는 관념(觀念)이다. “불타(佛陀)”


* 종교학(宗敎學)은 해석학(解釋學)을 통(通)해 인간(人間)이 지닌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총체적(總體的) 이해(理解)를 시도(施圖)해야 한다.


* 성주괴공(成住壞空)에 대(對)하여 세존(世尊) 왈(曰) “누가 감(敢)히 믿을 수 있으랴. 그것을 보는 자(者)만이 믿을 수 있을 뿐이다.”


* 아(我)가 개입(介入)되어 조작(造作) 되는 일체(一切)현상(現象)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은 모두 유위(有爲)로서 이 유위(有爲)는 큰 괴로움이며, 가시이며, 종기이다.


* 인상(人相)이란 오온(五蘊)의 화합(和合)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지옥취(地獄趣)나 축생(畜生)과는 전혀 다른 존재(存在)라고 집착(執着)하는 견해(見解)을 말한다.


* 중생상(衆生相)이란 ‘나’를 오온(五蘊)의 화합(和合)으로 말미암아 생긴 중생(衆生)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견해(見解).


* 인묵(忍黙:인욕과 침묵)을 닦아 원한(怨恨)을 품지 않음이 참다운 승리(勝利)이며, 능(能)히 삼유(三有)를 끊는다는 것은 ‘성냄’을 끊었다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과 탐욕(貪欲)을 끊었다는 증거(證據)이기 때문이다.


* 마음에 어리석음과 탐욕과 성냄이 있는 한(限) 싸움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 광명변조(光明遍照) : 무량수불유(無量壽佛有) 팔만사천상(八萬四千相), 일일상각유(一一相各有) 팔만사천수형호(八萬四千隨形好) 일일호부유(一一好復有) 팔만사천광명(八万四千光明) 일일광명변조(一一光明遍照) 시방세계염불중생(十方世界念佛衆生) 섭취불사(攝取不捨) 기광명상호(其光明相好) 급여화불(及與化佛) 불가구설(不可具說) 단당억상(但當憶想) 영심안견(令心眼見)
<아미타불에게는 팔만 사천 가지의 상(相)이 있고, 그 하나하나의 상에는 각각 팔만 사천의 수형호(隨形好)가 있으며, 그 낱낱 수형호마다 또한 팔만 사천의 광명이 있느니라. 그리고 그 광명은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중생들을 받아드려 그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느니라. 그런데 이러한 모든 광명과 상호와 화신불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깊이깊이 생각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도록 하여라. 주 : 청화큰스님 한글번역 「정토삼부경」 가운데 「관무량수경」의 제9관 진신관(眞身觀) 참조>


* 중생(衆生)들의 세계(世界)는 무명(無明)의 상태(狀態)에서 12처(十二處)를 욕탐(欲貪)으로 취착(取著)하여 계도(計度)한 존재화(存在化)된 세계(世界)이다. 존재화(存在化)된 세계(世界)에서는 존재(存在)의 유(有)와 무(無), 생성(生成)과 소멸(消滅)이 인식(認識) 되며 인간(人間)도 하나의 존재(存在)로서 생사(生死)하는 모습으로 인식(認識)된다.
따라서 이세계는 온통 괴로움의 덩어리<순대고총(純大苦冢)>인 것이며, 이것의 실상(實相)을 보여 주는 것이 무명(無明)에서 시작되는 12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그리고 이 같이 괴로운 세계(世界)의 근원(根源)은 무명(無明)이고 그 세계를 집기(集起)하는 원동력(原動力)은 욕탐(欲貪)이라는 사실<고집성제(苦集聖諦)>를 여실(如實)하게 알아서 무명(無明)과 욕탐(欲貪)이 멸진(滅盡)하여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세계(世界), 주체로서의 자아(自我)가 구체적인 삶을 영위(營爲)하는 진아(眞我)의 세계(世界)<고멸성제(苦滅聖諦)>로 복귀해야 하며 그 길이 팔정도(八正道)<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라는 것이 사성제(四聖諦)이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불타(佛陀)에 있어서 세계(世界)는 곧 나의 마음인 것이며, 여기에는 자타(自他), 주객(主客), 물심(物心), 내외(內外), 시공(時空), 유무(有無), 생멸(生滅) 등의 모순(矛盾)과 분별(分別)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衆生)들은 무명(無明)과 욕탐(欲貪)에 의해서 이 같은 분별상(分別相)을 일으킬 뿐이므로 세계(世界)가 마음에서 연기(緣起)한다는 진리(眞理)를 알아, 망념(妄念)으로 취착(取著)하고 계도(計度)한 허망한 대상(對象)세계(世界)를 분별(分別)애락(愛樂)하여 염착(染着)하지 않으면 모든 모순(矛盾)과 분별(分別)이 사라진 열반(涅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불타(佛陀)의 세계관(世界觀)이다.


* 중도(中道)는 유(有)와 무(無)의 추상(抽象)된 개념(槪念)이 허구(虛構)임을 자각(自覺)한 입장(立場)이다.


* 오온(五蘊)이란 마음이 구성(構成)한 허구적(虛構的) 관념(觀念)이다.


* 중생(衆生)들이 존재(存在)라고 믿는 것은 경험(經驗) 덩어리에 지나지 않다.


* 객관적(客觀的) 대상(對象)은 체험(體驗)된 내용(內容)을 의식(意識)이 통일적(統一的)으로 구성(構成)하여 객관화(客觀化)한 것이다.


* 오온(五蘊)은 공간(空間)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存在)가 아니라 과거(過去)의 경험(經驗)을 토대(土臺)로 미래(未來)의 자신(自身)을 구성(構成)해 가는 의식(意識)활동(活動)이다.
다시 말해서 오온(五蘊)은 연기법(緣起法)에 무지(無知)한 상태(狀態)에서 존재(存在)로 인식(認識)되는 것이다.


*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存在)는 모두 기억속의 의식이 집기(集起)한 것이며 이것이 오온(五蘊)이다.


* 12처(十二處)는 욕탐(欲貪)으로 법계(法界)에 참여하는 참여방식(參與方式)이다. <아래 참조(參照)>


* 중생(衆生)들의 세계(世界)는 중생(衆生)들이 법계(法界)에 참여하는 가운데, 즉 법(法)을 인식(認識)과 행위(行爲)의 대상(對象)으로 하는 가운데, 인식(認識)된 내용(內容)을 그것이 연기(緣起)한 인식현상(認識現象)임을 알지 못하고 탐욕(貪欲)으로 취착(取著)하여 존재(存在)로 인식(認識)하면서 살아가는 세계(世界)이다.
따라서 갈애(渴愛)에 의(依)해 취착(取著)된 세계(世界)라고 할 수 있다.


* 12처(十二處)는 욕탐(欲貪)으로 법계(法界)에 참여하는 참여방식(參與方式)이다. 이 같은 참여방식(參與方式)이 행(行)이다. 행(行)은 욕탐(欲貪)에 상응(相應)하는 인식현상(認識現象)을 대상화(對象化)하여 존재(存在)로 조작(造作)하려는 의지(意志)이며 이것이 중생(衆生)의 삶의 방식(方式)이다.


* 오온(五蘊)을 자아(自我)로 생각하는 삶은 상주(常住)하고자 하는 자신(自身)의 욕구(欲求)와 연기(緣起)하는 법(法)으로서의 무상(無常)한 오온(五蘊)사이에 생기는 끊임없는 갈등(葛藤)과 고뇌(苦惱)의 연속(連續)이다.


* 범부(凡夫)는 무명(無明)에 가리 우고 애욕(愛欲)에 묶이어 이 같이 분별(分別)하나니 자신(自身)의 내부(內部)에 이 식(識)이 있고 외부(外部)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한다. 이 두 인연(因緣)으로 촉(觸)이 생기 나니라. “불타”


* 우리가 윤회(輪廻)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意識)<인식(認識)>이 무상(無常)한 인식(認識)인줄 모르고 이것이 욕탐(欲貪)을 일으켜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으로 존재화(存在化) 시키기 때문이다.
허구(虛構)의 세계(世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것이 허구임을 자각(自覺)해야 한다.


* 정견(正見)이란 연기법(緣起法)이 진리(眞理)임을 아는 것이다. 불타(佛陀)의 가르침을 통(通)해서 연기법(緣起法)이 진리(眞理)라고 믿고 팔정도(八正道)를 수행(修行)하면 마침내 불타(佛陀)와 동일(同一)한 선정(禪定)을 통(通)해서 동일(同一)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 인식론적(認識論的) 체계(體系)에서 구차제정(九次第定)을 통해 진리(眞理)에 대한 보편타당(普遍妥當)한 인식(認識)이 가능(可能)함을 살펴보고, 존재론적(存在論的) 체계(體系)에서는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이 마음에서 연기(緣起)한 것임을 살펴봐야 한다.


* 불타(佛陀)의 중도(中道)는 진정(眞正)한 행복(幸福)과 진리(眞理)의 성취(成就)에 그 목적(目的)이 있다. 즉(卽) 지혜(智慧)롭고 행복(幸福)한 삶을 말한다.


* 자아(自我)를 물질(物質)의 우연(偶然)한 결합(結合)으로 설명(說明)한 유물론자(唯物論者)들은 도덕부정론(道德否定論)에 귀착(歸着)할 수 밖에 없다.


* 윤회(輪廻)의 주체(主體)는 진아(眞我)가 아니라 중생(衆生)들이 무명(無明)과 욕탐(欲貪)으로 취착(取著)한 거짓된 자아(自我)이다.


* 자아(自我)는 실증(實證)하는 주체(主體)이지 실증(實證)되는 대상(對象)이 아니다. 결코 대상화(對象化)할 수 없는 자아(自我)를 실증(實證)하려는 태도(態度)는 자아(自我)를 대상화(對象化)된 존재(存在)로 착각(錯覺)한데 기인한 것이다.


* 불타(佛陀)의 모든 가르침은 괴로운 세간(世間)과 그 세간(世間)이 전개(展開)되는 구조적(構造的) 실상(實相), 즉 세계(世界)의 진리(眞理)와, 이에 근거(根據)하여 우리가 성취(成就)할 수 있는 최고(最高)의 가치(價値)의 세계(世界)와 그 가치(價値)실현(實現)의 구체적(具體的)인 방법(方法) 즉(卽)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진리(眞理)를 현시(顯示)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제(聖諦)이다.


* 세간(世間)의 구조적(構造的) 실상(實相)을 종합적(綜合的) 체계적(體系的)으로 설(說)한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유전문(流轉門)이며 이를 토대(土臺)로 세간(世間)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提示)한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의 환멸문(還滅門)이다.


* 중생(衆生)들은 오온(五蘊) 가운데 희락(喜樂)과 갈애(渴愛)의 대상(對象)이 되는 것은 욕탐(欲貪)으로 취착(取著)하여 자아(自我)로 계도(計度)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衆生)으로서의 인간(人間)존재(存在)이다. 그것은 곧 오취온(五取蘊)이다.


* 인간(人間)의 사유(思惟)는 항상 욕(欲)에 기초(基礎)해서 이루어지며 그 결과(結果) 관념(觀念)을 구성(構成)하고, 구성(構成)된 관념(觀念)으로 대상(對象)을 분별(分別)하여 인식(認識)하는 것이다.


* 자아(自我) : 법계(法界)에서 보고, 느끼고, 사유(思惟)하고, 행동(行動)하고, 인식(認識)하는 가운데 연기(緣起)한 법(法)을 자아(自我)로 취착(取著)하여 개념(槪念)으로 대상화(對象化)한 것이 자아(自我)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는 존재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취온(五取蘊)인 것이다.


*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


* 오취온(五取蘊)은 본질적(本質的)으로 무상(無常)한 것임과 동시(同時)에 욕(欲)에 의해 존재(存在)로 계도(計度)된 자아(自我)인 것이다. 따라서 오취온(五取蘊)은 그 자체(自體) 속에 본질적(本質的)인 무상(無常)함과 욕(欲)에 의해서 구성(構成)된 자아(自我)가 대립(對立)하고 있다.


*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고(苦)이며 고의(苦義) 고미(苦味)이며 순일(純一)하게 청정(淸淨)함으로 충만하고 청백(淸白)한 범행(梵行)이니 소위(所謂)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니라. “세존(世尊)”


*공(空)의 세계(世界)에서는 과거(過去)의 나도 미래(未來)의 나도 현재(現在)의 나도 없다. 오직 업보(業報)<행위(行爲)와 그 결과(結果)>로 현재(現在)할 뿐이다.
이것이 공(空)의 의미(意味)이고 무아(無我)의 의미(意味)이다. 따라서 불타(佛陀)의 업설(業說)은 공(空)과 무아(無我)의 실상(實相)을 보여 주는 불교(佛敎)의 핵심(核心)이며 불교의 진수(眞髓)이다.


* 우리가 자아(自我)라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存在)도 사실은 존재(存在)가 아니라 법계(法界)에서 연기(緣起)하고 있는 행위(行爲)인 것이다.


* 명사(名詞)를 개념(槪念)이라 부른다. 따라서 존재화(存在化)란 개념화(槪念化)라고 할 수 있다.


* 오온(五蘊)이 개념형성(槪念形成)의 구조(構造)를 갖는다고 할 때, 결국 유위(有爲)란 개념(槪念)이라고 할 수 있다.


* 연기(緣起)하는 세계(世界)는 시간(적時間的)으로나 공간적(空間的)으로 분화(分化)될 수 가 없다.


* 유위법(有爲法)은 실상(實相)을 여실(如實)하게 이해(理解)하지 못한 중생(衆生)들이 욕탐(欲貪)으로 분별(分別)하여 존재화(存在化)시킨 것이다.


* 진리(眞理)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변치 않는다. 다만 진리(眞理)를 알면 진리(眞理)에 따라 살고 모르면 어긋나게 살 뿐이다.


* 존재(存在)는 무지(無知)한 무명(無明)에서 허구적(虛構的)으로 조작(造作)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명(無明)의 상태(狀態)에서 허구적(虛構的)으로 조작(造作)된 존재(存在)가 유위(有爲)이며, 유위(有爲)를 조작(造作)하는 행위(行爲)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행(行)이다.


* 아무리 그럴듯한 생각일 지라도 그것이 바로 진리(眞理)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불타(佛陀)의 생각이다. 불타(佛陀)에게 있어 진리(眞理)는 실천적(實踐的) 체험(體驗)으로 입증(立證)될 때 비로소 진정(眞正)한 진리(眞理)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無明)의 자각(自覺)은 그것이 진리(眞理)의 승인(承認)은 될지언정 진리(眞理)의 성취(成就), 바꿔서 말하면 무명(無明) 멸진(滅盡)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무명(無明)의 자각(自覺)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진리(眞理)가 아니라 진리를 발견(發見)할 수 있는 토대(土臺)인 것이다.


* 경험(經驗)을 토대(土臺)로 하는 귀납법(歸納法)이나 사변(思辨)에 의존(依存)하는 연역법(演繹法)이나 부정(否定)을 통(通)해서 모순(矛盾)을 통일(統一)하려는 변증법(辨證法) 등은 외도(外道)들이 의지(依支)하고 있는 논리(論理)로서 세존(世尊)은 이들을 기피(忌避)하고 있다.
불타(佛陀)가 제시(提示)한 진리(眞理)의 시금석(試金石)은 실천(實踐)을 통(通)한 체험(體驗)이다. 체험(體驗)만이 명증적(明證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佛陀)는 논리적(論理的) 사유(思惟)를 부정(否定)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논리적(論理的) 사유(思惟)를 불가결(不可缺)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천(實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리적(合理的)이고 의미(意味)있는 것인가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해서 스스로 승인(承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論理的)사유(思惟)는 실천(實踐)을 위한 조건(條件)으로 인식(認識)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타(佛陀)는 진리(眞理)에 대(對)한 인식(認識)이 바로 진리(眞理)의 성취(成就)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타(佛陀)에게 있어 진리는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이 아니라 실천(實踐)의 대상(對象)이며, 실천(實踐)해야 할 최고(最高) 가치(價値)인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眞理)는 어떠한 내용(內容)이기에 실천(實踐)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을 우리에게 부여한 것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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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선원 카페 http://cafe.daum.net/mujuseonwon/CiN8/4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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