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1.초기·부파불교에 나타난 염불과 선

수선님 2019. 7. 14. 11:18

제1주제

초기·부파불교에 나타난 염불과 선

조준호(한국외대)

Ⅰ. 들어가는 말

Ⅱ. 초기경전에 나타난 염불과 선정

1. 염불(念佛 : Buddha-anussati)의 어원

2. 불교사에서 염불의 이해

Ⅲ. 초기경전에 나타난 선과 염불

1. 염불선의 목적

2. 붓다 수념의 내용과 선정 차제(次第)

3. 붓다 수념의 기본 행법과 수념의 주제

4. 붓다 수념의 수행공덕

Ⅳ. 부파불교 전적에 나타난 선과 염불

Ⅴ.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동아시아 불교에서 염불과 선의 관계는 병립적이고 양립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때문에 염불과 선의 겸수나 일치론이 주장되었고 또한 이러한 시도를 타락이나 발전으로 보기도 했다. 더 나아가 아직까지 염불선(念佛禪)에 대한 규정이 없다고 하거나 또는 염불을 받아들여 선의 입장에서 이해한 것이 염불선이라는 이해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염불은 단지 귀의의 의례법이나 창명의례(唱名儀禮) 정도로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교리사나 수행사에 있어 처음부터 염불을 받아들여 선의 입장에서 이해한 것이 염불선인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본고는 이렇게 선과 염불을 양립의 관계로 보려는 이해가 과연 초기불교경전과 초기불교경전을 바탕한 부파불교에서도 그러한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본고는 염불의 원어가 선정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출발하고 전개되는지를 초기불교경전과 부파불교의 전적을 통해 살펴본다. 결론은 초기불교나 이후의 부파불교에서 염불과 선정은 별개의 행법으로 출발하거나 전개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초기불교나 부파불교는 선정 속에 염불이 있고, 염불 속에 선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처음부터 양자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염불의 선’인 염불선이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염불선의 청화선사 또한 부단히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전적을 비롯한 수많은 경론에서 염불선의 근거와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Ⅱ. 초기경전에 나타난 염불과 선정

1. 염불(念佛 : Buddha-anussati)의 어원

염불(念佛)의 원어는 Buddha-anussati(Sk. Buddha-anusmṛ.ti)이다. 염(念) 또는 수념(隨念)으로 번역된 anussati는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선정수행의 핵심 개념이다. 한역에 있어 sati와 anussati(念)를 구분없이 염으로 많이 옮겼으나 구분을 위해 anussati(隨念)는 수념으로 옮긴 경전과 논서들도 있다. 본고에서도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염불을 ‘붓다 수념’ 또는 ‘(佛陀 隨念)불타 수념’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먼저 초기경전에서 염불의 원어인 anussati가 어떠한 의미와 용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기경전에서 aussati는 한정적으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붓다의 아홉 가지 또는 열 가지 덕성(德性)을 대상으로 주로 많이 쓰인다. 그리고 사선(四禪)이나 사무색정(四無色定) 이후에 숙명통(宿命通)을 설명하는데 또한 나타난다. 더 포괄적으로 anussati라는 말이 어떠한 위상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anussatiṭṭhā.na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anussatiṭṭhā.na는 anussati와 ṭhā.na의 복합어로서 ṭhā.na는 place, condition, cause, state, constancy, standing up 그리고 stay 등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와 함께 경의 내용 상 용례로 anussatiṭṭhā.na는 ‘anussati가 이루어지는 장(場)’이란 말로 풀 수 있다. 경전은 여섯 장이 설명된다. 첫 번째는 전생기억으로 한 생, 두 생 등의 여러 생에 걸친 전생의 갖가지 모습을 기억하는 장이다. 두 번째는 제삼선(第三禪)까지의 장이다.

이로써 행복감이 유지된다고 한다. 세 번째는 낮과 밤이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명철(明徹)한 지각 상태[광명상(ā.lokasañnñnaṃ.)]의 장이다. 이는 지견(知見)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네 번째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왕복하면서 부정관(不淨觀)과 백골관(白骨觀)을 닦는 염신(念身) 수행의 장이다. 다음 다섯 번째로는 제사선(第四禪)의 장이다. 이로 계분별(界分別)이 가능하다고 한다. 마지막은 그대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눕고 일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를 염(念: sati)하는 장이다. 이로 정념정지(正念正知)를 성취할 수 있다 한다.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여섯 장을 모르는 것은 탁월한 마음인 선정[增上心學 : adhicitta]을 모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 ‘anussati의 장’의 내용을 통해 염불의 염자인 anussati라는 말이 선정수행과 깊이 관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나 산스끄리뜨에서 anussati의 접두어 anu는 ‘repeated’ 또는 ‘proper’ 또는 ‘follows’의 뜻을 담고 있다. 이로 본다면, Buddha-anussati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붓다에 대한 선정을 의미한다. 즉 붓다의 모습이나 성질 또는 덕성을 간단(間斷)없이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조견(照見)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숙명통(宿命通)이 가능한 자가 한 생, 두 생 등의 여러 생을 연달아 계속해서 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초기경전의 이른 층에서 anussati의 용례는 주로 다생의 전생을 기억해내는 숙명통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인다. 사선이나 사무색선 뒤에 삼명(三明)의 첫 번째인 숙명통은 반드시 선정 삼매에 바탕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볼 때 원래 이 말은 특별한 정신작용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anussati라는 용어의 무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후 이 말은 초기불교에서 수행도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염불을 포함한 육념법(六念法)과 십념법(十念法)에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서 ‘anussati의 장’에서 선정수행의 중심인 사선(四禪)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외의 광명상이나 부정관과 백골관과 같은 염신(念身) 수행은 다름아닌 사념처(四念處)의 신념처(身念處) 수행의 내용이며 동시에 사마타(samatha) 수행의 내용이다. 마지막의 그대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눕고 일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를 염(念: sati)하는 것으로 정념정지(正念正知)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사념처 가운데 신념처의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뒤에서 초기경전에서 ‘염불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설명하는 구절과 거의 같은 문구라는 점에서 염불이 선정수행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쓰임새로 본다면 anussati는 바로 대승불교의 삼매 가운데 일행삼매를 의미하는 초기불교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비롯한 모든 관찰 대상을 끊임없이 염염상속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집중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위빠사나 수행의 sati와는 다른 성질로 설명할 수 있지만 작용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사선이나 사념처의 sati 상태보다도 수승한 상태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경전에서 숙명통의 전생기억의 anussati라는 말이 쓰이는 것은 그 이전의 사선속의 sati와 비교된다. 즉 sati보다는 anussati가 고차원의 상태임을 말한다. 또한 이는 경전에서 anussati의 대상으로 팔정도보다 십정도(十正道)가 사용된다는 점도 비교가 된다. 이로써 염불(念佛)에 쓰인 anussati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선정수행과 선정수행의 결과인 숙명통과 같은 능력과 관계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원래 염불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선정범위의 수행이다. 때문에 초기불교에서 염불은 곧 염불선을 의미한다. 때문에 인도 불교전통에서 선(禪 : dhyāana)과 선정(禪定)이나 삼매(三昧: samāadhi)라는 말이 염불과 복합어로 사용되는 이유이다. 예를 들면 경론(經論) 가운데에서 『염불삼매경』,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염불보왕삼매론』,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등의 많은 경명의 원어에서 염불과 관련하여 선(禪)과 정(定)이 쓰이고 또한 많은 경전에서 염불관(念佛觀), 염불삼매(念佛三昧), 염불정(念佛定), 관불삼매(觀佛三昧), 반주삼매(般舟三昧)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염불선을 말하는 것으로 그대로 염불선의 다른 말이다. 이는 처음부터 염불은 삼매 또는 선정과 함께 수행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염불은 삼학 가운데 정학(定學)으로 정학의 다른 말은 초기불교경전에서 증상심학(增上心學 : adhicittasampadāa)으로도 사용된다. 증상심이란 adhicitta 즉 진리 통찰을 위한 탁월하고 뛰어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염불선은 진리체(眞理體)인 붓다[佛陀]의 모습과 성질, 가치 그리고 덕성 등을 선정으로 진리의 세계에 이르려하는 수행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불교 이후 아비달마 불교나 인도 대승불교는 물론 부파나 종파를 떠나 기본적으로 염불(念佛)의 buddhāanussati는 당연히 선정 수행의 범위 내에서 논의된다. 이는 염불을 간단히 신앙의례나 타력적인 기도법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될 이유가 된다.

때문에 초기불교를 포함한 인도불교에서 선과 염불이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교리적 양상은 보여주지 않는다. 결코 선정과 염불이 양립하기 때문에 병행(竝行)해야 하는 수행법이라 하지 않는다. 다만 ‘선정 속에 염불, 염불 속에 선정’이라는 설명을 보여준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정수행 속에 설명되는 염불이 될 때 ‘염불선(念佛禪)’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원어인 buddhāanussati라는 말의 본래 의미이다.

2. 불교사에서 염불의 이해

초기경전에서 붓다는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일거수 일투족과 같은 어떠한 상태에도 항상 선정에 있었다. 여래 십력(十力) 가운데 붓다는 모든 종류의 선정(Jhāana), 해탈삼매(vimokhasamāhi), 그(sam.patt.)리고 경지성취의 완성자로 설명된다. 이는 붓다의 마지막인 반열반(般涅槃)까지도 마찬가지로 제사선(第四禪)의 상태라고 초기경전인 『유행경(遊行經)』이나 이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에서도 말한다. 이렇게 붓다의 본질은 선정과 관련되어있다. 때문에 거꾸로 이러한 붓다와의 만남은 선정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염불 또는 염불선은 바로 붓다의 본질과 선정으로 하나 되는 ‘코드’로서의 수행법이다. 다시 말하면, 선정을 통해 붓다의 세계를 바로 느끼고 그대로 체험해 가는 것이다.

처음부터 염불은 본래 선정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같은 사실은 초기경전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선정의 모든 수행은 달리 지관(止觀) 즉, 사마타(奢摩他 : 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vipaśanā)로 압축된다. 동아시아에서는 지관보다는 ‘선정 수행’이라는 말을 더 사용하여 왔다.

먼저 불교의 수행을 크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구분할 때 초기불교와 초기불교의 부파는 일반적으로 염불을 사마타 수행의 범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부파불교의 논서속에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또는 오문선(五門禪)의 하나인 염불관(念佛觀)이 그것이다. 이는 계분별관(界分別觀) 대신 부정관(不淨觀), 자비관(慈悲觀), 인연관(因緣觀) 그리고 수식관(數息觀)과 함께 나열된다. 초기불교를 잇는 상좌불교(Theravada)의 대표적인 수행논서인 Visuddhimagga(『淸淨道論』)에서도 염불수행은 마찬가지로 사마타 수행의 범위로 포함시켜 설명한다.

여기에서 염불수행은 사마타 수행의 40가지 선정 주제 [業處 : Kammaṭṭāa]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전통을 잇는 동남아 불교의 염불수행도 선정수행 가운데 사마타 수행 범위로 행해진다. 미얀마나 태국 등은 위빠사나와 함께 사마타 수행으로 염불수행이 수행처에서 현재까지도 행해지고 있다. 미얀마의 경우, 종교성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염불은 “Buddh.nussati Meditation”이라는 표현처럼 선정 개념으로 염불수행이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대기획 전집으로 붓다의 생애를 펴낸 Mingun Sayadaw(1911-1993)의 저술에서도 염불을 “Buddhāussati Meditation”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Bhāanā는 다름아닌 선정수행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염불은 초기불교 이래 부파불교이든 대승불교이든 선정수행의 범위 내에서 수행된다. 이는 염불수행 자체가 ‘염불선’ 개념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과연 불명(佛名)을 마치 주문처럼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소리내어 외는 것을 초기불교에서는 염불로 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염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기본 교리에 따르면 구업(口業)과 신업(身業) 그리고 의업(意業)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입으로 소리내어 반복적으로 붓다의 이름을 칭명(稱名)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면, 염불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인용되는 경우도 있다.

즉 한 우바이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나 나쁜 일이 있을 때나 ‘나무불(南無佛)’이라고 부르고 붓다가 계신 곳을 향해 “나무 다타아가타아라하삼약삼붓다(세상에 귀하신 분, 공경받을 만한 분, 보편타당하게 깨달은 분에게 귀의합니다)”라고 세 번씩 말했다”이다. 또한 코살라의 파세나디 왕이 붓다를 향해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세 번 “세존·여래·응공·등정각께 귀의하고 예를 올립니다”도 염불의 사례로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한역이든 빠알리 경전이든 염불의 anussati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세 번씩 말했다”는 한역은 “삼설(三說)”이고 이에 상응하는 빠알리 경전 또한 같은 의미의 문구(tikkhattam udāam udāesi)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송불(誦佛)이나 칭불(稱佛)을 염불로 설명하는 구절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불교의 모든 실천수행은 크게 3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 가운데 염불은 계정혜 삼학(三學) 가운데 정학(定學)에 속한다.

정학은 선정수행을 말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삼학 가운데 정학의 동의어로 심학(心學) 또는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 달리 불리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칭불 또는 칭명불은 구행(口行)이고 염불은 의행(意行)의 범위로 설명한다.

이는 대승불교에서도 인도의 용수는 칭명불을 ‘겁약하열(怯弱下劣)’한 중생을 위한 신방편(信方便)의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이후 그는 네 단계의 염불을 말한다. 먼저 32상 80종호를 염하는 색신염불(色身念佛), 다음으로 40 불공법(不共法)을 염하는 법신염불(法身念佛), 다음으로 실상염불(實相念佛)로 공관염불(空觀念佛)이라고도 한다. 이는 앞의 색신과 법신염불에도 집착하지 않는 중도의 염불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최고의 염불은 십호염불(十號念佛)로 여래 10호를 염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최고논사가 염불의 마지막 단계를 초기경전의 염불로 회귀하여 그 내용인 십호로 배치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즉 법신과 실상염불보다 높은 최종적인 단계로 본다는 점에 십호가 갖는 큰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논사인 세친 또한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 가운데 몸으로 예배문과 입으로 여래의 이름을 부르는 찬탄문은 차제의 오염문(五念門) 가운데 도입부로 간주한다. 대신 세친은 신업의 예배문과 구업의 찬탄문을 넘어 의업(意業)에 지관(止觀)의 단계에서 염불을 말한다. 초기불교 이래 선정은 정학(定學)으로 증상심학(增上心學) 또는 심학이라고도 달리 불리워진다.

즉 마음의 문제에 해당하는 심학이 선정이고 그러한 심학과 정학 속에 지관이 설명된다. 이는 용수와 함께 세친 또한 진정한 의미의 염불은 선정이나 지관의 차원으로 설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인 중관과 유식의 대표적인 논사를 통해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알 수 있다.

 

Ⅲ. 초기경전에 나타난 선과 염불

1. 염불선의 목적

초기경전에서 붓다 수념[Buddhāussati]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비구들이여, 일법(一法 : ekadhamma)이 있다. 이를 많이 닦아 익히면 염리(厭離 : nibbidā), 이욕(離欲 : virāa), 지멸(止滅 : nirodhā), 평정(平靜 : upasama), 신통지(神通知 :abhiñqñrāq) 정등각(正等覺), 열반(涅槃)을 얻게 한다. 일법은 어떠한 것인가? 붓다를 수(佛隨念)념하는 불수념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법을 많이 닦아 익히면 염리, 이욕, 지멸, 평정, 신통지, 깨달음, 열반을 얻게 한다. 일법은 어떠한 것인가? 붓다를 수념하는 불수념(佛隨念)이다.

이처럼 붓다 수념은 일법으로 염리, 이욕, 지멸, 평정, 신통지, 깨달음,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천명한다. 모두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나타내는 동의어이다. 이에 상응하는 증일아함의 십념품(十念品)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면,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며, 사문과(沙門果)를 체득하고 스스로 열반을 이룰 것이다. 어떤 것을 한 법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붓다 수념(隨念)이 그것이다.

이 법을 잘 닦아 행하고 널리 연설해 펴면, 곧 신통을 이루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버리고, 사문과를 체득하고 스스로 열반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한 법을 닦아 행하고 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증일아함은 신통과 사문과가 언급되는데 사문과는 예류과에서 열반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는 것이 더해지고 있다. 사문과는 성인의 경지에 들어서고 완성한 단계까지를 말한다. 모두 붓다 수념이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목적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시에 붓다 수념의 위상 그리고 수행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2. 붓다 수념의 내용과 선정 차제(次第)

초기불교 경전에서 염불에 대한 위치와 수준 그리고 중요성이 가장 감동적으로 나타난 경전은 유명한 Sutta Nipāa이다. 이 경전은 초기경전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경전군의 집합이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4장과 제5장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가장 오래된 층으로 같은 초기경전 자체에서도 증명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최고층이라는 Pāayana-Vagga(彼岸道品)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염불 사상이다.

삥기야라는 늙고 기력이 떨어진 비구에게 시간을 초월한 진리를 설한 붓다를, 번뇌를 떠나는 법을 설해준 붓다를 “잠시라도 떨어져 살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한시라도 떨어져 살 수가 없다”라고 답한다.

나는 게으르지 않고 밤낮으로 마음의 눈을 가지고 그분을 보고 있습니다. 그분이 있는 방향에 예배하면서 밤을 보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떠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신앙과 기쁨(pīi)과 마음(mano)과 염(念 : sati)은 고오타마의 가르침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지혜 많으신 분이 어느 쪽으로 가시거나 나는 그곳을 향해 예배합니다.

계속해서 붓다의 연로한 제자인 삥기야는 늙고 기력이 없어 몸은 스승과 함께하지 못하지만 사유[saṅkappa]와 마음[mano]만큼은 스승과 항상 맺어져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으로 언제 어디서나 항상 붓다를 보며 신앙과 기쁨[pīi]과 마음[mano]과 염(念 : sati) 그리고 사유[saṅkappa]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쁨(p.ti)은 제2선의 선지(禪支)이며 염(念 : sati)은 제3선과 제4선의 선지라는 점과 그리고 사유[saṅkappa]는 팔정도의 두 번째인 정사유 지분임을 상기할 때 염불이 어떻게 사선(四禪)과 혜학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경은 산문이 아닌 운문으로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지만 사선과 위빠사나의 사념처(四念處) 수행 등의 핵심적인 용어인 sati가 언급됨은 특히 주의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sati와 염불의 원어인 anussati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진 말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참으로 감동어린 신앙고백처럼 여겨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초기불교 경전의 염불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 수준에 있어서는 마치 (一行三昧)대승불교의 염불선과 관련해 일행삼매를 설하는 『문수반야경』을 보는 것 같다. 때문에 Paul Williams은 이 귀중한 전거를 대승불교의 염불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다.

붓다 수념은 먼저 ‘무너지지 않은 깨끗한 믿음의 성취[不壞淨]’ 후에 수행되는 것으로 나온다. 즉 불불괴정(佛不壞淨)을 먼저 닦고[修] 성취한 다음에 붓다 수념의 수행이 제시된다. 또한 붓다 수념은 신(信), 정진(精進), 염(念), 삼매(三昧) 그리고 반야지혜(般若知慧)와 같은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을 닦은 후 그 위에[uttarim] 더 닦아야하는 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오근 오력은 37 보리분(菩提分)에 포함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초기경전에서 붓다 수념을 통한 선정의 내용과 차제(次第)를 잘 보여주는 경전이 있다. 먼저 <잡아함>의 이경(離經)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룩한 제자는 여래 응공께서 행하신 법을 염(念)하기 때문에, 탐욕의 감정[貪欲覺]·성내는 감정[瞋.覺]·해치려는 감정[害覺]을 여의나니, 이러한 거룩한 제자는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染着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어떤 것을 물들어 집착하는 마음이라 하는가? 이른바 다섯 가지 욕망을 말합니다.

이 다섯 가지 욕망에 대한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여의어, 바른 기억과 바른 앎[正念正智]에 편안히 머물고 올곧은 길에 오르며, 염불(念佛)을 닦아 익히면 바로 열반으로 향할 것입니다. 이것을 여래·응공·등정각께서 알고 보신 것으로 괴로운 곳에서 나와 훌륭한 곳에 오르게 하고, 일승(一乘)의 도를 설하시어 모든 중생을 깨끗하게 하며, 괴로움과 번뇌를 여의고, 근심과 슬픔을 다 없애 참다운 법을 얻게 하기 위해 첫 번째로 설하신 것이라 합니다.

경은 구체적으로 붓다 수념을 설명하기 위해 탐진치의 번뇌와 다섯 가지 욕망 그리고 정념정지가 거론된다. 여기서 다섯 가지 욕망은 오욕락(五欲樂)의 다른 표현이다. 초기경전에서 이러한

수준의 표현은 주로 사념처의 위빠사나 수행이나 팔정도를 설명할 때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붓다 수념과 선정과 위빠사나 수행의 관련을 시사하고 있다.

계속해서 이러한 수염법(隨念法)을 닦으면 탐욕의 성냄, 해치려는 마음 등을 떠나고 염착심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다섯 가지 욕망을 벗어나 탐진치를 여의고 정념정지에 안주하여 열반에 도달하는 바른 방향의 똑바른 길에 있다고 한다. 결국 염불은 탐진치를 여의고 정념정지에 안주한다는 표현은 사선(四禪)의 초선에서 제3선의 전형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또한 이 경구는 사념처의 정형구에서도 또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곳에서 나와 훌륭한 곳에 오르게 하고, 일승(一乘)의 도를 설하시어 모든 중생을 깨끗하게 하며, 모든 번뇌와 괴로움을 여의며, 근심과 슬픔을 다 없애 진여법(眞如法)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경구는 또한 위빠사나의 사념처를 설명할 때 나타난다. 나아가 다른 부파소속의 별역잡아함에서도 염불은 삼독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여 “마음이 항상 평등하여 법의 흐르는 물에 머물러 선정의 마음[定心]에 들어가며 염불하는 마음을 닦아서 열반에 나아가나니, 이것을 염불이라 말한다”라고 하여 염불을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붓다 수념을 선정의 마음[定心 :samāhi-citta]과 함께 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에서 삼매라 하면 팔정도의 정정(正定)에서 볼 수 있듯이 사선(四禪)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붓다 수념의 내용과 이러한 수행을 통해 차례로 전개되는 선정 단계를 보여주는 한 경전을 들면 다음과 같다.

마하나마여, 그대는 다음과 같이 여래를 수념(隨念)해야만 한다. ‘세존(世尊)은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며(正等覺 / 正遍知), 지혜와 덕행(明行足)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善逝),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잘 아시(世間解)는 분이시며(無上士), 위없는 분이시며, 하늘과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이시(調御丈夫)며(天人師), 하늘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佛), 깨달으신 부처(世尊)로 세존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이처럼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수념(隨念)할 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여래에 확고하게 고정되고 그의 마음은 정직해진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여래를 발단으로 마음이 정직해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의 밝아짐[의명(義明 : atthaveda)]과 법의 밝아짐[법명(法明 : dhammaveda)]을 성취한다.

이러한 법은 환열(pāojja)에 큰 희열(pamudita)을 성취하게 한다. 다시 큰 희열은 환희로움(pīi)이 있게 하고 환희로움은 ‘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o)’이 있게 하고, 몸의 경안은 행복[樂 : sukha]을 느끼게 하고, 행복한 마음은 삼매[samāhi]에 들게 한다. 마하나마여, 이것을 가리켜 성스러운 제자가 평정심이 없는 사람 가운데 평정심[visama]을 얻었다하고, 악의(惡意)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악의 없음에 머문다하고, 법의 흐름[dhammasota]에 이미 들어서 수념을 닦는다고 한다.

이 경전은 한역 잡아함에서도 거의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 붓다 수념[Buddhāussati]을 대신하는 ‘여래수념[念如來 : tathāatāussati]’이라는 말이 사용되며 붓다 수념의 대상으로 여래 십호가 제시되는 것도 동일하다. 붓다 수념은 여래의 십호를 결국 법의 흐름에 들고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한다.

이러한 경전에서 붓다 수념으로 차례로 전개되는 선정 단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환열(pāojja / pāujja) → ② 큰 희열(pamudita) → ③ 환희로움(pīi) ‘ → ④ 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o)’ → ⑤ 행복[樂 : sukha] → ⑥ 삼매[samāhi]

이러한 삼매까지의 수행 단계 또는 차례는 일반적으로 pāujja → pīi → passaddhikāa → sukha → samāhi 같은 순서로 많이 나타난다. 하지만 많은 초기경전은 다음과 같이 11가지 지분으로 선정수행에 이어 열반에 이르는 단계가 설명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생략되었지만 이후는 ⑦ yathāhūañqā ṇdassana[如實知見] → ⑧ nibbidā [厭離] → ⑨ virāa[無欲 또는 離貪] → ⑩ vimutti[解脫] → ⑪ khayañ āqṇ[滅盡智]로 연결되어 시설된다. 즉 삼매 성취로 위빠사나의 여실지견은 결국 해탈과 열반으로 귀결되는 구도이다.

여기서 ① 환열에서 ⑤ 행복[樂]까지는 초선에서 제삼선까지의 선지(禪支)이고, ⑥ 삼매는 제이선에서 제사선의 내용을 나타낸다. 이러한 차제적 선정 단계는 붓다 수념과 선정의 관계를 잘 시사해주고 있다. pāujja(歡悅)에서 samāhi(三昧)의 언급은 바로 사선을 의미한다. 염불이 어떻게 사선[四禪]의 선정수행으로 연결되어 궁극적으로 열반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붓다 수념은 선정 수행과 별개가 아니다. 염불 자체가 바로 선정 수행과 연결되어 있다.

3. 붓다 수념의 기본 행법과 수념의 주제

염불을 포함한 십념(十念)이 또한 선정수행과 관련을 의미하는 직접적인 문구는 “십념 수행은 헛되지 않는 선(禪 : jhāna)에 안주한다(ayaṃvuccati bhikkhave bhikkhu arittajjhāo viharati)”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jhāna는 빠알리로 산스끄리뜨로는 dhyāna이며 한역의 음역은 (禪)선(禪那)이나 선나로 옮겨진 말이다. 헛되지 않은 선이란 염불은 반드시 이익과 행복이 있는 공허하지 않는 공부법이라는 뜻이며 이로써 염불의 anussati는 선(禪 : jhāna)의 범주에 하나로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 선은 삼매의 경우처럼 사선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붓다 수념은 일반적으로 선정삼매의 기본 행법처럼 좌선 수행으로 설명한다. 붓다 수념의 방법을 가장 구체적으로 제시된 경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비구는 몸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바르게 하여 결가부좌하고 앉아, 염(念)을 매어 앞에 두고[繫念在前]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염불한다. 여래의 형상을 관(觀)하되 잠시도 눈을 떼는 일이 없게 하고, 눈을 떼지 않고 나선 곧 여래의 공덕을 염한다.

결가부좌와 함께 염(念)을 매어 앞에 두고[繫念在前]의 원어는 parimukhaṁsatiṁ upaṭṭapetvāl이다. parimukhaṁ은 ‘‥의 앞에’라는 뜻으로 학자들에 따라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논자는 이 말을 선정이나 위빠사나에서 관찰 대상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으로 대면(對面) 또는 직면(直面)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여기서는 붓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마음에 떠올려 대면(對面)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여래의 형상을 관(觀)’한다는 것은 붓다가 갖춘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을 말한다. 이처럼 바로 앞에서 인용한 경전은 붓다 수념을 선정수행의 기본인 좌선과 ‘여래의 형상’에 이어서 ‘여래의 공덕’을 설명하는데 그 내용과 방법은 다음과 같다.

여래의 본체는 금강(金剛)으로 이루어졌고 십력(十力)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며, 네 가지 두려움이 없어 대중들 속에서 용감하고 씩씩하시다. 여래의 얼굴은 단정하기 짝이 없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계(戒)의 덕을 성취한 것이 마치 금강과 같아서 부술 수 없고 티가 없이 청정하기는 마치 유리와 같다. 또 여래의 삼매(三昧)는 일찍 줄어진 일이 없다. 이미 쉬고 영원히 고요하여 다른 잡념이 전혀 없다. 교만하고 사납던 모든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하며 욕심이 없게 되었고,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과 망설임과 교만하게 구는 모든 번뇌도 다 없어졌다. 여래의 지혜로운 몸은 그 지혜가 끝도 없고 밑도 없으며 걸리는 데도 없다.

여래의 몸은 해탈을 성취하여 모든 갈래의 세계가 이미 다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어져서 (나는 나고 죽음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일이 없다. 여래의 몸은 지견성(知見城)을 지나고 다른 사람의 근기[根]를 알아 제도할 것과 제도하지 못할 것을 구분하여 그에 따라 호응하시며,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고 두루두루 오가면서 생사(生死)의 경계를 해탈하는 이와 해탈하지 못하는 이를 모두 다 아신다.

여기서 여래의 공덕을 수념하는 내용은 붓다가 갖춘 십력(十力)이 명시되고 계속해서 설명된다. 즉 붓다만이 갖춘 열 가지 정신적인 덕성을 말한다. 십력은 불타관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붓다 수념을 설하는 초기경전을 정리하면 붓다 수념의 기본 행법은 일반적인 선정수행의 기본처럼 좌선이다. 그리고 수념의 내용과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붓다의 형상[身相]에 대한 수념으로 붓다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려 수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기경전에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붓다의 덕성을 나타내는 여래 십호(十號)의 가치와 성질 그리고 의미를 수념하는 것으로

붓다 수념의 가장 중심 내용으로 나타난다.

셋째, 마찬가지로 붓다만의 가장 대표적인 덕성인 십력(十力)의 가치와 성질 그리고 의미를 수념하는 것으로 십호처럼 많이 찾아 볼 수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내용 상 여래 십호와 십력은 중첩되어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붓다 수념 사상은 앞에서 인용한 용수의 네 가지 염불 가운데 붓다의 사십 가지 불공법(不共法)을 염하는 법신염불(法身念佛)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의 십력 등은 사십 가지 불공법 속에 들어간다. 이 경문은 후대 중국에서 염불을 사종염불로 분류하는 것 가운데 칭명염불을 제외한 모든 염불법이 다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문수반야경』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염불 사상을 초기경전에서 그대로 찾을 수 있다. 바로 앞의 경구에서 “염(念)을 매어 앞에 두고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염불한다. 여래의 형상을 관(觀)하되 잠시도 눈을 떼는 일이 없게 하고, 눈을 떼지 않고”의 표현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인용한 Sutta Nipāta 의 삥기야의 붓다에 대한 사례에서도 일행삼매의 한 예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붓다 수념에 있어 일행삼매의 가장 좋은 가르침은 다음이다.

마하나마여, 염불은 그대가 가고, 오고, 서고, 앉고, 눕고 그리고 일할 때도 그리고 자식들과의 번잡한 가정에서도 닦아야한다.

어떤 경전은 붓다 수념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과 같은 모든 일상사에서 지속시킬 수 있는 수행을 설하고 있다. 또한 “자식들과의 번잡한 가정에서도 닦아야한다”라는 구절이 생략된 경전도 있지만 재가자에게도 붓다 수념이 매우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붓다 수념의 수행공덕

초기경전은 여래의 모습을 뵙는 것 자체만으로도 환희심을 일으켜 단정함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여래의 모습에 예경을 올리면 부유한 집안에 태어날 수 있다는 과보를 말한다. 나아가 ‘오롯한 일심염불[專精一心念佛]’은 수명을 더하고, 얼굴을 빛나게 하고, 기운을 왕성하게 하며 행복감이 더해지고, 음성도 부드럽게 하는 효과나 결과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불법승 삼보는 무상복전(無上福田)으로 수행의 공덕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不可稱計]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붓다 수념은 붓다의 모든 덕성, 특질, 특성 그리고 가치를 수념한다. 이로써 수행 공덕은 바로 붓다

수념의 목적과 같은데 앞에서 살펴본 경문을 토대로 정리해 본다. 먼저 붓다 수념의 수행을 통해 탐진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자비와 지혜의 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이 여래에 확고하게 고정되어 정직해진다고 한다. 이렇게 정직해진 마음은 의미의 밝아짐[의명(義明 : atthaveda)]과 법의 밝아짐[법명(法明 : dhammaveda)]을 성취하게 한다. 계속해서 환열에 큰 희열을 성취하게 하고 환희로움과 ‘몸의 경안(輕安)을 그리고 행복[樂]과 삼매[samādhi]가 조건적으로 연달아 일어나서 평정심의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다. 경전은 이러한 염불 공덕을 더 구체적으로 나열하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곧 좋은 명예(名譽)가 있게 되고,

둘째, 큰 과보(果報)를 성취하고

세 번째, 온갖 선(善)이 널리 모이고

네 번째, 감로(甘露)의 맛을 얻어 무위처(無爲處)에 이르고,

다섯째, 곧 신통을 이루고

여섯째, 온갖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고

일곱째, 사문과(沙門果)를 체득하며,

마지막 여덟 번째로 스스로 열반을 성취한다.

이같은 염불수행의 공덕은 빠알리 경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또한 붓다 수념은 ‘과위를 증득(증득(āgataphalo)’ 하고 ‘가르침을 안 자(viññātasāsano)가 많이 머물러야 하는 수행으로 제시된다. 초기불교에서 과위는 성인의 단계인 사문사과(沙門四果)를 말한다. 때문에 붓다 수념의 일법을 마땅히 닦아 행하고, 마땅히 널리 펴야 하는 것으로 경전은 강조한다. 이러한 수행은 성인(聖人)의 경지인 사문과는 물론 최종적으로 무위처와 열반 성취까지 염불수행의 결과로 말한다.

 

Ⅳ. 부파불교 전적에 나타난 선과 염불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은 부파불교 전적의 하나로 일종의 교리 문답서이다. 여기에서 붓다수념의 공덕에 대한 질의응답은 유명하다. 즉 당시에 생전에 악업을 지어도 임종 시에 붓다 수념을 하면 사후에 하늘 세계에 태어 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를 믿을 수 없다는 질문자에 나선비구는 작은 돌이라도 물 위에 놓으면 가라앉지만 백 개의 큰 돌은 배 위에 실으면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붓다 수념은 바로 그와 같은 큰 위신력이 있다고 비유로써 설명한다. 초기경전의 붓다 수념의 공덕과 과보가 업보(業報)를 바꿀 수 있다는 사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단초를 보여준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붓다 수념의 공덕과 과보로 생전에 열반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큰 과보(果報)를 성취한다고 하는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은 마찬가지로 인도 주류 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Sarvātivāa]의 선정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모은 것인데 여기서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은 마땅히 한마음으로 붓다를

수념하는 삼매를 닦아야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리고 이 경은 오정심관(五停心觀)으로 수행자가 각각 대치해야 할 다섯 가지의 번뇌에 대해 설하고 있다. 탐욕의 번뇌는 부정관(不淨觀)으로 다스리고, 진에는 자심관.(慈心觀)으로 다스리며, 우치(愚癡)는 인연관(因緣觀)으로 다스리고, 사각(思覺)은 염식관(念息觀)으로 다스리며, 등분(等分)은 염불관(念佛觀)으로 다스린다. 오종심관의 마지막으로 염불관에서 등분(等分)은 성실견(性實見)·착아견(着我見)·단(斷)·상(常)의 네 가지 견해를 말한다.

성실견이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며, 착아견은 나에게 집착하는 견해이고, 단견은 세상은 연속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며, 반대로 상견은 세상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를 말한다. 붓다 수념은 이같이 네 가지 견해를 제거하는 대치도로 설명한다. 그 방법으로 먼저 붓다의 32상과 80종호와 같은 상호를 일심으로 관하는 것으로 세 가지 단계 또는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초습행(初習行)·이습행(已習行)·구습행(久習行)이 그것이다.

만일 초습행의 사람이라면 불상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거나, 혹은 스스로 가게 하여 불상의 상호를 잘 보게 한다. 모습 모습이 명료해지면 한마음으로 지니고 조용한 곳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心眼]으로 불상을 관조하여 마음이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생각을 묶어 불상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다른 생각을 거두어서 항상 불상에 머물게 한다.

경전은 32상과 80종호를 일일이 나열하고 있으며 다시 한 붓다뿐만 아니라 두 붓다, 세 붓다, 나아가서 시방제불을 관하는 것이 제시된다. 이 경전에서 붓다의 모습에 대한 수념으로 구체적으로 불상이 제시되며 그리고 마음의 눈[心眼]과 심상(心想)으로 불상을 관조한다는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수행 과정에서 “문득 마음의 눈을 얻어 불상의 모습과 광명을 보면 눈에 보인 그대로여서 다름이 없다”라고 그리고 이 모습은 “바로 과거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이다. 내가 이제 붓다의 형상을 보았듯이 형상이 온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가지 않았다’라는 것으로 심상(心想)의 붓다를 말하고 있다.

『좌선삼매경』은 대승에서 대승만이 한 붓다가 아닌 여러 붓다를 관한다고 비판하지만 이 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부파불교도 이미 여러 붓다를 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승의 관불이 주로 아미타불에 있다면 이 경은 석가모니 붓다라고 하는 점이 대비된다. 무엇보다도 이 경에서 불상을 중심으로 붓다의 모습을 선명하게 관하는 단계가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점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점이다.

『좌선삼매경』은 계속해서 심상으로 붓다의 모습을 수념하는 것을 넘어 붓다의 공덕과 법신을 수념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공덕과 법신의 내용으로는 여래 십호 등이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붓다 수념은 등분(等分)과 나머지 무거운 죄를 없애버리는 큰 공덕이 있음을 말한다. 다시 경의 하권에서 ‘시방삼세의 모든 붓다가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붓다 수념을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로 삼매로 이름하고 있다. 즉 붓다 수념을 특정한 삼매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이행해간 과도기적인 전적으로 보이는 『오문선경요용법(五門禪經要用法)』에도 붓다 수념이 오정심관이 다른 역어 나타나는데 첫째는 안반문(安般門)이요, 둘째는 부정문(不淨門)이며, 셋째는 자심문(慈心門)이요, 넷째는 관연문(觀緣門)이며, 다섯째는 염불문(念佛門)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염불삼매(念佛三昧)’라는 말로 붓다를 관할 때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붓다의 상호(相好)를 잘 관찰하고, 모습이 명료하게 된 뒤에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만일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눈을 뜨고 골똘히 바라보아 마음에 분명하게 해 둔다. 그런 다음에 다시 앉아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눈앞에 생각을 매어둔다[繫念]. 이 때에 참 붓다를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면, 곧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아 스승에게 이렇게 아뢴다.”처럼 스승의 지도 편달이 나타난다. 그리고 붓다를 관하면서 나타난 경계로 “땅처럼 밝고 거울처럼 깨끗함을 보는 것”을 자기의 몸으로 견주어서 보는 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얻은 경계라고 한다.

더 나아가 이처럼 붓다 수념 시 자기의 몸이 맑고 깨끗하진 ‘명정경계(明淨境界)’의 광명을 보게 되면, 그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이루었다고 하며, 사선(四禪)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염불 삼매, 붓다 수념의 선정이나 삼매를 구체적으로 사선이라고 거론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붓다 수념의 염불선을 사선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경전은 대승의 『대방등대집경』을 들 수 있다. 이 경에서 “4선 경지의 염불에 의지한 삼매를 깊이 닦아서 마음속에 훈습(薰習)해야 하고, 이 법속에서 항상 닦아 익힘을 설해서 여의지 않는 자라야 모든 죄가 다 없어질 것이다”라는 경구가 그것이다.

다음은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 권제십육 육법품(六法品)에 나타난 붓다 수념이다. 여기서 육수념(六隨念) 가운데 불수념(佛隨念)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비구들이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스러운 제자들은 세존에 대하여 이와 같은 특징[如是相]으로써 모든 붓다를 수념하는 것이니, 즉 ‘세존은 곧 여래(如來)이고 아라한(阿羅漢)이며, 나아가 붓다이고 박가범(薄伽梵)이다’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성스러운 제자들이 이와 같은 특징으로써 모든 붓다를 수념할 때에 (수행자의) 소견이 근본증지(根本證智)와 상응하는 제념(諸念), 수념(隨念), 별념(別念), 억념(憶念)과 염성(念性), 수념성(隨念性), 별염성(別念性), 불망성(不忘性), 불망법성(不忘法性) 그리고 심명기성(心明記性)이 된다. 이를 일러 붓다 수념이라 한다.

한역 아비달마 전적에서 붓다 수념은 많은 분량이나 잦은 횟수로 논의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의 붓다 수념의 논의는 귀중하다. 여기서는 붓다 말씀을 근거로 초기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 수념의 내용은 여래 십호에 담긴 의미와 덕성을 수념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붓다 수념을 설명하는데 주목할만한 점은 아비달마 전적에서 사념처(四念處)의 위빠사나 설명법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같아졌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염(念)이나 불망성(不忘性), 불망법성(不忘法性) 그리고 심명기성(心明記性)은 사념처 설명하는 아비달마의 전형적인 문구가 붓다 수념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빠알리의 상좌불교와 달리 유부 계통의 부파불교에 이르면 붓다 수념과 같은 사마타의 수행을 사념처의 위빠사나와 같은 성격으로 보려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기서 위빠사나와 같이 혜학으로 증득한 지혜[根本證智]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나아가서 제념(諸念)과 수념(隨念) 그리고 별념(別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다른 논서 등에서도 찾을 수 없다. 논자의 이해에 따르면 제념(諸念)은 붓다의 10가지 덕성 모두를 동시에 염하는 것으로 일종의 총상염(總相念)적인 차원을 말하고, 수념(隨念)은 10가지 덕성을 차례로 연달아 염하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별념(別念)은 10가지 덕성의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파악된다.

즉 마지막 별념은 별상염(別相念)으로 달리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유부의 아비달마는 초기경전에서 논의하지 않은 붓다 수념의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초기불교의 붓다 수념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세 가지 다른 방법 가운데 제념이나 수념에 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붓다 신상(身相)의 여러 모습이나 여러 종류의 덕성을 차례로 하나하나 연달아 수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동시에 모두를 총체적으로 수념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붓다의 여러 덕성 (念念相續)가운데 특정한 한 덕성만을 중심으로 염염상속(無間斷)의 무간단한 수념 수행이 새롭게 제(集異門足論)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집이문족론(別念)』의 별념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붓다 수(心一境性)념에 있어 여러 덕성에 대한 수념이기에 심일경성의 경지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극복하는 행법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에서는 사불괴정(四不壞淨)의 첫 번째에 다른 번역으로 ‘불증정(佛證淨)’의 내용으로 여래의 열 가지 덕성에 대한 수념이 언급되며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와 같은 특징[如是相]으로써 붓다를 수념한다’고 함은 곧 이 특징[相]과 이 문(門)과 이 이치[理]로써 모든 붓다에 대하여 염을 일으키고 수념하며 전념(專念), 억념(憶念), 불망불실(不忘不失), 불유불루(不遺不漏), 부실법성(不失法性), 심명기성(心明記性)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징으로써 모든 붓다를 따라 수념한다’고 한다.

이같은 『법온족론(法蘊足論)』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붓다 수념이 이미 논서의 일반적인 사념처에 대한 설명으로 적용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붓다 수념이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위빠사나 수행으로 연결이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법온족론(法蘊足論)』은 앞에서 인용한 초기경전 근거를 제시하며 붓다 수념으로 칠각지(七覺支) 가운데 희각지(喜覺支)의 내용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여래의 열 가지 덕성에 대한 수념 가운데 탐진치의 제거와 희락(喜樂) 등의 사선(四禪)의 내용으로 전개되어 평등심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붓다 수념은 초기불교와 같이 사선과 연결되고 사선 가운데 있음을 시사하지만 구체적으로 선정수행의 계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인도불교의 최대이며 주류였던 설일체유부의 대표적인 논서에서 전개된 붓다 수념의 사상을 살펴보았다.

다시 정리해 보면, 부파불교 문헌에서 붓다 수념은 큰 죄업을 바꿀 수 있는 선정수행법으로 제시되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성실견(性實見)·착아견(着我見)·단(斷)·상(常)의 견해를 제거할 수 있는 정견(正見)과 지혜의 수행법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나아가서 붓다 수념의 설명은 사념처의 위빠사나 수행의 설명과 크게 차이가 없는 단계로 전개를 보여준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 계통의 논서에서 기본적으로 붓다 수념은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인 염불관(念佛觀)으로 제시된다. 불교 수행의 전체를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대별할 때 오정심관의 성격은 다분히 사마타 수행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붓다의 명호 자체를 소리내어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외는 것을 ‘붓다 수념’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아직 찾을 수 없다. 대신 붓다 수념의 내용의 중심은 붓다의 모습과 덕성에 집중되어 있다. 붓다의 모습의 수념에 있어서는 32상과 80종호인데 마음의 눈[心眼]과 심상(心想)으로 불상을 관조한다는 구체적인 표현과 심상의 선명도 단계에 대한 지도가 행해졌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붓다의 성질과 덕성에 대한 수념은 주로 여래 10호가 수행 주제이다. 10력이나 붓다만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 언급되지는 않는 듯하다. 이는 여래 10호 가운데 모든 붓다의 부수적인 덕성들이 포섭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된다.

또한 붓다 수념과 관련하여 제념(諸念)과 수념(隨念) 그리고 별념(別念)에 있어 논자의 이해가 옳다면 붓다 수념의 선정수행 방법은 매우 발전된 전개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빠알리 상좌불교와 관련해서 다시 설명될 것이다. 그리고 흔히 대승의 전적에서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하는 이유 가운데 대승이 모든 붓다를 수념하는데 반해 소승은 한 붓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유부의 부파 문헌에서도 어김없이 제불(諸佛)에 대한 수념이 설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제불은 대승의 제불은 아닐 것이다. 과거 24불이나 28불이 그 범위일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는 어디까지나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수념이 중심이며 이는 대승의 붓다 수념이 아미타불과 아촉불 등으로 제시되는 것과는 비교가 될 것이다.

 

Ⅴ. 마치는 말

이상과 같이 초기불교나 이후의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염불과 선정은 병립적 관계가 아님을 경전과 논서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는데 있어 붓다 수념[Buddha-anussati]이라는 말 자체가 선정개념 범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붓다 수념의 염불은 처음부터 선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론이 그러한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경전에 이어 부파불교의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인 염불관(念佛觀)이나 40가지 선정 주제[業處 : Kamma..h.na] 가운데 붓다 수념이 모두 선정수행에 위치해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마찬가지로 대승의 주류 부파인 중관이나 유식에서도 변함이 없다. 또한 대부분의 불교권에서도 현재까지 붓다 수념을 선정수행의 범위로 행해지고 있다. 이처럼 양자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선정 속의 염불이고 염불 속의 선정이라 할 정도로 처음부터 양자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고 ‘염불의 선’인 염불선이 행해졌던 것이다. 붓다 수념의 염불선은 그 자체로 붓다의 덕성과 가치 등을 담고 있는 십호를 통해 불성(佛性)과 불심(佛心)을 선정수행으로서 수념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붓다 수념의 염불선은 간화선이나 묵조선과 같은 어떠한 수행법보다도 먼저 행해져 온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불교수행의 근본적이며 중심적이고 종파를 초월한 가장 보편적인 행법이다.

초기불교나 부파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에서도 붓다를 진리체(眞理體)로 본다. 그 자체로 실상이다. 따라서 붓다 수념이나 염불선은 실상관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 이래 여러 경전에 인용이 되는 ‘진리[法]를 보면 바로 붓다를 본다[卽見法卽是見佛 혹은 若能見法其則見佛]’는 그 반대도 성립된다. 다시말해 진리체인 붓다를 보는 것으로 모든 법의 실상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붓다 수념 또는 염불선은 이러한 입장에서 처음부터 ‘실상염불선’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실상의 염불선은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에서 예외적으로 청화선사에 의해 강조되었다.

청화선사는 염불과 선정을 병립적으로 파악하려던 시대적 풍토를 넘어서서 염불선은 불교의 근본선(根本禪)이고 정통선(正統禪)이라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또한 근본선이고 정통선이기에 순선(純禪)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청화선사는 염불선의 근거와 가르침을 불교의 주요 경론으로부터 부단히 제시해주고 있음을 그의 설법이나 법문집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사는 일찍이 초기불교경전의 사선(四禪), 사무색(四無色) 그리고 멸진정(滅盡定)과 같은 구차제정(九次第定)을 불교의 근본선으로 여러 방면에서 구명하고 있다. 또한 이같은 불교선정사상의 기본골격인 구차제정이야말로 근본선이고 순선이고 정통선이라는 지극히 온당한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때문에 청화선사의 설법이나 법문집은 초기불교의 사선과 사무색 등의 선정에서부터 부파불교의 사선근(四善根) 등의 선정 사상에 이르기까지 염불선의 입장에서 매우 진중하게 풀어주고 있다. 이는 기존의 한국불교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크게 대비된다. 이러한 점에서 청화선사의 염불선 사상은 시대적 지역적 그리고 종파적 한계를 뛰어넘은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후세에 있어 이 시대 한국불교의 내용을 가장 풍부하게 한, 그리고 동시에 불교 본연의 수행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던 사상으로 평가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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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호

P.li Text는 P.li Text Society 본에 의거했다.

AN : A.guttara Nik.ya

DN : D.gha Nik.ya

MN : Majjhima Nik.ya

SN : Sa.yutta Nik.ya

Sn : Suttanip.ta

 

[토론]

초기·부파불교에 나타난 염불과 선을 읽고

법상(정광균)

이번 청화사상연구회에서 “염불선의 성립과 전개”라는 대 주제를 통해서 청화 큰스님의 염불선을 대중화 하려는데, 깊이 감사드리고 대단히 기쁜 마음이다. 불교의 다양한 수행방편 중에 염불수행은 선수행과 마찬가지로 주목해야 할 수행이다. 특히 다양한 염불수행 중에서 염불선은 중국의 송대 이후 현대에도 주목하는 수행법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중기 이후 줄곧 선염일치의 입장에서 실천되어 온 수행이면서 신앙의 요체가 되어 왔다. 이러한 염불선은 조선조에 이르러 서산휴정에 의해서 진정한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염불선이 확립되었던 수행법이 근현대에 간화선 중심의 수행법을 종단에서 채택한 이후 염불당을 폐쇄하고 선원으로 개조하여 운영하면서 염불을 의례의식과 종단유지의 구심점임에도 불구하고 염불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실정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여러 선사들 중에 금타 큰스님의 법통을 이으신 청화 큰스님께서 염불선을 수행의 요체로 삼아서 실천하시고 또한 후학을 위해서 여러 측면에서 입증까지 해주셨다. 이는 참으로 반갑고 고무적인 한국불교사의 특기할 불사(佛事)다. 이러한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학술대회를 통해서 염불선의 대중화를 개최함은 염불선의 연구자로 토론에 참가하면서 경축하고 감사드린다. 그러면 먼저 발표문의 내용을 검토해 보고 다음에 몇 가지 보충하는 질의를 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요약하자면 염불선을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 내재한 전적을 통해서 염과 선, 수념과 선,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닌 선수행임을 입증한 논문이라고 하겠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염(sati)과 수념(anusati), 염불(Buddha-anussati)의 어원적 개념을 정리하여 염불의 의미를 수념으로 간주하여 불수념에 중점을 두고 논증하였다. 이상의 수념의 장인 아누사티타나(anussatiṭṭāna)로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아함경과 니까야의 전거를 통해서 초기불교의 다양한 수행법들이 모두 염불선임을 입증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리체(眞理體)인 부처님의 모습과 성질, 가치, 덕성 등을 선정으로 진리의 세계에 이르려하는 수행이기에 ‘선정 속에 염불, 염불 속에 선정’이 바로 염불선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염불은 오정심관을 비롯하여 사마타 수행의 40가지 선정의 주제와 더불어 위빠사나 등은 수념하는 수행이지 송불이나 칭불이 아니고 의행(義行)의 염불이라 논하였다. 심지어 용수보살의 칭명염불도 신방편 이행도보다는 색신, 법신, 실상, 십호염불 중에 여래십호에 중점을 두었다고 보고, 세친보살의 오염문에서도 지관에 중점을 둔 염불로 간주하여 염즉선(念卽禪)이라고 입증한다.

다음에 붓다수념[Buddhānussati]의 목적을 최종적으로 일법으로 염리, 이욕, 지멸, 평정, 신통지, 깨달음,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수행의 과정을 입증하고, 붓다 수념의 내용과 선정 차제(次第)를 ① 환열 → ② 큰 희열 → ③ 환희로움 → ④ 몸의 경안(輕安) → ⑤ 행복 → ⑥ 삼매 → ⑦ 여실지견(如實知見) → ⑧ 염리(厭離) → ⑨ 무욕(無欲) 또는 이탐(離貪) → ⑩ 해탈(解脫) → ⑪ 멸진지(滅盡智)로 연결된 내용으로 사념처와 사선정, 37보리분(菩提分), 여래십호 등을 전거로 염불이 바로 선정수행임을 입증하였다.

그 다음에 ‘붓다 수념의 기본 행법과 수념의 주제’란 소주제에서 십념의 대표로 염불(anussati)을 선(jhāna 또는 dhyāna)과 관련시켜 여래의 18불공법과 32상80종호, 여래십호를 수념하는 계념재전(繫念在前, parimukhaṁsatiṁupaṭṭapetvā)이 바로 『문수반야경』의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청화 큰스님의 염불선이라고 입증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사의 염불수행임도 제시하였다. 이어서 붓다 수념의 수행공덕으로 부처님의 수념은 부처님의 모든 덕성, 특질, 특성, 가치의 수념을 통한 그 성취 내용은 의명(義明)과 법명(法明), 경안, 지복, 삼매, 평정임을 제시하면서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의 명예와 과보, 선의 쌓임, 무위처에 도달, 신통의 성취, 산란의 제거, 사문과와 열반을 성취하는 여덟 가지 염불수행의 성과를 제시한다.

이어서 부파불교 전적에 나타난 선과 염불에서 『나선비구경』과 『좌선삼매경』의 오종심관 중에서 등분(等分)의 성실견(性實見)·착아견(着我見)·단(斷)·상(常)을 제거하는 수행인 염불관을 설명하고, 여기서 부파의 전적과 대승의 전거에서 제시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로 대상이 다름을 명시하였다. 이어서 『오문선경요용법』의 오정심관에서 염불문이 바로 염불삼매로 사선의 내용을 내포한 것으로 간파하고, 『아비달마집이문족론』과 『아비달마법온족론』을 통해서 육수념과 사불과정, 제념(諸念), 수념(隨念), 별념(別念), 억념(憶念)과 염성(念性), 수념성(隨念性), 별염성(別念性), 불망성(不忘性), 불망법성(不忘法性), 심명기성(心明記性)을 불수념의 내용을 피력하고, 전념(專念), 억념(憶念), 불망불실(不忘不失), 불유불루(不遺不漏), 불실법성(不失法性), 심명기성(心明記性)이기 때문에 염염상속(念念相續)의 무간단(無間斷)한 수념수행이 붓다의 모습과 덕성에 집중됨을 나타낸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 자체를 소리를 내어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외는 것을 불수념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아직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제불의 개념도 과거 7불이나 24불, 28불이지 아미타불관 아촉불은 아니라고 제시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염불에서 염은 수념이지 염이 아니라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수념과 선은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연결된 염선일치가 아닌 ‘선이 염이고 염이 선’인 염불선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수행방편 중에서 불수념에 초점을 두고 염불선이 초기불교에서부터 부파불교 내지는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관철됨을 입증한 논문이다. 토론자는 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에도 마찬가지로 초기 중국불교에서 여산혜원을 태두로 순수 정토교가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며, 선정겸수와 선정쌍수, 선정일치로 이어진 자민류에서도 강조한 부분이다. 한국에서도 몇몇 선사를 제외하고 모두 인정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현대 조계종단에서만이 배척이 아닌 경시하는 풍조를 낳고 있다. 말하자면 간화선을 제외한 모든 선과

염불, 주력, 간경이 마치 외도인양 치부하는 풍조다.

특히 조사선의 주요 수행방편에서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의 세 가지로 귀결한다. 이는 제4조 도신선사를 필두로 육조혜능 선사도 일행삼매를 매우 중시하였다. 나아가 선사들 중에 영명연수는 「선정사료간」에서 선과 염불을 쌍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수행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이어 받은 북송 이후와 고려에서는 선과 염불을 쌍수 내지는 겸수하면서 급기야는 ‘염불자 시수’라는 화두를 수행의 요체로 삼아 염불선을 실천하여 왕생의 의미를 현실에서 의식의 전환을 이룬 열반의 체득과 극락왕생이 바로 불퇴전으로 구경성불임을 천명한다. 이러한 염불선은 우리나라에서 본 연구자가 연구한 바로는 조선의 서산휴정선사에 의해서 확정되고, 용성진종선사에 의해서 강화되었으며, 무주청화선사에 의해서 구차제정을 정통선과 순선으로 입증하면서 실상염불이 바로 염불선임을 입증하고 실천하여 선양하였다.

이상의 내용에서 발표자의 입증은 대단히 탁월한 전거를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보면 중국과 고대한국 중심의 연구로 점철된 것이 발표자의 입증에 의해서 염불선이 불교의 정통 내지는 전통적인 수행법임이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염이든 수념이든 그 기능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염의 기능은 먼저 부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바탕으로 기억하고 집중하는 수행이라 여겨진다. 그냥 생각하고 상기하며 기억하여 참회하면서 자기의 업장을 부처님을 통해서 소멸하고 부처님을 따라서 수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염에는 이미 부처님을 따라서 신구의 삼업을 맑히고 정화시켜 내가 본래 부처임을 자내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만이 따라서 기억하고 상기하여 삼매에 들어가 해탈하고 열반을 체득할 수 있고 구경에 성불할 것이다.

다음에 반복적인 칭명도 역시 이미 여래십호에서 제시된 내용을 상기하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이행도로서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즉, 염념상속의 간단이 없는 내용은 이미 내적으로 반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반복하는 칭명염불은 명시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일반서민 즉 일체중생을 구제하려는 의도에서 칭명만으로 무한한 공덕을 쌓고 성취시켜 구경에 성불을 지향하여 인도하는 방편으로 탁월한 발상인 것이다. 학술적 내용에서 용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염념상속 불간단은 그 내용을 담하고 있으며, 부처님에 대한 신뢰와 신앙이 없는 불자는 이미 불자가 아니다. 따라서 삼념과 사념, 육수념, 십수념과 오정심관의 바탕에는 신앙과 수행의 내용이 담보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끝으로 청화사상연구회의 회장님을 비롯한 발표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청화 큰스님의 염불선이 대중화되어 모두 부처님처럼 성불의 인연과 함께 불과를 성취하여 중생을 구제하고 개인의 깨달음과 사회의 깨달음이 실현되어 이 땅에 바로 극락정토가 구현되기를 앙망하면서 토론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