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2.『대지도론』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

수선님 2019. 7. 14. 11:20

제2주제

『대지도론』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

박경준(동국대학교)

Ⅰ. 머리말

Ⅱ. 『대지도론』의 성립과 의의

1. 『대지도론』의 성립

2. 『대지도론』의 주요 내용과 의의

Ⅲ. 『대지도론』의 염불사상

1. 『대지도론』의 염불론

2. 『대지도론』의 염불론과 실상염불

Ⅳ. 『대지도론』의 선사상

1. 『대지도론』의 선사상

2. 『대지도론』의 선사상과 청화의 실상염불선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청화 선사는 어떤 행복보다도 제일 큰 행복이 열반제일락(涅槃第一樂)이라고 설파하여, 열반이 불교의 최고선이자 최종 목표임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이러한 영원한 행복이요 참다운 자유의 길인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본래 공(空)한 번뇌 망상을 여의고 참 자기를 찾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마음 공부의 길은 불교의 긴 역사 속에서 실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이 다양한 마음공부의 방법 가운데서도 선과 염불은 특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인 수행의 전통을 형성하여 왔다. 청화 선사는 그의 은사인 금타 화상의 <보리방편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선과 염불의 전통을 하나로 회통하는 수행 방법이 현대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제시한 수행법이 바로 염불선이다. 이 염불선은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실상염불 또는 실상염불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염불이란 실상 즉 진리를 비추어 관하면서 하는 염불이다. 실상이란 생(生) 하지도 않고 멸(滅)하지도 않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명 자체를 의미하며, 동시에 진여, 여래, 불, 열반, 도, 실제, 보리, 주인공, 일물, 본래면목, 제일의제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 선사는 실상염불은 우리가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부처님께서 밝히신 대로 진리를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이라고 정의한다. 실상염불선은 청화의 불교관 및 수행론을 특징짓는 키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제6차 ‘청화사상 학술세미나’에서는 이 실상염불선의 사상적 원류와 배경을 탐색하는 의미에서, ‘염불과 선’이 초기불교, 인도 대승불교, 그리고 중국 천태사상 속에서 각각 어떤 내용,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화의 ‘실상염불선’의 불교교리사적 위치가 확인되고 실상염불선의 의미와 의의가 더욱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는 원래 ‘인도 대승불교 속의 염불과 선’이었다. 하지만 그 방대한 인도의 대승불교 사상을 주어진 시간 내에 섭렵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연구의 범위를 우선 용수의 『대지도론』에 한정하기로 하였다.

『대지도론』은 대승불교사상의 기본 텍스트와 같은 논서로서 훗날 전개되는 거의 모든 대승불교사(全書)상의 원천인 동시에 ‘불교백과전서’라고 할 만한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화 선사가 여러 저술과 법문 속에서 이 『대지도론』의 가르침을 적지 않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안다. 이 연구가 청화의 불교사상, 특히 실상염불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Ⅱ. 『대지도론』의 성립과 의의

1. 『대지도론』의 성립

『대지도론』은 그 본래 명칭이 『마하반야바라밀경석론(摩詞般若波羅蜜經釋論)』이다. 이름 그대로 『마하반야바라밀경(大品般若經)』에 대한 석론[주석서]이라는 의미다. 『대지도론』은 『대혜도경집요(大慧度經集要)』, 『대지도경론(大智度經論)』, 『마하반야석론』, 『대지석론(大智釋論)』, 『대지론』, 『대론』, 『지론』, 『지도론』, 『석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대지도론』은 일반적으로 용수(龍樹, Nāgārjuna, C.E. 약 150~250)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한역(漢譯)한 것으로 전한다.

구마라집은 홍시(弘始) 3년(401년)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 승예(僧叡), 승조(僧肇), 승계(僧契) 등과 더불어 『대품반야경』을 홍시 6년 4월에 착수하여 이듬해(405년) 12월에 끝마쳤다. 구마라집은 34권 (『대품반야』의 초품에 해당)까지만 원전 내용을 온전히 번역하고 그 이후 내용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적절하게 발췌하고 압축하여 번역하였다. 그렇게 하여 완성된 것이 현존하는 『대지도론』 100권이다.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번역했다면 100권이 아니라 이보다 10배 정도 더 많은 분량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지도론』의 저자를 용수로 확정한다든가 단지 용수 일인(一人)으로 한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용수는 남인도에서 출생하여 주로 남인도에서 활동하였는데 반해, 『대지도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생담(本生譚) 등이 거의 서북인도를 중심 무대로 하고 있고 서북인도의 지리가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모뜨가 『대지도론』의 저자를 서북인도 출신의 누군(秦言云云)가로 주장하는 근거도 바로 이 점이다. 또한 『대지도론』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진나라 말 운운’하는 구절은 아무래도 구마라집이 첨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대지도론』의 성립과정은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대지도론』의 핵심부분은 『중론』을 지은 용수가 저술하고, 그 후 제바(Ārya-deva)와 나후라(Rāhulabhadra), 그리고 익명의 누군가가 가필하고, 나아가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첨가한다. 『대지도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성립한 것이다.

2. 『대지도론』의 주요 내용과 의의

『대지도론』은 형식적으로는 『대품반야경』에 대한 주석서이지만, 그 가운데 ‘불교백과전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내용과 설명이 포함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 논의 내용은 『대품반야경』에 대한 주해(註解)를 중심으로, 전설과 비유, 역사와 사상, 인물과 지리, 승가의 실천규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지도론』은 초기경전과 율전은 물론 부파불교의 여러 논서, 반야경을 비롯한 법화, 화엄, 보적, 정토 등의 대승경전, 나아가 인도 일반 사상까지를 망라하여 언급하고 있다. 아비달마의 교리도 소승이라 하여 획일적으로 배척하지는 않고 취할 것은 취한다. 예컨대 설일체유부가 주장하는 일체법의 ‘실유론(實有論)’ 같은 사상은 강하게 비판하지만, 그 밖의 많은 교의는 반야바라밀의 입장에서 수용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천명하는 근거로 삼는다.

『대지도론』은 근본적으로 ‘반야공(般若空)’의 선양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그의 대표적 저술인 『중론』이 그것을 파사(破邪)에 의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밝히고 있는데 반해, 『지도론』은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역설한다. 또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비롯한

대승보살사상의 종교적 실천을 해명하고 강조한다. 요컨대 『대지도론』은 그것이 성립하기 이전까지의 불교의 교리적 종교적 측면들을 비판적으로 수용·종합하고 유기적으로 재조직하여 대승학(大乘學)의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 있다.

이러한 『대지도론』은 후대의 여러 대승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바, 용수를 ‘8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하는 것도 실로 이 논서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지도론은 인도 유식(唯識)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고, 『대승기신론』의 진여사상도 『대지도론』의 이론에 힘 입은 바가 크다. 또한 이 논서의 불신관 특히 법신관(法身觀)은 밀교사상의 토대가 되고 진언다라니의 모태가 된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는 아미타불국토를 찬탄하고 있는 바, 이것은 정토사상의 흥기에 자양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대지도론』의 교의는 중국의 삼론학파(三論學派)는 물론, 천태교학과 화엄학, 나아가 선종의 성립에도 큰 영항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Ⅲ. 『대지도론』의 염불사상

1. 『대지도론』의 염불론

오늘날 우리 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염불’의 사전적 의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처의 상호·공덕을 염하면서, 입으로 불명(佛名)을 부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는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염불의 싼스끄리뜨 원어는 Buddha-anusm.ti(빨리어: Buddha-anussati)로서 원래는 ‘선정 수행’의 개념이며 ‘붓다에 대한 간단(間斷) 없는 염염상속(念念相續)의 조견(照見) 상태’로 정의된다.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이 부처님을 입으로 부르고 왼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으로 억념(憶念)한다는 의미로 훨씬 더 많이 사용된다. 그것은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이라는 용어보다 ‘염불삼매’라는 용어가 더 빈번하게 발견되고 있는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요컨대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이 Buddha-anusm.ti라는 원어적 의미에 더 가깝게 사용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우선 다음의 인용문은 염불이 칭명(稱名)의 염불이 아니라 지속적인 마음[

心]의 염불임을 언명하고 있다.

이 사람은 항상 모든 부처님을 뵙고자 원하면서, 계신 곳을 듣거나 (어느) 국토 안에 부처님이 계시면, 뜻대로 그곳에 왕생(往生)하기를 원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밤낮으로 항상 유지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부처님을 염하는 마음[念佛心]이니라.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염불의 마음(念佛心)’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입으로 칭도(稱道)하는 염불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지도론 <불토원(佛土願)> 석론(釋論)에 나오는 ‘염불삼매’의 다음 용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량 없는 불국토라 함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말한다. 염불삼매란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부처님들을 마치 눈 앞에 현재 드러나 있는 것처럼 항상 마음의 눈(心眼)으로 바라보는 것을 이름한다.

여기에서도 ‘심안(心眼)’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염불의 선정(禪定)적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대지도론은 위의 가르침에 계속하여 두 가지 염불삼매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는 성문법(聲聞法)에서의 염불삼매이니, 이것은 한 불신(一佛身)에 대해 마음의 눈으로 관하여 시방에 가득하심을 보는 것이다. 둘째는 보살도(菩薩道)에서의 염불삼매이니, 이것은 한량 없는 불국토 가운데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염(念)하는 것이다. 대승의 관점에서 보면 일체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내재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어떤 한 시간, 어떤 한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무한히 열려 있다.

그리하여 무한한 공간[十方]과 무한한 시간[三世] 속에서 얼마든지 많은 부처가 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시방삼세무량제불(十方三世無量諸佛)’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따라서 대승의 기본 텍스트인 대지도론이 지향하는 염불삼매는 보살도의 염불삼매로서 부처님의 외연을 끝없이 확장하고 있다. 대승의 종교적 상상력은 여기에서도 빛을 발하며 고통 속의 중생에게 성불(成佛)에의 희망을 안겨준다.

대지도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염불의 내용을 부처님(또는 부처님의 몸)에서 부처님의 특성과 공덕으로 확장한다.

보살은 항상 인자한 마음[慈心]을 닦으면서 중생을 두루 생각하여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또한 항상 염불삼매를 닦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광명과 신령스런 덕을 생각[念]하는 까닭에 몸에 광명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는 염불삼매를 닦을 때 부처님의 광명과 신덕(神德)을 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지도론』<사리불인연(舍利佛因緣)>장(章)에서는 염불 시에 여래십호(十號)를 염한다 하고 있는데 여래십호를 염한다는 것도 결국은 부처님의 여러 공덕을 염하는 것이다. <십력(十力)>장의 석론에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염불 시에 법신(法身)도 염해야 한다고 설한다.

어떤 (성문이나) 보살이 염불삼매를 닦을 때는 비단 부처님 몸만을 염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신도 염해야 하느니라.

법신불 사상은 대승의 매우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교의다. 염불삼매의 내용 속에 법신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염불이 단순히 종교적(신앙적) 차원만이 아니라 교리발달사적 차원까지를 포함함을 보여준다. 이 내용은 훗날 정립된 <4종 염불> 가운데 ‘실상염불(實相念佛)’ 개념의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염불삼매에는 여러 수승한 공덕이 따르게 된다. 대지도론은 염불삼매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염불삼매는 갖가지 번뇌와 전생[先世]의 죄를 제거하지만, 다른 삼매로는 능히 음욕을 제거하나 성냄을 제거하지 못한다. 또한 능히 성냄을 제거하나 음욕을 제거하지 못하고, 능히 우치를 제거하나 음욕과 분노를 제거하지 못하고, 능히 삼독(三毒)을 제거하나 전생의 죄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염불삼매는 능히 갖가지 번뇌와 갖가지 죄를 제거하는 것이다. 또한 염불삼매에는 큰 복덕이 있어서 능히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 보살들이 중생을 제도하려 함에 다른 삼매들 가운데 이 염불삼매만큼 무량한 복덕으로 모든 죄를 속히 없앨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내용을 요약해 보면, 염불삼매에는 크게 세 가지 공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공덕은 탐진치 삼독과 그로 인한 모든 번뇌를 없애는 것이요, 두 번째 공덕은 전생의 죄를 제거하는 것이며, 세 번째 공덕은 중생의 죄를 빨리 없애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또한 “일심으로 부처님을 염하며 믿음이 청정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부처님을 보게 된다.”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염불삼매를 통해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게 된다. 금생만이 아니라 태어나는 곳마다 부처님을 만난다.

이 모든 보살은 부처님과 실상(實相)인 반야바라밀을 애경(愛敬)하고 염불삼매의 업을 닦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염불삼매의 공덕은 실로 끝이 없다. “염불삼매의 힘 때문에 색(色)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설명처럼 염불삼매는 부처님을 만나게 하기도 하지만 불색(佛色)에 집착케 하지도 않는다. 이 무집착의 염불수행은 대지도론 <차제학품>장의 석론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된다.

<차제학품>에서는 보살마하살의 차제행(次第行)과 차제학(次第學)과 차제도(次第道)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모든 법의 있지 않은 성품[無所有性]을 믿고 이해하면서 육념(六念)을 닦아야 한다고 설한다. 그 중 염불(念佛)에 대해서는, 부처님을 염할 때 오온(五蘊)이라든가 32상 80수형호(隨形好)로써 염하면 안 된다고 설한다. 부처님을 오분법신[五分法身, 계· 정·혜·해탈·해탈지견신]이나 18불공법, 대자대비, 12인연법으로써 염해도 안 된다. 이 모든 법에는 제 성품이 없는[無自性] 바, 만일 법(法)에 자성이 없으면 곧 법이 아니어서 염할 바가 없어진다. 이것을 참다운 염불이라 한다. 이 내용의 앞부분만을 소개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염불’을 닦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의 염불은 색(色) 로써 염하지 않고,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써도 염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색은 자성(自性)이 없고 수상행식 또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法)에 자성이 없다면 이것은 곧 있는 것이 아니다[無所有]. 왜냐하면 억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이니라.

『대지도론』의 설명에 의하면, 보살이 아직 깊은 선정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의 산과 강, 그리고 초목을 보면 곧 마음이 산란해진다. 그러므로 우선은 부처님만을 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의 힘을 얻고 나면 토지와 산하, 수목을 널리 관해도 된다. 하지만 무자성(無自性)과 반야공(般若空)을 표방하는 『대지도론』이 언제까지나 부처님의 몸과 공덕을 관하라고 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다. 이러한 입장이 결국 부처님의 원만상호를 관하는 관상(觀像)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을 관하는 관상(觀想)염불에서 중도실상의 진여불성을 관하는 실상(實相)염불로 나아가게 하는 이론적 전환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도론 <차제학품>에서는, 염불을 포함한 육념 수행을 ‘행하기도 쉽고 얻기도 쉬운 것’이라고 설한다. 모든 법의 성품은 비록 있지 않다 하더라도 세속의 진리[世諦]에 따라 행하여 뒤바뀜[顚倒]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행하기 쉬운’ 수행법이 필요한데, 그 수행법이 바로 염불 수행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대지도론에서는 어디까지나 차제학의 맥락에서 이행(易行)을 말한 것이지, 아직 불법을 이른바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해, 아미타불을 칭명하고 억념함으로써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행도’는 용수 보살의 또 다른 저술로 전해지는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불법(佛法)에는 한량없는 문(門)이 있다. 마치 세간의 길에 가기 어려운 길이 있고 가기 쉬운 길이 있어서, 육로로 걸어서 가면 힘들고 수로로 배를 타고 가면 (쉽고도)즐거운 것처럼, 보살의 길도 그러하여 혹은 부지런히 행하며 힘써 나아가는(勤行精進) 길이 있기도 하고, 혹은 믿음의 방편으로써 쉽게 나아가서 아유월치(不退轉地)에 빨리 이르는 길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지도론』에 아미타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견일체불세계의(見一切佛世界義)>에서는, 아미타불 세계 안의 모든 보살들이 몸에서 항상 광명을 놓아 10만 유순(由旬)을 비춘다는 설명도 보이고, 『아미타불경』을 송독한 공덕으로 임종 시에 아미타불이 그 대중을 데리고 온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하지만 아미타불 신앙에 의한 본격적인 ‘이행도’의 정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2. 『대지도론』의 염불론과 실상염불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지도론』에 나타난 염불론의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이 부처님을 입으로 부르고 왼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억념(憶念) 한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둘째,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을 서방 정토의 아미타불에 한정하지 않고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으로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은 염불삼매를 지향하며 왕생극락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탐진치 3독과 죄업장을 소멸하고 중생을 제도함을 목표로 한다.

넷째, 『대지도론』에서는 법신불을 염불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야지혜의 입장에서 불신(佛身) 및 불공덕(佛功德)의 무자성(無自性) 공(空)을 관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지도론의 염불관과 청화 선사의 염불관은 상당한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청화 선사가 칭명염불보다는 실상염불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의 첫 번째 특징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선사의 다음 가르침과 입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관세음보살님을 염한다 하여 아미타불이나 지장보살 염불은 별로 공덕이 없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공덕이 못되고 부처님 법에 여법한 염불도 못 됩니다. 아미타불을 염할 때도 같은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법은 무장무애(無障無.)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라는 평등일미 자리에는 높고 낮은 우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명호나 다 좋은 것입니다.

또한 세 번째 특징도 자성미타·유심정토를 강조하며 왕생극락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는 청화 선사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대지도론의 네 번째 염불관 역시 청화 선사가 역설하는 실상염불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선사는 실상염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입니다.

이것은 현상적인 가유(假有)나 허무에 집착하는 무(無)를 다 떠나서 중도실상의 진여불성 자리, 이른바 법신(法身) 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자리를 생각하는 실상염불이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염불에 대한 대지도론의 입장과 청화 선사의 입장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Ⅳ. 『대지도론』의 선사상

1. 『대지도론』의 선사상

『대지도론』에서 선(禪)에 관한 설명은 제17권 제28<선바라밀(禪波羅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승 보살의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을 설명하는 가운데 선바라밀은 다섯 번째로 다루어진다. 기존의 초기 부파불교의 선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대승적 이념을 반영하여 선의 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기존의 내용을 약간 변형시키고 새로운 내용을 첨가하기도 하며 다양한 비유를 활용한다.

이 <선바라밀>장은 『반야경』 가운데 매우 짧은 한 구절, 즉 “어지럽지 않고 맛들이지 않는 까닭에 선바라밀을 구족한다(不亂不味故 應具禪波羅蜜)”라는 가르침에 대한 장황한 석론(釋論)이다. 선정의 기본 개념은 바로 ‘어지러운 마음을 쉬는 것’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이 어지러운 마음을 쉬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어지러운 마음은 “가벼이 나부끼기는 기러기 털보다 더하고, 달리고 흩어짐이 멈추지 않기는 빨리 지나가는 바람과 같고, 제지하기 어렵기는 원숭이보다 더하고, 잠시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은 번개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쉬고 선정을 성취하기 위한 전통적인 선정 체계는 이른바 4선 4무색정이다. 『대지도론』에서는 각각의 선정에

대한 설명과 수행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기초적인 초선정에 관한 내용만을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대지도론은 다음과 같은 항목을 실천해야 초선을 성취할 수 있다고 설한다. 즉 5사(事, 5塵)를 물리치고 5법(法, 5蓋)을 제거하고, 5행(行, 5法)을 실천해야 한다.

5사를 물리친다는 것은 곧 5욕(欲)을 꾸짖는 것으로서 5욕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 대한 욕망이다. 이들 감각적 욕망의 대상을 제거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첫째, 그와 관련된 붓다의 말씀을 떠올리고 둘째, 그 우환이나 속성을 관찰하며 셋째, 그 위험을 감지한 다음 스스로 경책함으로써 각각의 욕망을 물리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일례로 이 중 첫 번째 ‘색’에 대한 욕망을 물리치는 가르침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살은) 색으로 인해 적국에 들어가 홀로 암바팔리 음녀(淫女)의 방에 있게 된 빔비사라의 일화, 혹은 색욕 때문에 500명의 손과 발을 자른 우전왕의 일화를 떠올린다. 둘째, 누구든지 색에 집착하면 불이 금과 은을 태우듯 번뇌의 불길이 그의 몸을 태우고, 또는 달구어져 끓는 꿀이 비록 모양과 맛은 있으나 그의 몸을 태우고 입을 데이는 등의 우환을 관찰한다. 셋째, 그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의 위험성을 감지한 다음 스스로 경책하고, 색과 그에 대한 나쁜 느낌들을 모두 일시에 제거해야 한다.

선바라밀을 이루고자 하는 보살은 다섯 가지 대상들에 대한 욕망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물리친 다음, 단계적으로 5개(五蓋, 마음을 덮는 다섯 가지의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 5개란 욕(欲)개, 진에(瞋.)개, 수면(睡眠)개, 도회(掉悔)개, 의(疑)개를 일컫는다. 『대지도론』은 우리로 하여금 5개의 속성과 우환을 깨닫게 하여 제거토록 이끈다. 이 가운데 특히 욕개, 즉 욕망의 덮개에 대한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다.

욕락이란 악마의 그물에 걸린 것 같아 벗어나기 어렵고, 사방의 숲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처럼 모든 즐거움을 태우고 말린다. 욕락은 불구덩이 같고, 독사와 같고, 원수가 뽑아든 칼과 같고, 무서운 나찰과 같고, 독약과 같고, 구리 녹인 물을 삼킨 것 같고, 미친 코끼리 같고, 크고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 같고, 사자가 앞을 막아선 것과 같고, 마갈어(摩竭魚)가 큰 입을 연 것과 같다.

또한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욕락에 집착된 사람에 대한 비유도 여간 흥미롭지 않다.

욕락에 집착된 사람은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같다. 우리 안의 사슴과 같고, 그물에 걸린 새와 같고, 낚시를 삼킨 고기와 같고, 이리에 붙잡힌 개와 같고, 솔개무리 속의 까마귀와 같고, 들 돼지를 만난 뱀과 같고, 고양이들 속에 갇힌 쥐와 같고, 구덩이 앞에 선 맹인 같고, 뜨거운 기름에 빠진 파리와 같고, 전쟁터에 있는 환자와 같고, 앉은뱅이가 불을 만난 것 같고, 끓는 소금강에 뛰어든 사람과도 같다. 또한 꿀 묻은 칼을 핥는 것 같고, 네거리에 놓인 저민 고기 같고, 얇은 천으로 칼숲을 가린 것 같고, 꽃으로 더러운 것을 덮은 것 같고, 꿀을 독 항아리에 바른 것 같고, 독사를 담은 광주리 같다. 꿈처럼 허망하고, 빌린 것을 다시 돌려주어야만 하는 것 같고, 허깨비가 아이들을 속이는 것 같고, 불꽃이 실제가 없는 것 같고, 큰 물에 빠진 것 같고, 마갈어의 입으로 들어간 배와 같고, 곡식을 해치는 우박과 같고, 사람에게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다.

모든 욕망과 욕락은 이처럼 두려움, 근심,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거짓되고 공허하며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론은 이 욕망을 제멸하는 방법으로, 선정의 즐거움을 얻을 것, 부정관(不淨觀)을 닦을 것, 노병사(老病死)를 관할 것, 선법(善法)을 좋아할 것, 몸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할 것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다음으로 성냄의 덮개(진에개)는 모든 선법(善法)을 잃는 근본이고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원수이며 선심(善心)의 큰 도적이라고 경계한다. 성냄의 덮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애로운 마음[慈心]을 사유하며 홀로 청한(淸閑)하게 지내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노병사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한다.

잠의 덮개(수면개)는 현세(現世)의 욕락과 이락(利樂)과 복덕은 물론, 현세와 후세의 궁극적 즐거움(究竟樂)을 파괴한다. 겨우 숨만 쉴 뿐,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에 “잠은 큰 어둠이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게 하나니, 날마다 침입하여 사람의 밝음을 빼앗아 간다.”라고 경계한다.

들뜸과 후회의 덮개(도회개)에 대해서는, 들뜨고 산란한 사람은 마치 고삐 없는 술 취한 코끼리 같고 코 잘린 낙타와 같아서 어떻게 제지할 수가 없으며, 후회(悔)란 마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이 항상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는 것 같아, 후회의 화살이 마음에 박히면 뽑을 수 없다고 경계한다.

마지막으로 의심의 덮개(疑蓋)에 대해서는, 의심과 의혹이 마음을 뒤덮어 모든 법에서 안정된 마음(定心)을 얻지 못하고 불법 가운데서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보물산에 들어갔으나 손이 없으면 보물을 하나도 가져올 수 없는 것과 같다고 경계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덮개(5개)를 제거하면 마치 빚 진 이가 빚을 갚듯이, 중환자가 쾌차하듯이 마음이 편안하고 청정하고 즐거워진다고 지도론은 설한다.

이와 같이 5욕을 꾸짖고, 5개를 제거하고 나면 이제 5법을 실천해야 한다. 이 5법을 행하면 초선(初禪)을 얻게 된다. 5법이란 곧 욕(欲), 정진(精進), 염(念), 교혜(巧慧), 일심(一心)이다. 욕은 긍정적인 의미의 의욕이다. 욕계에서 벗어나 초선을 얻고자 하는 의욕이다. 정진이란 집을 떠나 계를 지키며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오로지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고 음식을 절제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염(念)이란 초선(천)의 즐거움을 기억하되, 욕계는 더럽고 미친 듯 어지럽고 천박하나 초선천은 존중할 만하고 귀한 줄을 아는 것이다. 교묘한 지혜(巧慧)란 욕계의 즐거움과 초선천의 즐거움을 관찰하고 헤아려서 그 가볍고 무거움과 얻고 잃음을 아는 것이다. 일심(一心)이란 마음을 항상

대상(緣) 가운데 매어 두어 분산(分散)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지도론』은 이렇게 5욕을 꾸짖고, 5개를 제거하고, 5법을 실천하면 초선을 성취하게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지도론』에 따르면, 이러한 선정 또는 선바라밀의 수행은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숲속이나 연못가에 한가히 앉거나 산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으로 마음은 항상 세상과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心常不捨].

비유컨대 사람이 약을 먹음으로써 몸을 추스르고 잠시 일을 쉬었다가 기력이 회복되면 예전처럼 일을 하는 것처럼, 보살이 조용한 곳에 머무는 것도 그와 같아서 선정의 힘으로 지혜의 약을 먹고 신통력을 얻어 다시 중생 속으로 들어가서, 혹은 부모나 처자가 되기도 하고 스승과 어른이 되기도 하며, 혹은 천(天)이나 인간, 나아가서는 축생이 되어 갖가지 말과 방편으로 그들을 깨우쳐 인도한다.

이와 같이 지도론은 선바라밀을 닦는 목적이 자신만의 열반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제도 혹은 중생회향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선정의 공능은 숲과 한정처(閒靜處)가 아니라 오히려 중생의 생활세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발휘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선(禪)은 대비심(大悲心)에 기초하며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또한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알기 때문에 선정에 들면 마음이 안온해지고 맛[禪味]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도(外道)들은 선정에 들더라도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사견(邪見)과 교만에 빠져 선미에 탐착한다. 반면에 아라한과 벽지불은 선미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대비심이 없거나 희박하다.

그러므로 아라한과 벽지불 및 외도들의 선은 선바라밀이 되지 못하고 그냥 선일 뿐이다. 오직 보살의 선만을 선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아가 선바라밀을 닦는 보살은 이제 어지러움과 선정을 분별하지도 않고, 따라서 어지러운 모습도 탐하지 않고 선정의 모습도 탐하지 않는다.

보살은 일체법의 어지러움과 안정된 모습이 모두가 둘 아닌 모습[不二相]으로 관찰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제거하고서 안정을 구하려 한다. 왜냐하면 어지러운 법에 대하여는 성냄의 생각을 일으키고, 안정된 법에 대하여는 애착하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지도론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지혜가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항상 선정에 머물면서 세간과 열반에 대하여 분별하는 바가 없다. 제법실상은 실로 다르지 않고 다만 지혜의 우열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대지도론』은 형식적으로는 전통적인 소승선의 체계를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정의 내용에 있어서는 질적인 전환을 이루고 있다. 다음의 가르침은 그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다.

보살은 선바라밀에 들어가서 온갖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諸惡不善法]을 제멸(除滅)하나니, 초선 내지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에 들어가고, 그 마음이 부드럽게 길들여져 각각의 선정에서 대자대비를 행하며, 자비의 인연으로써 한량없는 겁의 죄를 멸하여 모든 법의 실상 지혜[諸法實相智]를 얻는다.

2. 『대지도론』의 선사상과 청화의 실상염불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지도론』에 나타난 선사상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대지도론』에서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시대의 선사상을 광범위하게 언급하며, 그 선사상 체계를 형식적으로는 대부분 수용한다. 하지만 보살의 선바라밀 내용과 부파불교의 선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둘째, 『대지도론』에서는, 선정의 수행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산과 숲 등의 한적한 곳에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기본적인 선정[초선]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5욕(欲)에 대한 꾸짖음, 5개(蓋)의 제거, 5법(法)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대지도론』에서는 선을 외도선, 소승[아라한 벽지불]선, 보살선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기존의 선 체계를 대승적 이념에 의해 재구성하고 있다.

넷째, 『대지도론』은, 보살은 선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 선미(禪味)에 탐착하는 것을 경계할 뿐 아니라, 선수행을 통한 선정과 지혜의 힘을 바탕으로 대비심(大悲心)에 의지하여 중생 제도를 위해 정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다섯째, 보살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에 산란(亂, 어지러움)과 선정(定, 안정됨), 나아가 세간과 열반을 서로 다르게 보지 않아[不二相] 산란함의 모습도 탐하지 않고 선정의 모습도 탐하지 않는다.

이 다섯 번째 특징에서 말하는 제법실상의 의미는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물과 존재(諸法)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實相)’이지만 천태가에서는 ‘제법은 실상임’의 의미로도 사용한다. 이것은 근(苦樂)본적으로 인간사회의 고락[神意]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절대자의 뜻[宿命] 이나 과거의 운명 또는 [無因無緣]우연(또는 인과)의 산물이 아니고 연기의 소산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인한다. 그리고 여기서의 제법실상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연기론적 세계관에 바탕한 반야공 사상을 반영하고 있(中道)어서, ‘중도실상’의 의미로 읽힌다.

불교의 중도(非有非無) 사상은 ‘비유비무’의 관점을 기본으로 유에도 무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바, 산란과 선정, 세간과 열반에 대한 분별을 역설[亂]하는 대지도론도 중도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란함[定]과 선정(不二)이 불이라는 가르침은 훗날 발전한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천태의 공가중삼제(空假中三諦) 사상의 맹아라고도 생각된다.

청화 선사의 선사상도 『대지도론』의 선사상 체계와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선사는 선나(禪那: dhyāna, 思惟修, 靜慮), 삼매(三昧, 三摩地: samādhi, 定, 等持), 삼마발저(三摩鉢底: samāpatti, 等至, 至), 삼마희다(三摩呬多: samāhita, 等引) 등, 선정의 원어들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존의 다양한 선과 선의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예컨대 선사는 기존의 여러 선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외도선(外道禪)이다. 외도선은 인과를 불신(不信)하고 유루공덕(有漏功德)을 위하여 닦는 선이다.

둘째, 범부선(凡夫禪)이다. 인과를 신(信)하고 유위공덕(有爲功德)을 위하여 닦는 선이다.

셋째, 소승선이다. 아공(我空)을 믿고 해탈을 위하여 닦는 선이다.

넷째, 대승선이다. 아공 및 법공(法空)을 믿고 해탈을 위하여 닦는 선이다.

다섯째, 최상승선(最上乘禪)이다. 여래선(如來禪)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고도 하며, 본래 부처로서 일체무루공덕(一切無漏功德)이 원만히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하고 닦는 선이다.

이 가운데서 선사는 최상승선을 닦아야 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는 지금 최상승선만이 문제입니다. 이 가운데 다 들어있으므로 그 외의 것은 문제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출가사문은 최상승선만을 문제로 해야 합니다. …(중략)… 마땅히 우리는 최상승선 도리를 한 발도 헛디디면 안 될 것입니다.

선사는 이러한 최상승선의 방법에는 공안선(화두선), 묵조선, 염불선이 있다고 설명하며 특히 (실상) 염불선을 강조한다.

자성미타, 유심정토라, 우리 본래면목이 바로 아미타불이요 마음이 청정하면 현실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이니 염불도 근본성품을 안 여의고 한다면 곧바로 참선이요, 참선과 염불이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른바 진여나 실상이나 중도실상의 본래면목 자리는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경지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한 부처님 광명이 충만한 경계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여실상의 경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점차로 진여불성의 광명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지도론에서는 법신불을 염불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반야지혜의 입장에서 불신(佛身)과 불공덕의 무자성(無自性) 공(空)을 관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 설하고, 산란함과 선정, 세간과 열반을 서로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이 선바라밀이라고 설한다. 또한 청화 선사는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며 영생상주한 진공묘유의 생명 자체인 실상(實相) 즉 진리(眞理)를 관조하면서 하는 ‘실상염불’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대지도론의 염불 및 선 사상과 청화 선사의 실상염불선 사상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Ⅴ. 맺음말

우리는 이상에서 대승불교사상의 기본텍스트라 할 수 있는 『대지도론』의 염불사상과 선사상에 대해 살펴본 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먼저, 대지도론의 염불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이 부처님을 입으로 부르고 왼다는 의미보다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억념(憶念) 한다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둘째, 『대지도론』에서는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을 서방 정토의 아미타불에 한정하지 않고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으로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셋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은 염불삼매를 지향하며 왕생극락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탐진치 3독과 죄업장을 소멸하고 중생을 제도함을 목표로 한다.

넷째, 『대지도론』에서는 법신불을 염불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야지혜의 입장에서 불신(佛身) 및 불공덕(佛功德)의 무자성(無自性) 공(空)을 관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대지도론의 선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지도론』에서는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시대의 선사상을 광범위하게 언급하며, 그 선사상 체계를 형식적으로는 대부분 수용한다. 하지만 보살의 선바라밀 내용과 부파불교의 선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둘째, 『대지도론』에서는, 선정의 수행은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산과 숲 등의 한적한 곳에서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기본적인 선정[초선]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법으로 5욕(欲)에 대한 꾸짖음, 5개(蓋)의 제거, 5법(法)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대지도론』에서는 선을 외도선, 소승[아라한·벽지불]선, 보살선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기존의 선 체계를 대승적 이념에 의해 재구성하고 있다.

넷째, 『대지도론』은, 보살은 선바라밀을 성취하기 위해 선미(禪味)에 탐착하는 것을 경계할 뿐 아니라, 선수행을 통한 선정과 지혜의 힘을 바탕으로 대비심(大悲心)에 의지하여 중생 제도를 위해 정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다섯째, 보살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에 산란(亂, 어지러움)과 선정(定, 안정됨), 나아가 세간과 열반을 서로 다르게 보지 않아[不二相] 산란함의 모습도 탐하지 않고 선정의 모습도 탐하지 않는다.

그리고 청화 선사의 실상염불선은 중도실상의 진여불성 자리, 이른바 법신 자리를 생각하는 최상승선이다.

이와 같이 대지도론의 사상적 특징은 청화 선사의 ‘실상염불선’의 내용과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연관성과 유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선사의 실상염불선은 상당부분 그 사상적 뿌리를 『대지도론』의 사상에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토론

『대지도론』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을 읽고

양승규(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은 청화 스님의 염불선(念佛禪)을 『대지도론』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 논문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은 용수(龍樹)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용수는 청화 스님의 스승이신 금타화상께서 의지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저자이기도 하다. 물론 『대지도론』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학적인 근거나 배경이 용수와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대지도론』의 염불과 선을 살펴보는 것은 금타화상과 청화 스님으로 이어지고 있는 염불선의 뿌리를 조명하는 귀한 기회가 됨에 틀림없을 것이다.

청화 스님의 ‘염불선(念佛禪)’은 글자 그대로 ‘염불(念佛)’과 ‘선(禪)’이 결합된 용어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불교를 소승과 대승,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현교와 밀교로 나눌 때 각각의 불교는 그 목적을 성취하는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을 들자면 지관(止觀)정도의 수행법이고, 나머지는 그 독자적인 수행방법으로 발전하고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으로 발전한 것이 염불(念佛)과 선(禪)이다.

염불을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정토종에서 주로 행해진 수행이라면, 선은 선종의 수행법이다. 수행의 방법적인 측면이나 지향하는 목적적인 측면에서 염불과 선은 상당히 이질적인 수행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수행법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임에 틀림없다.

청화 스님의 염불선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염불과 선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것을 논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화 스님의 염불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청화 스님은 『원통불법의 요체』에서 염불을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염불(觀像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의 넷으로 나눈다. 칭명염불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것이고, 관상(觀象)염불은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인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관찰하는 염불이다.

관상(觀想)염불은 부처님의 자비공덕이나 지혜광명 등 부처님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이고, 실상염불은 중도실상인 법신(法身)의 자리를 생각하는 염불이다. 청화 스님은 이 네 가지 염불 중에서 실상염불을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을 실상염불로 보기 때문에 “염불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라고 하고, “생각 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이다”라고 염불을 정의할 수 있다. 염불선에 대해서도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선이 됩니다.”라고 하고 “염불선(念佛禪)도 역시 원래 최상승선 도리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청화 스님이 보는 염불선에서 염불은 ‘참다운 본질적인 염불’과 ‘상근인의 염불’이고, 그것은 사종염불 중에서 실상염불임을 알 수 있다.

청화 스님은 실상염불이 ‘염불선’의 궁극적인 염불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방편의 염불과 하근인의 염불을 무의미하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심일 때는 역시 뭐라 해도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이름을 자꾸만 외우고 하나만 생각해야 마음이 모아집니다”라고 하고, 염불삼매를 인행(因行)과 과행(果行)의 염불삼매로 구분하고, 일심으로 법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심으로 불명을 칭하는 것도 인행의 염불삼매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시방불이 현전(現前)하거나 법신의 실상(實相)에 계합되는 것을 과행의 염불삼매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불명(佛名)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법신자리를 믿어야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을) 이른바 닦아갈 때 염불인 것입니다.”라고 한다. 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칭명염불을 할 경우에는 염불수행을 하는 것이고, 참다운 염불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논자는 논문에서 청화 스님의 염불선에서 염불이 실상염불이란 점을 주목하여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염불관을 해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에 대한 정의도 “붓다에 대한 간단(間斷) 없는 염염상속(念念相續)의 조견(照見) 상태”라고 하는 것을 수용한다. 이런 점에서 논자는 실상염불의 염불적인 요소가 『대지도론』에서 발견되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여 『대지도론』의 염불적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억념하는 의미이다. 둘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이다. 셋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은 왕생극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의 삼독과 업장을 소멸하고 중생을 제도함이다. 넷째, 『대지도론』에서 염불의 대상에는 법신불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반야지혜(佛身)의 입장에서 불신(佛功德) 및 불공덕(無自性)의 무자성(空) 공을 관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이라고 주장한다.

『대지도론』에서의 선관(禪觀)과 염불선의 선관을 동일한 맥락에서 비교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염불선은 선종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화 스님은 염불선을 ‘최상승선’으로 본다. 그렇다면 염불선에서 ‘선’은 ‘선정’이나 ‘선나(禪那)’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논자는 『대지도론』의 선의 특징을 다섯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선과 다른 보살선이다. 둘째, 선정을 성취하기 위해 오욕(五欲), 오개(五蓋)를 제거하고, 오법(五法)을 실천하는 수행이다. 셋째, 외도선, 소승선과 다른 대승선이다. 넷째, 선미(禪味)에 집착하지 않고 대비심을 의지하여 중생제도에 정진하는 수행이다. 다섯째, 제법실상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여 산란과 선정을 둘로 보지 않는 수행이다.

논자는 방대한 문헌인 『대지도론』에서 염불과 선의 개념이 청화 스님의 염불선과 어떻게 닿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잘 정리해 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대지도론』 자체에서 보여주고 있는 염불과 선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간단하게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논자에게 묻는 것으로 논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청화 스님의 염불선이 실상염불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보통의 일반인들이 염불선에 관심을 기울일 때에는 일반적으로 선수행의 어려움을 염불의 방법을 통해 선에 접근하자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근인이 아닌, 하근인이 염불선을 접근하는 방법은 가장 기본적으로 칭명(稱名)염불이나 관상(觀象)염불일 것인데, 이런 부분에 대한 『대지도론』의 설명은 없는지 묻고 싶다.

2. 청화 스님의 염불선에서 ‘선’은 결국 참선이고, 이 참선은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지도론』의 선과 닿아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청화 스님의 염불선에서 ‘선’의 수행법이 『대지도론』의 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