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중에 자기 마음이 올라오는 걸 보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느끼고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화를 내면 얼굴 표정이라든지 목소리라든지 몸의 동작이라든지 이런 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화의 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 화를 내는 마음의 작용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이 하나 있고 ‘화가 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걸 말하고, 화를 낸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걸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화를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화가 나는 것은 내 의지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팔을 올리고 내리는 건 내 의지와 관계가 있지만 심장이 뛰는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화가 나고 안 나고는 내 업식, 카르마와 관계가 있습니다. 화는 내 업식에서 일어납니다. 이 업식의 작용을 마음이라고 합니다.
수행은 화가 나지 않는 경지로 가는 겁니다. 화가 나지 않으면 화를 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필요 없죠. 그러니까 수행의 목표는 화가 나지 않는 것이며, 그 첫 단계가 화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건 지혜에 해당됩니다. 자신에게 화가 탁 일어날 때 화가 일어나는 줄을 아는 거예요. 화가 일어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됩니다. 이 사람이 화를 내면 남들은 그 사람 화났다는 걸 아는데 본인은 잘 몰라요.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 표정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건 제정신이 아닌 거죠. 그러나 조금만 지혜로우면 바깥으로 화를 내지는 않아도 자신이 지금 화난 상태라는 걸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남은 모르는데 나는 아는 게 수행입니다. 이때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안다고 화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화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면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지요.
즉, 먼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이 지속돼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딱 알아차렸는데 그 다음에 올라오는 화를 놓쳐버렸다면 바로 화가 나버리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다른 말로 ‘지켜본다’고 표현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번 놓쳤으면 ‘아이고, 놓쳤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리는 거예요. ‘왜 난 놓쳤을까, 바보같이, 벌써 세 번이나 놓쳤네.’ 하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오늘 집에 가야지’ 한다고 저절로 가지는 건 아니죠. ‘빨리 갔으면 좋겠다.’ 한다고 빨리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기든지 자동차가 한 바퀴씩 굴러가든지 전철이 한 바퀴씩 굴러가든지 해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빨리 이루려고 조바심 낸다고 이뤄지는 건 아닙니다.
‘왜 화가 날까, 왜 불안할까, 왜 미워할까’ 하는 문제들은 그 다음에 탐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일단은 알아차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알아차리기만 해도 어떤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리려고 해도 초심자는 자꾸 놓치게 됩니다.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이 감정으로 격화되어 일어나서 거기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욕심에 눈이 어둡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눈에 뭐가 씌었다’ 이런 말들을 하지요. 이렇게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를 범부중생이라고 합니다.
나눔의 장도 좋고 명상수련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지금부터 스스로 연습 삼아 도반들과 마음 나누기를 해보세요. ‘아, 저 사람 마음이 저렇구나.’, ‘내 마음은 이렇구나.’ 하고 말이에요. 그렇게 객관적인 사실로 자신의 감정을 볼 수 있는 연습을 계속적으로 해 보세요. 그러면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 정토회 지도법사
출처 법보신문 988호 [2009년 02월 28일 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