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
알고 행한 잘못과 모르고 행한 잘못 중 어느 것이 더 큰 벌을 받게 될까요 『미린다왕문경』을 보면, ‘모르고 지은 악행이 더 큰 화를 입는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모르고 행한 것에 대해서는 정상 참작을 하여 다소 가벼운 처벌이 가해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알고 지은 죄를 더 엄하게 다스린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중 생활을 위해 정해진 계율 관련 문헌을 보면 일반 상식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경전에서 ‘모르고 지은 악행이 더 큰 화를 입는다’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업의 측면, 반복의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알고 그 악행을 했으면, 최소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따라서 마음에 일말의 가책이 있든지, 아니면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짓게 되면, 또 짓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업이 자꾸 쌓여가게 되니 그로 인한 화는 커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과거 어리석음 ‘혹(惑)’[무명(無明)→]에 의해 ‘업(業)’[행(行)→]을 지었고, 그에 따라 현재의 ‘고(苦)’[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를 받으면서도, 현재 또한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미(迷)‘혹(惑)’하여[애(愛)→취(取)→] 또 다시 ‘업(業)’[유(有)→]을 이루고, 그로 인해 미래에 반복되는 ‘고(苦)’[생(生)→노사(老死)]를 받게 됩니다. 즉, 우리의 삶은 ‘혹(惑)→업(業)→고(苦)’의 반복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놈의 근본무명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어 스스로 어리석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다. ― 이런 점에서 “내가 너희들과 다른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라는 어느 성인의 말은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이러한 삶의 반복, 마음의 윤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무명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연기 공식의 후반 구절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무명이 없으므로 행이 없고, 행이 없으므로 나아가 노사(老死)가 없어져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됩니다.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나아가 노사가 있다’고 살펴보는 것을, 그 마음 작용이 서로 관계하여 고통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전연기(流轉緣起) 또는 순관(順觀)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무명이 없으므로 행이 없고. 행이 없으므로 나아가 노사가 없다’고 살펴보는 것을, 무명으로 인한 마음 작용이 사라져 고통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멸연기(還滅緣起), 또는 역관(逆觀)이라고 합니다. 어떤 논서에서는 “노사가 왜 있는가? 생이 있기 때문이다. 생은 왜 있는가? 나아가 행은 왜 있는가?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살펴보는 것을 역관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단, 필자가 본 경전에서는 환멸연기를 역관이라고 봅니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59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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