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가르침과 서양 심리학의 통찰의 만남, 붓다의 심리학
붓다의 가르침과 서양 심리학의 통찰의 조화로운 만남
■ 세계적인 프로젝트, 불교와 정신치료의 통합
불교적 접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조차 불교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불교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전히 이국적이고 낯설어서 이질적인 것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불교적 접근이 가지는 힘은 실제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동서양의 많은 정신치료자와 심리상담가들이 불교와 정신치료 또는 심리상담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불교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문제 해결에 도움을 받았거나, 불교 쪽에서 정신치료나 상담의 한계를 보완해 줄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정신치료의 통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저자 마크 엡스타인은 불교와 정신치료의 두 분야를 오랫동안 병행해 왔다. 하버드 의대 재학 당시부터 남방불교를 접하여 명상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의대 졸업반일 때는 하버드 의대의 스트레스 전문가 허버트 벤슨이 티벳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의학적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경험도 했다. 저자는 정신분석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알았지만, 정작 정신분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때 '문제를 느끼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불교 명상과 정신치료를 통합하게 되었고, 그 경험이 이 책의 기반이 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육도윤회에 대한 심리학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축생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상태로, 지옥계는 편집증과 공격성 및 불안한 상태로, 아귀계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으로, 청상계는 인간의 절정 경험으로, 아수라는 경쟁적이고 유능한 자아로, 인간계는 자기동일성의 문제를 추구하는 영역으로 보았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명상 경험을 토대로 심도 있는 명상의 정신역동적 해석을 하고, 정신치료와 병행하여 명상이 활용될 때 정신치료를 훨씬 효과적이게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의 영적인 경험은 본질적으로 심리학적 차원을 갖는다. 불교적 접근은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의 복잡함으로부터 신비주의적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신은 명상적 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치료와 중첩되는 점이다. 명상에서 요구하는 느림은 일상의 마음을 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며, 이러한 살펴봄은 심리학적이다. 이 살펴봄의 목적은 자기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만들어 낸 정신적 고통의 생성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정신치료학파가 추구해 왔던 것이다.
이 책은 '마음에 대한 붓다의 심리학''명상''치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제1부에서는 붓다의 심리학적 가르침을 서양의 정신역동학적 언어로 소개하였으며, 불교적 관점에 대한 예비 교육이다. 제2부 '명상'에서는 순수한 주의집중이라는 기초적인 불교적 주의집중법을 설명하고, 명상의 길을 어떻게 정신역동적인 용어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순수한 주의집중, 집중, 마음챙김, 분석적인 탐구의 명상 수행이 현대 정신역동적 관점의 최전방에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제3부 '치료'는 정신치료의 실제에 관한 프로이트의 논문 '기억, 반복 그리고 훈습'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이 정신치료의 실제와 어떻게 통합될 수 있는가를 다룬다.
붓다의 가르침이 어떻게 현대 정신치료를 보완하고 정보를 주며, 활기를 불어넣는가를 보여주고, 오늘날 임상적인 정신치료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문을 두드려 왔으며, 종종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사로서의 붓다'라는 표현은 진부하다. 삶이 곧 치유의 장일진대, 불교는 당연하게도 삶의 치유책인 것. '붓다의 심리학'은 그 사실을 서양에서 새삼스럽게 호들갑떠는 책이다.
서양의 정신치료가 최근에 와서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목표, 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인간의 나르시시즘을 직면하고 그것을 뿌리 뽑는 기법을 완성하였다.
책의 시작, 한국의 숭산 선사와 티베트의 고승이 맞붙는다. 고승에게 오렌지를 들이대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숭산 선사, 고승은 말한다. '한국에는 오렌지가 없나?' - 서양사람들의 놀라운 연출력, 웃기고 슬프다. 무지에서 비롯된 모든 행이란 것이 이렇다.
윤회 - 신경증적 마음에 대한 불교적 모델
# 붓다의 첫번째 진리 - 굴욕 ; 죽음 앞에서 '적어도 나는 다시 똥을 눌 필요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게 되는 인간의 조건, 그 굴욕, 생로병사가 씁쓸한 것은 비단 그것이 고통스러워서일 뿐만 아니라 굴욕적이기 때문일 것. 붓다는 우리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모욕은, 공격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가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자기(self)'에 대한 확신을 뿌리째 뽑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 모두는 나르시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불교명상은 오히려 나르시시즘이 출몰하는 모든 곳에서 그것을 타파하고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 붓다의 두번째 진리 - 갈애 ; 자기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왜곡될 수밖에 없을 때, 실체를 가진 작용자를 부정하는 결론은 '나는 동명사다'
# 붓다의 세번째 진리 - 해방 ; '만약 우리가 혼란스러운 주관성에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이 세간의 삶이 곧 열반의 실천이다.'
# 붓다의 네번째 진리 - 집착할 것이 없음 ; '공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모습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프로이트와의 비교- 불교는 매 순간마다의 완전한 경험을 강조하고 프로이트는 집중하지 않으면 무시되어버릴 것들에 집중하기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하지만, 정신치료는 단순한 통찰 이상의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의 성취방법을 배우기 위해 불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로버트 셔먼 - 자기를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는 우리가 부당하게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때, 자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처받았다고 느끼는 '나'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통찰의 길
명상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기에 대한 믿음을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
"생각은 생각하는 사람 없이 존재한다"
불교를 공부함은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고,
자신을 공부함은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신을 잊는 것은 다른 것들과 하나가 됨이다.
P-36
원치 않는 감정을 인식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화가 나고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그 감정들에 사로잡힌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공격적이거나 성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순수한' 헌신의 상태,
겸손 혹은 경견함으로 대치하라고 신자들에게 조언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추종자들이 이런 감정을 덜 두려워하고, 그것들의 뿌리를 이해하며,
원초적 충동이 갈망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하여 잃게 되었던 에너지를 회복하도록 격려해 준다.
세계의 종교 중에서 불교만이 독특하게 중도를 취하는데, 이것은 파괴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그런 벗어남은 우리가 벗어나기를 바라는 감정에 대해 비판단적으로 자각하는 것을 통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P-41
거짓 자기의 붕괴는 거짓 자기의 발현을 인식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지,
내재하고 있는 '더 진짜에 가까운' 것으로 대체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P- 101
무아는 과거에는 존재했던 것이 나중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자기'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이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언제나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132
인간계가 직면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 진실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니코트가 기꺼이 제의했듯이 "건강한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즐기지만, 반대의 사실도 그와 같은 정도로 진실하다. 곧 각 개인은 소외되어 있고, 영원히 의사소통하지 않으며,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고, 사실 발견되지도 않는 존재다" 우리는 공허함,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느낌, 그리고 소외라는 막연하고도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알고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후에는 주목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자리잡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주목이나 인정을 비추기(mirroring)라 부른다. p. 57.
p. 122-23
5조 홍인가 후계자를 찾으려 할 때 수제자인 신수가 다음의 시를 지었다
몸은 보리수이고 (身是菩提樹)
마음은 명경과 같으니 (心如明鏡臺)
늘 부지런히 털고 닦아 (時時勤拂拭)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 (勿使惹塵埃)
그러자 혜능은 신수의 시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간파하고 다음의 대안을 제시한다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是菩本無樹)
명경 또한 틀이 아닐세 (明鏡亦非坮)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本來無一物)
어느 곳에 끼일 때가 있겠는가? (何處惹塵埃)
5조는 뭇사람들 앞에서는 신수의 대답을 칭찬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둘만 남았을때는 신수를 질책했다. 반면 혜능을 사람들 앞에서는 나무라면서도 비밀리에 그를 6조로 인가하고 어둠을 틈타 도주할 것을 권했다.
붓다는 6년간 자신과 싸운 끝에 35세에 정각을 얻었다.
깨달음의 노래
내 헛되이 수많은 생을 헤맸어라
이 집 짓는 이 찾아
실로 괴로워 거듭된 생
오, 집짓는 자여!
그대 이제 보였나니
다시는 그대 집 짓지 못하리
서까래 모두 내던져졌고
대들보는 무너졌으니
내 마음 열반에 이르러
갈망은 모두 꺼졌어라.
정각 후 7주 동안 보리수 아래서 단식하면서 쉬고 반조하는 동안 붓다는 그의 발견에 대해 당혹해 했던 것 처럼 보인다. "내가 깨닫은 이 법은 실로 심오하고 알기 어려우며, 파악하기 어렵고, 고요하고 고귀하며, 논리의 영역이 아니고 미묘하며, 현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법을 가르친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애하지 못할 것이다." pp. 63-64
苦(dukkha) = 전반적인 불만족
전반적인 불만족의 원인 세가지
w 굴욕: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고뇌: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은 우리가 바라는 불멸의 환상과 충돌. 그러므로 불만족스런 느낌의 원인이 된다 => 나르시즘의 파괴와 그로 인한 굴욕이 곧 불만족/고의 원인
w 갈애: 우리 자신의 호불호가 고의 느낌의 원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불만족 초래. 불교는 쾌락적인 경험의 부정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인 만족에 이르려고 하는 자세를 경계. 감각적 쾌락은 일시적이고 믿을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확실성에 대한 갈망을 채울수 없기 때문이다.
w 우리 자신의 인격이 일반적인 불편한 느낌의 원인. 불완전성, 비실체성, 불확실성 혹은 불안정이라는 에는 듯한 감정에 영향을 받음. 인간 불안의 가장 큰 근원은 불완전함을 경험함. 완전함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깨진 잔' p. 100
이 잔이 보입니까? 나에게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요. 나는 그것을 즐긴다오. 나는 이것으로 물을 마시지요. 이것은 물을 잘 담고 있고, 때로는 해를 아름답게 비추어 주기도 하오. 이것을 톡톡 두드리면 울리는 소리 또한 아름답소. 혹 내가 이 잔을 선반 위에 놓았는데, 바람이 불어 그것을 쓰러뜨리거나 내 팔꿈치로 툭 쳐서 탁자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나면 나는 '당연히 깨지지'라고 생각할 것이오. 그런데 내가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잔이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할 것 아니겠소. p. 110.
불교에서 진짜 깨닫은 자는 자신에게 진짜 자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은 자다. 깨달은 자는 자신이 없음으로 인해 존재하고, 자기를 이미 부서진 것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효과적이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p. 100 '큰 의심'을 실천한 사람으로 유명한 선사 '하쿠인'은 자신의 깨달음을 '얼음덮개가 끼지거나 수정 탑이 무너지는 것 따위'를 갑자기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묘사.
- 결국 수사학적 인간이란 이같은 자아에 대한 개념에서 출발하여 대화적 능력 속에 투입된 자아의 관점으로 풀어나가라는 노력
불교명상= 공간에서 시간으로, 식욕에서 호흡으로 진행하는 과정 p. 192
마음챙김의 수행을 통해 자기에 대한 공간적 경험에서 시간적 경험으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집중을 통해 어느정도의 내적 안정성을 이루면서, 수행자는 이제 마음과 자기의 순간적 본성에 대해 더욱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챙김은 생각 느낌, 심상, 감각들이 어떻게 마음과 몸에서 끊임없이 변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과 관련된다. 자기에 대한 견해를 어떤 실체나 경계가 있는 공간으로서 증장시키는 대신, 마음챙김 수행은 자기에 대한 경험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나게 하는 경항이 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세상에서 패턴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와 관련되는 것이다. p. 187.
붓다는 그가 했던 마음 챙김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자기에 대한 공간적 은유가 부추기는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몸을 우리와 분리된 '사물'로, 마음을 생각하는 '장소'로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외감이나 동떨어진 느낌을 증폭시킨다. 알아차림 수행은 이러한 이유에서 호흡과 몸에 대한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에 대한 시간적 차원의 인식은 자신의 신체적 경험들이 일어남에 따라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는 말 그대로 자신의 감각으로 가는 것이다. p. 189-190.
정신분석가 마이클 아이겐(Michel Eigen)
숨을 쉰다는 정상적인 경험에 기반을 둔 자기라는 느낌은 쉽게 동요되지 않는 압박받지 않는 자기라는 느낌이다. 식욕으로 구성된 자기라는 느낌에서 시간은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호흡의 알아차림으로 구성된 자기는 숨쉬는 것이 그런 것 처럼 순간으로부터 순간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가져갈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을 뒤쫓지도 앞지르지도 않는다. 다만 시간과 함께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다. p. 191
느낌, 생각, 정서, 마음을 포함하는 마음챙김의 영역을 점차 확대할 때, 성공적인 수행자는 어떻게든 흐름을 멈추고, 호릅에 기반을 둔 흐름의 경험을 식욕에 바탕을 둔 충족경험으로 바꾸고자하는 자신의 욕구에 계속적으로 부딪친다. p. 192
동양은 동양이다 p. 227-229.
칼 융이 느끼기에 동양의 수행법은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어서 서구인들은 그들 고유의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전통에 따라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양의 자기는 가족, 계층, 계급 또는 다른 사회 조직의 기대가 형성되는 그물에 엮여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유일한 탈출구는 대개 정신적인 수행이다. 실제로 동양에서의 정신적 추구는 다른 방법으로는 사생활을 찾을 수 없는 개인적 자기를 위한 문화적으로 허용된 안전판과 같은 것이다. 동양의 명상 수행자는 서양의 명상가와 같이 '자기를 찾기'와 같은 필요로 동기를 가지지만, 출발점은 정반대다... 동양에서는 공감적 인식의 능력, 외부 자아 경계의 완화, 정서적 조율과 수용성, 소속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서양의 출발점이 얽힘 속에 있는 자기인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개가 소외된 자기다. 개별성과 자율의 강조, 대가족과 심지어는 핵가족의 해체, 좋은 부모 역할의 결핍, 사회내의 애정보다는 성취를 위한 끝없는 욕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절, 고립, 소외, 공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달라이라마는 '낮은 자존감'이라는 개념에 대해 미심쩍어했다. 그는 방을 돌면서 그곳의 서양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도 자존감이 낮은가요? 당신도 그런가요?"라고 물었다. 그들 모두가 그렇노라고 고개를 끄덕였을때 달라이 라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티베트에서는 긍정적인 자기감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가족망으로 이루어진 모든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일찍이 주입되고 강화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러한 긍정적인 느낌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서양의 정신세계는 불교적 관점에서 아귀계로 특징지워진 정서들인 소외, 갈망, 공허감, 무가치함과 같은 감정들에 점점 더 취약해지는 것 같다. 서양인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느끼고, 그 느낌을 모든 친밀한 관계에 똑같이 대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러한 느낌을 다소나마 지울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와 희망도 가진다. p. 228. ==> 우리가 자존감이라는 서양식 개념을 너무 쉽게 고민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끼?
의사소통 척도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있을 듯.
이 처럼 출발점이 소외된 자기냐 아니면 얽힘 속에 위치한 자기냐에 따라 불교수행이 다른 경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대부분의 서양인에게 명상은 필연적으로 근본적인 결함의 형태로 남아 있는 충족되지 않은 갈망의 기억을 낳는다. 반면 얽힘속에서 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명상은 해방을 갈구하는 원초적 갈망의 기억들을 더 많이 불러올 것이다.
붓다는 우리 모두를 나르시스로 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그것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자족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괴로와하며,
우리의 덧없고 상대적인 본성을 일깨우는 모든 것들에 필사적으로 대항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인 것이다.
붓다의 이러한 메시지는 주의를 기울일만하다
그는 우리를 나르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려고 애쓴다
또한 필연적으로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라는 느낌을 견고하게 해보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이른바 '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데로 주의를 돌릴 것을 촉구한다
생로병사가 씁쓸한 것은 그것이 고통스러워서일뿐만 아니라 굴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로병사는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나르시시즘에 크나큰 타격을 가한다
이와 관련된 프로이트의 첫 저작 중 하나에 따르면,
자신에 관한 불쾌한 사실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핵심이라고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러한 통찰을 자신의 심리학의 기초로 삼는다
붓다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경향을 가진다고 보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실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대신에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우리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러한 욕구에 빠질수록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진짜'가 아니게 된다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자신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심리철학의 정수를 정신분석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 그거 참 땡기는 짓이다. 프로이트랑 그 일당들-오토 랭크, 산도르 페렌치, 칼 융, 루 살로메 등등은 정신분석적 전망대에서 불교를 내려다보기 위해 애썼고, 영향받은 개념들도 꽤 있었다(힌두교에 심취했던 로망 롤랑과의 소통이 [문명과 불안]에서 oceanic feeling; 자궁회귀욕망- '무한한 나르시시즘의 회복'과 '유아적인 무력감의 재현'-으로써 논평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불교명상의 실제와 기본적으로 친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적 통찰들은 심리치료적 파워에도 불구하고 신비로운 지하실의 공간으로 내려놓아진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 불교지도자들은 정신분석이라는 광장의 언어에 유창하지 못했고, 임상경험과 집중적 불교명상을 두루 체험한 연구가들이 없었기에 양자의 효과적 통합은 어려웠다.
저자가 정신분석과 불교사상의 동의점으로 기술한 부분.
첫째는 '자기'다. 정신치료가 정교해지고 확장되면서, 불교사상과 유사한 부분이 점점 분명해졌다. '자기'의 문제는 불교와 정신분석에 공통으로 나타났다. 나르시시즘적인 딜레마-거짓자기,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이상화/평가절하는 메카니즘은 탄탄히 묘사되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서는 논란이 많다. 저자는, 명상은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고, 나아가 신경증적 고통으로부터 개인을 자유케 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피력한다.
육도윤회, 신경증에 대한 불교적 모델
불교의 '육도윤회'를 신경증적인 마음에 대한 모델로 자리매길 수 있다. 윤회 그림은 육도중생-중앙의 죽음의 신 야마가 있고, 그 주변을 인간, 축생, 지옥, 아귀, 아수라, 천상이라는 6도가 둘러싸고 있는 만다라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성에 대해 모르고, 세계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고통스럽다는 것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으며 윤회에 속박되어 있다. 육도의 영역 자체가 아니라 탐욕과 분노, 무지로 조건지워진 우리의 그릇된 육도인식이 고통을 일으킨다. 고통받는 자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어진 영역은 깨달음이 될 수도, 속박이 될 수도 있다. 즉, 고통의 원인이 곧 해탈의 원인이기도 하다.
서구 심리학은 육도를 조명해왔다. 프로이디안들의 구강기적 갈망, 공격적 충동과 불안은 아귀 영역의 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주의 정신치료는 천상 영역의 궁극경험, 자아심리학-행동주의-인지치료는 아수라 영역에서 보이는 경쟁적이고 유능한 자아를 개발시켰다. 코헛의 자기심리학은 인간계에서 매우 핵심적인 자기동일성-정체성을 다룬다. 만약 어떤 사람의 어느 측면이 이해되지 않은 채, 단절되고, 부정되고, 투사되고, 거절당하고, 탐닉하고, 혹은 동화되지 않은 채로 있다면 거기에 탐진치가 붙게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만족스런 만남을 갖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을 흡수하며, 소외된 자기에 대한 방어벽을 만들어내는 블랙홀이다. 모든 영역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적 명상[마음챙김]이고, 위니캇이 말한 [Holding]이다.
사성제, 실존적인 굴욕을 헤쳐나가는 도구
우리 모두는 늙고, 죽음, 실망, 상실, 질병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려는 헛된 투쟁을 하고 있다. 사성제는 이런 취약성 자체를 출발점으로 도망칠 수 없는 삶의 굴욕에서 겸손을 길러준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모든 모욕은 공격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자기에 대한 확신을 뿌리째 뽑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이들은 실체가 결여된 나르시스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족적인 이미지(라이히의 근육갑옷, 오토 랭크의 생의 두려움, 위니캇의 거짓자기)에 우리 자신을 투사할 때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진짜가 아니게 된다.
통찰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의 논조
정신분석에서 부모의 불안정감이 자녀에게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반면, 불교는 좋은 엄마가 있건 없건 우리가 누구인가를 처음부터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리차드 디 마르티노의 [선불교와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자신이 성취하는 것과 자신이 어떤 것인가를 혼동하게 된다고 하였다. 주체로서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제를 수행하는과정에서 객체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객체의 이미지는 결코 주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붓다의 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그 상태에 들어가는 것(not knowing)이다.
'갈애'와 ''쾌락원칙'의 연결.
갈애는 고통의 발생에 대한 진리다. 이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쾌락원칙과도 닿아있다. 우리는 감각적 쾌락경험을 부풀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하면서 자기에 대한 느낌을 왜곡한다. 이는 마음 속에서 수용할 만한 자기 이미지를 정립하기위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집착적인 마음이 겪는 불가피한 고통으로 본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불교적 화두는 수구의 개념에서 소위 과대감과 공허감으로 불린다. 천국을 믿는 자와 인생의 헛됨을 믿는 자가 있다. 인간의 정신은 이 두 극단을 번갈아 취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즉 부모의 칭찬을 받기 위해 요구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과장된 자기와, 외롭고 위축되어 있으며 불안정하여 받지 못한 사랑만을 갈구하는 공허한 자기가 극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묘하게 있으며 없는.
불교, 프로이트의 '자아' 틈새를 메꾸다
불교적 관점에서 깨달은 존재란 자기에게 진짜 자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다. 깨달은 자는 자신이 없음으로 인해 존재하고 자기를 이미 부서진 것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효과적이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정서적인 성숙과 연관된 특질을 상상하기 위해 진짜 자기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공을 깨달은 자의 행동에는 매우 발달된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이상하리만치 닮은 점이 있다. 새로운 자기표상을 만들어내지 않고 자기표상을 안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가 통찰의 과정에서 관찰될 때 한때 안정적이었던 것이 별안간 불안정해지고, 점점 부조리한 것이 된다. 정신세계 속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여겨졌던 이 이미지가 실은 은유요, 신기루일 뿐이다. 불교이론에서 더 높은 자기에 도달한다는 개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항상 진실이었지만 인정되지 않았던 바, 바로 자기는 허구임이 드러난다.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갈망을 없애는 데서, 통찰수행은 명상가가 '나'라는 거짓 느낌을 보호하려는 욕구로 방해받지 않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집중, 마음챙김, 통찰을 통해 자기의 모든 개인적인 것이 파헤쳐지면, 절멸도 영원한 독존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명상가는 자신의 지각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자유로워진다.
정상적인 기능을 위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정도를 넘어선 정신적 능력의 발달이 필요하다. 명상은 그러한 발달로 가는 길 중 하나다 .프로이트는 그의 논문 '종결할 수 있는 분석과 종결할 수 없는 분석'에서 정신분석만으로는 그의 치료적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히 강력하고 다재한 자아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에 개탄했다. 자기에 대한 은유적 경험을 직접 다룸으로써 명상은 자아발달에서 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채울 수 없었던 틈을 채울 수 있게 된다.
기억, 반복, 훈습
기억, 반복, 그리고 훈습. 프로이트의 명제. 불교에서도 역시 기억하는 것-현재를 기억하는 것을 정신적 안정에 중추적인 것으로 본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경험에 거듭 주의를 돌려 이러한 경향을 바꾸는 것이 가장 심오한 정신적 변화를 촉진시킨다. 프로이트가 자유연상에서 도달한 기억의 방식은 '환자의 마음에 나타난 것은 무엇이든지 연구하는 것'이었다. 붓다가 마음챙김에 의지할 것을 강조할 때 함께 들던 기억하기와 똑같은 것이다. 불교의 스승들은 표면에 떠오른 개인적, 역사적 기억들을 덜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 명상을 꾸준히 했다면, 프로이트가 밝힌 3가지 유형의 기억을 모두 얻을 수 있다.
동서양의 이질성
동양의 자기는 가족, 계층, 계급 또는 다른 사회조직의 기대가 형성하는 그물에 엮여있기에, 유일한 탈출구는 정신적 수행이다. 동양에서의 정신적 추구는 다른 방법으로는 사생활을 찾을 수 없는 개인적 자기를 위해 문화적으로 허용된 안전판과 같다. 동양에서는 공감적 인식의 능력, 외부 자아경계의 완화, 정서적 조율과 수용성, 소속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명상은 이러한 능력을 기민하게 사용하여 영적인 활동을 위한 수용적 내부환경을 확립한다 .
서양의 자기는 대부분 소외된 자기다. 개별성과 자율의 강조, 핵가족의 해체, 좋은 부모역할의 결핍, 사회내의 애정보다는 성취를 위한 끝없는 욕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절, 고립, 소외, 공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도달할 수 없으면서 막연히 위협적인 친밀감을 갈망하게 만든다. 서양의 정신세계는 불교적 관점에서 아귀계로 특징지워지는 소외, 갈망, 공허감, 무가치감과 같은 감정에 점점 취약해지는 것 같다. ....글쎄...
반복강박. 반복되는 자료가 우리 스스로에 관해 알고 싶지 않아하는 경우가 많다. 저항을 없애는 방법은 저항을 분석하는 것.반복을 해석해주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반복하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불교가 매순간마다의 완전한 경험을 강조하고 프로이트가 집중하지 않으면 무시되어버릴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를 강조하는 것이 여기서 일맥상통한다. 정신치료적 환경은 독특하다. 치료가 아닌 관계에서 무시되거나 토제될 것이 확실한 행동과 감정이 잘드러나도록 허용한다. 정신치료는 붓다가 설했던 알아차림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굉장한 기회를 제공한다. 치료자가 환자들의 방어를 언어적으로 해석해줌녀서 동시에 환자로 하여금 그러한 방어를 자신의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침묵.
치료자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도 굉장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생각 사이의 침묵, 집중된 마음의 침묵, 알아차림의 침묵... 정신치료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우리 모두는 침묵에 굶주려 있다. 가장 결정적인 치료의 순간에 환자를 방해하지 않는 법....
사스게이 스미르겔(프랑스 정신분석가), 비언어적 의사소통능력은 치료자가 어머니와 같은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하고 말헀다. 여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자신의 여성적 측면에 대한 숨겨진 두려움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망령을 조상으로... 폭력적 분노를 유감으로 바꾸도록 도와라. 유교 가정의 조상처럼 대문 위 선반에 안치되어 소중히 간직하고, 큰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
프로이트에게 훈습은 우리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을 되찾는 작업이며 부정했던 것을 수용하여 온전하게 하는 과정. 병을 현재의 힘으로 간주하라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9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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