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般若論 금강반야론

金剛般若論금강반야론 하권 무착보살

수선님 2019. 7. 28. 12:50

금강반야론 하권

무착보살 지음

수나라 달마급다 한역

이한정 번역

已說(이설)「八種住處(팔종주처)」之﹝三﹞欲住處竟(욕주처경),今說(금설)﹝四﹞離障礙住處(이장애주처),

有十二種障礙對治應知(유십이종장애대치응지)。

욕주처(住處)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니,

이제부터 이장애주처(離障礙住處)를 설명하기로 한다.

열두 종류의 장애에 대한 대치(對治)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何者十二障礙(하자십이장애):

1、慢(만),2、無慢而少聞(무만이소문),

3、多聞而小攀緣作念修道(다문이소반연작념수도),

4、不小攀緣作念修道而捨眾生(부소반연작념수도이사중생),

5、不捨眾生而樂隨外論散動(부사중생이악수외론산동),

6、雖不散動而破影像相中無巧便

(수부산동이파영상상중무교편),

7、雖有巧便而福資糧不具(수유교편이복자량부구),

8、雖具福資糧而樂未懈怠及利養等

(수구복자량이악미해태급리양등),

9、雖離懈怠利養而不能忍苦(수리해태리양이부능인고),

10、雖能忍苦而智資糧不具(수능인고이지자량부구),

11、雖具智資糧而不自攝(수구지자량이부자섭),

12、雖自攝而無教授(수자섭이무교수)。

어떠한 것이 그 열두 종류의 장애인가 하면,

첫 번째는 만결()을 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록 만결이 없더라도 적게 들은 것이고,

세 번째가 비록 많이 들었더라도 반연(攀緣)이 적어서

수도의 마음을 내는 것이고,

네 번째가 비록 반연이 적어서 수도의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중생을 저버리는 것이고,

다섯 번째가 비록 중생을 저버리지 않더라도 외도의 논리를 즐겨서 이에 따라 산란하게 동요되는 것이고,

여섯 번째가 비록 어지럽게 동요되지 않더라도 그 영상상(影像相)을 깨뜨리는 가운데 선교방편(善巧方便)이 없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비록 선교방편이 있더라도

복의 자량(資糧)을 갖추지 못한 것이고,

여덟 번째는 비록 복의 자량을 갖추었더라도

아직 해태(懈怠) 및 이양(利養) 따위를 즐기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비록 해태와 이양 따위를 여의었더라도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비록 고생을 견디더라도

지혜의 자량을 갖추지 못한 것이고,

열한 번째는 비록 지혜의 자량을 갖추었더라도

스스로 이를 섭수하지 못하는 것이고,

열두 번째는 스스로 섭수하더라도 가르침을 전수[教授]하지 않는 것이니,

1、初中為離慢故(초중위리만고),

여기서 앞부분[初分]과 중간 부분[中分]은 만결을 여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經言:「須陀洹頗作是念(수타원파작시념):我得須陀洹果(아득수타원과)」等。此為依義顯示對治我得慢故(차위의의현시대치아득만고)。

경전에서 “수다원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자못 생각하는”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도 이치에 의지해서[依義] 내가

성취하였다는 만결을 대치하고자 함이고,

又復(우부)「須陀洹頗作是念(수타원파작시념)」者,

即為說相顯示無慢故(즉위설상현시무만고)。

亦即是欲願攝持(역즉시욕원섭지),

다시 ‘수다원이 자못 생각한다’라고 한 것도 그 상을 설명해서

[說相] 만결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고,

또한 지욕과 원력의 섭지(攝持)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世尊(세존)!無有所入(무유소입),不入色聲香味觸(불입색성향미촉)」者,此為安立第一義(차위안립제일의)。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소입(所入)이 없기에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지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若須陀洹如是念(약수타원여시념):

「我得須陀洹果(아득수타원과)」,即為有我想(즉위유아상);若有我想(약유아상),則為有慢應知(칙위유만응지),

如是乃至阿羅漢亦爾(여시내지아라한역이)。

만약 수다원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내게 되면, 바로 유아상(有我想)에 떨어지고, 만약 유아상을 내는 경우, 바로 유만(有慢)에 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와 같다,

上座須菩提自顯無諍行第一(상좌수보제자현무쟁행제일),及阿羅漢共有功德者(급아라한공유공덕자),以己所證為令信故(이기소증위령신고),以無有法得阿羅漢(이무유법득아라한),及無所行故(급무소행고),說無諍行(설무쟁행),無諍行此中即為安立第一義(무쟁행차중즉위안립제일의)。

상좌 수보리가 스스로 무쟁행(無諍行)이 제일간다는 것과

아라한이 공유하는 공덕을 드러낸 것도 이미 증득[以所證]한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니, 아라한을 얻게 되는 법이 없고 아울러 그 소행(所行)도 없는 까닭이다. 여기서 무쟁행을 설명하는 것은 이 같은 무쟁행을 제일의로 안립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2、為離少聞故(위리소문고),經言(경언):「如來於然燈如來應供正遍知所(여래어연등여래응공정편지소),有法可取耶(유법가취야)」等(등)。謂彼佛出世承事供養時(위피불출세승사공양시),有法可取離此分別故(유법가취리차분별고)。依義等及對治等(의의등급대치등),隨義相應應知(수의상응응지)。

적게 듣는 것[少聞]을 여의기 위함 때문에.

경전에서 “여래가 연등 여래ㆍ응공ㆍ정변지의 처소에서 취할

만한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말하자면 그 부처님이 출세하시자 받들어 모시면서 공양하는 때에 취할 만한 법이 있다는 이 같은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의(依義)나 대치 등은 그 이치의 상응(相應)에 부수해서 알아야 하니,

3、為離小攀緣作念修道故(위리소반연작념수도고),

經言(경언):「須菩提若有菩薩如是言(수보제약유보살여시언),我當成就嚴淨佛土(아당성취엄정불토)」等(등)。

若念嚴淨土者(약념엄정토자),則於色等事分別生味著(칙어색등사분별생미저),為離此故(위리차고),

반연하는 것이 적어서 수도의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을

여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장엄하고 청정한 불국토 등을 성취하였다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 장엄하고 청정한

국토라는 마음을 내게 되면, 색 등의 사물에 대한 분별이 생겨나

그 미경(味境)에 집착하는, 이와 같은 것을 여의기 위함 때문이다.

經言(경언):「是故須菩提(시고수보제),菩薩應生如是不住心無所住(보살응생여시부주심무소주),

不住色聲香味觸法(부주색성향미촉법)」等(등).

경전에서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여, 보살이 마땅히 이처럼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서 머무는 바가 없어야만”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 등에 머물지 않는다.

4、為離捨眾生故(위리사중생고),經言(경언):

「須菩提譬如有人(수보리비여유인),身如須彌山王(신여수미산왕)」如是等(여시등),此何所顯示(차하소현시)?

為成熟欲界眾生故(위성숙욕계중생고)。

이는 중생을 저버리는 것을 여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신체가

수미산왕(須彌山王)만 하더라도”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구절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면, 욕계의 중생을 성숙시키고자 함이다.

彼羅[目+侯]阿修羅王等(피라후아수라왕등) ,一切大身量如須彌(일체대신량여수미),尚不應見其自體(상부응견기자체),何況餘者(하황여자),經言(경언):「如來說為非體(여래설위비체)」者(자),顯示法無我故(현시법무아고)。彼體非體者

(피체비체자),顯示法體無生無作故(현시법체무생무작고)。

此即顯示自性與相及差別故(차즉현시자성여상급차별고)。

그와 같은 나후아수라왕(阿修羅王) 등은 그 커다란 신체의 전체 크기가 마치 수미산만 해서 자신도 그 신체를 볼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그 밖의 중생이겠는가?

경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체()가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법무아(法無我)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그와 같이 체가 체가 아니라는 것은 법체(法體)는 나지도 않고

짓지도 않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려는 때문이니, 이와 같은 것은

바로 자성과 그 상의 차별을 나타내고자 함이고,

5、為離樂外論散亂故(위리악외론산란고)。經說(경설)

「四種因緣(사종인연)」,顯示此法勝異也(현시차법승이야)。

외도의 논리를 즐겨서 산란해지는 것을 여의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네 종류의 인연은 이 같은 법의 수승하고

기이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1)攝取福德(섭취복덕),(2)天等供養(천등공양),(3)難作(난작),「八種住處(팔종주처)」之(지)﹝二(이)﹞ (4)起如來等念(기여래등념)。

첫 번째는 복덕의 섭취이고, 두 번째는 천신 등의 공양이고,

세 번째는 어려운 일을 행하는 것[難作]이고,

네 번째는 여래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經言:「以此因緣得福多彼(이차인연득복다피)」者,

是(1)攝取福德(섭취복덕)。

경전에서 “이 같은 인연으로 얻는 복이 많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그와 같은 것은 복덕의 섭취에 해당하는 것이다.

經言:「為他若說若授若解釋(위타약설약수약해석),

彼地分即是支提相(피지분즉시지제상)」者,

是(2)天等供養(천등공양)。

경전에서 “다른 이에게 만약 말해 주거나 전수하거나 풀이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그와 같은 장소가 바로 지제(支提)의 상이니,

이것은 천신 등의 공양에 해당한다.

經言:「當得具足最上希有(당득구족최상희유)」者,

是(3)難作(난작)。

경전에서 “미래에 최상의 희유(希有)를 구족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을 행하는 것에 해당한다.

經言:「此地分即為教師住處(차지분즉위교사주처),

及餘可尊重(급여가존중)」者,

是(4)起如來等念(기여래등념)。

경전에서 “이 같은 장소를 나누어 교사(教師)의 주처로 삼았으니, 아울러 다른 이가 존중할 만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래에 대한 생각을 내는 것에 해당한다.

於中說者為他直說故(어중설자위타직설고),

授者教授他故(수자교수타고);

顯示此樂外論散亂對治法勝異已

(현시차악외론산란대치법승이이)。

여기서 말해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바로 설명하기 때문이고, 전수한다는 것[授]은 다른 사람을 교수하기 때문이니,

이처럼 외도의 논리를 즐겨서 산만한 것을 대치하는 법의 수승하고 기이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於如是法中(어여시법중),或起如言執義為對治(혹기여언집의위대치),彼未來罪故(피미래죄고),經言(경언):

「如來所說般若波羅蜜即非般若波羅蜜(여래소설반야바라밀즉비반야바라밀)」故(고),如般若波羅蜜非波羅蜜(여반약파라밀비파라밀),如是亦無有餘法(여시역무유여법),如來說者為顯此義故(여래설자위현차의고),   

이와 같은 법 가운데에서 혹 그 언설에 따라 그 이치에 집착하는

것이 대치에 해당하는 것이니, 저와 같은 것이 미래의 죄가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신바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고”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마치 반야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닌 것처럼, 이와 같은 여타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여기서 ‘여래가 말씀하신다’라고 한 것은 이 같은 이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경언):「頗有法如來可說不(파유법여래가설부)?」

此顯示自相及平等相法門第一義也

(차현시자상급평등상법문제일의야)。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실 만한 법이 자못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자상(自相) 및 평등상(平等相)을

법문의 제일의로 나타내고자 함이니,

6、為離於影像相自在中無巧便故(위리어영상상자재중무교편고),經言:「須菩提所有三千大千世界地塵(수보제소유삼천대천세계지진)」如是等(여시등)。彼不限量攀緣作意(피부한량반연작의),菩薩恒於世界攀緣作意修習故(보살항어세계반연작의수습고)。 說三千大千世界(설삼천대천세계),

영상상(影像相)의 자재 가운데에 처해서 선교방편이 없는 것을

여의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흙먼지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같이 한량없는 것을 반연하여 뜻을 세우라는 것[作意]이니,

보살이 언제나 세계를 반연하여 수습을 작의(作意)하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於中為破色身影像相故(어중위파색신영상상고);顯示二種方便(현시이종방편):1、細作方便(세작방편),如經(여경)「三千大千世界所有地塵寧為多不(삼천대천세계소유지진녕위다부)」等(등)。2、不念方便(불념방편),如經(여경)「所有地塵如來說非塵(소유지진여래설비진),是名地塵(시명지진)」故。

여기에서 색신(色身)의 영상상을 깨뜨리고자 두 종류의 방편을

나타내게 된다.

첫 번째는 세작방편(細作方便)이니, 마치 경전에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흙먼지가 많다고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불념방편(不念方便)이니, 마치 경전에서 “모든 흙먼지를 여래는 티끌이 아니라고”하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은 단지 그 명자(名字)가 흙먼지이기 때문이고,

為破眾生名身影像相故(위파중생명신영상상고)

중생 명신(名身)의 영상으로 나타낸 모습을 깨뜨리기 위함 때문이다.

經言:「所有世界如來說非世界(소유세계여래설비세계),

是名世界(시명세계)」故(고),於中世界者顯眾生世也(어중세계자현중생세야)。但以名身名為眾生世(단이명신명위중생세),不念名身方便即是顯示故(부념명신방편즉시현시고),彼名身影像相(피명신영상상),不復說細作方便也(부복설세작방편야)。

경전에서 “모든 세계를 여래는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니

이와 같은 것을 세계라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세계란 중생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지 명신으로서 중생세간이라 이름붙이는 것이니, 불념명신의 방편이 바로 나타나게

되면, 그와 같은 명신의 영상으로 나타낸 모습이 파괴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작방편은 다시 설명하지 않으니,

7、為離不具福資糧故(위리부구복자량고),經言(경언):

「須菩提於意云何(수보제어의운하)?以三十二大丈夫相見如來耶(이삼십이대장부상견여래야)」者,顯示為福資糧故(현시위복자량고),親近供養如來時(친근공양여래시),不應以相成就見如來(부응이상성취견여래),云何見(운하견)?

應見第一義法身故(응견제일의법신고)。

복의 자량을 갖추지 못한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대장부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복의 자량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래를 가까이해서 공양하는 때에, 그 상의 성취로써

여래를 친견할 수 없으니 어떻게 친견해야 하는가 하면,

제일의법신(第一義法身)으로 친견해야 하기 때문이고,

8、為離懈怠利養等樂味故(위리해태리양등악미고),經言:「須菩提(수보리)!若復婦女丈夫(약복부녀장부),

捨恒河沙(사항하사)」等,「自身如是(자신여시)」等。

此何所顯示(차하소현시)?如此捨爾許自身(여차사이허자신),

所有福不及此福(소유복부급차복)。

해태(懈怠)ㆍ이양 등의 미경(味境)에 기꺼워하는 것을 여의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부녀(婦女)와 장부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자기 신체를 버린다는 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가 하면, 이와 같이 자기의 신체를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모든 복도 이 같은 것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云何以一身著懈怠等故而為障礙(운하이일신저해태등고이위장애),何故此中上座須菩提流淚而言(하고차중상좌수보제류루이언),我未曾聞如是等法門也(아미증문여시등법문야);以聞此勝福甚多(이문차승복심다),過於捨無量身(과어사무량신),

更不說餘勝福故(경불설여승복고)。

어째서인가 하면, 몸으로써 게으름 등에 집착하는 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어째서 여기서 상좌 수보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제가 일찍이 이와 같은 법문을 듣지 못했나이다. 이와 같은

수승한 복을 듣고 보니 한량없는 신체를 버리는 것보다 많나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밖의 수승한 복을 다시 설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니,

若聞如是勝福故(약문여시승복고),發起精進已(발기정진이)。若於此法中生如義想(약어차법중생여의상),為離此過故(위리차과고),經言(경언):「於說此修多羅中生實想者(어설차수다라중생실상자),當成第一希有(당성제일희유)」等(등)。即於如是實想中(즉어여시실상중),為離實想分別故(위리실상분별고),經言(경언):「彼所有實想即非實想(피소유실상즉비실상)」如是等(여시등)。

만약 이와 같이 수승한 복을 듣게 되면, 바로 정진을 발기(發起)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법에 대해서 이치에 맞는 생각을 내게 되면, 바로 이와 같은 허물을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이같이 말씀하신 수다라에 대해서 실다운 생각을 내는 이는 마땅히 제일가는 희유를 성취하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같이 실다운 생각[實想]에서 실다운 생각이란 분별을 여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저와 같은 모든 실다운 생각은 실다운 생각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것들이다.

經言(경언):「世尊(세존)!我於此法門(아어차법문),若分別若信解不為希有(약분별약신해부위희유),若當來世其有眾生(약당래세기유중생),於此法門受持讀誦為他解釋(어차법문수지독송위타해석),則為第一希有(칙위제일희유)」如是等(여시등)。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제가 이와 같은 법문을 만약 분별하거나

신해(信解)를 내거나, 만약 미래세의 중생이 이와 같은 법을 수지해서 독송하고 섭수해서 다른 이에게 풀이해 준다면, 그야말로

제일가는 희유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此何義(차하의)?為令味著利養過懈怠諸菩薩生慚愧故(위령미저리양과해태제보살생참괴고)。於未來正法滅時(어미래정법멸시),尚有菩薩於此法門受持故(상유보살어차법문수지고)。無人等取及法取(무인등취급법취),云何汝等於正法興時(운하여등어정법흥시),遠離修行不生慚愧也(원리수행부생참괴야)。

그 이치가 어떠한가 하면, 이양의 미경에 집착해서 지나치게 게을러진 여러 보살들로 하여금 참괴(慚愧)를 내게 하고자 함이다.

또 미래세에 정법이 소멸하는 때에도 여전히 이와 같은 법문을

수지하는 보살이 있는데, 지금 이를 평등하게 취하거나 그 법을

취하는 이가 없으니, 어째서 너희들은 정법이 흥성하는 때에

이처럼 수행을 멀리하고도 참괴를 내지 않는 것인가?

經言:「是諸菩薩(시제보살),無復我等想轉(무복아등상전)」者(자),顯示無人取也(현시무인취야)。「所有我想即非我想(소유아상즉비아상)」者,顯示無法取也(현시무법취야)。

경전에서 “여러 보살이 아상(我相) 등으로 전의()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법을 취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모든 것이 아상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취할 만한 법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何以故諸佛世尊離一切想(하이고제불세존리일체상)」者,顯示諸菩薩順學相(현시제보살순학상),諸佛世尊離一切想(제불세존리일체상),是故我等亦應如是學(시고아등역응여시학),此等經文為離退精進故說(차등경문위리퇴정진고설),於中言(어중언),若分別若信解者(약분별약신해자),

後句釋前句也(후구석전구야)。

경전에서 “어째서인가 하면 모든 불세존은 일체의 상()을

여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 보살의 수승한 학업의

상()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모든 불세존께서는 일체의 생각을

여의었으니, 이러한 까닭에 우리들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전의 문구는 퇴실을 여의고 정진케 하고자 이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별하거나 신해를 내거나’라는 구절은 뒤 구절로서 앞 구절을 풀이하는 것이다.

受者受文字也(수자수문자야),攝者攝義也(섭자섭의야),

為離不發起精進故(위리불발기정진고)。

여기서 ‘수지한다’

는 것이란 그 문자를 수지한다는 것이고, ‘섭수한다’는 것이란

이치를 섭수한다는 것이니, 정진을 발기하지 못하는 것을 여의게 하기 때문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若聞說此修多羅章句時不驚(약문설차수다라장구시불경)」等者(등자),以驚等(이경등),故不發起精進也(고불발기정진야)。於聲聞乘中(어성문승중),世尊說有法及有空(세존설유법급유공),於聽聞此經時(어청문차경시),聞法無有故驚(문법무유고경),聞空無有故怖(문공무유고포),於思量時於二不有理中(어사량시어이불유리중),不能相應故畏(불능상응고외)。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이 같은 수다라의 문장이나 구절에 대한 해설을 듣는 때에 놀라지 않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놀래서는 정진을 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문승에게 세존께서 법()도 있고 공()도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경전을 청문하는 때에 법이 없다는 것을 듣고서 놀라게 되고, ‘공’조차 없다는 것을 듣고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량하는 때에 이 두 가지가 없다는 이치에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겁내게 되는 것이다.

更有別釋為三種無自性故應知(경유별석위삼종무자성고응지),謂相生第一義等(위상생제일의등),無自性故(무자성고),經言(경언):「何以故(하이고)?須菩提(수보리)!如來說第一波羅蜜(여래설제일바라밀)」者,此有何義(차유하의)?復說第二生慚愧處故(복설제이생참괴처고)。言此法如是勝上(언차법여시승상),汝等不應放逸(여등불응방일)。

다시 세 종류의 무자성(無自性)을 별도로 풀이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소위 상이 생겨나는 ‘제일의’ 등도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어째서인가 하면, 수보리여, 여래가 말하는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에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하면, 두 번째로 참괴를 내게 되는 처소임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을 이와 같이 수승하고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대들은 방일에 빠지지 말아야 하리니,

於中以於餘波羅蜜中勝故(어중이어여파라밀중승고)。名第一波羅蜜(명제일바라밀),經言(경언):「如來說第一波羅蜜(여래설제일바라밀)」者,「彼無量諸佛亦說波羅蜜(피무량제불역설파라밀)」者,此言顯示一切諸佛同說第一(차언현시일체제불동설제일),是故名第一(시고명제일)。

그 밖의 바라밀 가운데에 처해서도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이라 부르는 것이다.

경전에서 “여래께서 제일바라밀을 말씀하셨고 그와 같은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도 바라밀을 말씀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말씀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동일하게 제일가는 것을 말씀하신 일을 나타내고자 함 이니, 이러한 까닭에 제일이라 부르는 것으로,

9、為離不能忍苦故(위리불능인고고),經言(경언):「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如來說羼提波羅蜜(여래설찬제바라밀)」等。於中如所能忍(어중여소능인),以何相生忍處(이하상생인처)?如忍差別顯示(여인차별현시),對治彼因緣故(대치피인연고)。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여의기 위한 때문이다.

경전에서 “다시 수보리여, 여래가 말씀하시는 찬제바라밀 등은”

이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것에서 능히 인내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떠한 상에서 인처(忍差)가 생겨나겠는가? 그와 같은 인욕의

차별처럼 그러한 인연의 대치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何者能忍謂達法無我故(하자능인위달법무아고),

云何得顯示(운하득현시)?

어째서 능인(能忍)이라 이르는가 하면,

법무아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가능한가 하면,

如經言:「如來說羼提波羅蜜(여래설찬제바라밀)」故。

云何應知忍相(운하응지인상),若他於己起惡等時(약타어기기악등시),由無有我等想(유무유아등상),故不生瞋想(고불생진상),亦不於羼提波羅蜜中生有想(역불어찬제바라밀중생유상),於非波羅蜜中生無想(어비바라밀중생무상)。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시는 찬제바라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욕의 상을 알 수 있는가 하면, 만약 다른 이가 자신에게 악법 등을 일으키는 때에 아상 등이 없는 것에 연유해서 노여운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니, 또한 찬제바라밀 가운데에서도

유상(有想)을 내지 않고, 바라밀 가운데에서도 무상(無想)을

내지 않는 것이다.

此云何顯示(차운하현시)?如經:「如我昔為迦利王割截身分(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분),我於爾時無有我想(아어이시무유아상)」等,及無想(급무상),亦非無想等(역비무상등)。

이것은 어떠한 것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하면, 경전의 “내가 예전에 가리왕에게 내 신체의 각 부분이 절단되었을 때에, 나에게 자아가 있다는 생각[有我想]이나 없다는 생각[無想]이 없었으며 또한

없다는 생각조차 없었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何者種類忍(하자종류인)?謂極苦忍相續苦忍(위극고인상속고인)。此云何顯示(차운하현시)?如經(여경):「如我昔為迦利王割截身分(여아석위가리왕할절신분)」,及言(급언)「我憶過去五百生中(아억과거오백생중),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等。不忍因緣者有三種苦(불인인연자유삼종고):謂流轉苦

(위류전고),眾生相違苦(중생상위고),乏受用苦(핍수용고)。

이것은 어떠한 종류인가 하면, 극고인(極苦忍)과 상속고인(相續苦忍)이다. 이것은 어떠한 것을 나타내려는 것인가 하면,

마치 경전의 “내가 예전에 가리왕에게 신체의 각 부분이 절단되었다”라는 말씀이나 “내가 과거 5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다”라는 말씀 등이다.

참지 못하는[不忍] 인연에는 세 종류의 ‘고’가 있으니, 소위 유전고(流轉苦)ㆍ중생상위고(眾生相違苦)ㆍ핍수용고(乏受用苦)이다.

於中如經(어중여경):

「是故須菩提菩薩摩訶薩應離一切想

(시고수보제보살마가살응리일체상),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누다라삼묘삼보리심)」等。

此為顯示流轉苦忍因緣對治(차위현시류전고인인연대치)。

여기서 경전의 “수보리여,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야 한다”라는 이와 같은 말씀은 유전고의 인연의 대치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發菩提心者(발보제심자),以三種苦想故(이삼종고상고)。則不欲發心故(즉불욕발심고)。說「應離一切想(응리일체상)」等。此中一切想者(차중일체상자),為顯如是等三苦想也(위현여시등삼고상야)。若「著色(저색)」等,則於流轉苦中疲乏故(즉어류전고중피핍고)。菩提心不生故(보제심불생고)。

보리심을 발명한다는 것이란 세 종류의 고상(苦想) 때문이니,

“발심을 지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의 상을 여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상이란 이와 같은 세 가지 고상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만약 색 등에 집착하게 되면, 바로 유전고 가운데에서 피폐해지기 때문이고, 보리심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經言:「不應住色(불응주색),生心(생심)」等。如前說(여전설),不住非法者(부주비법자),謂非法無我也(위비법무아야)。於非法及法無我中皆不住故(어비법급법무아중개부주고)。為成就彼諸不往故(위성취피제불왕고)。

경전에서 “색 따위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다. 비법에 머물지 않는 것이란

소위 법무아가 아닌 것이다. 비법 및 법무아 가운데에도 모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저와 같은 모든 머물지 않음[不往]을 성취하고자 하면,

說遮餘事(설차여사),如經應生無所住心(여경응생무소주심),何以故(하이고)?若心有住即為非住等(약심유주즉위비주등),

그 밖의 일을 차단해야 한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니, 경전에서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어째서인가 하면, 만약 머무른다는 마음을 내더라도 곧 머무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經言:「如是菩薩為利益一切眾生(여시보살위리익일체중생),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乃至言(내지언)「諸所有想即為非想(제소유상즉위비상)」等。此顯示對治眾生相違苦忍(차현시대치중생상위고인),既為一切眾生而行於捨(기위일체중생이행어사),云何於彼應生瞋也(운하어피응생진야)。

경전에서 “이와 같이 보살이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이와 같이 보시하되 (중략) 모든 소유상(所有想)은 상 따위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중생상에 대치하는 것이 고인(苦忍)에 어긋남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일체 중생을 위한 행도 버려야 하거늘 어떻게 저들에게 노여움을 낼 수 있겠는가?

由不能無眾生想(유불능무중생상),以此因緣故(이차인연고),眾生相違時即生疲乏故(중생상위시즉생피핍고),顯示(현시)「人無我法無我(인무아법무아)」等。

중생상을 없앨 수 없는 이와 같은 것도 인연 때문이니, 중생상이

어긋날 때 곧 피로함과 결핍을 낳기 때문에,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 등을 나타내어 보인 것이다.

「須菩提如來是真語者(수보리여래시진어자)」等,此何所顯示(차하소현시)?欲令信如來故能忍(욕령신여래고능인),於中真語者為顯世諦相故(어중진어자위현세체상고);實語者為顯世諦修行(실어자위현세체수행),有煩惱及清淨相故(유번뇌급청정상고)。

“수보리여, 여래는 진어자(真語者)이시니” 등의 이 같은 구절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면, 여래를 믿게 하고자 지욕하는 까닭에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어자란 세제(世諦)의 상을 나타내고자 함이고, 실어자(實語者)란 세제의 수행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번뇌 및 청정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

於中實者(어중실자),此行煩惱此行清淨故(차행번뇌차행청정고)。如語者為第一義諦相故(여어자위제일의체상고),不異語者為第一義諦修行(불이어자위제일의체수행),有煩惱及清淨相故(유번뇌급청정상고)。說此真語等已(설차진어등이),於此中如言說性起執著(어차중여언설성기집저)。為遣此故(위견차고),

여기에서 실다운 것[실]이란 이와 같은 행은 번뇌이고 이와 같은 행은 청정하기 때문이고, 여어(여어)란 제일의제(제일의체)의 상이기 때문이다. 불이어(부이어)란 제일의제의 수행이니, 번뇌와 청정한 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진어 등을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그 언설의 성품에 따라 집착을 일으키는,

이와 같은 것을 몰아내기 위함 때문이다.

經言:「須菩提如來正覺法(수보리여래정각법)」及說(급설),「於中無實無妄(어중무실무망),無實者如言說性非有故(무실자여언설성비유고)。無妄者不如言說自性有故(무망자부여언설자성유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래의 법을 바르게 깨쳤다는 것이나

그와 같은 말씀은 실답지 않으며[無實] 허망하지 않으니[無妄]”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에서,

실답지 않다란 언설의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고,

허망하지 않다란 언설 그대로의 자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須菩提譬如丈夫入闇(수보리비여장부입암)」如是等(여시등),顯示乏受用苦忍因緣對治(현시핍수용고인인연대치),若為果報布施(약위과보보시),便著於事而捨施(편저어사이사시),彼於異施欲樂苦受中不解出離(피어이시욕악고수중부해출리),猶如入闇不知我何所趣(유여입암부지아하소취)。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장부가 어둠 속에 들어가는 것이니”와 같은 구절은 핍수용고인(乏受用苦)의 인연의 대치를 나타내고자 함이니, 만약 과보를 위해서 보시하는 경우, 사물에 집착하여 사시(捨施)를 행하는, 그와 같은 이시(異施)의 욕락(欲樂)에 처하면,

고수(苦受) 가운데에서 해탈하여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으니,

彼喜欲樂亦爾(피희욕악역이),若不著於事而行布施(약부저어사이행포시),如有眼丈夫(여유안장부),夜過日出(야과일출),見種種色隨意所趣(견종종색수의소취),應如是見(응여시견)。彼無明夜過(피무명야과),慧日出已(혜일출이),種種爾焰(종종이염),如實見之(여실견지),彼不知解出離欲樂苦受故(피부지해출리욕악고수고),喜樂欲樂(희악욕악)。

저 욕락을 즐기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두 눈이 멀쩡한 장부가 날이 밝아 해가 뜨면 갖가지 색을 보고 마음대로 가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만 한다. 그들이 무명의 밤이 지나고 지혜의 해가 뜨게 되면, 갖가지 아지랑이를 실답다고 보고 그들이 욕락의 고수(고수)에서 해탈하여

벗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욕락을 즐기는,

10、為離闕少智資糧故(위리궐소지자량고),經言:「須菩提若復善家子善家女(수보리약부선가자선가녀),於此法門若受(어차법문약수)」等。此中為離三摩提攀緣(차중위리삼마제반연),顯示與法相應(현시여법상응)。有五種勝功德(유오종승공덕):

그 지혜의 자량이 결핍된 것을 여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선가자(善家子)ㆍ선가녀(善家女)가 이와 같은 법문을 수지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삼마제의 반연을 여의게 하고자 법에 상응하는 다섯 종류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1)如來憶念親近(여래억념친근),

(2)攝福德(섭복덕),(3)讚歎法及修行(찬탄법급수행),

(4)天等供養(천등공양),(5)滅罪(멸죄)。

첫 번째는 여래를 억념하여 가까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복덕을 섭수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법과 수행을 찬탄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천신 등의 공양이고,

다섯 번째는 죄업의 소멸이다.

(1)何者如來憶念親近(하자여래억념친근)?如經(여경):「受持讀誦者(수지독송자),如來以佛智知彼(여래이불지지피),如來以佛眼見彼(여래이불안견피)」等。於中受者習誦故(어중수자습송고),持者不忘故(지자부망고)。若讀若攝(약독약섭)(編者註(편자주):「攝(섭)」一本作(일본작)「誦(송)」)者,此說受持因故(차설수지인고)。  

여기서 어떠한 것이 여래를 억념하여 가까이하는 것인가 하면,

만약 경전을 수지하여 독송하는 경우, 여래께서 불지(佛智)로서

그와 같은 일을 아시고 여래께서 불안(佛眼)으로 그와 같은 이들을 보시는 것이다.

여기서 수지한다는 것이란 거듭 독송하기 때문이고,

지닌다는 것이란 잊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독송하거나 섭수한다’라고 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이 수지하는 인(因)임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為欲受故讀(위욕수고독),為欲持故攝誦(위욕지고섭송),又復讀者習誦故(우복독자습송고)。攝者總覽義故(섭자총람의고)。

받들고자 독송하고 지니고자 섭수하는 것이니, 다시 여기서 독송이란 거듭 외우는 것이고, 섭수란 그 이치를 모두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2)何者攝福德(하자섭복덕)?如經(여경):「是諸眾生(시제중생),生如是無量福德聚(생여시무량복덕취)」等。

어떠한 것이 복덕의 섭수인가 하면, 경전의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무량한 복덕의 취(聚)가 생겨난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3)何者讚歎法及修行(하자찬탄법급수행)?如經(여경):「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此法門不可思不可稱(차법문부가사부가칭)」等。此為讚歎法(차위찬탄법),

於中不可思者(어중부가사자),唯自覺故(유자각고)。

不可稱者(부가칭자),無有等及勝故(무유등급승고)。

어떠한 것이 법과 수행의 찬탄인가 하면, 마치 경전의 “다시 수보리여, 이와 같은 법문은 불가사(不可思)하고 불가칭(不可稱)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법을 찬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가사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고,

불가칭이란 이와 동등하거나 수승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經言:「又此法門(우차법문),如來為發最上乘者說(여래위발최상승자설),為發最勝乘者說(위발최승승자설)」者,此成就不可稱義(차성취부가칭의),於中餘乘不及故(어중여승부급고),最上煩惱障智障淨故(최상번뇌장지장정고),

最勝應知(최승응지)。

경전에서 “다시 이 법문을 여래께서 가장 수승한 승(乘)을 발명한 이에게 말씀하셨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가장 수승한 승을

발명한 이에게 말씀하신 것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의 성취가

불가칭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여승(餘乘)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고, 가장 수승하게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이 청정하기 때문에 가장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經言:「若於此法門受持(약어차법문수지),乃至如來悉知見(내지여래실지견)」等者(등자),此為讚歎修行(차위찬탄수행)。於中(어중)「是諸眾生成就無量(시제중생성취무량)」者,是總說(시총설),「不可思不可稱不可量(부가사부가칭부가량)」者,解釋故(해석고)。是等即為荷擔我菩提者(시등즉위하담아보제자),謂肩負菩提重擔故(위견부보제중담고)。

경전에서 “만약 이와 같은 법문을 수지하면 (중략) 여래가 모두

이를 보고 아시게 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수행의 찬탄이다. 여기에서 이와 같은 모든 중생이 무량을 성취한다는 것은

총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니, 불가사ㆍ불가칭ㆍ불가량(不可量)을 해석하고자 함이다.

이 같은 것이 바로 나의 보리를 짊어지는 것이란 어깨에 보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須菩提下信解(수보리하신해)」者,不能聞此法者(불능문차법자),謂聲聞獨覺乘者故(위성문독각승자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하품의 신해를 내는 자는 이 같은 법을

듣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은 성문승ㆍ독각승에 해당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經言:「若有我(약유아)」等見者(등견자),謂有人我見眾生(위유인아견중생),而自謂菩薩者(이자위보살자)。

경전에서 “만약 아견(我見) 따위가 있는 이는”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은, 아견의 중생에 해당하는 사람이니 스스로 보살이라

자칭하는 것이다.

(4)何者天等供養(하자천등공양)。如經:「復次(부차),

須菩提(수보리),隨所地分解說此修多羅處(수소지분해설차수다라처),常應供養(상응공양),彼地分即為支提(피지분즉위지제)」等,於中(어중)「以華鬘燒香熏香塗香末香(이화만소향훈향도향말향),衣蓋幢幡(의개당번)」等,「供養恭敬禮拜右遶(공양공경례배우요)」,故名支提(고명지제)。

여기서 천신 등의 공양이란 무엇인가 하면, 마치 경전의 “다시

수보리여, 그 지위[地]의 분야에 부수해서 이 같은 수다라처(修多羅處)를 해설하고자, 늘 그와 같은 지위[地]의 분야를 공양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처럼 바로 지제(支提) 따위이다.

여기에서 꽃다발ㆍ소향(燒香)ㆍ훈향(熏香)ㆍ도향(塗香)ㆍ말향(末香)ㆍ법의(衣)ㆍ보개(蓋)ㆍ당번(幢幡) 등으로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면서 오른쪽으로 도는 까닭에 지제라 부르는 것이다.

5)何者滅罪(하자멸죄)?如經:「彼若為人輕賤(피약위인경천),甚輕賤乃至當得菩提(심경천내지당득보리)」等故。

此毀辱事有無量門(차훼욕사유무량문),

為顯示此故復言甚輕賤(위현시차고부언심경천)。

죄의 소멸이란 무엇인가 하면, 경전의 “그와 같은 사람이 비천한

사람이더라도 심지어 가장 비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보리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 같은 비방하는 일에는 무량한 문이 있으니,

이것을 나타내고자 다시 가장 비천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言:「當得佛菩提(당득불보리)」者,顯示罪滅故(현시죄멸고)。前所說(전소설)「以此因緣出生無量阿僧祇多福(이차인연출생무량아승기다복)」者,今當解釋(금당해석)。

경전에서 “미래에 불보리(佛菩提)를 성취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죄의 소멸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 같은 인연으로 무량한 아승기의 많은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해석하겠다.

彼無量阿僧祇義應知(피무량아승기의응지),威力者成熟熾然故(위력자성숙치연고)。多者具足勝大故(다자구족승대고)。

於中如經(어중여경):「須菩提(수보리),我憶阿僧祇過阿僧祇劫前(아억아승기과아승기겁전)」如是等(여시등),

此顯示威力故(차현시위력고)。即是福聚威力(즉시복취위력),以彼所有福聚遠絕高勝故(이피소유복취원절고승고)。

그와 같은 무량한 아승기의 뜻를 알아야 한다.

위력(威力)이란 그 성숙이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듯[熾然] 하기 때문이고, 많다는 것이란 승(勝)과 대(大)가 구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경전의 “수보리여, 내가 아승기겁에 아승기겁을 거쳤으니, 겁 이전에도 이와 같았다는 것을 기억하노라”라는 말씀은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니, 바로 복취(福聚)의 위력이다.

그와 같은 모든 복취는 현저하게 높고 수승하기 때문이다.

此中阿僧祇劫者乃至燃燈(차중아승기겁자내지연등),佛故應知過阿僧祇者(불고응지과아승기자),更過前故親近者(경과전고친근자),供養故(공양고)。不空過者(불공과자),常不離供養故(상불리공양고)。

여기에서 아승기겁이란 연등불에 이르기까지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아승기를 거쳤으니’라고 한 것은 그 앞서의 겁으로 소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까이한다는 것이란 공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란 언제나 공양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若復經言(약부경언):「須菩提(수보리),若善男子善女人所得福聚若我說(약선남자선녀인소득복취약아설)」者,

「若有人聞心則狂亂(약유인문심칙광란)」如是等(여시등)。

此顯示多故(차현시다고)。

만약 다시 경전의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소득하는

복취가 내가 말한 대로라면, 만약 이와 같은 것을 듣는 이는 마음이 미쳐버리는지라”와 같은 이러한 말씀은 많음을 현시하고자 함이니,

或為狂因或得亂心果應知(혹위광인혹득란심과응지),此之彼威力及彼多等(차지피위력급피다등),何人能說(하인능설)。

미치는 인이나 또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과를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그와 같은 위력 및 그와 같이 많은 것을 어떠한 사람이 말할 수 있겠는가?

是故經言(시고경언):「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此法門不可思議(차법문부가사의),果報亦不可思議(과보역불가사의)」,此顯示彼福體及果不可測量(차현시피복체급과불가측량),故為遠離自取故(고위원리자취고)。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 “다시 수보리여, 이와 같은 법문은 불가사의하니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그와 같은 복의 체(體)와 과(果)가 측량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자 함이고, 스스로 취하는 것을 멀리 여위었기(遠離) 때문이다.

經言:「須菩提言(수보리언),云何菩薩大乘中發心應住(운하보살대승중발심응주)」等。何故復發起此初時問也(하고복발기차초시문야)?將入證道菩薩(장입증도보살),自見得勝處(자견득승처),作是念(작시념):我如是住(아여시주),如是修行(여시수행),如是降伏心(여시강복심),我滅度眾生(아멸도중생),為對治此故(위대치차고),須菩提問(수보제문):「當於彼時如所應住(당어피시여소응주),如所應修行(여소응수행),如所應降伏其心(여소응강복기심)。」世尊答(세존답)「應生如是心(응생여시심)」等。

경전에서 “수보리가 ‘어째서 보살은 대승 가운데 발심하여 머물러야만 합니까?’라고 여쭈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어째서 다시 이와 같은 초시분에 해당하는 질문이 발기되는 것인가 하면, 장차 증도에 들어가는 보살이 수승한 처(處)를 얻었다는 견해를 내어 ‘내가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았으니, 내가 중생을 멸도시킨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내는 이러한 것을 대치하고자, 수보리가 “그와 같은 때에는

그 응하는 것[所應]에 따라 머물러야 하고 응하는 것에 따라 수행해야 하고, 응하는 것에 따라 항복받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세존께서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又經言:「須菩提(수보리),若菩薩眾生(약보살중생)」等想轉者(등상전자),為顯我執取或隨眠故(위현아집취혹수면고)。若言我正行菩薩乘(약언아정행보살승),此為我取(차위아취),對治彼故(대치피고),

다시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중생상(眾生想) 등으로

전의(轉)하는 경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집취(我執取)와 수면(隨眠)을 현시하고자 함이다. 만약 “내가 보살승을 지금 행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이와 같은 것은 아취(我取)가 되기에, 바로 그와 같은 것을 대치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

無有法發行菩薩乘(무유법발행보살승)」者。

경전에서 “수보리여, 보살승을 발행(발행)한다는 법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12、為離無教授故(위리무교수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有法如來於燃燈如來所(유법여래어연등여래소)」等。又經言(우경언):「須菩提(수보리)!若有法如來得正覺者(약유법여래득정각자),燃燈如來則不授記(연등여래즉불수기),汝當得(여당득)」等。

가르침의 전수가 없는 것을 여의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래가 연등불의 처소에서 어떠한 법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다시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여래가 정각을 획득한 법이 있다면, 연등여래가 네가 미래에 성취하게 되리라고 수기(授記)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등,

此有何意(차유하의)?若正覺法可說(약정각법가설),如彼燃燈如來所說者(여피연등여래소설자),我於彼時便得正覺(아어피시편득정각),燃燈如來則不授記(연등여래즉불수기),言汝當得等(언여당득등)。以彼法不可說故(이피법부가설고)。我於彼時不得正覺(아어피시부득정각),是故與我授記(시고여아수기),此是其義應知(차시기의응지)。

이와 같은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법의 정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치 저 연등여래가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그때에

정각을 획득해서 연등여래께서 네가 미래에 얻게 되리라고 수기를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와 같은 법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 “내가 그때에 정각을 성취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까닭에 나에게 수기하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이 그 이치임을 알아야 한다.

又何故彼法不可說(우하고피법불가설)?如經(여경):「須菩提(수보리)!如來者(여래자),即是真如故(즉시진여고)。」如清淨故(여청정고),名為如來(명위여래),以如不可說故(이여불가설고),作此說(작차설),清淨如名為真如(청정여명위진여),猶如真金(유여진김)。或言燃燈如來所(혹언연등여래소),於法不得正覺(어법부득정각),世尊後時自得正覺(세존후시자득정각)。為離此取故(위리차취고),

또 어째서 그와 같은 법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인가 하면, 경전의

“수보리여, 여래가 바로 진여(진여)이기 때문이고 청정하기 때문에 ‘여래’라 부르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진여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같이 ‘청정한 그대로’를 ‘진여’라고 부르는 것이니, 마치 순금과 같은 것이다. 또 “연등여래의 처소에서 법의 정각을 얻지 못하고 세존께서 후시분(後時)에 정각을 자득했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같이 취한다는 것을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若人如是言(약인여시언),如來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여래정각아누다라삼먁삼보리자)」等。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누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쳤다고 이같이 말하는”이라 말씀하시는 것과,

又經言:「須菩提(수보리),如來所正覺法(여래소정각법),

於是中不實不妄(어시중불실불망)」者,顯示真如無二故(현시진여무이고)。云何不實(운하불실)?謂言說故(위언설고)。

不妄者(불망자),謂彼正覺(위피정각),不無世間言說故(부무세간언설고)。

다시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래가 바르게 깨달은 법은 이 가운데에서 실답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진여가 둘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어째서 실답지 않다고 하는가 하면, 언설이기 때문이다. 허망하지 않다는 것이란 그와 같은 정각이 세간의 언설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經言:「是故如來說一切法(시고여래설일체법),即是佛法(즉시불법)」者,此何義(차하의)?顯一切法法如清淨故(현일체법법여청정고)。如者遍一切法故(여자편일체법고),此是其義(차시기의),又彼一切法法體不成就(우피일체법법체불성취),為安立第一義故(위안립제일의고)。

경전에서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체법이 바로 불법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일체법의 법 그대로가 청정임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기서 그대로[如]란 일체법에 두루 가득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것이 바로 그 이치이다. 또 그와 같은 일체법의 그 법체가 성취 불가능한 것을 제일의로 안립하고자 함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一切法者悉是非法(일체법자실시비법)」,是名一切法故(시명일체법고)。

為人證道故(위인증도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일체법이란 모두 법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일체법이라 부르는 것으로써, 증도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經言:「須菩提譬如有人(수보리비여유인),妙身大身(묘신대신)」如是等(여시등)。顯示人證道時(현시인증도시),得智慧(득지혜),故離慢(고리만)。云何得智(운하득지)?有二種智故(유이종지고)。謂攝種性智及平等智(위섭종성지급평등지)。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묘신(妙身)과 대신(大身)”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증도에 들어가는 시분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지혜를 얻게 되는 까닭에 만결을 여의게 된다.

어떻게 지혜를 얻는가 하면, 두 종류의 지혜가 있는데,

섭종성지(攝種性智) 및 평등지(平等智)이다.

若得智已(약득지이),得生如來家(득생여래가),得決定紹佛種(득결정소불종),此為攝種性智(차위섭종성지),得此智已能得妙身(득차지이능득묘신),若於此家長夜願生(약어차가장야원생),既得生已便得彼身(기득생이편득피신),是名妙身平等智(시명묘신평등지)。

만약 지혜를 얻거나 이미 얻었다면, 여래의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니, 부처님의 종성을 잇는 이러한 것이 섭종성지이다. 이와 같은

지혜를 얻고 나면 묘신을 얻을 수 있으니, 만약 이와 같은 여래의 집에 대해 무명의 긴긴밤 동안 출생(出生)의 서원을 세워서, 태어나자 바로 그와 같은 신체를 얻게 되는, 이와 같은 것을 묘신이라 부른다.

復有五種平等因緣(부유오종평등인연):謂(위)1、麤惡平等(추악평등),2、法無我平等(법무아평등),3、斷相應平等(단상응평등),4、無希望心相應平等(무희망심상응평등),5、一切菩薩證道平等(일체보살증도평등)。

평등 지혜에는 다시 다섯 종류의 평등의 인연이 있으니, 소위 추악평등(麤惡平等)ㆍ법무아평등(法無我平等)ㆍ단상응평등(斷相應平等)ㆍ무희망심상응평등(無希望心相應平等)ㆍ일체보살증도평등(一切菩薩證道平等)이다.

得此等故得為大身(득차등고득위대신),攝一切眾生大身故(섭일체중생대신고)。於彼身中安立非自非他故(어피신중안립비자비타고)。

이와 같은 것을 얻는 까닭에 얻게 되는 ‘대신’은 일체의 중생을

섭수하는 대신이기에, 그와 같은 신체 가운데에 자타가 아닌 것을 안립하고자 함이다.

經言:「如來所說(여래소설),有人妙身大身即非身(유인묘신대신즉비신),是故如來說名妙身大身(시고여래설명묘신대신)」等。此於妙身等中安立第一義(차어묘신등중안립제일의),如是等是為得智慧(여시등시위득지혜),云何離慢(운하리만)?如經(여경):「若菩薩作是言(약보살작시언)」等。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신 어떤 사람의 묘신과 대신도 신체가 아니니,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묘신과 대신 따위를 말씀하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묘신 따위를 제일로 안립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어떠한 것이 만결을 여의는 것인가 하면, 경전의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말한다면” 등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此云何可知(차운하가지)?若作是念(약작시념),我滅度眾生(아멸도중생),我是菩薩(아시보살),應知此是慢者(응지차시만자),非實義菩薩(비실의보살),為顯示此故(위현시차고),)」故(고)。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만약 “내가 중생을 멸도시켰으니, 내가 보살이다”라는 생각을 내는 경우가 이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만결을 내는 이는 실다운 이치의 보살이 아니기에,

이와 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經言(경언):「是故如來說一切法無眾生(시고여래설일체법무중생),若菩薩有眾生念(약보살유중생념),

則不得妙身大身(즉부득묘신대신)

경전에서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일체법에는 중생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 보살이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묘신과 대신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니,

彼為(피위)﹝十八(십팔)﹞「上求佛地(상구불지)」1、

淨國土三摩缽帝故(정국토삼마발제고)。

그들이 불지를 상구(上求)하는 가운데에 그 국토와 삼마발제를

청정케 하고자 함이다.

經言:「須菩提若菩薩作是言(수보리약보살작시언),我當成就莊嚴國土(아당성취장엄국토),則非菩薩(칙비보살)」,此義為於共見正行中轉故(차의위어공견정행중전고)。為斷彼故安立第一義(위단피고안립제일의)。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장엄국토를 성취하리라고 말한다면 보살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이치는 공견(공현)의 정행(정행) 가운데에서 전의하기 때문이니, 그와 같은 것을 끊고자 제일의를 안립하게 된다.

  經言(경언):「即非莊嚴如來(즉비장엄여래),

說名莊嚴國土(설명장엄국토)」等。

경전에서 “장엄이 아니기에 여래가 국토를 장엄한다고 말씀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又經言:「須菩提(수보리),若菩薩信解無我法(약보살신해무아법)」,無我法者(무아법자),此言為二種無我故(차언위이종무아고)。謂人無我(위인무아)、法無我(법무아)。

또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법을 신해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에서 무아법이란 이 같은 두 종류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니, 소위 인무아와 법무아이다.

又經言:「如來說名菩薩(여래설명보살)」,菩薩者(보살자),為於彼二種無我中二種正覺故

(위어피이종무아중이종정각고)。

또 경전에서 “여래께서 보살이라 부르시는 것도”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보살이란 그와 같은 두 종류의 무아 가운데에서 두 종류의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此等云何顯示(차등운하현시)?若言我成就(약언아성취),

即為人我取(즉위인아취);莊嚴國土者(장엄국토자),

是法我取(시법아취),此非菩薩(차비보살)。

이것은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가 하면, 만약 “내가 성취하였으니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장엄국토를 취하였다”라고 말하는 경우, 이처럼 법아(法我)를 취하는 이러한 사람은 보살이 아니기에,

為見(위견)﹝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2、

智淨具足故(지정구족고),

經言:「須菩提於意云何(수보제어의운하)?如來有肉眼不(여래유육안부)?」如是等(여시등)。如來不唯有慧眼(여래부유유혜안),為令知見淨勝故(위령지견정승고)。

顯示有五種眼(현시유오종안),

若異此則唯求慧眼見淨故(약이차칙유구혜안견정고)。

그 견(見)ㆍ지(地)의 청정을 구족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그와 같은 것에서 여래는 오직 혜안(慧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 ‘견’의 청정하고 수승함을 깨닫게 하고자 다섯 종류의 안(眼)을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를 경우에는, 오직 혜안의 견정(見淨)만을 구하기 때문에,

於中略說有四種眼(어중략설유사종안):謂色攝(위색섭),第一義諦攝(제일의체섭),世諦攝(세체섭),一切種一切應知攝(일체종일체응지섭)。色攝復有二種(색섭복유이종):謂法果(위법과)、修果(수과)。此為五眼麤境界故(차위오안추경계고)。是初色攝第一義智力故(시초색섭제일의지력고)。世智不顛倒轉(세지부전도전),是故第一義諦攝在先(시고제일의체섭재선)。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네 종류의 ‘안’을 설명하는 것이니, 소위 색섭(色攝)ㆍ제일의제섭(第一義諦攝)ㆍ세제섭(世諦攝)ㆍ일체종일체응지섭(一切種一切應知攝)이다. 색섭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법과(法果)와 수과(修果)이다. 이러한 것이 5안(眼)이니,

바로 추색(麤色)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최초의 색섭은 제일의(第一義)의 위력 때문에, 세간지(世智)에 전도되어 전의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제일의제섭을 우선하는 것이니,

於中為人說法(어중위인설법),若彼法為彼人施設(약피법위피인시설),此智說名法眼(차지설명법안),一切應知中(일체응지중),一切種無功用智(일체종무공용지),說名佛眼(설명불안),此等名為見淨(차등명위견정)。

이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설법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법을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시설(施設)한다면,

이 같은 지혜를 법안(法眼)이라 부르게 되니,

일체의 응지(應知) 가운데에서 ‘일체종(一切種)의 무공용지(無功用智)’를 ‘불안’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 붙이는 것은 견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如經說恒河等譬喻(여경설항하등비유),「所有若干種心住我悉知(소유약간종심주아실지)」等,此為智淨(차위지정)。

마치 경전에서 항하 등의 비유를 들어 “모든 약간종(若干種)의

심주(心住)라도 내가 모두 이를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지의 청정이다.

於中心住者(어중심주자),謂三世心(위삼세심),若干種者(약간종자),應知有二種(응지유이종):謂染及淨(위염급정),

即是共欲心(즉시공욕심)、離欲心等(이욕심등)。

世者謂過去等分(세자위과거등분)。

於此二中安立第一義故(어차이중안립제일의고)。

여기에서 심주란 삼세심(三世心)이고, 약간종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염(染) 및 정(淨)이니, 바로 공욕심(共欲心)과 이욕심(離欲心) 등이다. 여기서 세(世)란 소위 과거 따위의 시분이니, 이 두 가지 가운데에서 제일의를 안립하기 때문이다.

經言:「心住者即為非住(심주자즉위비주),乃至過去心不可得(내지과거심불가득)」等。於中(어중)「過去心不可得(과거심불가득)」者,已滅故(이멸고)。未來者(미래자),

未有故(미유고)。現在者(현재자),第一義故(제일의고)。

為應知中證故(위응지중증고)。

경전에서 “심주(心住)란 머무는 것이 아니니 (중략) 과거심(過去心)으로도 얻을 수 없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기에서 과거심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란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이고 미래심(未來心)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란 미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현재심(現在心)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란 제일의이기 때문이다. 응지(應知) 가운데의 증명을 삼고자

安立見為教彼(안립견위교피),彼眾生寂靜心故安立智(피중생적정심고안립지),於此智淨中(어차지정중),說心住即非心住(설심주즉비심주),如是見淨中(여시견정중),何故不說眼即非也(하고부설안즉비야)?以一住處故(이일주처고),

見智淨後安立第一義故(견지정후안립제일의고),

初亦得成就(초역득성취)。

견을 안립하는 것도 그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니,

그와 같은 중생들의 마음을 적정케 하려고 하기 때문에 지혜를

안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지의 청정 가운데에서 “심주는

곧 심주가 아니다”라고 설명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견의 청정 가운데에서 어째서 안이 안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면, 동일한 주처이기 때문이고, 견이 청정해지고 지가 청정해진 이후에 제일의를 안립하기 때문이고, 최초의 안을 성취해서

為﹝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3、

自在具足故(자재구족고),經言:「此三千大千世界(차삼천대천세계)」等。於中亦安立第一義故(어중역안립제일의고)。

복을 자재하게 구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이 같은 삼천대천세계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若福聚有實(약복취유실)」等。

於身具足中為好具足故(어신구족중위호구족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복취가 실다운 것이라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신체가 구족한 가운데 처해서 선호(選好)하게 구족하려 하기 때문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以色身成就見如來不(이색신성취견여래부)?」如是等(여시등)。

於中亦以安立第一義故(어중역이안립제일의고),

經言(경언):「如來說非成就(여래설비성취)」等。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색신(色身)의 성취로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여래께서 성취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이라 말씀하시는 것도,

為﹝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4、

相身具足故(상신구족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可以相具足見如來不(가이상구족견여래부)?」如是等(여시등)。

상신(相身)을 구족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의 구족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為﹝十八﹞「上求佛地」5、

語具足故(어구족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汝謂如來作是念(여위여래작시념):

我說法也(아설법야)」如是等(여시등)。於中安立第一義故(어중안립제일의고),經言(경언):「如來說法(여래설법),

說法者(설법자)」等。

어구족(語具足)이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너는 여래가 설법한다는 생각을 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여래가 법을 말씀하시되”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구절에서 법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란

於﹝十八﹞「上求佛地」6、

「心具足(심구족)」中,(1)為念處故(위념처고),

經言:「世尊(세존)!頗有眾生於未來世聞說是法(파유중생어미래세문설시법)」等。此處於諸眾生中顯示(차처어제중생중현시),如世尊念處故(여세존념처고)。彼非眾生者第一義故(피비중생자제일의고)。非不眾生者世諦故(비부중생자세체고)。是人即為希有第一者(시인즉위희유제일자),顯示說第一義(현시설제일의),是不共及相應故(시부공급상응고)。

此文如前說(차문여전설)。

심구족(心具足) 가운데에서 염처(念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많은 중생이 미래세에 이 같은 법을 듣고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같은 처소가 여러 중생 가운데 처하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되, 세존의 염처 그대로이기 때문이고,

그와 같은 비중생이란 것이 제일의이기 때문이고, 중생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은 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희유하기가 제일이라는 것은 제일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불공(不共) 및 상응(相應)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구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

於﹝十八﹞「上求佛地」6、

「心具足(심구족)」中,(2)為正覺故(위정각고),

經言:「頗有法如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파유법여래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正覺也(득정각야)」如是等(여시등)。於中無有法者(어중무유법자),為離有見過(위리유견과),已顯示菩提及菩提道故(이현시보제급보제도고)。彼復顯示菩提(피부현시보리),有二種因緣(유이종인연),謂阿耨多羅語故(위아누다라어고)。三藐三佛陀語故(삼먁삼불타어고)。

그와 같은 심구족 가운데에서 정각을 이루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정각을 얻었다는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법이 없다는 것’이란 유견(有見)의 허물을 여의게 하고자, 이미 보리 및 보리도(菩提道)를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다시 나타나는 보리에는 두 종류의 인연이 있으니, 말하자면 아뇩다라어(阿耨多羅語)에 기인하고, 삼먁삼불타어(三藐三佛陀語)에 기인하는 것이다.

於中經言(어중경언):「微塵許法不可得不可有(미진허법불가득불가유)」者,此為阿耨多羅語故(차위아뇩다라어고)。此顯示菩提自相故(차현시보리자상고),菩提解脫相故(보리해탈상고)。彼中無微塵許法有體(피중무미진허법유체),是故亦無可得亦無所有應知(시고역무가득역무소유응지),經言:「復次須菩提是法平等(부차수보리시법평등)」者,為三藐三佛陀語故(위삼먁삼불타어고)。顯示菩提者人平等相(현시보리자인평등상),於中平等者以菩提法故(어중평등자이보리법고)。得知是佛(득지시불)。

여기서 경전에서 “미진수(微塵數)와 같은 법은 얻지도 못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아뇩다라어에 해당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보리의 자상을 나타내고, 보리의 해탈상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그 같은 가운데 체가 있는 미진수의 법은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얻는다는 것도 없고, 소유도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경전에서 “다시 수보리여, 이와 같은 법은 평등한 것이기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삼먁삼불타어에 해당하기 때문이니, 보리가 인(人)의 평등상임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여기에서 평등이란 보리법으로서 이와 같은 부처님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此中經言(차중경언):「無有高下(무유고하)」者,顯示一切諸佛第一義中(현시일절체불제일의중),壽命等無高下故(수명등무고하고),經言:「無壽者(무수자),無眾生得彼平等阿耨多羅三藐三菩提(무중생득피평등아뇩다라삼먁삼보리)」者,顯示菩提(현시보리),於生死法平等相故(어생사법평등상고),經言:「一切善法得正覺(일체선법득정각)」者,顯示菩提道故(현시보리도고),經言:「所言善法(소언선법)、善法者(선법자),如來說非善法(여래설비선법)」等。此安立第一義相故(차안립제일의상고)。

이 가운데 경전에서 “높고 낮음도 없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 제일의 가운데에서 수행(壽)과 명행(命) 등이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행도 없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같이 평등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는 중생은 없다는 것이니,

보리는 생사법의 평등한 상(相)임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일체의 선법으로 정각을 얻을 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리도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선법이라 말하는 선법도 여래가 선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제일의의 상을 안립하고자 함이다.

於﹝十八﹞「上求佛地」6、

「心具足(심구족)」中,(3)為施設大利法故(위시설대리법고),經言(경언):「三千大千世界中所有須彌(삼천대천세계중소유수미)」如是等(여시등)。於中為安立第一義教授故(어중위안립제일의교수고),經言(경언):「如來頗作是念我度眾生耶(여래파작시념아도중생야)?」如是等(여시등)。如來則有我等取者(여래칙유아등취자),此有何義(차유하의)?如來如爾焰而知是故(여래여이염이지시고)。

그와 같은 심구족 가운데에서 광대한 이익법[大利法]을 시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삼천대천세계 가운데의 모든 수미”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이 가운데에 제일의의 교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여래가 내가 중생을 제도하였다는 생각을 내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여래가 바로 유아취자(有我取者) 등이라는 것이니, 이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여래는 아지랑이와 같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

若有眾生想(약유중생상),如來則為有我取(여래칙위유아취);若實無我而言有我取(약실무아이언유아취),為離此著故(위리차저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我取者即為非取(아취자즉위비취)」是如等(시여등)。是故但小兒凡夫有如是取故(시고단소아범부유여시취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凡夫(범부)、凡夫者(범부자),如來說非凡夫(여래설비범부),是名凡夫(시명범부)」故。

만약 중생상이 있다면 여래도 유아취가 될 것이나, 실제로 무아이면서 유아취를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집착을 여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아(我)를 취한다는 것도 바로 취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 단지 어린아이 같은 범부는 이 같은 것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범부의 범부란 여래는 범부가 아니라고 말씀하니, 이와 같은 것을 범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於﹝十八﹞「上求佛地」6、

「心具足(심구족)」中,(4)為攝取法身故(위섭취법신고),經言:「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應以相成就見如來不(응이상성취견여래부)?」如是等(여시등)。於中初偈顯示如所不應見不可見故(어중초게현시여소부응견불가견고)。

그와 같은 심구족 가운데에서 법신을 섭수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의 성취로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최초의 게송이

보지도 말아야 하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云何不可見(운하불가견)?諸見世諦故(제견세체고)。

「是人行邪靜(시인행사정)」者,定名為靜(정명위정),

以得禪者說名寂靜者故(이득선자설명적정자고)。

又復禪名思惟修故(우복선명사유수고)。

어째서 볼 수 없는가 하면, 모든 견은 세제이기 때문에, 사람이

삿된 정(靜)을 행하는 것이니, 정(定)을 적정(寂靜)이라 부르고, 선(禪)을 얻은 이를 적정자(寂靜者)라 부르기 때문이다.

또 선을 사유수(思惟修)라 부르기 때문이다.

於中思者意所攝(어중사자의소섭),修者識所攝(수자식소섭),言寂靜者即說意及識(언적정자즉설의급식),此世諦所攝應知(차세체소섭응지)。彼不應見佛者(피부응견불자),謂彼世諦行者(위피세체행자)。第二偈顯示如彼不應見(제이게현시여피부응견),及不應見因緣(급부응견인연),謂初分次分(위초분차분),於中偈言以法應見佛者(어중게언이법응견불자),

法者謂真如義也(법자위진여의야)。

여기에서 사(思)란 의(意)에 섭수되는 것이고, 수(修)란 식(識)에 섭수되는 것이니, 적정이라는 말은 의와 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것은 세제에 섭수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와 같이 부처님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란 소위 그와 같은 세제를 행하는 것이다. 제2의 게송에서는 ‘그와 같이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그와 같은 인연조차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말하자면 초분(初分)과 차분(次分)이다.

여기서 ‘법으로써 부처님을 볼 수 있다’라고 게송으로 말하는,

이 같은 법이란 진여(真如)의 이치이다.

此何因緣(차하인연)?偈言(게언):導師法為身故(도사법위신고)。以如為緣故(이여위연고)。出生諸佛淨身(출생제불정신),此不可見(차불가견),但應見法故彼不應見(단응견법고피불응견)。復何因緣故不可見(부하인연고불가견)?以彼法真如相故(이피법진여상고)。非如言說而知(비여언설이지),

唯自證知故(유자증지고)。不如言說者(불여언설자),

非見實不能知故(비견실불능지고)。

이것은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게송에서 ‘보살은 법을 신체로 삼기 때문에, 진여를 연으로 삼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신체가 출생하게 된다’라고 말한 이 같은 것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와 같은 법신을 보아야 하는 까닭에 그와 같은 것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어떠한 인연으로 볼 수 없는가 하면, 그와 같은 법이 진여상(真如相)이기 때문에 언설 그대로 알 수 없고 오직 자증(自證)하여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설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이란 견이 아니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니,

為顯示此義故(위현시차의고)。偈言(게언):法體不可見(법체불가견),彼識不能知(피식불능지)。於此住處中得顯示(어차주처중득현시),以法身應見如來非以相具足故(이법신응견여래비이상구족고)。若爾如來雖不應以相具足見(약이여래수불응이상구족견),應以相具足為因(응이상구족위인),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為離此著故(위리차저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如來可以相具足(여래가이상구족),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正覺也(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정각야)。」如是等(여시등)。

이와 같은 뜻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게송에서 법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처 가운데에서 나타남이 가능한 것은 법신으로써

여래를 보는 것이며 상의 구족에 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우 여래가 비록 상의 구족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상의 구족으로 인을 삼아야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는, 이와 같은 집착을 여의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상의 구족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로 깨쳤다고 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於﹝十八﹞「上求佛地」6、

「心具足(심구족)」中,(5)為不住生死涅槃故(위불주생사열반고),經言:「須菩提(수보리)!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發行菩薩乘者(발행보살승자)」如是等(여시등)。於中經言(어중경언):「於法不說斷滅(어법불설단멸)」者,謂如所住法而通達(위여소주법이통달),不斷一切生死影像法(부단일체생사영상법),於涅槃自在行利益眾生事(어열반자재행리익중생사),此中為遮一向寂靜故(차중위차일향적정고)。

심구족 가운데에서 생사의 열반에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가 보살승을 발행한다는 마음을 낸다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법을

단멸이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란 머무르는 법 그대로 통달하여 일체 생사의 그림자로 나타난 법[影像法]을 끊지 않고 열반의

자재한 행에 처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여기서 일향(一向)의 적정을 차단하고자

顯示不住涅槃(현시부주열반),若不住涅槃應受生死苦惱(약불주열반응수생사고뇌);為離此著故(위리차저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若善男子(약선남자)、善女人(선녀인)」

乃至(내지)「是故菩薩取福德(시고보살취복덕)」等。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나타내되, 혹시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생사의 고뇌를 받아야만 한다는, 이 같은 집착을 여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중략)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복덕을 취하게 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於中經言(어중경언):「無我無生法忍(무아무생법인)」者何義(자하의)?如來於有為法得自在故(여래어유위법득자재고)。

無彼生死法我(무피생사법아),又非業煩惱力生故(우비업번뇌력생고),無生故名無我者(무생고명무아자),無生者此中云何得顯示(무생자차중운하득현시)?如說攝取餘福(여설섭취여복),尚於生死中不受苦惱(상어생사중부수고뇌),何況菩薩於無我無生法中(하황보살어무아무생법중),得忍已(득인이),

所生福德勝多於彼(소생복덕승다어피)。

여기에서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무아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여래가 유위법(有為法)에서 자재를 얻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사의 법아가 없게 된다. 또 업번뇌(業煩惱)의 세력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고, 무생이기 때문에 무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생이란 이 가운데에서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가 하면,

그 밖의 복을 섭취한다는 설명 그대로 생사 가운데 머물더라도

고뇌하지 않는 것이니, 하물며 보살이 무아ㆍ무생법 가운데에서 법인을 얻는 것에서 생겨나는 복덕은 저것보다 훨씬 수승한 것이다.

經言:「須菩提(수보리)!菩薩不應受福聚(보살불응수복취)」者,此顯示不住生死故(차현시불주생사고)。若住生死即受福聚(약주생사즉수복취),經言:「須菩提言(수보리언):不應受福聚耶(불응수복취야)」者,此有何義(차유하의)?以世尊於餘處說應受福聚故(이세존어여처설응수복취고),經言:「世尊言(세존언):受福聚(수복취),不取福聚是名受福(불취복취시명수복),而不取(이불취)」者,此顯示以方便應受而不應取(차현시이방편응수이부응취),如前已說(여전이설)。

경전에서 “수보리여, 보살이 복취(福聚)를 받지 말아야만 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만약 생사에 머물게 되면 복취를 받게 된다.

경전에서 “수보리가 ‘복취를 받지 말아야 합니까?’ 하고 여쭈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하면, 세존께서 여타의 처소에서 복취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시되, 복취를 받되 복취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복을 받되 취하지 않는 것’이라 부른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방편으로 받되 취하지 말아야 함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如前已說(여전이설)。

於6、「心具足(심구족)」中,(6)行淨住中(행정주중)A、為威儀行住故(위위의행주고),經言(경언):「須菩提若有人言(수보리약유인언),如來若去若來(여래약거약래)」等。於中行者謂去來(어중행자위거래),住者謂餘威儀(주자위여위의)。

앞서 이미 행에 머무르는 심구족 가운데에서 이것을 설명하였으니, 위의행(威儀行)에 머물게 하려는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가셨다거나 여래가 오셨다고 말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행이란 오고 감[去來]이고 머무는 것[住]이란 그 밖의 위의이다.

於6、「心具足」中,(6)行淨住中(행정주중)B、

為破名色身自在行住故(위파명색신자재행주고),經言(경언):「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수보제약선남자선녀인),以三千大千世界所有微塵(이삼천대천세계소유미진)」等。於中(어중)「細末方便及無所見方便(세말방편급무소견방편)」等。

此破如前說應知(차파여전설응지)。

  經言(경언):「彼微塵聚甚多(피미진취심다)」者,

是細末方便(시세말방편)。

명색신(名色身)을 깨뜨려서 자재행(自在行)에 머물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미진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는 세말방편(細末方便) 및 무소견방편(無所見方便)이니,

이 깨트리는 것도 앞서 설명한 그대로임을 알아야 한다.

경전에서 “그와 같은 미진의 덩어리가 몹시 많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세말방편이다.

經言:「世尊若微塵聚有者(세존약미진취유자),世尊則不說微塵聚(세존칙부설미진취)」等。是為無所見方便(시위무소견방편),此說有何義(차설유하의)?若微塵聚第一義中是有者(약미진취제일의중시유자),世尊則不說非聚(세존칙부설비취),世尊說微塵聚非聚(세존설미진취비취),是名微塵聚者(시명미진취자),以此聚體不成就故(이차취체부성취고)。

  若異此者(약이차자),雖不說亦自知(수불설역자지),

是聚何義須說(시취하의수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만약 미진의 덩어리가 있다면 세존께서는 미진의 덩어리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무소견방편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만약 미진의 덩어리가 제일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세존께서는 덩어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터이니,

세존께서 미진의 덩어리는 덩어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단지 그 이름이 ‘미진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덩어리의 체는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말하지 않았더라도 저절로 알게 되리니,

이 같은 덩어리에 더 이상 설명해야 할 무슨 뜻이 있겠는가?

經言:「如來說即非世界(여래설즉비세계)」者,此是無所見方便(차시무소견방편),此破名身亦如前說應知(차파명신역여전설응지),於中(어중)「世界(세계)」者,為明眾生世故(위명중생세고)。彼唯名身得名(피유명신득명)。

경전에서 “여래께서 세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무소견방편이니, 여기서 그 명신(名身)을

깨뜨리는 것도 예전에 설명한 그대로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세계란 중생의 세상을 밝히려 하기 때문이니,

저와 같은 것은 오직 명신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經言:「世尊(세존)!若世界是有(약세계시유)」者,即為有搏取者(즉위유박취자),於中為並說(어중위병설),若世界若微塵界故(약세계약미진계고)。有二種搏取(유이종박취),謂一搏取及差別搏取(위일박취급차별박취),眾生類眾生世界有者此為一搏取(중생류중생세계유자차위일박취),微塵有者此為差別搏取(미진유자차위차별박취),以取微塵聚集故(이취미진취집고)。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만약 세계가 존재한다면,

바로 박취(搏取)가 있게 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세계(世界)나 미진계(微塵界)를 함께 설명하기 때문이니,

두 종류의 박취가 있다.

첫 번째 박취는 차별박취(搏取差別)이니, 중생의 유(有)와 중생 세계의 유(有)는 여기서 첫 번째 박취가 된다. 미진유(微塵有)와 같은 것은 차별박취이니, 그 미진의 취집을 취하기 때문이다.

經言:「如來說搏取即非搏取(여래설박취즉비박취)」者,

此上座須菩提安立第一義故(차상좌수보리안립제일의고)。

世尊為成就如是義故說搏取者(세존위성취여시의고설박취자),即是不可以言說說等(즉시불가이언설설등)。

경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박취는 박취가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도 상좌 수보리가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다. 세존께서 이와 같은 이치를 성취케 하시고자 박취를 말씀하셨으니, 언설로써 말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

此何所顯示(차하소현시)?世諦言說故(세체언설고)。有彼搏取第一義故(유피박취제일의고)。彼法不可說(피법불가설),彼小兒凡夫如言說取非第一義(피소아범부여언설취비제일의),已說無所見方便(이설무소견방편),破義未說(파의미설),無所見中入相應三昧時不分別(무소견중입상응삼매시부분별),謂如所不分別(위여소부분별),及何人何法何方便云何不分別(급하인하법하방편운하부분별),此後具說(차후구설)。

이와 같은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면, 세제의 언설이기 때문이고, 그와 같이 제일의의 이치를 박취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법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저 어린아이 같은 범부가 언설 그대로 제일의가 아닌 것을 취하게 된다.

여기서 무소견방편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나, 그 깨뜨리는 이치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무소견 가운데에서 상응삼매에 들어가는 시분은 분별하지 않았으니, 그 분별하지 않는 그대로이다. 아울러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법을 어떠한 방편에서 분별하지 않았는가는 이다음에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經言:「須菩提(수보리)!若有人如是言(약유인여시언):如來說我見(여래설아견)」等。此等顯示如所不分別(차등현시여소부분별),云何得顯如外道說我如來說(운하득현여외도설아여래설)?為我見故安置人無我(위아견고안치인무아),又為說有此我見故(우위설유차아견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견을 말씀하셨다고 이와 같이 말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분별되지 않은 그대로임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어떠한 것을 나타내는가 하면, 외도가 자아를 설명하는 것처럼 여래께서 이를 말씀하신 것이니, 아견을 말씀하시고자 인무아(人無我)를 안치하신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아견을 말씀하시고자

安置法無我若有彼我見是見所攝(안치법무아약유피아견시견소섭),如是觀察(여시관찰),菩薩入相應三昧時不復分別(보살입상응삼매시불부분별),即此觀察(즉차관찰),為入方便(위입방편)。

법무아(法無我)를 안치하신 것이다. 만약 그와 같은 아견이 견에 섭수된다고, 이와 같이 관찰하는 보살은

상응삼매에 들어가는 시분에 다시 분별이 없게 된다[無分別].

따라서 이와 같은 관찰은 그 들어가는 방편이 된다.

經言:「須菩提菩薩乘發行(수보리보살승발행)」者,

此顯示何人無分別(차현시하인무분별)。

경전에서 “수보리여, 보살승을 발행한다는”이라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나타내는 것은 무분별이 어떠한 사람에게 해당하는가이다.

經言:「於一切法(어일체법)」者,此顯示於何法不分別(차현시어하법부분별),經言(경언):「應如是知(응여시지),

應如是見(응여시견),應如是勝解(응여시승해)」者,

此顯示增上心增上智故(차현시증상심증상지고)。

於無分別中知見勝解(어무분별중지견승해)。

경전에서 “일체법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나타내는 것은 어떠한 법에서 분별하지 않는가이다.

경전에서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고, 이와 같이 승해(勝解)를 일으켜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는 증상심(增上心)과 증상지(增上智)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무분별 가운데의 지(知)ㆍ견(見)ㆍ승해 중에서,

於中若智依止奢摩他故知(어중약지의지사마타고지),依止毘缽舍那故見(의지비발사나고견),此二依止三摩提故(차이의지삼마제고)。勝解以三摩提自在故(승해이삼마제자재고)。

解內攀緣影像(해내반연영상),彼名勝解(피명승해)。

만약 지혜인 경우, 사마타(奢摩他)에 의지하기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이고, 비발사나(毘缽舍那)에 의지하기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삼마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승해는 삼마제의

자재를 빌미로 삼는 까닭에 내신(內)에 반연하는 영상(影像)을

이해하게 되는, 그와 같은 것을 승해라 부른다.

  經言(경언):「如是知解已(여시지해이),而不住法想(이부주법상)」者,此正顯示無分別(차정현시무분별)。

경전에서 “이와 같이 알고 이해해야 하니 법이라는 생각[法想]에 머물지 않아야만”이라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 바로 무분별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經言:「法想(법상),法想者即非法想(법상자즉비법상),

是名法想(시명법상)」者,此顯示法想中不共義及相應義(차현시법상중부공의급상응의)。如前已說(여전이설),如是一切住處中(여시일절주처중),相應三摩提方便亦爾應知(상응삼마제방편역이응지),欲願及攝散二種(욕원급섭산이종),

如前所說更無別義(여전소설경무별의),

是故不復說其方便(시고불부설기방편)。

경전에서 “법상의 법상이란 법상이 아니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법상’이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서는 법상 가운데의

불공(不共)의 이치와 상응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니, 앞서 이미 나타내 보인 그대로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주처 가운데에 삼마제에 상응하는 방편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지욕과 서원을 섭수하고 산개(散)하는 두 종류는 앞서 설명한 대로 별도의 이치가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다시 설명하지 않겠다. 그 방편이

於6、「心具足」中,(6)行淨住中C、

為說法無染故(위설법무염고),經言(경언):「須菩提若有菩薩(수보리약유보살),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이만무량아승기세계칠보)」等。此何所顯示(차하소현시)?以有如是大利益故(이유여시대리익고),決定實演說(결정실연설),

如是演說而無所染(여시연설이무소염)。

그와 같은 심구족 가운데 처해서 염오 없이 법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한량없는 아승기겁의 세계를 7보 따위로 가득 채워서”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나타내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이와 같은 커다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진실을 결정해서 연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연설이야말로 염오가 없는 것이다.

經言:「云何演說(운하연설),而不演說(이부연설),是名演說(시명연설)」者,此有何義(차유하의)?顯示不可言說(현시부가언설),故不演說(고부연설),彼法有可說體(피법유가설체),應如是演說(응여시연설),若異此者則為染說(약이차자칙위염설),以顛倒義故(이전도의고)。

경전에서 “어째서 연설하되 연설하지 않는 이러한 것을 ‘연설’이라 부르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여기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하면, 언설이 불가능하기에 연설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함이니, 그와 같은 법에 말할 만한 체가 있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연설해야 한다. 만약 이와 다르다면 바로 염오된 연설이 되는 것이니, 그 이치가 전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又如是說時不求信敬等(우여시설시불구신경등),

亦為無染說法(역위무염설법),於彼心具足中(어피심구족중),

為生死不染故(위생사불염고)。說星翳燈等偈(설성예등등게),

此義如前說(차의여전설)。

또 이와 같이 말하는 때에 믿음과 공경 따위를 구하지 말아야만

염오가 없는 설법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심구족 가운데에서

생사에 염오되지 않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별ㆍ안질[翳]ㆍ등잔 따위로 게송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이 같은 이치는 앞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若聞如是義(약문여시의)  於大乘無覺(어대승무각)

我念過有石(아념과유석)  究竟無因故(구경무인고)

만약 대승에 깨달음이 없다는

이 같은 이치를 듣더라도

내 마음[念]은 돌보다도 굳으니

구경에는 인이 없기 때문이다.

下人於此深大法(하인어차심대법)  

不能覺知及信向(부능각지급신향)

世間眾人多如此(세간중인다여차)  

是以此法成荒廢(시이차법성황폐)

하근기는 이같이 심오한 대승법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니

세상 사람이 대부분 이러한지라

이 같은 법이 황폐하게 되는구나.

여기서 금강반야바라밀론을 마친다.

무착보살 지음.

'金剛般若論 금강반야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剛盤若論(금강반야론) 상권  (0) 201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