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般若論 금강반야론

金剛盤若論(금강반야론) 상권

수선님 2019. 7. 28. 12:48

金剛盤若論(금강반야론) 상권

 無著菩薩造 무착보살 지음

隋 南印度三藏 達磨笈多譯

수나라 달마급다 한역

이한정 번역

出生佛法無與等(출생불법무여등)  

불법의 출생이 비할 데 없고

顯了法界最第一(현료법계최제일)

법계를 명시하는 것이 제일이네.

金剛難壞句義聚(금강난괴구의취)  

금강불괴의 이 같은 구의취는

一切聖人不能入(일체성인부능입)

일체의 성인도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此小金剛波羅蜜(차소금강바라밀)  

이 작은 『금강바라밀경』이

以如是名顯勢力(이여시명현세력)

그 이름대로 세력을 떨치리라.

智者所說教及義(지자소설교급의)  

지혜로운 이가 말씀하신 가르침과 이치를

聞已轉為我等說(문이전위아등설)

듣고서 옮겨 다시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전했으니

歸命彼類及此輩(귀명피류급차배)  

저 성인[類]과 선배[輩]들에게 목숨 바쳐 귀의하오며

皆以正心而頂禮(개이정심이정례)

모두 바른 마음으로 예를 올립니다.

我應精勤立彼義(아응정근립피의)  

제가 마땅히 힘써 그 이치를 다시 세워

解釋相續為自他(해석상속위자타)

나와 남을 위해 해석을 이어가겠습니다.

成立七種義句已(성립칠종의구이),

일곱 종류의 구의(句已)가 성립해야만,

此般若波羅蜜即得成立(차반야바라밀즉득성립)。

이 반야바라밀이 성립하게 된다.

七義句者(칠의구자):

여기서 일곱 종류의 구의란,

(一)種性不斷(종성부단),

첫 번째가 종성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고,

(二)發起行相(발기행상),

두 번째가 그 행상의 발기이고,

(三)行所住處(행소주처),

세 번째가 머물러야 하는 처소의 행이고,

(四)對治,

네 번째가 대치이고,

(五)不失(부실),

다섯 번째가 퇴실하지 않는 것이고,

六)地(지),

여섯 번째가 지이고,

(七)立名(입명),

일곱 번째가 명자를 세우는 것이다.

此等七義句(차등칠의구),

於般若波羅蜜經中成立(어반야바라밀경중성립),

故名義句(고명의구)。

이와 같은 일곱 종류의 구의는

『반야바라밀경』 안에서 성립되는 까닭에 구의라 부르는 것이다.

於中前六義句(어중전륙의구),

顯示菩薩所作究竟(현시보살소작구경)。

앞의 여섯 번째까지의 구의는

보살이 행해야 하는 구경을 현시하고,

第七義句(제칠의구),顯示成立此法門故(현시성립차법문고),

일곱 번째의 구의는 이 같은 법문의 성립을 현시하는 것이니,

應如是知(응여시지)。

마땅히 이를 알아야 한다.

(一)「種性不斷(종성부단)」者(자),

此般若波羅蜜(차반야바라밀),

為佛種不斷故流行於世(위불종부단고류행어세),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종성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까닭에,

세간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為顯此當得佛種不斷義故(위현차당득불종부단의고)。

이 같은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이치를

현시하고자 하는 까닭에,

上座須菩提最初說言(상좌수보리최초설언):

상좌 수보리가 경전의 서두에서

「希有世尊(희유세존),

云何如來以第一善攝攝受所有菩薩摩訶薩也

(운하여래이제일선섭섭수소유보살마가살야)。」

如是等(여시등)。

“세상에 드문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떻게 제일가는 선섭으로 모든 보살마하살을 섭수하셨습니까?”라고 말했다.

於中(어중)「善攝(선섭)」者(자),

謂已熟菩薩於佛證正覺轉法輪時

(위이숙보살어불증정각전법륜시),

以五種義中菩薩法而建立故(이오종의중보살법이건립고)。

이 같은 구절에서의 선섭이란,

소위 이미 성숙된 보살을 가리키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증득하시고 법륜을 굴리실 때에

다섯 가지 이치로써 보살법을 세웠기 때문이다.

「付囑(부촉)」者(자),

彼已得攝受菩薩等(피이득섭수보살등),

於佛般涅槃時(어불반열반시),

亦以彼五義如是建立故(역이피오의여시건립고)。

부촉이란

그와 같이 이미 섭수받은 보살 등이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는 때에 다시 그러한 다섯 가지 이치를 이와 같이 세웠기 때문이다.

此(차)「善攝(선섭)」「付囑(부촉)」二種(이종),

顯示種性不斷(현시종성부단)。

이 같은 선섭과 부촉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여기서는 그 종성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현시하고자 함이다.

(二)「發起行相(발기행상)」者(자),

如經云(여경운)「云何菩薩應住(운하보살응주)」

如是等(여시등)。

행상의 발기는 마치 경전에서 “보살이 어떻게 이와 같은 것에

응주하는가?”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니,

彼應住者謂欲願故(피응주자위욕원고);

저 응주란 지욕과 원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應修行者(응수행자),謂相應三摩缽帝故(위상응삼마발제고);

마땅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란

소위 삼마발제에 상응하기 때문이고,

應降伏心者(응강복심자),謂折伏散亂故(위절복산란고)。

마음을 항복 받는다는 것이란 산란한 마음을 조복하기 때문이다.

於中欲者正求也(어중욕자정구야);

願者為所求故作心思念也(원자위소구고작심사념야);

여기서 욕(지욕)이란 올바르게 구한다는 뜻이고,

원이란 구하는 바가 있어서 마음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相應三摩缽帝者,無分別三摩提也;

삼마발제에 상응하는 것이란 무분별의 삼마제이다.

折伏散亂者(절복산란자),

若彼三摩缽帝心散(약피삼마발제심산),

制令還住也(제령환주야)。

산란한 마음을 조복한다는 것은 만약 저와 같은 삼마발제의 마음이 산란해지면 이를 제어하여 다시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第一者顯示攝道(제일자현시섭도),

첫 번째는 도의 섭수를 현시하는 것이고,

第二者顯示成就道(제이자현시성취도),

두 번째는 도의 성취를 현시하는 것이고,

第三者顯示不失道(제삼자현시부실도)。

세 번째는 도에서의 불퇴전을 현시하는 것이니

(三)「行所住處(행소주처)」者(자),

謂彼發起行相所住處也(위피발기행상소주처야)。

여기서 머물러야 하는 처소의 행이란 소위 저와 같은

행상의 발기가 머무르게 되는 처소이다.

此復有十八種應知(차복유십팔종응지):

여기에 다시 열여덟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所謂(소위) ﹝一﹞發心(발심),

소위 첫 번째가 발심이고,

﹝二﹞波羅蜜相應行(바라밀상응행),

두 번째가 바라밀에 상응하는 행이고,

﹝三﹞欲得色身(욕득색신),

세 번째가 색신을 얻고자 하는 지욕이고,

﹝四﹞欲得法身(욕득법신),

네 번째가 법신을 얻고자 하는 지욕이고,

﹝五﹞於修道得勝中無慢(어수도득승중무만),

다섯 번째가 도를 수습하여

수승함을 얻더라도 거만함을 내지 않는 것이고,

﹝六﹞不離佛出時(불리불출시),

여섯 번째는 부처님께서 출세하시는 시절을 여의지 않는 것이고,

﹝七﹞願淨佛土(원정불토),

일곱 번째는 청정한 불국토의 원력을 세우는 것이고,

﹝八﹞成熟眾生(성숙중생),

여덟 번째는 중생을 성숙시키는 것이고,

﹝九﹞遠離隨順外論散亂(원리수순외론산란),

아홉 번째는 외도의 논서에서 야기되는

산란한 마음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十﹞色及眾生身搏取中觀破相應行

(색급중생신박취중관파상응행),

열 번째는 색신과 중생신에 사로잡힌 가운데에서 잘 관찰하여

이에 상응하는 행을 깨뜨리는 것이고,

﹝十一﹞供養給侍如來(공양급시여래),

열한 번째는 여래를 공양하고 시봉하는 것이고,

﹝十二﹞遠離利養及疲乏熱惱故(원리이양급피핍열뇌고)。

不起精進及退失等(부기정진급퇴실등),

열두 번째는 정진을 방해하거나 퇴실하게 하는

이양 및 뜨거운 번뇌의 핍박을 멀리 여의는 것이고,

﹝十三﹞忍苦(인고),

열세 번째는 고를 인내하는 것이고,

﹝十四﹞離寂靜味(이적정미),

열네 번째는 적정의 미경을 여의는 것이고,

﹝十五﹞於證道時遠離喜動(어증도시원리희동),

열다섯 번째는 도를 증득하는 때에

희근의 동요를 멀리 여의는 것이고,

﹝十六﹞求教授(구교수),

열여섯 번째는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고,

﹝十七﹞證道(증도),

열일곱 번째는 도를 증득하는 것이고,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是為十八種住處(시위십팔종주처)。

열여덟 번째는 불지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니,

모두 열여덟 종류의 주처가 된다.

於中菩薩應如是住(어중보살응여시주),

為滅度一切眾生故(위멸도일체중생고)。

이 가운데에서 보살이 이와 같이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것은

일체의 중생을 멸도 시키기 위해서이다.

發心已於波羅蜜等中相應修行(발심이어바라밀등중상응수행),

為得如來色身及法身故(위득여래색신급법신고)。

이미 바라밀 따위에 발심하고, 이에 상응해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여래의 색신과 법신을 얻기 위해서이다.

發生樂欲應遠離證道中障礙心(발생낙욕응원리증도중장애심),

낙욕을 발생시켜서 도를 증득하는 가운데

그 장애가 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하는 것이니,

既離慢等(기리만등)、喜動等心已(희동등심이),

만결이나 희근의 동요 따위를 여읜 마음에서

為證道故應求教誡(위증도고응구교계),

然後得彼證道(연후득피증도),

도를 증득하기 위한 까닭에, 가르침을 구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까닭에 도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自此已上皆求佛地(자차이상개구불지),

此等如是次第相續(차등여시차제상속)。

여기까지는 모두가 불지를 구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이 같은 차례에 따라 이어받게 되고,

於中(어중):

﹝一﹞為發心故(위발심고),經言(경언):

「此菩薩應生如是心(차보살응생여시심)」等(등)。

다시 이러한 가운데에서 발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이처럼 보살은 이러한 마음을 내어야만 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二﹞為波羅蜜相應行故(위바라밀상응행고),

經言(경언):「菩薩不住於物(보살부주어물),

應行布施(응행포시)」等(등)。

바라밀에 상응하게 행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보살이 물건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三﹞為欲得色身故(위욕득색신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相具足見如來不(응이상구족견여래부)?」

如是等(여시등)。

색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상(상)의 구족(구족)으로 여 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셨는데,

﹝四﹞法身復有二種(법신복유이종),

이 같은 구절에서 말하는 법신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謂(위)1、言說法身(언설법신),2、證得法身(증득법신)。

此證得法身亦有二種(차증득법신역유이종),

소위 언설법신과 증득법신이다.

이 같은 증득법신에도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謂(위)(1)智相(지상)、(2)福相(복상)。

소위 지상법신과 복상법신이 있다.

1、言說法身者(언설법신자),謂修多羅等(위수다라등)。

為欲得此法身故(위욕득차법신고),

언설법신은 말하자면 수다라등이니,

이 같은 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世尊(세존)!頗有眾生(파유중생),

於未來世(어미래세),」如是等(여시등)。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많은 중생이 미래세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於不顛倒義想是為實想(어부전도의상시위실상),

應知如言執義彼非實想(응지여언집의피비실상)。

그 이치가 전도되지 않은 생각[상]이 실다운 생각[실상]이니,

말씀하신 그대로 그 이치에 집착하는 저와 같은 것은 실다운 생각이 아니기에,

2、(1)為欲得智相法身故(위욕득지상법신고),

지상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有法如來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유법여래정각아누다라삼묘삼보제야)?」

如是等(여시등)。

경전에서 “어떠한 법이 여래께서 바르게 깨달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2、(2)為欲得福相法身故(위욕득복상법신고),

복상법신을 얻으려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

「若此三千大千世界(약차삼천대천세계)」如是等(여시등)。

경전에서 “만약 이 같은 삼천대천세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五﹞為修道得勝中無慢故(위수도득승중무만고),

經言(경언):

「須嚧多阿般那頗作是念(수로다아반나파작시념)」

如是等(여시등)。

도를 수습하여 수승함을 얻더라도 만결을 내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로다아반나파*가 이 같은 생각을 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범어 srota āpanna의 음사어이며, 수다원(수타원)을 말한다.

﹝六﹞為不離佛出時故(위부리불출시고),

經言(경언):「有法如來於然燈佛所(유법여래어연등불소)」

如是等(여시등)。

부처님께서 출세간하시는 시절을 여의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떠한 법이 여래께서 연등불의 처소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七﹞為願淨佛土故(위원정불토고),

經言(경언):「須菩提若有如是言(수보리약유여시언),

我成就莊嚴國土(아성취장엄국토)」如是等(여시등)。

청정한 불국토의 원력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내가 장엄 국토를 성취하였다고 말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八﹞為成熟眾生故(위성숙중생고),

經言(경언):

「須菩提譬如有丈夫(수보리비여유장부)」如是等(여시등)。

중생을 성숙시키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마치 장부처럼”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九﹞為遠離隨順外論散亂故(위원리수순외론산란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若恒伽河所有沙(약항가하소유사),

復有爾許恒伽河(복유이허항가하)」如是等(여시등)。

외도의 논설에서 야기되는 산란함을 멀리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에는 어떠한가?

만약 항가강에 있는 모든 모래가 다시 항가강에 있는”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十﹞為色及眾生身搏取中觀破相應行故

(위색급중생신박취중관파상응행고),

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

三千大千世界中所有地塵(삼천대천세계중소유지진)」

如是等(여시등)。

색과 중생신에 사로잡힌 가운데에서 잘 관찰하여

이에 상응하는 행을 깨뜨리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대지의 티끌을”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十一﹞為供養給侍如來故(위공양급시여래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三十二大丈夫相(응이삼십이대장부상),

見如來應正遍覺不(견여래응정편각부)」如是等(여시등)。

여래를 공양하고 시봉케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32대장부상으로써

여래ㆍ응ㆍ정변각을 친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二﹞為遠離利養疲乏熱惱(위원리리양피핍열뇌),

於精進若退若不發故(어정진약퇴약부발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

若女人若丈夫捨恒伽河沙等身

(약녀인약장부사항가하사등신)」如是等(여시등)。

정진하는 도중에 물러나게 하거나 발명하지 못하는[부발] 이양 및 뜨거운 번뇌[열뇌]의 핍박을 멀리 여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인이거나 장부가 항가강의 모래알 수와 같은 중생신을 버리고”라고 말씀하셨는데,

於中身有疲乏(어중신유피핍),心有熱惱(심유열뇌),

以此二種(이차이종),於彼精進(어피정진),

若退若不發(약퇴약부발)。

여기서 중생신 가운데 피곤한 마음과 뜨거운 번뇌가 있으니,

이 같은 두 종류가 저와 같은 정진을 퇴실케 하거나

발명하지 못하게 하는,

﹝十三﹞為忍苦故(위인고고),經言(경언):

「若如來忍波羅蜜(약여래인바라밀)」如是等(여시등)。

그러한 고통을 인내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만약 여래가 인욕바라밀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四﹞為離寂靜味故(위리적정미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若女人(약녀인)、若丈夫(약장부),

於此法門受持(어차법문수지)」如是等(여시등)。

적정(寂靜)의 미상[:미상]에 대한 탐착을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여인이거나 장부가 이 같은 법문을 받아서

간직하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五﹞為證道時遠離喜動故(위증도시원리희동고),

經言(경언):「世尊云何菩薩應住(세존운하보살응주)」

如是等(여시등)。

도를 증득하는 때에 희근(喜) 동요를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이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六﹞為求教授故(위구교수고),經言(경언):

「有法如來於燃燈如來所(유법여래어연등여래소),

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정각아누다라삼묘삼보리)」

如是等(여시등)。

가르침을 구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어떤 법을 여래가 연등여래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七﹞為證道故(위증도고),經言(경언):

「須菩提譬如丈夫妙身大身(수보제비여장부묘신대신)」

如是等(여시등)。於中妙身者(어중묘신자),

謂至得身成就身得畢竟轉依故

(위지득신성취신득필경전의고)。

도를 증득케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장부의 묘신이나 대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묘신이란 유신을 지득하여 유신을 성취하게 되면 마침내 전의하기 때문이고,

大身者(대신자),一切眾生身攝身故(일절중생신섭신고)。

대신이란 일체의 유신으로 그와 같은 유신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十八﹞自此已上皆求佛地應知(자차이상개구불지응지)。

여기까지는 모두가 불지(불지)를 구하는 것이니,

彼佛地復有六種具足攝轉依具足

(피불지복유륙종구족섭전의구족):所謂(소위)

1、國土淨具足(국토정구족),

2、無上見智淨具足(무상견지정구족),

3、隨形好身具足(수형호신구족),

4、相身具足(상신구족),

5、語具足(어구족),

6、心具足(심구족)。

그와 같은 불지에도 다시 여섯 종류의 구족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섭전의구족은 말하자면 국토정구족이니, 무상견지정구족ㆍ수형호신구족ㆍ상신구족ㆍ어구족ㆍ심구족이다.

彼(피)6、「心具足(심구족)」中(중),復有(복유):

(1)念處(념처),

(2)有正覺(유정각),

(3)有施設大利法(유시설대리법),

(4)有攝取法身(유섭취법신),

(5)有不住生死涅槃(유부주생사열반),

(6)有行住淨應知(유행주정응지)。

그 심구족에 다시 염처가 있고, 정각이 있고, 시설대리법

이 있고, 법신의 섭취가 있고, 부주생사열반이 있고,

행에 머무르는 것의 청정함[행주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6)此(차)「行住淨(행주정)」中(중),復有(복유)

A、威儀行住(위의행주),

B、有名色觀(유명색관)

編者註(편자주):疑缺(의결)「破(파)」字(자))自在行住(자재행주),

C、有不染行住應知(유부염행주응지)。

이 같은 행에 머무르는 것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다시 위의행에 머무는 것[위의행주]이 있고,

명색을 관찰하는 자재한 행에 머무는 것[명색관자재행주]이 있고, 염오되지 않은 행에 머무는 것[부염행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此(차)C、「不染(부염)」中(중),復有(복유)

(A)說法不染(설법부염),

(B)流轉不染應知(류전부염응지)。

이 같은 불염가운데에서 다시 설법불염과 유전불염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1、為國土淨具足故(위국토정구족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若菩薩如是言(약보살여시언),

我國土莊嚴成就(아국토장엄성취)」如是等(여시등)。

국토의 청정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국토의 장엄을 성취하였다고 이같이 말한다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2、為無上見智淨具足故(위무상견지정구족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如來有肉眼不(여래유육안부)?

乃至若此三千大千世界(내지약차삼천대천세계)」

如是等(여시등)。

무상의 지견을 청정하게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또는 만약 삼천대천세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3、為隨形好身具足故(위수형호신구족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色身成就見如來不(응이색신성취견여래부)」

如是等(여시등)。

형체를 좇아서 호신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색신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4、為相身具足故(위상신구족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相具足見如來不(응이상구족견여래부)」如是等(여시등)。

상신을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호의 구족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5、為語具足故(위어구족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如來作是念我說法耶(여래작시념아설법야)」如是等(여시등)。

일체의 언어를 구족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에는 어떠한가? 여래가 설법한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내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十八﹞「上求佛地(상구불지)」

6、「心具足(심구족)」中(중)

(1)為念處故(위념처고),經言(경언):

「須菩提非眾生非不眾生(수보제비중생비부중생)」

如是等(여시등)。

심구족 가운데에서 그 ‘염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2)為正覺故(위정각고),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頗有法如來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파유법여래정각아누다라삼먁삼보리부)」如是等(여시등)。

‘정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닫는다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3)為施設大利法故(위시설대리법고),經言(경언):

「復次(복차),須菩提(수보리)!

三千大千世界中(삼천대천세계중),所有須彌山(소유수미산)」如是等(여시등)。

‘시설대리법(시설대이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다시 수보리여,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모든 수미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4)為攝取法身故(위섭취법신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相具足見如來不(응이상구족견여래부)」如是等(여시등)。「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如來可以相具足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래가이상구족정각아누다라삼묘삼보리),

莫作是念(막작시념)」者(자),

此義明相具足體非菩提(차의명상구족체비보제),

亦不以相具足為因也(역부이상구족위인야),

以相是色自性故(이상시색자성고)。

법신을 섭취하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를 상호의 구족[상구족]으로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상호의 구족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쳤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내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이치는 상구족의 체가 보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또한 상구족을 인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은 색의 자성이기 때문에

6、「心具足(심구족)」中(중)

(5)為不住涅槃故(위부주열반고),經言(경언):

「須菩提如是念發行菩薩乘者(수보리여시념발행보살승자),有法說斷滅耶(유법설단멸야)」如是等(여시등)。

為不住流轉故(위부주류전고),經言(경언):

「須菩提菩薩於福聚(수보제보살어복취),

不應受不應取(부응수부응취)」如是等(여시등)。

受者說有故(수자설유고),取者取彼道故(취자취피도고),

如福聚及果中皆不應者(여복취급과중개부응자)。

열반법에도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이와 같이 보살승을 발명하여 이를 행하겠다고 생각을 내는 이에게 단멸이라고 말할 만한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유전법에 머물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보살의 복취를 받지도 말고 취하지도 말아야 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구절에서 받는다는 것이란

유를 설명하는 것이고,

취한다는 것이란 그와 같은 취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복취 가운데의 과보에 모두 상응하지 않아야만,

6、「心具足(심구족)」中(중)

(6)「行住淨(행주정)」中(중),

A、為威儀行住故(위위의행주고),經言(경언):

「若有如是言(약유여시언),如來若去(여래약거)」

如是等(여시등)。

행주정 가운데에서 위의행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만약 여래가 가셨다고 이와 같이 말하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6)「行住淨(행주정)」中(중),

B、為名色觀破自在行住故(위명색관파자재행주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若復善家子(약복선가자)、

善家女(선가녀),

以所有三千大千世界中地塵(이소유삼천대천세계중지진)」

如是等(여시등)。

명색을 관찰하여 이를 깨트리고

자재한 행에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선가자와 선가녀가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대지의 티끌”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6)「行住淨(행주정)」中(중),

C、「不染行住(부염행주)」中(중),

(A)為說法不染故(위설법부염고),經言(경언):

「須菩提(수보리)!若復菩薩(약복보살),

以無量無數世界(이무량무수세계)」如是等(여시등)。

불염행주 가운데에서의 설법불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만약 다시 보살이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세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6、「心具足(심구족)」中(중)

(6)「行住淨(행주정)」中(중),

C、「不染行住(부염행주)」中(중),

(B)為流轉不染故(위류전부염고),說偈言(설게언):

如星翳燈幻(여성예등환),露泡夢電雲(노포몽전운),

於諸有為法(어제유위법),應當如是觀(응당여시관)。

유전불염에 해당하기 때문이니,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치 별빛ㆍ안질ㆍ등잔ㆍ환영과

이슬ㆍ물거품ㆍ꿈ㆍ번개ㆍ구름처럼

모든 유위법을

이와 같이 관찰하여야 한다.

此偈顯示四種有為相(차게현시사종유위상):

a、所謂自性相(소위자성상),

b、著所住味相(저소주미상),

c、隨順過失相(수순과실상),

d、隨順出離相(수순출리상)。

이 게송에서는 네 종류의 유위상이 현시되었으니,

소위 자성상이고, 착소주미상이고, 수순과실상이고,

수순출리상이다.

a、於中自性相者(어중자성상자),

共相見識此相如星(공상견식차상여성),應如是見(응여시견),何以故(하이고)?無智闇中有彼光故(무지암중유피광고),

有智明中無彼光故(유지명중무피광고)。

  人法我見如翳(인법아견여예),應如是見(응여시견),

何以故(하이고)?以取無義故(이취무의고)。

  識如燈(식여등),應如是見(응여시견),何以故(하이고)?

渴愛潤取緣故熾然(갈애윤취연고치연)。

여기서 자성상은 공통되는 모양[공상]을 보고 식별하는 것이니, 이 같은 모양은 마치 별빛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가 없는 무명속에서도 그와 같은 빛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지혜가 있는 밝음 가운데에서는 그와 같은 빛이 없기 때문에,

인법과 자아를 보되, 마치 안질 환자처럼 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치가 없는 것을 취하기 때문이니, 식별하기는 하되

마치 등잔불 밑에서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애에 깊이 젖어서 그 연을 취하는 까닭에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듯하기 때문이다.

b、於中著所住味相者(어중저소주미상자),

味著顛倒境界故(미저전도경계고),彼如幻(피여환),

應如是見(응여시견),何以故(하이고)?

以顛倒見故(이전도견고)。

여기서 착소주미상이란 전도된 경계의 미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그와 같은 것을 마치 환영처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되게 보기 때문이다.

c、於中隨順過失相者(어중수순과실상자),

無常等隨順故(무상등수순고)。

여기서 수순과실상이란 무상 따위에 순순히 따르기 때문이니,

그와 같은 것을 이슬로 비유한 것은 그 상의 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무상에 순순히 따르기 때문이다.

  彼露譬喻者(피로비유자),顯示相體無有(현시상체무유),

以隨順無常故(이수순무상고);彼泡譬喻者(피포비유자),

顯示隨順苦體(현시수순고체),以受如泡故(이수여포고),

若有受皆是苦故隨有(약유수개시고고수유),

應知彼苦生故是苦苦(응지피고생고시고고),

破滅故是壞苦(파멸고시괴고),

不相離故是行苦(부상리고시행고)。

그와 같은 것을 물거품에 비유한 것은 고의 체에 순순히 따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그 수가 물거품과 같기 때문이고,

만약 ‘수’가 있더라도, 모두가 ‘고’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유’에 부수되어 그와 같은 ‘고’가 생겨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고고이고, 파멸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괴고 이고, 서로 여의지 못하는 까닭에 이 같은 것이 행고이다.

  復於第四禪及無色中(복어제사선급무색중),

立不苦不樂受以勝故(립부고부악수이승고)。

다시 제4선및 무색계 가운데에서 불고불락수를 세우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d、於中隨順出離相者(어중수순출리상자),

隨順人法無我(수순인법무아),以攀緣故(이반연고),

得出離故(득출리고)。說無我以為出離也(설무아이위출리야)。  

여기서 수순출리상이란 인법과 무아의 수순에 반연하기 때문이고 출리를 얻기 때문에, 무아로써 출리를 삼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隨順者(수순자),謂過去等行(위과거등행),

以夢等譬喻(이몽등비유),顯示彼過去行(현시피과거행),

以所念處故如夢(이소념처고여몽)。

  現在者不久時住(현재자부구시주),故如電(고여전)。

수순이란 소위 과거 따위의 행이니, 꿈 따위의 비유로써

그와 같은 것이 과거의 행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한 것이며,

기억되는 처소이기 때문에 꿈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란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번개 같다고 하는 것이고,

未來者彼麤惡種子似虛空(미래자피추악종자사허공),

引心出故如雲(인심출고여운),

如是知三世行轉生已(여시지삼세행전생이),

則通達無我(칙통달무아),

此顯示隨順出離相(차현시수순출리상)。

미래란 그와 같은 추악한 종자가 마치 허공처럼

그 마음을 끌어서 빼내는 까닭에 구름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3세에 유행하여 그 생을 전의하는 것임을 깨닫고 나면, 바로 무아를 통달하게 되는 것 이다.

이러한 것은 모두 수순출리상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彼住處等略為八種(피주처등략위팔종),亦得滿足(역득만족)。所謂(소위)﹝一﹞攝住處(섭주처),

﹝二﹞波羅蜜淨住處(파라밀정주처),

﹝三﹞欲住處(욕주처),﹝四﹞離障礙住處(리장애주처),

﹝五﹞淨心住處(정심주처),﹝六﹞究竟住處(구경주처),

﹝七﹞廣大住處(광대주처),﹝八﹞甚深住處(심심주처)。

그와 같은 주처등을 간략하게 여덟 종류로 삼아 만족을 얻는 것으로, 말하자면 섭주처ㆍ바라밀정주처ㆍ욕주처ㆍ이장애주처ㆍ

정심주처ㆍ구경주처ㆍ광대주처ㆍ심심주처이다.

於中(어중)﹝一﹞攝住處者(섭주처자),謂發心(위발심)。

여기서 섭주처란 발심(발심)을 가리키는 것이고,

﹝二﹞波羅蜜淨住處者(파라밀정주처자),

謂波羅蜜相應行(위파라밀상응행)。

바라밀정주처란 바라밀에 상응하는 행을 가리키는 것이고,

﹝三﹞欲住處者(욕주처자),

謂欲得色身(위욕득색신)、法身(법신)。

욕주처란 색신과 법신을 얻고자 하는 지욕을 가리키는 것이고,

﹝四﹞離障礙住處者(이장애주처자),

謂餘十二種(위여십이종)。

이장애주처란 여타의 열두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고,

﹝五﹞淨心住處者(정심주처자),謂證道(위증도)。

정심주처란 도의 증득을 가리키는 것이고,

﹝六﹞究竟住處者,謂自此已上皆求佛地。

구경주처란

여기서부터는 모두 불지를 구하게 되는 것임을 가리키고,

﹝七﹞廣大及(광대급)

﹝八﹞甚深住處者(심심주처자),通一切處(통일체처)。

광대주처 및 심심주처는 일체의 처소에 통용되는 것이다.

於初住處中(어초주처중),若說菩薩應生如是心(약설보살응생여시심),所有眾生如是等(소유중생여시등),此為廣大(차위광대);若復說言若菩薩眾生想轉如是等(약복설언약보살중생상전여시등),此為甚深(차위심심);於第二住處中(어제이주처중),若說菩薩不住於事(약설보살부주어사),應行布施如是等(응행포시여시등),此為甚深(차위심심);若復說言彼所有福聚(약복설언피소유복취),不可量取如是等(부가량취여시등),

此為廣大(차위광대)。

초주처에서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만”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모든 중생도 이와 같기에 이러한 것이 광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이처럼 “보살이 중생상으로 전의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심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2 주처에서 만약 “보살이 일에 머물지 않고”라고 말씀하시거나, “일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심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그와 같은 모든 복취가 양으로 취할 수 없다는 이와 같은 것이 광대에 해당한다.

如是於餘住處中(여시어여주처중),廣大(광대)、

甚深等(심심등),隨所相應應知(수소상응응지)。

이처럼 그 밖의 주처에서도 광대와 심심 등이

그 상응하는 것에 부수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四)已說住處(이설주처),何者對治(하자대치)?

彼如是相應行相行諸住處時(피여시상응행상행제주처시),

有二種對治應知(유이종대치응지):謂(위)

﹝一﹞邪行及(사행급)﹝二﹞共見正行(공견정행)。

여기서 주처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어떠한 것이 대치인가 하면, 그와 같은 것에 상응하는 행상이니,

여러 주처로 행하는 때에 두 종류의 대치,

소위 사행과 공견정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此中見者(차중견자),謂分別也(위분별야)。

여기서 견(현)이란 소위 분별이다.

於初住處中(어초주처중),若說(약설)

「菩薩應生如是心(보살응생여시심),所有眾生(소유중생)」

等(등),此是邪行對治(차시사행대치),

「生如是心(생여시심)」是菩薩邪行(시보살사행)。

초주처에서 “이처럼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을 내되, 모든 중생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사행대치이고,

“이와 같은 마음을 낸다는 것”은 보살의 사행이다.

若復說言(약복설언)「若菩薩有眾生想轉(약보살유중생상전)」等(등),此為共見正行對治(차위공견정행대치)。

此分別執菩薩亦應斷(차분별집보살역응단),

謂我應滅度眾生故(위아응멸도중생고)。

다시 “만약 보살이 중생상으로 전의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공견정행대치이다. 이 같은 분별의 집착도 보살이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니, 소위 “내가 중생을 멸도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於第二住處中(어제이주처중),若說(약설)

「應行布施(응행포시)」,此為邪行對治(차위사행대치),

非無布施是菩薩邪行(비무포시시보살사행)。

제2 주처에서 “이처럼 보시를 행하되”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사행대치이고, “보시 아닌 것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이 보살의 사행이다.

若復說言(약복설언)「住於事(주어사)」等(등),

是共見正行對治(시공견정행대치)。

此分別執菩薩亦應斷(차분별집보살역응단),

謂應行布施故(위응행포시고)。

다시 “일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공견정행대치이다.

이 같은 분별의 집착도 보살이 마땅히 끊어야 하는 것이니,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五)何者不失(하자부실)?謂離二邊(위리이변)。

云何二邊(운하이변)?謂(위)﹝一﹞增益邊(증익변),

﹝二﹞損減邊(손감변)。

어떠한 것이 잃어버리지 않는 것[不失]인가 하면,

소위 두 변을 여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변’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면, 소위 증익변과 손감변이다.

若於如言辭法中(약어여언사법중),

分別執有自性(분별집유자성),是增益邊(시증익변);

若於法無我事中(약어법무아사중),而執為無(이집위무),

是損減邊(시손감변)。

만약 여언사법 가운데에서 유자성에 분별 집착하는 이러한 것은

증익변이 되고, 만약 인법ㆍ무아의 일 가운데에서 없다고 집착하는 이러한 것이 손감변이 된다.

於中若說言(어중약설언)「世尊若福聚非聚(세존약복취비취)」者(자),此遮增益邊(차차증익변),

以無彼福聚分別自性故(이무피복취분별자성고)。

여기서 만약 세존께서 복이 취집하였거나 취집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경우, 이러한 것은 증익변을 차단하는 것이니,

그러한 복취를 분별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若復說言(약복설언)「是故如來說福聚(시고여래설복취)」,

此遮損減邊(차차손감변)。

以彼雖不如言辭有自性而有可說事

(이피수부여언사유자성이유가설사),

以如來說福聚故(이여래설복취고)。

此得顯示如是(차득현시여시)。

만약 다시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복취를 말씀하셨다는 이러한 것은 손감변을 차단하는 것이니, 그와 같은 것이 비록 언사에 해당하는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일을 설명할 수 있기에,

여래께서 복취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서 현시하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

「須菩提(수보리)!佛法佛法者(불법불법자),

如來說非佛法(여래설비불법)」者(자),

此遮增益邊(차차증익변)。

「是名佛法(시명불법)」者(자),此遮損減邊(차차손감변)。

“수보리여, 불법”에서의 불법을, 여래께서 불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증익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불법이라 부른다”는 이러한 것은 손감변을 차단하는 것이다.

於中(어중)「如來說非佛法(여래설비불법)」者(자),

顯示不共義(현시부공의);「是名佛法(시명불법)」者(자),

顯示相應義(현시상응의)。

여기서 여래께서 불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불공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이러한 것을 불법이라

부른다는 것은 상응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何者是相應(하자시상응)?若佛法(약불법),

如說有自性者(여설유자성자),

則如來不說佛法(칙여래부설불법)。

以雖不說(이수부설),亦自知故(역자지고),

是故無有自性(시고무유자성)。

為世諦故(위세체고),如來說名佛法(여래설명불법)。

如是於一切處(여시어일절처),

顯示不共及相應義應知(현시부공급상응의응지)。

어떠한 것이 상응인가 하면, 만약 불법이 그 말씀

처럼 자성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불법도,

비록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우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자성을 세제로 삼는 까닭에,

여래께서 불법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의 처소에서 불공 및 상응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復次(부차),佛法者(불법자),

攝波羅蜜事及念處等菩提分應知

(섭바파라밀사급념처등보제분응지)。

菩薩離此二邊故(보살리차이변고)。

於彼對治不復更失故名不失(어피대치부복경실고명부실)。

다시 불법이란 바라밀을 섭수하는 일과 염처 등의 보리분임을

알아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은 두 변을 여의는 까닭에,

그와 같은 것을 대치하여 다시 퇴실하지 않으므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六)何者(하자)「地(지)」,此地有三種(차지유삼종):

謂(위) ﹝一﹞信行地(신행지),﹝二﹞淨心地(정심지),

﹝三﹞如來地(여래지)。

於中(어중)

﹝一﹞前十六住處顯示信行地(전십륙주처현시신행지),

﹝二﹞證道住處是淨心地(증도주처시정심지),

﹝三﹞上求佛地(상구불지),

究竟住處是如來地(구경주처시여래지)。

어떠한 것이 지地 인가 하면, 이 같은 지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신행지ㆍ정심지ㆍ여래지이다.

여기서의 16주처는 신행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증도주처는 정심지이고, 구경주처는 여래지이다.

(七)云何立名(운하립명)?名(명)「金剛能斷금강능단)」

者(자)?此名有二義相應知(차명유이의상응지)。

如說入正見行(여설입정견행)、入邪見行故(입사견행고)。

어떻게 그 이름을 세우는가 하면, 금강처럼 능히 끊는다고

말해지는 이름은 두 가지 이치와 상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말씀에 따라 정견행(正見行)에 섭입되고 사견행(邪見行)에

섭입되기 때문이다.

「金剛(금강)」者(자),細牢故(세뢰고),

細者智因故(세자지인고),牢者不可壞故(뢰자부가괴고)。

「能斷(능단)」者般若波羅蜜中(자반야바라밀중),

聞思修所斷(문사수소단)。

如金剛斷處而斷故(여금강단처이단고),

是名(시명)「金剛能斷(금강능단)」。

여기서 금강이란 가느다란 절굿공이다.

여기서 가늘다고 한 것은 지혜의 인이기 때문이고,

절굿공이라 한 것은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고,

능히 끊는다고 한 것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문혜ㆍ사혜ㆍ수혜에 의하여 끊어지는 것

이 마치 금강저로 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능단이라 부른다.

又如畫金剛形(우여화금강형),初後闊(초후활),中則狹

(중칙협),如是般若波羅蜜中狹者(여시반야바라밀중협자),

謂淨心地(위정심지);初後闊者(초후활자),

謂信行地(위신행지)、如來地(여래지),

此顯示不共義也(차현시부공의야)。

  彼五種義句上上依止應知(피오종의구상상의지응지),

彼等皆依止地故(피등개의지지고)。

또 금강저의 형태를 그려보면, 첫 부분과 끝부분은 넓어지고

가운데 부분은 좁아지는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이 그 중간에서 좁아지는 것을 정심지라 한다. 첫 부분과 끝부분이 넓어진다는 것은 신행지와 여래지이니, 이것은 불공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와 같은 다섯 종류의 구절의 의미가 그 구절의 의미마다 의지하는 바를 알아야 하니, 그와 같은 것은 모두 지지止地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說修多羅身相續(설수다라신상속),

此義句今當說(차의구금당설),

世尊何故以寂靜者威儀而坐也(세존하고이적정자위의이좌야)?顯示唯寂靜者(현시유적정자),

於法能覺能說故(어법능각능설고)。

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래의 말씀이 수다라신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같은 구절의 의미를 지금 설명하도록 하겠다.

세존께서 어째서 적정한 위의를 갖추어 앉아 계셨는가 하면,

오직 적정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법을 능각하고 능설하기 때문이다.

何故上座須菩提問也(하고상좌수보제문야)?

有六因緣(유륙인연):

﹝一﹞為斷疑故(위단의고),

﹝二﹞為起信解故(위기신해고),

﹝三﹞為入甚深義故(위입심심의고),

﹝四﹞為不退轉故(위부퇴전고),

﹝五﹞為生歡喜故(위생환희고),

﹝六﹞為正法久住故(위정법구주고)。

即是般若波羅蜜令佛種不斷(즉시반약파라밀령불종부단)。

어째서 상좌 수보리가 질문하였는가 하면,

여기에는 여섯 종류의 인연이 있으니,

의심을 끊고자 함이고, 신해를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고,

깊고 깊음의 이치에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고,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정법을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云何以此令佛種不斷也(운하이차령불종부단야)?

  ﹝一﹞若有疑者(약유의자),得斷疑故(득단의고)。

어째서 이 같은 것이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가?

만약 의심하는 이가 있으면 그 의심을 끊고자 함이고,

﹝二﹞有樂福德而心未成熟諸菩薩等

(유악복덕이심미성숙제보살등),聞多福德(문다복덕),

於般若波羅蜜起信解故(어반약파라밀기신해고)。

복덕을 즐기더라도 그 마음이 성숙하지 못한 여러 보살들이 많은 복덕을 전해 듣고 반야바라밀에 대한 신해를 일으키게 하고자 함이고,

﹝三﹞已成熟心者(이성숙심자),入甚深義故(입심심의고)。

이미 그 마음이 성숙된 이는 깊고 깊음의 이치로 들어가게 하고자 함이고,

﹝四﹞已得不輕賤者(이득불경천자),由貪受持修行(유탐수지수행),有多功德不復退轉故(유다공덕부복퇴전고)。

이미 불경천(不輕賤)을 획득한 이는 그 탐심에 연유해서 수행의 많은 공덕을 수지하는 것으로 인해서 다시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五﹞已得順攝及淨心者(이득순섭급정심자),

於法自入及見生歡喜故(어법자입급견생환희고)。

이미 섭수의 수순과 청정한 마음을 얻은 이는

법에 스스로 들어가 이를 인견하고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六﹞能令未來世大乘教久住者故

(능령미래세대승교구주자고)。

미래세에 대승의 교리를

오래 머물게 하고자 함이다.

若略說(약략설):疑者令見故(의자령견고);樂福德及心已成熟諸菩薩等攝受故(악복덕급심이성숙제보살등섭수고);

已得不輕賤者令精勤心故(이득부경천자령정근심고)。

已淨心者令歡喜故(이정심자령환희고)。

만약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면, 의심 내는 이로 하여금 이를 인견하게 하고자 함이고, 복덕을 기꺼워하거나 마음이 이미 성숙된 여러 보살들이 섭수하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불경천을 얻은 이는 힘써 정진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자 함이고, 이미 마음이 깨끗한 이는

환희심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諸菩薩有七種大故(제보살유칠종대고),

此大眾生名摩訶薩埵(차대중생명마하살타)。

여러 보살에게는 일곱 종류의 대가 있는 까닭에,

이 같은 대중생을 마하살타라 부른다.

何者七種大(하자칠종대)?謂(위)﹝一﹞法大(법대),

﹝二﹞心大,﹝三﹞信解大(신해대),

﹝四﹞淨心大(정심대),﹝五﹞資糧大(자량대),

﹝六﹞時大(시대),﹝七﹞果報大(과보대),

如菩薩地持中說(여보살지지중설)。

여기서 어떠한 것이 일곱 종류의 ‘대’인가 하면,

소위 법대ㆍ신해대ㆍ정심대ㆍ자량대ㆍ시대ㆍ과보대이니,

보살지에서 가지된다고 설명한 그대로이다.

經言(경언):「善攝第一善攝(선섭제일선섭)」者(자),

於諸菩薩所(어제보살소),何者善攝(하자선섭)?

何者第一也(하자제일야)?

경전에서 “선섭이고 제일의 선섭이니, 여러 보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선섭이고 제일인가 하면,

利樂相應為善攝第一(리악상응위선섭제일),

有六種應知(유륙종응지):﹝一﹞時(시),

﹝二﹞差別(차별),﹝三﹞高大(고대),﹝四﹞牢固(뢰고),

﹝五﹞普遍(보편),﹝六﹞異相(이상)。

이익과 즐거움이 상응하는 것이 선섭이다.

제일에는 여섯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첫 번째는 시이고, 두 번째는 차별이고,

세 번째는 고대이고, 네 번째는 뇌고이고, 다섯 번째는 보편이고, 여섯 번째는 이상이다.

﹝一﹞何者時(하자시)?現見法及未來故(현견법급미래고)。

彼菩薩善攝中(피보살선섭중),樂者是現見法(악자시현견법),利者是未來世(리자시미래세)。  

여기서 어떠한 것이 시인가 하면, 현재 보이는 법과 미래이니,

그와 같은 보살의 선섭 가운데에서의 즐거움이 바로 현재 보이는 법이 되고, 그 이익이 미래법이 된다.

﹝二﹞何者差別(하자차별)?

於世間三摩缽帝及出世聖者(어세간삼마발제급출세성자),

聲聞獨覺等善攝中差別故(성문독각등선섭중차별고)。

어떠한 것이 차별인가 하면, 세간의 삼마발제와 출세간의 성자ㆍ성문ㆍ독각 등의 선섭 가운데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三﹞何者高大(하자고대)?

此善攝無有上故(차선섭무유상고)。

어떠한 것이 고대인가 하면,

이 같은 선섭에는 유상이 없기 때문이다.

﹝四﹞何者牢固(하자뢰고)?謂畢竟故(위필경고)。

어떠한 것이 ‘뇌고’인가 하면, 소위 필경이기 때문이다.

﹝五﹞何者普遍(하자보편)?

自然於自他身善攝故(자연어자타신선섭고)。

어떠한 것이 보편인가 하면,

나와 남의 유신을 자연스럽게 선섭하기 때문이다.

﹝六﹞何者異相(하자이상)?

於未淨菩薩善攝中勝上故(어미정보살선섭중승상고)。

어떠한 것이 이상인가 하면,

청정하지 못한 보살의 선섭 중에서 수승하기 때문이다.

經言(경언):「第一付囑(제일부촉)」者(자),

何者第一付囑(하자제일부촉)?

경전에서 “제일의 부촉”이라 말씀하시는 것 가운데,

어떠한 것이 제일가는 부촉인가 하면,

有六種因緣(유륙종인연):﹝一﹞入處(입처),

﹝二﹞法爾得(법이득),﹝三﹞轉教(전교),

﹝四﹞不失(부실),﹝五﹞悲(비),﹝六﹞尊重(존중)。

여기에도 여섯 종류의 인연이 있다.

첫 번째는 입처이고, 두 번째는 법이득이고, 세 번째는 전교이고, 네 번째는 부실이고, 다섯 번째는 비이고, 여섯 번째는 존중이다.

﹝一﹞何者入處(하자입처)?

於善友所善付囑故(어선우소선부촉고)。

어떠한 것이 입처인가 하면, 선지식에게 잘 부촉받는 것이다.

﹝二﹞何者法爾得(하자법이득)?已得善攝(이득선섭),

菩薩於他所法爾善攝故(보살어타소법이선섭고)。

어떠한 것이 법이득인가 하면,

이미 선섭을 얻은 보살이 다른 이를 이치에 따라 선섭하는 것이다.

﹝三﹞何者轉教(하자전교)?

汝等於餘菩薩應當善攝(여등어여보살응당선섭),

是名轉教(시명전교),此等三種(차등삼종),

如其次第(여기차제),即是(즉시)﹝四﹞不失(부실),

及(급)﹝五﹞悲(비)﹝六﹞尊重等應知(존중등응지)。

어떠한 것이 전교인가 하면, “그대들이 다른 보살을 잘 선섭해야 한다”는 이와 같은 것을 전교라 부른다. 다음의 세 종류는 그 순서에 따라 부실ㆍ비ㆍ존중 따위도 알아야 한다.

何故唯問發行(하고유문발행)?

菩薩乘為三種菩提差別故(보살승위삼종보제차별고),

以善問故(이선문고),

於上座須菩提所應稱善哉(어상좌수보제소응칭선재)。

所有眾生眾生所攝者(소유중생중생소섭자),

總相說也(총상설야)。

여기서 어째서 오직 행(행)의 발기만을 질문하는가 하면,

보살승에는 세 종류의 보리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그 질문이 어질기 때문에 상좌 수보리에게 “어질도다”라고

칭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란 중생으로 섭수되는 이들을

그 총상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고,

卵生等者(란생등자),差別說也(차별설야)。

又受生依止境界所攝差別應知(우수생의지경계소섭차별응지),乃至化生等者受生別故(내지화생등자수생별고)。

若有色若無色者(약유색약무색자),依止別故(의지별고)。

若有想若無想(약유상약무상),若非有想非無想者(약비유상비무상자),境界所攝別故(경계소섭별고)。

난생 등은 차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또 생을 받는 의지의 경계에 섭수되는 차별을 알아야 하니, 화생 등에 이르기까지 그 생을

따로 받기 때문이다. 만약 유색이거나 무색이라면 그 의지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 유상이거나 무상이거나 비유상비무상이라면 그 경계에 섭수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所有眾生界施設住施設已者(소유중생계시설주시설이자),

謂上種種相住眾生界佛施設說也

(위상종종상주중생계불시설설야)。

“모든 중생계를 시설하여 그 시설된 것에 머무른다”라는 것이란,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에 머무르는 중생계는 부처님이 시설하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我皆令入涅槃(아개령입열반)」者(자),

何故願此不可得義生所攝故(하고원차불가득의생소섭고)?

無過以皆是生故(무과이개시생고)。

따라서 어째서 “내가 모두 열반에 들게 하겠다”라고 발원하는가

하면, 이 같은 불가득의 이치로 생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허물없이 모두 여기서 거듭나게 하고자 함이니,

如所說卵生等生並入願數者(여소설란생등생병입원수자),

彼卵生濕生無想及非有想非無想等則不能

(피란생습생무상급비유상비무상등칙부능)。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난생 등의 생도 중생수에 넣어 발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난생ㆍ습생ㆍ무상과 비유상비무상 등은 불가능한 것인데도,

云何能令一切眾生入涅槃也(운하능령일절중생입열반야)?

有三因緣故(유삼인연고):﹝一﹞難處生者待時故(난처생자대시고),﹝二﹞非難處生未成熟者成熟之故(비난처생미성숙자성숙지고),﹝三﹞已成熟者解脫之故(이성숙자해탈지고)。

어째서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하겠다고 하는가?

세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난처에서 생겨난 이는 그 시절을

기다리기 때문이고, 난처 아닌 곳에서 태어나되 미처 성숙하지

못한 이는 이를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고, 이미 성숙한 이는 해탈시키기 때문이다.

何故說無餘涅槃界不直說涅槃(하고설무여열반계부직설열반)?若如是(약여시),便與世尊所說(편여세존소설),

初禪等方便涅槃不別故(초선등방편열반부별고),

彼自以丈夫力故(피자이장부력고),

無佛亦得但非究竟(무불역득단비구경)。

어째서 무여열반계를 설명하면서 곧바로 열반을 설명하지 않는가? 만약 이와 같은 경우에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초선 등의 방편열반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것은 스스로의 장부력으로 비롯되는 까닭에, 부처님 없이도 얻을 수 있되, 다만 구경이 아닌 것이다.

何故不說有餘涅槃界(하고부설유여열반계)?

彼共果故自以宿業(피공과고자이숙업),

又值佛說而得果故(우치불설이득과고),

又非一向身苦有餘故(우비일향신고유여고)。

어째서 유여열반계를 설명하지 않는가?

그와 같은 것은 그 과보가 공통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숙업에 연유하는 것이고, 또 부처님의 말씀에 맞게[值] 과를 얻기 때문이다.

또 일향(一向)이 아니기에 그 신체의 고가 남아 있기 때문이고,

如是涅槃及有餘涅槃等(여시열반급유여열반등),

丈夫力果故共果故(장부력과고공과고),

非究竟果故非一向果故(비구경과고비일향과고),

是故說無餘(시고설무여)。

이와 같은 열반 및 유여열반 등은 장부력의 과보이기 때문이고,

공통되는 과보이기 때문이고, 구경의 과가 아니기 때문이고,

일향의 과가 아니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무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如是無量眾生入涅槃已者(여시무량중생입열반이자),

顯示卵生等生一一無量故(현시란생등생일일무량고)。

“이 같은 무량한 중생이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란

난생 등의 생 하나하나가 무량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無有眾生得涅槃者(무유중생득열반자),此何義(차하의)?

如菩薩自得涅槃(여보살자득열반),無別眾生(무별중생)。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다”는 이러한 것은 무슨 이치인가 하면,

보살이 스스로 열반을 얻더라도 중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何以故(하이고)?若菩薩眾生想轉(약보살중생상전),

則不名菩薩者(칙부명보살자),此何義(차하의)?

若菩薩於眾生(약보살어중생),所他想轉非自體想(소타상전비자체상),不名菩薩故(부명보살고)。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중생상으로 전의하면 바로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만약 보살이 중생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전의하는 경우,

이것도 자체상(自體想)이 아니기에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何以故(하이고)?若眾生想(약중생상)、命想(명상)、

人想轉(인상전),不名菩薩者(부명보살자),此何義(차하의)?若以煩惱心取眾生(약이번뇌심취중생)、命(명)、

人想轉(인상전),彼則有我想及於眾生(피칙유아상급어중생)。中有眾生想轉(중유중생상전)

왜냐하면 만약 중생상(眾生想)ㆍ명상(命想)ㆍ인상(人想)으로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어떠한

이치인가 하면, 만약 번뇌심(煩惱心)으로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을 취하여 전의하는 그와 같은 경우, 바로 아상(我想)이 일어나 중생 가운데 처해서 중생상으로 전의하기 때문이다.

菩薩於彼不轉(보살어피부전),已斷我見故(이단아견고),

得自行(득자행)(行者謂五陰行(행자위오음행))

平等相故(평등상고),信解自他平等(신해자타평등)。

彼菩薩非眾生(피보살비중생)、命(명)、人取見者(인취견자),此是其義(차시기의)。

그러나 보살은 그와 같은 것으로 전의하지 않으니,

이미 아견(我見)을 끊은 까닭에 자재행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행(行)이란 5음(陰)의 행을 가리킨다.]

그 모양이 평등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 평등하다고 친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보살은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을 견(見)으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치이다.

復次(부차),經言(경언):

「菩薩應生如是心(보살응생여시심)」者(자),

顯示菩薩應如是住中欲願也(현시보살응여시주중욕원야)。

다시 경전에서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무르는 가운데에서의 지욕과 원력[欲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若菩薩我想轉(약보살아상전),不名菩薩者(부명보살자),

顯示應如是修行中(현시응여시수행중),

相應三摩缽帝時也(상응삼마발제시야)。

“만약 보살이 ‘아상’으로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은 수행 가운데에 상응하는 삼마발제의 시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若眾生想(약중생상)、命想(명상)、人想轉(인상전),

不名菩薩者(부명보살자),

顯示應如是降伏心中攝散時也

(현시응여시강복심중섭산시야)。

“만약 중생상ㆍ명상ㆍ인상이 전의하면 ‘보살’이라 일컫지 못한다는 것”이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 가운데에서

그 섭수되거나 이산되는 시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如菩薩相應三摩缽帝散時(여보살상응삼마발제산시),

眾生想亦不轉(중생상역부전),

如彼爾焰相住故(여피이염상주고)。

보살이 삼마발제에 상응하거나 이산하는 때에는

중생상도 역시 전의하지 않으니,

그들과 같이 염상(焰相:번뇌상)에 머무르는 까닭이다.

是故無有眾生得涅槃者(시고무유중생득열반자),

此得成就彼欲願者(차득성취피욕원자),

攝諸住處為最勝彼相應行相行(섭제주처위최승피상응행상행),餘住處時(여주처시),依止欲願決定得故(의지욕원결정득고),此欲願義不復解釋(차욕원의부복해석)。

“이러한 까닭에 열반을 얻는 중생이 없다는 것”과 “이것은 그와

같은 지욕과 원력을 성취한다는 것”이란 여러 주처를 섭수하여

가장 수승한 저것과 상응하는 행상으로 인하여 여타의 주처로 행하는 때이니, 지욕과 원력에 의지해서 그 지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욕과 원력의 이치는 다시 해설하지 않겠다.

自此後餘住處中(자차후여주처중),

有五種隨所相應而解釋應知(유오종수소상응이해석응지):

﹝一﹞依義(의의),﹝二﹞說相(설상),﹝三﹞攝持(섭지),

﹝四﹞安立(안립),﹝五﹞顯現(현현)。

﹝一﹞住處對治為依義(주처대치위의의),

﹝二﹞即彼住處為說相(즉피주처위설상),

﹝三﹞欲願為攝持(욕원위섭지),

﹝四﹞住處第一義為安立(주처제일의위안립),

﹝五﹞相應三摩提為顯現(상응삼마제위현현)。

이 이후에 그 밖의 주처 가운데에서 다섯 종류가 그 상응하는 것에 부수되어 해석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니,

첫 번째가 이치에 의지하는 것[依義]이고,

두 번째가 상의 설명[說相]이고,

세 번째가 섭지(攝持)이고,

네 번째가 안립(安立)이고,

다섯 번째가 현현(顯現)이다.

주처의 대치가 의의이고, 그와 같은 주처에 즉(即)하는 것이

설상이 된다. 지욕과 원력이 섭지가 되고, 주처의 제일의(第一義)가 안립이 되고, 삼마제에 상응하는 것이 현현이 되기에,

於(어)「八種住處(팔종주처)」之(지)

﹝二﹞波羅蜜淨住處中(파라밀정주처중),經言(경언):

「菩薩不住於物(보살부주어물),應行布施(응행포시)」

等(등)。

바라밀의 청정한 주처 가운데에 처하는 것이다.

경전에서 “보살이 물건에 머물지 않고 마땅히 보시 등을 행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는,

此為(차위)「五種隨所相應(오종수소상응)」之(지)

﹝一﹞依義(의의),顯示對治住著故(현시대치주저고),

이와 같은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집착에 머무르는 것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경언):「應行施(응행시)」者(자),此為(차위)

「五種隨所相應(오종수소상응)」之(지)﹝二﹞說相(설상),

六波羅蜜初攝一切檀那體性故

(륙파라밀초섭일체단나체성고)。

경전에서 “마땅히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6바라밀의 앞부분에서 일체의 단나(檀那)의 체성(體性)을 섭수하고자 함이다.

檀那有三種(단나유삼종):1、資生施者(자생시자),謂檀那波羅蜜(위단나파라밀),2、無畏施者(무외시자),謂尸羅波羅蜜(위시라파라밀)、羼提波羅蜜(찬제파라밀),3、法施者(법시자),謂毘梨耶波羅蜜(위비리야파라밀)、禪那波羅蜜(선나파라밀)、缽羅腎攘波羅蜜等(발라신양파라밀등)。

단나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의 자생시(資生施)는 단나바라밀이고, 두 번째의 무외시(무외시)는 시라바라밀ㆍ찬제바라밀이고, 세 번째의 법시는 비리야바라밀ㆍ선나바라밀ㆍ발라신양바라밀 등이다.

若無精進(약무정진),於受法人所(어수법인소),

為說法時(위설법시),疲惓故不能說法(피권고부능설법)。

만약 정진하지 못하고 수법受法하는 이에게 설법을 하는 때에,

피곤한 까닭에 설법을 하지 못하거나,

若無定(약무정),則貪於信敬供養(칙탐어신경공양),及不能忍寒熱等(급부능인한열등),逼惱故染心說法(핍뇌고염심설법)。

정(定)에 들지 못하거나 공경과 공양을 탐하거나 추위나 더위를

인내하지 못하는 따위로 괴로움에 몰린 까닭에 염오심(染心)으로 설법하거나,

若無智慧(약무지혜),便顛倒說法(편전도설법),

多有過故(다유과고)。不離此三得成法施(부리차삼득성법시)。

지혜가 없이 전도되게 설법하면 허물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 같은 세 가지를 여의고서 법시가 이루어질 수 없다.

彼諸波羅蜜有二種果(피제파라밀유이종과),謂未來(위미래)、現在(현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바라밀에는 두 종류의 과보가 있으니,

소위 미래에 받을 과[未來果]와 현재에 받는 과[現在果]이다.

1、未來果者(미래과자),檀那波羅蜜得大福報(단나파라밀득대복보);尸羅波羅蜜得自身具足(시라파라밀득자신구족),謂釋梵等(위석범등);羼提波羅蜜得大伴助(찬제파라밀득대반조)、大眷屬(대권속);毘離耶波羅蜜得果報等不斷絕(비리야파라밀득과보등부단절),禪那波羅蜜得生身不可損壞(선나파라밀득생신부가손괴);缽羅腎攘波羅蜜得諸根猛利及多諸悅樂(발라신양파라밀득제근맹리급다제열악),

於大人眾中得自在等(어대인중중득자재등)。

미래에 받을 과란 단나바라밀로서 커다란 복의 과보를 받는 것이고, 시라바라밀로서 자재신의 구족을 얻는 것이니,

말하자면 제석천ㆍ범천등이다. 찬제바라밀은 커다란 조력자나

커다란 권속을 얻게 되는 것이고, 비리야바라밀은 과보 등이 단절하지 않는 것을 얻게 되고, 선나바라밀은 허물어지지 않는 금강신의 생성을 얻게 되는 것이고, 발라신양바라밀은 여러 가지 근의

예리함과 여러 가지 즐거움 등을 얻어 대인의

무리 가운데에서도 자재함 등을 얻는 것이다.

2、現在果者(현재과자),得一切信敬供養(득일절신경공양),及現法涅槃等(급현법열반등)。於中若菩薩求未來果故行施(어중약보살구미래과고행시),為住物行施(위주물행시),

如所施物還望得彼物果(여소시물환망득피물과)。

  是故經言(시고경언):

「不住於物應行布施(부주어물응행포시)。」

현재에 받는 과란 일체 대중의 공경과 공양 및 현법(現法)의 열반 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약 보살이 미래에 받을 과를

구하고자 보시를 행하되, 물건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행하게 되면, 그 보시한 물건으로 인해서 다시 그와 같은 물건에 관한 과보의

취득을 바라게 되는 까닭에, 경전에서 “물건에 머물지 말고 마땅히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若求未來尸羅等果故行施(약구미래시라등과고행시),為有所住行施(위유소주행시);是故經言(시고경언):「無所住應行布施(무소주응행포시)。」尸羅等果有眾多(시라등과유중다),

不可分別故(부가분별고),總名有所往(총명유소왕)。

만약 미래의 시라(尸羅) 등의 그 과보를 구하려는 까닭에 보시를 행한다면, 머무름이 있는[有所住]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라 등의 과보는 너무 많아서 여기서 모두 분별할 수 없는 까닭에 총괄적으로 ‘머무름이 있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若求現在果(약구현재과),信敬供養等故行施(신경공양등고행시),為住色聲香味觸行施故(위주색성향미촉행시고),

經言(경언):「不住色(부주색)」等(등)。

만약 현재에 받는 과의 공경과 공양 등을 구하고자 보시를 행한다면,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색 등에 머물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若求現法涅槃故行施(약구현법열반고행시),

為住法行施故(위주법행시고),經言(경언):

「不住於法應行布施(부주어법응행포시)」。

만약 현법의 열반을 구하고자 보시를 행한다면,

이것은 법에 머무르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 “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又經言(우경언):「應行布施(응행포시)」者(자),即說(즉설)「五種隨所相應(오종수소상응)」之(지)﹝三﹞攝持施之欲願故(섭지시지욕원고)。

또 경전에서 “보시를 행하여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보시하고자 하는 지욕과 원력의 섭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經言(경언):「不住行施(부주행시)」者(자),

即此不住為(즉차부주위)「五種隨所相應(오종수소상응)」

之(지)﹝四﹞安立第一義故(안립제일의고)。

경전에서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같이 머물지 않아야만 제일의를 안립(安立)하게 되는 까닭이고,

於中以不住故(어중이부주고),顯示如所有事第一義不住物等(현시여소유사제일의부주물등),是所有事(시소유사)。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그 밖의 모든 제일의가 물건 등에 머물지 않는다는 이 같은 모든 일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경언):「菩薩應如是行施(보살응여시행시),不住於相想(부주어상상)」者(자),此為顯示(차위현시),謂相應三昧及攝散心(위상응삼매급섭산심),於此二時不住相想(어차이시부주상상),如是建立不住已(여시건립부주이),或有菩薩貪福德故(혹유보살탐복덕고),於此不堪(어차부감)。

경전에서 “보살은 이같이 보시를 행하여야 하니, 상(相)이라는

생각[想]에 머물지 않아야만”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삼매와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것이니, 이 같은 두 시분에 상의 생각에 머물지 않는, 이와 같은 것을

머물지 않는 것으로 세우게 된다. 또 보살이 복덕을 탐내는 까닭에 이와 같은 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為令堪故(위령감고),世尊顯示不住行施(세존현시부주행시),福聚甚多(복취심다),猶如虛空(유여허공)。

이를 감당하게 하고자 세존께서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니, 복취가 아무리 많더라도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有三因緣(유삼인연):

﹝一)﹞遍一切處(편일절처),

謂於住不住相中福生故(위어주부주상중복생고)。

﹝二﹞寬廣高大殊勝故(관광고대수승고)。

﹝三﹞無盡究竟不窮故(무진구경부궁고)。

여기에는 세 가지 인연이 있다.

첫 번째는 일체의 처소에 편만한 것이니,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에 머무는 가운데에서 복이 생겨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광대(광대)하고 고대(고대)하고 수승하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무진해서 구경토록 다하지 않기 때문이니,

為欲得色身住處故(위욕득색신주처고),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於意云何(어의운하)?

應以相具足見如來不(응이상구족견여래부)?」

此為依義顯示(차위의의현시),

對治如來色身慢故(대치여래색신만고),

經言(경언):「相具足(상구족)」者(자),

此為說相(차위설상),顯示如來色身故(현시여래색신고)。

색신의 주처를 얻고자 하는 지욕[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의 구족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여래의 색신이란 만결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상의 구족”이라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여래의 색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上座須菩提言(상좌수보제언)「不也(부야)」,為成滿此義故(위성만차의고)。世尊說(세존설):「須菩提(수보리)!所有相具足(소유상구족)」者(자),彼為虛虛此即顯欲願(피위허허차즉현욕원),於如是義中應攝持故(어여시의중응섭지고)。

따라서 상좌 수보리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이 같은 이치를 원만하게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수보리여, 모든 상의 구족”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은 허망한 것이기에, 여기서 지욕과 원력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이와 같은 이치 가운데에서 마땅히 섭지되는 까닭에,

及即是安立第一義(급즉시안립제일의),於第一義中相具足為虛妄(어제일의중상구족위허망),

非相具足為不虛妄(비상구족위부허망)。

아울러 여기서 제일의를 안립하게 되고,

제일의 가운데에서 상의 구족도 허망한 것이 되기에,

상의 구족이 아닌 것으로 허망하지 않은 것을 삼게 된다.

經言(경언):「如是諸相非相(여시제상비상),

應見如來(응견여래)」者(자),此為顯現(차위현현),

謂相應三昧及攝散心時(위상응삼매급섭산심시),

於彼相中非相見故(어피상중비상견고)。

경전에서 “이와 같은 여러 상은 비상(비상)이기에 마땅히 여래를 보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러한 것을 현전에 나타내는 것이니, 말하자면 삼매의 상응과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시분이다. 그것처럼 “상 가운데에서 비상으로 보게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為欲得言說法身住處故(위욕득언설법신주처고),經言(경언):「頗有眾生於未來世(파유중생어미래세),於如是修多羅句說(어여시수다라구설)」等(등),於中修多羅句說者(어중수다라구설자),謂所有義應知(위소유의응지)。何者為句(하자위구)?如上所說七種義句(여상소설칠종의구)。

언설법신의 주처를 얻고자 하는 지욕을 내게 하고자 함이다.

경전에서 “많은 중생이 미래세에 이와 같은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 등”이라고 말씀하신 것 가운데, 여기서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이란 말하자면 소유(소유)의 이치임을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이 글귀인가 하면, 앞서 설명한 일곱 종류의 구의이다.

上座須菩提作是念(상좌수보제작시념):「於未來世無有生實想(어미래세무유생실상)」者(자),為遮此故(위차차고),

「世尊言(세존언):有正法欲滅時(유정법욕멸시)」者(자),

謂修行漸滅時應知(위수행점멸시응지)。

“상좌 수보리가 ‘미래세에 실다운 생각을 내지 않는다’고 마음 내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을 차단하고자 함이고, 세존께서 “정법이 소멸하려는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수행이 점차로 소멸되어 가는

시절임을 알아야 한다.

次後世尊為如是顯示修行(차후세존위여시현시수행),

如是集因(여시집인),如是善友攝受(여시선우섭수),

如是攝福德相應(여시섭복덕상응),

如是實想中當得實想故(여시실상중당득실상고)。

이 이후로 세존께서 이처럼 수행을 나타내 보이시고자 함이니,

이와 같이 그 인을 모으시고자[集因] 함이고, 이와 같이 선지식(善友)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이와 같이 복덕의 상응을 섭수하고자

함이고, 이와 같이 실다운 생각[實想] 가운데에서 마땅히 실다운 생각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有戒有功德有智慧(유계유공덕유지혜)」者(자),此增上戒等三學(차증상계등삼학),顯示修行功德者(현시수행공덕자),少欲等功德為初(소욕등공덕위초),乃至三摩提等(내지삼마제등)。

경전에서 “계율을 지켜 공덕이 있고 지혜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이 같은 증상계학(증상계학) 등의 3학(학)은 수행의 공덕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작은 욕 등의 공덕이 그 첫 부분이 되어 삼마지 등에 이르게 된다.

經言(경언):「已得供養無量百千諸佛(이득공양무량백천제불),乃至一心淨信(내지일심정신)」等(등)。此顯示集因(차현시집인),一心淨信尚得如是業(일심정신상득여시업),

何況生實想也(하황생실상야)。

경전에서 “이미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에 대한 공양을 이루었으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신심이 청정하였노라”고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것은 ‘집인(集因)’에 해당한다. 한결같은 마음의

청정한 신심도 이와 같은 업을 얻는데 하물며 실다운 생각을 내는 것이겠는가?

經言(경언):「如來悉知(여래실지)」者(자),知名身(지명신),「如來悉見(여래실견)」者(자),見色身(견색신),謂於一切行住所作中(위어일체행주소작중),知其心(지기심),見其依止故(견기의지고)。此等顯示善友所攝(차등현시선우소섭)。

경전에서 “여래께서는 모두 아시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명신(명신)을 아신다는 것이고, 또 “여래께서는 모두 보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색신(色身)을 보는 것이니, 말하자면 일체의 행주법(行住法)의 지음[所作] 가운데에서 그 마음을 아시고 그 의지하는 것을 보시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것은 선지식에 섭수되는 것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경언):「生取無量福聚(생취무량복취)」者(자),此顯示攝福德(차현시섭복덕)。「生(생)」者福正起時故(자복정기시고),「取(취)」者即彼滅時攝持種子故(자즉피멸시섭지종자고)。

경전에서 “한량없는 복취가 생겨나서 이를 취하게 되니”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복덕의 섭수를 보이고자 함이다. 여기서 생겨난다는 것이란 복이 일어나는 시분이기 때문이고, 취한다는 것이란 그것이 소멸되는 때에 그 종자를 섭지하기 때문이다.

經言(경언):「是諸菩薩無復我想眾生想轉(시제보살무복아상중생상전)」,乃至言(내지언)「若法想轉(약법상전),即為有我取(즉위유아취)」者(자),此顯示實想對治五種邪取故(차현시실상대치오종사취고)。

경전에서 “이와 같은 여러 보살은 아상(아상)과 중생상(衆生相)으로의 전의가 전혀 없노라”라고 말씀하시고, 또 “만약 법상(法想)으로 전의하게 되면 바로 유아(有我)를 취하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실다운 생각으로 다섯 종류의 그릇된 취함[邪取]을 대치하려는 때문이다.

何者五邪取(하자오사취):﹝一﹞外道(외도),﹝二﹞內法凡夫及聲聞(내법범부급성문),﹝三﹞增上慢菩薩(증상만보살),﹝四﹞世間共想定(세간공상정),﹝五﹞無想定(무상정)。

어떠한 것이 다섯 종류의 그릇된 취함인가 하면,

첫 번째가 외도(外道)이고, 두 번째가 정법(正法) 내의

범부(凡夫)와 성문이고, 세 번째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보살이고, 네 번째가 세간에 함께 하는 유상정(想定)이고,

다섯 번째가 무상정(無想定)이다.

第一者(제일자),我等想轉(아등상전);第二者(제이자),

法想轉(법상전);第三者(제삼자),無法想轉(무법상전),

此猶有法取(차유유법취),有法取者(유법취자),

謂取無法故(위취무법고);第四者(제사자),有想轉(유상전);第五者(제오자),無想轉(무상전)。

첫 번째는 아상 등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법상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법(無法)의 생각으로 전의하는 것이니, 이것도 유법(有法)을 취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유법을 취한다는 것이란 말하자면 무법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유상으로 전의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무상으로 전의하는 것이다.

是諸菩薩於彼皆不轉也(시제보살어피개부전야),此中顯了有戒乃至當生無量福聚等(차중현료유계내지당생무량복취등)。

이처럼 모든 보살은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모두 전의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계율을 지니고 공덕이 있고 지혜가 있는 이에게는

한량없는 복취 등이 생겨나는 것임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고자 함이다.

經言(경언):「何以故(하이고)」者(자),此言是中邪取但法(차언시중사취단법),及非法想轉(급비법상전),非我等想(비아등상),以想及依止不轉故(이상급의지부전고)。然於我想中隨眠不斷故(연어아상중수면부단고),則為有我取(칙위유아취)。

경전에서 “어째서인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 같은 말씀은 여기서 단지 법만을 잘못 취하였기 때문이니, 법상으로 전의하는 것도 아니고, 아상 등도 아닌 것이다. 그 생각을 내는 것이나 이것에 의지하는 것으로 전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상 가운데에서도 수면(隨眠:번뇌)은 끊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바로 나를 취함[我取]이 있게 된다.

是故經言(시고경언):「是諸菩薩(시제보살),若起法想則為有我取(약기법상칙위유아취)」等(등),「若無法想轉(약무법상전),則為有我取(칙위유아취)」等(등);此我等想轉中(차아등상전중),餘義猶未說(여의유미설)。

이러한 까닭에 경전에서는 “만약 보살이 법상을 일으키면,

‘나를 취함’ 등이 있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

이다. 만약 무법의 생각으로 전의하더라도 나를 취함 등이 있게

되니, 이와 같은 자아 등의 생각으로 전의하는 가운데에,

그 밖의 이치를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經言(경언):「則為有我取(칙위유아취)」者(자),於中取自體相續為我想(어중취자체상속위아상),我所取為眾生想(아소취위중생상),謂我乃至壽住取為命想(위아내지수주취위명상),展轉趣餘趣取為人想應知(전전취여취취위인상응지)。

경전에서 “바로 ‘나를 취함’이 있게 되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여기서 자체의 상속을 취하여 아상을 삼고 나를 취하는 것[我所取]으로 중생상을 삼는 것이니,

말하자면 “내가 수명에 머무른다는 것”에서 명상(命想)을 취하게 되고, “취도(趣餘)를 전전하여 그 밖의 취(趣取)로 나아간다는 것”에서 인상(人想)을 취하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於中言當生實想者(어중언당생실상자),

此為依義顯示對治不實想故(차위의의현시대치부실상고)。

여기서 “마땅히 실다운 생각을 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실답지 못한 생각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言於此修多羅句說中者(언어차수다라구설중자),

此為說相顯示言說法身故(차위설상현시언설법신고)。

이 같은 “수다라의 글귀의 설명 가운데에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상(相)의 설명이니 언설법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고,

即彼當生實想中(즉피당생실상중),言(언)「當生(당생)」者是欲願(자시욕원),「攝持(섭지)」者是諸菩薩無復我想(자시제보살무복아상),「轉(전)」等者是安立第一義(등자시안립제일의),「須菩提(수보리)!不應取法非法(부응취법비법)」者是顯了(자시현료)。

바로

그와 같이 실다운 생각을 낸다는 것이 지욕과 원력이다.

섭지란 이와 같은 보살이 다시 아상을 내지 않는 것이고, 전의가 평등하다는 것은 제일의를 안립하는 것이다. “수보리여, 법과 비법을 취해서는 안 되니”라는 말씀이 드러내어 깨닫게 하는 것은,

謂相應三摩缽帝及攝散心時(위상응삼마발제급섭산심시),

不應取法非法者(부응취법비법자),

於法體及法無我並不分別故(어법체급법무아병부분별고)。

말하자면 삼마발제의 상응과 산란한 마음을 섭수하는 시분이다.

여기서 법과 비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란

법체(法體)와 법무아(法無我)를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又言說法身要義者(우언설법신요의자),經言(경언):「以是義故(이시의고),如來常說(여래상설)[木+伐]喻法門(유법문)」,若解此者(약해차자),法尚應捨(법상응사),何況非法(하황비법)?故(고)「法尚應捨(법상응사)」者(자),實想生故(실상생고);「何況非法(하황비법)」者(자),理不應故(리부응고)。

또 언설법신의 요의(要義)란, 경전에서 이 같은 이치로써 여래께서 언제나 뗏목의 비유로서 법문(法門)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니,

“만약 이와 같은 것을 이해하는 이는 법조차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이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법조차도 버려야 한다’라고 한 것은 실다운 생각을 내기 때문이고, ‘하물며 비법이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略說顯示菩薩欲得言說法身(략설현시보살욕득언설법신),

不應作不實想(부응작부실상),為欲得智相(위욕득지상),

至得法身住處故(지득법신주처고)。

여기서 간략하게 보살이 언설법신을 얻고자 지욕하되 실답지 않은 생각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지혜의 생각을 얻고자 지욕하기 때문이고, 법신의 주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經言(경언):「須菩提(수보제)!於意云何(어의운하)?有法如來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正覺耶(유법여래어아누다라삼묘삼보제중정각야)?」此為依義顯示(차위의의현시),翻於正覺菩提耶(번어정각보제야);故說法者(고설법자),正覺所攝故(정각소섭고)。

경전에서 “수보리여, 네 뜻은 어떠한가?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서 정각을 이루는 법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을 이치에 의지해서 나타내 보이시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우친다는 것이겠는가?’라는 구절을 반대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여기서 법을 설한다는 것이란 정각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經言(경언):「有法可說取阿耨多羅三藐三菩提(유법가설취아누다라삼묘삼보제)」者(자),是為說相顯示至得法身故(시위설상현시지득법신고)。無有定法者(무유정법자),上座須菩提導佛意故(상좌수보제도불의고)。

경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취한다고 말할 만한 법”이라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법신에 이를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정법이 없다는 것이란 상좌 수보리가

부처님의 뜻을 유도하기 때문이고,

世諦故有菩提及得,是為欲願攝持,以方便故二俱為有,

若如世尊意說者,二俱無有,為顯此故言,如我解世尊所說義等。

세제(世諦)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리와 도달함이 지욕과 원력의 섭지 이니, 방편으로 비롯되는 까닭에 두 가지가 구비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세존의 의향에 따라 설명하게 되면, 두 가지는 모두 없는 것이기에, 이 같은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내가 세존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이해한 바에 따르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經言(경언):「何以故(하이고)?如來所說法(여래소설법),

不可取(부가취),不可說(부가설),非法(비법)、非非法(비비법)」者(자),是安立第一義(시안립제일의),由說法故知得菩提故(유설법고지득보제고)。

경전에서 “여래가 말씀하시는 법이 취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법도 아니고 비법도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니, 설법에 연유해서 보리에 도달함을 깨닫기 때문에,

於說法中安立第一義(어설법중안립제일의),於中不可取者謂正聞時(어중부가취자위정문시),不可說者謂演說時(부가설자위연설시),非法者分別性故(비법자분별성고),非非法者法無我故(비비법자법무아고)。

설법 가운데에서 제일의를 안립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취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바로 그 설법을 듣는 시분이고,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란 법을 연설하는 시분이다.

비법이란 분별성(分別性)이기 때문이고,

비법이 아니란 것은 법무아(法無我)이기 때문이다.

經言(경언):「何以故(하이고)?以無為故(이무위고),得名聖人(득명성인)」者(자),無為者(무위자),無分別義也(무분별의야),是故菩薩有學得名(시고보살유학득명)。無起無作中(무기무작중),如來轉依(여래전의),名為清淨(명위청정),是故如來無學得名(시고여래무학득명)。

경전에서 “어째서 무위(無為)를 빌미로 삼아 성인(聖人)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인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이 같은 무위란 분별하지 않는다는 이치이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유학(有學)이란 이름을 얻어 일어나지도 않고 짓지도 않는 가운데에서 여래로 전의하는 것을 청정이라 부르는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여래는 무학(無學)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於中初無為義者(어중초무위의자),三摩缽帝相應(삼마발제상응),及折伏散亂時顯了故(급절복산란시현료고)。第二無為(제이무위),唯第一義者無上覺故(유제일의자무상각고)。自此已後(자차이후),一切住處中(일체주처중),皆顯以無為故(개현이무위고),得名聖人應知(득명성인응지)。

여기에서 첫 번째 무위의 이치는 삼마발제의 상응과 산란한 시분을 조복받는 것임을 현료(顯了)하고자 함이다. 두 번째의 무위는 오직 제일의이니, 무상(無上)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 일체의 주처 가운데에서 모두 무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성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前諸住處中未說無為得名(전제주처중미설무위득명),於此說阿耨多羅三藐三菩提中無為已竟(어차설아누다라삼묘삼보제중무위이경)。

앞서 여러 주처 가운데에서는 무위란 이름을 얻지 않는다고 설명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서의 일체의 무위법을 요결(了結)했기 때문이다.

福相至得法身住處云何顯示(복상지득법신주처운하현시),即彼所有言說法身出生如來福相(즉피소유언설법신출생여래복상),至得法身於彼乃至說一四句偈生福甚多(지득법신어피내지설일사구게생복심다)。況復如來所有福相(황복여래소유복상),至得法身(지득법신)。

복상(福相)을 얻는 법신의 주처는 어떻게 나타나 보이는 것인가? 그와 같이 모든 언설법신에서 여래의 복상이 출생하고 법신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한 곳에서 한 수의 4구게의 언설에 이르기까지 생겨나는 복이 몹시 많은 것이니, 하물며 여래께서 복상을 갖춰서 법신을 지득하는 것이겠는가?

以何因緣於言說法身中如是說一四句偈(이하인연어언설법신중여시설일사구게),能生多福(능생다복),為成就此義(위성취차의)。

어떠한 인으로서 언설법신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한 수의 4구게를 해설하는 것이 많은 복을 생겨나게 하는가 하면, 바로 이 같은 이치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故經言(고경언):「何以故(하이고)?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從此出(여래아누다라삼묘삼보리종차출)」者(자),於中普集十法行阿含故(어중보집십법행아함고)。

경전에서 “어째서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여기서 나오는가 하면”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에서 널리 10법행(法行)의 아함(阿含)을 취집하기 때문이다.

「諸佛世尊從此生(제불세존종차생)」者(자),世諦故(세체고),言佛出生以有菩提故(언불출생이유보제고),即此二並故名為佛(즉차이병고명위불)、法(법),以菩提及佛故(이보리급불고),

“모든 불세존이 여기서 나신다는 것”이란 세제이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출생은 보리에 연유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이 같은 두 가지가 함께 하는 까닭에 불법이라 부르는 것이니, 보리와 부처님을 빌미로 삼기 때문이다.

經言(경언):「須菩提(수보리)!佛法佛法者(불법불법자),

即非佛法(즉비불법)。」

경전에서 “수보리여, 불법을 불법이라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시고,

復次(부차),經言(경언):「其所生福勝彼無量阿僧祇(기소생복승피무량아승기)」者(자),此為依義顯示對治福不生故(차위의의현시대치복부생고);

다시 경전에서 “그 생겨나는 복이 그와 같이 무량한 아승기(阿僧祇)보다 수승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이러한 것은 이치에 의지해서 복이 생겨나지 않는 것의 대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於中其福者(어중기복자),

此為說相顯示福相法身故(차위설상현시복상법신고)。

「勝彼(승피)」者顯示欲願攝持故(자현시욕원섭지고)。

여기서 복이란 것은 그 상을 설명해서 복상의 법신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그것보다 수승하다는 것이란 지욕과 원력의 섭지를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經言(경언):「世尊(세존)!是福聚即非福聚(시복취즉비복취),是故如來說福聚(시고여래설복취)」及言(급언)「須菩提(수보리)!佛法佛法者即非佛法(불법불법자즉비불법),是名佛法(시명불법)」者(자),以此福聚及佛法(이차복취급불법),為攝取如來福相法身中安立第一義故(위섭취여래복상법신중안립제일의고),為隨順無為得名故(위수순무위득명고)。相應三摩缽帝及折伏散亂(상응삼마발제급절복산란),不復顯了(부복현료)。

경전에서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복취는 바로 복취가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 복취를 설명하시고,

“수보리여, 불법을 불법이라 하게 되면 불법이 아니니,

이러한 것을 불법이라 부르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복취와 불법을 빌미로 삼아 여래의 복상을 섭취해서

법신 가운데에 제일의를 안립하고자 함이고, 무위에 수순해서

이름붙이고자 함이니, 삼마발제에 상응하고 아울러 산란한 마음을 조복하는 것은 다시 드러내어 깨닫지 않는다는 것이다.

言(언)「甚多婆伽婆(심다파가파),甚多修伽陀(심다수가타)」二語者(이어자),顯示攝心持心(현시섭심지심),以攝自心故言受持(이섭자심고언수지),為他說者解釋句味故(위타설자해석구미고)。無量者(무량자),過譬喻故(과비유고);阿僧祇者(아승기자),顯多故(현다고)。

“몹시 많겠나이다. 바가바(파가파)시여, 몹시 많겠나이다.

수가타시여”라고 말씀하시는 두 마디는 마음을 수렴하여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고자 함이니, 자심(自心)을

섭수하기 때문에 수지(受持)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에게 풀어 말한다는 것이란 그 구절의 미상(味)을 해석하기 때문이고, 한량없다는 것이란 비유로 들 수 없기 때문이고, 아승기란 많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