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중국 간화선 및 그 사상의 특질

수선님 2019. 7. 28. 13:05

중국 宋代 看话禅 및 그 사상의 特質

 

 

赖 永 海 /中國 南京大学 교수

번역: 김진무(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차 례

Ⅰ. 들어가며

Ⅱ.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부터 ‘불리문자(不離文字)’까지

Ⅲ. ‘불리문자(不離文字)’로부터 ‘단거화두(但擧話頭)’까지

Ⅳ. 달마의 ‘면벽(面壁)’으로부터 굉지의 ‘묵조(黙照)’까지

Ⅴ. 맺는 말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지난 2005년 11월 26일에 보조사상연구원에서 개최한 제 4회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발표의 원고이다. ‘간화선 수행전통과 현대사회’라는 주제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간화선에서 찾으려는 최근 불교계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중국 송대 간화선 및 그 특징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송‧원 선학이 그 이전의 선종과 다른 점에 대하여 필자는 이 시기에는 수많은 『어록(語錄)』과『등록(燈錄)』, 심지어는 ‘평창(評唱)’, ‘격절(擊節)’ 등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즉 송․원대의 선종은 ‘불립문자’로부터 ‘불리문자(不離文字)’로 변하였다. 또한 대혜 종고에 의하여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전통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대혜종고의 간화선과 굉지정각의 묵조선의 차이에 대하여도 논하고 있다.

다만 ‘묵조선’은 모두 ‘간화선’에 미치지 못하며, 송‧원 이후의 선학에 대하여 비교적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마땅히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간화선’의 흥성과 유행은 중국 선종으로 하여금 송‧원 이후부터 더욱 비이성주의(非理性主義)적인 길을 걷게 하였다.

* 주제어

간화선, 대혜 종고, 원오 극근, 분등선, 묵조선

Ⅰ. 들어가며

중국불교는 당(當)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 이후 경전(經典)과 문물의 파괴가 몹시 심해짐으로 말미암아 각 종파가 모두 쇠퇴하게 되었고, 오직 많은 경전과 의궤(儀軌) 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종만이 법맥(法脈)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종은 당 말기부터 오대(五代) 말기에 다시 “하나의 꽃에 다섯 잎이 펼쳐진 것[一花開五葉]”과 같은 ‘오조분등(五祖分燈)’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위앙종(潙仰宗)은 당(唐)말에 창립하여 오대(五代)까지 번영하였고, 가장 먼저 개종하여 가장 일찍 쇠망하였다. 전후가 겨우 4대(代)이며, 앙산혜적(仰山慧寂) 이후의 법계(法系)가 분명하지 않다. 법안(法眼)은 다섯 종파 가운데 창립이 가장 늦으며, 오대 말에서 송(宋)초까지 흥성하고 송 중엽에 이르러 쇠망하였다. 운문(雲門)은 오대(五代)에 발흥하여, 송초에 크게 떨쳤으며, 설두중현(雪竇重顯)에 이르렀을 때 종파의 위세가 가장 성하였다. 조동종(曹洞宗)은 운거도응(雲居道膺) 이후부터 추세가 쇠미하다가 부용도해(芙蓉道楷) 이후 종파의 위세를 다시 떨치고, 단하자순(丹霞子淳) 이후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나와 ‘묵조선(黙照禪)’을 제창하였는데, 이것이 조송(趙宋) 일대 선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임제(臨濟)는 다섯 종파 가운데 전해져 내려오는 기간이 가장 길며 영향도 가장 커서 “임천하(臨天下)”라는 말까지도 있었다. 임제종은 석상초원(石霜楚圓) 아래로부터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계열이 갈라져 나와 송 중엽에 크게 성하였고, 불과극근(佛果克勤)에 이른 이후 대혜종고(大慧宗杲)가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여 일대를 풍미하였고, 후세에 대한 영향이 가장 깊고 크다. 전법세계(傳法世系)상에서 보면 이 다섯 종파는 모두 혜능 문하에서 나와 남종선(南宗禪)에 속하며, 선종 자체의 발전사에서 보면 이 다섯 종파는 모두 ‘분등선(分燈禪)’에 속한다. 송대 선학의 사상적 특질을 더욱 잘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이 시기의 선학이 이전의 선학과 비교하여 어느 방면에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Ⅱ.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부터 ‘불리문자(不離文字)’까지

송‧원 선학은 전기 선종과 다른 중요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수많은 『어록(語錄)』, 『등록(燈錄)』, 심지어는 ‘평창(評唱)’, ‘격절(擊節)’ 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약 전기 선종이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제창하여 중국 불교계에 독특한 상징을 세웠다면, 이 시기의 선종은 ‘불립문자’로부터 ‘불리문자(不離文字)’로 변하였다.

송‧원 선학의 ‘불리문자’의 근원을 소급한다면, 각종 ‘공안(公案)’ 및 ‘공안’에 대한 주해(注解)를 집성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공안(公案)’이란 본래 관청의 공문서를 가리키는데, 선종이 그것을 빌어 선배 조사(祖師)의 언행범례(言行范例)를 가리켰으며, 또한 그것을 직면한 시비의 판단 준칙으로 삼거나, 혹은 이 기연어구(機緣語句)로써 ‘고덕(古德)’의 선취(禪趣)를 탐구해 나갔다. 예컨대 중봉(中峰)화상이 『산방야화(山房夜話)』에서

혹 묻기를, 불조기연(佛祖機緣)을 세상에서 공안이라 일컬음은 어째서인가? 환(幻)이 이르기를, 공안은 바로 관청의 문서에 비유한 것이다. 법의 소재가 왕도(王道)의 어지러움 다스리는 계통이다. 공(公)이란 바로 성현의 한결같은 행적으로, 천하가 함께 그 길로 나아가 이치에 이른다. 안(案)은 바로 성현이 이치로 삼음을 기록한 정문(正文)이다. 무릇 천하가 있음에 관청이 없지 않고, 관청이 있음에 공문서가 없지 않다. 대개 이를 취하여 법으로 삼음은 천하의 바르지 못함을 끊고자 함이다. ‧‧‧‧‧ 무릇 불조기연을 지목해 공안이라고 말함은 또한 그러하다.

라고 하였다.

극근(克勤)선사는『벽암록(碧岩錄)』 제98칙 평창(評唱)에서도 “옛사람이 가르치기를 얻을 수 없어 근기에 따라 보인 것을 뒷사람이 공안이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두기봉(斗機鋒)’이란 역시 ‘공안’에 대한 의참(疑參)이며, 선사나 혹은 사도(師徒)들 사이에서 각종 은어(隱語), 비유, 암시, 심지어는 가차없이 때리거나, 봉할을 사용하여 선을 말하였다. 중국 선종사에서의 ‘공안’은 『벽암록』의 삼교노인서(三敎老人序)에 의하면, “당(唐)대에 제창되고 송(宋)대에 성행하여 그 전함을 숭상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공안’은 후기 선종이 제창한 것이 아니라 초기에도 있었는데, 다만 조송(趙宋)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하였을 뿐이다. 중국선종사를 살펴보면 이 말은 실제에 적합한 것이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 따르면, 이조(二祖) 혜가(慧可)가 일찍이 “마음이 아직 편안하지 못하오니 스승님께서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니,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편안하게 해주리라.”고 하자, 한참 있다가 혜가가 “마음을 찾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자, 달마는 “내가 너에게 안심의 경계를 주었다.”고 하였다. 이것도 또한 후대에서 말하는 ‘공안’이다. 즉, 암시를 통하여 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밖에 남악회양(南岳懷讓)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음을 통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을 깨우치고 있다. 좌선(坐禪)만으로는 성불할 수 없는 것도 이러한 것에 속한다. 마조도일 이후 이러한 방법으로 선을 설명하는 것이 점차 성행하였다. 황벽희운(黃蘗希運)에 이르렀을 때 대단히 성행하여, 희운선사가 마침내 “만약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하나의 공안을 참구하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안’은 송(宋) 때에 이미 수천칙(數千則)에 이르고 있으며, 당시의 선사가 그것들을 모아서 집성하게 됨으로서 수만 자에 달하는 각종 『어록(語錄)』, 『등록(燈錄)』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일찍이 선종을 ‘본래 그 시작에는 스스로 직지인심(直指人心),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네 가지 전등록과 선어록이 모두 백이십 권이며 수천만 자(字)이니, 바로 불리문자(不離文字)라고 하겠다.’라고 평하였다. 다시 말하여 선종은 송대에 이르러 이미 원래의 ‘불립문자’에서 ‘불리문자’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송대 선종의 ‘공안’이 비록 문자가 있으나, 이러한 문자는 대단히 간략하고 회삽(晦澁)하며, 의미가 지극히 모호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송(趙宋) 이후 많은 선사들이 이러한 ‘공안’에 대하여 주석을 달기 시작하였다. 관련된 자료에 따르면 가장 일찍 ‘공안’에 주석을 단 것은 임제(臨濟)ㆍ존장(存獎) 계통의 분양선소(汾陽善昭)선사이다. 그는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지어 공안에 대하여 주석을 하였다. 그 후 천동정각(天童正覺), 투자의청(投子義靑), 단하자순(丹霞子淳), 설두중현(雪竇重顯) 등의 네 선사가 모두 송고(頌古)를 내고 있어 역사에서는 ‘선종송고사가(禪宗頌古四家)’라고 부른다. 이 사가(四家)는 설두중현만이 운문(雲門)에 속하고, 그 외에 천동정각, 투자의청, 단하자순은 모두 조동(曹洞)에 속한다.

이른바 ‘송고(頌古)’는 일반적으로 최소한 두 부분을 포함한다. 첫째는 ‘염고(拈古)’이고, 둘째는 ‘송고(頌古)’이다. ‘염고’란 ‘고칙(古則: 공안)’을 골라내는 것을 말하며, ‘송고’는 이렇게 골라낸 ‘공안’에 대하여 평송(評頌)을 더하는 것이다. 예컨대 분양선소선사의 『송고백칙』에서 우선 혜가(慧可)가 달마(達磨)에게 입설단비(立雪斷臂)하고 안심(安心)을 구한 ‘고칙’을 골라낸 후, 다시 ‘9년 면벽에 큰 법을 받을 근기를 기다림에, 눈이 허리에 차도록 눈썹도 까딱 않고 공손하게 안심의 자리를 원하나 찾을 마음도 얻을 것이 없고서야 비로소 의심이 없었다.’라는 평창을 덧붙였다. ‘염고’ 또한 선종사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는데, 예컨대 운문문언(雲門文偃)선사가 “세존이 탄생하시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돌아보고, 천상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하였다.”는 고사를 골라낸 후, “당시 만약 내가 보았다면 한 주먹에 쳐 죽여 개에게 먹여 도리어 천하의 태평함을 꾀했으리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먼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킨 고사는 ‘염고’에 속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예를 들자면 태허(太虛)]은 ‘송고’의 풍이 운문문언(雲門文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선사들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공안’에 대하여서 평송을 붙인 다음에, ‘공안’은 자연히 비교적 분명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사의 평송은 종종 간략한 언어로 되어 있고 그 의미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많은 평송 자체가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안’을 더욱 분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어떤 선사들은 다시 ‘평송’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의 ‘공안’ 및 ‘평송’에 대하여 다시 ‘평창(評唱)’과 ‘격절(擊節)’을 하였다. 이 방면에 가장 영향을 주었던 선사는 조송(趙宋)의 원오극근(圓悟克勤)과 송‧원 시대의 만송행수(萬松行秀)를 들 수 있다. 원오는 『벽암록(碧岩錄)』으로 선종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이밖에도 그는 『격절록(擊節錄)』 2권이 있다.

『벽암록』은 운문(雲門)의 설두중현(雪竇重顯)의 『송고백칙(頌古百則)』에 ‘평창’을 가한 것이고, 『격절록』은 바로 설두의 『염고백칙(拈古百則)』에 ‘격절’을 붙인 것이다. 두 가지는 모두 설두의 ‘송고’와 ‘염고’에 대한 주석이며, 이른바 ‘설두의 『송고백칙』에 원오는 다시 각주를 붙인 것’이다. 『벽암록』은 『송고백칙』에 대한 주석으로, 앞에 ‘수시(垂示)’[즉, 總綱]를 더하고, 송(頌) 가운데 ‘착어(着語)’[즉, 夾注]를 붙이는 동시에 다시 ‘평창’[즉, 구체적인 설명]을 가하여, ‘공안’을 더욱 분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제한 것이다.

만송행수(萬松行秀)의 ‘평창’은 주로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송고백칙(頌古百則)』을 주석한 것이다. 그는 『종용암록(從容庵錄)』 6권이 있는데, 정각의 『송고백칙』의 바탕에서 ‘시중(示衆)’, ‘착어(著語)’, ‘평창(評唱)’을 덧붙여서 정각이 ‘염고’하고 ‘송고’한 ‘공안’을 더욱 쉽게 이해하게 한 것이다.

‘평창’, ‘격절’의 성행은 당시 선종에 적어도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선사들이 문자기교에 치중하여 글장난의 길을 감으로써 선종 ‘불립문자’의 본색을 잃었다. 둘째, ‘평창’, ‘격절’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선’ 자체는 다만 뜻으로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고, 의리(義理)로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예컨대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는 참선은 ‘한 번에 뛰어넘어 여래의 자리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며, ‘모름지기 직심, 직행’하며 ‘헤아려 사량하면 이미 왜곡되어버린다.’고 말하였다. ‘평창’, ‘격절’ 자체는 ‘경은 부처의 가르침이고, 선은 부처의 뜻이다.’는 사상과 서로 위배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자기교를 중시하고, 의리해석을 강조한 ‘평창’과 ‘격절’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리고 점차적으로 선사들의 심한 억제와 반대를 받게 되었다. 우선 이러한 문자, 의리의 선을 반대하기 시작한 것은 『벽암록』의 작자인 불과극근(佛果克勤)의 수제자 대혜종고(大慧宗杲)이다.

송(宋)대의 정선(淨善)이 다시 편집한 『선림보훈(禪林寶訓)』에 따르면, “천희(天禧)년간에 설두선사가 변설과 박학의 재주로써 뜻을 미화시켜 달라지게 하고, 새로운 기교를 구하여 학인들을 농락하니, 학풍이 이로 말미암아 일변되었다. 체선(逮宣)년간에 이르러 원오선사가 또 자기의 뜻을 붙여 그와 달리하여 『벽암록』이라 하였다. ‧‧‧‧‧ 소흥(紹興) 초에 대혜선사가 민강(閩江)에 가서 학인들이 그에 끄달려 돌이키지 않고 나날이 심하게 빠져들어 폐단을 이루는 것을 보고, 곧 『벽암록』을 불사르고 그 설을 금지시켰다.”라고 하였다. 원(元)대의 포릉(布陵)은 『중간환오선사벽암집후서(重刊圜悟禪師碧岩集後序)』에서 종고(宗杲)는 “따라서……후학이 근본을 밝히지 못하고 오로지 언어만 숭상하여 말자랑만 꾀할까 염려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를 불사르고 그 폐단을 없앴다.”라고 말하였다. 종고가 책을 없앤 행동은 어느 정도에 있어서 바로 ‘사물이 극에 달하면 뒤집어지는[物極則反]’ 현상의 체현이다. 『벽암록』은 확실히 ‘평창’과 ‘송고’를 극에 달하도록 하여 선의 직지(直指)의 취지와 너무 거리가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공안’을 문자로써 이해하는 데 반대하여,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일종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 것은 바로 ‘공안’에서 한 어구(語句)를 택하여, 화두(話頭)로써 그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참구(參究)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송‧원 이후 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간화선(看話禪)’이다.

Ⅲ. ‘불리문자(不離文字)’로부터 ‘단거화두(但擧話頭)’까지

‘간화선(看話禪)’에 대하여, 명(明)대 고음정금(古音淨琴)의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있는 평술이 있어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무릇 공부하는 것은 마땅히 번잡함을 여의고, 모든 인연을 끊어 잡념을 모두 쉬고, 다만 본래 참구하는 화두만을 들어 행주좌와(行住坐臥), 고락(苦樂)에 이르는 모든 상황에서도 잃지 않고, 이를 생각하고 이에 머물러, 온 마음 바른 뜻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생각마다 스스로 참구해 자기를 돌이켜보면, 이렇게 능히 찾고 묻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의심하고, 의심이 오고 감에 산수(山水)가 다하는 곳, 나무가 쓰러지고 등넝쿨이 마른 곳, 의심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 마음이 인연을 끊는 곳에 이르면, 홀연히 의심덩어리가 흩어지고 마음의 꽃이 밝게 발하여 큰 깨달음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첫째, ‘간화선’은 이전의 ‘송고’와 ‘평창’처럼 뜻을 풀어 이해하고 ‘공안’에 주석을 다는 것과는 다르게, 고금을 헤아려 논하여 하나의 ‘화두’에 단참(單參)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화두’의 참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걸쳐 행해야 하며, 때때로 일깨워서 전심전력하고, 생각 생각마다 잊지 않는 것이다. 셋째, 참구하는 과정에서 마땅히 자기를 반성해 돌아보고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것이다. 넷째, 이 의심은 반드시 일단 의심하면 철저히 하며 아주 깊은 곳까지 의심하여 ‘대사일번(大死一番)’하는 것이다. 다섯째, 갑자기 의심덩어리[疑團]가 깨지면, 밝고 크게 깨달아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고 제불(諸佛)이 현전(現前)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사로(思路)를 따라 대혜종고의 ‘간화선(看話禪)’에 대하여 비교적 깊은 분석을 하기로 하겠다.

단거화두(但擧話頭)

대혜종고 ‘간화선’의 출발점은 ‘단지 하나의 화두를 간(看)하는 것[只看個話頭]’이다. 『대혜보각선사어록』에서 이 말은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혹은 “다만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곳에 나아가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라고 가르친다.”라고 하고, 혹 “다만 이곳에서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라.”고도 하며, 혹은 “잡념이 일어날 때 다만 화두를 들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가 가장 자주 들었던 ‘화두’는 조주(趙州)선사의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대혜보각선사어록』 14권에 따르면, “대혜선사는 다만 사람들에게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와 죽비자(竹篦子) 화두를 참구하게 하여, 단지 말 붙이지 말고, 사량하지 말고, 드는 곳을 향해 알려고 하지 말고, 입 여는 곳에 나아가 참견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다만 이렇게 사람들에게 참구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여, 참선은 이전의 ‘송고’나 ‘평창’처럼 언어, 문자 상에 전념하여 참구(參究)하고, 인심(人心)을 우회하여 가리키고 성을 논하여 성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오늘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고, 내일 또 다른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오로지 하나의 화두를 오래도록 진실하게 참구하여야 하고, 아직 “부모에게서 나기 전의 면목을 꿰뚫어 봄”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본참화두를 놓치 않기를 서원”해야 한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참구하여 얻지 못한다면 일 년을 참구하고, 일 년을 참구하여 얻지 못한다면 일생을 참구하여야 한다. 죽을 힘을 다하여 화두를 참구하며, 조금도 늦추지 말 것이며, 한 번 참구하면 철저하게 한다. 물론 참구하는 화두는 ‘구자불성(狗子佛性)’에 국한되지 않으며, 또한 ‘부모가 아직 낳기 전에 무엇이 본래면목인가?’를 참구할 수도 있다.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처럼 위산(潙山)선사의 “부모가 아직 낳기 전에 무엇이 본래면목인가?”를 수년간 참구한 뒤에 마침내 “우연히 기와장을 던짐에 대나무를 치는 소리에 홀연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고(宗杲) 이후의 고봉원묘(高峰原妙)는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오는데, 하나로 돌아옴은 어느 곳인가?’를 참구하였으며, 원묘선사는 『개당보설(開堂普說)』에서 그가 이 화두를 힘들게 참구하였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산승이 옛날에 쌍경사 선당(禪堂)에서 머물 때, 한 달이 못 미쳐 홀연 잠자는 가운데 만법은 하나로 돌아오는데 하나로 돌아옴은 어느 곳인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의심이 문득 일어나 잠도 자지 않고, 먹는 것도 잊어 동서도 가리지 못하고 밤낮도 몰랐다. 자리에 앉아 발우를 펴고 똥오줌 누고 움직이고 멈춤과 말하고 침묵함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일귀하처(一歸何處)의 화두뿐, 다시 털끝만큼도 다른 생각이 없었다. ‧‧‧‧‧ 마치 빽빽하게 모인 군중 가운데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맑고 고요하며, 높고 뛰어나 한 점의 망념도 없어 한 생각이 만년(萬年)으로 경계도 쉬고 사람도 잊으니 어리석고 바보같이 깨닫지 못하여 제6일에 이르러 대중을 따라 삼탑(三塔)에서 독경할 때에 머리 들어 홀연 오조(五祖) 연(演)화상의 진영(眞影)을 봄에 문득 전에 앙산(仰山)노화상이 물었던 타사시구자(拖死尸句子)의 화두가 촉발되니, 곧 허공이 부숴지고 대지가 꺼져, 물(物)과 나를 같이 잊어버려 거울이 거울에 비치는 듯 하더라.

고봉선사의 이러한 참선법은 일종의 전형적인 ‘간화선’이다. 물론 그처럼 단지 육일의 시간 동안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선종사에 있어서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시시제시(時時提撕)

대혜(大慧) ‘간화선’의 두 번째 특징은 ‘시시제시(時時提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시시제시’란 시시처처(時時處處), 행주좌와(行住坐臥)에서 하나의 화두를 목숨 걸고 전념하여 조금도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대혜보각선사어록』에서 종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생(生)함에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음에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두 가지를 코끝에 붙여두고 차 마시고, 밥 먹고,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에 생각마다 긴박하게 하여 항상 백만관전(百萬貫錢)의 빚을 갚지 못한 것 같이 할지니, 벗어날 길이 없으며 가슴이 답답하여 회피할 문이 없고, 살고자 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자 하여도 얻을 수 없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선악의 길이 차례로 끊어진다. 이 같음을 느낄 때 바로 힘쓸지니 다만 여기에서 나아가 화두를 참구하라. 승려가 조주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가 말하기를, 없다(無)고 하니, 참구할 때 널리 사량하지 말고, 해석을 붙이지 말고, 알음알이를 얻으려 하지 말며, 입 여는 곳에 나아가 참견하지 말고, 드는 곳을 향해 도리를 짓지 말고, 공적한 곳에 떨어지지 말며, 마음에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고, 종사(宗師)를 향해 짐작하지 말며, 일이 없는 곳에 떨어져 있지 말라. 다만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때때로 일깨우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일깨워 익음을 얻으면 의론하고 사량함이 못미쳐, 마음속에 일곱이 오르면 여덟을 놓아버린다. 마치 쇳덩이를 씹는 것 같아 재미없을 때, 절실하게 그 뜻을 잊지 말 것이니, 이와 같이 얻은 때가 도리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이 단락의 문자 가운데, 종고는 ‘불용(不用)’을 아홉 번이나 사용하였다. 실제로 그는 아홉 번 심지어는 구십 번의 ‘불용’자를 쓸 수도 있다. 종합하면, 사량(思量)할 필요가 없고, 알음알이(知解)를 구할 필요도 없이, 단지 한 마음으로 그 재미없는 화두를 참구하여, 불방일(不放逸)하고, 재미없다고 생각되어질수록 더욱 방일하지 않게 하여 오래 지나면 좋은 소식이 뒤에 있다는 것이다. 종고의 이러한 ‘시시제시’에 대하여 후대의 선사는 그것을 ‘마치 닭이 계란을 품듯[如鷄捕卵]’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如猫捕鼠]’ 하고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생각하듯[如飢思食]’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如渴思水]’ 하고 ‘아이가 엄마를 찾는[如兒思母]’ 것에 비교하여 한시도 방일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실패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이 ‘시시제시’는 반드시 하나의 화두에 전일(專一)하여 만약 ‘무(無)’자를 참구하면 엄중히 ‘왜 개는 불성이 없는가’에 힘써야 하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참구하면 엄중히 ‘일귀하처(一歸何處)’에 전주(專注)하여야 한다. 만약 염불(念佛)을 참구하면, ‘염불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집중하여 다른 생각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고, 오늘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고 내일 다른 화두를 참구한다면, 영원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특히 참선하다 기진맥진하고 맥이 빠져 실망하였을 때, 제발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아야 하는데, 이때 아마도 바로 크게 깨닫는 전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혜보각선서(大慧普覺禪書)』에서 “제시(提撕)를 얻어, 앉음에도 일깨우고, 오고 감에도 일깨우고, 재미가 없을 때, 바로 좋은 곳이며 놓아버리지 않으면 홀연 심화(心花)가 밝아져 시방을 비추리니, 바로 능히 하나의 털끝에 보배가 나타나며, 티끌 같은 법속에 대법륜을 굴리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제기의정(提起疑情)

대혜종고 ‘간화선’의 세 번째 특징은 어떤 하나의 화두를 절실하게 참구할 때, 반드시 끊임없이 의정(疑情)을 제기하는 것이다. ‘간화선’에 따르면, “의심은 믿음으로써 체(體)를 삼고, 깨달음은 의심으로써 용(用)을 삼는다. 믿음이 십분 있으면 의심이 십분 있으며, 의심이 십분 있으면 깨달음을 십분 얻는다.”고 하며,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고 하며, ‘큰 의심 아래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 이는 의심이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며, 깨달음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며, 이른바 “의심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고, 조금 의심하면 조금 깨닫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간화선’의 ‘의(疑)’는 또한 결코 ‘믿음(信)’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서로 체용(體用)이 되어, “의심은 믿음으로써 체를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봉선사는 참선(參禪)에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즉, 첫째는 대신근(大信根)이고, 둘째는 대분지(大憤志)’이며,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이다. 이 가운데 이른바 ‘믿음’ 혹은 ‘대신근(大信根)’은 실제상 첫째 자기를 믿고, 둘째 어떤 하나의 화두를 목숨걸고 참구함을 믿는다면, 결국엔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대신근’이 없다면, 삼일 고기를 잡고 이틀은 그물을 말리거나, 혹은 오늘 하나의 화두를 참구하고 내일 다시 또 다른 화두를 참구하면 자연히 성공의 희망이 없어져, 고봉선사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비유컨대 다리 잘린 솥은 마침내 폐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른바 ‘대분지(大憤志)’는 반드시 용감하게 나아가는 정신과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의지가 있어,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심장이 뛰지 않으며, 칼날을 목에 들이대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정해진 기간에 공을 이루려고 한다면 독 속에 있는 자라가 달아남을 겁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른바 ‘대의정(大疑情)’은 비교적 복잡한데,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째 무엇을 의심하는가와 둘째 어떻게 의심하는가 이다. 이에 대하여 먼저 선사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에서 원묘(原妙)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먼저 육정(六情; 六根), 육식(六識), 사대(四大), 오온(五蘊)과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을 모두 하나의 의단(疑團)으로 포용하여, 문득 눈앞에 두고, ‧‧‧‧‧ 걸어감에도 다만 이 하나의 의단이며, 앉음도 다만 이 의단이며, 옷 입고 밥 먹음에도 다만 이 의단이며, 똥오줌 눌 때도 다만 이 의단이며, 보고 듣고 느껴 앎에 이르러서도 모두 다만 이 의단이다. 의심이 오고 감에, 의심하여 힘 더는 곳에 이르면 곧 힘 얻는 곳이다. 의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의심되며, 들지 않아도 절로 들리니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철하여 한 조각으로 이룬다. 의심에 털끝만치도 틈이 없으니 흔들어도 동하지 않고, 쫓아도 달아나지 않는다. 밝고 신령하여 항상 눈앞에 있다.

이 단락의 의미는 먼저 속과 겉의 사정을 하나의 의심덩어리[疑團]에 넣은 이후에 죽을 힘을 다해 이 의심을 되새기며, 행주좌와, 대소변을 볼 때, 심지어 땅이 진동하고 산이 흔들리며,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도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법은 거의 비교적 추상적이어서 쉽게 파악할 수가 없다. 어떤 선사의 해석은 비교적 구체적인데, 예컨대 명(明) 말기 무이원래(無異元來)선사가 지은 『박산화상참선경어(博山和尙參禪警語)』에 “공부함에 의심 일으킴을 귀하게 여기니 무엇을 일러 의정(疑情)이라 하는가? 생(生)이 어디로부터 온 것임을 모름에 온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죽어서 가는 곳을 알지 못하니 갈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다시 말하여, ‘제기의정(提起疑情)’이란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의심이 생기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죽으면 또한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제기한 후에 이 화두를 단단히 붙잡고 오래도록 진실되게 참구하라는 것이다. 또한 예컨대 고봉(高峰)선사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란 의심도 한 가지 예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오는데, 하나로 돌아오는 곳은 어디인가? “문득 나아가 일귀하처(一歸何處)에서 동서로 부딪치며 찾고, 종횡으로 때리며 업신여기고 다그치고, 다그침이 오고 감에 다그쳐 머물 곳이 없고, 어찌할 곳이 없는데 이르면 정말로 맹렬히 힘 쏟아야 할 것이니, 몸을 뒤집어 던져버리면 진흙덩이까지도 모두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다만 분명하게 뜻에 두어 의심함이 중요하니, 의심하여 정(情)을 잊고 마음이 끊어지는 곳에 이르면, 황금 닭이 한 밤중에 하늘을 나를 것이다.”를 말하는 것이다. 위의 두 단락은 만약 ‘일귀하처(一歸何處)’가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를 가리킨다면, “동서로 부딪치며 찾고 종횡으로 때리며 업신여기고 다그침” 및 “다만 분명하게 뜻에 두어 의심함이 중요하니, 의심하여 정(情)을 잊고 마음이 끊어지는 곳에 이름”은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간화선’의 논술이 많으며, 사상도 상당히 깊고 풍부하다. 따라서 반드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탐구해야 할 것이다.

대사일번(大死一番)

‘대사일번’은 어떻게 의심하고, 의심을 어디까지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매우 형상(形象)적인 설법이다. ‘대사일번’은 송‧원시대에 중봉(中峰)화상의 『시운남복원통삼강주(示雲南福元通三講主)』에서 제시되었다. 중봉화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근대 종사(宗師)들은 학인을 위해 베푸는 견문이 너무 많으며, 더구나 순일하게 통절히 생사를 문제 삼지 않는 까닭에 하나의 의미 없는 화두를 만들어 팔식(八識) 가운데 던져두기를, 마치 밤송이 삼킨 듯, 독약에 중독된 것처럼 한다. 다만 몸과 목숨 버림을 귀하게 여겨, 침식을 잊고 크게 죽기를 한 번 하여 문득 씹어 깨트리면 조금의 서로 응함이 있다. 네가 만약 이 방편을 알지 못하고, 화두를 참구하여 의정을 일으키면, 일체의 심식(心識)이 움직임과 고요함을 헤아리고, 망령되이 견문(見聞)을 인식하면 맹렬하게 구함과 취하고 버리는 구덩이에 빠져 앉음이니, 혹은 잠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집착하여 기뻐하고, 혹은 혼침과 산란이 증가해 오래도록 물러가지 않아 근심하니, 모두 공부하는 취지를 알지 못함이다.

중봉선사가 여기에서 말한 ‘대사일회(大死一回)’는 주로 화두를 참구하는데 마땅히 일체의 심식계량(心識計量)과 견문취사(見聞取舍)를 버리고, 마땅히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죽도록 화두를 참구하여 되새기며, 거의 목숨을 버리듯 하고, 바보같이 어리석은 듯이 참구해야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형태를 묘사한 더욱 생동감 있는 고봉화상의 논술이 있다.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시중(示衆)』에서 그는

바로 가슴을 비우도록 노력하고 넓어져 확 트이도록 하여 털끝만치도 걸림이 없게 하라. 다시 한 법에 해당됨이 없으니, 처음에 한 생각이 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차를 마시되 차를 모르고, 밥을 먹되 밥을 모르고,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되 앉음도 알지 못하여, 정식(情識)이 문득 깨끗하여 계교를 모두 잊음이 흡사 하나의 기식(氣息)은 있되 죽은 사람과 같고, 또한 진흙으로 빚고 나무로 조각한 상과 비슷하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후반부의 부분은 형상(形象)과 핍진(逼眞)이며, 이른바 ‘대사일번(大死一番)’은 화두를 참구함에 반드시 마치 ‘기식(氣息)은 있되 죽은 사람[有氣的死人]’과 ‘진흙으로 빚고 나무로 조각한 상[泥塑的木雕]’처럼 일체의 상식, 견문, 계교(計較)를 완전히 없애고, 마치 바보처럼 차를 마셔도 차를 알지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불과극근(佛果克勤) 등의 선사는 “마치 어린애 기르듯이 하면 순화됨이 맑은 물과 같다.”하고 “아침 내내 어리석은 듯하고, 저녁이 다하도록 어린애와 다름없다.”고 하였다. 또한 달마가 참선하는 것 같이 마음을 벽과 같이 하며, 부자(夫子; 공자)가 세 달 동안 입맛을 잊었고, 안회(顔回)가 종일 어리석은 듯이 행하였던 것을 말한다. ‘간화선’을 창도한 선사들은 다만 이렇게 ‘대사일번’을 겪은 뒤에 겨우 모종의 한 기연(機緣)을 빌려 마치 “영운이 복숭아꽃을 보고, 향엄이 대나무 치는 소리에, 장경이 커텐을 걷는 동작에, 현사가 발가락으로 찌르는데” 깨달음을 얻었듯이, ‘절박한 후 다시 소생[絶後復蘇]’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관건은 의심덩어리를 ‘맥연교파(驀然咬破)’해야 한다는 것이다.

맥연교파(驀然咬破)

‘맥연교파’는 참선(參禪)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하나의 고리이다. ‘간화선’의 입장에서 보면, 참선자의 제기의정(提起疑情)과 대사일번(大死一番) 자체는 결코 목적이 아니며, 목적은 의심덩어리를 깨뜨리고[看破疑團] 절박한 후 다시 소생[絶後復蘇]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정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더해지며, 의정을 만약 깨뜨리면, 생사의 마음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심덩어리를 깨뜨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에서 노력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대혜종고가 말한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이다. 화두에서 의심을 파하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깨어진다. 화두를 파하지 못하면 곧 의심에 갇히게 된다. 만약 화두를 포기하고 도리어 문자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교(經敎)에서 의심을 일으키고, 옛 사람의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생활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 삿된 마군의 권속이다.”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단거화두(但擧話頭)’와 ‘시시제시(時時提撕)’이며, 마음대로 화두를 바꿀 수 없으며,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오로지 이 화두에 전주하여 직접 이 화두를 간파(看破)하여 멈추는 것이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간파하느냐 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간파(看破)하는데 있어 이론이나 의해(義解)로는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만약 “언구(言句)에서 길잡이를 삼고, 경계와 사물에 알음알이를 내면 곧 깊은 샘 가운데 떨어져 마침내 더듬어 찾지 못함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도는 무심을 귀하게 여기고, 선은 명리를 끊는다.”고 하고, “오직 생각을 잊어 완전히 없애면 가히 빛을 돌이켜 뼛속까지 밝혀 체(體)를 벗어나 통하리니 다시 헤아리고 의심함을 용납하지 않고 곧바로 통 밑바닥까지 요달한다. ‧‧‧‧‧ 한번 밝아짐에 모두 밝아진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곧바로 통 밑바닥까지 요달하고, 한번 밝아짐에 모두 밝아진다.”는 것을 통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활연관통(豁然貫通)’이고, 선종의 용어를 사용하면 ‘돈오(頓悟)’이며, ‘간화선’ 자체의 용어를 사용하면 대혜종고가 말한 바와 같이 “문득 깨쳐 드러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림이 관우장군의 손에서 큰 칼을 빼앗은 것 같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생사의 경계에 크게 자재하니 대도를 향해 육도사생(六度四生) 가운데 삼매를 즐긴다.”는 것이다. 혹은 고봉선사가 말한 바와 같이 “뛰어 오고 뛰어 감에 사람과 법을 모두 잊음에 이르면 심식(心識)의 길이 끊기고, 단번에 대지를 밟아 뒤집고 허공을 쳐부수면 원래 산이 곧 자기요, 자기가 곧 산이다.” “단번에 의심덩어리를 깨트리면 마치 그물 속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라는 것이다. 간화선의 선사들이 사용했던 ‘맥연(驀然)’, ‘맥홀(驀忽)’, ‘폭지일성(爆地一聲)’, ‘분지일발(噴地一發)’, ‘홀연폭지단(忽然爆地斷)’, ‘홀연쵀지파(忽然啐地破)’ 등 많은 용어는 의심덩어리가 타파되는 상황을 표시한 것이고, 의미는 의심덩어리가 타파된 것이 결코 의리분석이나 이성적인 사유에 의하여서 된 것이 아니라, 사유의 중단 혹은 ‘비약(飛躍)’에 의하여서 된 것임을 나타낸다. 다만 이러한 ‘비약’을 통하여서만 대철대오(大徹大悟)하고, 초불월조(超佛越祖)할 수 있다. 의심덩어리를 간파하는 관건, 혹은 ‘간화선’의 관건은 곧 ‘깨달음’에 있고,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돈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시오득(須是悟得)

‘선에는 문자가 없어 모름지기 깨달아 얻어야 한다.’ 이것은 종고(宗杲)가 ‘간화선’에 대하여 화룡점정(畵龍點睛)한 개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 예컨대 ‘단거화두(但擧話頭)’, ‘시시제시(時時提撕)’, ‘제기의정(提起疑情)’, ‘대사일번(大死一番)’ 등등은 모두 ‘맥연교파(驀然咬破)’ - 활연관통(豁然貫通)하여 대철대오(大徹大悟)하는 최후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 대철대오의 도래(到來)는 절대로 그 자연에 따르는 것이지, 구하여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여 추호도 ‘대오지심(待悟之心)’이 있을 수 없으며, “쓸모없는 나무덩이 같은 알음알이로 찾아 구하지 말 것이니, 재주로 구하면 곧 그림자를 붙잡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연스럽게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간화선’의 기본 사상에 비추어보면, “선은 네가 알 도리가 없음이다. 만약 선을 안다고 말하면 곧 선을 비방함이다. ‧‧‧‧‧ 만약 미묘한 깨달음이 없다면 비록 말로 해석하기를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고, 설법하기를 솟는 샘과 같이 해도, 모두 사량분별이요, 선을 설함이 아니다.”라고 한다. 다시 말하여 선법(禪法)은 사량(思量)과 분별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참선 역시 일체의 사유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공부를 하는 것은 일종의 학문이 아니고, 또한 말로서 표현할 수 없으며, 특히 이론적으로는 할 수 없으며, 의해(義解)는 더욱 용납이 안 되고, “마땅히 알라. 선은 모든 경전이 설하는 바에 의하지 않고, 닦아 증득한 바에 의하지 않으며, 모든 견문의 아는 바에 의하지 않고, 모든 문과 길의 드는 바에 의하지 않는 까닭에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일종의 현상을 살펴보았다. 만약 오조분등(五祖分燈) 이후의 선종이 점차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 ‘불리문자(不離文字)’에로 전향하는 경향이라고 한다면, 대혜(大慧)가 창도한 ‘간화선(看話禪)’은 또 하나의 전기(轉機)라고 할 수 있다. 즉, ‘문자선(文字禪)’으로부터 이탈하여 직지견성(直旨見性)을 제창하기 시작하였으며, 만약 초불월조(超佛越祖)의 분등선(分燈禪)이 전기 선종에 비교하여서 심오언(心悟言)을 중시하고, 더욱 ‘순임자연(純任自然), 무증무수(無證無修)’를 주장하였다고 한다면, 종고(宗杲) 이후의 ‘간화선’은 바로 ‘돈오(頓悟)’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돈오’는 어떤 하나의 공안, 화두에 오로지 참구하고 ‘대사일번(大死一番)’을 통한 이후에 ‘맥연(驀然)’하게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간화선’이 중국 선종의 선풍(禪風)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지만, 송‧원시대의 선종이 ‘간화선’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조송(趙宋) 일대에 대혜종고가 창도한 ‘간화선’ 이외에 당시의 선종은 또 다른 하나의 선풍도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굉지정각(宏智正覺)이 창도한 ‘묵조선(黙照禪)’이다.

Ⅳ. 달마의 ‘면벽(面壁)’으로부터

굉지의 ‘묵조(黙照)’까지

‘묵조선(黙照禪)’의 가장 큰 특징은 간심정좌(看心靜坐)를 근본으로 삼는 것으로, 문자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묵묵히 정좌(靜坐)하여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싹틀 수 있게 제법(諸法)의 본원(本源)을 통찰하는 것이다. 이는 굉지정각의 『묵조명(黙照銘)』과 『어록(語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묵묵히 말 잊음에 밝게 현전한다.”고 하며, “밝게 트여 신령스러움에 본래의 광명이 스스로 비추고 고요히 응함에 대용(大用)이 현전한다.”는 것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묵조선’은 전통선학으로 복귀하는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달마(達磨)의 ‘면벽이좌(面壁而坐), 종일묵묵(終日黙黙)’과 서로 유사하며, 다른 것은 ‘묵조선’도 공안을 염고(拈古)하고 송고(頌古)하여, 예컨대 굉지(宏智) 자신에게 『송고백칙(頌古百則)』이 있어 세상에 전하고 있고,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후대의 ‘묵조선’ 선사들이 공안의 참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고 섭심정좌(攝心靜坐)와 잠심내관(潛心內觀)을 더욱 중시하고 있고, 아마도 바로 이러한 원인으로 후대에 ‘간화선’에서 ‘묵조선’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야기하였다.

개인적인 교류의 측면에서 보면, 대혜종고와 굉지정각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고, 굉지가 임종 전에 일찍이 후사를 종고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학사상의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선학 사이에 결국 논쟁과 상호비판이 나타났고, 종고 본인은 일찍이 직접 ‘묵조선’을 비판하였다. 그는 “근래 몇 년 동안, 하나의 삿된 스승이 있어 묵조선을 설하고 사람을 가르치기를, 12시(時) 가운데 모든 일에 상관하지 말고 쉬고 비우라고 하며, 소리도 짓지 말라, 지금 때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고 함에 가끔 사대부가 총명함과 지혜 있음에 이끌려 말이 번다한 것을 싫어하여, 잠시 삿된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라 고요히 앉아 도리어 힘이 덜 드는 것을 보고, 바로 옳다고 하여 다시 미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묵묵함을 최종의 법칙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도 종고가 묵조선을 공격한 글이 실려 있다.

달마가 소림에 9년 동안 냉랭히 앉았지만 신광(神光)에게 그 엿봄을 당하였다. 요즘 옥과 돌을 구분하기 어려워 다만 문자 속에서 얻으니, ‧‧‧‧‧ 달마의 9년 공이 말에 떨어지니, 당시에 그 허물을 살피지 않음이 애석하도다. 지금에 이르러 묵조의 무리는 귀신 굴에서 오랜 세월 헛되이 앉았구나.

종고의 이 글은 ‘묵조선’을 ‘달마선’과 연계시키는 것이 틀리지 않다고 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묵조선’은 확실히 달마의 ‘면벽이좌(面壁而坐), 종처묵묵(終處黙黙)’하는 특징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심한 것은 종고가 ‘묵조선’은 다만 이승(二乘), 심지어 외도(外道)의 경계에 떨어질 수 있다고 질책한 것이다. 『답진소경서(答陳少卿書)』에서 종고는 “삿된 스승의 무리가 사대부들로 하여금 마음을 거두고, 고요히 앉아 모든 일에 관계하지 말고, 쉬고 비우라고 가르치니, 어찌 마음으로 마음을 쉬고,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마음으로 마음을 씀이 아닌가.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하면 어찌 외도(外道) 이승선(二乘禪)의 적단견(寂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심(自心)의 밝고 묘한 쓰임과 구경(究竟)의 안락함과 여실한 청정함, 해탈변화의 미묘함을 분명히 얻겠는가?”라고 지적하였다. 이 단락에서 보면, 하나는 ‘섭심정좌(攝心靜坐)’를 중시하고, 또 하나는 ‘자심명묘수용(自心明妙受用)’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이를 선종사에서 고찰해 본다면 전자는 의심할 것 없이 비교적 전통적인 ‘선정(禪定)’에 가깝고, 후자는 의심할 것 없이 중국화된 선종의 ‘도유심오(道由心悟)’에 더욱 가깝다.

지금까지 우리는 송‧원시대 선학의 발전에 대한 기본적인 흐름을 간결하게 고찰해 보았다. 만약 전기 선종이 일찍이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중국불교계에 하나의 독특한 상징을 세웠다면, 송‧원 선학은 많은 ‘공안(公案)’과 ‘기봉(機鋒)’이 출현하고, 이러한 ‘공안’과 ‘기봉’에 대한 주해를 가한 ‘평창(評唱)’과 ‘격절(擊節)’이 나옴에 따라서 이 시대의 선학은 전기 선학의 반대적인 측면으로 나가게 되어 의해(義解)를 중시하고, 불리문자(不離文字)의 ‘의리선(義理禪)’, ‘문자선(文字禪)’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선(禪)’이란 본래 ‘불의(佛意)’에 속하는 것으로, 다만 뜻으로 계합(意會)할 수는 있어도 말로 전할[言傳] 수는 없으며, ‘깨달을 수[悟得]’ 있으나 ‘이해(理解)’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리선’과 ‘문자선’은 상당히 선종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본색을 잃었기 때문에, 후에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제창하였다. 만약 만당(晩唐) 오대(五代)에 출현하여 조송(趙宋) 때 성행하였던 분등선(分燈禪)이 어떤 의미에서 전기 혜능(惠能)의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부정[예컨대, 불성론과 수행법 등]이라고 한다면, 대혜의 ‘간화선’은 이러한 부정에 대한 재부정이며, 전기 조사선이 ‘도유심오(道由心悟)’를 중시하고, ‘직지견성(直旨見性)’의 수행법을 제창한 것에 대한 복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조송(趙宋) 일대의 선학은 ‘간화선’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굉지정각이 창도한 ‘묵조선’은 ‘간화선’과 상당한 차별이 있으며, 심지어 대립적인 선법이다. ― ‘간화선’이 ‘조사선’으로 복귀한 것과는 다르게 ‘묵조선’은 ‘달마선(達磨禪)’으로 복귀하는 색채를 띠고 있다. 사상적인 영향에 관하여 논한다면, 범위와 심도에 있어서 ‘묵조선’은 모두 ‘간화선’에 미치지 못하며, 송‧원 이후의 선학에 대하여 비교적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마땅히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간화선’의 흥성과 유행은 중국 선종으로 하여금 송‧원 이후부터 더욱 비이성주의(非理性主義)적인 길을 걷게 하였다.

宋代 看話禪 及 其思想 特質

賴永海 / 中國 南京大學 敎授

中國佛敎自會昌毁佛之后,由于經典、文物多遭破坏,各宗均呈頹勢,唯无須多少經典、儀軌之禪宗一枝獨秀。而禪宗自唐末、五代之后,又“一花開五叶”,出現了五祖分灯,其中:潙仰創立幷繁興于唐末五代,開宗最先,衰亡亦最早,前后僅四世,仰山慧寂后四世卽法系不明;法眼在五宗中創立最遲,興于五代末及宋初,至宋中叶卽告衰亡;云門一宗勃興于五代,大振于宋初,至雪竇重顯時宗風尤盛;曹洞宗自云居道膺后卽趨衰微,從芙蓉道楷后宗風再振,丹霞子淳下出宏智正覺,倡“黙照禪”,是趙宋一代禪學之一大代表;臨濟在五宗中流傳時間最長,影響也最大,一至于有“臨天下”之說。該宗自石霜楚圓下分出黃龍、楊歧二系,大盛于宋中叶,至佛果克勤下出大慧宗杲,倡“看話禪”,風行一代,對后世影響至爲深遠。從傳法世系上說,此五宗均出于惠能門下,屬南宗禪;從禪宗自身的發展史說,此五宗均屬“分灯禪”。爲了能更好地把握宋代禪學的思想特質,有必要先看看此時的禪學較諸以往的禪學在哪些方面發生了變化。

(一)從“不立文字”到“不离文字”`

宋元禪學有一个不同于前期禪宗的重要地方是出現了許多“語彔”、“灯彔”,甚而“評唱”、“擊節”。如果說,前期禪宗曾以“敎外別傳”、“不立文字”爲号召而在中國佛敎界獨樹一幟,那么,此時期的禪宗則又由“不立文字”一變而成爲“不离文字”。

宋元禪學的“不离文字”如溯其源頭,盖來自于匯集各种“公案”及對“公案”的注解。

所謂“公案”,原指官府之案竇,禪宗借用它指前輩師祖之言行范例,幷以它作爲判斷当前是非的准則,或以此机緣語句去探討“古德”的意蘊禪趣。正如中峰和尙在《山房夜話》中所說的:

或問:佛祖机緣,世称公案者何耶?幻曰:公案,乃喩乎公府之案牘也。法之所在,而王道之治亂系焉。公者,乃圣賢一其轍,天下同其途之至理也。案者,乃記圣

賢爲理之正文也。凡有天下者,未嘗无公府;有公府者,未嘗无案牘。盖欲取以爲法,而斷天下之不正者也。……夫佛祖机緣目之曰公案亦爾。(注一)

克勤禪師在《碧岩彔》第九十八則評唱中也說:“古人事不獲已,對机垂示,后人喚作公案。”所謂“斗机鋒”,實際上也就是對“公案”之疑參,禪師之間或者師徒之間通過各种隱語、比喩、暗示甚而拳打脚踢、棒喝交加來繞路說禪。中國禪宗史上的“公案”,据《碧岩彔》的三敎老人序說:“唱于唐而盛于宋,其來尙矣”。也就是說“公案”非后期禪宗所發明,而是早已有之,只是到了趙宋才大爲盛行而已。考諸中國禪宗史,此說是切合實際的。

据《五灯會元》記載,二祖慧可曾因其“心未宁,乞師与安”,達磨曰:“將心來,与汝安”。過了許久,慧可說:“覓心了不可得”。達磨便說:“我与汝安心竟”。(注二)這也就是后來所謂“公案”,卽通過暗示,繞路說禪。此外,南岳怀讓通過磨磚不能成鏡啓發馬祖道一:坐禪不能成佛,也屬此類。馬祖道一之后,此种繞路說禪的方法就逐漸盛行,至黃檗希運時,就蔚然成風,以致希運禪師竟說:“若是丈夫漢,須看个公案。”此類公案至至宋時已有數千則之多,当時的禪師就把它們匯集成編,因之出現了多達數十万字的各种《語彔》、《灯彔》等。對于這种現象,《文獻通考》曾評之曰:禪宗“本初自謂直指人心,不立文字,今四灯總一百二十卷,數千万言,乃正不离文字耳。”(注三)也就是說,禪宗至宋,已由原來的“不立文字”發展成“不离文字"。

宋代禪宗的“公案”雖有文字,但這种文字往往十分簡略、晦澀,意義极是含混。因之,趙宋以后,就有許多禪師出來爲這些“公案”作注。据有關資料記載,最早出來爲“公案”作注的是臨濟存獎一系的汾陽善昭禪師。他作《頌古百則》,繞路說禪,其后,天童正覺、投子義靑、丹霞子淳、雪竇重顯四禪師均有頌古之擧,史称“禪宗頌古四家”(詳見 譚《犖絶老人頌古直注序》。(注四)。此四家除雪竇重顯出自云門外,天童正覺、投子義靑、丹霞子淳皆屬曹洞。

所謂 “頌古”,一般至少包含兩个部分:一是“拈古”;二是“頌古”。“拈古”者,也就是拈出“古則”(亦卽“公案”);“頌古”則是對所拈出之“公案”加以評頌。例如,汾陽善昭禪師在其《頌古百則》中先拈出慧可于達磨處立雪斷臂、請求安心的“古則”后,再加以評唱曰:“九年面壁待当机,立雪齊腰未展眉,恭敬愿安心地決,覓心无得始无疑。”至于“拈古”,禪宗史上也是早已有之,如云門文偃禪師在拈出“世尊初生下,一手指天,一手指地,周行七步,目顧四方,云:‘天上天下,唯我獨尊’”之古事后說:“我当時若見,一棒打殺給狗子吃,却圖天下太平。”(注五)此中先列出釋 牟尼初生時一手指天,一手指地的古事則屬“拈古”。因此,有的人(如太虛)認爲,“頌古”之風,端肇云門文偃禪師們按照自己的理解對 “公案”加以評頌之后,“公案”自然較爲明白、易懂一些。但是,這些禪師的評頌,往往語言簡略,意蘊含蓄,許多評頌本身,就不太容易理解,爲了使這些“公案”能更加明白、易懂一些,有些禪師又在前人“評頌”的基础上,進一步對原有之“公案”及“評頌”進行重新“評唱”和“擊節”。這方面最有影響的当推趙宋之圜悟克勤和宋、元之際的万松行秀、圜悟以其《碧岩彔》聞名于禪宗史。此外,他還有《擊節彔》二卷。

《碧岩彔》是對云門雪竇重顯的《頌古百則》加以評唱;《擊節彔》卽是對雪竇的《拈古百則》加以“擊節”。二者都是對雪竇“頌古”和“拈古”的注釋,所謂“雪竇頌百則,圜悟重下注脚”是也。《碧岩彔》對《頌古百則》的注釋,采用篇前加“垂示”(亦卽總綱),頌中加“着語”(亦卽夾注),同時再加以“評唱”(亦卽具体發揮),使得“公案”更加明白、易懂。

万松行秀的“評唱”主要是注釋天童正覺的《頌古百則》。他有《從容庵彔》六卷,在正覺《頌古百則》的基础上增加“示衆”、“著語”、“評唱”,也使正覺所拈、頌的“公案”更加易于理解。

“評唱”、“擊節”之盛行,給当時禪宗至少帶來兩个結果:一是使得禪師們注重文字技巧、走上舞文弄墨的道路,失却禪宗“不立文字”的本色;二是“評唱”、“擊節”的目的,就是爲了使人容易“理解”,但是,“禪”本身就是只可意會,不可言傳,不可以義理加以解釋的,正如大慧宗杲所說的:參禪“是一超直入如來地”,“須是直心、直行”,“擬議思量已曲了也”。(注六)可見,“評唱”、“擊節”本身就与“經是佛語,禪是佛意”的思想相違背。因此,注重文字技巧、强調義理解釋的“評唱”、“擊節”十分自然地、漸漸地受到

某些深得禪之底蘊的禪師們的抵制和反對。首先起來反對這种文字、義理禪的,就是《碧岩彔》的作者---佛果克勤的高足大慧宗杲。

据宋淨善重集的《禪林宝訓》記載,“天禧間雪竇以辯博之才,美意變异,求新琢巧,籠絡当時學者,學風由此一變矣。逮宣政間,圜悟又出己意,离之爲《碧岩彔》……紹興初,佛日(宗杲)入閩,見學者牽之不返,日馳月鶩,浸漬成弊,卽碎其板,辟其說。”

元布陵在《重刊圜悟禪師碧岩集后序》中也說:宗杲“因……慮其后不明根本,專尙語言以圖口捷,由是火之,以救斯弊也。”(注七)宗杲毁板之擧在某种程度上正是“物极則反”現象的体現---因爲《碧岩彔》确把“評唱”、“頌古”推到极至,与禪之直指之旨相去太遠。

反對把“公案”作爲正面的文章去理解,大慧宗杲提出了一种新的參禪方法,也就是從“公案”中提取某一語句,作爲話頭,執着不舍地對它進行內省式的參究,這就是曾經對宋元往后禪學産生過深遠影響的所謂“看話禪”。

(二)從“不离文字”到“但擧話頭”`

對于“看話禪”,明代古音淨琴有一段頗得要領的評述,先摘引于下:

凡作工夫,当离喧鬧,截斷衆緣,屛息雜念,單提本參話,至于行住坐臥,,苦樂逆順,一切時中,不得忘失,念茲在茲,專心正意,切切思思,念念自究,返觀自己,這个能追能問的,是个什么人?若能如是下疑,疑來疑去,疑到水窮山盡處,樹倒藤枯處,擬議不到處,心忘絶緣處,忽然疑團迸散,心花朗發,大悟現前。

這段話大致包含這樣几層意思:一是“看話禪”不象以往的“頌古”、“評唱”注重意解理會,注釋“公案”,論量古今,而是單參一个“話頭”;二是對此“話頭”之參究,必須做到行住坐臥,時時提撕,專心致志,念念不忘;三是在參究過程中,應該返觀自己,提起疑情;四是此疑必須一疑到底,疑到水窮山盡處,“大死一番”;五是要驀然咬破疑團,疑團一破,則朗然大悟,生死心絶而諸佛現前。下面我們就沿着這一思路,對大慧宗杲的“看話禪”作一番較爲深入的剖析。

“但擧話頭”

大慧宗杲“看話禪”的入手處是“只看个話頭”。在《大慧普覺禪師語彔》中,此話到處可見,或曰:“只敎就未拔處看个話頭”(注八);或曰:“只就這里看个話頭”(注九);或曰:“雜念起時,但擧話頭”(注一0)。而他最經常擧的“話頭”就是趙州和尙的“狗子還有佛性也无?”。据《大慧普覺禪師語彔》卷一四記載,“和尙(宗杲)只敎人看狗子无佛性話,竹蓖子話,只是不得下話,不得思量,不得向擧處會,不得去開口處承当。狗子還有佛性也无?无。只恁么敎人看。”也就是說,參禪旣不能象以往的“頌古”、“評唱”那樣專在語言、文字上討意度,曲指人心、說性成佛,也不能今日參一个話頭,明日參一話頭,而是應專就一个話頭歷久眞實參究,只要還沒達到“洞見父母生前面目”,“誓不放舍本參話頭”。一時參不透,參一年,一年參不透,參一生。死死咬住本參話頭,毫不放松,一參到底。当然,所參的話頭不局限于“狗子佛性”話,也可參“父母未生之前,如何是本來面目?”。象香嚴智閑禪師那樣,被潙山禪師的“父母未生之前,如何是本來面目?”一問,苦苦參究數年,后終于“偶抛瓦礫,擊竹作聲,忽然省悟。”(注一一)而宗杲后之高峰原妙禪師則專參“万法歸一,一歸何處?”。原妙禪師在《開堂普說》中曾這樣描述他苦參此話頭的情形:

“山僧昔年在双徑歸堂,未及一月,忽于睡中,疑着万法歸一,一歸何處?自此疑情頓發,廢寢忘食,東西不辨,晝夜不分,開單展鉢,屙屎放尿,至于一動一靜。一語一黙,總只是个一歸何處,更无絲毫异念。……如在稠人广衆中,如无一人相似。從朝至暮,從暮至朝,澄澄湛湛,卓卓巍巍,絶淸絶点,一念万年,境寂人忘,如痴如兀。不覺至第六日,隨衆在三塔諷經次,抬頭忽睹五祖演和尙眞,驀然触發日前仰山老和尙問拖死尸句子,直得虛空粉碎,大地平沉,物我俱忘,如鏡照鏡。(注一二)

高峰禪師這一參禪方法就是一种典型的“看話禪”。当然,象他那樣僅用六日時間就得悟的,禪宗史上也許不多

“時時提撕”

大慧“看話禪”的第二个特点就是要“時時提撕”。所謂“時時提撕”,也就是時時處處,行住坐臥,死死咬住這一話頭,毫不放松。在《大慧普覺禪師語彔》中,宗杲說:

常以生知來處,死不知去處,二事貼在鼻孔尖上,茶里飯里,靜處鬧處,念念孜孜,常似欠却人百万貫錢債,无所從出,心胸煩悶,回避无門,求生不得,求死不得,当恁么時,善惡路頭,相次絶也。覺得如此時正好著力只就這里看个話頭。僧問趙州:狗子還有佛性也无?州云:无。看時不用博量,不用注解,不用要得分曉,不用向開口處承当,不用向擧起處作道理,不用墮在空寂處,不用將心等悟,不用向宗師處領略,不用掉在无事匣里。但行住坐臥,時時提撕:狗子還有佛性也无?无!提撕得熟,口議心思不及,方寸里七上八下,如咬生鐵镢,沒滋味時,切勿忘志,得如此時,却是个好消息。(注一三)

在這段文字中,宗杲一連用了九个"不用”。實際上他還可以列上九个甚至九十个“不用”。總之,不用思量分曉,不用求知求解,只要一心一意咬住那个沒義味之話頭,時刻都不要放松,越是覺得沒滋味,越是不要放弃,長此以往,好消息就在后頭。對于宗杲這种“時時提撕”,后來的禪師把它比作“如鷄抱卵”、“如猫捕鼠”、“如飢思食”、“如渴思水”、“如儿思母”,時刻也不能放松,否則將功亏一簣。同時,這种“時時提撕”,還必須專就一个話頭,如看“无”字,要緊在“爲什么狗子无佛性?”上用力;看“万法歸一,一歸何處? ”要緊在“一歸何處?”;若參念佛,要緊在“念佛者是誰?”。切切不可見异思遷,

今日一話頭,明日一話頭,如此則永无得悟之期。尤其是在參到精疲力竭、心灰味窮之時,千万不要打退堂鼓,因爲此時也許正是大悟之前夜。正如《大慧普覺禪書》中所說的:“行提撕,坐也提撕,提撕來,提撕去,沒滋味,那時便是好處,不得放舍,忽然心花發明,照十方刹,便能于一毛端,現宝王刹,法微塵里,轉大法輪。”

“提起疑情”

大慧宗杲“看話禪”的第三个特点,就是在死死參究某一話頭的時候,必須不斷地提起疑情。在“看話禪”看來,“疑以信爲体,悟以疑爲用。信有十分,疑有十分;疑有十分,悟得十分。”(注一四)“不疑言句,是爲大病。”(注一五)“大疑之下,必有大悟。”(注一六)此謂疑是悟的前提條件,是悟的必經路徑,所謂“不疑不悟,小疑小悟,大疑大悟”是也。当然,“看話禪”的“疑”又非全然不“信”,而是与“信”互爲体用,“疑以信爲体”。因此,高峰和尙說:參禪要具足三个條件:“第一要有大信根”;“第二要有大憤志”第三要有大疑情。此中之“信”或“大信根”,實際上就是一要信自己,二要信死參某一話頭,最后定能開悟。如果无此“大信根”,三天捕魚,兩天晒网,或者今日一話頭,明日一話頭,自然沒有成功的希望,用高峰禪師的話說,“譬如折足之鼎,終成廢器”。所謂“大憤志”,實則須有一往无前的精神和鍥而不舍的意志,所謂“泰山崩于前而心不跳,刀劍加于項而色不變”。能如此,則“管取克日成功,不怕雍中走鼈”。所謂“大疑情”,就比較复雜了,至少有這樣兩層含意:一是疑什么?二是怎么疑?對此,我們先听听禪師們是怎么說的。

在《高峰和尙禪要》中,原妙禪師是這么說的:

先將六情六識,四大五蘊,山河大地,万象森羅,總溶作一个疑團,頓在眼前,……行也只是个疑團,坐也只是个疑團,著衣吃飯也只是个疑團,屙屎放尿也只是个疑團,以至見聞覺知,總只是个疑團。疑來疑去,疑至省力處,便是得力處,不疑自疑,不擧自擧,從朝至暮,粘頭綴尾,打成一片,无絲毫疑縫 ,撼也不動,趁也不去,昭昭灵灵,常現在前。(注一七)

此段話的意思是說,先將內情外色,溶作一个疑團,然后死死咬住這个疑團,行住坐臥,屙屎放尿,甚至地動山搖、山崩地裂,都不放松。這种說法似乎比較空泛,不易把握。有些禪師的解釋就比較具体,例如,明末无异元來禪師所作之《博山和尙參禪警語》中有這樣一段話:“做工夫,貴在起疑情。何謂疑情?如生不知何來,不得不疑來處;死不知何去,不得不疑去處。”也就是說,所謂“提起疑情”,疑个什么呢?疑个生究竟是從何處來的?死又是到何處去了?然后緊緊抓住這个話頭,歷久眞實參究。再如高峰禪師的“万法歸一,一歸何處?”之疑,也是一例。万法歸一,一又歸于何處呢?“便就在一歸何處上東擊西敲,橫拷竪逼,逼來逼去,逼到无栖泊、不奈何處,誠須重加猛利,翻身一擲,土塊泥團,悉皆成佛。”(注一八)所謂“万法歸一一歸何,只貴惺惺著意疑,疑到情忘心絶處,金鷄夜半徹天飛。”(注一九)上面這兩段話,如果說“一歸何處”是指疑个什么?那么,所謂“東擊西敲、橫拷竪逼”及“只貴惺惺著意疑,疑到情忘心絶處”則在說明“怎么疑”。当然,對于“怎么疑”問題,“看話禪”的論述很多,思想也頗深刻丰富,因此,有必要作深入一步的探討。

“大死一番”

“大死一番”是“看話禪”對怎么疑? 疑到何种程度爲好?的一个十分形象的說法。所謂“大死一番”,語出宋、元之際的中峰和尙《示云南福元通三講主》。在那篇示文中,中峰和尙說:

近代宗師,爲人涉獵見聞太多,况是不純一痛爲生死,所以把个无義味話頭,抛在伊八識田中,如呑栗刺蓬,如中毒藥相似。只貴拌舍形命,廢忘寢食,大死一番,驀忽咬破,方有少分相應。你若不知此方便,于看話頭起疑情之際,將一切心識較量動靜,妄認見聞,坐在馳求取舍窠臼中,或得暫時心念不起,執以爲喜,或昏散增加,久遠不退,承以爲憂,皆不識做工夫之旨趣也。(注二0)

中峰禪師這里所說的“大死一回",主要是指參話頭應該抛弃一切心識計量、見聞取舍,而應該忘餐廢寢地死死咬住所參話頭,几致于拼舍身命,如痴如愚。這种情形,高峰和尙有一段更爲生動的論述。在《高峰和尙禪要·示衆》中,他說:

直得胸次中,空勞勞地,虛豁豁地,蕩蕩然无絲毫許滯碍,更无一法可 当情,与初生无异。吃茶不知茶,吃飯不知飯,行不知行,坐不知坐,情識頓淨,計較都忘,恰如个有气底死人相似,又如泥塑木雕底相似。(注二一)

這后句最是形象、逼眞,所謂“大死一番”,亦卽參話頭必須參得如“有气的死人”、“泥塑的木雕”,一切情識、見聞、計較全无,如痴如愚,吃茶不知茶,吃飯不知飯。用佛果克勤等禪師的話說:“養得如嬰儿相似,純和冲淡”(注二二)、“終朝兀兀如痴,与昔嬰孩无异”(注二三)。又如達磨參禪,心如墻壁,夫子三月忘味,顔回終日如愚。倡“看話禪”的禪師們認爲,只有經過這樣“大死一番”之后,才有希望借助于某一机緣,如灵云桃花,香嚴擊竹,長慶卷帘,玄沙 指,突然得悟,“絶后复蘇”。而此中之關鍵是要“驀然咬破”疑團。

“驀然咬破”

“驀然咬破”在參禪中是十分重要的一环。在“看話禪”看來,參禪者的提起疑情、大死一番本身幷不是目的,目的是看破疑團、絶后复蘇。這是因爲,“疑情不破,生死交加;疑情若破,則生死心絶矣。”(注二四)而要看破疑團,最重要的在話頭上用力,這正如大慧宗杲所說的:“千疑万疑,只是一疑。話頭上疑破,則千疑万疑一時破;話頭不破,則且就上面与之 崖。若弃了話頭,却去別文字上起疑,經敎上起疑,古人公案上起疑,日用塵勞中起疑,皆是邪魔眷屬。”(注二五)這也就是我們在上面語及的“但擧話頭”、“時時提撕”,不要隨便更換話頭,更不能半途而廢;而應該專在此話頭上与之“厮崖”,直到把

此話頭看破爲止。

当然,更重要的在于,如何看破。“看話禪”認爲,要看破話頭,不可以理論,不能以義解。如果“于言句上作路布,境物上生解會,則墮在骨董袋中,卒撈摸不着。”(注二六)因爲“道貴无心,禪絶名理”,“唯忘怀泯絶,乃可趣向回光骨燭,脫体通透,更不容擬議,直下桶底子,……一了一切了。”(注二七)所謂“直下桶底子,一了一切了”,用通常的話說,就是“豁然貫通”,用禪宗的語言說,就是“頓悟”,用“看話禪”自己的話說,或如大慧宗杲所言“驀然打發,惊天動地,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逢佛殺佛,逢祖殺祖,于生死岸頭得大自在,向六道四生中游戲三昧。”(注二八)或如高峰禪師所說:“跳來跳去,跳到人法俱忘,心識路絶,驀然踏翻大地,撞破虛空,元來山卽自己,自己卽山。”(注二九)“驀然打破疑團,如在羅网中跳出。”(注三0)看話禪的禪師們用了許多諸如“驀然”、“驀忽”、“爆地一聲”、“噴地一發”、“忽然爆地斷”、“忽然啐地破”等術語來表示疑團被打破的情形,旨在表明疑團的被打破絶不是靠義理分析或理性的思維,而是思維的中斷,或者說“飛躍”。只有通過這一“飛躍”,才能大徹大悟、超佛越祖。可見,看破疑團的關鍵,或者說“看話禪”的關鍵,乃在于“悟”,或者更准确点說--“頓悟”。

“須是悟得”

“禪无文字,須是悟得。”(注三一)這可說是宗杲對“看話禪”的一个畵龍点睛般的槪括。我們在前面所說的一切,諸如“但擧話頭”、“時時提撕”、“提起疑情”、“大死一番”等等,都是爲了達到“驀然咬破”---豁然貫通而大徹大悟這一最后的目標。当然,這一大徹大悟的到來,絶對必須是順其自然的,而不可去求、去等。也就是不可有絲毫“待悟之心”,“切忌作株解求覓,才求,卽如捕影也。”(注三二)而是“必須自然入于无心三昧”(注三三)。

按照“看話禪”的基本思想,“禪无你會底道理。若說會禪,是謗禪也。……若不妙悟,縱使解語如塵沙,說法如涌泉,皆是識量分別,非禪說也。”(注三四)也就是說,禪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參禪亦非一切有作思維之所能及,做工夫旣不是一种學問,也不可以事說,尤不可以理論,更不容以義解,"当知禪不依一切經法所詮,不依一切修証所得,不依一切見聞所解,不依一切門路所入,所以云敎外別傳。”(注三五)

至此,我們看到這樣一种現象,如果說五祖分灯后的禪宗有一种逐漸從“不立文字”轉向“不离文字”的傾向,那么,大慧倡導的“看話禪”又出現一个轉机,開始從“文字禪”中擺脫出來,提倡直指見性;如果說超佛越祖的分灯禪較之前期禪宗注重心悟言,更主張“純任自然、无証无修”,那么,宗杲以后的“看話禪”則又開始强調“頓悟”,当然這种“頓悟”是在專參某一公案話頭、經過“大死一番”后“驀然”而得的。

不過,說“看話禪”使中國禪宗的禪風發生了重大的變化,絲毫不等于說宋元時期的禪宗是“看話禪”的一統天下,實際上,在趙宋一代,除了大慧宗杲所倡導的“看話禪”之外,当時的禪宗,另有一股禪風也頗具影響,這就是由宏智正覺倡導的“黙照禪”。

(三)從達磨之“面壁”到宏智之“黙照”

“黙照禪”的最大的特点,是以看心靜坐爲根本本,認爲无須多少文字語言,只要黙黙地靜坐,便可萌生般若智慧,洞見諸法本源,這有如宏智正覺在《黙照銘》和《語彔》中所說的:“黙黙忘言,昭昭現前”,“廓爾而灵,本光自照,寂然而應,大用現前。”(注三六)

從某种角度說,“黙照禪”帶有向傳統禪學复歸的色彩。它与達磨的“面壁而坐,終日黙黙”很相類似,所不同的是,“黙照禪”也拈、頌公案,如宏智本人就有《頌古百則》留傳于世,且頗有影響。当然,后來的“黙照禪”禪師可能就不太注重公案之參究,而更注重于攝心靜坐,潛神內觀,也許正由于這一点,導致了后來“看話禪”對“黙照禪”的批評和攻擊。

就私交說,大慧宗杲与宏智正覺的个人關系不錯,宏智在臨終前曾把后事托与宗杲;但就禪學思想說,二者則頗多差异。因此,二禪之間終于出現了論爭和相互指責,宗杲本人就曾直接批評“黙照禪”。他說:“近年以來,有一种邪師說黙照禪,敎人十二時中是事莫管,休去歇去,不得做聲。恐落今時,往往士大夫爲聰明利根所使者,多是厭惡鬧處,乍被邪師輩指令靜坐却見省力,便以爲是,更不求妙悟,只以黙黙梧鱇則。”(注三七)《五灯會元》中也記載有宗杲對黙照禪的攻擊:

少林九年冷坐,剛被神光 破;如今玉石難分,只得麻纏紙裹。…… 老胡九年話墮,可惜当時放過;致令黙照之徒,鬼窟長年打坐。(注三八)

宗杲的這段話把“黙照禪”与“達磨禪”聯系起來是不无道理的,正如我們在前面指出的,“黙照禪”确實帶有達磨“面壁而坐,終處黙黙”的特点。更有甚者,宗杲還斥責“黙照禪”最后只能落得个二乘甚至外道的境界。在《答陳少卿書》中,宗杲指出:“邪師輩敎士大夫攝心靜坐,事事莫管,休去歇去,豈不是將心休心,將心歇心,將心用心。若如此修行,如何不落外道二乘禪寂斷見境界,如何顯得自心明妙受用、究竟安樂、如實淸淨、解脫變化之妙?”從這段話看,一个是注重“攝心靜坐”,另一个則强調“自心明妙受用”。如果把它們放到禪宗史上去考察,則前者无疑較接近于傳統禪學的“禪定”,而后者則无疑更接近于中國化了的禪宗的“道由心悟”。

至此,我們不妨對宋元時期禪學發展的基本路徑作一个簡要的回顧:如果說前期禪宗曾經以“以心傳心”、“不立文字”在中國佛敎界獨樹一幟,那么,宋元禪學由于出現了許多“公案”、“机鋒”以及對這些“公”、“机鋒”進行注解的“評唱”、“擊節”,從而使這時期的禪學走向前期禪學的反面,出現了注重義解、不离文字的“義理禪”、“文字禪”。但是,所謂“禪”者,原屬“佛意”,是只可意會,不可言傳,只可“悟得”,不可“理解”的,

因此,“義理禪”、“文字禪”在相当程度上失却了禪宗 “以心傳心”的本色,故爾后來有大慧宗杲的提倡“看話禪”。如果說,出現于晩唐五代、盛行于赴宋的分灯禪在某种意義上說是對前期惠能祖師禪的否定(如佛性理論和修行方法等),那么,大慧的“看話禪”則是對這种否定的再否定,而向前期祖師禪注重“道由心悟”、提倡“直指見性”修行方法的复歸。当然,赴宋一代的禪學非止“看話禪”一家,宏智正覺所弘揚的“黙照禪”就是一种与“看話禪”有着很大差別甚至在一定程度上說是對立的禪法---与“看話禪”是對祖師禪的复歸不同,“黙照禪”帶有向“達磨禪”复歸的色彩。就思想影響而論,不論广度還是深度,“黙照禪”均不及“看話禪”,眞正對宋元以后之禪學産生較大影響的,当是“看話禪”。而“看話禪”的盛興、流行,則使中國禪宗自宋元之后更加走向非理性主義的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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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釋

注一:中峰和尙:《山房夜話》卷上。

注二:《五灯會元》卷一。

注三:《文獻通考》卷二二七。

注四: 譚:《犖絶老人頌古直注序》。《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二套,第三冊,第

二五三頁。

注五:《五灯會元》卷一五。

注六:《大慧普覺禪師宗門武庫》。

注七:《大正藏》卷四八,第224頁。

注八:《大慧普覺禪師語彔》卷二一。

注九:同上。

注一0:同上,卷二。

注一一:《五灯會元》卷九。

注一二:《高峰和尙禪要》。《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七套,第四冊。

注一三:《大慧普覺禪師語彔》卷二一。

注一四:宗杲:《示信洪居士》。《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七套,第四冊。

注一五:《五灯會元》卷一九。

注一六:《禪家龜鏡》。

注一七:《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七套,第四冊。

注一八:同上。

注一九:同上。

注二0:《天目中峰和尙广彔》卷四之上。

注二一:同上。

注二二: 《示成都雷公悅居士》

注二三:高峰原妙:《示衆》。

注二四:《大慧普覺禪師語彔》卷二八。

注二五:同上。

注二六:《示璨上人》。《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五套,第四冊。

注二七:同上。

注二八:《大慧普覺禪師語彔》卷一九。

注二九:高峰原妙:《示衆》。《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七套,第四冊。

注三0:同上。

注三一:《大慧普覺禪師語彔》卷一六。

注三二:《示璨上人》。《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五套,第四冊。

注三三:《續藏經》第一輯,第二編,第二0套,第四冊。

注三四:《天目中峰和尙广彔》卷五之下。

注三五:《天目中峰和尙广彔》卷一一之上。

注三六:《宏智正覺禪師广彔》卷一。

注三七:《大慧普覺禪師語彔》卷二六。

注三八:《五灯會元》卷一九。

* Keywords

Kanhwasŏn(看話禪), Dahuizonggao(大慧宗杲) , Yuanwukeqin (園悟克勤), Fendengchan(分燈禪), Mozhaochan(黙照禪)

본문; hw


출처; 보조사상 26집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460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