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을 변화시켜주는 8편의 시 >
소원을 들어 주는 보석보다 귀한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향해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내가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마음 속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해친다면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게 하소서.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나는 마치 금은 보화를 발견한 듯이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큰 희망을 심어 주었던 자가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은혜와 기쁨을 베풀게 하시고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은밀히 짊어지게 하소서.
세속팔풍에 물들지 않아모든 것이 때묻지 않게 하시고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첫번째 보리심 수행법 -----------------
⊙ 마음을 바꾸는 요령, 마음을 고치는 핵심 방법이란 이것이다.
로종의 가르침에 의해 제시된 방법들은 우리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바꾸어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의 내면을 바꾸는 훈련은 다른 누구에 의해서 주어지거나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육체적 훈련의 경우 어느 정도의 강요는 수련이 제자리를 잡는 데 아주 효과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내적인 변화에 요구되는 정신적 수련은 결코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수용, 다시 말하여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은 유익한데, 이에 비하여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개인적인 인식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신수련을 받아들이게 되며,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을 바꾸는 열쇠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그 양면을 함께보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 파괴적인 분노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는 한편, 자신의 생각과 감정 속에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해독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곳도 마음이지만,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해독제가 있는 곳도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낳는 생각과 감정은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그런 다음에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함으로써,우리는 점차 분노와 증오의 힘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기르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정신수행의 핵심은 익히고 또 익히는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본질은 보다 많이 사용하고 보다 많이 개발할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자비심을 키우려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일깨우고 발달시켜야 합니다.
보리심은 오직 규칙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또한 마음의 전환은 한밤중에 문득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로어머니의 애정과 보호를 받아야만 비로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메디컬 사이언스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태어난 뒤 처음 몇 주 동안어머니의 품에 안겨 아머니의 체온을 느끼면서 자라는 것이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몸이 제대로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애정이 담긴 마음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고,몸도 마음과 똑같이 애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입니다.
사람이 살아가고 성장하는데 사랑이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에 대해 여러분도 충분히 생각하고 잘 조사해 보십시요.
자식은 부모에게 의존하여 성장합니다.우리는 어머니가 애정을 가지고 자식을 키우는 현실을 토대로 하여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막판에 죽음을 맞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자기는 혼자 죽어가야 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남아서 앞으로도 살아갈 테니까 죽음은 이별이 됩니다.
그 마지막 작별의 순간, 애정으로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그래도 주위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애정으로 지켜봐 준다면,죽는 사람도 편안히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인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인생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중요한 것 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시내에 나가 가게에서 사올 수는 없습니다.돈을 주고 사랑을 사겠다고 말하면 남들이 비웃거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병원에 가서 사랑이 싹트는 주사를 한 대 놓아 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수술을 하거나 약을 먹어서 사랑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법률로 모든 사람은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해 놓아도 그런 규율에서 사랑이 싹트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키워야 할까요?
스스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사랑이 자기 마음속에 배어들게 하고,자진해서 사랑을 키우려고 애쓰고,다정한 마음을 갖는데 익숙해지면,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점점 높이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애정의 씨앗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사랑에 익숙해지게 하고,자진해서 사랑을 키우려고 애쓰면, 사랑이라는 좋은 자질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반대 요소인 분노와 증고, 남을 해치려는 나쁜 마음에는 어떤 결점이 있는지 잘 조사해 보는 것 입니다.
마음속으로 <아, 사랑이란 정말 바람직한 거로구나. 도움이 되는 좋은 마음이구나>라고인식함으로써 자진해서 사랑을 키우려고 애쓰고,사랑을 키우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갖는 동시에,
<분노나 증오, 질투 따위는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나쁜 마음>이라고 확신하면서서히...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마음속에 좋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 윤회의 근거 = 이전 순간에서 상속되어지는 의식 &불생불멸의 불성(佛性)
의식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그것에는 물체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나 모양 또는 폐쇄성이 없습니다.
그것의 본질은 밝게 빛나고 인지하는 것일 뿐인데,그것이 어떤 조건을 만나게 되면 대상을 반영합니다.
마음이 시시각각 변하고 상이한 양상을 띠는 것은그것이 원인과 조건이라는 다른 영향력 아래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마음은 비슷한 유형의 앞선 마음에 의존해서 생겨나는데,그러자면 그보다 앞선 시작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연속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마음이 반드시 앞선 순간의 마음에 의존해서 일어나지 않고 까닭 없이 일어날 수 있다면,그 마음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의식이 앞선 의식에 연속으로 일어나지 않고,그대신 물질적인 것에서 일어난다면 부조리하게도 언제든지 일어나거나 결코 일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 또한 부조리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로써 의식은 앞선 의식의 연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앞선 순간의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연속에는 시작이 있을 수 없습니다.의식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 연속 때문에 마음은 좋은 상태로 변할 수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우리의 경험은 윤회의 영역에 제한되게 됩니다.
연속되는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를 벗어나게 되면 열반을 이룰 수 있습니다.이렇게 볼 때 모든 현상은 마음이 부리는 재주 또는 유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회라고 하는 청정하지 못한 현상은 청정하지 못한 마음의 유희입니다.열반이라고 하는 청정한 현상은 청정한 마음의 유희입니다.
윤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최종적인 논리에 의하면,우리의 의식은 빛과 앎의 실체로써 반드시 이전 순간의 의식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일단 의식이 이전 순간의 의식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연속체인 의식에 발단이 있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반적인 의식과 가장 미묘한 의식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이로써 재생 이론이 확립됩니다.
불교 경전에는 감정과 마음에 관한 많은 정보가 있는데 특히 금강승의 가르침에 많이 있습니다.
금강승의 가르침이 생리학적인 힘의 적용과 제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차원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더 거친 차원의 마음이 있는가 하면 좀 더 미세한 마음,
훨씬 더 미세한 마음과 같이 다양한 층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밀교의 경전에서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감각적 차원의 의식, 혹은 마음이 온전히 작동하고 아주 활동적일 때, 비록 그와 동시에 생각이 흘러간다 할지라도 감각적 차원의 의식이 훨씬 더 지배적입니다.
꿈을 꿀 동안에 감각적인 의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각만이, 다른 차원만이 작동합니다.
꿈을 꾸지 않고 깊이 자는 동안에는 또 다른 차원의 더 깊은 의식(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기절을 하면, 설사 호흡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또 다른 차원의 깊은 마음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생리적, 육체적 기능이 멈춥니다.
예를 들어 심장 박동이 멈추고 뇌에서 피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경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 때 모든 거친 차원의 마음은 멈춥니다.
그 때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은 멈추고 더 이상 거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인 차원이 멈춘다는 것이고
의학적으로 죽음이 선언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몸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를 가르치셨던 스승님은 돌아가신 후 13일 동안이나 몸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최근에, 일 년 전인 듯한데 티베트의 한 고승도 열반하신 후 거의 3주 동안이나 몸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 린포체의 몸이 그대로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람살라의 병원에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기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사람을 보내 그 기계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머리에 연결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장치 같은 것도 함께 왔습니다.
비록 그때 아주 구체적인 분석이 최종적으로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의학적으로 죽음의 선언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분의 뇌에 여전히 어떤 전기적인 신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미세한 의식이 그의 몸 안에 남아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장 미세한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의식에는 아주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
족첸 전통의 독특한 한 방법은
기본적인 마음과 본래적인 자각(리그파, rigpa, 불성)의 구별에 기초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구별은 다음과 같은 것에 기초해서 이해됩니다.
더 우발적이고 더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본성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보통 상태의 마음>의 특색입니다.
<본래적인 자각(리그파, rigpa, 佛性)>은 그와 같은 불안정함이 없이 항상 존재하며,
의식의 근원적인 본질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 둘은 이렇게 구별되어집니다.
--- 아래는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 질문자는 외도이며, 답변자는 용수보살입니다.
[문] 죽어서 나는 인연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멸하고 말기 때문이다. 멸함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불에 태우면 재가 되어버리고, 둘째는 벌레에 파먹혀 똥이 되어버리며, 셋째는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지금은 단지 그 없어지는 것만이 보일 뿐 다시 나오는 이나 후생에 몸을 받는 이를 보지 못하나니, 보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답] 만일 그대가 몸은 멸하여 곧 없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중생들이 전생에 익힌 바의 근심과 기쁨과 두려워함 등이 있다 하겠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울기도 하고 혹은 웃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익혔기 때문에 지금은 남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근심과 기쁨을 계속 내는 것이다.
또 마치 송아지가 나자마자 젖을 찾아 먹는 것과 같고
돼지와 양의 족속은 그가 나서 얼마 되지 않아도 곧 암수의 교합(交合)을 아는 것과 같으며,
아들은 같은 부모를 통해 태어나는데도 잘생기기도 하고 못 생기기도 하며, 가난하게 살기도 하고 부자로 살기도 하며, 총명하기도 하고 암둔하기도 하는 등 저마다 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만일 전세의 인연이 없다면 다름이 없어야 하리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보아도 후세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그대는 먼저 “특별히 가는 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사람 몸 안에는 비단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몸 안의 6정(情)은 저마다 아는 것이 있나니, 법을 들을 수도 있고 냄새 맡을 수도 있으며,
맛볼 수도 있고 댈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들을 수 있는 법조차도 오히려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알 수 있는 것이랴.
나는 것이 있고 죽는 것이 있는 법도 역시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대는 육안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지만 천안을 지닌 이는 명료하게 보게 된다.
마치 사람이 한 방에서 나와서 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나니,
이 몸을 버리고 뒷몸을 받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만일 육안으로 볼 수 있다 하면 천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천안과 육안과 어리석은 이와 성인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는 곧 그대가 축생과 같이 보는 것이 되니 어찌 후세를 보고 알 수 있다 하겠는가.
이 몸은 금세(今世)의 5중(衆)의 인연 때문에 다시 후세를 낳고 5중의 행업(行業)이 상속하면서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과보를 받게 된다.
또 마치 겨울 나무는 비록 아직 꽃과 잎과 열매가 없다 하더라도 시절을 만나게 되면 차례로 나오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죽어서 나는 것이 있음을 안다.
또 현재의 세상에서 전생의 일[宿命]을 아는 이가 있나니, 마치 사람이 꿈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피로했다가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그가 거쳐 지나간 길을 아는 것과 같다.
또 온갖 성인과 안팎의 경서(經書)는 모두 후세를 말씀하고 있다.
또 현재의 세상에서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켜서 허물이 중하며, 성을 내고 질투를 하고 의심을 내어 안으로 시달리기 때문에 몸이 바짝 마르고 얼굴빛이 즐겁지 않게 된다.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에 해를 받음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일으키겠는가.
만일 착한 법과 청정하게 믿는 업의 인연을 내면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고 마음이 기뻐지므로 몸이 가뿐해지고 안색이 온화하게 된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이 있으므로 착함과 착하지 않은 일이 있다.
이제 틀림없이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후세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단지 중생이 육안이라 보지 못하고 지혜가 얇기 때문에 삿된 의심을 낼 뿐이니,
비록 복된 일을 닦는다 하더라도 짓는 일이 천박하다.
비유하건대 마치 약사(藥師)가 왕을 위하여 병을 치료할 때 왕은 은밀히 그를 위하여 집을 지어 놓았는데 약사는 모르고 있다가 돌아와서 그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그 동안에 성의와 힘을 다하여 왕을 치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것과 같다.
또 성인이 말씀하는 현재의 일을 진실로 믿을 수 있기 때문에 후세의 일을 말씀해도 모두 믿을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밤에 험한 길을 갈 때 길잡이가 손을 내주면 믿어도 좋다고 하는 까닭에 곧 붙잡고 따라가는 것과 같나니, 비지(比智) 및 성인의 말씀으로써 반드시 후세가 있는 줄 알 수 있다.
그대는 육안의 죄가 중하면서 비지가 박(薄)하기 때문이며 또 천안이 없는 데다 스스로 지혜가 없어서 성인의 말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후세를 알 수 있겠는가.
그대는 천안(天眼)의 밝은 눈이 없기 때문에 후세를 의심하며 스스로 죄악에 빠지려 하나니,
이 죄업의 인연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로 왕생(往生)을 설명하는 것이다.
★ [평등심] 확립하기 1. 평등심이 없으면 보리심을 닦을 수가 없다.
평등심을 지니기 위한 수련의 핵심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느끼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것 입니다.
이와같은 편견이나 차별은가깝다거나 멀다는 것과 관련된 일희일비하는 감정과 생각에 토대를 둡니다.
실로 애착은 우리의 사고를 강제적으로 한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으며,그 때문에 우리가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물이나사람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집착은 여러분의 견해를 흐리게 하고 좁게 만드는 부정적인 효과를 지닙니다.
평등심을 지니는 훈련을 통하여 우리가 편견을 극복하고 평등하게 모든 것을 다루고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기 위히여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면, 보리심을 닦지 않고서는 여기에 이를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에 간다고 열심히 갔는데 막상 서울에 왔다고 숨을 내쉴 때 부산에 도착해 있는 경우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순서대로 닦아야 한다.
일체중생이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평등심이 먼저 생겨야 한다. 일체중생에 대한 평등한 마음이 없으면 비록 자애심과 연민심등이 일어나더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이다.
일체중생을 향한 평등심이 필요한데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서 집착하고,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면서 무시한다.
그러므로 평등심을 갖기 위해서 자기 앞에 원수나 친척, 그도 저도 아닌, 다른 세 가지 관계의 사람을 놓고 관상해야 한다.
그러한 세 가지 마음이 떠오르게 될 때 싫어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살펴보면 전에 자기를 해쳤거나 좋지 않게 행동을 했던 이유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중사도에서 이미 윤회세계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듯이, 그 원수는 어느 전생에 나와 여러 번 친척이었을 것을 사유해서 화가 남을 막아야 한다.
현재의 친척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도와주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로써 좋아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도 전생에 여러 번 나의 원수로 태어났음을 알아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지금 원수도 아니고 친척도 아닌 사람들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생의 원수이거나 친척과 같이 그 사람들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관상의 세 가지 대상이 똑같은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함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된다.
친척에게 그와 같이 집착할 필요가 없음은 전생에 원수였을 수도 있고, 지금의 원수는 전생에 여러 번 친척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하나씩 살피면 평등심을 가질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원수나 친척으로 보이는 것뿐이지 영원히 그러한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본인 스스로를 애착하고 남을 싫어함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으며, 대상으로서 그들을 볼 때에도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바라지 않음이 나와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비록 이번 생에 나를 도와주거나 해치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양자간에 결코 차이가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도와주었던 사람과 지금 도와주는 사람은 똑같다.
과거에 지팡이로 우리를 때렸던 것과 지금 그렇게 해치는 것은 같은 것이므로 관상했던 원수, 친척, 그도 아닌, 이 세 대상을 더 넓게 확대시켜서 일체중생들이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식으로 관상하면 원수를 미워하면서 복수하고 싶거나, 친척을 좋아하면서 품에 안고 싶어함과 같은 좋지 못한 행동들을 저절로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 일체중생들 속에서 자기가 마워하거나 좋아함을 따로 따로 골라서 하게 되면 보리심이 일어날 틈이 없다.
이처럼 평등심만 닦는 데에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와 같이 닦아야 한다. 만일 평등심 없이도 보리심을 쉽게 닦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 [평등심] 확립하기 2. 실제 수행방법 - 세 부류 시각화 하기
우리가 평등심을 지니기 위한 훈련을 할 때,때로는 <마음 속에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세명의 다른 사람들,즉 여러분과 아주 가까운 사람, 여러분이 적으로 생각하는 아주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여러분이 무관심한 완전히 중립적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세 사람과 관련하여 여러분의 자연스런 느낌과 생각이 일어나게 하십시요.
일단 여러분이 자신의 자연스런 느낌들이 일어나게 할 수 있으면,여러분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친근감과 강한 애착을 느끼고,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마 적의와 거리감을 느낄 것이며,중립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아주 가까운 사람
나는 왜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는가?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는가?
여러분은 아마 자신의 애착에 대한 근거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그 사람은 여러분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을 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 마음이 영원할 것인가......그리고 그 사람 또한 항상 이와같을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보면,여러분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 입니다.
심지어는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이것은 특히 불교적인 관점에서 타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윤회사상에 입각하여 우리가 여러 생을 고려하게 될 때,지금 이 생에서 아주 가까운 어떤 사람이 전생에는 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은 강한 애착을 느끼는 데 대한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2.적으로 생각하는 아주 싫어하는 사람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관심을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돌려서무슨 이유로 나는 이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가?????? 하고 자문해 보십시요.
또한 이것은 그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어떤 것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러나 그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항상 여러분의 적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요.
만일 여러분이 여러 생을 고려해 본다면,여러분은 그 사람이 전생에 당신과 아주 가까웠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적으로서 그의 신분은 단지 잠깐일 뿐 입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에 대하여 그와 같이 극단적인 증오와 분노를 지니는 데 대한 아무런 정당한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3.중립적인 무관심한 사람
끝으로, 여러분이 완전히 무관심하게 생각하는 중립적인 사람을 생각하십시요.
만일 여러분이 다시 같은 종류의 질문들을 한다면,여러분은 그 사람이 현재 여러분의 삶과 거의 무관하지만,전생에는 아주 가까웠던 사람일 수도 있고,내생이나 심지어는 지금 생의 다가오는 미래에 여러분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느끼는 변화무쌍한 감정들을 균일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며여러분이 보다 균형잡힌 평등심을 확립하는 단단한 토대가 될 것 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끊임없이 평등심을 일깨우고 북돋운다면,보리심의 어린 싹, 이타적인 의지는 자연히 자랄 것 입니다.
★ [평등심] 확립하기 3. 세 부류에 대한 차별의 제거 순서
진정한 자비심을 개발하고자 한다면
1. 당신이 먼저 마음의 평정[평등심]을 위한 명상을 수행하고, 2.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자신을 애착/집착을 분리해야 합니다. 3. 그러고 나서 당신의 적에게 향한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모든 감각을 가진 존재들을 평등하게 보아야 합니다.이것을 시작으로 당신은 점진적으로 그들 모두에 대한 진정한 자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비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동정과 같은 감정이 아닙니다.
대신 진정한 자비로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당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진정한 자비를 가지려면 가장 먼저 평정[평등심]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대한 평정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은 편견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평정을 개발하기 위한 불교 명상수행의 예를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당신이 아는 친구나 친척처럼 당신이 애착을 가지는 몇 명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로 전혀 무관심한 몇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 번째로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나서 당신의 마음이 자연스런 상태로 가도록 하고 이 사람들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의 친구에 대해서는 애착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싫은 감정을, 중립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도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 친구와 적에 대한 당신의 상반된 태도의 효과를 비교해 보고 이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동요하는 감정 상태가 왜 생기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같은 반응이 당신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보십시오.
앞에서 증오심을 품고 적에게 노여움을 느끼는 경우의 문제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친구와 다른 사람들에게 극도의 애착을 느끼는 경우의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두 극단의 그룹에 있는 사람들에 향한 당신의 강한 감정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과 중생에 대한 근본적인 평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입니다.
당신의 행복하고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갈망처럼 모든 감각을 가진 존재들도 그 같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같은 천부적인 갈망을 실현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다른 모든 감각을 가진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들을 차별하는 것입니까?
⊙ 친근감(자애) 일깨우기 &주의 사항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 혹은 동물에 대하여 보다 친근하게 느낄수록 그 존재와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자비심을 키우는 영적 수행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다른 존재들과 교감하는 능력이며,그들에 대하여 서로 연관되어 있는 존재로써 친근감을 지닌다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비의 대상에 대한 친근감이라고 말합니다.이것은 또한 자애(慈愛)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보다 친근하게 느낄수록,여러분은 그 사람의 고통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질 것 입니다.
우리는 분노나 증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특히 영적 수행을 통해 우리는자신이 특별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없애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스런 것에 대한 애착에는 사랑과 자비의 요소 뿐만 아니라 친근감도 있지만,종종 이 감정은 강한 욕망으로 물듭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깊은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과 관련될 때,우리는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와 같은 사람이 우리의 기대에 반대되는 행동을 할 때그것은 자신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을 때보다 훨씬 큰 상처를 줄 잠재력을 지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는 애정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집착이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 느끼는 애착을 안정시키고 조절해서 그들에 대한 우리의 친근감이 욕망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진정한 자비심의 발현 =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때
진정한 자비는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극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사람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없이, 그 사람의 안녕에 대해 염려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당신 친구를 향한 당신의 사랑과 자비심은 보통 애착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모든 존재가 행복하고 고통을 극복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떤 것이 자기의 것, 자기의 친구, 자기에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애착입니다.
따라서 당신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가 바뀌면 친밀한 감정도 즉시 사라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인간이고 <고통을 극복할 모든 권리가 있기 때문에>당신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와 관계없이 일종의 염려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중립적이든 당신의 적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권리 때문에 계속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요 차이점입니다.
진정한 자비심은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며,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해지고 고통을 피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식을 갖고 남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들을 염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나의 적도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이며, 나와 마찬가지로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남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부릅니다.
내게 적대적인 사람이든, 호의적인 사람이든 상관없이그 자비심은 모든 사람을 향해서 퍼져 나갑니다.
모든 중생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고통을 해결할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방법의 <긍정적·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단기적인 이익과 장기적인 이익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기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불자들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없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믿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인간에게 과연 권리가 있느냐" 물어온다면 자신있게 저는 "인간에게 권리가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항상 인간의 마음속에는 저절로 '나'라는 것이 일어나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 점이 바로 인간에게 권리가 있다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 원치 않는 고통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지구에는 몇 억이라는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없애기 위하여 각각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각각의 길을 최고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행복과 고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합니다.
5개년 계획, 10개년 계획 등의 장기적인 계획은 지구의 발전을 위한 큰 계획이라 할 수 있으며, 이렇게 계획이 자꾸 생기는 이유는 바로 여러분들이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며 인간 스스로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계획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붓다가 되는 인연은 대비심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 나와 남을 바꿔보는 수행)으로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대치될 때 대비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일체 중생이 탐 · 진 · 치에 시달리고 있음을 완벽히 이해할 때> 대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체 중생을 위한 수승한 발심이 일어나야
비로소 무상정등각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 [자비심] 일으키기 1. 모든 중생이 전생에 나의 어머니였음을 인식하기
보리심을 닦기 위한 일곱 가지 중에서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기’가 가장 어렵다.
이것이 생기지 않으면 다음 순서인 ‘은혜를 기억하기’등으로 이어지기가 불가능하므로,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기’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열심히 닦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곱 가지 인과법으로 보리심을 닦기 중에서 첫 번째인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일체중생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이번 생의 어머니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보리심이 일어날 수가 없다.
공성 등의 논리들은 다양한 견해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그것을 깨우치기가 그렇게 힘들지 않지만, 보리심을 닦음은 논리적인 것보다는 신심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제 마음이 이어져온 결과이다.
그 전의 흐름을 살펴가다 보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부터임을 알 수 있고, 또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음의 시작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와 같이 시작 없는 마음에는 끝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게되면 우리가 태어났던 생도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 생에 어머니가 있는 것처럼 전생에 태생, 난생 등으로 태어났을 때도 어머니가 한 분씩 있었으며,
만일 우리가 백 번 태어났으면 백 명의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천 번 태어났으면 천명의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생을 태어나는 동안 우리의 어머니도 그 숫자만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의 어머니가 많이 있었겠지만, 한량없는 일체중생 모두가 과연 우리의 어머니였을까’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수많은 생명체로 태어났어도 태어났던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무릇 다양한 생명의 종류를 헤아릴 수 없듯이, 우리는 이미 각기 무량한 숫자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무든 중생의 숫자보다 더 많이 태어났을 것이다.
태어날 때마다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모든 중생들이 한 번씩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대지의 흙을 작은 알로 만들어서 하나씩 전생의 어머니 숫자를 세면 그 알이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그와 같이 일체중생이 자기 어머니였던 것을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데 본인이 이런 저런 생명으로 태어난 적이 없었다는 등의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아니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씩 반복해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와 같이 일체 중생이 나의 어머니 아닌 분이 없으므로 모든 중생이 나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한다.
만약 전생에 어머니였다면 알 수 있어야 하는데 단지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머니가 아니었던 중생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떠올려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일 뿐이지 일체중생은 우리의 친어머니였다.
이번 생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개로 태어나도 본인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다른 경우는 오죽하겠는가!
또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어머니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아무리 낡았다 해도 과거의 색깔도 곱고 냄새도 안 나던 그 새 옷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번 생의 어머니와 전생의 어머니들도 이와 같이 전혀 차이가 없음을 사유해야 한다.
작년에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대해서 올해도 그 은혜를 기억하는 것처럼 꾸준한 사유를 통해서 모든 중생들이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게 되면,
아주 작은 개미를 보더라도 저 개미가 어느 과거 생에 나의 어머니였고, 나의 모든 행복이 그 개미에게 달려 있었던 적도 있었음을 자세하게 마음에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모든 중생이 자신의 사랑하는 어머니나 자신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생들 하나하나가 똑같이 내게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고, 내 어머니나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 준 사람에게 느끼는 애정을 내 마음에 불러일으키면서 그 애정을 모든 중생을 향해 확장시켜야 합니다.
시작도 알 수 없이 먼 옛날부터 무한한 생애들을 윤회하는 동안 모든 중생들이 서로 관련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모든 중생들이 전생의 언젠가는 우리의 부모였을 것이고, 지금의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그들도 나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었을 것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새끼들이 홀로 먹이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어미 새는 새끼들을 날개로 감싸 안아 보호하고 먹이를 구해다 줍니다.
인간이 말하는 자비심을 어미 새가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동 자체는 분명히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새끼들은 전적으로 어미 새에게 의존하고 있어서 어미 새만이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이며 의지할 대상이며 후원자인 것처럼 대합니다.
게다가, 어미 새는 새끼들을 돌보는데 아주 헌신적이어서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마저도 기꺼이 희생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들을 향해서 그런 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수많은 전생들에 대해 숙고해 보면, 모든 중생들이 언젠가 한번쯤은 우리의 부모가 되어 능력껏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보살펴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나면, 다른 중생들에 대해 강한 공감과 감사한 마음을 기르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들에게 진정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친밀감을 느끼면, 그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와 상관없이 그들이 전생에 우리에게 베풀었던 친절함을 상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친밀감을 느낀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이 친밀감도 점차로 생깁니다.
무시(無始)의 생애들을 고려하면 모든 중생들은 어느 한 시점에서우리들의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친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다른 존재와 관련짓고 진정한 의미의 연대감을 일깨워 북돋우는 방법입니다.
후손들을 양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대부분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분명한 사실은 어머니는 자식의 안전과 성장을 보장하기 위하여 무엇이든 한다는 것 입니다.
모든 중생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여기는 것은,전생과 내생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삶의 개념에 따른 것 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의식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환생의 가능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식이란 오직 바로 앞의 의식에 기인하여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모든 존재를 여러분의 자애로운 어머니로 인식할 때,자연스럽게 여러분은 그들에 대한 친근감을 느낄 것 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애정을 일깨워야 합니다.그때 여러분은 또한 자비심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핵심은 모든 중생들을 진심으로 가깝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모든 중생들을 자애로운 어머니로 여기는 것>과<우리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근본적인 평등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인식한다면,그때 여러분의 내면에 진정한 자비심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직 그때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진정한 염원을 지니게 될 것 입니다.
★ [자비심] 일으키기 2. 모든 어머니들의 친절/보살핌/감사/은혜 기억하기
일체중생이 어머니였음을 알게 되면 어머니였을 때마다 베푸셨던 은혜를 관상해야 한다.
이번 생의 어머니를 비유로 들어 보면 처음 아기를 가져서부터 아홉 달 열흘을 당신의 뱃속에서 키우시면서 아기에게 해로울까 두려워서 자신이 먹거나 마시거나 걸어갈 때조차도 조심스럽게 행동하셨다.
그 때 어머니가 지혜롭게 키우지 않으셨다면 정법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며 지금처럼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본인의 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머니의 은혜 덕분이었다.
자식을 낳고서는 항상 조심스럽게 안고서 귀한 보석을 찾은 것처럼 좋아하시며,
따뜻한 가슴으로 감싸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키우셨다.
콧물조차도 자식이 아플까 입으로 닦아내 주시고,
나뭇잎으로 닦아낼 수 있는 똥을 행여 다칠까 하여 손으로 닦아내 주셨다.
하루만이 아니라 단 한 시간이라도 어머니가 그렇게 돌봐 주시지 않았다면 개나 새들에게 뜯어 먹혔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이가 만약 절벽에서 떨어지는 위험을 당한다면
어머니는 하루에 백 번이면 백번 다 아이의 목숨을 구하셨을 것이다.
아이에게 고통이 오면 당신이 고통을 대신 당하셨고 늦은 밤에도 아이에게 마음이 쏠려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가 없었다.
걸음마에서부터 혼자 서고 말하고 먹을 수 있는 등 지금의 그 모든 것들은 어머니의 은혜 덕분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키우기 위해서 죄를 짓기도 하고 싫은 소리도 듣는 등 갖가지 고통을 이겨내셨다.
귀하게 모은 재물로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이처럼 온 우주를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이처럼 지금의 어머니가 베푸신 것과 같이
중생들이 과거 어머니였을 때 내게 베푼 은혜를 관상해야 한다.
짐승으로 태어났을 때도 어미로서 애지중지하며 혀로 핥아서 키우셨다.
새로 태어났을 때에도 어미는 두 날개로 품고서 누가 달려들어 해치려 하면
오로지 새끼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지켰으며,
밖에서 작은 먹이밖에 찾지 못했더라도 새끼에게 먼저 주면서 키우기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 번하면서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었을 것이다.
예전에 ‘골록’이라는 지역에서 어떤 강도가 칼로 말을 베었는데 말의 배에서 새끼가 땅에 떨어졌다.
이 때 죽어가던 말 어미가 새끼를 혀로 핥으면서 감싸는 것을 보고,
그 강도는 다시는 강도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때 말의 새끼는 지금의 자신이며, 지금의 원수가 그 어미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와 같이 금생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찬가지임을 사유해야 한다.
명상중에 여러분은 다른 존재들의 친절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특히 그들이 현재의 삶이나 다른 생에서
여러분의 어머니였다는 맥락에서 그들의 친절에 집중하며,
이것은 자연히 반드시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친절에 <감사>해야 하며,
나는 반드시 그들의 <친절을 갚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하여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그 두 사람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다.
가령 비구들아,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얹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얹고 다니면서, 천 만년 동안 의복·음식·평상·침구·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 등으로 공양할 때에 그 부모가 설령 어깨 위에서 오줌과 똥을 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을 것이다.
비구들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부모의 은혜는 참으로 막중(莫重)하니라.
우리들을 안아 길러 주셨고, 수시로 보살펴 시기를 놓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저 해와 달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方便]로 보아 이 부모의 은혜를 갚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공양을 해야 할 것이요, 항상 효도하고 순종하여 그 시기를 놓지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나니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증일아함경
★ [자비심] 일으키기 3. 모든 어머니들의 친절에 보답해야 함을 깊이 사유하기
지금의 어머니가 앞 못 보는 맹인에다 정신 또한 혼미한 채 길을 헤매다 절벽으로 떨어지려 한다 하자.
그 때 만약 자식이 옆에서 보았다면 그 자식이 어머니를 구하지 않으면 누구를 구하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들은 선업과 불선업을 가릴 수 있는 눈이 없고,
찰나 찰나마다 실천을 거꾸로 하여 걸음마다 죄악을 짓고
마음을 번뇌의 삼독으로 오염시켜서 거의 미쳐 있는 상태이다.
실로 고통만이 있는 삼악도로 뛰어내리려 서 있을 때 다행히 우리는 근본 스승을 만나 대승의 귀한 법을 듣고, 선업과 불선업을 가리는 방법도 안다.
그러므로 지금 위험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짐을 져야 하며 그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임을 관상해야 한다.
한편 먹을 것이나 입는 것은 갈증이나 배고픔을 잠시 해소해 주는 것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보답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행복을 갖추게 하고 모든 고통을 버릴 수 있도록 진실로 보답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행복을 갖추게 되고 고통들은 버리게 되므로,
모든 중생들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자기 어머니가 미쳐서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어머니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원인을 치료할 방법부터 찾는 것처럼
원수에게조차도 그러한 논리로 보답해야만 한다.
★ [자비심] 일으키기 4. 모든 중생들에 대해 사랑[慈]하는 마음 사유하기
모든 중생들을 자기 가슴으로부터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중생들에 대한 자애심이다.
스승 ‘뽀또와’가 어느 노모에게 말하기를,
자애심이라는 것은 당신이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자애심을 모든 중생들을 향해가져야 한다.
여기서 크게 생각할 필요 없이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기, 은혜를 기억하기, 은혜에 보답하기,
이 세 가지를 잘하면 자애심은 저절로 우러나게 된다.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는 번뇌없는 행복이 없으며,
지금 행복이라고 하는 것도 착각이고 고통 그 차체에만 빠져있으므로
‘그들 모두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과
‘행복의 조건을 갖추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는 마음,
또 내가 그것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사유해야 한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매력이 넘치는 존재,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애지중지하고,또 제 몸의 일부분처럼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며 애정을 쏟고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애정입니다.
보통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이는 그런 애정은 자기보다 약한 처지에 있는 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자신보다도 소중한 존재를 귀중한 보물처럼 아끼는 감정,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밀감 넘치는 감정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정말로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상대를 누구보다도 가깝고 친밀하게 여기는 감정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이고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은 아주 귀중한 것이고,우리 인간이 인간다움과 인간성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사랑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받는 것을 더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 [자비심] 일으키기 5. 모든 중생들에 대해 연민[悲]하는 마음 사유하기
‘쫑카빠’ 대사께서 『보리도차제』에서 보리심을 닦는 순서를 정했을 때,
<큰 연민은 대승의 길로 들어서는 뿌리>라고 가르치셨다.
큰 연민의 특징은 처음에는 대승의 길로 확실하게 들어서게 하는 것으로써 보리심을 일으키는 뿌리이자 씨앗 같은 것이고, 중간에는 보살행을 실천함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게 하는 물과 거름 같은 것이며, 끝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 후에도 남을 위해 끊임없이 베푸는 행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열매를 수확하여 사용하는 것처럼 매우 중요하다.
보리심이 얼마나 자신에게 깊이 새겨져 있는지도 큰 연민에 달려 있다.
보살들이 각 차제에 오르는 시간도 얼마나 큰 연민을 갖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보살들이 밀교에 입문하여 빠른 길을 닦을 수 있는 것도 큰 연민의 힘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불 아궁이에 떨어질 때 부모가 가장 빠르게 건져내며,
다른 친척들은 그와 같이 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또한 부모가 얼마나 큰 연민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큰 연민을 관상할 때 백정들이 소나 양을 잡는 것을 보거나 그 상황을 떠올리면 큰 연민이 생기기 쉽다. 백정이 양을 잡을 때를 보면 양의 뒷발을 묶고 거꾸로 매달아 벗어날 수 없게 만든 다음 목숨을 위협한다. 양이 죽음의 공포에서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고 두려움의 눈물이 앞을 가려도 구해줄 자가 아무도 없다.
백정의 얼굴을 보면 더욱 무섭고 결국은 심한 고통으로 다양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양이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앞의 ‘하사도편’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양도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알고서 백정이 자리를 비우면 칼을 숨긴다.
도살장에 아직 끌려가지 않은 소나 양들이 풀을 뜯고 있으나 시간 문제일 뿐
그들도 곧 그렇게 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전생에 우리의 어머니였음을 알아 큰 연민을 일으키면서 그러한 과정을 자세하게 관상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어느 정도 관상할 수 있으면
하사도차제에서 설명한 삼악도의 고통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관상한다.
어떤 어머니는 불에 달궈져 있는 쇠판 위에 있으며,
다른 어머니는 끊는 쇳물에 삶겨지기도 하고,
어떤 어머니는 아귀로 태어나서 배고프고 목마른 고통에 헤매고 있는 것 등을 관상하면서,
모든 중생에 대한 큰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한 연민이 생기면
산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과 지금 도살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양들은
단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인 것과 같이 지금 세상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과 이미 삼악도에 떨어진 중생들과도 차이가 없음을 관상해야 한다.
이번 생의 어머니 역시 고통의 원인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서 큰 연민으로 그러한 것을 관상한다.
그러한 연민이 일어나기 힘든 중생들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따로 관상해야 한다.
예를 들면 천상계에 있는 신들에게 연민이 생기기 힘들 때
중사도에서 설명한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관상하면 그들에게도 큰 연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큰 연민이 일어나면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병에 걸릴까 염려하는 어머니가, 먹고 마실 때조차 늘 자식을 걱정하는 것과 같이 일체중생들에게 그와 같은 큰 연민이 일어나게 된다.
일체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연민은
성문, 연각들도 공통적으로 가지지만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해야겠다는 연민은
대승의 ‘특별한 연민심’만이 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일으켜야한다.
이러한 큰 연민이 일어나기 어렵더라도 물러나지 말고,
과거에 본인이 아팠을 때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서라도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더욱이 하사도, 중사도에서 본 삼악도와 윤회의 고통을 떠올린다면 큰 연민이 생길 수 있다.
⊙ 자비심이 있으면 내면의 힘이 생긴다.
자비심이 지닌 한 단면은 남을 보살피는 책임감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책임감이 자라나면, 저절로 자신감이 커집니다.자신감이 커지면 두려움이 적어지고 결단력이 생깁니다.
어려운 과제를 성취하겠다고 처음부터 결단을 내렸다면, 몇 번을 실패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목표가 분명하니까 계속해서 노력할 것 입니다.
그렇게 낙관적이고 결단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성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비심이 있으면 내면의 힘이 생깁니다.
일단 자비심이 생기면, 내면의 문이 저절로 열리며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동료 인간이나 다른 중생들과 마음에서 마음으로 안심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그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 주변의 분위기가 더 화목해지기를 바란다면,우리가 먼저 그 분위기를 위한 기초를 닦아야 합니다.
남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화목해질 기반을 우리가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그런 노력 후에도 남들이 우리를 여전히 부정적으로 대한다면, 그에 따라 대응해도 합당합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호의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라 때도 저는 서로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그 사람은 분명히 나와 같은 인간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미소와 치아와 눈망울을 보면서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것을 압니다.게다가, 감정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똑같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ㅇ르 제외하고는, 육체적인 면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습니다.머리색이 노랗거나 파랗거나 하얀것은 정말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면에서 우리가 똑같다는 것입니다.그런 확신을 갖고, 저는 다른 사람을 인류 형제로 느끼고 자발적으로 그에게 다가갑니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들도 즉시 제 태도에 따라 반응하고 친구가 됩니다.실패할 경우도 가끔 있는데, 그럴 때는 상황에 맞춰서 대응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개개의 사람들이 우리 자신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그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누구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자비심은 저절로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평화와 만족을 느끼게 합니다.자비로운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즐거운 분위기 입니다.
동물이나 새들도 안심하고 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진실한 미소를 지으십시오.진실한 미소는 자비심에서만 나옵니다.
우리가 일단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면,비폭력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폭력은 외교상으로 쓰는 상투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된 자비심을 말 합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의 행동은 종종 폭력적입니다.반면에, 마음에 자비심을 갖고 있는 사람의 행동은 비폭력적입니다.
★ [보리심] 결심하기 1. 일체 중생을 구하겠다고 확고하게 결심하기
어머니의 짐을 자식이 들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고 행복을 갖게 해 줄 짐을 내가져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는데 앞장서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가 절벽에서 떨어지려는 사람을 보고
간절하게 ‘누군가 저 사람을 구제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자애심과 큰 연민심 이 두 가지 면에서 비슷하지만
내가 그를 구하겠다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확고하게 결심하기’에 해당한다.
원래 자애심과 큰 연민은 성문 연각들에게도 있지만
확고한 결심은 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 [보리심] 증장하기 2. 이번 생에 확실하게 보리심을 증장하기
이렇게 결심했지만 자기가 그 짐을 질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지금 본인에게는 한 중생도 구제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속히 그들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며,
그러한 경지에 이르고자하는 발심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을 구할 수 있는 경지는 신들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성문, 연각, 아라한들은 더더욱 아니다.
소승의 성인들은 자신을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중생을 구제하는 힘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지는 그와 비교할 수 없으며, 하늘과 손바닥처럼 차이가 크다.
중생들의 근기와 그 생각에 따라 구제하고 베풀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도 부처님의 경지뿐이다.
하사도에서 설명한 것들을 생각하더라도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러야 만이 남을 근본적으로 도울 수 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경지에 반드시 이르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위에서 설명한 평등심으로부터 모든 중생이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여 은혜에 보답하는 것들은 남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이 된다.
자애심과 큰 연민심, 확고한 결심, 이 세 가지는 남을 위해서 베푸는 마음의 실제가 되며,
이러한 마음이 생기고 나면 마지막으로 남을 돕기 위해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발심하게 된다.
그러나 발심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길을 배워야 하며,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자애심과 큰 연민심, 확고한 결심을 하면서 관상했던 것들을 그대로 실천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왜냐하면 보리심을 닦을 수 있는 때는 이번 생보다 나은 때가 없으며,
법 중에서도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한 생에 깨달아 여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밀교수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지금의 이 몸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람림’을 사유하고 관상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여 경을 읽거나 염불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모르는 행위이다.
우리가 다음 생에 또 이런 몸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며
비록 얻더라도 대승의 가르침, 특히 『보리도차제』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므로,
이 몸이 없어지기 전에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도록 간절히 노력해야 한다.
옛날 어떤 산골에 기근이 들어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먹을거리를 조금 찾았는데 아버지가 생각하기에 이것을 나누어 먹는다면
잠시 배고픔은 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은 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가 그것을 다 먹고 그 힘으로 음식을 찾아다닌다면
가족 모두를 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 음식을 다 먹었다.
그 힘으로 아버지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섰고, 결국 가족들을 다 살려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수승한 밀교적인 수행이나
‘옴마니뻬메훔’ 진언을 한 번 외우거나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크게 발심하고서 행해야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떠한 생명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날 때
실질적인 보리심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대승의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하는 것이며,
완전한 부처님이 되는 기간인 삼아승지겁의 복을 쌓는 시작이다.
이 정도가 되면 보살이며,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밀교에 입문해서 실천한다면 완전하게 깨닫는 것이 빨라진다.
이것이 ‘일곱 가지 인과법으로 보리심 닦기’이다.
--------------두번째 보리심 수행법 -----------------
★ [자타교환] 1. 나와 남은 똑같다 : 평등함 사유하기
대보살 ‘샨디데와’의 ‘평등하게 자기와 타인을 바꾸기’로 마음 닦는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일곱 가지 인과법으로 보리심 닦기’를 실천해도 보리심이 일어날 수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평등하게 자기와 타인을 바꾸기’라는 방편을 의지해도 보리심이 일어난다.
‘평등하게 자기와 타인을 바꾸기’는 ‘까담빠’들이 주로 실천하였으며,
여기에 ‘똥렌[주고받기]’을 겸하여 수행하는 것을 ‘로죵[마음 바꾸기]’이라고 한다.
이는 자기와 타인을 평등하게 사유하기, 이기심의 허물을 다양하게 사유하기, 이타심의 장점을 다양하게 사유하기, 자기와 남을 실질적으로 바꾸어 사유하기, ‘똥렌’을 관상하기, 이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자기와 타인을 평등하게 사유하기>
처음에는 위에서 설명한 평등심에서 자애심까지의 내용을 사유하면서 관상하면 된다.
그 다음 나라고 하는 것을 매우 아끼며 애착하는 만큼 남을 보지 못하며,
이로 인해 자기와 남을 평등하게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기와 남이 그렇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 것은 누구나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와 남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장애가 되는 이기심의 허물과 이를 평등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이타심의 장점을 깊이 사유해야 한다.
여러분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존재 또한 그것을 추구합니다.
우선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하여
보다 엄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감정에서 생겨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열망은
우리가 의식적인 생명체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 열망과 함께 개체로서 나는 나의 열망을 실현할 정당한 <권리를 지닌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만일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똑같은 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으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 또한 이 근본적인 열망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의 개체로써 나의 열망을 실현할 <권리>를 지닌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들의 열망을 실현할 <권리>를 지닙니다.
우리가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평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근거에서 입니다.
⊙ 이기심/이타심 생생하게 시각화하기
# 아래의 관상법은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유사합니다. 모두 달라이라마께서 하신 설법 내용으로써, 전체적으로 읽어보시면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자신을 중심으로 오른 편에는 무한히 펼쳐진 모든 중생들을 관상하고 왼편에는 수백 명의 중생들을 관상합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을 편견 없이 관찰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다 버리고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겠습니까? 아니면 내 자신을 버리고 이 무수히 많은 이들과 함께 하겠습니까?
다시 오른쪽에는 자기 한 사람을 두고 왼쪽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두고 관찰해 보십시오. 일반적인 방식으로 결정한다면 결국 다수를 생각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방식에 적용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일입니다. 결정을 할 때, 단 하나가 됐든 수백만이 됐든, 어느 쪽이든 많은 쪽이 선택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분명하고 편견 없이 살펴보면,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금방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비현실적인지 살펴보았습니다. 무언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쏟는다면, 아마 누구나 인정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중하고 고귀한 마음입니다. 관심은 결국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고 무가치한데에다 쏟았던 관심들을 여의주(如意珠)처럼 가치 있고 소중한 데로 돌려야 합니다.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소망을 키워야 합니다. 이기적인 관심을 버리고 모든 이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의 자비심을 고양하게 되면 다양한 긍정적인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당신의 자비심이 커질수록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극복하는 힘이 강해지고 어려움을 긍정적인 상황으로 변화시키는 능력도 더 강화됩니다.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에 아주 효과적인 실행 방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이 방법에 따르면
먼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옛날의 자신을 상상하고 그 다음에 다른 모든 감각을 가진 존재들을 대표하는 집단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중립적이고 편견이 없는 관찰자로서의 제 삼자의 의견을 채택하여 이 두 집단의 가치, 이익, 중요성을 비교 평가해 봅니다.
또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안녕을 망각하는 잘못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방식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이기적인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안녕, 그들을 위한 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제 삼의 관찰자로서 당신이 누구의 이익과 누구의 안녕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지 봅니다.
자연적으로 당신은 수많은 다른 사람을 위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이타심이 더 커질수록 당신은 더욱 용감해집니다.
더 많은 용기를 느낄수록 쉽게 낙담하지 않고 희망도 잃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심은 내부 힘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내부의 힘이 강해지면 강한 결단력이 생기고 결단력으로 어떠한 장애가 있어도 성공의 가능성이 커집니다.
반면에 망설이고 두렵고 자신감이 부족하면 당신은 자주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의 씨앗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성취할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성취하기 어려워도 흔들리지 않는 결단력이 있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따라서 자비심은 성공적인 미래에도 아주 중요합니다.
샨티데바는 자신의 <입보리행론>에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중심주의의 결함을 올바로 인식하게 하고,마음 속에 생생하게 시각화하는 방법입니다.
1. 이기적인 자아
여러분은 자신의 평범한 자아, 즉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하고자기 중심주의의 결정체인 자아를 마음 속에 생생하게 그립니다.
이것은 오직 자신의 행복만 염려하는 자아이며,심지어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까지 합니다.
2. 고통받는 다수
그런 다음에 다른 한편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이렇다할 피난처도 없는 고통받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마음 속에 생생하게 그립니다.
3. 중립적인 관찰자
셋째로 여러분은 자신을 중립적인 제3자 혹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관찰자,즉 여기서 누구의 이익이더 중요한가를 평가하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중립적인 관찰자로 여러분을 객관화시키는 것은, 여러분이 자기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인식하는 동시에다른 중생들의 행복을 염려하는 것이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인가를 쉽게 인식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와같은 시각화의 결과로 여러분은 서서히 다른 존재들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고,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기 시작할 것이며,이 시점에서 여러분은 주고받기[통렌수행]의 실제적인 명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이기심/이타심, 평등한 권리
평등심 함양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지니는 결점,- 그것의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한 성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생각을 일깨우는 것의 장점에 대한 성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교함으로써 이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각자의 열망이라는 점에서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평등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포함한 다른 모든 존재들은 그 열망을 실현할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관한 한,절대적인 평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그 차이는 실로 숫자의 문제입니다.
어느 한 개인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그 사람의 이익은 단지 개인의 이익에 불과하지만,이에 비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익은 수많은 존재들의 이익입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단순히 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만일 우리가 공정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우리 자신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심지어 세간에서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들이 일반적으로 소수의 사람들 혹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이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다른 수많은 존재들의 행복이 우리 자신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할 때,우리는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다수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짓이며,
이에 비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한 사람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은 보다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이 타당하게 들린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과 다른 사람들이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며,그들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모른 척하고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그 사람과 다른 사람들은 별개가 아니며, 그들의 이익은 사실 서로 얽혀 있습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심지어 여러분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도 여러분의 삶은다른 사람들의 삶과 아주 긴밀하게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하나의 분리된 존재로 잘라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이 아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전적으로 다르고 독립적인 어떤 자아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비록 이것이 진실이기는 하지만,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쉽게 반영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진실과는 무관하게 지금까지 우리는 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무장된 "나"라는 어떤 덩어리를 키워왔습니다.
우리는 사랑스럽고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우리 존재의 핵심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으며,독립적인 실재를 지니는 개별 존재로써 우리의 실재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닙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있다는 믿음과다른 존재들의 이익을 댓가로 자신의 이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우리의 여러 생을 통하여 우리 속에 줄곧 키워 온 두가지 중요한 생각과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그것이 우리에게 그 어떤 이익이라도 가져왔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으며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시달리고 있습니다.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은 우리의 삶을 크게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촛점을 우리 자신에서 다른 존재들로......그리고 보다 넓은 세계로 옮긴다면...그리고 만을 우리가 스스로의 관점을 세계의 모든 재난과 곤경과 고통으로 돌린다면...
우리의 이 문제들의 대부분이 닦이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직/간접적인 결과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 모든 문제들은 결국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독립된 존재에 대한 믿음의 강한 결합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보다 넓은 세계로 옮길 때,우리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 입니다.
우리는 "개체로써 나는 스스로의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으로부터 그리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나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어떤 이익을 얻는가?" 하고 자문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심사숙고해 보면, 여러분의 그 대답이 "그다지 많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사실, 이와같은 자기 중심적인 믿음은 심지어 그 개인에 대해서도 고통과 불행의 원천입니다.
자, 이제 반대로 만일 여러분이 초점을 자기 자신에서 다른 존재들로 옮기고,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넓혀 그들의 행복을 염원하는 생각을 키운다면,여러분에게 스스로의 사람을 개발하고 새로운 의식의 차원으로 발돋움아흔 것을 돕는즉각적인 효과를 보일 것 입니다.
이와같이 이타심을 키우는 훈련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세속적인 관점에서도 유익하며 또한 오랜 기간을 통하여 나타나는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심지어는 즉각적인 보상이라는 점에서도 유익한 효과가 있습니다.
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비추어 볼 때,나는 이타주의를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염려할 때,그것은 당장 나를 편안하게 하며 보다 확신에 차게 한다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타심은 즉각적인 이득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자아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다른 존재들과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파악하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에 대한 성찰이 어떤 심오한 정신적 실현을 가져온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적어도 그것이 어떤 효과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어려분의 마음은 보다 개방적이고 넓어질 것은 분명합니다.어떤 것이 여러분 안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할 것 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기 중심주의에서 이타주의로,자존에 대한 믿음에서 상호의존적 생성에 대한 믿음으로 입장을 바꾼다면,아주 짧은 기간 안에도 분명히 긍정적이고 유익한 효과가 있을 것 입니다.
요약해 말하면,다음과 같은 산티데바의 글로 나의 견해를 대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더 말해야 할 무슨 필요가 있는가?그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부끄러운 행동과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한 붓다의 실천......다만, 그 둘의 차이를 직시하라.
만일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내가 나의 행복을 버리지 않는다면,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윤회의 세계에서도 결코 나는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리라.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천은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에 있으며,모든 행복의 원천은다른 중생들을 향한 마음에 있다.
⊙ 누구나 다 고통을 싫어하며, 고통을 벗어날 <권리>가 있다.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수행’은 ‘내가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처럼, 허공계의 한량없는 중생이 모두 고통을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개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우리가 행복을 원하는 만큼 다른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우리 몸에 머리 팔 다리 등 여러 가지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 다 같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몸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 보호해서는 몸의 안전 역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바라는 것도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와 남의 상황을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마치 내 몸의 한 부분처럼, 언제나 함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의 건강 역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부인권(天賦人權, Natural Right)’이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우리가 날 때부터 타고난 권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자유롭고 스스로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차이는 오직 숫자적 범위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를 둘러싼 공동체의 권리를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권리라고 말할 때는 곧 모든 중생들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또 모든 중생의 의미 안에는 이미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권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안전이 다른 이의 안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무관심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하며, 심지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앞에서 그렇게 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행복과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까? 아마 분명한 이유를 찾기가 힘들 겁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은 다른 이들의 친절과 협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이익을 챙겨주면 줄수록 여러분의 행복과 이익은 점점 자라날 것이며, 반대로 스스로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갈수록 외롭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확실한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바라다면,「입보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익보다 남들의 안위와 행복을 챙기는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나면, 남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매진하는 자세를 확실히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보리심에 대한 수행은 지혜를 얻기 위한 다양한 수행과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내 자신과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부처의 성품(佛性)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모든 현상이 실제로 공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리적인 힘을 사용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모든 고통은 무지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멸하려면, 거친 마음의 속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무지의 얼룩을 지워야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지혜가 필요한 부분을 탐구하고 수행하며, 자비심과 이타심을 끊임없이 개발해 나가다보면, 마침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불하려면 무한한 애타심을 키우고 선행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중생에게 많이 의존합니다.다른 중생이 없다면 무한한 애타심을 키우지도 못하고 성불도 못할 것 입니다.
명성, 부, 친구를 가진 것은 모두 다른 중생 덕분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중생이 없다면 모직 옷을 갖지 못합니다.양이 없으면 모직도 없을테니까요.
매스 미디어 덕분에 명성을 얻습니다.평판도 전적으로 다른 중생 덕분에 생깁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다른 것들에게 의지합니다.다른 중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용한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생긴 순간, 다른 이를 향한 부정적인 태도는 바뀌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늘 긍정적인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다른 이들을 동정하지 말고 염려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귀한 존재로 존중하고 대우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비심이 있다면 연민심이나 친밀감 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느껴야 한다.
번민에 빠졌거나 행복하지 않거나 풍요롭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행복하길 원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진정한 자비심이 생긴다.
상대방이 어떤 문제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면, 내가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될 권리가 있듯이 그에게도 똑같은 권리가 있다.
자비심은 연민과 염려가 합쳐진 것이며, 책임감이 담긴 친밀감이다.
고통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통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자세히 이해해야 한다.
고통에 대해 많이 깨달을수록,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결심 또한 단단해지는 법이다.
인간의 지성은 아주 복잡 미묘해서 때로는 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때론 우리는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서 뭐든 이룰 수 있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자기 삶이 타인의 존재와 도움, 지원에 달려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환경과 다른 생물에게도 적용된다.사실 모든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주위 환경에서 받는 도움과 지원을 깨닫지 못하면, 많은 문제와 고통이 생긴다.또 주변 환경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와 고통이 생기는 원인이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우라.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마라.
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삼가야 하는가?
상호의존성 때문이다.우리의 장래는 타인에게 달려 있다.
개인의 정신적인 행복까지도 여러 요소와 조건에 좌우된다.오늘 겪는 일은 전생의 업보뿐만 아니라 어제 벌어진 일의 원인과 영향에서 비롯된다.
우주 전체, 은하계 전체가 이런 식으로 오간다.
★ [자타교환] 2. 이기심이 모든 고통의 근원임을 사유하기
구루요가경』에서 <이기심은 고질병으로서 원하지 않는 고통이 생기는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입보리행론』에서도 <“세간의 모든 고통들은 모두가 자기만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입보리행론』에서는 “세간에서의 모든 해침이나 두려움, 고통들이 아집(我執)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처럼 큰 귀신(자아에 대한 애착)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이기심에서 출발한 것이다.
무기나 독, 귀신들의 해침, 지옥,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는 원인들도 자기만의 행복과 이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살생하거나 인색한 짓을 하고 남을 무시하는 등의 허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몸이 아프고 병이 들거나, 원수가 두렵고 타인과 다투는 등의 원인은 이기심으로 먹을 것을 조절하지 못하고 입을 것, 명예 등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허물들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부부가 다투고, 심지어 출가자들끼리 다투는 것들 모두 다 이기심의 허물이다.
이기심이 없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당신 좋을 대로 하십시오.’ 라는 마음이 있으면,
전쟁이나 다툼과 같은 허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도둑이나 강도에게 빼앗기거나, 쥐가 파먹어서 마음이 편치 않는 것조차도 이기심 때문이다.
독을 먹고 죽거나 음식이 맞지 않아서 죽는 것도
이기심으로 온갖 음식을 다 먹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지 독이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이기심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는 것 또한
전에 이기심으로 나를 이와 같이 해한 과보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심은 삼선도와 해탈의 목숨을 죽이는 백정이다.
삼독의 자루를 들고서 모든 공덕의 열매를 도둑질하는 도둑이다.
무지의 밭에 불선업의 씨앗을 뿌려서 윤회를 수확하는 어리석은 농부이다.
활과 창을 휘두르는 전쟁 중에도 나만의 이익에 골몰하는 탐욕스러운 자이다.
자기가 손해를 입는다고 스승이나 부모도 속이는 부끄러움 없는 자이다.
시작 없는 옛날부터 좋은 일을 성취하지 못하여 빈손으로 떠도는 귀신이다.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을 바라는 자이다.
높거나 자기와 비슷하거나 자기보다 낮은 것에 질투하고 비교하며 무시한다.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난하면 화내면서 세간의 모든 나쁜 점을 불러내는 자이다.
이기심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시작 없는 때부터 고통만 받게 하는 것도 이기심이다.
원수가 자신의 심장 가운데에 있는 데도, 밖에서만 원수를 물리치려고 한다.
우리가 윤회세계에서 지금까지 돌고 돌면서 고통 받은 것도 바로 이기심 때문이다.
이기심과 아집은 다르지만 ‘로죵[마음 바꾸기]’에서는 이 둘을 하나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든 죄악의 뿌리이며,
아집은 ‘나’,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며,
이기심은 나라고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모두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든 허물들은 자기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심을 없애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가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그 뿌리를 찾지 못해서 받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제부터 그 뿌리인 이기심을 제일의 원수로 보고 이를 버려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라도 된 것처럼 계속 이러한 감정의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점검해야 한다.
분석을 통해 부정적인 면을 없애고, 긍정적인 면을 키우거나 생기게 해야 한다.
그러니 마음을 분석하라.
분석적인 명상을 통해 신념과 확신을 얻으면 잠시 그것에 관해 숙고하라.
진언을 암송하라.
분석적인 명상을 한 후에는 마지막에 집중하는 명상을 하는 것이 좋다. - 달라이라마 -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던 것에서 남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전환하려면, 다양한 자신의 번뇌 망상을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즉, 번뇌 망상이 지금까지 우리를 이기심 속에 가두어 두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도록 한 것입니다.
해로운 번뇌 망상을 처음부터 막아야 합니다. 마음에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전에, 마치 자신의 소중한 집을 지키는 것처럼,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분석하여 구분하는 정지(正知)와 조심스럽게 깨어 있는 억념(憶念)으로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는 내면의 마음을 지키는 경찰과 같습니다.
이들이 마음에 있으면, 나쁜 일이나 해로운 일은 저절로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외부의 경찰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지와 억념이라는 내부의 경찰을 잃고 나면, 외부의 경찰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경찰을 피해 제 멋대로 일을 저지르는 테러범과 같습니다.
이 게송은 또 나와 남들이 항상 맞서 싸우고 있는 위험인 번뇌 망상을 제대로 인식하라고 가르칩니다. 내부의 보호자인 관찰의 힘을 잘 유지하면 집착과 분노 등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자마자 강력한 힘으로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즉, 번뇌 망상이 자신과 남들에게 끼치는 해로움을 기억함으로서 번뇌 망상은 곧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안정과 평화를 잃고, 이성과 균형을 잃고 맙니다.
번뇌 망상에는 분노, 집착, 시기, 질투, 자만, 의심, 무지 등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여섯 가지의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있으며, 더불어 스무 가지의 부차적인 번뇌인 수면번뇌(隨眠煩惱)가 있습니다.
번뇌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로운 번뇌들 안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분노와 증오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폭력적이고 악의적인 결과를 몰고 오며,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누군가가 말합니다. “오늘 난 정말 화가 나, 그래서 난 행복해! 화는 나를 착하게 해.” 이것이 말이 됩니까?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말합니다. “아, 당신은 병이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화를 내는 것이 당신의 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화는 오직 파괴적인 결과만을 몰고 올 뿐입니다.
자비심과 선한 마음을 기르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남들의 평화와 기쁨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안락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윤회하는 다양한 중생들의 가장 일반적인 마음 상태가 바로 이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다. 모든 번뇌망상의 근원이지요.
그러므로 자비심과 선한 마음을 기르려는 수행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이와 같은 번뇌의 파괴적인 속성을 이해하고, 어떻게 이러한 망상이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번뇌의 파괴적인 속성을 알고, 원치 않는 결과를 어떻게 야기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증오와 분노, 집착과 시기질투 같은 망상은 우리 안에 있는 내부의 적입니다. 망상이란 놈은 팔 다리도 없고 무기도 들지 않았으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번뇌를 일으키는 적들입니다.
망상은 우리의 마음을 속박하여 노예처럼 부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망상이 우리의 적인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냥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망상과 맞닥뜨려 무언가를 해볼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망상과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이들은 끊임없이 마음에 남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우리를 해롭게 할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은 속이는 일을 자주합니다. 교묘한 눈속임으로 우리에게 장난칩니다.
예를 들어 욕망은 우리에게 아주 믿음직스럽고 존경할 만한 친구처럼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분노와 증오도 든든한 보호자처럼 나타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해치려고 하면, 분노는 마치 멋있는 보호자처럼 치밀어 오릅니다. 강한 힘이 솟아나게 하지요.
상대방보다 약한 경우에도 분노는 여러분을 강한 것처럼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힘과 에너지에 대한 객관적인 감각을 잃게 하지요.
결국 무참하게 맞고 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분노와 같은 파괴적인 감정은 그 실체를 만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우리를 현혹합니다. 이외에도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들이 우리를 속이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완전히 드러내려면, 먼저 마음의 평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의 배반적인 속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한 번 화낸 일이 이렇게 번거롭고 힘든 일을 만드는데도 화는 끊임없이 다시 또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부정적인 마음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아주 큰 상처를 입히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거기다 끈질기기까지 하지요.
인간의 가장 좋은 특징 중에 하나는 이성(理性)입니다. 이성은 좋고 나쁜 것을 판단하게 하고, 이롭고 해로운 것을 구별하게 해줍니다.
분노와 강한 집착은 이렇게 좋은 인간의 속성을 순간에 마비시킵니다. 아주 슬픈 일이지요. 분노와 집착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점점 더 미칠 것 같이 됩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미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이성을 잃고 나면, 그때부터 모든 파괴적인 행동이 다 나옵니다.
한 번 마음이 이렇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갈피를 못 잡고 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심리 상태를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면, 거의 정신 이상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잘 다스리면 더 이상 파괴적인 일은 하지 않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게도 우리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잘 길들여져 있다면, 적들의 힘이 강하게 밀려오더라도 크게 영향 받지 않고 평온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감정에도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은 쉽게 흔들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내부에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적은 인격을 가진 외부의 어떤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적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무상한 것입니다.
순간 적이었다가도 다른 순간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까운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그러나 내부의 적인 생각과 감정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이어지는 동안은 과거에도 여러분이 적이었으며,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도 여러분의 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이 실제의 적이며, 이 적들은 우리 내부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부의 적들은 아주 위험합니다.
외부의 적이 가지는 파괴적인 잠재성은 내부의 적에 비해 한계가 있습니다. 외부의 적에게는 가끔 물리적인 방어력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두꺼운 벽을 이중 삼중으로 쌓아 요새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물론 현대의 핵무기들은 이러한 요새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주 기지를 통해 핵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전략적 방어망을 기술적으로 실현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즉 공격이 발전하면 방어도 발전하는 것이 외부의 적대 관계이며, 눈에 드러난 외부의 적은 어떻게든 막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은 다릅니다.
이 내부의 적은 진지하게 잘 살펴보지 않으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평생 확인도 한번 못해본 채 한생을 마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부의 적을 확인하든 확인하지 못하든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외부의 파괴적인 적들도 알고 보면 내적에 문제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즉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을 해소시킬 실마리인 셈입니다.
내부의 적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깊은 직관의 힘을 통하여 마음의 본성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마음은 아주 복잡한 현상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의식을 다양한 유형으로 구분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에도 아주 이롭고 유용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잠재적인 사실들을 바르고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비롯된 고통과 문제들을 과학자들처럼 하나씩 분석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내면적인 직관을 통해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실제로 이렇게 마음을 분석하고 관찰하는데 삶의 가장 큰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무지와 망상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진정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무지와 망상의 구속을 발견하였다면, 이제 거기에서 자유로운 해탈을 구해야 할 시기입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비구와 비구니 스님이라면 모든 삶을 여기에 바쳐야 합니다. 완전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스스로가 법을 수행하는데 완전히 헌신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완전한 해탈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부의 적인 번뇌와 망상은 오로지 모든 현상에 대한 궁극적인 본성을 꿰뚫는 지혜를 얻어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외부의 어떠한 무기나 물리적인 힘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바른 진리에 의지해야 합니다. 실제로 외부의 적과는 달리 내부의 적은 강력한 지혜의 힘으로 한 번 부서지고 나면 다시는 뭉치거나 돌아오지 못합니다.
⊙ 적을 존경할 정도가 되어야 보리심을 닦을 자격이 된다.
분노와 증오는 보리심(菩提心)을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가장 큰 장애입니다.
보살은 분노와 증오를 일으키는 대신에 그에 맞서 당당하게 수행합니다. 인욕(忍辱)을 수행해야 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일시에 과거의 공덕을 까먹게 하며, 미래의 해로운 원인으로 남습니다.
인내를 수행하는 사람은 이 분노와 증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먼저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에 불행과 불만이 쌓이면 이내 분노와 증오로 모든 것이 변질 됩니다. 상황과 조건에 대한 불만과 불행을 느끼는 것은 분노와 증오의 좋은 연료이자 먹이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마음의 평화를 방해받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샨띠데바 보살은 분노에 대처하고 제거해나갈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내를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충고입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잃지 않는 것>은 분노가 잃어나는 것을 막는 것이 요점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마치 좋은 먹이감이 생긴 것처럼 분노가 자라나게 됩니다.
분노는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불만과 갈증만 쌓아줄 뿐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인내를 수행하는 것과 함께, 샨띠데바 보살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수행자들은 현재의 사고를 전환하여 자비심을 키워야 합니다.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 위해 깨달으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일깨우고 증장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아직도 적들의 성공이 못 마땅한 것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면, 아직 보리심을 수행할 단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보리심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말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내가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도 남들이 그렇게 성공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행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적들에 대한 감정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면, 그때는 인욕의 바라밀을 수행할 너무나 좋은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보살의 이상인 인욕을 실천할 소중한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 결과 가장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지의 수행을 성취할 수 있는 공덕의 자량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적들은 스스로의 부정적인 행위 때문에 자신의 업만 쌓은 것일 뿐입니다.
결국 가해자는 해를 입힌 사람에게 엄청난 공덕을 쌓을 기회를 주고 자신은 그 대가로 부정적인 업을 쌓는 희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욕의 바라밀을 통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주변에 적이 있을 때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인욕의 수행으로 쌓을 수 있는 공덕의 가장 큰 공헌자입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입보리행론」에서는 적들에 대한 고마움과 자비를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적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나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만한 인욕의 수행처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 마음을 비추는 자비의 거울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진심으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적을 존경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의 적은 여러분 자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사성제를 존경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심과 보리심을 수행하는 수승한 수행자로써 여러분은 인욕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인욕을 정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여러분에게 해가 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로운 사람들만이 여러분에게 진정한 수행의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인내를 실험하지만, 스승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의 황금 같은 기회는 오직 여러분의 적만이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결론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한번 적에 대한 존경심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무한한 이타심을 개발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은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보살의 이상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대상에게도 적의를 품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비난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을 만나서도 모든 것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나를 해롭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하든 상관없이,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수행을 위한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악의에 찬 사람들을 만나도 모든 피해는 스스로 감당하고 그들이 승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오히려 화를 내거나 거칠게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시 사랑과 자비를 잃고, 흥분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런 경우 보살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보살은 사랑과 자비로 대하던 누군가가 거칠게 반응하더라도, 그들을 자신의 스승으로 보고 대합니다. 이런 좋은 수행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인내와 관용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의 자세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수행해 나갑니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보살은 인내를 바탕으로 수행합니다. 즉, 화를 내지 않습니다.
인내를 기르면 기를수록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한 정신적 바탕은 더욱 자라납니다. 인내는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수행에 큰 도움을 주는 정신적인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생활 방식 즉, 보살의 수행은 적이나 자기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따듯한 애정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존경과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수행해 나가면, 결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적이나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불행의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소리치고 화내는 대신에 애정과 감사를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 [자타교환] 3. 이타심이 모든 행복의 근원임을 사유하기
대보살 ‘산디데와’는 세간의 <모든 행복은 남의 행복을 바랄 때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처럼 우리가 귀한 몸을 얻고 부족함 없이 살거나 기쁨 등을 느낄 수 있는 것들 모두는
이타심이 그 근원이 된 것들이다.
남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서 살생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공덕의 과보로 인간으로 태어나 오래 사는 것이며, 이타심으로 보시하면서 도둑질하지 않은 과보로 부유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과
부처님께서 남을 위해서 행하시는 것의 차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부처님과 우리가 과거에 윤회의 바퀴에서 돌고 돌았던 것은 같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느 때부터 이타심으로 이기심의 허물을 모두 없애고 깨달으셨다.
우리는 윤회세계에서 이기심만으로 내가 행복했으면 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이기적인 행동보다 이타행을 했더라면 지금은 깨달아 자신의 고통을 다 없애고,
의심 없이 남을 위해 이타행을 행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기심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자기에게 고통만 따르게 하는 것이며,
이기심으로 무엇을 물리치려고 해봐야
이는 이기심 자체가 원수인 줄을 모르고 밖에서만 허우적거리는 꼴이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에 ‘빼마젠’이라는 이름의 왕으로 태어나신 적이 있었는데
나라에 전염병이 돌자 이타심으로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로히따’라는 물고기로 다시 태어났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먹어야 전염병이 다 나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 물고기로 태어날 것을 서원하여 물고기로 태어나,
그로 인해 전염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거북이로 태어나셨을 때도
바다에서 난파된 배에 있던 상인 오백 명을 등에 지고 바닷가까지 그들을 데리고 가서 구해주셨다.
왕자 ‘닝똡첸뽀’로 태어나셨을 때는
배고픈 호랑이 어미가 자기 새끼를 먹으려는 것을 보고 연민을 느껴서 자신의 몸을 보시하셨다.
그와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이타행을 하셨으나
우리는 자기만 알고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을 금방 따라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기도를 통해서라도 이런 행을 해야 한다.
이타심은 수확이 좋은 논밭과 같고 보배로운 여의주와 같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입는 것 모두가 남을 의지해서 생긴 것이며,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어머니였을 때 베푸셨던 은혜일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아니었을 때도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쌀 한줌이 생기는 것도 누군가가 땅을 갈고 씨를 뿌려 물을 주고 관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도 어떤 이가 땅을 파서 주춧돌을 세우고 벽돌과 기둥을 세우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우리가 입고 있는 옷들도 어떤 이들이 실을 잣고 베를 짜서 재단을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같이 유가구족인 인간의 몸을 얻는 것에서부터 보리심이 일어나고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도,
모두 중생들이 베푼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민의 대상, 발심의 대상, 보시하는 대상, 계를 지키는 대상, 인욕을 사유할 수 있는 대상도
모두가 중생에 대한 것이다.
이 모든 중생들 덕분에 우리의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게 깨닫는 것의 반 정도는 스승들 덕분이지만
나머지 반은 모든 생명들의 큰 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지금부터 깨달을 때까지 모든 것을 성취케 하는 여의주와 같아서
그들을 향한 이타행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자타교환] 4. 나와 남을 바꾸기 : 나 대신 남을 아껴라.
위에서 본 이기심의 단점과 이타심의 장점을 살펴서 남을 이롭게 했던 마음과 남을 무시했던 마음 두 가지의 입장을 서로 바꾸는 것을 ‘자타 바꾸기’라고 한다.
이것은 남이 자기가 되고 자기가 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이때까지 이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했거나 관심 갖지 않은 것을 거꾸로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자기를 아끼던 이기심>을 이제는 <남을 아끼는 이타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남에 대해 관심 갖지 않고 무관심했던 것을
이제부터 자신을 버리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늘리는 것으로 마음을 닦아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사유하면 실질적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예를 들면 저 산에 있을 때는 이쪽 산이 되고, 이 산에 있을 때는 저쪽 산이 되는 것처럼
자기와 남도 바꿀 수 있다.
우리 몸에 머리 팔 다리 등 여러 가지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 다 같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몸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 보호해서는 몸의 안전 역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바라는 것도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와 남의 상황을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마치 내 몸의 한 부분처럼, 언제나 함께 보호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의 건강 역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부인권(天賦人權, Natural Right)’이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우리가 날 때부터 타고난 권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자유롭고 스스로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똑 같은 권리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차이는 오직 숫자적 범위일 뿐입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를 둘러싼 공동체의 권리를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의 권리라고 말할 때는 곧 모든 중생들의 권리를 의미합니다.
또 모든 중생의 의미 안에는 이미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권리는 우리 자신의 권리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안전이 다른 이의 안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무관심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하며, 심지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그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사실만 봐도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앞에서 그렇게 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기 행복과 욕망만을 채우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무언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습니까? 아마 분명한 이유를 찾기가 힘들 겁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은 다른 이들의 친절과 협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이익을 챙겨주면 줄수록 여러분의 행복과 이익은 점점 자라날 것이며, 반대로 스스로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갈수록 외롭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잘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확실한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정으로 여러분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바라다면,자신의 이익보다 남들의 안위와 행복을 챙기는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나면, 남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매진하는 자세를 확실히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 달라이라마 -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
그 사람의 상황에 당신 자신을 과감히 대입해 보십시오.
당신이 그와 똑같은 고통을 받을 때 과연 무엇을 겪게 될 것인지 되도록 생생하게 그려봅니다. 다음과 같은 자문도 해봅시다.
1. 내 기분이 어떻지? 2. 나는 내 친지/친구들이 어떻게 대해 주기를 바랄까? 3. 내가 친지/친구들로부터 몹시 기대하게 되는 것은 뭘까?
이처럼 상대방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자아에 대한 애착은 곧장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아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해방시키고, 그 결과 당신의 자비심을 풀어놓을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방법입니다. - 소걀린포체 -
★ [자타교환] 5. 주고받기 수행하기(통렌수행)
주고받기 수행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불행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들의 애처로운 상황을 그려보는 관상(觀想)을 말합니다.
지금 당장 그러한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것까지 함께 그려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고통은 바로 이전에 지은 업(業)의 원인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지은 업이 바로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의 상황을 그려봄으로서 마침내 그들의 고통스런 상황에 진심어린 애정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들을 구하려는 급박한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짓고 있는 업이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모든 중생들의 다가올 고통의 원인과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을 제거하고 싶은 급박한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혐오감 없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그려 보는 수행입니다.
실제 이 수행은 마음에 특정한 상황과 조건을 깊은 집중의 상태로 만들어 수행의 대상을 그려 보는 특별한 수행의 방법인 관상법(觀想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훈련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대신 받는다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 충만한 행복을 주려는 적극적인 원(願)을 세워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원을 세우고, 이 수행의 두 번째 단계인 “주기(T: gTong)”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줍니다.
즉,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들, 생각과 말과 몸으로 가진 모든 것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들의 이익과 편안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관상(觀想)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랑과 연민인 자비심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들의 채워지지 않은 모든 행복을 채우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기”수행입니다. - 달라이라마 -
‘자타 바꾸기’에 의지해서 ‘똥렌’을 관상해야 한다.
이는 연민을 바탕으로 한 <받음>과 자애심을 바탕으로 한 <줌>인데,
이것이 ‘주고받기’ 수행의 기본이다.
남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행복을 주어도 도움이 될 수 없다.
1. 받기
먼저 연민을 바탕으로 한 ‘받음’ 을 살펴보면
일체중생의 모든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으로 실제의 연민을 느끼고,
삭발할 때 머리카락을 깎아내듯이 남의 모든 고통을 검은 빛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가슴에 있는 이기심에 흡수되는 것을 관상한다.
더 자세하게 하지면 불지옥의 뜨거운 고통과 그 불까지도 받아들여서
자신의 가슴에 있는 이기심의 통에 흡수되는 것을 관상한다.
순서대로 얼음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 십지보살 아래 모든 중생의 고통과 업을
본인이 받아들여서, 모든 중생의 고통과 업장이 실제로 소멸되었음을 관상한다.
이러한 타인의 고통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수용되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 고통을 받을 때 근본 스승과 부처님 두 분을 관상하지 말아야 한다.
근기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이런 수행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오후에 받을 고통을 아침에 미리 관상하고,
내일 받을 고통을 오늘 미리 받는 것으로 생각하며,
다음 달에 받을 고통, 내년에 받을 고통, 이번 생과 다음 생에 받을 고통, 세세생생의 고통을 관상하며,
그 다음에는 부모나 친척 가까운 이들에서부터
가깝지도 않고 원수도 아닌 사람들의 고통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간다.
이것이 잘 되면 원수에서 일체중생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확장시켜서 관상해야 한다.
처음부터 원수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고통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옥중생에까지 미치게 하고
가끔씩 지옥의 고통들로부터
또는 나라(국가)의 위(북쪽)에서 부터나 밑(남쪽)에서부터의 고통을 자기가 받는 것을 관상한다.
심지어는 돌에 맞는 개의 고통 등도 다양하게 관상해서 그것을 자신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 때 불안하거나 긴장되는 감정이 생기면 이는 좋은 징조이다.
이와 같이 직접 받을 수 없더라도 이러한 관상을 통해 큰 공덕을 쌓게 된다.
이러한 관상이 <익숙해지면> 남의 고통을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생긴다.
2. 주기
이제 자애심을 바탕으로 한 ‘줌’ 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체중생의 성취를 위해서 본인이 성스러운 부처님의 몸으로 변하는 것을 관상한다.
타인에게 필요한 대상으로 자신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시원한 소나기로 변해서 불지옥의 고통을 없앤다고 관상하고
그들이 유가구족인 인간의 몸을 얻어 좋은 집과 좋은 환경을 갖추어 행복하게 살며,
내 자신이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으로 변하는 것을 관상하면서 그들이 만족해하는 것까지 관상한다.
입을 것으로도 변해서 그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근본 스승으로 변하여 법문을 하며 그들이 깨닫는 것까지도 관상한다.
얼음지옥에서는 자신이 햇빛으로 변하고 따스한 옷으로 변하며,
아귀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 등으로,
축생들에게는 법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로,
아수라들에게는 인욕의 옷으로 변하고,
천신들에게는 거울, 악기, 향수, 진귀한 과일, 아름다운 옷 등으로 변한다.
중생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로 변해서 육도 중생 모두에게 준다고 관상한다.
이는 자신의 몸을 변화시켜서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공덕까지도 다 준다고 관상한다.
근본 스승과 부처님들께서는 자기 몸을 다양한 공양물로 변화시켜 올리고
스승들께서 장수하시며 하고자 하시는 일들 모두 성취하는 것을 관상한다.
이렇게 줄 때는 중생들이 행복을 바라면서도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서 자애심을 주된 바탕으로 하여 주어야 한다.
여기 ‘로죵[마음 바꾸기]’에서는 이 두 가지 관상을 마음의 의지처로 삼아
‘똥렌[주고받기]’수행을 잊지 않도록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실천해야 한다.
‘주고받기’ 이 두 가지를 호흡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방법도 있다.
똥렌의 관상이 익숙해지면 나중에 자신의 호흡을 밖으로 내쉴 때 ‘주고’,
안으로 들이 마실 때 ‘받는’ 것을 관상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지만 자주 수행하여 익숙해지면
‘자타 바꾸기’ 관상으로 보리심을 쉽게 일으키는 데 큰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된다.
1. 떠맡기
떠맡기에 대한 시각화 과정을 택하는 것은 종종 큰 도움이 됩니다.
첫째, 여러분은 고통받는 존재들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를 집중하며,그들에 대한 여러분의 자비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여마침내 여러분이 그들의 고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지점까지 강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은 실천적인 의미에서 여러분이 그들을 돕기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은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훈련이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나타낼 수 있으려면,자비심에 입각해서 여러분은 그들의 고통과 그것의 원인들,그들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 등을 몸소 떠 맡는 것을 마음 속에 생생하게 그립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부정적인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한 줄기 검은 연기로 상상하고,그 연기가 여러분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마음에 생생하게 그립니다.
2. 나누어주기
떠맡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자신의 긍정적인 속성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마음에 생생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행한 어떤 덕행들, 자신 속에 있는 긍정적인 잠재력,그리고 또한 자신이 얻었을 수도 있는 어떤 정신적인 지식이나 통찰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같은 성품이나 능력을 다른 중생들에게 보내서그 결과로 그들 또한 이러한 이점을 향유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긍정적인 속성들을 다른 존재들을 관통하여 그 속으로 침투하는 투명한 빛이나한줄기 희미한 빛으로 상상함으로써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떠맡기>와 <나누어주기>의 시각화를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명상은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물질적인 효과를 지니지는 않을 것입니다.그것은 마음에 그려 시각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을 증가시키고,그들의 고통에 대한 여러분의 공감대를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며,또한 그것은 여러분의 이기심을 약화시키는 것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른 중생들을 도우려는 이타적인 열망을 함양하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닦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열망과 함께 일어날 때, 여러분은 보리심 즉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타적인 의지를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 통렌수행방법의 자세한 설명은 아래 블로그의 통렌수행법 카테고리에 나와 있습니다.http://blog.daum.net/mahatop7
⊙ 주고받기 수행은 지속적으로 오랜세월 계속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임에 대해 명상하고,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중시하고 그들의 안녕을 위해 행동하는 경우의 긍정적인 결과에 관해 명상하며,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확신을 하게 되면, 불교의 명상에서 ‘주고받는 수행’으로 알려진 특별한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명상은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자비심과 사랑을 높이려고 특별히 마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고통, 부정적인 것들, 바람직하지 못한 경험들을 당신이 떠맡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입니다.
그 부정적인 것들을 떠맡고 당신의 긍정적인 성향, 즉 도덕적 마음 상태, 긍정적인 에너지, 부, 행복 등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그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실제로 감소하거나 당신의 마음속에 긍정적 성향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당신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켜 사랑과 자비의 감정이 더욱 높아지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이 수행을 하면 아주 효과적이고 당신의 마음과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을 수행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면 당신이 불자가 아니어도 인간의 기본적인 좋은 성향을 향상시키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 같은 정신적 변화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서양의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영적인 변화가 단기간에 발생하리라고 예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1년, 5년, 10년, 15년 후에 당신은 결국 어떤 변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이것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수행이 아주 도움된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산티데바가 저술한 책 내용 중에서 내가 인용하기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우주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봉사하고 도움을 주려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입니다.
▶ 현상(외양)과 실체는 다르니, 세속팔풍에 휘둘리지 말라.
여러분은 자비 그 자체와, 자비심을 지닌 수행자, 자비심의 대상, 이 세 가지는 마치 마술사가 만들어 낸 환상 같은 것이기에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환상 같은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성을 가진 존재로 보이는 이러한 요소가 실제로는 그러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불하려고 보리심을 수행하는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유가 중생이 자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거나,깨달음 그 자체를 자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본다면,"자성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실제로 깨달음을 얻는데 장애가 될 것 입니다.
따라서 그 반대로 보리심을 일으킨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이 성취하려는 깨달음도, 깨달음의 대상인 중생도 자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현현하는 방식과 진정한 본연의 상태가 다르다는 의미에서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에 자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성의 부정은 과거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그보다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ㅇ르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 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지 때문에 실제로는 현상에 자성이 없음에도 자성이 있다고 보는 것 입니다.
자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우리는 현상이 보이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속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번뇌에 사로잡히고 번뇌에 의해 파멸되는 것 입니다.
사람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주로 명명(이름 붙임)에 의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나타날 때는 사람들이 이름이나 용어에 의해 지칭된 힘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고, 마치 자력으로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현상이 그 자체로서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현상이 드러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현상을 분석할 때 현상의 자성이 분명하고 확고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명명된 대상을 들여다 보면 분석을 통해서는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고 카르마를 축적하는 등의 인습적인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나’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현상이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그것이 그 자체로 몸을 가지든 아니면 또 다른 형태를 가지든 상관없이, 우리가 명명된 현상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할 경우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는 현상이 마음과 몸에 나타나지만 여러분이 막상 몸과 마음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면 그때는 ‘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전체로서의 몸은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집합체에 의존해 명명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을 부분들로 해체해 살펴본다면 그 어떤 것(실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상이 객관적이고 자력으로 존재하듯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들의 방식과분석을 통해 나타난 현상들의 실상이 다릅니다.
만일 현상이 자력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스스로 존재한다면,우리의 분석을 통해 그 존재 양식이 더욱 분명해져야 할 것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상을 탐색하고 분석해 본 경험에 따르면 현상의 실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따라서 현상을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현상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과 분석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현상의 실상이 다르다는 것은 곧 그토록 확고해 보이던 것이 사실은 우리 마음의 오류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실은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현상은 환상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현상에 나타나는 방식을 아는 동시에 현상의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찰이 어떤 도움을 주겠습니까?
탐욕, 미움 등의 번뇌는 우리들이 현상에 대해서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이상의 좋음이나 싫음을 덧붙임으로써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우 분노하거나 탐내는 마음이 일어날 때는 그 대상을 매우 좋거나 매우 나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같은 대상을 본다면 우리는 일찍이 가졌던 관념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가실을 깨닫고는 허탈해 할 것 입니다.
우리가 현상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에다 좋음이나 싫음을 덧붙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 바로 지혜의 힘이고 효과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분노나 탐욕을 끊을 수 있습니다.지혜란 모든 현상에 자성이 없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아래 문장은 게송임)
여덟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모든 것이 때묻지 않게 하시고,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세속팔풍에 흔들리지 말라.>
- 이득/손해- 명성/악명- 칭찬/비방- 즐거움/괴로움
탐심 = 애착 : 순응 : 자만진심 = 증오 : 적대 : 좌절
- <이득>을 볼 때 순응하여 애착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라.- <손해>를 볼 때 좌절하거나 우울해해하지 말고, 적대하여 화도 내지 말라.
- <명성>을 떨칠 때 순응하여 자만하거나 잘난체 하지 말라.- <악명>을 떨칠 때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적대하여 화도 내지 말라.
- <칭찬> 받을 때 순응하여 자만하거나 잘난체 하지 말라.- <비방> 받을 때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말고, 적대하여 화도 내지 말라.
- <즐거움>을 얻을 때 순응하여 애착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라.- <괴로움>을 얻을 때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도 말고, 적대하여 화도 내지 말라.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본래 나라는 것은 없어서 이익을 얻은 것도 없으며, 또한 잃는 것도 역시 없다.
참된 수행자는 이타심의 함양에 이러한 세속팔풍의 생각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내 자신을 점검하고 내 생각과 감정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이타의 이상을 실천하는 가운데,문득 자신의 이타행에 우쭐해지는 자부심을 느끼면서"나는 훌륭한 수행자로구나" 라고 생각한다면,당장 세속적인 여덟가지 관심(세속팔풍)이 그의 수행을 오염시킬 것 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수행자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칭찬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면,그의 행위도 세속적인 여덟가지 관심으로 물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수행을 방해하는 세속적인 관심들이며,이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우리의 수행을 청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나를 얕잡아볼 때 의기소침해 하지 않으며,누가 나를 추켜세울 때 우쭐해 하지 않게 하소서.만일 내가 칭찬으로 즐거워한다면,그것은 곧장 나의 오만과 뽐내는 마음을 부추길 것 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의 비난에도 기쁜 마음을 지닌다면,적어도 그것은 내가 나의 결함들을 알게 할 것 입니다.
이것(위 문장은 게송임)은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집착을 떨쳐 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명상 후의 기간이 매우 중요합니다.(위 두줄 문장은 게송임)
존재의 궁극적인 본질에 대한 명상의 전체적인 요점은여러분이 현상들에 대하여 미혹되지 않고, 겉으로 보는 사물들과있는 그대로의 사물들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입니다.
존재에 대한 심원한 이해를 통하여 여러분은 현상들을 뛰어넘어훨씬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실재적인 방법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는다면,명상 후 시간 즉 여러분이 실제로 세상과 관련을 맺으며 사는 동안에도여러분은 훨씬 합당하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모든 현상들을 환영과 같이 보게 되는 것은오직 여러분들이 독립적인 실체로써 현상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와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면,실재의 환영같은 본질에 대한 자각은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 입니다.
어떤 것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 때마다,비록 그것은 독립적인 혹은 객관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여러분은 명상의 결과로 이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은 사물들이 겉보기와는 달리 실체적이거나 견실하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환영" 이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사물들을 지각하는 방식과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사이의 불일치를 가르킵니다.
모든 중생과 부처, 그리고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기쁨과 슬픔, 선과 악 등을 담고 윤회하는 이 모든 현상계가 나타나는 대로 혹은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이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단지 서로 의지하여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 그 본래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집착과 분노 같은 수많은 번뇌 망상 즉, 번뇌의 때가 잔뜩 낀 객진번뇌(客塵煩惱)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현상계의 특성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확실히 현상계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것과 슬픈 것이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이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현상계의 모든 것들이 언제나 그렇게 독립적으로 본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바른 마음을 키우는데 아주 중요한 구분입니다. 이런 구분을 통하여 남을 위한 마음을 바르게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구분이며, 그에 따른 수행의 방법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은 언제나 그렇게 같은 상황과 조건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게송의 두 번째 구절은 선과 악이라는 상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은 원인과 조건의 결합일 뿐 본래 그러한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은 단지 세속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자칫 정신적인 수행을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구분은 단지 세속적인 것으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하나의 이해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현상을 환몽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양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즉, 인간과 현상을 미세하게 관찰해 보면, 꽉 차 있는 실체가 아니라 무언가 비어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상태를 공성(空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인간이나 현상에 본래의 성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막론하고 아주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밀교에는 “환광(幻光)”이라는 의미의 용어가 있습니다. 이 용어 역시 현교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합니다.
“환(幻)”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합니다. 항상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게송에서 의미하는 것은 현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마치 본래 그러한 성품(自性)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현상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 자세하게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환(幻)”이며 환상과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유형들을 다시 세세하게 살펴보면, 본래 그러한 모습(自性)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마치 부서진 시계에는 원래 시간을 보여주던 시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 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수행에서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실제 현상에서 이것을 점검하면 모든 현상의 성품이 결국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행으로 돌아와, 모든 현상이 비추어서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되면, 존재의 궁극적인 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이전의 수행 중에 경험했던 것을 적용하여, 이 현상에는 본래 이것이라고 할만한 성품이 없다는 것을 보면서도 보이는 현상계 역시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현상 역시 꿈과 다르지 않은 환상으로 인식합니다. 즉, 환몽(幻夢)의 경험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현상의 궁극적인 존재 형식을 깨달음으로써, 공성(空性)을 깨닫고 자성(自性)이 없음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상대적인 현상은 단지 세속적으로 이름 붙인 것임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된 이 모든 현상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지울 때까지 끊임없이 수행하고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와 편견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무지와 편견이 사라지면, 윤회 속에 다시 태어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만물이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 즉 공(空)을 깨달으려면먼저 <외양>과 <실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거기엔 모순이 많다.사물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체가 매우 다르다.
공(空)이라는 것은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하지만 감각 기관과 뇌는 모든 것을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즉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
이렇듯 사물이 외양처럼 존재한다면, 분석적인 명상을 통해 더 명확해질 것이다.그러나 조사해 보면 독립적인 존재를 찾을 수 없다.
<외양>과 <실체>는 다르다.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진제와 속제 두가지 진리로써 설명한다.
사물의 실제 존재 방식을 이해하고, <외양>과 <실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를 아는 것이 실재와 외양의 불균형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다
<본문; hwp>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327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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