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

수선님 2019. 8. 25. 11:20

선정(jhāna)의 문제에 관한 고찰

Nikāya에 나타나는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관계를 중심으로 ―





1)임 승 택*


Ⅰ. 문제 제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Nikāya 경전의 하나로서 Dhammapada(法句經)가 있다. 거기에 “혜가 없는 이에게 선정은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는 이에게 혜는 없나니, 선정과 혜가 함께 있을 때 그는 실로 열반의 가까이에 있다”1)는 말씀이 있다. 선정을 내용으로 하는 ‘사마타(止)’와 혜의 발현을 기능으로 하는 ‘위빠싸나(觀)’의 상관관계를 거론함에 있어, 이와 같이 간략하면서도 분명한 해답을 주는 문구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본 고는 이 경문과 동일한 맥락에서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관련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각기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연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하는데 있어 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김재성 선생의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 또한 결국에는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밀접한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2) 그러나 위빠싸나가 행해지는 심리적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크다.3)

거기에는 물론 특정 텍스트를 바라보는 문헌학적 시각이 다르다는 점이 얼마간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방상좌부(Theravāda)’의 ‘경장(Suttapiṭaka)’ 즉 Nikāya 내에서 이러한 견해 차이를 해소할 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과연 위빠싸나는 어떠한 선정의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인가. 또한 위빠싸나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굳이 A.D. 5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개념인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의 이론을 빌어야만 하는가.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문젯거리는 결코 심각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다시말해 Nikāya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읽어 간다면 쉽사리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본 고는 바로 여기에 취의를 두고 있음을 밝힌다.



Ⅱ. 선정(jhāna)의 의의


‘선정(jhāna, =samādhi, =samatha)’4)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김재성 선생도 밝히고 있듯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안정’ 즉 ‘선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5) 나아가 “비구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비구들이여, 삼매에 든 비구는 ‘있는 그대로(yathābhūtaṃ)’ 알아차린다”6)는 인용문은 위빠싸나에 대해 선정 수행이 지니는 의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위빠싸나와 선정의 밀접한 관련성을 드러내는 문헌으로서, 필자는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과 Ānāpānasati- Sutta(安般守意經)를 거론하고자 한다. 이들 양 문헌은 남방상좌부의 수행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가히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할 것이다. 과연 어느 대목에서 선정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지 직접 확인해 본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아란냐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비어있는 곳에 가서 앉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지킴’을 확립한 후에 [앉는다.] 그는 그는 마음지켜 [숨을] 마시고, 마음지켜 [숨을] 내쉰다. 길게 마실 때에는 길게 마신다고 알아차린다. 길게 내쉴 때에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 온 몸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 ‘육체적 현상(身行)’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마시겠노라 익힌다. ‘육체적 현상(身行)’을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7)


… ‘육체적 현상(身行)’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ṁ kāyasaṅkhā raṁ) 마시겠노라 익힌다.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 기쁨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힌다. 기쁨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 즐거움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힌다. 즐거움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 ‘정신적 현상(心行)’을 느끼면서 마시겠노라 익힌다. ‘정신적 현상’을 느끼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passambhayaṁ cittasaṅkhāraṁ) 마시겠노라 익힌다.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쉬겠노라 익힌다.8)


인용문에 등장한 ‘육체적 현상(身行, kāyasaṅkhāra)’과 ‘정신적 현상(心行, cittasaṅkhāra)’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선정(想受滅定, saññāvedayi tanirodhasamāpatti)’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가라앉는다.9) 따라서 이들 현상의 ‘그침(paṭippassaddhā)’을 진행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본 대목은 사념처의 위빠싸나 수행이 선정의 상태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이들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부연하고 있다.


‘육체적 현상(身行)을 가라앉히며 마시겠노라’고 익히고,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며 내쉬겠노라’고 익힌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 긴 들숨 등은 몸에 속한다. 이들 법은 몸에 관련된 것으로 육체적 현상이다. 그러한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진정시키며, 익힌다[는 의미이다] … ‘정신적 현상(心行)을 가라앉히며 마시겠노라’ 익히고,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며 내쉬겠노라’ 익힌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 긴 들숨의 힘과 함께 하는 지각(想)과 느낌(受)은 마음에 속한다. 이들 법은 마음에 관련된 것으로 정신적 현상이다. 그러한 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진정시키며 익힌다[는 의미이다].10)


인용문의 내용은 사념처의 수행에서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중층적으로 얽혀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사념처의 위빠싸나는 ‘상카라(saṅkhārā)’의 ‘지멸(paṭippassaddhā)’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선정의 상태와 통한다는 것이다.11) 만약 사념처의 수행이 선정과 무관하다면, ‘육체적 현상(身行, kāyasaṅkhāra)’이라든가 ‘정신적 현상(心行, cittasaṅkhāra)’에 대해, ‘가라앉히면서(passambhento)’․‘소멸시키면서(nirod hento)’․‘진정시키면서(vūpasamento)’ 등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大念處經)에 기술된 ‘법에 대한 마음지킴(法念處)’의 세부항목으로서 ‘네 가지 선정(四禪)’12)에 관련한 언급이라든가, Paṭisambhidāmagga에 나타나는 ‘8가지 선정(色界四禪과 無色界四禪)’13)에 관한 내용은 사념처의 수행이 선정의 상태를 포함하는 것임을 직접 확인시켜 준다. 다시 말해서 사념처의 틀 내에서 그와 같은 선정의 상태가 발현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념처의 경문은 止觀均行이라든가 定慧雙修 등의 언명에 대해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념처의 수행 체계는 사마타적인 내용과 위빠싸나적인 내용을 공히 포함한다. 따라서 사념처에 대해 위빠싸나 일변도의 행법인 양 간주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MajjhimanikāyaCūḷavedalla-Sutta에 나타나는 바, “사념처는 곧 삼매의 근거이다”14)라는 언명 또한 이와 같은 필자의 주장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제, 과연 어떠한 선정의 상태에서 위빠싸나가 행해지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선정의 예비적 단계에서 위빠싸나가 행해짐을 나타내는 경문을 인용한다.


… 그는 공양을 마치고 난 후, 발우를 물리고서, 가부좌를 꼬고 앉는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면전에 마음지킴을 확립한 후에 [앉는다]. 그는 세간에 관련한 탐욕을 버리고서,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탐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악의와 분노를 버리고서 악의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들에게 이익이 되는 자비로움을 지녀 악의와 분노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혼침과 졸음을 버리고서 혼침과 졸음이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빛에 대한 지각(光明想)을 지니고 마음지킴(念, sato)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o)을 지녀 혼침과 졸음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들뜸(棹擧)과 악한 마음냄(惡作)을 버리고서 차분하게 머문다. 내부적으로 가라 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악한 마음냄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의심을 버리고서 의심을 극복하여 머문다. 선한 법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한다. 그는 이들 다섯 장애(五蓋)를 버리고서 마음의 번뇌가 약화되었을 때에,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벗어나, 거친사유(尋, vitakka)와 미세사유(伺, vicāra)를 지닌, 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 두 번째 선정(第二禪) … 세 번째 선정(第三禪) …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15)


그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위빠싸나란 다름 아닌 ‘마음지킴(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의 수행이다.16) 그런데 본 인용문은 그러한 위빠싸나 수행이 본격적인 선정이 발현되기 이전부터 행해지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마음지킴을 확립한 후에(satiṃ upaṭṭhapetvā)’ → ‘다섯 장애(五蓋)를 극복하고(sati-sampajañña를 통함)’ → ‘첫 번째 선정(初禪)’ → ‘두 번째 선정(第二禪)’ → ‘세 번째 선정(第三禪)’ → ‘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과정을 겪어 나가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인용문은 ‘마음지킴(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에 의한 ‘위빠싸나 수행’이 ‘첫 번째 선정’의 이전부터 행해질 수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내용은 Majjhimanikāya에서 뿐만 아니라, Dīghānikāya에서도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된다.17) 따라서 선정의 예비적 단계에서부터 위빠싸나가 가능하다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편 본격적인 선정의 단계에서 위빠싸나가 행해짐을 알리는 경문으로는, 김재성 선생이 언급한 적이 있는18) MajjhimanikāyaAnupadasutta를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련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다는 보름 동안에 걸친 ‘순서에 따른 법에 의한 위빠싸나(anupadadhammavipassanā)를 수행하였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사리뿟따의 ‘순서에 따른 법에 의한 위빠싸나’란 이러하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사리뿟따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벗어나, 거친사유(尋)와 미세사유(伺)를 지닌, 떠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 도달하여 머문다. 그러한 ‘첫 번째 선정’에는 거친사유(尋)․미세사유(伺)․기쁨(喜)․즐거움(樂)․하나된 마음(心一境性)․접촉(觸) ․느낌(受)․지각(想)․의도(捨)․마음(心)․의욕(欲)․확신(勝解)․정진(精進)․마음지킴(念)․평정(捨)․마음냄(作意) 등의 법이 있는 바, 그들 법이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anupadavavatthitā honti). 그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그들 법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evaṃ pajānāti). ‘실로 이들 법은 나에게 있지 않다가 발생한 것이다. 있고 난 후, 알게 된 것이다’라고.19)


본 인용문은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위빠싸나’가 행해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20) 필자는 이전부터 위빠싸나 수행의 원리와 관련하여, 인용문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감지되는 것(viditā)’이라는 용어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21)

위빠싸나를 행해 나갈 때, 수행자는 비단 ‘코끝’이나 ‘면상’ 따위의 직접적인 관찰대상 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에 대해서도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선정의 상태에서 위빠싸나를 행해 나가는 경우에도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인용문에 등장한 ‘첫 번째 선정’의 심리적 내용물이 그 전형적인 경우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Nikāya의 도처에서 다음과 같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존자여, 어떻게 해서 삼매수행의 닦음과 행함으로부터 마음지킴(念)과 알아차림(知)[에 의한 위빠싸나]로 나아가는가? 이러한 [선정] 안에서 비구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 vedanā)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 saññā)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尋, vitakkā)가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가]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가] 사라진다. 존자여, 이와 같이 삼매 수행의 닦음과 행함으로부터 마음지킴과 알아차림[에 의한 위빠싸나]로 나아간다.22)


두 인용문에 보이는 ‘viditā’라는 용어는 위빠싸나에 의한 혜(paññā)의 발현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특히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이 용어를 ‘조건성(緣, paccaya)’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과 결부시켜 해설하여, 일찍부터 필자의 주목을 받아 왔던 바이다.23) 그런데 바로 이 용어가 Anupadasutta에서 ‘첫 번째 선정’의 심리적 내용물과 관련되어 똑같은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감지되는 것(viditā)’은 현재적 시점에서 ‘알아차리는(pajānāti)’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정을 벗어난 후가 아니라, 그와 같은 선정의 상태에서 ‘감지되는 것(viditā)’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9단계의 선정체계(九次第定)’ 중에서, ‘첫 번째 선정(初禪)’에서부터 ‘아무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24) 따라서 위빠싸나가 가능한 선정의 상태란 곧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경지’까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定)’와 더불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定)’에서는 ‘지각(saññā)’의 기능 자체가 문제시된다. 따라서 이들 두 선정은 거기에서 출정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러한 선정 체험에 대한 반조가 가능하다. Anupadasutta에서도 이들 양자에 대해서는 똑같은 형식으로 언급하되, 앞서의 7가지 선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설하고 있다.


…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를 넘어,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에 도달하여 머문다. 그는 그 선정으로부터 마음지켜(念) 벗어난다(sato vuṭṭhahati). 그는 그 선정으로부터 마음지켜 벗어난 연후에, 이전에 소멸되었고(niruddhā) 변이되었던(vipariṇatā) 법이 있는 바, 그들 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한다(samanu passati). ‘실로 이들 법은 나에게 있지 않다가 발생한 것이다. 있고 난 후 알게 된 것이다’라고 …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을 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에 도달하여 머문다. 그는 그 선정으로부터 마음지켜 벗어난다. 그는 그 선정으로부터 마음지켜 벗어난 연후에, 이전에 소멸되었고 변이되었던 법이 있는 바, 그들 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한다. ‘실로 이들 법은 나에게 있지 않다가 발생한 것이다. 있고 난 후 알게 된 것이다’라고.25)


이미 확인했듯이, ‘아무 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 이하 7가지 선정의 심리적 내용물에 대해서는 각각의 선정 상태에서 그와 같이 ‘알아차린다(pajānāti)’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한 2가지 선정에 대해서는 그러한 상태를 ‘벗어난 연후(vuṭṭhahitvā)’에 ‘이전에 소멸한(atītā niruddhā)’ 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한다(samanupassati)’는 표현이 기술된다. 또한 ‘감지되는 것(viditā)’들이 ‘일어난다(uppajjanti)’, ‘드러난다(upaṭ ṭhahanti)’, ‘사라진다(abbhatthaṃ gacchanti)’는 언급이 일절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곧 이들 2가지 선정의 상태에서는 위빠싸나가 행해지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 소절을 간략하게 결론지우면 다음과 같다. ①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② 사념처의 체계 내에서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중층적으로 얽혀있는 구조를 지닌다. ③ 따라서 사마타를 배제한 ‘순수 위빠싸나’는 사념처의 체계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④ 위빠싸나는 ‘첫 번째 선정’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행해진다. ⑤ 위빠싸나는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 ⑥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 상태에서는 위빠싸나를 행할 수 없다. ⑦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은 그러한 선정의 상태를 ‘벗어난 연후에(vuṭṭhahitvā)’, ‘돌이켜 생각하는 것(samanupassanā)'이 가능하다.



Ⅲ. 나아감(magga)의 과정


여기에서 필자가 일컫는 ‘나아감의 과정’이란, 곧 ‘나아감(道, magga)’의 상태에 이르는 방법을 가리킨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나아감’을 체득한 이를 ‘4쌍의 8무리(四雙八輩, catasso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에 포함시키는데, 이 경지에서부터는 일반적으로 ‘거룩한 이(聖者, ariyā)’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들 ‘나아감’에는 ‘흐름에 들어섬으로 나아감(預流道)’․‘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 등이 있다.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나아감’의 경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고 있다.


‘흐름에 들어섬으로 나아감(預流道)’의 찰나, …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의 찰나, …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의 찰나, …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의 찰나, ‘봄(見)’의 의미를 지닌 ‘바른 견해(正見)’는 … ‘마음쏟음(現前解)’의 의미를 지닌 ‘바른 사유(正思惟)’는 …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를 지닌 ‘바른 삼매(正定)’는 ‘물질적 현상에 대한 탐냄(色貪)’,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음에 대한 탐냄(無色貪)’, ‘교만(慢)’, ‘들뜸(棹擧)’, ‘무명(無明)’, ‘교만의 잠재적 성향(慢隨眠)’, ‘있음에 대한 탐냄의 잠재적 성향(有貪隨眠)’, ‘무명의 잠재적 성향(無明隨眠)’으로부터 벗어난다. ….26)


이와 같이 ‘나아감(道)’의 경지는 ‘바른 견해’에서부터 ‘바른 삼매’라고 하는 팔정도의 형식으로 설명된다. 이를 통해 앞서 언급한 ‘거룩한 이’라는 호칭이 단지 몇몇 수행법에 숙달됨으로써 부여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아감’의 경지는 전인적인 성숙 혹은 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아감’의 내용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관계 문제를 고려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염두에 둘 만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이제 ‘나아감’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 본다. Nikāya 상에는 이와 관련한 언급이 무수히 반복된다고 할 수 있다.27) 그중에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전형적인 것으로서는 MajjhimanikāyaPaṭisambhi dāmagga에 등장하는 ‘아난다(Ānanda)’ 존자의 언급을 꼽을 수 있다.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 한 비구가 있어 ① 사마타(止)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觀)를 닦는다. 그와 같이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을 때 ‘나아감(道)’이 발현한다. 그는 그러한 ‘나아감’을 익히고 닦고 행한다. 그와 같이 그러한 나아감을 익히고 닦고 행할 때, 여러 얽매임(結縛)이 끊긴다. 여러 잠재적 성향(隨眠)이 소멸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②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다. …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③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다. …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④ 법에 의한 들뜸(棹擧)에 붙잡힌 마음을 지닌다. … 친애하는 이들이여, 비구, 비구니로서 나의 앞에서 ‘아라한(阿羅漢性)을 얻었노라’ 말하는 이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4가지 ‘나아감(道)’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이다.28)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사마타를 먼저 행할 수도 있고, 위빠싸나를 먼저 행할 수도 있으며, 이들 양자를 한꺼번에 행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29) 이들은 순서 상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은 ‘나아감(magga)’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아라한의 경지’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간 이 대목과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에 나타나는 해설을 근거로 이미 수차에 걸친 언급을 한 적이 있다.30) 거기에 따르면, 선정이 깊어질 때 ‘감각대상(所緣, ārammaṇa)’에 대한 ‘집중(samatha)’은 ‘감각대상’ 자체의 소멸을 초래한다. 즉 특정한 대상에 몰입되고 나면, ‘몰입된 대상’ 자체에 대한 지각이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위빠싸나를 행하면서 ‘감각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anupassī)’하다 보면, 무상․고통․무아의 특성이 드러나면서 결국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 역시 ‘감각대상’의 소멸을 의미한다. 다음의 경구는 그러한 과정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들뜸을 끊을 때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은 삼매로서 ‘감각대상’의 소멸[을 초래한다]. 무명을 끊을 때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의 위빠싸나는 ‘감각대상’의 소멸[을 초래한다]. 따라서 ‘감각대상’의 의미[에 근거하여],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한 맛이며 짝을 이루는 것이며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31)


이렇게 해서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그 순서가 다르다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는 서로 통한다. 이와 같은 Paṭisambhidāmagga의 해설은 ‘나아감(道)’에 관련한 ‘아난다(Ānanda)’ 존자의 언급에 대해,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공존할 수 있는 회통의 원리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이 내용은 앞 소절에서 이미 살펴 보았던 것으로, AnupadasuttaSaṅgītisuttanta 등에 기술된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 따위가 일어나고, 드러나고, 사라진다. …”는 표현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즉 선정의 상태에서 감지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곧 위빠싸나의 대상으로서의 ‘감각대상(ārammaṇa)’이 무상․고통․무아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소멸하는 과정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통의 원리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선정의 상태에 있을 때 온전한 위빠싸나가 행해지며, 또한 ‘나아감’의 경지가 발현되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 문제는 곧 본 소절의 주제임과 동시에, 위빠싸나에 의한 혜가 발현될 때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이해와 맞물린 중대 사안이다.

앞 소절에서 이미 결론을 내렸듯이, 위빠싸나가 행해질 수 있는 상태는 ‘첫 번째 선정(初禪)’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까지이다. 그러나 ‘첫 번째 선정’ 이전의 단계는 아직 ‘악의’와 ‘분노’ 따위의 ‘다섯 장애(五蓋)’가 제거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심리적 요건이 아직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단계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두 번째 선정)’ 이상의 경지는 ‘알아차림’의 대상으로서 ‘거친사유(尋, vitakka)'라든가 ‘기쁨(喜, pīti)'․‘즐거움(樂, sukha)' 등이 순차적으로 사라진 상태로서 그만큼 위빠싸나의 영역이 좁아진다.

이들 중에서 특히 ‘거친사유(尋)’의 원어로 제시되는 ‘vitakka'는 ‘언어적 현상(語行, vacīsaṅkhārā)’을 구성하는 요인으로서,32) 이것에 대한 ‘알아차림(sampajañña)’이 없이는 스스로의 사유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관조가 불가능하다. 즉 내면의 심리적 과정을 자각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망실된다는 의미이다.33) 따라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위빠싸나가 진행되는 경지는 ‘첫 번째 선정’의 상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사실은 앞 소절에서 언급한 Anupadasutta라든가 Saṅgītisuttanta 그리고 Paṭisambhidāmagga 등의 관련 내용에,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 지각(想)이 일어난다. … 거친사유(尋)가 일어난다. … ”는34) 인용문이 한결같이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들 경구는 위빠싸나가 진행되는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인데, 바로 거기에 다름 아닌 ‘거친사유(尋)’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안정(=samatha)’과 ‘있는 그대로에 대한 관찰(=vipassanā),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나아감(magga)’의 발현 과정을 담지해 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심리상태는 다름 아닌 ‘첫 번째 선정(初禪)’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필자의 결론은 Paṭisambhidāmagga의 다음 구절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첫 번째 선정(初禪)에는 … 거친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사유(伺)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즐거움(樂)이 수반되고, 마음굳힘(攝持)이 수반되고, 믿음(信)이 수반되고, 정진(勤)이 수반되고, 마음지킴(念)이 수반되고, 삼매(三昧)가 수반되고, 혜(慧)가 수반된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서는 … 또한 기쁨이 수반되고, 즐거움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 내지 … 혜가 수반된다. … 세 번째 선정(第三禪)에서는 … 또한 즐거움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 내지 … 혜가 수반된다. …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서는 … 또한 평정(捨)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 내지 … 혜가 수반된다.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空無邊處定),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識無邊處定), 아무 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定) 등에서도 … 또한 평정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 내지 … 혜가 수반된다.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에서는 …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에서는 …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에서는 … 흐름에 들어섬으로 나아감(預流道)에서는 …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에서는 …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 …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에서는 … 또한 거친사유가 수반되고, 미세사유가 수반되고, 기쁨이 수반되고, 즐거움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믿음이 수반되고, 정진이 수반되고, 마음지킴이 수반되고, 삼매가 수반되고, 혜가 수반된다.35)


이와 같이 ‘첫 번째 선정’과 동일한 심리적 지평에서 ‘위빠싸나’가 진행되고 또한 ‘나아감’의 경지가 설명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설은 앞 소절의 Anupadasutta에서 확인되는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세부적인 사항에서 몇 가지 차이를 보이지만, 중심적인 맥락은 흐름을 같이한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은 Paṭisambhidāmagga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Nikāya가 정착되던 당시에 일반적으로 유통되던 교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본 소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상호간에 회통이 가능한 원리를 지닌다. ② ‘거친사유’를 포함하는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위빠싸나가 진행된다. ③ ‘나아감’의 경지 또한 ‘첫 번째 선정’과 동일한 심리적 지평에서 설명된다. ④ 따라서 ‘첫 번째 선정’과 ‘위빠싸나의 경지’ 그리고 ‘나아감의 경지’는 동일한 심리 차원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⑤ 이러한 내용은 Paṭisambhidāmagga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만, 그 골자는 4부 Nikāya에도 기술되어 있다. ⑥ 이상과 같이 Nikāya에 나타나는 내용만으로도 ‘위빠싸나’와 ‘사마타’ 그리고 ‘나아감 경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Ⅳ. 남은 문제


이상과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 그리고 ‘나아감’의 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필자가 이 글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도입부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즉 “과연 위빠싸나는 어떠한 선정의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인가. 또한 위빠싸나 수행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굳이 A.D. 5세기 이후에야 등장한 개념인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의 이론을 빌어야만 하는가”하는 문제의식이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 글은 김재성 선생의 선행 연구물에 대한 반론적인 성격이 크다.

각 소절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한 항목들은 그간 이 분야에 관련된 학술적 논의에서 쟁점이 되어 왔던 사안들이다. 거기에서 필자는 거의 단정적인 어투로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이 글은 또 다른 논쟁과 반론을 일으킬 만한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그러나 Nikāya에는 여기에서 거론한 내용 이외에도 필자의 논지를 뒷받침할 만한 경구들이 많다. 그러한 까닭에 이들 쟁점에 관련한 각자의 입장은 결국 홀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서글픈(?) 예측을 미리 해본다.

글을 마치는 시점에서, Visuddhimagga의 ‘찰라삼매(khaṇikasamādhi)’에 대해 몇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김재성 선생이 Visuddhimagga의 ‘찰라삼매’를 소개․거론했던 까닭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싸나를 규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가 정리한 내용과는 그 궤도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얼마간의 의문이 남는다.

필자에게는 아직도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선 Visuddhimagga에 나타나는 찰나삼매는 극히 빈약한 용례를 보인다.36) 더구나 거기에 기술된 ‘찰라삼매’는 아직 내용적으로도 완전한 형식을 취하지 못한다. 아무리 ‘찰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구성요소(禪支, jhānaṅga)’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Visuddhi magga에는 찰라삼매의 구성요소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37)

이것은 똑같이 찰나적으로 진행되는 ‘나아감(magga)’의 경지에 대한 설명과 비교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앞 소절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Paṭisambhidāmagga 등에는 ‘아라한에 나아감의 찰나(arahattamag gakkhaṇe)’가 묘사되는데, 거기에는 한결같이 ‘나아감의 구성요소(道支, maggaṇga)’에 관련한 설명들이 뒤따른다.38) 만약 찰나삼매가 완성된 개념이었다면, 그것에 수반된 마음작용들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필자는 Visuddhimagga의 찰나삼매란 미완성의 개념으로서, 임의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렇다면 찰나삼매의 ‘구성요소’ 자체는 과연 어떠한가. Visuddhimagga에서 침묵하고 있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문맥을 근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먼저 김재성 선생께서 지적하고 있듯이, Visuddhimagga에는 ‘순수 위빠싸나’와 ‘찰나삼매’의 밀접한 관련성을 밝히는 언급이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39) 그런데 이 문헌에는 ① 순수 위빠싸나에 의한 ‘나아감(道)’, ② ‘첫 번째 선정’에 의한 ‘나아감’, ③ 잡다한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통한 ‘나아감’ 등이, 결국에는 ‘첫 번째 선정에 속한 것(paṭhamajjhānikā)’이라는40) 언급도 또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Visuddhimagga에는 동일한 테마에 대해 서로 다른 맥락으로 보여지는 언급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찰나삼매의 실제를 추정케하는 중요한 단서 또한 제공하는 것이다. 앞 소절에서 결론지은 바에 따르면, 가장 온전한 형태의 위빠싸나로부터 ‘나아감(道)’의 경지가 발현된다. 그리고 그러한 ‘위빠싸나’와 ‘나아감’이 경험되는 심리적 상태란 다름 아닌 ‘첫 번째 선정’이다. 따라서 ‘순수 위빠싸나’가 진행될 때의 심리 또한 ‘첫 번째 선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시 말해서 ‘순수 위빠싸나’가 진행될 때의 심리란, 곧 ‘첫 번째 선정’을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러한 추정은 위에서 언급한 ①②③의 내용이 결국은 ‘첫 번째 선정’에 속한다는 Visuddhimagga의 해설에 착안한 것임과 동시에, 이 글 전체를 통해 필자가 주장한 논지와도 상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Visuddhimagga의 명확한 언급이 없는 이상, 어디까지나 추정에 머물 뿐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는 찰나삼매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시도해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나삼매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Visuddhimagga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Saddhammapakāsinī의 문구를 소개해 본다.


세 가지 삼매로서, ① ‘거친사유와 미세사유를 지닌 삼매(有尋有伺三昧)’, ② ‘거친사유는 없고 미세사유만을 지닌 삼매(無尋有伺三昧)’, ③ ‘거친사유와 미세사유가 없는 삼매(無尋無伺三昧)’가 있다. 거친사유와 더불어 실천하여 거친사유를 지니고, 미세사유와 함께 하여 미세사유를 지닌, 그러한 [삼매는]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위빠싸나삼매(vipassanāsamādhi)’․‘근접삼매(upacārasamādhi)’․‘첫 번째 선정의 삼매(paṭhamajjhānasamādhi)’ 등이다. … ‘두 번째 선정의 삼매’는 그들 2가지의 ‘거친사유와 미세사유가 없는 상태’에 머무는 삼매이다. … ‘세 번째 선정’은 … ‘네 번째 선정의 삼매’는 ….41)

인용구에는 ‘찰나삼매’․‘위빠싸나삼매’․‘근접삼매’․‘첫 번째 선정의 삼매’ 따위의 용어들이 나열되고 있다. 이들 모두는 ‘거친사유와 미세사유를 지닌 삼매(有尋有伺三昧)’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동일한 지평에서 설명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찰나삼매’ 이외에 ‘위빠싸나삼매’라고 하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여 혼동을 부추킨다. 더욱이 이들 양자는 ‘거친사유와 미세사유를 지닌 삼매’에 속한 것으로만 언급되며, ‘두 번째 선정’ 이상의 상태와 관련해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찰나삼매’가 명확하게 규명되기 위해서는 ‘위빠싸나삼매’와의 차별성도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Visuddhimagga에 나타나는 ‘순수 위빠싸나(suddhavipassanā)’는 수행을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리고 김재성 선생도 또한 그와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42) 그러한 견해는 예비적인 선정을 닦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위빠싸나로서, ‘마하시 사야도’의 행법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시작하는 위빠싸나(taruṇavipassanā)’는 별도의 것으로 존재한다. 관련 문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①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이란 ‘시작하는 위빠싸나(taruṇavipassanā)’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설해진다. ②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離貪隨觀)’이란 그로부터 더욱 힘이 강해져 ‘현상(行)에 관련한 오염됨에서 벗어난 강한 위빠싸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③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이란 그로부터 더욱 힘이 강해져 ‘번뇌를 소멸한 강한 위빠싸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④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이란 ‘나아감(道)’에 가까운 것으로 ‘극히 예리한 위빠싸나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설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거기에서 ‘나아감(道)’을 얻어 철저히 알게(證智) 된다. 이와 같은 [네 번째의] 네 가지 것(捨離隨觀)은 ‘순수 위빠싸나(suddhavipassanā)’의 힘에 의한 것이라 설해진다. 다시, 앞서의 세 가지들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43)


이 인용문 Visuddhimagga의 관련 구절에 대한 해설로 여겨진다.44) 이들에 따르면 ‘순수 위빠싸나’란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paṭinissaggānu passī)’ 즉 捨離隨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매우 숙련된 상태에서만 행할 수 있는 위빠싸나이다. 따라서 ‘순수 위빠싸나’를 초보적인 단계에서부터 행할 수 있는 위빠싸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순수 위빠싸나’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paṭinissaggānupassanā(捨離隨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기술한 사항들은 아직 후대의 주석문헌을 연구해 보지 않은 필자에게 당혹감과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당혹감은 ‘찰나삼매’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감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개념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특히 현존하는 남방상좌부의 위빠싸나 수행과 관련하여,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개념에 대해 더 이상의 의혹이 증폭되지 않도록 충분한 후속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주제어: 위빠싸나(觀, vipassanā), 사마타(止, samatha), 선정(禪, jhāna), 상카라(行, saṅkhārā), 마음지킴(念, sati), 알아차림(知, sampajañña), 거친사유(尋, vitakka), 미세사유(伺, vicāra), 첫 번째 선정(初禪, paṭhamajjhāna), 아무 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 찰나삼매(khaṇikasa mādhi), 남방상좌부(Theravāda)

A Study on Jhānas



Lim, Seung Taek


The insight(vipassanā) has been said to go with the serenity(samatha) since the early Buddhism. In this study, I also have insisted that the insight and the serenity should be a pair in the practice of meditation. The meditator makes the progress of meditation through these two functional elements.

Nevertheless, there are some differences between the insight and the serenity. It is the insight that continually required until the last goal. The serenity would be used as the supporter of the insight in the limits. Therefore I would like to say that the essence of the early Buddhist practice theory lies in the insight.

The serenity can be divided into the nine stages, that is four jhānas and four samāpattis and a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When the meditator practices the insight, he leans on the four jhānas and first three samāpattis.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māpatti and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have no connection with the insight.

Therefore the meditater would be retired from nevasaññānāsaññāya tanasamāpatti and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for the practice of the insight. I have referred to this fact in confromity with Anupadasutta in Majjhimanikāya. on the basis of this reason, the insight would go with the serenity only for some time. And the first jhāna would be the main area for the practice of the insight among the seven stages of the serenity.

When the meditator reaches the deep stages of the serenity, his capacity of the insight will be reduced step by step. The serenity is to concentrate one's mind on one point, that is opposed to the capacity of the insight. That is why the insight would go with the serenity only for some time, and that the first jhāna is the main area to practice the insight.


* 동국대학교 강사.

 


1) “Natthi jhānaṃ a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mhi jhānaṃ ca paññā ca sa ve nibbāṇasantike.” Dhammapada, 372게송, p.54

 


2) 김재성, 「純觀(suddha-vipassanā)에 대하여 ― 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불교학연구회, 제10차 학술발표회 발표문, 2002, 참조.

 


3) 이와 관련하여 일부에서는 ‘네 가지 선정(四禪)’을 완성한 연후랴야 위빠싸나를 행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韓國禪學������, 1호(서울: 한국선학회, 2000); 조준호, 「위빠싸나(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보조사상������ 제16집, 2001 등 참조.

 


4) 본 고의 성격상, ‘jhāna(선정)’와 ‘samādhi(삼매)’와 ‘samatha(가라앉음)’는 일단 동일한 의미의 것으로 규정해 두고자 한다. 이것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졸고,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 ������인도철학������ 제11집, 제1호, pp.212-219 등 참조.

 


5) 김재성, 앞의 발표문, p.36

 


6) “Samādhiṃ bhikkhave, bhāvetha. Samāhito bhikkhave, bhikkhu yathābhūtaṃ pajānāti.” SN. vol.3. p.13; 김재성, 앞의 발표문, p.36 재인용.

 


7)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Dīghaṃ vā assasanto di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DN. vol.2. p.291

 


8) “......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 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ṭi 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 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 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passa sissāmīti sikkhati.” MN. vol.3. pp.82-83

 


9) “…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들어간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에 의한 ‘육체적 현상(身行)’이 그친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에 들어간 자에게는 지각과 느낌에 의한 ‘정신적 현상(心行)’이 그친다(..... catutthajjhānaṁ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ā paṭippassaddhā honti,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assa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ā paṭippassaddhā honti)” Ps. vol.1. p.99; “이와 같이 비구가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에 들어가면, 그의 ‘육체적 현상(身行)’이 소멸하고 그친다. ‘언어적 현상(語行)’이 소멸하고 그친다. ‘정신적 현상(心行)’이 소멸하고 그친다(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tassapi kāy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Vacī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cittasaṅkhārā niruddhā paṭippassaddhā)”. MN. vol.1. p.296; SN. vol.4. pp.217-218, 220, 227, 228 cf.

 


10) “kathaṁ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kāy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 dīghaṁ assāsā kāyikā, ete dhammā kāyapaṭibandhā kāyasaṅkhārā, te kāyasaṅkhāre passambhento nirodhento vūpasa mento sikkhati(p.184)..... “kathaṁ ‘passambhayaṁ cittasaṅkhāraṁ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ṁ cittasaṅkhāraṁ passasissāmīti’ sikkhati? ..... dīghaṁ assāsavasena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aṭibandhā citta saṅkhārā, te cittasaṅkhāre passambhento nirodhento vūpasamento sikkhāti(p.189).” Ps. vol.1. pp.184-189

 


11) 앞의 각주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定)’ 상태와 관련하여, ‘(육체적․정신적) 현상(行)이 그친다’라는 표현에 사용된 원어는 “saṅkhārā paṭip passaddhā honti”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고, 진정시키며 익힌다”에 사용된 원어는 “passambhento nirod hento vūpasamento sikkhati”이다. ‘paṭippassaddhā’는 일단 선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인 까닭에 과거수동분사형 어구가 사용되었고, ‘passambhento’라든가 ‘nirodhento’ 따위는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인 까닭에 현사분사형 어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인용문에는 ‘nirodhento(소멸시키다)’라든가 ‘vūpasamento(진정시키다, 억제하다)’라는 말이 추가적으로 부언되고 있다. 따라서 선정의 상태에 대한 묘사에 비해, 사념처의 수행에 대한 묘사에서 오히려 止滅의 의미가 강조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실제적인 수행의 입장에서 선정의 상태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념처의 수행이 ‘네 번째 선정(第四禪)’이라든가 ‘지각과 느낌의 소멸(想受滅定)’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바로 그들 선정의 상태를 하나의 과정으로 삼아 지향해 나가는 것임을 유추케 하는 것이다.

 


12) DN. vol.2. p.313

 


13) Ps. vol.1. pp.167-169

 


14) 관련 경구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대 비사카여, 마음의 하나됨은 곧 삼매이며, 사념처는 곧 삼매의 근거(혹은 드러난 모습)이며, 사정단은 곧 삼매의 도구이며, 그들 법을 익히고 닦고 행하는 것은 곧 삼매의 닦음이니라(Yā kho āvuso visākha cittassa ekaggatā ayaṃ samādh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Cattāro sammappadhānā samādhiparikkhārā. Yā tesaṃyeva dhammānaṃ āsevanā bhāvanā bahulīkammaṃ, ayaṃ tattha samādhi bhāvanāti)” MN. vol.1. p.301

 


15) “So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 paṭikkanto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o abhijjhaṃ loke pahāya vigatābhijjhena cetasā viharati. Abhijjhāya cittaṃ parisodheti. Byāpādapadosaṃ pahāya abyāpannacitto viharati sabbapāṇabhūtahitānukampī. Byāpādapadosā cittaṃ parisodheti. Thīnamiddhaṃ pahāya vigatathīnamiddho viharati ālokasaññī sato sampajāno. Thīnamiddhā cittaṃ parisodheti. Uddhaccakukkuccaṃ pahāya anuddhato viharati ajjhattaṃ vūpasantacitto. Uddhaccakukkuccā cittaṃ parisod heti. Vicikicchaṃ pahāya tiṇṇavicikiccho viharati akathaṅkathī kusalesu dham mesu. Vicikicchāya cittaṃ parisodheti. So ime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dutiyaṃ jhānaṃ1 upasampajja viharati.... tatiyaṃ jhān aṃupasampa jja viharati.....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MN. vol.1. pp.181-182; MN. vol.1. pp.269-270; MN. vol.1. pp.346-347; MN. vol.1. p.412; MN. vol.1. p.522; MN. vol.3. pp.4-5; MN. vol.3. pp.35-36; MN. vol.3. pp.135-136 등.

 


16) “vipassana는 다름 아닌 sati-sampajañña 수행이다. …”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韓國禪學������, 제1호(서울: 한국선학회, 2000), p.343; 졸고, 「위빠싸나의 이론과 실제」, 전강련 불교학술대회논집, 2002, pp.76-84 등.

 


17) DN. vol.3. p.49

 


18) 김재성, 앞의 발표문, p.39

 


19) “Sāriputto bhikkhave, addhamāsaṃ anupadadhammavipassanaṃ vipassati. Tatridaṃbhikkhave, sāriputtassa anupadadhammavipassanāya hoti. Idha bhik khave, sāriputt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majja viharati. Ye ca paṭhame jhāne dhammā vitakko ca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o vi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tyāssa dhammā vidit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So evaṃ pajānāti: evaṃ kira 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MN. vol.3. p.25

 


20) 이러한 필자의 언명과 관련하여, Aṅguttaranikāya의 다음 구절은 충분히 참조할 만한 것이다. 소개하는 부분은 주지하는 바, 사념처의 위빠싸나 중에서 ‘마음에 대한 마음지킴(心念處)’과 일치하는 것이다. “… 내부적으로 집중된 마음에 대해 나의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밖으로부터 산만해진 마음에 대해 나의 마음이 밖으로부터 산만해져 있다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에게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尋)’가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 (Ajjhattaṃ saṅkhittaṃ vā cittaṃ ajjhattaṃ me saṅkhittaṃ citt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Bahiddhā vikkhittaṃ vā cittaṃ bahiddhā me vikkhittaṃ citt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AN. viol.4. pp.32-33

 


21) 졸고,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 들숨․날숨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pp.100-103 참조; 졸고, 「사띠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 보조사상연구원 제39차 학술발표회, 7월 자료집 등 참조.

 


22) “Katamā cāvuso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 tati? Idhāvuso bhikkhun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 thaṃ gacch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Ayaṃ āvuso samādhibhāvanā bhāvitā bahulīkatā satisampajaññāya saṃvattati”. DN. vol.2. p.223; AN. viol.2. p.45; AN. viol.4. p.168 cf; SN. vol.5. pp.180-181 cf;

 


23) 이 부분과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의 해설을 옮겨 본다.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 감지되는 것으로서 거친사유(尋)가 일어난다. … ‘무명의 일어남(集)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緣)에 의한 일어남(paccaya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vidito hoti). …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dīghaṁ assāsapassāsavasena cittassa ekaggataṁ avikkhepaṁ pajānato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ṁ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avijjāsamudayā vedanāsamudayo’ ti paccayasamudayaṭṭhena ve danāyauppādo vidito hoti..... ‘avijjānirodhā vedanānirodho’ ti paccayanirodhaṭ ṭhena vedanāya atthaṅgamo vidito hoti,.... ) Ps. vol.1. pp.178-179

이와 같은 Paṭisambhidāmagga의 해설은 일차적인 위빠싸나 관찰의 대상으로서 ‘코끝’ 혹은 ‘면상’에 대해 ‘마음지킴을 확립하고난 후(satiṃ upaṭṭhapetvā)’에 진리가 체득되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용어는 ‘감지되는 것(vidita)’인데, 이것의 원어인 ‘vidita’는 동사원형 ‘√vid(보다, 알다, 경험하다)’에서 기원한 말로서, 과거수동분사․단수(혹은 복수)․주격의 문법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 의해 수식을 받는 ‘느낌’․‘지각’․‘거친사유’ 따위는 수행자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이 없이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조건(緣, paccaya)’에 의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감지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지킴(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에 의한 위빠싸나 수행이 단순하게 마음의 ‘평정(samatha)’만을 의도하는 것이라면, 일차적인 관찰대상 즉 ‘코끝’이라든가 ‘배의 움직임’ 따위에 대해 집중된 상태에만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낌(受)’ 따위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된다(viditā honti)’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곧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일어남(paccaya 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는 내용이 곧 이를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Paṭisambhidāmagga의 해설은 사념처의 체계 안에 이들 전 과정을 일관된 틀로써 엮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24) 그러나 ‘감지되는(viditā)’ 현상들은 선정이 깊어짐에 따라 차츰 감소되는 추세를 보인다. 즉 ‘첫 번째 선정’ 상태의 심리적 내용물은 거친사유(尋)․미세사유(伺)․기쁨(喜)․즐거움(樂)․하나된 마음(心一境性)․접촉(觸)․느낌(受)․지각(想)․의도(捨)․ 마음(心)․의욕(欲)․확신(勝解)․정진(精進)․마음지킴(念)․평정(捨)․마음냄(作意) 등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두 번째 선정’에서는 이들 중에서 ‘거친사유’와 ‘미세사유’가 배제되고, ‘세 번째 선정’에서는 다시 거기에서 ‘기쁨’이, 그리고 ‘네 번째 선정’에서는 ‘즐거움’이 배제된다. 이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空無邊處定)’․‘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識無邊處定)’․‘아무것도 없는 경지(無所有處定)’ 등도 대략 ‘네 번째 선정’과 동일한 심리적 지평에서 설명된다. MN. vol.3. pp.25-28

참고적으로 맨 마지막의 ‘아무것도 없는 선정’에 관련한 문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대한 지각․하나된 마음․접촉․느낌․지각․의도․마음․의욕․확신․정진․마음지킴․평정․마음냄 등이 있는 바, 그들 법이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 그에게 ‘감지되는 것’으로서 그들 법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진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 … (Ye ca ākiñcaññāyatane dhammā ākiñcaññāyatanasaññā ca cittekaggatā ca phasso vedanā saññā cetanā cittaṃ chando adhimokkhaṃ vi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 tyāssa dhammā anupadavavatthitā honti. Tyāssa dhammā vidit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So evaṃ pajānāti....)” MN. vol.3. p.28

 


25) “ākiñc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ati.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t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evaṃ kira 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nevasaññān 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Paññāya cassa disvā āsavā parikkhīṇā honti. So tāya samāpattiyā sato vuṭṭhahitvā ye te dhamm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e dhamme samanupassati: 'evaṃ kira me dhammā ahutvā sambhonti, hutvā paṭiventī'ti.” MN. vol.3. p.28

 


26) “sotāpattimaggakkhaṇe..... sakadāgāmimaggakkhaṇe.... anāgāmimaggakkhaṇe.... arahat tamaggakkhaṇe dassanaṭṭhena sammādiṭṭhi.... abhiniropanaṭṭhena sammāsaṅkappo.... avikhepaṭṭhena sammāsamādhi rūparāgā arūparāgā mānā uddhaccā avijjāya mānānusayā bhavarāgānusayā avijjānusayā vuṭṭhāti....” Ps. vol.1. pp.69-70

 


27) 예컨대 Dīghānikāya(vol.2. pp.314-315)에 나타나는 것으로,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四念處)를 7년 동안 행한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가 기대되거나],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이 기대된다](Yo hi koci bhikkhave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e evaṃ bhāveyya sattavassāni, tassa dvinnaṃ phalānaṃ aññataraṃ phalaṃ pāṭikaṅkhaṃ diṭṭheva dhamme aññā. sati vā upādisese anāgāmitā)”는 경문 또한 ‘나아감(magga)’과 ‘성취(phala)’를 얻는 방법의 일종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28) “Idha āvuso bhikkhu samatha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eti. Tassa samatha pubbaṅgamaṃ vipassanaṃ bhāvayato maggo sañjāyati. So taṃ maggaṃ āsevati bhāveti bahulīkaroti. Tassa taṃ maggaṃ āsevato bhāvayato bahulīkaroto saññojanā pahīyanti. Anusayā vyantīhonti. Puna ca paraṃ āvuso bhikkhu vipassan āpubbaṅgamaṃ samathaṃ bhāveti,...... Puna ca paraṃ āvuso bhikkhu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Puna ca paraṃ āvuso bhikkhuno dhammuddhaccaviggahītaṃ mānaṃ hoti.... Yo hi ko vi āvuso bhikkhu vā bhikkhunī vā mama santike arahattappattiṃ vyākaroti, sabbo so imehi catūhi maggehi, etesaṃ vā aññatarenāti.” AN. vol.2. p.157; Ps. vol.2. pp.92

 


29) 그러나 맨 마지막의 “④법에 의한 들뜸에 붙잡힌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Saddhammapakāsinī(Paṭisambhidāmagga- Aṭṭhakathā, p.584)에 “메마른 위빠싸나(乾觀)를 행하는 이는 아라한에 이르기 위해 법에 의한 들뜸을 먼저 행한다.(sukkhavipassakassa hi arahato dhammuddhacca pubbaṅgamaṁ)”는 구절이 나오는 바, ‘법에 의한 들뜸에 붙잡힌 마음(dhammud dhaccaviggahitaṃ mānasaṃ)’이 ‘법에 의한 들뜸의 먼저 행함(dhammuddhacca pubbaṅgamaṁ)’으로 바뀌어 있음에 주목한다. 거기에서 ‘먼저 행함(先行, pubbaṅ gama)’이라는 말은, ‘법에 의한 들뜸’의 이후에 인용문의 ②와 ③의 사마타가 개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된다면 ④의 방법은 실제적으로 ②의 방법과 동일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30) 졸고,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 들숨․날숨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청구논문, pp.135-139; 졸고,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 ������인도철학������ 제11집, 제1호, pp.228-233 등.

 


31) “uddhaccaṁ pajahato cittassa ekaggatā avikkhepo samādhi nirodhārammaṇo, avijjaṁ pajahato anupassanaṭṭhenavipassanā nirodhārammaṇā. iti ārammaṇaṭṭhena samatha vipassanā ekarasā honti, yuganandhā honti, aññamaññaṁ nātivattantīti.” Ps. vol.2. p.97

 


32)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 들어간 자에게는 ‘거친사유(尋)’와 ‘미세사유(伺)’에 의한 ‘언어적 현상(語行)’이 그친다(dutiyajjhānaṁ samāpannassa vitakkavicārā vacī saṅkhārā paṭippassaddhāhonti)” Ps. vol.1. p.99

 


33)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거친사유’와 ‘미세사유’에 대한 Saddhammapa kāsinī의 해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친사유(尋)’란 사유한다는 것이며, ‘거친사유’란 사유함이며, ‘추론’이라 불리우는 그것이다. 그것에 의해 마음이 의지하는 바(對象) 안에서 ‘맴도는 것’이 ‘미세사유(伺)’이며, ‘배회하는 것’이 ‘미세사유’이며, ‘따라 다니는 것’이라 불리우는 것이 [미세사유이다](vitakketīti vitakko, vitakkanaṁ vā vitakko, ūhananti vuttaṁ hoti. ārammaṇe tena cittaṁ vicaratīti vicāro, vicaraṇaṁ vā vicāro, anusañcaraṇanti vuttaṁ hoti).” PsA. p.80

 


34) 앞 소절에서 살펴 보았던 바, ‘감지되는 것(viditā)’의 내용으로서 느낌(受)․지각(想)․거친사유(尋)를 동일한 패턴으로 거론하는 경우는 MN. vol.3. p.25; DN. vol.2. p.223; AN. viol.2. p.45; AN. viol.4. pp.32-33; AN. viol.4. p.168; SN. vol.5. pp.180- 181; Ps. vol.1. pp.178-179 등이다.

 


35) “paṭhamassa jhānassa..... vitakkasampannañ c’eva hoti vicārasampannañ ca pītisam pannañ ca sukhasampannañ ca cittassa adhiṭṭhānasampannañ ca saddhā sampannañ ca viriyasampannañ ca satisampannañ ca samādhisam pannañ ca paññāsampannañ ca.....

dutiyassa jhānassa,.... pītisampannañ c’eva hoti sukhasampannañ c’eva cittassa adhiṭṭhānasampannañ ca…pe…paññāsampannañ ca.... tatiyassa jhānassa..... sukhas ampannañ c’eva hoti cittassa adhiṭṭhānasampannañ ca.... pe.... paññāsampannañ ca..... catutthassa jhānassa.... upekkhasampannañ c’eva hoti cittassa adhiṭṭhān asampannañ ca.... pe..... paññāsampannañ ca..... ākāsānañcāyatanasamāpattiyā, viññāṇañcāyatanasamāpattiyā, ākiñcaññāyatana samāpattiy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 asamāpattiyā ko ādi,..... upekkhāsam pannañ c’eva hoti cittassa adhiṭṭhānasampannañ ca…pe…paññāsampannañ ca.

aniccānupassanāya.... dukkhānupassanāya..... anattānupassanāya,..... sotāpatti maggassa, sakadāgāmimaggassa, anāgāmimaggassa, arahattamaggassa..... vitakkasampannañ c’eva hoti vicārasampannañ ca pītisampannañ ca sukhasampannañ ca cittassa adhi ṭṭhānasampannañ ca saddhāsampannañ ca viriyasampannañ ca satisampannañ ca samādhisampannañ ca paññāsam pannañ ca.” Ps. I, pp.168-170

 


36) 필자가 검색한 바에 따르면 ‘khaṇikasamādhi’라는 용어는 Visuddhimagga에 단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참고적으로 Visuddhimagga에는 ‘samādhi’라는 용어가 무려 325차례 이상 언급된다.

 


37) Visuddhimagga에는 ‘khaṇikasamādhi’와 연관된 용어로서 ‘찰라적으로 하나된 마음(ekacittakkhaṇika)’이라든가, ‘찰라적인 마음집중(khaṇikacittekaggatā)’ 등이 3번 가량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ekacittakkhaṇika’라든가 ‘khaṇikacit tekaggata’ 따위는 엄밀히 말해서 ‘선정의 구성요소(jhānaṅga, 禪支)’를 이루는 일부의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38) 이와 같이 찰나 지간에 일어나는 심리적 내용을 묘사하는 대목은 Paṭisambhidā magga에 약 200번 가량 발견되며, Visuddhimagga에서도 약 100회 정도 검색된다.

 


39) “止行者(samathayānika)에게는, 近行定과 安止定이라는 定이 없이는, 또 한편 [觀行者(vipassanāyānika)]에게는 刹那定이 없이는, 다시 [止行者와 觀行者] 양자에게 [無相․無願․空이라는 三]解脫門이 없이는 出世間을 얻을 수 없다(samathayānikassa hiupacārappanāpabhedaṃ samādhiṃ itarassa khaṇikasamādhiṃ ubhayesam pi vimokkhamukhattayaṃvinā na kadāci pi lokuttarādhigamo sambhavati. ten' āha sa mādhiñ c'eva vipassanañ ca bhāvayamāno ti)” Vism p.3, 김재성, 전게문 p.42 재인용.

 


40) “순수 위빠싸나 수행자가 위빠싸나를 실천하여, 선정의 기초를 닦지 않고서 증득을 얻어 도달한 ‘나아감(道)’도, ‘첫 번째 선정’의 기초를 닦고서 도달한 ‘나아감’도, 잡다한 현상에 대해 경험하고 난 후, 발생한 ‘나아감’도 ‘첫 번째 선정’에 속한다(vipassanāniyamena hi sukkhavipassakassa uppannamaggo pi samāpattilābhino jhānaṁ pādakaṁ akatvā, uppannamaggo pi paṭhamajjhānaṁ pādakaṁkatvā, pakiṇṇa kasaṅkhāre sammasitvā, uppāditamaggo pi paṭhamajjhānikā va honti).” Vism. pp.666-667

 


41) “tayo samādhīti savitakko savicāro samādhi , avitakko vicāramatto samādhi, avitakko avicāro samādhi. sampayogavasena vattamānena saha vitakkena savitakko, saha vicārena savicāro. so khaṇikasamādhi, vipassanāsamādhi, upacārasamādhi, paṭhamajjhānasamādhi.... dutiyajjhānasamādhi, tadubhayavirahito avitakko avicāro samādhi,... tatiyajjhānādi,... catutthajjhānasamādhi.... ” PsA. p.125

 


42) 김재성, 앞의 발표문 p.40; 더불어 주 23번에 나타나는 Visuddhimagga의 원문 참조.

 


43) “ettha ca ‘aniccānupassī’ti taruṇavipassanāya vasena vuttaṁ, ‘virāgānupassī’ti tato balavatarāya saṅkhāresu virajjanasamatthāyavipassanāya vasena, ‘nirod hānupassī’ti tato balavatarāya kilesanirodhanasamatthāya vipassanāya vasena, ‘paṭinissag gānupassī’ti maggassa āsannabhūtāya atitikkhāya vipassanāya vasena vuttanti veditabbaṁ. yattha pana maggopi labbhati, so abhinnoyeva. evamidaṁ catukkaṁ suddhavipassanāvasena vuttaṁ, purimāni pana tīṇi samathavipassanāvasenāti.” PsA. pp.504-505

 


44) Saddhammapakāsinī의 인용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Visuddhimagga에 나타나는 관련 구절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 그와 같이 [길고 짧은 숨에 의한] 두 가지 종류의 ‘버리고 따라가 보는 법(捨離隨觀)’을 갖추고서, [숨을] 마시거나 내 쉴 때 버리고 따라가며 보면서 ‘마시겠노라 혹은 내쉬겠노라’ 익힌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들 네 번째의 넷은 ‘순수 위빠싸나(純觀)’의 힘에 의한 것이고, 다시 앞서의 세 가지 것들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겹의 네 가지 것에 의한 16항목의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에 의한 닦음을 알아야 한다. … (...tāya duvidhāya pi paṭinissaggānupassanāya samannāgato hutvā assasanto passasanto ca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i passasissāmī ti sikkhatī ti veditabbo. idaṁ catutthacatukkaṁ suddhavipasānā vasen' eva vuttaṁ. purimāni pana tīṇi samathavipassanā vasena. evaṁ catunnaṁ catukkānaṁ vasena soḷasavatthukāya ānāpānasatiyā bhāvanā veditabbā...)” Vism. pp.291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130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