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각 <宗要序>에서 본 현실관
한 종 만*
머리말
원효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살면서 독창적인 불교적 세계관을 전개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른 학승들은 인도나 중국에 구법을 해서 불교를 연구하였지만 그는 중국에 가는 도중 스스로의 깨침에 따라 되돌아와 이 땅에서 진리를 깨쳤고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고 스스로가 실천한 위대한 선각자이다.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참 길을 찾는다면 민중의 괴로움을 속속들이 잘 아는 원효의 혼을 되새겨서 그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가 행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살길을 찾는 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효가 불교의 여러 경전의 내용을 집약해서 밝힌 각 종요의 序를 자료로 해서 그의 사상을 밝힌다. 원효는 여러 경과 논의 집약인 종요를 밝히고 그 序를 썼다. 여러 경론의 종요서이지만 여기에는 일맥 상통한 원효의 기본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도가 없으면서 도 아님이 없다.(無道而無非道)
주함이 없으면서 주하지 아니함이 없다.(無住而無不住)
여인 바가 없는 고로 여의지 않는 바가 없다.(無所離故無所不離)
이른 바가 없는 고로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無所到故無所不到) (열반경종요서)
법이 없으면서 법 아님이 없다.(無法而無不法)
문이 아니면서 문 아님이 없다.(非門而無不門)
드는 바가 없는고로 들지 아니한 바가 없다.(無所入故無所不入)
얻은 바가 없는 고로 얻지 아니한 바가 없다.(無所得故無所不得) (화엄경소서)
이가 없는 지극한 이이다.(無理之至理)
그러함이 없는 큰 그러함이다.(不然之大然) (기신론 별기)
체가 있지 않는 고로 실체가 아니다.(非有體故非實)
체가 없지 않는 고로 허가 아니다.(非無體故非虛)
진제가 아닌 고로 하나로 같음이 아니다.(非眞諦故非如)
속제가 아닌 고로 다름이 아니다.(非俗諦故非異) (법화경종요)
파함이 없으면서 파하지 아니함이 없다.(無破而無不破)
세움이 없으면서 세우지 아니함이 없다.(無立而無不立) (금강삼매경론소)
가히 도라 할 수 없는 고로 가히 써 유심으로 행할 수 없다.(不可道故不可以有心行)
가히 문이라 할 수 없는 고로 가히 써 행해서 들어감이 없다.(不可門故不可以有行入)
도가 없는 도는 도 아님이 없다.(無道之道 斯無不道)
문이 없는 문인즉 문 아님이 없다.(無門之門 則無非門) (본업경소서)
하는 바가 없는 고로 짓지 아니한 바가 없다.(無所爲故 無所不作)
논할 바가 없는 극이므로 말하지 아니 한 바가 없다.(無所論極 無所不言)(해심밀경소서)
보인 바가 없는 고로 보이지 않는 바가 없다.(無所示故無所不示) (대혜도경 종요)
원효는 불교의 주요 경전을 통독하여 그 정신과 핵심을 잡아서 종요를 지었다. 각 종요에는 서가 있다. 종요의 서는 그의 정신과 사상의 핵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각 종요의 서를 통해서 원효의 현실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각 종요서에는 앞에서 밝힌 부정과 긍정의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곧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참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집착을 떠나서 보면 현실 그대로가 참 모습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집착만 버리면 모두가 그렇게 해야 된다는 논리이다.
1. 열반경종요서에서 본 현실관
열반경종요서에 의하면 어리석은 마음으로 도라고 규정한 것은 도의 참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서 보면 현실 그대로가 도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음으로 파악된 현실의 규정을 일단 부정한다. 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공의 원리이다. 대체적으로 불교의 모든 경론에서 이 원리를 강조하였다. 현실을 일단 부정하는 불교의 참 뜻을 알아야 한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지고 현실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비추면 현실 그대로가 참 모습인 것이다.
불교의 사상사에서 보면 현실을 부정하는 사상 체계가 너무나 강조되어 불교를 허무성으로 이해하게 되자 화엄 천태등의 사상 체계가 일어나 현실 긍정의 면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면 불교의 참뜻은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해서 일단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지 부정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원효는 불교의 진리를 자각해서 불교 원리에 바탕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의 깨침에 의한 사상 체계를 이루고 있다.
무도이無道而 무비도無非道의 사상 체계는 불교적 원리일 수도 있지만 노장적인 원리일 수도 있다. 그는 현실을 보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진리를 철견하는 혜안이 되기를 바란다. 혜안으로 보는 세계는 현실 그대로가 진리의 참 모습이다. 현실을 진리의 참 모습으로 보게 하는 것이 원효의 참 뜻일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부정한 것이지 현실 자체를 무조건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정에 중점을 두느냐 긍정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불교를 이해하는 눈이 달라진다. 부정은 긍정을 전제한 것이다. 오히려 부정이 바로 긍정인 것이다. 부정을 방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원리적으로 알았을 때 불교의 참 뜻을 알기 어렵게 된다. 원효는 無道의 방법을 들어 無非道의 참 뜻을 드러냈다. 이는 불교의 원리임과 동시에 원효 사상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아서는 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가르쳐 마음의 눈을 뜨게 해서 현실 그대로를 진리의 참 모습으로 보게 한 것이다.
주착하는 마음이 없어야 참 마음이 될 수 있고 주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어느 곳 어느 일에나 쓰는 그 마음이 참 마음인 것이다. 주착된 마음은 참 마음이 아니라고 주착된 현실의 마음을 일단 부정한다. 불교에서는 주착해서 분별하는 마음을 식識이라 하고 참 마음을 지智라고 한다.
그러나 지는 식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주착하는 바만 없으면 식이 바로 지인 것이다. 이를 유식학에서는 전식성지轉識成智라 한다. 식의 주착성을 전환시켜 반야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식을 바꾸어서 지를 이룬다고 해서 식과 지의 근본적인 자체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다만 식의 주착하는 작용이 쉬어지면 그대로 반야지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식을 현실적이라면 지는 근본적이다. 식과 지는 한 마음인 것이다. 다만 주착해서 분별함을 식이라 이름하고 주착하지 않고 참 마음 그대로 작용함을 지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마음이 주착한 바만 없으면 바로 참 마음인 것이다. 이렇게 원효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마음을 주착하는 바만 없으면 모두가 참 마음이라는 것이다. 곧 무주이無住而 무불주無不住인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약동하는 마음을 다만 주착하는 바만 없게 하여 참 마음으로 발현시키는 것이다.
無道而 無非道의 도를 이렇게 밝힌다. 이 도는 지극히 고요하면서 지극히 크게 외친다. 지극히 크게 외치는 고로 허공에 가득 차 울려 쉼이 없고 지극히 고요한 고로 십상十相을 원리遠離하여 진리의 참 모습에 함께 하고 지극히 먼 곳까지 미치는 고로 천겁을 다하도록 끊임이 없고 지극히 가까운 고로 말 잊음으로 찾아 일념으로 스스로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지근至近 지원至遠하게 우주에 충만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도가 우주에 충만해 있음도 어떠한 근본을 이룬다는 의미로도 해석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의 도의 밝힘은 도를 깨친 마음에 나타난 도의 지근성을 강조한 듯이 보인다. 도는 지극히 가까운 데 있으면서 한 생각으로 깨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을 보는 눈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밝혀 주는 것이다. 현실을 바로 볼 때 진리에 대한 외경심이 우러나고 한 마음에서 진리를 깨쳤을 때 우리가 행해야 할 길이 밝혀지는 것이다.
원효는 불교를 바탕으로 해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에서 살면서 독창적인 불교적 세계관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효는 현실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따라 현실 속에 사는 사람들의 찾을 길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잘못 보면 찾는 길도 잘못 찾아갈 것이고 반면 잘 보면 바른 길이 찾아질 것이다. 원효는 진리를 깨친 눈으로 특히 민중과 함께 사는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원효의 현실관은 불교의 원리에 입각하면서도 어떠한 면에서는 혁명적인 현실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효는 세계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을 이렇게 생각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무엇인가에 얽매인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지금 얽매인 마음으로 보고 있는 세계는 참 모습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인간의 하는 일도 욕심에 얽매인 마음이라고 하였다. 그는 전통적으로 있어 온 불교를 이해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핵심을 철견하여 원융하게 융합해서 그의 독창적인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되게 하는 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리석은 마음이 깨끗이 없어지고 얽매인 마음에서 완전히 풀려난다면 지금 바라보고 있는 현실 그대로가 참 모습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욕심에 얽매인 마음만 벗어나면 지금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은 모두가 그렇게 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인간의 하는 일을 바라보는 눈에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보고 있는 세계와 인간의 하는 일들이 그대로 옳다고 보는 점이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세계를 잘 보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와 인간의 하는 일이 얼마만큼 잘 하느냐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현실 그대로를 긍정하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계와 인간의 하는 일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도 세계를 허망하게 보는 정도의 차이와 인간의 하는 일이 얼마만큼 잘못하느냐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현실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현실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부족과 잘못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만 하는 것도 허무성에 빠진다. 왜냐하면 부정은 현실을 바로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필요한 것이지 부정만으로 그쳐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를 살펴보면 불교나 노장 사상은 대체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고(물론 대승 불교는 현실 긍정의 입장이지만) 그 외의 사상과 문화는 대체적으로 현실 긍정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사상과 문화는 매우 다양하다. 어떠한 일률적인 원리만으로 인간의 갈 길을 가르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여기에 전통적인 사상과 문화의 재 이해가 요청되고 있다. 현실을 부정만도 할 수 없고 현실을 무조건 긍정만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지성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 나라에 살기 위하여 현실을 저버릴 수도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무엇인가 쇠사슬에 얽매인 듯한 현실에 무릎 꿇고 갇혀 있을 수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고민이다. 이러한 어려운 열쇠를 원효의 혼을 통해서 얻어 보려는 것이다.
2. 화엄경소서에서 본 현실관
화엄경소서에 의하면 어리석은 마음으로 법이라고 규정한 것은 참 법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서 보면 현실 그대로가 법 아님이 없는 것이다. 법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존재 자체를 뜻하기도 하고 교법을 뜻하기도 한다. 여하튼 어리석음으로 파악된 법은 참 법이라고 할 수 없지만 참 마음이 열려서 보면 현실 그대로가 진리의 참 모습이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으로 보는 문은 참된 문이 아닌 것이지만 깨친 눈으로 보면 현실 모두가 문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이 문은 앞에서 밝힌 법과 연결되어 무장 무애 법계 법문을 뜻하는 것으로 법문의 뜻은 무애 법계의 내용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무애 법계라는 것은 무법이無法而 무불법無不法 비문이非門而 무불문無不門이라는 것이다. 법문은 현실의 모습과 우리의 갈 길이다. 현실의 모습을 바르게 보고 우리의 갈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 법과 문을 바르게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참되게 살아갈 수가 없다. 무애 법계는 우리가 사는 진리의 세계이다. 진리의 세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무애 법계를 그는 이렇게 밝힌다. 이는 크다고도 할 수 없으며 작다고도 할 수 없다. 잡을 수도 없으며 놓아버릴 수도 없다. 動한다고 할 수 없고 靜한다고도 할 수 없다. 一이라고도 할 수 없고 多라고도 할 수 없다. 크다고 할 수 없는 고로 극미極微가 되어서 남김이 없고 작다고 할 수 없는 고로 허공을 두루해서 남음이 없다. 잡을 수 없는 고로 능히 삼세를 포함하고 놓아버릴 수 없는 고로 전체가 一刹에 들어간다. 동함도 없고 정함도 없는 고로 생사가 열반이 되고 열반이 생사가 된다. 一도 아니요 多도 아닌 고로 一法이 곧 일체법이요 일체법이 곧 일법인 것이다.
이는 一卽多의 화엄 철학의 원리를 밝힌 것인데 여기에 화엄 철학의 표현을 통해서 원효의 현실관이 잘 나타나 있다. 무애 법계의 진리성을 비대非大 비소非小 비촉非促 비사非奢 불동不動 불정不靜 불일不一 불다不多로 본 점은 간명하면서도 화엄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점을 파헤친 것이다. 이는 화엄 철학을 그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화엄 철학을 통해서 본 원효의 세계관이다.
무애 법계의 진리성은 극미에도 가득 차 있고 허공에도 충만해 있으며 영원과 무애를 통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미에서 무애를 보고 찰나에서 영원을 보는 현실관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순간의 현실에서 영원과 무애를 철견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참되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특히 불동不動 불정不靜의 원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철학을 전개해 준 것이다. 원래 종교 철학에서 정을 본래적인 것으로 중시해서 인간들의 정신 세계를 정으로 향하게 하였다. 정으로 향하는 길은 요동하는 불완전한 현실성을 방법적으로 정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었으나 정을 너무나 강조한 결과 정을 궁극적인 이상향으로 생각하여 정에 고착해서 현실을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아니하였다.
여기에 정함이 아니라는 것은 진리의 생생 약동함을 밝혀 준 것이며 동함이 아니라는 것은 동한다는 상대적 분별을 지양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동과 정의 분별을 넘어선 진리의 참 모습에서 보면 중생의 생사와 부처의 열반이 바로 하나인 것이다. 정을 중시하는 면에서 보면 생사를 초월해서 열반을 얻어 열반에 안주하는 것을 지상 목표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불정이라는 원리에서 보면 오히려 생사 속에서 바로 열반을 누리며 열반에 고착하지 않고 다시 생사 속에 내려와 괴로워하는 생사 속에 뛰어들어 생사와 열반이 바로 하나인 것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 생사라는 중생의 세계와 열반이라는 부처의 세계를 하나로 보아 중생의 현실 속에서 바로 부처를 찾는 생생 약동한 원효의 현실관을 엿볼 수 있다.
생사의 집착을 버리면 곧 열반이요 번뇌를 끊으면 곧 보리라는 것이 대승 불교의 원리이지만 종래에 열반과 보리를 너무나 이상시하여 생사의 집착을 버리고 번뇌를 끊는다는 데에 강점을 두었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하고 번뇌에 휩싸인 중생 세계와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이 생각되어 왔다. 아무리 대승 불교에서 생사즉 열반이요 번뇌즉 보리라는 원리를 외친다 할지라도 열반의 피안에서 생사 윤회에 허덕이는 중생의 현실 세계를 멀리 바라보면서 번뇌를 끊어야 열반을 얻는다고 손짓만 하는 실천 원리로서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의 현실을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고해의 중생을 낙원으로 구원하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고해와 낙원을 둘로 갈라 보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 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생을 실질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종교가 보다 민중의 현실과 밀착해서 실질적으로 민중을 구원하려면 고해 속에서 바로 낙원을 찾고 생사 윤회속에서 바로 열반을 찾고 번뇌 속에서 바로 보리를 찾는 실질적인 실천 방법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중생의 현실과 밀착해서 중생과 같이 괴로워하면서 열반을 찾으려 몸부림쳤던 원효이기 때문에 표현은 같은 生死爲涅槃이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관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不一 不多의 원리는 일법이 일체법이며 일체법이 일법이라는 一卽多의 원리이다. 역사적인 동서 철학의 대체를 살펴보면 본체와 현상과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 본체를 근본으로 보고 현상을 현실로 보아 근본적인 본체에서 현실적인 현상 세계가 이루어지려면 단계적인 과정을 밟는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 가운데는 본체와 현상이 바로 하나라는 본체즉 현상을 주장하는 입장도 있었다. 그러나 본체즉 현상을 주장하면서도 설명 방식이나 실천 방법은 어딘지 모르게 본체를 중시하는 경향이었다. 이러한 종교나 철학 사상이기 때문에 종교와 민중의 현실과는 밀착될 수 없는 문제를 가져왔다.
여기에 천차만별의 현실 속에서 바로 본체적인 진리성을 찾을 수 있는 논리 체계와 실천 방법이 찾아지는 새로운 종교 철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원효는 화엄 철학의 一卽多의 원리에 입각하면서도 보다 적극적이면서 실질적인 현실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장 무애 법계는 모든 보살과 삼세제불과 모든 범부들이 함께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에 철두철미 범부 중생의 현실 속에서 바로 불과 보살을 찾는 원효의 현실관을 엿볼 수 있다.
수미(極大)가 개자(極小)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쌀 한 톨(극소)이 큰 창고(극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극대가 극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극소가 극대에 들어간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인 본체와 현실적인 현상을 나누어 보지 않고 근본에 대한 현실이라는 구별마저 떠나버린 원효의 현실관 아닌 현실관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엄교에서 단계적인 단위를 설한 것은 법문이 무애하기 때문이었으나 참 뜻에 있어서는 단위를 밟아 入하여도 入한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入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며 수행을 해서 도를 얻는다는 것도 참 뜻에 있어서는 얻는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며 삼현 십성은 행함에 원만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삼신 십불도 덕스러움이 갖추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화엄교는 돈교로서 단계적인 계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기본 입장인데 수행 계위가 설정되어 있어 문제점이었다. 그런데 왜 수행 계위가 설정되었으며 계위의 참 뜻은 계위를 설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나 법문이 너무나 무애하기 때문에 방법적으로 제시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뜻에 있어서는 계위를 밟아 추입을 해도 추입한 바가 없는 것이며 수행을 해서 덕을 닦아도 얻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入한 바가 없고 得한 바가 없다는 것은 본래와 현실이 바로 하나라는 것이다.
더욱 入한 바가 없는 고로 入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이며 得한 바가 없는 고로 得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활동이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佛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적인 모든 활동을 佛의 활동으로 보는 데에 원효의 실질적인 현실관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無所入故 無所不入, 無所得故 無所不得의 원리는 화엄교의 수행 계위를 화엄교의 기본 입장인 一卽多의 원리에 입각해서 체계화시켜 준 원효의 탁견이며 그의 적극적인 현실관인 것이다.
수행 계위의 단계적인 설명에서는 삼현 십성이나 삼신 십불은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나 원효에 의하면 행함에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고 덕스러움에 갖추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이다. 大方廣佛華嚴이라는 것은 법계가 무한하기 때문에 대방광인 것이며 行德이 무변이기 때문에 불화엄인 것이다. 그러나 대방이 아니면 광불화일 수 없고 佛華가 아니면 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계와 行德을 하나로 보아 법계와 행덕을 상호 불가 분리의 관계로 의미지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계는 외적인 것, 행덕은 내적인 것, 법계는 원리적인 것, 행덕은 실천적인 것으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으나 원효는 법계와 행덕을 바로 하나로 보아 서로의 관계를 밀착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화엄을 통한 현실관이 크게 웅장하면서도 실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기신론소에서 본 현실관
기신론소에 의하면 진리 자체는 공적하면서 沖玄하다. 충현이 거듭 충현하면 만상을 초월한 것 같고 공적이 거듭 공적하면 만상에 내재한 것 같다……크다고 하자니 안 없는 데까지 들어가고 작다고 하자니 밖이 없는 데까지 감싸는도다. 有라고 하자니 一如하게 空해 있으며 無라고 하자니 만상을 모두 이루고 있다.
공적을 진여문으로 보고 충현을 생멸문으로 보아 충현을 거듭 충현하면 만상을 초월해서 진여문으로 들어가고 공적이 거듭 공적하면 만상에 내재해서 생멸문으로 나온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俗에서 眞으로 들어가고 진에서 속으로 나타난다는 방법적인 논리적 설명인 것이다. 진리 자체를 一元的으로 직관하는 데는 진과 속의 구별마저 놓아야 할 것이다. 진에 들어간 듯하고 속에서 나온 듯하나 들어간다고도 할 수 없고 나온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종래 불교의 논리에 체와 용이 있어 진여문을 체로 보고 생멸문을 용으로 보아 유를 초월한 것을 체라 하고 유가 완연한 것을 용이라 보고 있다. 그리하여 진여가 생멸로 나타나고 생멸에서 진여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리가 본체적인 것에서 현상적인 것을 이루는 과정의 설명과 또는 현상적인 불완전성에서 본체적인 완전성을 이루는 과정의 설명에는 필요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현실 세계에서 바로 법신을 직시하기에는 어렵게 된다. 이러한 체와 용의 논리에 고착되어 있기에 법신과 화신의 구별을 지어 현실 세계에서 화신을 볼 줄 알아도 현실 세계에서 법신은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을 구별해 보고 진과 속, 무와 유를 구별해 보고 법신과 화신을 구별해 보는 것은 이원적 의식 구조를 가진 인간의 인식 능력에 이해하기 쉽도록 한 논리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 구조는 유식학에서 말한 제 7 마나식에서 비롯된다. 제 7 마나식의 작용은 제 8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사량 분별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생기며 본체와 현상의 분별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 인식의 현실은 다양한 분별을 하고 있다.
불교의 선은 이 다양한 분별을 없애고 自와他 등의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의 이원적 분별을 극복해서 참된 마음을 찾자는 것이다. 자와 타의 분별을 일으키는 제 7 마나식을 극복하고 아직도 한 생각이라는 것에 머무르고 있는 제 8 아뢰야식 까지를 극복해야 참된 마음 곧 진여 자성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체와 현상을 구별하는 비롯이 제 7식이었기 때문에 본체와 현상을 나눌 수 없는 참 모습을 찾으려면 제 7식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제 7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상태 곧,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면 극복해 가는 요긴한 방법으로서도 우리의 의식이나 인식 작용은 항상 이원적인 생각을 경계하고 일원적인 생각으로 되돌리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늘과 땅을 보고 산과 바다를 바라보고 인간과 사회를 접할 때에는 항상 나라는 생각을 잊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고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되고 진과 속, 유와 무가 하나가 되고 법신과 화신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인식 작용의 순화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본체에서 현상이 생긴다든가 현상을 모두 합쳐서 파고 들어가면 본체가 된다든가 진여에서 생멸의 세계가 나타난다든가 생멸하는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본래적인 진여의 세계를 찾아 들어간다든가 진에서 속으로 나온다든가 속에서 진으로 들어간다든가 무에서 유가 나타난다든가 유에서 무로 들어간다든가 화신보다도 무형의 법신을 찾는다든가 법신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화신이라는 등의 모든 이원적인 생각은 극복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진과 속이 하나가 되어 있는 俗에서 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되어 있는 현상에서 바로 본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효의 기신론소의 宗體文을 살펴보면 공적을 진여문으로 하고 충현을 생멸문으로 하여 충현을 거듭 충현하면 만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俗에서 진으로 들어간다고 하고 공적을 거듭 공적하면 만상에 내재한다는 것을 진에서 속으로 나온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진여문과 생멸문을 나누어 본 것은 생멸문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면 진여문이라는 진리 자체의 향방이 있어야 하는 실천 방법으로 필요한 것이지 법신을 철견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이다.
공적과 충현을 논리상으로는 진과 속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의미상으로는 공적 충현 그대로 인 것이다. 공적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분별을 공적하도록 하기 위해서 공적이라는 표현이 필요한 것이며 공적에 고착될까봐 충현이라는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안 없는 데까지 들어가 남김이 없고 밖 없는 데까지 감싸 남음이 없다는 것은 진리 자체가 우주에 충만해서 생생 약동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유라고 하자니 공에 있으며 무라고 하자니 만물에 가득 찼다고 하는 것은 진리가 충만한 그의 현실관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기신론 별기에 의하면 대승의 체는 광활한 것이다. 태허와 같아서 私가 없으며 대승의 체는 탕탕한 것이다. 거해와 같아서 지극히 공변된 것이다. 지극히 공변되는 고로 동과 정이 함께 成하며 사가 없는 고로 染과 淨이 융하는 고로 진속이 평등하며 동과 정이 성하는 고로 오르고 내림이 뒤바뀐다. 오르고 내림이 뒤바뀌는 고로 감응의 길이 열리며 진속이 평등하므로 생각의 길이 끊어지는 것이다. 생각의 길이 끊어지는 고로 체득한 자가 그림자와 울림을 乘하여 方이 없으며 감응의 길이 통하는 고로 비는 자가 명상을 초월하면서 歸함이 있는 것이다. 乘한 바 影響은 형상 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는 것이니 이미 명상을 초월하였거늘 무엇을 초월하여 어디로 귀한다는 말인가 이를 일러 理라고 할 수 없는 지극한 理, 然이라고 할 수 있는 大然인 것이다.
진리 자체를 태허와 거해에 비유하고 태허와 같이 無私, 거해와 같이 至公하다고 밝힌다. 疏宗體文에서의 공적과 충현이 별기에서는 무사와 지공으로 파악되고 있다. 공적과 충현이 진리 자체의 원리적인 파악이라면 무사와 지공은 실천적인 파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사와 지공도 진리 자체의 원리적인 파악을 주안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공변되는 고로 동과 정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역사적인 종교의 경향이 동보다도 정을 중시하는 실천 방법이었기 때문에 원효의 동정 수성의 원리는 크게 주목을 받는다. 정은 요동을 그치기 위한 실천 방법이었던 것이지 정에 고착하면 활동성이 약화된다. 동을 정과 함께 지공으로 본 것은 원효가 종교의 궁극적 경지나 활동상을 현실에 밀착시킨 혁명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범부적인 染과 불보살적인 淨은 항상 차별되어 왔다. 이러한 凡과 聖의 간격은 앞에서도 논의된 이원적 견해로써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원효는 진리 자체의 무사의 원리로써 염과 정 곧 범과 성을 융합시킨 것이다. 염과 정이 융합하는 고로 진과 속이 평등하다는 것은 진을 중시하고 속을 경시하던 종교 사상사에 원효는 진속 평등이라는 새로운 종교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 원리적으로는 진속 평등을 밝히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실천 방법으로는 진속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 원효는 진리 자체의 지공과 무사의 원리에 바탕해서 동과 정을 하나로 보며 진과 속을 하나로 보아 동과 정을 나누어 볼 수 없는 무사의 俗에서 진을 찾는 실질적인 불교 철학을 전개한 것이다.
지공에 바탕하면 동에서 정을 찾을 수 있고 정을 살려서 동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무사에 바탕하면 俗에서 진을 찾을 수 있고 진을 살려서 俗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약동하는 현실의 동에서 정을 찾아 정을 현실에 활용할 수 있고 약동하는 현실의 俗에서 진을 찾아 진을 현실에 활용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또는 불교 철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법화경종요에서 본 현실관
법화경종요에 의하면 일법계一法界 일과체一果體는 실체가 있지 않으므로 實이라 할 수 없고 실체가 없지 않은 고로 虛라 할 수 없고 진제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 고로 如라 할 수 없고 속제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 고로 異라 할 수 없고 실체가 없지 않은 고로 如라 할 수 없고 속제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 고로 異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체가 있지 않은 고로 實이 아니라는 것은 모든 철학적 사유의 실체 관념을 철저하게 때려 부셔 본체계나 현상계를 통해서 본체계의 실체 관념과 현상계의 실체 관념을 여의어 버린 참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본체계나 현상계의 실체 관념을 부정해버리면 허무성으로 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이는 현실계가 생생 약동하는 진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원효 현실관의 산 모습일 것이다.
실체가 없지 않은 고로 허가 아니라는 것은 여기의 실체는 실체 관념에 고착된 실체가 아니라 실체 관념을 철저하게 떠나버린 실체 아닌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 아닌 실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허무성이 아닌 것이다. 분명히 있는 실체를 실체라고 고착하지 아니하였을 때 허무성 같기도 한 참 도의 실체인 것이다.
진제에 고착되지 않는 고로 如가 아니라는 것은 진제라는 본체적인 실체 관념을 떠나버린 고로 진여라는 한 생각도 없는 것이다. 진여라는 한 생각은 진여가 되지 못한 경지에서 진여가 되기 위해서 진여를 바라보는 향방으로서의 진여가 필요한 것이지 진여라고 귀히 여겨 진여를 안고 있어서는 진여는 갇혀버려 진여는 활동성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라는 생각을 놓아버려야 진여는 현실계에 가득 차 진여의 제 구실을 할 것이다. 여기에 물을 건너면 뗏배를 놓으라는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뗏배가 물을 건너는 데에는 지극히 필요한 것이었으나 지극히 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물을 건넌 후까지 붙들고만 있으면 뗏배는 또 다시 물을 건너게 하는 제 구실을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뗏배를 지극히 귀중하게 생각하고 뗏배를 더 할 수 없이 사랑한다면 과감히 뗏배를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뗏배는 놓임을 받았을 때 또 다시 한없이 물건넘을 할 수 있는 활동성 있는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여는 뗏배이다. 진여를 찾을 때 진여를 지극히 고귀하게 생각한다면 진여를 얻었을 때 진여를 헌 신짝같이 내버려야 한다. 헌 신짝같이 진여는 내던져져야 우주에 가득차게 된다. 진여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진여는 깊음 속에 갇혀버린다.
진여라는 한 생각마저 놓아버려 진여를 우주에 가득차게 하자는 것이다. 속제에 고착하지 않은 고로 다름이 아니라는 것은 속제에 집착되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을 때 형식은 분명히 속이지만 이미 속이라는 집착을 떠나버린 속이 아닌 참된 의미에서의 속이기 때문에 차별에 집착하는 다름이 아닌 것이다.
형식은 俗이로되 그 속에서 진을 찾는 아니 속 그대로가 진으로 화해버린 현실관이라야 참된 의미에서의 현실관일 것이다. 원효는 俗을 진으로 보고 속에서 살면서 속을 진으로 녹여버린 현실관을 밝혀 준 것이며 속을 진으로 녹여버릴 수 있는 실질적인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5. 금강삼매경론서에서 본 현실관
금강삼매경론서에 의하면 一心의 경지는 유라 함과 무라 함을 떠난 홀로 조촐한 자리이며 三空의 경지는 진과 속을 융합한 담연한 자리이다…… 둘을 융합하여 하나에 고착하지 않는 고로 진과 속을 세우지 않은 바가 없고 염과 정이 갖추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며 변을 여의어서 中에도 착하지 않은 고로 유와 무를 짓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是와 非가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破하지 않으면서 破하지 아니함이 없고 立함이 없으되 立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理가 아닌 지극한 理인 것이며 然이 아닌 大然인 것이다.
離有無와 融眞俗은 원효 현실관의 기본 입장이다. 유라든가 무라든가의 나누어 보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유의 세계가 곧 무인 것이요, 무가 곧 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는 무를 초월적으로 보고 유를 내재적인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유 속에서 무를 보고 무의 의미를 유 속에서 찾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離有無를 유와 무를 초월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유와 무를 초월하였다고 해서 어떠한 초월의 경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참된 유무 초월은 유 속에서 유와 무를 하나로 알아 무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眞이라든가 俗이라든가의 나누어 보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속의 세계가 곧 진인 것이요 진이 곧 속의 세계인 것이다. 이는 진을 초월적으로 보고 속을 내재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俗 속에서 眞을 보고 진의 의미를 俗 속에서 찾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融眞俗을 진과 속을 초월한 경지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眞과 俗을 초월하였다고 해서 어떠한 초월의 경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참된 진속 초월은 俗 속에서 진과 속을 하나로 알아 진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진과 속을 융합하여 하나로 보면서 진과 속이 하나라는 생각에 착하지 않으므로 참되게 진속을 하나로 보게 되면 염정이 참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유와 무를 떠나 하나로 보면서 중도라는 한 생각에 착하지 않으므로 참되게 유무를 하나로 보게 되며 시비가 참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破함이 없는 가운데 파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立하지 아니함이 없는 경지인 것이다. 이는 破한다는 관념, 파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홀연히 떠나 참된 그것을 찾는 경지이며 立한다는 관념, 立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거연히 떠나 그것을 찾는 경지이다. 이러한 안목에서 현실을 보면 着해진 현실이 아닌 참된 현실이며 진으로 화해진 현실인 것이다. 원효는 이러한 현실을 찾았던 것이다.
이것은 理에 착하지 않는 理인 것이며 그렇다고 긍정해버린 긍정에 붙잡히지 않는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큰 긍정인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현실의 집착을 부정함을 통해서 현실을 참되게 바로 세우는 긍정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不然之大然은 원효의 현실관을 집약해 주는 새로운 종교 철학이 될 것이다.
6. 해심밀경소서에서 본 현실관
해심밀경소서에 의하면 불도라는 것은 湛爾 沖玄한 것이다. 충현해서 사이가 없는 것이며 태연해서 광원하다. 광원해서 가가 없다. 유위와 무위가 幻化와 같아 둘이 아니다. 생함도 없고 상도 없는 것이다. 내와 외의 구별을 없애 하나가 된다. 모두를 없애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둘이 아닌 경지를 알면 一味를 함께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삼세를 하나로 보게 되고 十方에 법신을 나투어 법계에 두루해서 만물을 제도하는 것이다. …… 법신은 불가사의해서 모든 분별의 戱論을 絶한 것이다. 하는 바가 없으므로 짓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논한 바가 없으므로 말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며 짓지 아니한 바가 없으므로 현실을 구제해서 남음이 없게 된다.
충현해서 무간하다는 것은 도가 우주에 충만함을 뜻한다. 충만한 도가 무변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도는 현상계의 유위와 본체계의 무위를 통관하는 하나의 진리성인 것으로 유위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여기에 본체계와 현상계를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진리성을 현실이 아닌 보다 차원 높은 원효의 현실관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유위의 현상이 환화라면 무위의 본체도 환화라는 관점은 종래 현상적인 것을 환화라고 강조했던 불교적 관점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것이며 본체적인 것을 실체시하는 모든 종교나 철학적 사유 방식에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현상이 허깨비라면 본체도 허깨비이다. 여기에 원효의 현상이라는 집착과 본체라는 흔적을 뛰어넘어 현실에서 유위와 무위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철견하는 원효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사유 방식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구별해 본다. 내적인 것은 마음이며 외적인 것은 우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과 우주가 나뉘어져 있는 한 하나의 경지를 깨치기는 어렵다. 안과 밖이라는 그 한 생각을 버려야 안과 밖이 없는 한 경지를 깨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효는 안과 밖이 함께 없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가 일미를 맛보면 삼세에 능히 노닐고 시방에 법신을 나투어 법계의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방에 법신을 나툰다는 것, 법계의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원효가 얼마만큼 현실 세계의 중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신은 불가사의해서 모든 분별 희론을 초월한다고 했다. 이는 법신의 무량 묘용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신의 작용은 한다는 관념이 없이 작용하기 때문에 작용되어지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며 논한다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말해지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 아닌 현실을 바로 법신의 작용으로 보아 정성들여 활동하면 현실 그대로가 바로 참된 현실로 화해질 것이다.
7. 대혜도경종요에서 본 현실관
대혜도경종요에 의하면 지극한 도는 고요하지 아니함이 없고 탕탕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실상은 상이라 할 수 없는 고로 상 아닌 바가 없는 것이며 밝지 못함을 참되게 비추므로 밝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無明 無不明이라는 것을 누가 어리석음을 없애서 혜명을 얻는다고 하였으며 無相 無非相이라는 것을 어찌 가명을 때려부수어 실상을 설했다고 하였는가. 假名 妄相이 眞性 아님이 없어서 그 상을 능히 말로 할 수 없어 실상 반야는 현묘하고 거듭 현묘한 것이다.……반야는 설함도 없고 示함도 없고 聞함도 없고 得함도 없어서 모든 언어 표현을 초월한 것이다. 示한 바가 없는 고로 示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득함이 없는 고로 득하지 아니한 바가 없는 것이다.
실상은 상이라 할 수 없는 고로 상 아닌 바가 없다는 것은 실상이라는 실체 관념을 떠나 버리면 현실 세계의 모두가 실상이라는 것이다. 실상이라는 실체 관념을 떠나 현실 세계를 바로 실상으로 보는 점이 원효의 탁월한 현실관인 것이다. 어리석음을 없애서 혜명을 얻는다든가 현실계는 실상이 아니라든가의 분별마저 놓아버리면 현실계의 가명이나 망상이 바로 진성으로 化해진다는 것이다.
원효가 얼마만큼 어리석음과 밝음, 가명과 실상이라는 이원적 분별을 넘어서서 진과 망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경지를 실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은 현묘하고 거듭 현묘하다는 것은 실상의 현묘한 작용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현시한 바가 없는 고로 현시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은 실상이라 집착하지 않는다면 모든 나타남이 바로 실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8. 무량수경종요에서 본 현실관
무량수경종요에 의하면 중생 심성은 융통 무애 해서 크기로는 허공과 같고 넓고 맑기로는 巨海와 같다. 허공과 같은 고로 그 體는 평등한 것이다. 어찌 조촐함과 더러움이 있겠는가. 거해와 같은 고로 그 성이 윤활한 것이다. 능히 緣을 따라 어기지 않으니 어찌 동시와 정시가 없겠는가……깨친 안목으로 보면 이곳도 없고 저곳도 없는 것이며 穢土와 淨國이 본래 一心이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것이다.
중생 심성은 허공과 같이 평등해서 조촐함과 더러움이라는 나뉨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더러움으로 보고 본래를 조촐함으로 보는 한 생각을 넘어선 것이다. 깨친 세계에서 보면 차안도 없고 피안도 없이 생사와 열반이 하나라는 것이다. 여기에 현실의 생사와 이상적인 열반을 하나로 보는 원효의 현실관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9. 본업경소서에서 본 현실관
본업경소서에 의하면 二諦 中道는 가히 도라고 할 수 있는 나루터가 없는 것이며 重玄 法門은 가히 門이라고 할 수 있는 理가 없는 것이다. 가히 도라고 할 수 없는 고로 마음이 있다고 하면 참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이며 가히 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고로 행이 있다고 하면 참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해는 나루터가 없으되 배를 띄어 저어 가면 능히 건널 수 있고 허공은 사다리가 없으되 날개를 퍼덕이면 높이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라고 할 수 없는 도는 도 아님이 없는 것이며 문이라고 할 수 없는 문은 문 아님이 없는 것이다. 문 아님이 없는 고로 모든 일이 모두 현묘한 문에 들게 되고 도 아님이 없는 고로 어느 곳이나 모두 본원에 돌아가는 길인 것이다.
어떠한 마음을 갖는다는 마음에 집착되어 있으면 참된 행이 될 수 없고 어떠한 행을 한다는 데에 집착되어 있으면 참된 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실천적인 면에서의 실체 관념의 부정인 것이다. 어떠한 마음을 갖는다, 어떠한 행동을 한다 등은 현실에 집착된 현실이다. 현실의 집착을 넘어서서 마음을 갖고 행을 하면 그 마음과 행은 큰 바다에 나루터가 없으되 배를 한없이 저어 갈 수 있고 허공에 사다리가 없으되 얼마든지 훨훨 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집착을 넘어서서 현실을 바라볼 때 현실이 바로 실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도라 할 수 없는 도이기에 도 아님이 없기 때문에 이 우주 어느 곳이나 모두가 참된 길이 되는 것이며 문이라 할 수 없는 문이기에 문 아님이 없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하는 모든 일이 모두 진리의 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원효가 실천적인 면에서 실체 관념을 부정하여 현실을 바로 보고 현실에서 참된 길을 밝혀 준 것이다.
맺음말
열반경종요서에 의하면 大體와 大用은 無二이며 無別인 것이다. 피안이 없으므로 무엇을 건널 수 있을 것이며 차안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떠난 바가 없으므로 떠나지 아니한 바가 없어 이를 大滅이라 하고 다다른 바가 없으므로 다다르지 아니한 바가 없어 이를 大度라 한다.
여기에 체와 용을 하나로 보는 원효의 입장이 밝혀졌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넌다는 것은 차안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한 향방으로서의 피안이 필요한 것이지 피안에 고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차안을 떠났다는 집착이 없기 때문에 떠나지 아니한 바가 없고 피안에 도달했다는 집착이 없기 때문에 도달한 바가 없는 것이다. 원효의 본체와 현상을 하나로 보는 현실관에서 착실하게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실질적인 실천 방법인 것이다.
우리는 현실의 모습을 바르게 보고 우리의 갈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 현실은 무한한 발전 가능태이다. 보다 알찬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발전할 수 있는 가능태이기 때문에 현실에는 불완전성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불완전성을 무조건 긍정해버리면 줄기찬 발전은 멈추어 버린다. 그래서 현실의 불완전성을 똑바로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정의 논리가 방법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원효는 일단 현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한 것은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부정한 것이지 현실 자체를 무조건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주착된 현실의 마음을 일단 부정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지혜의 눈이 비추이면 현실 그대로가 참 모습이다. 현실을 바로 볼 때 진리에 대한 외경심이 우러나고 한 마음에서 진리를 깨쳤을 때 우리가 행해야 할 길이 밝혀지는 것이다.
원효는 순간의 현실에서 영원과 무한을 철견하게 하여 우리의 삶을 보다 참되고 풍부하게 하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진과 속, 무와 유, 법신과 화신을 구별해 보는 것은 이원적 의식 구조를 가진 인간의 인식 능력에 이해하기 쉽도록 한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이원성을 극복해서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인간과 사회를 대할 때에 항상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하나의 마음가짐으로 현실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진과 속이 하나가 되어 있는 속에서 진을 찾아야 하며 본체와 현상이 하나가 되어 있는 현상에서 바로 본체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원효는 가르쳤다. 본체계나 현상계의 실체 관념을 부정해버리면 허무성으로 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이는 현실계가 생생 약동하는 진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분명히 있는 실체를 실체라고 고착하지 아니하였을 때 허무성 같기도 한 참된 실체가 나타나는 것이다.
眞如라는 한 생각을 일으키면 진여는 깊음 속에 갇혀 버린다. 진여라는 한 생각마저 놓아버리면 진여는 우주에 가득 차게 된다. 원효는 俗을 진으로 보고 속에서 살면서 속을 진으로 녹여버린 현실관을 밝혀 준 것이며 속을 진으로 녹여버릴 수 있는 실질적인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약동하는 현실의 動에서 靜을 찾아 정을 현실에 활용할 수 있고 약동하는 현실의 俗에서 眞을 찾아 진을 현실에 활용할 수 있는 종교 철학 또는 불교 철학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909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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