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원효의 륜리사상

수선님 2019. 9. 22. 11:50

원효의 륜리사상

 

 

원효의 학문은 책상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를 타고서 저술하기도 하고, 대중의 삶의 현장에 뛰어 들기도 했던 그의 학문에는 풍부한 체험이 스며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공허하지 않았다. 이제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원효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되새겨 보기로 한다.

 

 

어느날 원효와 혜공은 항사사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고 변을 봤다. 혜공이 말했다. '여시오어'(汝屎吾魚). 너는 똥을 싸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는 뜻인 듯, 어떻게 죽은 고기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한바탕 삶에도 괴로움의 늪이 있고 기쁨의 언덕이 있다.

 

 

然夫 衆生心性 融通無碍 泰若虛空 湛猶巨海

若虛空故 其體平等 無別相而可得 何有淨穢之處

猶巨海故 其性潤滑 能隨緣而不逆 豈無動靜之時

爾乃 或因塵風 淪五濁而隨轉 沈苦浪而長流

或承善根 截四流而不還 至彼岸而永寂

若斯動寂 皆是大夢 以覺言之 無此無彼

穢土淨國本來一心 生死涅槃終無二際

然 歸源大覺 積功乃得

隋流長夢 不可頓開 《無量壽經宗要》序

 

 

바다와도 같은 중생의 심성(心性)은 언제나 일렁이고 있다. 그러기에 일정한 성격을 지킬 수 없다. 진풍(塵風)은 염업(染業), 선근(善根)은 정연(淨緣)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장몽(長夢)에서 깨어나기란 어렵다.

 

 

진실은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열반종요》서문 중의 다음 구절은 주목된다.

 

 

其道 至近至遠

由至遠故 隨敎逝之 綿歷千劫而不臻

由至近故 忘言尋之 不過一念而自會也

 

 

《금강삼매경론》에는 승조(僧肇·383∼414)의 게송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도원호재 촉사이진 성원호재 체지즉신'(道遠乎哉 觸事而眞 聖遠乎哉 體之卽神)이 그것이다. 도리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듯, 바로 우리들 손 끝에 있는 것. 흔히 오염된 국토와 깨끗한 나라를 구별하고 차안(此岸)고 피안(彼岸)을 구별하지만, '이미 도달해야 할 피안(彼岸)이 없거니 어찌 떠나야 할 차안(此岸)이 있겠느냐'(旣無彼岸可到何有此岸可離)는 원효의 교훈에 귀 기우릴 필요가 있다.

 

 

大海無津 汎舟楫而能渡

虛空無梯 翩羽翼而高翔

 

 

無非門故 事事皆爲入玄之門

無不道故 處處咸是歸源之路

 

 

備架福智兩  能渡乎佛法大海

雙運止觀二翼 高翔乎法性虛空 《本業經疏》序

 

 

특정한 문만이 문일 수 없고, 어떤 길만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인생의 어떤 일도 모두 다 현묘(玄妙)한 데로 이를 수 있는 문이 되며, 사람들이 서 있는 어떤 위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탄탄대로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진실에 이를 수 있고,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누가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려 걷느냐 하는 것이다.

 

 

대승의 진리만이 보배는 아니다. 원효에 의하면 大·小乘法이 모두 보배로운 것이다. 큰 것이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고 작은 것이 요긴할 적도 있다. 옷을 깁기에는 작은 바늘이, 돗자리를 꿰멜 때는 돗바늘이 더 좋다. 작은 새의 행복은 산기슭에 있고, 피래미의 보금자리는 여울물인 것을. 이는 원효의 다음 말씀에 의한 것이다.

 

 

縫衣之時 短針爲要 雖有長戟而無所用

避雨之日 小盖是用 普天雖覆而無所救

是故不可以小爲經 隨其根性 大小皆珍者也

《彌勒上生經宗要》

 

 

短 之鳥 庇山林而養形

微○之魚 潛涓流而安性

所以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華嚴經疏序》

 

 

어떤 약도 만병통치약은 없다. 교설도 마찬가지다. 원효는 말했다. '부정관(不淨觀)은 욕심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 되지만 분노의 병에는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심(慈心)은 분노에는 좋지만 욕심에는 좋지 않은 것이다.' 짝사랑의 열병을 앓던 엄장(嚴莊)이 찾아왔을 때, 원효는 그를 부정관(不淨觀)으로 치료했었다.

 

 

원효의 윤리사상은 그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중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어떻게 탁류를 거슬러 원천으로 돌아가는 나룻배를 탈 수 있고, 삿된 짓을 버리고 정당해 질 수 있을까 ? 사(邪)와 정(正), 죄(罪)와 복(福)을 가름하기란 어렵다. 내심(內心)은 삿된데 겉모습은 바른 듯 보이는 경우가 있고, 드러난 짓은 물든 것 같지만 속마음은 깨끗한 경우도 있다. 어떤 행위는 적은 복〔小福〕에는 맞아도 오히려 큰 우환〔大患〕을 초래하는 수 있고, 생각과 행동이 깊고 원대한 듯 하면서도 천박하고 근시안적인 것에도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를 예로 살펴보자. 상대방의 신심을 일으키기 위한 경우는 복이지 범한 것이 아니다. 방일(放逸)과 무기심(無記心)으로 인한 경우는 범(犯)이되 물든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애증으로 인한 경우는 물들었지만 중죄(重罪)는 아니다. 이양(利養)과 공경(恭敬)을 탐함으로 인한 경우는 중죄로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이양, 공경을 탐해서 자찬훼타하는 경우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가끔 참회하면 하품(下品)이고, 참회하지는 않되 이를 덕으로 여기지는 않으면 중품(中品)이며, 참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이를 즐기며 공덕으로 보는 경우는 상품(上品)이다. 또 개인을 헐뜯는 경우는 하품(下品), 한 무리를 상대할 경우는 중품(中品)이며, 다중(多衆)일 경우 상품(上品)이다.

 

 

많은 대중을 상대로 자찬훼타하는 경우는 그 죄(罪)가 하나가 아닌데, 여기에 해당하는 무리는 벌레들이다. 첫째, 심학(心學)에 의한 벌레로 탐욕으로 인한 경우와 교만으로 인한 경우가 있다. 둘째, 계학(戒學)과 관련된 벌레로 사계(邪戒)를 지키는 경우와 정계(正戒)를 지키는 경우가 있다. 사계(邪戒)를 지키는 경우, '내이상진 외이난인'(內以傷眞 外以亂人)해서, 그 상난(傷亂)의 죄가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 정계(正戒)에 머물면서 교만한 자는 소선(小善)에는 완전하지만 대금(大禁)을 범한 경우로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된다.

 

 

古之大賢 誡其子云 愼莫爲善 其子對曰 當爲惡乎 親言 善尙莫爲 況爲惡乎

 

 

셋째, 혜학(慧學)을 빙자해 자찬훼타하는 벌레에는 증익(增益)으로 인한 경우와 손감(損減)에 연유한 경우가 있다. 그 성품이 졸렬하고 비좁아 학문을 넓게 하지 않고 심오한 경론(經論)의 일부만을 치우치게 익혀 그 은밀한 뜻을 알지 못한 채 여언취의(如言取義)하는 자가 손감인(損減人)이다. '집의 개가 토끼를 쫓다가 바라보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서 오히려 자기가 앞섰다고 하면서 멈추고 뒤돌아 본다.'〔家狗逐兎 望不能及 便謂己超 止而顧見〕손감인도 이 꼴이다. 이 사람은 낮은 것을 높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이 사람은 가장 심오한 약을 복용하고 도리어 중병에 걸린 격이다. 중병의 양상은 무병(無病)과 매우 흡사하다. 이 때문에 이 병을 고칠 의술이 없으며, 이 병을 자작하는 이 극히 적다.

 

 

'유인위관규천 위제불규기관내자 개시불견창천자'(有人葦管窺天 謂諸不窺其管內者 皆是不見蒼天者) 이를 일러 적은 식견으로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각자미자 비대미이 지자암자 비극암이'(覺自迷者 非大迷矣 知自闇者 非極闇矣)다.

 

 

찬훼(讚毁)의 계에 대해서도 그 이해의 깊고 얕음은 다르다. 하사(下士)는 이를 듣고 말과 같이 이해한다. 그래서 자훼찬타(自毁讚他)는 반드시 복업(福業)이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는 반드시 범죄라고 한쪽으로만 말귀를 따라 이해한다. 장차 복을 닦으려 하지만 복행(福行)은 적고 죄업은 많아, 죄를 버리고자 하지만 죄 하나를 제거하면서 복 세 가지를 제거한다. 이를 천박한 식견의 지범(持犯)의 과오라고 한다. 상사(上士)는 이를 듣고 의취(意趣)를 탐구해, 한 모서리를 들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다 이해한다. 한 문장에 대해 매양 사구(四句)로 판단한다. 즉,

 

 

① 자훼찬타(自毁讚他)가 복(福)이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가 죄(罪)되는 경우

② 자훼찬타(自毁讚他)가 죄(罪)가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가 복(福)이 되는 경우

③ 자훼찬타(自毁讚他)나 자찬훼타(自讚毁他)가 죄(罪) 혹은 복(福)이 되는 경우

④ 자훼찬타(自毁讚他)도 아니고 자찬훼타(自讚毁他)도 아닌 것이 복(福) 또는 죄(罪)가 되는 수도 있다.

 

 

'부주계상고(不住戒相故) 구계도(具戒度).' 이는 원효의 명언이다. 모든 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뭇 인연과 어울려 이름 빌려 업이라고 한다. …… 방일하여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業의 실상 생각할 수 없는 이는, 비록 죄성이 없더라도 장차 지옥에 빠질 것이다. 마치 마법의 호랑이가 마법사를 삼키듯이. 이러기에 모든 부처님께 깊이 참괴하는 마음내어 참회하라.' 이 또한《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중의 교훈이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521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