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자살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해결책

수선님 2019. 10. 20. 12:12

자살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해결책

자살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해결책

-윤회론적 입장을 중심으로-

이 문 성(백산신경정신과)

I. 서론 - 과연 죽으면 끝인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사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죽는다고 해서 그 괴로움이 끝나지 않거나 고통이 더 심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후세계의 존재유무를 어떤 근거로 판단할 것인가? 현대의 과학은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후세계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이런 과학적인 입장과는 달리 대부분의 종교는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이 겪는 힘든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경향이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사람들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종교인들조차도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가고 있는 듯하다.
과학은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과학적인 입장이 사후세계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을 뿐이지 사후세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진실로 사후세계가 없고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살로서 삶의 괴로움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죽었는데도 모든 것이 끝이 아니고 다른 세상에서 더 큰 고생을 하게 된다면 자살은 얼마나 어리석은 실수가 될 것인가?
과학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지식이나 지혜이기 때문에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처한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든 것 같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리 삶의 지혜를 말해보아야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후세계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이에 대한 종교적인 가르침이 자살문제를 포함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본 논문에서는 자살에 대한 불교적 관점과 해결책을 윤회론적 입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불교 경전에 나타난 자살에 대한 고찰

불교 경전에 나타난 자살에 대하여 안양규와 백도수의 연구논문을 인용하여 고찰해보고자 한다.

1. 아라한의 자살

붓다 재세시(在世時) 아라한들 중 자신의 수명을 다 살지 아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사건이 초기 경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들 아라한의 자발적인 수명 단절은 붓다 재세시 적지 않게 행하여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한의 자살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질병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육신의 수명을 단절하는 것이다. 아라한이 이 세상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이롭게 하고 불법을 전승하고 포교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 때문이므로, 아라한이 질병으로 더 이상 효과적으로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구차스럽게 단지 육신의 지속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이 다음 생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아라한으로서 할 일을 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유형은 붓다의 입멸과 관련하여 수명을 단축하는 경우이다. 아라한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수명을 일겁(一劫)이상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상수 제자인 사리자는 비구 8만 명과 함께, 목련(目連)은 비구 7만 명과 함께 붓다 보다 몇 개월 전에 입멸하였으며, 세존은 비구 1만 8천명과 함께 반열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대애도(大愛道)는 500비구니와 함께 반열반하였는데, “나는 여래가 입멸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그리고 아난이 입멸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 나 마땅히 먼저 입멸해야 하겠다.” 라고 생각한 후 대애도는 붓다를 찾아가 자신의 의도를 알리고 승낙을 받는다. 사리자와 목련도 이와 같은 이유로 붓다를 찾아가서 허락을 얻고 난 뒤 입멸하게 된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자살은 윤회세계 내에서 다시 재생을 가져오지만 아라한은 이미 생사윤회에서 벗어났으므로 아라한의 자살은 범부의 자살과 달리 도덕적으로 죄악시될 수 없다.

2. 자살을 죄로 규정한 율장(律藏)

아라한의 자살이 붓다에 의해 허용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붓다는 수행자의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율장(律藏)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붓다가 베살리의 대림에 있는 중각강당에 머물 때, 붓다가 설한 신체의 부정(不淨)에 대해서 부정관(不淨觀) 등의 수행으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몸을 혐오한 비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문의 옷을 입고 있는 미가란디까에게 발우를 주기로 하고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미가란디까는 225명 비구들을 살해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구가 의도적으로 인간을 죽이거나 칼을 지니기를 원한다면 비구는 또한 바라이이고 함께 살지 못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조문을 규정하셨다.”

그리고 이 율의 제정 이후에 육군비구는 병든 우바새의 아내를 얻고자 그 우바새에게 죽음을 권유하고 찬탄하여 그를 죽게 하였다. 그 때문에 세 번째 바라이죄에 대한 추가적인 규정이 세워졌다. “한편 비구가 의도적으로 인간을 죽인다면, 또는 그가 칼을 지니고자 한다면, 죽음을 찬탄하거나 죽음에 들게 한다면 ‘오, 사람아, 네게 이 사악하고 좋지 않은 생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마음이나 뜻으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음을 칭찬하거나 죽음에 들게 한다면 이것은 또한 바라이이며 불공주(不共住)이다.”

율장의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자살도 살인바라이죄(殺人 波羅夷罪)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백도수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율장은 살인이나 자살교사를 행한 수행자를 교단에서 추방한다는 벌칙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지 자살을 행한 사람에 대한 벌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살해서 죽은 사람을 교단에서 추방한다는 것도 성립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장의 내용은 신체의 부정(不淨)에 대한 붓다의 설법을 잘못 이해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이 잘못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이 사악하고 좋지 않은 생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라고 생각하여 현생(現生)의 삶을 혐오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도 옳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불교의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잘못 받아들여서 인생은 무상하여 허망한 것이므로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살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붓다가 직접 설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에 대한 붓다의 부정적인 입장은 자살시도에 대한 벌칙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스스로 산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은 돌길라죄(惡作)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돌길라죄를 고의로 범했을 때는 상좌비구에게 참회해야 하고 고의가 아닌 경우는 자기 마음속으로 참회하면 된다고 한다. 이처럼 자살시도는 살인이나 자살교사(自殺敎唆)와 다르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살인을 하거나 자살을 교사한 수행자는 승가 즉 교단생활에 관한 금율(禁律)을 어긴 죄가 중하여 교단생활을 같이 할 수 없지만 자살을 시도한 수행자는 참회함으로써 출죄(出罪)가 가능하고 수행을 계속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3. 자살의 과보
자살의 과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백도수는 자살이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므로 타인의 생명을 죽이는 살인과 자살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자살하여 내생에서 받게 되는 과보(果報)는 살생으로 인하여 받게 될 악한 과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살생의 과보에 관해 살펴보면, 살생을 많이 하면 지옥, 축생, 아귀계의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아무리 가벼운 살생일지라도 그것의 과보는 인간을 단명하게 된다고 한다. 자살을 살생과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자살의 과보도 살생의 과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4. 자살을 시도하다가 아라한과를 성취한 시하 비구니
장로니게 註釋에 따르면, 시하라는 여인이 출가하여 위파사나(觀, vipassana)를 닦으면서도 마음을 통제할 수 없어 7년 동안 잘못된 생각으로 물들어 마음의 해탈을 성취하지 못해 ‘내게 이 사악한 삶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스스로 파괴하여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여 밧줄을 가져다 나뭇가지에 묶고 자신의 목을 매었다. 그 찰나에 그녀는 이전의 수행으로 관(觀)의 마음이 생겼다. 관(觀)이 증가하여 무애지(無碍智)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고 전해진다.
시하 비구니의 이야기에서 보면 자살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깨달음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시하 비구니는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벗어났다 그러나 만약 시하 비구니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살해서 죽었다면 다음 생에 지옥, 축생, 아귀계의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나서 더 큰 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Ⅲ. 자살에 대한 윤회론적 입장과 해결책

1. 윤회론.
윤회(輪廻)는 하나의 생으로부터 다음의 생으로 재생(再生)을 거듭하는 것을 말하며, 생사(生死)라고도 한다. 중생은 그 업에 따라서 삼계육도(三界六道)를 윤회한다. 삼계(三界)란 육체를 가지지 않고 정신적 요소만으로 된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와 욕망은 끊었으나 육체가 남아있는 세계인 색계(色界)와 욕망과 집착으로 가득 찬 세계인 욕계(欲界)를 말한다. 육도(六道)란 욕계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생존양식을 가리키는 말로서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 魔神),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을 뜻한다.

붓다의 가르침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바르게 깨닫게 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겠지만 이를 잘못 받아들여서 인생은 무상(人生無常)하여 허망한 것이니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하는 사람은 죽은 뒤에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삼악도(三惡道)에 다시 태어나서 죽기 전보다 더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2. 현생(現生)의 고통은 전생(前生)의 업보(業報)다
육도집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 보살이 바라문으로서 나무 밑에서 정밀하게 사유하고 있었다. 마침 가리왕이 산에 들어가 사냥을 하다가 사슴을 쫓아서 그 발자국을 찾았더니, 보살의 앞으로 지나간지라, 왕이 도사에게 사슴의 행방을 물어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에 격분한 가리왕은 칼을 빼어들고는 수행자에게 “너는 누구야?”고 묻자 “저는 인욕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의 두 팔과 다리를 끊고 코와 귀를 끊으니 피가 샘솟듯 흘렀으며 그 아픔이 한량없었다. 그러자 사천대왕이 모두 함께 내려와 가리왕을 죽이려고 하자, 도사가 대답하였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이 앙화(殃禍)는 내가 전 세상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저에게 독해(毒害)를 가하였기 때문에 악한 짓을 한 앙화가 마치 그림자가 형체에 매인 것처럼 쫓아온 것입니다. 예전에 조금 심은 것을 지금에 많이 거두는 것이니, 내가 만약 천왕의 뜻에 순종한다면 그 앙화가 하늘땅과 같아서 여러 겁 동안 그 죄를 받아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보살은 왕을 원망하기는커녕 자비심으로 그를 불쌍히 여겼다.

전생(前生)의 붓다는 자신의 팔다리가 잘리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업보임을 알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끝내버리고 싶어 하는 인생의 고통이 바로 자신이 지은 전생의 업보라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3. 깨닫지 못한 수행자의 자살

중국 당나라 시절에 석상(石霜) 선사 계셨는데, 전법(傳法)하여 후사(後嗣)를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열반에 드셨다. 그러고 나니, 회중(會中)에서는 뒤를 이을 분을 모시기 위한 대중공사(大衆公事)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의견이 분분하다가, 그 회상(會上)에서 다년간 입승(入繩)도 보고 대중의 존경도 받아오던 노장 스님을 조실에 모시기로 대중의 공론이 모아졌다.
그런데 석상 선사의 시자였던 나이 어린 구봉(九峰) 스님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그렇다면 제가 열반하신 선사의 법문을 들어서 묻겠사오니, 만일 선사의 뜻에 맞게 답하신다면 그 때는 조실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하고는 물음을 던졌다.
“석상선사는 항상 법문하시기를, ‘쉬어가고 쉬어가되 한생각이 만 년을 가게 하고, 찬 재와 마른 나무같이 가며, 옛 사당의 향로와 같이 차게 가고, 한 필의 흰 비단과 같이 이어가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밝히신 것입니까?”
이에 조실로 추대받던 노장 스님이, “그 법문은 일색변사(一色邊事, 온 대지가 청정일색인 경지)를 밝힌 것이다.” 라고 말하니, 시자였던 구봉 스님이 듣고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석상 선사의 뜻을 모르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 노장 스님이, “그러면 내가 향(香)에 불을 붙여서 향 연기가 피어오를 동안에 이 몸뚱이를 벗어 보이겠다. 만약 내가 석상 선사의 뜻을 알지 못했다면 향 연기가 일어날 때 좌탈(坐脫)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향에 불을 붙여 한 줄기 향연(香煙)이 피어오르자 그만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 이에 구봉 스님이 다가가서 그 스님의 등을 툭툭 치면서, “앉아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몸뚱이를 벗는 일은 없지 아니하나, 석상 선사의 근본 뜻은 꿈에도 보지 못하셨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후대의 천동각(天童覺) 선사는 좌탈(坐脫)한 노장 스님의 대답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임을 밝혔으며, 구봉 스님은 석상 선사의 법을 이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린 그 노장스님이 다음 생에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나 그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해서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음에 제시할 백장 선사의 이야기에서 그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4. 깨닫지 못한 수행자의 윤회
백장 선사가 법문을 할 때마다 휜 속복(俗服)을 입은 노인이 법문을 듣고 하였는데, 하루는 그 노인에게 백장선사가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이가 누구냐?” 그러자 노인이 대답을 했다.
“제가 과거 가섭불 당시에 이 백장산에서 회상을 열어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이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라고 묻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대답했다가 그 후 오백 생(五百 生) 동안 여우 몸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불법을 지도하였던 선사였지만,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 학인의 질문에 틀린 답변을 한 업보로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함은 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면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5. 깨달은 수행자의 환생
옛날 중국에 달마대사로부터 선법이 전해져 오다가 사조 도신(四祖 道信) 선사에 이르렀는데, 도신 선사는 나이 팔십에 가깝도록 눈 밝은 제자를 두지 못하였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자신보다 더 연로한 한 노승이 찾아와서 “제가 스님의 고귀한 법을 잇겠습니다.”라고 하여 부처님 법을 물어보니 막힘이 없이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많은지라 “그대가 부처님의 진리의 법은 바로 알지만 너무 연로해서 법을 부촉할 수 없으니 가서 몸을 바꾸어 오게. 그러면 그때 가서 법을 전해 주겠네.”
노승이 소나무 한 그루를 도신 선사의 방 앞뜰에 심어 신표(信表)를 해놓고는 떠났다. 산 아래 마을에 이르니, 마침 한 처녀가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어서, 노승이 처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하룻밤 묵고 갈 수는 없겠는지요?”라고 물었다. “집에 어른들이 계시니 여쭈어 보면 쉬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라는 처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승은 거기에서 그만 몸을 벗어버리고 처녀의 뱃속에 들어가 잉태되어 버렸다. 이 아이가 다섯 살이 되어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도신 선사를 찾아가서, “재송(栽松)이가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방 앞의 소나무를 가리켰다. 이 아이가 사조 도신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오조(五祖) 홍인 선사이다.
오조선사가 널리 선법을 펴다가 열반에 들 즈음 제자들에게 일렀다.
“내가 열반에 들거든 육신을 화장시키지 말고 그대로 조사전(祖師殿)에 안치해 두어라. 내가 다시 몸을 받아올 때에는 그 전생신(前生身)이 한 손을 들 것이다.”
그로부터 삼백여 년이 흐른 후에 오조 스님의 한 손이 들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모두 선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노승(老僧)이 조사전에 들어가서 오조 선사의 형상 앞에 서서, “옛날에 이렇게 온 몸으로 갔다가 오늘에 이렇게 다시 왔으니, 그대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대를 아노라.” 고 하였다. 이 노승(老僧)이 바로 오조산(五祖山) 법연(法演)선사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방하여 경전의 글자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한 선불교에서도 윤회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 그렇다면 현생의 고통을 자살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으로 벗어날 것인가?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다(三界火宅四生苦海)’라는 표현이 있다. 삼계(三界), 즉 중생이 사는 이 우주는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즉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괴로움(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이런 괴로움일 것이다. 붓다는 인생의 이런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한 설법이기도 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四聖諦)는 붓다가 깨달은 바로서 인생은 괴로움(苦)이라는 진리, 이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진리, 집착을 절멸(絶滅)하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방법에 관한 진리 등 네 가지를 뜻한다.

 

 

Ⅳ.결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괴로움을 끝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생(現生)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살하게 되면 다음 생에 지옥, 축생, 아귀계의 삼악도(三惡道)에 태어나서 더 큰 고통을 받게 되지만,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없애는 올바른 수행을 실천하게 되면 인생의 고통을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하늘(四禪天)에서 바늘을 던져서 겨자씨를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하는 것이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므로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됨으로써 인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현재의 삶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자살이라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을 할 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백도수(2002), 불교에 나타난 자살에 대한 고찰, 인도철학, vol.11 no.2 (12), 203-228 쪽.
성철(1971), 백일법문 상, 장경각.
안양규(2002), 붓다의 입멸과 관련한 아라한의 자살, 불교문화연구, Vol. 3, 5-34쪽.
역경위원회, 한글대장경 , 동국역경원.
이기영(1998), 불교개론강의 상권, 한국불교연구원.
진제(1993), 돌사람 크게 웃네<石人大笑>, 백광.

중심 단어: 자살. 인생고. 불교. 윤회. 깨달음.


Abstract

Buddhistic approach to the suicidal problem
-With the special reference to Samsara (cycle of rebirth)-

Moonsung Rhee, M.D.

The most people who try to commit suicide seem to throw away their lives for the purpose of quitting pains of their lives because they think everything will come to an end if they die. But there is the possibility of the life after death. That alters the case. The sufferings of their lives might be continued and become more severe in the future life. Therefore on-e who intends to commit suicide has to check up on whether there is the life after death or not. But what can verify the existence of the life after death? Modern science does not admit the existence of it because on-ly the thing that can be proved by evidence can be an object of modern science. Contrary to the scientific standpoint, the most religions seem to admit the existence of the life after death. on that account the people with scientific attitude seem to commit suicide for the purpose of quitting bitters of their lives more than people with religious attitude. However, even the religious people in modern society seem to lose their belief on the life after death as modern science is developed.
It is evident that science can't prove not on-ly the existence of the life after death but also the non-existence of it. Therefore on-e who intends to commit suicide must give careful consideration to the religious teaching on the life after death. If it is true that everything will come to an end when we die, sufferings of our life will also come to an end. But If on-e who killed on-eself is born again in the future life and suffer from the more severe pain than present life, suicide will be a very stupid mistake. It is in this context that I think religious approach will help us solve the suicidal problem. So I gave a consideration to the suicidal problem from the standpoint of Samsara (cycle of rebirth).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Buddha, when on-e commits suicide for the purpose of quitting pains of on-e's life on-e is born again in the future life and suffers from the more severe pain than present life. But on-e can be free from on-e's pain by the practice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Buddha.
The conclusion is that on-e has not to make a stupid mistake like suicide for the purpose of quitting on-e's pain but has to try to attain Buddha's Awakening and make on-eself free of on-e's pain.


KEY WORDS: Suicide. Pain of life. Buddhism. Samsara. Buddha's Awakening.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40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