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佛陀의 四念處觀연구

수선님 2019. 11. 3. 12:10

佛陀의 四念處觀연구


東國大學校 大學院 禪學科 김 쥬 디(慧見) 碩士學位論文 (1998)

I. 緖言

1. 硏究의 目的

禪의 원류를 보통 古代 인도사상에서 찾는다. 하지만 禪이라는 것은 사상적 이해, 교리적 이해, 또는 문헌학적 이해보다는 禪 자체가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수행법이 대두되어 왔다. 佛陀 석가모니 이래로 불교는 동남아시아 및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다양한 문화를 거치면서 그 방대한 사상체계와 수행체계는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所典을 중심으로 하는 宗派적 불교는 그 經의 내용에 따라 수행론도 다양하다. 불교적 禪의 淵源을 인도에서 찾을 수 있다면, 초기 佛陀가 직접 깨닫고, 가르치신 수행법의 조명은 오늘날 다양해진 禪수행법을 이해하는 데에 기점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재 한국에서 이해하고 있는 불교, 즉 禪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는 근간 들어, 남방불교 수행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은 비교적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다는 佛陀의 止觀法인 vipassanā이다. 남방불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근래 한국불교에서도 아함에 설해졌던 佛陀의 수행법에 대해 지대한 관심으로 연구되고 있는 바이다.

주로 중국불교, 즉 보리달마를 初祖로 하는 曹溪 전통의 禪風을 잇고 있는 한국불교로서는 vipassanā의 수행법이 생소할 것이며 역사적 근거로 보자면 달마로부터 부정되고 있는 인도적 수행법이기도 하다. 次第적인 수행법으로부터의 전환은 頓悟적인 오늘날의 祖師禪의 바탕을 이루었다. 불교의 많은 종파와 사상들 중에서 禪宗은 일찍이 ‘心宗’이라 하여 佛陀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실천수행의 근본을 마음으로 삼아 동양체제에 맞게 발전시켜 왔다. 그럼에도 선종 내에서도 頓悟니, 漸修이니 하는 두 가지 견해의 사상적, 실천적 갈등은 항시 있어온 듯 하다. 선종의 출발은 사실 佛陀의 정신을 선의 실천으로 재정립하고 佛陀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復古운동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중국인들의 사유방식과 풍토에 알맞은 현실적인 생활종교로 전개되었고, 중국에서 완성된 조사선은 성립과정에서 그 정통성을 항시 佛陀에게 두었으나 현재 일각에서는 佛陀 당시로의 완전한 복고운동으로서 佛陀의 수행법, 즉 vipassanā 觀法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항시 그 사상과 傳乘의 정통성을 佛陀에게 두었던 선종은 왜 수행법에서는 그 정통성을 부정하였던 것일까. 그렇다면 佛陀의 수행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佛陀시대의 수행법과 오늘날 禪의 전통을 가진 한국불교에서 행하고 있는 수행법들은 얼마나 같고 다른 것일까. 그에 대한 차이점들은 앞으로 더욱 硏究하여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지만 본 論文에서는 우선적으로 초기 佛陀의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觀法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초기 佛陀의 수행법의 핵심을 밝힘은 그 이후 각 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해온 선법의 이해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佛陀가 그 시대에 고민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구했던 인간의 고통과 고뇌의 문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佛陀의 수행법, 즉 인간고뇌에 대응하여 그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얻는 실질적인 해결책으로써 제시한 觀法, 과연 그것은 어떠한 수행체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보통 佛陀의 수행체계를 말할 때 止觀雙運, 더 나아가서는 戒. 定. 慧 三學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체계는 지관쌍운이라는 말이 내포하듯이 서로 떨어져서 따로따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용되는 체계이며 각각에는 서로의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만 본 논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관법에 있다. 실제로 佛陀의 사상은 고대 힌두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수행의 출발이 바로 힌두전통의 수행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그가 正等正覺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전통을 일부 수용하고 일부는 비판하면서 세운 교설이란 극단적 사상과 수행법을 뛰어넘는 中道의 입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불교가 힌두 전통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것을 들자면 自我의 實體에 대한 부정으로써 佛陀가 깨달은 三法印 중 無我說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아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수행으로써 주장된 것이 불교 내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행법인 vipassanā, 곧 觀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佛陀가 고대 힌두사상으로 부터 받아들인 것이 禪定 부분이라고 한다면 불교 내에서만 발견되는 수행법은 바로 vipassanā, 觀法이다. 이 관법으로 佛陀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고, 그 깨달음에 비추어 그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그들은 최고의 지위인 阿羅漢果를 성취했다고 하는 사실이 아함경 전반에 설해져 있음을 볼 때, 이 관법은 佛陀의 근본수행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소를 제공한다고 본다.


2. 硏究 방법과 범위

佛陀의 교설에 바탕을 둔 四念處觀法은 아함부 경전 중 『大念處經』에 그 내용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중심적 자료로 하되, 그와 관련된 내용들 역시 아함부 경전을 底本으로 하였다. 그 외에 아함부의 수행면을 총괄적으로 다룬 『淸淨度論』 및, 초기불교의 禪定觀을 다룬 다소 論文들을 2차 자료로 삼았다.

서론에 이어 II에서는 사념처관과 관계되는 佛陀의 깨달음을 살펴보고, 그 깨달음에 의하여 佛陀의 의문이었던 生老病死에 대한 실질적인 業論을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苦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제시되는 四聖諦와 八正道를 사념처관법의 成立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III에서는 本論의 사념처관법의 골격을 이루는 觀法의 意義를 먼저 밝히고, 禪定과의 관계에 비춰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IV는 본론으로서 身, 受, 心, 法으로 이어지는 四念處의 관법체계가 五蘊을 바탕으로 가설된 ‘나’의 존재론적 이해를 우선적으로 설립하고, 俗諦에서 眞諦로의 還滅緣起로서 제시됨을 주제별로 논의하고자 한다.

V는 十二緣起法과 관련하여 四念處의 특성을 수행의 果와 함께 총괄적으로 재검토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四念處觀法과 관련하여 먼저 정의 되어야할 意味와 요소들로써 관법의 기초적 이해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心의 기능적 이해와 認識者, 곧 ‘관하는자’의 준비적 이해이며, 그리고 인식되어지는 내용이다. 이러한 구조를 四念處觀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認識이라고 하는 것은 平常認識으로부터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다. 그 평상인식은 觀이라고 하는 새로운 인식방법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설해질 四念處의 觀의 의미가 우선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認識轉換의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즉 ‘나’로부터 시작하는 몸과 마음의 구성체를 바탕으로 觀의 인식작용은 더 나아가 法界의 實體를 깨달아 나아가는 구조에서 四念處觀은 三法印을 깨달음의 전제로 삼는 佛陀의 世界觀을 머금고 있음이다. 佛陀가 제시한 一乘道로써의 수행법의 체계는 我空의 이치에 도달하게 되며, 그것은 다시 法界인 대상의 이치를 규명함으로써 法空의 깨달음으로 도달한다는 구조를 대략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II. 佛陀의 世界觀

1. 四念處와 佛陀의 깨달음


우선 佛陀의 世界觀은 그가 이해한 인간과 세계를 바탕으로 해탈의 길로써 제시하게 되는 수행법의 성립배경을 제공한다고 본다. 佛陀는 수행법에 있어서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는 일부터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業, 곧 까르마(karma)의 개념을 접하게 되는데 까르마 사상은 인도의 거의 모든 사상 학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사상이다. 업의 문제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苦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에 있어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그 이해에 따라 고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이어지는 것이 인도 사상체계라 할 수 있고 불교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럼에도 佛陀는 고의 원인과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들과 견해를 분명히 달리하고 있다. 이 章에서는 佛陀 당시, 苦와 연결된 業의 문제에 있어서 그가 인도 전통사상으로부터 이해를 달리하게 된 동기와 그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업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해석을 첫 번째로 검토하고자 한다. 두 번째로, 因果가 가지는 윤리성 또한 佛陀의 수행관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업의 문제는 佛陀가 깨달은 사실, 곧 사성제 중 그 첫 번째인 苦聖諦와 관련하며 차후 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生, 老, 病, 死라고 하는 인간의 근본적 고통의 문제에 대한 의문을 안고 성밖을 나선 佛陀에게 있어서 이 네 가지 고통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話頭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스승에게서 받은 것도, 수행의 방편으로 채택된 것도 아닌 그의 內心에서 우러나온 話頭라 해야 할 것이다. 출가하여 당시의 고행주의적 전통과 위대한 요가 스승들로부터 無色界의 최고선정을 배웠지만1) 그것이 그의 근본화두인 생사를 뛰어넘는 無上正等覺을 얻을 수 없음에 스스로 어릴 적 체험했던 初禪의 경험에 비추어 그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진리에 대한 탐구에 들어갔던 것이 바로 正念正智(Sampajañña-sammasati)의 思惟法이었다.2) 여기서 우리는 佛陀의 禪定觀을 엿볼 수 있다. 佛陀의 깨달음에 대한 클로즈업은 그의 교화 전반에 강조되었던 苦로부터의 해탈을 향한 一乘道(Ekayana)로 설해진 四念處觀의 중요성을 말해 줄 것이다.3)


불타는 無色界 3禪에 속하는 無所有處定을 스승 알라라 깔라마로부터 사사받고, 다음으로 웃타까 라마풋다로부터 無色界 4禪에 해당되는 非想非非想處定을 경험한 뒤에 그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결론으로 그 이후 6년의 苦行에 들어간다. 그의 고행은 참혹하리만금 혹독한, 그야말로 고행의 극치였다. 이런 지독한 고행을 통하여 그는 인간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참으로 진실된 하나의 지혜를 명백히 터득했다고 한다. ‘깨달음의 길은 거기에 없었다. 깨달음의 길은 필경 다른 데에 있으리라’4) 하며, 고행을 저버린 후 마침내 보리수 밑에서 '욕심과 선하지 않은 일을 여의고' '마음집중'과 '관찰'에 몰입하여 기쁨과 법열이 넘치는 가운데 初禪에서 4禪까지의 선정을 차례로 진행해 나아가면서 三明智를 통해 윤회의 끝인 해탈을 성취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술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라앉고 순수하며, 청명하고, 순수 직관적이고, 청정하고, 순일하며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견고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관찰 쪽으로 마음을 챙겨 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고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이것이 고의 소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내 마음은 관능적인 삶을 동경하는 망상에서 벗어났다.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에서 풀려났으며, 무명에서 비롯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그리하여 이 같은 자유와 해탈 안에서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윤회는 이제 끝났다. 더 높은 삶이 성취되었다.”5)


이와 같은 진술을 통해 그의 근본화두인 고통에 대한 해결이 풀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분명히 어떤 의도적인 思惟作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直觀적인 관찰을 위해 마음을 챙김(sati)으로 표현되고 있고 그것은 간곡히 무언가를 알고자하는 강렬한 의도를 지녔다. 苦의 실체에 대해 알고자 하는 sati의 마음집중과 관찰력의 작용은 그것에 대한 智로 이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4선정이다. 佛陀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 특별한 선정은 사실 그가 이전에 성취하였던 무색계 선정보다 낮은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색계4선이 깨달음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연구가들의 추측은 이러하다. 佛陀의 열반시 선정의 과정을 보면 초선에서 차례로 멸진정까지 들었다가 다시 초선으로 내려온 후 다시 4선에 들어, 4선에서 입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6) 이를 미루어 보아 佛陀는 성도시에도 이와 같은 선정의 순서가 있었고 止觀均等의 4선에 머물러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이다.7) 경전 상에는 佛陀성도시, 무색계선정에 대한 언급이 없었을 뿐더러, 오직 4선정에서의 三明智와 해탈을 진술하고 있다.8) 그러나 이미 이전에 성취하였던 무색계 선정의 경험에 비추어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4선정의 특성이다. 4선정은 색계선정으로서 止와 觀이 균등하여 깨달음과 신통에 들어가기 가장 좋은 상태라고 보고 있다.9) 무색계선정에 들었었다가 다시 4선정으로 내려왔다 해도, 4선정 자체는 그 안에 直觀으로 향해갈 수 있는 觀의 요소가 고의 근원인 무명을 비추어 보기에 가장 적절했다고 보는 것이다. 직관으로 비추어 봄으로써, 無明의 환상에서 벗어 날 수 있었으며, 明으로의 전환은 무명으로 연기된 12緣起가 차례로 한꺼번에 滅하여지는 解脫을 가져 왔던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언가 안다(智)는 것이다. 그 智는 또한 관념적으로 아는 차원으로부터 구별되는 봄(見)으로도 표현된다. 佛陀가 깨달은 法相은 존재의 참모습, 그것을 實相10)이라 할 때, 실상의 발견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生滅)이 실상(不生不滅)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을 여실히 봄(苦. 集)과 실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滅)과 그를 위한 수행법(道)의 파악까지 모두 그의 깨달음의 내용에 담고 있다.11)

4선정은 그 자체가 念處觀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12) 그 이후로 해탈을 위한 一乘道로서 설해지는 사념처관법에는 4선정의 성취가 함께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4선의 선정은 마음의 停止가 아니다. 그것은 思惟에 의해 心의 전환 과정을 보여준다.13) 4선정은 자체로서 觀法을 구비하고 있으며, 觀의 측면에서의 사념처는 4선정과 不二의 관계라 볼 수 있다.


“비구여, 네 곳에 마음 집중하는 수행법이 있느니라. 무엇이 네 곳이냐? 몸에서 몸을, 감각에서 감각을, 마음에서 마음을, 법에서 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 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하면서 세상의 욕망과 슬픔을 극복하여 수행하느니라. 몸(감각, 마음, 법)에서 몸을 관찰하는 동안 몸(감각, 마음, 법)에 대한 어떠한 욕망도 제거 하느니라. 욕망의 제거를 통하여 죽음이 없는 경지를 실현하느니라.”14)


이것이 苦의 滅을 위한 수행법으로써 그가 깨달은 四念處觀의 내용이다. 苦의 근원인 無明을 明으로 비추는 것이다. 明으로 비춤으로써 無明으로 연기된 12緣起가 차례로, 한꺼번에 滅하여지는 實踐法인 것이다.


2. 業에 대한 異見


언급한 바와 같이 業思想은 佛陀 당시 인도의 여러 학파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개념이다. 業의 개념은 인간의 고통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근본적 고통은 아무래도 삶의 유한성,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적인 것 같다. 佛陀가 궁극적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인간의 고통인 죽음이었음을 볼 때, 보편적으로 죽음을 상대로 추구하게 되는 不死의 길은 바로 輪廻의 고통으로부터의 解脫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관계하여 인도의 학파들이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던 업의 개념은 사실 미묘한 이해차이에 의해 상당히 다른 實踐論을 전개하고 있다. 우선 그 차이점을 크게 두 가지로 보기로 한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지배적인 사상체계에서 보았던 行業에 대한 개념과 佛陀의 개념이다.


먼저 Veda 경전을 근본으로 하는 바라문교의 업에 대한 개념은 祭祀儀式과 관련한다. 그에 대한 배경으로 아리안족들의 서북인도 침입(B.C 15C)이래로 소수민족으로서 다수 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한 종교적 수단으로 신에게 祭式을 행하였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不死의 삶을 위해 神을 향해 기원하게 되었는데, 여기서의 업은 제식과 같은 성스런 행위를 의미한다. 제식을 행하는 사제에게는 신 다음으로 절대적인 권위가 주어졌으며 제식은 비인간적인 희생제와 같은 행위로 발전하게 된다.15)

이에 대해 우파니샤드 철학은 바라문교의 이 같은 외형적이기만 한 제사의식에 대한 회의감으로 비판하기에 이르렀고 신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不死를 성취하는 행위의 전반적인 가치를 인간의 내적인 심층에서 찾았고 마침내 ‘梵我一如(brahmdn-ātman -ekaya)를 발견,16) 인간의 심층궁극은 곧 대우주의 그것이라는 전제에서 凡과 我를 일치시키는 작업으로써 인간심리의 內的인 요가 명상이 거룩한 業, 곧 行爲라고 생각하였다.

또 한편 자이나교에서도 베다전통의 제식주의에 대하여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인간 존재의 실존을 형성하는 윤회의 주체로써 파악하였다.17) ‘業은 生死의 원인이며 생사는 고통이다’18) 그들은 지바(jiva)라고 하는 순수한 本性이 업 물질과 결합하여 身, 口, 意의 행위를 일으킴으로써 본성이 덮어지고 구속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jiva가 본성대로 자유로이 解脫되기 위해 새롭게 부착된 업의 流入을 막고, 이미 붙은 업은 苦行(tapas)에 의해 滅해야 한다는 사상이 성립되고, 이는 苦行主義 수행으로 발전한다. 물질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육체 학대와 같은 엄청난 고행에 대한 찬양은 자연히 현실 부정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宿命論적인 면을 지니게 된다.19)

이러한 인도의 대표적인 사상계에 비하여 佛陀는 業, 즉 行爲에 대하여 더욱 세밀한 분석을 한다. 보편적으로 業, 곧 까르마(karma)의 통상적인 의미는 '行爲'를 일컫는다. 그것은 ‘만들다(kṛ)'를 語源으로 하며, 作用을 의미한다. 그러나 업은 因果의 관계로 이어지므로, 행위(業)라고 할 때 드러난 행위 자체만 가지고 업이라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행위를 세밀히 검토해 보면 그것을 있게 하는 동기, 즉 意志를 동반하고 있다. 먼저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意志가 일어나고(samkalpa), 그것이 行動으로 옮겨지며(karman), 다음으로 그에 대한 結果가(pariṇāma) 따른다.20) 말하자면 원인에서 결과, 즉 인과 관계를 원리로 하고 있다. 따라서 행위로 일컬어지는 업의 사실상 구조는 다음과 같이 분석 될 수 있다.


佛陀는 위의 세 가지 업의 형태 중 행위의 원인 因子를 제공하는 의지를 行으로 본다.21) 따라서 업으로부터의 해탈은 바로 이 行의 所滅을 의미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業(kamman)을 알아야 한다. 모든 업의 연유, 발생인을 알아야 한다. ... 나는 업이란 意思(cetanā)라고 설한다. 의사가 작용하여 身, 口, 意에 의해 업을 만든다. ... 무엇이 諸業의 연유, 발생인인가? 비구들이여, 접촉(觸:Phassa)이 제업의 연유, 발생인이다”22)


의지는 곧 마음작용이다. 따라서 外道들이 주장하는 바, 業은 宿命이나 神의 뜻이나, 또는 우연히 생긴 것이라는 說을 佛陀는 비판23)하였고, 업은 의식상에서 觸을 緣하여 生起하는 것으로 自業自得이라는 업의 自意的 因果性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佛陀의 업의 개념은 인간과 우주의 온갖 변화의 眞實相을 뒷받침하고 있는 緣起法으로 해석되고 있다. 의지가 곧 행위의 근본이라면 그것은 善因樂果, 惡因苦果라는 倫理的 인과성을 내포한다. 이에 따른 修行論은 자연 모든 善業을 짓고 모든 惡業을 멀리하도록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佛陀의 수행체계인 戒. 定. 慧 三學 중 戒學에 특히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佛陀가 제시하는 수행법에는 곳곳에 善惡을 구별하여 行할 것이 강조 되어있다. 예를 들어 八正道에서 正語, 正業, 正命은 올바른 말과 행위와 생활수단에 대하여 說하므로 戒學에 속한다. 이러한 계학의 구조는 37助道品중 4正斷, 4如意足, 5根, 5力, 그리고 7覺支에 반복되고 있다. 가장 선두에서 善惡을 가려 끊고 바른 마음을 가져야하는 덕목으로써 항시 강조되고 있다. 業의 의도적 측면에 있어서 貪, 瞋, 痴의 有無는 곧, 業의 有無를 결정한다. 같은 行이어도 意圖에 따라 果가 다름을 이와 같이 說하고 있다.


There are three causes for the arising of kamma: non-greed, non- hatred and non-delusion. The kamma done with one of these, caused by it, arising out of it, is skilful, not blameworthy, and brings happiness(sukha-vipāaṃ); it conduces to the destruction of kamma, not to the arising of kamma.24)


貪, 瞋, 痴에 의해 일어난 業이 아닐 때에는 그 果는 행복이며, 또한 業의 所滅을 가져온다고 하고 있다. 이 경구에서 보면 佛陀 역시도 業이란 意圖에 의해 생성되지만 결론적으로 業의 所滅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業의 소멸은 곧, 貪, 瞋, 痴의 소멸과의 관계로서 善.惡이라는 윤리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貪, 瞋, 痴의 의도가 없는 行은 곧 苦果 대신 樂果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이다. 業은 無明을 바탕으로 하는 行임에 반대하여 苦가 따르지 않는 行이란 明을 바탕으로 하는 行과 관련한다. 이러한 佛陀의 業說을 바탕으로 하여 苦에 대한 극복으로서 제시되는 修行論은 倫理的이며, 實質的이다. 결론적으로 佛陀의 業의 개념은 결국 ‘自身’이라는 인간이 그 주체이며, 그 주체는 마음으로 귀결 시킨다. 업으로써 이루어지는 고의 근원인 마음에 대하여 정확한 心理學的 분석과 함께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佛陀의 修行論이 뒤따른다.


3. 苦에 대한 佛陀의 해결책


위에서 佛陀의 業의 개념을 살펴볼 때 중요한 것은 行(Sankhārā)의 작용이었다. 왜냐하면 行(業)은 苦의 씨앗이 심어지는 밭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25) 이를 미루어 보아 行은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意圖라고 하는 心理的 因子이다. 의도는 실현시키는 창조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緣起法에서의 行, 五蘊에서의 行은 무언가 길러내는 밭과 같은 것으로 표현 가능하다. 業은 곧 行이고, 行은 意志적 作用이며, 意志적 作用은 곧 마음이라고 밝혔을 때 佛陀가 마음에서 찾은 苦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苦(dukka)26)라고 하는 괴로움을 고찰해 보면 그것은 身體的, 心理的 부자유로부터 오는 불쾌감, 불만족 등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자유의 반대이다. 三法印 중 一切皆苦는 一切가 의미하는 十二處에 접수되는 모든 감각을 苦라 상정한 것이다.27) 苦의 본질은 苦聖諦 중 集諦에서 밝혀지는 바, 그것은 영원하지 않은 五蘊을 ‘나’라고 집착 하는 데에 있고, 그것은 존재로의 맹목적인 욕망에 근거한다. 佛陀가 깨달은 四聖諦는 世間道(俗諦)와 出世間道(眞諦)를 모두 담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業의 滅인가. 비구들이여, 身. 口. 意 3業의 滅에 의해 해방됨이 業의 滅이다. 비구들이여, 業의 滅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8正道이다‘28)


苦의 원인에 대한 발견이 佛陀가 깨달은 내용이라면 苦의 滅도, 또 그에 이르는 길(道) 역시 모두 깨달음의 내용이 된다. 苦諦와 集諦는 緣起法에 의존한 五蘊의 실상을 말하므로 世間道에 속하며, 滅諦와 道諦는 十二緣起의 還滅과 그 실천적 방법을 설하므로 出世間道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위에 제시된 수행문인 八正道는 滅諦를 위한 實踐道이자 窮極의 삶이기도 하다. 八正道는 곧 中道를 의미한다. 그 체계는 습관적인 자기 괘락과 그 반대인 고행의 양 극단을 떠나 열반에 이르게 하는 올바른 길로서 戒. 定. 慧 三學의 구조로 說해진다.


“여래. 最正覺께서는 눈(眼)을 얻고, 지혜(慧)도 얻어서 모든 치우침에서 벗어나 스스로 涅槃을 이루었니라. 무엇을 中道라 하는가. 기실 그것은 八正道이다. 다시 말하여 正見,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이다.”29)


八正道의 내용 중 正見은 四聖諦를 아는 것, 正思는 바른 思惟로써 慧學부분에 속하며, 正語, 正業, 正命은 戒學에 속하며, 正精進, 正念, 正定은 定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30) 이중 수행의 핵심부분은 正念과 正定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正念은 Samma-sati라 하며 바로 四念處의 내용을 담고 있다. 正定은 四禪定의 내용으로서 正念의 四念處와 함께 止觀雙修로써 定慧雙修의 체계를 갖춘다.

佛陀의 苦에 대한 해결책을 정리하자면 世間의 성립을 설명하는 십이연기설을 바탕으로, 世間 성립의 원인(苦諦, 集諦)과 과정을 알아 이를 滅하는 것으로 팔정도의 수행을(滅諦, 道諦) 제시하는 것이다. 팔정도의 수행 중 四念處觀은 正念부분에 속하며 正定과 함께 五蘊이 ‘나’라고 하는 邪見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여 正見을 성취하도록 하는 佛陀 특유의 觀法이라 할 수 있다.


III. 觀의 意義

1. 佛陀의 禪定觀


觀의 意義는 禪定과 함께 四念處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먼저 불타의 禪定觀에 대해 살펴보고, 觀이라고 하는 특별한 思惟法과 관련하여, 禪定과 智慧의 필연적 雙修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佛陀의 선정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佛陀가 깨달음을 얻었을 당시와 涅槃시 취했다고 하는 4禪定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II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佛陀는 生老病死의 의문을 안고 만나게 된 스승들로부터 無色界禪定의 최고 경지에 속하는 無所有處(akimcanyayatana)와 非想非非想處(naiva-samjna-nasamjna-ayatana)의 禪定을 사사 받았으나, 그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선정들의 한계는 일단 선정에서 나오면 번뇌로부터 벗어난 평온한 상태가 유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궁극적인 苦의 滅은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31), 행한 것이 6년의 고행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육신만 해칠 뿐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自覺으로 결국은 그 고행마저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행한 禪이 바로 4禪이었다.32) 佛陀가 修定主義와 苦行主義의 극단적인 수행을 버리고 4禪을 행하였을 때는 이미 그는 中道의 行을 택하였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것은 佛陀가 설명하는 4禪의 내용33)에서 보여지는 선정의 과정단계에서 正念正智로 표현되는 ‘念:sati'이라든가 ‘마음의 향함’이라든가, ‘관찰’이라든가 하는 의식의 작용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34),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4禪定을 佛陀 특유의 禪定觀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佛陀가 깨달음을 얻게 된 4禪은 특별한 觀法을 동반하는 소위 止觀雙運의 禪定이라 할 수 있겠다. 4禪은 아함부 경전의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初禪 : 尋(vittaka)이 있고 伺(viccāra)35)가 있어서 대상을 관찰, 사유 함으로써 欲界에서 벗어나며 선하지 않은 법도 떠나니 이로 인한 喜樂(sukka)이 생긴다.

2禪 : 尋(vittaka)와 伺(viccāra)도 쉬어 마음이 고요하며 尋(vittaka)와 伺(viccāra)가 사라진 定에서 희락이 생긴다.

3禪 : 그 희락마저도 버리고 평정에 머무르면, 正念(sammasati) 正智(Sampajañña)로써 몸에 희락을 느끼니 이것은 성인들이 이른바 ‘떠나 있어 바라만 볼 수 있는(念:sati) 희락을 느낀다’라는 3禪을 갖춘다.

4禪 : 모든 희락도, 苦도 남김없이 떠나서 슬픔도 기쁨도 사라지면, 苦도 없고 樂도 없는 淨念一心이 된다.36)


이것을 色界 4禪이라고 하는데 다시 정리해 보면, 初禪은 五官으로 느끼는 欲界37)에서 시작한다. 오관으로 느끼는 욕망을 버리고 악한 생각을 버림으로써, 기쁨이 생기고, 2禪에서는 그 같은 희락도 아직은 대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므로 대상을 떠난 內心의 희락에 머문다. 3禪은 마음의 喜樂도 욕구임을 자각해, 그것을 버림으로써 평정한 마음을 갖추는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正念正智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正念正智는 sati와 Sampajañña라고 하는 直觀的 사유작용이다. 이를 미루어 보아 4禪의 내용은 主觀과 客觀의 대립 가운데 대상에 대한 欲貪과 주관의 감정이 滅한 상태이며, 욕망과 감정을 떠나 대상이 순수하게 인식되는 상태라고 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佛陀가 成道시 이 같은 4禪을 행하여 三明智를 얻음으로써, 전생의 일을 다 아는 宿命通과, 중생의 業의 재생과정의 인과응보의 이치를 아는 天眼通과, 번뇌의 漏가 다한 지혜의 漏盡通으로 成道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깨달음의 내용은 四聖諦였음을 설하고 있다.38) 佛陀가 無色界禪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고 진술하고 4禪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거는 4禪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살펴보면 그 안에 戒, 定, 慧가 다 갖추어져 있으며, 이는 4禪定이 깨달음을 얻기 좋은 상태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4禪은 止觀均等이라 하여 止와 觀이 알맞게 혼합하여 지혜에 의한 관찰을 이루고 깨달음과 신통에 들어가기에 가장 좋은 상태라고 한다.39) 사성제의 깨달음은 모든 苦의 원인부터 滅하는 道果까지의 여정을 간파하고 있는데 이는 곧 緣起法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解脫은 業의 輪廻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 과정을 佛陀는 이와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라앉고 순수하며, 청명하고, 순수직관이고, 청정하고, 순일하며,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견고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관찰 쪽으로 마음을 챙겨 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苦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이것이 苦의 소멸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이것이 苦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았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아서 내 마음은 관능적인 삶을 동경하는 망상에서 벗어났다. 존재하고자 하는 渴望에서 풀려났으며, 無明에서 비롯된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이 같은 자유와 해탈 안에서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輪廻는 이제 끝났다40)


欲界와 色界 그리고 無色界에 속하는 모든 선정, 즉 4禪 8定의 체제를 滅盡 3禪과 4禪에서 이어지는 正念正智가 바로 연기법의 사유를 위해 적절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럼에도 佛陀는 그 이후로 연기법에 근거하여 欲定을 포함하여 완벽한 선정의 체계를 九次第禪定으로 시설하고 있다.41) 선정의 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行을 滅盡 하는 방법으로 구차제정을 설하고 있으며, 行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無明을 滅하기 위한 것은 智慧라고 본다. 行의 마음생성 과정을 멈추는 것이 心解脫이라면, 마음의 근본적인 어두움인 無明(근본번뇌)을 제거하는 것이 慧解脫인 것이다.42)

우리는 佛陀가 8선정의 최고 경지라고 생각했던 非想非非想處定으로궁극적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서43), 궁극적 깨달음은 단지 行의 滅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을 있게 하는 무명은 제거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명의 멸을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4선정의 智慧觀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智慧, 곧 밝음(明)은 어두움, 즉 잘못된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이를 근거로 해서 佛陀는 무명으로 緣起하는 중생계의 본질을 사유할 수 있었고 그것의 還滅하는 緣起도 알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還滅緣起를 위해 제시된 수행법, 더 정확히 말하여 인식법은 行과 無明을 제거하기 위해 시설되었으며, 禪定과 智慧의 雙修를 강조하였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정혜쌍수의 수행문은 수행자의 근기와 취향에 따라 다양한 방법론을 펴고 있다.44)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 법을 떠나지 않는데 samatha 수행과 vipassanā 수행이다.


마땅히 두 가지 법으로써 마음을 오롯이 하여 정미롭게 思惟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止와 觀이다...이른바 성인의 제자는 止와 觀을 함께 닦아서 모든 解脫의 세계를 얻는다.45)

九次第定에서의 滅盡定은 想과 受의 작용이 멸하여 거의 죽음의 상태와도 같다고 한다. 현상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은 ‘想’의 작용을 필수로 한다. 현상을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있고 난 후 智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想이 먼저고 智가 다음이다... 想의 등지가 있는 만큼 智와 通達이 있다’46)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想은 正念을 의미하고 智는 正智를 의미한다고 본다. 4禪은 憂. 喜. 苦. 樂 등의 감정적 동요와 집착을 일으키는 受의 작용이 정화되는 과정으로, 4禪의 상태에 이르러서는 애욕 등의 감정에서 벗어나 잘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현상들의 변화를 세세히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로 觀을 계발하기 좋은 상태라 할 수 있다. 4無色定은 想의 작용마저도 그치므로 內心의 고요와 평온에 깊이 몰입되어가는 상태이다. 따라서 지관쌍수의 수행에서는 4선정에 머물면서 法理에 대한 觀慧를 닦아나가는 것으로 본다. 지관쌍수의 선정은 止중심의 선정보다는 얕고 순간적인 집중이 연속되는 상태이지만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적절한 상태라고 한다.


경전 상에서는 佛陀의 선정에 있어서 四禪定과 九次第定의 체계는 어떤 것이 正統인지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47) 그것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제시되었고, 그중 四念處와 관련하여 제시된 선정은 보편적으로 四禪定에 속하며, Buddhagosa에 이르러 四禪定과 四無色定은 통합적인 정통으로 인정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Buddhaghosa에 의하면 滅盡定은 이미 八禪定을 성취한 不還果와 阿羅漢果를 성취한 자만이 들 수 있는 것이라 한다.48) 滅盡定은 살아있는 상태의 열반으로서 바라문 수행에서의 한계점을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止와 觀의 결정적 산물이라고 하고 있다.


2. 觀의 意義


四念處觀의 수행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觀이라고 하는 佛陀 특유의 사유법에 대한 意義를 먼저 고찰해 볼 필요성이 있겠다. 觀은 佛陀 수행법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고 禪定의 차원을 보다 실질적으로 昇華시켰다고 볼 수 있다.

팔정도의 중도체계에서 正念과 正定은 三學 중 定學에 속한다고 언급하였다. 두 가지가 함께 定學에 속하는 것은 선정과 지혜관찰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듯한 수행법이 실은 서로 필수적으로 함께 닦아져야 하는 관계로 묶어진다. ‘觀’한다고 하는 것은 대상을 사실 그대로 직관하며 분간하여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觀’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직관의 의미는 그만큼 우리의 평상 인식에 오류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觀’의 역할은 경험적인 평상 감각 의식인 분별지로부터 直觀으로의 확장을 유발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49)

Pāli 경전 상에서 觀을 의미하는 용어는 다양하게 구사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正念의 또 다른 강조법이나, 일면을 나타내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므로 정념에 통합된다. 우선 정념에서의 念인 sati를 살펴보면, 사전 상에는 記憶(memory), 認識(recognition), 意識(consciousness) 등의50) 정신작용과 두 번째로는 의식상에서의 止적인 면이 강조되는 주의집중(bare attention), 정신차림(mindfulness)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전 상에서 正念은 隨念과 億念의 두 가지로 설하고 있는데51) 隨念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바, 생각을 갖지 않는 주의 집중과 같은 의미를 갖고, 憶念은 생각을 갖는 기억, 인식 등을 의미한다고 본다. Buddhaghosa는 sati의 특성을 ‘흔들리지 않고 명심하며, 대상을 대함에 있어 몸, 감각, 마음, 법에 정면으로 직시(直視)하여 확고부동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며, 여섯 감각문의 문지기로서 굳건하게 마음집중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52)

sati는 통합적으로 정신집중을 동반한 사유력을 의미하는데. 경전 상에서 sati는 sampajañña(正知)라는 용어와 함께 종종 사용되고 그의 합성어로 sati-sampajañña로 표현되기도 한다.53)


비구는 念正知(sati-sampajañña) 하면서 때를 보내야 한다...어떻게 念(sati)하는가? 四念處를 隨觀(anupassin)하여 머무르며 열렬히 正知有念 (sampajāno satimā)하여서 세간의 욕탐과 근심을 조복한다...54)


보통 sampajañña는 sati와 거의 같은 의미라고 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念正知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념의 bare atttention이라는 마음집중의 止적인 면과 正知의 그로인한 분명한 이해력, 또는 통찰력의 의미는 함께 止觀의 구조를 형성함을 알 수 있다. 사실 念 자체에도 지관의 의미를 담고 있으나 念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念正知로 표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觀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용어로 anupassanā(隨觀)가 있는데 隨의 의미를 볼 때 동작이나 행위에 뒤따르는 관이라 볼 수 있고, vipassanā는 vi의 분리, 구별이라는 뜻과 passana의 ‘바로본다’의 의미의 합성으로 여러 가지 대상에서의 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vipassanā는 통합적으로 알아차림과 ‘꿰뚫어 봄’과 같은 위주의 뜻으로, 통찰(accurate awareness)이라고 하는 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설하고 있다.


“vipassanā를 닦아서 무슨 뜻을 성취하는가? 지혜(paññā)를 닦는다. 지혜를 닦아서 무슨 뜻을 성취하는가? 있는 바의 無明을 끊는다... 이와 같이 무명을 여의어서 慧解脫한다.”55)


이와 같이 觀은 智慧의 획득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世間 生滅法의 근본인 無明을 제거하여 明으로 회복시키는 강력한 작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문자대로라도 어두운 無明緣起의 實相을 여실히 觀으로 비추어 밝은 지혜로 전환됨은 世間道에서 出世間道로의 전환이며 慧解脫이라고 하는 것이다.

sati는 patthana와 함께 굳건하게 자리 잡음을 뜻하는56) 념처(Satipaṭṭhāna)로도 쓰여지며, 념처인 satipattana는 십이연기설상의 6處(tana)에서 tana가 의미하는 의식 성립 영역과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念處法은 6入處에서 觸을 인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感覺과 愛着으로 흘러가는 識을 다스리는 것이다. 감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도 같이 말이다. 處는 어떤 존재성립의 바탕이 되는 영역, 아직은 분별되지 않은 영역을 뜻한다. 따라서 念處의 수행은 이직 분별되지 않은 영역에서 마음집중과 알아차림이라는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마음으로 觸에 인연하여 접수된 緣의 흐름의 길에서, 첫째는 흐름을 늦추는(적어도 일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작용으로 유도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緣起의 흐름을 멈추고, 還滅로 이끌 수 있는 기능을 가진다.57)


나는 저 고행을 완전히 버렸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고행을 버린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이다. 흔들리지 않는 正念을 가지고 깨달음에 도달했으니 정말로 잘한 일이다.58)


佛陀가 고행을 버리고 4선정에서 병행한 것은 바로 正念의 觀法이었음을 위와 같이 술회하고 있는 것이다.


IV. 四念處의 觀法

우리가 왜 수행을 해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하며,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다음의 경문은 사성제의 형식으로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어떤 법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깨쳐야 할 법으로서 그것을 다 알고 깨치겠는가. 이른바 名色이니라. 어떤 법을 마땅히 알고 끊어야 하는가. 이른바 無明과 有愛니라. 어떤 법을 마땅히 알고 證得해야 하는가. 이른바. 明과 解脫이니라. 어떤 법을 마땅히 알고 닦아야 하는가. 이른바 正觀이니라.59)


바로 알아야할 덕목으로 五取蘊이 우선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몸과 마음으로 된 ‘我’라고 취착되는 가장 근본적인 허상을 깨는 일이며, 그 허상을 깨기 위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게 하여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으로 이끄는 無明과 愛貪의 마음을 끊어야 하며, 그것을 끊음으로서 ‘我’에 대한 바른 앎(明)과 자유를 얻으며, 그 방법은 바로 禪定과 知慧觀法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知慧觀法으로 제시되는 사념처관 중에서 身觀, 受觀, 心觀은 우선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있는 ‘我’의 실체, 곧 五蘊의 실체를 밝혀나감으로써 ‘我’가 공한 이치(我空)를 깨달아 가며, 法觀에서는 진실된 空性의 ‘我’는 물론 그 대상인 法 역시 같은 空性임을 自覺하여, 法다운 삶으로 다시 태어남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正念(samasati) 正知(Sampajañña)로 표현되는 念處觀은 그 자체에 止法을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四念處觀에서는 따로이 禪定을 닦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행되어지는 체계이므로 사념처관의 과정 중에서 4禪定의 경지가 함께 무르익어 간다고 할 것이다.


1. 身念處觀

1) 我의 존재론적 이해


眞理를 관찰하는 실질적인 필요성은 바로 ‘나’의 문제와 직결되어야 한다. ‘나’의 괴로움, 행복,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과 해결점은 바로 ‘나’로부터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에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실제적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佛陀는 연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主觀的 認識을 중심으로 一切를 설하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 여부도 결국 인식하는 주관으로써만 인정하는 것이다. 이 밖에 일체를 실존적인 것으로 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에서 오직 일체를 의식세계의 主客關係로 축소시킨 것이다. 佛陀가 보는 인간이란 존재는 五蘊의 집합으로 구성되며 그것은 물질적인 면(色과) 정신적인 면(名)을 가지고 있다.60) 이것을 名色(namarupa)으로도 표현한다. 오온의 구성요소는 色(rūpa). 受(vedanā), 想(samjnā), 行(sankhārā), 識(vijñāna)이다. 이중 色은 地, 水, 火, 風 등의 물질적인 것을 총괄하는 의미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정신적인 작용을 세분화 한 것이다. 는 감각과 같은 느낌을 말하고, 은 지각이나 관념을 뜻하며, 은 창조력을 가지는 의지력을 말하며, 은 분별하는 작용을 한다. 佛陀가 입증하려고 한 ‘我’라는 존재는 오온을 바탕으로 하며, 오온의 인식주체로서의 六內處는 대상(六外處)을 대함(觸)으로써 일어나는 識의 작용의 전부이다. 이러한 식의 작용, 즉, 한생각의 생멸과정을 12연기의 과정으로 포착해 낸 것이다. 佛陀는 거기에서 ‘나’라고 고정시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刹那生, 刹那滅의 반복적인 순환이었으며, 그것의 지속이 고정된 존재처럼 보였고 착각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諸法無我, 諸行無常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영원하지도 않은 오온을 영원하고 견고하기를 바라는 탐착하는 마음이 바로 고통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고, 잘못알고 있었던 사실(無明)은 탐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남으로써 明으로 전환되었고 이를 解脫이라 하였다.

世間法은 無明緣起에 의하여 生滅 변화하는 苦의 모습이고, 出世間法은 明으로 밝혀지는 常住不滅하는 法이며, 이것은 모든 것을 벗어난 자유라 하였듯이, 결국 ‘나’라는 것은 ‘法’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나’라고 상정되었던 개념들, 즉 개별적인 테두리와 그로 말미암은 客觀과의 상반되는 부딪침으로 고통이었던 것이, 그 개별적인 테두리를 벗어나, 객관과의 부딪침 속에서 걸림이 없는 자유의 모습으로의 전환을 단지 ‘나가 없다’라고 이해해야 할까. 깨달음(明)에서는 특정적으로 대상과 상반되는 ‘나’가 없다고는 하겠지만 오히려 한계적인 테두리를 벗어났으므로 ‘나’ 아님이 없는 이치로 확장, 승화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佛陀의 성도 후의 삶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行은 더 이상 이기심의 발동인 渴愛와 業의 因子로서의 行(sankhārā)이 아닌 利他心의 보살행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일체가 ‘나’아님이 없을 때는 대립되는 다툼이 없기 때문에 利己心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佛陀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는61) 의미를 새겨보자면, 진리의 입장은 단지 대상을 비출 뿐 그 대상과 상반되어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진리의 모습을 삶을 통하여 보여 준 것이 佛陀의 삶이었고 그 삶은 八正道의 삶이었다. 佛陀의 중도는 달리 독특한 색깔로서 세운 법이 아니라 단지 正의 입장으로서 비춘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있는 그대로 비추려면 거기에는 색깔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Ātman'에 대한 부정은 그것과 상반되는 無我의 개념이기 보다는 ‘Ātman'의 실체를 공성으로 비춰낸 것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62) 그것의 최종적 목적이라면 有라든가, 無라고 하는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有라 하면 곧 無로 돌아가고, 無라 하면 곧 有로 돌아가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고 자신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자신은 有限한 존재가 아니라 無限한 존재라는 法에 대한 자각으로 도달한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심, 자신에 대한 철저한 관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 이로써 법의 이치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四念處觀의 바탕이라 할 수 있다. 佛陀는 자신을 철저히 부정한 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귀의를 가르쳤다.63) 그것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인 법으로서의 자신을 뜻하므로 ‘自歸依, 法歸依’에서 自와 法은 동일시된다. 따라서 四聖諦는 俗諦로서는 無我를 설하며, 眞諦로서는 法을 설하고 있다. 無我로서 我가 無化되는 것으로 끝이라면 苦, 集, 滅, 道의 순서는 苦, 集, 道, 滅이어야 할 것이다. 八正道는 眞諦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八正道는 眞諦로 향한 滅法도 되지만 완성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2) 身念處觀法


身念處觀은 ‘나’라는 관문의 가장 기초적이며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물질적 몸에 대한 관찰이다. ‘나’라고 상정되는 오온의 구조에서 色부분에 해당하는 관법으로써 色에 대한 철저하고 세밀한 파해침을 전개하는데 『MahaSatipaṭṭhāna Sutta』에 설명된 身念處는 몸에 대한 관찰을 다음의 여섯 가지로 구분, 발전시키고 있다.


1) 숨에 대한 관찰

2)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

3) 몸의 행동에 대한 관찰

4) 몸의 구성에 대한 관찰

5) 몸의 요소에 대한 관찰

6) 몸의 부패에 대한 관찰


몸에 대한 관찰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호흡에 대한 觀이라 할 수 있으며 身念處에서 가장 주목할만 하다. 이를 隨息觀(ānāpāna sati)라 하여 『Ānāpānasati Sutta』64)와 같이 개별적으로 설해지기도 할 만큼 호흡관은 기초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四禪定의 성취에 유용하게 활용되며, 四念處觀의 기본적요소로서 그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는 바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하니 비구들이여, 어떻게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하여 머물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숲으로 가서, 혹은 나무 밑으로 가서, 혹은 공터로 가서 결가부좌하고 몸을 곧게 하여 생각을 가다듬고 앉는다.

그는 마음을 바르게 지니고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바르게 지니고 숨을 내보내고, 혹은 길게 들이 마시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이 마신다’라고 알아차리고, 또는 길게 숨을 내보내면서 ‘나는 숨을 길게 내 보낸다’고 알아차린다...

혹은 숨을 짧게 들이 마시면서 ‘나는 숨을 짧게 들이 마신다’라고 알아차리고, 또한 숨을 짧게 내보내면서 ‘나는 숨을 짧게 내 보낸다’고 알아차린다.

‘온몸을 느끼면서 나는 숨을 마신다’고 알아차려서 닦고 ‘온몸을 느끼면서 나는 숨을 내 보낸다’고 닦는다.“


隨息觀은 요가수행에서 행하는 호흡의 조절(調節: prānayāma)의 개념과는 다르다. 요가수행에서는 호흡 멈춤의 길이 조절65)에 중점을 두지만 수식관에서는 通察力으로 호흡의 들고 나는 자체를 관찰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불타의 수식관이 지향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호흡은 몸과 마음을 연결시켜주는 중간 역할로써 호흡관찰은 정신집중에 상당히 효과가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다. 엄격히 구분하자면 호흡관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4大(地. 水. 火. 風)중 바람요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요소에 대한 認識(알아차림: sati)은 점차적으로 非我적인 수행으로 발전한다.66) 호흡에 대해 알아차림은 더 나아가 몸의 느낌이나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연결된다.


“또한 비구여, 비구는 가면서 ‘나는 간다’고 알아 차리고 또한 머물면서 ‘나는 머문다’고 알아 차리고, 또한 앉으면서 ‘나는 앉는다’고 알아 차리고, 또한 누우면, ‘나는 눕는다’고 알아 차린다. 또한 이 몸이 어떤 상태에 놓였더라도 그와 같이 이것을 알아차린다.”


초기에 호흡의 들고 남에 대한 알아차림(awareness)은 부동한 자세에서 시작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익숙해지면 行, 住, 坐, 臥의 모든 상태에서도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隨息觀을 통해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不淨觀이 가능할 것이다. 不淨觀은 몸의 구성을 우선 보여지는 모습에서부터 찬찬히 살펴나가는 일종의 해부학과 같다.


“다음에 또한 비구들이여, 몸을 위로는 머리끝에서 아래로는 발바닥까지 가죽으로 된 자루에 불결한 것들이 담겨진 것으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머리카락, 털, 손톱, 이빨,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 늑막, 지라, 허파, 위, 위 내용물, 창자 내용물, 똥,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기름, 눈물, 임파액, 침, 콧물, 관절액, 오줌 등이 있다’라고 관찰한다.”


흔히 몸이 ‘나’라고 하는 고정관념은 이 부정관에 의해 낱낱이 해부된다. ‘나’, 또는 ‘나의 모습’,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 구성체를 客觀的으로 해체시켜 나가는 것이다. 보기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잘 포장된 나의 겉모습의 얇은 껍질만 벗겨 보아도 이런 구성체의 모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구성체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리 아름다울 것도,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닌 비인격적인 요소들인 것이다. 이 부정관은 그야말로 우리가 몸에 대한 환상과 더불어 ‘나’에 대한 환상을 깨주는 실질적인 觀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더욱 미세한 관찰의 현미경으로 몸의 구성요소(地, 水, 火, 風)를 관찰하는데 이것은 五停心觀67) 중에 界分別觀에 속한다. 몸을 포함한 일체 물질들은 고체성(地), 액체성(水), 열(火), 운동(風)등 네 가지 요소로 나누고 있는 학설은 인도에서 통용되고 있던 것이다.68) 이미 이루어진 상태의 모습에 끌리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인연하여 이루어 진 것인가의 ‘나’에 대한 근원적인 추적이 身念處의 핵심이다.

살아있는 몸의 관찰은 더 나아가 ‘나’의 몸이 필연적으로 격어야 할 ‘滅’에 대한 관찰로 이어진다. 그것은 죽음이 맞는 이런 구성요소의 흩어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屍身觀, 또는 白骨觀은 어쩌면 그의 四門有觀相 중에 생로병사에 대한 話頭의 절실함을 제공한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 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 佛陀는 9단계에 걸쳐 그 무엇보다 세세히 觀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또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치 묘지에 시체가 죽은 뒤 하루나, 이틀 내지는 사흘이 지나서 부어오르고 검푸르게 변하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과 같이, 그는 이 몸을 관찰하여 ‘이 몸이야말로 이러한 법, 이러한 것이요, 이것을 면할 수 없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몸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몸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觀法에는 세 가지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生(集起)하고 어떻게 滅하는가를 관하고 또 生과 滅을 함께 관하는 것이다. 물질의 해부된 모습은 그 모습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生滅한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즉,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은 분해되어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사실에 대해 관념적이 아닌 실제적인 관인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인도의 풍토와 장례관습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身念處의 과정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진실은 바로 三法印의 깨달음이다. ‘나’라고 하는 몸뚱이는 결국 비인격적인 요소들의 일시적인 모임으로 구성되었으므로 ‘나’라고 달아 매둘 수 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으며(諸法無我), 그 요소들은 인연따라 생과 멸의 끝없는 반복의 진행일 뿐이기 때문에(諸行無常), 나로서 영원히 남는 요소는 하나도 없기에 영원하지 않은 것은 고통(一切開苦)이라는 결론이다.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얼핏 보기에 희망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고통의 원인을 알게 되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모든 고통의 족쇄는 풀리게 되는 진실이 異面에 있는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괴로움에 대해 반대로 즐거움을 제공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如實히 비추는 불빛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추는 불빛에 의하여 동그란 것은 동그란 대로, 모난 것은 모난 대로 비추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은 바로 보지 못하여, 즉 正見의 결여로 동그란 것을 모난 것으로, 모난 것을 동그란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하는 데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身念處의 觀法은 상세하게 이제까지 ‘나’라고 오해하고 집착했던 몸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여실히 밝혀나가는 관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몽상에서 깨어남으로 이끄는 결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몸의 관찰로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2. 受念處觀

1) 受의 작용


앞서의 身念處는 五蘊 중 色에 대한 觀法이었다. 受念處에서의 受는 정신계의 첫 출입지라고 할 수 있다. 受는 十二緣起 上에서 六處가 觸에 의해 의식이 발생하는 첫 감수과정을 말한다. 그것을 감각 또는 느낌이라고 하는데 불쾌한 느낌(苦), 즐거운 느낌(樂),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을 佛陀는 모두 苦라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69) 그 이유는 無常하기 때문이다.

受의 작용은 六根이 觸을 연할 때 일어난다. 따라서 受는 身과도 관련이 있다. 더 자세히는 몸(五官)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受와 意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受가 있는 것이다. 受에서 감지되는 느낌들은 곧 관념을 짓고(想), 의지를 일으키며(行), 분별(識)의 과정으로 진입하도록 되어있으며 이 과정은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五蘊상의 마음의 작용이며, 그것을 12연기는 더욱 세세하게 한 생각의 進路, 즉 한 생각의 生滅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受는 分別, 또는 知覺으로 옮겨가기 이전의 감각상태이니 만큼 그것을 알아차리는 작업은 어느 정도의 집중력을 要한다고 하겠다. 受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受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 受念處이다. 이로써 수행자는 대상과의 접촉에서 그것에 동요되지 않고 결박되지 않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마음을 기쁘게 하는 대상을 볼 때에 그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거기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것을 두고 욕망을 품지 않는다. 그의 몸은 확고부동하고 태연하며, 그의 마음은 단단하고 요지부동이며, 마음을 잘 안정시켜 자유롭다. 혐오감을 일으키는 대상을 볼 때에도 그는 거기에 충격을 받지 않으며, 마음은 그것 때문에 동요하지 않으며 억압받지 않으며 화내지 않는다.’70)


위의 경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대상을 감수할 때 그 대상에 대한 慾望을 품지 않을뿐더러 전혀 동요되지 않고 있음을 보아 4禪의 경지에 있음을 알 수 있고 더불어 모든 受를 苦로 보는 지혜수행에 의해서 성취 되었으리라 본다.


2) 受念處觀法


앞서 身念處는 오온 중 色에 대한 觀法이라 했다. 受念處는 ‘나’를 구성하는 오온 중 정신적인 면(名)인 마음에 속하는 관찰이다. 受는 마음의 여러 작용 중에서도 觸에 의해서 첫 감수작용을 하는데, 수되는 것은 세 가지 즉 좋은 느낌, 불쾌한 느낌, 좋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으로 구분한다. 『Mahāsatipatthāna Suttanta』는 수념처의 관법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여 머물 것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즐거움을 느끼면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리고, 괴로움을 느끼면 ‘나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나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알아차린다.

혹은 육체의 괴로움을 느끼면 ‘나는 육체의 괴로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정신의 괴로움을 느끼면 ‘나는 정신의 괴로움을 느낀다.’고 알아차린다. 혹은 육체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으면 ‘나는 육체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받는다.’고 알아차린다.


우선 세 가지 느낌을 느끼는 대로 알아차리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느낌들은 육체적인 五官으로 느끼는 것이 있고 또 정신적인 意官으로 느끼는 것이 있음을 알아서 그대로 느낌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느낌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짓지 않고 그 느낌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것은 그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감지하기 위해 일종의 정신집중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남방불교계통의 미얀마에서는 ‘이름붙이기(naming)’라 한다.71) 당장 느끼는 감각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이름을 붙인다. 좋으면 ‘좋다’, 불쾌하면 ‘불쾌하다’ 피로하면 ‘피로하다’ 등 현재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감수과정에서 잠시 멈추게 하여 行으로의 진입, 또는 愛로의 진입을 막자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작용하는 受를 통해 재빨리 다음 단계인 개념화, 의지력, 분별 등으로 옮아가는 끝도 없는 생각의 흐름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마음집중(sati)과 알아차림(sampajañña)은 止와 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생각의 끝없는 흐름의 제일 첫 단계인 受에서 정신을 차리고 그 느낌을 느낌 자체로 알아차리면 止觀이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단지 알아차리는 것이 익숙해지면 그것의 더욱 미세한 생과 멸의 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됨을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바깥의 모든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하여 머문다. 혹은 느낌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하여 머물고, 또한 느낌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하여 머문다. 또한 느낌이 생했다가 멸하는 현상을 관하여 머문다. 그래서 이해와 관찰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느낌이다.’고 명확한 알아차림이 있다. 그는 초연하게 생활하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하며 머문다.


受觀도 알아차림을 시작으로 그 生함을, 滅함을 그리고 生과 滅을 동시에 알아차리는 차분한 경지까지 이르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은 빠른 것이다. 그런데 그 생과 멸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그 만큼의 정신 집중을 要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수행은 자연히 감각적 느낌들의 정체를 알아차림의 반복으로 마음은 서서히 초탈하는 禪定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佛陀의 4禪定의 내용이 이미 止觀均等의 선정이라는 것을 고찰한 바 있다. 念處觀은 구체적인 觀의 대상을 통해 4禪定을 획득하여 가면서, 결국은 마음의 無明의 실체까지도 밝혀내는 것이다. 受念處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느낌들에 대해 단지 알아차린다는 것은 그 느낌들 자체에 관념적인 생각들, 예를 들면 좋다, 나쁘다, 혹은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또는 이런 느낌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受念處의 觀法이자 목적임을 알 수 있겠다.


3. 心念處觀

1) 心의 정의


心을 표현하는 경전 상의 용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佛陀의 모든 교설은 이 마음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Dhammapada』의 첫 게송은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왔고,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선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바퀴가 수레를 끄는 소의 뒤를 따르듯이72)


소를 마음에 비유하는 예는 후대 中國禪宗에서 더욱 발전한다. 그 중 十牛圖는 길들여지는 마음을 소에 비유하여 열 단계로 표현하고 있다.73) 처음의 검은 소는 마지막에 흰 소로 전환된다. 그것은 마음의 두 가지 兩象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위의 經文에서 말하듯이 마음쓰기에 따라 드러나는 현상계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四聖諦에서도 苦와 集은 현실에서 고뇌하는 마음이고 滅, 道는 번뇌를 멸한 淨樂의 상태를 그리고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佛陀는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12處만을 一切로 삼고 있다. 인식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존재는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표현하는 용어의 대표적인 것은 心(citta), 意(manas), 識(vijñāna)이다. 이 셋은 아함부 경전에서 거의 同義語로 쓰이고 있다. 五蘊가운데서 색을 뺀 受, 想, 行, 識이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受란 苦. 樂 등의 감정을 의미하고, 想이란 개념작용을 의미하며, 行이란 禪.惡의 의지작용을 총칭하는 것이고, 識이란 인식판단, 분별작용을 하는데 인식주체로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十二處에서는 意處가 마음의 영역이며, 12緣起는 마음의 生滅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와같이 통상적으로 心, citta, mind로 표현되는 마음은 그 작용에 있어 다양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念處觀이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기능을 알아 그것을 선의적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산다. 그것이 衆生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자기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는 마음의 노예가 아니다.”74)라고 하고 있듯이 마음의 기능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고, 하고 번뇌와 탐욕의 고통 속으로 가둘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을 쓰기에 달려있는 것인 만큼 佛陀는 마음의 정체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치밀한 관찰로써 그 베일을 벗겨내었으며, 또한 정복할 수 있었다. 有限하고도 無限한 것이 마음의 세계이며, 心念處는 六門에서 마음을 지켜보는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2) 心念處觀法


受念處에서는 주로 五官을 통해 느끼는 감각차원의 일아차림이었는 데 비해 心念處는 마음의 내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심리상태를 다룬다. 그것들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마음의 작용들 중 쉽게 감지 할 수 있는 것들, 즉 貪慾, 忿怒, 어리석음, 산란함, 또는 그 반대인 고요함, 좁고 넓음 등이다. 겉잡을 수 없이 일어나다가는 어느새 스러지고 또 다른 마음으로 교체되는 마음의 작용을 경전에서는 원숭이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마음은 잡을 수도 없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속성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관찰도 受念處와 같이 우선은 그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할 것인가? 비구는 마음이 탐을 내면 ‘탐하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탐내지 않으면 ‘탐하지 않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성을 내면 ‘성내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성내지 않으면 ‘성내지 않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전도되면 ‘전도된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전도되지 않으면 ‘전도되지 않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넓고 크면 ‘넓고 큰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좁고 작으면 ‘좁고 작은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위가 있으면 ‘위가 있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위가 없으면 ‘위가 없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에 안정이 있으면 ‘안정이 있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에 안정이 없으면 ‘안정이 없는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해탈했으면 ‘해탈한 마음이다.’고 알아차리고, 또한 마음이 해탈하지 않으면 ‘해탈하지 않은 마음이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혹은 안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밖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안팎으로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문다. 혹은 마음에 대하여 생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물고, 또한 마음에 대하여 생하고 멸하는 법을 관찰하여 머문다.

그래서 이해와 관찰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마음이다.’고 명확한 알아차림이 있다.

그는 초연하게 생활하고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여 머문다.



正念正智의 止觀은 거울 역할을 한다. 이 거울을 통해 마음의 온갖 모습이 비춰지고 드러나며 곧 사라진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름을 붙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마음의 흐름을 일단 정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Nyanaponika Thera에 의하면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관찰은 수행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게 만든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를 조금은 두려워한다.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면 자신감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각은 그 잘못됨에 대한 증장을 막아줄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고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75) 마음의 여러 가지 속성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집중은 더 나아가 그것의 生과 滅과 生滅의 三種觀으로 선정은 더욱 깊어져 內心의 貪瞋痴등의 번뇌는 물론 차차 그로부터 벗어나는 마음까지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心念處가 수행되면 3禪이상의 禪定과 병행되지 않나 본다. 止觀雙修의 수행에서는 선정이 무르익는 만큼 지혜관찰이 명확해지고 지혜관찰이 명확해지면 禪定도 깊어지는 不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수행자는 더욱 초연하게 되고 집착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佛陀는 설하고 있다.


4. 法念處觀

1) 法의 대상


불교에서는 法이란 용어를 실로 다양하게 쓰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현상세계의 자연을 法이라 하기도 하고, 영원한 理法인 진리로서의 法으로 쓰일 경우도 있으며, 또는 佛陀에 의해 가르쳐진 내용들을 法이라 일컫기도 한다. 佛陀가 깨닫고 가르친 내용은 진리에 대한 理法과 實踐論이 함께 한다. 佛陀의 교설은 바로 법에 대한 교설이었으며 그에 대한 진실한 실천적인 認識을 가르친 것이 수행법이다. 佛陀 入滅時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것은 ‘오직 자신에게 의지하라. 법에 의지하라’는 가르침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五蘊에 대한 觀을 통해 끊임없이 ‘나’라는 것은 덧없기 때문에 空하다는 이치를 밝혀 왔는데 여기에서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자신은 무엇을 의미 할까. ‘我空’의 이치를 통해 부정된 ‘나’는 世間道로부터 해탈하여 出世間道인 法으로써 승화 되는 것이다. 佛陀는 無我 또는 非我를 설하면서 따로이 我를 설정한 바는 없지만, 生死를 해탈한 涅槃의 德으로써 大乘에서는 常, 樂, 我, 淨으로 표현한데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승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승화 없이 단지 일체가 고통이며(一切皆苦),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諸法無我),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諸行無常)라는 사실만 알고 끝내는 건 오히려 空虛하고 허무하다.


“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法界는 상주하며, 여래는 이 法을 自覺하여 等正覺을 이루고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顯示하나니 소위 無明이 있으므로 行이 있고...”76)


三法印을 깨닫는다는 것은 世間의 성립방식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緣起法이다. 緣起法의 還滅로 世間道를 벗어나면 一切皆苦는 涅槃樂으로 전환되고(樂), 諸法無我는 능동적인 自在者(我)로 전환되며, 諸行無常은 涅槃의 절대적 永遠性(常)으로 전환되는 것이고 청정(淨)을 더해 이것을 涅槃에서 얻는 네 가지 德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我는 곧 法으로서의 진실된 모습을 갖추므로 不二의 관계이다. 法을 보는 자는 如來를 본다고 하였듯이 『金剛經』의 한 구절은 이런 여래의 모습을 ‘凡所有想 皆是虛妄 若見諸想非想 卽見如來’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法은 진리이자 佛陀가 깨달은 바이며, 곧 그의 가르침을 뜻한다.


2) 法念處觀法


法念處觀에서의 法은 佛陀가 깨달은 진실상에 대한 관이다. 法念處의 내용은 1) 5障碍, 2) 5蘊, 3) 6入處, 4) 7覺支, 5) 4聖諦와 8正道이다. 이제까지는 나의 主觀적인 생각에서 客觀적인 思惟를 위해 身, 受, 心에서 훈련이 되었다면 法念處는 숙달된 객관적인 思惟로 폭넓은 객관적인 사실들(法)을 관찰하는 것이라 본다. 따라서 그 내용을 보면 法觀을 행하려는 수행자에게 있어 언제라도 엄습할 수 있는 다섯 가지 障碍를 지적하고 다섯 가지 장애의 有․無에 대한 관찰을 세밀히 세 가지 단계로 관하도록 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身觀, 受觀, 心觀, 法觀시 모두 적용되는 기본의 心理的 방해요소이므로 그 내용으로 보아 心觀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法觀에 적용시킨 것은 5障碍가 일어날 때 단순히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보다는 더 깊은 차원의 觀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貪慾이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림’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은 잠재적인 탐욕을 말한다. 따라서 心念處에서의 탐욕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것의 활발한 生과 관계하지만 法觀에서의 觀은 잠재적이며 근본적인 탐욕에 대한 관인만큼, 더 깊은 차원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에 상응하여 ‘이미 나타난 탐욕의 滅’은 앞서의 탐욕의 멸이며 이와 같은 잠재적 번뇌의 生․滅은 ‘미래에 있어서도 일어나지 않음’을 예견하고 있다.

여기에서 貪은 근본적인 渴愛의 성격을 띤다. 四念處觀은 十二緣起 상 名色에서 六處-觸-受-愛-取-有-生-老死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의 滅이라고 해설된 바 있다.77) 그러나 法念處에서의 貪에 대한 관찰은 經說의 내용으로 보아 識-行-無明으로 향한 滅法으로 보인다. 法念處관은 觀의 내용이면서 궁극적으로 佛陀의 깨달음의 내용과 일치됨을 볼 때 我空의 이치를 깨달은 이후에 관찰되어질 수 있는 더욱 깊은 차원의 관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法觀은 근본번뇌인 無明의 生, 滅, 有, 無를 관찰하여 들어가는 과정은 단지 觸을 연하여 일어나는 五蘊의 작용 차원이 아닌 의식의 깊은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관법이라 보여 진다. 말하자면 색계성을 넘은 무색계 차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無色界 차원에서의 貪은 無明에서의 번뇌의 뿌리와 관계한다고 본다. 心念處에서의 貪은 대상으로 인해 일어난 貪心 자체에 대한 관인데 비하여 法念處에서의 貪은 이미 일어나지 않은 貪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嗔心, 昏沈, 不安, 疑心의 장애에 대한 관찰로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제거를 향한 깊은 차원의 명확한 관이다.

그 다음은 五蘊에 대한 觀이다. 五蘊에 대한 觀은 이미 身, 受, 心觀에서 다루어진 바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身, 受, 心觀에서는 五蘊 자체를 객관적으로 관한 것이 아니라, 오온의 입장에서 그것이 허망한 것을 알게 되는 것으로 향하게 하는 觀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法觀에서의 오온은 이미 오온이 공함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에서 그 자체의 하나하나의 생명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법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12處(āyatana)에 대한 관찰이다. 佛陀는 ‘일체(sabba)는 곧 12처다.’78)라고 선포한 바 있다. 일체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본질을 의미하는데79) 그 본질을 佛陀는 우리에게 인식되는 세계로 그 폭을 좁혀 바깥 외부에 실존하는 존재적 여부가 아닌 오직 대상이 인식 되어지는 바탕으로 일체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설정하고 있다.80) 따라서 佛陀가 본 世界는 다음에서 연기한 것이다. 十二處란 內六處(眼, 耳, 鼻, 舌, 身, 意)와 外六處(色, 聲, 香, 味, 觸, 法)로서 인식 작용의 주관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의 연기적 관계를 말한다. 따라서 12緣起說에서 六處는 六根, 六境의 특별한 主客관계를 통합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여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眼, cakkhu)을 알아차리고(눈의 대상인) 형상(색, rūpa)을 알아차리며, 또 그 두 가지에 대해 생겨난 속박81)(結, 족쇄, 번뇌, samyokjana)을 알아차리다. 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미 생겨난 결과가 멸해지면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리며 이미 멸해진 결과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六處는 觸에 의해 集起한다. 主觀(六根)과 客觀(六境)도 觸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82) 다음으로 七覺支(Bojjhanga)에 대한 관찰이 있다. 칠각지는 일곱 가지 지혜의 요소를 가리킨다. 그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念覺支(sati: 마음집중)

② 擇覺支(dhamma-vicaya: 법의 선택)

③ 精進覺支(viriya: 정진력)

④ 喜覺支(piti: 희각)

⑤ 經安覺支(passaddhi: 경괘안각)

⑥ 定覺支(samādhi:삼매)

⑦ 平等覺支(upssaddhi: 평등각)


“여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으로 염각의 깨달음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nga)가 있으면 ‘내 안에 염각의 깨달음 요소가 있다’고 알아차리고, 혹 안으로 염각의 깨달음 요소가 없으면 ‘내 안에 염각의 깨달음 요소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는 또 아직 생겨나지 않은 염각의 깨달음 요소가 생겨나면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미 생겨난 염각의 깨달음 요소가 발전되어 완성 되면 그대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七覺支의 내용 역시 초보자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udabbaya ńāna)'등이 나타날 때부터 경험하는 것으로 Mahasi Sayadaw는 해석하고 있다.83) 喜覺은 수행의 진보로 일어나는 法喜라고 할 수 있다. 經安覺支는 心身이 고요해지고 가벼워지는 상태를 말하며, 定覺支는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결과 모든 대상의 관찰에서 平等覺을 갖게 되는데 이 상태는 마음을 無心하게 하여 경계에 흔들리지 않음이다. 칠각지의 내용도 그것의 나타남과 사람짐을 알아차리되 그 과정도 세밀하게 관찰한다. 칠각지의 내용은 四禪定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念이라든가 覺이라든가 喜, 定, 平等覺支는 四禪定의 내용과 흡사한데 선정의 깊이도 진입해 들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인 동시에 다음의 최종적인 法觀인 四聖諦의 觀을 위한 완벽한 준비가 아닐까 생각 한다.


최종적인 法觀은 佛陀의 깨달은 바 四聖諦의 관이다. 苦, 集, 滅, 道의 순서로 그 내용은 이미 ‘苦에 대한 불타의 해결책’에서 검토된 바 있다. 法念處觀에서 가장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부분이다.

苦에 대한 觀에서 즉, 不滿足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모든 요소가 苦觀의 대상이 된다. 가장 먼저 生老病死가 苦임을 밝힌다. 그리고 근심, 슬픔, 괴로움, 걱정, 답답함이 苦이다. 이것은 몸과 마음의 괴로움의 총체이다. 이러한 苦는 피할 수 없는 것들로 결국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취함(5取蘊)으로 형성되는 것이 苦觀이다.


다음으로 5取蘊이 드러난 苦라면 보이지 않는 원인을 참구해 들어가는 것이 集觀이다. 그 원인은 거의 마음에서 찾아진다. 그 원인을 추궁해 들어가는 관찰은 12緣起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것은 愛慾이라는 無明意識을 바탕으로 五蘊의 觸으로 말미암은 모든 생성과 멸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바 12緣起에서 念處觀의 작용은 명색, 즉 오온상의 6처가 촉을 인연하는 과정의 영역이다. 그런데 觸-受-愛-取-有-生-老死에서 마지막 부분인 생, 노사는 生, 住, 異, 滅의 관계를 말한다고 본다. 따라서 觸을 緣하여 한 찰나의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전 과정을 12연기는 필름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마음집중은 禪定으로 이끌며 마음이 고요하면 선정의 상태에서는 한 찰나의 짧은 시간의 전 과정이 마치 한생, 또는 무량겁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의 妙境을 十二緣起說에 비추어 그리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찰나 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로 통하는 門도 미래로 통하는 문도 결국은 현재의 한 생각에 있으므로 念處觀은 五蘊-六入處-觸에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苦의 원인은 渴愛(tanha)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觸-受에서 받아들여진 느낌들에 싫고 좋음 같은 집착의 취함이 덧붙어 돌아가는 현장이다. 원인의 滅을 설하는 滅諦는 결국 갈애, 욕망의 장체가 밝혀짐으로 가능하다. 갈애는 마음에 좋고 싫어함의 取着心을 근거로 한다. 滅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八正道의 길이며, 동시에 道의 완성을 의미한다. Ⅱ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八正道는 三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dukkha-nirodha-gāmini-patipadā-sriya-sacca)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길, 즉 올바른 행위(正見), 올바른 생각(正思), 올바른 언어(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집중(正念), 올바른 선정(正定)등 이니라.

① 그런데 비구들이여, 올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i)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비구들이여, 괴로움(苦)에 관해서 확실히 알고, 통찰(慧)하고 괴로움의 원인(集)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慧)하고, 괴로움의 소멸(滅)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慧)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에 관해서 확실히 통찰하는 것,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견해라고 하느니라. (고집멸도를 제대로 아는 것)

② 비구들이여, 올바른 생각(正思, Sammā- Sarikappa)이란 무엇이라 하겠는가? 욕심 없는 생각(無慾), 증오하지 않는 생각(無碍), 남을 해하지 않는 생각(無害)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생각이라 하느니라. (탐진치를 버리는 것)

③ 비구들이여, 올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란 무엇이겠는가? 거짓말(兩舌)을 않고, 헐뜯는 말(惡口)을 않고, 거친 말(妄語)을 않고, 쓸데없는 말(綺語)을 하지 않는 것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언어라 하느니라. (口業을 짓지 않는 것)

④ 비구들이여, 올바른 행위(定業, Sammā-Kammanta)란 무엇이겠는가? 생명체를 죽이지 않고(不殺生),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으며(不與取), 잘못된 애욕 행위를 하지 않는 것(不邪淫),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행위라 하느니라. (五偈를 지키는 것)

⑤ 비구들이여, 올바른 생활수단(正命, Sammā-ājiva)이란 무엇이겠는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들은 잘못된 생활수단(邪命)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수단으로써 삶을 영위하느니라.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직업이라 하느니라.

⑥ 비구들이여, 올바른 노력(正精進, Sammā-Vāyāma)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아직 생기지 않은 악(惡)이나 좋지 않은 행위(法)가 일어나지 않도록 결심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이미 일어난 악이나 좋지 않은 행위를 버리기 위해 결심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쓰고, 또 아직 생기지 않은 선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결심하여 노력하고, 저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쓰고, 이미 일어난 선한 행위는 머물러 흩어지지 않게 기르고, 충만하게 이루어 성취케 하려는 결심을 하여 노력하고, 전력을 기울여 마음을 다잡아 애쓴다.

⑦ 비구들이여, 올바른 마음집중(正念, Sammā-Sati)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는 몸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無常, 苦, 無我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감각에서는 감각을... 마음에서는 마음을... 법(法)에서는 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한다. 그리하여 마음집중하지 않으므로 나타나는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마음집중이라 하느니라.

⑧ 비구들이여, 올바른 선정(正定, Sammā-samādhi)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비구들이여, 비구는 애욕을 여의고 좋지 않은 행위(不善法)을 여의고자 노력하려는 마음을 일으켜(尋, initial application of the mind, vitakka)이 마음을 궁리하여 유지시키고(何, sustained application of the mind, vicāra), 무집착에서 생긴 기쁨(喜, joy, pīti)과 즐거움(樂, happy, sukka)의 초선을 얻는다. 다음으로 이러한 관념과 궁리에서 벗어나 삼매(定)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의 제2선(第二禪)을 얻어 주한다. 다음에는 기쁨을 여의고 무심(捨), 마음집중(念), 지혜(智)에 주하고 몸으로는 즐거움을 간직하면서, 성인들이 말하는 “무심한 이는 마음집중하여 즐거움을 주한다”라는 제3선(第三禪)을 얻어주한다.


다음으로 즐거움도 괴로움도 버리고 전에 느꼈던 희열과 우울도 멸해진, 따라서 괴로움도 기쁨도 아닌(不苦不樂) 무심(捨)과 청정한 마음집중(念)의 제4선(第四禪)을 얻어 주한다.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올바른 선정이라 한다. 이를 일러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성스러운 길의 진리라고 한다.


이와 같이 八正道의 기준은 中道에 있다. 中道는 聖스러운 것이며 올바른 것이라 하여 八聖道, 또는 八中道라고도 불린다. 팔정도는 결국 생활을 바르게 하고(戒), 마음을 청정하게 안정시켜(定), 진리를 보는 눈을 기르고자 하는 것에 있으므로(慧) 이러한 수행에 의해 번뇌를 끊고 무루(無漏)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無念無常의 선정은 마음의 不在가 아니라, 물들지 않는 마음이듯이 無我란 ‘나가 없다’라는 뜻보다는 ‘나’라고 생각해온 오온이 사실상 생멸하는 연기법으로써 空한 것이며, 이러한 착각인 無明이 수행을 통해 明으로 전환됨으로써 한정적이던 ‘나’라는 존재는 ‘法’의 전체성에 녹아들어, 개별적으로 ‘나’라고 부를 것은 없지만, 오히려 ‘나’ 아님이 없는 이치로 승화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승화된 삶의 모습을 그린 것이 八正道이다.


V. 四念處의 特性

1. 四念處와 十二緣起의 관계


佛陀가 모든 苦의 원인과 그 해탈의 길을 마음에서 찾았고, 마음에서 찾은 번뇌는 無明을 근본으로 하는 12緣起였음을 깨달았을 때, 무명을 멸하는 해탈의 길은 12연기의 소멸인 還滅緣起로서 12緣起와 四念處觀의 관계는 病과 藥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누차 언급되었지만 12연기상에서 念處觀은 六處가 觸을 緣할 때 적용 된다. 그때가 마음이 작용하는 때이며, 마음의 작용과정에서 禪定은 行을 멸하기 위함이고 知慧는 無明을 멸하기 위해 함께 수행되어야 하는 필수의 관계가 성립한다. 業의 원천을 일차적으로 行이라 밝힌바 있다. 行은 意圖 의지력을 말하며, 창조적으로 지어가는 힘이 있다. 行은, 적어도 그것의 의도가 惡한 쪽이었다면 곧 苦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12연기에서의 行은 渴愛라고 하였고 行은 無明에 인연한다.84) 무명은 어리석음, 곧 잘못 알고 있는 것, 밝은 지혜가 없는 것, 이런 것들은 자연 지혜의 비춤으로 멸한다. 따라서 知慧는 치심(無明)을 제거하고, 禪定은 貪心으로 유발되는 行의 역동성을 멈춘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禪定과 知慧의 두 가지 치료약은 무명으로 병든 마음의 작용을 치유한다고 할 때 四念處觀과 12緣起의 관계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약과 병의 관계라 할 수 있겠다.

身, 受, 心, 法으로 전개되는 四念處는 그 내용상 점차적인 수행체계인 듯 하나, 그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할 때에는 관의 대상을 고정시키지 않는 듯하다. 사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활을 부드럽지 못하게 하고 부자연스러움을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止觀修行의 원활한 실행을 위하여 준비적 단계로서 제시되는 것이 있다. 우리는 佛陀의 初禪에서 발견하듯이 모든 악한 마음과 慾心을 떠나고자 하는 發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한 것을 버리고 선한 뜻을 지닌다는 것을 佛陀는 그의 모든 수행체계에서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戒行은 定. 慧수행의 밑거름이 됨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身, 受, 心, 法의 체계는 분명 단계적으로 시설하는 의도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나’라는 가상적 존재의 해부에 있어서 물질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소를 끄집어내어 滅-즉, 妄想의 滅이다-로 이끄는 과정과 ‘我空’의 성취로써 더 깊고 넓은 차원의 法의 실상을 觀해 나가는 것을 앞서 我의 法으로써의 승화라 한 바 있다. 마음의 세계에서 身, 受, 心, 法觀이 수행되어지는 영역을 나름대로 12緣起 상에서 다음과 같이 관련지어 보면 모두가 六處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5) 身觀, 受觀, 心觀 은 육처에서 愛貪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수행되어지고 관찰되어지는 것이라면, 法觀은 觸을 연하지 않은 잠재적 애욕 등을 관찰하는 것과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의 내용인 것을 보아 더 깊은 심층상의 禪定에서 이루어지는 관찰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四念處의 果

『Mahasatipaṭṭhāna Sutta』는 身, 受, 心, 法觀에 이어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修行의 果에 대한 설명으로 마친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7년 동안 이와 같이 닦는 자는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나, 즉 바로 보이는 현상(現法)에서 구경각 아라한 또는 나머지 생애에서 아나함의 경지가 기약되느니라.

비구들이여, 7년 동안은 제쳐두고라도..7개월..7일만이라도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이와 같이 닦는 자는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나, 즉 바로 보이는 현상에서 구경각 아라한 또는 나머지 생애에서 아나함의 경지가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은 중생의 정화를 위한, 슬름을 건너기 위한, 괴로움의 소멸을 위한, 진리의 길을 걷기 위한, 열반의 증득을 위한 단 하나의 길, 즉 네 가지 대상에 마음집중을 굳게 확립하는 사념처이니라”


수행결과로서 두 가지 덕목을 설하고 있는데 그것이 阿羅漢果와 不還果이다. 번뇌가 끊어져가는 단계를 보통 4단계로 나누어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阿羅漢果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과를 향해 수행중임을 일컬어 사향사과(四向四果)혹은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도 한다.


“사문의 法과 사문의 果가 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사문법인가. 이른바 팔성도이니, 正見과 正定이다. 어떤 것이 사문과인가. 이른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이니라.

어떤 것이 수다원과인가. 세 가지 번뇌가 끊어진 것이다. 어떤 것이 사다함과인가. 세 가지 번뇌가 끊어지고 탐, 진, 치가 엷어진 것이다. 어떤 것이 아나함과인가. 이른바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것이다. 어떤 것이 아라한과인가. 이른바 탐, 진, 치가 모두 다하고, 일체 번뇌가 다한 것이니라.”86)


수다원(Sotāpatti)과란 진리의 흐름에 들어가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데 세 가지 번뇌인 유신견, 戒禁取見, 疑結(의심)에서 벗어난다. 못해도 7생 안으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하여 入流果 또는 예류과라고도 한다.

두 번째로 사다함(Sakadāgāmi)과는 三結과 네 번째 다섯 번째 번뇌인 감각적인 탐욕과 성냄의 번뇌가 상당히 약화되어 거의 제거된 상태이지만 아직 미세하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탐과 진의 제거 여부는 그의 신, 구, 의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몸을 받는 것은 한생, 즉 내생 안으로 완전한 정각을 성취하므로 일래과라 부르기도 한다.

세 번째로 아나함(ānāgani)과는 불환과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경지는 수다원에서 미세하게 남은 탐, 진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를 말한다. 처음 5가지 번뇌(五下分結)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은 물질적 세계를 벗어났음을 뜻한다.

네 번째로, 아라한과(arahatta)는 나머지 다섯 번뇌 즉,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불안정함, 자만심, 근본무명을 완전히 제거하여 탐, 진, 치가 소멸한 상태이다. 아라한과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無學道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과는 번뇌의 소멸 정도 기준으로, 또는 지혜의 획득의 기준으로 부여됨을 알 수 있다. 止는 번뇌소멸을 위한 것이고, 慧는 무명의 제거를 위함이다. 일체 行의 滅을 涅槃이라 일컫는다. 行의 滅이 열반이라 할 때 그것은 의식자체의 滅로는 볼 수 없다. 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無明을 근본으로 할 때이다. 無明을 근본으로 하는 行은 貪. 瞋. 痴의 번뇌 망상을 이행한다. 여기에서 목적으로 하는 行의 滅이란 무명을 滅한 行이다. 그것은 자연적 行의 滅이 아닌 明의 行으로 대치, 전환되기 위한 것이다. 佛陀를 칭하는 十號중 明行足이 바로 三明智, 즉 宿命通, 天眼通, 漏盡通을 구족한 원만한 行이라는 의미가 내포 하듯이 行 자체의 滅은 아닌 것이다. 이것을 佛陀는 般涅槃이라 일컬었다. 그것은 무명번뇌를 제거한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行 자체는 목숨이 다하면 자연히 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佛陀는 滅盡定으로써 生涅槃의 모습도 보여준 바 있다. 그 만큼 有, 無로 자유자재함을, 그러면서도 어디에도 머물지 않은 中道의 입장에서 4禪定을 중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行의 滅보다도 無明의 滅을 더욱 궁극적인 苦의 원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禪定은 사실 知慧觀을 위한 선정인 입장에서의 止觀雙修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四念處의 特性


이상으로 정리해보면 四念處觀법의 특성을 몆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자체가 戒定慧 三學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禪定과 知慧의 均等이나 世俗의 行에 대한 戒學등은 中道적 입장이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三學의 의미이다. 戒學이 있음으로써 정혜쌍수는 반드시 내적 심층의 개발만 중요시 한 것이 아니라, 외적 물질세계에 대한 바른 길도 중요시 하였다는 입장이다. 아니, 입장이라기보다는 無와 有의 불가분한 관계, 無와 有의 조화, 色界와 無色界의 공존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본다.87) 여기에서 佛陀가, 色界의 四禪定을 택하게 되는 의미는 색계와 무색계의 균등한 상태를 더욱 중요시 하는, 다시 말해서 有로도, 無로도 치우치지 않는 中道心에 바탕한 것이라고 본다.88) 결론적으로 佛陀의 禪定觀은 오로지 마음의 부동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전환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9)

둘째로 觀의 대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當處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으로써 貪, 嗔, 痴를 제거하므로 行, 住, 坐, 臥에 언제라도 실행할 수 있는 日常性을 띄고 있다.

“오, 비구들이여, 마음집중법은 一切處, 一切時에 무엇에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선언하노라.”90)

그것은 이미 身觀, 受觀, 心觀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경전 상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사실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예를 들어 놓은 것이므로 그 내용들은 우리들의 실생활에서 더욱 다양하게 전게 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예로 受念處에서 감수되는 느낌들이란 객관적으로 구분하자면, 세 가지로 구분되지만 그 느낌들의 세세한 내용들은 실로 다양한 것들이다.91)

세 째로, 수행의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果가 정확하여 스스로 진리를 확인 할 수 있는 直觀性과 自證性을 가졌다.


“우파와나여, 여기 한 비구가 자신의 눈으로 한 형상을 보고 있을 때 그 형상을 인식하고 그 형상에 대한 욕망을 인식한다. 그의 마음속에 형상에 대한 욕망이 나타났을 때 ‘내 안에 형상에 대한 욕망이 있다’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만약 그 비구가 자신의 눈으로 하나의 형상을 보고 있을 때 그 형상을 인식하고 그 형상에 대한 욕망을 인식하고 그의 내부에 형상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가르침이고, ’와서 보라‘라고 할 만큼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현자에 의해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라.

우파와나여, 더 나아가서...자신의 귀로써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마음으로 마음의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의 재상을 인식하고 마음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인식한다..."92)


위의 경문과 같이 四念處觀법은 六根으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경계에서 직접 알아질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자신의 경지도 감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시리밧다(Srivaḍḍa)는 자신의 경지를 스스로 자각하게 됨을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존자시여,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념처법은 저에게서도 발견되어 질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에 따라 삽니다 ... 그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섯 가지 번뇌는 하나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제거하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시리밧다여. 불환과가 성취되었음이 당신 스스로에 의해 선포되고 있습니다.”93)


四念處의 果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果는 번뇌의 소멸정도와 그에 따른 知慧의 획득의 정도에 따라 구분되어 있음을 살펴본 바 있다. 번뇌의 정도는 욕망, 즉 탐심과 관계하여 탐심의 有, 無의 관찰이 중심적임을 알 수 있다.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욕망에 대한 인식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 하는 것은 그에 대한 알아차림 자체가 곧 해탈의 열쇠를 갖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관찰되어져야 하고 보이는 대상이 관찰되어져야 하고, 몸이 관찰되어져야 하고, 감촉되는 것이 관찰되어져야 하고, 마음이 관찰되어져야하고 마음상태가 관찰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바로 6處에서 관해지는 身觀, 受觀, 心觀을 의미하며, 스스로 알 수 있기에 直觀性과 自證性을 지닌다.

네 째로, 四念處의 果는 차별적이지만 수행법의 내용은 초보자나 고참자, 또는 阿羅漢, 如來 모두 一貫性을 띄고 있다.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배우러 온 사람들 가운데 아직 많이 진보하지 않은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네 가지 마음 집중법을 가르치느니라. 무엇이 넷이냐? 몸에서는 몸을, 감각에서는 감각을, 마음에서는 마음을, 법에서는 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 집중하여 분명한 앎으로 일념으로, 고요한 마음으로 모아진 마음으로, 집중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관찰하면서 머무느니라. 또한 수행이 상당히 진보 했지만 아직 궁극의 구경처에는 도달하지 않은 아라한 이전의 수행자도 몸에서는 몸을, ... 또한 탐. 진. 치를 소멸하고 완전한 지혜로 견성해탈한 아라한들도 역시 몸에는 몸을,... 결박의 족쇄에서 벗어난 채 관찰하면서 머무느니라.”94)


사리불이 아나율의 聖位境地에 대해 묻자 아나율은 四念處 계발로 그것이 가능하였음을 말하고 있고95) 如來는 완성자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說하고 있다.


“아난다여, 완성자의 특성을 명심하고 있어야 하느니라. 완성자의 위대한 특성은 완성자의 내부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감정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인식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인식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생각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아느니라. 아난다여, 이것이 완성자의 위대한 특성임을 명심하여야 하느니라.”96)


완성자, 곧 如來의 특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인식과, 생각 등의 生滅을 아는 자라고 표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초보자에게 涅槃 解脫을 위한 一乘道로써 제시하는 四念處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一切를 12處로 축소시키고 있는 佛陀에게 있어 凡夫와 완성자의 차이는 곧, 認識의 차이로 구별된다. 그것은 知의 결여와 知의 현전에 차이를 둔다. 알아차림의 경지는 초보자로써 획득해야할 인식이자 완성자로서의 인식이기도 함을 설하는 것이다.


VI. 結論


身, 受, 心, 法으로 이어지는 四念處觀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나'의 실체를 관찰함으로써, 이제까지 ‘나’라고 생각되어져 왔던 ‘나’의 실체는 空하며, 空한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속박되어온 몸과 마음의 해탈을 맛보고, 대상, 또는 진리라고 할 수 있는 法의 실상도 모두 緣起의 법칙에 의해 空함을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無我란 ‘나가 없다’라는 뜻보다는 ‘나’라고 생각해온 五蘊이 사실상 生滅하는 緣起法으로써 空한 것이며, 이러한 착각인 無明이 수행을 통해 明으로 전환됨으로써 한정적이던 ‘나(我)’라는 존재는 ‘法’의 전체성에 녹아들어, 개별적으로 ‘나’라고 부를 것은 없지만, 오히려 ‘나’ 아님이 없는 이치로 승화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승화된 삶의 모습을 그린 것이 八正道이다. 佛陀의 삶이 보여 주고 있듯이 그의 行은 業의 차원을 넘어서 衆生을 향한 자비와 연민의 菩薩行이었으며, 有, 無의 걸림 없는 이치와 실천행으로 많은 이들을 자유로 이끌었다. 그 자유를 위해, 一乘道로써 제시하는 四念處觀은 마음이 펼쳐내는 가설적인 세계를 향한 횃불과도 같은 실질적인 치유법이다. 佛陀의 현실에는 苦가 없다. 왜냐하면 苦를 형성하고 있는 가상적인 안개가 걷혀 그가 가는 길은 항상 또렷한 것이다. 그의 현실은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닌 양면에 자유로운 현실이다. 이것이 佛陀가 깨달은, 알아낸 사실들로써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그 세밀한 방법을 四念處觀으로써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三學의 의미이다. 戒學이 있음으로써 定慧雙修는 반드시 내적 심층의 개발만 중요시 한 것이 아니라, 외적 물질세계에 대한 바른 길도 중요시 하였다는 입장이다. 아니, 입장이라기보다는 無와 有의 불가분한 관계, 무와 유의 조화, 색계와 무색계의 공존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佛陀가, 色界의 사선정을 택하게 되는 의미는 색계와 무색계의 균등한 상태를 더욱 중요시하는, 다시 말해서 유로도, 무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심에 바탕한 것이라고 본다. 이제까지 살펴본 佛陀의 사념처관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자 한다.

첫째, 관법의 출발은 佛陀의 깨달음과 그의 世界觀, 즉 그의 業에 대한 해결책과 관계된다. 그는 業의 직접적 인자를 行爲보다는 心으로 보았다는 데에서 觀法이 해탈의 핵심적 역할을 한다. 業을 방지하기위한 行의 不動化(禪定, 苦行主義)를 상대로 心의 전환의 수행법을 제기한 것이다.

둘째,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불교특유의 것으로 구별되는 것은 觀法(vipassanā)이다. 그러나 佛陀는 기존의 사상과 방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中道적인 입장으로 再解釋한 것뿐이다. 佛陀의 禪定觀을 이해함에 있어서 觀法의 핵심은 sati, 念에 있다. 이것은 마음의 不動화, 念의 停止가 아니라 思惟作用은 계속된다는 데에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觀法의 내용들(隨息觀, 不淨觀, 白骨觀등,)은 가설적 방편들이다. 그러므로 방편의 門은 고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無限하게 열려있으므로 변화를 수용한다.

셋째, 佛陀의 觀法의 핵심적 구조와 내용들을 통해서 佛陀의 중도적 입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사실은 그 이후 여러 문화와 시대변화에 따라 재해석되어지는 佛陀의 敎說을 바탕으로 수행되어온 다양한 修行論의 입장도 佛陀의 근본적 中道의 입장에 의하여 발전 될 수 있었다는 추론에 도달할 수 있겠다. 예를 들자면, 中國에서의 禪宗의 성립배경으로 天台智顗의 ‘摩訶止觀’을 들 수 있는데, 보리달마의 壁觀은 止觀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본다. 마음을 壁과 같이 움직이지 않음은 止에 해당하고, 觀은 그대로 자신의 성품을 비춘다는 의미에서 觀에 통한다. 보리달마가 인도의 修行法을 부정하고 頓法을 주장한 것 또한 그 당시 치우친 次第的 견해에 대한 中道의 입장이었다고 본다. 中道란 치우치지 않으며, 有와 無, 俗과 瞋을 두루 머무는 바 없이 나와 남이 이익됨을 근본으로 한다. 佛陀가 그랬듯이 禪宗도 일찍이 ‘心宗’을 표방하며 가장 실질적인 문제를 마음에 두어 현실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것이 佛陀사상으로의 復歸운동이었듯이 오늘날에도 이 시대에 맞는 中道의 길을 다시금 밝혀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