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깨달음과 이성의 자각 / 동국대 명예교수 김용정
禪의 깨달음과 理性의 自覺
김 용 정(동국대 철학과 명예교수)
1. 禪定과 智慧
禪이란 무엇인가. 禪이라는 한역어는 본래 산스크리트어 dhyāna의 속어형인 jhāna 또는 jhān의 이두어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의역한 것이 定 또는 靜慮이며, 그 定을 禪과 결합해서 禪定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dhyāna라는 말이 있었으며, 그와 동의어인 三昧(samādhi)는 우파니샤드 문헌에도 나타나 있다. dhyāna는 본래 숙고하다(vdhyai)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정신통일,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필자는 일본의 불교학자 마쯔모도 시로(松本史朗)의 94년판 ?禪思想의 批判的 硏究?(大藏出版)의 방대한 저술 중에 禪과 慧의 부분을 참고로 하여 이 장의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불교사상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禪은 慧, 즉 智慧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어 왔다. 즉 禪은 결코 불교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마음을 통일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바른 이해, 다시 말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지혜를 얻음으로써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禪宗이 성립한 이후에는 지혜보다도 禪을 더욱 중요시하고 그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으로 될 만큼 선후가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戒定慧의 三學 또는 定慧雙修와 관련된 부분의 연구가 필요하지만 禪은 분별적인 사고의 미망을 돌파하는 데 있기 때문에 때로는 지혜와 대립되는 개념처럼 이해되기도 하였다. 문제는 지혜가 사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따라올 수밖에 없지만, 후에 지혜는 개념이나 언어작용을 떠난 주객분리 이전의 무분별지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보편화되었다.
필자는 여기서 잠시 禪師 摩阿衍의 ?頓悟大乘正理決? 속에 나타나 있는 離妄想과 有佛性의 문제를 가지고 禪과 慧의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正理決? 속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 중생은 무량겁 이래 三毒 煩惱無始心想 習氣妄想을 떠나지 못하여 생사유랑함으로써 해탈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중생이 三毒 煩惱無始心想 習氣妄想을 떠나면 해탈을 얻고 成佛한다”는 것이다. 摩阿衍의 주장은 중생이 번뇌, 심상, 망상을 떠나면 곧 해탈 성불한다는 것이다. 과연 망상을 떠나는 것만으로 해탈이 가능할 것인가, 망상 때문에 윤회 전생을 하는데 망상을 떠나면 윤회 전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지만 망상을 떠나는 것이 곧 해탈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하연은 일체 중생이 본래 佛性을 갖고 있으나 태양이 구름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망상이 불성을 蓋覆하여 나타나지 않지만 만일 망심이 일어나지 않아 일체의 망상을 떠나면 본유의 眞性과 一切種智가 자연히 나타난다(若妄心不起離一切妄想者 眞性本有及一切種智 自然顯現)고 하여 망상을 떠남으로써 불성이 현현하여 해탈이 성취된다고 설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佛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망상의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眞性인 一切種智, 즉 佛性이 나타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佛性은 그것을 一切種智라고 표현하듯이 그 자체가 곧 覺 깨달음의 당체인 것이다.
우리는 불교에서 佛性, 如來藏, 般若, 智慧, 無分別智 등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들이 각각 그 나름의 개념을 갖고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佛性이나 智慧가 깨달음의 절대적 주체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마하연도 衆生本來有佛性者니 一切種智니 하여 그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頓悟要門?에 의하면 定과 慧를 다음과 같이 問答式으로 설명하고 있다.
問그러면 근본을 修行하려면 어떠한 방법으로 修行해야 하는가.
答오직 坐禪하여 禪定을 하면 근본을 얻을 수 있다. 禪門經에 이르기를 佛의 智慧를 얻으려 면 곧 禪定이 필요하다. 만일 禪定이 없다면 正覺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산란하여 그 善根 을 파괴하게 된다.
問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禪이고 무엇이 定인가.
答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禪이라 하고 正坐하여 本性을 보는 것을 定이라 한다. 本性이 란 이것 그대의 無生心이요 定이란 境(對象)에 대한 無心으로서, 八風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八風이란 利益 損失 배후에서 비방하는 것, 뒤에서 칭찬하는 것, 면전에서 칭찬하 는 것,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 苦樂 등의 여덟을 八風이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定을 얻었 다면 凡夫라 하더라도 그대로 佛位에 들어갈 수 있다. 본래 禪이나 定은 같은 dhyāna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그것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定慧雙修와 같이 말할 때에는 禪定과 智慧의 끝字를 따서 축소해서 한 말이다. 그래서 定一慧의 知는 ‘見性’이라 는 말이 있는데 이때에도 그렇게 축소해서 쓰는 말이다. 性徹스님은 定과 慧의 관계를 ?禪 門正路?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諸佛世尊은 定과 慧를 等持하므로 佛性을 明見하 여 了了히 障碍가 없어서 菴摩勒果를 봄과 같느니라. * 定慧가 均等한 大寂光三昧中의 如 來位가 아니면, 佛性을 明見치 못하나니 見性이 즉 成佛인 無上正覺이다.
여기서 菴摩勒果는 무구청정한 天果를 표현하는 말로 定과 慧가 평등하게 조화를 이룰 때 見性하여 無上正覺에 이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頓悟要門?은 禪定과 智慧의 평등을 다음과 같이 문답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問“涅槃經에 이르기를 定이 많고 慧가 적으면 無明을 떠나지 못하고 定이 적고 慧가 많으면 邪見이 증대한다. 定과 慧가 평등하므로 즉 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答 일체의 善惡에 대해서 모두 바른 판단을 바라는 것, 이것을 慧라 한다. 그 판단한 결과에 대해서 愛憎을 일으키지 않고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이 定이다. 이것이 定과 慧가 평등하 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악에 대해서 바른 판단을 하는 것을 慧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慧는 과연 無分別智인 智慧를 의미하는가 또는 分別智인 世間的인 思惟를 말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이 문제는 2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아무튼 ?頓悟要門?은 禪定과 智慧를 體와 用의 관계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역시 문답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問어떻게 하는 것이 禪定과 智慧를 평등하게 배우는 것인가.
答禪定은 이것 本體요 智慧는 이것 用이다. 禪定에서 智慧가 일어나고 慧에서 禪定으로 돌아 간다. 마치 물과 파도와 같이 一體로서 다시 전후가 없다. 그러므로 禪定과 智慧를 평등하 게 배운다고 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논의에서 禪定과 智慧의 等持 定慧雙修, 定慧兩輪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2. 分別智와 無分別智의 패러독스
分別智는 말 그대로 主客을 分別하여 아는 지식을 말한다. ?円集要義論?에 의하면 無二智의 二는 能取(grāhaka)와 所取(grāhya)의 둘을 의미한다. 여기서 取(upādāna)란 執受라고도 번역되는데,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存在가 나의 것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결국 能取와 所取는 나라고 하는 존재에 있어서 主體的인 것과 客體的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主客分別에서 출발하는 지식이 곧 分別智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에 있어서 主體的인 것과 客體的인 것 둘 중에서 주체적인 것이 먼저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론, 客體的인 것이 먼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유물론, 주체적인 것과 客體的인 것이 동시에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그 둘이 상응함으로써 구체적인 나라고 하는 것이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실재론 등의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제3의 경우는 정신적인 것(jiva)과 물질적인 것(ājiva)과의 두 원인에 의해 이 세계가 생성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勝論에 있어서는 나의 마음과 地水火風意의 물질이 聚合하여 일체가 성립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앞의 두 입장은 先住論이라 하여 하나는 정신적인 주관을 앞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물질적인 객관을 앞세우는 것으로서 서양철학의 일반적인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한 논의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서 귀결되는 것은 無二智란 能所主客의 二面에서 성립하는 전술한 세 경우를 다 부정하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能所主客이 서로 緣起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緣起에 있어서의 사물의 存在방식을 prajnapti, 즉 般若底라고 하는데, 그것은 能所主客의 相緣相待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후에 설명하겠지만 바로 이 無二智가 곧 般若沒羅蜜, 즉 prajñā를 의미하며 또한 다른 말로 智慧 혹은 無分別智라는 말로 표현하게 된다. 禪的인 표현으로는 三輪淸淨, 心行處滅 言語道過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은 앞에서 제시된 能所主客을 분리하여 사유하는 것들이 곧 分別智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원래 分別智란 말 그대로 주객을 분별하다의 vi-와 知 jñāna의 복합명사 vijñāna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唯識學에서 識이라고 번역하거니와 이는 온전함이라는 pra라는 말과 역시 知 jñāna의 복합명사, 즉 분별되지 않는 prajñā 分別智와 無分別智의 차이를 알게 되는데, 그렇다면 禪定과 知慧가 평등하다고 말할 때의 智慧는 두말할 것도 없이 prajñā, 즉 無分別智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객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分別知는 무조건 妄想으로 돌려 버려 배척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山口益은 唯識說에 의하면 經典이란 淨法界等流의 敎法이라고 말하고 淨法界等流란 眞如가 우리들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眞如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眞如는 그것의 필연적 결과로서 우리들 속으로 流入되어 우리들의 思想言語의 형태로 형성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思想言語의 형태를 취한다 함은 能知所知 能言所言인 能所의 二의 형태에 있어서 分別작용하는 것, 즉 世間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淨法界等流란 眞如의 世間化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眞如가 우리들 속으로 유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二分法的인 主客으로 分離되어 세속적인 二分法的 사고 내지 언어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앞에서 논의한 分別智란 能所主客이 相緣相待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존재, 즉 緣起에 의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主客을 각각 실체적 존재로 보는 견해를 空無化하는 것이다.
分別智는 다른 말로 相이라 하는데, 필자는 이 相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摩阿衍과 카말라실라(Kamala ila : 8세기 후반 中觀派학승)와의 논쟁을 통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이 논쟁에 관한 것은 최근 1994년에 大作을 내놓은 일본의 불교학자 松本史朗의 ?禪思想의 批判的 硏究?(大藏出版社)를 많이 참고할 것이다.
전장에서 제기했던 마하연의 離妄想의 근거가 된 ?金剛經?의 離一切諸相則各諸佛,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가 그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相은 妄想을 의미한다. 羅什역은 相으로 되어 있으나 마하연역은 凡所有想 皆是虛妄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想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相의 原語 saṃjñā는 色受想行識의 五縕 중의 하나인데 이 想이 일체의 妄想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俱舍論의 체계에서는 想은 十大地法(受, 思, 觸, 欲, 慧, 念, 作意, 勝解, 三昧, 想)의 하나로 설명되어 있다. 즉 想(samjñā)은 samjnāna '함께'라는 뜻이 있어 '함께 알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즉 諸法無常想을 예로 들면 諸法을 諸法이 갖는 無常性과 함께 諸法을 無常하다라고 아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松本史朗은 그렇다면 想 samjñā는 소위 판단이나 사고라는 현대어로 해석이 가능하고 따라서 판단에는 바른 판단과 잘못된 판단이 있는 것처럼 想에도 諸法無常想의 경우와 같이 바른 想과 ?金剛經?이 부정하는 我想 人想衆生想 壽者想이라는 잘못된 想, 즉 妄想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카말라실라의 주장을 인용하여 바른 판단과 無分別智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카말라실라는 最高知인 '無分別智'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한 '바른 分別智'를 바른 개별관찰(bhūta-pratyavekṣ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正思惟(yoniśo-manasikāra)는 바른 사유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개별관찰(pratya- vekśā), 分別(vikalpa), 思惟(manasikāra)는 모두 사고와 판단을 의미한다. 사고와 판단에는 바른 사고와 판단이 있을 수 있고 바르지 않은 사고와 판단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카말라실라는 잘못된 사고와 판단에서는 바른 無分別智가 나올 수 없고 바른 사고와 판단에서만 바른 無分別智가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무에의 宗論'(794년)이라고 하는 티베트에서 일어났던 불교사상상 미증유의 사상적 논쟁에 있어서 그가 摩阿衍과 대결하여 바른 分別知를 無分別知에 도달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내세워 자기 주장을 논파했던 것인데, 그것은 이른바 ?修習次第?(Brāvanākrana) 후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문답식으로 설하고 있다.
反論 一切法에 대한 無念(asmṇti) 無思惟(amanasikāra)에 의해서 마음은 無分別性 (nirvikalparā)에 들어간다.
答論 그것은 불합리하다.
여기서 反論者는 摩阿衍으로 알려져 있다. 카말라실라는 摩阿衍이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不思 不觀은 산스크리트어 amanasikāra로서 不思惟에 해당하며 비로 이 不思惟에 의해서 無分別性에 들어간다는 데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카말라실라의 비판은 한마디로 “最高의 智慧인 無分別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分別知가 수단으로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카말라실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른 개별관찰(bhūta pratyavekṣā)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이것(바른 개별관찰)은 分別(vikalpa)을 自性으로 하고 있어도 正思惟(yoniśo manasikāra)를 自性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것(바른 개별관찰)으로부터 바른 無分別智(bhūta nirvikalpa-jñāna)가 나온다고 생각하여 그 知(無分別智)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개별관찰)을 학습해야 한다.”
카말라실라는 바른 개별관찰을 버리게 되면 般若까지도 버리게 된다고 말하고 따라서 바른 개별관찰 없이는 바른 無分別智를 얻을 수 없으며 번뇌라고 하는 장해도 단멸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개별관찰, 分別(vikalpa), 思惟(manasikāra) 등은 전술한 바와 같이 바른 사고, 바른 판단을 의미한다. 바르지 못한 사고 판단에서는 바른 無分別智가 나올 수 없으며 바른 사고, 판단에서 그것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카말라실라는 바른 개별관찰(bhūta- pratyavekṣā)을 중요한 覺支(bodhyaṅga)라고 하였는데 覺支는 菩提를 얻기 위한 요인이므로 그것이 없이는 菩提, 즉 無分別智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松本史朗은 여기서 無分別智가 잘못 전달된 문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나 이 문제는 기정 사실로 접어두고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摩阿衍의 分別(想)을 버리면 佛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 카말라실라는 바른 사고나 판단 없이 또는 正誤를 구분할 수 있는 일체의 사고를 떠난다면 모든 사고와 의식이 정지된 기절 상태가 오히려 무분별지에 가깝다는 얘기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念과 思惟의 無(abhāva)만이 無念 無思惟라고 의도된다면 그것은 그 양자(念과 思惟)의 無가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 생기는가라고 하는 것만이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無는 그것에 의해서 그것(無)으로부터 無分別性이 생기는 것 같은 그러한 因(Kāraṇa)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실신한 사람에게도 念과 사유의 無로부터 無分別性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잘못된 귀결에 이르게 된다.”
예컨대 無念․無思惟가 있다 하더라도 바른 개별관찰이 없다면 諸法의 無自性性이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諸法은 自性으로서 空으로서 있다라고 할 때 그것(諸法)을 개별관찰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의 空性(sūnyata)의 통찰(prativedha)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空性의 통찰이 없다면 장해를 끊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결론은 正思惟 없이는 正覺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만일 마하연이 想을 떠나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을 바르지 못한 思惟를 떠나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마하연의 正理決에는 바른 分別知나 正思惟와 바르지 못한 分別知나 바르지 못한 思惟와 구분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大乘莊嚴經論?에는 自界 svadhātu에서 無明 avidya와 煩惱 Kleśa를 동반하는 활동과 分別(vikalpā)를 갖고 있는 二種의 顯現이 생긴다는 명제가 있다.
唯識說에서는 唯心은 二種의 顯現이요, 所取와 能取의 顯現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唯心과 唯識이 인간 존재의 근본구조의 原點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고 分別이라고 하는 것은 虛妄分別이라고 하여 인간 존재의 錯誤的인 주관작용을 지시하고 있다. ?攝大乘論?의 眞諦역에서는 似分別 顯現이니 分別影像이니 하여 진실은 그렇지 않은데 마치 대상인 것처럼 또는 주관의 작용인 것처럼 幻影을 갖게 되는 分別의 錯覺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原文을 보면 心은 二種의 顯現을 갖고 있어 貪(raga) 등의 顯現이라고도 말하고 마찬가지로 信(śraddhā) 등의 顯現이라고도 말하여진다. 그것이 染汚의 法이라고 하든 또는 善法이라고 하든 그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主體的 세계의 근원적인 心으로부터 無明과 번뇌를 동반하는 分別이 일어난 인식대상과 인식 주체의 양면으로 나뉘어 貪 혹은 信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끝부분의 貪으로도 信으로도 나타난다는 것은 실체가 아닌 그림자의 세계 바로 거기에 깨달음으로도 미망으로도 통하는 唯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李箕永 박사는 五蘊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특히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想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想은 推理요, 臆測이요, 思想이요, 理想일 수가 있다. 그것은 唯識說에 遍計所執 또는 妄分別이라고 번역되듯이 ‘人間心性’ parikalpita(그릇 想像되어진)의 ― lakśana(모습)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빚은 숱한 想像과 臆測과 思想과 심지어는 理想에 얼마나 많은 誤謬가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想(samjñā)의 不正確性, 不眞實性에 啞沿失色을 금할 수 없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훨씬 현저한 발전이 着取되는 까닭에 그 優越性이 인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李箕永 박사도 역시 想이 妄分別이지만 그러나 그것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分別智와 無分別智는 패러독스 그 자체이며 分別智 없는 無分別智나 無分別智 없는 分別智는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둘이야말로 또 하나의 相緣相待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3. 理性의 自覺과 無我의 깨달음
서양철학에 있어서 이성은 사유의 주체로서 대상인식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자기 인식의 원천임을 자각하는 자발적 이성이었다. 서양의 근대과학이 과학으로 성립한 것도 이성에 근거한 것이고 칸트적인 인격윤리의 기초가 된 것도 이성이었다. 서양철학사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의 nous, logos, 근세의 ratio, vermunft, reason 등 이성이라는 말은 나라와 철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왔으나 그것은 개략적으로 넓은 의미의 사유의 주체로 인식되어 왔다. 이성은 감성이나 감각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선험적인 사유실체라는 점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성을 근본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면 칸트의 경우와 같이 오성, 선험적 통각, 이론이성, 실천이성 등 지적 판단의 여러 분야를 논의해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불교의 無我와 대응해서 주로 데카르트 이후 근대적인 계몽적 이성 내지 독일 관념론에 입각한 순수자아(피히테의 reines Ich)로서의 이성을 본 논문의 용어로서 사용할 것이다. 물론 이 말의 배경에는 칸트의 ‘순수이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절에서는 일본의 阿部正雄의 논문을 참고하였기 때문에 그가 ‘순수자아’라고 사용한 개념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무르티(T. R. V. Murti)는 ?불교의 중심철학? ?中論과 칸트?에서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 이성을 구별함으로써 인간적 지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재에 관한 인식은 초월적 신에게 위임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천이성은 순수실천이성으로서 도덕법의 입법자이며 동시에 스스로 도덕법에 따르게 하는 무대감독이다. 칸트에 있어서는 ‘나는 생각한다’의 선험적 주관은 자연법칙의 구성자이면서 동시에 선험적 자유에 기반을 둔 선험적 주관은 도덕법의 입법자로서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행위한다의 나는 동일한 순수이성이었다.
일본의 阿部正雄은 일찍이 1963년에 ?현대에 있어서의 信의 문제?(부제 佛敎的 信과 理性)에서 서양철학의 순수자아인 이성과 불교적 無我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인간 존재내에서 자각되어 온 선험적인 순수자아의 입장은 종래의 불교적 무아의 입장이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순수자아는 자기 중심적인 일상의 자아의 입장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無我의 방향으로 초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순수자아에는 일종의 자아의 부정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것은 자아 그 자체를 절대로 부정해 버린 탈자적인 무아로 전입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아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일상적 자아를 초월한 그 근원을 자각하는 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순수하게 자각된 자아자신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무아의 입장은 이와 같은 유럽의 이성비판을 통한 인간존재의 내재적인 형이상학적 순수자아의 자각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불교는 분명히 자아와 분별지를 부정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의 무아의 입장은 서구의 고도로 자각된 순수자아인 이성의 차원까지도 초월하는 것이다. 서구의 이성이 여전히 형이상학적 실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가 이성까지도 부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보다도 이성의 자각은 주객 분리에 의한 지적 판단에 지나지 않으며 실존적으로 체험된 직관적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阿部正雄은 이 점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불교적 무아가 강조된다 해도 거기에는 일종의 공허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이며, 그 입장의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역사적 현실 속에서 공전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는 소이도, 이것이 충분히 수행되어 무아의 입장이 오늘의 역사적 위상 속에서 사상적으로 辨證되어 그 의미에 있어서 충분히 자각화되고 실존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오늘에 불교가 산 종교로서 그 종교적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무아의 입장이 자립적인 순수자아의 입장까지도 내적으로 지양되어진 의미에의 무아의 입장으로서 주체적 자각적으로 변증되어 기초지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阿部正雄은 이와 같은 문제의 상황의 근저에는 어떻게 하여 불교의 無我의 입장이 자립적인 순수이성을 포섭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와 관계있는, 따라서 진리 그 자체에도 관계있는 매우 근원적인 문제가 잠복해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실존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을 비롯한 반주지주의 사상들도 넓은 의미의 이성의 아들들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서구의 비판이성은 분명히 동양의 신비적 직관의 세계까지도 자각하는 이성이다.
사실 최근의 신과학의 유기체론적 홀리즘의 경향들은 다분히 동양사상과의 밀접한 교류의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물론 이 신과학들 역시 서양의 비판이성의 아들들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서양의 이성의 자각은 불교의 직관적 세계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한 카말라실라의 正思惟와 無分別智의 분석과 대비될 수 있다.
무르티는 中論과 칸트의 체계는 다 같이 철학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하고 그 철학의 작업은 그 철학적 비판에 대한 반성적 이해라고 하였다. 그는 이 반성은 곧 自覺(selfconscious- ness)이며 이 반성은 우리가 참이라고 믿었던 것이 허위임을 깨닫게 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르티는 나가르쥬나와 칸트의 논리적 출발점은 선험적인 假象(transcenttental illusion)을 자각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본래 칸트의 이성의 내재적인 초월의 경지에 있어서는 자연, 신, 인간 모두를 근거짓는 일종의 절대적인 보편성의 차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신적인 차원이나 초이성적 차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아에 내재하는 이성의 차원이다.
칸트는 나의 신앙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지식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칸트의 이성 비판은 현상과 물자체를 명백하게 분리하여 서로 차원을 달리하는 두 세계를 동시에 정립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이성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칸트가 ‘특수한 운명’이라고 부른 인간 이성의 인식활동에 대한 패러독스는 본래 인간 이성 자신의 ‘변증성’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한편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경험계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이 피제약적인 가능적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초감성적 세계로 향하려는 자연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 칸트에 있어서 인간 이성의 모든 이율배반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두 가지 측면에 연원되는 것으로서, 이른바 인간의 형이상학적 소질도 곧 여기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자연적 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하여 가능한가?”에서 “어떻게 하여 학(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라는 형식으로 그의 철학의 과제를 바꾸어야만 했다.
결국 칸트에 있어서 ‘자연적 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이 해명되기 위해서는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가능한가 아닌가 하는 이른바 ‘최후의 문제’를 해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문제’는 먼저 “어떻게 해서 선천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해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이 서느냐 쓰러지느냐 하는 것은 그 과제가 해결되느냐 혹은 그 과제가 설명되기를 요구하는 선천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이 사실은 전혀 성립하지 않음이 충분히 증명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칸트의 비판 이성은 자연, 신, 자유, 영혼, 인간의 제문제를 이성 자신 속에서 해명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 제1판의 서문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인간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갖고 있다. 즉 인간 이성은 물리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제문제(영혼․신․자유 등)에 고민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문제들을 제쳐놓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성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하여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며, 대답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 이성의 일체의 능력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칸트에 있어서 절대자나 자유와 같은 이념은 본래 자의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며, 이성 자신에 의해서 부과되어 있는 것이지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이 자기에게 부과된 과제적 표상을 주어져 있는 표상, 즉 인식되는 대상으로 볼 때, 이른바 선험적 변증으로서의 ‘가상의 논리’인 궤변이 성립한다. 유한한 대상적 인식을 초월하여 무한한 무제약자를 추구하는 이성은 유한과 무한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뛰어넘어 신과 같은 절대자를 인식의 대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성적 착각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은 ‘부과되어 있다’는 것과 ‘주어져 있다’는 것과의 뒤바뀜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본래 ‘이성의 본성에 유래하는’ ‘선험적 뒤바꿈’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과제는 단지 과학적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하는 인식의 가능 근거를 묻고 따라서 이성의 한계를 밝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이성 자신이 자기 인식을 밝힘으로써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무르티는 中論과 칸트가 사변적인 形而上學的 假象을 초극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칸트는 오히려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증명하려는 방향을 취함으로써 무제약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포기하고 이를 절대자에게로 돌렸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中論은 칸트와는 달리 철저하게 인간의 제관념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해탈케 하는 방향을 취함으로써 무제약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무르티는 칸트의 形而上學을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칸트와 불교의 차이는 분명히 무제약적인 것에 대한 내적인 이론적 자각과 내외를 동시에 초월하여 無我로 돌파하는 적극적인 실천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성의 자각과 禪의 깨달음의 차이가 있다. 禪의 목표는 진리의 깨달음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설에 의한 논의들은 이론으로 머무르는 한 의미가 없다. 그것이 수행 실천으로 옮겨질 때에만 깨달음은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천이 곧 禪이다.
세계적인 禪思想家 스즈끼 다이세쯔는 禪을 이렇게 설명한다.
“선(禪)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 선은 우리들 각자 속에 자연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모든 에네르기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에네르기는 보통 속박되고 왜곡되어 있어 자유롭게 활동하는 통로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들이 미치거나 불구가 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이것만이 본래 우리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는 창조적이고도 자비로운 모든 충동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내가 말하는 자유의 의미이다.”
禪에 있어서 깨달음은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현실이 사라진 황홀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몇몇 종교적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애적인 마음의 상태도 아니다. 조주(趙州)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마음의 정상적인 상태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禪에 있어서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정한 깨달음은 평안한 상태(well being)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이 개오(enlightenment)를 심리학적인 용어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인간 내부와 외부의 실상(實相)에 완전한 조화를 이룬 상태, 또는 인간이 그 실상을 충분하게 자각하고 파악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두뇌도 아니고, 또한 그의 신체의 어느 부분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그 사람 전인(全人)이 자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사고로써 파악하는, 저기에 떨어져 있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 즉 꽃이나 개나 사람을 그것의 전체적 실상에 있어서 자각하는 것이다.”
프롬의 이러한 주장은 주로 스즈끼 다이세쯔의 말을 재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스즈끼 다이세쯔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아무튼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諸法의 無我와 空을 깨닫는 것인데, 相應部의 蘊相應(Khandha-samyutta)은 無我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色은 無常(anicca)이다. 無常한 것은 苦(dukkha)이다. 苦인 것은 無我(anattā)이다. 無我인 것은 나의 것(mama)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나의 나(attā)는 아니다. 이와 같이 여실하게 바른 지혜를 갖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受․想․行․識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설하고 있다.
위의 교설에서 나(aham)와 我(attan)가 구분되어 있는데 我(attan : atman)는 나의 심연에 있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망에 의한 가상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나의 나(我)는 아니다’의 교설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자기의 육신이나 마음을 자기 자신의 소유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자아는 사실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인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귀결점에 이르게 된다. 자기의 심신을 자기의 자식이나 재산처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은 무명에 의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기적인 세대에 걸쳐서 지속되어 온 훈습 때문에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자기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의 죽음과 함께 버려지게 되고 그것이 아소유가 아니라는 것, 즉 無我가 드러나게 된다.
후세에는 我를 人我와 法我의 둘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人我는 주체로서의 실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주체의 능동성을 부여하여 전능자라는 의미가 첨가되었다. 이에 대해서 法我는 실체로서 불변상주하는 것으로서의 我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표시되었다. 아무튼 이 아트만으로서의 자아는 실체이면서 동시에 주체를 나타내는 것인만큼 이것이 바로 범부의 편견에 의한 아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편견과 아집을 떠나 中道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人無我 法無我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이다. 그러나 이 無我에 집착해서도 안되기 때문에 中論 18장 6계의 ‘空性에 있어서 戱論은 止滅한다’에 계속되는 부분에는,
諸佛은 我가 존재한다고 假說하고
無我라고 가르치고
어떠한 나도 없고 無我도 없다고 가르쳤다.
라고 설하고 있는데 바로 그렇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성의 자각은 칸트가 신앙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지식을 제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자각,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禪의 대비에서 보는 바와 같이 禪의 깨달음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넓은 의미의 자각이라고 본다면 이성의 자각은 禪의 깨달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선의 깨달음과 이성의 자각|작성자 임기영 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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