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의 제9장인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은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시작한다.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 수다원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는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흐름에 들어간 자’라는 뜻이지만, 들어갈 것도 없사오며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에도 들어가질 않으며 그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 이어서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에 대한 부처님의 물음과 수보리의 대답이 이어진다.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多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불교에서 지향하는 네 단계의 성자들로 ‘사과(四果)의 성인’이라고 부른다. ≪금강경≫에서는 수다원과에서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네 단계의 성자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이 그런 지위에 올랐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이들 성자 그 누구도 자신의 수행깊이에 대해서 티를 내지 않는다. 요컨대 이들 성자들의 경우 ‘나’라는 생각이 끊어졌기에 “‘내’가 어떤 경지에 올랐다.”는 분별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소승불교의 수행 목표는 아라한이지만, 대승불교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부처와 아라한을 다르게 본다. 그러나 초기불전을 보면 부처님 역시 당신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하셨다. 녹야원에서 중도의 설법을 통해서 다섯 비구들을 아라한의 경지로 인도하신 후 “이제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아라한! 대승이든 소승이든 불교수행자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성자다. 산스끄리뜨어로는 아르하뜨(Arhat), 빠알리어로는 아라한뜨(Arahant)라고 쓴다. 아르하뜨의 어원에 대해서 학설이 구구한데, ‘~할 만한 가치가 있는(deserve)’을 의미하는 어근 ‘아르흐(arh)’에 현재분사어미 ‘아뜨(at)’가 붙은 말로 분석하여 ‘응공(應供)’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마땅히 공양할만한 분’이란 뜻이다. 공양물을 올린 시주자에게 무한한 복을 주는 복전(福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賊)’을 의미하는 명사 ‘아리(ari)’에 ‘죽이다’를 의미하는 어근 ‘한(han)’과 과거수동분사어미 ‘따(ta)’가 붙어서 만들어진 복합어 아리한따(Arihanta)에서 파생된 말로 볼 때에는 ‘살적(殺賊)’이라고 번역된다. ‘적을 죽인 분’이란 뜻이다. 한문불교권에서는 주로 아라한(阿羅漢)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하지만, 티벳에서는 ‘다쫌빠(dGra bCom Pa)’라고 번역했는데, ‘다’는 ‘적’을 의미하며 ‘쫌빠’는 ‘정복’을 의미하기에, ‘살적’과 의미가 같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적’은 ‘번뇌의 적’을 뜻한다. 번뇌란 우리의 생각과 감성을 흔드는 ‘탐욕,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라한은 이러한 ‘번뇌의 적’들을 완전히 제압한 최고의 성자다.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된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괴로움일 뿐이라는 고성제, 그런 괴로움의 원인은 우리 마음 속 번뇌에 있다는 집성제, 번뇌를 제거하여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그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인 팔정도의 도성제다. 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번뇌를 제거하는 일이다.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를 제거하면 아라한이 된다.
번뇌에는 열 가지가 있다. ①탐(貪), ②진(瞋), ③만(慢), ④무명(無明), ⑤의(疑)의 다섯 가지에 ⑥유신견(有身見), ⑦변집견(邊執見), ⑧사견(邪見), ⑨견취견(見取見), ⑩계금취견(戒禁取見)의 오견(五見)을 합하여 열 가지다. 순서대로 풀어서 말하면 ‘①탐’이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망’인 욕탐(欲貪)과 ‘존재하고 싶은 욕망’인 유탐(有貪)을 의미하며, ‘②진’은 분노심, ‘③만’은 교만한 마음, ‘④무명’은 생명과 세계의 진상을 모르는 근본적인 어리석음, ‘⑤의’는 불교에 대한 의심, ‘⑥유신견’은 내가 있다는 생각, ‘⑦변집견’은 삶의 끝자락(邊)인 죽음 이후에 지금의 내가 그대로 이어진다거나 아예 사라진다고 망상하는 것, ‘⑧사견’은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것, ‘⑨견취견’은 앞의 세 가지 착각인 유신견, 변집견, 사견을 의식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으로 삼는 것, ‘⑩계금취견’은 다른 종교의 삿된 의례나 규범을 올바르다고 착각하거나 지계(持戒)만으로도 깨달음을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런 번뇌들을 완전히 제거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단계를 차례로 거쳐야 한다.
생명의 세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욕계의 중생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남녀나 암수의 성(性)을 갖고 살아간다. 색계의 중생은 동물적 욕망에서 벗어났기에 ‘청정한 몸’과 ‘정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색계의 중생은 몸조차 사라지고 ‘정신적 삼매경’ 속에서 살아간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고결해지고 미세해진다. 그런데 욕계를 벗어나 색계 이상의 세계에 오르는 시기가 언제인가에 따라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수다원은 산스끄리뜨어 ‘슈로따-아빤나(Srota Āpanna)’의 음사어다. ‘흐름에(Srote) 들어온 분(Āpanna)’이란 뜻으로 ‘입류(入流)’ 또는 ‘예류(預流)’라고 의역한다. 여기서 말하는 흐름이란 ‘성자(聖者)의 흐름’을 의미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를 갠지스 강물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한다. 갠지스 강에 들어가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떠내려가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바다에 이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수행을 통해서 수다원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 언젠가는 반드시 아라한이 된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다. 수다원이 되기 위해서는 열 가지 근본 번뇌 가운데 ⑤의(疑), ⑥유신견(有身見), ⑩계금취견(戒禁取見)의 셋을 끊으면 된다. ⑤‘의’를 끊었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⑥‘유신견’을 제거했기에 몸 어딘가에 내가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⑩‘계금취견’이 없기에 다른 종교의 의례나 규범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①탐욕, ②분노, ③교만 등 다른 번뇌들은 아직 남아 있어도 무아(無我)를 체득하고 불교에 대한 불퇴전의 신심을 갖추면 수다원이다. 무아를 아공(我空)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수다원이 되면 수행자의 마음에 비로소 ‘공성(空性)의 불길’이 붙는다. 짚단에 한 구석에 불이 붙으면 언젠가 다 타고 말듯이, 우리 마음에 공성의 불이 붙으면 머지않아 마음 속 번뇌가 모두 소진된다. 그래서 불퇴전의 경지다.
수다원은 “극칠반(極七返)한다.”고 한다. “기껏해야(極) 일곱 번(七) 욕계로 돌아온다(返).”는 뜻이다. 사성제를 통찰하는 수행을 통해서 수다원의 지위에 오르면, 죽은 후 내생에 많아야 일곱 번 욕계에 태어나고, 그 이후에는 색계 이상에 태어난다. 불교수행의 최고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지만, 이를 현생에 이루기는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수다원의 경지까지만 올라도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내생에 결코 험한 곳에 태어나지 않으며 머지않아 반드시 아라한이 되는 불퇴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수다원! 불교수행의 현실적 목표다.
그 다음 단계인 사다함은 ‘사끄리드-아가민(Sakṛd Āgamin)’의 음사어다. ‘한 번(Sakṛt) 오는 분(Āgamin)’이란 뜻이기에 일래(一來)라고 번역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생에 ‘한 번 더 욕계에 태어나야 하는 성자’다. 수다원의 경지는 넘어섰지만 아직은 욕계의 번뇌가 남아 있기에 죽은 후 내생에 한 번은 욕계에 태어나서 동물적 욕망과 분노심 같은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끊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생에는 색계 이상에 태어나 다시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이 된다.
아나함은 ‘안아가민(Anāgamin)’을 음사한 용어로 ‘안(An)’은 부정의 접두어이고, ‘아가민(āgamin)’은 ‘오는 자’를 의미한다. 의역하여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쓴다. ‘내생에 욕계에 오지 않는 분’이란 뜻이다. 고결하게 살면서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끊었기에 죽은 후 반드시 색계 이상의 세계에 태어나 아라한이 된다. 삼계 가운데 욕계를 하계(下界), 색계와 무색계를 묶어서 상계(上界)라고 부른다. 욕계에 속한 번뇌에 다섯 가지가 있는데 이를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고 한다. 하계(下)인 욕계에 속하는(分) 다섯(五) 번뇌(結)란 뜻이다. 오하분결은 ‘①탐 가운데 욕탐, ②진, ⑤의, ⑥유신견, ⑩계금취견’의 다섯이다. 사다함은 수다원의 경지를 이미 거쳤기에 ⑤의, ⑥유신견, ⑩계금취견이 없고, 더 나아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망도 끊고(①),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②). 그러나 ‘①탐’ 가운데 ‘색계에 대한 집착(색탐)’과 ‘무색계에 대한 집착(무색탐)’의 두가지, ‘③교만한 마음’, ‘④무명’, 그리고 ‘들뜬 마음(掉擧)’ 등 모두 다섯 가지 번뇌가 아직 남아 있다. 이를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부른다. 욕계는 완전히 벗어났지만 이런 집착이 남아 있기에 내생에 상계(上界)에 태어난다.
그리고 상계에서 이들 다섯 번뇌마저 모두 끊을 때, 결국 열 가지 근본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아라한이 된다. 번뇌의 적을 모두 제압한 ‘살적(殺賊)’이 되는 것이다. ‘동물적 욕망(欲)’과 ‘형상(色)에 대한 집착’ 그리고 ‘삼매의 경지(無色)’에 대한 집착조차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다시는 삼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죽은 후 몸과 마음이 모두 적멸에 든다. 완전한 열반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맺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인(聖人) 중의 성인이다. 아라한이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월간 <불광> 2012년 6월호 / 불교, 쉽고 명쾌하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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