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법륜스님

수선님 2019. 12. 1. 11:30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강의 법륜스님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무리[園林]를 삼으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걸쳐 중생을 교화했던 묘협(妙協)스님의 저서 《보왕삼매염불직지(寶王三昧念佛直指)》총 22편중 17편 십대애행(十大礙行)에 나오는 구절을 가려 뽑아 엮은 글이다.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1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1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많은 바람들, 병이 없기를 원하고, 장애가 없기를 바라고,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고, 남이 내 뜻에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는 일어날 만한 인연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수없는 인연을 지어놓고 과보를 받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면으로 과보를 받아드릴 뿐 만 아니라 그 장애의 원인도 규명해서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보왕삼매론>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어려움을 하나하나 들어서 그것을 부처님의 정법에 따라 수행으로 뛰어넘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훈 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제법이 공한 이치에 바탕을 두고 인생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
一 念身不求無病身 無病則貪欲易生
일 염신불구무병신 무병즉탐욕이생
是故聖人設化 , 以病苦為良藥 ,
시고성인설화 , 이병고위양약 ,
우리는 누구나 몸에 병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병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고뇌를 불교에서는 간략하게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태어나는 고(苦), 늙는 고, 병드는 고, 죽는 고, 바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이지요.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태어난 자가 죽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죽지 않기를 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 죽지 않기를 원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것을 고통으로 보니 고통이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바닷물의 현상인 것처럼 천하 만물은 봄이 되면 싹이 트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의 자연 현상입니다.
파도가 출렁이는 것이 고통입니까? 잎이 피고 지는 것이 고통입니까?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자연현상 중 하나입니다. 자연현상을 두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생각에 빠져 하나의 자연현상을 잘못 생각해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자연현상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의 원리라 하며 그것을 찬탄합니다. 봄에 움이 트는 것을 찬탄하고 꽃 피는 것을 찬탄하고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찬탄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몸에 대해서만 이 자연현상을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나를 떠나서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인데 나에게 사로잡혀 자연현상을 거부하기 때문에 큰 고통이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제 현상, 즉 법의 실상을 안다면 몸에 병이 나지 않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자연현상이지요.
어떤 기계를 만들든지 그 기계가 가끔 고장이 날 때가 있습니다. 고장이 안 나는 기계는 없어요. 기계가 고장 나면 수리하면 됩니다. 고장 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고장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기계가 고장 날 때는 날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계가 고장 났다고 신경질 낼 것이 아니라 고장 나면 고치면 됩니다. 고장이 나면 고쳐 쓰면 되고, 고장이 덜 나도록 사용할 때 유의하면 됩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더 이상 수리할 수 없는 정도가 되고, 수리하는 경비로 많이 듭니다. 이것을 계속 수리해서 유지시키려면 새로 기계를 사는 것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럴 때는 폐기처분하는 것입니다. 그럼 폐기처분하는 것이 손실인가? 손실이 아니에요. 그동안 충분히 썼으니까요. 우리의 몸도 그와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에 병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죠. 잔고장이 나면 고치고 그 차의 상태를 잘 알아서 조심을 하게 마련입니다. 자동차가 잔고장이 많이 나면 과속을 안 하게 되지요. 그런데 자동차가 아무 고장이 없고 속도도 잘 나면 과속할 위험이 있습니다. 과속을 하면 사고 나되 죽는 수가 있지요. 그래서 몸이 건강한 사람들이 한 번 아파서 병원에 가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에 몸이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들이 장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잔병치레 하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옛 말이 있지요. 왜냐면 몸을 조심하거든요. 몸을 조심해서 그때그때 잘 처치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장이 전혀 안 나면 과신하게 됩니다. 과신하게 되니까 어느 순간에 큰 사고가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배고픈데 밥 먹으려는 게 탐욕인가? 졸린데 자는 게 탐욕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욕구라고 합니다. 욕구가 지나치면 탐욕이라고 하지요. 중생이 갖는 욕심을 보통 오욕 - 식욕, 색욕, 재욕, 수면욕, 명예욕 - 이라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병이 없으면 이런 것이 더 일어나게 됩니다. 몸에 병이 없으면 여러 가지 탐심이 생겨나서 수명을 단축시키고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살면서 연관 맺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지 힘이 남아돌게 되면 과욕을 부리게 됩니다. 그런데서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는 것입니다.
만약 몸에 병이 났으면 병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병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 병이 일어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큰 재앙이라도 맞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병고를 통해 자기가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반성하고 돌이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그저 절에 와서 절 몇 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제법(諸法)이 공(空)한 도리, 욕심을 버리는 행위’가 될 때, 바로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때, 나에게 있는 병이 내 삶의 약이 되고, 내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이 몸은 생로병사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병은 생기는 것이지요. <유마경>을 보면 병이 난 유마거사는 자신의 병을 방편 삼아 설법을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병들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방편으로 쓰지요.
이렇게 생로병사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서 병에 구애를 안 받는 것이 근본 가르침이고 그 다음으로는 병의 원인이 이런 과욕으로 생겨난 줄을 알아 그 과욕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병이 낫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고
탐욕이 생겨나면 마침내 파계하여 도에서 물러나게 되느니라.
몸에 병이 없으면 과욕을 하게 되고 과욕은 계율을 깬다.
계율을 깬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선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병의 인연을 살펴서 병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면 병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병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병에 구애받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여러분들도 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나치게 민감하지 말고 ‘몸이라는 것은 잘 다스려 써야 하지만 때로는 고장이 날 수도 있다, 고장이 나면 수리해서 쓰면 된다.’ 이런 가벼운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 몸에 고장이 났을 때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잘 찾아서 수리해서 쓰면 됩니다. 그런데 원인을 찾아 병원에 가서 어디가 나쁘다하는 결과를 듣고는 그 결과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 병의 80퍼센트는 정신적 과욕, 스트레스이고 거기에 따른 과식, 따라서 온갖 과욕에서 병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돌이켜서 여러분이 마음을 가볍게 가지고 베푸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뭔가를 얻기 위해 나를 고집하고, 뭔가를 움켜쥐기 위해 애를 쓸수록 몸과 마음에 병이 듭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고개를 숙이고 상대에게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가정생활부터 가볍게 할 때, 여러분들의 건강도 좋아집니다.
※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의 혼란기에 생존한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 안에 있는 스물 두 편의 글 중 제17편, ‘십대애행’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원문은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것보다 긴 문장인데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새기기에 편하도록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2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2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
[원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모두를 속이고 억압하게 되느니라.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고난이 나를 어찌 상하게 하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고난으로써 해탈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二 處世不求無難 世無難則驕奢必起
이 처세불구무난 세무난즉교사필기
是故聖人設化 , 以患難為逍遙 ,
시고성인설화 , 이환난위소요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정초기도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올해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영험 있다 하는 도량을 찾아다니며 무사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하는 말씀은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명산 대첩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는데,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럴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지난 호 <월간 정토>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병들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일은 우리 뜻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바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다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고 하면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상충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성불하는 게 목표인데 ‘나의 부모님’이 나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지요. 또 ‘나의 여자 친구’도 나에 대해서 원하는 바가 다르겠지요. 이렇게 서로 원하는 바가 상충되는데,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오늘 놀러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내일 놀러가는 사람이 있는데 각각은 자신이 놀러가는 날의 날씨가 맑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맑게 되면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어서 농사는 안 되고 먼지가 펄펄 날리니 금방 사막이 되어 버리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자연은 사막이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좋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니 결국 바꿔 말하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세상을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하는 바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이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괴로워하면서 갖가지 곤란을 겪습니다.
여러 가지 곤란을 겪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그런 일을 겪는 것은 그런 일을 겪을 만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바로 이 인과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래서 원인을 지은 것으로 결과가 있는데 우리는 내가 지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재앙’ 혹은 ‘곤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인을 알게 되면 ‘재앙’이나 ‘곤란’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과법을 알아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드림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 자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정상이니까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괴로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나의 괴로움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날씨가 맑든 날씨가 흐리든 그 자체는 우리들이 괴로워야할 아무런 이유가 아니지요. 날 괴롭히려고 비가 오거나, 날 괴롭히려고 해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기후환경인데 내가 ‘오늘 날씨가 맑아야한다’ 거나 ‘비가 내려야하는데.’ 하고 바라는 대로 돼야 한다고 할 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곤란하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곤란한 일은 아니지요. 약간 불편한 일일 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 게 진리이므로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해서 괴로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될 수 없으므로 곤란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곤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고통을 겪습니다. 곤란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가끔 있지요. 그러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인기 가수, 탤런트, 스포츠맨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처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세상살이에 조심하는 마음이 없어서 교만하고 거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걸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집에 와서 밥 얻어먹는 주제에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날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려면 문간에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좋고 많이 줘도 좋고 적게 줘도 좋고 이것 줘도 좋고 저것 줘도 좋습니다. 걸식과 구걸의 차이는 걸식은 수행의 한 방편이고 구걸은 욕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걸식을 할 때는 욕심을 버리고 걸식을 하고, 구걸을 할 때는 욕심으로 전전긍긍합니다. 걸식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맡기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고, 구걸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든 애걸복걸하든 어쨌든 강요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걸식을 하는 자는 겸손해야합니다. 그래서 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의 제자들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겸손해라. 나의 제자들은 비굴해서는 안 된다, 당당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겸손과 비굴을 같이 봅니다. 욕구가 있으면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욕구가 없으면 당당해집니다. 욕구가 있으면 교만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겸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천하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천하 사람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중생은 천하 사람에게 움츠려 비굴하고 또 천하 사람에게 잘났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여러분들이 돈에 집착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면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돈 적은 사람을 만나면 교만해집니다. 또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거만해집니다. 얼굴 모양에 집착하게 되면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에게는 기가 죽고 자기보다 못생긴 사람에게는 잘난 척을 합니다. 지식에 집착하면 자기보다 지식이 더 많은 사람에게는 기를 못 펴고 자기보다 지식이 못한 사람에게는 큰소리 뻥뻥 칩니다. 실제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심리지요.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것을 내려놓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비굴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거만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가난한 자에게 밥을 빌게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겸손하도록 가르치고, 궁성에 가서는 그 어떤 것도 빌지 못하게 해서 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은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왕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말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는 수행자의 발아래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제일 낮은 자는 수행자의 머리 위에 얹어놓으니 하니 결국은 세상을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왕은 천시하고 중생은 높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하였습니다. 근데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이건 주위의 사람을 봐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봐도 알 수 있습니다. 뭐든지 뜻대로 잘 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자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원문에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고 바라는 데서 고난이 되지 본래는 고난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空)’이지요.
고난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하랴.
우리가 고난이라 말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본래 고난이 없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 고난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여기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보면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면 어느 고난도 아무런 장애가 안 되지요.
- 월간 정토 2007년 4월호-
 

 

법륜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3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3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마음 공부하는 데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마라.
마음 공부하는 데 장애가 없으면 배움에 등급을 뛰어넘게 되고
등급을 뛰어넘으면 반드시 얻지 못하고서도 얻었다고 하게 되느니라.
이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해져서 장애에 걸릴 것이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을 자유로이 거닐어라 하셨느니라.
三 究心不求無障 心無障則所學蹋等
삼 구심불구무장 심무장즉소학답등
是故聖人設化 , 以遮障為解脫 ,
시고성인설화 , 이차장위해탈 ,
염불을 하면 염불에 집중이 되고, 참선을 하면 화두가 성성해지고, 명상을 하면 마음이 호흡에 집중 되고,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해 보면 그렇지 않지요. 온갖 번뇌, 망상이 끼어들어 집중이 안 됩니다.
마음 공부의 온갖 장애는 먼저 내적 장애와 외적 장애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외적 장애는 수행하겠다고 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든지 집에 부도가 나든지 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조건이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외부에서 갖가지 번뇌가 생기는 거예요. 하지만 외적 장애는 사실 장애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외적 장애에 부딪혔을 때 내적으로 수행에 대한, 공부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일어나면 외적인 사건은 큰 장애가 됩니다. 공부하는 데 회의가 일어나서 싫어하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외적인 상황이 갑자기 큰 장애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외적 장애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장애는 장애라고 하지만 사실은 장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공부에 대한 회의가 들지 않으면 외적 장애는 문제가 안 되거든요. 오히려 외적인 장애는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음 공부할 때 생기는 내적 장애 중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번뇌입니다. 명상을 한다고 앉아 있으면 이미 지나가버린 옛날 생각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책에 있는 글처럼 내가 옛날에 그랬다는 기록이지 그게 어떻든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과거에 사로잡힙니다. 지나온 삶이 괴로웠으면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적의가 생깁니다. 지금 내가 돌이켜봤을 때 과거의 기억이 괴로웠다고 한을 품으면 그것은 나에게 큰 불행을 자초합니다. 반면에 과거의 좋았던 기억에 사로잡혀서 번뇌가 일기도 합니다. ‘나도 한 때는 지위가 높았는데, 부자였는데, 얼굴이 예뻤는데…….’ 이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면 현재의 자기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과거에 휩싸여서 현재의 자신이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못 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자기를 자꾸 불행하게 만들지요. 과거의 나쁜 기억에 사로잡히면 과거를 불행하게 만들고, 과거의 좋은 기억에 사로잡히면 현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내적 장애의 두 번째는 망상이에요. 미래에 대한 생각이지요. 있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이 생깁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이런 망상 때문에 집중이 안 되지요.
세 번째는 회의입니다. ‘절하면 뭐하나, 수행하면 뭐하나.’ 주로 안 될 때 이런 생각이 많이 일어나지요. ‘꼭 정진해야 하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참회하나.’ 이렇게 자꾸 의심이 듭니다.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면 합당한 이유가 생깁니다. 합당한 이유가 생기니까 그만둘 수 있지요. 내가 하기로 해 놓고 안 하는 게 아니고 안 할 이유가 생겨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하기로 해 놓고 안 했을 때 여기에 대한 책임감이 적습니다. 공부할 때 드는 회의와 의심, 이 마장은 무섭습니다.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 집중이 안 되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은 ‘번뇌가 왜 이리 많지, 왜 이리 공부가 안 되지’하는 정도지,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회의와 의심은 ‘과연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가, 안 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이럴 때 여러 가지 바깥 이유가 겹치지요. 이사를 간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이런 이유가 겹치면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싫어함에 사로잡히게 되면 남의 말이 귀에 안 들리고 사물을 봐도 눈에 안 보입니다. 그래서 사로잡힘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싫어함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장애의 핵심은 싫어함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의욕이 없는 거예요. 흐르는 물처럼 명예도 무엇도 다 버리고 사는 것은, 다 버렸다 하더라도 생기가 있습니다. 좌절이나 절망과는 거리가 멀지요. 무심의 상태라는 것은 그 안에 ‘소소영영’, 깨어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할 때도 마음의 평정, 마음의 고요함 속에 정념이 있어야 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흐리멍덩한 상태는 수행하는 데 큰 장애에요.
우리가 공부할 때 이런저런 것들을 장애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이에요. 밖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 업이 어떤 부분에서 애착과 혐오를 일으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장애가 없어서 명상하면 명상이 고요히 되고, 염불하면 염불이 잘 되고, 어떤 일을 하든 뜻대로 되면 좋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됩니다. 교만해지게 됩니다. 무엇이든 일을 할 때, 손쉽게 하려고 하면 안 돼요. 오히려 적당한 장애는 우리 인생을 탄탄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가끔 장애를 맞는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장애를 뛰어넘을 때만이 공부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장애를 뛰어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면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겁니다.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뛰어넘으면 승리를 하지만 걸려 넘어지면 패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을 세웠으면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 장애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다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면 장애가 스스로 고요해져서 장애에 걸릴 것이 없어집니다. ‘장애’라 하는 것은 장애에 걸려 넘어질 때 장애지, 그 장애에 구애를 받지 않으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입니다. 반야심경에 나오지요. ‘심무가애(心無罫碍)’, 마음에 장애가 없어지면 ‘심무가애 무가애고(心無罫碍 無罫碍故)’, 바깥 장애도 없어져 버립니다. 장애가 없으므로 ‘무유공포(無有恐怖)’, 두려울 것이 없어지지요.
우리는 아무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데 장애는 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장애가 우선이에요. 싫어하는 데 사로잡히면 이 마음이 바로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걸리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하나의 사건이 되고, 그런 사건을 해결하게 되면 나에게 능력이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것이 나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에게 좋은 일이에요. 돌아보면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장애들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공부를 도와줬어요. 그런데서 우리가 장애를 해탈의 지름길로 여기고, 장애 가운데서 해탈을 얻어야 하는 거예요. 갖가지 장애 속에서 자유로워야지 장애 없이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4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4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수행하는 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하고
서원이 견고하지 못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도 증득했다고 하느니라.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보고 마 자체에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길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四 立行不求無魔 行無魔則誓願不堅
사 입행불구무마 행무마즉서원불견
是故聖人設化 , 以群魔為法侶 ,
시고성인설화 , 이군마위법려 ,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마장(魔障)이 낀다.’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공부하다 보면 공부를 못 하게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누구나 다 원하지요. 그런데 수행을 하면 누구에게나 마장이 일어납니다. 옛사람들은 이 마장이라는 것을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라고 하여, 그것이 수행을 못 하도록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장애는 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게 어떤 것이든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가 물러나는 마음을 내면 그게 바로 ‘마장’이지요.
그러면 이런 물러나는 마음, 어떤 것을 하려고 할 때 나아가지 못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이 내 업식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습관을 바꾸려고 할 때, 과거의 습관이 저항하는 거예요. 이 업의 흐름, 습관의 흐름은 물리학에서 말하는 뉴턴의 제3법칙인 ‘관성의 법칙’과 같아요. 움직이는 물건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추었던 물건은 계속 멈추어 있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려면 힘을 가해야 하고, 멈춰 있는 물체를 움직이려면 역시 큰 힘을 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습관이라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움직이는 물체와 같아요. 습관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계속 그 방향으로 가려 하는데 우리가 그걸 바꾸려고 하면 이 습관이 상당한 저항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저항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결심을 하면 꼭 사건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옛날부터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심을 단단히 해도 삼일을 못 넘기지요.
하지만 이 마장이라는 것도 확실한 의지, 즉 죽기를 각오한 대결정심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반면에 털끝만큼이라도 틈이 생기면 마장은 쏜살같이, 비수같이 파고들어서 주인 노릇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생각 자체를 바꾸게 하여 공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면 마음속에서는 항상 또 다른 망설임이 생기지요.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 마왕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됩니다. 마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즉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이 바라는 최고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마왕이여, 나는 바라는 바가 없소.” 하고 말씀하셨어요. 바라는 바가 없으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부처님께는 아무런 유혹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것도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게 좋을까요?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이 나에게 훨씬 좋습니다.
날씨를 예로 들어 봅시다. 날씨에 대해서 내가 어떠했으면 좋겠다는 원하는 바가 없으면 비 오든, 구름 끼든, 덥든, 춥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날씨의 변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굉장히 지혜로운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법은 높고 낮음이 없지요. 제법은 존재 가치의 높고 낮음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空)’입니다. 다만 필요에 의해 쓰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가치는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높다는 데 집착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일단 이치가 뚫리면, 수없이 걸려서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치가 딱 꿰뚫어지지 않으면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틀리고도 틀린 줄 모르고, 모르면서도 물을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 줄을 모르니까 이것은 해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일단 이치를 확실히 알아버리면 잘못해도 잘못한 줄 알고 모르면 모르는 줄 알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나아지게 돼요. 그래서 법의 이치를 정확하게 꿰뚫어야 합니다. 이것을 ‘견도(見道)’라고 합니다. 적어도 이생에는 ‘견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치를 통달하여도 지금까지의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무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약간 방심을 하면 업식이 일어나서 업식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이치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것이 ‘수행’입니다. 넘어져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상태에서 누워 있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수행’은 연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됩니다. 즉, 자신이 공부할 때 자기 원하는 대로 되면 교만해지듯이 이 마음이 교만해져서 얻지 못한 것도 얻었다, 증득하지 못한 것도 증득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데 마 없기를 바라지 말 게 아니라, 마장이 있더라도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마장이 일어날 때 그것이 마장인 줄 알면 됩니다. ‘아, 이게 과거 나의 업식이구나.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이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걸 늘 봐야 합니다. 그럼 거기에 휩쓸려 가지 않아요. 견도가 열리면 어긋나는 자기를 끝없이 볼 수 있어요. 부부관계에서도 볼 수 있고, 음식에서도 볼 수 있고, 잠자는 것에서도 볼 수 있고, 절하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시간이 공부꺼리지요. 그러니 잘하면 내게 교훈이 되고 못하더라도 내게 뉘우침이 되니까 넘어져도 일어나면 됩니다. ‘아, 내가 이 정도에 걸려 넘어지는구나.’ 알게 되면 한 번, 두 번 걸려 넘어지면서 세 번째는 안 넘어질 수도 있지요.
세상살이에 혼란이 있는 게 정상인 것처럼, 일하는 데 장애가 있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런 것처럼 수행할 때는 마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견고해지지 못합니다. 원을 세웠다 하더라도 한 번, 두 번 넘어지면서 만 번 넘어져도 일어나고, 다시 만 한 번째에도 일어난다고 하면 그 원이 아주 견고한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서원이 굳건하지 못했다면 마왕이 천하를 다 내 주겠다고 했을 때 받았을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이무소득고 -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처럼 얻을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가 허망한 것임을 꿰뚫어 보고 마 자체에는 뿌리가 없다는 것을 사무쳐 알게 되면 마가 어찌 나를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로써 수행을 돕는 벗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마장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나한테 이런 마장이 또 있구나. 결국은 이것이 내가 앞으로 극복해야 될 대상이구나.’ 하고 돌이킬 줄 안다면, 마장이 일어남으로써 우리가 알아차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지요. 일어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일어남으로 해서 내 수행의 과제를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마를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꾸준히 정진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5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5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원문]
『일을 도모함에 있어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성취되면 뜻이 경박하고 교만해지며,
뜻이 경박하고 교만해지면 반드시 나는 유능하다고 스스로 칭하게 되느니라.
생각하는 대로 일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일을 이룸은 업을 따르는 것.
일이란 지금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일의 어려움을 안락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五 謀事不求易成 事易成則志存輕慢
오 모사불구역성 사역성즉지존경만
是故聖人設化 , 以留難為成就 ,
시고성인설화 , 이류난위성취 ,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일이 쉽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뜻대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힘들어하고 좌절하면서 자기 능력을 탓합니다. 반대로 일이 잘 되면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그러다 보면 큰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등산을 할 때 오르기 편한 산을 선택하면 편하기는 하지만 재미가 좀 떨어집니다. 험한 산을 오르면 힘은 들지만 재미가 있잖아요. 또 날마다 다니던 산보다 처음 가는 산을 선택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길을 잃거나 두세 번 헤매다보면 그때는 괴롭지만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경험으로 그 산에 대해 훤히 알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되도록 하기 위해 연구를 하면 경험이 쌓이고 공부가 되고 그것이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될 때 연구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실망하고 그러면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노력 없이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부처님이나 하느님 같은 존재에게 빌기도 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일이 안 될 때는 왜 안 되는지 연구해서 나에게 더 많은 학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되는대로 하면서 ‘일이 안 되는 것을 수행삼아 한다.’라고 말하면 안 되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준비를 해도 상황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준비가 잘 되어 있으면 객관적인 상황이 안 받쳐줘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각지도 않은 변수를 몇 번 경험하면서 전문가가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떤 새로운 일을 할 때도 몇 가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응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일을 그르친 경험으로 대처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잘못됨으로써 배우는 기회가 생깁니다. 일이 뜻대로 되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은 뭐든 잘 된다고 과신하다가 장애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심하면 충격도 받습니다. 그러나 잔병이 많은 사람이 질병에 대한 대응능력이 생기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들에 많이 부딪히면 그만큼 대처능력이 생깁니다.
정토회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인도 성지 순례를 갑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하면 예기치 못한 변수가 늘 일어납니다.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준비를 충분히 했는데도 돌발 상황들이 생기는 것이지요. 비행기가 안개 때문에 이륙을 못 해 일정에도 없는 방콕에서 하루를 자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인도라는 나라가 우리의 상식과는 달라서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서든 문제는 늘 있기 마련이니 이걸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며 아주 면밀히 계획을 세웁니다. 비행기가 하루 늦게 도착한다든지, 기차가 예닐곱 시간 늦게 온다든지, 버스가 중간에 고장이 나서 못 간다든지 할 때도 여행의 큰 줄기에는 차질 없이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지순례 일정을 짤 때 오늘 저녁에 도착해 오늘 저녁에 기차를 타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도착하면 내일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하고 그 사이에 구경거리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만약 비행기가 늦어지면 그 구경거리만 빼고 일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일 어려웠던 일 중 하나는 호텔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는데 예약한 30개 방을 달라고 했더니 10개만 주고 20개는 못 준다고 한 사건이었습니다. 딴 사람이 와서 돈을 두 배로 주면 예약과는 상관없이 방을 내주기 때문에 방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도에 가면 우리 뜻대로 안 됩니다. 오는 경계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고 사전에 교육을 합니다. 성지순례이기 때문에 여행사 따라 오듯이 불평, 불만을 하기보다는 길거리에서 자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달리는 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 기도를 놓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일정을 책임지는 사람은 대중의 편의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담당자는 네다섯 시간 전에 호텔에 먼저 가서 체크를 해야 합니다. 이런 점검들은 예전에 일이 잘 안 된 경험을 했던 덕분에 생긴 대처능력입니다.
무조건 일이 뜻대로 되어야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이 뜻대로 되면 사람이 경솔해지고 잘한다는 우월감으로 콧대가 높아집니다. 수행과는 정반대로 가지요. 그러니 어떤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을 자기 생각대로 추진할 수는 있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의 의도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많은 조건들과 결합해 이루어집니다. 즉, ‘인연과’입니다. ‘인’은 내가 의도하는 것이고 ‘연’은 주위의 상황 조건이에요. 인이 조금 부족해도 연이 무난하면 괜찮아요.
전기를 예로 들어 볼까요. 여기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도 그 순간, 누가 봤다거나 불이 옮겨 붙을만한 나무나 다른 물체가 없었다면 불이 날 원인은 있어도 주변 조건으로 화재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화재 위험이 있는 곳이라도 불씨가 없으면 불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꼭 큰 화재가 날 때는 불씨가 있고, 그 때 마침 주위에 인화물질이 있고, 대처할 사람이 없을 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인연과’ 입니다. 그러니까 조심을 하고, 계획을 잘 세우는 것은 ‘인’입니다. 인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어요. 씨앗도 좋아야 하지만 반드시 씨앗이 좋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좋은 씨앗도 자갈밭에 떨어지면 잘 자라지 않아요. ‘연’이 어떠냐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씨앗인데 자갈밭에 떨어졌으면 밭을 바꿔야 하고 좋은 밭인데 나쁜 씨앗이 떨어졌으면 씨앗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서 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하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반드시 내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변 상황과 관계가 있어요. 그것을 수용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일이란 지금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주어진 조건과 결합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일의 어려움을 수행으로 삼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일어날 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재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6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6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원문]
『정을 나누되 나에게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나의 이익을 바라며 정을 나누면 도의를 잃게 되고 도의를 잃게 되면
반드시 그릇됨을 드러내게 되느니라.
정의 근본을 잘 살펴볼지니, 정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정은 인연을 의지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힘든 교제로써 깨달음의 밑천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六 交情不求益吾 交益吾則虧損道義
육 교정불구익오 교익오즉휴손도의
是故聖人設化 , 以敝交為資糧
시고성인설화 , 이폐교위자량
우리는 친구를 사귈 때도 상대로부터 조금이라도 득을 보려고 합니다. 아닌 것 같지만 ‘괜찮은 친구’라는 것은 ‘내가 득 보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득 본다는 것은 꼭 경제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그 친구를 사귐으로 해서 배우는 게 많든지, 경제적으로 도움을 얻든지, 출세의 줄이 되든지, 놀면 재밌든지, 뭐가 되었든 그 친구로부터 득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친구가 나에게 와서 매일 죽겠다고 울며 상담하고, 돈 빌려 달라고 해서 내가 부담이 되면 나는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됩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사람들은 결혼할 때도 자기가 이롭고자 결혼을 합니다. 살아봐서 별로 득이 안 된다 싶을 때 나타나는 생각은 ‘이럴 바엔 혼자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별로 좋은 게 없다는 것은 별로 득 되는 게 없다는 뜻이지요. 더 나아가서 ‘이제 못 살겠다.’ 하는 것은 그 손해가 막심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서로 솔직할 필요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관계는 바로 부부입니다.
옛날에 제가 부부수련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부인들에게 “남편한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남편이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 것 같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어요. 남편들에게도 “아내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내가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 것 같은가?”라고 물었지요. 결과는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존중이었어요. 부부로 같이 살면서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멸시하거나 얕보는 데 대한 상처가 많았어요. 남편이 아이들 보는 앞에서 “네가 뭘 알아?”라고 면박을 줄 때 가장 모멸감을 느낀다고 했어요.
근데 남편들에게 아내가 뭘 가장 원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돈’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어요. ‘마누라하면 돈만 생각난다. 우리 마누라는 돈만 벌어주면 괜찮다.’ 남편들이 이렇게 돈에 대한 압박이 있으니 아내에게 돈을 못 벌어주면 괜히 위축이 되는 거예요. 반대로 자기가 돈을 좀 벌어주는 편이면 대부분이 바람을 피워요.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람피우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이 없어요. 생활비를 충분히 주고 있으니 나머지는 자기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부부가 평등하려면 아내도 남편이 돈을 벌어 와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남녀관계에서 평등하다는 의미 안에는 경제적인 문제에서도 평등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직장을 잃고 집에 있게 되면, 부인은 자기가 나가서 돈을 버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남편을 무능하다고 생각하거나 꼴 보기 싫어하면 그건 불평등한 관계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여자니까 하고 주장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남녀가 평등하니까 하고 주장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이익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선을 보거나 연애할 때도 학벌이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잖아요. 인물도 잘 나고 신체도 좋고 성격도 좋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있고, 또 자기만 쳐다봐야 하는 사람이길 바라잖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연애할 때 한눈에 반했다고 말하는데 실 한 눈에 반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런 여러 가지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지요. 가난한 집에 팔이나 눈이 하나 없거나, 말을 더듬는 등 장애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는 경우는 없잖아요. 상대가 내 눈에 왕자 같거나 공주 같아 보인 경우에 한눈에 반했다는 거예요.
래서 한 눈에 반하면 연애나 결혼생활이 오래 못 갑니다. 그냥 같이 살다보니 정이 들어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이혼율이 높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게 가진 기대치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실망하게 됩니다. 바라는 것이 없거나 낮을수록 관계가 오래가고 서로에 대한 실망이 적어요. 기대치가 없으니 특별히 미워한다거나 원수가 되거나 헤어지는 일이 없어요.
누구를 사귀어 정을 주고받는 게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다고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상대를 금방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를 오래 하다보면 그 사람의 진의를 알게 되어 좋아지기도 합니다. 특히 내가 어렵거나 하는 경우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몸과 피부로 느끼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순결’이란 ‘꼭 너만 사귄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그를 위하는 마음, 바른 마음을 갖고 사귀면 사귐이 길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손에 있는 돈을 낭비하지 않고 잘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길이지만 자기가 한 번 만든 인간관계를 나쁘게 만들지 않고 사귐을 길게 하는 것도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을 만나서 서로 원수가 되거나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관계를 만들면 있는 재산을 잃는 것과 같은 거예요. 원효대사는 상대가 나를 미워하는 것까지도 내 문제로 봤습니다. 우리는 그 수준까지는 안 되더라도 수행자라면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상대 때문에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든, 폭행을 당했든, 그 어떤 이유가 있어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상대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괴롭고 사람도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을 잘하는 것이 돈을 버는 거예요. 열심히 수행하면 주위에 신뢰를 얻고, 그것이 곧 재산이 되어 앞으로 언제 무슨 일로 나에게 이익을 가져올지 모릅니다. 뿌린 인연의 공덕은 언젠가는 옵니다. 금방 오기도 하고 십년 후에 오기도 하고 다음 생에 오기도 하고 여러 생이 지나서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는 길게 사귀어야 해요. 길게 사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롭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를 따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손익 계산을 좀 더 길게 하라는 거예요.
인과의 법칙이 있다는 것은 인생은 손해 볼 일도 없고 득 볼 일도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투자했는데 금방 돌아오지 않으면 손해라고 느끼고, 투자는 작게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많으면 득으로 느끼죠. 우리 인생은 늘 손해도 보고 득도 봅니다. 손해 보는 것이 꼭 나쁜 게 아니에요. 손해 보는 것은 저축하는 것이고 다음에 득이 되어 나타납니다. 지금 득이 되는 것은 좋은 게 아니에요. 다음에 갚아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손실과 득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노력보다 많이 받는다면 빚을 내거나 저축한 걸 갖다 쓰는 거고 내가 한 것보다 돌아오는 게 적다면 빚 갚거나 저축하는 겁니다. 사실은 인생에는 손익이 없습니다. 계산을 무한대로 하면 본래 손익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길게 보면 이익 보려 하지 않아도 득이 되는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7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무리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다른 사람이 순종하고 거스르지 않기를 바라지 마라.
사람들이 순종하여 거스르지 않으면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며
내심으로 자신을 뽐내게 되면 반드시 내가 옳다고 고집하게 되느니라.
깨달은 이의 자세는 사람들의 허망한 행위를 관하여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거역하는 사람으로서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七 於人不求順適 人順勢則心必自矜
칠 어인불구순적 인순세즉심필자긍
是故聖人設化 , 以逆人為園林 ,
시고성인설화 , 이역인위원림 ,
우리는 누구나 남이 내 뜻에 순종해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말하면 남편도 “그래, 그래.” 하기를 원하고, 아내도 “예, 예.” 하기를 원하고, 부모까지도 “오냐, 오냐.” 하기를 원해요. 누구나 이렇게 원하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상대방이 “예, 예” 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일까요? “예, 예.” 하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 역시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는 가볍게 해야 합니다. 가볍게 한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들어줄 것이라는 전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내 말을 안 들어줄 바에야 굳이 왜 말을 해? 내 입만 아프지.’ 하는데 그것은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조건 순종하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이런 경우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왕이에요. 왕은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항상 “‘예, 예.” 하고 순종하니 자신이 말하고 생각한 것은 다 진리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기 의견을 거스르면 화를 내고 처벌을 하거나 때로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우리가 악덕 군주라고 하는 사람도 한 개인으로 보면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말하는 입만 있었지 듣는 귀는 없이 키워졌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면 모든 사람이 따른다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결국 이런 교만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질 거예요. 또 두 번, 세 번 이혼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것이 서양 문물이 들어와 우리 전통 문화가 파괴되어서 생기는 문제만은 아니에요. 가장 큰 원인은 자녀를 하나나 둘밖에 낳지 않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집이라도 아이가 하나 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한테는 무엇이든지 최고로 해 주려고 합니다. 월급의 절반을 들여서라도 아이한테만은 최고의 것을 해 주고 모든 기준이 아이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좋게 말하면 개성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에게 제대로 안 해 준다고 느끼면 “제대로 해 주지 않을 바에야 뭐 때문에 낳았어요?”하면서 부모에게 반항하고 덤비게 됩니다.
이런 아이의 태도는 부모가 한 행동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보통 때는 버스나 기차를 타다가도 아이와 함께 갈 때는 택시를 타거나 고속열차를 타잖아요. 내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아이를 위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택시나 좋은 기차를 타고 가는 것에 습관이 듭니다. 그래서 아이가 좀 크거나 아니면 집안 형편이 나빠져서 좀 낮춰서 살자고 하면 아이는 싫어합니다. 아이가 나빠서라기보다 자랄 때 그렇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 손님으로 초대받아서 아프간 사람의 집에 가면 다섯 살, 일곱 살 된 조그만 아이들도 손님 접대한다고 물도 가져오고 옆에 줄을 서서 인사하며 일을 합니다. 손님이 나가면 신발까지 닦아서 앞에 놓아줍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어때요? 오히려 아빠나 엄마가 아이 앞에 신을 갖다 주고 신겨 주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집에서는 부모가 자기를 떠받드는데 학교에 들어가면 아무도 부모처럼 자기에게 안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친구들이 이기적이라고 느끼는 거예요. 아마 앞으로는 옛날처럼 의리 있고, 오래가는 친구 관계를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기만 하고 자라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세대 차이가 예전보다 심하게 생기는 겁니다. 마치 기독교와 무슬림이, 또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문화가 달라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반면에 같은 세대면 이제는 한국 아이들과 일본 아이들은 오히려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것 빼고는 금방 동질감을 느껴요.
그런데 같은 나라에 살아도 기성세대하고 신세대는 말과 얼굴 모양만 같고 나머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남한과 북한 사람들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 같은 말을 쓰고, 얼굴 생김새가 같고, 옛날의 풍습이 같았다는 것을 빼놓고는 서로 만나면 공통점이 별로 없어요. 이것은 단순히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변화 속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왕삼매론> 중 특히 이 가르침이 아주 중요합니다.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말할 때는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지 말고 내 의견을 그냥 내놓아야 합니다. 또 상대가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 의견에 꼭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견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견해를 더 얘기하고 싶으면 얘기는 더 할 수 있되 고집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견해를 내놓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고집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누구나 의견을 솔직하게 내놓고 그것을 서로 인정하고 다시 토론해서 같은 것은 함께 가고 다른 것은 서로 인정해서 달리 가는 거예요.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뽐내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압니다. 의견을 내더라도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주고받을 뿐입니다. 무심하게 주고받는다는 말은 자기 의견이 있으면 억누르지 않고 가볍게 내놓고, 다른 사람의 얘기도 무심히 듣는 걸 말합니다. 저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듣는 것입니다. 내놓을 때 가볍게 내놓고, 들을 때도 가볍게 듣고 거기에 대해서 상대가 들어야 한다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고 상대가 말하면 내가 다 들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 내 마음의 답답함도 없고 상대의 얘기도 귀담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 판단은 나중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나에게 불행이 됩니다. 주위에 숲을 이루듯이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거기에 걸림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거기에 공부가 굉장히 많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 뜻에 맞는 사람들만 주위에 데리고 살면 패거리가 되고,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 내 말에 섣불리 “예”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위에 두고서도 내가 만약에 능히 거기서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공부가 아주 잘 된 사람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 뜻에 맞는 사람과는 같이 살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살다가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이 한두 명 생긴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며 배척하느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수행의 과제로 삼으라.’는 건 내가 내 생각에 빠지는 것을 거슬리는 그 상대가 막아주어 나도 모르게 공부가 되어, 사람들이 나를 따라주니까 내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아준다는 뜻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8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8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처럼 버려라 하셨느니라.」
[원문]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마라.
베푼 덕에 대해 보답을 바라게 되면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도모하는 생각이 있게 되면 반드시 화려한 명예를 드날리고자 하게 되느니라.
덕의 본성이 없음을 밝히고 덕이 영원하지 않음을 관조할지니
덕이란 참알맹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 베푼 것을 헌신짝 버리듯이 하라 하셨느니라.』
八施德不求望報 德望報則意有所圖
팔시덕불구망보 덕망보즉의유소도
是故聖人設化 , 以布德為棄屣
시고성인설화 , 이포덕위기사
우리가 남에게 보시를 하거나 돕거나 뭔가 보탬이 되도록 해주면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흔히 우리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사랑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지식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의 뿌리 끝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면 엄마들은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아이가 자기 기대만큼 안 되어 섭섭하다는 거예요. 결국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사랑에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줬다.’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네가 내 공을 알아야한다.’라는 겁니다. 알아서 그것을 돈으로 갚든지, 인사로 갚든지 무엇으로든 갚아야 한다는 거지요. 이런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어떨까요? 상대가 내가 원하는 것처럼 반응을 해주면 다행인데, 반응해 주지 않으면 섭섭함이 생기고 섭섭함이 지나치면 미움이 생깁니다. 그러다 미움이 지나치면 원망이 생기고, 원망이 지나치면 원한이 맺힙니다. 원한이 맺히면 내가 상대에게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좋아하고 사랑했던 마음이 상대를 해치는 쪽으로까지 가게 되지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을 좋아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부처님이 존경스러워 갖가지 공양을 올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부처님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똑같이 대하는 것을 보고 섭섭한 마음이 생겼어요. 부처님이 자신을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부처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셨습니다.
그 여인은 부처님에 대해 섭섭하다 못해 미운 마음까지 생겼어요. 그래서 공양도 올리지 않고, 결국 절에도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여인은 어떤 나라의 왕자에게 시집을 가버렸고 얼마 후 왕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그 왕비의 나라에 와서 법을 전하게 되었는데 왕궁에서 궁녀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나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질투심이 생겼지요. 그래서 궁녀들에게 부처님의 설법을 못 듣게 하고 심지어 왕에게 말해서 어느 누구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 못하도록 금지를 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왕비는 부처님의 법을 펴는 데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고 부처님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사실 부처님은 이 여인이 부처님을 좋아한 것도 모르고, 원한에 사무쳐서 부처님을 미워하는 줄도 모르셨어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심하면 죽이려는 마음까지도 생기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이 나를 좋아하면 자신이 굉장한 사람인 줄 알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나를 좋아할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여 닥쳐올 수 재앙을 미리 막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봄에 새싹이 틀 때 이것이 자라 여름에는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질 것을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엽이 질 때 슬픔을 일으키거나 실망하지 않아요. 새싹이 필 때 벌써 낙엽을 보되 새싹은 새싹으로 좋고, 무성한 잎은 무성한 잎으로 좋고, 낙엽은 낙엽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치면 그 다음 단계는 인연을 따라 나투는 겁니다. 이미 결말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현상에 빠지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 남이 나를 좋아할 때 내가 덩달아 좋아하면 과보가 따르니 그 과보를 받겠다는 각오를 하세요. 만약 과보가 싫으면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것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거지요.
우리는 산을 좋아하되 산을 미워하지 않고 바다를 좋아하되 바다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또 꽃을 좋아하되 꽃을 미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악산은 열 번 가도 좋고 바다도 열 번 봐도 항상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면 무미건조한 인간, 돌 같은 인간, 냉혈한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데 잘 몰라서 그래요.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면 좋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한다는 것은 뭔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좋아하되 바라지 마라,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인연과보가 일어나지 않고 ‘사랑은 눈물의 씨앗’도 아니고 ‘미움의 씨앗’도 아니게 됩니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금강경>에서 말하기를 ‘보살은 베풀되 과보를 받지 아니하고 과보를 탐하지 않는다.’ 이라고 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것이 진정한 공덕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에게 베풀든 그것이 절대 미움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산이나 꽃, 바다를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바라는 마음이 없으니 아무리 좋아해도 절대 원한이 맺히지 않지요. 그러면 왜 사람은 좋아해서 무엇을 베풀어주고도 원수가 될까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는 돈 주고 몸 주고도 원수지고 뺨 맞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럴 때는 안 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안 주면 되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물질적으로 베풀었든, 도움을 주었든, 사랑을 했든 마음에 섭섭하거나 미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생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누군가에게 베풀면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은 두 가지에요. 바라는 마음을 충족시켜 주거나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없으면 받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도 보시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살펴보세요. 내가 많이 베풀어주고 도와주거나 사랑하던 관계가 지금까지 좋은 관계로 유지된 경우가 많은가요? 시집가서 시동생들 뒷바라지해서 공부시켰거나 시집, 장가보냈다는 분들이 많지요. 그런 형제들과 지금도 관계가 좋습니까? 아마 원수진 경우가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해주는 사람이 많이 바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내가 고생 고생해서 남편을 고시 공부시킨 경우, 누나가 고생해서 동생들 공부시킨 경우는 백이면 백 다 원수가 됩니다. 해준 사람은 바라는 마음이 있고 받은 사람은 해준 사람의 공을 알긴 알아도 받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만큼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만큼 모르기 때문에 바라는 사람은 섭섭하고 받았던 상대는 또 마음이 무거운 거예요. 그것 좀 해줬다고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꾸 얘기하는 게 듣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면 안 만나려고 하고 그러면 해 준 사람은 더 섭섭해지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거예요.
결국 바라는 것이 나를 해치고 관계를 해치게 됩니다. 이 이치를 아시고 수행자라면 베풀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9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원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을 바람이 분에 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고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을 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키느니라.
세상의 이익이란 본래 공한 것,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면 번뇌만 커지나니
이익을 허망하게 구하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이익을 멀리 하는 것으로 부귀를 삼으라 하셨느니라.』
九 見利不求沾分 利沾分則癡心易動
구 견리불구첨분 이첨분즉치심역동
是故聖人設化 , 以疎利為富貴 ,
시고성인설화 , 이소리위부귀 ,
우리가 어떤 일을 도모할 때는 늘 이익을 많이 바랍니다. 조그마한 일을 해 놓고 큰 이익을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부처님께 공양물을 조금 올려놓고는 ‘우리 아들 서울대학교 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또 자기 아들은 말썽이 많으면서 좋은 며느리를 보려고 한다든지, 자기 딸은 자기가 봐도 문제가 있는데 사위는 좋은 사람을 구하려고 합니다.
부모로서의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이것은 모순입니다. 부모인 나도 내 아들, 딸 대하기가 힘든데 누가 내 아들과 딸을 감싸주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며느리나 사위되는 사람에게 항상 고마워해야 합니다. ‘참 고맙고 착하다. 문제 많은 내 자식을 돌봐주니 고맙다. 밥이라도 먹여주니 고맙다.’ 이렇게 여기세요. 그래서 며느리에게는 “아가, 네가 우리 집에 시집 안 왔으면 내 아들이 평생 혼자 살았을 건데 네가 와서 살아주니 고맙다.” 하고, 사위에게는 “자네가 아니면 내 딸을 누가 데리고 살겠는가? 고맙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내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와주되 간섭은 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을 모르니 며느리나 사위가 밉고 갈등이 생기지요. 고마움을 모른 채 기도하는 것은 허황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항상 이렇게 분에 넘치는 이익을 원합니다.
장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가 물건을 팔 때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받으려고 궁리하고, 팔고나서는 가격이 오를까 봐 조바심 내고, 반대로 자기가 물건을 살 때는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사려고 하고, 산 뒤에는 가격이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심리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속에 사는 사람들한테 아예 이익을 바라지 말라는 얘기는 안 하셨어요. 수행자들에게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상대에게 도움을 주라.’ 이렇게 가르쳤고 세상 사람에게는 ‘이익을 너무 바라지 마라.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도리어 재앙의 원인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반드시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친다.’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우리 사회도 한번 보세요. 가지고 있던 땅이 갑자기 열 배, 스무 배 값이 올라 부자가 되거나 주식 투자로 갑자기 큰돈이 생긴 사람들을 보면, 돈을 아껴 유용한 데 쓰기보다는 사치를 부리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제 값어치를 못 해요. 일을 해서 벌어도 마찬가지에요.
이익이 분에 넘쳐서 좋은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복권이 당첨돼서 그 돈으로 알뜰하게 살면서 성공했다는 사람 얘기는 듣기 힘들잖아요. 그런 사람치고 정상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제가 언젠가 잡지에서 읽었는데 요정이라는 곳에 다니는 여자들의 한 달 수입이 1000만 원쯤 된다고 해요. 그런데 한 달 쓰는 돈이 또 1000만 원이랍니다. 그래서 남는 돈이 없대요. 처음에는 대학생들까지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처럼 일을 시작했는데 몸이 상품이다 보니 몸에 쓰는 돈이 점점 많아지면서 오히려 빚만 진다고 합니다. 몸은 몸대로 버리고 정신은 정신대로 파괴되는 거죠. 그래서 한 달에 10만 원 벌어서 5만 원 쓰고 5만 원 저축하는 사람보다 못한 거예요.
돈은 한번 낭비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아껴서 쓰는 것이 잘 안 됩니다. 옛날에는 버스나 일반열차를 타다가 새마을호를 타려고 하면 돈이 아까워서 떨렸잖아요. 그런데 일단 새마을호를 한번 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일반 열차를 못 탑니다. 지금은 KTX 한두 번 타면 새마을 기차도 안 타집니다. 택시 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택시 타고 돌아다니는 습관이 들면 버스는 안 타집니다. 버스를 타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 맞추느라 한 시간 전에 나가는데 택시 타는 습관이 있으면 10분, 20분을 그냥 보내면서 ‘까짓것 택시타고 가면 되지.’ 하고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또 자가용 한번 타기 시작하면 이제는 차가 없으면 못 다니게 됩니다. 차가 없으면 아예 나갈 생각도 안 하고 다리가 없는 줄 알아요. 자가용이 몸에 붙으면 차가 자기 발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물론 차가 유용하고 시간이 절약되고 여러 가지 좋은 측면이 있지만 이것이 다 습관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습관이라는 것이 한번 편리하고 좋은 곳으로 올라가면 내려가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분에 넘치는 이익이 생기면 그것을 쓰고 또 분에 넘치는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이익은 얻을 확률이 매우 적습니다. 첫째는 쉽게 얻지 못해 괴롭고 둘째는 설령 얻었다 하더라도 부작용이 많이 생겨서, 그 다음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통이 더 커집니다.
‘이익을 바람이 분에 넘쳐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치면’ 반드시 추악한 이익 때문에 자신을 훼손시킵니다. 이렇게 해서 몸과 마음을 다 피폐하게 만듭니다. 꼭 쾌락 때문이 아니어도 사람이 절망스러울 때도 술, 담배, 마약을 합니다. 돈이 아주 많아서 즐기기도 하지만 아주 극한 상황의 고통에 처할 때,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외부의 자극에 쉽게 빠지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을 하기에는 천상도 좋지 않고, 지옥도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마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을 도웁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이 세계에 가장 큰 부자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부족하다고 헐떡거리게 되면 아주 빈곤한 사람이 되고 비록 가난하지만 만족할 줄 알면 부자입니다. 그래서 늘 뭔가가 부족하고 아주 뜻대로 안 이루어진다고 좌절하고 부정적으로 살면 ‘극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족하는 마음으로 검소하게 살면 ‘청빈’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가난입니다. 청빈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며 자기 삶에 만족을 하기 때문에 부자에 속합니다. 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라 자기 삶에 만족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부자입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이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법륜 스님의 경전 강의 <보왕삼매론> 10

 

장애를 이기는 열 가지 수행법 10
억울함을 당해 밝히려고 하지 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한 마음을 밝히게 되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삼으라 하셨느니라.」
[원문]
『억울함을 당하여 거듭 거듭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자꾸만 밝히고자 하면 상대와 나를 잊지 못하고
상대와 나를 두게 되면 반드시 원한이 무성하게 자라느니라.
억울함을 받아들여 능히 참고 용서하라.
참고 용서하면 겸허하게 바뀌나니
억울한 일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할 수 있으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수행의 문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十被抑不求申明 抑申明則怨恨滋生
십피억불구신명 억신명즉원한자생
是故聖人設化 , 以屈抑為行門
시고성인설화 , 이굴억위행문
내가 안 했는데 했다고 하는 억울함을 당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억울함을 밝혀 해명하고 싶어 합니다. 저도 한때는 억울함을 밝히는 것이 세상의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거짓을 밝히는 것과 자기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내 억울함이라는 것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기 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으면 나름대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자 약간의 억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말을 하면 아무리 잘 전달을 했다 해도 내가 말한 것과 상대가 들은 것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자기가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억울하지요. 내용은 같은데 의미 해석이 다르거나 아예 말 자체가 다르게 전달되면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면서 억울함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억울함을 자꾸 밝히려고 하면 상대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엉뚱하게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상대가 또 억울해서 자기가 들은 것이 정당하다고 밝히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서로 원한이 쌓이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세요. 내가 억울한 것을 밝히는 것은 나한테는 좋지만 거꾸로 상대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어떤 일이 있을 때 아내가 억울하다고 너무 밝혀버리면 남편이 상처를 입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속속들이 너무 밝혀버리면 상대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나로 인해 상대가 나쁜 인간이 되어버리고 내가 해명한다고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격이 되므로 다시 억울한 마음을 가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모순의 관계를 해결하고 양쪽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면 밝히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문제가 공부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명을 쓰고 어디로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고문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올 때는 여기서 일어난 일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썼습니다. 억울한 사람 데려다 고문한 그 사람들이 각서를 써도 용서를 할까 말까한데 결과적으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각서를 썼습니다.
이것이 한 시대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그 시대에서는 그 사람들대로 잘한다고 했던 거예요. 전쟁터에 가면 군인이 잘한다고 상대편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억울함이 한이 되면 누구 손해입니까? 한이 맺히면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반대로 억울함을 통해 공부가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뭐든지 다 참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가 필요하면 법적으로 대응을 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10년, 20년 노력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대학교수가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는데 부당하다고 재판을 해서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대학 측에서 채용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채용 안 해준 것이 억울하다고 재판을 해서 또 10년 만에 이겼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이 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이 때문에 재임용 자격이 안 되고 20년간 재판하느라 논문을 한 편도 못 써서 또 재임용이 안 됐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핍박한다고 억울함을 밝히는 과정에서 내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일을 하면 희생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일이 해결 되든 해결되지 않든 괴롭지 않습니다. 억울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억울한 마음 없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원망이 쌓이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기 때문에 내가 호랑이를 죽인다면 살생입니다. 그러나 호랑이가 내 부모를 물어 죽였듯이 더 많은 사람을 물어 죽이려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호랑이를 잡았다면 보살행이 됩니다. 내가 살생의 과보를 감수하고 중생을 구제했기 때문입니다. 살생의 과보를 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차원이 좀 다르지요.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떤 일을 밝힐 때도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 복잡해지지 않습니까? 오히려 딱 받아들이면 확 뚫려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장애들, 여러 역경들을 이겨내는 것은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계에 부딪치면서 이겨내는 힘이 있으면 앞으로 어떤 것이든 해낼 힘이 있지만 그냥 온실에서 자란 것처럼 아무 일이 없기만 바라면 그것은 오히려 인생 공부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진을 하는 동안에 이런 저런 일이 자꾸 나타나면 어차피 받아야 할 일들이 닥쳐온다고 생각하세요. 어차피 받아야 할 과보라면 빨리 받는 것이 좋고 갚아야 할 빚이라면 빨리 갚는 것이 좋습니다. 미루어 놓았다가 나중에 갚아야 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어차피 받아야 할 인연 과보라면 일찍 받자.’ 이런 마음으로 임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첫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둘째,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셋째, 공부하는 데에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넷째, 수행하는 데에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에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모든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다섯째, 일을 계획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풀리면 뜻이 경솔해지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많은 세월을 두고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여섯째,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한다면 의리를 상하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순결로써 사귐을 깊게 하라' 하셨느니라.
일곱째,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진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 무리를 이루라' 하셨느니라.
여덟째, 공덕을 베풀 때에는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게 되면 불순한 생각이 움튼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덕 베푼 것을 헌 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아홉째,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寶王三昧念佛直指
 

 

十大礙行第十七
詳夫一心平等體性無虧。眾生雖纏綿於業識之中。靡不有出塵之志。方欲究道。魔境先彰。一事虧心。萬善俱失。成小敗廣。得者還稀。況乎物欲交傾。死生遷變。遞相倣效。易地皆然。使我如來於三大阿僧祇劫。捨無數頭目髓腦國城妻子身肉手足。戒忍精進承事知識。不惜身命修行道品。所得法門因茲障礙退其心故。一旦在我而滅。可不痛傷。我今既為釋迦之子。不以力爭。坐令法界群有永失慧目。甚於割切身肉也。是故我今依經創立十種大礙之行。名十不求行。人雖不故願於礙。但於此間或不得已。有一切障礙現前之時。俾我身心先居礙中。而眾魔諸惡障礙之境不能侵我。不能障我。譬如金火同爐。火雖欺金。金必成器。其十種大礙之行今當說。一念身不求無病。二處世不求無難。三究心不求無障。四立行不求無魔。五謀事不求易成。六交情不求益我。七於人不求順適。八施德不求望報。九見利不求霑分。十被抑不求申明。此十種大礙之行攝一切諸礙。惟上智者堪任。中下之人不敢希冀。若有得聞此十句義。於諸礙中一一皆能照察覺悟。省身體道。持之不失。則能入諸魔界不為群魔退轉其心。循諸色聲不為色聲惑亂其志。乃至憎愛利名之境。人我得失之場。我心先居礙中。彼礙豈能為礙。礙若無礙。則於道行尚可直進。何況得於自然無礙之境。道豈不可進哉。譬如高崖之木。雖久旱如焚。尚不改其秀色。何況再澤滂霑而又加於三春之令。豈不敷榮茂實者乎。又如根缺之人。運用雖艱。而於求食之計。有不勝之巧。若以求得之計。移之於求道。豈在礙不能行道乎。當知此礙即是一切眾生大善知識。亦是一切眾生良佑福田。可以了死脫生。可以超凡入聖。於諸世間所有美味上服金剛珠玉一切眾寶。所不能及。是故若非以礙為道。則於非礙反成為礙。何以故。身無病則貪欲乃生。世無難則驕奢必起。心無障則所學躐等。行無魔則誓願不堅。事易成則志成輕慢。情益我則虧失道義。人順適則內心自矜。德望報則意有所圖。利霑分則癡心必動。抑申明則人我未忘。以是義故則知十無礙道能生是過。及成如是一切不吉祥事。為障道因緣。何以故。貪欲生必破戒退道。驕奢起必欺壓一切。學躐等必未得謂得。願不堅必未證謂證。志輕慢必稱我有能。虧道義必見人之非。內自矜必執我之是。意有圖必華名欲揚。癡心動必惡利毀己。存人我必怨恨滋生。是十種過從凡妄生皆名邪見。展轉生起無量惡法。遍虛空界。必令眾生墮於地獄。豈可於此不生敬慎。若能體茲礙境。識病因緣知病性空。病不能惱。了難境界體難本妄。難亦奚傷。解障無根。即障自寂障不為礙。達魔妄有究魔無根。魔何能嬈。量事從心。成事隨業。事不由能。察情有因。於情難強。情乃依緣。悟人處世。觀人妄為。人但酬報。明德無性。照德非常。德亦非實。世利本空。欲利生惱。利莫妄求。受抑能忍。忍抑為謙。抑何傷我。是故大聖化人以病苦為良藥。以患難為解脫。以障礙為逍遙。以群魔為法侶。以事難為安樂。以弊交為資糧。以逆人為園林。以市德為棄屣。以疏利為富貴。以受抑為行門。如是則居礙反通。求通反礙。於此障礙皆成妙境。故得之與失自不能知。人奚於中強生取捨。是以如來於障礙中得菩提道。至若為半偈時之遇羅剎。作仙人世之值歌利。瓦石來擊之增上慢比丘。木盂為孕之大毀謗嬖女。及鴦屈摩羅之輩。提婆達多之徒。皆來作逆。而佛悉與其記。化令成佛。豈不以彼逆而為吾之順。以彼毀而為吾之成也。何況時薄世惡。人事異常。於學道人豈無障礙。於今若不先居於礙。則障礙至時莫能排遣。使法王大寶因茲而失。可不惜。諸愚故依經聊述所知。願勿嫌棄。倘因聞此義故障礙現前。反能勇進於道。可謂得斯旨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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