各修5]『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4.
『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4(終).
그러면, 이 선정(禪定)은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한 것입니다.
즉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애(慈愛)의 무기를 갖추고 대비심(大悲心)의 경지에 머무르며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을 모두 성취하기 위한 선정(禪定)을 행하라. 여기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보시(布施)와 멀어지지 않고 지계(持戒)와 멀어지지 않으며, 인욕(忍辱)과 멀어지지 않고 정진(精進)과 멀어지지 않으며, 선정(禪定)과 멀어지지 않고 지혜(智慧)와 멀어지지 않으며, 방편(方便)과 멀어지지 않는 것이니라.”라는 것 등을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은 모든 유정 중생을 모두 성숙시켜야 하며, 장소와 몸 그리고 많은 권속(眷屬) 등을 원만(圓滿)하게 하는 보시(布施) 방편(方便) 등의 선법(善法)에 확실히 의지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국토(佛國土) 등의 원만(圓滿)함은 무엇을 말하며,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수승함을 지닌 지혜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을 완전히 구족(具足)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존께서도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는 방편의 구경(究竟)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살은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도 역시 의지해야 합니다. 공성(空性)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설하신 것처럼, “미륵이여, 보살들이 육바라밀(六婆羅密)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은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위한 것인데,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보살은 지혜바라밀만을 익혀야 한다. 나머지 바라밀을 해서 무엇 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다른 바라밀 역시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미륵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보살행(菩薩行)을 할 때 육바라밀(六婆羅密)을 가지고 선근복덕(善根福德)을 쌓은 그 선근복덕들은 해로운 것인가?’ 미륵보살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이여, 그대 역시 육십 겁(劫) 동안 보시(布施) 바라밀을 바르게 수행해 왔다. 육십 겁(劫) 동안 지계(持戒)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인욕(忍辱)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정진(精進)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선정(禪定) 바라밀을, 육십 겁(劫) 동안 지혜(智慧) 바라밀을 수행해 왔다.’ 이에 어리석은 이들이 말하기를, ‘한 가지 방법만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은 공성(空性) 수행이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행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라는 등의 [법]을 [널리] 펴셨습니다.
방편(方便)과는 먼 보살의 지혜라는 것은 성문(聲聞)과 같아서 부처의 행상(行相:수행 행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즉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이여, 이와 같으니 예를 들면 신하(臣下)가 뒷받침하는 왕들이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듯이, 보살의 지혜는 선교방편(善巧方便)에 의한 모든 도움으로 역시 부처의 모든 행상(行相)을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살도(菩薩道)의 지견(智見: 진리에 대한 견해)과는 다른 외도(外道)와 성문도(聲聞道)의 지견(智見)은 ‘아(我: 개별적 본체)’ 등에 대한 전도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언제나 지혜와는 먼 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문(聲聞)들은 대비심(大悲心)과는 멀기 때문에 방편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열반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시 한 번] 보살도(菩薩道)는 지혜와 방편을 [모두]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무주열반(無住涅槃)을 성취함으로서,
지혜의 힘으로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 열반에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설상두정사경(佛說象頭精舍經)』에서, “보살도(菩薩道)를 요약하면 이 두 가지인 데, 둘이라는 것은 이와 같아서 방편과 지혜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에서도, “지혜바라밀은 어머니이며, 선교방편(善巧方便)은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에서도, “보살들에게 속박이란 무엇이며 해탈이란 무엇인가 하면, 방편이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방편으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지혜가 없이 윤회 중생을 [애써] 모두 떠받치는 것이 보살의 속박이며, 지혜로 윤회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보살의 해탈이다.
방편이 갖추어지지 않은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갖추어진 지혜는 해탈이다.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편이 속박이며, 지혜가 갖추어진 방편이 해탈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보살이 지혜만을 의지하면 성문(聲聞)이 갈구하는 열반에 떨어져 속박당하는 것과 같아서, 무주열반(無住涅槃)에 드는 성취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방편과는 먼 지혜를 보살의 속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바람에 얼어가는 사람이 불에 의지하는 것처럼 보살은 전도된 바람을 막고서, 방편을 가진 지혜인 공성(空性)에 의지해야 합니다.
성문(聲聞)과 같은 방식으로 깨달으려 하지 말고, 『대보적경대승십법회제구(大寶積經大乘十法會第九)』에서 설하신 것처럼, “선남자(善男子)는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불을 철저히 받들면서 그 불을 지극히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긴다 하더라도, ‘나는 불을 숭배하고 스승처럼 여기며 받들고 있으니 여기 두 손에다 모두 담아야 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자신의 몸이 고통스럽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 역시 열반을 알고 있지만 지니고 있는 열반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렇게 자신의 깨달음을 바꾸어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방편에만 단순히 의지한다면 보살은 범부(凡夫)의 경지를 뛰어 넘지 못하고 단지 속박만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방편에 의지해야 하는 데, 이것은 진언(眞言, Mantra)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처럼, 보살은 번뇌도 역시,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감로(甘露)로 변화시킵니다. 자연스럽게 상승적인 과보를 받는 방법이 보시(布施) 등에 의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이와 같아서 예를 들면 진언(眞言)과 약(藥)으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독(毒)으로는 [어떤 것도] 죽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살들의 번뇌는 지혜로 완전히 정화(淨化:攝受)한 것이기 때문에 전락(轉落)할 수가 없다.”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윤회를 포기하지 않으며, 열반에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지혜의 힘으로 모든 대상(所緣)을 끊고서 윤회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오직 무주열반(無住涅槃)만의 불성(佛性)을 성취합니다. 따라서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에서도, “지혜를 알고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다. 방편을 알고서 모든 유정을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유정 중생의 이익에 별 관심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行)이 화합(和合)하여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한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무상청정원만각(無上淸淨圓滿覺)이라고 나는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성(佛性)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에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를 수행할 때나 깊은 정(定)에 들어 갈 때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의지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전(前)과 후(後)에 생기는 지혜가 무엇이든, [그것이] 생기면 그때는 [언제든지] 방편에 의지할 수 있으니, 그렇게 지혜와 방편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적용해야 합니다.
더불어, 보살들이 지혜와 방편을 병행(竝行:雙修)하는 길이 이 길입니다. 모든 유정 중생을 보살피는 대비심(大悲心)으로 [스스로] 완전히 성숙(攝受)해서 출세간(出世間)의 길에 의지해야 하고, 일으킨 방편을 행할 때도 환술사(幻術師)처럼 전도되지만 말고 보시(布施) 등에 의지해야 합니다.
『대방등대집경제십이무진의보살품(大方等大集經第十二無盡意菩薩品)』에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보살의 방편은 무엇이며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정(定, Samāhita: 人無我와 法無我의 空性을 보기 위한 선정)에 들어 유정 중생을 보살피면서 대비심(大悲心)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방편이며, 적정(寂靜)과 최고의 적정(寂靜)으로 정려(精慮, Samāpatti: 평등한 경지의 선정)에 드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널리 설하신 바와 같습니다.
『항마장(降魔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보살들의 가행(加行: 적극적 수행)을 바르게 공경하는 것은, 지혜를 알기에 모든 선법(善法)을 쌓기 위해 가행(加行)하고, 지혜를 알기에 내가 없음(無我)과 유정이 없음과 생명이 없음과 생명의 유지가 없음과 사람이 없음(人無我)에 대해서도 가행(加行)하며, 방편을 알기에 모든 유정을 완전히 성숙시키기 위해 역시 가행(加行)하는 것이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집제법방광경(集諸法方廣經)』에서도,
“예를 들어 어떤 환술사(幻術師)가
[자신이 만든] 환(幻)에서 벗어나려고 애쓸 때,
그는 이미 환(幻)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환(幻) [자체에] 집착하지 않듯이,
삼계(三界)가 환(幻)과 같은 줄
구경보리(究竟菩提) 성인(聖人)은 아시나니,
중생을 위해 무장(武裝)하신 [뜻은]
중생을 그전부터 알기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살들이 오직 지혜와 방편의 법(法)을 성취한 힘으로 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가행(加行)이 윤회 속에 머물면서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가지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원만하게 회향(回向)하는 보시(布施) 등의 방편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앞에서와 같이 일정한 시간에 따라서 지(止)와 관(觀)의 가행(加行)을 가능한 만큼 수행해야 합니다.
『성소행경계원만청정경(聖所行境界圓滿淸淨經)』에서 언제나 유정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보살들의 공덕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처럼, 가까이 두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방편에 능숙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에 익숙해지면, 이 생에서 의심할 것 없이 특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꿈 속에서 언제나 불보살님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좋은 꿈들 역시 꿀 수 있습니다. 천신(天神)들도 기뻐서 보호할 것이며, 매 순간 마다 공덕과 지혜의 자량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번뇌장(煩惱障)과 나쁜 과보 역시 정화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풍길 수 있으며, 몸도 역시 질병으로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업(業)에서 자유로워지는 수승함 역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통(神通) 등의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통력(神通力)으로 세간(世間)의 무량(無量)한 세계에 가서 불세존께 헌공(獻供)하고 당신들의 법(法)을 듣습니다. 임종시(臨終時)에도 의심할 바 없이 불보살님들을 친견(親見)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에서도 불보살님과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특별히 성스러운 가문(家門)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원만하게 구족(具足)할 수 있습니다.
큰 부(富)와 수많은 권속(眷屬)을 거느리며, 예리한 지혜로 수많은 사람을 모두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에서 [모든] 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다른 경전들에서도 보여주고 있음으로 [바르게] 터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자비(慈悲)와 방편(方便)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공경하고 오랫동안 수행하면 점차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이 완전히 모두 청정해지는 순간이 나타나 완전한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불을 만드는 것처럼, 바른 이익을 위해 수행하면 최고의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고, 출세간(出世間)의 지혜로 일체의 분별(分別)의 그물에서 멀어져 법(法)의 틀을 희론(戱論)함이 없이 분명하게 알며, 티 없이(無垢) 흔들리지 않는 등불을 바람이 없는 곳(無風地帶)에 놓아 둔 것처럼, 흔들림 없이 알게 됩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본래 자성(自性)이 현전(現前)하는 견도(見道)를 포함한 승의(勝義:絶對) 보리심의 본래 성품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여 사물의 끝자리를 보는 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여래의 종성(種姓:家門)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보살의 무결(無缺)함에 들어가는 것이며, 세간의 일체 중생에서 바뀌는 것입니다. 보살의 법성(法性)과 법(法)의 틀을 알고서 안주(安住)하는 것이며, 보살의 초지(初地)를 성취한 것으로 이에 대한 공덕은 더 자세하게 『십지경(十地經)』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여(眞如)를 바라보는 선정(禪定)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살이 희론(戱論)없는 무분별(無分別)의 성품에 들어간 것으로, 신해행(信解行)의 경지를 신해(信解)의 힘으로 들어갔음을 의미(安立)하는 것이지, 실제 행(行)은 아닙니다. [여기에] 지혜가 생겨나야만 실제 행(行)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지(初地)에 들어간 다음, 수도(修道)에서 출세간(出世間)에서 얻은 두 가지 지혜(根本智와 後得智 또는 止觀)로 지혜와 방편을 수행하고, 점차로 수행하여 끊어야 하는 장애(障碍)가 미세하게 축적된 것 역시 미세하게 정화하며, 특별한 공덕(功德:屬性)을 더 깊이 성취하기 위해 하급(下級)의 수준들도 완전히 정화하여, 여래지(如來地)의 중심에 들어가 일체지(一切智)의 바다로 들어가게 되면, 목적한 바를 완전히 이루고 목표 역시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완전히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도, “점차로, 보다 질 좋은 땅의 황금처럼, 마음을 확실히 정화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어 구경원만(究竟圓滿)한 완전청정(成佛)을 이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면 여의주(如意珠)와 같이 일체 유정 중생의 생존을 떠받치는 공덕(功德:屬性)을 쌓고 지니며 이전(以前)에 [세운] 원력(願力:祈禱)의 과보를 받아 이룰 수 있습니다. 즉 대비심(大悲心)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 본래 갖추고 있던 갖가지 방편을 가지고 한량없는 화현(化現)으로 일체 중생을 모두 원만하게 합니다. 습기(習氣)로 인한 잘못된 일체의 허물을 제거하고, 무한한 유정 세계에 머무시는 것을 알기에 불세존의 일체 공덕(功德:屬性)이 생긴 자리(根源)에 대한 신심(信心)을 일으키며, 그 공덕(功德:屬性)을 완전히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밀주(秘密主)의 일체지(一切智)의 지혜라는 것은 자비(慈悲)를 근본으로 하여 생긴 것이고, 보리심(菩提心)이라는 원인(因)에서 생긴 것이며, 방편(方便)으로 구경원만(究竟圓滿)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자(賢者)는 질시(嫉視) 등의 허물을 멀리 하고
공덕(功德)에는 만족이 없어, 대양(大洋)과 같으니,
분별(分別)하고 잘 해석하여 파악함이
환희(歡喜)의 백조가 물에서 우유를 취하는 것 같네.
그러므로 지자(智者)들은
편견(偏見)의 혼란을 여의고,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잘 해설하나니
모두가 취(取)해야 할 것 뿐이로다.
이와 같이 중도(中道)를 설하노니,
내가 지은 공덕이 무엇이든
그렇게 일체 중생이
중도(中道)를 성취케 하소서.
『수행차제(修行次第)』를 아짜리야(Ācārya, 傳敎師) 까말라실라(Kamalaśīla, 蓮花戒)께서 중편(中篇)을 지어 마치셨다. 인도 학자 쁘라갸와르마(Prajñavarma, 慧鎧)와 역경사(譯經師) 승려(僧侶) 예쉐 데(Ye shes sde)가 번역하고 편집 교정하였다.
이 까말라실라(Kamalaśīla, 蓮花戒)의 『수행차제(修行次第)』의 중편(中篇)은 2002년 1월 인도의 보드가야(Bodhgaya)에서 있었던 깔라짜끄라(Kālacakra: 時輪) 관정(灌頂) 입문식에서 현 제14대 달라이 라마께서 깔라짜끄라 관정을 위한 예비법문을 위해 사용한 교재로서, 북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세릭 빠르캉(Sherig Parkhang)에서 출판한 교정본(校訂本)을 서기(西紀) 2004년 정초(正初)에 한국말로 번역 정리한 것입니다.
이어서 곰림바르빠 주해가 계속됩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55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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