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림 바르빠(修行次第 中篇)』원문 번역본(原文飜譯本) 3.
‘진여(眞如)는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답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과 사람과 법의 자성(自性)이 공성(空性)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바라밀(婆羅密, Pāramitā) 행으로 깨우치는 것이지 다른 것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은 제법(諸法:現象)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어떤 바라밀행(婆羅密行)으로 파악합니까? 관자재(觀自在) 보살이여, 지혜의 바라밀행으로 파악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止)에 안주(安住)하면서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요가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온(蘊)·계(界)·처(處:入)를 제외하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온(蘊) 등일 수 없는 것은, 온(蘊) 등이라는 것들이 무상(無常)하고 많은 성품(性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恒常)하며 하나의 성품(性品)이라고 다른 이들이 분별(分別)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체이거나 또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실재(實在)할 수 없습니다. 즉 [서로 결합하고 의지하여 존재하는 방식 이외에]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세간(世間)에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人無我]
법무아(法無我)도 역시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합니다. 즉 법(法:現象)이라고 하는 것은, 요약하면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입니다. 여기서 온(蘊) 처(處) 계(界) 그리고 형색(形色:形體)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는 없습니다. 즉 그들은 미세한 입자(粒子)로 부서지며, 미세한 입자들 역시 나누어지는 성품(性品)으로, 각각을 살펴보면 본래의 성품을 분명하게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시이래(無始以來) 형색(形色:形體) 등은 역시 청정한 것이 아니며, 발현(發現)의 욕구가 꿈이라면 보이는 대상(所緣)의 형색(形色:形體)등은 빛과 같은 것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마음의 성품인 형색(形色:形體) 등을 밖에서 끊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결국 여기서 형색(形色:形體) 등은 마음의 형상(形像)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저러한 이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唯識)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이러한 법(法:現象)을 분석하여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이들 각각을 분석하는 것이 모든 법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의 본성을 각각 점검해야 합니다. 이상(以上)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 역시 진제(眞諦:절대 진리)에 부합(符合:契合)하지 않습니다.
즉 거짓 본성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형상(形相)을 파악하는 갖가지 심성(心性)이 생겨나서 [인식하는] 것을 진제(眞諦)에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형색(形色:形體)등이 거짓인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는 거짓 성품입니다. 그렇게 형색(形色:形體) 등은 갖가지 형상(形相)이나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이 아닌 것처럼, 마음 역시 그 이외에는 없음으로 일(一)과 다(多)가 본래의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환영(幻影) 등의 본성(本性)과 같을 뿐입니다.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환영(幻影) 등의 본성과 같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지혜로 마음의 본성을 각각 분석하면
궁극적으로 마음은 내부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외부에서도 찾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찾을 수 없으며 현재 생겨나는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역시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 역시 어디로 간 곳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파악할 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것인데, 형색(形色:形體)을 가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성품인 것은 무엇과 같은가라고 한다면,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설하신 것처럼, “가섭(迦葉)이여, 마음을 완전히 탐구하고 나면 발견할 수가 없다.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과거에도 없다. 미래에도 없으며 현재에도 생겨나지 않는다.”라고 널리 [법을] 펴셨습니다.
그렇게 분석하면 마음은 시작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으며 끝도 무결(無缺)하여 볼 수 없고 중간도 역시 무결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끝과 중간이 없는 것처럼 제법(諸法:現象)도 역시 끝과 중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의 본래 성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무언가를 완전히 깨우친다는 것은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았다고 해도, 마음이 만든 형상(形相)인 형색(形色:形體) 등의 본래 성품 역시 궁극적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지혜로도 제법(諸法:現象)의 본래 성품을 바르게 볼 수 없다면, 형색(形色:形體)이 항상(恒常)한지 무상(無常)한지 공(空)한지 공(空)하지 않은지 번뇌가 있는지(有漏) 번뇌가 없는지(無漏) 생겨나는지(生) 생겨나지 않는지(不生) 존재하는지(有) 존재하지 않는지(無)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형색(形色:形體)에 대한 구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역시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차별들 역시 존재할 수가 없으니, 이에 구별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여 요가 수행자가 어떤 사물의 본래 성품이 궁극적으로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천착(穿鑿)하지 않을 때, 무분별삼매(無分別三昧) 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제법(諸法:現象)에는 본래 성품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하지 않고 수행을 하게 되면, 생각을 모두 끊기 위해서만 수행하는 분별심 역시 피할 수 없으며 본래의 성품이 없다는 것도 깨우칠 수 없는데, [이것은] 지혜의 빛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르게 각각을 분석해야 앎의 불이 생기는 것은, 마치 부싯나무(燧木)를 문질러 일으킨 불처럼, 분석의 나무를 태우는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설제개장보살소문경(佛說除蓋障菩薩所問經)』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잘못 길들여진 일체의 희론(戱論)을 여의고자 한다면 공성(空性)을 닦는 요가(瑜伽)를 해야 한다. 공성(空性)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마음을 흐트러뜨리거나 마음을 아주 기쁘게 하는 대상(處)과 그것들의 본래 성품을 완전히 탐구하여 공(空)을 깨우친다.
마음이 무엇인지 깨우치는 것도 역시 본래의 성품을 모두 탐구하여 공(空)한 것을 깨우치고, 그렇게 깨우쳐서 무상(無相) 요가(瑜伽)에 들어간다.”라고 널리 펴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분석을 먼저 하는 것이 무상(無相)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생각을 완전히 끊는다 해도 지혜로 사물의 본래 성품을 분석하지 않고는 무분별(無分別)한 상태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 형색(形色:形體) 등으로 [이루어진] 사물의 본래 성품을 바르고 정확하게 분석하고 나서, 선정(禪定)에 들어 갈 때는 형색(形色:形體) 등에 머무는 선정(禪定)에 들어가지 말 것이며, 기세간(器世間)과 출세간(出世間) 사이에 머무는 선정(禪定)에도 들지 말아야 함은 형색(形色:形體) 등의 [실체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주선정(無住禪定: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선정)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일체 사물의 본래 성품을 각각 분석한 다음, 무성선정(無性禪定: 대상이나 조건이 없는 선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혜선정(智慧禪定)이라고 합니다. 즉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이나 『대보적경보만보살회(大寶積經寶鬘菩薩會)』 등에서 가르치신 바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진리에 들어가면, 모든 것은 생각할 것과 관찰할 것이 다르지 않음으로 분별과 분석을 떠나는 것입니다. 말없이 한 곳에 집중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수행하는 데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르면서 마음의 흐름(心相續)을 산란(散亂)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탐착(貪着) 등으로 마음의 바깥 경계(境界:對象)가 산란해지면 산란한 감각(受)을 빨리 벗어나는 수행 등으로 산란심(散亂心)을 가라앉히고 빨리 본래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마음에 싫증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면 삼매(三昧)의 공덕(功德)을 생각함으로서, 그에 대한 환희심(歡喜心)을 길러야 합니다. 산란함의 허물을 보고서 또한 싫증을 모두 가라앉혀야 합니다.
반면에 혼침(昏沈)과 수면(睡眠)에 굴복하여 흐름이 불분명해지고, 마음이 침몰(沈沒)하거나 침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환희심(歡喜心)의 대상을 생각하여 빨리 침몰을 극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대상(所緣)의 본래 성품에 아주 견고(堅固)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반면에 이전에 웃고 즐기던 기억으로 인하여 도거(掉擧)나 방일(放逸)할 염려가 있을 때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상(無常) 등을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대상에 적용하여 산란심(散亂心)을 가라 앉혀야 하며, 그런 다음 다시 진여(眞如)를 향해 마음을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들어가 머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반면에 침몰(沈沒)과 방일(放逸)에서 멀어진 다음, 정(定)에 들어 진여(眞如)에 대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려면, 정진(精進)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쉬고 [치우치지 않으며] 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마음이 정(定)에 들어가고 있는 중에 [너무] 애써 정진하면 마음은 산란해질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침몰하고 있는 중에 애써서 정진 하지 않으면 아주 침몰하여 관(觀)은 사라지고 마음은 선천적인 맹인(盲人)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침몰하면 애써서 정진해야 합니다.
[또 이미] 정(定)에 들면 [너무] 애써 정진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觀)을 수행하는 중에 지혜를 아주 강화(强化)하면 지(止)가 약해져서 등불을 바람에 놓아 둔 것처럼 마음은 요동칠 것이며, 그로 인해 진여(眞如)를 극명(克明)하게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럴 때는 지(止)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가 너무 강해지면 마찬가지로 그때는 지혜를 수행해야 합니다.
[지(止)와 관(觀)] 두 가지가 모두를 평등하게 들어가고(雙修) 있으면, [이때는] 몸과 마음에 해로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행하는 바((加行方便) 없이 머물러야 합니다. 몸 등이 불편해지면, 그때는 일체 세간(世間)을 환영(幻影) 아지랑이(陽炎) 꿈(夢) 물에 비친 달(水月) 빛 그림자(光影)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들 유정(有情) 중생은 이와 같이 심오한 법(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윤회하면서 모든 번뇌에 휩싸이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법성(法性:眞如)을 이해 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생각하며, 대비심(大悲心)과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킵니다.
그런 다음, 잠시 쉬고(良久) 다시 그와 같이 제법(諸法:現象)의 무광삼매(無光三昧: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삼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마음에 아주 싫증이 나면 그와 같이 잠시 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들어가는 길이며, 분별(分別)로 무분별(無分別)의 상(像:印象)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가 수행자는 이 [수행] 차제(次第:精進法)를 한 시간(一回精進) 또는 밤중에 반(半) 정진의 시간이나 한 정진의 시간 또는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진여(眞如) 수행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의분별선정(意分別禪定: 色受想行識을 幻으로 파악하는 선정)이며,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다음, 원한다면 삼매(三昧)에서 깨어나 가부좌(跏趺坐)를 풀지 말고, “이들 제법(諸法:現象)이 궁극적으로는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라 해도 세속적으로는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업(業)과 결과(果) 등이 어떻게 편재(遍在)할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도,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성(自性)이 없다.’라고 설하셨다. [하지만] 이들 유정(有情) 중생이 어설픈 지식으로 본래 성품이 없는 사물들을 존재한다고 과장(誇張:增益)하여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긴 세월을 윤회의 수레 위에서 떠돌고 있으니, 내 어떻게 해서든지 위없는(無上)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모두 구족(具足)할 것이며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를 이루어서 이 모든 법성(法性:眞如)을 깨우치고 말리라.”라고 생각한 다음,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불보살님께 배례(拜禮)하고 나서, 그들에게 헌공(獻供) 찬탄(讚嘆)한 다음, 『보현보살행원찬(普賢菩薩行願讚)』 등의 서원(誓願:祈禱)을 널리 세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공성(空性)과 대비심(大悲心)의 정수(精髓:心要)를 지니고 보시(布施) 등의 일체 공덕과 지혜 자량을 성취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무인아제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oonceo/55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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