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사야도 우 자나카 (Sayadaw U Janaka) 가르침

수선님 2020. 4. 5. 11:25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Lectures on Insight Meditation

사야도 우 자나카 (Sayadaw U Janaka) 가르침

正 圓 옮 김

서 문

일러두기

제 1 장 ; 바른 이해(正見)를 통한 행복

괴로움의 원인

잘못된 견해의 원인

있는 그대로 보라

선택 없는 알아차림

이름 붙이기

사마타와 위빠사나 - 선정[마음의 고요;止]과 지혜[통찰; 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자각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

제 2 장 ; 수행자를 위한 예비적인 가르침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

네 가지 요소(四大)에 대한 마음챙김

정신적인 상태와 감정적인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

걷는 수행(行禪)

침묵 속의 알아차림

제 3 장 ;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

신앙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도덕적인 측면

실천적인 측면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

제 4 장 ; 네 가지 마음챙김

원인과 결과의 고리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법에 대한 마음챙김

제 5 장 ; 일곱 단계의 청정

도덕적 행위의 청정

마음의 청정

견해의 청정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성숙에 대한 앎

앎과 봄의 청정

제 6 장 ; 마음의 기능(五根)을 예리하게 하는 아홉 가지 방법

마음의 기능들을 균형 잡기

제 7 장 ; 수행자의 다섯 가지 요소

바라문교에서의 자아

불교에서의 자아

부록 1

수행의 지침

도덕적 행위(戒)

위빠사나의 의미

마음 챙겨 알아차림

좌선

걷는 수행(行禪)

일상의 행위에 대한 마음챙김

통증과 인내

정신적 감정적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

수행자의 다섯 기능(五根)

수행의 점검 또는 보고

부록 2 : 집중수행기간 일정표

부록 3 : 자비관

서문

Sudassam vajjamannesam Attano pana duddasam

다른 사람의 허물은 보기 쉽지만 실로 자신의 허물은 보기 어렵다. ({法句經} 252)

위의 말씀은, 수행자(요기)들에게도 또한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어떤 요기는, 예리하면서도 충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함께 지내면서 잘못들을 지적해 줄 때까지,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그 사실에 대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들은 (이러한 자신의 잘못들을) 망각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1983년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페낭의 말레이시아 불교 수행 센터(Malaysian Buddhist Meditation Center)에서, 아주 경험이 많으신 위빠사나 스승을 모시고 집중수행회(retreat)를 열을 수 있는 행운을 가져, 지도 받고, 가르침을 받고, 교정 받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금 일깨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적확한 가르침과 엄한 지도 그리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을 통해 크나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속박에서 벗어난 최상의 안전을 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가르침들을 엮어내 봅니다. 이 가르침은, 우 자나카 비왐사께서 요기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신 저녁 법문들입니다. 어떤 법문들은, 사야도와 요기와의 인터뷰(점검)에서 주로 선별한 가르침들입니다. 이 가르침들은, 한 권의 정리된 소책자로 엮어지기 위해 다양한 항목에 따라서 다시 정리되었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그 말씀이 있었던 바로 그 상황에만 적절한 것이어서 너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돼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 주시고 당신 스스로 책 내용을 검토해 주신 사야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이 책이 가능하도록 도움을 준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수지와(Venerable Sujiva)

1985년 6월.

일러두기

말레이시아와 미얀마에서 세 번 출판되었던, {위빠사나 수행}(Vipassanaa Meditation)의 새 판을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법문을 모으고 편집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고, 1983년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내가 이끈 집중수행회에서 요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지도를 해준, 수지와 스님에게 우리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새 판은, 1992년, 서양에서의 나의 전법 여행(Dhamma-tour) 동안에 출판되었습니다. 런던 미얀마정사(精舍)의 페살라(Pesala) 비구는 이 점에 있어서 값을 따질 수 없는 도움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나의 제자인 로이스 와일즈(Royce Wiles)는 필사된 법문 원고의 영어를 다듬어 주었고, 말레이시아 비구 우 담마수바(U Dhammmasubha), 몽옹지(Maung Aung Gyi) 그리고 몽빡민우(Maung Zaw Myint Oo)가 이 원고들을 컴퓨터에 입력해주었습니다. 이들에게 깊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1992년 11월 2일.

아신 자나카 비왐사,

찬매 사야도.

나모 따싸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싸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sambuddhassa

존귀한 분, 공양 받을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제 1 장 ; 바른 이해(正見)를 통한 행복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참된 길을 찾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불교인데, 불교는 사람들을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해줍니다.

괴로움의 원인

붓다는 괴로움(dukkha)의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붓다가 괴로움을 없애버리려고 했을 때, 그는 그 원인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원인이 제거되었을 때, 어떤 결과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 또는 愛着; ta.nhaa)임을 발견했습니다.

<*역주 ; 일체지(一切智)는 남방상좌부에서 말하는, 성문(聲聞) 제자들은 갖추지 못한, 붓다만이 지닌 여섯 가지 지혜(六不共智; cha asaadhaara.na ~naa.na)의 하나입니다. 그 여섯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중생들의 다섯 가지 기능(五根; 信∙精進∙念∙定∙慧)에 대한 앎 indriyaparopariyatte ~naa.na.m,

② 중생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잠재된 번뇌에 대한 앎 sattaana.m aasayaanusaye ~naa.na.m,

③ 몸을 둘로 변화시키는 앎(雙身變智; yamakapaa.tihiire ~naa.na.m,

④ 대비정(大悲定)의 앎 mahaakaru.naa- samaapattiyaa ~naa.na.m,

⑤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naa.na.m, ⑥ 무장애지(無障碍智) anaavara.na~naa.na.m

『無碍解道』Pa.tisambhidamagga,「大品」의「智論」Mahaavagga ~naa.na-kathaa, PSM I, p.3, p.158 ff.참조.>

탕하(ta.nhaa)라는 말의 의미는 탐욕, 욕정, 욕망, 갈망 등입니다. 불교 학자들은 '탕하'를 갈애(渴愛; attachment)로 번역했으며, 이 말은 모든 형태의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탕하'에 대해서 '갈애'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탕하 또는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탕하가 있을 때, 그곳에는 두카(괴로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탕하를 없애버릴 수 있을 때, 그는 틀림없이 괴로움을 제거합니다. 이 탕하도 또한 어떤 원인에 의존해서 생겨납니다. 원인이 없다면, 탕하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탕하는 하나의 정신적인 상태이며, 정신의 조건 지워져 있는 한 과정입니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갈애(탕하)의 원인은 잘못된 견해(邪見)임을 발견했습니다. 잘못된 견해란, 영혼, 자아, '나', '너', 인격 또는 개체 등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며,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또는 아견(我見; atta-di.t.thi)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신견 또는 아견이, 괴로움을 야기시키는 탕하의 원인입니다. 그러면 이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名; naama)과 육체(色; ruupa)의 자연스런 흐름(과정)에 대한 무지(無知; 팔리어로 moha[癡] 또는 avijjaa[無明])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원인임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과정을 그 진정한 본질의 측면에서 자각하거나(realization) 바르게 이해(正見)함으로써, 우리는 무지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緣起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무지는 원인이며,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는 그 결과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원인이며, 갈애는 그 결과입니다. 갈애는 원인이며, 괴로움은 그 결과입니다.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지가 제거될 때, 영혼, 자아, 사람, 존재에 대한 어떠한 잘못된 견해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견해가 깨져버렸을 때, 그 어떠한 갈애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가 없어져버렸을 때, 그 어떠한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즉 괴로움의 소멸(滅諦; nirodha-sacca)을 이룬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의 원인

마음과 몸의 과정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어떻게 영혼 또는 자아, 인간 또는 존재, '나' 또는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생겨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잘못된 견해 때문에 갈애가 생겨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마음과 몸의) 두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마음과 몸)을 어떤 사람, 어떤 존재, 영혼, 자아라고 간주합니다. 그때, 그 사람, 그 존재, '나', '너'는 부자가 되거나, 왕, 여왕, 대통령, 수상, 백만장자가 되려는 욕망을 지니게 됩니다. 여왕이나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이 욕망이 갈애입니다. 그것(갈애)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욕망이나 갈애를 뿌리뽑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원인이란 무엇입니까 ? 욕망 또는 갈애의 원인은, 이미 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잘못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견해가 깨져버렸을 때, 부자나 왕,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그 어떠한 갈애도 생겨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 되려고 하며,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 또는 잘못된 개념에서 생겨납니다. 이러한 욕망이나 갈애가 우리의 마음속에 피어났을 때,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생명이 없는 사물[無情物]인 집에 집착할 때, 우리는 집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게 되면, 우리는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슬픔은 주된 괴로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괴로움은 집에 대한 우리의 갈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친척이나 친구, 아이들, 부모에 대해 갈애를 가지고 있을 때, 이 갈애 때문에도 또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시험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걱정을 하게 되고, 유감스러워 하며, 슬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적인 괴로움 또는 정신적인 두카(dukkha)이며,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갈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갈애(ta.nhaa)는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갈애는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 육체적 정신적인 과정을,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라고 간주하는 잘못된 개념에서 갈애는 생겨납니다. 인격이나 개체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파괴되어 버릴 때, 어떠한 갈애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갈애가 없을 때, 어떤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

이 (마음과 몸의) 두 가지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챙김(알아차림; being mindful)에 의해서, 그것의 내재적인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함 없이, 논리적으로 사고함 없이, 철학적으로 생각함 없이, 선입견 없이,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려야(마음 챙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매우 주의 깊어야만 하고, 있는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바라봅시다. 아주 주의 깊고 세심하게 시계를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시계에 대해서 아주 주의 깊고 밀착해서 관찰했을 때, 우리는 그 시계의 상표, 디자인, 모양새를 봅니다. (이때) 우리는, 이것은 시계이며, 상표 이름은 세이코이고, 세계 시간표가 있다는 등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의 관찰이 "나는 이전에 이와 같은 시계를 본적이 있어. 상표 이름은 오메가였지"라는 선입견적인 관념과 결합되어 있다면, 시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오메가라고 간주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우리가 그 시계를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볼 때, 선입견적인 관념을 사용하곤 했다면, 선입견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시계에 대해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고 단지 그것을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세이코이고, 일제이며, 또한 세계 시간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계를 관찰할 때, "오메가"라는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마음-몸의 과정들을 그 진정한 본질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굴려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이리 저리 따져보아서도(reason), 안되며, 어떠한 지적인 지식도, 어떤 선입견적인 관념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한 쪽에 놓아두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몸에서 현재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해 단지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몸에서 뜨거움을 느낄 때, 우리는 뜨거움을 뜨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note) 합니다. 몸에서 차가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차가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을 느낄 때, 그것을 통증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을 분노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비탄을 느낄 때, 그것을 비탄이라고 마음 챙겨야 (알아차려야) 합니다. 슬픔이나 실망을 느낄 때, 우리는 슬픔과 실망이라는 감정의 상태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be aware) 합니다.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과정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대로 관찰해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참된 본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됩니다. 무지가 제거되면, 우리는 마음-몸의 과정을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라고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몸의 과정을 단순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파악(take)하게 된다면, 어떠한 갈애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가 깨져버릴 대, 우리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괴로움의 소멸(涅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참된 본질에서의 마음-몸에 대한 마음챙김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지자이신 붓다가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에 대한 가르침에서 설하신 길입니다.

이 경전에서,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과 육체의 현상에 대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마음 챙기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마음 챙겨야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육체적인 과정에 대한 마음챙김 (kaayaanupassanaa satipa.t.thaana)

2.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 (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

3. 마음(의식)에 대한 마음챙김 (cittaanupassanaa satipa.t.thaana)

4. 마음의 현상들에 대한 마음챙김 (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

선택없는 알아차림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우리는 수행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스스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고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수행(명상)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대상에 애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이나 '관찰하는 마음(observing mind)'은 스스로 대상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대상들은) 아마도 성공했을 때의 행복감이나, 고통스런 감각이나 또는 (호흡에 따라 일어나는) 복부의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려고 하더라도, (몸의 어떤 부위의) 통증이 보다 뚜렷하고, 보다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그곳(복부의 움직임)에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은 통증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관찰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보다 뚜렷한 느낌에 마음은 아주 강하게 쏠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을 선택할 필요가 없고, 단지 마음이 선택한 대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주의 깊고 밀착된 알아차림을 통해서 통증이 사라졌다면, 그 때 마음은 가장 두드러진 다른 대상을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 등의 가려운 감각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뚜렷하거나 더욱 분명하다면, 마음은 가려운 감각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하고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강한 마음챙김(strong mindfulness)과 깊은 마음집중(deep concentration)에 의해서 가려운 감각이 사라졌을 때, 마음은 (예컨대) 복부의 움직임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대상들보다도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감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행복감을 그 대상으로 선택해서 그것을 '행복, 행복, 행복'하고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 수행의 원리(principle)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리는[마음 챙기는] 것입니다. 이 마음챙김 수행은 아주 단순하고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적인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아주 효과적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먹는 행위에 수반되는 모든 행위, 모든 동작에 대해 알아차려야 합니다. 팔을 뻗을 때, 우리는 팔을 뻗는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손이 숟가락이나 밥에 닿을 때, 닿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숟가락을 집을 때, 집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숟가락이 카레 속으로 들어갈 때, 들어가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숟가락으로 카레를 떴을 때, 그 동작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먹는 행위에 수반되는,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동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적인 과정이 완전히 자각되어야만 잘못된 견해의 원인인 무지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사무실이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에 수반되는 모든 동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수행기간(retreat) 동안, 걷는 수행을 할 때, 발을 드는 움직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내려놓는 움직임 등의 발의 움직임을, 밀착해서 정확하게,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이름 붙이기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걷기 위해서 발을 들어올릴 때, 우리는 그 동작에 '들어올림'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발을 앞으로 밀 때에는 우리는 '나아감'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음'하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또는 '듦, 나아감, 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명칭을 붙여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명칭을 붙이거나 이름을 붙임에 의해서 마음은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에 밀착해서,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명칭을 붙이는 일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는(focus) 데에도 또한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수행의 대상에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 수행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명칭을 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대상을 관찰하기만 합니다. 그들은 단지 발의 움직임을,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의 바로 처음 순간부터 발을 내려놓는 동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지 관찰하기만 합니다. 마음은,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주 밀착해서 발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마음집중을 이전보다 더욱 깊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때에는 마음은 아주 자주 헤매이곤 합니다. 마음이 헤맬 때마다, 여러분은 그 마음을 따라잡아 관찰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안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마음속으로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처음의 (집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걷는 동작으로 돌아와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보통 때처럼 알아차리기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 선정[마음의 고요;止]과 지혜[통찰; 觀]

이제 우리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사마타란, 마음집중, 평온, 고요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었을 때, 마음은 평온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사마타 수행의 목적은, 하나의 대상에 깊은 마음의 집중을 얻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安止定; appanaa-samaadhi, jhaana) 또는 근접정(近接定; upacaaraa-samaadhi)*과 같은 깊은 마음집중(삼매 또는 定)을 얻는 것입니다.

<역주 : 안지정(安止定; appanaa-samaadhi, jhaana)이란 초선(初禪)에서 사선(四禪)에 이르는 색계정(色界定)과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는 무색계정(無色界定)에 완전히 도달해 있는 상태를 말하며, 근접정(近接定; upacaaraa-samaadhi)이란 이러한 안지정에 도달하려고 접근해 가는 선정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어 있을 때, 욕정, 탐욕, 분노, 욕망, 자만, 무지 등과 같은 모든 번뇌들은, 대상에 몰입해 있는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마음이 모든 번뇌나 덮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평온함, 고요함, 행복, 평화로움을 느낀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安止定) 또는 근접정(近接定)과 같은 깊은 마음집중(삼매 또는 定)을 얻음을 통한 어느 정도의 행복감입니다. 하지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마타를 닦는 수행자는 수행의 대상으로서 어떤 장치 또는 [둥근 원판 모양의] 카시나(kasina)*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역주 : 카시나(kasina)라는 말은 '전체', '전부', '모든'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의 k.rt.sna와 연관된 용어라는 설이 있으며, 한문으로는 편(遍)이라고 번역됩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삼은 '카시나'를 의식에 가득하게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즉, 청색의 카시나를 대상으로 삼을 경우, 청색이 칠해진 둥근 원판을 만들어 놓고, 처음에는 이 원판을 보면서 의식을 집중시키면서, 눈을 감아도 의식 내에 청색의 원판이 떠오르도록 합니다. 이렇게 청색으로 의식을 가득 채워 가며 마음을 집중시켜나가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해나갑니다.

다른 수행법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카시나를 수행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혼자서 책만을 보고 시도하지 말고 반드시 수행지도를 잘 해줄 스승의 지도하에서 해야합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경전(AN I, p.41, AN V, p.46ff, DN III, p.68, MN II, p.14 etc)과 『청정도론』에서는 10가지의 카시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 카시나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청황적백(靑黃赤白) 공간(空間; aakaasa) 의식(意識; vi~n~naa.na)의 10가지이며, 『청정도론』에서는 의식과 공간 대신에 한정공간(限定空間; paricchinna-aakaasa)과 광명(光明; aaloka)이 제시되어 있습니다.(Vism 5장 참조) >

예를 들면,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색깔(예컨대 붉은 색)의 카시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방바닥에서 60cm 정도의 높이의 벽에, 붉은 색 원반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접시 크기 만한 붉은 원반을 만들되, 색깔은, 전체가 고르고 부드러운, 순수한 붉은 색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장치가 만들어지면, 그는 벽에서 60cm 정도 떨어진 방바닥에 앉아서, 붉은 원반을 보면서 마음을 그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헤매이게 되면, 헤매는 마음을 따라가서는 안되며, 마음을 수행의 대상 즉, 붉은 원반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붉은 원반에 마음을 집중시켜, '붉음, 붉음, 붉음' 하면서 그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간략한 사마타 수행의 방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에, 그 목적은,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함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마음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역주 :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에서 필요한 마음집중(定; jhaana, 또는 三昧; samaadhi)은 순간적인 마음집중(刹那三昧; khanika-samaadhi)입니다. 순간적인 마음집중이란 관찰 대상에 한 순간 한 순간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있을 때 생기는 마음집중으로, 이러한 마음집중이 생길 때, 다섯 가지 덮개(五蓋)가 극복되면서 위빠사나 수행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순간적인 마음집중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aa)라고 하며, 이렇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하는 자'(vipassanaa-yaanika)라고 합니다.

'순수 위빠사나'와는 달리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선(四禪)이나 팔선(八禪)을 먼저 닦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선이나 팔선을 먼저 닦아서 다섯 가지 덮개를 마음집중의 힘으로 극복한 후, 선정 수행에서 경험한 정신적인 상태를 관찰의 대상으로 하며 위빠사나를 닦습니다. 이렇게 사선 등의 마음집중 수행을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마음집중을 수행법을 하는 자'(samatha -yaanika)라고 합니다.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하는 자'와 '마음집중을 수행법을 하는 자' 양자의 차이는 마음집중의 종류에서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불교 수행의 구조인 '마음집중(定)을 바탕으로 한 지혜(慧)'의 향상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양자 모두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

이 마음집중은, 마음-몸에 대한 지속적이며,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에는 다양한 대상이 있습니다. 행복감도 수행의 대상이며, 분노, 슬픔, 고통스런 감각, 뻗뻗함, 저림 등도 수행의 대상입니다. 어떤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과 결과는, 그 방법들이 다르듯이 서로 다릅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으로 되돌아 가봅시다. 걸을 때, 우리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등의 발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다리(의 움직임)에 제대로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헤맬 때, 우리는 그 마음을 따라잡아서 헤매는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헤매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라야, 우리는 평상시처럼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잘 집중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들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발의 움직임이지, 발의 겉모양이나 걷는 동안의 몸의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들어올림'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나아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내려놓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동작들을 자연스런 움직임의 과정이라고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또한 마음이 그 동작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됩니다. 들어올리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입니다. 나아가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의 두 과정을 완전하게 자각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단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올바르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들을 사람이니 존재니, '나'니, '너'니 하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때 인격, 개체, 영혼 또는 자아라고 하는 그 어떠한 잘못된 개념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깨져버릴 때,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어떠한 애착이나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애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갈애의 결과인 어떠한 괴로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움직임의 과정을 단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습니다.

우리가 정진해 나아가면, 마음챙김은 더욱 순일해지고, 끊어지지 않고, 강해집니다. 마음챙김이 순일해지고, 강해지면, 마음집중은 더욱 깊어지고 강력해집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지고 강력해질 때,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에 대한 우리의 자각 또는 꿰뚫어 보는 지혜는 한층 명료해집니다. 이때가 되면, 들어올리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series)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나아가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내려놓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에, (움직이는) 과정의 그 어떠한 부분들도 지속적이거나 영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움직임의 모든 과정은 변하기(anicca; 無常) 쉽습니다. 즉, 아주 빠르게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달가운(good) 과정이 아니라, 그리 달갑지 않은(bad) 과정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인 괴로움(dukkha; 苦)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인 본질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영속적인 실체 즉,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정신적 과정의 본질로, 무아(anatta; 無我)이며, 영혼이 없음(no-soul)이며, 자아가 없음(no-self)이며, 에고가 없음(no-ego)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영혼 또는 무아(無我; anatta)를 깨닫습니다.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자각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위빠사나지(知) 즉, 꿰뚫어보는 앎(vipassanaa -~naana; insight knowledge)의 모든 단계들을 순차적으로 밟아 나아갑니다. 위빠사나지(知)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그는 첫 번째도(道)인 수타원도(sotaapatti-magga)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첫 번째 도를 얻은 순간, 수행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 Dukkha-sacca),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集諦; Samuda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Nirodha-sacca),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諦; Magga-sacca)

수행자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깨달을 때, 이는 곧, 그가 괴로움의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제거되어, 수행자는 괴로움이 소멸해버린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완전하게 갖추게 됩니다.

1. 바른 이해 (正見 ; Sammaa-di.t.thi)

2. 바른 사유 (正思 ; Sammaa-sankappa)

3. 바른 말 (正語 ; Sammaa-vaacaa)

4. 바른 행위 (正業 ; Sammaa-kammanta)

5. 바른 생계 (正命 ; Sammaa-aajiiva)

6. 바른 노력 (正精進 ; Sammaa-vaayaama)

7. 바른 마음챙김 (正念 ; Sammaa-sati)

8. 바른 마음집중 (正定 ; Sammaa-samaadhi)

수행자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이라는 수행의 대상에 대해서 폭넓게(large extent)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부터,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이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시킬 때, 그는 마음으로 노력을 기우려야만 합니다. 이 마음의 노력이 '바른 노력 (正精進; Sammaa-vaayaama)'입니다. 이 마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는 발의 움직임에 제대로 마음을 챙길 수 있게 됩니다. 이 마음챙김이 '바른 마음챙김 (正念; Sammaa-sati)'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챙김에 의해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집중해있을 때, 마음은 한 순간 동안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刹那三昧). 하지만 마음집중이 지속되어 끊어짐 없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깊어지게 되면, 그 마음집중이 '바른 마음집중 (正定; Sammaa-samaadhi)'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이 헤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행자가 많은 노력을 기우리더라도, 처음에는 마음이 발의 움직임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때, 발의 움직임에 대한 마음챙김과 함께 생겨나는 하나의 마음 상태가 있어서, 마음을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으로 인도합니다.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인도하는 이 마음 상태가 '바른 사유 (正思; Sammaa-sankappa)'입니다. '바른 사유'의 기능은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에 마음은 잘 집중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은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의 참된 본질로 꿰뚫고 들어가게 되어, 자연스런 과정으로 그 움직임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런 과정으로서의 (발의) 움직임에 대한 이 앎 또는 이 이해가 '바른 이해 (正見; Sammaa-di.t.thi)'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길 때,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의 다섯 가지 정신적인 요소를 닦아온 것이 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른 노력 (正精進 ; Sammaa-vaayaama)

2. 바른 마음챙김 (正念 ; Sammaa-sati)

3. 바른 마음집중 (正定 ; Sammaa-samaadhi)

4. 바른 사유 (正思 ; Sammaa-sa"nkappa)

5. 바른 이해 (正見 ; Sammaa-di.t.thi)

이 다섯 가지 정신적인 요소들은,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기는 일로 모두 귀결됩니다. 마음챙김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잘못된 말,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계를 삼가게 됩니다. 잘못된 말을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말 (正語; Sammaa-vaacaa)'을 뜻합니다. 잘못된 행위를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행위 (正業; Sammaa-kammanta)'를 뜻합니다. 잘못된 생계를 삼가는 것은 '바른 생계 (正命; Sammaa-aajiiva)'를 뜻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든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기고 있는 동안,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라는 여덟 가지 정신적인 요소가 모두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나갈 때, 우리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요소인 바른 이해(正見)의 힘으로 잘못된 견해(有身見 또는 我見)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첫 번째도(道)인 수타원도에 들어갈 때,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도의 진리(道諦; Magga-sacca)를 완전하게 갖추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해 그 참된 본질에서 마음챙김을 닦는 것에 의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방법입니다.

제 2 장 ; 수행자를 위한 예비적인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세 가지 익혀야할 것(三學)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행위(戒)를 익히는 것

마음집중(定)을 익히는 것, 그리고

지혜, 통찰 또는 깨달음(慧)을 익히는 것

도덕적인 행위를 지켜나갈 때, 그것은 말과 행위를 삼감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재가자의 경우에는 최소한 5계 또는 8계를, 상가(승려)의 경우에는 227계 또는 별해탈(別解脫; pa.timokkha)이라는 지켜야할 규범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unwholesome; akusala; 不善)행위와 말을 삼갈 때, 이 계들을 온전하게 지니는 것입니다.

5계를 지닐 때, 우리는 살생, 도둑질, 잘못된 성행위, 거짓말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술이나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첫 번째 계인 살생을 삼간다는 것은,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계인 도둑질과 소유자가 주지 않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을 삼간다는 것도,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계와 다섯 번째 계인 잘못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과 술을 마시는 것을 삼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네 번째 계인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잘못되고 온전치 못한 말을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온전치 못한 말과 행위를 피한다면, 우리는 계(戒; siila)를 완전하게 지니게 될 것입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는, 8계를 지녀야만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보다 많은 시간을 수행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의 계는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음식을 먹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에 어떤 종류의 음식도 삼가해야만 하지만, 꿀과 오렌지 주스 그리고 레몬 주스와 같은 과일 주스는 먹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춤추고,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 것 그리고 꽃이나 향수 등을 사용해서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삼가해야만 합니다.

여덟 번째 계는 높고 사치스러운 침구를 삼가는 것입니다.

8계 가운데의 세 번째 계는, 단지 잘못된 성행위가 아니라, 모든 성행위를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피함으로써, 여러분의 말과 행위는 청정해집니다. 이것이 집중수행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지녀야만 할 8계입니다.

8계를 지니는 것은 도덕적 행위의 정화(戒淸淨; siila-visuddhi)를 의미합니다. 계청정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향상을 이루기 위한 선행 조건입니다. 도덕적인 행위(戒)가 청정해졌을 때, 절대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식이 없을 때,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따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마음집중(定)을 얻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꿰뚫어보는 지혜(慧)가 생겨날 것입니다.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

위빠사나(vipassanaa)는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법(Dhamma)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위(vi)'라는 말은,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불만족 또는 괴로움, 무영혼, 무아 또는 에고가 없음을 말합니다. '빠싸나(passanaa)'라는 말은, 바른 이해 또는 깊은 마음집중을 통한 깨달음(realization), 또는 마음(名; naama)과 몸(色; ruupa)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 수행을 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탐욕, 욕정, 욕망, 갈망, 분노, 악의, 질투, 아만, 혼침과 수면, 슬픔과 걱정, 들뜸과 회한 등과 같은 온갖 번뇌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번뇌들을 없애버렸을 때, 우리는 해탈 또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번뇌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여러 가지 괴로움을 경험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번뇌는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번뇌가 제거되어 버릴 때, 온갖 괴로움도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네 가지 요소(四大)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을 그것들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관찰해야만 합니다. 수행(坐禪의 경우)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우리는 대장로(大長老)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역주 : 호흡에 동반된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을 한국어로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명명하는 데에 문제를 제기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rising, falling'의 번역입니다. 실제로 복부가 일어난다는 표현과 사라진다는 표현보다는 '불러옴, 꺼짐' 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찰대상에 이름을 붙여가면서 관찰을 하는 이유는 집중력의 향상과 대상에 대한 분명한 파악을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자신의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어떤 용어를 쓰던지, 그 대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 됩니다. 역자의 경우에는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불러옴', '꺼짐'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어로 'rising', 'falling'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수단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수단을 잘 사용해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목적을 이루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은 {대념처경}(Mahaa-satipa.t.thaana Sutta)에 따른 것입니다. 이 경에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한 마음챙김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붓다는 우리들에게 네 가지 요소(땅의 요소[地界; pathavi-dhaatu], 물의 요소[水界; apo-dhaatu], 불의 요소[火界; tejo-dhaatu], 바람의 요소[風界; vayo-dhaatu])가 발생할 때, 그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챙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도 관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땅의 요소(地界)가 실제적인 땅(地)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신에 그것은 땅의 요소의 참된 본질을 가리킵니다. 땅의 요소란, 딱딱함(hardness), 부드러움(softness) 등과 같은 그것의 개별적인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딱딱함, 부드러움이 땅의 요소의 개별적이며, 독특한 특성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몸의 어느 부분에서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을 자각했을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땅의 요소의 참된 본질 또는 개별적인 특성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의 요소(水界)는 실제적인 물(水)이 아니라, 그 요소의 개별적인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유동성과 팽창성이 물의 요소의 특성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몸의 어느 부분에서 유동성이나 팽창성을 자각했을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물의 요소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의 요소(火界)는 실제적인 불(火)이 아니라, 그 요소의 독특한 특성을 말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불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바람의 요소(風界)도 마찬가지로 바람(風)이 아니라, 바람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그 특성이란, 여러분 몸의 어느 부분에서의 움직임, 동작, 떨림 또는 지탱해주는 힘(support)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몸의 어느 부분에서 움직임, 동작, 떨림 또는 지탱해주는 성질을 느끼고, 자각하고, 바르게 이해할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바람의 요소를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요소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만 합니다." 라고. 우리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우리의 마음과 몸의 과정에 마음을 모을 때, 처음에 어느 대상을 관찰해야 하는가 모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장로 마하시 사야도는 수행자들에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과 함께 수행을 시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숨을 들여 마실 때, 복부는 불러오고, 숨을 내쉴 때는 복부는 꺼집니다. 우리는 이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복부가 불러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복부가 꺼질 때, 그것을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바람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을 완전하게 자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수행자들은 사람이니, 존재니, 영혼이니 하는 잘못된 견해를 깨버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 또는 복부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을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관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하는 동안에, 알아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큰 소리가 들릴 때, 여러분들은 '들음, 들음, 들음'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여러분은 그 (시끄러운) 소리를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이 '들음, 들음'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리를) 알아차리는 일을 그만둘만하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은 일차적인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때는 소리가 1-2초 동안 지속될는지도 모릅니다. 소리가 사라져버렸을 때, 여러분들은 평상시 알아차려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인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갈 것입니다.

정신적인 상태와 감정적인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

여러분이 행복함이나 불행함을 느낄 때, 또는 유감스러움이나 슬픔을 느낄 때, 이러한 감정적인 상태도 있는 그대로 '행복, 행복', '불행, 불행' 또는 '슬픔, 슬픔'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관찰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상태가 사라지고 난 후, 알아차리는 마음은, 평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일차적인 알아차림의 대상을 놓쳐 버리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일이나, 가족, 친척들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복부의 움직임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헤매는 생각을 관찰하면서, 마음으로 '생각, 생각'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은 아주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정신적인 상태나 감정적인 상태를 관찰할 때, 알아차리는 마음은 활기 있고, 주의 깊고, 정확하고, 어느 정도 민첩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그 알아차리는 마음이 지속적이고, 끊어짐이 없고, 항상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강해질 때, 생각이나 관념, 또는 생각하는 마음은 저절로 멈추어버립니다. 그때, 알아차리는 마음은 더 이상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평상시 알아차려야 하는 복부의 움직임으로 되돌아옵니다.

걷는 수행(行禪)

붓다는, 걷고(行), 서고(住), 앉고(坐), 눕는(臥) 네 가지 동작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지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걷고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서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누워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자세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수행자들이 걷는 수행(行禪)과 앉는 수행(坐禪)을 번갈아 가며 실행하라고 지도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보다 쉽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되어, 걷는 과정과 앉는 과정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insight)을 얻게 됩니다. 매번 (좌선을 하기 위해) 앉기 전에는 걷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걷는 수행에서의 발의 움직임은 앉아 있을 때의 복부의 움직임 보다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이 점차 향상되면, 그때는 걷는 수행보다도 앉는 수행을 오랫동안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위빠사나 앎(Insight Knowledge)의 제 6단계에 이르게 되면, 걷는 수행보다 앉는 수행을 더 오래 하게 될 것입니다. 앉는 수행을 2-3시간 동안하고 걷는 수행은 1시간 정도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여러분의 마음집중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을 자각하는데(名色消滅智) 충분할 만큼, 좋고, 깊고, 강합니다. 하지만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에는, 좌선보다 행선을 오래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는 없더라도 오랫동안 걸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좌선할 때보다는 행선할 때, 어느 정도 마음집중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여러분은 발걸음을 알아차리면서 걷는 수행을 해야합니다. 왼발을 내딛을 때, '왼발'하고 알아차립니다. 오른발을 내딛을 때, '오른발'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런 식으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또는 '걸음, 걸음'하고 알아차립니다. 명칭 붙이기나 이름 붙이는 것은,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마음만큼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발의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 예리한 알아차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걷는 수행을 할 때,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편안하게 보통 상태로) 눈을 반개 해야 하며, 여러분의 발 앞의 1-1.5미터 전방의 바닥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머리는 앞으로 너무 수그려서는 안됩니다. 고개를 너무 수그리면, 목과 어깨에 바로 긴장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두통이나 어지러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발을 바라보아도 안됩니다. 만일 발을 바라보면, 발의 움직임에 제대로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게 되면, 마음은 눈과 함께 움직여서, 여러분의 마음집중은 깨지고 맙니다. 누군가 여러분 앞으로 다가오거나 지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여러분은 쳐다보려고 하는 경향이나 욕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쳐다보려고 하는 경향이나 욕구는 즉시 관찰되어야 하며 '경향' 또는 '바라보려고 함' 하면서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한 경향이나 욕구가 사라지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집중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주변을 둘러보지 않도록 주의해서 여러분의 마음집중을 지속시켜나가고, 걷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집중을 이루는데 향상을 이루기 바랍니다. 손의 위치를 바꾸어야 하겠다고 느꼈다면, 바꾸어도 좋으나 마음을 챙기고 바꾸어야 합니다.

(손의)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의도가 생겨났을 때, 여러분은 (먼저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아주 천천히 자세를 바꾸면서, 자세를 바꾸는 행위에 따르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관찰되어져야 합니다. 어떤 움직임이나 행위에 대해서도 마음챙김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손의 자세를 바꾸고 난 후, 여러분은 다시 전처럼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좌선의 경우에도 역시, 어떤 이들은 적어도 45분 동안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아있어야 한다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초보자들은 최소한 20-30분 정도는 자세를 바꾸지 말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만일 초보자가 (주로 다리의 어느 부분에서) 생겨난 심한 통증을 참을 수 없을 경우에, 그는 자세를 바꾸었으면 하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자세를 바꾸기 전에, 먼저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세를 바꾸는데 따르는 모든 동작과 행위를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자세를 다 바꾸었으면, 다시 일차적인 (알아차림의)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돌아와서 평상시처럼 알아차려야 합니다.

침묵 속의 알아차림

집중수행기간 동안에, 어떤 행위나 움직임도 빠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가능한 만큼 모든 행위나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하는데,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매 순간의 몸의 움직임이나 행위에 마음챙김을 적용시킬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이러한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할 필요는 없으며, 평상시대로 하되 마음을 챙겨서 관찰해야 합니다.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일상적인 마음챙김입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몸의 모든 행위들에 대해 마음 챙기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해야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몇 마디의 말을 제외하고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몇 마디의 말도 천천히 부드럽게 해야하며, 이 말 때문에 다른 수행자들의 마음집중이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역주 : 집중수행 동안에 마음챙김이 끊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수행과는 관계가 없는 잡담은 결정적으로 마음챙김에 단절을 초래합니다. 수행과 관계가 있는 말(법문이나 법에 대한 토론)도 일정한 시간(길어도 1 시간 정도)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하며, 말을 하는 당사자는 최대한 마음챙김을 지니고 해야합니다. 역자가 받은 충고로는 부득이 말을 하게될 때에는 자신의 입술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면서 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어활동의 배경에는 의식의 흐름이 있지만, 이 의식의 흐름에 마음을 챙기기는 어렵기 때문에, 육체적인 현상인 '입술의 움직임'을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해야된다는 충고였습니다. 상당한 마음챙김의 힘이 있어야 자신의 입술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가면서 고요히,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술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에는 단지 입술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을 하면 됩니다. 입술의 움직임에 명칭을 붙이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들을 아주 소리가 적게 또는 아예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신을 끌거나 몸이 축 쳐져 걸으면서 소리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고 있다면, 걸으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몸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 모든 먹는 행위와 동작에 대해서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목욕을 할 때, 옷을 입을 때, 물을 마실 때, 여러분은 모든 행위를 천천히 해야 하며, 그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앉을 때에도, 모든 앉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앉아야 합니다. 일어날 때에도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즉,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생겨났다가는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의 이러한 참된 본질을 자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 합니다.

마음챙김(念)과 마음집중(定)은 지혜(慧)가 펼쳐지기 위한 길을 장엄해줍니다. 마음챙김이 이어질 때, 마음집중은 자연스럽게 더욱 심화됩니다. 마음집중이 더욱 심화될 때, 지혜는 저절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어짐 없고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제 3 장 ;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

붓다가 가르친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은 {대념처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불교의 네 가지 측면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이 네 가지 측면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불교의 신앙적인 측면,

2.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

3. 불교의 도덕적인 측면,

4. (체험적인 측면을 포함한)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

신앙적인 측면

불교의 신앙적인(헌신적인) 측면은, 의례와 의식, 경전이나 호주(護呪; paritta)의 독경, 음식물이나 가사(승복)를 공양하는 것과 같이 꽃이나 향을 공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좋은 행위들을 행할 때는 우리들에게 믿음[信心; "sraddha (sanskrit), saddha (paali)]이 있기 때문입니다.

팔리어의 삿다(saddha)라는 말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삿다'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영어 표현은 없습니다. 우리가 삿다를 '믿음(faith)'으로 번역하면, 믿음이라는 말은 그 진정한 의미를 전부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말을 '확신(confidence)'이라고 번역하더라도, 또한 그 진정한 의미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삿다의 완전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의 영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삿다라는 말은 '법(法; Dhamma)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한 믿음(belief)'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할 때, 우리는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합니다. 우리는 붓다(佛), 담마(法; 가르침), 상가(僧; 승단)를 믿습니다. 우리는, 붓다가 최상의 깨달음을 통해서 모든 번뇌를 없애버렸으며, 따라서 공양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아라한)이라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분은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붓다이었지, 다른 스승으로부터 담마(法)를 배워서 붓다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붓다를 이런 입장에서 믿습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쳤고, 모든 종류의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과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분명히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괴로움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담마를 믿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상가를 믿습니다. 우리가 상가라고 말할 때, 이는 아리야 상가 즉, (수타원에서 아라한에 이르는) 네 단계의 도(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얻은 고귀한 상가(聖衆)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 말은 세간적인 상가(Sammuti- sangha ; 번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승려들)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보 -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합니다. 우리는 또한 경전이나 호주(護呪)를 독송하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공덕 있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공덕 있는 행위를 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신앙적인 측면을 이룹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교의 핵심을 맛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신앙적인 측면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높은 측면을 실천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윤리적인 측면

불교의 두 번째 측면은 윤리적인 측면입니다. 이것은 행위와 말과 마음의 정화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에 관한 가르침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다음 생에서뿐만 아니라 현생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괴로움을 완전하게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종류의 악한 행위를 삼가는 것,

2. 공덕 있거나 선한 행위를 실행하는 것,

3. 모든 번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 세 가지 부분의 윤리적인 측면은 일체지자이신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며, 모든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악한 행위를 삼간다면, 어떠한 나쁜 과보에 의해서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뿐만 아니라 사마타 수행도 닦아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선정에 들어 있는 동안에만 마음은 정화되지만, 선정에 들어있지 않을 때에는, 번뇌가 다시 우리들을 공격해 옵니다. 만일 마음-몸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했다면, 번뇌는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자각이나 지혜를 꿰뚫어 보는 앎(vipassanaa-~naa.na; Insight-Knowledge)이라 합니다. 이 앎에 의해서 어떤 측면의 번뇌는 극복되고, 탐욕(貪), 성냄(瞋), 어리석음(癡) 등과 같은 번뇌는 줄어든다. 꿰뚫어 보는 앎 (vipassanaa-~naa.na; Insight-Knowledge)에 의해 제거된 번뇌들은 다시는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꿰뚫어 보는 앎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게 되면, 그 체험은 사라지거나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얻은 그 체험을 다시 회상할 때, 우리가 얻은 꿰뚫어 보는 앎은 다시 생겨나고, 꿰뚫어 보는 앎과 함께, 이 앎에 의해 제거된 번뇌들은 다시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번뇌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충분한 삿다(saddha; 믿음 또는 확신)를 지니고 있다면, 수행에 보다 더 큰 노력을 가해서 네 번째의 도(道)인 아라한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모든 번뇌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번뇌가 전부 제거되고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었을 때, 어떠한 두카 또는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괴로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번뇌로부터의 마음의 이러한 정화는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에 관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앞의 두 가지 점은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에 관한 것입니다.

{길상경}(Mangala Sutta; Suttanipaata, 258-269偈)에도 38 가지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경에는, 우리가 그것에 따르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많은 윤리들이 설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안락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에도 가능한 한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위와 말과 마음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

이 말들은, 우리들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번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따라야할 많은 윤리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친숙할지 모르는, 『암발라티카 라훌로와다경』(中部 61經)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경에서 붓다는 7살이 된 사미인, 당신의 아들 라훌라에게 바르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라고 격려합니다. 붓다는 라훌라에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도가 생겨날 때마다, 잠시 행동을 멈추고 재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라훌라야, 너는 네가 하려고 하는 행동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하며,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잘 생각한 후,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해도 좋다.'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는 해야 할 일을 잘 생각할 것,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릴 것, 이미 한 일을 회상할 것에 대하여 라훌라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윤리는, 우리들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많은 윤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윤리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따른다면, 비록 우리가 모든 괴로움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할지라도,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도덕적인 측면

이러한 윤리에 의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불교의 두 번째 측면으로 우리는 단순하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보다 높은 불교의 측면인 세 번째의 도덕적인 측면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여러분은 5계, 8계 또는 10계를 지켜야 합니다. 227계가 비구들을 위한 계이며, 10계는 견습승인 사미를 위한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우리는 최소한 5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5계를 완전하게 지킬 수 있을 때, 우리의 도덕은 정화됩니다. 도덕적인 행위가 정화될 때, 수행자는 어렵지 않게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도덕적인 행위의 정화라는 기반 위에서, 수행자는 어렵지 않게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으며, 깊은 마음집중을 얻을 수 있게 되어, 마음은 명료해지고 고요해지며 행복해집니다.

실천적인 측면

다음으로, 네 번째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수행을 닦습니다. 하나는 깊은 마음집중을 얻게 해주고, 다른 하나는, 마음과 몸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하게 해줌으로써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 해줍니다. 붓다는 두 번째의 수행 방식 즉, 위빠사나 수행을 강조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닦을 때, 우리는 {대념처경}에 따라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지닌다면,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붓다는 쿠루 지방에서 {대념처경}을 설할 때, 네 가지 마음챙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

이 경의 도입 부분에서 붓다는, 수행자가 스스로 법을 체험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익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이익은 청정입니다. 어떤 이가 마음챙김을 닦을 때, 그는 모든 번뇌에서 청정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팔리어의 킬레사(kilesa)라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킬레사'라는 말을 불교 학자들은 번뇌 또는 때(defilement)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킬레사에는 10 가지의 주요한 종류가 있습니다.

(1) 탐욕(貪; lobha),

(2) 성냄(瞋; dosa),

(3) 어리석음(癡; moha),

(4) 사견(見; di.t.thi),

(5) 아만(慢; maana),

(6) 의심(疑; vicikicchaa),

(7) 혼침과 수면(混沈-睡眠; thiina-middha),

(8) 들뜸과 회한(掉擧-悔恨; uddhacca-kukkhucca),

(9) 무참(無斬; ahirika),

(10) 무괴(無愧; anottappa).

로바(lobha)는 탐욕뿐만 아니라 욕망, 욕정, 갈망, 갈애 그리고 사랑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상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날 때, 우리의 마음은 더럽혀져 번뇌에 물듭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번뇌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사(dosa)는 증오, 분노, 악의 또는 혐오의 뜻입니다.

모하(moha)는 환각, 또는 무지의 뜻입니다.

디티(di.t.thi)는 잘못된 견해 또는 틀린 견해의 뜻입니다.

마나(maana)는 아만(자만)의 뜻입니다.

위치킷차(vicikicchaa)는 회의적인 의심의 뜻입니다.

티나-밋다(thiina-middha)는 혼침과 졸음의 뜻입니다. 졸리움도 역시 혼침과 졸음의 일종입니다. 혼침과 졸음은 수행자들과 법을 듣는 이들의 오랜 친구이기도 합니다.

오늘, 점검(interview) 시간에, 모든 수행자들이 '피곤합니다, 졸음이 옵니다'라는 경험을 보고했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아직 우리들은 마음챙김 수행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힘을 불어넣어야만 합니다. (피곤과 졸음을 느끼는) 이 때가 수행의 고비 단계이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이 기간은 2-3일 정도 지속될는지도 모릅니다. 3일이 지나면, 모든 수행자들은 괜찮아질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물론 사마타 수행에 있어서 향상을 방해하는 이 '오랜 친구'들을 이겨내는데 그리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 수행자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웃닷차-쿡쿠차(uddhacca-kukkhucca)는 들뜸(restlessness; 불안함)과 회한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아히리카(ahirika)는 도덕적인 부끄러움이 없음(無斬)을 의미합니다. 말과 생각과 행위로 지은 악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안오타파(anottappa)는 도덕적으로 두려워함이 없음(無愧)을 의미합니다. 말과 생각과 행위로 지은 악한 행위에 대해서 (남들에게) 두려워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도덕적으로 두려워함이 없는 것도 번뇌의 하나입니다.

이것들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버리고 제거해야할 10 가지 번뇌들입니다. 붓다는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마음챙김 수행을 닦는다면,

그는 모든 번뇌로부터 청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종류의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청정해졌을 때, 그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익입니다.

마음챙김 수행의 두 번째 이익은, 슬픔과 근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마음챙김 수행을 닦는다면, 여러분은 실패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친척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일자리를 잃어서 슬픔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 어떠한 일이 닥쳐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슬픔과 근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픔과 근심이 생길 때, 여러분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챙김 수행을 완전하게 향상시켰을 때, 여러분은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근심과 슬픔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심과 슬픔은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이익은 비탄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의 부모나 자식이나 친척이 죽는다하더라도, 그 때문에 어떠한 비탄에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른바 '자식'이나 '부모'라고 불리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정신과 육체의 과정들을 완전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비탄은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의 이익과 관련해서 {대념처경}의 주석서에서는 한 이야기를 들고 있습니다.

파타차라라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하루 이틀 사이에 남편과 두 아들,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죽어서 슬픔과 근심과 비탄으로 미칠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 때문에 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사위성 가까이 있는 죽림정사에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던 이 미친 여인은 정사로 들어가서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대중들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대중에게 다가가자, 이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친절한 한 노인이 자신의 상의를 벗어서 그 여인에게 건네주며 "여보시오, 내 옷으로 당신 몸을 좀 가리시구려" 하고 말을 건넸다. 이와 동시에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자매여, 마음을 챙기시오" 하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의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그 미친 여인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대중의 한 쪽에 앉아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붓다는 그 여인이 정신을 차린 것을 아시고, 법문의 방향을 그녀에게 맞추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점차로, 법문의 핵심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법을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그녀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를 설했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苦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苦滅道諦).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는 우리의 마음과 몸에서 생겨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정신을 차린 파차타라는 마음챙김의 기법을 바르게 이해했으며, 그 방법을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에 대해 적용시켰습니다. 그녀의 마음챙김이 순간적인 마음집중(刹那三昧; momentum)을 이루었을 때, 그녀의 마음집중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강해졌습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지게 되자, 마음과 몸에 대한 그녀의 지혜와 꿰뚫어 보는 앎은 더욱 강력해져서, 그녀는 점차로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독특한 특성과 일반적인 특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법문을 듣는 동안에 꿰뚫어 보는 앎의 모든 단계를 차례로 경험해서,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sotaapatti-magga)를 얻었습니다. 마음챙김 수행에 의해, 법에 대한 그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슬픔과 근심과 비탄은 그녀의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려 그녀는 '새로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녀는 마음챙김 수행에 의해 그녀의 슬픔, 근심, 비탄을 극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념처경}의 주석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붓다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도 또한 슬픔과 근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마음챙김 수행을 닦아서 어느 정도의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을 얻게 된다면. 여러분들도 마음챙김 수행에 의해 슬픔과 걱정을 극복할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네 번째의 이익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다섯 번째의 이익은 정신적인 고뇌의 소멸입니다.

통증, 뻗뻗함, 가려움, 저림 등등의 육체적인 통증은, 일상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도 마음챙김 수행에 의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수행이 진전되어 어느 정도의 체험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정신적 육체적인 괴로움을 상당히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충분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여러분이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때, 정신적 육체적인 괴로움을 영원히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여러분은 통증, 뻗뻗함, 가려움, 저림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불쾌한 육체적인 감각들을, 아주 적극적으로 그리고 밀착해서 관찰함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통증, 뻗뻗함, 또는 저림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들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끔 도와주는 '좋은 벗'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통증을 강하고, 정확하게,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더욱 명료하게 알게 되기 때문에 통증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고통스러운 감각의 불쾌함을 완전히 알게 될 때, 여러분은 그 불쾌함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간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감각이란 정신적인 현상의 자연스런 과정이라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고통스런 감각에 대해서 '나'니 '나의 것'이니 '사람'이니 '존재'니 하면서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은 영혼, 자아, 사람, 존재, '나' 또는 '너'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없앨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번뇌의 뿌리인 유신견(有身見) 또는 아견(我見)을 부수어 버렸을 때, 여러분은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를 틀림없이 얻습니다. 그런 후, 여러분은 세 자지의 보다 높은 도(道)와 과(果)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증, 뻗뻗함, 가려움, 저림 등의 불쾌한 육체적인 감각들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끔 도와주는 '좋은 벗'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림이나 다른 고통스런 감각이 바로 열반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통증을 느낄 때,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것입니다. 통증은 가장 가치 있는 수행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통증이 있으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그 통증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그 통증에 깊이 집중할 수 있게 되고, 그 속에 몰입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고통스런 감각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여러분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의 모양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각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고통의 고유한 특성(sabhaava-lakkhana) 또는 고통스런 감각(苦受; dukkha-vedanaa)의 개별적인 특성을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여러분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무상하고 고이며, 무영혼 또는 무아인 일반적인 특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통증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꿰뚫어 보는 앎(위빠사나)의 세 번째 단계(思惟智; sammasana-~naa.na)를 통과한 어떤 수행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모든 고통스런 감각을 완전하게 극복했지만, 알아차려야 할 통증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행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에 체중의 압력을 주어 통증을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들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좋은 벗'을 찾았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불쾌함을 느낄 때, 그 불쾌함을 강하고, 주의 깊고, 아주 밀착해서 '불쾌함, 불쾌함' 하고 관찰해보기 바랍니다. 만일에 우울함을 느꼈다면, 그 우울함을 아주 주의 깊고 인내력 있게 관찰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챙김이 강해지면, 불쾌함이나 우울함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적인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마음챙김 수행의 다섯 번째 이익입니다,

여섯 번째 이익은 깨달음 즉, 도(道)와 과(果)의 성취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챙김 수행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을 때, 여러분들은 최소한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챙김 수행의 여섯 번째 이익입니다.

일곱 번째 이익은,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열반, 해탈, 자유를 틀림없이 얻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은 위빠사나 수행자가 법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1. 모든 종류의 번뇌로부터 청정.

2. 슬픔과 근심의 극복.

3. 비탄의 극복.

4. 모든 육체적인 통증의 극복.

5. 모든 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6. 깨달음(道와 果)의 성취.

7. 열반의 성취.

붓다는, 서두에 이 일곱 가지 마음챙김 수행의 이익을 제시하면서 {대념처경}을 설했습니다. 따라서 불굴의 정진력으로 수행한다면, 여러분들이 이 일곱 가지 이익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들은 운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감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팔리 경전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곳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물은 맑고, 많은 연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손이 더러운 한 여행자가 있었습니다. 연못에 손을 씻으면 손이 깨끗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을 씻으러 연못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손은 여전히 더러운 채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연못을 지나쳐서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이 비유가 설해진 다음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더러운 채로 있다면,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 연못인가, 여행자 자신인가 ?" 비난받을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여행자입니다. 그는 연못에서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행자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우리에게 마음챙김이라는 (마음의 때와 번뇌를 씻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만일 우리가 그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챙김 수행을 닦지 않는다면, 우리는 괴로움을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괴로움을 없애지 못한다면, 누가 비난받아야 하겠는가 ? 붓다입니까, 마음챙김 수행법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입니까 ? 그렇습니다. 우리 지신이 비난받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굴의 정진력으로 이 마음챙김 수행법을 닦는다면, 이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을 얻음으로써 여러분은 모든 번뇌에서 청정해지고, 괴로움을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제 4 장 ; 네 가지 마음챙김

마음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을 설명하고 난 후, 붓다는 이어서 네 가지의 마음챙김(四念處)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1. 몸에 대한 마음챙김 (身念處; kaayaanupassanaa satipa.t.thaana)

2.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受念處; 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

3. 마음 또는 의식의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心念處; cittaanupassanaa satipa.t.thaana)

4. 법에 대한 마음챙김(法念處; 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

몸에 대한 마음챙김

신념처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 또는 현재 발생하는 모든 육체의 과정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수념처는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이 느낌 또는 감각에는 3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즐거운 느낌이나 감각,

(2) 불쾌한 느낌이나 감각,

(3)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간의 느낌이나 감각.

즐거운 느낌이나 감각을 수카-웨다나(樂受; sukha-vedanaa; sukha는 즐거움, vedanaa는 느낌 또는 감각)라고 합니다. 불쾌한 감각이나 불쾌한 느낌은 팔리어로 두카-웨다나(苦受; dukkha-vedanaa; 여기에서 dukkha는 불쾌함을 의미함)라고 합니다.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간의 느낌이나 감각은 우페카-웨다나(捨受 또는 不苦不樂受; upekkha-vedanaa; upekkha는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중간을 의미함)라고 합니다.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중간의 느낌이 일어날 때, 수행자는 그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불쾌한 느낌은 불쾌하기 때문에 관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모든 종류의 느낌을 실제로 발생하는 그대로, 아주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즐겁거나 불쾌한 느낌이나 감각을 관찰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즐거운) 느낌에 애착하거나 (불쾌한 느낌을) 물리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느낌이나 감각을 좋아할 때, 우리는 그것에 애착하기 시작합니다. 갈애 또는 탕하는 느낌이나 감각에 의존해서 생겨납니다. 이 경우에, 즐거운 느낌이 원인이고 갈애는 그 결과입니다.

만일 어떤 수행자가 굽히지 않고 참을성 있게 정진한다면, 그의 마음집중은 깊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수행자의 마음집중이 깊어지고 강해졌을 때, 그는 행복(樂; sukha)을 느끼고 희열(悅; piiti)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집중이 이루어진 그 순간에는, 그의 마음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 아만과 같은 모든 번뇌에서 분명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참을성 있는 수행자는 그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꿰뚫어 보는 앎의 아주 좋은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 수행자가 그 상태를 즐기고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면, 이는 그가 그 단계에 애착하고 있음을 뜻하고, 따라서 그는 더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은 꿰뚫어 보는 앎의 네 번째 단계의 처음 부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이러한 사실을 이해했다면, 이 단계에서 자신이 얻은 경험을 단지 관찰해야만 합니다. 만일 그가 아주 주의 깊고, 강하게 자신의 경험을 관찰한다면, 이 단계에서 경험하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그는 애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주의 깊고 지속적으로 그 경험을 알아차릴 때, 행복감, 고요함 또는 평온함이 그의 마음속에서 지배적이지(manifest) 않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순간에 그가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단지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그는 즐거운 느낌과 불쾌한 느낌을 구별짓지 않으며, 그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애착을 떠나, 보다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을 향해서 정진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이 (네 번째)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아주 마음 챙겨서 걷는다면, 걸음의 6 과정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발을 들어올림,

발가락을 들어올림,

발을 앞으로 나아감,

발을 내려놓음,

닿음, 그리고

눌림,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마음집중은 좋아지고, 깊어지고, 강해지며, 그는 발의 겉모양을 인식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그의 몸이나 몸의 모양도 인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발의 움직임뿐입니다. 그 움직임이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즉, 공중을 걷고 있는 듯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그는, 아주 좋은 수행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가 이러한 경험들을 마음 챙겨서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경험들을 좋아하게 될 것이며, 그 경험들을 보다 많이 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행에 아주 만족하게 되어 이 경험이 열반(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험이 그가 이제껏 겪어온 경험 가운데 최상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즐거운 경험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그 경험들에 애착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애착은 좋은 경험에 대한 즐거운 느낌 또는 즐거운 감각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만일 수행자가, 자신의 좋은 경험에 대한 즐거운 느낌이나 감각을 마음챙김 없이 즐긴다면, 그는 분명히 그 느낌에 애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이 단계에서 부딪히는 그 어떠한 경험에 대해서도 관찰하고 마음 챙겨야 합니다. 그는 경험을 분석해서도 안되며, 그에 대해서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그는 단지 경험들이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려야만 하는데, 이는 이러한 정신의 과정이나 정신의 상태에 대한 경험이 변하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마음 챙겨 알아차릴 때마다 경험은 지속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지속적이고 한결 같고, 강하게 되면, 이 마음은 그의 경험 즉, 정신의 상태의 본질로 꿰뚫고 들어갑니다. 경험은 생겨날 때마다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그의 마음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법(法; Dhamma)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무상(無常) 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경험과 함께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에서 법(法; Dhamma)이란, 육체적 과정은 물론 정신적 과정도 의미합니다. 좋은 경험과 함께 즐거운 느낌이나 감각도 무상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애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좋은 정신적 상태나 좋은 경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 때, 애착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고리

갈애가 생겨나지 않을 때, 집착(取; upaadaana)은 생기지 않습니다. 집착이 일어나지 않을 때, 언어적,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온전하거나(善) 온전치 못한(不善) 어떠한 행위들도 없을 것입니다. 집착에 기인하여 생긴 행위를 업(業; kamma-bhaava)이라고 합니다. 업은 온전하거나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온전한 육체적인 행위를 신선업(身善業; kusala kaaya-kamma)이라 합니다. 온전치 못한 육체적인 행위를 신불선업(身不善業; akusala kaaya-kamma)이라 합니다. 온전한 언어적인 행위를 구선업(口善業; kusala vacii-kamma)이라 합니다. 온전치 못한 언어적인 행위를 구불선업(口不善業; akusala vacii-kamma)이라 합니다. 온전한 정신적인 행위를 의선업(意善業; kusala maano-kamma)이라 합니다. 온전치 못한 정신적인 행위를 의불선업(意不善業; kusala kaaya-kamma)이라 합니다. 이러한 행위나 업은, 즐겁거나 불쾌한 느낌이나 감각에 대한 갈애의 결과인 집착에서 생겨납니다.

어떠한 육체적, 언어적 또는 정신적인 행위이라도 취하게 될 때, 그것은 원인이 됩니다. 이 원인에 의해서 이 생에서나 다음 생에서 결과가 생겨납니다. 이런 식으로 한 존재는 자신의 온전하거나 온전치 못한 업을 통해서 생을 되풀이합니다. 그 행위는 갈애를 뿌리로 하고 있는 집착에 의해 생겨납니다. 차례로, 갈애는 감수(感受; vedanaa)인 느낌이나 감각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함께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갖가지 괴로움을 겪으면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수행자가 느낌들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게 되고 갖가지 괴로움으로 고통을 겪게 되는, 조건에 의한 발생[緣起; pa.ticcasamuppada]의 고리를 따라서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떠한 즐겁거나 불쾌하거나, 중간의 느낌이나 감각에 대해서도, 마음 챙겨야 한다고 붓다가 우리들에게 가르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 또는 감각에 대한 수행을 수념처(受念處; 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라고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정신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감각에서도 불쾌함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두 가지 종류의 감각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육체적인 감수(身受; kayika-vedanaa)

2. 정신적인 감수(心受; cetasika-vedanaa)

만일 느낌이나 감각이 육체적인 과정에 의존해서 생겨난다면, 그것을 육체적인 감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육체적인 느낌이나 감각, 또는 신체적인 느낌이나 감각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일 느낌이나 감각이 정신적인 과정에 의존해서 생겨난다면, 그것을 정신적인 감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정신적인 느낌이나 감각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느낌이나 모든 감각은 정신적인 과정이지 육체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때때로 느낌이나 감각은 육체의 불편함 때문에 생겨납니다. 수행자가 몸에서 불편함을 느낄 때, 불쾌한 감각이 생깁니다. 그 불쾌한 감각을 육체적인 감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적인 과정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대부분 정식적 육체적으로 불쾌한 감각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떠한 감각을 경험하더라도 수행자는 그 감각을 매우 주의 깊게, 힘차게 그리고 밀착해서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느낌이나 감각의 참된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느낌의 독특한 특성과 일반적인 특성을 완전하게 자각해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그는 느낌에 애착하거나 밀어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수념처(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 -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실제로 일어나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 도중에 경험하는 불쾌한 육체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고통스런 감각은 두려워 해야할 과정이 아닙니다. 통증은, 그것이 실제로 생겨나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완전하게 이해해야 하는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수행자가 참을성 있는 노력으로, 성공적으로 통증을 관찰할 때, 그는 통증의 참된 본질- 통증의 독특하고 일반적인 본질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 통증 또는 불쾌한 감각의 참된 본질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에 의해서 수행자는 보다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고통스런 감각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

세 번째의 마음챙김은 심념처(心念處; cittaanupassanaa satipa.t.thaana)입니다. 이것은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마음의 상태(心所; cetasika)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합니다. 논서(論書; Abhidhamma)에 의하면, 이른바 모든 '마음'은 마음과 그것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용물이란 여기서 마음에 부속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은 결코 독립적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부속물과 함께 생겨납니다. 간단히 말하면, 어떤 의식이나, 어떤 마음이나, 어떤 마음의 상태나, 그것이 발생하는 그대로 마음 챙겨 알아차리거나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을 심념처라고 합니다. 마음의 상태가 좋고, 감정적인 상태는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지 실제로 발생하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따라서 탐욕과 갈애의 마음이 생기면,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내는 마음이 생기면,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념처경}에 의하면, 성내는 마음은 '성냄, 성냄'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챙김이 강해지면, 성냄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 수행자는 성냄이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성냄을 관찰함으로써 수행자는 두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성냄을 극복하는 것.

2. 성냄의 참된 본질 (성냄의 발생과 소멸, 또는 성냄의 무상한 본질)을 자각하는 것.

마음 챙겨서 알아차리면, 성냄이란, 수행자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하나의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법에 대한 마음챙김

네 번째의 마음챙김은, 법에 대한 수행 또는 법에 대한 마음챙김을 의미하는 법념처(法念處; 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입니다. 여기에서 법(dhamma)은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과정의 많은 범주들을 포함합니다. 첫 번째의 범주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 pa~nca-niivara.na)입니다.

1. 욕락(欲樂; kaamacchanda). 감각적 욕망 - 보이는 대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의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한 욕망.

2. 악의(惡意; vyaapaada). 성냄 또는 악의.

3. 혼침-수면(混沈-睡眠; thiina-middha). 졸음, 정신적인 침체, 무거움.

4. 들뜸-회한(掉擧-悔恨; uddhacca-kukkucca). 후회, 근심, 과거의 행위에 대해 마음 아파함. 과거에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 첫 번째 양상이고, 두 번째 양상은 해서는 안돼는 일 즉,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온전치 못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

5 의심(疑; Vicikicchaa). 회의적인 의심.

마음에 번뇌가 있는 한, 수행자는 어떤 정신적 과정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에 잘 집중해 있을 때, 마음은 모든 번뇌 또는 덮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더욱 명료해지고 꿰뚫어 보게 됩니다. 꿰뚫어 보게 됨으로써 마음은, 정신적 육체적인 과정의 본질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자각합니다. 따라서 다섯 가지 덮개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수행자의 마음속에 생겨날 때에는, 그는 그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수행자가 밖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그에게 노래를 듣고싶다는 욕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이 노래를 듣고 싶어해서 그 노래에 빠져들게 됩니다.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그 욕망이 감각적 욕망 - 욕락(kaamacchanda)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때라도, '들음, 들음'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챙김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여전히 노랫소리에 휘말려 들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나 사건에 부딪히게 되거나, 수행이 향상하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강한 마음챙김에 의해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감각적인 욕망을 '욕망, 욕망' 하고 알아차립니다. 마음챙김이 순일해지고 강해질 때, 욕망은 사라집니다. 욕망은 아주 주의 깊고 강력하게 관찰되었기 때문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속으로 '욕망, 욕망'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그의 감각적 욕망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거나 마음 챙길 때. 그는 {대념처경}에서 붓다가 가르친 가르침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마음 챙기는 것을 법념처 또는 마음의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 즉, 다섯 가지 덮개에 대한 마음챙김인 것입니다.

혼침-수면은, 실제로는 졸리움을 의미합니다. 혼침-수면은 수행자들의 아주 '오랜 벗'입니다. 수행자가 졸리움을 느낄 때, 그는 그것을 즐깁니다. 만일에 다른 즐거운 감각이 그에게 생겨나면, 그는 그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졸음이 올 때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혼침-수면은 수행자들의 아주 '오랜 벗'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왔습니다. 만일 졸리움을 관찰할 수 없다면, 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가 혼침-수면 또는 졸리움의 참된 본질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것에 애착해서 즐길 것입니다.

졸음이 올 때, 우리는 수행에 보다 강한 정진력을 쏟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보다 주의 깊게, 보다 강하게, 그리고 밀착해서 관찰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 마음을 활동적이고 기민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활동적이고 기민해질 때, 졸음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때 수행자는 졸리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들뜸-회한은 네 번째의 덮개입니다. 들뜸은 안정되지 못한 상태 또는 산만한 상태이고, 회한은 후회입니다. 여기에서 들뜸이란 마음의 산만함, 마음의 불안정, 마음의 헤매임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헤매이거나 알아차려야 할 수행의 대상 대신에, 다른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그것을 들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헤맬 때,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수행자들은 그 (헤매는 마음을) 관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수행의 대상인 배의 움직임이나 호흡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헤맴, 헤맴' 또는 '생각, 생각'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들뜸-회한을 관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덮개는 의심입니다. 여러분은 붓다(佛), 담마(法), 상가(僧) 또는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심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아주 주의 깊게 관찰되어져야 하고,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법념처(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 - 법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들이 네 가지의 마음챙김입니다.

1.신념처(身念處; kaayaanupassanaa satipa.t.thaana)몸 또는 육체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2.수념처(受念處; 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

3.심념처(心念處; cittaanupassanaa satipa.t.thaana)마음과 그 부수물 부속물에 대한 마음챙김.

4.법념처(法念處; 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법 또는 마음의 대상에 대한 마음챙김.

제 5 장 ; 일곱 단계의 청정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일곱 단계의 청정을 거처야만 합니다.

도덕적 행위의 청정

첫 번째는 계청정(戒淸淨; siila-visuddhi) 즉, 도덕적 행위의 청정입니다. 수행자는 8계가 아니면, 최소한 5계를 지켜야 합니다. 5계의 세 번째가 잘못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임에 반하여, 8계의 세 번째는 모든 성행위를 삼가는 것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성행위를 삼가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의 덮개의 의해서 더렵혀질 것입니다. 마음이 모든 덮개에서 청정하게 되었을 때에만, 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그 본질에서 자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행자가 8계를 지킨다면 더욱 좋습니다. 만일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맛, 음식, 보이는 대상, 들리는 대상, 냄새 그리고 감촉의 대상에 대한 욕망 -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그들의 마음속에 생겨날 것입니다. 8계를 지킴에 의해서, 자신의 행위와 말을 정화해서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이루게 됩니다. 도덕적인 행위가 청정해지면, 마음도 또한 어느 정도 청정해집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맑아지며, 평온해지고 행복해지며, 수행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수행자는 두 번째의 청정인 마음의 청정 즉, 심청정(心淸淨; Citta-visuddhi)을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제자였던 우띠야(Uttiya) 존자가 병에 걸려 누어있을 때, 부처님이 문병 와서 병의 차도를 물었습니다. 우띠야 존자는 부처님에게 자신의 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제 병은 회복되지는 않고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오늘을 넘길지 내일을 넘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저는 죽기 전에, 네 번째의 깨달음인 아라한과를 얻어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수행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짧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부처님이 말씀했습니다.

'우띠야여, 너는 시작을 청정하게 해야한다. 시작이 청정해지면, 너는 그때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다음의 물음을 던졌습니다.

'시작이란 무엇인가 ?'

그리고는 스스로 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시작이란, 정화된 도덕적인 행위(戒)와 바른 견해(正見)를 말한다. 바른 견해란, 인과의 법칙 또는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우띠야여, 너는 너의 도덕적인 행위와 바른 견해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는 정화된 도덕적인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네 가지 마음챙김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너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 될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계 즉,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빠사나뿐만 아니라 마음집중에서도 향상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덕적 행위가 청정해질 때, 마음은 고요하고, 맑아지며, 행복해집니다.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이룬 후에) 마음챙김을 닦는다면,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쉽게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의 청정은 수행자가 향상을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할 선결 조건입니다.

마음의 청정

두 번째 청정은 마음의 청정(心淸淨; citta-visuddhi)입니다. 만일 우리가 꿰뚫어 보는 앎을 얻기를 원한다면,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청정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잘 집중되어 있을 때, 이러한 모든 덮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마음의 청정이라고 합니다. 이 청정을 얻고서야 마음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꿰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제일 먼저, 수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名色; naama-ruupa)의 차이를 구별하게 됩니다. 이 앎은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의 구별에 대한 앎(名色區別智 ; naama- ruupa-pariccheda-~naa.na)이라고 합니다.

견해의 청정

세 번째는 견해의 청정(見淸淨; di.t.thi-visuddhi)입니다. 수행자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참된 본질을 꿰뚫어 알게 될 때, 그는 그 과정들을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의 견해는 청정하게 되어 견해의 청정을 얻게 됩니다.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

네 번째는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度疑淸淨; kankhaavitara.na-visuddhi)입니다. 캉카(kankhaa)는 의심을 뜻하고, 위숫디(visuddhi)는 청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전체의 의미는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입니다. 수행자가 두 번째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 -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緣把握淸淨; Paccayapariggaha -visuddhi)을 얻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즉, 의심을 극복한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이라고 합니다.

이 앎을 얻기 위해서, 수행자는 모든 행위과 동작을 하기 전에 각각의 의도, 바람 또는 원하는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모든 행위에는 의도, 바람, 원함이 앞섭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모든 행위과 동작을 하기 전에 각각의 의도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발을 들어올리려는 의도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난 후, '올림, 올림' 하고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팔을 구부리려는 의도가 있을 때는,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구부림, 구부림' 하고 알아차립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우리는 입을 벌리고 음식을 먹으려는 의도를 지닙니다. 그때, 맨 먼저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다음에 '벌림, 벌림' 하고 알아차립니다. 입을 벌리는 동작에 있어서, 의도는 원인이고, 입을 벌리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

여기에 오려고 하는 바램이나 원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겠습니까 ? 그러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입니까 ? 이곳에 온 행위는 결과이고 오려고 했던 의도는 원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왜 지금 의자에 앉아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주체(sitter)가 어디 따로 있습니까 ? 만일 여러분이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병원에서 시신을 가져와서 의자에 앉혀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체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앉아있을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과정인 의도만이 행위나 동작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앉아 있는 모습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사미입니까, 비구입니까 ?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앉아 있는 모습에는, 바람의 요소(風界; vayo-dhaatu - 내적 외적인 바람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육체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앉아 있음은 육체적인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앉고자 할 때, 먼저 우리는 '의도, 의도'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 후에 '앉음, 앉음, 앉음' 하고 알아차립니다. 모든 앉는 동작들도 의도를 알아차린 후에 관찰되어야 합니다. 팔을 구부릴 때, 그 의도를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팔을 구부리는 동작을 관찰해야 합니다. 팔을 뻗을 때,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뻗는 동작을 '뻗음, 뻗음, 뻗음'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집중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 의도와 그에 따른 행위를 알아차림에 의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원인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원인에 의존해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사람, 남자, 여자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일 뿐입니다. (불변하는) 행위의 주체(doer)는 없습니다. 아무도 어떤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만일 앉아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유신견(有身見) 또는 아견(我見) - 행위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 -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자각한다면, 우리가 자각한 것은 단지 자연스런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대통령이 된 어떤 사람도 없고, 왕이 된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오직 원인과 결과의 과정뿐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과거 전생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전생에 대한 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모든 행위를 하기 전에 의도를 관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인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도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행위하고 동작을 취할 때,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끈기를 지니고 행위 하면, 우리는 모든 행위과 동작을 하기 전에, 의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기 전에 의도를 관찰할 때,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발을 앞으로 내밀기 전에 의도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내미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하게 됩니다. 발을 내려놓기 전에 의도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내려놓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완전하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자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각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 영속적인 어떤 한 인간이나 실체가 있지는 않은가라는 의심을 극복하게 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일 뿐입니다.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다섯 번째 청정은,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 dassa.na-visuddhi)입니다. 이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서는, 여러분은 아주 좋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심신의) 경쾌함, 행복, 고요함, 평온함 등등. 어떤 때는 여러분의 몸이 빛이 된 듯이 느끼면서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도 들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챙김은 아주 예민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진력(正精進)은 굳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강하지도 않으며, 너무 경직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정진력은 조화롭고, 굳건하며, 확고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집중(正定)은 깊어서, 여러분은 평화로움, 평온, 맑음, 고요함, 행복, 희열 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수행자들이 통과해 지나가야 하는 아주 좋은 상태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꾸준히 수행한다면, 이러한 상태는 약 2주일 정도 경험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행자들은 1주일 안에 이 상태를 통과해 가버립니다. 이러한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전에 이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백만 달러보다 더 좋다. 이제 나는 열반을 얻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 이상 나가가지 않습니다. 이 경험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이 이상 더 나아가게 되면, 나는 열반을 넘어가 버린다"라고. 만일 수행자가 이 상태를 열반이라고 붙들고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길(非道; amagga)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해서 수행하고 꾸준히 닦아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소하고 부수적인 경험에 불과하고, 수행자는 이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야 합니다.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여섯 번째 청정은,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입니다. '파티파다 (pa.tipadaa)'는 수행의 과정이란 뜻이며, '냐나 (~naa.na)'는 앎, '다싸나 (dassa.na)'는 본다는 뜻입니다. 냐나와 다싸나는 여기에서는 대략 같은 의미입니다. 꿰뚫어 봄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 경전에서는 앎과 봄이라는 두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은 수행의 과정에 대한 앎과 봄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을 지나왔을 때, 우리는 아라한과 또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된 길 위에 있다면,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에서 멈추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른 길에 서 있기 때문에, 꿰뚫어 보는 앎의 아홉 번째 단계를 통과해서 나아가야 하며, 목적지로 다가가고 있는 도중이므로, 우리의 수행 과정이 올바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행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의심은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行道智見淸淨)에 의해서 제거된 것입니다. 그때, 바른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은 수순지(隨順智; anuloma-~naa.na)를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은, 낮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과 보다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 따라 순차적으로 얻어졌기 때문입니다.

성숙에 대한 앎

우리가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우리는 곧 경계선에 다가갈 것입니다. 두 세 찰나 사이에, 우리는 그 경계선에 도착해서 그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계선은, 범부(凡夫; puthujjana)와 성인(聖人; ariya) 사이의 경계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경계선에 서있다면, 앞으로 나아가겠습니까, 뒤 돌아가겠습니까 ? 만일 뒤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주의력은 과거를 향할 것이며, 만일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주의력도 앞으로 향할 것입니다. 앞이란, 형성된 것들(諸行)의 소멸 즉, 모든 정신적인 현상(名; naama)과 육체적인 현상(色; ruupa)의 소멸을 말합니다. 경계선 또는 접경에 서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뒤뿐만 아니라 앞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앞으로 나아가면, 모든 괴로움이 소멸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 그리고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수많은 겁(劫) 동안에 괴로움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겁'이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수입니다. 여러분이 경계선에 있을 때, "괴로움의 굴레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재양식으로 괴로움을 받아왔구나. 이 정도로 이제 괴로움은 충분히 겪었어. 이제 괴로움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 하고 여러분의 과거의 경험을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주의력은 괴로움의 소멸로 향합니다. 이 경계선의 앎을 종성지(種性智; gotrabhuu-~naa.na)라고 합니다. '종성(種性; gotra)'이란, 범부 또는 전래된 것을 말합니다. 이 접경에서, 범부의 전래물은 완전하게 끊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때, 더 이상 범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단 이 경계선을 한번 통과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성인(聖人)이 됩니다. 범부의 가계(家系)를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냐나포니카(Nyanaponika) 스님이 이 말을 성숙지(成熟智) 또는 성숙에 대한 앎(knowledge of maturity)으로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앎이 도(道; magga)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 말을 우리는, 범부의 가계를 끊어버린 앎이라고 문자 그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범부의 가계가 끊어져 버릴 때, 수행자는 수타원도의 앎(須陀洹道智; sotaapatti-magga-~naa.na)을 얻어서 고귀한 사람, 성인이 됩니다.

성숙에 대한 경계선의 앎을 얻고 난 직후, 아래의 사성제를 완전하게 자각하는 도지(道智; magga- ~naa.na)를 얻습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苦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苦滅道諦).

앎과 봄의 청정

사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진리에 대한 앎과 봄이 청정해집니다. 이 꿰뚫어 보는 앎을 지견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dhi) 즉, 앎과 봄의 청정이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 청정을 첫 번째 도인 수타원의 앎, 또는 지견청정(智見淸淨)이라고 합니다. 냐나(~naa.na)는 앎, 다싸나(dassa.na)는 봄, 위숫디(visuddhi)는 청정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일곱 번째 청정을 얻었을 때, 여러분은 수타원(sotaappana)이 된 것입니다. 소타(sotaa)란 흐름을 뜻하고, 아판나(appana)는 들어감을 뜻합니다. 따라서 '수타원(소타판나)'은 흐름에 들어간 자(預流)라는 의미입니다. 즉, 고귀한 팔정도(八支聖道)의 흐름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이때에만 여러분은 지견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dhi) - 앎과 봄의 청정을 이룬 것입니다.

제 6 장 ; 마음의 기능(五根)을 예리하게 하는 아홉 가지 방법

수행들에게 있어서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은 믿음(信; saddha), 정진(精進; viriya), 마음챙김(念; sati), 마음집중(定; samaadhi), 지혜(慧; pa~n~naa)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오근(五根; pa~ncindriya; pa~nca는 다섯, indriya는 기능을 뜻함) 또는 오력(五力; pa~ncabaala; 다섯 가지 마음의 힘)이라고 부릅니다.

삿다(信; saddha)는, 바른 이해를 갖춘, 또는 바른 이해를 통한 믿음을 뜻합니다.

위리야(精進; viriya)는, 불굴의 노력 또는 에너지를 뜻합니다.

싸띠(念; sati)는, 마음챙김 또는 한결같고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뜻합니다.

사마디(定; samaadhi)는, 깊은 마음집중을 뜻합니다.

판냐(慧; pa~n~naa)는, 지혜, 꿰뚫어 보는 앎 또는 깨달음을 뜻합니다.

수행을 위해서는,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 다섯 가지 기능은 강하고, 힘있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굳건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정진은 힘차고, 강해야 합니다. 마음챙김은 깊어야 하고, 지혜는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기능들을 균형 잡기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들을 강하고 힘차며,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수행자들이 따라야 하는 아홉 가지 지침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이 강하지만 균형 잡혀있지 않다면, 수행자는 꿰뚫어 보는 앎을 얻어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信)은 지혜(慧)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집중(定)은 정진(精進)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중요한 마음의 기능인 마음챙김은 다른 기능들과 균형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강하고, 한결 같고,끊어짐이 없어야 합니다.

만일 믿음은 약한데 지혜가 강하다면, 수행자는 수행의 과정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을 경험하는 동안에, 특히 법(法; Dhamma)에 대해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면, 그는 그 경험들을 분석할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할 때, 그 분석적인 지식으로 인해 마음집중이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집중은 깨지거나 약화될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자연스런 흐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닌, 논리적인 추론, 철학적인 사색, 또는 분석을 할 여지는 없습니다. 법을 바르게 꿰뚫어 보고, 이해하고, 자각하지 못할 때, 법이나 경험에 대한 자신의 분석적인 지식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행자는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거나 믿음이 없어져버립니다. 오직 수행을 완성해서 깨달음을 체험하고 난 후에 라야, 수행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경험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체험적인 앎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붓다, 달마, 상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그의 지혜 또는 꿰뚫어 보는 앎은 확고한 믿음과 균형을 이룬다. 그때, 그는 분석적인 지식이나 추론 또는 철학적인 사색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수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불교나 법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자 하여, 때때로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분석하여 실재와는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믿음은 반드시 지혜(꿰뚫어 보는 앎)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그 거꾸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챙김 수행을 시작했을 때, 나의 목적은 이 수행법이 올바른가를 살피면서 기법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챙김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마하시 사야도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법}(Vipassanaa Meditation) 2권*을 독파했습니다. 그때에는 사야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역주 : {위빠사나 수행법}(Vipassanaa Meditation)은 Vipassanaa shu nyi gyan라는 이름으로 미얀마어로 1941년에 저술되었습니다. 본서는 총 950쪽에 달하는 대자로 마하시 사야도의 주저(主著)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서의 저술경위들에 대한 소개는 마하시 사야도의 전기인 The Venerable Mahaasi Sayaadaw Biography (Mahasi Biography), Rangoon, Buddha Saasanaa Nuggaha Organization, pp.58ff 참조.>

하지만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 챙기는 수행은 책을 통해서 수행 방법을 익혀온 이들에게는 매우 직선적이었습니다. 나는 그 방법이 참되고 옳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복부의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다른 세 가지 요소 -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땅의 요소 - 들도 바람의 요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네 가지 요소에 마음 챙길 수 있다면, 이 방법은 옳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들은 수식관(隨息觀) 또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aanaapaanasati)이라는 수행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사미였던 17세부터 24세 때까지 출입식념을 수행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마하시 사야도의 방법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통적인 출입식념의 수행 방식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그 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복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마음 챙기는 것에서 시작하는 마하시 사야도의 방법을 테스트해보고자 했던 이유입니다. 마하시 수행 센터에 가서 그 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했지만, 나는 많은 의심을 품고서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가, 1953년의 우안거(雨安居; vassa) 4개월간의 집중수행 과정을 그곳에서 보낸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만달래이의 불교 대학의 강사였습니다. 나는 우 난다왐사(U Nandavamsa)의 지도하에 수행을 했습니다. 그분은 말했습니다.

'우 자나카여, 자네는 고급 시험 과정을 통과해서 지금은 대학의 강사이네. 만일 자네가 이 수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루고자 원한다면, 책에서 배운, 법에 대한 자네의 지식을 한쪽에 두어야만 하네.' 그분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나는 나의 지식을 제쳐놓고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믿음은 나의 지혜와 균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책에서 배운 지식이나 나의 선입견으로 경험이나 수행 방법을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지혜가 약하고 믿음이 강하면, 수행자는 경솔하게 믿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지식, 지혜, 지성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쉽사리 어떤 이론이나 교리를 믿어버리기 때문에, 경솔하게 믿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어느 수행자가 쉽사리 믿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는 잘못된 길로 이끄는, 교리나 이론에 빠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반드시 지혜 또는 앎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근(信根)과 혜근(慧根)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마음집중(samaadhi)과 정진(viriya)은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정진이 마음집중보다 더 강하고 힘있다면, 여러분은 수행의 대상에 제대로 마음을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정진이 마음집중보다 강하고 힘있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산만해지고 들뜨게 될 것(uddhacca)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수행자의 마음집중은 보통 약하고, 종종 헤맵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을 따라 잡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꿰뚫어 보는 앎을 이루려고 하는데 너무 열성적이라면, 그는 수행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은 산만해지고 들뜨게 되는 것입니다. 노력은 마음집중과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편안히 가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을 주의 깊게, 하지만 너무 힘을 들이지 말고 알아차리면서, 노력을 조금 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점차로 어느 정도의 마음집중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마음집중의 덕으로, 그의 노력은 안정되고, 확고해지며, 너무 강하지도, 너무 느슨해지지도 않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느 수행자가 2-3 주일 동안 수행을 했을 때, 그의 마음집중이 아주 깊고 강해져서, 알아차리는 마음은, 저절로, 자동적으로, 별 노력도 없이,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충분한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점차로 둔해지고 무거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집중은 혼침과 수면 또는 졸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주석서에서 말했습니다.

만일 마음집중이 너무 강하고, 노력이 너무 약하다면,

마음집중은 혼침과 수면 또는 졸음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집중은 반드시 노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힘없이 앉는 자세를 취하면, 마음은 대상에 더욱더 몰입하게 되어, 점점 더 둔하게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음집중과 노력 사이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는 좌선보다는 걷는 수행(行禪)을 더 오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수행자들만이 정진력(노력)을 능가하는 마음집중을 경험합니다. 마음집중을 능가하는 정진력(노력)을 발휘하는 수행자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마음집중은 반드시 노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마음챙김(正念; sati)에 대해서는, 너무 강하다거나 너무 힘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순간 순간, 마음과 몸의 모든 행위와 각각의 행위에 대해서 마음 챙기는 것이 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챙김이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고, 이어지게 되면, 깊은 마음집중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질 때, 꿰뚫어 보는 앎은 자연스럽게 펼쳐져서, 여러분은 마음과 몸의 과정(名色; naama-ruupa)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챙김이 너무 강하다거나 너무 세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수행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하는 아홉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수행자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 또는 조건 지워진 현상들(諸行)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고 관찰할 때, 그것들은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반드시 이래야만 합니다. 때때로 어떤 수행자들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은 무상하고, 생겨났다가는 사라져버리기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러한 선입견 때문에, 그는 마음-몸의 과정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어느 정도 마음집중을 이루었더라도, 그 마음집중으로는 제한된 평온이나 행복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주석서에서 말했습니다.

수행자는, 자신이 존재하는 것 또는 마음-몸의 과정을 관찰한다면,

그것들의 무상함을 자각하게 되리라고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수행자는 마음챙김 수행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즉, 그는 진지하게 마음챙김 수행을 닦아야 합니다. 수행의 방법이나 결과에 대해서 소중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수행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제대로 집중시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참된 본질을 자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 번째 방법은,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수행자의 마음챙김은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고, 이어져야 합니다. 오직 그때에만, 그는 깊은 마음집중을 이루어 그 위에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참된 본질을 꿰뚫는 꿰뚫어 보는 앎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 점은 모든 수행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지속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루 종일 한 순간의 끊어짐도 없이 마음챙김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마음챙김(sati)'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일상적인 마음챙김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는 마음챙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방법은, 수행자가 의존하는 일곱 가지의 적절한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적절한 수행 장소, 음식, 기후 등등입니다

<역주 : 수행자가 의존하는 일곱 가지의 적절한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적절한 거주처 - 주거 환경

2. 가까운 탁발처 - 음식의 조달

3. 바른 언어생활 - 법과 열반의 성취에 도움이 되는 말과 성스러운 침묵.

4. 좋은 벗, 도반, 선지식과 함께 지낼 것. - 잘 다스려진 자기 자신은 좋은 스승.

5. 적절한 음식 - 건강의 유지

6. 적절한 기후

7. 적절한 자세 - 좌선과 행선을 할 때, 자신에게 가장 좋은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낼 것.>

하지만, 조건이 갖추어져 있건 말건, 여러분은 수행에 정진해야 합니다. 때때로, 어떤 수행자들은, 더운 날씨 때문에 선풍기에 너무 집착합니다. 그는 선풍기 아래에 앉기를 원합니다. 실제로 수행자는 춥거나 따뜻하거나 덥거나, 무관심해야 합니다.

마음챙김은 실제로 모든 일을 이루어 내는 원천입니다. 마음챙김에 의해서, 우리는 '적'을 '친구'로 바꿀 수 있습니다. 더위를 느낀다면, 더위에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마음을 챙기면, 더위는 점차로 친구가 됩니다. 통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가 통증을 관찰할 때, 마음집중은 더욱 강해지고 그때, 통증은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깊은 마음집중과 함께 마음이 더욱 예민해진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통증이 점점 더 명확해져서 더욱 심해진 것처럼 보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통증이란 단지 불쾌한 느낌의 정신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나 몸의 형태를 인식하지 않게 됩니다. 그때, 그가 자각하고 있는 것은, 고통스런 감각과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뿐입니다. 그는 감각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통증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통증 때문에 마음집중이 방해받지 않습니다. 통증은 친구와 같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음챙김이 전부이며, 모든 것을 이루는 원천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알았더라도, 여러분은 실천적으로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챙김에 의해서, 여러분은 '적'을 '친구'로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 챙기고 있는 수행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적이 없습니다. 모든 현상들은 '친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로 인해서 꿰뚫어 보는 앎 또는 깨달음 -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방법은, 수행자는 자신이 깊은 마음집중을 얻은 방법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깊은 마음집중을 얻을 수 있게끔 해준, 이미 획득한 기법을 되풀이해서 사용하면서, 그 방법, 그 수행법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섯 번째 방법은, 수행자는 반드시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bojjhanga)를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가 필요할 때, 그것들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챙김(念), 법에 한 고찰(擇法), 노력(精進), 기쁨(喜), 평안(輕安), 마음집중(定), 평온(捨).

일곱 번째 방법은, 여러분의 몸이나 목숨에 대해서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아침 4시에서 밤 9시나 10시까지 쉬지 않고 아주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가, 몸이 약해지지는 않을까라고 걱정하게 됩니다. 한달 동안 이런 식으로 정진한다면, 과로나 다른 병 때문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생각에 빠집니다. 따라서 그는 수행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되어, 그의 마음챙김은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고, 이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챙김이 끊어질 때, 깊은 마음집중을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집중이 약해질 때,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은 펼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몸이나 건강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몸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하루종일 쉬거나 휴식을 취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인내심 있게 수행하십시오.

여덟 번째 방법은, 정신적 육체적 통증이 생길 때마다, 수행에 더욱 힘을 가해서, 그 통증을 알아차리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증이 생기면, 그것을 없애려고 자세를 바꾸려는 경향이나 욕구가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그 통증을 알아차리는 일에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세를 바꾸는 대신에, 그것을 보다 힘차고, 주의 깊고, 밀착해서 알아차림에 의해, 통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행에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합니다. 그때, 그 통증은 깊은 마음집중과 명확한 꿰뚫어 보는 앎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여러분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아홉 번째 방법은, 여러분의 목표를 도중에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마음챙김수행은 여러분들이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라한과를 얻고자하는 여러분의 열정 때문에, 수행에 적절한 노력을 쏟게 되고, 따라서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은 더욱 강해지고, 힘있게 됩니다.

요약하면, 수행자의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을 예리하게 하기 위한 아홉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무상함을 자각하려는 목표를 염두에 둘 것.

2. 진지하고 소중한 마음으로 법을 수행할 것.

3. 하루종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알아차림에 의해,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고, 이어지는 마음챙김을 유지할 것.

4. 일곱 가지의 적절한 조건을 따르고 관찰할 것.

5. 이전에 얻었던 마음집중을 이루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을 것.

6.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를 닦을 것.

7. 수행하는 동안, 몸의 건강이나 목숨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 것.

8. 수행에서 불굴의 노력을 통해서 육체적인 통증(苦受)을 극복할 것.

9. 목표를 도중에서 포기하지 말 것. 즉,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항상 분투 노력할 것.

제 7 장 ; 수행자의 다섯 가지 요소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에서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는 다섯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믿음(信)입니다. 수행자는 붓다(佛), 담마(法), 상가(僧)에 대해서, 특히 그가 수행하고 있는 수행법을 내포하고 있는 담마에 대해서 확고하고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요소는 ,수행자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만일 일시적으로, 두통으로 괴로워하고, 현기증을 느끼거나, 복통이 일어나고, 위장이나 다른 곳의 병이 있다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그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라면 건강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먹는 음식은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음식 때문에 위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화불량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수행자는 정직하고, 솔직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스승이나 동료 수행자들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직함이 최상의 마음가짐(policy)입니다.

네 번째 요소는 정진(viriya)입니다. 이때의 정진은, 일상적인 노력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확고한 힘(padhaana)입니다. 수행자는, 해탈을 위해서 분투하는데 성공하기 위해서, 이 요소를 반드시 지녀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진 또는 노력을 줄여서는 안됩니다. 그는 정진을 끊임없이 증진시키고, 늘려나가야 합니다. 정진(精進; viriya)이나 정단(正斷; padhaana)이 증가할 때, 마음챙김은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게 됩니다. 마음챙김이 지속적이고, 순일하며, 끊어짐이 없게 될 때, 마음챙김은 깊고 강해집니다.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이해하게됨으로써, 꿰뚫어 보는 앎도 예리해지고 꿰뚫게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요소는 반야 또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반야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말은 일반적인 지혜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꿰뚫어 보는 앎의 네 번째 단계인,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생멸을 아는 꿰뚫어 보는 앎(生滅智; udayabbaya-~naa.na)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명색구별지(名色區別智; naamaruupa-pariccheda-~naa.na;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의 다름에 대한 앎)이고, 두 번째 단계는, 연파악지(緣把握智; paccayapariggaha-~naa.na; 인과 관계에 대한 앎 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한 앎)이며, 세 번째 단계는 사유지(思惟智; Sammasana-~naa.na)입니다. 사유지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 알고, 이해하는 앎입니다. 네 번째 단계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생멸을 아는 꿰뚫어 보는 앎(生滅智; udayabbaya-~naa.na)입니다.

따라서 붓다는, 여기에서 말하는 반야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생성과 소멸을 꿰뚫는, 네 번째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이라고 말했습니다. 수행자는 이 요소를 지니려고 해야 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했을 때에는, 수행자는 생멸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을 지니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강하고 확고한 정진력으로 네 번째 꿰뚫어 보는 앎인 생멸지(生滅智; udayabbaya-~naa.na)를 얻기 위해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마음 챙기도록 애써야 합니다. 만일 수행자가 이 지혜를 지닌다면, 그는 최소한 가장 낮은 도지(道智)인 수타원도지(sotaapatti-magga-~naa.na)에 이르기까지 향상해 나갈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붓다가, 수행자들은 반드시,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생성과 소멸을 자각하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수행자가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인, 수타원도지를 얻었을 때, 그는 영혼이나 자아, 인격이나 개체에 대한 관념(有身見; sakkaaya-di.t.thi)과 삼보에 대한 의심이라는 두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버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마음의 청정(心淸淨)을 얻었을 때, 그의 마음은 마음-몸의 과정의 참된 본질을 꿰뚫는 데 충분하게 예리해져 있습니다. 그때, 그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구별하게 되고,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독특한 특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입니다. 그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독특한 특성을 자각할 수 있고,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구별할 수 있을 때, 그는 유신견과 아견을 당분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서, 그는 유신견과 아견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그가 이 꿰뚫어 보는 앎을 체험하지 못했을 때, 유신견과 아견은 비록 강하지는 않더라도 다시 그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유신견은 오직, 첫 번째 단계의 깨달음인, 수타원도지를 얻었을 때, 뿌리뽑힙니다.

바라문교에서의 자아

우리는 유신견과 아견이라는 개념을 힌두교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힌두교 또는 바라문교에 의하면, 전 우주는 대범천(大梵天; Mahaabrahma)이 창조했다고 합니다. 대범천은 이쉬와라(Isvara), 파라마트마(Paramaatma), 프라자파티(Prajapati) 등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티(Pati)라는 말은 창조자 또는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프라자(Praja)는 피조물 또는 생명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만들어 냈기 때문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주인입니다.

파라마트마(Paramaatma)는 산스크리트어며, 힌두교의 용어입니다. 팔리어로는 파라마타(Patamatta)입니다. 파라마트마를 두 말로 분석하면, 파라마(Parama)와 아트마(Ātma)가 됩니다. '파라마'는 '가장 고귀한', '가장 성스러운'이라는 뜻이며, '아트마'는 영혼 또는 자아의 뜻입니다. 따라서 파라마트마는 가장 성스러운 영혼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위대한 자아, 크나큰 영혼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영혼은 세상과 생명 있는 존재들을 전부 만들어 낼만큼 큽니다. 이 세계의 조건이, 생명들이 살기에 충분해질 때, 그는 모든 존재 - 인간, 천신, 범천 그리고 동물 -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인간에게 아주 위험한 사자, 호랑이와 독사도 만들었습니다. 대범천 또는 파라마트마가 처음 생명을 창조했을 때, 피조물들은 죽은 시체와 같이 움직일 수도, 앉아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대범천은 이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각의 피조물 또는 존재에게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피조물들은 일어나서 움직이고, 서고 앉게 되었습니다. 바라문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작은 영혼이나 자아가 모든 존재들 안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혼은 명아(命我; Jiiva-atta)라고 불린다. 이것은 영속적이며, 파괴될 수 없으며,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심지어는 원자폭탄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범천 또는 프라자파티에 의해 지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몸이 해체될 때, 영혼은 몸이 해체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 몸을 떠나서 다른 몸으로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이 생에서의 자신의 업에 따라서, 더 낮거나 더 높은 세계에서 생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그 영혼이 이 생에서 선한 행위를 쌓았다면, 이 선한 행위는 좋은 업이므로, 이 선업에 의해 영혼은 보다 높은 존재 세계에 인도됩니다. 영혼이 다른 몸 속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그것을 윤회(reincarnation)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영원한 영혼, 명아, 자아는 다음 생에서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윤회의 굴레는 계속됩니다. 이것이 바라문교의 영혼에 대한 믿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라문교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이른바 자아, 영혼, 에고라고 하는, 영원한 실체가 있습니다.

아견이라고 알려져 있는, 영원한 실체, 자아 또는 에고에 대한 믿음이나 관념 때문에, 자연스런 과정의 참된 본질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불교에서의 자아

우리는 힌두교도는 아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강한 의미는 아니더라도, 영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우리는, 영혼이나 자아가 없다는 것 또는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의 영혼이 몸밖으로 빠져 나와서 그의 집이나, 자신의 시신이나 관 주의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지 않고, 우리의 선행을 죽은 이와 나누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우리 주위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다 하서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아견의 관념을 가지고 있고, 이 관념에 바탕 해서, 인격, 개체, 존재, 남자, 여자 등과 같은 또 다른 관념인 유신견(여기에서 유신(有身 ; sakkaaya)은 정신적·육체적 현상인 명색(名色 ; naama-ruupa)을 의미하고 견(見 ; di.t.thi)은 잘못된 또는 틀린 견해를 의미합니다.)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몸-마음의 과정에 대한 독특하고 일반적인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념을 갖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을 영원한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내가 내일 죽을 것인가 ?"라고 자문해 본다면, 그 질문에 감히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내일 죽을 것이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나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이 영원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의 마음-몸의 과정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과정의 생성과 소멸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생각을 고집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끊임없고, 순간적인 생성과 소멸을 본다면, 여러분은 그것들이 영원하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어떠한 정신적 육체적 과정도 단 1초 동안도 지속되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이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분은, 그것들의 무상한 본질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여러분이 법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있을 때에만, 여러분은 그것이 무상하다고 결론 내리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는 내일까지 살아있지 않을지도 몰라. 바로 이 순간 죽을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모든 현상은 무상하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생성과 소멸을 자각하지 못할 때, 그는 이 현상들을 영원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개체에 대한 관념은, 우리 내부의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견과 유신견은 동일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 이제 나는 나의 손을 들어올리려 한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나에게, 누가 손을 들어올리는 가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가 손을 들어올린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 한 비구입니까, 한 남자입니까, 살아있는 어떤 존재입니까 ? 만일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영원한 본질에 대해서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개체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인 두 과정은 변하기 쉽고, 생겨났다가는 사라져버리는 것들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을 인간, 존재, 개 또는. 동물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가 유신견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마음과 몸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거나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모든 행위 또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 알아차려야, 우리가 이 두 가지 과정을 자연스런 과정으로 자각할 수 있다고,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친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꿰뚫어 보는 앎을 고유한 특성(自性相; Sabhaava-lakkhana)에 대한 앎(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독특한 특성 또는 개별적인 특성에 대한 바른 이해)이라고 합니다. 이 꿰뚫어 보는 앎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아만 등과 같은 번뇌들의 주요한 원인인, 영혼이나 자아, 인간이나 존재에 대한 관념을 부수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관념이 모든 번뇌의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씨앗을 제거해버리면, 어떤 번뇌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괴로움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

유신견을 없애기 위해, 비구는 마음을 챙기고 편력하라.

(sakkaaya-di.t.thi pahanaya sato bhikkhu paribbaje) <역주 : SN, I. p. 13>

고 설한 이유입니다.

'유신견을 없애기 위해'(sakkaaya-di.t.thi pahanaya)라는 말은 영혼, 자아 또는 사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싸또(sato)는 마음챙김의 뜻이고, 비구는 수행승입니다. 현상에 마음 챙기고 있는 비구는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수행에 전력해야 합니다. 그가 이 유신견을 깨뜨릴 수 있을 때, 그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유신견은 모든 종류의 번뇌의 원인, 모든 번뇌의 씨앗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챙김 수행에 의해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이 유신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이 마음챙김 수행을 닦아서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 사두 ! 사두 !

(sadhu ! sadhu ! sadhu !)

부록 1 수행의 지침

도덕적 행위(戒)

도덕적 행위의 청정은, 수행자들이 수행의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조건입니다.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이루었을 때에만, 그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얽매임이 없어져서 쉽게 마음집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는 수행자는 8계를 지켜야 합니다.

1. 나는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2. 나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3. 나는 성적인 금욕을 깨뜨리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4.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5. 나는 증류되거나 발효된 술과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들을

취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6. 나는 때아닌 때에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7.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이런 것을 듣지도 보지도 않으며,

몸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꽃다발이나 향수, 화장품 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8. 나는 높고 사치스런 좌구나 침상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위빠사나의 의미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알아차림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빠사나(Vipassanaa)는, 위(vi)와 빠싸나(passanaa)라는 두 말로 되어 있습니다. 위(vi)는 여러 가지 즉, 세 가지 특성(三法印 ; 無常, 苦, 無我)을 의미합니다. 빠싸나(passanaa)는, 바른 이해 또는 마음과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 얻은 자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을 의미합니다.

마음 챙겨 알아차림

주의 깊고 밀착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알아차린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더욱 산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현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현재 이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하는 도중에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면, 마음은 미래에 가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생겨나는 그 순간에 관찰하는 것이, 이 수행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마음집중이 약할 때, '명칭을 붙이는 것'은 마음챙김의 벗입니다. 만일 명칭을 붙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대상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말은 필수적인 것은 아니나, 때로는 도움이 됩니다. 특히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 만일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명칭 붙이기를 그만 두지 마십시오.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밀착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들의 참된 본질을 자각해야 합니다.

좌선

좌선을 하려고 앉아 있을 때에는, 몸의 균형을 잘 잡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벽이나 다른 물건에 기대어 앉지 마십시오. 기대어 앉으면, 바른 노력(正精進)이 약화되어, 졸음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높거나 압축된 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게 됩니다. 이 자세도 졸음을 부릅니다. 사리풋타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는 좌선할 때, 아무 방석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좌선을 하기 전에, 1시간의 걷는 수행(行禪)을 해야합니다. (집중수행기간이 아닐 때에는 사정에 따라서 행선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행선에서 좌선으로 자세를 바꾸려할 때, 마음챙김과 마음집중이 흩뜨려져서는 안됩니다.

수행을 처음 할 때에는, 초심자는 무엇을 알아차려야 할지 혼동되기도 합니다. 수행자는 복부의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배가 불러올 때는 '일어남', 배가 꺼질 때는 '사라짐'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리라고 마하시 사야도는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대념처경}에서 네 요소(四大)에 대한 부분에 따른 수행법입니다. 복부의 움직임은 바람의 요소(風界)입니다.

각각의 요소는 개별적이고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의 요소(地界)는,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그 고유한 특성입니다.

물의 요소(水界)는, 유동성과 팽창성이 그 고유한 특성입니다.

불의 요소(火界)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그 고유한 특성입니다.

바람의 요소(風界)는, 움직임, 지탱해 주는 힘이 그 고유한 특성입니다.

만일 수행자가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겨서 자각할 때, 그는 바람의 요소의 참된 본질을 바르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으며,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없앨 수 있습니다.

복부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다면, 처음에는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해야합니다. 빨리 하거나 심호흡(단전호흡)을 하지 마십시오. 숨을 빠르게 하거나 심호흡을 하면, 지치게 될 것입니다. 가능한 한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십시오.

복부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명확해지면, 알아차림의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일어남, 일어남, 일어남', '사라짐, 사라짐, 사라짐' 하면서. 움직임이 빨라지면, 보통 때처럼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자는, 처음에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라고 지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에 애착해서는 안됩니다. 이 복부의 움직임은 유일한 대상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의 다양한 대상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소리가 들린다면, '들림'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많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충분히 마음 챙겨 알아차리고 난 후에 라야, 수행자는 일차적인 수행의 대상(즉, 일어남-사라짐)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일 일어남과 사라짐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 사이를 '앉음' 또는 '닿음'으로 채워야 합니다.*

<*역주 :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서, 호흡이 느려지고 안정됩니다. 그에 따라 복부의 움직임이 미세해져서, 일어남과 사라짐의 사이에 복부의 움직임이 정지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 때가 일어남과 사라짐 사이에 틈이 생긴 때입니다. 이 순간에는 알아차려야 할 일차적인 대상인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는 상태이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챙김을 놓쳐서 헤매이게 됩니다. 이 때는 자신의 앉아 있는 자세를 '앉음, 앉음' 하고 알아차리거나, 몸의 접촉 부분, 예컨대, 다리와 바닥의 닿은 부분이나 엉덩이와 바닥의 닿은 부분을 관찰하면서 '닿음, 닿음'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앉음'과 '닿음'에 대하여 알아차리다가 다시 호흡이 시작되어 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움직임이 발생하면, 재빨리 이 일차적인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긴다. '앉음'과 '닿음'은 시간이 허락되는 한, 한 가지만 하던지 두 가지를 병행하던지 합니다. 이때의 시간이란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이 잠시 멈춘 시간입니다.>

좌선을 하는 동안에는 눈을 뜨지 말라. 눈을 뜨면, (마음이 산란해져서) 마음집중이 깨집니다.

<역주 : 위빠사나 수행에서, 좌선할 때에는 눈은 감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아서 너무 졸릴 때에는 눈을 잠시 뜨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물론 이때에도 눈을 뜨려고 하는 의도에서 눈을 뜨는 동작에 마음챙김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1시간 동안의 좌선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앉아 있도록 하십시오.

자세는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역주 : 다리의 통증 때문에 자세를 바꾸려할 때는 바꾸려는 의도(정신적인 현상)에서부터 한 동작, 한 동작(육체적인 현상)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초보자들도, 최소한 1시간의 좌선에서 처음 30분은 자세를 바꾸거나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통증이 생기면 관찰하고, 통증은 통증으로 내버려두고 수행해야 합니다. 점차 앉는 자세가 익숙해지면 1시간의 좌선은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게 됩니다.>

걷는 수행(行禪)

진지하게 행선을 행하십시오. 행선만을 해서, 아라한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예로서, 부처님의 마지막 아라한 제자인 수밧다(Subhadda) 존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행선을 할 때에는 발에 주의를 모아야 합니다. 예리한 관찰로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왼발', '오른발' 하면서 한 쪽 발걸음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눈은 감지 말고 반개해서 4-5 걸음 앞을 바라보십시오.

고개는 너무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고개를 너무 숙이면, 곧 긴장감과 현기증이 일어나게 됩니다.

발을 보지 마십시오. 마음이 산만해집니다. 발의 움직임을 따라 마음 챙길 때, 발을 너무 높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알아차려야 하는 대상은 점차로 증가합니다. 즉, 한 번의 걸음에서 관찰되어야 하는 현상들이 점차 증가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듦', '나아감', '내려놓음'의 세 단계를 따라서, 한 걸음을 관찰하는데 10 분이 걸리기도 합니다. 마침내, 그 수는 더욱 증가해서, '의도함', '듦', '나아감', '내려놓음', '닿음', '눌림'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1시간 행선을 하는 동안에, 마음은 몇 번이나 헤매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행선을 하는 동안, 여기 저기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여기 저기 기웃거려 왔으며, 또 앞으로도 기웃거릴 것입니다. 만일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마음집중에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주위를 바라보려고 하는 '욕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헤매는 눈은 수행자에게는 아주 큰 골치 아픈 문젯거리입니다.

최소한 하루에 5-6 시간씩의 좌선과 행선을 해야 합니다.

일상의 행위에 대한 마음챙김

마음챙김은 붓다의 삶의 방식입니다. 일상의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자의 삶입니다. 일단, 수행자가 자신의 행위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삶을 잃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챙김(sati), 마음집중(samaadhi), 지혜(pa~n~naa)가 없기 때문에 그는 수행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 하나의, 모든 일상의 행위에 대해 마음 챙겨야 합니다.

만일 일상의 행위에 대해서 마음 챙길 수 없다면, 수행의 향상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일상의 행위를 알아차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챙김의 큰 공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마음챙김을 지니는 지속성이 필요합니다.

수행자의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satindriya)에는, 하루종일 지속적이고, 끊어짐이 없는 마음챙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으로부터 깊은 마음집중이 생깁니다. 깊은 마음집중이 있어야만, 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본래적인 본질을 자각할 수 있고, 이 자각에 의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속적이고,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다면, 매일 매일 발견해야할, 수많은 새로운 현상들이 존재합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해야할 일은 마음 챙기는 것밖에 없습니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수행자를,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환자에 비유했습니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 여러분의 마음은 집중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수행을 통해서 무엇인가 성취하고자 원한다면, 천천히 움직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선풍기가 빨리 돌아갈 때,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만일 천천히 돌아간다면, 그때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아주 바쁘게 일을 하는 사람들 틈에 있을 때, 여러분은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아주 힘있게 자신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행위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말하는 것은 수행의 향상을 이루는데 크나큰 장애입니다.

5분 동안 이야기하면, 수행자의 하루 동안의 마음집중이 깨져버립니다.

읽지도 말고, 외우지도 말고, 회상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의 수행의 향상에 장애입니다.

통증과 인내

통증은, 피할 수 없는 수행자의 벗입니다. 통증은 여러분을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통증은 통지 없이 여러분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친구여 제발 떠나다오' 하면서 외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일부러 다리의 통증을 부르기도 합니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참된 본질을 자각하기 위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통증은 열반에 이르는 문의 열쇠입니다.

마음집중이 잘되어 있을 때, 통증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은 복부의 '일어남', '사라짐'과 다름없는 자연적인 과정일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의 깊게 그것을 관찰하면, 그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서, 그것의 참된 본질을 발견할 것입니다.

통증이 생기면,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계속되면, 무시해버리십시오*.

<역주 : 좌선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처음 좌선을 할 때, 다리와 등에 심한 통증이 생겨납니다. 통증이 생겨나는 순간 이 통증을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려진 육체의 통증은 더욱 선명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점차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일정한 시간 동안 알아차려도 통증이 지속될 때에는 통증을 그냥 내버려 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통증을 무시해버리라는 말씀은 통증에 신경을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말입니다. 1시간 동안의 좌선에서 생긴 다리의 통증으로 관절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몸에 병이 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좌선의 경험이 있는 이라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앉는 자세가 안정되고 익숙해지면 통증은 점차 사라집니다.>

지속적인 마음챙김에서 생겨난, 깊은 마음집중에 의해서 통증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만일 걷는 동안에 강한 통증이 일어나면, 잠시 멈추고 그것을 관찰하십시오.

인내는 열반으로 인도하고, 인내하지 못함은 지옥으로 인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자극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참을성을 지니십시오.

누가 세상은 즐길만하다고 말했습니까 ?

정신적 감정적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

만일 여러분이 어떤 정신적 또는 감정적 상태를 알아차린다면, 아주 빠르게, 힘차게, 밀착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알아차리는 마음이 이어지고, 강해집니다. 그리고는 생각은 저절로 멈출 것입니다.

마치 막대기로 치는 것처럼, 빠르게 생각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또는,

'졸림, 졸림, 졸림' 또는,

'행복, 행복, 행복' 또는,

'슬픔, 슬픔, 슬픔'

다음과 같이 천천히 알아차리지 말고.

'생각함......., 생각함.......' 또는,

'졸림........, 졸림........'

만일 여러분이 헤매는 생각들을 알아차릴 수 없다면, 여러분은 마음집중을 이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여전히 헤매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여러분이 충분히 힘차게 알아차리지 않고 있음을 뜻할 뿐입니다. 이 능력은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의 내용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생각은 여전히 진행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 그 자체를 알아차리고 있다면, 그때, 생각은 멈출 것입니다.

생각이나 이론에 얽매여 애착하지 마십시오.

꿰뚫어 보는 앎은 깊은 마음집중과 함께 찾아옵니다. 하지만 논리적이나 철학적인 생각은 피상적인 마음집중과 함께 찾아옵니다.

마음집중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걱정은 마음을 산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분함은 보다 많은 힘을 불어넣음에 의해 극복될 수 있습니다. 명칭을 붙이며 알아차리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호기심이나 기대감은, 분명히 여러분의 향상을 지연시킵니다. 만일 이것들이 생기면, 그것들과 함께 지내지 말고, 그것들에게 예리한 알아차림을 주십시오.

졸림은 아주 빠르게 반복하면서, 힘차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역주 : 우 자나카 사야도가 말씀하시듯이 졸림은 수행자의 오래된 벗입니다. 수행을 하기 시작하면 졸림이 바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졸리움을 즐겨서는 수행에 향상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졸림은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정신적인 현상이지만, 정진에 힘을 불어넣어 마음챙김의 힘이 강해지면, 졸음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적이 몰래 잠입해 들어오는 것처럼 찾아오는 졸음은 정진과 마음챙김의 서치라이트로 바로 잡아내야 합니다.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는 2-3일이면 졸음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알아차리기 위한 힘은 항상 그곳에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그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한다는 점입니다. 정신 상태는 아주 중요합니다. 비관적으로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때, 모든 상황에 대해 만족하게 되고, 여러분들도 또한 덜 산만해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수행자가 새벽 3시에 눈을 떴다면, 그는 수행을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4시까지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바른 정신자세가 아닙니다.

만일 잠자리에서 깨어날 때, 졸리면, 벌떡 일어나서 걸어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다시 잠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집중수행에서는, 요기들의 일어나는 시간은 새벽 4시입니다.)

만일 졸음을 느낀다면, 햇빛 속을 빠르게 왕복하면서 거십시오.

인간에게는 아주 다양한 힘과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투해야합니다. 시도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충분한 노력을 쏟는다면, 여러분은 네 가지 도(道)와 과(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주 : 네 가지 도(道)와 과(果)란 예류(預流, 수타원), 일래(一來, 사타함), 불환(不還, 아나함), 아라한(阿羅漢)의 네 부류의 성인들의 도(道)와 과(果)를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의 목적은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와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하는 것입니다.>

일 주일 동안의 수행은 단지 배우는 과정일 뿐입니다. 실제적인 수행은, 오직 그 후에 시작됩니다.

수행은 시간과 장소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정진하도록 하십시오.

수행자의 다섯 기능(五根)

수행자는 강하고, 힘차며, 예리하고, 균형 있게, 이 다섯 기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믿음(信; saddha) -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확고하고 강한 믿음.

2. 정진(精進; viriya) -, 수행에서, 강하고 굽히지 않는 불굴의 노력.

3. 마음챙김(念; sati) - 한결같고 지속적인 마음챙김.

4. 마음집중(定; samaadhi) - 깊은 마음집중.

5. 지혜(慧; pa~n~naa) - 꿰뚫어 보는 앎, 꿰뚫는 지혜.

꿰뚫어 보는 앎을 얻기 위해서, 이 다섯 기능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은 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정진은 마음집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집중은 어떤 기능과도 균형을 이룰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집중은, 다른 네 기능이 제 각기 목적지에 이르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입니다.

수행의 점검 또는 보고

수행자들은 매일,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수행 지도법사에게 보고를 해서 수행의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그 날의 수행에서 경험한 내용을 보고하고 나면, 지도법사는 수행을 고쳐주고, 더 나아간 가르침을 주기도 하며, 더욱 향상하게끔 수행자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두 사람 사이의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합니다.

집중수행기간에는, 지도법사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각 그룹에게 서로 다른 시간대가 주어집니다.

수행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자기에게 배당된 시간 전에 점검 받는 방에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고 시간을 맞추는 것에 의해 수행에 방해받아서는 않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뒤에 들어와서 보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보고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수행자들이 많이 있는데 시간이 한정되어 있을 때에는 특히, 수행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려 깊게 행위 해야 합니다. 짧으면서도 핵심적인 보고를 하십시오.

(보고하는 것 때문에) 흥분하거나,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침착하고 마음을 열고 보고하십시오. 제대로 된 문장으로, 분명하게 들리도록 말하십시오. 말을 삼키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속으로 중얼거리지 마십시오.

법문은 주의해서 듣고, 그 가르침을 똑바로, 부지런히 따라서 수행하십시오.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을 받으면,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더라도 자신의 경험을 보고해야 합니다.

좌선이나 행선 뒤에 바로 짧은 메모를 적어두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수행을 하는 동안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는데 중점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마음집중을 방해할 것입니다.

보고하러 오고 가는 동안에도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부록 2 집중수행기간 일정표*

<역주 : 집중수행기간 동안의 일정은 각 수행센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유사합니다. 여기에 제시된 일정표는 우 자나카 사야도께서 지도하실 때의 일정표 중의 한 예입니다.>

오전

4시 -------------- 기상

4시30분 -------------- 행선

5시30분 -------------- 좌선*

6시30분 -------------- 행선

7시 -------------- 아침식사

8시 -------------- 행선

9시 -------------- 좌선

10시 -------------- 행선

11시 -------------- 점심식사

12시 -------------- 휴식

오후

1시 -------------- 좌선*

2시 -------------- 행선

3시 -------------- 좌선

4시 -------------- 행선

5시 -------------- 음료

5시30분 -------------- 행선

6시30분 -------------- 좌선

7시30분 -------------- 행선

8시 -------------- 법문

9시30분 -------------- 좌선

10시30분 -------------- 자율정진

* 집중수행기간의 후반부에 실시되는, 의무적인 그룹 수행 모임.

부록 3 자비관

Chammyay Meditation Center

Meditation on Loving-kindness <Mettaa Bhaavanaa>

May all sentient beings be well and happy, free from suffering and distress.

May all have smooth going in every way.

May all sentient beings be free from harm and antagonism, devoid of worry and lamentation.

May all enjoy real happiness and calm.

May all sentient beings be free from anger, conceit, and aggressiveness, loath to harm or kill.

May all be pure at heart, invested only with Loving-kindness and benevolence.

May all sentient beings be wont to eschew deception and foxy ways, forgoing backbiting and harsh speech, threatening and provoking words, and empty and not beneficial talk.

May one's speech be true, beneficial, and full of essence and love, again sweetly rendered with Loving-kindness.

May all sentient beings check themselves from taking other's property, or from destroying other's well-being, or holding wrong view.

Free of wrong view, May all keep down avarice and anger to bring about peace among all.

May all sentient beings enjoy abundance, yet willing to give in charity, and may they keep sabbath and moral precepts, all the while being able to exercise control in their actions.

May they also practice concentration and meditation, thus with peace at heart, may all be healthy and happy.

May all wishes be fulfilled.

Sermon for Remembrance of Loving-kindness

(1) Bodily Loving-kindness

Remember always act with loving-kindness.

Remember especially the virtue of your benefactors ; You'll invite from all love, respect and friendship. Keeping solidarity, same view and unity, every activity of yours will be successful, and make a peaceful world.

(2) Verbal Loving-kindness

Remember always to speak with Loving-kindness ; All are glad to hear of sweet words mean to benefit others.

Remember especially the virtue of your benefactors ; You'll invite from all love, respect and friendship. Keeping solidarity, same view and unity, every activity of yours will be successful, and make a peaceful world.

(3) Mental Loving-kindness

Remember always to keep your mind filled with Loving-kindness.

Remember especially the virtue of your benefactors ; You'll invite from all love, respect and friendship. Keeping solidarity, same view and unity, every activity of yours will be successful, and make a peaceful world.

Ven. Chammyay Sayadaw.

찬매 수행센터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한 기원

<자비관>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안락하고 행복하며, 괴로움과 재난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해악(害惡)과 미워하는 마음,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즐기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분노와 기만, 남을 해치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남에서 해를 끼치고 살해하는

일에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자애와 선행에 마음을 기울이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남을 속이는 일과 야비한 마음씀을 삼가하기를 기원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

거친 말, 위협하는 말, 화나게 하는 말, 빈 말, 쓸모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삼가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진실 되고, 유익하며, 의미 있고, 사랑스러우며, 자애로움을 표현하는, 듣기 좋은 말을 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다른 이의 재산을 훔치는 일, 남의 행복을 파괴하는 일, 잘못된 생각을 지니는 일을 삼가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잘못된 생각, 탐욕, 성내는 일에서 벗어나, 모두 함께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풍요로우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일에 솔선하고, 제일(齊日)과 계율을 잘 지키며, 자신의 행위를 올바르게 제어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이들이 마음집중(定)과 지혜(慧)를 닦아, 마음이 평화롭고, 심신이 건강하며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모든 기원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한 기원(자비관)을 마음으로 다짐하기 위한 가르침

(1) 몸으로 실천하는 자비관

항상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행동하리라 마음으로 다짐하십시오.

특히 자비관을 실천함으로서 여러분이 얻게되는 다음과 같은 이익을 염두에 두십시오.

자비관을 실천하면, 사랑과 존경과 우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속을 다지게 되고 같은 생각을 지니게 되며,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동은 성공을 하게되며,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2) 말로 실천하는 자비관

항상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지니고 말하리라 마음으로 다짐하십시오.

다른 이들이 듣기 좋은 말과 이로운 말을 하도록 하십시오.

특히 자비관을 실천함으로서 여러분이 얻게되는 다음과 같은 이익을 염두에 두십시오.

자비관을 실천하면, 사랑과 존경과 우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속을 다지게 되고 같은 생각을 지니게 되며,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동은 성공을 하게되며,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3) 마음으로 실천하는 자비관

항상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이 온 마음에 가득하도록 하십시오.

특히 자비관을 실천함으로서 여러분이 얻게되는 다음과 같은 이익을 염두에 두십시오.

자비관을 실천하면, 사랑과 존경과 우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속을 다지게 되고 같은 생각을 지니게 되며,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동은 성공을 하게되며,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마음챙김에 의거한 위빠사나수행

(Satipatthaana Vipassanaa Bhaavanaa)

1. 수행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작업.

특히 여기에서 사용되는 수행이라는 용어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마음챙김 수행 또는 마음챙김에 의거한 위빠사나 수행, 즉 간단히 말하면 위빠싸나 수행을 의미함을 미리 밝혀 둔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말하는 위빠싸나 수행의 방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을 기본 교제로 하고, 『청정도론(淸淨道論)』을 보조로 하며, 구체적인 수행의 지침은 현대 미얀마의 선지식 마하시 사야도(1908-1982)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그 분의 제자들(우 판디타 사야도, 우 자나카 사야도, 우 실라난다 사야도, 우 쿤달라 사야도 등)의 가르침을 참조로 하면서 정리해 본 것이다.

2. 왜 수행을 하는가.

청정과 지혜를 얻어 궁극의 행복인 열반을 이루기 위하여.

3.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궁극적인 마음의 평온과 안락인 열반. 시시한 쾌락을 버림으로써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지혜로운 이는 보다 큰 기쁨을 위해 시시한 쾌락을 기꺼이 버리리라. <Dhp 290.>

4. 마음의 청정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번뇌[五蓋], 마음의 문제(심리적인 갈등, 노이로제, 콤플렉스 등)를 가라앉힌 상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 마음집중[禪定]의 힘으로 마음의 청정을 이룸.

5. 지혜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란 마음과 몸[名色; 五蘊, 十二處]의 정체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마음과 몸은 항상 변하며[無常],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苦], 영원한 실체가 없다[無我]는 사실을 수행의 힘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말한다. 마음챙김[正念]에 의거한 위빠싸나 수행으로 지혜를 얻음.

6.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

수행에 임하는 수행자는 스스로 자신의 수행의 동기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기본적으로 불.법.승의 삼보(三寶)에 대한 신심과 수행 방법에 대한 신심, 그리고 수행을 하려고 하는 열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심이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구도의 마음, 자유 - 칼라마경』참조, 서울: 고요한소리), 처음에는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법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의 마음을 지니고 수행을 시작할 수 있으면 된다. 수행이 진전되고 스스로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체험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약하던 신심은 확고한 확신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언제나 제자들이 스스로 확인하도록 길을 제시하셨다. 이 길은 스스로 가야 하는 길이다. 열심히 그 길을 감으로써 얻어지게 되는 확신은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신의 재산이 될 것이다. 수행을 해보려고 일으킨 마음은 귀한 기회를 만든 것이다. 기회는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방법에 의해서 현실화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살아나는 것임을 명심하며 부처님이 보증한 수행의 좋은 결실인 최상의 행복을 스스로 거두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어느 누구의 말보다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확인된 진실만이 자신의 참다운 의지처가 될 것이다.

두 가지 양식의 수행

수행에는 두 가지의 양식이 있다. 일정 기간 동안 일정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집중적인 수행과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해 나가는 수행이 그 두 가지이다. 집중적인 수행은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이므로 효과적으로 수행법을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수행의 초보자는 일정 기간 동안의 집중수행을 통해서 수행법을 익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중수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에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을 할애해서 수행을 할 수 있다. 수행의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고, 수행할 열의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수행은 가능할 것이다. 집중수행을 통해서 얻은 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살려 가면서 활용할 때, 수행의 참된 의미가 살아날 것이다.

1.1 일정 기간 동안의 집중적인 수행 - 수련회, 안거.

생활 규범[戒] 마음집중[定] 지혜[慧]의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집중적으로 마음의 향상을 위해서 노력하는 수행.

1.2 일상 생활에서의 수행. - 가정과 일상의 사회 활동에서의 수행.

마음챙김을 기본으로 하여 질서 있는 생활을 해 나가며, 시간을 정해서 틈틈이 마음집중 수행을 해 나간다. 세상일에 부딪힐 때,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미리 미리 갖추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네 가지 고귀한 마음가짐[四無量心; 慈悲喜捨]을 정해진 시간에 닦는 것은 마음의 평온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자관(慈觀)의 실천을 바탕으로 항상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는다.

집중적인 수행을 위한 7 가지 조건

1.적절한 거주처 - 주거 환경

2.가까운 탁발처 - 음식의 조달

3.바른 언어생활 - 법과 열반의 성취에 도움이 되는 말과 성스러운 침묵.

4.좋은 벗, 도반, 선지식과 함께 지낼 것. - 잘 다스려진 자기 자신은 좋은 스승.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자기를 잘 다룰 때, 얻기 힘든 주인을 얻은 것이다. <법구경>}

5.적절한 음식 - 건강의 유지

6.적절한 기후

7.적절한 자세 - 좌선과 행선을 할 때, 자신에게 가장 좋은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낼 것. 좌선의 경우, 중요한 것은 등을 바로 하고 앉는 것.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는 자신의 몸의 조건에 맞게 시도할 것.

수행의 초심자와 경험자

초심자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붓다의 말씀을 의지하고, 수행을 잘 지도해 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법을 지도 받되, 수행은 자신의 힘으로 해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스스로 마음이 청정해지고 지혜가 계발되는 방법을 자신의 몸으로 익혀야 한다. 수행은 실제적인 '길'이므로,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경험을 디딤돌로 해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경험자의 경우는 이미 배워 익힌 방법을 항상 활용해 가면서 물러남이 없는 정진을 해 나갈 것. 이 생에서 聖人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 노력을 더해 가며, 자신의 체험을 늘 돌아보며, 점검해 나가야 한다.

마음챙김 수행을 위한 제언

위빠사나 수행의 기반이며, 때로는 위빠사나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하는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 (복부의 움직임, 가려움, 통증, 저림, 뻣뻣함 등)을 있는 그대로 단순한 주위 집중(bare attention)을 통해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즉, 현재 분명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심신의 모든 현상을 좋거나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면서, 경험되는 그대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챙김[正念]은, 파악된 현상에 대한 분명한 앎[正知]과 항상 짝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은 단순한 작업이지만 쉽지는 않다. 끊임없는 마음챙김을 지니기 위해서는 강한 열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마음챙김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숨을 쉬고 있듯이, (호흡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이므로, 마음챙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마음챙김 수행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수행을 하려는 열의와 노력과 바른 방법이다. 왜 수행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이 있고, 수행에의 열의가 있는 사람이 바른 방법으로 쉬지 않고 노력을 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스스로 얻게 될 것이다. 마음챙김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곧 육체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몸은 익숙하지 않은 자세 때문에 여기 저기서 통증이 생겨나며, 마음은 쉴새없이 피어나는 생각들로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 때문에 다리가 아프고, 일상생활에서의 의식의 흐름이 수행을 시작하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몸의 통증은 4-5일 정도 지나면 조금씩 덜어지게 되므로 그리 걱정할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을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므로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들을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 마음챙김 수행의 핵심이다. 좋은 생각도 붙들지 말고 나쁜 생각도 없애려 하지 말라. 좋은 생각도 망상도 수행자에게는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생겨나는 현상을 막을 수는 없다. 단지 생겨난 현상을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점차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수행은 향상되어 가는 것이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앎이 예리해지고 정확해지면, 마음집중(三昧)이 이루어지고 마음집중에서 현상들에 대한 올바른 앎(지혜)이 생겨난다. 마음집중과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마음에서는 번뇌, 갈등, 불안, 우울 등의 부정적인 요소들이 제거되어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 때가 되면 더욱 수행을 가속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며, 수행 자체가 행복과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게 해준다. 이는 깨달음의 7가지 요인(七覺支)이 경험되는 때이다. 하지만 좋은 현상들이 경험되더라도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쉬지 말며 최종 목표에 이를 때까지 마음챙김을 지녀야 한다. 마음챙김의 역할 마음챙김은 일종의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을 한다. 이 문지기가 가려내는 적은 탐진치(貪瞋癡)가 근본이며, 이 적들에 대한 각각의 대치법의 근본에는 마음챙김(念; sati)이 항상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독특한 적들을 막아내는 힘이 약하다. 자신이 어떤 적들에 대해서 약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여섯 부류의 인간의 성향*은 자신의 성향과 수행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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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부류의 인간의 성향은 각각의 성향에 맞는 수행의 주제와 함께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성향(性向)     수행(修行)의 주제(業處)

(1)탐행貪行(raaga-cariyaa;貪欲이 많은 성향)  十不淨·身至念

(2)진행瞋行(dosa-;화내기 쉬운 성향) 四梵住·靑遍·黃遍·赤遍·白遍

(3)치행痴行(moha-;우둔한 성향)   出入息念

(4)신행信行(saddhaa;-;신앙이 깊은 성향) 六隨念(佛·法·僧·戒·捨·天)

(5)각행覺行(buddhi-;지혜가 날카로운 성향) 死隨念·寂止隨念·界差別·食厭想

(6)심행尋行(vitakka-;사변적인 성향)  出入息念 (Vism 114-5)

<身至念과 界差別은 위빠싸나 수행에 직접사용>

- 마음챙김은 마음에 발생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밀착해서 보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보는 것.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 현상들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얻어지는 것이 지혜이다. 지혜에 의해 번뇌의 적을 다스린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 (四念處)

위빠싸나 수행을 위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경전에는 몸, 느낌, 마음, 법[身受心法]의 네 가지가 설해져 있다. 네 가지 대상은 간단하게 육체적인 현상[色; ruupa]과 정신적인 현상[名; naama]으로 분류된다. -------- 마음챙김의 네 가지 대상 (四念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대념처경』번역을 참조하십시오. --------

1. 身念處

14 가지 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육체와 그 동작(호흡 행 주 좌 와) 및 부정관(不淨觀)을 주제로 한 마음챙김. (1)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2)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

(3)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행동;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돌아올 때,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돌아볼 때,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 (탁발을 하기 위해서) 가사(승복)를 수하고(옷을 입고), 발우를 들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대소변을 볼 때, 가고, 서고, 앉을 때,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4)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 신체의 31(또는 32)가지 부분에 대한 상기(想起).

(5)네 가지 요소 -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四大; 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 가운데 바람의 요소가 마하시 위빠싸나 수행에서 일차적인 알아차림의 대상> (6-14)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 - 현재 이 수행은 시행되지 않고 있음

2.受念處

1 가지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정신적인 현상]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세 가지 육체적 정신적인 느낌[感受]에 대한 마음챙김.

3.心念處

1 가지 마음의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정신적인 현상] 8쌍 16 가지.

(1)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

(2)성내는 마음[有瞋心],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

(3)어리석은 마음[有癡心],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

(4)침체된 마음, 산만한 마음.

(5)(선정 수행으로) 커진 마음[大心],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

(6)(色界禪과 無色界禪 수행이)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된 마음. (7)(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된 마음.

(8)(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解脫心],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있는 그대로) 안다.

----------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의식의 순간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사소한 마음의 변화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는 수행 중의 수행자의 마음 또는 의식의 순간들을 가리키고 있다.

4.法念處

5 가지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

(1) 다섯 가지 덮개 [五蓋: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우울, 회의적 의심]

(2)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 [五蘊:色受想行識]

(3) 인식기관과 인식 대상 [十二處: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4) 일곱가지 깨달음의 요소 [七覺支: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5)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四聖諦:苦集滅道] 법에 대한 마음챙김은 법에 대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즉, 교리적으로 법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수행의 일차적인 주제와 수행 도중에 생기는 장애, 그리고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심신의 상태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등이 제시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법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하더라도 일차적인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은 오온(五蘊) 가운데 육체적, 물질적인 현상인 색온(色蘊)이다. 육체적, 물질적인 현상인 색온(色蘊)은 다름 아닌 신념처(身念處)의 대상이며, 십이처(十二處)의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과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다. 다섯 가지 덮개[五蓋]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곧 부딪히는 장애이다. 감각적인 욕망과 분노의 마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 속에서 부침하며, 좌선할 때의 혼침과 졸음은 수행자들의 오래된 벗처럼 슬며시 찾아온다. 마음은 들떠서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과거의 잘못이 마음에 떠오르며 회한에 싸이기도 한다. 수행이 잘 진전되지 않을 때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와 수행법 또는 지도 법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장애가 나타나면 즉시 알아차린 후,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마음을 빨리 가져가야 한다. 마음챙김의 힘이 강해지면서, 점차로 장애들은 극복되기 시작한다. 다섯 가지 덮개를 극복하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며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마음챙김[念覺支]이 더욱 예리해지고, 현상에 대한 이해[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精進覺支]. 마음에서 희열을 맛보기도 하며[喜覺支], 마음과 몸은 편안해지고 안정된다[輕安覺支]. 희열을 맛보며 안정된 마음은 더욱 집중을 이루게 되며[定覺支],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평온이 유지된다[捨覺支]. 이처럼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될 때,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수행의 핵심은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들도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경험되면 바로 알아차리고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이론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이해되게 된다.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苦滅道聖諦]가 체험적으로 파악되면서 성인의 도과(道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수행의 실제

본격적인 좌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경직되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고 민첩하게 해주며,

정진에 힘을 불어넣기 위한 예비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먼저 삼배를 하면서 간절하게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붓담 사라남 갓차미’

‘담맘 사라남 갓차미’

‘상감 사라남 갓차미'

저는 부처님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저는 가르침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저는 스님들을 피난처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자관(慈觀)을 한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관을 마친 후,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관하며[死隨觀], 굳은 결의로 수행에 임할 마음을 일으킨다.

‘이 목숨 언제 끊어질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단 하나의 현상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리라’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호흡에 동반되는 복부의 움직임[風界; 바람의 요소]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알아차려 나간다.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네 가지 대상 가운데에서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은 자신의 육체와 그 동작이다. 즉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이 마음챙김을 닦는 이들에게 있어서 수행의 첫 걸음이 된다.

육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제반 현상들에 마음을 챙기면서 그 육체적인 현상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느낌을 포착해 가면서 수행은 자연스럽게 네 가지 대상(몸, 느낌, 마음의 상태, 법) 전체로 확산되어 가게 된다.

신념처를 마음챙김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는 이유는,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보다 거칠어서 알아차리기가 쉽고, 변화도 더디기 때문에 마음집중[禪定] 수행의 기초가 없는 초보자들이 마음을 집중하는 데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단계 -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 수행에서의 마음챙김의 일차적인 대상과 보고의 내용

좌선의 경우

앉는 자세는 반가부좌나 결가부좌 어느 쪽도 좋음. 여러 가지 앉는 방법을 시도해 보아 가장 편하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세를 스스로 찾아 익힌다. 주의해야 할 점은 허리를 바르게 펴 주는 것이다.

좌선을 처음 하거나 오랜만에 하는 이들은 누구나 다리와 등에서 통증을 느낀다. 앉는 자세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리의 통증은 참아 내기보다는 포기하는 것이 낳다. 자세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자세를 바꾸어도 통증은 여전히 생기므로.

호흡은 자연스럽게 한다. 단전호흡이나 특별한 호흡법은 위빠싸나 수행과는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호흡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

마음챙김의 순서와 보고 내용

1.자연스러운 들숨과 날숨에 동반되는 복부(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둘 것.

2.들숨에 따라 복부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릴 것.

3.날숨에 따라 복부가 꺼지면, '사라짐' 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차릴 것.

4.복부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수반되어 생겨나는 복부의 감각들을 주의 깊게 살필 것.

5.어떠한 감각들이 있었는가 기록해 두었다가 두드러진 현상들을 간단, 명료하게 보고할 것.

6.복부의 일어남.사라짐에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리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어떤 생각이나 몸의 느낌들이 생겨나면,

그 순간 파악 할 것. 파악한 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보고할 것.

행선[걷는 수행]의 경우 -

1.초보자들은 너무 빨리 걷거나 너무 느리게 걷지 말고 천천히 조금 느린 속도로 걷는다.

2.적당한 거리(10-20미터)를 왕복한다.

3.마음챙김의 순서 - 처음에 걸으려고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여 주요 동작들에 마음을 챙긴다.

2 단계의 알아차림 :

좌선에서 행선으로 바꿀 때, 처음의 5분 정도는 굳어 있는 다리를 풀어 주기 위해서 보통의 걸음으로 걸으며, '왼발','오른발'하며 각 걸음을 알아차린다.

3 단계의 알아차림 :

다리의 근육이 풀리면 걷는 속도를 느리게 하여 움직이고 있는 다리 동작의 각 단계를

'들음', '나아감', '놓음'이라는 3단계의 동작으로 나누어 알아차린다.

보다 느린 동작의 알아차림 :

마음챙김이 향상됨에 따라 걷는 동작의 각 단계가 더욱 세분된다.

5 단계 이상으로 세분되면서는 순간 순간의 움직이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시켜 알아차린다.

4.이처럼 걸으면서 알아차려야 하는 현상은 발바닥에서 무릎 아랫부분의 다리의 감각들이다.

5.걷는 동작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제반 감각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어느 순간에 어떤 감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알아차려 보고할 것.

기타 동작을 할 경우

(1)일상의 행동에 대한 마음챙김 - ‘분명한 앎[正知]’의 적용

좌선에서 행선으로 또는 행선에서 좌선으로 자세를 바꿀 때에도 마음챙김을 놓아서는 안 된다.

자세를 바꾸려는 의도를 먼저 알아차리고, 천천히 움직이며 주요 동작들을 알아차린다.

식사 세면 목욕 등의 여타의 동작들과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옮겨가는 때의 마음의 상태(의도)와 몸의 움직임도 놓치지 말고 알아차릴 것.

일상적인 행동을 할 때에도 마음챙김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음챙김은 잠에서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끊어짐 없이 이어져야 한다.

일상적인 동작을 할 경우에는 가장 두드러진 동작을 알아차린다.

밥 먹을 때에는 손의 동작에서 음식을 씹는 동작, 삼키는 동작 등으로 순간 순간의 두드러진 동작이 마음챙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수행의 핵심은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을 지니는 일.

즉 한 순간의 放心도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일이다.

(2)바른 언어생활

집중수행 기간 중에 법문을 듣거나 점검 때를 제외하고는 침묵(고귀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 활동은 마음을 집중시키는데 장애가 되므로 묵언하면서 오직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 철저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수행 중에는 법에 대한 언어와 고귀한 침묵이 올바른 언어생활[正語]이다.

(3)수행의 주대상 -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

타인의 행동이나 말은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이 아니므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 몰두해야 한다.

귀중한 시간을 틈내서 가지게 된 길지 않은 집중수행이므로 타인의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타인의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위 하여야 한다.

특히 남에게 말을 거는 일은 가장 삼가야 한다.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의 중요성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이 발생하는 것은 느낌에 의해서이므로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은 중요하다.

쉴새없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느낌에 의해서 생기는 번뇌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다스려야 한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는 좋은 느낌보다는 아프고, 싫은 느낌이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특히, 좌선할 때에는 다리와 등에서 통증을 느끼게 되고, 더위와 가려움 등의 싫은 느낌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면 ‘아픔’,‘아픔’,‘가려움’,‘가려움’하면서 알아차린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사라지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한 동안 지속되는 느낌들도 있다.

지속되는 느낌들에 대해서는 한 두 번 알아차린 후에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권한다.

여러 가지 느낌들이 동일한 강도로 일어날 때에는 스스로 선택해서 알아차리면 된다.

앉는 자세가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다리와 등의 통증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

조금 통증을 느낀다고 자세를 바꾼다면 마음집중이 향상되지 않는다.

너무 통증이 심해져서 마음챙김 자체에 장애가 될 때에는 자세를 바꾸되,

자세를 바꾸는 과정의 모든 동작을 철저히 알아차리면서 바꾼다.

마음챙김은 사소한 동작에도 항상 밀착해서 동반되어야 한다.

인식과 느낌과 번뇌의 발생 과정

1.감각기관[六根]과 감각대상[六境]에 의해서 인식[六識]이 발생한다.

2.위의 세 가지가 어우러진 것이 접촉[六觸]이다.

3.접촉에 의해서 싫거나[苦], 좋거나[樂], 무덤덤한[不苦不樂] 느낌[受]이 생겨남.

4.마음챙김이 없을 때, 괴로운 느낌에서는 성냄[진심, 瞋心]이, 좋은 느낌에서는 탐욕[탐심, 貪心]이,

무덤덤한 느낌에서는 어리석음[치심, 癡心)이 생겨난다.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탐진치의 번뇌가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것이 문지기 또는 방패로서의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문지기가 없으면, 탐진치의 번뇌들이 마음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된다.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제시된 마음챙김 수행의 7 가지 이익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은 다음의 7 가지 이익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길(혼자서 가는 길, 유일한 길)이다.

(1)마음의 청정 - 번뇌의 제거,

(2)슬픔과 근심의 극복,

(3)비탄의 극복,

(4)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5)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6)네 가지의 도(道)와 과(果)의 성취,

(7)열반의 성취.

수행자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사마타 행자와 위빠사나 행자이다.

사마타 행자(行者)란 사선(四禪) 또는 팔선(八禪)의 마음집중을 먼저 닦아, 완전한 마음집중[安止定]의 힘으로 다섯 가지 덮개를 억누른 후,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이다.

위빠사나 행자(行者)는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이나, 40 가지 선정 수행의 주제 가운데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관찰[四界差別]에 의해서 특별한 마음집중 수행이 없이 처음부터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위빠사나 행자는 완전한 마음집중이 아니라 순간적인 마음집중[刹那定]에 의해 다섯 가지 덮개를 억누르며, 수행을 해 나간다.

위빠사나 수행의 기반이 되는 마음집중은 따라서 찰나정임을 알 수 있다.

마음집중[禪定, 止, samatha 사마타],

지혜[智慧, 觀, vipassana 위빠사나],

마음챙김[念, sati 싸띠]

마음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如實하게] 보는 지혜는 생기지 않는다.

마음챙김은 마음집중과 지혜의 공통되는 기반이다.

마음집중은 번뇌를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지혜는 번뇌를 잘라 내버린다.

수행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번뇌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번뇌에 대한 대치법은 간단하다.

어떠한 번뇌가 생겨나도 생겨나는 그 순간에 즉각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방패로 모든 번뇌를 대처한다는 의미이다.

끊어짐이 없는 마음챙김만이 번뇌를 막아낼 수 있는 것이다.

번뇌가 생기면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알아차림을 지니려 해야 한다.

수행의 초보 단계에서는 번뇌의 힘이 강하고 마음챙김이 약하므로 수행 자체가 쉽사리 진행되지 않는다.

무리하게 번뇌와 정면으로 맞부딪히려하지 말고 마음챙김을 지니려고 노력하라.

마음챙김이 강해질수록 번뇌의 거센 물결은 점차 가라앉게 될 것이다.

다음에 제시되는 번뇌와 대치법은 경전과 주석문헌을 참고로 하여 정리한 것이다.

번뇌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조언이므로 잘 새겨서 기억해 두면 좋을 것이다.

1. 다섯 가지 덮개[五蓋]와 대치법

{中部『念處經』주석; MN-a I, 281-6 = 長部 『大念處經』주석 : DN-a III, 778-82.}

(1)감각적인 욕망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부정관을 할 것. (不淨相의 획득; asubbha-nimittassa uggaho)

②부정관에 전념할 것. (부정관 수행에의 노력; asubbha- bhaavaaanuyogo)

③감각기관을 잘 제어할 것. (감각기관의 보호; indriyesu guttadvaarataa)

④음식에 대해서 소중한 생각을 지니고 양을 조절할 것. 식사의 양을 알 것; bhojane matt~n~nutaa)

⑤도심이 굳은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aa.na-mittataa)

⑥감각적 욕망에 대한 말을 피하고 욕망을 제어하는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aayakathaa)

(2)분노[惡意]를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자관(慈觀)을 닦을 것.

(慈相의 획득; mettaanimittassa uggaho)

②자관(慈觀)에 전념 할 것.

(慈觀 수행에의 노력; mettaabhaavanaanuyogo)

③업은 자신의 것임을 생각할 것.

(자신이 지은 업의 자성을 관찰; kammassakataapaccavekkha.naa)

④자관의 좋은 점과 분노의 해로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

(관찰을 많이 닦을 것; patisankhaanabahuliikataa)

⑤분노를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aa.na-mittataa)

⑥자관의 이로움과 분노의 불이익에 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aayakathaa)

(3)혼침과 졸음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혼침과 졸음의 원인이 과식에 있음을 알 것.

(과식에 대한 相의 획득; atibhojane nimittaggaaho)

②자세를 바꿀 것.

(威儀의 전환; iriyaapatha-samparivattanataa)

③광명상(光明想)을 닦을 것.

(광명상의 사유; aalokasa~n~naa-manasikaaro)

④지붕이 없는 곳에서 수행할 것.

(露地에서 머물 것; abbhokaasavaaso)

⑤잠자기를 즐기지 않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aana-mittataa)

⑥수면의 불이익과 깨어 있음의 이로움에 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aayakathaa)

{수행 도중 졸음에 시달리던 목갈라나 존자에게 부처님이 일러주신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

<AN IV, 85-91, 增支部, 七集, 第六 無記品, 58經>

① 졸음의 원인이 되는 생각들을 떨쳐 버릴 것.

② 이전에 들은 가르침(法)을 상기할 것.

③ 가르침을 자세하게 반복해서 생각하며 외울 것.

④ 양 귓불을 잡아당기고 팔 다리를 문지를 것.

⑤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눈을 씻을 것.

⑥ 광명상(光明想)에 주의를 기울일 것.

⑦ 경행(걷는 수행)을 할 것.

⑧ 사자와 같이 누워서 쉬되 일어날 시간을 정하고 잠에 들 것}

(4)들뜸과 우울(회한)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aa)

②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돼는 일을 두루 물을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aa)

③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n~nutaa)

④계를 잘 이해하고 지키는 연장자[長老]와 함께 지낼 것.

(老長老를 가까이 모실 것; vuddhasevitaa)

⑤들뜸과 우울을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aa.na-mittataa)

⑥들뜸과 우울의 해로움과 마음의 고요함의 이로움에 관한 적절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aayakathaa)

(5)회의적 의심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aa)

②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이 있으면 질문을 하여 의심을 풀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aa)

③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n~nutaa)

④삼보의 진실함에 대한 믿음을 기를 것.

(신심[勝解]을 많이 닦을 것; adhimokkhabahulataa)

⑤삼보에 대한 신심이 지극한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aa.na- mittataa)

⑥의심의 해로움과 의심을 없애는 일의 이로움에 대한 적적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aayakathaa)

<다섯 가지 덮개와 대치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 (서울: 고요한소리, 1988) 참조.>

2. 마라[魔]의 열 가지 군대

{『숫타니파타』「大品」,「정진경」Padhaana-sutta, Sn 436-8. 마라[魔]의 열 가지 군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U Pandita Sayadaw, In this very Life; The Liberation Teachings of the Buddha, pp.63-95 참조. }

①감각적 쾌락; kaama.

②불쾌[憂愁]; arati.

③배고픔과 목마름[飢渴]; khuppipaasaa.

④갈망[渴愛]; ta.nhaa.

⑤혼침(昏沈)과 졸음[睡眠]; thiina-middha.

⑥공포; aabhiiruu.

⑦회의적 의심[疑]; vicikicchaa.

⑧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僞善]과 고집; makkho, thambho.

⑨이익, 칭찬, 존경받음, 잘못 얻은 명성; laabho, siloko, sakkaaro, micchaaladdho yaso.

⑩자신에 대한 칭찬과 타인에 대한 비방; attaanam samukkamse pare avajaanati.

3. 10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十觀隨染]

10 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十觀隨染]는 모두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에게만 생기는 번뇌이다. (Vism 633-8)

①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하기도 하고[光明 ochaasa],

②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듯이 이해되기도 하며[知 ~naa.na],

③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기기도 하고[喜 piiti],

④몸과 마음은 아주 안정되어 편안해지며[輕安 passaddhi],

⑤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끼기도 하며[樂 sukha],

⑥강한 신심이 생겨나기도 하고[勝解 adhimokkha],

⑦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하며[努力 paggaho],

⑧흔들림 없는 마음챙김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기도 하고[現起 upa.t.thaana],

⑨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은 더욱더 무덤덤해지며[捨 upekkhaa],

⑩이러한 제 현상들에 대하에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nikanti].

光明·知·喜·輕安·樂는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다.

勝解는 강한 믿음이며, 노력은 정진(viriya)을 말한다.

現起는 마음챙김[念, sati]이다. 위빠사나와 관련되어 있는 흔들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생긴다.

捨는 위빠사나의 捨이다. 이 捨가 생기면, 모든 현상[一切行]에 대하여 탐착과 싫어함을 떠난 중간의 입장이 된다(majjhattabhuutaa).

마지막의 욕구는,光明 등에 의해 장엄된 위빠사나에 대해서 집착을 일으켜, 미세하며, 고요한 형태를 지닌 欲求를 말한다.

이렇게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가 생길 때, '나는 道를 얻었다. 나는 果를 얻었다.'라고 도가 아닌 것[非道]을 道라고 집착하며, 깨달음이 아닌 것[非果]을 깨달음[果]이라고 집착한다. 

따라서 1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견해의 집착[見執, di.t.thigaaha], 나라고 하는 집착[慢執, maanagaaha], 더욱 갈망하는 집착[愛執, ta.nhaagaaha]이 생겨나서 3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三十觀隨染]가 된다.

이 30가지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 대해서, 이것들은 無常하며, 만들어진 것들[有爲]이며,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緣已生]이며,

소멸해 버리는 현상[滅盡法]이며,사라져 버리는 현상[消滅法]이며, 탐착을 해서는 안될 현상[離貪法]이며,

멸하는 현상[滅法]이다라고 지혜에 의해 고찰해서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에서 벗어나서,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번뇌는 非道이며, 바른 길로 이끄는 위빠사나의 앎은 道라고 확실하게 이해한다.

이것이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이다.

견청정(見淸淨)에서 명색구별(名色區別)에 의해 苦諦의 분석을 행하고, 도의청정(度疑淸淨)에서 연파악(緣把渥)에 의해 集諦의 분석을 행하며,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에서 正道의 강조에 의해 道諦의 분석을 행한다. 이 세 가지 청정에 의해서, 세 가지 진리[三諦]에 대한 분석이 행해진다.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발생의 진리[集諦]·길의 진리[道諦]에 대하여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4. 열 가지 족쇄

{DN III, 234}

5하분결(五下分結); 욕망의 세계[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pa~ncannam orambhaagiyaanam samyojanaanam

① 유신견(有身見) 또는 자신견(自身見) - 오온을 영원한 자아와 관련 지워 보는 견해. sakkaayadi.t.thi

② 회의적 의심 - 삼보와 수행법 등에 대한 의심.vicikicchaa

③ 계율이나 금지 조항에의 집착[戒禁取見].siilabbataparaamaaso

④ 감각적 욕망[愛慾]. kaamacchando

⑤ 악의 - 분노. vyaapaado

5상분결(五上分結); -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pa~ncannam uddhambhaagiyaanam samyojanaanam

⑥ 색계에 대한 욕망. ruuparaago

⑦ 무색계에 대한 욕망. aruuparaago

⑧ 아만. maano

⑨ 들뜸. uddhaccam

⑩ 어리석음[無明]. avijjaa

聖人(四道四果)과 10가지 족쇄의 소멸 {MN I, 34}

聖人 10 가지 족쇄의 소멸

흐름에 들어선 분 - 預流, sotaapanno (1-3의 소멸)

한 번 오는 분 - 一來 sakadaagaamii (1-3의 소멸, 4-5의 약화)

돌아오지 않는 분 - 不還 anaagamii (1-5의 소멸)

공양받을만한 분 - 阿羅漢 aarahato (1-10의 소멸)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

불교의 수행법에는 서른 일곱 가지 깨달음을 도와주는 법[bodhipakkhiyaa dhammaa, 三十七助道]이 있다. 다음의 7 가지 범주에 속하는 수행의 항목 수가 37 가지이지만,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14가지 덕목이 된다. (『淸淨道論』p.680참조)

(1)사념처(四念處)

(2)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

(3)사신족(四神足)

(4)오근(五根)

(5)오력(五力)

(6)칠각지(七覺支)

(7)팔지성도(八支聖道), 팔정도(八正道)

(1)사념처(四念處) cattaaro satipa.t.thaana, 네 가지 마음챙김

①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處]

②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受念處]

③ 마음에 대한 마음챙김[心念處]

④ 법에 대한 마음챙김[法念處]

(2)사정근(四正勤), 사정단(四正斷) cattaaro sammappadhaanaa 네 가지 노력.

①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온전치 못한 법은 생겨나지 않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策勵)하고 노력함 [未生惡令不生]

②이미 생겨난 악하고 온전치 못한 법은 없애려고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 [已生惡令永斷]

③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온전한) 법은 생겨나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未生善令生]

④이미 생겨난 선한(온전한) 법은 유지시키고, 잃지 않도록 하며, 증장시키고, 많아지도록 하며, 계발하고, 완성시키도록 의욕을 일으키고, 애쓰고, 정진하고, 마음을 책려하고 노력함. [已生善令增長].

(3)사신족(四神足) cattaaro iddhipaadaa, 네 가지 신통의 기반.

①욕신족(欲神足) 또는 욕여의족(欲如意足) : (신통을 얻으려고 하는) 의욕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足].

②정진신족(精進神足) : 정진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③심신족(心神足) : 마음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④사유신족(思惟神足) : 사유[관찰]에 의해 생겨난 선정(禪定)과 노력의 힘을 갖춘 신통의 기반.

(4)오근(五根) pañca-indriyaani,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

①믿음의 기능 [信根, saddhaa-indriya] :

붓다의 깨달음[tathaagatassa bodhi.m]에 대한 믿음. 불·법·승 삼보와 계에 대한 네 가지 불괴(不壞)의 정신(淨信)[aveccappasaada].

②노력의 기능 [精進根,viriya-indriya] : 사정근(四正勤)

③마음챙김의 기능 [念根 sati-indriya] : 사념처(四念處)

④마음집중의 기능 [定根samaadhi-indriya] : 사선(四禪)

⑤지혜의 기능 [慧根paññaa-indriya] :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앎.

성스러운 통찰에 의해 올바르게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생멸하는 현상에 대한 지혜의 성취.

(5)오력(五力) pañca balaani, 다섯 가지 마음의 힘.

①믿음의 힘 [信力, saddhaa-bala]

②정진의 힘 [精進力, viriya-bala]

③마음챙김의 힘 [念力, sati-bala]

④마음집중의 힘 [定力, samaadhi-bala]

⑤지혜의 힘 [慧力, paññaa-bala]

(6)칠각지(七覺支) satta bojjhaɥgaa

①마음챙김의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sati-sambojjhaɥga]

②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dhamma-vicaya-s]

③정진의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viriya-s]

④기쁨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iiti-s]

⑤(심신의) 평안의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passaddhi-s]

⑥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samaadhi-s]

⑦평온의 깨달음의 요소[捨覺支; upekkhaa-s].

(7)팔지성도(八支聖道), 팔정도(八正道)ariyo a.t.thangiko maggo

①바른 이해[正見] ---+ 지혜[慧]

②바른 사유[正思惟] ---+ (paññaa)

③바른 언어[正語] ---+ 윤리[戒]

④바른 행위[正業] | (siila)

⑤바른 생계[正命] ---+

⑥바른 노력[正精進] ---+ 마음집중[定]

⑦바른 마음챙김[正念] | (samaadhi)

⑧바른 마음집중[正定] -+

『대념처경』의 팔정도 설명. (DN II, 312-3)

①바른 이해 - 四聖諦에 대한 앎.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②바른 사유

감각적인 욕망이 없는 마음가짐[出離], 나쁜 의도[惡意]가 없는 마음가짐, 남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가짐.

③바른 언어[正語]

거짓말[妄語], 이간질하는 말[兩舌], 거친 말[惡口], 쓸모 없는 말[綺語]을 삼가함.

④바른 행위[正業]

살생을 하지 않음[不殺生],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음[不偸盜],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음[不邪淫].

⑤바른 생계[正命]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

⑥바른 노력[正精進] - 네 가지 노력[四正勤]

⑦바른 마음챙김[正念] -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

⑧바른 마음집중[正定] -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

네 가지 마음집중[사선(四禪)]

(1)초선(初禪)

비구들이여, 비구는 모든 감각적인 욕망을 떨어버리고, 모든 온전하지 못한 법들[不善法]을 떨쳐 버리고 (마음집중의 대상에 대한)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있고, (감각적인 욕망 등에서) 멀리 떠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喜, pīti]과 행복감[樂, sukha]이 있는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벗들이여,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에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가 끊어지고,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五禪支]가 갖추어진다.

[오개(五蓋)의 사단(捨斷)]

벗들이여, 여기에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①감각적 욕망에의 희구[kāmacchanda]가 끊어진다.

②악의[惡意, byāpāda]가 끊어진다.

③혼침과 졸음[thīna-middha]이 끊어진다.

④들뜨는 마음과 회한에 잠기는 마음[uddhacca-kukkucca]이 끊어진다.

⑤회의적인 의심[vicikicchā]이 끊어진다.

[오선지(五禪支)의 구족(具足)]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①거친 사유[尋, vitakka],

②미세한 사유[伺, vicāra],

③희열[喜, pīti],

④행복감[樂, sukha],

⑤하나의 대상에 대한 마음의 통일[心一境性, cittekaggatā]이 작용한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에서 작용하는 다섯 가지 현상을 초선의 다섯 구성요소라고 한다. 그 가운데 거친 사유[尋, vitakka]와 미세한 사유[伺, vicāro]는 마음의 언어적인 작용[vaci-sankhāra]으로 불린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의식의 이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淸淨道論』에 의하면, 거친 사유[尋, vitakka]는 물병을 잡는 행위에 비유되고, 미세한 사유[伺, vicāra]는 잡은 물병을 닦는 행위에 비유된다. 초선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지만, 수행의 대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되어 있을 때, 미세한 사유는 산만함이 없어지고 탐색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초선의 요소는 제 2선(第二禪) 이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2) 제2선(第二禪)

다시 비구들이여,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가라앉고 마음의 정결함[sampasādana]과 전일성(專一性)이 있는, 거친 사유가 없고[無尋] 미세한 사유도 없는[無伺] 마음집중[samādhi]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감이 있는 제2선(第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2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희열[喜], 행복감[樂] 그리고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3.

(3) 제3선(第三禪)

다시 비구들이여, 희열을 버리고, 평온[捨,upekkha]에 머문다.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면서, 성자들이 `평온함과 마음챙김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고 한 제3선(第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3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행복감[樂]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4.

(4) 제 4선(第四禪)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행복감[樂]을 떠나고 괴로움[苦]도 떠나고,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없애버린, 불고불락(不苦不樂)인, 그리고 평온(捨)에 의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또는, 평온과 마음챙김이 청정하게된; upekkhā-sati-pārisuddhi) 제4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4선을 구성하는 요소는 평온[捨]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禪定分別」Vibh 264.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마음집중[正定]이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요인들[칠각지(七覺支)]과 조건들

(DN-a III, 786-96)

1 마음챙김[念]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4 가지 방법

①분명한 앎과 함께 마음챙김을 지닐 것.

②마음이 혼란한 이들을 멀리할 것.

③마음챙김을 지니고 있는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④마음챙김에 마음을 기울일 것.

2 법에 대한 고찰[擇法]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7 가지 법

①부처님의 가르침,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사대(四大),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탐구.

②자신의 몸과 주위 환경을 깨끗이 할 것.

③오근(五根)의 균형을 이룰 것.

④어리석은 이들을 멀리할 것.

⑤지혜로운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⑥부처님의 가르침을 탐구하여 깊이 있게 사유할 것.

⑦법에 대한 고찰에 마음을 기울일 것.

3 용맹스런 정진(精進)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11 가지 방법

①삼악도(三惡道)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②정진의 이로움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③붓다와 독각(獨覺)과 위대한 제자들이 정진에 의해서 도(道)를 이루었음을 생각할 것.

④제공받는 음식에 대해 고마움을 생각할 것.

⑤부처님의 법의 유산의 위대함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⑥스승이신 부처님의 덕에 대해 생각할 것.

⑦자신이 부처님의 제자임을 생각할 것.

⑧사리풋타와 목갈라나 존자 등의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들을 생각할 것.

⑨게으른 이들을 멀리할 것.

⑩열심히 정진하는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⑪정진에 마음을 기울일 것

4 기쁨[喜]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10 가지 방법

①부처님[佛]의 덕에 대하여 생각할 것.

②가르침[法]의 덕에 대하여 생각할 것.

③상가[僧]의 덕에 대하여 생각할 것.

④계행[戒]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⑤베풂[捨]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⑥천상[天]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⑦적정(寂定) 즉, 열반에 대해서 생각할 것.

⑧마음씀과 행동이 거친 이들을 멀리할 것.

⑨마음이 맑고, 부드러운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⑩기쁨에 마음을 기울일 것

5 심신의 평안[輕安]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7 가지 방법

①몸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음식을 취할 것.

②수행하기에 적적할 기후에서 지낼 것.

③안정되고 편안한 자세로 지낼 것.

④업은 자신의 것, 자기는 자기의 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생각할 것.

⑤들떠서 안정되지 못한 이들을 피할 것.

⑥안정된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⑦평안에 마음을 기울일 것

6 마음집중[定]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10 가지 방법

①자신의 몸과 주위 환경을 깨끗이 할 것.

②오근(五根)의 균형을 이룰 것.

③마음집중의 대상(kasiɧa)에 익숙할 것.

④침체된 마음을 택법(擇法), 정진(精進) 기쁨으로 고무시킬 것

⑤들뜬 마음을 평안[輕安], 마음집중[定], 평온[捨]으로 가라앉힐 것.

⑥소침해진 마음은 부처님의 덕 등을 생각하면서 밝게 할 것.

⑦수행이 균형을 유지하며 잘 지속 될 때는 평온[捨]을 생각하며 수행을 지속시켜 나갈 것.

⑧마음이 잘 집중되지 않은 이들을 멀리할 것.

⑨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는 이들과 가까이 할 것.

⑩마음집중에 마음을 기울일 것

7 평온[捨]을 생기게 하고 향상시키는 5 가지 방법

①존재나 사람들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를 지닐 것

②사물들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를 지닐 것.

③다른 존재들 (가족이나 친척,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멀리할 것.

④사물에 대해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멀리할 것.

⑤평온에 마음을 기울일 것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五根]의 균형

<다섯 가지 마음의 기능(五根)의 균형 잡기에 대해서는 우 자나카 사야도의 『위빠싸나 수행』(서울: 경서원, 1998) 140-52쪽 참조 바람.>

①믿음[信]과 지혜[慧]는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②마음집중[定]과 정진(精進)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③마음챙김[念]은 믿음과 지혜, 마음집중과 정진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주므로 언제나 필요하다. 마음챙김은 강하면 강할수록 바람직하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챙김은 어느 곳에서나 바람직하다고 하셨다. 지나친 마음챙김이란 있을 수 없다. 마음챙김은 약방의 감초이며, 모든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이며, 왕의 모든 일을 맡아보는 대신이다. 마음챙김은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