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승불교(大乘佛敎)

수선님 2020. 4. 19. 11:33

대승불교(大乘佛敎)




목차


1. 개요


2. 대승불교의 원류

(1) 대승불교의 원류

(2) 부파불교와의 관계

(3) 불전문학


3. 보살사상

(1) 보살사상의 형성

(2) 대승의 보살

(3) 보살의 수행


4. 대승경전의 성립

(1) 대승경전의 성립

(2) 대승경전의 발달 구분

(3) 초기의 대승경전

(4) 중기이후의 대승경전


5. 대승사상의 전개

공사상


(1) 공사상의 의미

(2) 공사상의 배경

(3) 용수의 공사상

(4) 중기 중관파

(5) 후기 중관파

유식


(1) 유식사상의 흥기

(2) 유식사상의 발달

(3) 팔식의 구조

(4) 식의 전변

(5) 삼성설

(6) 유식의 수행


여래장사상


(1) 여래장 사상의 배경

(2) 여래장계 경전

(3) 여래장 사상의 연원

(4) 여래장과 아뢰야식

(5) 여래장 연기설

밀교


(1) 밀교의 의미

(2) 밀교의 기원

(3) 초기밀교

(4) 중기밀교

(5) 후기 밀교


천태사상


(1) 천태사상의 역사

(2) 법화경과 천태삼대부

(3) 천태의 교상판석

(4) 천태의 존재양상

(5) 천태의 실천체계


화엄사상


(1) 화엄경개설

(2) 화엄사상의 역사

(3) 화엄의 교판

(4) 법계연기

(5) 삼성동이와 연기인문육의

(6) 십현연기

(8) 성기사상

(7) 육상원융

정토사상


(1) 정토삼부경 개설

(2) 정토사상의 발전과 변용

(3) 정토의 교판

(4) 타력본원설

(5) 악인과 왕생

(6) 아미타불과 극락정토


선사상


(1) 선의 기원

(2) 보리달마의 선사상

(3) 달마이전의 중국선 - 소승선과 대승선, 염불선

(4) 능가종(楞伽宗)의 성립과 발전

(5)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형성

(6)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

(7) 선종(禪宗)의 형성

(8) 오가선풍(五家禪風)의 전개

(9) 간화선과 묵조선


한국의 선사상


(1) 한국불교의 선풍

(2) 한국의 초기선

(3) 한국의 중기선

(4) 한국의 후기선




초기대승론






1. 개요


대승(大乘)이란 마하야나(Maha-yana)의 역어(譯語)로 큰 수레라는 의미이며, 소승(小乘)은 히나야나(Hina-yana)의 역어(譯語)로 작은 수레라는 의미이다. 히나(hina)에는 ?버려진, 천한, 열등한?이라는 의미도 있어, 히나야나란 대승교도가 부파불교를 경멸하여 천시한 호칭이다. 즉 부파불교에서는 스스로 소승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승과 소승의 승(yana)란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함으로 미혹의 현실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으므로 수레에 비유한 것이다.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교리적 차이는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차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남을 구제함으로 자신도 구제된다?는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圓滿)의 가르침을 설한다. 이에 비해 유부나 상좌부에서는 번뇌를 끊고 자기자신의 해탈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 되고 있다. 해탈을 얻어 열반에 드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이 해탈을 얻은 후에 남을 구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지 않았다.


부파불교는 철저히 출가위주의 불교이다. 즉 출가자는 성불(成佛)을 이상으로 삼지만, 재가자는 이러한 이상에서 배제되어 단지 출가자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는 일차적인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가르침의 근저에는 누구에게나 붓다가 될 수 있는 소질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에서부터 점차로 교리상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소승에서는 육신이 멸하여 열반에 드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삼았지만, 대승에서는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관음보살 등은 성불하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열반에 들지 않는다. 이러한 교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대승에서는 공(空)의 사상이 심화되고, 연기(緣起)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했다. 동시에 붓다에 의한 구제의 교리로서 악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도 구제하는 타력이행(他力易行)의 교리가 나타난다. 이러한 관념은 이전에 보이지 않는 대승불교의 특색이다.




2. 대승불교의 원류


(1) 대승불교의 원류

대승불교가 어디서부터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 세 가지 원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대승불교가 부파불교로부터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중부(大衆部)가 발전하여 대승불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대중부의 주장 가운데 일부가 대승불교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출현한 이후에도 대중부는 존속하기 때문에 대중부가 발전하여 대승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부파들의 교리도 대승불교에 도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교리는 비판되면서도 가장 많이 채용되었다. 또 경량부의 교리도 대승불교에, 특히 유식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느 한 부파로부터 발전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둘째는 불전문학(佛傳文學), 이른바 찬불승(讚佛僧)의 계통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불전문학이 어떤 부파에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점차 부파불교를 초월한 사상으로 발전해나갔을 것이다. 이 불전문학의 사상이 대승의 흥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셋째는 불탑신앙이다. 불멸 후에 불골(佛骨)을 분배하여 중인도에 세워진 불탑은 점차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켜 불탑신앙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 후 아쇼카왕은 각지에 불탑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불탑신앙은 더욱 성행하였을 것이다. 불탑신앙이 성행하게 되면서 이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면서 불탑교단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탑교단은 기존의 부파불교와는 별개로 발전하여 대승불교의 흥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2) 부파불교와의 관계

대승불교의 원류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대중부(大衆部)에서 대중불교가 흥기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대중부의 교리가 대승불교에 가깝다는 것이다. 대중부의 교리 가운데 불타론(佛陀論), 보살론(菩薩論),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이 그것이다. 먼저 불타론에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한 분의 붓다를 설하지 않고 여러 명의 붓다를 설하였으며, 또 이 붓다는 세상에 나와서 중생을 교화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유부의 불타관과 다르다. 유부에서는 오직 한 분의 붓다만이 존재하며, 이 붓다는 열반에 들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대중부계의 보살론에서는 일체의 보살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유정(有情)을 이롭게 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원해서 악취(惡趣)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유부에서 업에 따라서 윤회한다고 설한 것과 다른 것으로 대승불교 사상에 가깝다.


그리고 대중부에서는 심성본정(心性本淨)을 설하였는데, 이 심성본정설도 대승불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이다. 그러나 대중부의 심성본정의 주장은 다른 부파에서도 발견되며, 세일론 상좌부가 전하는 <아함경>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심성본정설을 대중부의 독특한 설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상좌부계의 화지부(化地部)와 법장부(法藏部)도 대승경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유부의 한 파인 비유자(譬喩者)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교리적 유사성만으로 대중부에서 대중불교가 흥기했다고 할 수 없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교리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가했기 때문에 어떤 한 부파의 교리를 전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대승의 기원은 교리의 기원임과 동시에 교단의 기원이기도 한데, 대중부의 교단과 대승교도 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3) 불전문학

불전(佛傳)문학이란 기존의 경전이나 율장과는 달리 붓다의 생애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으로 위대한 붓다에 대한 찬탄을 주로 한다. 따라서 불전문학은 찬불승(讚佛僧)과 같은 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전문학에서는 붓다가 성불한 인연을 추구하고 성불을 가능하게 한 수행[本行]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붓다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성불에 도달했는지, 그 사이에 어떤 수행을 했는지 등을 고찰하면서 점차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전(佛傳)은 부파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부파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었다.


불전문학에서 공통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것은 첫째로 석가보살이 연등불(燃燈佛)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것이다. 그 때의 보살은 바라문 청년이었는데, 이름은 선혜(善慧), 수메다, 운(雲) 등으로 이본(異本)에 따라 다르다. 이 이야기에서는 5줄기의 꽃을 어떤 여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연등불에게 바쳤다는 것, 진흙을 덮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풀어 그 위에 깔아 연등불을 건너게 한 것, 이 때 미래에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 등이 말해진다.


그러나 그 후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기 전의 석가보살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3아승지겁의 옛날부터의 수행이 설해지게 되었다. 불전에서는 수기를 받은 후 보살이 6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 설해진다. 붓다가 성불하는 데에는 성문이나 연각과는 다른 수행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6바라밀이 설정된 것이다. 석가보살은 6바라밀을 수행한 후 10지(地)에 오르고, 그 수행이 완성되어 일생보처(一生補處)에 오른다.


이러한 불전문학의 특징적인 점들은 대승경전에 계승되고 있다. 불전문학과 대승경전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즉 불전문학에서 문제삼고 있는 보살은 붓다의 전생(前生)으로서 이미 수기를 받아 성불이 결정되어 있는 보살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보살은 단지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보살일 뿐이다. 성불이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물론이고 수기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이 세운 서원에서 후퇴할 수 있는 범부로서의 보살이다. 불전문학에서는 범부의 수행자가 스스로 보살의 자각을 일으켜 수행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3. 보살사상


(1) 보살사상의 형성

보살(菩薩)은 보디삿트바(bodhisattva)를 음사하여 줄인 말이다. 보디(bodhi)는 깨달음이며, 삿트바(sattva)는 유정(有情)을 가리키므로, 보살이라는 말의 뜻은 깨달음을 얻은 유정(有情)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有情)이 된다. 그러나 이후에는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설명된다.


초기 경전인 팔리의 니카야에도 보살의 용례가 보이고 숫타니파타에도 그러한 용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보살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역에서는 <장아함경>과 <증일아함경>에는 보살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중아함경>과 <잡아함경>에는 보살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초기 경전 가운데 보살이라는 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보살이라는 관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보살이란 말은 불전문학에서 제일 먼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전문학에서는 이미 성불한 붓다의 전생(前生)을 탐구하여 깨닫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보살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따라서 보살의 기원적 의미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有情)으로서 깨달음이 확정되어 있는 유정(有情)?이다.


대체로 불전문학의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 사상에서 보살의 관념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연등수기는 다음과 같다. 먼 과거세에 바라문 청년이었던 붓다가 연등불을 보고 존경심이 일어나 다섯 송이의 꽃을 공양하고 머리카락을 진흙 위에 펼치면서 반드시 붓다가 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 그때 연등불은 미래에 반드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라는 붓다가 될 것이라고 수기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석가보살은 이미 성불이 결정된 보살로서 오직 단 한명뿐이다. 이러한 석가보살의 이념은 부파불교에 그대로 수용되어, 보살은 붓다의 성불 이전 단계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불전문학에 등장하는 석가보살의 수행을 통하여 조직된 보살도(菩薩道)는 붓다가 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는 것, 모든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자비심을 가지고 육바라밀(六波羅蜜), 방편(方便), 사무량심(四無量心) 등을 실천하는 것, 공덕을 쌓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공양하는 것 등의 단계를 거쳐 실천의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2) 대승의 보살

불전문학에서 제시된 보살이라는 관념은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고 보편화되었다. 따라서 붓다의 전신(前身)뿐만 아니라 붓다가 되기 전의 모든 중생을 보살로 간주하게 되었다. 즉 수행을 완성한 사람뿐만 아니라 붓다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든 중생을 보살이라고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점차 경전에도 나타나게 된다.


대승경전에서는 미륵(彌勒), 관음(觀音), 보현(普賢), 문수(文殊)처럼 수행이 완성된 대보살(大菩薩)과 대승의 가르침을 믿고 지니며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범부보살(凡夫菩薩)이 등장한다. 이처럼 대보살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고 세상에 나와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과 재가와 출가를 불문하고 남녀, 빈부, 귀천을 불문하고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여 보살의 행을 닦는 사람은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기존의 보살관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는 범부보살의 사상은 기존의 부파 교단과는 별도의 즉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탑교단의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탑 신앙자들은 그들의 수행의 이상형을 석가보살로 삼았으며, 그 석가보살의 수행을 통해 자신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의 전신(前身)인 석가보살의 수행은 단순한 수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인행(因行)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대승경전으로 여겨지는 <아촉불국경>과 <대아미타경>에는 각각 미륵과 관음이라는 대보살이 등장한다. 미륵과 관음은 현재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석가보살과 다르며, 수행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범부보살과도 다르다. 이는 기존 부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보살이다. 이러한 대보살은 실제로 존재했던 보살이기 보다는 이념적인 존재들로서 석가보살로부터 비약된 보살들이다. 즉 붓다에 대한 신앙이 발전함에 따라 그 필요에 따라 여러 보살들이 설정된 것이다.


불전문학에서의 보살은 석가보살 단 한 명만이 제시되어 있으며, 또한 붓다의 전신(前身)이므로 반드시 과거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은 붓다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보살이므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보살이 존재하는 시간도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가능하다. 대보살이나 범부보살은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현재에도 존재한다. 대승보살의 가장 큰 특징은 불전문학의 보살이 업(業)에 의해서 태어나는데 반해 대승보살은 자신의 서원에 의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즉 수행이 완성되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데 이들 대보살들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에 의해 윤회의 세계에 나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3) 보살의 수행

불전문학의 보살은 성불이 결정된 보살로서 과거의 선업(善業)에 의해 태어나지만 대승의 보살은 서원에 의해 태어나게 된다. 따라서 보살의 서원(願)은 이기적인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타적인 성격이 강하다. 보살의 서원에는 각각의 보살이 일으키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원[別願, 本願]과 모든 보살이 갖추고 있는 보편적인 원[總願]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과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중생의 제도는 발심(發心)할 때 세운 서원의 실현이며 자비행은 깨달음을 중생에게 돌리는 실천이기 때문에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과 깨달음을 성취하는 자리행(自利行)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의 갑옷으로 무장한 후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음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육바라밀은 붓다의 전신(前身)인 석가보살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무수한 생애동안 실천한 것이다.


바라밀(波羅蜜)은 파라미타(paramita)의 음사로서 ?피안(彼岸)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는데 구마라집은 도피안(到彼岸)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완성이라고 하더라도 완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완성이며, 이상을 향해 영원히 나아가는 실천적인 지혜이다. 바라밀은 무차별, 공(空)에 입각한 실천이기 때문에 도달이나 완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닦아가는 것이 바라밀의 참뜻이다. 이런 바라밀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반야(般若)바라밀이다. 이 여섯 가지 바라밀은 논리적인 체계와는 상관없이 보살의 실천덕목을 말하는 것이다.


보시(布施, dana)란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에는 물질적으로 베푸는 재시(財施)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법시(法施), 두려움과 근심을 함께 하고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보시할 때에는 주는 자, 받는 자, 주는 물건이 모두 청정한 것[三輪淸淨]이 진정한 보시이다. 즉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선행에 집착하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가 보시바라밀이다.


지계(持戒, sila)란 ?계를 지킨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계(戒)에는 재가신자들이 지켜야 할 오계(五戒)와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가 갖추어야 할 250계와 350계가 있지만 대승의 보살계에는 10가지가 있다. 이 열 가지는 십선(十善)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살생(不殺生), 부도(不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악구(不惡口), 불양설(不兩舌), 불기어(不綺語), 무탐(無貪), 무진(無瞋), 정견(正見) 등의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의 지계(持戒)는 이전의 소승처럼 수동적이고 타율적이지 않으며 능동적이고 자율적 정신을 강조한다. 계(戒를 지키는데 있어서 그 본래의 정신을 망각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다. 계(戒)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지키며, 타인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지계바라밀의 본질이다.


인욕(忍辱, ksanti)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고통이며 그러한 세계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화내지 않고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미움은 미움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미움을 부르기 때문에 참고 용서하는 것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virya)이란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의 실천이며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다. 중생의 정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보살의 정진은 이타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생과 보살의 정진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데 있다.


선정(禪定, dhyana)의 정(定)은 삼매(三昧)란 뜻으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이라고 풀이된다. 선정은 붓다가 성도(成道)하실 때부터 행하신 것으로 근본불교에서부터 강조되고 있다. 선정을 통해 모든 존재가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직관하여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般若, prajna)란 ?수승한 지혜?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혜는 사유분별의 망상을 떠난 지혜로서 집착이 없는 지혜이며, 공(空)한 지혜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지혜의 완성이라는 의미이다. 반야바라밀은 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으로 주로 <반야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바라밀의 수행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전력하는 것이며, 성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끊임없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다. 보살의 이러한 결의를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에 비유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살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면서도 인도된 사람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도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4. 대승경전의 성립


(1) 대승경전의 성립

대승불교는 원래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불탑 공양을 통해 붓다를 찬탄하고 숭배하는 재가 신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전의 여러 부파들이 승원을 중심으로 지극히 난해한 법(法) 중심의 불교를 발달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붓다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불멸(佛滅) 후에 나타난 붓다 신격화의 결과이다. 즉 불전문학과 본생담 등을 통해 범부와 다른 붓다에 대한 고찰을 발달시켰다. 그 결과로 붓다는 과거에 무한의 수행을 한 과보(果報)로 성불(成佛)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하며, 인행(因行)으로서 이타행(利他行)을 주로 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을 설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거세 붓다의 체험을 일반화해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출가 수행자들은 붓다와 자신들과의 거리감으로 인해 스스로 아라한에 머무르고자 했음에 대해서, 중생의 성불이야말로 붓다의 본래의 서원[本願]이라고 주장하여 붓다와 똑같은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부르게 된다. 많은 중생이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대승(大乘)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법사(法師)라고 불린다. 법사의 기원은 어쩌면 출가 수행자 중에서 재가 신자를 위해 붓다의 생애나 가르침을 설하는 전문가였는지도 모르지만, 기록을 통해서는 그 기원을 알 수 없다. 이들은 재가 신자에서의 지도자이든가 혹은 출가자이더라도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대승 경전이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대승불교 자체에 여러 가지 새로운 현상이 발생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대승 경전에 대해 공양하고 숭배하고자 하는 요구와 법사를 존중하고자 하는 요망이다. 결국 경전이 불탑을 대신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되었으며 대승경전이라고 하는 법(法)의 절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새로운 가르침을 크게 유포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현상은 성불도(成佛道)로서의 보살도(菩薩)가 정비되고 체계화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처음에 비판하였던 부파의 아비달마 교학을 다시 도입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재가보살 대신 출가 보살을 이상상으로 여기게 된다.


대승불교가 점차 이론화되고 체계화되어감에 따라 결국 출가주의화와 아비달마화를 초래하여 이전의 불교가 걸었던 길을 답습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밀교가 일어나고, 그들의 주장을 담은 밀교 경전이 제작된다. 밀교 경전도 역시 불설(佛說)임을 표방하지만 그것을 설하는 주체가 대승 경전에서처럼 붓다가 아니라 절대적 존재로서의 법신(法身)이다.


대승불교의 역사상 실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져야 할 과제가 많지만, 대승경전의 존재를 통해서 대승불교의 실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형성과 대승경전의 성립이 그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가 흥기하기 이전에 이미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이 존재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전의 사상들에 대해 비판하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새로운 경전들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2) 대승경전의 발달 구분

대승경전의 역사는 보통 3기로 나누어 말한다. 제1기인 초기는 대승의 형성에서부터 용수(龍樹)의 시대까지이고, 제2기인 중기는 용수 이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의 시대까지이고, 제3기인 후기는 세친 이후의 후대이다. 제1기에는 경전의 제작이 성행하였으며, 제2기에서는 조금 덜하였고, 제3기에서는 밀교를 제외하고 극히 드물었다. 제1기는 대체로 기원 전후로부터 3세기 전반까지로, 북인도에서는 쿠샤나 왕조가 번창하던 시대이고 남인도에서는 인드라 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제2기는 세친의 연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굽타 왕조가 흥성하던 시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초기의 경전은 대승불교의 교리를 최초로 저술한 인물로 지목되는 용수의 학설에 영향을 주거나 또는 인용되고 있는 경전류이다. 제2기의 분류기준은 경전의 한역 연대이다. 한역 경전에 대해서는 역자와 연대가 비교적 정확하기 때문에 이 연대에 해당하는 경전이 성립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대승경전이 최초로 한역된 것은 후한의 지루가참에 의한 것인데 이로부터 대승경전이 최초로 형성된 시기를 서기 1세기 경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초기 대승경전이 발전하기 이전에 <반야경>이 성립되었고,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중심으로 대승 경전들이 제작되었다. 동시에 여러 부처를 인정하는 다불사상(多佛思想)이 성립되고 이러한 신앙도 발달하였는데, 그 중에서 아미타불의 신앙이 보편화되어 이후에 정토교(淨土敎)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화엄경>이 발전하고 또한 <법화경>을 신앙하는 운동이 급속하게 퍼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교리의 조직 및 체계화에 이루어지는데 이로 인해 부파불교의 교리들이 대승사상에 수용되게 된다. 즉 부파불교의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 것이다.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대체로 여래장(如來藏)사상과 유식(唯識)사상에 관련된 것이다. 여래장계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如來藏) 즉 불성(佛性)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유식계의 근본경전은 <해심밀경>인데 이는 보리유지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으나, 부분적으로는 구나발타라에 의해 번역되어 있으므로 대체로 4세기 말까지는 성립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경전과 논전과의 구별이 어렵다. 대승사상이 점차 체계화되고 발달됨에 따라 경전에서도 정교한 사상을 설하였으며, 논전을 기초로 하여 개작된 것도 있다.


대승 경전의 제작은 후대에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수는 갑자기 줄어들게 된다. 대신 밀교 경전이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650년을 전후로 <대일경>이 성립되고, <금강정경>의 성립으로 그 교리가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초기의 대승경전

대승불교를 확립한 경전으로 <반야경(般若經)>을 꼽을 수 있다. <반야경>은 최초로 성립된 경전으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각종의 <반야경>이 작성되었으며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반야경>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경전류의 약칭이다. 반야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여섯 바라밀 가운데 하나이지만, <반야경>은 특히 반야바라밀을 중요시하여 다른 바라밀들은 모두 이 가운데 포섭되며, 이를 기초로 하여 성립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야경>은 그 속에 포함한 송(頌)의 수로 구분하는데 <팔천송반야>에서 <이만오천송반야>로 확대되고 다시 <이만오천송반야>에서 <십만송반야>로 확대된다. 그 후 <이만오천송>와 <팔천송> 사이에 <만오천송반야>와 <일만송반야>가 생겼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팔천송반야>에서 <이만오천송반야>로의 발전이 초기 대승경전에 해당된다.


<팔천송계 반야경>은 2세기 후반에, <이만오천송계 반야경>은 3세기 후반에 여러 차례 한역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유포된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인 <마하반야바라밀경>인데, 분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대품(大品)반야경>과 <소품(小品)반야경>으로 불린다. 가장 많은 분량의 반야경이 하나의 총서로 편집된 것은, 현장이 660년부터 663년에 걸쳐 한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이다. <대반야경>은 600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구성은 16회(會)로 나누어진다. <대반야경>을 기준으로 각종 <반야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한역 가운데 이역본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류의 <반야경>이 이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반야심경(般若心經)>과 한역만이 현존하는 <인왕(仁王)반야경>이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타방정토(他方淨土)사상이 발달하였는데, 가장 유력한 정토사상으로는 미륵보살의 도솔천 정토와 아촉불의 동방 묘희국 정토와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세계 정토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된 정토사상은 미륵보살의 도솔천 신앙이다. 도솔천 신앙을 설한 경전으로는 <중아함경>의 설본경(說本經),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관미륵보살상생(觀彌勒菩薩上生)도설천경>이 있다. 아촉불의 정토신앙을 주제로 한 경전에는 <아촉불국경>, <대보적경(大寶積經)>의 제6 부동여래회(不動如來會)가 있다. 아촉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각종의 <반야경>, <유마경>, <비화경(悲華經)>, <화수경(華手經)>, <수능엄삼매경>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아촉불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아미타불 신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많지만 직접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은 세 경전이 있다. 정토는 극락정토에만 한정되지 않지만 극락정토가 가장 유력하므로 정토의 대표로 간주된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 신앙을 정토교(淨土敎)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신앙을 담은 경전을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한다. 정토삼부경은 강승개 역의 <무량수경(無量壽經)>, 구마라집 역의 <아미타경(阿彌陀經)>, 강량야사 역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다.


<무량수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네팔에서 전승된 것이며, 한역에는 번역된 시대에 따라 후한역, 오역, 위역, 당역, 송역이 있다. 후한(後漢)역은 지루가참 역의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이며, 오(吳)역은 지겸 역의 <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과도인도경(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이며, 위(魏)역은 강승개의 <무량수경>이며, 당(唐)역은 보리유지 역의 <대보적경> 제5회 무량수여래회이며, 송(宋)역은 법현 역의 <대승부량수장엄경>이다. 이들 번역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와 변화가 나타나 있다. 특히 가장 오래된 후한역과 오역은 다른 본과 차이가 많다. <아미타경>은 매우 짧은 경전으로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다. <관무량수경>은 앞의 두 경전보다 발달된 사상을 담고 있지만 관불(觀佛)을 설하는 경전 가운데 하나로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장엄함을 마음으로 관하는 실천방법을 정리하고 있다.


<화엄경<華嚴經)>은 대승불교의 근본인 보살행을 조직적으로 설한 경전이다. 이 경은 한역으로 60권 또는 80권의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이지만 전체가 한꺼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 안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불타발타라에 의해 60권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한역되었으며, 80권본 <대방광불화엄경>은 실차난타에 의해 한역되었다. 한역은 이외에 일부분의 이역본(異譯本)이 20여부 이상에 이른다. <육십화엄>은 8회 34품, <팔십화엄>은 9회 39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엄(華嚴)은 붓다의 세계를 꽃으로 장엄한다는 것이다. 이 경은 예로부터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그 내관(內觀)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마가다국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몸에서 빛을 발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는 광대한 우주적인 붓다의 모습을 드러냈다. 비로자나불로부터 빛이 방사되자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밝게 드러나고 그곳에 사는 무수한 보살과 신 등은 연화장(蓮花藏)세계의 장엄함을 볼 수 있게 된다. <화엄경>에서의 설법의 주체는 비로자나불이 아니라 비로자나불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보살, 신, 천자, 천왕 등이다. 그들은 붓다의 위신력으로 차례로 등장하여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찬탄하며 붓다를 대신하여 설법하고 있다. 설법의 주체로 다양한 보살이 등장하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반야경>의 공사상과 관련된 보살로서 이 보살의 등장은 <화엄경>이 일반적인 대승경전의 사상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보현보살은 무한한 세계에서의 보살행의 실천자를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성격을 갖는다.


<법화경(法華經)>은 중국, 한국 등지에서 지명도가 높은 경전이다. <법화경>은 붓다에 대한 숭배를 강조하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표현되어 있다. <법화경>의 산스크리트어 원전은 여러 가지로 발견된 지방에 따라 네팔계, 까쉬미르계, 중앙아시아계로 구분된다. 한역으로는 축법호 역의 <정법화경(正法華經)>, 구마라집 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사나굴다 역의 <첨품(添品)묘법연화경>이 있다. 이 가운데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이 옛부터 명역이라 하여 널리 독송되었다. <법화경>은 종종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의 묘법(Saddharma)은 정법(正法)으로도 번역되는데 이는 붓다가 설명한 최고의 진리를 말한다. 연화는 청정한 것의 비유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실천자의 인격을 나타낸다. <법화경>에서는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비유담, 불보살의 전세 이야기가 풍부하게 나온다. 또한 붓다에 대한 신앙을 <법화경> 그 자체에 대한 신앙으로 생각하여 이를 신앙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4) 중기이후의 대승경전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고 다수의 경전들의 유포됨에 따라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신앙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였지만 그 이론의 전개를 명확히 해야만 이전의 부파불교 논사들과 대항해 대승불교의 우수성을 선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운동은 주로 재가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많은 경전의 작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용수(龍樹)는 대승사상을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후의 대승사상의 전개는 그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용수 이후에도 많은 경전들이 작성되었는데 주류는 여래장계 경전과 유식계의 경전이다. 초기 대승경전이 주로 종교문학적임에 반해서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교의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따라서 중기 이후의 대승경전은 논(論)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논(論)에 준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여래장 계통의 경전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如來藏) 즉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설한다. 여래장과 불성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불성은 주로 <열반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래장계 경전으로는 불타발타라가 한역한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을 선두로 하여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앙굴마라경(央掘摩羅經)>, <대법고경(大法鼓經)>, <승만경>, <열반경>, <능가경>, <무상의경(無上依經)이 있다. 여래장은 여래의 태아, 모태라는 의미로 이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여래장경>이다. 중생이 여래의 태아로서 여래 안에 포용되어 있는 상태 또는 중생이 자신 안에 여래가 될 태아 혹은 여래의 소질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래장과 동일한 의미로 불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폭넓은 이론을 발전시킨 경전은 <열반경>이다. 한역의 전체 역본으로는 담무참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 있다. 처음 북중국에 번역되었을 때는 40권본이 있었으나 남중국에서는 부분역인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과 대조하여 읽기 편하게 36권본으로 만들었다. 원시적인 형태의 <열반경>에서는 주로 붓다의 임종 전후의 사적을 기술하였지만 대승의 <열반경>에서는 붓다의 임종을 소재로 하면서도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80세에 죽음을 맞이한 붓다보다는 붓다의 본질인 상주불멸의 법신(法身)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법신은 중생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본질이며, 중생의 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불성으로 작용한다.


유식계의 경전으로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 선구적인 문헌이며, 이는 대체로 5세기 경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유식계 경전은 무착과 세친에 의해 대성된 유가행파(瑜伽行派)가 발달시킨 문헌이다. 가장 널리 읽힌 것은 현장 역의 <유가사지론>으로 이는 한역으로 1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이다. 전체는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졌으며 처음의 두 부분이 중심이다. <해심밀경>은 붓다의 깊고 깊은 가르침을 해명한 경이라는 의미로 많이 읽히는 것은 현장 역이다. 이역으로는 보리유지역의 <심밀해탈경(心密解脫經)>이 있으며 이밖에도 부분적인 이역이 있다. <해심밀경>과 같은 시기에 <대승아비달마경>이 있었는데 이 경전은 이론이 정연하고 조직화되어 있어 앞의 경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후에 유가행파가 발전해감에 따라 점차 많은 문헌들이 작성되게 되었다.



5. 대승사상의 전개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고 수많은 경전이 생겨나자,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확립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따라 대승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은 서력 기원후 2~ 3세기 무렵에 출현한 용수(龍樹, Nagarjuna,)이다. 용수는 남인도 출신 사람으로 불교의 여러 사상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저서들에서는 주로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공(空)사상에 입각해서 여러 견해들을 논파하고 있다. 용수는 불교의 근본 진리를 연기(緣起)로 보고, <중론(中論)>에서 연기를 생멸(生滅),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차별적인 대립을 넘어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상호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뿐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일체는 공(空)하다고 설하고 있다. 용수는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공(空)의 이론을 확립하여 대승불교의 기반을 다졌다.


용수에 의해 이론적 기반을 다진 대승불교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새로운 경전이 생겨나면서 발달된 교리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새로운 경전은 공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 미혹과 깨달음의 주체로서 마음의 본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즉 마음은 깨달음의 세계를 낳는 원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씨앗이 되기도 한다. 마음은 보리(菩提)의 바탕인 동시에 윤회의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전자는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이상적 측면에서 고찰한 여래장(如來藏)설이고, 후자는 마음의 현실적 기능의 분석에서 출발하는 유식(唯識)설이다.


유식사상은 일체의 분별망상이 비롯되는 인간의 의식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전환을 통해 진여(眞如)와 열반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이론으로 3 ~ 4세기 무렵 출현한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아가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을 동일시하여 양자간의 융합을 모색하려는 경전과 논서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이론이 점차 체계화되고 정비되어 감에 따라 이전의 아비달마불교처럼 대단히 번쇄하고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다. 자연히 초기 대승불교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고 후기에는 이전의 불교와는 성격이 다른 밀교(密敎)가 출현하게 된다. 밀교에서는 붓다의 깨달음을 다라니(陀羅尼)나 진언(眞言), 만다라(曼多羅) 등의 상징으로 나타내며, 의례를 중심으로 한 불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힌두교의 의례와 유사하게 되어 그것에 동화되기에 이르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도들이 인도에 침입하여 불교사원을 파괴함으로써 불교는 13세기 무렵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불교는 서력 기원전후 동쪽으로 진출해서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수(隨), 당(唐)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론들이 번역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인도의 불교는 오랜 시간동안 넓은 지역에 걸쳐 전개된 것이었으므로 어떤 일정한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즉 경론 간에 서로 다른 해석과 주장이 있게 되고 경론이 중국에 들어올 때 시대별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국의 불교인들은 번역된 온갖 경론들에 대해 체계성을 부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불교의 일체 경론을 분류하고 해석하였는데, 이를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상판석에 따라 마지막으로 설해진 것 또는 가장 뜻이 깊은 것으로 간주된 경론들을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종파들이 성립하게 되었다. 불교의 종파는 이미 동진시대나 남북조시대에 여러 경론이 번역되고 그것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수많은 종파가 성립하게 된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13종파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중국 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법화경>의 일승(一乘)을 대승불교의 근본으로 간주하는 천태종(天台宗), <화엄경>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法界)를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하는 화엄종(華嚴宗), 정토계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정토의 실현을 추구하는 정토종(淨土宗), 그리고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이전의 여러 종파들과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표방하는 선종(禪宗) 등이 있다.


이제 인도의 대승불교 사상인 공(空)사상, 유식(唯識)사상, 여래장(如來藏)사상, 밀교(密敎)사상을 살펴보고, 이어서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종파인 천태종(天台宗), 화엄(華嚴宗), 정토(淨土宗), 선宗(禪宗) 등의 사상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공사상


(1) 공사상의 의미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이 용수이며, 이 용수의 대표적인 저술인 <중론(中論, Madhyamakakarikah)>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중관(中觀) 사상이라 하며, 또 그 중관 사상의 흐름을 이어받는 불교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라 부른다. 용수는 <중론> 외에도 다수의 저작을 남기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론>으로 이후 많은 주석서가 씌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수 당시의 제자로 제바(提婆)와 라후라발타다(羅侯羅跋陀羅)가 있다. 제바는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면서 외도(外道)의 사상을 맹렬하게 비판하여 논적(論敵)에게 암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제바는 <사백론(四百論)>, <백론(百論)>, <백자론(百字論)> 등을 남기고 있다. 라후라발타라는 용수와 제바와 제자로 <중론>에 대한 주석을 주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지 않고, <반야바라밀다찬(般若波羅蜜多讚)>, <법화찬(法華讚)> 등이 전해진다. 제바와 라후라발타라는 용수와 함께 초기 중관파로 분류되며, 용수의 사상을 선양하고 중관 사상의 기틀을 다졌다.


초기 중관파에 이어서 용수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중관 사상을 완성시키는데 기여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이 중기 중관파의 논사들이다. 중기 중관파들이 활약했던 시기는 대체로 5 ~ 7세기로 이들은 모두 용수의 <중론(中論)>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고 있다. <중론>의 주석가는 10명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후기 중관파의 문헌과 티벳의 전승에서는 8명의 주석가가 거론되고 있다. 8명의 주석가 가운데 중관 사상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불호(佛護, Buddhapalita)이다. 불호는 <중론>의 주석서로 티벳역으로 현존하는 <근본중론주(根本中論註)>를 남겼지만 그의 주석태도는 후에 청변으로부터 비판받는다. 청변은 <반야등론(般若燈論)>에서 불호의 주석태도를 비판하고 논리식에 따른 주석태도를 취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월칭에 의해서 비판된다. 이러한 비판으로 후에 티벳에서는 중관파를 청변 계통의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와 불호, 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로 분류한다.


이 중기 중관파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중관파가 후기 중관파로 분류되는 논사들로서, 그 가운데 자립논증파 출신인 적호(寂護, Santaraksita)와 연화계(蓮華戒, Kamalasila)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기 중관파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8 ~ 11세기로 이들은 중관사상과 유가행파의 사상을 종합하여 후에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고 불리었다.



(2) 공사상의 배경

초기 대승불교의 중심적인 철학인 공사상은 당시 성행하고 있던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적인 실재론에 반발로서 형성되었다. <발지론(發智論)>은 B.C 2세기 내지 1세기에는 성립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부파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설일체유부의 실재론의 체계가 <팔천송> 이전에 확립되어 북인도에 널리 유포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비달마 철학이 실재라고 고집하는 제법을 부정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으며, 또한 사물이라는 것은 무지한 범부나 일반인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5온을 필두로 하는 제법은 마치 환인(幻人)처럼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 속박되지 않으며 해방되지도 않는 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진여, 眞如)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유정으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꿈이나 환과 같다.


최초기에 있어서는 보살은 어떠한 것도 인식해서는 안되며 집착하고 마음을 고정시켜 주착해서는 안된다는 보살의 마음가짐과 어떠한 것도 본체를 갖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런 매개없이 동일시 되고 있었다.



(3) 용수의 공사상

용수는 중관파(中觀派)의 개조이며 팔종(八宗)의 조사로도 추앙받고 있는데, 이는 용수 이후의 대승사상은 그가 체계화한 공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용수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구마라집 역의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길가야와 담요 공역의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5권,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0권 등이 있다. <용수보살전>에 의하면 용수는 남인도 출신의 바라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 당시의 학문에 거의 통달하여 명성이 드높았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은신술을 익힌 그는 왕궁에 침입해 쾌락에 탐닉했으나, 애욕은 모든 재앙의 근원임을 깨달아 불교에 귀의해 출가했다. 그는 입산하여 출가수계를 받았다. 3개월간의 정진으로 소승의 경전에 통달한 후 다시 경전을 찾아 설산(雪山)을 헤맨 끝에 산중의 어느 탑 앞에서 늙은 비구로부터 대승경전을 전수받았다. 여기서 많은 진리를 깨달았지만 부족하다고 여긴 용수는 다시 경전을 찾아 다녔다. 그러던 끝에 대룡(大龍)보살의 도움으로 바닷속 궁전에서 심오한 경전을 전수받았다. 이를 깊이 연구하여 용수는 갖가지 심의(深義)에 통달하고 무생(無生)의 이인(二忍)을 얻었다고 한다.


이처럼 <용수보살전>은 전설로서 객관적인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용수가 남인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의 왕조와 교섭을 가졌음을 사실이다. 이는 용수가 어느 왕에게 보낸 편지의 모음인 <용수보살권계왕송(龍樹菩薩勸誡王頌)>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수가 활동한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대개 2 ~ 3세기 또는 150 ~ 25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수의 저작은 많지만 후세 여러 저작이 그의 이름으로 가탁되고 있어서 진위가 명확하지 않은 문헌들이 적지 않다. 그의 저작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공과 연기에 관한 것으로는 <중론송(中論頌)>, <공칠십론(空七十論)>, <십이문론(十二門論)>,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 <인연심론송석(因緣心論頌釋)>, <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이 있다. 공사상에 입각해서 외도(外道)인 니야야학파의 학설을 비판한 것으로는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이 있다. 그 외의 저작으로는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대승이십송론(大乘二十頌論)>,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용수보살권계왕송(龍樹菩薩勸誡王頌)>, <보리자량론송(菩提資糧論頌)>, <사종찬가(四種讚歌)>이 있다. 이 가운데 <십이문론>과 <대지도론>은 한역만이 있어서 용수의 저작임이 의심되고 있다.



(4) 중기 중관파

용수 이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관파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중관파가 명확한 체계를 갖춘 것은 불호(佛護) 이후이다. <중론>의 주석가는 후기 중관파의 문헌과 티벳의 전승에서 8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존하는 주석서로는 무외(無外, Akutobhaya)의 주석, 청목(靑目, Pingala)의 주석, 무착(無着)의 <순중론(順中論)>, 불호(佛護, Buddhapalita)의 주석, 청변의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안혜(安慧, Sthiramati)의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월칭(月稱, Candrakirti)의 <명구론(明句論)>이 있다.


6세기 이후 융성한 중관파의 문헌은 중국에 별로 소개되지 않고 티벳에 전승되었다. 티벳의 전승에 의하면 중관파는 최고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해 두 파로 나뉜다. 불호는 공의 논증을 귀류논법으로 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청변은 <반야등론석>에서 귀류논법을 배척하고 인명(因明)의 추론형식에 따른 논증법으로 공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월칭은 청변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불호를 옹호하게 된다. 이러한 논쟁을 겪으면서 중관파는 불호, 월칭 계통의 귀류논증파(歸謬論證派, Prasanghika)와 청변 계통의 자립논증파(自立論證派, Svatantrika)로 나뉘었다.


귀류논법은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여 그 주장을 파척하는 논법이다. 즉 입론자가 어떤 명제의 참을 주장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이에 대해 반대한다면, 상대방의 의향에 덧붙여 그 명제에 부정을 가정하고, 이 가정된 명제를 전제로 하여 도출된 결론이 불합리하거나 오류임을 밝힘으로 입론자의 주장이 참임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주장에 과실이 있음을 지적하면 결국 상대방은 어떤 입언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空)을 논증하려고 하는 것이 귀류논증파의 방법이다. 귀류논증파는 스스로 주장을 세우지 않는다.


이에 대해 청변은 귀류논증은 논증법으로 불확실하다고 하여 이를 배척하였다. 즉 불호는 귀류논법을 써서 상대방의 입론을 파척했지만 그것은 단지 파척한 것일 뿐 적극적으로 공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청변은 공(空)을 나타내는데는 귀류논증으로는 불충분하며 독립된 추론으로 공을 논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청변은 진나(陳那)의 추론방식에 따라 주장명제, 이유명제, 실례명제의 형식을 갖춘 논증식을 받아들여 논증하려고 했다. 이처럼 청변은 논리를 중요시했지만 공성 자체는 논리를 초월해 있으며, 공성은 논리적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승의(勝義)의 입장에서 논리학을 부정하면서도 세속의 범위 내에서는 공성을 논리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변의 시도에도 문제점은 있다. 추론형식에 따를 때 이유개념과 실례는 주장자와 반대자가 모두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자는 아직 최고의 진리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유개념 및 실례는 세속의 지식을 채용해야 한다. 이에 대해 주장명제는 최고의 진리인 승의제(勝義諦)를 표현한다. 이처럼 지식의 내용에 세속제와 승의제의 차이가 있으므로 청변은 주장명제에서 ?승의제에서는 ~?이라는 한정사를 붙인다. 그러나 이는 차원이 다른 두 가지 진리를 설정하는 것이므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5) 후기 중관파

중기 중관파는 유식사상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배척하는 입장이 강하였다. 그러나 점차 중관파 가운데 유식사상이 도입되고, 중관파의 입장에서 유식사상과의 융합이 시도되게 된다. 이는 적호(寂護, Santaraksita)와 그의 제자 연화계(蓮華戒)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들을 유가행중관파(瑜伽行中觀派)라고 불렀다.


8세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적호에게는 <진리강요(眞理綱要)>, <중관장엄론> 등의 많은 저작이 있다. <진리강요>는 중관파의 입장에서 인도의 여러 철학, 불교 안의 여러 학파와 학설을 광범위하게 비판한 것으로, 당시의 사상계의 상황을 전해준다. <중관장엄론>에서는 대표적인 불교학설을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파, 중관파의 네 단계로 나누면서 순차적으로 뒤의 학설은 앞의 학설을 넘어선다고 하며, 최고의 진리인 중관파에 들어가는 전제로서 다른 학파를 인정한다. 이런 입장은 다른 학파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전의 중관파와는 다르다. 적호는 청변의 자립논증파 계통을 계승하며, 법칭의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유식설에 대해서는 유상유식(有相唯識)보다 무상유식(無相唯識)을 높이 평가하며, 무상유식의 입장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적호는 만년에 티벳에 초빙되어 티벳불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제자인 연화계도 티벳으로 들어가 중국의 선승 마하연(摩訶衍)과 점오와 돈오에 관해 논쟁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연화계에게는 적호의 저작에 대한 주석 외에 <수습차제(修習次第)> 등의 저작이 있다. <수습차제>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난 후 성불하기까지의 수행순서를 밝힌 것이며, 발보리심, 반야와 방편, 문사수(聞思修)의 삼혜(三慧), 지관(止觀), 번뇌 등을 해설하고 있다. 그 후 중관파는 10세기 경 프라즈냐까라마띠, 라뜨나까라샨띠 등이 배출되어 활약하였다.


중기 중관파는 주로 용수의 저작인 <중론>을 주석하고 이를 논증식으로 체계화하려고 했으며, 유식사상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에 비해 후기 중관파는 용수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지만 법칭의 지식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자립논증파에 속하며, 유가행파와 대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학설에 경량부나 유가행파의 사상을 흡수하려고 하였다. 후기 중관파는 종합적인 학파로 발전되어갔다.




유식


(1) 유식사상의 흥기

유식사상에서는 자기의 밑바닥에 아뢰야식을 세워 그 식으로부터 자기와 존재하는 세계의 일체가 변현(變現)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것은 식에 따라 자기를 실체시하는 것으로서 제법무아라는 불교 본래의 입장을 상실한 것이다라는 이해가 제법 널리 퍼져있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후기 유식사상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이 이해되어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초기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것과는 거의 동떨어진 깊은 사상이었다고 짐작하고 있다.


유가행파는 유식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의 학파로서, 공관을 설한 중관파와 후대의 인도 대승불교의 두 유파를 형성하였다. 유가행(瑜伽行)이란 요가의 실천을 의미하지만 원어인 '요가짜리(yogacara)에는 '유행을 하는 사람', '요가의 스승'이라는 의미도 있다. 현장은 이것을 '유가사(瑜伽師)'라 번역하였다. 이 유가사들에 의해 유식사상이 발생하였다.


유가행파의 학설은 중국이나 일본의 법상종(法相宗)에 해당된다. '법상'이라는 것은 법 즉 부처님 가르침의 형태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학문이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대승적인 해석을 부여하여 구사론과는 다른 전개 방식을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유식사상의 발달

굽타왕조시대에 형성된 유가행파(瑜伽行派)는 <해심밀경(解心密經)>이나 <대승아비달마경(大乘阿毘達摩經)>의 사상을 이어받아 조직된 학파이다. 이들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서 유식(唯識)의 체험을 심화하고, 용수에 의해 체계화된 공사상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했다. 유가행파는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이 유가행파의 시조는 미륵(彌勒, Maitreya)이며, 그 후 무착(無着, Asanga)과 세친(世親, Vasubandhu)이 유식설을 체계화시켰다. 유식파의 개조인 미륵 논사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무착이 미륵보살을 만나 유가행(瑜伽行)의 깊은 뜻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전설은 중국과 티벳에도 전해졌으며 무착이 미륵보살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는 논(論)이 중국과 티벳에 각각 5부가 있다. 이 양자의 전승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를 종합하면 일곱 가지가 된다.


미륵의 저작으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변중변론송(變中邊論頌)>,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현관장엄론송(現觀莊嚴論頌)>, <법법성분별론(法法性分別論頌)>,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이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은 유가행파의 기본서로서 본지분(本地分), 섭결택분(攝決擇分), 섭석분(攝釋分), 섭이문분(攝異門分), 섭사분(攝事分)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지분(本地分)에서는 요가 행자가 수행해야 할 17개의 명상단계를 성명하고 있고, 섭결택분(攝決擇分)에서는 아뢰야식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을 제외한 나머지 저서는 모두 간결한 시구로써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究境一乘寶性論)>은 티벳에서는 시구의 부분이 미륵의 교설이며, 산문 주석은 무착의 저작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전체가 견혜(堅慧)의 저작이라고 한다. <구경일승보성론>의 저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미륵의 뒤를 이어 유식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무착과 세친이다. 무착은 북인도 간다라 지방의 푸루샤푸라 출신으로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출가했다가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미륵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무착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현양성교론송(顯揚聖敎論)>, <순중론(順中論)>, <육문교수습정론송(六門敎授習定論)>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섭대승론(攝大乘論)>으로,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특성을 10항목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다. 10항목의 배열은 현실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단계를 나타내고 있다. 소지의분(所知依分)에서는 이전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켜 아뢰야식에 대해 논하고 있고, 소지상분(所知相分)에서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삼성설(三性說)을 논하고 있다.


세친은 대략 4 ~ 5세기 인물로 추정되는데, 무착의 동생으로 처음에는 소승교단에 출가하여 <구사론>을 저술하였지만 형인 무착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세친은 미륵과 무착의 대부분 저서들에 주석을 썼으며, 여러 대승경전의 해설서도 썼다. 유식설에 관련된 저작으로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삼자성게(三自性偈)>,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등이 있다. 세친의 주요 저작은 <유식삼십송>과 <유식이십론>이다.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은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대승장엄경론>, <변중변론> 등을 바탕으로 해서 유식설의 요점을 30개의 시구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후 유식 사상가들은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를 써서 그들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다. 대표적인 주석으로는 안혜(安慧)의 주석과 호법(護法)의 주석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이 있다. <유식삼십송>은 30개의 시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세친은 여기서 식(識)의 전변(轉變)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아뢰야식, 말나식(末那識), 전육식(前六識) 등 8식에 의해 현상 세계가 식의 현현(顯現)임을 설하고 있다.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은 약 20개의 시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 세친은 소승불교를 비롯한 일반의 사상을 비판하여 ?오직 식(識)뿐이며 외경(外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무착과 세친에 의해 대성된 유가행파는 하나의 학파로 계속 발전해갔다. 이후 연구는 주로 기본적인 경론에 대한 주석작업으로 이어졌다. 현장은 세친의 <유식삼십송>을 주석한 사람으로 십대(十大) 논사를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호법(護法), 덕혜(德慧), 안혜(安慧), 친승, 난타(難陀), 정월(淨月), 화변(火變), 승우, 승자, 지월(智月)이다. 이 가운데 안혜와 호법의 주석만이 남아있다. 다른 주석들은 호법의 주석 가운데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세친 이후 유가행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진나(陳那)를 들 수 있다. 진나는 480 ~ 540년 경의 인물로 주된 저작은 인명(因明:논리학)에 관한 것으로 <집량론(集量論)>이 있으며, 유식에 관계된 것으로는 <관소연론(觀所緣論)>, <취인가설론(取因假說論)> 등이 있다. 논리학은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에 공통된 학문으로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파를 니야야학파라고 한다. 니야야는 자기의 주장을 상대방으로 하여금 승인하게 하기 위한 변론이다.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因明)이라고 하는데, 인(因)에 관한 명(明)이라는 뜻이다. 이전의 논리학에서는 지식을 얻기 위한 수단인 인식근거(量)에 현량(現量:직접 지각), 비량(比量:추론), 비유량(比喩量:유추), 성언량(聖言量:성인의 말)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진나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 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근거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진나는 추론식을 종전의 오분작법(五分作法)에서 삼지작법(三支作法)으로 개량하였다. 오분작법(五分作法)은 종(宗:주장), 인(因:이유), 유(喩:실례), 합(合:적용), 결(結:귀결)로 구성되어 있다. 삼지작법(三支作法)은 종(宗), 인(因), 유(喩)로 구성된 것으로 유(喩)에는 동유(同喩)와 이유(異喩)가 있다.


진나 이후 인도의 모든 학파에서는 논리학이 중시되었으며,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이를 사용하였다. 진나의 논리학은 법칭(法稱)에게로 이어져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8세기 이후 중관파 논서에서는 진나와 법칭 계통의 유식설을 유상유식(有相唯識)이라고 하여, 이를 무착 이래의 전통적인 학설인 무상유식(無相唯識)과 구별하고 있다. 유상유식(有相唯識)은 마음 안의 대상의 형상과 이를 지향하는 인식작용의 대응성, 즉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대응성에서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지각의 내용으로 파악되는 사물의 형상에 사유가 이와 합치하는 판단을 내릴 때 정확한 인식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대상의 형상을 표상함과 이를 지향함, 즉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작용 자체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분별은 미혹한 것이며 진리는 직관에 의해 획득된다고 보았다. 대체로 유상유식(有相唯識)은 식(識)의 실유(實有)를 강조함에 대해 무상유식(無相唯識)은 식(識)의 무(無)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3) 팔식의 구조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으로 부른다. 이러한 용례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心), 의(意), 식(識)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心), 의(意), 식(識)의 체성(體性)은 염오성(染汚性)이라고 보았으며, 심의식(心意識)은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여겼다. 초기 경전에서는 각각의 개별적인 심리작용은 없었으며, 생각하고 사량하고 요별하는 심리작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주체적 측면과 작용적 측면으로 파악하고, 주체적 측면을 심(心), 심법(心法), 심왕(心王) 등으로 부르고 작용적 측면을 심소유법(心所有法), 심소법(心所法) 등으로 부른다. 이러한 분류가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부파불교에서부터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분류하였는데, 심왕(心王)은 마음의 주체로서 인식주관이며, 심소(心所)는 개별적인 심리작용이다. 심왕(心王)이 바로 심의식(心意識)이며 이는 육식(六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마음의 작용을 구분하면서 심(心), 의(意), 식(識)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대비바사론> 제72권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의 무차별설(無差別說)과 차별설(差別說)을 같이 설하고 있다. 심의식(心意識)의 무차별설은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 다같이 정신의 주체를 가리키며 체(體)가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는 설일체유부의 견해이다. 심의식(心意識)의 차별설은 명칭과 교설의 시설, 의미, 업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체(體)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심(心)은 집기(集起)의 의미가 있으며, 의(意)는 사량(思量)의 의미가 있으며, 식(識)은 요별(了別)의 의미가 있다고 설했으며 이는 정신의 주체이며 작용만 다를 뿐 체(體)는 하나라고 설하였다.


그러나 점차 유식설이 발달해가면서 유가행파의 유가사들은 선정 중에 심층적인 식의 흐름과 기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래 부파불교시대부터 탐구되던 두 가지 문제인 윤회의 주체, 번뇌와 아집의 주체 및 의근(意根)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阿賴耶識), 번뇌와 아집의 주체는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식체(識體)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육식설(六識說)에다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말나식(末那識)을 결합하여 팔식(八識)을 구성하였다.


팔식(八識) 가운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묶어서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식들은 각각의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외부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 즉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이식(耳識)은 성경(聲境)을, 비식(鼻識)은 설경(舌境)을, 설식(舌識)은 미경(味境)을, 신식(身識)은 촉경(觸境)을 요별한다.


제6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키는데, 전오식(前五識)의 인식내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기억하고 회상하고 추리한다. 이 의식은 전오식(前五識)으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번째는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단독으로 인식하는 경우이고[五俱意識], 두번째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禪定)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五不俱意識]를 말한다.


제7 말나식(末那識)은 자아의식으로 제6식보다 사량분별작용이 강하고 집요하다. 즉 제6의식 깊숙한 곳에 잠재하는 이기성과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이 말나식인 것이다. 말나는 인도의 마나스(manas)의 음사어로 ?이것저것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또 말나식은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으로 상정된다. 우리가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하거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 이들에 의한 인상이나 여운 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식은 제6식보다는 깊고 제8식보다는 얕은 식이 상정됨으로써 가능하다. 이러한 식을 제7말나식이라고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아뢰야(阿賴耶)는 인도의 아알라야(alaya)란 말을 그대로 음사한 것이다. 아라야란 ?밑층에 깔려있는, 파묻히다?라는 말을 명사화한 것이며, ?감추다, 간직하다?라는 뜻이다.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 같이 항상 제7 말나식의 집착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 경우 제8 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본래 의미는 유루법(有漏法)이 현행(現行)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에 오르면 이 식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4) 식의 전변

유식설에서는 마음의 주체적인 측면을 팔식(八識)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삼능변(三能變)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팔식(八識)은 인간의 마음이 표층에서 심층으로 향하는데 여덟 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삼능변(三能變)은 마음이 심층에서 표층으로 능동적으로 대상에 작용하는 면을 말한 것으로 이것이 식전변설(識轉變說)이다.


<중변분별론>에서 식은 대상으로서, 감관으로서, 자아로서, 육식(六識)으로 현현(顯現)한다고 설해져 있다. 즉 식의 현현은 설해지지만 아직 식의 전변을 설하지는 않는다. 식의 전변(轉變)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한 것은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다. 전변(轉變)의 원어는 빠리나라(parinama)로 문자 그대로 변화하는 것, 달라지는 것이다. 전변이라는 말은 인도철학의 한 학파인 상키야 철학에서 근본 물질에서 시작하는 우주의 전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세친은 전변을 시간적 변화로 파악하하고 있는데, 전변에는 잠재심으로서의 아뢰야식이 형태를 바꾸어 표면심으로 나타나는 변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식설에 있어 전변(轉變)은 인전변(因轉變)과 과전변(果轉變)으로 나뉜다. 과전변(果轉變)에는 이숙(異熟)전변, 사량(思量)전변, 요별경(了別境)전변이 있다. 인전변(因轉變)이란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으로 전변하는 힘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 종자는 현행의 훈습에 의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것이다. 즉 선(善)의 현행은 선의 종자를, 악(惡)의 현행은 악의 종자를, 무기(無記)의 현행은 무기의 종자를 아뢰야식에 저장한다. 이 인(因)과 같은 성질의 종자를 등류습기(等類習起)라고 하며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현행의 심리경험은 명언(名言)의 상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선악의 행위는 업종자(業種子)를 아뢰야식에 훈습하고, 이 업종자(業種子)에 의해 업의 과보가 생긴다. 이 아뢰야식 가운데 명언종자(名言種子)와 업종자(業種子)가 전변하는 힘을 인전변(因轉變)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전변(果轉變)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생의 업의 과보로서 아뢰야식의 중동분(衆同分) 가운데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한 개인의 생존이 선택되는 것, 아뢰야식의 모태를 빌어 특정한 개인의 생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총보(總報)의 과체(果體)로서의 아뢰야식이 성립하는 것으로서 전생의 업의 과보에 의해 인간으로 태어날 때 모태에 의탁하는 찰나에 인간의 아뢰야식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이 개인적 생존의 아뢰야식 자체의 종자에서 현행의 8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숙전변(異熟轉變), 사량전변(思量轉變), 요별경전변(了別境轉變)의 세 가지 전변이 있다.


이숙전변(異熟轉變)은 아뢰야식으로, 자기의 모든 행위를 훈습하여 간직하는 것이다. 아뢰야식은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모든 종자를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총보(總報)의 과체(果體)로서의 아뢰야식은 이숙(異熟)이라고 말해진다. 이숙(異熟)이란 과거 업의 결과로 생긴 것이지만 그 자신은 선도 악도 아닌 것은 의미한다. 이 아뢰야식도 식인 점에서 인식작용을 하고 있지만 식의 활동이 미약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다. 식의 활동을 하고 있는 점에서 현행(現行) 뢰야이며, 이에 대해 종자의 집합체인 점에서 종자(種子) 뢰야이다. 현행 뢰야와 종자 뢰야는 아뢰야식의 두 측면이다. 아뢰야식은 찰나멸하지만 그 가운데 성격이나 기억 등은 종자로 보존되어 개인의 인격을 형성한다. 즉 찰나멸을 되풀이하면서 변화해가는 것이다. 아뢰야식을 흔히 고정된 실체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아뢰야식은 인격의 주체로서 자아와 같지만 고정적인 실체는 아니다. 아뢰야식의 전변을 이숙전변(異熟轉變)이라고 한 것은 윤회의 주체로서 아뢰야식은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성립한 것이며, 이숙과(異熟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명언종자가 보존되어 있고, 그들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닌 중성의 상태[無記]인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밝힌 것이 이숙전변이다.


사량전변(思量轉變)이란 말나식(末那識)을 말하며, 사량(思量)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배후에 있으며, 사량에 의해 끊임없이 자아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식이다. 이것은 염오의(染五意)라고도 불리며,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더러워져있는 식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근거로 하여 생기며, 아뢰야식 가운데 스스로의 종자가 전변하여 성립한 식이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자기의 자아로 잘못 인식하고 자아의식을 일으킨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배후에 있는 자아의식이지만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처럼 명료하지는 않다. 말나식은 제6의식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기절했을 때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자아의식을 저절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별(了別)이란 판단 즉 인식활동, 식의 작용을 말한다. 아뢰야식이건 말나식이건 식은 요별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판단하는 전6식의 작용은 특히 미세하지도 않고 대략적이기 때문에 전6식의 작용을 요별경전변(了別境轉變)이라고 한다. 전6식이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전5식과 제6의식(意識)이다. 전5식은 감각적 인식이며, 그 소연(所緣)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의 오경(五境)이다. 제6의식에는 감각적 인식과 동시에 활동하고 이 결과를 인식하는 것과 의식만이 단독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전5식은 감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의식과 동시에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물들어 5식도 선(善), 악(惡), 무기성(無記性)이 된다고 한다. 의식은 외계의 사물을 실체적으로 구상하여 법집(法執)을 일으킨다.




(5) 삼성설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공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여 인식과 존재와 깨달음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 삼성설(三性說)이다.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이며, 의타기성은 서로 의지하는 연기의 세계이며,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이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분별성(分別性)이라고도 하며, 범부의 인식내용이 허망함을 뜻한다. 범부가 인식하는 것은 성인이 인식하는 것과 다른 것으로, 현상세계와 자아를 집착하여 이를 고정적 실체로 인식하고 있다. 즉 이러한 범부의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허망분별에 의해 거짓으로 분별된 인식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성인 것이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의타성(依他性)이라고도 한다. 의타기(依他起)란 다른 것에 의존해 생긴다는 뜻으로 타(他)란 연(緣)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의타기(依他起)란 연기(緣起)와 같은 것이다. 식(識)은 수많은 연(緣)이 모여서 성립한 것으로 독자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며, 연(緣)이 흩어지면 식(識)도 사라지게 된다. 식은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은 여러 가지 조건이 서로 화합됨에 따라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우리의 현실세계이며, 모든 존재의 보편적인 모습인 것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진실성(眞實性) 이라고도 하며, 의타기성의 식(識)으로부터 허망한 분별이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타기성 이외에 특별한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상세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으로 의타기성의 진실을 각성하는 것이다. 즉 의타기성의 세계를 의타기성의 세계라고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다. 실체를 그대로 자각하는 것, 존재의 진상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즉 원성실성과 의타기성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의타기성에서 변계소집성인 주체가 원성실성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의 경지에서도 의타기성의 상(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미망에 싸여있는 것은 변계소집성이며, 자기를 깨닫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6) 유식의 수행

유식설에서는 미혹과 허망분별로 가득찬 세계를 자각하고 이를 전환하여 무분별의 세계인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설하고 있다. 즉 윤회의 세계에서 전환하면 깨달음의 세계가 드러나는데 이를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유식설에서는 유가행의 수습단계가 발전하여 오위설(五位說)로 정착되었지만 이미 부파불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설해지고 있었다. 오위(五位)는 유식관의 진전을 나눈 것으로,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이다.


첫째 자량위(資糧位)는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축적하는 수행의 준비단계라는 의미이다. 즉 친구의 권유나 자기의 의지로써 유식의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 유식(唯識)이 자기 것으로 체험되지 않은 단계이다. 따라서 아집, 법집의 번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단계이다.


둘째 가행위(加行位)는 이미 직접적으로 유식(唯識)의 수행으로 나아간 단계이다. 그러나 눈 앞에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이것이 유식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단계이므로 아직 참된 유식에 들어 갔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유식이라는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가행위(加行位)에서 사심사관(四尋四觀)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 등의 관법을 닦아 유식의 수행이 진전함으로써 유식에 통달한다. 이것이 세번째 통달위(通達位)이며,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즉 인식의 대상을 나로 집착하거나 법으로 집착하는 일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혜가 소연(所緣)에서 생기지 않을 때 유식성에 머문다?라고 한다. 소연(所緣)에서 앎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집착하는 주체도 없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열이 없어진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를 떠난 지혜, 즉 공(空)의 지혜이다.


이 유식에 안주한 지혜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견도(見道)에는 진견도(眞見道)와 상견도(相見道)가 있다. 진견도(眞見道)는 근본 무분별지(無分別智)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성(性)을 깨닫는 것이고, 상견도(相見道)는 후득지(後得智)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상(相)을 깨닫는 것이다. 이 통달위는 성자의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십지(十地) 중 최초의 환희지에 든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수행을 계속하여 제10지의 위(位)에 이르기까지가 네번째 수습위(修習位)이다. 즉 이 단계에서는 되풀이해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수습하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전의(轉依)를 실현하는 것이다. 앞의 통달위 단계에서도 무분별지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다시 번뇌가 생긴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분별지를 자주 수습하여 그 수습이 완성될 때 전의(轉依)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번뇌장(煩惱障)을 떨쳐버림으로써 열반을 얻고 소지장(所知障)을 떨쳐버림으로서 보리를 얻는 것이다.


수습위의 다음인 다섯번째 구경위(究竟位)는 불과(佛果)이다. 즉 오랜 기간동안 수행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래장사상


(1) 여래장 사상의 배경

여래장사상이 대승불교 중의 하나의 학설로서 위치하게 된 것은 중국에 와서이다. 화엄종의 현수 법장(法藏)이 대소승경론을 소승,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으로 크게 네 등분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부터 이미 출현, 전개되어 왔다.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근본은 일체의 중생들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여래장(如來藏)의 개념을 이론화하고 발전시킨 경전들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여래의 태(胎)라는 의미로, 중생들은 그 안에 여래를 키우는 태와 같다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이란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 즉 중생은 여래를 감추고 있다는 사상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여래장사상은 그후 화엄, 선을 위시하여 모든 대승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그 후 여래장사상은 진여가 무명의 연을 만남에 의해 진여의 체가 온통 그대로 일어나 생멸변화하는 만유가 되니 이 생멸 미계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 하였는데, 그러면 무명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홀연히 일어났다'고만 하고 있다. 그래서 무명은 그 시작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였고, 무명의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이의 해결을 위하여 여래장연기설에 이이서 후에 법계연기사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2) 여래장계 경전

여래장사상이 대승불교 중의 하나의 학설로서 위치하게 된 것은 중국에 와서이다. 화엄종의 현수 법장(法藏)이 대소승경론을 소승,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으로 크게 네 등분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서부터 이미 출현, 전개되어 왔다.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근본은 일체의 중생들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여래장(如來藏)의 개념을 이론화하고 발전시킨 경전들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여래의 태(胎)라는 의미로, 중생들은 그 안에 여래를 키우는 태와 같다는 것이다.


여래장사상이란 '일체중생은 여래장이다' 즉 중생은 여래를 감추고 있다는 사상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여래장사상은 그후 화엄, 선을 위시하여 모든 대승사상의 근원이 되었다. 그 후 여래장사상은 진여가 무명의 연을 만남에 의해 진여의 체가 온통 그대로 일어나 생멸변화하는 만유가 되니 이 생멸 미계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 하였는데, 그러면 무명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홀연히 일어났다'고만 하고 있다. 그래서 무명은 그 시작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였고, 무명의 정체를 알 수 없기에 이의 해결을 위하여 여래장연기설에 이이서 후에 법계연기사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3) 여래장 사상의 연원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근본은 일체의 중생들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래장 계통의 경전들은 여래장(如來藏)의 개념을 이론화하고 발전시킨 경전들이다. 여래장(如來藏)이란 여래의 태(胎)라는 의미로, 중생들은 그 안에 여래를 키우는 태와 같다는 것이다.


여래장 계통의 경전 가운데 제일 먼저 형성된 것은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이다. 이 경에서는 ?일체 중생은 [그 안에 여래를 장(藏)하고 있는] 여래장(如來藏)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 경은 매우 짧은 경으로 여래장에 대한 설명방식도 매우 소박하다. 무사한 연꽃 안에 붓다가 좌선하고 있는 것처럼, 중생의 번뇌 안에도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몸이 갖추어져 있어 번뇌가 멸할 때 붓다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래장인데, 중생 안에 들어있는 여래(如來)를 <여래장경(如來藏經)>은 여래지(如來知), 여래지견(如來知見), 여래법성(如來法性), 여래의 종성(如來種姓)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여래를 장(藏)하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아홉 가지 비유로 제시하고 있다. 색이 바랜 연꽃잎 속에 붓다가 단정히 앉아 있듯이, 꿀벌의 무리 가운데 꿀이 감추어져 있듯이, 오물이 묻은 황금과 같이, 가난한 집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이, 망고나무 열매 안에 싹을 틔우는 종자가 있듯이, 누더기에 감싸인 황금의 상(像)과 같이, 비천한 여인이 전륜성왕을 임신한 것같이, 진흙에 묻힌 황금의 상과 같이, 일체 중생 속에 여래장이 존재한다.


<여래장경>으로부터 비롯되는 여래장설은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과 <승만경>으로 계승되고 점차 이론적으로 정비되어 간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의 주요 내용은 중생계(衆生界)가 곧 법계(法界)이며, 중생의 깨달음에 증감(增減)이 있더라도 중생계와 법계는 증감이 없으며, 이 둘은 동일한 계(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그릇된 견해에 사로잡혀 생사 윤회의 바다에 침몰하게 된다. 이 중생계, 즉 중생의 본질은 여래장(如來藏)이고 여래의 법신(法身)이다. 그리고 이 여래장이 무량의 번뇌에 감싸여 있는 것을 중생이라 부르고, 일체의 번뇌를 떠나 청정해질 때에는 여래라 부른다고 한다. <여래장경>이 여래장과 중생을 동일시하는 반면에 <부증불감경>은 여래장을 중생계 즉 중생의 본질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중생 성불의 가능성을 여래장에서 구하고 있다.


여래장계 경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승만경>이다. 여기에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역의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1권 외에, 이역(異譯)으로 <대보적경(大寶積經)> 제48회 승만부인회가 있다. 이 경의 주인공인 승만은 코살라국의 파사익(波斯匿)왕과 말리(末利)부인 사이에 태어난 딸로 아요디야의 어느 왕에게 출가했다. 경전은 그 부모가 딸에게 불교에의 믿음을 권하는 편지를 보낸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편지를 읽은 총명한 승만부인이 붓다를 찬탄하는 시구를 설하자 그 자리에 붓다가 나타나 그녀가 붓다가 될 것을 수기한다. 그후 그녀가 설법자가 되며, 붓다는 그 설법을 승인하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은 고(苦)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보리심이라고 하고, 법신(法身)이 번뇌에 의해 감싸여 있을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래장 그 자체는 본래 청정한 자성청정심으로 단지 외적인 번뇌에 염오(染汚)되어 있음을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여래장을 불공(不空)여래장과 공(空)여래장의 두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불공(不空)여래장은 여래의 지혜와 불가분적인 여러 덕성을 갖춘 여래장을 말하고, 공(空)여래장은 여래의 지혜와 거리가 먼 번뇌가 본래적으로 없는 여래장을 의미한다. 여래장의 기초적인 사상은 <승만경>에 거의 다 제시되어 있다.


여래장사상을 교의적으로 집대성한 것은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이다. 여기서 보성(寶性)은 보성분별(寶性分別)의 줄인 말로 삼보(三寶)의 성(性)이라는 의미이다. <보성론>은 여래장을 주제로 하여 종합적인 체계를 수립한 논서이다. 그 내용은 여래장계 경전의 설명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교설이 발견되지 않으며, 다만 염오된 진여[有垢眞如]와 염오됨이 없는 진여[無垢眞如]를 구별하고 있다. 염오된 진여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중생의 본질로서 여래장을 지칭하며, 염오됨이 없는 진여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나타나는 불(佛)의 법신(法身)이다.


<능가경>과 <대승기신론>은 아뢰야연기설의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을 융합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능가경(楞伽經)>은 아비달마적인 경전으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여러 종류의 대승사상들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능가경(楞伽經)>에는 세 종류의 한역본이 있다. 구나발타라 역의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 보리유지 역의 <입능가경(入楞伽經)> 10권, 실차난타 역의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7권이 있다. 이 가운데서 산스크리트본과 가까운 것은 실차난타 역의 <대승입능가경>이다. <능가경>은 스스로의 중요한 내용을 오법(五法), 삼자성(三自性), 팔식(八識), 이무아(二無我)로 규정하고 있다. <능가경>의 사상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아뢰야식과 여래장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은 동일한 것의 양면으로, 여래장은 생멸의 기저가 되는 상주(常住)의 원리, 아뢰야식은 생멸의 법으로 작용하는 측면을 의미한다. 여기서 여래장은 깨달음의 세계, 아뢰야식은 미혹의 세계와 관련된다. 본래 아뢰야식은 생사의 세계를 형성하는 망식(妄識)이었으나 <능가경>은 이것을 여래장과 동일시하므로 제법(諸法)은 곧 여래장의 현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즉 아뢰야연기설이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로 바뀌게 된 것이다.


<능가경>과 사상의 맥을 같이 하여 여래장연기를 설하고 있는 것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대승기신론>은 진여(眞如)와 생멸(生滅)을 같은 일심(一心)의 양면으로 본다. 일심법계(一心法界)의 무차별상은 진여이며, 일심법계의 차별상은 생멸의 세계인 것이다. 이 차별상으로서의 일심법계가 곧 여래장 자성청정심이며,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고 한다. 아리야식은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이 화합하여 비일비이(非一非異)한 양상이며, 염정(染淨), 각(覺)과 불각(不覺)을 포함하는 진망화합(眞妄和合)의 식(識)이라고 한다. 아리야식의 불각(不覺)에 의하여 염(染)연기인 수연(隨緣) 유전의 생사의 세계가 전개되며, 아리야식의 각(覺)에 인하여 정(淨)연기인 환멸(還滅)의 열반 세계가 가능한 것이다.



여래장사상의 연원으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이 원래는 청정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이고 일시적인 염오(染汚)에 의해 더러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객진번뇌(客塵煩惱)의 교리는 이미 <아함경>에 나타나며, 부파불교의 논서를 매개로 하여 대승경전에서도 <반야경>을 비롯하여 <법화경>, <유마경> 등에 널리 설해지고 있다.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객진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근본적인 관점 가운데 하나이다.


여래장설에서 자성청정심은 공성(空性)에 해당하며,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자성청정심을 허공에 비유한 것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근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여래장설에서 공(空)이라는 것은 객진번뇌에 한정된 것이며, 그것이 점차 여래장은 객진번뇌에 대해 공(空)이라는 주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이란 중생 안에 있는 붓다의 인(因)을 말하는 것으로, 인(因)은 성불(成佛)의 가능성, 곧 중생 자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성불 즉 깨달음에 이르는 능력을 경전에서는 종성(種姓, gotra)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 고트라는 금속과 보석을 매장하고 있는 산이라는 의미와 바라문의 가계(家系) 또는 그 가문에 이어지고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런 고트라의 개념이 불교에 도입된 것은 원시경전의 성립 말기이다.


팔리경전 가운데는 gotrabhu(種姓人)라는 용어가 발견되는데, 이는 수행 과정에서 성인이 되기 직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범부의 종성을 버리고 성인의 종성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불교의 수행 계위설에 적용시키면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수행단계 가운데 세제일법(世第一法)에 해당하며, 대승불교의 <반야경>에 있어서는 반야십지(般若十地說) 가운데 종성지(種姓地)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행의 계위설에 근거해서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의 종성(種姓)을 성문, 독각, 보살의 종성으로 나누고 보살만이 붓다의 계통이라고 여긴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다른 사성(四姓)계급처럼, 삼승(三乘)의 깨달음이 각각 다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소질이 다르거나 수행과정에서 목적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출가자와 재가자를 불문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발심하는 자는 모두 보살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보살은 여래의 가족이며 불자(佛子)라고 설하고 있다. 여래장계 경전에서는 고트라를 일체 중생에게 확대시켜, 이를 여래의 종성이라고 하고 있다. 여래의 종성은 일체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태(胎, garbha)의 개념이다. 고트라와 유사한 개념인 가르바는 아직 감추어져 있어 볼 수 없는, 그러나 곧 성장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르바는 원래 손에 넣다라는 어미의 어근에서 유래된 것으로 태(胎)와 태아(胎兒)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가르바는 주로 ?~을 태(胎)에 감춘다, ~을 안에 장(藏)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여래장(tathagata-garbha)은 그 안에 여래를 감추고 있는 것 또는 여래의 태아를 갖는 것이란 의미가 된다. 이것은 여래가 안에 있어 밖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이고, 그 안에 있는 여래는 현실의 여래가 아니고 여래의 태아이며, 그 태아는 장래의 여래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래장의 의미는 <보성론>과 <불성론>에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여래장이 ?여래이어야 할 태아?는 결국 중생에 있어서 번뇌에 덮혀 나타나지 않는 여래이어야 할 인(因) 또는 본질을 의미하고 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이 계(界)라는 개념의 발전이다. 계(界, dhatu)는 원래 ?놓는 장소?라는 뜻이다. 즉 그 위에 무엇인가를 놓는 또는 그 안에 무엇인가를 받아 들이는 장소로서 공간을 말한다. 근본불교에서는 이 계가 주로 일체법을 분류하는 십팔계(十八界) 또는 법계(法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계(界)를 종류(種類) 또는 생본(生本)의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종류(種類)는 같은 류에 속하는 것의 공통성을 의미하고, 생본(生本)은 동일한 종류가 갖는 내적 본질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계(界)는 점차 불변성과 보편성을 갖게 된다. 불변성과 보편성이 중생에게 적용될 때, 이는 불성(佛性) 즉 붓다가 되는 인(因)이 된다. 즉 중생이 여래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게 되며, 이는 모든 중생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래장사상에서 이 계(界)가 모든 법의 본성, 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 중생계와 법계가 무차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래장은 온갖 번뇌에 둘러싸인 중생 안에 있는 여래의 인(因)이 되는 것이다. 계(界)의 의미는 점차 발전하여 <열반경>에서는 불계(佛界)로서의 불(佛)의 인(因), 즉 불성(佛性)으로서 중생 안에 있는 성불의 가능성을 가르킨다.


(4) 여래장과 아뢰야식

아뢰야식을 일체 미오(迷悟)의 근원이라고 본 반면에 여래장은 자기의 본성이 본래 불성(佛性)이라고 본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점차 동일한 심(心)의 세계를 바탕으로 양자가 교류하게 되고 융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여래장은 실천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이것을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면 여래장과 아뢰야식의 결합이 문제된다. 유식설에 있어서는 아뢰야식은 망식(妄識)인데 여래장설에서는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결합된 것으로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다. 보통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으로서의 아뢰야식은 아리야식이라고 부르고, 망식(妄識)의 아뢰야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르는데 원어는 같다. 여래장사상이 발전해감에 따라 아뢰야식와 여래장을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설에서는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생의 업의 과보로서의 식이기 때문이다. 이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다.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으로는 깨달음의 정법(淨法)을 발견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여래장의 사상은 번뇌로 오염된 마음의 밑바탕에 오염되지 않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있다는 것이다. 이 청정한 것까지도 포함시켜 아뢰야식이라 부르기 때문에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진(眞)과 망(妄), 염(染)과 정(淨)을 합일시키고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전개하는 것이 <대승기신론>이다.


그러나 <대승기신론> 이전에도 <대승장엄경론>이나 진제 역의 <섭대승론석> 등에 언급되어 있다. 유식사상에서는 우선 삼성문(三性門)의 유식설이 여래장사상과 관계된다. 삼성(三性)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원성실성은 당연히 여래장과 동질의 것이다. 따라서 유식설에서는 여래장(如來藏), 법신(法身)은 원성실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만 여래장은 염정(染淨)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가 의타기성에도 도입된다. 여기서 의타기성에 염분(染分)의 의타와 정분(淨分)의 의타를 설하는 이분(二分)의 타성이 성립되고, 이 이분(二分)이 동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뢰야식을 망식(妄識)으로 보는 유식설의 입장에서는 삼성설(三性說) 가운데 여래장설을 도입하기 곤란한 것이다.


유식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점차 아뢰야식에 대한 견해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후기에 이를수록 아뢰야식 자체가 여래장이 본래 가지고 있던 상주불변의 성질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은 동일한 심(心)을 주제로 하고 있으나 여래장설은 중생의 본성(本性)이 본래 불성(佛性)에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여래장은 깨달음의 근본이 되며, 아뢰야식은 염정화합식(染淨和合識)이나 일체 미혹의 근원이다. 따라서 식은 미혹의 근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멸해야 되는 것이며, 전의(轉依)에 의해서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또 여래장은 무위(無爲)의 법신(法身), 진여에 바탕을 두고 유위잡염법(有爲雜染法)의 윤회가 성립된다고 본다. 거기에 비해 아뢰야식은 일체 종자식(種子識)이며, 잠재식(潛在識)이다. 이 종자가 상속함으로써 생사윤회가 성립된다고 본다.



(5) 여래장 연기설

여래장사상은 <보성론(寶性論)>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의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르러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여래장연기설(如來藏緣起說)은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중생의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어떻게 번뇌에 오염되었으며, 그리고 어떻게 이 번뇌에서 벗어나서 본래 갖추고 있는 여래성를 개현(開顯)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즉 생사고해의 유전(流轉)을 밝히는 동시에 여래본연의 상태인 환멸(還滅)을 밝히는 것이다. 여래장계 초기 경전인 <승만경>에 나타난 공(空)여래장과 불공(不空)여래장, 여래장염정의지설(如來藏染淨依持說)은 여래장을 중심으로 미혹과 깨달음의 연기를 설명하는 여래장 연기설의 원초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승만경>의 이런 원초적인 구도가 <대승기신론>에 이르러 여래장연기설로 체계화된 것이다.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는 말은 법장의 <대승기신론의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대승기신론>의 입의분(立義分)에서는 대승(大乘)을 법(法)과 의(義)로 나누어 설명한다. 법은 곧 중생심이며, 우리 범부의 마음에 대승의 힘이 갖춰져 있다는 뜻이다. 보통 대승은 대승의 가르침으로 이해되지만 <기신론>에서 설한 대승(大乘)은 범부의 마음에 갖춰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래장(如來藏)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마음의 본성은 진여(眞如)이지만, 마음의 상태를 심생멸문(心生滅門)과 심진여문(心眞如門)의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은 마음의 진여상태를 밝힌 것으로 마음의 영원한 상을 나타낸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 번뇌나 악의 성질은 결국 멸하는 것이므로 이는 심진여(心眞如)가 아니다. 심진여(心眞如)는 상대를 초월한 것이어서 언어로 나타낼 수 없지만 또 언어에 의하지 않고는 나타낼 수 없다. 마음의 본성은 영원하지만 고정적인 실체는 아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동적인 마음의 본성이 진여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중생심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여래장연기설이다. 심생멸문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여래장으로 설해진다. 이것은 인간이 성불할 수 있는 본성으로, 특히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를 여래장이라고 한다. 번뇌를 여읜 상태를 법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번뇌에 얽매인 법신이 곧 여래장이다. 이처럼 현실의 마음이 미혹에 빠져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여래장연기를 설하는 것이다.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연속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미혹과 깨달음의 관계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이며, 미혹의 원인이 무명(無明)과 깨달음인 진여(眞如)는 화합해 있으므로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인 것이다. 이러한 진망화합식을 아리야식이라고 부른다.


<기신론>의 아리야식은 아뢰야식처럼 잠재심이 아니다. 이 아리야식에는 무명(無明)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아리야식에서 필연적으로 인식이 성립된다. 이 아리야식으로부터 인식이 전개되는 과정을 삼세육추로 설명하고 있다. 삼세(三世)는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이다. 무명업상(無明業相)은 무명의 힘이 작용하여 망념의 세계가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주체와 객체로 분열하는 것이 능견상(能見相)과 경계상(境界相)이다. 이는 미세한 인식계로서 이러한 마음의 활동은 의식으로는 인식되지 않으므로 삼세라고 하며, 육추는 거친 마음의 활동으로서 의식에 의해 알 수 있는 활동이다.


삼세육추는 망념 세계의 전개이고, 자성청정심과 망념의 상호관계를 밝힌 것이 훈습론(熏習論)이다. 유식설에서는 표면심의 작용이 아뢰야식에 훈습하는 것은 설하지만 진여가 아뢰야식과 서로 훈습하는 것은 설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여래장설에서는 진여가 자성청정심이며, 현상심이므로 망심과 상호교섭할 수 있다고 설한다. 즉 진여와 무명이 서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이것이 염정상자(染淨相資)이다. 이처럼 여래장연기설은 염정생멸(染淨生滅)은 설한 삼세육추와 염정상자(染淨相資)의 훈습에 의해서 전개된다



밀교


(1) 밀교의 의미

인도의 대승불교사상을 논함에 있어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밀교사상이다. 밀교는 비밀불교(秘密佛敎)의 줄인 말로 비밀로 설해진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현교(顯敎)와 상대적 개념을 지닌 말로 간주되어 왔다.


이 밀교는 비밀승이라고 번역되었는데, 그 밖에 밀장, 다라니교, 금강승 등으로 불렸고, 근래 서양에서는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로 부르고 있다. 탄트라 불교는 7,8세기 경 불교에 인도교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오늘날 네팔이나 티베트 등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밀교를 위주로 한 말이다.


탄트라는 원래 주술적인 신비의 의궤를 가르치는 전적의 총칭으로, 베다 이래의 인도 고대문화도 이어받았으나 베다 외의 문화체계도 가지고 있다. 또 탄트라는 여성 에너지인 성력(sakti) 숭배가 중심을 이루고 있어 남녀의 합일이 교리와 실천의 중심부분을 이루는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이교적인 이 밀교가 불교의 정통적 지위를 주장하게 된 것은 인도에서 <대일경>, <금강정경> 등의 경전이 편찬되고서 부터이다. 인도에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에는 교학적으로나 교단적으로 매우 복합적인 원인과 배경을 갖고 있다. 밀교교리 또한 다양하고 복잡하며, 관정이나 호마(Homa) 등 의식도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부파불교시대 말엽, 부파간의 대립이 지속되고 불교교단이 이론중심, 출가중심의 불교로 흘러가고 있을 때 석존이래 주춤했던 바라문교가 민간신앙을 흡수하고 불교사상을 모방하여 힌두교로 재정비하였다. 바라문교의 세력확장은 자연히 불교교단의 약세를 가져왔고 그에 대비하여 불교에서도 바라문교, 힌두교, 민간신앙사상 등을 폭넓게 수용하여 불교적으로 재정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밀교의 출발인 것이다.


당시 불교도 내에서 주문을 외우고 밀법을 행하는 자가 점점 늘어나자 수행자가 일신의 보호를 위해 도움이 되는 주법은 행해도 좋다는 선별승인을 하게 되었고 후에 민간비법과 바라문교의 주법을 모방하여 불교 특유의 진언을 창안해 냄으로써 밀교성립의 기반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제석천사상이나 관음신앙을 위시한 보살사상 등도 모두가 이러한 영향 속에서 불교가 수용했거나 창안한 사상들이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밀교의 경전과 의궤 등을 통해 밀교의 역사적 발전을 더듬어 볼 수 있는데, 밀교는 크게 잡밀(雜密)과 순밀(純密)로 나눌 수 있다. 잡밀은 일정한 형태로 체계화되지 않은 밀교를 말하며, 순밀은 다른 대승사상과 구별되는 체계화된 밀교를 말한다. 잡밀은 주로 대승경전에 보이는 밀교를 말하는 것으로, 잡부밀교(雜部密敎)라고 부른다. 잡밀(雜密)은 밀교가 아직 독립하지 않은 시대로, 여기에서는 본존이 만다라의 중심이 되는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아니고, 석가여래(釋迦如來), 약사여래(藥師如來) 등의 전통적인 여래나 혹은 십일면(十一面), 천수(千手), 불공견삭 등의 특수한 형태를 가진 변화관음(變化觀音)이다. 또 제존(諸尊)의 다라니를 외우는 것이 중심이 되고, 이 단계에서는 치병(治病), 연명(延命) 등의 현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며, 성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밀교적 세계관의 축소판인 만다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순밀은 순정밀교라고 부르며 순밀(純密)에서는 본존이 대일여래이며, 삼밀(三密)의 행법이 완성되었고, 이전의 현실적 목적과 함께 자신들이 불(佛)을 체현(體現)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사상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다. 또 이 단계에서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만다라가 완성되었다.


또 다른 분류는 밀교의 발생지인 인도의 밀교 전개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초기의 밀교는 인도에서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로서, 잡밀에 해당한다. 중기의 밀교는 7세기 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밀교경전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로서, 순밀에 해당한다. 후기의 밀교는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tantrism)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이다. 이 시기의 밀교는 좌도밀교(左道密敎)라는 부르며 혐오시되였는데, 이전과는 달리 성적 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분류법 외에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다양한 밀교의 분류법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티베트의 대학자인 부톤의 분류이다. 밀교의 경전을 네 가지 계통으로 분류한 것으로 소작(所作)탄트라, 행(行)탄트라, 유가(瑜伽)탄트라, 무상유가(無上瑜伽)탄트라이다. 이 가운데 유가탄트라와 무상유가탄트라는 상위의 탄트라로 여겨지며, 후대에 성립한 것이다.


소작(所作)탄트라는 수법에 사용하는 제단 등의 조영법, 공물의 조달법 등 기초적인 작법을 설한다. 소작탄트라는 밀교적인 대승경전을 포함하며, 밀교가 아직 완전하게 성립되지 않은 시기의 경전들이다.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약사여래본원경>, <금광명경>, <소실지갈라경>, <소바호동자청문경>, <다라니집경>, <불정존숭다라니경>, <불모대공작명왕경>, <무량문미밀지경>, <불공견색신주경>, <부현보살다라니경> 등이 있다.


행(行)탄트라는 특정한 존격(尊格)과 만다라의 제존(諸尊)에 대한 구체적인 예배법을 설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경전은 <대일경>이다.


유가(瑜伽)탄트라는 삼밀행(三密行)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진언(眞言)과 인상(印相)과 만다라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성스러운 대일여래와 다름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 경지를 즉신성불(卽身成佛), 입아아입(入我我入), 불범일여(佛凡一如)라고 한다. 유가탄트라의 대표적인 것은 <금강정경>이다. 다음으로 <이취반야경>이 여기에 포함된다.


무상유가(無上瑜伽)탄트라는 최고의 탄트라는 의미로, 8세기 이후 인도와 티베트에서 크게 유행한 후기밀교를 말한다. 무상유가탄트라는 방편 부(父)탄트라, 반야 모(母)탄트라, 이 두 가지에 포함되지 않는 탄트라의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방편 부(父)탄트라에 포함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은 <비밀집회>이며, 반야 모(母)탄트라는 7부로 나뉘어 있으며 여기에 포함되는 경전은 매우 많다.


밀교경전의 성립으로 밀교의 발달을 살펴보면, 잡밀경전으로서의 소작(所作)탄트라시대가 있으며, 그 다음에는 행(行)탄트라로서 <대일경>이 출현하면서 밀교가 체계화되었는데 이 시기가 7세기 경이다. 교리가 발달하면서 유가(瑜伽)탄트라로서 <금강정경>이나 <이취반야경>이 나타났다. 그후 밀교가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에 무상유가(無上瑜伽)탄트라의 경들이 형성되었다. 무상유가탄트라의 시대는 오랜동안 계속되어, 이 시대의 밀교는 여러 파로 갈라져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교리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변용되고 타락하면서, 결국 힌두교에 흡수되고 인도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2) 밀교의 기원

밀교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존상들에 대한 진언과 호마행법(護摩行法) 등의 기원은 <리그베다>나 <아타르바베다>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신격이 발전하거나 토속신과의 결합에 의해 변용되어 밀교의 만다라 가운데 편입되었다. 밀교의 진언도 원초적인 형태는 <리그베다>의 만트라에서 찾을 수 있다. <리그베다>의 신들에게 바치는 만타라 속에는 병의 치료, 원적의 추방, 기우(祈雨), 전승에 관한 주문들이 많다. 이러한 주문이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더욱 다양해지고, 점차 주법(呪法)이 발달하게 되었다. <아타르바베다>에는 주문과 주법이 상당히 많으며, 이러한 주술적인 경향은 점차 체계화되었다. <아타르바베다>의 주술은 치병법(治病法), 장수법(長壽法), 증익법(增益法), 속죄법(贖罪法), 화합법(和合法), 여사법(女事法), 조복법(調伏法), 왕사법(王事法), 바라문법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식재(息災)와 증익(增益)과 조복의 수법은 불교에 수용되었다.


붓다는 주술을 비롯한 모든 바라문의 종교의례를 부정했다. <장아함(長阿含)경>, <중아함(中阿含)경>, <사분율(四分律)> 등에 의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세속의 주술을 행하지 말라고 하며, 만일 이것을 어기는 자는 바일제(波逸提)를 범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주술에 대한 엄격한 태도는 점차 약화돼 잡주(雜呪)나 주법(呪法)은 부정했지만 호신(護身)을 위한 주술인 파릿타(paritta)는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밀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경전에 밀교적 요소가 도입된 것은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서이다. 이 시기에 바라문교는 인도 토속신앙의 여러 신들과 일상적인 의례를 융합시킨 힌두교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힌두교가 큰 세력을 갖게 됨에 따라 불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의해 대승경전에는 밀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대승경전에는 종교의례, 신화, 주술, 신비사상, 다라니가 많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시된 것은 다라니이다. 다라니(dharani)는 원래 인도 요가수법의 하나인 집지(執持)에 기원을 둔 것으로,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본래 정신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다라니가, 대승경전에서는 경전의 내용을 빠르고 확실하게 기억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다. 또 다라니는 경전 내용의 응결(凝結)이라고 여겨져, 점차 다라니 독송의 공덕을 설하게 되었다. 밀교에서는 대승불교의 다라니의 모든 성격을 포괄하면서 이를 밀교의례 속에 교묘히 접합시키고 있다. 밀교에서 다라니는 진리의 발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다라니의 염송에 의해 즉신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도 대승불교에 이르러 점차 바라문의 의례를 수용하고,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다신교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공양법, 관불법, 결계작단법(結界作壇法), 청우지우법(請雨止雨法)이 점차 형성되고 주술적인 경전이 성립되었다. 또 고대 제왕의 즉위식에서 행해졌던 관정(灌頂)의식이 수용되어 불위를 계승하는 의례에 적용되었다. 그후 존격의 도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승불교 이전에는 석가여래가 중심이 된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관음, 문수, 미륵 등의 새로운 보살이 등장하고 있으며, 5세기 경에는 관음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켜 십일면, 천수, 불공견삭 등 특이한 양상을 가진 각양각색의 변화관음(變化觀音)이 출현하고 이에 관한 의궤가 정비되었다. 이로써 갖가지 밀교의궤가 거의 완성되었고, 또한 제존법(諸尊法)도 다양해졌다.


초기밀교의 근본경전은 산스크리트본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한역만이 현존한다. 한역 밀교경궤의 초기에 속하는 것은 3세기 초엽 축율염(竺律炎)과 지겸(支謙)이 번역한 <마등가경(摩登伽經)>과 이것의 이역본(異譯本)으로 서진의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사두간태자이십팔숙경(舍頭諫太子二十八宿經)>이다. 여기에는 많은 주(呪)와 호마작법과 점성술도 언급되고 있다. 담요(曇曜)가 역출한 <대길의신주경(大吉義神呪經)>에는 수행법의 공간을 나타내는 결계법(結界法)도 한층 완비되어 있고 또 수행목적도 악마의 퇴치를 기원하는 식재(息災) 외에 체계화된 기원법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 반드시 밀교경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4세기 경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금광명경(金光明經)>과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에서도 사방사불(四方四佛)을 설하고 있는 점에서 후세의 만다라가 성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4 ~ 5세기에 걸쳐 힌두교의 부흥과 더불어 불교 내에서도 의례와 도상에 중점을 둔 밀교적 요소가 점차 농후해지게 되었고, 6세기 경에는 진언(眞言), 인상(印像), 만다라의 대부분이 정리된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이 나오게 된다.



(3) 초기밀교

밀교의 요소 가운데 하나인 존상들에 대한 진언과 호마행법(護摩行法) 등의 기원은 <리그베다>나 <아타르바베다>에까지 소급할 수 있다.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신격이 발전하거나 토속신과의 결합에 의해 변용되어 밀교의 만다라 가운데 편입되었다. 밀교의 진언도 원초적인 형태는 <리그베다>의 만트라에서 찾을 수 있다. <리그베다>의 신들에게 바치는 만타라 속에는 병의 치료, 원적의 추방, 기우(祈雨), 전승에 관한 주문들이 많다. 이러한 주문이 토착신앙과 결합하여 더욱 다양해지고, 점차 주법(呪法)이 발달하게 되었다. <아타르바베다>에는 주문과 주법이 상당히 많으며, 이러한 주술적인 경향은 점차 체계화되었다. <아타르바베다>의 주술은 치병법(治病法), 장수법(長壽法), 증익법(增益法), 속죄법(贖罪法), 화합법(和合法), 여사법(女事法), 조복법(調伏法), 왕사법(王事法), 바라문법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식재(息災)와 증익(增益)과 조복의 수법은 불교에 수용되었다.


붓다는 주술을 비롯한 모든 바라문의 종교의례를 부정했다. <장아함(長阿含)경>, <중아함(中阿含)경>, <사분율(四分律)> 등에 의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세속의 주술을 행하지 말라고 하며, 만일 이것을 어기는 자는 바일제(波逸提)를 범한다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주술에 대한 엄격한 태도는 점차 약화돼 잡주(雜呪)나 주법(呪法)은 부정했지만 호신(護身)을 위한 주술인 파릿타(paritta)는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밀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경전에 밀교적 요소가 도입된 것은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서이다. 이 시기에 바라문교는 인도 토속신앙의 여러 신들과 일상적인 의례를 융합시킨 힌두교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는 힌두교가 큰 세력을 갖게 됨에 따라 불교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의해 대승경전에는 밀교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다.


대승경전에는 종교의례, 신화, 주술, 신비사상, 다라니가 많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장 중시된 것은 다라니이다. 다라니(dharani)는 원래 인도 요가수법의 하나인 집지(執持)에 기원을 둔 것으로,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본래 정신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다라니가, 대승경전에서는 경전의 내용을 빠르고 확실하게 기억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다. 또 다라니는 경전 내용의 응결(凝結)이라고 여겨져, 점차 다라니 독송의 공덕을 설하게 되었다. 밀교에서는 대승불교의 다라니의 모든 성격을 포괄하면서 이를 밀교의례 속에 교묘히 접합시키고 있다. 밀교에서 다라니는 진리의 발현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다라니의 염송에 의해 즉신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도 대승불교에 이르러 점차 바라문의 의례를 수용하고, 힌두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점차 다신교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공양법, 관불법, 결계작단법(結界作壇法), 청우지우법(請雨止雨法)이 점차 형성되고 주술적인 경전이 성립되었다. 또 고대 제왕의 즉위식에서 행해졌던 관정(灌頂)의식이 수용되어 불위를 계승하는 의례에 적용되었다. 그후 존격의 도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승불교 이전에는 석가여래가 중심이 된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관음, 문수, 미륵 등의 새로운 보살이 등장하고 있으며, 5세기 경에는 관음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켜 십일면, 천수, 불공견삭 등 특이한 양상을 가진 각양각색의 변화관음(變化觀音)이 출현하고 이에 관한 의궤가 정비되었다. 이로써 갖가지 밀교의궤가 거의 완성되었고, 또한 제존법(諸尊法)도 다양해졌다.


초기밀교의 근본경전은 산스크리트본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한역만이 현존한다. 한역 밀교경궤의 초기에 속하는 것은 3세기 초엽 축율염(竺律炎)과 지겸(支謙)이 번역한 <마등가경(摩登伽經)>과 이것의 이역본(異譯本)으로 서진의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사두간태자이십팔숙경(舍頭諫太子二十八宿經)>이다. 여기에는 많은 주(呪)와 호마작법과 점성술도 언급되고 있다. 담요(曇曜)가 역출한 <대길의신주경(大吉義神呪經)>에는 수행법의 공간을 나타내는 결계법(結界法)도 한층 완비되어 있고 또 수행목적도 악마의 퇴치를 기원하는 식재(息災) 외에 체계화된 기원법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 반드시 밀교경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4세기 경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금광명경(金光明經)>과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에서도 사방사불(四方四佛)을 설하고 있는 점에서 후세의 만다라가 성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4 ~ 5세기에 걸쳐 힌두교의 부흥과 더불어 불교 내에서도 의례와 도상에 중점을 둔 밀교적 요소가 점차 농후해지게 되었고, 6세기 경에는 진언(眞言), 인상(印像), 만다라의 대부분이 정리된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이 나오게 된다.




(4) 중기밀교

굽타왕조 하에 힌두이즘의 융성과 더불어 발전한 밀교는 7세기에 들어서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이때쯤부터 점차 대승불교에 수용되었던 다라니, 주술, 유가(瑜伽)관법, 종교의식 등이 조직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성립되었다. 초기의 밀교에서는 붓다가 직접 설법하는 형식을 취하고 액을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 의례가 중시되었으며, 다라니, 인계(印契), 관법(觀法) 등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대일경>과 <금강정경>으로 대표되는 중기의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인 비로자나여래가 교주이며, 성불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다. 또 대승불교사상과 밀교의례가 접목되었으며, 관법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밀(三密)의 상즉(相卽)이 중시되고 제존(諸尊)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만다라에 조직되었다. 탄트라의 네 가지 분류에 의하면 <대일경>은 행(行)탄트라에, <금강정경>은 유가(瑜伽)탄트라에 해당한다.


<대일경(大日經)>의 정식 명칭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으로,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의 성불이 신변(神變)에 의해 중생에게 가지(加持)되는 것을 밝힌 경전이다. 이것은 개원(開元) 12년(724)에 선무외(善無畏)가 한역하고 제자인 일행(一行)이 기록했다. 전체가 7권으로 되어있으며, 제6권 31품까지가 중심이 되는 경전이며, 제7권의 5품은 이에 부속된 의궤이다. 산스크리트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티벳역에는 호마(護摩) 등에 관한 의궤 7품이 부가되어 있다.


<대일경>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어져 있다. <대일경>의 제1품인 주심품(住心品)에는 사상적인 서술이 많으며, 제2품인 구연품(具緣品) 이하는 만다라, 인계(印契), 진언 등 주로 수도(修道)에 관해 서술하였다. <대일경>은 본격적인 밀교경전의 효시로서, 집금강비밀주(執金剛秘密主)의 질문에 비로자나여래가 대답하는 형식을 빌어 절대적인 지혜[一切智智]를 획득하는 방법과 그것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설한 경전이다.


?보리심(菩提心)을 인(因)으로 하고, 대비(大悲)를 근(根)으로 하며, 방편(方便)을 구경(究竟)으로 한다?는 삼구(三句)의 법문이 <대일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삼구(三句)를 실천함에 의해서 반야와 방편을 함께 닦고, 절대적인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 <대일경>에서는 이 절대적인 지혜야말로 보리이며, 자기의 마음이라고 설한다. 또한 절대적인 지혜인 보리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음을 여러 종류의 상태로 분석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공(空)이며 본성청정(本性淸淨)이라고 설하고 있다.


<대일경>은 제존(諸尊)을 불부(佛部), 연화부(蓮華部), 금강부(金剛部)의 3부로 분류했으며, 행법(行法)으로는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오륜(五輪)에 해당하는 아(a), 바(va), 라(ra), 하(ha), 카(kha)의 다섯 자를 신체의 다섯 곳에 포치(布置)하는 관상방법(觀想方法)을 기조(基調)로 하고 있다.


<대일경>이 표현하는 만다라 세계를 ?대비태장생(大悲胎藏生)만다라?라고 하며, 이것을 줄여서 ?태장(胎藏)만다라?라고 한다. 이것은 붓다가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중생구제를 위해 갖가지 몸을 나투고, 갖가지 설법교화를 행하며, 중생의 성격에 따라 본래의 서원을 밝히는 활동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대비(大悲)의 만행(萬行)에 의해 보리심을 성장, 발전시키고 마침내 섭화방편의 활동이 일어나게 하므로 대비(大悲)를 가리켜 태장(胎藏)이라고 한다. 태장(胎藏)은 어머니의 모태처럼 모든 것을 생산해내는 근원을 의미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자비(如來慈悲)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불보살이 모습과 형태를 달리하면서 출생하여 우리들을 구제해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태장만다라의 표현형식에는 대(大)만다라, 법(法)만다라, 삼매야(三昧耶)만다라의 세 가지가 있다. 대(大)만다라는 5대의 색(백, 적, 황, 청, 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만다라를 토단(土壇)으로 만든다거나 혹은 회도(繪圖)로 표현하는데 만다라 가운데 제불(諸佛), 제보살(諸菩薩), 제존(諸尊) 등을 신상(身像)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는 신(身)만다라이다. 법(法)만다라는 아, 라, 카 등의 말이나 문자로써 제존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語)만다라이다. 삼매야(三昧耶)만다라는 제존(諸尊)의 본래 서원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만다라를 설하는 것이며, 본래의 서원은 의(意)로 드러나므로 의(意)만다라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만다라가 <대일경>에 설해져 있으며, 이것은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의 교리와 관계가 있다.


중기밀교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경전은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한역에는 금강지(金剛智) 역인 <금강정유가중략출념송경(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 4권, 불공(不空) 역인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 3권, 시호(施護) 역인 <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삼매대교왕경(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三昧大敎王經)> 30권 등의 세 종류가 있다. 세 종류의 한역본 가운데 산스크리트 원전 및 티벳 역과 일치하는 것은 시호(施護) 역의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불공(不空)의 <금강정경유가십팔회지귀(金剛頂經瑜伽十八會指歸)>에 의하면 <금강정경>은 18회가 있다고 하는데, 18회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스크리트 원전, 티벳 역, 한역에 <금강정경>으로 존재하는 것은 초회(初會)뿐이므로, <금강정경>이라고 하면 <초회금강정경> 즉 <진실섭경>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금강정경>은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보살의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의 여래성을 깨닫고, 불신(佛身)을 성취하는 수도법(修道法)으로서 대비로자나여래가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설한다. 그것에 의하여 정각(正覺)을 얻은 경지를 표현한 것이 금강계(金剛界)만다라이며, 만다라에 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제1은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의 본질이 자성청정(自性淸淨)임을 달관하는 것인데, 이를 통달보리심(通達)이라고 한다. 자기에게 자성청정심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아촉여래의 본질인 대원경지를 얻는다. 제2는 이 자성청정심에 기초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데, 이를 수보리심(修菩提心)이라고 한다. 이로써 자기의 마음이 월륜(月輪)과 같다고 달관하고, 평등성지를 얻으며, 보생여래로서 나타난다. 제3은 이 보리심을 더욱 굳건히 하고 이로써 금강심(金剛心)을 실현한다. 자기의 마음이 금강의 지혜임을 아는 것으로, 이를 성금강심(成金剛心)이라고 한다. 이로써 묘관찰지를 얻고 무량광여래로서 나타난다. 제4는 이 금강심을 더욱 굳건히 하여 자기의 신(身), 어(語), 의(意)가 모두 금강계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증금강신(證金剛身)이라고 하며, 이로써 성소작지를 얻고 불공성취여래로서 나타난다. 신(身), 어(語), 의(意)의 금강을 실현함으로써 금강계보살이 된다. 제5는 금강계보살이 비로자나불의 본질인 법계체성지를 얻어 대비로자나불이 되는데, 이를 금강계여래라고 한다.


이 비로자나불의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성불(成佛)은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실현되는데 이 일체 여래의 평등성을 실현한 후에 비로자나불은 다시 인간계로 되돌아와 석가보살의 몸으로 들어가 악마를 항복시키고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한다. 일체 여래의 평등성을 깨닫고 일체 여래와 융합한 비로자나불은 지신(智身)이다. 지혜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널리 퍼질 수 있고, 일체 여래와 마찬가지로 법계에 꽉 차 있으며 무한하다. 일체 여래는 법계에 꽉 차 있지만 범부도 법계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을 깨달아 일체 여래의 가지(加持)를 받아 밀교의 유가(瑜伽, yoga)에 들면 범부도 바로 그 자리에서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나투어 비로자나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교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금강정경>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다섯 단계의 명상법 즉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통해 우주의 진리인 대일여래가 되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며, 이것을 시각적으로 불보살(佛菩薩)의 세계로 나타내는 것이 금강계(金剛界)만다라이다. 금강계만다라는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에 의해 중생이 이상을 실현한 경지를 명시한 것으로, 지(智)의 만다라라고 한다.


금강계만다라가 태장만다라보다도 한층 밀교화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 금강계의 존격들이다. 즉 금강계만다라는 중앙의 대일여래의 사방에 아촉, 보생(寶生), 아미타(阿彌陀), 불공성취(不空成就)라는 4불(佛)을 배치하여 대일여래의 속성을 4불(佛)에게 분담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5불(佛) 전체로 밀교적 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 4불(佛) 각각의 주위에 4체(體)씩의 보살 등 합해서 16보살이 배치되었는데, 16보살은 모두 금강법(金剛法), 금강보(金剛寶), 금강리(金剛利), 금강당(金剛幢)이라는 식으로 금강(金剛)이라는 관칭을 가지고 있다. 이 16보살 가운데 금강법(金剛法), 금강보(金剛寶), 금강리(利), 금강당(金剛幢)은 대승불교의 대보살인 관음(觀音), 허공장(虛空藏), 문수(文殊), 지장이 밀교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또 금강계만다라는 향, 노래, 무용 등 비로자나불에게 바치는 공양까지 의인화해서 금강향(金剛香), 금강가(金剛歌), 금강무(金剛舞) 등의 존격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금강정경> 이후에 <이취경(理趣經)>이 그 흐름을 잇고 있다. <이취경>은 <반야경>에서 설하는 부정의 논리를 적극적인 현실긍정으로 전환시킨 밀교의 경전이다. <이취경>이라고 할 경우 한역으로는 보통 불공(不空) 역의 <대락금강불공진실삼마야경> 1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반야이취경(般若理趣經)>이라고도 불린다. 이 경전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긍정하고 성욕까지도 대담하게 청정한 보살위(菩薩位)로 표명하고있다. 욕망을 단순히 번뇌라고 하여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般若)의 영지(英智)를 통해 그대로 가치를 전환해 절대화시켜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욕망도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생명의 현실적인 표현이기 대문에 본질적으로 청정하다고 본다. 나아가 현실 존재와 우주 생명의 융합을 양성(兩性)의 교섭으로 표현하고 그 불이(不二)의 경지를 대락(大樂)이나 적열(適悅)이라고 한다. <이취경>은 <반야경>에서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공(空)의 입장을 현실긍정의 사상 즉 대락의 사상으로 완전히 밀교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락의 법문은 자칫 잘못하면 사견(邪見)으로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굽타왕조 하에 힌두이즘의 융성과 더불어 발전한 밀교는 7세기에 들어서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이때쯤부터 점차 대승불교에 수용되었던 다라니, 주술, 유가(瑜伽)관법, 종교의식 등이 조직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성립되었다. 초기의 밀교에서는 붓다가 직접 설법하는 형식을 취하고 액을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 의례가 중시되었으며, 다라니, 인계(印契), 관법(觀法) 등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대일경>과 <금강정경>으로 대표되는 중기의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인 비로자나여래가 교주이며, 성불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다. 또 대승불교사상과 밀교의례가 접목되었으며, 관법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밀(三密)의 상즉(相卽)이 중시되고 제존(諸尊)은 일정한 형식에 따라 만다라에 조직되었다. 탄트라의 네 가지 분류에 의하면 <대일경>은 행(行)탄트라에, <금강정경>은 유가(瑜伽)탄트라에 해당한다.


<대일경(大日經)>의 정식 명칭은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으로,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의 성불이 신변(神變)에 의해 중생에게 가지(加持)되는 것을 밝힌 경전이다. 이것은 개원(開元) 12년(724)에 선무외(善無畏)가 한역하고 제자인 일행(一行)이 기록했다. 전체가 7권으로 되어있으며, 제6권 31품까지가 중심이 되는 경전이며, 제7권의 5품은 이에 부속된 의궤이다. 산스크리트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티벳역에는 호마(護摩) 등에 관한 의궤 7품이 부가되어 있다.


<대일경>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어져 있다. <대일경>의 제1품인 주심품(住心品)에는 사상적인 서술이 많으며, 제2품인 구연품(具緣品) 이하는 만다라, 인계(印契), 진언 등 주로 수도(修道)에 관해 서술하였다. <대일경>은 본격적인 밀교경전의 효시로서, 집금강비밀주(執金剛秘密主)의 질문에 비로자나여래가 대답하는 형식을 빌어 절대적인 지혜[一切智智]를 획득하는 방법과 그것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를 설한 경전이다.


?보리심(菩提心)을 인(因)으로 하고, 대비(大悲)를 근(根)으로 하며, 방편(方便)을 구경(究竟)으로 한다?는 삼구(三句)의 법문이 <대일경>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삼구(三句)를 실천함에 의해서 반야와 방편을 함께 닦고, 절대적인 지혜를 획득할 수 있다. <대일경>에서는 이 절대적인 지혜야말로 보리이며, 자기의 마음이라고 설한다. 또한 절대적인 지혜인 보리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음을 여러 종류의 상태로 분석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공(空)이며 본성청정(本性淸淨)이라고 설하고 있다.


<대일경>은 제존(諸尊)을 불부(佛部), 연화부(蓮華部), 금강부(金剛部)의 3부로 분류했으며, 행법(行法)으로는 오자엄신관(五字嚴身觀)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의 오륜(五輪)에 해당하는 아(a), 바(va), 라(ra), 하(ha), 카(kha)의 다섯 자를 신체의 다섯 곳에 포치(布置)하는 관상방법(觀想方法)을 기조(基調)로 하고 있다.


<대일경>이 표현하는 만다라 세계를 ?대비태장생(大悲胎藏生)만다라?라고 하며, 이것을 줄여서 ?태장(胎藏)만다라?라고 한다. 이것은 붓다가 대비원력(大悲願力)으로 중생구제를 위해 갖가지 몸을 나투고, 갖가지 설법교화를 행하며, 중생의 성격에 따라 본래의 서원을 밝히는 활동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대비(大悲)의 만행(萬行)에 의해 보리심을 성장, 발전시키고 마침내 섭화방편의 활동이 일어나게 하므로 대비(大悲)를 가리켜 태장(胎藏)이라고 한다. 태장(胎藏)은 어머니의 모태처럼 모든 것을 생산해내는 근원을 의미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자비(如來慈悲)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불보살이 모습과 형태를 달리하면서 출생하여 우리들을 구제해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태장만다라의 표현형식에는 대(大)만다라, 법(法)만다라, 삼매야(三昧耶)만다라의 세 가지가 있다. 대(大)만다라는 5대의 색(백, 적, 황, 청, 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만다라를 토단(土壇)으로 만든다거나 혹은 회도(繪圖)로 표현하는데 만다라 가운데 제불(諸佛), 제보살(諸菩薩), 제존(諸尊) 등을 신상(身像)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는 신(身)만다라이다. 법(法)만다라는 아, 라, 카 등의 말이나 문자로써 제존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語)만다라이다. 삼매야(三昧耶)만다라는 제존(諸尊)의 본래 서원을 표현하는 도구로써 만다라를 설하는 것이며, 본래의 서원은 의(意)로 드러나므로 의(意)만다라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만다라가 <대일경>에 설해져 있으며, 이것은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의 교리와 관계가 있다.


중기밀교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경전은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한역에는 금강지(金剛智) 역인 <금강정유가중략출념송경(金剛頂瑜伽中略出念誦經)> 4권, 불공(不空) 역인 <금강정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대교왕경(金剛頂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大敎王經)> 3권, 시호(施護) 역인 <일체여래진실섭대승현증삼매대교왕경(一切如來眞實攝大乘現證三昧大敎王經)> 30권 등의 세 종류가 있다. 세 종류의 한역본 가운데 산스크리트 원전 및 티벳 역과 일치하는 것은 시호(施護) 역의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불공(不空)의 <금강정경유가십팔회지귀(金剛頂經瑜伽十八會指歸)>에 의하면 <금강정경>은 18회가 있다고 하는데, 18회를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스크리트 원전, 티벳 역, 한역에 <금강정경>으로 존재하는 것은 초회(初會)뿐이므로, <금강정경>이라고 하면 <초회금강정경> 즉 <진실섭경>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금강정경>은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보살의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의 여래성을 깨닫고, 불신(佛身)을 성취하는 수도법(修道法)으로서 대비로자나여래가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설한다. 그것에 의하여 정각(正覺)을 얻은 경지를 표현한 것이 금강계(金剛界)만다라이며, 만다라에 관한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제1은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의 본질이 자성청정(自性淸淨)임을 달관하는 것인데, 이를 통달보리심(通達)이라고 한다. 자기에게 자성청정심이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아촉여래의 본질인 대원경지를 얻는다. 제2는 이 자성청정심에 기초하여 보리심을 일으키는데, 이를 수보리심(修菩提心)이라고 한다. 이로써 자기의 마음이 월륜(月輪)과 같다고 달관하고, 평등성지를 얻으며, 보생여래로서 나타난다. 제3은 이 보리심을 더욱 굳건히 하고 이로써 금강심(金剛心)을 실현한다. 자기의 마음이 금강의 지혜임을 아는 것으로, 이를 성금강심(成金剛心)이라고 한다. 이로써 묘관찰지를 얻고 무량광여래로서 나타난다. 제4는 이 금강심을 더욱 굳건히 하여 자기의 신(身), 어(語), 의(意)가 모두 금강계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증금강신(證金剛身)이라고 하며, 이로써 성소작지를 얻고 불공성취여래로서 나타난다. 신(身), 어(語), 의(意)의 금강을 실현함으로써 금강계보살이 된다. 제5는 금강계보살이 비로자나불의 본질인 법계체성지를 얻어 대비로자나불이 되는데, 이를 금강계여래라고 한다.


이 비로자나불의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성불(成佛)은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실현되는데 이 일체 여래의 평등성을 실현한 후에 비로자나불은 다시 인간계로 되돌아와 석가보살의 몸으로 들어가 악마를 항복시키고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한다. 일체 여래의 평등성을 깨닫고 일체 여래와 융합한 비로자나불은 지신(智身)이다. 지혜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널리 퍼질 수 있고, 일체 여래와 마찬가지로 법계에 꽉 차 있으며 무한하다. 일체 여래는 법계에 꽉 차 있지만 범부도 법계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을 깨달아 일체 여래의 가지(加持)를 받아 밀교의 유가(瑜伽, yoga)에 들면 범부도 바로 그 자리에서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나투어 비로자나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교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금강정경>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들이 다섯 단계의 명상법 즉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통해 우주의 진리인 대일여래가 되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며, 이것을 시각적으로 불보살(佛菩薩)의 세계로 나타내는 것이 금강계(金剛界)만다라이다. 금강계만다라는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에 의해 중생이 이상을 실현한 경지를 명시한 것으로, 지(智)의 만다라라고 한다.


금강계만다라가 태장만다라보다도 한층 밀교화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 금강계의 존격들이다. 즉 금강계만다라는 중앙의 대일여래의 사방에 아촉, 보생(寶生), 아미타(阿彌陀), 불공성취(不空成就)라는 4불(佛)을 배치하여 대일여래의 속성을 4불(佛)에게 분담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5불(佛) 전체로 밀교적 우주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 4불(佛) 각각의 주위에 4체(體)씩의 보살 등 합해서 16보살이 배치되었는데, 16보살은 모두 금강법(金剛法), 금강보(金剛寶), 금강리(金剛利), 금강당(金剛幢)이라는 식으로 금강(金剛)이라는 관칭을 가지고 있다. 이 16보살 가운데 금강법(金剛法), 금강보(金剛寶), 금강리(利), 금강당(金剛幢)은 대승불교의 대보살인 관음(觀音), 허공장(虛空藏), 문수(文殊), 지장이 밀교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또 금강계만다라는 향, 노래, 무용 등 비로자나불에게 바치는 공양까지 의인화해서 금강향(金剛香), 금강가(金剛歌), 금강무(金剛舞) 등의 존격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금강정경> 이후에 <이취경(理趣經)>이 그 흐름을 잇고 있다. <이취경>은 <반야경>에서 설하는 부정의 논리를 적극적인 현실긍정으로 전환시킨 밀교의 경전이다. <이취경>이라고 할 경우 한역으로는 보통 불공(不空) 역의 <대락금강불공진실삼마야경> 1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반야이취경(般若理趣經)>이라고도 불린다. 이 경전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긍정하고 성욕까지도 대담하게 청정한 보살위(菩薩位)로 표명하고있다. 욕망을 단순히 번뇌라고 하여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般若)의 영지(英智)를 통해 그대로 가치를 전환해 절대화시켜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욕망도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생명의 현실적인 표현이기 대문에 본질적으로 청정하다고 본다. 나아가 현실 존재와 우주 생명의 융합을 양성(兩性)의 교섭으로 표현하고 그 불이(不二)의 경지를 대락(大樂)이나 적열(適悅)이라고 한다. <이취경>은 <반야경>에서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공(空)의 입장을 현실긍정의 사상 즉 대락의 사상으로 완전히 밀교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락의 법문은 자칫 잘못하면 사견(邪見)으로 빠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5) 후기 밀교

유가부(瑜伽部)밀교의 성행과 더불어 8세기 후반에서부터 9세기에 걸쳐 새로운 요소를 가진 밀교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무상유가(無上瑜伽)밀교라고 불리는 후기의 밀교이다. 이때부터 밀교성전이 종래의 수트라(Sutra)를 대신하여 탄트라(Tantra)로 불리기 시작했다.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밀교의 특색은 요가의 실수에 있어서 샤크티(Sakti, 明妃)와의 교섭을 가진 것이다. 이외에도 오육(五肉), 오감로(五甘露) 등과 같은 음식을 권하고 그것이 해탈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 대승불교의 번뇌 즉 보리의 이념이 여기에서는 탐진치(貪瞋痴)를 그대로 행하므로서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으로 인도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현실 그대로를 이상형태로 보는 대승불교의 이념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모든 현실 존재를 긍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절대화시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행부(行部)와 유가부(瑜伽部)의 밀교를 우도밀교(右道密敎)라고 부르고 샤크티숭배를 포함하는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밀교를 좌도밀교(左道密敎)라고 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 인도와 티베트의 학자들은 무상유가(無上瑜伽)밀교를 방편(方便) 부(父)탄트라, 반야(般若) 모(母)탄트라, 불이(不二)탄트라로 구분하고 있다. 방편 부(父)탄트라는 방편공(方便空)을 중시하고 법신(法身)이 현실세계에 전개하는 과정을 관법(觀法)으로 조직하고 그 수법체계를 기조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야 모(母)탄트라는 반야대락(般若大樂)을 강조하고 행자가 법신(法身)과 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타요가적인 수법(修法)체계를 가졌다. 불이(不二)탄트라는 반야와 방편의 쌍입(雙入), 공비불이(空悲不二)를 설한다.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밀교에서는 탄트라에 대한 주석서보다 오히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수도법궤(修道法軌), 즉 생기차제(生起次第)와 구경차제(究竟次第)를 수도(修道)의 기반으로 하여 유파를 형성하였다. 생기차제는 법신(法身)이 현실세계에 전개하는 과정을 유가관법(瑜伽觀法)으로서 구성한 것이고, 구경차제는 행자가 법신(法身)에 귀입(歸入)하는 과정을 관법차제(觀法次第)로서 구성한 것이다. 생기차제는 부(父)탄트라, 구경차제는 모(母)탄트라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방편(方便)은 원래 대승경전에서 ?사람들을 잘 구제하는 수단?이라는 의미가 사용되었다. 방편은 후에 반야와 한 쌍이 되어 교학화되었다. 그런데 감각을 강조하고 모든 사물을 상징하기를 좋아하는 밀교에서는 이러한 이원론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인 남녀로 치환하여 방편탄트라는 부(父)탄트라로, 반야탄트라는 모(母)탄트라로 등치하였다.


방편 부(父)탄트라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구히야삼마자 탄트라> 혹은 <비밀집회탄트라>라고 부르는 경전이 있다. 이 경전은 8세기 경에는 이미 인도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호(施護)가 <일체여래금강삼업최상비밀대교왕경(一切如來金剛三業最上秘密大敎王經)>으로 한역하였다. <비밀집회탄트라>는 인도 및 티벳에서는 크게 유행했지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비밀집회탄트라>의 만다라에서는 5불(佛) 가운데 아촉여래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대일여래는 동방, 보당여래는 남방, 무량광여래는 서방, 불공금강여래는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비밀집회탄트라>에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5불(佛)도 설해져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촉여래를 중심으로 하는 5불(佛)이다. 나아가 5불(佛)을 오온(五蘊)과 동일시하고 있다. 5불(佛)을 오온과 동일시하는 것은 5불과 오온의 인간이 모두 오온으로서 본질에 있어서는 같음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우주로서의 불(佛)과 소우주로서의 자기가 모두 오온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입각하여 즉신성불의 가능성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또 성불을 샤크티(明妃)에 의해 실현하려고 한다. <비밀집회탄트라>에서는 5불(佛)에 대한 사크티로서, 4불모(佛母) 혹은 5명비(明妃)가 배당되어 있다.


<비밀집회탄트라>는 열렬히 신봉되어 많은 유파가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즈냐나파다가 세운 즈냐나파다류와 용수와 그 제자들의 이름으로 세워진 성자부자류(聖者父子流)이다. 즈냐나파다는 8세기 후반에 활약한 사람이며, 그의 제자로는 붓다구햐, 붓다샨티, 샤카미트라 등이 있었다고 하며, 이 유파는 9 ~10세기에 걸쳐 번창했다. 성자부자류의 성립은 즈냐나파다류보다 늦으며 9 ~10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 학파는 크게 번창하여 그 세력이 즈냐나파다류를 능가했다.


반야 모(母)탄트라 계통의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헤바즈라탄트라>이다. 그 후에 상바라(Samvara) 계통의 여러 경전이 성립하였다. 반야 모(母)탄트라계의 교리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샤크티의 실천이 부탄트라계보다 강한다. 모탄트라계의 만다라에서 중앙의 남존은 그에 대한 여존과 짝을 이루고있으며, 2존은 포옹합체하여 쌍입(雙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존은 공성(空性)과 비(悲)의 권화로서 양자가 융합하여 보리심이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을 단순히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스스로 만다라 속으로 들어가 16세의 소녀 등을 상대로 하여 이러한 포옹을 실천하고 그 대락(大樂) 속에서 깨달음을 체험한다.


<헤바즈라탄트라>의 만다라에서는 주존(主尊)인 헤바즈라가 여존(女尊)인 나이라트먀와 쌍입한 채로 중앙에 위치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개의 원륜(圓輪)이 있다. 안쪽의 원륜 위에는 바즈라 등의 4천녀가 위치하고, 외륜 위에는 제2의 가우리 등의 8천녀가 위치하며, 그 외측의 상방에 케차리, 하방에 부차리의 2존이 위치하여 도합 16존의 만다라를 이루고 있다. <상바로다야탄트라>의 만다라에서는 헤루카와 바즈라바히의 주존과 4천녀, 8천녀, 24對의 남성수행자와 유가녀가 추가되어 도합 62존으로 되어 있다. 이들 남성 수행자를 다카라고 하며, 그의 상대가 되는 유가녀를 다키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주존 헤르카와 바즈라바히 및 24對48존의 다카와 다키니 등은 모두 쌍입을 행하는 것이다. 이 성유가(性瑜伽)의 실천을 통해서 생기는 대락(大樂)을 상바라(samvara, 勝樂)라고 한다. <상바로다야>란 이 승락(勝樂)의 출생을 밝히는 탄트라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모탄트라계에서는 샤크티의 의미가 강하다.


인도밀교의 말기에 나타난 특이한 탄트라로 <칼라차크탄트라>가 있다. <칼라차크라탄트라>는 이슬람교도와의 대결을 통해 생성되었다. ?칼라차크라?란 <최승본초불(最勝本初佛)에서 초출(抄出)한 길상시륜(吉祥時輪)이라고 하는 탄트라왕>의 약칭이다. 근본본초불(根本本初佛)이란 근본탄트라 12000송을 가리키며, 그 광본(廣本)에서 초출한 역본이 현존하는 3천송의 탄트라이다.


<칼라차크라탄트라>는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의 밀교경전이지만 <비밀집회>를 대표 경전으로하는 방편 부탄타르나 <헤바즈라>등을 대표 경전으로 하는 반야 모탄트라보다 후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양자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앞의 두 경전에 견주어 불이(不二)의 탄트라라고 한다. 이 탄트라는 방편과 반야, 공과 자비, 대우주와 소우주의 불이(不二)를 설하는 탄트라이다. ?칼라차크라?의 칼라는 대비(大悲) 방편을 의미하고, 차크라는 공성(空性) 반야를 의미하며, 이 양자를 합하여 쌍입불이를 시현하는 것이 <칼라차크라탄트라>이다. <칼라차크라탄트라>에서는 중생이 미래불이라고 하는 절대와 현 존재의 쌍입불이(雙入不二)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5불(佛)을 창조하는 근본원리라고 보고 있다.


<칼라차크라탄트라>에서는 힌두교 제파와의 융합이 한층 더 진행되면서 그들을 자기 산하에 넣고 그들과 연합군을 결성함에 의해서 이슬람교의 무력 침공에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힌두교의 여러 파가 모두 칼라차크라의 관정을 받아 금강부족이 되고, 계급이나 종교적 관습의 차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동단결하여 이슬람교도에 대처하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미래의 쿠리카왕 때에 이르면 비슈누와 쉬바 및 여러 왕들의 대연합군이 결성되어 이슬람교도에게 대승한다는 예언의 형식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인도전역은 이슬람교도 의해 정복되고, 날란다, 비크라마쉴라, 오단타푸리 등의 수많은 사원들이 파괴되고, 각 절의 학장들은 티벳이나 네팔 혹은 남인도 등지로 흩어졌다.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가 멸망했다. 그러나 그 명맥을 일부 불교도들이 유지하고 있다.


천태사상


(1) 천태사상의 역사

화엄사상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천태사상은 중국 수나라 때 천태 지의에 의해 <법화경>을 중심으로 체계화된 사상이다. 천태종(天台宗)이라는 호칭은 당 중기 형계 담연(湛然)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천태 지의에 의해 세워진 종파이다. 천태종의 개조는 북제(北齊)의 혜문(慧文)선사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전기나 기록이 없다. 다만 북제의 고조(高祖)시대에 활약한 사람으로 수백 명의 제자들을 엄하게 지도하였으며 스스로는 오로지 <대지도론>에 의해 선관(禪觀)을 닦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제2조는 혜사(慧思)선사이며, 혜문선사에게서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심요를 전수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에 의해서 크게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혜사의 사상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말법(末法)사상이다. 혜사는 정법(正法) 오백년, 상법(像法) 천년, 말법(末法) 만년의 삼시설(三時說)을 세우고 지금의 시대가 말법의 처음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의 말법에서 불법(佛法)을 멸하지 않게 하고, 불도(佛道)를 완성하여 56억만세 후에 미륵불과 만날 것을 서원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무엇보다도 계율에 의해 형성된 바른 선정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현존하는 저서로는 <입서원문(立誓願文)> 1권, <제법무쟁삼매법문(諸法無諍三昧法門)> 2권, <수자의삼매(隨自意三昧)> 1권, <안락행의(安樂行義)> 1권 등이 있다. 혜사의 뒤를 이어 천태교학을 대성한 이가 바로 제3조인 천태 지의이다.


지의(538 ~ 597)는 형주의 화용(華容)에서 태어났으며, 양나라가 망한 다음 해인18세에 출가하기에 이른다.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진제(眞諦) 삼장의 문인이었던 혜광(慧曠)에게서 <섭대승론>과 유식, 율(律) 등을 배웠지만 후에 대현산에서 <법화경>을 독송하고 방등참법(方等懺法)을 닦았다. 23세에 광주의 대소산을 들어가 혜사에게 사사했다. 14일 후 <법화경>을 독송하고 있을 때, 약왕보살품(藥王菩薩品)의 사신(捨身)공양을 찬탄한 구절인 ?여러 부처님이 다같이 찬탄하기를,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공양한다고 이름한다?에서 법화삼매를 오도(悟道)하였다.


이후 지의는 혜사의 곁을 떠나 진나라의 수도인 금릉에서 학풍을 드날리기 시작하였으며, 38세 이후에는 천태산에 주석하였다. 다음 해에 선제(宣帝)로부터 수선사(修禪寺)라는 절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584년에는 칙명을 받아 금릉을 나와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했다. 다음 해에는 태자에게 계를 주고 587년에는 광택사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다. 589년 진(陳)이 멸망하자 형주로 가서 여산에 머물다가 진왕 광(晋王廣)으로부터 지자(智者)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광산(匡山)의 옥천사에 머물면서 <법화현의(法華玄義)>와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했다. 58세가 되던 해인 595년에 금릉에 나아가 진왕을 위해서 <정명소(淨名疏)>를 짓고, 다음 해에 입적하였다. 지의의 저술을 대단히 많지만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법화현의(法華玄義)> 20권, <법화문구(法華文句)> 20권, <마하지관(摩訶止觀)> 20권, <유마경략소(維摩經略疏)> 10권, <유마경현소(維摩經玄疏)> 6권, <차제선문(次第禪門)> 10권, <사교의(四敎儀)> 12권, <관심론(觀心論)> 1권,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 1권 등이 있다.


지의의 법을 이은 사람은 32명이라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후계자가 된 사람은 장안 관정(灌頂)이다. 관정은 지의의 문하에 들어가 광택사에서 관문(觀門)을 배우고 인가를 받았다. 이후 항상 지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강설을 기록했으며 지의가 입적한 후에는 그 유지(遺旨)를 받들어 천태산에 머물렀다. 저서에는 <열반경소(涅槃經疏)> 15권, <열반경현의(涅槃經玄義)> 1권, <국청백론(國淸百錄)> 5권 등이 있다. 관정의 제자에는 지위(智威), 홍경(弘景) 등이 있다. 지위는 제자인 혜위(慧威)에게 법을 전하고 혜위는 현랑(玄朗)에게 전했는데, 당대에 이르러 법상종, 화엄종, 선종 등의 세력에 눌려 천태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당 중기에 나와서 천태종을 중흥시킨 사람은 천태종의 제6조인 담연(湛然)이다. 담연은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 유학을 공부했었는데, 후에 천태종의 현랑에게 사사하게 된다. 담연은 <법화경>을 교판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초월적인 위치로 끌어올려 법화지상주의를 선양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체구설(體具說) 즉 마음의 본체는 본래부터 널리 퍼져 있으므로 모든 사물에도 일체의 세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또 초목이나 돌과 같은 무정(無情)의 존재에도 불성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저서로는 <법화현의석참(法華玄義釋懺)> 10권,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10권, <마하지관보행전홍결(摩訶止觀輔行傳弘決)> 10권, <십불이문(十不二門)> 1권 등이 있다. 담연이 활동할 당시에는 화엄종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화엄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예로 <대승기신론>의 진여수연(眞如隨緣) 사상에 근거해 만법(萬法)의 진실성을 논하고 있는 점, <화엄경>의 사상에 근거해 법과 부처의 일체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담연 이후 천태종은 당말오대(唐末五代)의 난세를 맞이하게 된다. 당 무제나 후주 세종의 폐불로 인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천태종은 오월왕의 보호를 받아 부흥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월의 충의왕은 의적(義寂)을 신임하여 그의 권유로 산실된 천태의 논서를 찾는데 힘썼다. 이에 따라 고려의 왕은 제관(諦觀)에게 부탁하여 논서를 오월에 기증했다. 제관은 의적의 제자가 되어 중국에 머물면서 천태학을 연구하였는데, 이때 천태교학의 강요서로 유명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가 탄생되었다.


의적의 문하에는 의통(義通), 의통에게서는 준식(遵式)과 지례(知禮)가 배출되었다. 지례는 천태종이 담연 이후 화엄종과 대립하면서도 화엄, <대승기신론>, 선(禪) 등의 사상이 흡수되어 점차 화엄화되어감을 비판하고 원래의 천태사상으로 복귀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지례의 주장에 대해서, 화엄화된 천태사상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반발하여 두 파로 나누어져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지례의 그룹은 스스로를 정통파로 여기며 산가파(山家派)라 칭하고, 그 반대 그룹을 산외파(山外派)라 칭하였다. 산외파는 지인(志因), 오은(晤恩), 원청(源淸)으로 이어지며 원청의 문하에서 지원(智圓)과 경소(慶昭)가 나와서 지례와 논쟁을 벌었다.


(2) 법화경과 천태삼대부

천태사상의 기본이 되는 경전은 <법화경(法華經)>이며 이 경을 중심으로 교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법화경>의 한역에는 여섯 종류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축법호 역의 <정법화경(正法華經)>, 구마라집 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사나굴다 역의 <첨품묘법연화경(添品 妙法蓮華經)>의 세 종류이다. 이 가운데 구마라집 역의 <묘법연화경>이 가장 많이 유포되여, <법화경>이라고 하면 이를 칭한다.


천태 지의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제목을 해석하는데 있어 묘법(妙法)을 최고, 절대의 진리라고 설하고 있다. 또 절대에는 상대적인 절대[相待妙]와 절대적인 절대[絶待妙]의 두 가지가 있다고 보며, 묘법(妙法)에서 묘(妙)인 까닭은 이 참된 절대 즉 절대적인 절대에 있다고 주장한다. <법화경>에서 보살의 생애를 연꽃에 비유하고 있다. 즉 연꽃이 더러운 연못이 아니면 자라지 않듯이,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을 피우듯이 보살도 역시 더러운 연못과 같은 현실에서 진리의 꽃을 피우게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연화(蓮華)가 묘법(妙法)에 덧붙여진 것은 묘법(妙法)이 보살에 의해서 현실 속에 구현되어야 할 진리로 존재하는 것임을 뜻한다.


<법화경>은 내용상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일승(一乘)의 묘법(妙法)을 밝히고 있고, 붓다가 영원한 인격[久遠本佛]을 밝히고 있고, 보살행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은 원래 27품이었는데, 지의에 의해서 <제바달다품>이 <견보탑품> 다음에 첨가되어 28품이 되었다. 지의는<법화경> 28품을 앞뒤 14품씩으로 나누고, 여기에 인문(因門)과 과문(果門)을 수용해서 앞의 14품은 적문(迹門)이라 하고 뒤의 14품은 본문(本門)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태학에서는 <법화경>보다 삼대부(三大部)로 불리는 <법화경>의 세 가지 주석서를 더 중요시한다. 천태종의 개종자인 지의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년에 학문과 수행이 원숙한 경지에서 독창적인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 강설한 주석서인 <법화문구(法華文句)>와 법화철학의 정수이자 원론서인 <법화현의(法華玄義)>와 수행과 실천의 대도를 밝힌 <마하지관(摩訶止觀) >을 삼대부(三大部)로 불러왔다. 이 삼대부는 천태 지의가 강의한 것을 제자인 장안 관정(灌頂)이 받아 적어 정리한 것이다.


먼저 <법화현의(法華玄義)>는 <법화경>과 천태학의 총론적 연구서이다. 교상문(敎相門, 교학)의 대표적인 저서로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경의 제목을 중심으로 하여 경전의 요지를 해석하고, 붓다 일생의 교법(敎法)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였다. 이른바 오중현의(五重玄義)로서 법화사상을 강론한 것이다. 곧 경의 제목, 주체, 근본, 작용, 교판의 다섯 가지 기준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모든 경전을 분석하여 <법화경>의 우위를 주장한 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는 <법화경> 28품의 모든 문장을 해석한 주석서이다. 여기에서도 네 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전형적인 경전 해석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설법의 인연에 따른 해석이며, 둘째는 듣는 이의 근기와 기호에 따른 해석이고, 셋째는 붓다가 법신(法身)의 본래불(本來佛)인가 아니면 화신불(化身佛)인가 등에 따른 차별적 해석이며, 넷째는 관심법 등 신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해석이다.


삼대부의 마지막인 <마하지관(摩訶止觀)>은 천태종의 실천적 관심법(觀心法)을 체계화한 저서이다. 여기서는 이전부터 전해 온 선정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특히 대표적인 실천론인 원돈지관(圓頓止觀)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이 책은 지의가 만년에 강술한 것으로 가장 원숙하고 체계적인 논서이다.


이 삼대부에 대해서 담연이 <법화현의석참(法華玄義釋懺)>,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 <마하지관보행전홍결(摩訶止觀輔行傳弘決)> 등의 주석서를 남겼다. 천태사상은 이 삼대부에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삼대부에 외에 천태학 또는 불교학의 입문서로 고려 제관의 저술인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가 있다. 3대 주석서로 종의의 <사교의집해(四敎儀集解)>, 원수의 <사교의비석(四敎儀備釋)>, 몽윤의 <사교의집주(四敎儀集註)>가 현존한다.



(3) 천태의 교상판석

중국에서의 교판의 기원을 찾아본다면 동진시대의 라집(羅什)과 보리유지(菩提流支)의 일음교설(一音敎說)이 있었고, 라집의 수많은 문하 중에서도 특히 도생(道生)의 사종법륜설(四宗法輪說)과 승예(僧叡)의 사교설(四敎說) 등이 있었다. 육조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진시대에 행해졌던 교판사상이 점차 발달하여 이른바 ?남삼북칠(南三北七)?이라 불리는 10가(家)의 교판이 형성되었다.


먼저 남방 삼가(三家)의 교판설을 살펴보면 이들은 불교를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나누었다. 돈교에 <화엄경>을 배대시켰으며 점교는 유상교(有相敎; 아함), 무상교(無相敎; 반야), 억양교(抑揚敎; 유마), 동귀교(同歸敎; 법화), 상주교(常住敎; 열반)로 나누었다. 북방 칠가(七家)의 교판설 가운데 광통(光統)과 혜광(慧光)의 사종판(四宗判)에서는 불교를 인연종(因緣宗; 毘曇), 가명종(假名宗; 戒論), 광상종(狂相宗; 大品般若), 상종(常宗; 열반, 화엄)으로 나누었다. 이 사종판(四宗判)은 후에 천태의 교판인 오시팔교(五時八敎)설 가운데 화의사교(化儀四敎)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현의>에서 ?남삼북칠(南三北七)?이라는 이전의 대표적인 교판 10 가지를 열거하여 전부 비판하고 자신의 교판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천태의 교판은 ?남삼북칠(南三北七)?의 교판의 영향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며, 종래의 교판을 종합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시(五時)와 화의사교(化儀四敎)는 비밀교(秘密敎)를 제외한 대부분 명칭이 이전의 교판 가운데 있고 지의는 그것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것이다.


지의는 불교의 모든 경교(經敎)를 붓다가 설법한 차례와 순서에 따라 다섯 단계 즉 오시(五時)로 배열하였다. 여기에 설법의 방법과 형식에 따라 분류한 화의사교(化儀四敎)와 법의 내용인 일체 교리를 분류한 화법사교(化法四敎)의 팔교(八敎)를 결부시켜 ?오시팔교(五時八敎)?로 지칭되는 교상판석을 완성시켰다.


오시(五時)란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로 일체의 경전을 설한 시기에 따라 분류하고 통일한 것이다. 화엄시(華嚴時)는 붓다가 <화엄경>을 설한 것을 시기로 성도(成道) 후 21일 동안이다. <화엄경>은 붓다가 직접 깨달은 법을 조금도 수식하지 않고 순수한 형태로 직접 설한 것이다. 아함시(阿含時)는 붓다가 <아함경>을, <화엄경>을 설한 직후, 12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최초의 설법장소가 녹야원이었으므로 녹야시라고도 한다. <아함경>은 이해력이 가장 낮은 사람을 위한 경전으로 간주되며 붓다 최초의 설법에 해당한다.

방등시(方等時)는 붓다가 <유마경>, <능가경> 등의 여러 방등(方等)경전을 아함 이후 8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방등경(方等經)은 소승(小乘)의 사고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무라면서 대승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소승불교를 배척하고 대승불교를 찬탄했으며 소승을 부끄럽게 여기고 대승을 흠모한 것이다.

반야시(般若時)는 붓다가 각종 <반야경>을 방등(方等) 후 22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공(空)의 근본 진리를 해명함으로써 소승을 대승으로 길들인 것이다.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는 붓다가 <법화경>과 <열반경>을 반야시 이후 8년 동안 설한 것을 말한다. <법화경>은 통일적인 진리 내지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으며, <열반경>은 붓다가 입멸할 즈음에 하루 밤낮동안 설했던 것으로 내용적으로 <법화경>과 동등한 위치를 갖는다.


지의는 오시(五時)를 통(通)과 별(別)로 구분해서 보았는데, 통오시(通五時)란 오시는 시간상 구별이 아니라 설법내용의 분류이며 오시 상호간에 오시의 설법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별오시(別五時)란 시간상의 차제를 분류한 것이다.


팔교(八敎)는 화의사교와 화법사교이다. 화의사교(化儀四敎)는 설법의 방법과 형식에 따라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로 분류한 것이고, 화법사교(化法四敎) 는 붓다가 설한 법의 내용인 일체 교리를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분류한 것이다.


화의사교를 살펴보면 돈교(頓敎)는 직돈(直頓)의 의미로 점진, 유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단번에 대승의 심오한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하며 화엄시에 해당한다. 점교(漸敎)는 점차의 의미로서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점진, 유인하는 것을 말한다. 소승으로부터 대승에 걸친 설법이 포함되며 아함, 방등, 반야시에 해당한다. 비밀교(秘密敎)는 비밀부정교(秘密不定敎)의 약칭이며 듣는 사람이 서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으로 모든 경전에 지칭된다. 부정교(不定敎)는 현로부정교(顯露不定敎)의 약칭이며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미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소승과 대승의 모든 경전에 대하여 지칭할 수 있다.


화법사교는 지의의 독창적인 인식으로 지의의 불교관과 사상적 입장이 표출되어 있다. 장교(藏敎)는 경(經), 율(律), 론(論)의 삼장교(三藏敎)라는 의미로 소승불교를 가리킨다. 이는 불교 교리를 이해하는 초보적인 단계로 특히 공(空)을 파악하는 방법에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상으로는 자기 및 세계를 요소로 분석하여 진정한 존재물은 이 요소뿐이며 이것을 법체(法體)라 하고 삼세(三世)에 항존하기 때문에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했다. 바로 사물을 요소적으로 분석해감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무(空無)를 주장하였으므로 절공관(折空觀)이라고 평하게 되었 다. 또 공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에 정체했다고 하여 편공(偏空), 단공(但空), 단공(單空)이라든가 허무공견(虛無空見)이라고 비판받았으며 장교의 공관(空觀)이나 입장은 진리로 인도하는 방법이 졸렬하다고 하여 졸도관(拙度觀)이라고도 지칭된다.


통교(通敎)는 공통의 교법(敎法)이라는 뜻으로, 앞의 장교에도 통하고 뒤의 별교, 원교에도 통하며 또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에 공통되는 교리이다. 즉 대승과 소승에 공통되는 교리이다. 장교가 사물의 생멸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데 비해 통교는 사물 그대로에 합치하여 전체적으로 공이라고 본다. 바꿔 말하면 사물의 당체(當體) 그대로 공이라고 하여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체공관(體空觀) 또는 즉공관(卽空觀)이라고 불린다. 생멸에 관해서는 생(生)을 고집하지도 멸(滅)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생과 멸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무생무멸(無生無滅)이며 간략하게 무생관(無生觀)이라 지칭된다. 장교의 졸도관에 대하여 이것은 교도관(巧度觀)이라고 지칭된다. 대승의 경전 가운데 특히 <반야경>이 통교를 대표한다.


별교(別敎)는 앞의 장교와 통교, 뒤의 원교와도 구별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오로지 보살만을 대상으로 삼는데 이 점이 이승(二乘)과 같지 않으며, 대승에서 설한 특별한 가르침이다. 교리로서는 공(空)으로부터 가(假)로 나아가며 현실의 한량없는 모습에 대한 자유자재의 대응을 설한다. 그리하여 다시 중(中)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별교에 있어서 공(空), 가(假), 중(中)은 점차적이고 단계를 낮춘 것으로서 원융상즉(圓融相卽)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중(中)은 공(空), 가(假)에 대해 특별한 것이고 목적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중(但中)이라고 평해진다. 이러한 점에서도 별교라고 지칭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전으로 <화엄경>을 들 수 있다.


원교(圓敎)는 원만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며, 진리 내지 세계를 총합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공가중(空假中)에 대하여 말하면 별교처럼 차제의 삼관(三觀)이 아니고 원융상즉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이다. 공가중(空假中)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참으로 적당함을 얻어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진(眞)이 되는 등, 여러 가지 사물이 본래 지녀야할 바를 얻어서 무작(無作), 즉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원교에 가장 적합한 경전으로 <법화경>이 거론된다.



(4) 천태의 존재양상

천태의 진리관으로부터 다양한 존재의 상태가 규정되고 또 전체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 먼저 존재의 상태에 대해서는 <법화경> 방편품(方便品)에서 십여시(十如是)로 표현하고 있다. 십여시란 모든 것이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보(報), 본말구경등(本末久竟等)의 열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고 생기한다는 것이다. 상(相)은 외적인 양상, 성(性)은 내적인 성질, 체(體)는 외적인 양상과 내적인 성질을 합한 전체, 력(力)은 잠재적인 능력, 작(作)은 드러나는 작용, 인(因)은 사물이 생기하는 직접적인 원인,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 과(果)는 인연에 의해 생긴 결과, 보(報)는 결과가 사실이 되어 외부로 표출된 것, 본말구경등(本末久竟等)은 상(相)에서부터 보(報)까지 연관하여 일관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전체에 여시(如是)라는 말이 있으므로 십여시(十如是)라고 불렀다. 이 십여시는 처음과 끝을 일관한 법으로 다양한 사물에 구비되어 각각의 개체를 지탱하는 규범이 되고 있다. 천태 지의는 십여시를 공(空), 가(假), 중(中)의 삼제(三諦)에 적용하여 전독(轉讀)했는데, 이는 뜻에 의거해서 문장을 읽는 것으로 삼전독(三轉讀)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의 존재를 열 가지 계층으로 배열하였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 천상(天上), 성문(聲門),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의 십계(十界)가 바로 그것이다. 십계는 현실적으로는 열 개의 다른 계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본래는 선악불이(善惡不二)로서 서로 융합하는 것이다. 10계로 말하면 지옥에도 불계(佛界)가 있고, 불계(佛界)에도 지옥이 있게 된다. 10계 전체에 적용하면, 10계 각각에 10계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천태 지의가 설한 십계호구설(十界互具說)이다.


천태 지의의 십계호구설과 선악상즉론 등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총합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이며, 그 결정체가 일념삼천론(一念三千論)이다. 삼천이라는 것은 우주의 모든 존재를 십계로 나누어지고, 이 각각의 십계에 십계가 포함되므로 백계(百界)가 된다. 또 모든 존재는 십여시(十如是)라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리하여 백계에 이 십여시를 곱하면 천(千)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여기에 다시 <대지도론>에서 설하는 중생(衆生), 오음(五陰), 국토(國土)의 삼종 세간을 곱하면 삼천(三千)이 된다. 삼천은 일체 제법이 모두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묘법(妙法)이며 사리융즉(事理融卽)하여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있다. 삼천은 커다란 우주전체의 상태를 나타난 것이며, 이에 비해 일념(一念)은 극소의 세계를 나타난 것이다. 이 일념과 삼천이 상즉(相卽)하고 있음을 논한 것이 <마하지관>이며, 그 상즉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일념삼천이다. 즉 일념삼천은 만유 모두가 서로 융즉(融卽)한 것을 설하는 것으로 일념이 삼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5) 천태의 실천체계

천태사상은 크게 교상문(敎相門)과 관심문(觀心門)으로 나누어진다.

교상문은 이론적인 측면으로써 교학적으로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으로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이 대표적인 예이다. 관심문은 수행적인 측면으로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천태 지의의 실천론은 지관(止觀)이라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지관(止觀)은 천태 지의 이전부터 사용되던 말로써 지(止)는 범어 samatha로 바깥 경계를 쫓아 일어나는 모든 잡념과 망상을 그치고 마음을 고요히 지니는 방법으로 곧 적정(寂靜)을 뜻한다. 관(觀)은 범어 vipasyana로 어떤 대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지관(止觀)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가운데 정(定)에 속하는 정도이지만, 지의에게서 지관(止觀)은 정적인 면과 동적인 면,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선정(禪定)적인 면과 선혜(禪慧)적인 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지관(止觀)에는 점차(漸次)지관, 부정(不定)지관, 원돈(圓頓)지관의 세 가지가 있다. <마하지관(摩訶止觀)>에 의하면 이 세 가지 지관은 천태 지의가 남악 혜사(慧思)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라고 한다. 점차지관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점차적으로 지관을 실수(實修)하는 것을 말하고, 부정지관은 때와 경우에 따라 심천(深淺), 전후(前後)가 서로 호응되는 것을 말하고, 원돈지관은 전체적, 종합적으로 곧바로 실상(實相)의 구극을 체득하고 체현하는 것을 말한다. 천태 지의의 저서 가운데 점차지관이 중심인 것은 <차제법문(次第法門)>이며, 부정지관이 중심인 것은 <육묘법문(六妙法門)>이며, 원돈지관이 중심인 것은 <마하지관>이다.


오시팔교(五時八敎)의 화법사교(化法四敎)에 의하면 장교(藏敎)에서는 석공관(析空觀)을, 통교(通敎)에서는 체공관(體空觀)을, 별교(別敎)에서는 공가중(空假中)에 대한 차제삼관(次第三觀)을, 원교(圓敎)에서는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일심삼관(一心三觀)을 닦는다. <마하지관>에서 말하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은 이 원교의 지관법으로 천태실천론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지관>은 천태실천론의 궁극적인 이상인 원돈지관을 오략십광(五略十廣)의 조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오략(五略)은 발대심(發大心), 수대행(修大行), 감대과(感大果), 렬대망(裂大網), 귀대처(歸大處)로 구성되어 있다. 발대심(發大心)에서는 열 가지의 틀린 생각을 제시하면서 사성제나 사홍서원 혹은 육즉(六卽) 등의 교설을 매개로 삼아 생각을 바르게 하며, 즉공(卽空) 즉가(卽假) 즉중(卽中)의 지관의 구극을 향하여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수대행(修大行)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에 관하여 사종삼매(四種三昧)의 지관 실천법을 설명한다. 감대과(感大果)에서는 지관의 성과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렬대망(裂大網)에서는 지관의 달성에 의해 세간의 미혹이라는 그물이 파열되는 것을 말하고, 귀대처(歸大處)에서는 지관이 귀착해야 할 곳을 밝힌다.


오략(五略)을 확대해서 설명한 것이 십광(十廣)으로 대의(大義), 석명(釋名), 체상(體相), 섭법(攝法), 편원(偏圓), 방편(方便), 정수(正修), 과보(果報), 기교(起敎), 지귀(旨歸)로 구성된다. 대의(大義)에서는 오략(五略)의 대의를 기술하고, 석명(釋名)에서는 상대지관과 절대지관, 천태가 의미하는 지(止)의 세 가지 뜻과 관(觀)의 세 가지 뜻을 밝힌다. 체상(體相)에서는 지관의 체와 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섭법(攝法)에서는 리혹지행위교(理惑智幸位敎)의 여섯 가지 법에 의해서 일체법을 포섭하고 다시 그 여섯 가지 법이 상호 포섭되는 것을 나타낸다. 편원(偏圓)에서는 대소(大小), 반만(半滿), 편원(偏圓), 점돈(漸頓), 권실(權實)에 대해서 상술한다. 방편(方便)에서는 25방편을 설하고, 정수(正修)에서는 지관의 대상인 십경(十境)과 지관의 방법인 십승관법(十乘觀法)에 대해서 기술한다. 과보(果報)에서는 관법을 성취해서 얻는 불과(佛果)에 대해서, 기교(起敎)에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대해, 지귀(旨歸)에서는 불과(佛果)를 성취해서 모두가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의는 지관을 상대지관과 절대지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상대지관이란 지(止)와 불지(不止), 관(觀)과 불관(不觀), 지관하는 주체[能觀]와 지관의 대상[所觀] 등이 대립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에 반해 절대지관이란 두 가지가 대립하는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이를 부사의(不思儀)한 지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지관, 일대사(一大事)지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절대지관이 곧 원돈지관이다.


원돈지관의 방편행인 25방편은 선관(禪觀)을 닦는 필수조건으로 지관의 본격적인 실수를 위한 예비단계이다. 25방편은 구오연(具五緣), 가오욕(呵五欲), 기오개(棄五蓋), 조오사(調五事), 행오법(行五法)이다. 구오연(具五緣)은 수행하기 위한 예비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말하고, 가오욕(呵五欲)은 꾸짖어야 할 다섯 가지 욕망이고, 기오개(棄五蓋)은 깨달음을 향한 서원과 지혜가 생기는 것을 덮어서 방해하는 버려야 할 다섯 가지를 말하고, 조오사(調五事)는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모두 제거한 후에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다섯 가지를 말하고, 행오법(行五法)은 집중해서 수행정진하기 위해 행하는 다섯 가지이다.


이 25방편을 닦았을 때에 비로소 정수지관(正修止觀)을 닦을 수 있다. 이 정수지관(正修止觀)의 외형적인 면은 사종삼매(四種三昧) 즉 상좌(常坐)삼매, 상행(常行)삼매, 반행반좌(半行半坐)삼매, 비행비좌(非行非坐)삼매로 나누어진다. 사종삼매는 실천 방면을 세분한 것으로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으로 구분한다.


상좌삼매(常坐三昧)는 일행(一行)삼매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90일을 한 기간으로 해서 몸은 오로지 불(佛)을 향하여 다리를 포개고 바르게 앉고, 입은 침묵을 지키고, 뜻은 오직 일념으로 법계(法界)를 향한다. 상행삼매(常行三昧)는 몸은 항상 행보를 하며 친지나 마을을 떠나 홀로 머문다. 항상 걸식하고 특별한 청은 받지 않는다. 도량을 장엄하고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며, 꽃과 향, 등불, 공양물 등을 올린다. 목욕으로 몸을 청정히 하고 옷을 갈아입고 90일간 아미타불의 주변을 계속 걷는다. 입으로는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처를 생각한다. 뜻으로는 미타의 정토나 부처의 32상(相)을 상기한다.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는 방등(方等)삼매와 법화(法華)삼매로 나누어진다. 방등삼매는 7일을 한 주기로 해서 재(齋)를 올린다. 날마다 3번 목욕하고 첫날에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24계와 다라니를 받는다. 입으로는 먼자 다라니주를 독송하고 첫날에는 이구동음으로 삼보(三寶), 십불(十佛), 방등부모(方等父母), 십법왕자(十法王子)를 청한다. 공양하고 예배, 참회하고 돌면서 다라니를 외우는 일과 앉아서 명상하는 일을 반복한다. 뜻으로는 번뇌를 다스리고 선근(善根)을 증장시킬 것을 사유한다. 법화삼매는 21일을 한 주기로 해서 불상 주위를 돌고 좌선하는 것을 교대로 행한다. 그 사이에 예불, 참회, 송경(誦經) 등이 행해진다.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는 세 가지 삼매 외에 모든 삼매를 말한다.


정수지관(正修止觀)의 내면적인 측면은 지관의 대상인 십경(十境)과 지관의 방법인 십승관법(十乘觀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십승관법의 대상이 되는 십경(十境)은 음입계경(陰入界境), 번뇌경(煩惱境), 병환경(病患境), 업상경(業相境), 마사경(魔事境), 선정경(禪定境), 제견경(諸見境), 증상만경(證上慢境), 이승경(二乘境), 보살경(菩薩境)이다. 십경(十境)은 수행에 나타나는 갖가지 경계의 번뇌를 일으키는 기초단계인 음입계경(陰入界境)에서부터 이를 멸해나가는 경계를 차례로 나타내고 있다.


십승관법(十乘觀法)은 해탈, 성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열 가지 관법이다. 십승관법의 항목은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 기자비심(起慈悲心), 교안지관(巧安止觀), 파법편(破法遍), 식통색(識通塞), 수도품(修道品), 대치조개(大治助開), 지차위(知次位), 능안인(能安忍), 무법애(無法愛)이다. 관부사의경(觀不思議境)은 부사의경을 관하는 것이다. 기자비심(起慈悲心)은 원교의 진정한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교안지관(巧安止觀)은 앞의 기자비심에서 지관을 성취하지 못한 이가 교묘하게 마음을 잘 안정시켜서 지관하는 방법이다. 파법편(破法遍)은 앞의 교안지관을 닦아도 지관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집착이 있기 때문이므로 자신의 일방적인 견해, 아견, 편견 등에 대한 집착을 파척하는 것이다. 식통색(識通塞)이란 수행을 막는 것과 통하게 하는 것을 식별하여, 막는 것은 제거하고 통하게 하는 것은 증장시키는 지관법이다. 수도품(修道品)이란 37조도품을 원교적으로 응용하여 때와 처소에 맞게 닦는 것이다. 대치조개(大治助開)란 보조행을 닦아서 장애를 대치한 후에 본래의 바른 지관을 닦는 것이다. 지차위(知次位)란 수행자가 지금까지의 수도 정도와 앞으로 닦아가야 할 계위를 아는 것이다. 능안인(能安忍)이란 안팎에서 오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능히 견디는 지관법이다. 무법애(無法愛)란 작은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 이 십승관법은 수행자가 만나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이에 대처한 것이다.





화엄사상


(1) 화엄경개설

오시교판(五時敎判)은 화엄경의 특색을 아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시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 설법을 각 경전이 설해진 시기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제 2주째의 설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베나레스의 녹야원의 초전법륜보다도 이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은 초전법륜의 사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주축으로 하는 <아함경>보다 빠른 것이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들은 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아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녹야원의 설법에 의하여 비로서 성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 자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 단엄하게 앉아 있고, 그 후에 여러 천계(天界)에 올라갈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있는 곳에는 항상 보살들이 운집하여 부처님을 찬탄하고 삼매에 들어 부처님이 깨달은 풍광을 감득하고서는 이것을 서로 이야기 한다. 보살들은 그 경우에 부처님이 발하는 광명을 받고 가시(加持)를 입어 법을 설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경을 들을 수도 없었고, 따라서 '아함' 속에 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화엄경은 이와 같이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부처님의 내관(內觀), 즉 깨달음의 풍광을 그려 내는 것을 제1의 목적으로 하는 경전인 것이다.



(2) 화엄사상의 역사

화엄사상은 중국불교의 정화(精華)로서 <화엄경>을 바탕으로 전개된 사상이다. <화엄경>은 인도에서 이루어졌으나 사상적으로는 중국의 화엄가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화엄사상은 곧 화엄종의 성립으로 구축된 사상의 총합이다. 화엄종은 지론종(地論宗)과 섭론종(攝論宗)의 학설을 받아 들이고 당 초기에 현장이 전한 유식불교의 자극을 받아서 성립된 것이다.


중국의 화엄사상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은 불타발타라 역의 <육십화엄>이다. 이 <육십화엄>의 번역장에 참여했던 법업(法業)이 <화엄지귀(華嚴旨歸)> 2권을 썼는데, 이것이 <화엄경> 연구의 시초이다. 이후 <화엄경> 연구가 왕성해져 남북조 시대에는 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었다. 화엄종은 당나라에 이르러 형성되어 화엄교가들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성되어갔다.


두순(杜順)은 화엄종의 초조로 여겨진다. 두순은 18세에 출가하여 인성사(因聖寺)에서 승진(僧珍)을 모셨다. 두순은 <화엄경>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였다기보다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는 <화엄경>을 독송하고 궁극적인 보살행으로서의 보현행을 닦을 것을 중시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저서로는 <오교지관(五敎止觀)>, <법계관문(法界觀門)>, <오회문(五悔文)>, <십문실상관(十門實相觀)>, <회제종별견송(會諸宗別見頌)> 등이 있는데 두순의 진작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특히 <법계관문>은 <화엄경>의 세계를 세 가지 관법에 의해 파악하려 한 책으로, 이는 법장의 저서로 여겨지고 있다.


지엄(智儼)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화엄가였다. 지엄은 12세에 신승 두순의 문하에 들어가 두순의 수제자인 달(達)법사에게 맡겨 키워졌다. 지엄은 인도승으로부터 범문을 배우고 여러 법사에게서 <섭대승론>, <사분율>, <십지경>, <열반경> 등을 배웠다. 지엄은 지정(智正)에게서 <화엄경>의 강의를 듣고 <화엄경>의 연구에 몰두했다. 저서로는 <화엄공목장(華嚴孔目章)>, <오십요문답(五十要問答)>,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 <육상장(六相章)>, <수현기(搜玄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수현기>는 60화엄의 주석서이다.


법장(法藏)은 현수(賢首)국사라고 불리는데 화엄교학의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다. 17세에 법을 구하여 태백산에 들어갔다가 후에 지엄이 운화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는 것을 듣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법장은 실차난타가 80권 <화엄경>을 번역할 때 참여했으며, 이를 강의하기도 했다. 장안(長安) 4년에는 측천무후를 위하여 장생전에서 십현육상(十玄六相)의 교의를 금사자에 비유하여 설했는데 이것이 <화엄금사자장(華嚴金獅子章)>이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망진환원관(妄眞還源觀)>, <탐현기(探玄記)>, <유심법계기(遊心法界記)>, <화엄지귀(華嚴旨歸)>,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등의 화엄관계 저서들과 <반야심경(般若心經)>, <범망경(梵網經)>, <밀엄경(密嚴經)>의 주석, 그리고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십이문론종치의기(十二門論宗致義記)>, <입능가경현의> 등의 저서가 있다.


전통적인 화엄교가에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화엄사상을 수립한 사람으로 이통현(李通玄)이 있다. 그는 80화엄의 연구에 몰두하여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저술하였다. 그 외의 저서로는 <결의론(決疑論)>, <석해미현지성비십명론(釋解迷顯智成悲十明論)> 등이 있다. 이통현은 불광삼매관(佛光三昧觀)을 중시하여 실천적인 사유를 전개하였으며,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혜원(慧苑)은 법장의 뛰어난 제자였으나 스승의 설을 이어받지 않고 독자적인 교판론을 세워고 십현(十玄)에 대한 해석도 달리 하였다. 이로 인해 징관에 의해 이단자로 취급받아 배척당했다. 저서로는 80권 화엄경의 주석서인 <속화엄략소간정기(續華嚴略疏刊定記)>, <화엄경음의(華嚴經音義)> 등이 있다.


청량대사 징관(澄觀)은 화엄교학뿐만 아니라 천태(天台), 율(律), 선(禪) 사상은 물론 불교 이외의 사상에도 정통했다. 그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교의를 사종법계(四種法界)로 체계화했으며, 모든 종파를 융합하려는 입장에서 화엄사상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화엄경수소연의초> 80권을 저술했는데, 이는 80화엄의 대표적인 주석서이다. 이외에 저서로 <삼성원융관(三聖圓融觀)>, <법계현경(法界玄鏡)> 등의 저서가 있다.


종밀(宗密)은 처음에는 유학을 배우고 이후에 도원(道圓)에 의해 출가하였다. 그는 특히 <원각경(圓覺經)>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는 <원각경>의 주석서인 <원각경대소>, <원각경대소초>와 <원인론(原人論)>,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 등이 있다. 종밀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와 도교를 명확히 사상적으로 정립시키고, 징관이 주장한 교선일치(敎禪一致)설을 완성시켰다.


징관과 종밀에 의해 화엄교학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회창폐불 이후 화엄사상은 점차 쇠퇴해갔으며, 중흥의 교주라 불리는 송대의 정원(淨源)을 선두로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징관이나 종밀의 교학을 연구하고 주석을 달 뿐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3) 화엄의 교판

중국불교를 흔히 종파불교라고 하는데, 각 종파의 성립과 사상을 이해하는데는 교판(敎判)이 중요한 지침이 된다. 남북조 시대부터 각 종파에서 자기 종파의 종지(宗旨)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행해졌던 것이다. 화엄종도 예외는 아니여서 법장(法藏)에 의해 교판론이 체계화되었다. <화엄오교장>에서는 화엄교판 이전에 있었던 10 가지 교판을 제시한 후에 화엄의 독자적인 교판을 세우고 있다. 법장은 화엄사상이 모든 사상의 총결이며 가장 수승한 법문임을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과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으로 드러냈다.


화엄교학에서는 일승(一乘)을 동교(同敎)일승과 별교(別敎)일승으로 나눈다. 양거(羊車), 녹거(鹿車), 우거(牛車)로 비유되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에 대하여 대백우거(大白牛車)의 일불승(一佛乘)이 가장 수승하다는 것은 법화(法華)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화엄에서는 이 일승을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누어 법화는 동교에 배대시키고, 화엄을 별교에 배대시키고 있다. 동교는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이 융회해서 같다는 의미이며, 별교는 삼승(三乘)에 별이(別異)하다는 의미이다. 일승이 삼승과의 대립을 초월하면서도 삼승을 포함하는 것을 별교일승이라고 하며, 삼승을 회통한 일승은 동교일승이다.


법장은 일승이 삼승보다 수승하다는 것은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에서 밝히고 있다. 오교판은 법을 분류한 것이고, 십종판을 종취를 분류한 것이다. 오교(五敎)는 소승교(小乘敎), 대승시교(大乘始敎), 종교(終敎), 돈교(頓敎), 원교(圓敎)이다. 소승교(小乘敎)는 소승불교의 설로 인공(人空)을 설할 뿐 법공(法空)을 알지 못했으로 낮추어 부른 것이다. 대승시교(大乘始敎)는 대승의 첫 관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식설과 중관설을 말한다. 종교(終敎)는 대승종극의 의미로 여래장연기설을 말한다. 돈교(頓敎)는 언설과 계위를 세우지 않는 몰록 이루고 몰록 증득하는 것으로 <유마경>의 설이 이에 해당한다. 원교(圓敎)는 교리(敎理)와 행과(行果)가 모두 원융무애하고 자재한 교설이다.


십종(十宗)은 법(法)도 아(我)도 동시에 실재한다고 설하는 독자부 등의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삼세(三世)에 걸친 법의 실재와 무아(無我)를 설하는 설일체유부 등의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현재의 법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대중부 등의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현재의 법 가운데도 오온은 실재하지만 십이처와 십팔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설가부 등의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세속의 법은 일시적으로 것으로 출세간의 법이 진실이라고 하는 설출세부 등의 속망진실종(俗忘眞實宗), 아(我)도 법(法)도 임시로 이름붙인 것으로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하는 일설부 등의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일체법은 모두 본래 공하다고 설하는 대승시교의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일체의 법은 진리 그 자체의 작용으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종교의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말을 떠난 진실의 경지를 나타내는 돈교의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별교일승의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이다. <화엄경>의 가르침은 제5교인 원교(圓敎), 제10종인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에 해당한다.



(4) 법계연기

화엄가들은 <화엄경>의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으로 보고 있으며, 화엄의 세계는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세계라고 보고 있다. 법장은 화엄종의 종취를 ?인과연기 이실법계(因果緣起 理實法界)?라고 밝히고 있다. 법계연기란 모든 사물이나 현상이 진실 그 자체의 연기의 모습으로 나타내어진 것으로 어떠한 실체성이나 고정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계연기설은 지엄에게서 그 틀이 보이며 청량 징관을 거쳐 규봉 종밀에 와서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확정된다.


화엄사상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법계(法界)라고 한다. 두순의 <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는 진공관(眞空觀),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의 법계삼관(法界三觀)을 설하고 있다. 먼저 진공관(眞空觀)은 모든 법은 실성이 없어 유(有)와 공(空)의 두 가지 집착을 떠난 진공(眞空)임을 관하는 것이다. 이사무애관(理事無碍觀)은 차별있는 사법(事法)과 평등한 이법(理法)은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함을 관하는 것이다. 주변함용관(周遍含容觀)은 우주간의 온갖 사물이 서로서로 일체를 함용하는 것을 관하는 것이다.


지엄은 법계연기를 보리정분의 정문(淨門)연기와 범부염법의 염문(染門)연기로 나누고 있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과 인불가설(因分不可說)로 나누고 그것이 십불자경계(十佛自境界)와 보현경계(普賢境界)라고 하고 있다. 종밀에 이르러서는 사종법계(四種法界)설로 발전하게 된다. 사종법계(四種法界)는 사물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의 관계를 설한 가르침이다. 여기서 법계(法界)란 Dharma-dhatu의 번역어로 연기현전하는 우주만유이다. 이 법계의 체(體)는 일심(一心)으로 원명구덕(圓明具德)의 일심이며, 총해만유(總該萬有)의 일심이다. 따라서 법계란 일심체상에 연기하는 만유이다. 그래서 우주만유 각각의 법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을 법계라 한다. 이 법계를 설명하는데 사(事)와 이(理)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인 것이다.


사종법계는 사(事)법계, 이(理)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이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를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사(事)법계는 모든 차별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事)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계(界)란 분(分)을 뜻한다. 각각의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개체간의 공통성보다는 차별적인 면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이(理)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理)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계(界)란 성(性)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理)는 총체적 일심진여(一心眞如)이며, 공(空)이며 여여(如如)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간의 동일성, 공통성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이사무애(理事無碍)법계는 이(理)와 사(事), 즉 본체계와 현상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유기적으로 연걸되어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 있다. 금이라는 금속은 이(理)의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事) 혹은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事事無碍)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모든 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 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5) 삼성동이와 연기인문육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연기는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의 도리가 바탕이 되어 전개된다. 이 상즉과 상입의 근거를 밝힌 것이 삼성동이(三性同異)와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이다. 삼성동이는 법계연기의 과법(果法)에서 파악한 것이고, 연기인문육의는 인(因)의 입장에서 파악한 것이다.


삼성동이(三性同異)란 삼성(三性)이 체상에서 보면 동일하지만 의리상에서 보면 다른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삼성(三性)은 진여원성(眞如圓性), 의타(依他), 소집성(所執性)으로 유식에서 설하는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을 차용한 것이다. 법장에 의하면 삼성에는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진여(眞如)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이 있고, 의타(依他)에는 사유(似有)와 무성(無性)이 있고, 소집(所執)에 정유(情有)와 이무(理無)가 있다. 진여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연(緣)에 따라 다르게 이루진다. 의타성은 다른 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연이 다하면 없어진다. 그래서 거짓으로 있는 것이며 자성이 없는 것이다. 소집성은 망정(妄情)으로만 생기는 것이르모 정(情)만 있고 이치상으로는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 진여의 불변(不變), 의타성의 무성(無性), 소집성의 이무(理無)는 의미에 의해서 동일한 범주에 속하며 서로 어긋나지 않는데 이를 본삼성(本三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현상을 파괴하지 않고 언제나 진실 그 자체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진여의 수연, (隨緣) 의타성의 사유(似有), 소집성의 정유(情有)는 의미에 의해서 동일한 범주에 속하며 서로 어긋나지 않는데 이를 말삼성(末三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본질을 움직이지 않고 항상 현상으로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삼성도 다르지 않고 말삼성도 다르지 않으므로 불이문(不異門)이며, 본말 삼성이 하나가 아니므로 불일문(不一門)이다. 결국 본말삼성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로써 진(眞)의 본은 망의 말(末)을 포섭하고 망의 말(末)에는 진(眞)의 본이 두루 미쳐있으므로, 진망은 서로 동일체로 걸림이 없는 것이다.


법계연기의 원인이 인(因)의 여섯 가지 뜻을 밝힌 것이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이다. 모든 법이 생기하는 원인에는 반드시 공유력부대연(空有力不待緣), 공유력대연(空有力待緣), 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 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 유유력대연(有有力待緣), 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의 여섯 가지 뜻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서 과보(果報)가 발생한다. 여기서 인(因)의 체(體)가 공(空)하고 유(有)한 2문 상에 각각 인(因)에 힘이 있어 연(緣)을 기다리지 않는 경우와, 인(因)에 힘이 있어도 연(緣)과 함께 만나 일어나는 경우와, 인(因)에 힘이 없어 언제나 연(緣)을 만나야만 제법(諸法)이 생기하는 경우를 총칭해서 인(因)에 육의(六義)를 설정한 것이다.


이 육의(六義) 또한 유식에서 설하는 종자(種子)의 육의(六義)를 수용하여 전개한 것이다. 종자는 여섯 가지 조건을 갖추여야 하는데, 즉 유위법(有爲法)은 찰나에 생멸하므로 인(因)인 종자도 찰나에 생멸해야 한다는 찰나멸(刹那滅), 발생할 현상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하여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과구유(果俱有), 끊이지 않고 항상 상속해야 한다는 항수전(恒隨轉), 선악에 대한 공능(功能)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성결정(性決定), 반드시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할 때 현상이 발생해야 한다는 대중연(對衆緣), 자신의 과(果)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인자과(引自果)이다.


공유력부대연(空有力不待緣)은 찰나멸(刹那滅)의 뜻으로, 제법이 찰나에 생멸하여 과거는 이미 멸했으며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무르지 않아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무자성공(無自性空)이다. 그런데 이 멸함에 의하여 다시 과법(果法)이 생기므로 인(因)에 힘이 있어 유력(有力)이며, 사라져 멸함은 인(因)이 되는 종자의 속성이므로 연(緣)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부대연(不待緣)이다. 공유력대연(空有力待緣)은 구유(俱有)의 뜻으로, 인(因) 자체는 공(空)이고 인과(因果)가 모두 함께 갖추어 있으므로 유력(有力)이고, 인(因)은 독존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연(待緣)이다. 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은 대중연(對衆緣)의 뜻으로, 여러 인(因)이 화합한 제법은 자성이 없으며 그 인(因)의 체는 공이다. 인(因)만으로는 과(果)가 생할 수 없고 반드시 연(緣)을 기다려 과(果)가 생하므로 인(因)에 작용력이 없으므로 대연(待緣)이다.


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은 성결정(性決定)의 뜻으로, 성품이 본래부터 결정되어 있어 유(有)이며, 자성을 고치지 않고서 과법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 유력(有力)이고, 연(緣)이 없어도 인(因)이 과(果)를 발생하므로 부대연(不待緣)이다. 유유력대연(有有力待緣)은 인자과(引自果)의 뜻으로, 인(因)이 스스로 자체와 동류인 결과를 초래하므로 유(有)이고, 인(因)이 자체와 동류인 과(果)를 내는데는 인(因)에 힘이 있는 것이므로 유력(有力)이고, 인(因)이 자과(自果)를 생하는데는 증상연을 필요로 하므로 대연(待緣)이다. 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은 항수전(恒隨轉)의 뜻으로, 제법은 항상 다른 연(緣)에 의해 전변 상속하므로 유(有)이고, 인(因)은 항상 다른 연을 따라 작용하므로 인(因) 자체에는 작용력이 없으므로 무력(無力)이고, 연을 따르므로 대연(待緣)이다.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에서는 공유(空有)의 대립은 상즉(相卽)의 원리로, 유력무력(有力無力)의 대립은 상입(相入)의 원리로, 대연부대연(待緣不待緣)은 동체(同體)와 이체(異體)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를 근거로 하여 십현연기와 육상원융과 같은 화엄의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성립되는 것이다.



(6) 십현연기

상즉, 상입의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체계적으로 관찰한 구체적 설명이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십현연기는 십현문(十玄門)이라고도 하는데, 존재하는 사사물물 전체가 원융무애하게 있음을 설한 것이다. 십(十)은 원만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현묘, 문(門)은 사사무애법문이다. 10가지 심오한 신비의 무애(無碍)세계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법장은 <화엄오교장>에서는 스승인 지엄의 십현문설(十玄門)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나 <탐현기>에서는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탐현기> 이후에 보이는 십현설을 신십현(新十玄)이라 하고 그 이전의 십현설을 고십현(古十玄)이라고 부른다.


신십현(新十玄)은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탁사현법상해문(託事顯法生解門),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이다.


이 가운데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과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은 고십현(古十玄)에서의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과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고친 것이며,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은 고십현(古十玄)의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은 십현연기의 총설로서 낱낱의 현상에 전세계가 동시에 구족해 있고 또 원만하게 잘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同時)는 선후(先後)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고, 구족(具足)은 모두 섭수하여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체 제법이 열 가지 뜻을 동시에 구족해서 상응하여 원만히 조화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열 가지 뜻은 담고 있는 말씀과 담겨있는 내용인 교의(敎義), 본체와 현상계인 이사(理事), 소현경(所現境)과 능관지(能觀智)인 경지(境地), 수행과 도달하는 지위인 행위(行爲), 원인과 결과인 인과(因果), 의보와 정보인 의정(依正), 체성과 묘용인 체용(體用), 사람과 법 즉 주체와 객체인 인법(人法), 역행과 수순행인 역순(逆順), 느끼게 해는 것과 응해주는 것인 감응(感應)이다.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은 연기 제법에 각각 광협(廣狹)이 있으면서도 무애(無碍)하다는 것이다. 이는 간격이 멀든 가깝든 간에 모든 존재들이 아무런 장애없다는 뜻이다. 광(廣)은 밖이 없다는 무외(無外)의 뜻으로 넓음이란 한계를 갖지 않아 밖이 없는 것이다. 협(狹)은 안이 없다는 무내(無內)의 뜻으로 가장 좁음이란 그 자체가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아 안이 없다는 것이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를 포섭하는 것이다. 좁은 것과 넓은 것은 하나와 전체로 말할 수 있으므로 서로 자유롭게 구애됨이 없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 이를 고십현(古十玄)에서는 제장순잡구덕문(諸藏雜具德門)이라고 한다. 즉 연기하고 있는 법에는 순수한 것과 잡된 것이 섞여 있지만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 대로 나름의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동시일념(同時一念)으로 자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보살이 오직 대비로 순(純)을 삼더라도 미래세가 다하도록 보살도를 행하는 것을 보이는 경계이다.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은 하나와 전체가 서로 용납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는 전체에 들고 전체는 하나에 녹아 있어 무애자재하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다. 그러면서도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하나와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상입(相入)을 말한다. 상입이란 이것과 저것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걸림없이 융합하는 것이다. 하나란 불변의 자성을 가진 확정적인 하나가 아니라 연기한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 가운데 전체이고 전체 속의 하나이지만, 하나는 하나로서 전체가 아니고 전체는 전체로서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가 아니고 전체도 하나가 아니다. 각각 제 나름대로의 개성으로 본래의 면목을 보유하고 있다.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은 모든 요소들이 서로 동일시되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인 차별로부터의 자유이며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타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종합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서로 비춰보고 서로 동일시한 결과 함께 조화하여 움직인다. 상입(相入)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걸림없이 융합하는 묘용(妙用)의 측면이라면, 상즉(相卽)은 서로 자기를 폐(廢)하여 다른 것과 같아지는 체(體)의 측면이다.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은 고십현(古十玄)에서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비밀은(秘密隱)?과 ?현(顯)?으로 된 것을 ?은밀(隱密)?과 ?현료(顯了)?로 정리한 것이다. 비밀(秘密) 즉 숨은 것과 현료(顯了) 즉 드러난 것이 함께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금사자장>에서는 우리가 금사자를 접할 때 사자로서 사자를 볼 때는 사자뿐이고 금은 없으며, 금을 볼 때는 단지 금뿐이고 사자는 없으나 금사자는 금과 사자를 합하여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화엄현담>에서는 반달의 예를 들고 있다. 반달은 반은 빛나고 반은 어둡다. 그러나 감춰진 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을 지구에서 보면 큰 공만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작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달 자체가 늘어나가 줄어들지 않는다. 그 반달은 밝음과 어둠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밞음 아래에 어둠이 있고 어둠 아래에 밝음이 있다. 하나로 많은 것을 섭수하면 하나는 드러나고 많은 것은 가리워진다. 많은 것이 하나를 거두어들이면 많은 것은 드러나나 하나는 가리워진다. 한 터럭이 법계를 섭수하면 곧 나머지 터럭의 법계는 모두 가리워지고 나머지 낱낱 터럭의 가리워지고 드러남도 또한 그러하다. 한 편은 보이고 한 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둘다 갖추어져 있어서 하나가 성립되면 다른 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은 미세한 것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미세(微細)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작고 정밀하다는 의미이다. 하나가 능히 많은 것을 함용하므로 상용(相容)이라고 하고, 하나와 많은 것이 섞이지 않으므로 안립(安立)이라고 한다. 무한세계가 작은 먼지나 티끌 속에 존재하며, 이들 세계의 일체 먼지 속에 또다시 무한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일념 중에 모든 것을 구족하여 가지런히 나타나 명료하지 않음이 없음을 겨자씨를 담은 병에 비유하기도 하고 화살이 빽빽히 꽂친 화살통에 비유하기도 한다.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은 인다라망(因陀羅網)의 비유에 의해 상호 반영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천 궁전에 걸린 보배망의 각 보배구슬마다 서로 다른 일체 구슬이 비쳐 무진(無盡)한 것처럼 법계의 일체도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연기상유(緣起相由)하여 무애자재하다.


탁사현법생해문(託事顯法生解門)은 모든 연기된 존재가 그대로 법계 법문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 당체(當體)가 그대로 연기 현전한 것이므로 두두물물이 다 비로자나 진법신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비유는 곧바로 법의 상징이고, 법이 비유이고 비유가 곧 법이다.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은 십세의 시간에 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즉, 상입하여 하나의 총합을 이루지만 그러나 전후 장단의 구별이 뚜렷하여 질서가 정연한 것을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삼세(三世)가 있어 구세(九世)가 되고 그 구세(九世)는 한 생각에 포섭되므로 십세(十世)이다. 또 일념을 열면 구세(九世)가 되므로 합하여 십세(十世)가 된다. 그래서 일념(一念)이 십세무량겁(十世無量劫)이고 무량겁(無量劫)이 일념(一念)이지만 십세(十世)는 낱낱이 서로 혼잡함이 없이 완연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은 주체와 객체가 조화롭게 함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우주법계에는 어느 한 사물도 독자적으로 생겨나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서로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되어 모든 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십현(古十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바꾼 것이다.



(7) 육상원융

육상원융(六相圓融)은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다. 육상(六相)은 <화엄경> 속에 있는 명칭인데 이를 철학적으로 논의한 것은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이다. 지론종 남도파인 혜원(慧遠)은 세친의 십지경론설을 받아들여서 육상설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혜원의 설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지엄이고 완전하게 조직한 사람이 법장이다.


육상(六相)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한다. 이는 총별(總別), 동이(同異), 성괴(成壞)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개념이나 모습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이다.


모든 존재는 다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의 육상(六相)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이 육상(六相)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일체가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기로써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緣)이 모여 성립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성립된 총상(總相)은 부분을 총괄하여 전체를 만들고 있다. 또 별상(別相)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과 부분을 말하는데 이것이 총상(總相)에 의지하여 원만하고 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총상(總相)이 없으면 별상(別相)이 없고 따라서 총상(總相) 밖에 별상(別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동상(同相)이란 별상(別相)의 하나하나가 서로 조화되어 모순되지 않고 성립되는 힘을 균등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상(異相)이란 별상(別相)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있으면서 제각기 상을 잃지 않고 조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성상(成相)이란 별상(別相)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총상(總相)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부분이 다만 집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유기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모여서 하나의 전체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괴상(壞相)은 별상(別相)이 총상을 성립시키면서도 별상(別相) 제각기의 자격을 갖추고 있으면서 총상(總相)의 모양으로 혼융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법장은 <오교장>에서 육상(六相)을 집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다 가령 총상(總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을 총괄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별상(別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그 자체를 이른다. 동상(同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이상(異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은 각각 가로와 세로로 되어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 또 성상(成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각각 인연이 되어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괴상(壞相)은 기둥, 석가래, 대들보 등이 집을 조립하여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각 자기의 본 모양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육상(六相)의 관계를 체상용(體相用)의 관계로 나누어 보면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은 연기의 체(體)라고 보고,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은 연기의 상(相)이라고 하고,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은 연기의 용(用)이라고 할 수 있다.




(8) 성기사상

화엄교학의 '성기'는 천태에 있어서의 '성구(性具)'에 대한 성기사상으로 사상화되어 있다.


'성기'란 말할 것도 없이 <60권 화엄경> <성기품>에 근거한 말이다. '성기'를 중요한 주제로 주목한 것은 지엄이다. 지엄의 그러한 경향이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것이다.


<수현기(搜玄記)> 권 하에서 법계연기를 밝히는 중에 정문(淨門) 연기에 4문을 나누는데 그 본유문에 "연기는 본래부터 실제가 정(情)을 떠나 법계 현연으로서 3세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고 그 경증으로서 <성기품>의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미진의 경권(經卷)이 있다. 보리의 대수가 있어서 중성(衆聖)은 공히 증하며 사람이 증하는 것은 전후가 부동이지만 그 수(樹)는 별이(別異)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인용하고 있다.


성기는 "연기는 구극적??으로 성기"라고 말하여지는데 그 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무자성의이기 때문에 공이요, 둘째는 인연유력 때문에 생하여 과법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첫번째 뜻인 연성을 무자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통례로서 특이한 것은 없지만, 지엄은 이것은 불기(不起)의 기로서 파악한다.


"이것은 연기의 성에 말미암기 때문에 설하여 기라고 한다. 기는 곧 불기이다. 불기란 곧 성기이다."라는 성기사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연기하고 있는 제법은 현현해 있으면서도 본래의 불기의 과성(果性)이다. 연기의 제법을 관찰해 보면 그 하나는 무자성으로서, 기가 즉 불기하고 하는 것은 본래의 불기의 과성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연기하고 있는 단순한 기를 성기라고 하지 않는다. 제법을 무자성에 있어서 파악하여, 기이면서 불기라고 하는 것이 성기의 입장이다.


성기란 일승법계(一乘法界)를 밝힌다. 연기에 처하여도 본래 구경으로서 수조를 떠난다. 무엇때문인가. 난상(難相) 때문이다. 기란 대해(大解), 대행(大行), 난분별(難分別)의 보리심 가운데 있음을 이름하여 기라고 한다.


성기란 화엄의 일승법계를 밝히는 것이므로 연기의 구극적인 수조를 떠난 것이라고 한다. 인간이나 자연의 구체적인 현실은 하나 밖에 없으며 그것을 떠나 별도의 성기의 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토사상


(1) 정토삼부경 개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설한 경전은 다수 중국에 번역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연구되어 온 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다. 정토삼부경이란 정토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경전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강승개(康僧鎧) 역이라고 전해지는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 강량야사(畺良耶舍) 역이라고 전해지는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量壽經)> 1권, 구마라집(鳩摩羅什) 역으로 전해지는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1권을 말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중국역은 강승개 역뿐만 아니라 천 년에 걸쳐 12회 번역되었으며, 5본이 현존하고 다른 7본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을 옛날부터 오존칠결(五存七缺)이라고 말한다. 현재 남아있는 다섯 가지의 번역본의 <무량수경>은 다음과 같다.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4권은 <평등각경(平等覺經)>이라고 줄어서 부르기도 한다. 후한의 지루가참이 번역하였다고 하며 위나라의 백연이 번역했다는 설도 있으며 서진의 축법호가 번역했다는 설도 있다. 후한의 지루가참 역인 <불설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과도인경(佛說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 2권은 일반적으로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이라고 불려진다. 강승개 역의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2권은 <대경(大經)>, <쌍권경(雙卷經)> 혹은 <위역(魏譯)>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중국, 한국, 일본에 가장 많이 유포된 경전이며 일반적으로 <무량수경>이라고 할 때에는 이 경전을 가리킨다.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 2권은 <대보적경(大寶積經)>에 수록된 것으로 당나라의 보리유지가 706년에서 713년에 걸쳐 번역하였다. <대무량수장엄경(大無量壽莊嚴經)> 3권은 송나라의 법현이 991년에 번역하였다.


<무량수경>은 정토사상의 모든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유포된 위나라의 강승개가 번역한 <무량수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량수경>은 석가모니가 왕사성의 기사굴산에서 아난존자를 상대로 설한 것으로 상, 하의 두 권으로 되어있다. 내용은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法藏)비구가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워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과 그 결과로 얻은 서방정토의 장엄과 중생들이 왕생할 수 있는 방법을 설한 것이다.


먼저 상권에서는 여래정토(如來淨土)의 인과(因果) 즉 아미타불이 정토를 건립하는 인과를 설하고 있으며, 하권에서는 중생왕생(衆生往生) 즉 중생들이 극락에 왕생하는 인과를 설하고 있다. 정토건립의 인(因)은 법장비구가 세운 48가지 서원이고, 정토건립의 과(果)는 법장비구가 수행하여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정토를 건립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시방세계에 알리며 중생으로 하여금 듣고 믿게 한 것이다. 중생왕생의 인(因)이란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근기와 수행의 공덕에 따라 상배(上輩), 중배(中輩), 하배(下輩)로 분류하고 이들이 모두 염불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수행에 의해 왕생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중생왕생의 과(果)란 중생이 정토에 왕생하여 받는 무량한 과보를 말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경(觀 經) >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번역된 것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강량야사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고, 다른 하나는 담마밀다의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이다. 그러나 담마밀다가 번역한 것은 산실되었고 강량야사 역만이 현존한다. <관무량수경>은 정토삼부경 가운데 가장 나중에 성립하였고, 내용적으로도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과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산스크리트 원전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善導)가 <관무량수경소>를 저술한 이후 중국, 한국, 일본의 정토교에서 이를 중요한 경전으로 취급하였다.


<관무량수경>의 내용은 석가모니가 기사굴산에 계실 때 왕사성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태자 아사세가 부친 빈비사라왕을 감옥에 가두고 모친 위제희부인까지고 살해하려고 왕궁의 깊은 곳에 유폐시켜 버렸다. 이에 위제희부인은 슬퍼하며 석가모니의 왕림을 기원하였다. 석가모니가 위제희부인의 서원에 따라 부인의 처소에 나타나 광명을 일으켜 시방세계의 정토를 비쳐 보여주자 위제희부인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을 원하고 그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석가모니는 부인을 위해 삼복(三福)과 16관(觀)을 설하였다. 위제희부인은 이 설법을 듣고 진리의 실상을 깨닫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았으며 500명의 시녀들도 극락왕생을 원했다고 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특히 관(觀)이 중시되고 있는데, 관(觀)한다는 말에는 관견(觀見)과 관지(觀知)의 두 가지 뜻이 있다. 관견(觀見)이란 극락정토의 아름답고도 불가사의한 장엄을 마음 속에 그려보는 것을 말하며, 관지(觀知)란 아미타불에게 귀의하는 절대 신심을 말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은 줄여서 <소경(小經)>, <미타경(彌陀經)>이라고 부른다. <아미타경>에는 세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구마라집 역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1권, 구타발타라 역의 <소무량수경(小無量壽經)> 1권, 현장 역의 <칭찬정토불섭수경(稱讚淨土攝受經)> 1권이 있다. 이 가운데 구나발타라 역은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고, 구마라집 역이 정토삼부경의 하나이다.


<아미타경>은 석가모니가 기사국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사리불 존자에게 설한 것으로, <무량수경>에 비해 분량이 적다. 주된 내용은 극락정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공덕장엄(功德莊嚴)과 극락에 왕생하는 방법을 설한다. 이러한 공덕장엄은 국토, 의복, 음식 그리고 육체나 정신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렇게 공덕장엄을 널리 설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중생의 업(業)인 작은 선근(善根)이나 복덕으로는 왕생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아미타불의 명호를 듣고 하루 내지 7일동안 염불한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이 이것을 믿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동서남북과 상하의 육방(六方)의 항하사제불(恒河沙諸佛)이 광장설(廣長舌)을 내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으면서 증명하고 있으며 경계하고 있다. 왕생극락을 의심하는 것은 육방의 항하사제불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이 되며, 왕생극락을 믿는 것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을 믿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은 석존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석존의 말씀을 믿는 것은 육방의 항하사제불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리불에게 석가모니와 육방의 모든 부처님도 이 불가사의한 공덕을 찬탄함을 설하고, 중생들은 모든 부처님이 찬탄하는 이 경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지녀 정토에 왕생하기를 서원할 것을 권한다.



(2) 정토사상의 발전과 변용

정토사상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중국의 정토사상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나름대로의 독자적 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그 원형은 중국의 정토사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국의 정토사상은 후한 삼국시대에 정토계 경전의 번역에서 비롯되었다. 영제광화(靈帝光和) 2년(179)에 지루가참과 축불삭이 공동으로 <반주삼매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이 정토관계 번역의 효시이다.


정토교 초기에 결사를 만들어 염불삼매법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여산의 혜원(慧遠)이다. 혜원은 남방 여산에서 백련결사(白連結社)를 하여 대중과 함께 염불삼매에 정진하였는데, 주로 <반주삼매경>에 의해 견불왕생(見佛往生)을 기약하였다. 이는 엄격한 지계(持戒)와 뛰어난 명상으로 아미타불을 염하여 실제로 혹은 꿈에서 아미타불과 만나 드리어 인과응보의 세계를 떠나 서방정토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정토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유송 이후 정토신앙은 각지에 전파되어 <무량수경>의 강독이 널리 행해졌고 아미타불상도 점차 조성되었다. 북위(北魏)의 선문제(宣武帝) 때 보리유지는 세친의 <무량수경우바데사>를 번역하였고, 담란(曇鸞)이 그것을 주석함과 동시에 <십주비바사론>의 난이이도(難易二道)설에 의해 타력본원(他力本願)을 주장하여 정토교의 본의를 천명하였다. 담란은 정토교의 교판을 이행도(易行道)라고 규정짓고 이행도는 아미타불을 믿고 그 원력에 의해서 정토에 왕생을 이루는 도(道)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의 원력이 바로 타력(他力)이다. 담란은 중국 정토교의 초조이며, 그의 저서로는 <정토론주(淨土論註)>, <왕생론주(往生論註)>, <찬아미타불게(讚阿彌陀偈)> 등이 있다.


담란 이후 정토교는 그 세력이 점차 확대된다.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작(道綽)과 선도(善導) 등이 배출되어 담란의 교지를 계승하여 부처님의 본원(本願)을 강조하였고 말법(末法)사상을 고취하여 정토사상이 시기와 근기에 부합하여 수행하는데 적당하다고 설하였다.


도작(道綽)은 14세에 출가하여 <열반경>을 연구하고 24번이나 강의했으며 후에는 <반야경>을 배웠다고 한다. 우연히 담란이 살았던 분주 현충사에 참배하러 가 정토교에 귀의했다. 당시 삼론종의 길장이 아미타불은 중생의 모습을 취한 화신(化身)이지 진실한 보신(報身)이 아니며 극락도 부처님이 임시로 나타내 보인 화토(化土)지 진실한 불국토인 보토(報土)가 아니라고 하면서 정토교를 비난하였다. 또 섭론종에서는 극락왕생은 곧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그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서방왕생을 과소평가하였다. 도작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고 정토사상을 확립하기 위해서 <안락집(安樂集)>을 저술하였다. 도작은 불교의 역사적인 쇠퇴를 정법(正法) 500년, 상법(像法) 1000년, 말법(末法) 10000년이라고 파악하고 <대집경(大集經)>에 근거해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불멸 후 제4의 500년에 해당된다고 하여 지금이야말로 참회하고 복을 닦고 당연히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또 어느 곳에난 불국토는 존재하며 그것들은 모두 청정한 세계이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정토는 그러한 정토의 초문(初門)이 아니며, 그것은 예토의 마지막 장소인 사바세계와 접하고 있으므로 왕생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선도(善導)는 각지를 순례한 후 도작의 문하가 되어 염불(念佛)의 실천에 전념하였다. 장안에 나가 정토교를 널리 알리고 <아미타경> 수만 권을 사경하였다. 저서로는 <관무량수경소>, <법사담(法事談)>, <왕생예찬게(往生禮讚偈)> 등이 있다. 선도는 <무량수경>을 근본으로 하면서 <관무량수경>을 표방하고 있으며, <관무량수경>에 대한 혜원, 지의, 길상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그는 아미타불의 본원의 힘을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 작용하는 힘으로 해석하여 이것을 믿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 틀림없이 어떠한 어리석은 사람도 아미타불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관무량수경>의 16관(觀)을 정선(定善) 13관, 산선(散善) 3관으로 나누고 전체를 범부를 위해 설한 것으로 간주하여, 오역죄(五逆罪)를 짓거나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악인이라도 정토왕생이 가능하다고 했다.


당나라 개원(開元) 초기에 혜일(慧日)은 인도로부터 돌아와서, 당시 선종에서 정토신앙을 오직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방편허망설로 보는 견해를 통렬히 비판하여 염불왕생의 긴요함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파를 만들었다. 이것이 혜일삼장의 자민류(慈愍流)이다. 저서로는 <정토자비집(淨土慈悲集)>, <반주삼매찬(般舟三昧讚)> 등이 있으며, 이 사상은 후세의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 내지는 염불선(念佛禪)의 원류가 되었다. 혜일의 사상은 승원, 법조, 비석 등이 계승하여 염불삼매가 위없이 깊고 묘한 선문(禪門)이 된다고 하면서 참선하는 무리들은 아만심만 높다고 배척하였다.


혜일 이후 선정쌍수(禪淨雙修)가 설해짐으로 염불과 선의 결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그 영향을 받아 부처나 정토를 마음으로 파악하려는 유심정토(唯心淨土)사상이 강해졌다. 이러한 경향을 원, 명시대에도 거의 그대로 이어졌는데 명대의 대표적인 정토사상가 주굉의 선정일치(禪淨一致) 사상이나 지욱(智旭)의 선교율(禪敎律)을 염불에 통일하려는 사상에서 나타난다.



(3) 정토의 교판

교상판석은 각 종파의 종지(宗旨)를 세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정토교에서도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정토교장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교판을 세웠다. 정토교에는 난역이도(難易二道)의 교판, 성정이문(聖淨二門)의 교판이 있다. 난역이도(難易二道)의 교판은 용수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나온 설을 근거로 한 것이고, 성정이문(聖淨二門)의 교판은 중국의 도작(道綽)이 주장한 것이다.


난역이도(難易二道)의 교판은 깨달음 또는 정토왕생을 위한 수행의 난이(難易)에 의하여 세운 교판이다. 자력(自力)에 의하여 현세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권하는 수행을 난행도(難行道),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의 명호를 칭하는 타력(他力)에 의지해서 빠르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용수는 대승보살도의 하나로서 보살이 52계위를 밟아서 불퇴전위(不退轉位)를 획득함에 있어서 난이이도(難易二道)를 설한다. 즉 난행도(難行道)는 자력에 의해 오랜 동안 고행을 닦아 불퇴전위(不退轉位)에 드는 것을 말하고, 이행도(易行道)는 부처님을 믿는 인연에 의해 제불보살의 명호를 칭하고 부처의 원력에 의해 쉽게 불퇴전위(不退轉位)에 이를 것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의 담란(曇鸞)은 이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권하는 보살도를 난행도(難行道),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즉 깨달음을 얻음에 있어서 정토에서 얻는 것을 이행도(易行道), 이 세계에서 얻는 것을 난행도(難行道)라고 한다.


성정이문(聖淨二門)의 교판은 말법(末法)이라고 하는 시대의식을 배경으로 인간의 능력의 우 열(優劣)이라는 관점에서 행해진 것이다. 이는 도작(道綽)이 주장한 것으로 그는 말법사상의 영향을 받아 시교상응(時敎相應)의 긴요함을 설하고 있다. 도작은 부처님의 교법을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의 두 가지로 분류했다. 성도문(聖道門)은 사바세계에서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해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 과보를 얻는 것이고,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정토문(淨土門)이라고 했다. 지금은 말법시대이므로 성도문(聖道門)을 버리고 오로지 정토문(淨土門)에 귀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도문(聖道門)은 이미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되었고, 또한 그 진리가 아주 심오해서 말법시대의 둔한 근기를 지닌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타력본원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착안하여 타력본원(他力本願)설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담란(曇鸞)이다. 담란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도, 정토에서 보살행을 닦는 것도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가능하다고 설하고 있다. 담란은 그 증거로 법장(法藏)보살의 48원 가운데 제11원, 제18원, 제22원의 세 가지 서원을 인용하여 타력(他力)의 증상연(增上緣)이라고 불리는 부처님을 가피력을 설한다.


제11원은 정토에 왕생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願)에 머물러 반드시 멸도(滅度)에 이른다고 하는 것인데, 담란은 이를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머물게 하는 서원이라고 해석했다. 제18원은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왕생하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내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담란은 제18원의 힘으로 시방의 모든 중생은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며 왕생한 후에는 제11원의 힘으로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제22원의 원력(願力)으로 보현보살과 같은 보살행을 닦고, 시방세계의 무량한 중생들을 교화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를 얻게 하는 보살도(菩薩道)를 행하게 한다고 한다.


담란은 법장보살의 48원을 성취한 아미타불의 원력을 타력(他力)이라고 하고, 모든 중생은 이 타력(他力)으로 왕생(往生)과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와 보살도(菩薩道) 세 가지를 완성한다는 타력본원설(他力)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난행도(難行道)는 자력(自力)뿐으로 타력(他力)이 없지만, 이행도(易行道)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정토에 왕생해서 신속하게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부처님의 원력에 주목한 담란의 타력설은 도작(道綽)에게로 이어졌다. 도작의 타력설은 말법(末法)사상과 부처님의 원력(願力)이 결합된 것이다. 도작은 부처님을 믿는 인연으로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마음을 일으키며 공덕을 닦고 갖가지 수행을 할 때 부처님의 원력으로 즉시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의 가피로 인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본원의 강조는 선도(善導)의 <관무량경소>에도 나타난다.



(5) 악인과 왕생

<무량수경>에는 법장보살이 세운 48원 가운데 제18원에서는 십념(十念)으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설하면서도 오역(五逆)의 죄를 범한 자, 정법(正法)을 비방한 자는 제외했다. 그러나 <관무량수경>에는 만약 오역(五逆), 십악(十惡)의 중죄를 범하고 여러 가지 선하지 못한 행을 갖춘 자라도 임종에 이르러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의 명호를 부른다면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해져 있다. 따라서 정토가들 사이에 이 두 경전의 교설의 상위가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담란(曇鸞)은 <무량수경>은 오역죄(五逆罪)와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두 종류의 중죄를 범한 자는 왕생할 수 없다고 한 데 반해서, <관무량수경>은 십악(十惡), 오역(五逆) 등의 죄를 범한 자라도 왕생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지만, <관무량수경>의 악인(惡人)은 정법(正法)을 비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담란은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것만이 왕생할 수 없는 죄라고 간주하면서, 두 경전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담란은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자는 불국토에 태어나기를 원할 리 없으며, 만일 비방하면서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연기없는 불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또 담란은 오역죄를 범했는데 십념(十念)에 의해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십념에 마음(心), 연(緣), 결정(決定)의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을 경우라고 했다. 마음에 대해서는 이 십념은 진실한 가르침을 듣고 염할 수 있는 것으로서 죄를 범한 마음의 허망(虛妄)을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오역죄를 범한 자도 십념에 의해 왕생할 수 있다. 연(緣)에 대해서는, 이 십념은 무상(無上)의 신심(信心)에 의해서 아미타불의 방편장엄진실청정무량한 공덕명호를 염하는 것으로서, 독화살을 맞았어도 화살을 빼고 약을 바르면 낫는 것과 같다고 했다. 결정(決定)에 대해서는 이 십념은 무후심(無後心)과 무간심(無間心)에 의해 염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도작(道綽)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도작은 <무량수경>이 오역죄(五逆罪)와 정법(正法)을 비방한 자를 제외한 것은 부처님이 일체 중생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죄업이 무겁기 때문에 만일 범한다면 아비지옥에 떨어져 결국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 잘못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방편으로 못하게 하여 태어날 수 없다고 한 것이지, 구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관무량수경>에서 최하위의 사람에 대해 정법(正法)을 비방한 사람만을 제외한 것은 오역(五逆)은 이미 범해 버렸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는 만류하고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죄를 범하면 태어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아직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행하였다고 하더라도 구제하여 태어나게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선도는 담란과 달리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뿐만 아니라 정법(正法)을 비방한 자도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도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6) 아미타불과 극락정토

<대아미타경>의 24원 중 제6원에는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분단보시하고, 탑을 만들고, 연등을 밝히고, 사문에 시식하고, 탑을 쌓은 절을 짓고, 애욕을 끊어 나의 나라에 와서 태어나고자 하는 원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성취의 귀절 가운데 삼배(三輩) 중의 중배단(中輩段)에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평등각>의 24원에는 이것에 해당하는 원은 없지만 3배단에는 '중배'의 간에 이것과 같은 것이 설해져 있다.


<무량수경>의 중배단에도 이것은 설해져 있다. 아미타불의 가르침은 처음에는 불탑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이 중시되어 정적인 부처가 됨과 동시에 불탑신앙에서 멀어진 것이다.


아미타불의 광명은 태양의 광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태양의 광명과 불교가 일어난 중인도 풍토는 적대관계에 있다고 한다. 흑열의 중인도에서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을 태양은 용서없이 증발시켜 버리기 때문에 결코 환영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미타경>은 극락의 공덕을 설한 것이 주가 되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광명에 관해서는 광명이 무량하여 사방의 국토를 비추며 장애가 없다고 설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무량수경>에 아미타불의 광명에 관해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아미타불의 기원을 서방에서 구하는 유력한 이유가 되고 있다.


아미타불을 신앙하면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도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것이 정토교가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선사상


(1) 선의 기원

선(禪)은 고대 인도인의 요가라고 부르는 우주합일의 지혜로부터 비롯된다. 그 기원은 멀리 기원전 2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해진다. 선은 산스크리트어인 디야나(dhyana)의 음사로 명상을 의미하며, 요가(Yoga)는 정신집중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선은 넓은 의미에서의 요가실습의 한 단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양쪽 모두 마음을 일정한 대상에 결부시키는 것에 의해서 마음의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고 몰아(沒我)적인 밝은 지혜를 얻는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인도의 문명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러한 명상과 정신집중의 실습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슈베타. 슈부타라. 우파니샤드>가 가르치는 요가 방법은 후에 서기 1세기 무렵의 인도의 산스크리트 종교시 <바가바드.기타> 제 6장으로 계승된다. 이 글에서 말해지는 요가의 실습은 유일신에 대한 절대귀의를 말하는 인도의 원시 샹카의 철학과 결부되지만, 실습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앞에 기록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명상의 실습에 의거하면서, 후에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각 종파의 종교가 창안해낸 교의(敎義)가 참으로 다양하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불교 가운데에서 조차 거의 동일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차이를 나타낸다. 예컨데 오늘날 남방불교의 명상과 일본 선종의 명상은 그 사상내용을 현저하게 달리한다. 더구나 요가와 선의 좌법(坐法)은 그 실습의 양식까지 서로 다르다. 말하자면 종으로는 2000년의 역사를 관총하면서, 횡으로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의 전역에 확산되었던 명상의 사상은 각 지역의 이질적인 문명과 서로 결합되어, 온갖 꽃들이 어지럽게 피는 듯한 장관을 이끌어낸 것이다.


중앙아시아나 티베트, 그리고 남해(南海)의 여러 섬에서 일찍이 훌륭한 명상의 종교가 번영했던 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많은 유물과 문헌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아시아인이 고대 인도에서 일어난 명상의 종교에 기울인 관심이 참으로 다양했으며 지역적으로 광범위하였다는 사실은 곧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추구하는 기대의 세계적인 다양성과 상으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장구한 역사를 견디면서 광범위한 이질적인 문명과 결합했던 인도에서 발생한 명상의 종교의 그 사상적인 본질을 파악하기란 매우 곤란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막연하게 선이라든가 요가라고 말해지고 있는 것이 모두 그것이며, 동시에 어느 쪽이나 모두 반드시 그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함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선의 문화라든가 사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그 위험성은 한층 심각하다.


선의 문화는 반드시 철학의 체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감상이나 이해의 정도는 그것한 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이해하는 사람은 알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며, 더욱이 이해하는 방식이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해지는 내용에도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선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소수파 종교이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출가와 독좌명상(獨坐瞑想)이라고 하는 엄격한 실천으로부터 출발했다. 적어도 불교의 선은 고타마 붓타의 엄격한 출가와 좌선의 도(道)를 문자 그대로 충실하게 배운다고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더욱이 불교 이전의 고독한 옛 선인의 전통과 연결되는 것이다.


또 수 많은 대승의 여러 파가 일어난 후에도, 가장 소박한 출가불교의 실천을, 오로지 지키려고 한 것이 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곧바로 일반적인 공통의 실천으로 삼기 어려운 한계를 갖는다. 본래 소승의 선에 대해서 대승의 선이 주장되고, 다시 이것을 넘어서는 최상승의 선을 입장으로 하는 것이 중국, 한국, 일본의 선으로, 그것은 반드시 협의의 출가주의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실습으로서의 선은 기원전 3세기에 해당하는 오랜 베다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이 없다.


명상의 실습은 실제로는 일반 현대인이 생활과 결부되기 어렵다. 적어도 어떤 일정기간은 가족이나 사회와의 교섭을 단절하는 고독한 생활이 요구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문화의 영역까지도 뛰어 넘는다



(2) 보리달마의 선사상

선(禪)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에서 발달하고 한국, 일본에 전해져 각각 독자적인 전통을 형성하였다. 또 우리가 선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협의로 모든 중국선종의 사상이다. 인도불교의 독자적인 명상이었던 선(禪)이 중국에 와서 정착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불교가 전래하기 이전부터 선(禪)과 유사한 종교적 실천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장자>에서 설한 진인(眞人)의 호흡법이나 이것에 영향을 받아 후에 태식법(胎息法)으로서 완성된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호흡법이 그것인데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얻어진 경지의 표현도 불교의 선의 경지의 그것과 대응하는 면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선이 노장사상이나 신선도와 교섭하면서 전개된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양상을 가진 선의 실천은 선자들을 배출하면서 각지로 전해져 갔다. 그러나 북위시대가 되면서 다시금 새로운 선이 중국에 전해지게 된다. 이것이 이후 중국선의 개창자가 되는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선이다. 중국의 선종(禪宗)은 양나라 때에 중국에 온 보리달마(菩提達摩)를 초조(初祖)로 하여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순서로 그 선법(禪法)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혜능의 시대에 정설로 된 것이어서 반드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페르시아 출신으로 중국으로 건너와 유행하던 중 낙양의 영녕사(永寧寺) 9층탑의 금반(金盤)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고 종소리가 바람을 머금고 울려퍼지는 것을 듣고 ?나는 150살이 되는 지금까지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사원은 보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입으로 나무(南無)를 외우고 매일매일 합장했다고 한다. 또한 담림(曇林)이 기록한 <약변대승입도사행서(略辯大乘入道四行序)>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인도 국왕의 셋째 아들로서 대승의 도(道)에 마음이 끌려서 출가하여 세상에서 뛰어난 덕을 갖추었으나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보리달마의 출신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으며 건너온 경로에 대해서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서역을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달마의 대승선은 반야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벽관(壁觀)의 실천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달마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데, 이입사행이란 도(道)에 들어가는 요문으로서 이입(理入)과 사행(四行)으로 구성되었다. 이(理)는 진리가 진리인 원리이며, 행(行)은 그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이다.


먼저 이(理)에 들어가는 이입(理入)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는 실천으로서 그것은 경전의 취지를 깨달아서 중생의 동일한 진성(眞性)을 깊이 믿고 벽관에 확고히 머물러서 차별, 상대의 입장을 떠나 진리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다음에 행(行)에 들어가는 행입(行入)에는 보원행(報寃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의 네 가지가 있다. 보원행(報寃行)이란 어떠한 괴로움이 닥쳐도 그것을 자기의 악업(惡業)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달게 받아 들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 소득도 없는 죄라고 호소하지 않는 것이다. 수연행(隨緣行)이란 고락(苦樂), 득실(得失)은 모두 연(緣)에 의한 것이라고 관하여 마음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스스로 도에 따르는 실천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 만유는 공이며, 현실의 세계는 편안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무 것도 구하거나 원하지 않는 실천이다. 칭법행(稱法行)이란 본래 청정한 진리에 들어맞는 실천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더러움이나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행해지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한다.


달마는 진리를 자각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으로 벽관(壁觀)이라는 독자적인 대승선법을 주장하였다. 달마의 제자인 담림은 이입(理入)은 안심(安心)이며, 안심(安心)은 벽관(壁觀)이라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벽이란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풍진(風塵)을 방지하는 역할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가옥의 외벽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벽관은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들어갈 수 없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과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음이 장벽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본래의 상태인 것이다.


이후 보리달마의 선법은 혜가(慧可), 도육(道育), 니총지(泥總持)에게 전해졌다고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보리달마의 선맥은 혜가(慧可)에게로 전승되었다. 혜가는 6년간 달마에게 배우고 일승(一乘)을 깊이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선사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확실한 것은 그에게서부터 능가종(楞伽宗)이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능가종(楞伽宗)은 <능가경(楞伽經)>을 소의로 연구하며 그 정신을 추구하였는데 <속고승전>에는 달마가 이것을 혜가에게 전하고, 혜가가 처음으로 그 요지를 체득한 것으로 이후의 계보에 기재되어 있다.

(3) 달마이전의 중국선 - 소승선과 대승선, 염불선

본래 인도가 가진 독자적인 명상기술의 중국전래를 가능하게 했던것은 중구민족이 옛날부터 갖고 있던 신선방술(神仙方術)에 대한 신앙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용에 앞서 오히려 이것을 이끌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선왕들의 고전과 고유한 오랜 전통문화를 갖고 있으면서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인 중국 지식인 사회에 인도불교가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실로 다양한 변용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인도선이 가지는 초역사적인 신통의 매력은 점차 일상적이며 현실적인 것으로 승화된다. 인도선의 이러한 중국적 변용의 최종적인 완성은 지의의 <달마지관>의 체계일 것이지만, 지의에 있어서 아직 불식되지 못한 인도적 신이의 잔재를 더욱 더욱 완전하게 승화시킨 것이 보리달마에 의한 중국 선종의 형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적인 중국민족의 내면적인 요구이며, 단순한 인도 명상법의 연장 변용으로서는 처리될 수 없는 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보리달마를 시조로 하는 중국선종의 형성에 앞서서 중국민족 자신에 의한 새로운 종교철학의 요구는 이미 불교와 유교 및 도교가 가장 자유로운 교류를 가질 수 있었던 위진남북조 시대에 청담과 현학이라 불리는 사상으로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서는 보지(寶誌, 418~514)와 전대사(傳大士, 497~569) 등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종교가에 의해서도 시도되기도 하였다. 보리달마의 선종은 오히려 이러한 각 파의 흐름을 포용하는 것에 의해서 후에 독자적인 전통을 형성하는데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위진남북조 시대를 통해서 옛날 제자백가들처럼 개성적인 많은 실천사상가들이 배출된 가운데에서 겨우 그 일파에 불과했던 달마선이라는 한 계통이, 제일 빨리 전통을 형성하여 은연중에 새로운 사상의 독립을 표방하면서 중국불교사의 후반을 대표하는 것처럼 발전한 것은, 분명히 체질적으로 수 많은 학설들을 하나로 꿰뚫어 정리하고자 하는 중국민족의 사상적 요구를 대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승선과 대승선

소승선은 당나라의 규봉종밀(圭峰宗密)이 선을 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의 5종으로 분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외도선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본 이교의 선이라는 뜻으로, 본래 요가나 자이나교 등의 명상법을 가리키지만, 종밀은 그 특색을 설명하여 그릇된 인생관에 근거하여 천상의 열락을 바라고, 승천을 목표로 하여 수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아마도 백일승천을 원하며 불로장생을 지향하는 중국 선도(仙道)의 수행 등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된다.


그리고 범부선 이하는 본래 불교의 선이지만, 범부선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이법을 신봉하며, 악업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승천을 목표로 하여 행해지는 명상이며, 소승선은 생로병사 등의 무상관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대승선은 일체계공의 반야의 진를 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거기에 이들의 명상을 뒷받침하는 대승과 소승의 두 철학이 예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최상승선과 대승선의 구별에 대해서 종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며, 본디부터 번뇌라고 하는 것이 없고, 물듬이 없는 지혜가 바로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 그러한 근원적인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궁극적으로 불타와 어떤 다름도 없음을 직관하고, 그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것이 최상승선으로, 또 여래청정관이나 진여삼매라고도 불리운다.'


염불선

중국초기의 정토교가 아미타불교보다도 그 한역명(漢譯名)인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는 이름에 보다 깊은 친밀감을 느낀 것고 주문과 같이 그의 이름을 외우는 것에 의해서 불로장생을 얻는다고 하는 세속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도안은 중국에 처음으로 선의 경전을 전한 안세고에게 가장 깊은 경의를 표하면서, 그가 번역해 낸 경전을 정리하고, 대표적인 것 모두에 상세한 주를 붙이고 서를 덧붙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자였다고 하는데, 천문오행과 의방이술을 잘 하였고, 새나 짐승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단순한 박학다식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전생을 환히 보고 숙업(宿業)의 업보 때문에 스스로 굳이 도적의 손에 잡혀있거나, 이무기의 몸을 뒤집어 쓰고 있던 사람을 불가사의한 주술에 의해서 구했다고 하는 일화도, 모두 이것과 관계가 있다. 또 그가 자신의 선법 후계자로서 강승회의 출현을 예언하고 있는 것도, 물론 이후의 견강부회이기는 하지만, 초기의 중국 불교도가 얼마나 선과 기적을 동일시하고 있었는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서역지방의 매력을 한 몸에 구현하고 직접 도안을 지도한 사람은 일대의 신이(神異)라고 할 수 있는 불도징(佛圖澄, 232~348)이었다. 후에 혜교가 그의 <고승전>에 '신이'라는 항목을 설정한 최대 이유는, 아마 불도징의 신이함을 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천만 마디의 말을 다하여 불교에서의 신이의 의의를 해설하기보다는 한 사람의 불도징의 사적을 전하는 쪽이 보다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불도징이 중국에 온 것은 바로 4세기의 초두, 서진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는 영가의 난(311)이 일어나기 전 해이다. 한민족은 강남으로 망명하여 동진을 세우고, 중원은 마침내 오호하고 불리는 북방민족이 번갈아가며 날뛰는 전란의 무대가 된다. 그를 맞이들인 것은 하북지방에 조라고 하는 작은 나라를 세우고 있돈 선비족의 석륵과 석호 부자였다. 호족의 지도자들이 불교의 철리에 깊은 이해를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신이의 매력에 있었던 것이다.


<고승전>에 의하면 처음 대명한 징에게 석륵이 "불법에 어떤 영험이 있는가?"라 묻는 문장이 있다. 징은 곧바로 지니고 있돈 식기인 발우에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운다. 그 즉시 물속에 휘황찬란한 푸른 연꽃이 핀다. 석륵은 대단히 신기해 하고 나라를 들어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윽고 징은 그들을 위하여 나아가 비를 빌고, 고징병을 고치기도 하고 갑자기 죽은 석호의 아들을 소생시키기도 한다.

(4) 능가종(楞伽宗)의 성립과 발전

능가종(楞伽宗)은 송대의 구나발타라가 번역한 4권 <능가경(楞伽經)>에 의거한 보리달마(菩提達摩), 혜가(慧可)계의 후예임을 자임하는 능가사들의 일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능가종(楞伽宗)이란 말은 이를 연구한 중국의 학자 호적(胡適)이 붙인 종명(宗名)이다.


능가종(楞伽宗)은 보리달마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실천불교의 정신을 계승한 수행자들이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하나의 정피된 수행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후대의 선종의 전등설의 성립은 능가사들의 계보를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달마가 <능가경(楞伽經)>을 혜가에게 수여했다고 한 것에서 종파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전례는 훗날에 북종선(北宗禪)에서 <능가경>의 전수가 사자상승의 인가증명(印可證明)으로 발전하고 있다.


초기 선종에서 달마가 혜가에게 <능가경>을 전수하였다는 전법의 사실은 종파적인 자각을 고취시켰으며, 이를 근거로 다양한 선종의 파에서 독자적이고 다양한 부법(付法)의 사실과 법통설을 주장하게 된다.


능가종은 <능가경>을 매개로 하여 선과 삼론종과의 교류에서 발생한 선종의 일파로서 달마계 선종이 발달한 최초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속고승전>에서는 능가의 심법(心法)이 보리달마에서 혜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그 문하에 전해졌다고 하는 능가종의 계보가 설해져 있다. 처음 달마가 4권 <능가경>을 혜가에게 건너주면서 수행의 기준으로 삼도록 한 사실과 혜가가 이 경을 수행의 심요(心要)로 삼았으며 경의 현묘한 이치를 설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능가종의 법은 혜가의 제자인 나선사(那禪師)와 또 그의 제자인 혜만(慧滿)에게로 전해졌다. 능가종의 계보는 보리달마, 혜가, 나선사, 혜만으로 이어지는 4대의 법계이다.


후세의 전등설에 따르면 선종의 제3조는 승찬(僧璨)이다. 승찬의 사적은 현재 거의 알 수 없으며 <속고승전>에 혜가문하의 한 사람으로 ?찬(璨)선사?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설에는 사공산에 숨어서 좌선에 전념하고 12년간 그를 섬긴 도신(道信)에게 법을 전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달마, 혜가계의 대승선은 능가사들에 의해 당시 대승정신을 잇고 경전 등의 사상(事相)에 집착해 있던 교학불교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실천불교의 대안으로 자리잡아, 이후 중국불교 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5) 동산법문(東山法門)의 형성

달마, 혜가계의 선법을 계승한 후예라고 자칭하는 능가사들이 하북과 하남, 산동의 연주 등지에서 그 선풍을 선양하고 있을 때, 양자강 중류에 가까운 기주 쌍봉산(雙峯山)에서도 대승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수행자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 쌍봉산의 선문을 개창한 사람은 다름아닌 중국 선종의 제4조로 일컫는 도신(道信)이다.


도신(道信)은 12살이 지나자 서주 완공산에 들어가 두 스님에게서 10여년간 선을 배웠으며 601년 경에 출가하여 길주사에 머물렀다. 그 후 형산으로 향하는 도중 주위의 만류로 노산의 대림사에 10년간 머물렀으며 초대를 받아 쌍봉산에 들어가 독자적인 좌선을 중심으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실천 불교를 전개하여 문도 500명 이상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도신의 제자인 홍인(弘忍)이 쌍봉산(雙峯山)의 동산(東山)으로 옮겨 새로운 수선(修禪)의 도량으로 개창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동산법문에 대한 기록은 <능가사자기>의 홍인장(弘忍)에 기재되어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동산법문은 쌍봉산의 동산에서 홍인이 개연(開演)한 선법(禪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동산법문의 수행자들은 낙양의 중앙 귀족들이나 정치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산중에서 묵묵히 독자적인 선사상과 좌선을 실천하며 쌍봉산을 중심으로 수도집단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도신 문하의 500여명, 홍인 문하의 1000명이라고 하는 것처럼 당시 많은 수행승들이 쌍봉산으로 운집하였다. 그리고 홍인(弘忍) 문하에서는 드디어 신수(神秀)를 대표로 하는 십대제자가 장안, 낙양 등 전국 각지에 진출하여 독자적으로 활약하게 되자 동산법문은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동산법문이란 칭호는 홍인 제자들의 활약에 의해서 불리워진 것이지만, 기주 쌍봉산을 중심으로 도신(道信)과 홍인(弘忍)의 2대에 걸쳐서 전개된 대승선의 새로운 수행교단을 통칭하는 것이다. 동산법문의 시대는 수(隨)에서 당(唐)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난세였으나, 수행자들은 이에 동요되지 않고 모여들어 최초로 선종의 대교단을 형성하였다.


동산법문은 중국 선종의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으로는 좌선과 노동을 병행한 것이다. 즉 동산법문의 수행자들은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면서 좌선을 전념하였다. 원래 불교교단은 출가 수행교단으로 매일 걸식하거나 신자들의 보시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인도와 기후나 풍토, 문화적 배경이 달랐으므로 걸식에 의한 수도생활은 불가능했다. 출가승들이 노동을 하는 것은 불교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계율에 위배되는 것이다. 홍인(弘忍)은 낮에는 직접 생산노동에 참여하였고 밤에는 좌선을 했으며, 좌선과 노동이 모두 불사(佛事)라고 설했다. 이는 선종이 국가적 정세의 변화에 관계없이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형성한 것이며, 중국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

홍인(弘忍) 이후 선종은 크게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의 두 파로 나뉜다. 흔히 북종은 점교(漸敎)의 가르침을 설하고, 남종은 돈교(頓敎)의 가르침을 설한다고 하고 있다. 원래 북종(北宗)이라는 명칭은 혜능의 제자인 하택 신회가 개원(開院) 20년(732) 대운사에서 종론을 제기하면서 보리달마 남종(南宗)의 정법은 조계 혜능(慧能)을 계승했으며 북종(北宗)의 신수(神秀)는 방계(傍系)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북종과 남종의 구분은 지리적인 구분에 따른 것이었으나 그 안에는 남종의 방계로서 북종을 폄하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종선의 사람들은 스스로 북종이라고 자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북종선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낙양, 장안 등의 북쪽 지방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통칭으로 사용한다.


처음에 그 세력이 우세했던 북종선(北宗禪)의 중심인물은 신수(神秀)였다. 신수는 변주위씨 출신으로 100세를 넘겨 장수한 명승이었다. 어려서 유학 및 노자와 장자의 전적에 정통하고 652년 낙양의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50세 가까이 되어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6년간 사사했다. 홍인의 법을 이은 후 의봉(儀鳳)년간에 형주 옥천사의 승적에 속하여 그 근처에서 도문사를 열었으며 그의 주변에는 많은 수행자가 모였다고 한다. 701년에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어전에 들어갔으며 그 때 그는 가신(家臣)의 예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양경(兩京)의 주주(注主), 삼제(三帝)의 국사라고 불리운다. 저서에 <관심론(觀心論)> 1권, <화엄경소> 30권, <묘리원성관(妙理圓成觀)> 등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후대의 서적 인용 가운데서 그 일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신수는 홍인의 사상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신수는 요심수도(了心修道)를 설하고 있는데, 요심(了心)은 자심(自心)을 깨닫는 것이다. 그는 마음의 작용을 <기신론>에 의거하여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이라는 두 종류의 차별심으로 보고, 정심(淨心)은 진여(眞如)의 마음이며, 염심(染心)은 무명(無明)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마음은 본래 정심과 염심을 갖추고 있다. 만약 진여를 자각하여 염심(染心)이 없으면 바로 성인이며, 악업을 따르면 범부로서 삼계에 침륜하게 되는데 이는 진여의 본체를 염심(染心)이 덮었기 때문이다. 즉 신수는 마음을 다스려 망견(妄見)에서 떠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신수에 의해 북종선은 장안과 낙양의 황실 및 귀족의 귀의로 인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북종선은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까지의 반세기 동안 보적(普寂)과 의복(義福) 등의 활약으로 북종선이 융성했지만 그 후로는 점차로 쇠약해져서 주류의 자리를 완전히 남종선에게 양보하게 된다.


남종선(南宗禪)의 시조는 혜능(慧能)이다. 혜능은 속성이 노(盧)씨이며, 선조는 대대로 범양(范陽)에 살았지만 아버지의 좌천으로 인하여 신주(新州)의 평민이 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남해(南海)로 이주하여 땔나무를 팔아서 모친을 봉양하였다. 어느 날 마을의 손님 한 사람이 숙사로 돌아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홍인(弘忍)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8개월간 방아지기로 생활하면서 법을 이었다. 이 때 혜능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라고 전한다. 그 후 676년에 <열반경>의 학자로서 이름난 인종(印宗)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후 소주의 조계 보림사(寶林寺)에 거주하면서 많은 선자를 키우고 선풍을 날렸다. 그의 설법을 법해(法海)가 기록하였는데 이를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한다. 혜능은 대감선사(大鑑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육조단경>에서 밝힌 혜능의 선사상은 돈오견성설(頓悟見性說)과 반야바라밀이며, 그 구체적인 실천은 무념(無念),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사상이다. 반야는 지혜로 일체시중(一切時中)에 한 생각 한 생각이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로 실행하는 것이 반야행이라고 한다. 또 반야삼매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곧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견성(見性)을 하는 것이 반야삼매에 드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리고 반야를 깨달은 것이 바로 무념(無念)이라고 하고 있다. 무념은 일체의 외부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으로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혜능은 자성청정심의 자각과 무념, 무주, 무상의 반야의 실천을 일체화하고 있다.


혜능의 문하 가운데서 남종선의 정통성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사람은 하택 신회(神會)이다. 신회는 양양(襄陽) 출신으로 오경, 노장을 배운 후 출가하여 혜능의 만년에 그 문하가 되어 수 년간 배웠다. 732년에는 활대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를 열어 천하의 학도자들을 모아 놓고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 남종의 정법을 이은 6조는 혜능이라고 주장하였다.


신회는 달마로부터 전래된 선불교의 근본은 여래선(如來禪)이며 불지견(佛知見)을 개연하는 것이라고 보고, 북종의 좌선관심(坐禪觀心)이 달마의 진의가 아니라고 배척하고 무념(無念)의 근저에 있는 청정한 자성(自性)을 곧바로 자각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하였다. 신회에 의해서 북종의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신수는 마음을 집중시켜 선정에 들게 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어 그 청정함을 간(看)하게 하여 마음을 일으켜 밝게 비추고 마음을 섭수하여 안으로 증득케 하라고 주장하는데, 신회는 이러한 가르침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신회는 북종선의 법은 단순히 마음을 조복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서 남종선의 수행은 단순히 마음의 조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7) 선종(禪宗)의 형성

보리달마, 혜가로부터 비롯되는 선종은 능가종, 동산법문, 북종선과 남종선의 시대를 거쳐 9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인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인도에서 전래한 선이 신비한 습선(習禪)이나 삼매(三昧)가 아닌 하나의 종파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선종을 이끌고 간 사람은 강서(江西)의 마조(馬祖)와 호남(湖南)의 석두(石頭)이다. 이들은 모두 조계 혜능문하의 회양(懷讓)과 행사(行思)의 제자들이다. 마조와 석두는 강서와 호남이라는 지방의 풍부한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지방관리나 호족들의 귀의를 받으며 독자적인 선풍을 전개했다.


마조와 석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불교에서는 선종의 본격적인 역사서인 <보림전(寶林傳)이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는 석가모니불이 가섭에게 부촉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서천 28조, 동토 6조의 전등을 거쳐 마조,석두에게까지 전래되었다는 계보를 완성하고 있다. 중국 선종의 형성은 <보림전>을 통해 법계를 분명히 밝히는데 기초하고 있다. 이 시대의 불교 즉 선종의 특징은 <보림전>에 의해 선종의 법통설이 완성되었고,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종교와 생활이 일치되었으며, 선종의 어록이 출현하였으며, 선종교단이 독립하여 자급자족의 생산불교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이다.


중국 선종을 조사선(助師禪)으로 대성시킨 사람은 마조 도일(道一)이다. 마조는 처적(處寂)에게서 삭발하였으며 원율사(圓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마조는 여러 지방을 행각하다가 남악 회양이 6조 혜능의 정법을 이은 대선지식임을 알고 참문하여 한 마디의 교시에 의해 불법이 대의를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조 도일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표현할 수 있다. 마조는 도(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평상심이 곧 도(道)라고 설하고 있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도 없고 시비(是非)나 취사(取捨)도 없고 단상(斷常)이나 범부나 성인이라는 분별이 없는 일상적인 마음이다. 마조는 평상심이 다름아닌 부처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입장은 보리달마가 붓다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중국에 전한 일심(一心)의 법이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의 제자는 84명이라고도 하고 80명 또는 800명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가운데 백장 회해(懷海)가 있다. 회해는 당시 율사(律寺)에 있던 선원(禪院)을 독립시키고 대소승의 계율을 절충해서 교단의 규칙을 정했으며, 마조의 정신을 토대로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던 승려의 노동을 긍정하여 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같은 선종의 교단조직과 수행생활의 규칙 등을 성문화한 것이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회해는 선원에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만을 세우고, 존경해야 할 스승을 장로로 삼는다고 하고 있다. 이 밖에 선원의 특유한 승당 안에서 생활양식 및 일을 맡은 승려에 관한 십부국(十部局), 장로와 대중이 평등하게 노동에 종사하는 보청법(普請法)을 규정했고, 법을 위반한 자에 대한 벌칙까지 규정하고 있다.



(8) 오가선풍(五家禪風)의 전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의 하나인 당말의 회창(會昌)의 폐불사건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불교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때 파괴된 사원이 약 4만5천이며 환속된 승려는 26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원을 의지처로 했던 불교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거의 멸망의 위기에 빠져들었지만 오직 선종만은 이를 계기로 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당말에서 오대(五代)에 걸쳐 오가(五家)가 성립하게 된다.


오가(五家)란 선풍의 상위함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서 위앙종, 임제종(臨齊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을 말한다. 여기서 다시 송대에 임제종에서 분리된 황룡(黃龍), 양기(楊崎)의 2종을 합쳐서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고 한다. 이 오가칠종은 어느 것이나 혜능의 남종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최초로 형성된 위앙종은 호남의 위산 동경사의 영우(靈祐)와 그의 제자인 앙산 혜적(慧寂)간의 2대에 걸친 독창적인 선풍을 말한다. 후에 혜적이 강서의 원주 앙산을 중심으로 교화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다.


선종 오가(五家) 가운데 두번째로 형성된 종파가 임제 의현(義玄)의 임제종(臨齊宗)이다. 임제臨齊라는 종명은 의현이 강서에서 스승인 황벽 희운(希運)의 불법을 이어받은 뒤에 하북성 진주의 호타하라는 강변 기슭에 임제원을 짓고 학인들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조동종(曹洞宗)은 동산 양개(良介)와 그의 제자인 조산 본적(本寂)의 2대가 청원(靑原), 석두(石頭)계의 선법을 계승하여 개창한 것으로 임제종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되었다.


선종 오가(五家)의 발전은 강남의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의 형성으로 절정에 이른다. 운문雲門이나 법안法眼은 모두 설봉 의존(義存)의 법을 이어 발전시켰다. 운문은 영남지방을 통치한 남한(南漢)의 유씨의 귀의를 받아 선법을 전개하였다. 운문종(雲門宗)은 운문 문언(文偃)이 남한의 건형 3년 소주 운문산에 광태선원을 창건하고 독창적인 선법을 펼치며 강남의 불교를 발전시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안종은 설봉 의존(義存), 현사 사비(師備), 나한 계침(桂琛), 법안 문익(文益)과 그 문하의 선승들이 펼친 선풍이다. 법안종(法眼宗)은 창시자인 법안 문익(文益)이 나한의 법을 얻은 뒤 승주의 청량원에 거주하면서 오월왕 왕전씨의 귀의를 받으면서 크게 선풍을 진작시켰다. 그의 문하에 천태 덕소(德韶), 백장 도항(道恒) 등 다수의 제자들이 배출되어 절강과 복건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를 확장했다.


이 가운데 임제종과 조동종은 오늘날까지도 그 선풍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국 선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임제종과 조동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임제종은 임제 의현이 세운 종파이다. 의현은 처음에 계율과 유식사상을 배웠다. 그러나 진실과의 계합에는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황벽(黃檗)의 문하에 들어가 참선하고, 다시 대우(大愚)의 문하에서 참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임제선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바로 부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임제는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곳이 모두 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서 미망에서 깨달음으로의 구체적인 실천이 오직 밖에서 구하지 말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처이든, 조사이든 그것은 외재적인 권위로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임제선은 자기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자각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조동종의 동산 양계(良介)는 영묵(靈黙)에게서 선을 배우고, 숭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각지를 다니다가 남천 보원(普願), 위산 영우(靈祐) 등에게 참문하였으며, 위산의 권유로 예능 유현(攸縣)과 운암 담성(曇晟)을 방문하여 그들의 법을 이었다. 동산에게는 두 개의 오위송(五位頌)이 있는데, 이는 조동종의 입장을 체계화한 것이다. 두 개의 오위송(五位頌)이란 편정오위송(偏正五位頌)과 공훈오위송(功勳五位頌)이다.


먼저 편정오위송(偏正五位頌)에서 오위(五位)란 정위각편(正位却偏: 평등한 세계가 도리어 차별의 세계이다), 편위각정(偏位却正:차별의 세계가 도리어 평등한 세계이다), 정위중래(正位中來:평등한 세계에서 나타난다), 편위중래(偏位中來:차별의 세계에서 나타난다), 상겸대적(相兼帶寂: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나타난다)이다. 이 오위는 조산 본적에 의해 정중편(正中偏), 편중정(偏中正), 정중래(正中來), 편중지(偏中至), 겸중지(兼中至)로 개편된다. 여기서 정(正)은 만법 세계의 본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리의 세계이며, 편(偏)은 만법 세계의 모습을 가리킨다. 즉 정(正)은 보편적인 세계를 말하며, 편(偏)은 개별적인 세계를 말한다. 공훈오위송(功勳五位頌)은 수행의 단계를 향위(向位:향하는 位), 봉위(奉位:받드는 位), 공위(功位:깨달음을 얻는 位), 공공위(共功位:깨달음을 함께 하는 位), 공공위(功功位:깨달음의 극에 달하는 位)로 나눈 것이다.



(9) 간화선과 묵조선

간화선(看話禪)의 화란 화두의 준말로서 화두를 근거로 공부하는 선품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화두는 공안(空案)을 말하고, 간은 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고인의 공안을 간하는 참선법이며, 묵조선이라는 편을 받은 조도(曹洞)의 선풍에 대한 임제의 선풍을 일컫는 말이다.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이 본래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닫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4성제, 8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서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메이지 않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마대사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 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일갈했고,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임제의현(?~866)의 임제종은 청원계통의 조동종(묵조선을 주장함)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중국을 대표하는 선종이기도 하다.


임제라고 하는 말은 그 종파의 조사인 의현이 말년에 하북의 작은 사원에 머물며 거쳐했던 사실로부터 생긴 것이다. 회창의 폐불사건 이후 위산과 같은 시기에 배휴의 귀의에 의해서 다시 부흥한 강서의 황벽희운의 불교를 계승한 것이다.


의현은 조주 남화사람이다. 임제의 설법에는 인습화된 켸켸묵은 가치에 대한 투철한 비판의 입장이 전제된다. 신비적인 소망과 결합된 형식적인 좌선이 철저하게 물리쳐진다. 그는 육도만행을 모두 지옷을 짓는 업이라고까지 잘라 말하면서, 자신의 설법조차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냉담하게 뿌리친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불법을 배우는 자의 최초의 터득이라고 하는 진정한 견해는, 그의 불교의 심오한 뜻이기도 하다. 그가 경계하고 있는 자신불급(自信不及)이라는 말은 진정한 견해를 빠뜨린 사람의 일이다. 스스로의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의 생활 그 자체를 총실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현재의 자기 위에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원만하게 두루 부여되어 있는 평등한 능력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자유로이 작동시킬 수 없는 것은 모두 그릇된 지도자나 켸켸묵은 전통의 인습이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법을 배우는 자는 먼저 그러한 사람을 미혹시키는 것을 단호히 물리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임제의 선풍은 마조가 주장했던 평상심의 계승이며, 그가 황벽의 슬하에서 터득한 간명직절한 순일한 불법의 최고의 단계이다. 또한 간화선은 우리 나라에서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것이다.


임제대사에 이르기까지의 선의 수행법은 공안을 제자에게 직접 주어서 공부시키지는 않았다. 제자가 의문나는 점을 물어오면 그에 대해 일러줄 따름이었다. 선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고요히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좌선을 하는 것으로 화두를 갖지 않고 하는 선을 묵조선(黙照禪)이라 한다. 그러나 임제종의 대혜선사가 묵조좌선의 폐해를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의 선사상


(1) 한국불교의 선풍


한국선의 역사적 전개


선(禪)은 법계전승(法界傳承)의 전통이 강한 종파이다. 그러므로 전통수호운동이 강력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움직임도 또한 비교적 강하고 민족사회의 전통을 특징적으로 잘 보존시키려는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 그 긍정적인 평가이다. 신라시대의 선은 산문선(山門禪)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의 전통을 수용했으며, 조선시대의 선은 조사선(祖師禪)의 전통을 지니면서 한국적이고 독자적인 선풍을 전승하였다. 물론 선의 흐름은 정치적인 시대성에 사로잡힌 유약한 사상은 아니었지만, 선의 이념이 시대와 함께 능동적으로 변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신라시대(新羅時代)

신라시대의 선을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 초기의 선과는 달리 한국 초기의 선은 다양한 산문이 각각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신라시대의 초기선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지만, 구산선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선문도 있고 고려시대에 개산되었던 선문(禪門)도 있으므로, 구산선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에 살아남은 산문선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선문은 구산(九山) 이상의 산문이 있었으나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문선의 성격은 신라 선가(禪家)들의 비문을 보면 다양한 선가들이 상호 접촉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에 의하면 '북산의 남악척(北山義 南岳陟)'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북산이란 설악산을 의미하며, 도의(道義)가 가지산에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들어간 일을 가리킨다. 또한 남악이란 지리산을 가리키며 홍척(洪陟)이 남원 실상사(實相寺)를 개산하였던 사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도의와 홍척은 함께 신라선의 선각자로서 마조(馬祖)의 제자 서당(西堂)에게 법을 이은 선사였으나 신라선에 미친 영향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신라인은 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경교(經敎)중심주의이며 또한 선을 수행해도 습선(習禪, 觀)에 지나지 않는 맹목적 불교수행이며 미신적 불교신앙이었다. 이러한 종래의 불교에 대한 도의의 비판적 태도는 달마대사가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하였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도의도 진전사에서 15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홍척에게는 흥덕왕과 선강(宣康)태자가 파격적으로 제자가 되어 당시 선으로 신라사회에서의 지배적 권위를 가져온 국사(國師)의 호까지 새롭게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골품제도가 폐지되고 지방호족제도로 바뀌는 역사적 상황이 홍적을 중심으로 하는 선가의 배경에 맞았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북산의 남악척'의 상이한 방향성은 당시 모든 산문에 영향을 미쳐 두 개의 그룹처럼 되었다. 북산계에서는 사굴산의 범일(梵日)이 '석존의 스승은 진귀조사(眞歸祖師)이다'라고 하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전설을 가지고 선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또한 성주산의 무염(無染)은 교학(敎學)의 '유설토(有舌土)'에 대해서, 선학(禪學)의 '무설토(無舌土)'가 근본적이며 우위의 세계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선 우위사상은 세속을 초탈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선사상은 조선시대의 조사선풍(祖師禪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에 비해 남악계는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시키는 것에 부심하였다. 희양산의 지선은 의양산에 선궁(禪宮)을 구축하는 일을 하고, 또한 동리산의 도선(道詵)은 도참(圖讖)과 위서(緯書)를 가지고 사회에 출현하였다. 또 쌍계산의 혜소는 범패를 실연하는 불교의 대중화를 목표로 한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선과 정치, 선과 사회풍속, 선과 교학을 융화하고 싶다는 융선(融禪)의 움직임은 당시 호족들의 배경이 되고부터 호족의 한 사람이었던 왕건이 성공하고 그 결과 융선사상(融禪思想)이 고려사회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시대가 되자 송나라의 화엄, 천태의 발달과 함께 선과 교가 상호 대칭관계를 가지고 불교가 전개되었다. 교가 선과 함께 화회(和會)하는 이념은 후삼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선과 교가 회통하는 움직임은 이념통일에 부심했던 의천(義天)이 송나라로부터 천태종을 가지고 고려에 유포하여 송도(松都)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산문선의 승려, 특히 융선계의 선승들을 구했던 때부터이다. 이 움직임은 당시 선승에게 강한 충격을 주어 선계에서도 선의 입장에서 선교화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의 방법에 의한 수행으로 출발하여 다양한 교학을 통해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는 즉 시작과 종착은 선에 의한 방법을 가지고 선교화회의 방도를 구했다.


이상의 선교화회는 각각의 교, 또는 선의 입장에서 선교화회하는 것으로서 자파중심의 화회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지눌(知訥)은 각기 입장을 넘어서 진정한 불자의 화회는 자기의 '진심(眞心)'으로 돌아가지 아노으면 안된다는 것을 불자의 첫번째 요건으로 삼았다.


진심으로 돌아가는 제일도(第一道)는 해오(解悟)이며, 그 해오는 혜능(慧能)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사상이었다.


지물은 창평의 청원사(淸原寺)에서 혜능의 <단경>을 보고 크게 깨쳐 어떠한 곳에든 부처님의 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지눌은 대장경 속에서도 성불하는 도를 발견하고 또한 선에 있어서도 대반야(大般若)가 살아 숨쉬는 도를 증득했다.


불법의 생활화라고 하는 도를 경험했던 지눌은 출가 대중이 많은 송광사에 돌아가서 진심의 도를 가르치는 책인 <수심결(修心訣)>을 저작하고 '정혜쌍수'에 의해서 진심을 계발하고 '돈오점수'에 의해서 진심을 함양하는 도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이것이 지눌의 선교화회의 사상 내용이다.


그런데 이는 일반 대중의 도이었지만 중생의 근기는 다양한데 비해 정혜쌍수하는 도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므로 그 지표를 확실히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눌의 전통은 지눌에서부터 16대까지 전해졌지만 그 선교화회하는 사상적 전통은 너무나도 변하기 쉬웠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지눌의 선이 그 제자 혜심에게 전해지자마자 그 내용은 변화하게 되었다. 지눌의 기본사상이었던 화회(和會)사상보다도 지눌사상의 일부분이었던 경절사상(徑截思想)을 궁극적 진리라고 말하면서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해버렸다.


특히 선의 우위성을 증명하는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는 움직임은 고려 말기의 시대사적 사상 조류였다. 이 때문에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이 유행하였다.


조사선의 이론을 전개하는 결정적인 전적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이다. <선문보장록>은 신라의 산문선 중 순선계(純禪系)의 움직임을 제시하면서 선의 우위성을 설명하였다. 특히 사굴산의 범일이 진성왕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는 설화, 즉 석가의 스승이었던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澈底)시켰다고 하는 전설을 제시하고 강조하는 것이 발견된다. 이것은 조사성을 강조하는 이론의 암시였다.


여래(如來)의 설은 방편교학(方便敎學)이며 팔만대장경을 전개하였지만 조사의 그것은 설명이 없이 바로 들게 하는 격외선(格外禪)이며 스스로의 깨침만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조사의 밀밀상전(密密相傳)하는 소식(消息)에 의해서 완성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사상은 조선시대의 정수(頂首)였던 서산휴정(西山休靜)의 선교석(禪敎釋)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특히 휴정은 여래의 깨침 이상으로 조사의 밀전(密傳)을 직로(直路)함이 중요하다고 보면서, 경전은 입문하여 선행(禪行)은 구극이라고 하는 의미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도를 설명하였다.


어느날 금강대로 행주(行珠), 유정(惟政), 보정(寶晶)의 3대 제자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가지고 와서 '금강경을 선종의 종지로 삼아야 좋을 지 어떨지'에 대해 물았을 때 휴정은 '석가가 정법안장을 가섭(迦葉)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금강경을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직 못들었다.'고 말하며 반대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또 '그러면 팔만대장경은 석가의 교설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휴정은 '팔만대장경을 석가의 교설이라고 하는 것은 석가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조선시대의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으로 변해갔다. 물론 조선시대에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사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사선풍이 강했던 것은 확실하다

오교양종

오교양종이라는 용어는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고려사(高麗史)>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에 보이고 있다. 5교양종도 한국불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 할 만하다.


오교는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에는 법상종(法相宗), 계율종(戒律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으로 되어 있으며,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자은종(慈恩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으로 되어 있으며, <대각국사묘지명>과 <태종실록>에 나타난 종조(宗祖)는 법상종과 자은종은 진표(眞表, 8세기), 계율종과 총남종은 자장(慈藏, 7세기), 열반종과 시흥종은 보덕(普德, 7세기), 법상종과 중도종은 원효(元曉, 617~686), 원융종과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로 되어 있다.


양종(兩宗)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이다.


오교양종의 성격은 그 용례에 따라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오교승통(五敎僧統), 오교법석(五敎法席), 오교사문(五敎沙門) 등이라 칭하고 불교 전체를 나타낸 것이다. 원명국사가 승과제도에 의해 오교승통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종 2년(1261)에는 몽고에 끌려 들어갔던 태자의 귀환을 위해 내전에 오교법석을 설치하였다. 또 같은 13년(1272)에는 원(元)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김준(金俊)이 오교사문을 불러모아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오교란 승과제도에 의해 고려불교 전체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불학(佛學)의 전체를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불교를 학술적인 대상으로 할 때 오교의 어휘를 사용한것이다. 세번째는 오교양종의 어휘가 전 불교의 승려를 나타낸 것이다. 네번째로는 조선조에 이르러 불교사원 혁파에 수반하여 사용한 것이다.


오교와 오교양종은 거의 같은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성립종파라 하기 보다 전 불교나 전 불교의 승려, 혹은 불교의 총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조선왕조 폐불시에 정책적으로 사용했던 종파의 이름으로 구체화 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2) 한국의 초기선


신라시대의 선사상

선사상(禪思想)은 우리 나라에 들어 온 후 많은 공적을 쌓았으며 또한 문제점도 야기해 왔다. 공적은 문자 밖의 인간심층으로 파고 들어 인간에 없어서는 안될 자각(自覺)의 열쇠를 열게 하였고, 현실을 초월하여 국가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 왔지만, 이와 반대되는 문제점으로는 문자에 담긴 불교사상을 경시하고 문화와 창조적 사상에 힘쓰지 않았으며 신라가 망해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은둔과 안전에만 그치려 한 점 등을 학자들은 들고 있다.


삼국의 통일을 기하는 신라인의 내면에는 호국사상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인왕반야경>, <금강명경>, <금강명최승왕경>, <미륵하생경> 등이 교리 내용보다도 불타사상에 의한 호국이라는 방향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선시대(禪時代)에 와서는 국가사회에 공헌하는 중대한 작업이 끊어져 버렸다..


그 반면 선의 발전은 또한 시대적 욕구라는 점과 선에 한국불교사상의 주류를 이루게 하는 사적 과정을 감안 할 때 신라선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느 곳에서도 구제받지 않고 다양하게 발전되었던 양상은 선 발달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순지(順之)의 일원사상(一圓思想)

선이 불교의 교학을 초월하여 그 독자성을 발휘하는 9세기에 들어와서 여래선(如來禪)의 선학에서 조사선(祖師禪)의 일상평범한 선생활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조사선이 등장한 뒤 선이 중국인의 생활에 토착화하였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지금까지의 종교적 신앙은 그 표층에서 은폐된 새로운 가치기준을 모색하는 시대에 이르렀다.


선으로부터 비롯된 일원상(一圓相) 상징의 발단은 '일물(一物)'이라고 하는 말에서 이다. 이 일물을 긍정적으로는 유일물(有一物)이라고 말하고 부정적으로는 무일물(無一物)이라고 하는 발상을 일원상(一圓相)에 갈무리하여 상대덕, 이원적인 문제가 하나로 합치하므로 극히 이상적이고 편리한 표현방식으로 보여진다. 유일물 무일물은 8세기 후반의 유행이었다고 하며, 모두 다 육조 혜능에 관계되는 개오심경(開悟心境)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일물일하는 것은 상대적인 대립관을 금하고 일상(一相)도 없는 불립문자의 표현법으로서 '이자불성팔자불시(以字不成八字不是)'라고 하는 단적인 의미표현을 일원상(一圓相)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측면의 오직 한 면으로는 무의미한 skepticism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무일물에 대하여 유일물의 표현이 나왔다. 일물을 상대적 현실, 특히 불(佛)도 범부도 다 일물인 즉 일원상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원론적 상대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교학에 있어서는 <기신론(起信論)>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현실, 보리나 번뇌의 본래가 상즉(相卽)한다고 하는 논리를 잘 해결하는 것이나 선에서는 이 이원성(二元性)을 견성(見性)하는 것 외에는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한 한다고 하더라도 황엽지제(黃葉止啼)의 방편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원상 속에 있는 불(佛)의 보리와 중생의 번뇌를 논리 탈피하든가 극복하든가 하는 것이 일대의 문제였다.


이것의 해답으로 오관산(五關山)의 순지(順之)는 일원상 속에 우(牛, 소)를 나타내 중생의 번뇌가 불(佛)의 보리로 변화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이원론적 이론을 극복한다.


선종사책의 최고본인 <조당집(祖堂集)>의 권20을 보면 앙상혜적(仰山慧寂, 803~887)의 법사, 오관산 순지(585唐~874귀국 65세 입적)의 항목이 파격적으로 취급되어 있다. 불가사의하게도 순지는 귀국한 후 황해도 오관산 서운사(瑞雲寺)에 개산한 사람이면서 한국의 선종사서에는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선록에는 <조당집>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선종 서적에 들어 있다.


<단집> 권20에는 일원상의 본질을 '상수불이 미오불동(相雖不異 迷悟不同)'으로서 이원적 요소를 일원상에 포함시켜 미오(迷悟)의 차를 구체화하고 있다. 즉 범부에 성인이 되는 방법을 구체화한 것이다.


순지는 일원상의 체계로써 우(牛), 인(人), 불(佛)의 삼면(三面)을 나누어 보았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심(心), 불(佛), 중생(衆生), 삼무차별(三無差別)이라고 하는 이념을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한 것으로 마음의 비유(譬喩)인 '우(牛)를 일원상에 의한 목우(牧牛)의 도로써 한 것으로 제일화(第一話)에서는 사대팔상(四對八相)이 있고 중생의 비유인 '인(人)'을 일원상에 의한 수도의 길로써 제이화(第二話) 양대사상(兩對四相)이 있다. 또한 수행에 있어 구극(究極)의 비유인 '불(佛)'이 일원상에 의하여 인간화하는 제삼화(第三話)의 사대오상(四對五相)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원대(元代)에 이르러 목우도(牧牛圖)의 선회(禪繪)를 개척한 원천이 되고 성불(成佛)의 이상을 현실적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되었다.




(3) 한국의 중기선


개요

고려불교를 형태별로 요약하면 선과 교가 서로 착종(錯綜)하여 상치(相峙)되는 때도 있었고 상화(相和)되는 때도 있었던 종단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이나 교의 한 단면만으로 고려불교에 전급하는 것은 편견에 빠지기 쉽다. 고려불교의 선을 시기별로 나누면 아래와 같다.


왕건(918~943) 태조시대에는 신라하대에 형성된 소위 산문선가들이 대거 입당하여 돌아왔을 때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신라시대가 아닌 고려의 태조시대가 되어 왕건에게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다. 단시 선가들은 대부분 산문개창 시대의 선계인 마조도일계(馬祖道一系)와는 달리 청원행사계(靑原行思系)의 선을 중국에 가서 수용하고 돌아온다.


광종(949~975)시대는 신라 전승의 호족세력을 근절하고 전제(傳制)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고려의 신흥선종으로서 법안종(法眼宗)을 왕력(王力)에 의해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천태종을 중국에 역수출하는 반면, 부동의 선종세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고달원(高達院),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의 삼원 부동전승 체제를 세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세력도 많아서 인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다만 광종시대에 승과제도가 생겨남에 따라 선종 별도의 선선제도(禪選制度)도 일어났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광종 이후에는 그동안 불교교단의 주도권을 잡아왔던 선종계의 인물에소 점차 화엄, 천태나 유식 등 제교의 인물들이 국사,왕사로 책봉을 받게 된다. 특히 문종시대를 전후하여 성대한 제법회가 있었던 반면 선종의 행사나 활동은 미약해져 버렸다.



고려선종의 사상적 계보

고려 불교 중 선종은 성종(成宗, 982~997)에서 문종(文宗, 1047~1083)까지 약 백년간의 잠적기를 제외하고 대체로 불교교단의 주도적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종은 자신의 수도를 통해 강한 정신능력을 발휘하는 종교이기는 하나 외래사상에 비교적 민감했고 전등(傳燈)의 사법(師法) 수호정신이 강하면서도 학무상사(學無常師)의 회통이념(會通理念)이 강했던 것도 고려선의 일관된 선풍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태조(太祖)에서 광종(光宗)에 이르는 고려초기 선은 신라선풍을 계승하는 산문선(山門禪)의 형태 속에 전개되어 온 것이다. 중국의 회창법난(會昌法難) 이후의 선가들 중에 신라 선객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너무나 동경해 온 나머지 마침내 배를 타고 신라에 돌아온 외국인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동경한 신라는 이미 신라가 아닌 고려로 바뀌어 있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고려사회는 나름대로 고려의 새 전통 확립에 역점을 둔 시기가 다름아닌 광종시대였다. 특히 광종시대에 이루어진 승과제도는 점차 선교양종이 서로 나뉘어 승과(僧科)를 보게 되었으며 선종은 마침내 산문선을 구산으로 유별정리(類別整理)하게 된다.


이 시기는 적어도 선종(宣宗, 1084~1094) 이후에 구산선문으로 유별된 때이다. 구산이란 이름이 선종 때 선선문제(禪選問題)로 논급된 것이 자료상으로 비롯된다. 오교양종의 명칭은 숙종(肅宗, 1096~1105)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명종 때 결사(結社)해 온 대표적인 양종단으로 보고 있다. 즉 조계종의 수선사(修禪社)와 천태종의 백련사(白蓮社) 등 양대종단의 결사운동이 성숙할 때인 1204년대의 호칭이 아니었던가 하는 추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종의 구별도 공민왕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조계종 중심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원융부(圓融府)의 활동중 그 중심 과제의 하나가 구산통합에 두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민왕 당시 많은 선가들이 앞다투어 원나라에 가서 임제선종(臨濟禪宗)을 전승수용했으나 임제종이라 부르지 않고 조계종명으로만 불렸던 것은 구산통합의 전통적 확립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조계종의 내면에는 가지산계와 사굴산계의 양대산맥이 당시의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가지산계인 태고보우에 의해 법계에 계맥을 대고 사굴산계인 나옹혜근에 의해 결사의 선풍과 조계선의 교재내용이 되게 한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고려선을 다음과 같이 시대별로 그 형태가 변화되었다.


처음은 산문선시대이다. 태조에서 광종시대에 이르는 이 시기는 신라하대선이 고려초로 옮겨졌던 시대이나 내부에는 송대에 이르는 변질된 선을 구용하게 된다.


두번째는 구산선문시대이다. 광종에서 선종에 이르는 시대로 승과가 형성되고 승과 중에도 선선제도가 형성될 때 그동안의 산문선이 살아남은 산문을 집약하여 구산선문이라 했던 시기이다.


세번째는 양종선시대이다. 명종이후 결사운동을 일으킨 소위 두 종단이 있었으니 즉 조계종의 구선사계와 천태종의 백련사계가 1210년대부터 이루어졌다. 이것이 양종이 형성되었던 시대였다고 보고 있다.


네번째 조계선시대이다. 조계선이란 일찍이 신라말 산문선시대부터 시작되었던 명칭이기는 하나 의천의 비명에서 조계란 용어가 일반화 된다. 그러나 이 사상이 1세기 후에 수선사 결사시대에 타결사명과 비교하여 조계종이라 불렸고 결정적으로 종단명이 된 것은 태고보우가 산문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선문의 단일명칭으로 조계종명이 되었다. 따라서 태고보우만이 아니라 사굴산계의 나옹혜근도 조계종명을 사용하였다.


산문시대에서 오교양종까지의 선사상의 별명은 선적종(禪寂宗)이었다. 물론 산문 독자적 가풍이 있었겠지만 한말로 선적과 일심(一心)의 선수행에 그 촛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결사시대에 있어서는 습정균혜(習定均慧)에 의한 선법을 구체화한 시대라고 보여진다. 습정균혜는 자성 본래가 정혜일치(定慧一致)된 것으로 보고 자성문정혜로 나누어 수선의 길을 정혜쌍수(定慧雙修)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결사선의 계승자들은 임제종의 간화선에 관심을 두었다. 특히 지눌의 제자 혜심은 간화에 관심을 둔 대표적인 승려였다. 간화선에 중점을 둔 조계종선은 조주(趙州) 이후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조사선 우위사상이 고려하대에도 유행하게 되었다.


비록 유교의 주자학파들이 배불에 열을 가했던 시대지만 한국의 조계종으로 선종종단이 확립을 보게 된 점에서 고려하대선이 조계종의 기초정립기임에 틀림이 없다고 할 것이다. 선이 선교를 포용하면서 선의 독자성을 수립하는 것이 고려말 조선초 선가들의 과제였다.




혜소국사(慧炤國師)

혜소국사는 비록 구체적 생애를 기록한 비문이나 행장은 없지만 신라시대의 원효와 함께 성사(聖師)라고까지 썼던 <원감록(圓鑑錄)>의 내용 속에 보면 과거에도 미래에도 찾기 힘든 성사로서 조계산의 선구요, 계족산의 창건자로 설명되어 있다.


혜소국사는 전남 순천의 계족산에서 정혜사를 창건하기 전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그의 생애를 찾을 수 있다. 혜조국사의 성장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 중기에 생활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고려 태조의 원사(願寺)로 출발했던 당시 불교행정을 관할 했던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의 시험관으로 있었으며 한양에 있던 봉은사에 자주 묵어가며 당시 불교의 선지식들과 대화하다가 대각국사 의천(1055~1101)과 함께 송나라로 가 송나라의 선가 정인도진(淨因道臻)에게서 임제선을 공부하였다. 정인도진의 법계는 임제(臨濟)- 엽현귀성(葉縣歸省) - 부산법원(浮山法遠) - 정인도진(淨因道臻)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송나라에 가서 임제의 법계를 계승했으나 돌아와서는 사굴산의 법계를 전승하였다.


혜조는 다시 탄현과 함께 화악산에 있으면서 청평산에 있는 이자현과 선문 대화를 하여 선의 본지(本旨)를 교환하였다. 이것은 이자현에게나 혜조에게 서로 중요한 만남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자현에게는 그동안 유교인으로 관계(關界)생활을 하다가 선생활에 입문하여 문수원(文殊院)을 개창하면서 거사불교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되었고 혜조에게 있어서는 그동안 중앙집권하의 불교요, 교종하의 불교에서 선을 통해서 지방분산적 불교활동을 실천하는 좋은 본보기를 여기서부터 발견한 것이다.


혜조국사의 선풍은 송광사의 선풍과 일치하지 못했던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혜조국사는 어디까지나 임제종의 제3대인 정인도진의 법계로서 다양한 선법을 수용하면서 독자적 선풍을 계발한 보조국사의 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두타행(頭陀行)을 쌓아가면서 운둔 수선하려 했던 점에서는 지눌과 일치한다.따라서 수선사의 선풍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졌으며 수선사의 제4대인 청진국사(淸眞國師) 이후 원감국사시대에 이르는 동안 수선사 계통이 정혜사 계통에 의한 선풍을 크게 수용한 영양력 있는 사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불교의 결사운동

고려불교의 특징은 결사운동으로 볼 수 있다. 진실된 불교인이 되기 위한 노력은 제법회 이후 수십인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하려는 결사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


결사운동의 시작은 390년에 도안의 법사 혜원이 유유민(劉遺民) 등 18현을 상수로 하여 동지 123인과 함께 무량수불상전에 서방정토에 나기를 서약하는 백련사의 결사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결사(結社)가 주는 의미는 자기 혼자 불타에 이르려는 노력을 도반들과 함께 결속함으로써 그 사회현실을 정화하려는 소수의 사회정화운동으로 다량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노장학(老莊學)을 통해 자연과 동화하려는 사상에 기초하여 외족의 침입에 대한 철저한 수도생활, 보다 구체적인 호국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결사운동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의 결사운동이 전개됨으로써 불교의 여러 가지 양상이 달라졌다. 그 몇 가지 예로 결사로 형성된 제 사원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전통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로 수선사(修禪社), 백련사(白蓮社), 선원사(禪院源社) 등의 전통이 있다. 그 또 다른 하나는 학무상사(學無常師)의 정신에 입각, 정선된 용상(龍象)을 사원의 원주(院主)로 등용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선사 16국사가 출현한 이유라고 한다.


결사로 이루어진 참신한 불교인이 되고자 하는 많은 결사의 움직임이 고려후기에 파생되어 사(寺)와 사(社)가 차가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상 몇 가지 현상은 고려중기 불교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임에 틀림없다. 결사했던 종파는 주로 선종, 천태종, 화엄종이라 하겠다. 그러나 결사하는 행위 자체가 세속화되었던 후기 고려시대에는 확정할 수가 없다. 단순히 가람건설을 목표로 하면서 결사문을 지어 왔던 것이 조선말에 이르기까지의 폐습이었으며 결사가 주는 고원한 뜻을 빌려 많은 호불가(好佛家) 들이 가람건립을 결사로 혼돈한 때가 왕왕 있었다고 한다.



정혜결사(定慧結社)

정혜결사란 명칭 그대로 정혜(定慧)를 근수(勤修)하는 결사이다. 그 사명(社名)을 '定慧'라고 한 이 두자가 결사의 이념이며 취지이다.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는


1. 당시에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불교' '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하고 구세제중하는 '정법불교(正法佛敎)'의 복귀운동이며,


2. 명리의 도구화, 구명익생의 소굴화된 '형식불교', '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도불교(修道佛敎)'의 재건운동,


3. 매우 퇴폐하고 변질된 '궁정불교', '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있는 '민간불교', '대중불교'의 건설운동이다.


보조국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면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도불교(修道佛敎)', '정법불교(正法佛敎)', '민간불교(民間佛敎)'를 실현하기 위하여 '근수정혜결사'를 발기하였던 것이다. 그 이념이 위의 세 가지이며 근수는 수도불교의 재건을 뜻하는 것이며, 정혜는 곧 정법불교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고, 결사는 새로운 민간자유의 수도집단체제를 구축하는 '민간불교' '대중불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정혜(定慧)'에 대하여 결사문 서두에 "지난 임인세정월(壬寅歲正月)에 상도보제사담선법회(上都普濟寺談禪法會)에 참석했을 적에 동지 십여인과 약속하기를 이 회(會)를 파한 뒤에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같이 결사하되 '습정균혜(習定均惠)'로서 과무(課務)를 삼자"라고 습정균혜한 것이 이 정혜결사를 발기한 근본취지라고 한다.


'담선법회(談腺法會)'라는 것은 선종에서 선사의 공부를 시험하기 위한 선문답을 하는 법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 때 지눌은 장차 결사를 약속하면서 '습정균혜'를 표방한 것은 당시 선종에서는 정(定)에만 치우치고 교종에서는 혜학(慧學)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습정균혜'는 정에만 치우치거나 혜에만 치우치는 편파적 당시 교계의 폐단을 지양하고 '선교원융, 정혜쌍수(禪敎圓融, 定慧雙修)의 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이 '습정균혜'라는 말은 종밀선사(宗密禪師)의 선원집도서(禪源集都序)에 "애견(세속적인 인연) 막기 어려울 새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습정균혜'하여 참선하기를 10여년 이었다." 고 한 어구를 사용한 것이다. 종밀의 뜻은 자기가 경, 율, 논소도 찬술하여 계, 정, 혜명을 널리 열었으나 그런 교학에만 치우쳐 문자의 이론과 명상(名相)에 걸리기 쉬우며 자신도 정학(定學)에 소홀하게 되므로 '습정균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조가 이 문구를 인용한 것은 그 당시에 선과 교가 서로 문호를 달리하여 교가(敎家)는 선정(禪定)의 체험이 없이 이론, 지혜로써 불법의 전부라고 하고, 선가(禪家)는 불, 조(祖)의 여실언교(如實言敎)를 하나의 콩깨묵 같은 것이라 하여 휴지화하여 선교양가가 적대시 하므로 선은 불심, 교는 불어로서 그 불심과 불어가 둘이 아닌 진실을 외면하는데 대하여 '선교상자 정혜쌍수(禪敎相資 定慧雙修)'를 주지(主旨)로 하여 새로운 지도이념을 정립한 것이 '정혜결사' 근본 취지인 것이다.



보조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깨달음이 강조되는 만큼 닦음 역시 중요시된다. 불교의 많은 가르침들 중에서 깨달음과 닦음에 대한 가르침인 수증론(修證論)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선불교이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선에서 내세우는 수증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한 것이다.


중국의 선사들은 다양한 돈점관(頓漸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나 현재적 관점에서나 가장 대표적인 수증론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이 택한 수증론은 돈오점수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조는 돈오돈수는 애초부터 모르고 돈오점수만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돈오돈수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검토하였다. 그런 뒤 돈오점수를 선택한 것이다.


돈오돈수는 글자 그대로 '지금 - 여기서' 깨달음과 닦음을 동시에, 한순간에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돈오돈수라고 한다면 그것은 최상승근기의 득입(得入)이라고 하는 평가가 타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오돈수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겠으나 현실적으로 얼마나 있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불교, 더 구체적으로 선의 수증론은 범부중생을 위해서 시설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조 당대에도 그렇게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보조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지금 당장의 일을 떼어 놓고 보면 돈오돈수인 것 처럼 보이나 과거 전생에서부터 익혀 온 점수(漸修)의 공덕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점수 역시 과거 전생에 먼저 깨닫고 나서 닦은 것(선오후수, 先悟後修) 임을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돈오돈수도 사실은 돈오점수라는 것이다.


그럼 보조의 돈오점수는 어떠한 내용인가? 어떠한 내용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보다 근본적이냐 라고 물을 때, 흔히 점(漸)보다 (頓)이 근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오점수를 돈오점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돈오점수 =점수'로 이해하고, 돈오돈수를 돈오돈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돈오돈수 = 돈오'로 이해한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의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문제는 허구적으로 전승되어 온 것임이 밝혀진 <육조단경>의 남돈북점(南頓北漸)의 이야기에 나오는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의 대립, 즉 돈오와 점수의 대립으로 용해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각기 돈오와 점수로 본다면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당연히 점수보다는 돈오를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신수보다는 혜능이 정통이며, 혜능의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법통설과도 맞물려 돈오돈수가 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는 점수와 돈수에 있다고 본다. 닦음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차이는 오히려 수(修)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悟)에 있는 것이다.


보조는 돈오점수의 돈오를 해오(解悟)라고 하였다. 해오 이외에 깨달음에는 증오(證悟)라고 하는 것이 있다. 해오니 증오니 하는 술어는 청량의 것인데, 보조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돈오점수의 돈오, 즉 해오를 보조는 <수심결(修心結>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돈오는 범부가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사대(四大)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서 자성이 참다운 법신(法身)이며, 자기의 본성이 참다운 부처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쫓아 다녔으나, 선지식의 지시(指示)에 힘입어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은 본래 번뇌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가 구족되어 여러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므로 돈(頓)이라 한다."


여기서 해오인 돈오는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스스로의 본성을 보는 것이며, 이는 여러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오인 돈오는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해오의 해(解)자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일찍이 호적(胡適, 1891~1962)과 선논쟁을 전개했던 스즈끼 다이세쯔의 해석을 음미해 보면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함의 문이다."라고 한 규봉의 지의 개념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지란 반야직관(般若直觀)을 의미하지, 보통 의미의 지는 아니다. 지가 호적에 의해 말해진 것처럼 지식이라고 해석된다면, 신회나 혜능 뿐만 아니라 선 그 자체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지란 여기서는 선의 모든 비밀을 해결하는 관건이 되는 말이다.


선이 지와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은 혜능의 직관이었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사상에 있어서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신회의 지의 철학을 애써 지해로보는 것은 올바른 해는 아니다. 인도철학에서 이미 지(jnana)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하는 것은 차라리 상식에 속한다. 선불교는 이러한 점에서 그 정신사적 고향이 인도철학 전통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우리는 돈오점수, 돈오돈수의 논쟁이 그 내면적으로 법통관과 연결되며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애써 육조단경의 이야기를 중시하고 임제의 전통을 소중히 여진다. 임제선이 고준하며,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선적 정신을 정신을 장 나타내주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임제선 역시 보조선에 용해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오늘날 선을 이해하고 수행함에 있어서 그같은 한 종파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른 종파의 사상이나 전통도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며, 그들 종파의 선사들 역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조의 삼종문

삼종문(三種門)이라면 혜능과 이장자와 대혜의 상이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조의 사상체계 속에 함입시키게 하는 것으로, 잘못 보면 각기 다른 사상의 혼입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보기 쉽다. 그러나 미(迷)했을 때가 각기 다른 것이요, 또한 안목에서 보면 서로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원리인 것은 분명하다.


먼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다. 성적등지란 정혜쌍수사상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이다. 성적등지의 사상은 보조 25세시 정혜결사운동시에 강조했던 사상으로 '정혜결사문'이 그의 중심이었다. 정과 혜를 적적(寂寂)과 성성(惺惺)으로 표현한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언구를 빌려 성적등지문이라 한 것이다. 정혜결사문에 의하면 영가대사의 언구를 빌려 적적으로 연노(緣盧)를 다스리고 성성으로 혼침(昏沈)을 다스려서 성성과 적적이 아울러야만 바른 선이라고 보았다.


성적(惺寂)의 본질이란 물론 자성본래에 이르는 마음상태이다. 따라서 누가 조작해서 만드는 상태가 아니라 자연히 맑고 영롱한 심상(心狀)을 일러 성적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성적의 본연상태를 빼앗아서 범부로 전락된다. 이 성적을 회복하자면 자성문정혜와 수상문정혜를 아울러야 한다.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란 혜능이 심지무난(心地無亂) 자성정(自性定)이오 심지무치(心地無痴) 자성혜(自性慧)라고 하였듯이 본래 마음 속에 무난무치함을 찾아 나가는 길을 자성문정혜라고 부른다. 따라서 불락공용(不落功用)하고 원자무위(元自無爲)함을 일러 자성문이오 부난본적본지(不難本寂本知)하고 임운쌍수자(任運雙修者)는 자성문정혜라 표현한다.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란 자성이 본래 성적한 이치를 어기고 경계를 따라 움직이는 범부에게 산란할 때는 정(定)으로, 혼침이 올 때는 혜(慧)로 대치하는 것이 수상문이고, 칭리섭산(稱理攝散)하고 택법관공(擇法觀空)하며 균조개란(均調皆亂)하여 본래 무위한 자성정혜에 이르는 것이 수상문정혜라고 하는 것이다.


오와 수의 관계는 본래 성성적적한 정혜쌍수의 실천결과이다. 따라서 오는 본래 돈명에서 실천수행하는 앞길을 밝혀서 선행하는 것으로 등불의 효능이 있고 수는 둔탁한 습관을 놓고 새마음을 쌓아 나가는 길이니 곧 선행하는 오경(悟境)과 후수(後隨)하는 수지(修地)가 서로 맞아서 쌓아 나갈 때 바람직한 정혜쌍수의 구체적 방법론이 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돈오점수는 돈증하는 경절선(徑截禪)이나 점득하는 소승선(小乘禪)을 서로 함께 하여 바람직한 병진 회통하는 수선의 길이 이 성적등지문에 있는 것이다. 보조는 그의 생애를 두고 이 등지의 회통문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선의 시작과 끝을 이 성적등지문에 의좀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이다. 보조는 예천 보문사에서 수선하다가 이통현장저의 <화엄신론>을 보고 본래 교학의 사상도 선과 동등한 신해의 실천문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특히 보조는 이통현장저의 <화엄신론>을 통해 종래 화엄사상이 바른 견해가 아님을 논한 것이다.


종래 <화엄론>은 주로 청량계의 사상인바, 주로 연기론에 입각한 화엄사상의 전개였다. 사(師)는 이를 돌려 연기론에서 성기론의 입장에 의거했다. 범행품 가운데 '초발심시 편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이라 한 명제를 청량학파는 말하길 '십천겁(十千劫)을 닦아 십신(十信)의 만심에 오른 후 십주(十住)의 주초(住初)에 대심범부(大心梵夫)의 발심에 들어가서 성불한다'고 하는 다겁수행의 성불론을 제창했으니 이른바 이 점이 연기론적 화엄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장자와 보조는 '삼승 중에는 겁량(劫量)을 논한 바 있으나 원교(圓敎, 화엄사상)에는 겁량을 논한 바 없음'을 밝히고 있다. 청량국사는 그의 성불하는 수행법을 '먼저 비로법계를 깨치고 뒤에 보현행해를 닦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보현행해는 널리 보살의 자비행덕을 이루되 삼라만상의 하나하나가 나타난 사사무애의 행을 말한다. 환언하면 비로법계는 차별있게 놓여진 현실에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행처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성적등지문의 돈오와 통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보조가 보기에는 크게 어긋난 것이 있었는데 곧 청량이 설하고 소위 비로법계의 오득이 주는 의미해석이다. 비로법계의 오득은 생각을 일으켜 관하여야 한다고 본 점이다. 생각을 일으켜 오득하고 성불한다고 보면 망상으로 진리를 오득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진리를 오득할 수 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크게 어긋난 잘못이라고 평하고 있다.


일찍이 조계선의 정통적 선법이 무념위종이었듯이 <화엄신론>에서도 '불이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그 뜻을 조촐히 하여 허공과 같이 하고 망상과 제취를 여의어서 어느곳에 물들어도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십신의 초에 해오하고 십주의 초에 증오하는 바 해오, 증오가 모두 원(願)을 이루면 공(功)을 얻어 서로가 한 체에서 이루어지는 보광명지(普光明智)가 나타나 계급없는 지혜이므로 초발심시 편성정각을 선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조는 오직 선적인 화엄사상에 철저한 것이 원돈신해문의 요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가가 제상상도 근본에 가서는 성불하여 나갈 수 있는 선교시이의 본염자성을 떠나지 않음을 논구한 것이다.


경절문(徑截門)이다. 경절이 지는 뜻은 방법론적인 모든 면을 돈절(頓截)한다는 것이다. 그 어원을 살펴본다면 <벽암록> 사사즉에 경절이란 용어가 나오고 있다. 경절의 뜻은 본즉에 있는 '습학을 일러 문(聞)이라 하고 절학(絶學)을 일러 이웃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을 다 넘어서야 진과(眞過)라 한다' 이상의 습학(소승)과 절학(대승)을 지나고 경절의 세계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진과로서 진선에 드는 이른바 경절의 뜻이라 하겠다.


이상의 뜻에서 보면 보조는 경절의 뜻을 방법론 없는 선경을 찾아 첩경의 직로를 걷는 수행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경절의 문도 일종의 문이상의 방법론 없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 방법론이란 간화선을 가능케 하는 길일 것이다.


감화선은 지난날 아무리 뛰어난 원돈신해의 근본사상이라도 간화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한갓 지해의리선이오 번뇌만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였다. 따라서 간화선의 관문을 들기 위해서는 일체의 사념을 놓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갓 간화십종병에 걸리고 마는 선이 되기 때문이다. 십종병에 걸리는 이유는 식정에 사로잡혀 있는 관섭 때문이다.


이 삼종문의 성격은 첫째 삼종문은 중생을 삼종의 근기로 나누어 삼종근기에 알맞는 길을 찾기 위해 이루어진 종문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중생이 불법에 들어가는 문로로서 공종, 법종, 성종이라고 나우었듯이 등지문, 신해문, 경절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선교회통하기 위해 삼종문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는데 선과 교를 통해 서로 맞게 병행해야만 원만한 수선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선은 독자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 회통하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삼종문의 방향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번째는 서산이 사교입선이라고 말했듯이 선을 행하는 사람이 초입에는 선교를 아울러 행하다가 교를 버리고 선에 이르러야 진정한 선수행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선으로 시작하여 선으로 마치며 아직 마치지 못하면 부득이 교에서 선으로 마치는 길이 있다고 보면서 일반적으로는 교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마치는 것이니 곧 사교입선이 그 뜻이다.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진귀조사설을 논급한 항목은 세 곳이다. 처음에 나타난 것은 제 4칙으로 <달마밀록>에 있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달마가 혜가에게 전하였다는 인도의 전설을 7언으로 된 송구로 설하고 있다. '진귀조사가 설산에 주하고 총림방 중에서 석가를 기다리었다. 임오세(壬午歲)에 이르러 조사선을 전수함과 아울러 조사의 종지를 심득하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제 24칙 <해동칠대록(海東七代錄>에서의 인용이다. 그 내용은 사굴산의 범일은 최초일구인 석가가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걸음걸어 유아독존을 천명하고 유성출가하여 견명성오도한 것이 구극의 경지가 아니고 수십월간 설산에 유행하여 진귀조사의 거소를 찾고 나서 비로서 현극한 의지를 전했다고 본다. 이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지의 비롯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 4칙은 진귀조사가 설산의 총림방 중에서 석가에게 조인을 전했다고 하는 설이며 제24칙은 선종의 최초일구인 석가의 생애를 중심으로 설해졌는데 진귀조사의 소득처를 석가의 깨달음보다 심원한 근원에 있다고 보는 발상은 양측이 대체로 비슷하다.


<선문보장록>에 나타난 진귀조사설은 선문전등(禪門傳燈)의 입장에서 그 설의 성립으로 고려불교의 선교대변론(禪敎對辨論)까지 논급하여 왔다. 거기에 비쳐진 진귀조사설은 한국불교사상에 순선시대를 연 고려후기에 있어서 선의 근원을 설하고 또한 선의 본래적 우위성을 말하는 근원적 설화로 알려져 왔다.


선종의 경향은 신라시대로부터 깨달음보다는 전심(傳心)이 중시되었는데 <선문보장록>에서도 마찬가지이며 같은 흐름이 고려 후기 이하에까지 계승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선문에 있어서 진귀조사설은 단지 설화로 이야기되는 것보다 선지를 전하는 조사선사상으로 생각된 경향이 길었던 것이다.


선문의 본존은 석가이지만 진귀조사는 석가의 깨친 경지를 초월하여 있고 그 근원은 고불인 노사나불에 연유한다. 따라서 고려선문의 전등은 석가의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이심전심 불입문자(以心傳心 不立文字)'의 상징인 진귀조사를 통하여 본래면목인 전심이 강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깨달음에 의한 사고의 전환보다도 본래평등의 선지를 수용전등하는 흐름에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진귀조사설은 삼신불(三身佛)의 관점에서 보면 석가불이 화신불이며 비로자나불은 법신불, 노사나불은 보신불이지만 진귀조사는 화신불이 아니고 보신불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선문에서 진귀조사설을 강조하는 것은 보신불을 매체로 하여 법신불에 점심하고 이를 전등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진귀조사설이 중시된 고려후기의 선문에는 석가보다도 법, 보, 화 삼신을 본존으로 하는 흐름이 보인다.




고려후기의 선사상

고려후기 선사상에 있어서 태고 보우와 나옹 혜근, 백운 경한을 빼놓 수 없다.


태고보우(太古普愚)는 그 법계상으로 개창조(開創祖)라기보다는 중흥조나 구산을 통합한 업적으로 볼 때는 개창조가 행할 작업을 이루었다. 그러나 구산통합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가, 외적인 행정상 통합만을 본 것인가는 지금도 파악하기 힘든 점이 있다.


보우의 행장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과연 어떤 이념에서 구산을 통합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1356년 4월 왕사로 책봉하였는데 오랜동안 가물다가 비가왔다 하여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고 왕사우(王師雨)라 하였으며 또한 이어 왕명으로 개성 만월동에 있는 광명사에 원융부를 세우고 그곳에 보우를 거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원융부에 관한 구체적 자료가 없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히 고려국에 있어 불교를 국교화했다 하나 조정에 별정직 기관을 둔 것은 왕사부였던 원융부뿐이다. 그러나 원융부는 일반행정기관처럼 사무상 행정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원융부를 통해 보우가 한 작업은 구산선문의 통합, 행정력을 혁신할 수 있도록 하는 길, 수도를 경성(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보우가 구산선문을 통합하려는 의도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본래 선문은 하나라는 것이다. 선의 본래가 일기(一機)라고 하는 말은 <도서(都序)>나 <보장록(寶藏錄)> 등에 널리 제시되었지만 보우는 선이 하나라는 점을 구산을 하나로 합해야 할 가장 본질적 근거로 내세우고 있었다.


두번째는 하나여야 할 선문을 나누고 보니 서로 다툴 뿐이라는 것이다. 근본에 있어 둘이 아닌 선의 기본도리이지만 구산으로 나누고 보니 자기만을 생각한 나머지 서로 다투기만 하는 발풍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선의 본의와 크게 어긋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세번째는 구산은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문이 국가사회를 위해 간접적인 공헌은 되고 있으나 보다 직접적인 공헌은 되어 있지 아니하다. 현릉이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문에서 위국하는 것이 무엇일까 찾는 것이다. 과거 대각국사 등이 제창했던 천태사상의 교리 중에 삼회귀일(三會歸一)을 찾아보면 그 저변에 삼국통일의 성업과 일치시킨 정신작업이 있거니와 국가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네번째는 역학(易學)과의 관련된 통합이념이다. 개성은 삼양에 이르는 땅이다. 이곳에서 삼국을 통일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또한 선의 본연이 하나인데 삼양에 분배하게 되면 구산이 자기 분화된 면만 찾게 되니 구조의 길이 서로 편벽되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보우의 이런 교단 합치 운동은 비교적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하겠으나 한국 불교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불교를 위축하고 마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선이 일문에 속한다고는 하나 일문에 들어오는 인간의 근기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나로 묶어 매어 수도를 한다는 것은 자발적인 노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이다. 혜근어록의 대부분이 선심과 예의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신위도원 공덕모 장양일체 제선법(信爲道源 功德母 長養一切 諸善法)'이라는 말과 '성상륙하 만세 만세 만만세(聖上陸下 萬歲 萬歲 萬萬歲)'를 많이 하였다. 고려가 사양 길에 들어섰던 공민왕대에 왜 그말을 많이 했는지는 의문이다. 불은(佛恩)과 황은(皇恩)을 떠나지 않아야 할 왕사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는 이면이 있다.


당시 승려들의 풍기가 문란할 대로 문란하고 정삼봉을 중심으로 불교를 싫어하는 유학인들이 속출하여 이들이 어지러운 고려사직을 바로 세워 보자고 하는 지사들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들에 대해 유교인들은 불교 본연을 무부무군(無父無君)한 형태라 생각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유교에도 못지 않게 불교에도 갚은 윤리사상이 들어 있음을 알리고자 했던 의미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상국들에게 불타에게 향하는 신심과 성상만세 등을 제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활불활조(活佛活祖)하는 기백은 누구 못지 않았다.


혜근의 생애는 31세(1351)시 지공의 회상을 거쳐 평산처림에게 갔었다. 평산이 "지공이 무엇을 쓰던가?"하고 물으니 "지공은 평소 천검(千劍)을 쓰더군요"라고 대답했다. 평산이 다시 묻기를 "지공의 천검은 놓아두고서 당신의 일검이나 가져와 써보게"하였더니 혜근은 앉았던 죄구로 선좌에 있는 평산을 마구쳐 쓰려뜨렸다. 평산은 크게 소리를 치며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하니 혜근이 바로 부축해 일으키면서 "내 칼은 능히 살인하고 또한 능히 활인 합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백은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소식이었다.


혜근은 언제나 살활을 겸한 선기만 나타내 보였을 뿐 단살(單殺)이나 단활(單活)은 쓰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살활자재의 자세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단살은 남에게 죄를 던지는 중생이 되기 쉽고 단활은 스스로를 우치하게 하는 중생이 되기 쉽다. 활(活)의 경지는 일체처 일체시 진진찰찰(一切處 一切時 塵塵刹刹)에 살아 있는 본연을 찾으면 된다. 혜근은 특별히 한줄기 풀이 장육금신불(丈六金身佛)을 만들고 장육금신불이 한 줄기 풀이 될 수 있어야 그것이 살인검인인 동시에 활불활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이것을 얻기만 하면 이는 황은, 불은에 일시 보필한다고 제시했다.


혜근은 이상 활인검을 주장하여 대자비를 구하기 때문에 진진찰찰 진대지 만상삼나(塵塵刹刹 盡大地 萬象森羅) 그대로가 진리요 부처의 세계임을 곳곳에 지적하고 있다. 살불살조만 하고 활불활조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미숙한 풋나기요 잘못하면 불문에 소기만 낸다. 이런 점에서 활불활조는 당연한 법이다.


백운경한(白雲景閑)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은 고려말기에 접하여 불교로 인해 민중이 피해를 입고 사회가 불교의 근본사상과는 달리 많은 문제를 안은 시대였다. 특히 신돈과 같은 이들이 조정에 들게 된 시대적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보우, 나옹, 지공, 경한 등 거승들이 선교사상을 정리하려는 데서부터 불폐의 현안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소위 태고가 제시한 구산선문 통합을 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일조일석에 성취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선조 초기까지 구산선문의 전심은 존속해 왔다. 구산통합의 배경에 있는 사상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시도하였다.


첫째 제사상 중 분열 이전이었던 조계 혜능에 의거하려는 입장인데 지눌이 처음에 단경을 보고 초견성하고 나서 '원사조계(遠師曹溪)'라 한 본의가 오가칠종의 통합처를 보아온 점이라고 할 것이다.


두번째는 구산선문이 모두 조계에 합일 할 수 있는 법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산의 일부 선풍은 북종에 관계된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법계만은 조계 이후 제선가에 의거하고 있다. 이 두 면이 구산을 통합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풍은 바람없는 온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고려 땅 자기가 몸담은 사찰에서 오득했으나 당시 국제사회에서 승려들로 인한 외교수단을 통해 중국에 다녀오고, 다녀오면 주고받는 새로운 풍토가 생겼다. 이 종풍 중에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과시한 것인 임제종의 선사상이었다. 특히 고려말기에 와서는 임제의 간화선풍이 있으나 그 사상마저 차차 은둔과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는 때라 하겠다.


고려말기의 고승들이 모두 임제계 양기파(揚岐派)였던 석옥청홍과 평산처림에게서 사상을 교류했다. 그러나 표면에는 인제종계와의 법맥을 유통했으나 그 이면에는 다양한 사상과 종합된 점이 없지 아니하다. 불법이 흥륭할 때 종파를 종합하게 되고 그 반면 불법이 쇠진할 때도, 종파를 종합하게 되기도 한다. 석옥 등에게 전해온 중국의 선풍은 점차 쇠토일로에 있었다. 반면에 고려의 선풍은 대성을 보이는 기회를 넏었다. 그 이유는 구산통합의 사상적 배경을 성숙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혀 후기의 선가들은 다같이 간화선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임제선가들이지만 임제에 그치는 선이 아니라 조동, 운문, 위앙, 법안 등 5가의 사상을 두루 받았으며 시대적인 풍조와 함께 절충된 임제계의 입장이 고려말에 오득한 선가들의 마음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임제계의 법맥을 이으면서도 임제종이 아닌 조계종이라고 표명한 의미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한국의 선맥을 태고의 문파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임제계의 선맥을 이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산을 통합한 한국 독자적인 시초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성공을 본 것은 내면에 경한이 정신적으로 힘을 밀어준데 기인한 것이다. 경한은 스스로 은거하면서 교단행정면에 앞장선 태고와 덕행을 겸비한 나옹을 두루 모시고 이들을 위대성을 한 몸에 받아 찬영(璨英)에게 전한 데에서 발전하게 한 중간자 작업이었다.



여말선초의 천태, 법화선

정혜결사의 영향을 받고 그에 맞서 천태종의 법화결사가 일어났는데 원묘 요세(了世, 1163 ~ 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가 그것이다. 이 또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전남 강진 만덕사에 도량을 두고 있으나, 결사의 사상적 동기는 상당히 다른 바가 있다. 요세가 의식한 중생은 죄업장이 두터운 범부였기 때문이다. 법화삼매참, 천태지관, 정토구생(淨土求生)의 3문은 요세의 철저한 범부의식에 입각한 것으로, 보살 같은 상근기 중생을 위한 지눌의 3문시설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죄장이 두터운 중생은 무엇보다도 먼저 죄업을 참회하여 지관을 닦고 타력정토문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세의 천태 사상도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백련결사 역시 정혜결사 못지 않게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말에 이르도록 정혜결사가 16세를 헤아리는 가운데 5인 이상이 국사 또는 국통으로 책봉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 후반기 불교는 정혜결사와 백련결사에 의해 주도된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나, 그 밖에도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많이 있다.


제2차 몽고란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다시 구국의 발원으로 재조장경이 이루어졌을 때 화엄종 승려들이 대거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보유판에 의천이 배척했던 균여의 저술이 대량 수록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짐작되는 바이다. 균여 화엄학의 부활은 정치적인 측면도 없지는 않으나 보다 심층적인 동기는 민족의 전통성에 대한 의식이 발생했던 것임도 간과할 수 없다. 균여의 화엄학은 전통적인 신라 의상계의 화엄이기 때문이다. 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바로 그러한 민족 전통성에 대한 역사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1세기에 걸친 원의 지배하에서 교단을 쇄신하고 구산문의 사상적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우, 나옹 혜근 등이 원에 들어가 임제선을 전래해 오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고려사회는 부분적인 개혁만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반원 복고정책을 수행했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고려말엽부터 전래된 유교의 성리학이 조선조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채택됨과 함께 불교는 서서히 뒷자리로 물러나는 시절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4) 한국의 후기선


조선후기의 선론

백파에 의해 전개된 선문논쟁이 1790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약 1세기 반에 걸친 동안에 호남의 대흥사계(大興寺系)와 선운사(禪雲寺)의 선논쟁은 조선조 말기를 장식하는 불교계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백파를 중심으로 선논쟁자들이 자란 18~19세기는 영, 정조시대로 실학의 물결이 일반서민사회에까지 깊이 파고들었던 시기였다. 이것은 전통사상의 흐름을 반성하게 하는 외래사상의 접근과 실오라기 정도의 과학사상이 한국학계에도 이해를 촉구하는 시기였다. 초의가 추사, 다산 등의 유학인들과 교류하면서 전총 백파의 이론을 반성하고 싶어서 이루어진 논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를 시대적으로 요약한다면 신구세력의 교체기이며, 호락논쟁(湖洛論爭)과 실학의 큰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가 하면 묵은 가치를 뒤엎고 나오는 신흥종교가 서학의 물결과 함께 조용히 싹터오는 시기였다고 할 것이다.


백파의 입장과 초의의 입자은 단순한 한두 사람의 주관에서 나타나는 선론에 그친것은 아니다. 적어도 고려말 이후 한국선의 전통적 이해를 통해 새롭게 펼쳐진 문제점이었다. 특히 서산휴정의 선문이해에서 고려말의 <선문보장록>과 합절한 <선문강요(禪文綱要)>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선가귀감> <선교석> 등에 소개하는 한편 <선문섭요>에 <보장록>과 <선문강요>를 금과옥조의 기본문으로 인정함에 따라 조선조 후대 선계학자들은 그것을 지켜야 할 전통처럼 받아 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백파에게만 있는 현상은 아니었다. 지안의 <오종강요>가 임제의 삼구에 의해 선문오종을 평가하는 한국 대표의 자료였다. 이것은 물론 중국의 <인천안목>의 뒷받침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한국의 전통 속에 있는 서산과 지안으로 잇는 선사상의 맥락에는 백파의 입장이 정론이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문제삼아야 할 백파 특유의 주장도 있으나 삼종선이 삼구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근거를 그랬다.


그러나 합리성을 띠고 선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초의, 우담, 축원의 사상을 끝내 설득 시키지 못했고 오랜 역사전통은 도리어 초의계 편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데 부인할 수 없도록 설득력이 있었다.


이런 점을 지녔지만 여전히 백파계는 선문의 정로라고 일반선계에서 간주하는 전통성 또한 부인할 수 없었다.


백파 이후 이들의 논란의 중요문제는 삼처전심의 문제와 살, 활, 삼구 등 소위 선학 전통의 전설을 추리 심성과 연결하여 논술하는 문제였다. 오늘날도 전통적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근거 없는 전설이지만 그대로 묵수하는 것이 선지의 실천의 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원시성 문제보다도 조사선 우위사상에 깊게 깔고 있는 문제는 스승의 전심사상이다.


대담하게도 불타의 대각보다 진귀조사가 불타에게 조사선을 전심했다는 설은 당시 한국 선사상의 중대한 전통이었다. 이에 따른 삼처심이나 살활의 문제 등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 백파의 법손 설두의 방향이었다. 이것은 백파의 입장에서 바르게 판단한 것이다.


이 뜻을 알면 사변(四辨)인 조사선, 여래선, 격외선, 의리선의 구조로 해결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분명히 여래선과 의리선이 일치할 수 없어서 관과 국의 입장으로 새로운 해설을 했거니와 조사선과 격외선을 일치하게 볼 수 없는 점으로서 조사선은 진귀조사의 원천을 지닌 것이라면 격외선은 삼처전심에 의거했다 하겠다.


분명히 그렇다면 비록 여래인 불타가 산처전심을 행했으나 조사선이어야만 한다는 모순을 그대로 인정해야만 한다. 이런 면에서 전통적인 신념에서는 백파편을 쫒으려 하나 여기에는 균형을 잃은 신념이라는 점에서 당시 신진들은 크게 반발했고, 그 반대의 구체적인 방법이 추사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두 선계의 논쟁은 한번쯤 거쳐야 할 일이겠으나 이 논쟁에 머물러서는 안될 이론이었다.



진묵의 선풍

진묵은 비록 전주에서 태어나 대찰도 아닌 작은 암자에서 지냈지만 항상 큰 서원과 큰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므로 초의는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전(世典)에 말하기를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원이 많은 것이니 원이 많은 고통은 불(佛)을 덮을 자가 없다.'하였다. 그 중에도 '약사여래는 그 보살행을 닦을 때 십이원이 있었고 미타불은 법장비구가 되어 사십팔원을 세웠으며 석가여래는 보해범지시에 오백서원을 발했다'


이 처럼 주세불은 수십 배의 원이 더 많은데 그 원은 다툼이 아닌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구하기 위한 원이라고 보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 자주 세상의 응화신이 되어 나온다. 특히 동국의 진묵은 석가여래의 응화신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진묵은 그 누구보다도 형상할 수 없는 큰 원을 발하였던 주인공이었다.


진묵은 모든 중생의 원을 수용하여 더욱 큰 원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가령 대원사의 기춘에서 유희하며 이락삼매(離樂三昧)에 든 일, 감나무 밑에서 여자의 청을 받아 주려 했던 일 등 허다하게 많은 일을 통하여 중생의 원을 들어주어 큰 원을 세우는 작업을 쉬지 않았다.


진묵은 천변에서 고기를 잡아 국을 끓여 먹는 소년들을 만났다. 진묵은 무고히 잡혀 국 속에 끓고 있는 물고기의 아픔을 생각했다. 소년들은 물고기와 술을 진묵에게 권했다. 진묵은 말하길 "나는 양이 커서 한 냄비 다 먹는다"하였다. 소년들은 모두 권하였다. 진묵은 통째 마셔 버리고 술도 많이 마셨다. 소년들은 술과 고기를 주어 놓고 문제를 일으킨다. "어떻게 스님이 술과 고기를 다하오?" 진묵은 "술과 고기를 먹었으되 그대로 내놓아 고기는 살고 술은 물에 떠내려버리면 되지 않는가"하면서 천변으로 들어가 고기와 술을 후문(後門)에 내 놓으니 고기를 살아서 펄쩍펄쩍 뛰고 술은 뿌연 뜨물이 되어 나왔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물론 믿기 어려운 마술과 같은 얘기지만 중생의 원에 따라 수용하고 또 다시 큰 원을 세우는 역할이 되었다는 점에서 웃어 넘길수 없는 대심성자의 행적이다.


특히 여기서 진묵과 같은 능력을 인정한다면 계문과 같은 것은 한낱 형식 윤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주 봉곡 선생과 만나 '화(和)'자를 많이 가지고 시를 읊은 것이 있지만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묵은 72세가 되던 시월초 어느날 머리를 목욕을 하고 머리를 깎으며 문밖에 나가 시내 흐르는 물을 따라 시자와 함께 지나다가 갑자기 서 버렸다. 잔잔한 물에 비친 그의 얼굴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이것이 석가불의 그림자니라" 시자는 "그것은 화상의 그림자인데요?" "너는 고작 아는 것이 진묵의 가짜 그림자만 보지 석가의 참 그림자를 모른다"하며 입실하였다.


진묵은 바로 열반의 차비를 하면서 "내 장차 없을 터이니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한 제자가 묻기를 "화상은 100세 후 종승을 누구에게 잇게 하겠나이까?" 진묵은 묵언양구 하다가 말하기를 "하종승지(何宗乘之)오"라고 답한다. 물론 보잘 것없는 종승을 묻는 것에 답하기 어려운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제자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진묵이 답하여 말하기를 "명리승(名利僧)이지. 그래서 휴정장로에게 속해야겠지" 하더니 입적하였다. 이렇게 볼 때 비록 트인 사람일지나 밖으로 넘치지 아니 하고, 속 깊은 공부를 하고 있으나 현실의 어려운 상황을 떠나지 않았으며 , 대원을 가졌으나 중생의 원을 들어 주는 가운데 세웠고, 계문과 수행을 초월했으나 대의는 역연히 지켜왔으며, 신통과 이적이 자재했으나 법과 질서는 분명히 지켜주었다. 이것이 진묵의 교훈이다.




근대 한국의 선사상

조선 후기의 불교를 개관함에 있어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역사 속에서도 선종 승려의 법계를 통일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던 점이다. 서산과 휴정이후 조선의 불교는 자체 관리상 선교양종으로 표기해 왔으나 그 내면에는 법계만이 전승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은 조선왕조 말기 불교계의 변화에서 더욱 분명해지게 된다.


고종 18년(1881) 정월초 조선의 조정에서는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등 60여 명으로 이루어진 신사유람단이란 명목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일본 불교 각 종파들이 식민지 종교정책의 전위대로 한국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불교의 조선 침식은 식민지사회를 토착화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그러나 막상 조선불교와의 직접적인 교류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또한 일찍이 일본승려로서 한국 제일의 부찰 양산 통도사를 정토종 말사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승려들의 완강한 반대와 항거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식민지의 마수는 이것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한말 친일자들로 하여금 몸소 앞에 나서서 매교행위를 하게 하였다.


신흥사에서 출가한 해인사 주지였던 이회광은 당시 친일계였던 이완용 내각의 힘을 입어 각도 사찰 52인을 동대문 밖 원흥사에 모이게 하여 원종의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원종 총무원의 설치 의도가 비록 매국적이긴 하지만 한국선의 사상적 근본을 영명사 연수의 <종경록>의 선교겸수론에 입각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더욱이 일본 조동종 승려를 원종 종무원의 고문으로 삼게 되었다.


이회광은 원종 종무원을 대표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72개 사찰의 위임장을 받아 도일하여 조통 종무원과 연합할 것을 교섭하였다. 당시 조동종의 관장이 그 뜻을 기꺼이 받아 들여 7개 조항의 연합조약을 조인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원종사원과 조동종은 완전 영구히 연합 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함

② 조동종 종무원은 원종 종무원 설립 인가를 담당할 것

③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포교에 대해 상당한 편리를 제공할 것

④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고문을 초빙할 것

⑤ 원종 종무원은 조계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명수반지사찰에 배치하고 일반포교급 청년 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조동종의 포교사 파견시에는 해당 수반사찰에 숙소를 제공함과 청년 승려 교육에 힘써 줄 것

⑥ 본 계약은 쌍방 의견에 불합할 때는 폐지 변경할 것

⑦ 본 계약은 그 관할처의 승인을 얻은 날부터 효력을 발생함


일방적인 식민지 불교로의 굴욕적인 처리는 마침내 한국 불교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백양사 승려 박한영, 회엄사의 진응, 범어사의 한용운, 오성월을 필두로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제기하여 이에 대한 완강한 반대와 항거를 하게 되었다.


첫째, 한국불교를 원종으로 개종시켰다는 사실이니, 한국불교가 태고 보우이후 임제종통으로 일사불란했건만 이 종통을 이유없이 개종시킨 사실은 역사의 죄인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점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한국불교를 굴욕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매교했다는 점이니, 신념 사회마저 강자의 일반적인 지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국가의 정세변화에 따라 종통 이해를 더욱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점은 한국전통의 선맥을 선맥을 선명하게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다. 

 

 

초기대승론


Ⅰ. 서 론

1. 문제제기

2. 大乘이란?


Ⅱ. 본 론

1. 大乘佛敎運動의 시작

①. 대승불교의 성립시기

②. 대승불교 성립의 배경

2. 佛塔과 在家信者의 신앙

3. 菩薩사상과 在家의 실천

①. 菩薩의 등장과 개념

②. 菩薩의 實踐

4. 大乘經典에서의 在家佛敎

①. 大乘佛敎의 根據마련과 經典成立

②. 經典에 나타난 在家佛敎


Ⅲ. 결 론

①. 大乘佛敎運動의 主役인 在家佛者

②. 오늘날의 在家佛敎에 대한 제언


Ⅳ. 참 고 서 적


Ⅰ. 序 論


1. 문제제기

在家法師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그것은 이 時代가 在家法師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在家法師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의 論点은 첫째로 佛敎의 다양화와 확대화를 가져오기에는 현재의 出家僧侶만으로는 부족하며 佛家의 四部大衆이 모두 동참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正法을 올바르게 알고 실천해 나가는 在家者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많은 大衆들에게 佛敎를 布敎하기에는 出家僧侶가 가지지 못한 점과 大衆들이 원하는 점등을 在家法師는 수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在家者로서 佛法을 올바르게 믿고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주장이며 集團化 傾向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넷째로는 오늘날 出家者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경향이고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가능성이 많은 현실에서 불교 포교와 정법수호의 역할을 出家僧侶들만이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은 在家法師의 위상이어야 한다. 물론 위의 주장도 在家法師의 필요성에 一助를 하겠으나 다만 위의 주장만으로는 在家法師의 필요성의 가장 큰 핵심인 ‘在家法師란 어떠한 존재인가와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답을 해 줄 수 가 없다. 그저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世間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在家法師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筆者는 이에 대한 문제해결을 이 글에서는 初期 大乘佛敎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在家佛敎는 어떠한 사상과 실천이 있었는가를 알아보고 그 속에서 진정한 在家의 의미를 되찾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初期 大乘佛敎에서 부터 시작된 在家佛敎運動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었다면 오늘날의 在家法師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初期 大乘佛敎運動 이후의 在家佛敎는 그 命脈을 재대로 잇지 못하였으며 大乘佛敎라는 우리나라에서도 그 命脈을 잇지 못하였다. 때문에 在家法師 위상의 정립을 필요로 하는 오늘날에서는 재차 정립하여야 하는 어려움과 외부의 따가운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이 점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在家法師의 위상정립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


2. ‘大乘’이란?

‘大乘’이라는 말은 摩訶耶那(Mahayana)의 飜譯語로, ‘摩訶’는 ‘위대한’, ‘훌륭한’을, ‘耶那’는 수레의 뜻에서 변하여 ‘가르침’을 의미한다. 즉 ‘위대한 가르침’, ‘훌륭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1) 즉 小乘이 修行者의 利益에 立脚하여 수도한다면 大乘은 修行하는 이와 修行에 도움이 되는 이가 함께 이익되며 더 나아가 함께 成佛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共同體的인 槪念이 原始佛敎 당시에 없었다기 보다는 出家修行者들에 관한 文獻이 많이 남아 있어 상대적으로 在家修行者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原始佛敎時代 이후인 部派佛敎時代에 들어 와서는 분명 出家者들의 阿毘達磨的인 性格으로 인해 在家者들이 소외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在家佛者들의 소외감은 佛敎敎義에 대한 재해석을 가능케 하였고 새로운 이념의 부각과 창출을 가져왔다. 바로 在家도 成佛에 더 한층 가까워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였으며 그 목표점도 소승의 개념과도 구별되게 확립하였던 것이다.

大乘佛敎에서의 在家者들 權益向上運動 이후 그 思想은 각 國으로 전해졌는 데 그 속에 우리나라도 포함되어졌다. 때문에 아직도 우리나라의 불교성격은 대승불교라고 규정되어지며 사상과 교의 일반도 大乘佛敎의 것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모든 思想界의 潮流가 그러하듯이 佛敎界도 時代와 空間의 영향에 의해 본 모습을 많이 상실하거나 形式的 面만을 고수하고 있는 점이 많다. 大乘佛敎運動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佛敎 傳受의 時代에 영향을 받아 佛敎思想이 변색되어져 오늘날은 大乘佛敎이면서도 소승적인 활동에 그치는 상황인 것이다. 그 예로서 대승의 菩薩槪念이 좁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法師라는 개념이 제대로 활용되고 있지 못하고 ‘自他一時成佛道’思想에서도 함께 成佛로 나아가기 보다는 出家修行者 위주의 成佛槪念이 지배적이다.


Ⅱ. 본 론

1. 大乘佛敎運動의 始作

①. 大乘佛敎의 成立時期

大乘佛敎의 成立時期는 ‘大乘’이라는 단어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 알아봄으로써 추측할 수 있는 데 기존의 학설에 의하면 中國으로 건너온 月支國의 지루가참(支婁迦懺)이 번역한 大乘經典인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卷1의 ‘道行品’에서 ‘大乘’을 ‘마하연(摩訶衍, Mahayana)’이라는 말로 音譯하여 나타내고 있다. 「도행반야경」이 中國에 전해진 시기가 서기 170년 경이므로 支婁迦懺이 月支國에서 가져와서 번역한 시기를 제하면 이미 월지국에서는 150년 경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도행반야경」에서도 新.古品으로 구분되어지는 데 그 중 가장 오래된 道行品의 성립 시기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무리하게 추측해 보면 기원전 1세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외도 <아촉불국경>의 원형도 A.D 1세기 전반 이전에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수능엄삼매경>도 A.D 1세기 전반에 북인도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경전 성립사를 살펴보아 대승불교의 사상적 근원이 되는 대승경전이 서력 기원 전후로 해서 북인도에 존재했다.1) 즉 대승의 성립시기가 서력기원 전후가 되는 것이다.


②. 대승불교 성립의 배경

大乘佛敎의 原流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異見이 존재한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은 日本의 前田慧雲(1864-1930)이 주장한, 部派佛敎까지를 대승불교의 原流라고 주장한 대목인데 그는 ‘明治 36년(1903)에 大乘非佛說을 비판하여 반박할 의도를 가지고 「大乘佛敎史論」을 저작하였다. 그는 이 문제(大乘佛敎의 原流)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논증하고자 하여 大乘佛敎敎理를 연구하여 그 原流를 추구하였다. 그는 「大乘佛敎史論」의 부록에 「大乘佛說考」에서 대승불교의 원류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部派佛敎와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는 佛滅後 2백년간의 대승소식에 대해서는 거의 절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설해 대승이 佛說인 것은 논증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部派佛敎까지는 大乘敎理의 原流를 더듬을 수 있다고 한다.’2) 라고 하였다. 이를 부언 설명하자면 대승불교의 원류는 部派佛敎의 大衆部에서 발전되어져 나왔다는 것이다. 이후 部派佛敎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대승불교의 원류가 大衆部 이외의 부파에서도 영향을 받았다는 說이 宮本正尊에 의해 제기되었다.3)

이들의 주장에서 공통시 되는 대중부는 수행자들의 계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시작된 제2결집에서 부터 파생되어진 부파로서 그 내용은 北方佛敎에서 전해지는 설인 ‘大天의 五事’와 南方에서 전해지는 ‘十事’에 관한 戒解釋의 차이였다. 이 小小戒의 해석문제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인정하고 따르느냐 아니면 기존의 수행관행과 계율을 지키느냐의 문제로 保守的 성향의 長老들인 上座部와 젊고 進步的인 修行者들인 大衆部가 나누어져 따로 結集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進步的인 大衆部는 사회변화를 인정하며 敎團의 運營을 가져갔기에 당시 불교세력을 잡고있던 上座部系列로 부터 異端으로 몰려나게 된다. 이러한 대중부는 자신들의 성격으로 大乘佛敎로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물론 대중부가 大乘佛敎의 직접적인 原因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思想이 당시의 상좌부계의 ‘我空法有, 三世實有’ 思想보다는 大乘쪽에 가까운 ‘我法皆空’일 뿐이지 완전한 大乘의 思想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思想的 흐름이었던 部派佛敎의 阿毘達磨的 敎學(abhidharma)은 상당히 煩鎖的이고 理論的이었으며,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無爲涅槃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理想的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阿羅漢(arhat)으로 인식되어져 專門的으로 敎學에만 치중 修行하는 僧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部派佛敎의 性向은 一般 大衆들에게 佛敎란 매우 실천하기 어렵고 專門的인 知識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認識되어져 많은 부담감과 거리감으로 다가와 결국은 疎外感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疎外感은 이후 大乘佛敎運動의 原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大乘佛敎의 發生背景은 위와 같은 內的要因에서 만이 아니라 당시의 文化的 要因에서도 살펴 볼 수 있다. 西洋, 특히 그리이스와의 文化交流는 佛陀에 관한 기존의 觀念을 변화시켜 佛滅 후 500여 년간 조성되지 않았던 佛陀의 像을 造形化하여 禮拜의 對象으로 삼았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佛敎의 造形美術化는 그리이스적인 思惟形態에 영향을 받아 東.西洋의 文化融和로 인해 현저하게 드러나는 데 이미 아쇼카왕 시대의 건축과 조각에 그리스와 페르샤의 영향을 받았고 쿠산왕조의 카니시카왕 무렵이 되자 간다라파로 불리는 그리스풍의 불교미술이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佛陀의 尊像이 대담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다.4) 이와같은 미술사적 흐름은 大衆과 佛陀와의 관계를 部派佛敎에서 요구하는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가 아닌 佛陀를 神格化시켜 자신과의 결합 내지 구원을 받는 관계로 전환시켜 大乘佛敎의 발생에 큰 역할을 한 <자타카(jataka)>,<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의 佛典文學으로 발전되어 일반 佛敎信者들의 사상에 불타를 한층 昇格化시키고 좀 더 가깝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어 大乘佛敎의 原流가 된다.

이상에서의 大乘佛敎의 成立背景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모두가 당시의 社會思想과 상황을 인정하고 發展的으로 受容하였다는 점이며 佛陀에 대한 思想이 더욱 친밀하고 敬畏시 하는, 그리하여 닮아가도록 하는 점으로 변모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들이 이후 大乘佛敎의 發生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一般 大衆들의 佛敎觀의 自覺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佛塔과 在家信者의 信仰

초기 대승불교를 일으켰던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이 점에 대해 일본학자인 히라가와 아키라(平川章)박사는 ‘初期의 大乘敎團은 出家菩薩과 在家菩薩로 구성되어 있으며 在家불교 중심에서 출가불교로 바뀌었다고 한다.5) 히라가와 아키라 박사의 이러한 가설이 증명된다면 초기 대승의 시작은 在家信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입증되는 중요한 가설인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초기 대승교단이 在家佛敎였다는 점은 그들의 신앙이 佛塔을 위주로 한 佛塔信仰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가 있다.

먼저 불탑에 대해 알아보면 佛塔은 산스끄리뜨어로 스투파(stupa), 빨리어로 투빠(thupa)라고 부르며, ‘塔’이란 말이나 音은 이 原語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한 原語를 직접 音譯한 말에는 ‘솔도파(率都婆)’, ‘솔탑파(率塔婆)’등이 있다. 원래 印度에서는 古代부터 각별히 유서 깊은 사람(특히 聖者)에 대하여 그 사람의 死後에 故人을 기념하는 분묘를 만들었는데, 이는 흙을 쌓아 올려서 봉분을 만드는 풍습이었다. 스뚜빠보다도 규모가 작은 토착적인 분묘에 대해서는 별도로 산스끄리뜨어로 짜이띠야(caitya), 빨리어로 쩨디야(cetiya)등으로 불렀으며 탑묘(塔墓), 사당(祠堂), 무덤(塚)등으로 번역되었다.6) 이러한 佛塔에 대한 신앙을 在家자의 신앙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佛塔信仰의 시초와 당시 部派에서의 佛塔信仰에 대한 의견을 들어 알 수 있다. 佛塔信仰의 시초는 부처님의 入滅 후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在世 時 부처님의 장례절차를 묻는 것에 대한 답변으로 出家修行者는 사리공양에 간여 해서는 안되며 모든 것을 在家信者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하셨다. 빨리어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열반에 들 석존에게 아난이 불멸 후의 일을 질문하였다. 그중에 “대덕이시여, 우리는 여래의 사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이 있는 데 이에 석존은 “아난다여, 그대들은 여래의 사리공양에 봉사하여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최고의 선을 위하여 노력하라. 최고선에 住하기 위하여 게으름 없이 노력하라. 아난다여 여래에 대한 信이 돈독한 끄샤뜨리야의 현자, 바라문의 현자, 거사(資産家)의 현자가 있어 그들이 여래의 사리에 공양을 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7) 이렇듯 사리공양, 佛塔信仰의 시작은 在家信者에 의해 시작되었고 사리를 위해 탑을 쌓거나 관리하는 것은 在家의 역할이었지 출가자의 몫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파에서의 佛塔信仰에 대한 견해를 보면 세일론상좌부에서는 일찍부터 佛塔이 세워지고 있었지만, 이 派가 지닌 <팔리율>에는 佛塔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고 유부(有部)의 <십송율>이나 대중부의 <마하승기율>에서는 塔地와 僧地를 구별하고 있으며 塔物과 僧物도 구별하고 상용(相用)을 금하고 만일 互相하였을 떄는 바라이죄에 저촉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부종륜론>에서는 “佛塔에 공양하면 광대과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중부계의 제다산부, 서산주부, 북산주부, 화지부 등은 “佛塔공양을 하더라도 얻는 과는 적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部派佛敎의 佛塔공양의 견해는 매우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불탑공양에 대해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못한 점은 당시의 일반 대중들의 불탑신앙이 대단하여 시대의 흐름을 거역치 못하고 흐름에 쫒아 시행한 느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출가集團에서도 불탑공양을 한 흔적을 탑건립의 기증자 명단에 비구.비구니 이름이 들어 있음을 보고 알 수 있는데 이는 외부에서 佛塔信仰이 성행하였기에 僧家佛敎가 이것을 도입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佛塔信仰이 在家불교에 가져오는 영향은 단지 탑을 건립, 관리하는 차원을 벗어나서 불탑을 관리하는 出家菩薩 내지 在家보살들이 在家信者들을 모으고, 또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해 내며 나아가 불타관을 대승불교의 구제불신앙으로 이어 당시 부파의 출가자들과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타관은, 이제까지 초인적인 면은 인정하나 중생을 구제하는 불타는 아니었고, 수행법에 있어서도 전문적인 노력을 요구하였고 ‘法의 導師’로서 法中心의 佛敎觀을 지닌 部派佛敎의 佛陀觀을 배격하여 일반 在家信者들이 생활에서 지키기 어려운 엄격한 계률과 선정의 실천, 법의 이해를 불타에 대한 자비력으로 전환시키어 그들에게 ‘구제불’로서의 불타관을 심어주어 희망을 준 것이다. 때문에 불타의 사리(遺物)을 모신 탑은 자연히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불타에 대한 경외심과 가피력을 입기위한 불탑공양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佛塔信仰에 중점을 두어 살펴 보았다면 이제는 佛塔교단의 면을 살펴보겠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히라가와 아끼라(平川章)씨는 ‘대승불교의 원류는 在家佛敎의 신앙集團의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佛塔을 거점으로 하는 승속의 佛塔信仰者 集團이 큰 原流의 하나라고 主張하였다. 이 주장은 초기대승경전의 주도면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종래 거의 규명되어 있지 않았던 교단사의 측면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8) 만일 이 가설이 증명된다면 대승불교가 在家佛者에 의해 주도됐느냐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가능해질 것이다.

히라가라 아끼라(平川章)씨에 의하면 초기의 대승교단격으로 菩薩集團을 이야기 한다. 이 菩薩集團은 부파교단과 같이 상가의 조직을 갖지 않았으므로 ‘가나(gana)'라고 불렀다는 것이다.9)

이 보살集團의 성격이 ‘출가자들의 集團이냐, 在家자들의 集團이냐’와 그 생활상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가설을 세우길, 만일 在家자로서 佛塔을 관리하고 보호하며 신자들에게 부처님의 전생 설화(본생담)등을 이야기 해 주면서 佛塔에서 사는 사람들의 集團이 비구계(250 구족계수지)를 받았다면 이들은 부파의 교단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승보에 속하게 되어 佛塔에서 거주할 수 없고 수행처인 아란야에서 생활해야 될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봐서 그들은 250계를 받지 않고 신자들이 佛塔에 받치는 공양물로서 생활하며 토지를 시주하거나 佛塔을 시주한 것에 의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비구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佛塔을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佛塔에 새겨진 불전도나 자타카, 佛塔 공양법 등을 설명했던 것을 봐서는 자신들 스스로 出家僧에 버금갈 정도의 자부심과 계율을 지녔고 지킬려고 했을 것이다.

즉 出家菩薩集團은 在家信者와 출가수행자 사이의 비승비속으로 살아가면서 이후 대승불교의 큰 원류가 되지 않았나 추측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부파교단과 병행하여 존재하였던 佛塔信仰자 集團의 찬불적, 신앙적 불교형태가 초기의 대승불교 형성을 가져온다’10) 라는 설명이 나온다.

결국 대승불교의 원류격인 불탑신앙자들(특히 자신들이 스스로 불법에 마음을 내어 신앙실천한 자)은 出家菩薩 혹은 在家보살로서 일반 在家信者들의 공양물에 의존하면서 스스로 계율을 정해 놓고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菩薩思想과 在家의 實踐

①. 菩薩의 登場과 槪念

초기 대승불교의 상황은 出家菩薩, 在家보살들이 部派佛敎의 틀을 벗고서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하여 일반 신자들을 이끌어 함께 구제되는 길로 나아가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部派佛敎의 교단처럼 출가자가 아닌 새로운 지도자로서 지도력을 확보하여야 했다. 이것은 앞서 지적했듯 非僧非俗의 위치로 문학작품 속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菩薩이라는 이념 또는 그 이미지를 자기들 내부로 교묘하게 흡수하면서 그들의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이윽고 大乘菩薩이 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좋다.11)

菩薩은 보디삿뜨바(bodhisattva)를 音寫하여 줄인 말로서 상세하게는 보리살타(菩提薩陀)로 音寫된다. 보디는 ‘깨달음’이며 삿뜨바는 ‘유정(有情)’을 가리키므로 菩薩이라는 말의 뜻은 ‘깨달음을 얻은 유정’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이 된다. 후에는 일반적으로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고(自利)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노력하는(利他) 사람(上求菩提 下化衆生)’으로 설명된다. 자리와 이타를 완성하고자 용맹정진하는 사람이므로 마하삿뜨바(mahasattva, 마하살 또는 대사)로 찬양되기도 한다.12)

菩薩이라는 말과 개념은 초기 불교에서 部派佛敎로 이행할 당시 즉 연대로 말하면 대략 기원전 2세기 경 이후에 등장한 것 같다.13) 대략적으로 말하면 빨리 계통에서는 대개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존을 부각시켜 ‘菩薩’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빨리어 <아함경>에 “내가 아직 정각을 얻지못한 菩薩일 때에”라는 말이 있어 정형화 되어 사용되었다. 게다가 본생담(jataka)에서는 석존의 전생수행 때를 菩薩로서 지칭하고 있으며 수기(受記)를 얻어낸 菩薩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菩薩이 생기게 된 것은 釋迦菩薩로 부터 간주하고 部派佛敎에서도 수용되었다.14) 이러한 受記菩薩은 찬불승(讚佛僧)들이 佛典文學을 통해 부각시켰지만 대승불교의 菩薩과는 차이가 있다. 찬불승과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菩薩의 큰 차이점은 찬불승의 菩薩이 석가세존의 전생으로서 연등불께 수기를 받은 수기불 내지 불전문학을 통해 등장한 불전菩薩이라면 대승불교의 菩薩은 일반범부인 대승수행자도 菩薩로서 수기없이 언젠가는 成佛할 수 있다는 자부심의 菩薩이다. 이를 범부菩薩(수기를 받지 않은 菩薩)이라 한다.

보살의 중요한 점은 범부보살 즉 자기 스스로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대승사상인 여래장사상으로도 이어지는 데 이 점이 불탑신앙과 불탑교단을 이끌어 온 많은 출가보살, 在家菩薩의 힘이 되고 사상의 근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②. 菩薩의 실천

대승에서 제기되는 菩薩은 수기가 없이도 成佛할 수 있는 菩薩이다. 그렇다면 당시 在家信者들은 凡夫菩薩에 대해 어떻게 여겼을까. 그것은 在家信者 곧 凡夫菩薩이라고 스스로 지칭하였을 것이고 흡수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범부菩薩의 사상은 在家佛者의 사상이 되고 菩薩의 실천행은 곧 在家信者의 실천행이 되었다.

범부菩薩의 사상 중에서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菩薩이라고 자각하는 것이다. 이점은 앞서 언급되었고 佛典菩薩과도 차이점을 보이는 것인데 범부菩薩이면서 깨달을 수 있다는 자각은 자신에게 내재되어져 있는 불성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즉 自性淸靜心思想으로 釋迦菩薩의 行蹟을 따라 자신도 成佛하겠다는 마음의 각오, 이것이 ‘보리심을 발하는 것’으로 이때가 진정 大乘의 菩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六婆羅密行을 닦아야 하는데, 만일 原始佛敎에서 출가수행자가 닦아야 할 것이 팔정도와 三十七助道品이라면 대승의 在家信者(보리심을 발한 凡夫菩薩)는 전생의 釋迦菩薩이 행한 婆羅密修行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般若部經典에서는 般若婆羅密多修行法을 강조하는데 이 반야바라밀수행법은 空思想으로서 菩薩은 무집착의 행으로서 이타수행을 하데 대상에 집착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마음속에 새기거나 이타행을 하였다는 생각을 하여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일체의 사물과 만법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법은 공이며 무자성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15) 이러한 사상이 나오게 된 것은 물론 불타의 교설에서 이겠지만 部派佛敎의 번쇄적이고 유부의 사상에 대하여 대항하여 나왔다고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출가보살, 在家菩薩의 삶이 공양물에 의존한 윤택하지 못하다는 생활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볼 때 자신들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강조되어졌다고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般若婆羅密의 실천은 오직 自利를 구하지 않고 利他에만 전력하는 입장이며, 成佛도 도모하지 않는 끊임없는 修行이기 때문에 이 修行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다. 菩薩의 이 결의를 갑옷을 입고 싸움터로 나가는 전사에 비유하여 ‘홍서의 대개를 입는다(mahasamnhasamnaddha)’라고 표현하고 있다. 大乘菩薩 즉 일반 在家佛者로서 菩提心을 發한 자는 이상과 같은 힘든 수행을 하여야 하는데 이는 마치 部派佛敎에 대한 大乘佛敎의 自覺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만큼 在家佛者들의 心境은 대단한 決意로 무장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 大乘經典에서의 在家佛敎

①. 대승불교의 근거마련과 경전성립

‘대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명확히 사용한 사람은 <소품반야경>을 작성한 사람들이다. 그들 또한 불탑을 위주로 생활한 출가보살, 在家菩薩로서 은 스스로를 ‘법사(dharma-bhanaka)’로 부르며 그들이 설하는 반야바라밀이라는 새로운 법이 무상심심(無常深深)의 ‘제불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無自性空의 立場에 서면 世間은 그대로 涅槃이기 때문에 二乘(聲門,緣覺)과 같이 世間을 厭離하고 涅槃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승이 입장을 부정하였다. 그들은 經典 供養이 佛塔供養보다 훨씬 우월한 것으로 주장하였으며 반야를 전하는 법사에게 헌신할 것을 강조하였다.16)

여기에 나타난 법사는 ‘다르마 바나까’로 대승의 독자적인 설립자로서 새로 등장하여 在家信者들의 지도자에서 탈바꿈하여 대승불교의 지도자적 지위에 오른다. 이들 중에는 여성도 포함되어 ‘다르마 바니까(dharma-dhanika)’라는 여성명사도 있다.

법사들은 새로운 ‘법’의 가치를 강조하고 이에 대한 성실한 믿음과 공양을 권장하였다. 이 ‘법’은 ‘경전’으로 성문화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경전의 독송,서사를 장려하였으며 서사된 경전을 안치하고 이에 향과 꽃을 공양하는 것이 佛塔공양보다 수승한 것임을 강조하였다.17) 이러한 경전의 공양은 부파교단으로 부터 대승 비불교설에 대한 방어와 동시에 佛塔信仰자들로 부터 소외시 되는 상황도 벌어지게 되었다.

경전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역출된 경전으로 부터 추정해 나갈수 밖에 없는데 중국에서 가장 빠르게 번역된 대승경전으로 지루가참이 번역한 <도행반야경>으로서 알아보고자 한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것은 대개 서력기원 전후의 무렵이라고 보아 틀림없다.18) 그리고 대승경전으로 번역된 것은 후한의 상제(146-167 재위), 영제(167-189 재위)의 시대에 대월지국(kusana)의 사문 지루가참(지루가참)의 ‘대승경전 14부 27권’을 역출했다고 한다. 그가 대승경전을 주로 번역한 시기는 광화(178-183 재위), 중평(184-189 재위)의 시대이지만 중국에 온 것은 그보다 빠르며 그가 역출한 경전의 원본은 A.D 150년 이전 이미 쿠사나왕조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나오며 문제는 150년에서 얼마나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다.19)

지루가참이 번역한 경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 포한되어 있는에 이 경은 10권으로 구성된 대부의 경이며 내용은 30장으로 되어있다. 그 속에는 신.고의 층이 구별되어지는 데 예를 들면 제25장을 ‘累敎品’이라 하는에 이것은 경전이 끝났음을 이른다. 따라서 26장 이하 30장 까지는 경전이 마무리 된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28장 이하의 상제(常啼)菩薩의 법을 구하는 이야기에 불상을 만드는 법이 설해져 있는에 불사을 제작한 시기는 A.D 1세기 후반 이후 부터이다. 그리고 이 상제菩薩이 법을 구하는 이야기는 이미 다른 경전 「방광반야경」이나 「대품반야경」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이들 경전이 A.D 1세기 이전에 제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행반야경에서 가장 오래된 장은 제 1장인 ‘도행품’인데 이 도행품과 마지막의 상제菩薩의 구법이야기와는 상당한 시일이 흘러음을 알 수 있으므로 도행품의 성립시기는 서기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세기까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쇼카 왕(기원전 268-232 경)의 ‘법칙(法則)’에서는 대승사상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대승의 흥기를 서력 기원 전 후의 시기 보다 너무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타당지 않다.20) 이외의 지루가참이 번역한 경전 <반주삼매경>1권, <수능엄삼매경>2권, <아자세왕경>2권, <아촉불국경>1권 등도 A.D 1세기 경에 북인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그 당시 반야계 게통, 아촉불의 사상, 화엄계통의 사상, 아미타불, 관불사상, 심성본정설, 문수의 교리, 반주삼매, 수능엄삼매, 보적경계통의 사상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21)


②. 경전에 나타난 在家佛敎

앞서 제시한 각종의 대승경전은 部派佛敎에 대한 출가보살, 在家菩薩자들의 입장정리와 근거확보라고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본래의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히 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입장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때문에 대승불교가 시작된 기원전 1세기 경에서 부터 대승경전의 제작은 시작되었다.

우선 법화경을 살펴보면 법화경의 원명은 ‘삭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이다. 이 말은 ‘바르고 오묘한 법(삿다르마saddharma)'은 진흙탕 속에서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흰연꽃(백연화; 뿐다리까pundarika)'비유한 것이다.22) 그리고 <묘법연화경>이라고 하며 7권본 또는 8권본이 있다. 그들은 법화경에서 경전의 제명처럼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진실된 믿음을 밝히려 하였을 것이다.

법화경에서 재가불교를 대변하여 주고 있는 것을 보면 <법화경>의 전문학자인 기노야박사에 의하면 <법화경>에 나타난 佛敎信者團은 부처님의 유골을 중심으로 숭배하는 佛塔信仰에 의해 모인 在家信者의 신자단이었으며 그 신자단의 중심을 이룬 것은 왕후가 아니고 도시의 자산가였다고 한다. <법화경>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중요한 등장인물이 거의 도시의 자산가나 상인이었음이 나타난다. 이 점을 도식화 시켜보면 도표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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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서품(서품) - 모든 재산을 베풀고 있는 많은 菩薩들 ?

? 2)비유품(비유품) - 대재화(대재화), 대재산(대재산)을 보유한 자산가 ?

? 3)신해품(신해품) - 여러 대국의 부호 ?

? 4)화성유품(화성유품) - 무역상의 지도자 ?

? 5)보문품(보문품) - 무역상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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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을 비춰보면 법화경의 주요부 성립시대인 1세기에는 在家信者--대부호, 상당한 권력자 등도 포함된--들의 활동이 중심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법사에 관한 장이 나오는 데 제10의 법사품에서는 ‘여래의 사자’ 사상이 나타나는데 그 내용에 따르면 佛의 使徒란 菩薩을 가르키며 이는 ‘여래사(如來使,Tathagata=duta)’라 부르는데 그가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두려워말고 법을 설하라고 권유한다.

법화경 전반부의 중심부는 제2장으로 ‘방편품’인 이 장은 일불사상이 나타나 있는 장이다. 部派佛敎의 성문승과 연각승, 대승의 菩薩승의 삼승은 각자가 成佛을 위해서 수행하나 사실은 1승(1승)에 귀착되며 다만 교화의 수단으로서 근기에 따르는 설법에 지나지 않으므로 오직 일불승 뿐 이라고 역설하고 있다.24) 이처럼 성문,연각이라도 成佛할 수 있다고 확신을 일으킬 수 있는 점은 <법화경> 내에 불성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방편품’의 ‘제법의 본성prakrti은 항상 청정prabhasvara하다’는 ‘제법본성청정’에 의거한 불성의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25) 이사상은 반야경에 나오는 ‘심성본정’과 같은 의미이며 이후 실유불성이나 여래장으로 발전하는 것이다.26)

<법화경>은 在家佛者들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在家佛者들이 成佛로 나아가는데 큰 힘을 주고 있다. ‘방편품’이나 ‘여래수무량품’에서 在家불교사상을 받고 있으며 <법화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在家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법화경과 함께 재가불교를 대변하고 있는 경으로는 유마경이 있다.

이 유마경은 반야부경전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상계통으로 보면 명백히 <반야경> 계통으로 간주되는 <유마경>이 있다.27) 이 경전의 온전한 제목은 <유마힐소설경(唯摩詰所說經)> 으로 구마라집역 <유마힐소설경(唯摩詰所說經)>3권(406년)이지만 이외의 한역으로 지겸(支謙)역 <유마힐경>2권(223-253년), 현장역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6권(650년)의 2종이 있으며 별도로 티벳역에도 있다. 산스끄리뜨 원정은 현존하지 않지만 다른 문헌에 인용된 산스끄리뜨 단편에 의해 그 편린을 알 수 있다.28)

이 경의 주인공인 유마힐(약칭으로 유마)은 음역(音譯)이며 원명은 Vimalakirti로 직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다. 그는 당시의 상공업의 중심지인 바이샬리(vaisali)에 살고 있었고 부인도 재산도 있었으며 때로는 유희장이나 주석에 끼는 경우도 있었다.29)

이 경의 골자는 在家(유마힐)의 출자중심주의의 소승불교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대승의 진의를 발휘한다는 것이며 아울러 在家信者의 종교활동과 포교활동을 주제로 한 것이다. 유마경의 주요내용으로는 문수에게 “중생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들었노라. 만일 일체중생의 병이 없어지면 즉시 내 병도 없어지나니......중생이 앓을 때는 곧 菩薩도 앓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菩薩의 병도 나으리라......菩薩의 병은 대비로 인하여 일어나느니라.”하면서 대비를 강조하는 동시에 무상.고.무아.평등.무소득.방편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 경의 정점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의 문제가 제기된다. 자리를 함께 했던 菩薩들은 자신이 이해한 바를 번갈아 이야기 하였다. 마지막으로 유마가 설명할 차례가 되었으나, 그는 침묵을 지키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이의 경지는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마경에서 유마거사는 在家信者의 모델, 이상향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불토도 청정하다.” “직심.심심.보리심이 菩薩의 淨土이다.”라는 사상으로 유흥장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어느 장소, 어느 때이든지 어울리면서 올바른 신앙을 깨뜨리지 않은 在家자였다.

특히 유마거사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서 在家佛者들의 실천법을 지적하였는데 “지도(지도; 반야바라밀의 한역)는 菩薩의 어머니, 방편으로써 아버지를 삼는다. 중생을 이끄는 모든 스승(導師)은 이로 인해 태어나지 않음이 없다. 법희(法喜)로써 아내를 삼고, 자비의 마음을 딸로 삼는다.” 라고 하였다.

유마거사의 깨달음은 출가수행자를 능가하기도 하지만 在家자들이 이루어야 할 목표라는 것도 공사상의 진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이 외에도 재가불교에 관한 경의 내용이 많다. 반야경에서의 수능엄삼매에 관한 내용은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라도 넘어갈 수 있는 삼매이며,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단계를 정하여 놓아 보살이 체계를 갖추어져 결코 部派佛敎의 수행자에 뒤떨어지지 않게 되며 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을 설하는 장면과 많은 영락, 마니, 등의 보석은 재가불교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결 론

①. 大乘佛敎運動의 주역인 在家佛者

大乘佛敎運動은 오랜 시간 그 원인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部派佛敎의 근본분렬이라 할 수 있는 제2결집의 대중부에서 찾을 수 있으며, 불멸 후 部派佛敎의 번쇄적이며 관념적인 교리연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론 외적인 영향으로 문화사적인 면에서 조형미술의 발달로 불타의 이미지가 일반 대중에게 새롭게 다가가갈 수 있었던 것에서도 찾을 수 있고 여기에는 없지만 인도 흰두교의 영향도 무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필요에 의한 일반 대중들의 자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불멸 후 계속되어 온 불탑신앙과 불전문학 등을 통해 각자가 부처가 되어 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보겠다는 신앙의 형태 속에서 이미 대승불교의 원류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이끌어 내고 새롭게 승화시킨 주역이 바로 불탑을 의지하여 생활하는 출가보살과 在家菩薩이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각자가 불탑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마음속에는 항상 부처님에 대한 사뭇치는 애정과 자신들도 出家僧려들과 같은 수행의 길을 통한 해탈을 경지를 맛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출世間과 世間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부처님의 유물인 불탑에 기거 하며 그곳이 바로 그들의 수행도량이 되었고 그들 또한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극적인 部派佛敎의 出家僧에 대한 아쉬운 미련 때문에 더욱 世間에서 수행의 길을 갔는지도 모른다. 여하간 불탑을 위시한 출가보살, 在家菩薩은 스스로를 보살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의 자손이라 칭하였고 자신들의 모델을 부처님의 전생과 흰두의 전통신에서 따왔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스스로를 법사라고 칭하면서 이론적 토대와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을 피력했다.

이렇게 일어난 大乘佛敎運動은 일반 대중들에겐 희망이었으며 部派佛敎교단에게는 이단자들이었다.

②. 오늘날의 在家불교에 대한 제언

앞서 제기된 법사의 위상을 이제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해 유추해 보면 첫째로 불성에 대한 자각이라 할 수 있다. 즉 成佛에 대한 강한 믿음감이 없이는 그 무엇도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스스로의 수행에 있다. 만일 출가보살과 在家菩薩이 타율적인 율에 의해 생활을 하였다면 그들은 당시의 부파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일깨우며 수행해 나아갔다. 셋째는 물러남이 없는 용맹심에 있다. 당시 部派佛敎의 따가운 시선에서도 물러남이 없이 불교 본래의 정법이라는 믿음 아래 수행정진하였던 것이다. 넷째는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出世間과 世間의 차별을 두어 어느 것이 더 우위의 것이고 더 정법의 길이냐를 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철저한 공사상에 의거한 자신들의 길만을 충실히 걸었던 것이다.

당시의 출가보살이나 在家菩薩의 입장과 지금의 在家法師의 입장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된다. 有髮로서 世間에 머물며 생활하는 가나集團을 당시의 出家僧家는 질책과 멸시를 주었을 것이며 당시의 일반 대중들도 모두가 가나集團을 이해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나集團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는 점이며 출가보살, 在家菩薩도 분명 成佛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오늘날 在家法師는 자신의 수행을 재점검하여야 하며 홀로 수행함에 있어 오는 독단과 독선을 항상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제기한 在家法師의 위상을 충실히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出家僧家나 在家法師集團 이나 진정한 목표점은 서로의 화합과 成佛의 길에 있으며 그 길은 관념된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Ⅳ. 참 고 서 적

1) 대승불교개설/히라카와 아끼라(平川章) 저/정승석 역/김영사/1989

2) 인도불교의 역사 상/平川章/이호근 역/민족사/1991

3) 대승의 세계/시즈타니 마사오(靜谷正雄) 외 저/정호영 역/대원정사/1991

4) 바웃드하 불교/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외/혜원 역/김영사/1990

5) 대승불교의 핵심/尹性海/우리출판사/1991

6) 大乘佛敎 成立에 대한 諸異論考(동국사상제24호)/신성현/동국대 불교대/1991

7) 불교학대사전/편집부 편/홍법원/1991

8) 불교학개론/김동화/보련각/

9) 한글세대를 위한 불교/E.CONZE 저/한형조 역/1990

10)불타의 세계/나까무라 하지메(中村 元) 저/김지견 역/김영사/1990

11) 유마경 강설/이영무 저/월인출판사/1989

12) 初期部派佛敎의 역사/후지타 코오타츠(藤田廣達) 외/권오민 역/1989



1)대승의 세계/靜谷正雄, 勝呂信靜 저/정호영 역/대원정사/1991/p12/상



 


 

1)인도불교의 역사 상/平川章/이호근 역/민족사/1991/p267-268

 


 

2)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諸異論考/신성현 저/동국사상 제24집/1991/p48

 


 

3)대승불교의 성립에 대한 諸異論考/신성현 저/동국사상 제24집/1991/p49

 


 

4)대승불교의 핵심/윤성해/우리출판사/1991/p28

 


 

5)인도불교의 역사 상/평천장 저/이호근 역/민족사/1991/p291/상

 


 

6)바웃드하 불교/中村元 저/혜원 역/김영사/1990/p180/상

 


 

7)대승의 세계/정곡정웅, 승여신정 저/정호영 역/대원정사/1991/p112/중

 


 

8)대승의 세계/정곡정웅,승여신정 저/정호영 역/대원정사/1991/p111

 


 

9)대승불교개설/평천장 저/정승석 역/김영사/1989/p53/하

 


 

10)대승이 세계/정곡정웅,승여신정 저/정호영 역/대원정사/1991/p112/상

 


 

11)대승불교개설/平川章, 梶山雄一 외 저/정승석 역/김영사/1989/p130/중

 


 

12)대승의 세계/p122/상

 


 

13)바웃드하 불교/중촌원 외 저/혜원 역/김영사/1990/p203/중

 


 

14)대승의 세계/p125/하

 


 

15)대승불교개설/p25/하


 


 

16)대승의세계/p144

 


 

17)대승의 세계/p150




 


 

18)인도불교의역사 상/267

 


 

19)인도불교의 역사/p268

 


 

20)대승불교개설/p28

 


 

21)인도불교의 역사 상/p271

 


 

22)바웃드하 불교/p263

 


 

23)대승불교총설/pp23-24

 


 

24)바웃드하 불교/p264/중

 


 

25)인도불교의 역사 상/p305/하

 


 

26)인도불교의 역사 상/P305/하

 


 

27)대승의 세계/p173/하

 


 

28)대승의 세계/p174/하

 


 

29)바웃드하 불교/p252/하

 


 

[출처] 대승불교(大乘佛敎)|작성자 U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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