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대승불교의 선구자, 용수

수선님 2020. 4. 5. 12:40

대승불교의 선구자, 용수

 

 

용수, 그는 불교의 역사상 찬연한 발자취를 남겼다.
어느 종교든지 거기에는 종교적인 열성을 지니고 있는 이른바, 종교적 천재라고 불리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불교에서는 용수가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했던 근본불교가 다분히 철학적이었고, 또 어떤 의미로 보면, 귀족적인 모습도 없지 않았다. 그것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어서 부파불교시대에는 많은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용수가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오해가 불식되고 불교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그 모든 것을 통칭해서 대승불교라 부른다.
용수, 그의 본명은 나가르쥬나이다. 태어난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후 150년경에 남인도의 비발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불교사에 명멸하는 많은 위인들의 정확한 생몰연대가 밝뼈져 있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략 기원후 150-250년 사이, 즉 기원후 2세기 중후반이 그의 활약 시기였으리라고 추측된다.
나가르쥬나, 용수는 원래 외도의 사상을 공부하는 외도사상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대승불교에 귀의하고 난 다음에 매우 위대한 철학적인 논증을 통해서 외도들의 논박을 물리치는 탁월란 논사가 되었다.
용수가 주로 쓰고 있는 논리 가운데 '프라상가'라는 논리가 있다. 그 논리 구조는 매우 흥미롭다.
그는 상대방과 격렬한 토론을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지적하여 상대방의 질문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형식논리를 채택하고 있다. 이를 인도 논리학에 있어서는 '프라상가의 논리'라고 부른다.
그러한 용수보살의 프라상가의 논리를 용수가 지은 』중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알아보자.

대론자가 용수에게 질문을 한다.

"용수보살은 공에 대한 말을 많이 하고 있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도 공이고, 부처님이 가르친 진리도 공이 된다. 그리고 그 진리를 믿고 따르는 승단도 공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 끝까지 공을 주장한다면 불·법·승 삼보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의 이론은 옳지 못하다. "

이렇게 통박하자, 용수는 그것이 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고 상대방 논리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대는 내가 불·법·승 삼보를 공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불법을 파괴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대의 논리대로 한다면 부처님은 불공이 되어야 한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도 불공이어야 한다. 아울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모든 승가의 무리도 불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불공이 되어야 삼보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게다가 불공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히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결코 이 세상의 제행이 무상하다든지, 제법이 무아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불공으로서 삼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이기 때문에 비로소 삼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일종의 지적인 유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용수보살이 이러한 논리형식을 벌써 2천여년 전에 고안하여 논증법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놀랄 만하다.
용수의 』중론)의 게송 가운데 이러한 것이 있다. 다음은 한문으로 번역된 용수보살의 』중론) 제24장 (관사제품)의 게송 한 구절이다.

갖가지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법들이기에

나는 그것을 공이라고 말하네.
내가 지금 공이라고 말하는 그것 또한 헛된 이름이니
이것이 또한 중도의 참다운 뜻이다.


이 짤막한 오언절구의 게송 속에 용수가 지향하고자 하는 철학의 근거가 담겨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얹혀져 있다. 인연으로 형성된 것이다.
우리들의 태어남과 죽음을 보아도 그것은 분명하다.
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이라는 결과가 있는 것이다. 원인 없이 이루어진 결과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할 수 없는 성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연에 따라서 생멸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게 된다. 예컨대, 한 번 악행을 저지른 이는 영원히 그 악의 과보를 없앨 수 없다. 또 착한 일을 한 이는 영원히 그 착한 과보가 남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흘러가고 변해가고 있다. 오직 인과 연의 법에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연에 따라 생겨난 모든 것을 용수는 공이라고 하였다. 이 때의 공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허무적멸의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용수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견해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만약에 모든 것이 공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을 공이라고 생각하는 그대의 생각도 공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공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자신이 공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은 공이 아니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공에 집착한 결과이다.
따라서 공의 진실한 의미는 불공과 상응할 수밖에 없다. 공이란 온갖 그릇된 것을 끊었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동시에 갖가지 훌륭한 것들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보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또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 깊은 의미를 '이라고 말한다면, 그 언어에 집착한 것이 되므로 가명, 거짓 이름이라고 우회하여 표현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논증한 바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연으로 이루어져서 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실천적인 의지로써 중도를 표방해야 할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영원성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동시에 이 세상이 영원할 수 없기에 서글프다고 하는 생각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중'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의 참된 의미이다.
공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은 그 공에 집착한 견해일 따름이다. 진실로 공의 의미를 아는 이는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며 진실하다. 한 번 흘러가 버린 것은 다시는 되돌아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중도의 실천적인 의지인 덕이다. 용수는 그 위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용수의 철학은 철저한 공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중'이란 부파 소승불교도들이 빠져 있던 실재론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영원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실재론은 서양철학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실재론은 고대에서 비롯된 키래, 결국은 헤겔의 변증법과 결합됐다.
이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하여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물론 동양에도 실재론적인 견해가 있었다. 이 』중론>은 그러한 실재론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따라서 공은 절대적멸로서의 경지이지, 공이라고 하는 어떤 실재적인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공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어떻게 이 공의 세계에 잠입해 들어가느냐 하는 실천문제만이 남아 있다고 본다.
후대에 많은 사상가들은 용수와 그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중 관학파, 또는 중관철학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용수는 중관의 실천적인 철학에 대해서 달하였기 때문이다. 용수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으뜸가는 제자가 제바였다.

그는 』광백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스승이었던 용수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래서 기원후 3∼4세기 또는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도불교에 있어서 용수의 철학파의 위치는 매우 지대했다. 중국에서는 용수가 저술하였던 』중론5, 』백론) 그리고 제바가 쓴 』광백론B을 포함한 삼론(프35)을 중심으로 한 종파가 형성되었다. 삼론종은 반야의 철학을 중점으로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의 승랑이 삼론종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용수의 중관철학은 대승의 초기 운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용수의 진속원융 이론

용수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중관학파가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의 움직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그의 중관철학의 핵심이 되는 진속원응 이론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무자성, 즉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공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때의 공은 있다,없다라는 상대적인 개념을 벗어난 것이다. 일면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피상적인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말이나 글로써 이 경지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말이나 글과 같은 불완전한 것으로는 이 절대 진여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다.
그 진여의 세계를 용수는 제일의제, 진제라고 하였다. 제일의제란 숫자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공성의 피안, 그 영원한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세상은 철저한 공의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속의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
세속의 세계는 분명히 우리들의 주변에 상존하고 있다.
그리고 세속의 세계에는 분명히 생멸도 있으며 거래도 있다. 그러나 공의 세계에는 생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진 속이 서로 어울려서 이 세계를 이룩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성과 속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다.
진의 세계는 표현될 수 없고, 만져질 수 없고, 도저히 감득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어떻게 의식세계인 세속이 이것에 접근하는가라는 매우 실천적이고 방법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용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하나가 된다는 것,
가운데서 을 구현하고, 가운데서 을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가능해진다. "

예를 들어서 우리들은 이 세속의 기쁨에 탐닉해서는 안된다. 세속의 기쁨은 무엇인가?
부귀, 영화, 출세, 재물 등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허상에 빠져 있다. 그러한 것들이 진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목표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세속적인 것이 삶의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미 부처님도 지적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을지라도 우리의 헛된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비록 이 세속을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는 열반의 세계이다.
용수에 따르자면 의 세계이다. 그 진실한 세계가 있다고 믿고 그곳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어나 가려고 하는 노력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에서 열반을 구현하기 위한 삶의 태도이다.
그러면 그와 반대로 생각해 보자. 공의 세계, 진여의 세계에 안주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오랜 노력끝에 그 세계에 진입했다고 하여, 혼자만이 그 세계 속에 묻혀서 안일과 열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그 열반의 기쁨을 이 세속으로 되돌려야 할 것이다.
즉, 열반에 들었을지라도 세속의 아픔과 세속의 상처, 세속에서 덧없는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중생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속에 있으면서 진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진여의세계에서 세속의 아픔을 잊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진속원응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진속원응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관념적이거나, 혹은 철학적인 이해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진속원응의 이론을 실생활 속에 부영시킬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지녀야 된다.
진속원응의세계는 결코 관념의 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근접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다.
우리들의 이 삶 속에서, 이 생활 속에서 진실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진속원융의 이론이다. 용수보살은 또 팔부중도라는 것을 말한다. 팔부중도란 여러 가지의 그렇지 아니한 중도라는 뜻이다. 진에서 속이 되고, 속에서 진이 되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중도의 방법이다.
이 중도의 여덟 가지의 실천 방법은 모두 다 한번 우리들의 피상적인 것을 부정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공의 경지는 불생불멸, 즉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다.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개인적인 삶에는 생멸이 있다. 몇 년 몇 월에 태어났고, 몇 년 몇 월에 죽는다.
그러나 이 우주를 관통하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으로 보자면 개인적인 생멸은 없다.
나고 죽음과는 상관없이, 또한 나고 죽음을 거듭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이다. 즉, 진여의 세계에서 관조하므로 불생불멸이 된다.
그 다음, 부단불상+이다. 공이란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단이란 끊어져 허무하다는 뜻이고, 상이란 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허무도 아니고 영원도 아니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서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관하도록 하라.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서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나 허무의 견해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는 봄날에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들풀의 모습을 보도록 해주면 생명의 무한한 영원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느 하나의 극단적인 사고에서 보았을 때, 허무하다거나 영원하다는 견해가 생겨날 수 있다.
오직 공의 입장에서 보면 끊어짐도, 영원함도 없다는 것이다.
불일불이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하나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 하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해버릴 위험성이 있다.
또 다르다고 했을 때는 철학에서 말하는 이원론적 편견에 빠져 버리게 된다.
흔히 흑백논리라고도 하는데, 이것과 저것의 상호대립을 없애는 길은 결코 정복적인 자세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비록 선일지라도 정복적인 자세로 악을 눌렀을 경우에는 반드시 반대입장, 불선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악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악이라고 하는 가치판단을 초월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불일불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불거불래이다. 공의 경지는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에 대한 여래라는 칭호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금강경)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 그는어디에 따라서 오는것이 아니다.
또그는 어디로 따는분도 아니다.
어디서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가는 바도 없기에 여래라 한다.

그와 같이 오고, 그와 같이 가기에 여래라고 부를 뿐이다.
부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나라 꼭대기 어디엔가 금빛찬란한 옷을 걸치고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베풀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부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가까이 한다고 질투하는 분노의 화신일까?
그렇지 않다. 부처님이 어느 한곳에 고정적인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무명이다.
이상의 네 가지의 이론을 팔부중도라고 한다.
불생불멸, 생김도 얼고 멸함도 없으며,
부단불상, 허무한 것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니며,
불일불이, 하나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며,
불거불래, 가는 것도 아니요, 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보다 실천적인 용어로는 동체대비라고도 말한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동체대비,
이 세상에서 대립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는 기쁨을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용수보살이 추구하고 있던 일심의 경지,
공의 경지, 진여의 경지이다.


팔부중도에 의한 공의 실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요, 동시에 그 을 향한 단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 의 세계를 체득할 수 있을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수가 말하는 옹·가·중. 삼제의 논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용수의 기본적인 입장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에 대하여 용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이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예컨대 여기 한 떨기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다고 가정을 하자.

그러면 직관에 의해서 그 꽃이 임을 알아야 한다.
그 꽃이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제1단계이다.
아주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괴테가 쓴 '시와 진실'이라는 책이 있다. 그 속에 재미있는 은유가 나온다. 어떤 시인이 들판으로 놀러 나갔다. 그 들판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심취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를 읖었다. "저 아름다운 한떨기 꽃이여." 그러자 꽃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또 흘러내리는 폭포의 물줄기가 아름답다고 느껴서
"저 아름다운 폭포여"라고 말했을 때, 그 폭포가 굳어버렸다. 이렇게 그 시인의 탄성이 가닿는 대상마다 노래 부르는 순간 굳어 버렸다.
그 굳어버린 상태에서 시인과 자연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시인은 묻는다.

"왜 내가 아름다운 꽃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굳어버렸는가?"

꽃이 대답하기를,

"나는 항상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불게 되면 내 잎은 누렇게 변하고 아름답던 꽃잎은 가을바람에 흩날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그 때에도 당신은 나를 보고 '아름다운 꽃이여'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일면성만을 보았습니다. 그 일면성에 집착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말한마디에 화석이 된 것입니다. "

폭포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새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것들이 시인의 이와 같은 노래에 대해서 반발을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극단의 양면성이다. 시인은그 안면성을 볼 수 있는 형안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상적인 것에만 집착하는 것에 대해 시인은 '시와 진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용수의 입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물론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우리들의 젊음도 마찬가지다. 악을 보고서 참지 못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대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어느덧 인생에 황혼이 지고,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서산을 보는 것과 같은 마루턱에 올라서게 된다. 인생이란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긴 것이 아니다.
젊음은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잠시 후면 그들도 그들이 비판했던 기성세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임을 파악해야 된다. 그리하여 그 두번째 단계가 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꽃의 속성이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아름다움에만 정신이 팔린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못된다. 그 양면성을 함께 보아야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의 모습이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이 모습은 거짓이라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잠시 우리들의 눈앞에 아름다움의 인연을 만들어 놓았을 뿐, 언젠가는 아름답지 못한 추한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을 깨달아냐 한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우수를 머금은 그대의 눈동자'라는 시구를 사랑하는 연인에게 바치는 노래에서 읊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나 서정적이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 보자. 여인의 눈동자는 밤낮 그렇게 우수를 머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뒤주에 쌀이 떨어졌다면 그 눈빛이 우수 대신에 성난 고양이의 눈초리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 일면만을 보고 양면성을 고찰하지 못하는가? 그와 마찬가지의 논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하고 있다. 변하는 것 속에서 변하지 않는 실체를 인정하려는 그릇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이 가의 원리이다. 요컨대, 공이기 때문에 가'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상적인 모든 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물질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잘못된 길로 행하는 것이니, 끝내 여래를 볼수 없으리라. 만약 그대가 그대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물들의 헛됨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만 한다면 그대 여래를 볼 수 있으리라.]

금강경1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우리들의 눈앞에는 마치 아지랑이와 같고 신기루와 같은 이러한 환상과 가상들이 펼쳐져 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실재라고 믿고, 이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비탄과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경험하고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라고 깨달을 수 있다면 진실한 세계가 열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까지만 말하고 나면 다분히 허무의 냄새가 짙게 느껴진다.
그래서 용수는 , 그 다음에 의 원리를 말하였던 것이다.
이고 이기 때문에,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되지만, 인 것에도 집착해서도 안된다.
다시말하면, 앞에서 우리들 주변에 있는 양면성에 대해 언급하였듯이, 그 양면성을 모두 벗어날 줄 아는 것이 진실한 의 세계라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하니, 공부를 한다거나, 수도를 하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치 타일러 말하기를,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해서 그렇게 허무론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은 수도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제자는 부처님의 이 말에도 반발하였다.

"부처님,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허무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부처님은 다시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다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그대의 생각도 허무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하면서도 허무하다는 그대의 생각만은 전혀 허무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병이니라."

이에 대하여 용수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병이 들었다고하자. 그러면 병이 든 그 사람은 약을 써서 고칠 수 있다.
훌륭한 의사라면 병외 원인을 알아낸 뒤, 수술을 할 것인지 투약을 할 것인지, 여러 방법을 써서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해 병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병을 고치기 위해서 썼던 약이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도저히 고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은 우리들의 집착을 없애주기 위해 공을 말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진실로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열어보였다. 그러나그 공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집착을 일으킨다면 천불이 출세할지라도 도저히 제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병을 고치기 위한 약이 또다시 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주변에도 이러한 공병 환자가 많다고 생각한다. 매사를 시큰등하게 받아들이며 인생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허비하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일수록 마치 지극한 도라도 깨친듯 이 위선의 모습을 하고 도인을 가장한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세상 모든 멋은 이고 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것만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들의 내생에서는 업보에 따라 우리들의 생존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적어도 지금 우리들이 누리는 삶은 일회적이다.
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악연을 맺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가능하면 나와 내 주변을 선한 인연으로 가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출처/ 불교방송>정병조 교수의 불교입문강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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