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진공묘유(眞空妙有)

수선님 2020. 5. 3. 12:02

진공묘유(眞空妙有)

 

 

1 () 개념의 등장

‘공()’이라는 용어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sunya’라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라는 용어는 공한 것, 공성(空性),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공은 ‘부풀어 오른 모양으로 속이 비어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빌 공()’자로 번역한 것이다.그러나 이 ‘공()’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공()’의 개념은 특수하다. 공사상(空思想)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함으로써 붓다의 기본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 핵심사상이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철학사상이라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그리고 공은 인연(因緣)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은 용수(龍樹,나가르주나/Nagarjuna, 150?-250?)이다.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교리의 해석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서 점차 교파가 분열되기 시작함으로써 부파불교시대가 시작됐다. 그리고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인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 등장해 번쇄한 논장이 무성하게 발전했고, 윤회에 있어서는 중심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혼란스럽게 여겼다. 그에 따라 불멸 후 300년경에 이르자 초기불교에 있어서 주류사상을 이루었던 무아론(無我論)은 차츰 세력을 잃어가는 한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犢子部)에선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서 개아(個我, 人相,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이러한 부파불교 아비달마교학의 잘못된 교의에 반기를 든 사람이 중관학파의 개조 용수(龍樹)이다. 그는 그의 명저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통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반야경> 계통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부파불교의 법체설이나 개아설을 뒤집었다. 용수는 법체(法體)나 개체(個體), 이런 말은 모두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아체(我體)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자성(自性)이란 존재할 수 없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 - ()」이라고 주장했다.

, ()은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법체설(法體說)과 독자부의 개아설(個我說,pudgala) 등 유아론(有我論)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용어이다. 부파불교에서 주장한 체성(體性)을 공격하기 위해 공()이란 말을 썼고, 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dravya), ‘자아(自我,atman)’등과 같이 개개 인간의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제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공이란 말을 썼다.그리고 불교경전을 보면 공()이란 말은 심(),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 등 여러 가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공()이란 마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알음알이로 이해하려면 힘들다. 더구나 불교의 ‘공()’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체득해야 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범부는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문자로 어느 정도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중생들의 속성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범부들의 중생다운 행위이다.


2. 진공묘유(眞空妙有)

()을 이해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 그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비어있다는 말이라는 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없다」는 말은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고, ‘공()’은 본래부터 없는(비어 있는) 것이며, 고정된 주체(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세상사는 채울 때 보다 비워야 할 때가 더 많다. 따라서 잘 비워야 한다. 잔은 비울수록 여유가 있다. 잔은 채울 때보다 비울 때가 더 아름답다. 따라서 어물어물하지 말고 텅 비우면 오묘한 일이 일어난다.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고, 바르게 비우면 그냥 텅 빈 것이 아니라, 비어 있어 가득 차니, 이를 일러 텅 빈 충만, 곧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7색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도자기로 된 용기에 모래가 담겨있다면 모래그릇이 되고, 그 용기를 비워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며, 물을 부으면 물그릇이 된다., 나를 비우는 것은 보다 바른 것을 채우기 위한 선행 작업이며,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팔정도를 채우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절대적인 공()일수록 그 속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으므로 이를 두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허공[]의 무한한 가능성[]은 어떠한 상황[;조건]을 만나면 사물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인연법, 연기법이라 하고, 전체적으로는, 원인[]이 조건[]을 만나면 무엇을 만들어 내고[], 만들어 진 것[]은 업()으로서 남게 되며, ()은 다시 새로운 인()과 연()을 만들게 돼 또 다른 업()을 남기는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윤회(輪廻)].

이와 같아서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며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한다. 그리하여 없는 듯 있는 진공묘유가 오히려 산스크리트 원어 ‘sunya'의 참뜻에 더 가깝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을 근원으로 해 존재하는 절대 진리를 말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이자, 자성(自性)을 말한다..

진공(眞空)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묘하게도 존재하나니[묘유(妙有)],이것이 진공묘유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 진공묘유는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불변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성립하는 현상을 말한다. 완전한 공은 단순한 허무가 아니라, 만물이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모습 자체가 바로 공을 의미한다. 공의 그러한 형성작용을 진공묘유라 한다. 그래서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다.’라고 표현한다.


3.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성격

우리는 보통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무()를 존재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생각한 것이다. 예컨대, 쟁반 위에 사과가 몇 개 있다고 하자, 그것을 다 먹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 게 우리가 생각하는 무()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우주의 허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묘한 무엇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셨고 그것을 공()이라 했다.

이와 같이 공()은 존재를 무화(無化)시킴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이다. 공의 세계가 색()의 세계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공이 색을 포함하고도 남을 수 있겠는가.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 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라는 말은 무()와 다른 개념이고, 형상과 구분되는 말이다. 형상은 마음과 사물이 만나서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공이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말한다.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표현한다. 진실로 공한 가운데 묘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있는 것 같은데 없고, 없는 것 같은데 있다.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 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이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 중에서


위 법정(法頂,1932~2010) 스님의 글 중에서 「텅 비울 때」가 바로 진공(眞空)이고,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말이 묘유(妙有)이다. 참다운 비움으로부터 불가사의한 존재, 묘유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없음(실체 없음)’이 없이는 무위(無爲)도 없고 참된 존재도 없다. 참 존재는 ‘없는 상태’로부터 나온다는 말이고, ‘없음’이야 말로 거기에서 모든 것을 나타내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없음’이란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음’과 ‘실체 없음’을 의미한다.

거울이 만물을 비춰도 빛을 어지럽히지 않고, 새가 공중을 날아도 하늘을 더럽히지 않는다. 비유비무(非有非無)역유역무(亦有亦無) 불생불멸(不生不滅) 역생역멸(亦生亦滅)이라, 양 극단에 집착하지도 않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참된 무위(無爲)를 논할진댄 곧 유위(有爲)도 취하지 아니하고 무위(無爲)도 취하지 아니함이 참된 무위법(無爲法)이니라.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입장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이니까 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보는 것이다. ()은 현상인데, 색은 말하자면 밀가루인데, 밀가루가 빵도 되고,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고, 범벅도 된다. 그런데 이게 전부 인연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현상은 무자성(無自性)이다. 곧 스스로의 본성이 없고 인연에 의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현상에는 관심을 안 갖는 것이 대승불교, 특히 중관학파의 입장이다.

마누라는 어떻게 해서 마누라가 되는가. 남편 때문에 마누라가 되는 것이다. 남편은 어째서 남편이 되는가. 역시 아내 때문에 남편이 되는 것이다. 부부(夫婦)란 이렇게 의지해서 연기된 관계로 이루어진 일심동체이다. 그래서 ‘부부’란 이와 같이 의지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무자성이다. 그런데 살뜰한 부부가 이혼을 했다고 상상해보자, 남는 게 무엇이 있는가. 이처럼 부부란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 현상관이고 세계관이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것의 실체가 아니고, 저것은 저것의 실체가 아니다. 이게 공()이라는 것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죽음을 떠나서 삶의 실체가 없고, 삶을 떠나서 죽음의 실체가 없다. 그러니까 그 실체가 없다. 이 게 바로 공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이란 것에 비유해 보자. 사람마다 ‘생각’이란 게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므로 - 있다가도 없어지므로 그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공은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비어있어, 실체가 없어, 공이라 하는 것이다.실체가 없다는 것은 무자성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체의 집착과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 어떤 상()도 여윈 자리는 분명 공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인연이 닿으면 바로 작용을 한다. 이를 묘유라고 한다. 마음에 따라 진공의 본래 자리에 머물 수도 있지만 무명에 의한 탐() () ()와 분별심이 번뇌를 만들어내고 윤회를 만들어낸다. 시비(是非)호오(好惡) 장단(長短) 선악(善惡)… 등 갖가지 분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도(中道)라고 하는 사유방식이 필요하다. 중도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운데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쪽에도 머물지 않는 상태를 중도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견해 중 이분법적 논리를 변견(邊見)이라 한다. 예를 들면, 공간은 무한하다 또는 유한하다, 나와 너, 선과 악, 이와 같이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서 단정하는 것을 변견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논리의 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중도사상이다. 중도(中道)에서의 ‘중()’자는 ‘가운데’라는 말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라는 뜻으로 바를 ‘정()’자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중()’은 무자성(無自性)과 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용수의 저서 <중론>의 중심사상은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으로 귀결되는데,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공은 유 ? 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中道)를 지향하고 있다. ,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이 중도이다. 따라서 ‘중도’ 앞에서는 우매한 중생들이 항상 끄달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많다 적다고 하는 등의 온갖 분별이 봄 눈 녹듯 없어진다. 따라서 중도의 완성은 불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도가 곧 진공묘유인 것이다.



*유식학(唯識學)의 입장

유식학(唯識學)은 중관학파(中觀學派) 불교에 이어 등장해 대승불교 양대 산맥을 형성한다. 그리고 유식불교는 마음[유식(唯識)]을 강조하고 그것이 움직이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유식불교는 아뢰야식에 공으로서 깨끗한 부분이 존재하며,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공하지만 그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불성(佛性)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불성이 곧 자성의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그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공의 움직임, 그것이 활공(活空)이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했다. 따라서 유식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을 인정했다. 이점이 중관불교와의 차이점이다. 중관불교에서는 「무자성(無自性)-()」이라 한 데에 비해 유식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의 입장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윤회의 뿌리를 제거하려면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근본마음[근본식(根本識)]인 아뢰야식을 공으로 비워야 한다. 아뢰야식이 공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마음이 청정해지고, 그 깨끗한 마음은 살아 움직이는 진공묘유의 활공이 돼 걸림이 없는 대자유의 바다와 같은 마음이 된다. 따라서 마음을 비우라고 한 것도 마음을 비우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나 자신은 물론이요, 주변의 모든 것에 분별없이 없어지고, 모두가 한 마음의 바다에서 하나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진공묘유란 본래의 성품인 참마음을 뜻한다. 마음에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인식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를 참마음, 즉 진공이라 하는데, 보고 듣는 작용이 텅 빈 가운데 묘하게 있음으로 이를 진공묘유라 한다. 그러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는 근본이 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그 지혜이며 활용이라 할 것이다.

범부중생은 동일한 상황 동일한 물건을 보고도 어떤 이는 슬퍼하고 어떤 이는 기뻐하기도 하니 이 모두가 마음의 장난이다. 부처를 이루느냐 중생으로 있느냐 하는 것 역시 마음에 달려 있다. 좋고 나쁨,내 편 네 편, 승패와 같이 좌우를 구별하는 이분법적 차별현상이란 게 모두 마음작용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범부중생은 제각각 다르게 알고 다르게 경험한다. 우리가 동일한 사건이나 동일한 대상조차 서로 다르게 알고 다르게 경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아의식의 마음작용 때문이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일체를 만들고 이룬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唯識學)에서의 주장은 오로지 식(-마음) 뿐이고, 모든 현상은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모든 차별현상 일체는 오직 인식하는 마음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마음의 투영인 표상(表像)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대금연주자가 연주를 하면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를 듣던 어떤 사람이 황홀함을 느껴서 그 소리를 가져오라고 한다. 사람들이 대금과 연주자를 데리고 왔다. 이를 본 그 사람이 “아까 그 황홀했던 그 소리를 가져오란 말이야.”라고 한다면 무어라 해야 할까? 연주자와 악기를 떠나서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기라는 인()과 연주자라는 연()이 만나서 소리가 난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인연 따라 일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용을 한다. 이러한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눈물짓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마음의 위안을 얻기도 하고, 옛 생각을 떠올리거나 향수에 젖기도 한다. 소리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같이 사람들의 심금을 뒤흔드는 작용은 분명히 있다.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공()은 지식체계를 부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근거하고 있는 지식체계가 근본적인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사상에 의해 무너지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유식학에서는 객관(客觀)이 아닌 직관(直觀)의 신통함을 강조한다.


먼저 우리의 지식체계를 살펴보자. 지식체계 중에서 인식은 “보는(인식하는) 놈인 주체가 있고, 보이는(인식하는) 대상인 객관이 있고, 그 사이에 본다는(인식하는) 작용이 있다.”이런 세 가지에 의해서 인식이 성립된다. 이러한 인식의 구조, 즉 분석적인 사고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이 이러한 인식구조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학이나 철학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자체도 또한 이러한 인식구조를 바탕으로 영위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의 인식방법은「유식(唯識)- 직관(直觀)」의 인식구조이다. 유식(唯識)은 말 그대로‘다만 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식에는 인식의 주체도 없고, 인식의 대상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작용하는 인식작용도 없다. - 오로지 ‘앎(마음)’이 - 직관(直觀)이 있을 뿐이란 말이다.유식(唯識)에서의 앎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작용하는 인식과는 다르다. 대상도 주체도 없는 가운데 다만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한다. 주체로 보면 참으로 공한데, 그 가운데 앎이라는 작용이 일어나니 신통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도 한다. 주체가 텅 비어 공적한데, 신령스러운 앎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유식(唯識)을 좀 더 간단하게 표현한 말이 공()이다. 이 둘은 같은 뜻이다. 보는 놈도 보이는 대상도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그렇게 주체가 공한 가운데 온갖 앎(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한다. 또한 이렇게 주체도 객체도 따로 없는 가운데 다만 신령스러운 앎(마음)이 일어나는 이러한 모습을 일심법계(一心法界)라 표현하기도 한다. 너와 내가 없는, 한 마음뿐인 참다운 세계라는 뜻이다.


* 선불교(禪佛敎)의 입장

특히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일체만상을 찰나생멸하는 존재로 파악해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보면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인데, 그 가운데 진공묘유가 있다고 한다.

〈금강경> 게송에,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다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할지니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하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그리고 이슬과 번갯불의 공통점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일순간에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 생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섬진강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섬진강은 시시각각으로 흘러가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나날이 다르며, 아침저녁으로도 달라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의 섬진강을 딱 잘라내어 ‘이것이 섬진강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순간만을 섬진강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순간 이외의 섬진강은 섬진강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고정된 실체로서의 섬진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섬진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섬진강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섬진강은 분명히 존재한다. 고정된 실체는 아니지만 현상으로서의 섬진강은 존재한다. 존재하면서 작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많은 물고기를 갈무리하고 있으며, 토사를 운반하면서 흘러내려가고 있다.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선가(禪家)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나라시대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마곡 보철(麻谷寶徹)선사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데, 스님은 어째서 부채질을 하고 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바람의 본질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아는지 몰라도,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치는 모르고 있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사는 아무 말 없이 부채질을 계속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에 떨어진 것이다. 더위는 본래 없다. 그러나 더운 현상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부채질을 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찰라지만, 부채질을 떠나서 바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잠깐이나마 공기가 부채질을 만나야 바람이 인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기 때문에 그 안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분명히 현상으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 찰나생멸 하지만 현상으로서는 존재하고 있는 - 진공묘유 하는 세상의 모습, 서양의 과학자들도 찰나생명 하는 세상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정체를 알고 싶어 했다.


4. 과학으로서의 진공묘유(眞空妙有)

그리하여 그들은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 소립자(素粒子)도 쪼갠 결과 결국 발견한 것은 물리적 진공(物理的眞空)이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물질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발표하고, 이어서, “우주의 궁극은 무형의 생명에너지, 물리적 진공이며, 이 진공(장 에너지)이 인연에 따라 형상을 지어 파생된 것이 물질의 세상이다.”라고 해서 양자물리학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물리적 진공’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물리학 고유의 연구방법인‘논리’적인 사유로는 한 치도 전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진공(物理的眞空)과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으로 과학은 더 이상 자신만의 아성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이제 과학은 철학, 종교와 더불어 겸허히 손을 잡고 정신, 물질 일원론으로 나아가야 하게 된 것이다. 물리적 진공, 물질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정신도 아닌 것이… 입자도 아닌 것이 파동도 아닌 것이…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닌, 이것이 진공묘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 만상(모든 존재)에 본래 갖추어져있는 본성(本性)을 말하며, 이것은 불생불멸이고 항상 한 것이다. 공은 형상(모양)이 없는 일종의 에너지로 온 우주에 조금의 빈틈도 없이 가득하고, 대상(인연)을 만나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그 실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주만상은 공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공묘유라 한다.

이것을 양자물리학으로 살펴본다면, 공의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 소립자(素粒子)는 우주만상을 이루고 있는 근본물질이며, 소립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소립자는 평상시에는 파동(波動)의 성질을 지니고 전 공간에 퍼져있으나 ‘관찰자’라는 대상을 만나면 파동의 성질은 붕괴되고 입자(粒子)의 성질로 바뀌면서 모양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공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에너지로서 대상을 통해서 그 모양을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상을 만나지 않으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으나 스스로 그 모양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바다 속에 지능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하자. 바다 속에 있는 한 이 물고기는 바닷물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텅 빈 공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다 속 물고기는 바다에서 생겨나서 평생을 바다에서 살다가 죽으면 바다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자기가 생겨난 바다를 모르듯이 우리 인간도 역시 물고기처럼 자기가 태어난 곳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며 역시 자기가 인연이 다해 죽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


이것이 디랙(P. A. M. Dirac)의 상대론적 양자역학(相對論的量子力學, relativistic quantum mechanics)의 세계상, 즉 현대물리학의 진공개념에 대한 물고기의 비유 예이다. 소립자의 파동은 전 우주 공간에 걸쳐 있어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것은 어떤 숨은 변수가 있어 양자입자에 영향을 미치며, 이 숨은 변수들은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을“비국소성(non-locality)”이라고 불렀다. 비국소성이론(非局所性理論)에서는 입자들은 하나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이 거리와 상관없이 빛보다 빨리 동시적으로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우주의 한 끝에 있는 입자의 속성을 변화시켰을 때 그 입자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다른 입자의 속성도 역시 동시적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현대물리학이 파악하고 있는 진공이란 ‘허무 단명’의 공이 아니고 묘유(妙有)하는 공이다. 진공묘유이다. 물고기의 비유는 현대물리학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닷물과 파도의 비유이다. 바닷물이 잔잔해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다면 이는 공의 상태에 해당된다. 그 바다에 바람이 불어 풍랑이 일게 된다면 풍랑이라는 색이 나타나게 된다. 고요한 바다에 바람이라는 에너지가 들어가서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게 되지만 단지 그것뿐 풍랑이 이는 바다도 역시 바다이다. 풍랑이라는 형상이 나타나더라도 바다라는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이를 <금강경>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자. 수미산(須彌山)과 같이 큰 파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한한 색의 제한을 가지고 있는 한, 바다라는 성품 자체와 그 크기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보리 존자는 ‘불설비신 시명대신(佛說非身 是明大身)’이라고 대답했다. 공성(空性)의 바다는 색상의 파도를 언제나 그 안에 포함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지만 연기에 의해 잠시 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공()은 모든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는 인연에 의해 잠시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은 그 공 가운데 가유(假有)하는 것을 똑바로 알아 그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나 현실로는 없지 아니하니,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어, 진공묘유(眞空妙有)한 것이므로 중도라 한다고 했다. - 양형진 교수


5. 맺는 말

오늘날 과학의 발달로 우주에 가득한 허공은 일정한 굴곡을 가지고 있어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는 것도 이 모양을 따라서 돌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곳(Black Hole)이 우주 곳곳에 산재해 있어 그곳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최초 우주의 탄생도,150억 년 전에 허공(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우주) 10의 마이너스 33cm의 크기로 축소됐다가 대폭발(Big Bang)을 일으켜 확장되면서 만물이 생겨나서, 오늘의 지구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은하계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을 일으켜 새로운 은하계가 만들어 지고 있으며, 우주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주는 허공의 폭발이라는 인()이 연()을 만나서 없어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는 것을 반복(윤회)하고 있다.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 가져와서 살펴보면, 현재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공묘유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일체는 인연에 따라 만났다가 인연 따라 흩어지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일체사물은 말할 나위가 없고 육신과 생각들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일체는 실체가 없으니 이를 공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지구는 지금도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고,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 한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고, 남해에는 푸른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실체는 없는 것이로되 눈앞에 펼쳐져 있어, 이를 묘유(妙有)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물리학이 말하는 진공(Vacume)은 이제 더 이상 진공이 아니다. 절대 허무로서의 없음이 아니라, 진공은 가득 찬 것으로서의 진공이다. , 텅 빈 가운데 가득 찬 그 무엇이 진공인데, 이것이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진공관을 맨 먼저 언급한 사람이 20세기의 물리학자 폴 디락(Dirac)이다. 디락은 그의 방정식을 통해 현상계의 입자에 상응하는 반입자(反粒子)가 존재하며, 그 반입자들로 진공이 가득 채워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디락의 주장은 처음에는 학자들에 의해 비웃음의 대상이었으나, 그의 주장은 일 년 후 실제로 증명이 됐다. 실제로 전자의 반입자(反粒子)로서의 양전자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디락의 주장은 그 후 더욱 발전돼 양자장론(量子場論, quantum field theory)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진공 속에는 쌍으로 된 입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쌍의 입자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진공 속의 생성과 소멸의 쌍입자들은 끊임없이 현상계의 전자와 같은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호작용은 불교로 말하면 연기(緣起)이기도 하다. 이렇게 최신의 현대물리학에서는 우리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진공이 기실은 온갖 종류의 입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득 찬 입자들이 부단히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현대물리학의 진공과 입자들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공묘유와 같다. 무한대의 숫자들로서의 진공묘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단지 감각에 의해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 청광

부처님께서 진리의 참 모습을 깨닫고 보니 진리의 참 모습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이라 하셨다. 즉 있음의 변()도 아니고 없음의 변()도 아니면서 또한 양변을 아우르므로 이것을 치우침이 없는 것 즉 중도(中道)라 한다. 불성(佛性)은 있음과 없음에 얽매이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다. ,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佛性非有非無亦有亦無有無合故名爲中道)니라.” 그리고 이게 진공묘유라 하셨다.

언뜻 생각하면 공()과 유()는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공(眞空)이 아니면 묘유(妙有)일 수 없고, 묘유가 아니면 진공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공 즉 묘유이고, 묘유 즉 진공이며, 진공과 묘유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완전한 합일이므로 이것이 즉()함의 뜻이다. 색과 공이 즉함과 같다. 그래서 〈열반경〉에 ‘이 마음자리는 밝고 밝아서 아는 것도 없고 알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한다. 무릇 불법의 근본은 진공묘유에 있으며 화엄법계연기(華嚴法界緣起)도 그 근원을 역시 여기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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