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에 대해
공(空), 중도, 무시무종, 무아, 이들은 모두 연기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들이다.
연기의 인과를 일컬어 공이라 하고 연기의 존재를 일컬어 무아라 하며 공의 모습을 일컬어 무시무종이라 하고 무아의 모습을 일컬어 중도라 한다.
영어로 공을 번역할 때 emptiness라고 하는데, 이는 힌두적 번역일 뿐 불교적 번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어있음은 공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어서 이것과 저것이 상즉 상의하는 연기의 인과법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공을 해석하는데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공을 불성의 차원에서 해석하여 만물을 현현하게 하는 비어있는 실체로 해석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그러나 공이 불성의 세계(연기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질료로서의 불성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해서는 곤란하다.
연기의 질료를 개념화하는 것은 힌두교의 브라만과 같이 현상세계와 대비되는 궁극적 실체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우주 자체의 본질을 브라만이라 한다.
현상하는 만물에서 브라만은 내재(內在)의 개념이다.
브라만이 천지를 창조하고 그 자신은 만물의 본질로 내재하였다는 것이 힌두의 주장이다.
브라만이 만물에 내재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아뜨만이다.
그래서 힌두에서는 현상의 껍데기를 벗고 진아, 참 나를 찾는 것이 수행의 방식이다.
그러나 불교는 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세계가 곧 불성의 세계라고 보는 것이 불교이다.
즉, 힌두에서는 현상에 아뜨만이 내재하지만 불교에서는 현상 자체가 불성이다.
그래서 힌두에서는 브라만의 인과법(해탈, 비어있음, 무위의 법)과 업 윤회의 인과법(유위의 인과법) 두 가지가 있지만 불교에서는 오직 연기의 인과법만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연기법은 제쳐두고 윤회의 인연법과 불성의 무위법을 만들어 힌두 따라하기에만 급급하다.
불법인 연기법을 논하면서 연기 질료(본체, 실체)의 성품을 언급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절대 금하는 것이 옳다.
만일 연기 외에 불성의 성품을 따로 언급하게 되면 이는 형식과 질료를 나누어 보는 힌두적 방식이 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식과 질료를 하나로 보는 것이라면, 불성은 바로 연기일 수밖에 없다.
현상세계가 곧 불성의 세계이기에 불성은 곧 현상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성이라는 것을 연기라는 존재형식과 따로 생각한다면, 이는 곧 내재의 개념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현 불교계에서 불성 혹은 견성을 언급하고 또 전파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성품을 보는 것은 현상세계의 연기를 보는 것이지, 연기를 이루는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붓다는 연기를 보라고 말씀하셨고 경전에서도 곳곳에서 본질의 형상화나 개념화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경계하여도 무어라 형용할 수 없다는 등의 본체 개념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작금의 불교 현실이다.
부처의 성품은 연기에 있는 것이지 비어있음이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적정 또한 연기의 지혜가 충만함으로 인한 마음의 평화이지, 어떤 실체적 차원의 상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부처의 성품은 어떤 것인가?
오욕칠정의 갖가지 분별들이 부처의 성품인가?
아니다. 오욕칠정의 분별들은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 기인한 망상의 관념일 뿐이다.
부처의 성품은 무시무종, 중도, 연기, 무아, 무상, 공이다.
그리고 이들은 현상세계의 실상을 가리키는 다양한 이름들일 뿐이다.
현상세계는 조건으로부터 일어선다.
존재도 조건으로부터 성립하고 인식의 현상도 조건으로부터 성립한다.
조건으로부터 성립하기에 이들에게는 상주하는 아(我)가 없다.
상주하는 아가 없기에 개별존재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모든 존재는 유(有) 혹은 무(無)라는 존재론적 관념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유무의 이분법적 분별을 중지한 분별, 이를 가리켜 중도라고 한다.
조건에 의존하는 현상들은 인과(因果)가 유한하지 않다.
조건들은 또 다른 조건들에 연속하고 전체는 부분으로, 부분은 전체로 순환한다.
말하자면 조건들의 인과적 연결은 무한적 순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아침에 날씨가 흐려 앞 차를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내었다고 하자.
교통사고의 원인과 교통사고로 인한 결과를 어찌 유한한 범위로 제한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인식의 대상들이 모두 의존적 타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상에게로 향한 인과의 허물은 곧 자신에게도 나누어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 대상들 모두는 상주하는 아가 없는 ‘조건의존적 존재’들일 뿐이다.
즉, 유한한 범위의 인과는 실제가 아니라 의식이 방편적으로 행하는 관념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는 유한의 범위가 없는 인과인 것이다.
유한의 범위가 없는 인과, 이를 가리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한다.
공(空)이라는 개념은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본격화된다.
출가 수행자 중심의 상좌부 불교가 육사외도들이나 행하던 아공법유적 방식으로 불교의 인연법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 대중부가 반발하면서 제시한 것이 공이다.
아비담마 불교로 이어지는 상좌부 불교는 현상을 이루는 질료들로 72부수 혹은 82부수의 근본법들을 상정하고 이들의 이합집산으로서 인연과 연기를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당연히 현상의 존재들은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아공법유적 해석으로 귀결한다.
이에 대중부는 근본법은 물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상(相)들을 깨기 위하여 공을 들고 나온다.
즉, 공이라는 개념의 실체는 ‘있다’라는 관념들을 깨기 위한 방법적 도구였던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무아, 공, 무시무종, 중도 등은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채용된 방편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연기를 표현하는 언어들이지만 각자 나름으로는 보다 심화된 의미를 가진다.
공이 세상 및 존재의 인과(因果) 실상을 적시하는 표현이라면 무시무종은 인과의 내용을 설명하는 말이다.
무아가 존재의 존재 형식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중도는 존재의 실천 지침을 나타낸다.
연기의 세상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위해야 하는지를 적시한 실천 지침이 바로 중도인 것이다.
불법의 모든 주요한 용어들은 연기를 나타내기 위한 언어적 방편들일 뿐이며, 연기는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 존재들의 실상이다.
그리고 연기는 현실에서 드러나는 부처의 성품인 것이다.
다만 인간이 무지한 존재론적 관념에 빠져서는 부처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불법이 이렇듯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현상초월적인 불성, 진아, 참나, 공 등을 실체론적으로 언급하며 불교를 힌두교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질료로서의 불성을 따로 생각하지 말라.
자칫 힌두 귀신의 놀음에 놀아나는 꼴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어찌 보면 힌두적 성향은 대승불교라 자칭하는 북방 불교에서 더욱 심한 것일 수도 있다.
유식을 비롯한 선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를 강조한다.
모든 것은 마음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가 지나쳐 현실마저도 꿈이나 환, 허상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꿈을 벗어나는 길은 공의 본래면목을 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현실을 비실유, 공을 실유로 만드는 발상이다.
그러나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것은 의존성을 말하는 연기법에 비추어도 옳지 않다.
일체유심조는 모든 것이 인식에서 일어나므로 자신의 수행을 위하여 마음을 수련하라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세계의 실제는 상의성의 원리이다.
마음만으로는 일어날 것이 없다.
세계의 작용력이 있기에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행의 방편인 일체유심조를 세계의 실제로 받아들여 현실의 연기세계를 꿈, 허상으로 설법하는 수행자들과 그 설법을 불법으로 간직하는 신자들의 모습은 힌두교와 조금도 틀림이 없다.
<출처 : '연기론 - 인식의 혁명'(신용국 저, 하늘북, 2009년), p161~166>
(http://cafe.daum.net/mahabuddhism 참조)
[출처] [공유] 공空에 대해|작성자 관문
'법문과 수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로움의 종류 (2) - 노고老苦 (0) | 2020.05.17 |
---|---|
진공묘유(眞空妙有) (0) | 2020.05.03 |
제행무상의 의미 (0) | 2020.04.05 |
懷疑論(회의론)의 克服(극복)과 12處說(처설)의 가르침 1 (0) | 2020.04.05 |
최봉수교수 1-2강 요점정리 (0) | 2020.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