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독일낭만주의의 불교수용에 관한 고찰

수선님 2020. 5. 17. 11:16

독일낭만주의의 불교수용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Buddhism Acceptance

of Romanticism in Germany

주 현 철*

목차

I, 서론

II. 독일에서의 불교사상연구

III. 쇼펜하우어와 불교

IV. 결 론

참고 문헌

I. 서 론

낭만주의자들이 인도(印度)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헤르더의 영향이 크며, 낭만주의의 인도정신에 대한 동경이 절정에 달하게 된 것은, 독일인과 인도인의 타고난 낭만적 기질과 공통된 문학적 방법 낭만주의와 인도정신의 비합리적인 경향에 기인한다. 낭만주의자 노발리스는 무한세계의 추구로 말미암아 인도를 동경했으며, 인도에서 낭만적 꿈과 이상 그리고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동화의 세계를 발견했다. 또한 인도에서 최고의 낭만성을 구하고자 했던 F. 슐레겔은 인도연구의 결실로써 ≪인도인의 언어와 지혜에 대해서≫를 저술하였다. 그는 인도를 인간정신의 근원지로 인식하고 그 본질을 밝히

려고 노력하였다. 비록 카톨릭적 경향으로 그의 연구가 여러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는 인도언어와 서양언어의 동족관계를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유출설과 윤회설에 근거하여 인도의 사유체계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인도학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렇게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동양이란 인도가 그 중심이며, 구체적으로는 브라만적 인도였다.

이에 비하면 낭만주의자들과 동시대 철학자 쇼펜하우어나는 현저하게 불교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는 평생동안 불교연구에 몰두하여 서양에서 근대불교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우고 있다. 그는 처음에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우파니샤드사상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다시 말해서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사상을 접하면서 인도종교를 알게 되었고, 인도정신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불교를 연구 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인도정신에 대한 연구의 동기는 동양학자로서 독일에서 베단타사상에 대해 강의를 했던 마이어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글에서 쇼펜하우어의 불교수용 문제를 다루는 것이 논의의 촛점이다. 그러나 아직 불교가 서양에 전달된 경로와 서양에서의 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과정을 밝혀야 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은 쇼펜하우어와 불교문학작품을 창작했던 독일작가들의 불교수용 동기와 방향, 그리고 불교이해의 정도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의 불교영향과 연구상황 그리고 독일작가들에 의해 창작된 불교문학작품에 대해서 고찰한 부분들은 아주 개론적인 내용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여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또 서양에서 불교연구나 불교문학작품의 창작상황을 낭만주의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이 시기를 전후한 연구상황을 밝힌 것도 이러한 점을 참작한 것임을 밝혀둔다.

Ⅱ. 독일에서의 불교사상연구

B.C. 543∼463년 경에 이르러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 사상을 무시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수많은 자유사상가가 배출되었으나 시대적 요구에 부흥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돈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자각(大自覺)을 얻어 진리의 가르침을 편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붇다(Buddha)이며, 그 진리의 종교가 불교이다. 그렇다고 이전의 브라만교와 완전한 단절속에서 불교가 태동한 것은 아니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불다의 교리, 용어, 사고방식, 개념 행위에는 특히 새로운 것은 별로 없다. 고행자와 고행집단이 있었고, 교단생활의 수행이 있었다. 숲속에 은둔하는 자는 어느 계급출신이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출신성분의 여하에 관계없이 성자로 인정되었다. 지각에 의한 해탈도 이미 있었고, 명상의 제단계인 요가(명상단계의 수행방법)도 있었다. 우주관과 세상의 연륜, 신의 세계관도 벌써부터 있었다. 붇다는 의심없이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계속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초월성에 근거한 인도적 생활방식의 완성, 인도철학의 결산의 역할을 다한다." 실제로 붇다의 가르침은 사상적으로는 비브라만 계통이지만 브라만교의 장점을 그대로 도입하여 중도적인 입장에 서서 신성한 교리로써 전수했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전통이던 카스트제도를 타파하여 천민도 성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으며, 우파니샤드에서 진정한 자아의 존재를 깨달음으로써 해탈할 수 있는데 반해 불교에서는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해탈할 수 있다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가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의 저서다. 그는 B.C. 300년경 사절의 한 사람으로서 인도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를 방문한 바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그 저서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많은 그리이스와 라틴계 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참고했다. 인도로 이주해 온 희랍인들은 주로 인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야바나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태어난 희랍의 왕인 메난드로스(Menandros)와 불교의 학승 나가세나(Nagasena)사이에 불교 교리의 문답형식인≪미린다팡하(Milindapa ha)≫라는 경전이 현존한다. 이 경전은 B.C. 15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팔리어(Pali) 경전에 속한다. 지혜, 번뇌, 윤회, 업, 출가와 재가, 교단, 내세 등 광범위한 내용의 문답은 그 당시 동·서 사회의 가치관이나 종교관을 비교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메난드로스왕 뿐만 아니라 많은 희랍인들은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또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A.D. 2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붇다의 교리를 따르며 그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도인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또 히로니무스(Hieronymus, A.D.347∼419 ?)는 붇다의 탄생에 대해 묘사하고 있지만 그 후 기독교의 영향으로 몇 백 년간 불교에 대한 뚜렷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가 1271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출발해서 1296년 귀국할 때까지 26년 동안 동양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을 ≪동방견문록≫에 담고 있다. 그는 인도에 가면 값진 향료와 금은보화가 가득 하다고 전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 인도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동경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풍습과 종교, 특히 불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인도정신 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환상과 꿈을 따라 인도로 향하게 했다. 이렇게 서양인들이 동양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 동기는 마르크 폴로의 덕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후 인도로 향하는 상인, 여행자, 선교사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선교사들의 여행기는 서양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선교사들의 저술로부터 얻어진 정보와는 별도로 많은 성담을 담고 있는 아주 인기가 높았던 저서는 1365년 존 맨더빌(John Mandeville)의 ≪항해기(Voyages)≫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서양어로 번역되어 사본만도 약 300 종류에 달하고 있으며, 1470년경부터 1800년대 말까지 22판이나 출판되었다. 또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1497년에서 1498년에 걸쳐 인도를 항해함으로써 서양과 동양사이의 역사적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으며, 16세기에는 선교사들이 중국, 일본, 스리랑카, 인도 차이나 등 동양의 여러나라를 방문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교에 대한 정보를 서양에 제공했다. 그러나 여기서 16∼18세기에 나온 선교사들의 보고나 저서를 상세히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기간 동안에 출판된 내용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지도 문제지만 서양 자체내에서도 그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믿을 만한 인도불교에 대한 저술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25년 이후부터다. 독일인 크라프로트가 1823년에 쓴 ≪붇다의 생애(La Vie de Buddha)≫가 있지만 대단히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 뷔르누와 독일학자 라쎈이 1826년에 출판한≪팔리어에 관한 試論(L'Essai sur le pali)≫은 스리랑카 불전에 대한 연구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로부터 약 10년후 영국의 네팔 주재원이었던 하지슨(Hodgson)이 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해 준 많은 양의 산스크리트 대승경전의 필사본들을 런던과 파리에 보내왔다. 몇몇 인도학 학자들은 곧 그것을 번역하기 시작했고 뷔르누는 1844년 ≪인도불교사 서설(Introduction l'histoire du Bouddhisme indien≫을 출판하여 서양에서 인도불교연구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자료가 풍부하고 또한 학문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나 불교의 정신적인 여러가지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영국인 스펜스 하디(Spence Hardy)의 ≪동방의 승원생활(Eastern Monachism)≫(1850), ≪불교입문서(Manual of Buddhism)≫(1853)도 마찬가지다. 불교를 전체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커다란 시도로는 독일인 쾨펜(K ppen)의 ≪붇다의 종교(Die Religion des Buddha)≫(1857)를 들 수 있다. 뒤이어 불교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서술하고 있는 저서는 네덜란드인 케른(H. Kern)의 ≪인도불교와 그역사(Geschiedenis van het Buddhism in India)≫ 2권이 있다. 이것을 야코비(H. Jacobi)가 독일어로 ≪인도불교사(Der Buddhismus und seine Ge- schichte in Indien)≫(1882∼1884)라는 제목으로 라이프찌히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는 승려 생활과 교단을 특히 상세히 논하고, 불교와 요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또 케른의 ≪인도불교 입문서(Manual of indian Buddhism)≫(1896)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다. 산스크리트 자료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인 스나르(Senart)는 ≪붇다의 전설에 대한 시론(Essai sur la l gende du Buddha)≫(1882)을 출판하기도 했다.

한편 성전의 출판과 불교연구 일반에 가장 공적이 있었던 것은 1881년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를 창립한 라이스 데이비드이다. 여기에서는 팔리어로 된 저작의 출판을 사명으로 삼았으며, 창립시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회원으로는 영국학자 라이스 데이비드를 비롯하여 모리스(Moris), 챔머스(Chalmers), 카펜터(Carpenter), 독일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Hermann Oldenberg), 피헬(Pichel), 가이거(Geiger), 막스 뮐러, 스칸디나비아 학자 트렌크너(Trenkner), 프랑스학자 피르(Feer), 러시아학자 미나예프(Minayeff) 등이 있다. 1895년에는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간행된 불교에 관한 모든 서적의 영역총서인 ≪불교성전(Sacred Books of the Bud- dhist)≫의 제 1권이 나왔다. 라이스 데이비드가 불교를 최초로 논한 저서로는 ≪불교(Buddhism)≫(1877)가 있으며, 그 후 ≪불교, 그 역사와 문헌(Buddhism, its history and literature)≫(1896)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 이외에도 역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올덴베르크의 ≪붇다, 그의 생애, 교설, 교단(Buddha, sein Leben, seine Lehre, seine Gemeinde)≫(1881)이다. 이 책은 팔리어로 된 자료를 기초로 해서 초기불교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를 발판으로 독일에서는 1900년 이래 주목할 만한 불교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독일불교학자로는 쇼펜하우어의 제자인 파울 도이쎈(Paul Deussen)을 비롯하여, 뤼드너(H. L dner), 가르베(R. v. Garbe), 불교철학사 연구에 몰두하여 저서 ≪불교철학 발달사(Die buddhistische Philosophie in ihrer ge- schichtlichen Entwicklung)≫(1904∼1924)를 남긴 발레저(M. Walleser), ≪인도문학사(Geschichte der indischen Literatur)≫의 저자 빈터니쯔, 붇다 전설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한 ≪붇다의 생애에 대한 전설(Die Legende von Leben des Budda)≫(1926)의 발트슈미트(E. Waldschmidt), 인도철학사가인 그라제나프가 있다. 그의 저서로는 ≪梵과 붇다(Brahma und Bud- dha)≫(1930), ≪인도불교와 극동불교(Der Buddhismus in Indien und im Fernen Osten)≫(1936), ≪불교의 신비(Buddhistische Mysterien)≫(1940) 등이 있다. 또 팔리어 연구에 공헌한 학자로 유럽최초의 팔리어 텍스트인 ≪Anecdota Palica≫(1845)을 저술한 슈피겔(F. Spiegel)과 팔리어 문법서인 ≪팔리어 문법을 위한 기고(Beitr ge zur Pail-Grammatik)≫(1875)의 저자 에른스트 쿤(Ernst Kuhn), ≪팔리문학과 언어(Pail Literatur und Sprache)≫(1916)의 저자 가이거(Geiger)를 들 수 있다. 이 이외에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의 비교연구로서 유명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Pali und Sans­krit)≫의 저자 프랑켄(R. O. Franken), 불교학자로서 번역의 대가인 ≪불교詩選(Buddhistische Anthologie)≫(1892)을 저술한 노이만(K. T. Neumann) 등이 있다.

Ⅲ. 독일에서의 불교문학

1. 불교문학의 태동

불교문학작품 중 성담집≪바를람과 요사파드(Barlaam und Josaphat)≫만큼 세계문학 사상 그 어떤 작품도 서양에서 그렇게 일반에게 널리 인기를 누렸던 작품은 없었으며, 이 성담집은 번역되지 않은 서양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를 소재로한 여러 번안작품중에서 중고독일의 시인이었던 루돌프 폰 엠스(Rudolf von Ems, 또는 Rudolf von Montfort라고도 함)가 번안한 작품이 13세기 전반에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이 수도원을 나오는 수도사들의 재산목록 중 도서목록에 빈번히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해 볼 때 A.D. 14∼15세기경 프로이쎈의 수도사들에게 있어 애독서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 왕립도서관에 그 당시의 육필사본이 아주 드문데도 14세기에 나온 이 작품의 두 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훌륭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왕립학회(K niglichen Deutschen Gesellschaft)회원들의 후원으로 1818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처음으로 인쇄 발행되었다. 이 작품의 내용을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권세와 부력을 겸비한 인도의 왕인 아베니어(Avenir)가 살았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반대자로서 오랫동안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러던 중 왕이 그토록 바라던 왕자가 태어나자 그 이름을 요사파트(Josaphat)라고 지었다. 기쁨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한 현자가 찾아와서 요사파트는 후에 훌륭한 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부왕은 그 현자의 말을 듣고 난 후부터 밤낮으로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 왕은 고심끝에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왕자에게 웅장한 궁궐을 지어 준다. 왕자는 그곳에서 행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했으나 부왕의 기쁨도 잠시 뿐, 부왕은 마침내 간곡히 부탁하는 왕자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외출을 허락한다. 부왕은 시종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왕자가 길을 가던 도중에 슬픈 일과 마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명을 내린다. 그렇지만 왕자가 말을 타고 가던 도중에 궁안에서 보지 못했던 나병환자, 장님, 그리고 쇠약한 노인과 마주치게 되자 깜짝 놀라서 시종에게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묻자 그 시종은 "속세의 모든 것이 무상해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솔직히 대답한다.

왕자는 궁궐로 돌아 온 후에도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이 사실들을 부왕이나 그 주위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한 대신을 불러 자기가 느낀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고 여러가지 질문을 한다. 그러나 그 대신이 왕자의 의문을 풀어주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은 왕자가 품은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 바를람(Barlaam)이라는 현자를 그에게 보낸다. 이 현자는 오랫동안 고독한 섬에서만 지내던 은자(Einsiedler)로서 값비싼 보석을 팔러 다니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은밀히 그 왕자를 만나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쳐 준다. 부왕의 신하인 자르단(Zardan)은 왕자가 한 현자와 대화하는 것을 듣고 그 사실을 왕에게 보고한다. 그 때는 이미 그 현자가 궁궐을 떠난 후였다. 그러자 왕은 급한 나머지 신하들에게 공개토론을 개최해서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그리스도교를 압도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을 내린다. 또한 부왕은 왕자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바를람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나코르(Nachor)로 하여금 바를람이라 자처케 하여 그리스도교가 토론에서 패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코르는 토론중에 갑자기 그리스도의 교리에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교를 지지하고 그 모든 반대자를 물리친다. 부왕은 테오다스(Theodas)라는 마법사를 시켜 왕자가 그리스도교를 멀리하도록 또 다시 시도하였으나 그것도 헛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왕은 자기 신하의 충고를 받아들여 왕자에게 영토를 주어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그 후 요사파트 왕자는 부왕이 하사한 그리스도교의 영역에서 살게 된다. 머지 않아 부왕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인정하여 왕자에게 모든 영토를 물려 주고 은자로서 4년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요사파트는 부왕이 죽자 자신의 왕위를 버리고 25살에 이르러 황야를 떠돌기 시작한다. 그는 악마로부터 여러 번 유혹을 당하였으나 그 때마다 과감히 그 유혹을 물리친다. 2년 후 황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그에게 그리스교의 교리를 처음 가르쳐 준 현자 바를람을 만난다. 그 두사람은 기쁨을 나누고 난 후 서로 고행에 몰두하였으나 바를람이 죽는다. 요사파트도 황야를 떠돌며 고행을 하다가 마침내 3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시신은 인도로 엄숙하게 옮겨져 그곳에 안장되었는데, 그 무덤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바를람과 요사파트라는 두 성인은 로마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A.D. 4세기 말에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1370년에 죽은 뻬트뤼스 드 나딸리뷔스(Petrus de Natalibus)가 작성한 성자 목록안에 처음 기록되어 있으며, 그 후 1583년에 나온 순교자 명부와 현대 성인집에서도 볼 수 있다. 또 요사파트의 성유물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포루투칼의 리사본(Lissabon), 벨기에의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성자의 이야기는 고타마 싣다르타(Gotama Siddhartha, 붇다의 성도하기 이전의 이름)의 생애를 그리스도교에 알맞게 번안한 것으로 두 성자가 가공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서양사람들은 그들을 고타마 싣다르타와는 무관한 실재 인물로 생각하였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1843년 크리스토프 폰 슈미트(Christoph von Schmidt)는 ≪요사파트(Josaphat)≫라는 소설을 썼으며, 이를 기초로 1845년 산 마르테(San Marte)는 ≪십자가의 시련(Das Kreuzes Pr fung)≫이라는 희곡작품으로 각색하기도 하였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성명미상인 편집자가≪바를람과 요사파트≫가 붇다의 일생과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그 편집자는 이 성담이 불교성전을 번안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또 1612년 포르투칼의 작가 디오고 도 콘토(Diogo do Conto)는 요사파트가 붇다의 일대기에 나오는 똑같은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 성장 과정 또한 동일하다고 두 이야기를 비교하고 있지만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비로소 학자들에 의해 요사파트 이야기가 불교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1859년 7월 26일 라부라이(Laboulay)가 ≪토론지(Journal des Debats)≫에서 그 이야기의 출처는 불교성전이라고 주장하였고, 펠릭스 리브레히트(Felix Liebrecht)도 ≪라틴문헌과 영문헌 연감(Jahrbuch f r romanische und englisch Literatur)≫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후 막스 뮐러, 에른스트 쿤, 코스퀸(Cosquin), 쪼텐베르크(Zotenberg)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증거가 입증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볼 때 이 성담에 나오는 'Josaphat'라는 명칭은 그리이스어 'Joasaph' 또는 'Jodasaph', 아랍어 'Yudasaf' 또는 'Budasaf'와 동일하며, 중고 페르시아어인 팔라비어(Pahlavi)로 전달된 'Bodhisattva(보살)'의 변형이다. 이 말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자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불교 문헌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완성자', 즉 붇다가 되기 이전의 이름인 싣다르타와 같다. 에른스트 쿤은 'Barlaam(또는 Balauhar)'이라는 말은 인도어 바가반(Bhagavan, 붇다에게 붙여진 명칭으로 고귀한 자를 의미)의 변형으로서 붇다 형상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성담집 ≪바를람과 요사파드(Barlaam und Josaphat)≫는 붇다의 전설을 그리스도적으로 각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교를 서양에 전파하려고 한다든지 찬미하려고 한 의도가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성담에 대한 연구가 있은 후 서양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연구와 함께 불교 창작작품이 잇따라 발표됨으로써, 불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한 것처럼 불교문학도 세계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2. 불교문학작품

독일에서도 작가들은 불교문학의 창작에 힘을 기울여 일반대중들이 불교를 인식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독일에서의 불교문학작품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우선 불교 드라마작품으로 리카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가극(Musikdrama) ≪승리자 (Die Sieger)≫를 들 수 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불교의 윤회와 해탈을 소재로 한 이 미완성의 작품을 남겼다. 그 후 붇다전설이 독일 드라마의 테마로 등장하게 되는데 페르디난트 폰 홀스타인(Ferdinand von Horstein)은 자신의 작품≪붇다(Buddha, Legende in 3 Akten)≫(1899)를 1900년에 뮌헨극장에서 상연하기도 하였다. 또 막스 포클리히(Max Vogrich)의 ≪붇다(Der Buddha, Gro e Oper in 3 Akten und einem Vorspiel)≫(1901), 칼 브라이프트로이(Karl Bleibtreu, 1859∼1925)의 5막극 ≪業 (Karma, Schauspiel in 5 Aufz gen)≫과 ≪聖王 (Der Heils­k nig)≫(1903), 아돌프 포클(Adolf Vogl)의 가극 ≪마야(Maja, dramatische Dichtung mit Musik in 2 Aufz gen)≫(1908) 등이 있으며, 바그너처럼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칼 젤러루프(Karl Gjellerup, 1857∼1919)의 ≪覺者의 妻(Das Weib des Vollendeten, ein Legendendrama)≫(1907)가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불교연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다가 흥미를 느껴 불교학을 연구하게 된 노이만(Neumann)의 번역을 통해 불교를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속에 붇다는 처음에 출가전의 왕자 싣다르타로서 나중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완성자로서 등장하지만, 불전에 나오는 붇다의 생애와 그 내용이 약간 변형되어 있다.

불교소설 작품으로는 칼 구쯔코브(Karl Gutzkow, 1811∼1878)의 ≪마하구루(Maha Guru, die Geschichte eines Gottes)≫(1833), 펠릭스 로렌쯔(Felix Lorenz)의 ≪불교도 (Der Buddhist)≫, 파울 달케(Paul Dahlke, 1865∼1928)의 ≪불교 이야기 (Buddhistische Erz hlungen)≫(1904), ≪붇다의 나라로부터(Aus dem Reiche des Buddha≫(1913)와 ≪宿命知通의 書(Das Buch Pubbenivasa, vier buddhistische Wiedergeburtsgeschichten)≫(1919)가 있으며, 프리쯔 마우트너(Fritz Mauthner, 1849∼1923)의 ≪열반경≫을 근거로 한 ≪고타마 붇다의 최후의 죽음(Der letzte Tod des Gautama Buddha)≫(1912)이 있다. 또 한스 후흐(Hans Huch, 1880∼1932)는 의사로서 번역 및 창작을 통해 잘 알려진 작가인데, 그는 삼부작 소설을 썼다. 즉, 제 1권 ≪붇다의 출가(Buddha, Der Schritt aus der Heimat in die Heimatlosigkeit)≫(1914)에서 출가전의 붇다의 생활을, 제 2권 ≪覺者의 귀향(Die Heimkehr des Vollendeten)≫(1920)에서 출가후 10 년만에 도를 이루고 귀향하는 것을 그리고 제 3권 ≪붇다의 세계(Die Welt des Buddha)≫(1992)에서는 붇다의 해탈을 묘사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유명한 헤르만 헷세의 ≪싣다르타(Siddharta, eine indische Dichtung)≫(1919) 등이 있다.

불교 시작품으로는 요제프 빅토르 비트만(Josef Viktor Widmann, 1842∼1911)의 서사시 ≪붇다(Buddha,epische Dichtungen in 20 Ges ngen)≫(1869)가 불전문학중 최초의 완성된 형태로 발표된 이후 에두아르트 그리제바하(Eduard Griesebach, 1845∼1906)의 서사시 ≪신 탄호이저(Der neue Tannh user)≫(1869), 아돌프 프리드리히 그라프 폰 샤커(Adolf Friedrich Graf von Schaker)의 ≪동방의 밤(N chte des Orients)≫(1874) 그리고 젤러루프의 아름다운 서사시 ≪순례자 카마니타(Pilgrimen Kamanita)≫가 1906년에 나왔는데, 이 작품은 전적으로 불전에 의존한 것은 아니지만 붇다의 형상을 원전에 따라 묘사되어 있으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시 전체가 불교의 진정한 정신에 따라 직관에 호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불교도들의 낙원인 극락에 대한 시적 묘사는 아주 매혹적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로댕의 영향을 받아 3편의 붇다詩를 썼는데, 제 1시와 제 2시의 제목은 <붇다(Buddha)>로 1905년과 1906년에 그리고 제 3시 <영광의 붇다(Buddha in der Glorie)>를 1908년에 각각 발표했다. 제 1시에서는 원과 중심의 상호관계에서 모든 관찰적 한계를 초월한 붇다를 별(Stern), 제 2시에서는 달(Mond)로 상징화 하였고, 마지막 제 3시에서는 우주계중 중심을 이루고 있는 태양마저 극복할 준비를 갖춘 붇다의 찬란한 위업을 찬양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헤르만 헷세의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1914)를 비롯한 많은 시편들이 있다.

Ⅳ. 쇼펜하우어의 불교연구

1. 인도사상의 수용배경

쇼펜하우어는 어느 서양철학자보다도 인도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인도종교의 깊은 이해와 애정은 자신의 사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인도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헤르더의 제자로서 인도의 베단타사상을 가르쳤던 마이어의 덕택으로, "동양학자 마이어는 자진해서 나에게 인도의 고대를 소개해 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듯이 쇼펜하우어가 그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는 마이어가 준 앙께띨 뒤뻬롱의 라틴어 번역판 ≪Oupnek'kat≫를 통해 인도사상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우파니샤드사상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유례없이 소중한 가장 칭송할 만한 글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이 글은 나의 임종의 자리에서도 위안이 될 것이다"라고 감격어린 어조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우파니샤드사상은 나중에 알게 된 불교사상과 함께 그에게 인도 전통의 본질과 가치를 설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산스크리트어가 희랍어와 라틴어를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듯이 브라만교와 불교가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같은 역할을 한다"고 비록 자신이 슐레겔처럼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그 언어의 우수성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는 슐레겔이 인도에서 자신이 소망했던 종교의 신비로운 원천을 발견하고자 하였으나 실망으로 끝났던 것과는 달리 인도민족을 가장 고귀하고 가장 고대적인 민족, 그리고 그들의 지혜를 인류의 가장 원초적 지혜로 특징지우면서 인도를 가장 원초적인 종교의 근원지이자 가장 오래된 세계관의 발생지로서 또 인류의 조국으로 간주했다. 그는 계속해서 인도의 지혜가 서양으로 유입되어 서양사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서양인의 관심이 다시 동양으로 향하게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면 인도종교와 쇼펜하우어 자신의 철학체계 발생과는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그는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1813년 겨울 마이어와 교류하였고, 1816년 그의 주저 제 1권을 저술하던 중 "나는 우파니샤드, 플라톤 그리고 칸트가 동시에 인간정신에 빛을 던져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학설이 형성될 수 없었음을 시인한다"고 밝힌 바에 의하면 우파니샤드사상이 그의 철학체계의 발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1856년 그의 제자인 아담 폰 도쓰(Adam von Do )에게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나의 학설과의 일치는 놀라운 일이다. 특히 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제 1권을 1814년에서 1818년에 걸쳐 집필했을 때 그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해 과거에 알지 못했었고, 또 알 수도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불교사상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그의 주저 제 2권을 보면 그의 불교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크게 진척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2.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쇼펜하우어는 1836년에 발표한 논문 ≪자연에서의 의지에 대해서( ber den Willen in der Natur)≫에서 "불교를 보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 자신이 소장하고 있고 또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추천하고 싶은 서양어로 된 불교문헌을 열거하려고 한다"고 말한 후 26권의 중요한 불교관련 문헌 및 논문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단순히 불교문헌을 탐독하는 차원을 넘어 서양에서 불교 전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불교도들을 자신의 신앙동지(Glaubengenossen)라고 불렀으며, 어느 날 만일 임종의 자리에 이르게 될 때 불교성전을 읽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다. 또 그의 서재에는 영원하고 온화한 미소를 띤 불상이 있었는데, 1856년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상기하고 있는 칼 베어(Karl B hr)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날 신의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그는 나에게 아주 흥미롭고 진기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말한 후 방의 한 모퉁이에서 철 아니면 황동으로 된 듯한, 그러나 검게 칠해져 있어 얼핏 보기에 중국의 불상과 비슷한, 높이가 1피트쯤 되는 좌불상을 꺼내와 책상위에 놓았다. 마치 그는 나에게 그것이 무슨 형상인지 알아 맞춰 보라고 은밀히 묻는 듯했다. 나는 그것이 중국에서 온 것이리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티벳에서 온 것으로 약 백 년쯤 되었는데 붇다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것은 불교도들에겐 기독교도들의 십자가와 같은 것이며, 여기서 붇다는 구걸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하필이면 왜 붇다를 구걸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기억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붇다의 신화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는 서재학자나 독일철학교수 즉 강단철학자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타고난 철학자이며, 나에게 얘기해 준 고대의 현자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경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난 1년 후 벡(G. C. Beck)도 쇼펜하우어의 방에서 똑같은 불상을 발견했는데, 이 때의 불상은 도금이 되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도금공에게 불상을 도금할 때 순금을 사용하고 또 금을 아끼지 말라고 일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 자신의 진술이나 주변사람들의 말을 통해 그의 깊은 불심(佛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의 사상 또한 많은 점에서 불교의 기본교리들과 일치하고 있다. 특히 붇다가 성도한 후 베나레스에서 행한 첫번째 설법인 사성제(四聖諦)는 그의 사상과 가장 특징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 사성제란 인생고(人生苦)를 초극해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붇다가 깨달은 연기설(緣起說)이 일반 사람들에게 어렵기 때문에 그 자신이 설법하기 쉬운 형태로 체계화한 신성한 진리이다. 이것은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로 이루어져 있으며 흔히 이것을 줄여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라고도 한다. 붇다는 먼저 고(苦)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괴로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므로 오랫동안 먼 길을 헤매어 생사가 쉬지 않는다. 그러나 반드시 이 세상 모든 것이 괴로움임을 알 것이니, 괴로움이란 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근심과 슬픔과 번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는 것이 얻어지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이 모든 괴로움이다." 오온이란 모든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을 형성하고 있는 물질적 정신적 작용으로서 물질(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작용(行), 의식(識)의 다섯 요소를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붇다가 어린시절 경험한 인생의 괴로움을 자신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자신이 유능한 상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아주 긴 외국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고프고 고달픈 학문의 길보다는 상인으로서 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여행을 추진했던 것인데, 정작 그가 여행에서 체험한 것은 생의 기쁨이 아니라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눈물의 계곡(Jammertal)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17살 때 어떠한 정상적인 학교교육도 받지 않고서 붇다가 어린시절 병, 노쇠, 고통과 죽음을 보았던 것처럼 나 또한 생의 비참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붇다와 같은 생의 체험을 가져다 준 여행이후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를 더욱 심한 고통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는 부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신성한 존재로까지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부친을 향한 그의 존경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모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인기 여류소설가였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남자들과 자유연애를 즐겼으며, 이에 반발하여 고뇌에 빠져 있던 쇼펜하우어는 괴벽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던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고 결국 그들은 단절상태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24년간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일생에 있어 부모의 사랑이 절실했을 시기에도 그 정을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붇다가 괴로움의 요소로 지적한 바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을 부모에게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는 부모도, 처자식도, 친구도 없었다. 그에게 오직 고독만이 전부였을 뿐이다. 이러한 숱한 생의 고통은 그를 염세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염세주의적 경향은 불교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개성과 성격 그리고 소년시절 가정안에서의 비극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불교가 서양에서 염세주의적 종교로 인식된 것은 주로 쇼펜하우어의 소개에 기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중심문제는 의지(Wille)였다. 이 의지의 개념은 불교의 사성제 중 두번째 진리인 집(集, Durst)의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집(集)이란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기쁨과 탐욕을 쫓아 모든 곳에서 환희를 구하려는 무지와 맹목의 그릇된 욕구인 갈애(渴愛)를 일컫는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면서 베다의 마야(m y )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했는데, 마야란 '환상', '가상', '허상'을 의미한다. 그는 마야의 개념을 칸트의 이론인 현상(Erscheinung)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마야의 베일에 가려진 환상의 세계이고 생사가 끊이지 않는 경험적 세계인 윤회(Sams ra)의 세계이다. 인간이 생의 의지로 인해 본능적으로 이 환상의 세계를 쫓지만 그 뒤에 남는 것은 괴로움과 환멸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경우 업(集)의 의미가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생의 의지 중 성욕이다. 성욕이란 인간에게 있어 생의 의지가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이다. 생의 의지는 성욕으로 나타나는데, 성욕자체가 이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탄생시키려는 새로운 개체의 생의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존재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죄과, 하나의 사악한 욕념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업은 또 다른 업을 낳는 법이다. 또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그 충족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설사 욕망이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또 다른 욕망이 싹튼다. 그래서 욕망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세계는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쇼펜하우어가 본 세계 그 자체는 지옥이었다.

결국 생의 의지의 부정 즉, 모든 욕망을 버리는 것만이 이러한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다. 이것이 사성제 중 세번째 진리인 멸(滅)이다. 붇다는 이렇게 전한다. "이것이 괴로움인 줄 알고 애욕의 집착을 끊으면 눈을 얻었다고 하리니, 이 생을 마치고는 뒤에 다시 괴로움이 없게 된다. 집착이라 함은 애욕을 따라 생긴다는 것이니, 괴로움과 집착을 모두 없애고 그 길을 따라 진리를 행하여 눈을 얻으면 이 생을 마친 뒤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이미 진리를 보아 도의 눈을 얻은 이에게는 다시 나고 죽음이 없다." 이렇게 집착의 단절을 통해서만이 다시 태어나고 죽음을 거듭하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불교에서는 니르바나(Nirv na, 涅槃)라 한다. 쇼펜하우어는 여러 문헌 및 논문을 통해서 니르바나의 의미를 심도있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뒤따랐다. 그는 스펜스 하디의 ≪동방의 승원생활≫을 통해 Nirv na를 부정(Negation)을 의미하는 'nir'와 죄악적 소원(s ndliche W nsche)인 'vana'의 합성어로서 '죄악적 소원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러시아의 聖 페테스부르크 학술원의 학자들을 통해 Nirv na를 지속적인 환상의 세계, 욕망과 욕구의 세계, 감각적인 환멸과 가변적인 형식들의 세계, 생·노·병·사의 세계인 윤회와의 반대로 이해했다. 더 나아가 그는 Nirv na를 무(nichts)와 연관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태연하고 평온하다. 생의 의지를 단념하고 부정하는 체념적인 인간의 특권은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는 것이다. 그는 피상적으로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생존을 필요로 하지 않고 욕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꺼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존재를 포기한다. 그 대신 그에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 눈에는 무(無)인 것이다. 불교에서 저 피안의 세계를 열반 즉, 절멸이라 부른다."

여기서 부정된 것은 생성의 세계인 윤회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만일 니르바나가 무(無)로 규정된다면 이것은 단지 윤회는 니르바나를 정의하거나 구성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요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함으로써 윤회(Sams ra)를 열반(Nirv na)과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무(無), "이것은 바로 불교도들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며, 모든 인식의 피안 다시 말해서 이미 주관과 객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반야바라밀(Praj p ramit )이란 지혜, 직관, 통찰력이라는 뜻의 'praj ' 성취, 완성, 최상이라는 뜻의 'p ramit '가 합성된 말로서,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불교에 있어서 최상의 경지이기도 하다. 즉, 이 세계는 마야의 환상일 뿐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달은 자만이 열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열반이야말로 불교윤리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열반에 대한 언급은 붇다의 네번째 진리인 도(道)로 인도한다. 도란 멸의 길 즉,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붇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도를 얻으려면 여덟가지 행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듣고, 둘째는 애욕을 버려 갈등을 없애며, 세째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 같은 것을 저지르지 않고, 네째는 속이고 아첨하며 나쁜 말로 꾸짖는 일을 하지 않으며, 다섯째는 질투하고 욕심내어 남들이 믿지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임을 생각하며, 일곱째는 몸의 냄새나고 더럽고 깨끗하지 않음을 생각하고 여덟째는 몸에 탐착하지 않고 마침내는 흙에 들어갈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붇다는 괴로움을 없애고 해탈할 수 있는 길로서 팔정도(八正道)를 말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관능적 욕구의 추구나 고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모두 극단적인 행위로서 올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이어야 한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팔정도를 설법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해탈하고자 했다. 그가 생의 의지를 부정했다 하더라도 자살에 대해 결코 동조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자살은 의지의 부정이라기 보다 의지의 강한 긍정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부정은 생의 고통이 아닌 생의 환희를 꺼려한다는 사실에 부정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보다 나은 생과 행복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자살은 생을 의미하며 육체에 구속받지 않은 존재와 긍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자살은 해탈을 위한 올바른 길이 아니며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그는 해탈을 위한 길 즉,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진정한 길로서 항상 호의와 동정(Mitleid)과 같은 미덕의 실천과 이 보다 더 고결한 금욕주의적인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금욕주의자들을 대단히 존경했는데, 그들은 궁극적이고 진실한 목적을 위해 고행금욕(苦行禁慾, Askesis), 정진정결(精進貞潔, Keuschheit), 무욕청빈(無慾淸貧, Armut)과 같은 생활을 몸소 실천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의지의 현상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욕망을 끊고 자신들의 의지가 어떤 것에도 애착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금욕적인 삶은 모든 종교인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다른 종교인보다 특히 힌두교도와 불교도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인도종교, 기독교, 회교의 고행자들은 그들 교리의 본질적인 의미와 정신 등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가 말한 고행금욕, 정진정결, 무욕청빈은 불교의 팔정도 중 올바른 인식과 일치하며, 동정(Mitleid)의 윤리는 보시인욕(布施忍辱)과 일치한다. 또 그가 사용한 특수한 용어인 '정적(靜寂, Quietiv)'은 인간의지의 단념과 부정, 무상한 것에 대한 포기, 무관심 같은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적 색채가 짙게 풍기고 있다.

그는 초기불교사상인 사성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자신의 중심문제였던 의지(Wille)를 사성제 중 두번째 진리인 집(集, Durst)의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으며, 열반(Nirv na)의 의미를 지속적인 환상의 세계, 욕망의 세계, 생·노·병·사의 세계인 윤회와 반대개념으로 파악하였지만, 니르바나를 무(無, nichts)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큰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불교연구에 몰두하여 서양에서의 불교의 전달자로서 불교의 독일적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쇼펜하우어의 논리는 다분히 불교적이며, 그의 사상 또한 불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타난 사상이 불교사상과 아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불교사상 전체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했다거나 그의 사상이 불교사상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초기불교사상인 사성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자신의 중심문제였던 의지(Wille)를 사성제 중 두번째 진리인 집(集, Durst)의 개념과 결부시키고 있으며, 열반(Nirv na)의 의미를 지속적인 환상의 세계, 욕망의 세계, 생·노·병·사의 세계인 윤회와 반대개념으로 파악하였지만, 니르바나를 무(無, nichts)의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큰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불교의 경우 열반은 진리로 가득 찬 세계를 의미하며,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를 뛰어 넘는 초존재의 개념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열반의 의미는 불교와 다르다. 붇다는 인간의 죽음 이후의 문제나 열반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해탈할 수 있으냐가 문제였지 그로부터 오는 결과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쇼펜하우어가 금욕의 최고단계로 불교에서 볼 수 없는 자발적인 금식에 의한 죽음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점에서 그의 고행 금욕은 불교보다 더 격렬하다. 또 그가 이 세계를 가장 사악한 것으로 단정함으로써 그의 염세관이 불교보다 훨씬 더 철저한 면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교와의 차이점은 붇다가 양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며 중도설을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사색속에서 불교사상을 극단에 치우치게 한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는 단지 일생동안 불교연구에 몰두하여 서양에서의 불교의 전달자로서 불교의 독일적 해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도이쎈, 바그너, 니체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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