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마지막 여로(1)
1)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시작한 이후, 사십여 년 동안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붓다는 북인도의 거리에서 거리로, 마을에서 마을로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그 역사적 전후 관계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모두 붓다께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설법했다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1)
그러나 붓다의 만년(晩年), 즉 입멸 전후의 사정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전의 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의 세 가지 경전2)에서는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하빠리닙바나 숫따(Mahāparinibbāna sutta, 大般涅槃經)]는 그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현재 팔리어 [대반열반경] 외에도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어 사본(寫本)의 단편과 티베트어역, 그리고 다섯 종류의 한역본이3) 전해지고 있습니다.4) 이로 미루어 이 경전은 다른 부파에서도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 역본들의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모두 붓다 입멸 전후의 사정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성(事實性)이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도 포함되어 있음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약간의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묘사된 내용은 역사적, 지리적 사실에 가깝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은 위대한 분의 크나큰 죽음과, 그 죽음을 앞에 두고 설해 남기신 최후의 설법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지니는 가치와 크나큰 매력은 역시 이 크나큰 죽음의 사실과 그 최후 설법에 있어서의 주옥같은 가르침의 말씀입니다.5)
그런데 대승경전에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라는 같은 이름의 경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전은 붓다께서 입멸할 때의 설법을 주제로 한 것으로 아주 딴 경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반열반경]은 팔리어 경전과 그에 해당되는 한역본을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남전의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의 마지막 여정은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를 출발하여 갠지스강을 가로질러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에 이르러 안거를 마치고, 말라(Mallā)국의 도시였던 꾸시나라(Kusinārā, Kusinagara, 拘尸那竭羅)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입적(入寂)하게 됩니다. 그리고 붓다의 입멸 후 화장과 사리분배 등에 관한 후대의 기사까지 아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는 팔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붓다의 마지막 여로에 대한 줄거리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2) 라자가하에서 설한 칠불퇴법(七不退法)
[대반열반경]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반 년 내지 일 년 정도 전 라자가하의 깃자꾸따(Gijjhakūta, 耆闍崛山, 靈鷲山)에 머물고 있을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무렵 마가다국의 아자따삿투(Ajātasattu, 阿闍世) 왕은 밧지(Vajji)국을 정복할 야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밧사까라(Vassakāra)라는 대신(大臣)을 붓다께 보내 그 의향을 여쭤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붓다는 아자삿투왕의 대신 밧사까라에게 직접 답하지 않고,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다음의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①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6)
밧지족 사이에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아난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밧지족 사람들이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번영하고 결코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되지 않는다고 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이들 밧지족의 멸망을 초래하지 않는 일곱 가지 법(七不退法)을 설한 다음 계속하여 동일한 내용을 그대로 불교승가에 적용시켜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①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7)
이 외에도 교단이 쇠퇴하지 않는 다른 네 가지 종류의 칠불퇴법과 한 가지 종류의 육불퇴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8) 이와 같이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비구들이 모이는 것, 비구들이 공동으로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것, 정해진 학처(學處)에 따라 행동하는 것 등은 불교승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사항들입니다. 이러한 승가 운영상의 중요한 사항들이 밧지족 사이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습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9)
3) 최후의 여정에 오름
얼마 후 붓다는 80세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라자가하를 떠나 최후의 여정에 오릅니다.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북쪽의 베살리를 향해 라자가하를 출발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암바랏티까(Ambalatthika) 동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는 암바랏티까 동산의 ‘왕의 집(Rājâgārake)’에 머무셨습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에도 비구들에게 수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즉 “이것이 계율이다. 이것이 선정이다. 이것이 지혜이다. 계(戒)가 실천되었을 때, 정(定)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정(定)이 실천되었을 때, 혜(慧)의 큰 이익과 과보가 있다. 혜(慧)가 실천되면 마음은 번뇌, 즉 욕루(欲漏, kammâsavā), 유루(有漏, bhavâsavā), 견루(見漏, ditthâsavā), 무명루(無明漏, avijjâsavā)로부터 해탈하게 된다.”10) 계율과 선정과 지혜, 이 셋은 불교 전체를 통해 가장 기본적인 실천 형태이며, 흔히 ‘삼학(三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우 학(學)은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라는 뜻입니다.11) 이 삼학은 불교의 매우 중요한 교설로서, 이 경전에서 붓다는 반복해서 비구들에게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학에 관한 교설은 이 경전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암바랏티까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는 나란다(Nālanda, 那爛陀)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붓다는 나란다에 도착하여 그곳의 빠와리까(Pāvārika)의 망고 숲에 머무셨습니다. 그 때 존자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가 세존의 처소를 찾아와서 세존께 예배드리고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러한 신앙을 품고 있습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바른 깨달음에 대해 세존만큼 심오하고 철저하게 도달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며, 현재에도 물론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12)
그러자 붓다는 사리뿟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사리뿟따는 자기는 과거, 현재, 미래의 제불세존(諸佛世尊)에 대해서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릇 불세존이라는 분은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함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은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있지만, 한역의 해당 부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 팔리문과 한역(漢譯) 아함(阿含)의 다른 곳에 나와 있습니다.13)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리뿟따의 신앙 고백은 다른 기회, 즉 붓다의 입멸 직전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일로 여겨집니다.14) 그러니까 팔리문 [대반열반경]의 편집자는 나란다 마을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오기 때문에 이 고장과 관련되어 알려진 사리뿟따의 고백을 여기에 삽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15)
4) 빠딸리 마을과 갠지스강
이어 붓다는 나란다를 떠나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갠지스강 남쪽 기슭에 있는 빠딸리가마(Pātaligāma, ‘빠딸리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붓다께서 빠딸리 마을에 도착하자 그 고장의 신자들은 붓다와 제자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 지은 공회당에 와서 법문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빠딸리 마을 사람들에게 계율을 지킬 때의 다섯 결과와 계율을 지키지 않을 때의 다섯 결과를 설하셨습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재산을 잃게 되고, 나쁜 소문이 일어나고, 모임에 참가할 때 자신이 없고, 죽을 때 우둔하게 죽게 되고, 죽고 나서 지옥에 가게 됨을 설하셨습니다.16)
이와 같이 붓다는 빠딸리 마을 신자들을 위해 밤늦게까지 설법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붓다의 분부로 신자들은 물러갔습니다. 붓다는 잠시 후 조용한 곳에 가서 쉬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의 대신(大臣) 수니다(Sunīdha)와 밧사까라(Vassakāra)가 밧지족을 물리치기 위해 빠딸리가마에 요새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수많은 신들이 빠딸리 마을을 수호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다음 날 아난다에게 “고귀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중에서, 모든 상업의 중심지 중에서 빠딸리뿟따(Pātaliputta, Pātaliputra, 華氏城)17)가 가장 큰 도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빠딸리뿟따는 화재와 수재, 또는 내란[불화]의 위험이 염려된다.”라고 예언했습니다.
한편 마가다국의 대신 수니다와 밧사까라는 붓다와 제자들을 초대하여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붓다께서 나간 문을 ‘고따마의 문(Gotama Gate)’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넌 장소를 ‘고따마의 나루터(Gotama Fort)’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갠지스강을 건너기 위해 강기슭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배를 타거나 혹은 뗏목을 엮어 강을 건너려고 붐비고 있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마치 역사(力士)가 굽힌 팔을 펴거나 혹은 폈던 팔을 굽히듯이 순식간에 저쪽 강가에 모습을 나타내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이 기적에 관한 종교적 의미는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18)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33.
2) Mahāparinibbāna sutta(大般涅槃經), Mahāsudassana sutta(大善見王經), Janavasabha sutta(闍尼沙經) 등이다.
3) ①[遊行經](大正藏 1, pp.11-30); ②[佛般泥洹經](大正藏 1, pp.160-175); ③[大般涅槃經](大正藏 1, pp.191-207); ④[般泥洹經](大正藏 1, pp.176-191); ⑤[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大正藏 24, pp.384-402) 등이다.
4)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p.233.
5) 마스다니 후미오 지음, 반영규 옮김, [붓다, 그 생애와 사상](서울 : 대원정사, 1987), pp.264-5.
6) Dīgha Nikāya(PTS), Vol.Ⅱ. pp.73-76.
7) Dīgha Nikāya(PTS), Vol.Ⅱ. pp.76-77.
8) Dīgha Nikāya(PTS), Vol.Ⅱ. pp.77-81.
9) 후지타 코타츠 외,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서울 : 민족사, 1989), pp.109-111.
10) Dīgha Nikāya(PTS), Vol.Ⅱ. p.81.
11)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27.
12) Dīgha Nikāya(PTS), Vol.Ⅱ. p.82.
13) 사리뿟따와 붓다의 대화는 Dīgha Nikāya(長部)의 Sampasādanīya Sutta(自歡喜經)(D.Ⅲ, pp. 99-116)과 Samyutta Nikāya의 Satipatthāna Samyutta(念處相應)(S.Ⅴ, p.159)에 길게 설해져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인기 있는 대목이었으며, 아쇼카왕의 비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London: PTS, 1910), p.87, No.2 참조.]
14)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도 [대반열반경]에는 후대에 삽입된 부분이 많이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참조.]
15)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329.
16) Dīgha Nikāya(PTS), Vol.Ⅱ, pp.85-6; Vinaya Pitaka(PTS), Vol Ⅰ, pp.227-8; Udāna (PTS), pp. 86-7.
17) 여기서 시골의 빠딸리가마(Pātaligāma)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그 이름이 빠딸리뿟따(Pātaliputta, 현재의 Patna)로 변경되었다. 나중에 이곳은 마가다 왕국을 발전시킨 아쇼카 황제의 수도로 유명해졌다.[Bhikkhu Ñānamoli, The Life of the Buddha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72), p.357.]
18) 와다나베 쇼오고는 이 기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와다나베 쇼오고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po.332-3를 참조하기 바란다.
붓다의 마지막 여로(2)
1) 꼬띠가마와 나디까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너신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꼬띠가마(Kotigāma, 꼬띠 마을이라는 뜻)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그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이겠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다음에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원인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한없이 미망된 생존을 반복하여 머물 곳이 없느니라.
반대로 비구들이여!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의미에 도달한 사람 혹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각각 잘 이해하고, 그것의 깊은 뜻에 도달하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 생존의 원인이 되는 것을 단절하고, 다시 미망된 태어남을 받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붓다께서는 꼬띠 마을에 머물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사성제(四聖諦)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는 불교의 가장 핵심 되는 교리입니다. 붓다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여로에서도 붓다는 또 다시 제자들에게 사성제의 가르침을 설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붓다께서 사성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깊은 뜻에 도달하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러한 붓다의 간곡한 법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이어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셨습니다. 이 이후에도 붓다는 반복해서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은 불교 수행의 근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꼬띠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나디까(Nādika)1) 마을에 도착하시어, 그곳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 벽돌 회관)’2)에 머무셨습니다.3)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에 머물고 계실 때,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이곳 나디까 마을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에 대해 붓다께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은, 여래(如來)4)에게 있어서는 별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 일일이 여래의 처소에 와 묻는 것은 번쇄하고 번거롭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제부터 나는 ‘진리의 거울[法鏡, dhamma-ādāsa]’이라는 가르침을 설하리라. 이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성스러운 제자들은 ‘나에게는 지옥의 경계는 다했다. 축생의 경계, 아귀의 경계, 나쁜 경계에 떨어진 조건은 모두 다했다. 나는 성자의 흐름에 든 이가 되어 깨달음의 세계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틀림없이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가 되었다’라고, 각자 원하는 그대로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나디까 마을의 ‘벽돌 회관’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2) 베살리의 암바빨리 동산
나디까 마을에서 충분히 머무신 다음, 붓다와 제자들은 베살리(Vesāli, 毘舍離城)로 이동하였습니다. 베살리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암바빨리(Ambapāli, 菴婆婆利)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습니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사념처관(四念處觀)에 대해 자세히 설하셨습니다. 그 자세한 설법 내용은 생략합니다.
당시 베살리에는 ‘암바빨리’라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자신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붓다께 문안드리고 한쪽에 앉았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유녀 암바빨리는 기쁨에 넘쳐, 내일 자신이 세존과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붓다께서는 침묵으로써 수락하셨습니다.
그때 베살리의 릿차비(Licchavī)족 사람들도 붓다께서 베살리에 도착하시어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릿차비족 사람들은 서둘러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붓다가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유녀 암바빨리의 마차와 부딪쳐 릿차비족 사람들의 수레가 부셔져 버렸습니다. 릿차비족 사람들은 유녀 암바빨리를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암바빨리는 내일 세존과 비구들을 공양에 초대하기 위해 너무 서둘렀기 때문이라고 사죄했습니다. 가문에 대한 긍지가 높았던 릿차비족 사람들은 자신들이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할 수 있도록 십만금(十萬金)에 권리를 양도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암바빨리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여기서 릿차비족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릿차비족은 붓다시대에 인도의 강력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캇띠야(Khattiya, 刹帝利, 王族)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붓다 입멸 후, 자기들의 나라에 불탑을 세우기 위해 불사리(佛舍利)의 분배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5) 그들의 수도는 베살리였으며, 밧지스(Vajjīs)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밧지족 연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거대한 통일체를 형성했는데, 만일 릿차비의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모든 사람들이 문병을 갔다고 합니다. 릿차비의 집에서 실시되는 행사에는 전체 부족이 참가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방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명예스럽게 모두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6) 그들이 화려한 색상의 의복을 입고 밝게 색칠한 마차를 탄 모습을 매우 아름다웠다고7)고 합니다.8) 이처럼 부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던 릿차비족들이 자기 마을을 방문한 붓다께 공양 올릴 기회를 유녀 암바빨리에게 빼앗겼다는 것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편 릿차비족 사람들이 붓다를 친견하고 법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붓다와 제자들에게 먼저 공양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미 암바빨리의 공양을 받기로 약속하였으므로 릿차비족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유녀 암바빨리는 자신의 정원에 잘 요리된 딱딱하고 부드러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여 세존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이 끝났을 때 유녀 암바빨리는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동산을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들에게 기진(寄進)하겠사옵니다. 부디 수락하여 주소서.”
붓다께서는 그녀의 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여기서 붓다는 유녀 암바빨리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했으며, 그녀를 격려하여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암바빨리의 거처를 떠났습니다.
3) 벨루와에서의 안거(安居)
붓다께서 암바빨리의 망고 동산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비구들과 함께 벨루와(Beluva, Venu, 竹林) 마을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때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벗이나 지인(知人) 혹은 지기(知己)를 의지하여 베살리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우기를 지내도록 하여라. 나는 이 벨루와 마을에 남아 우기를 보내리라.”
그리하여 비구들은 베살리의 각 지방에 흩어져 그곳에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만은 혼자 이곳 벨루와 마을에 머물면서 우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우기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붓다께서는 중병(重病)에 걸렸습니다. 심한 고통이 엄습하여 죽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붓다께서는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존하시어 마음이 번잡하지 않게 고통을 참았습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 붓다께서는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9)을 확립하여 병을 극복하였습니다. 그때 아난다가 붓다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편찮으신 동안 저에게는 티끌만한 걱정도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저는 ‘한 숨 돌리는 정도의 시간이다’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사옵니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어떤 지시를 주지 않는 동안에는 결코 열반에 드시는 일은 없다’라고.”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師拳)’이라는 것은 없느니라. 또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여래는 ‘비구의 모임은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은 결코 없느니라. 따라서 아난다여! 여래가 비구의 모임에 대해 어떤 지시를 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난다여! 이제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느니라.”
이 대목은 불교 교단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즉 여래의 법에는 스승이 특별한 제자에게만 전하는 은밀한 비전(秘傳)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교단을 통솔한다거나, 교단은 붓다께 의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자귀의 법귀의와 사념처
이어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너희 비구들도 자기의 섬[自洲]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自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法洲]에 머물고 법에 귀의[法歸依]하라. 다른 것[他]에 귀의하지 말라.”10)
“아난다여!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 느낌(受)에 대해 … 마음(意)에 대해 …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섬으로 삼아[自洲]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法洲]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다여!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섬으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11)
위 인용문에서 앞의 것은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뒤의 것은 ‘자귀의 법귀의’ 내용이 곧 사념처관(四念處觀)임을 설한 대목입니다.12) 이것은 붓다께서 입멸하기 직전에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매우 귀중한 법문입니다.
Notes:
1) 나디까(Nādika)는 꼬띠가마(Kotigāma)와 베살리(Vesāli)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밧지(Vajji)국에 속한 지역이다. 여러 책에서는 냐띠까(Ñātika)와 나디까(Nādika) 두 가지로 이 마을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일찍부터 두 가지 철자법 모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Ñātika는 ñātigāma였기 때문이고, Nādika는 Nādika 연못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Rhys Davids는 Nādikā(복수)는 종족의 이름이고, Nādika는 그 종족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한다. Woodward 역시 Nādika로 읽는 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 이름은 nadī(강)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eration, 1983; Originally Published in 1937), Vol. Ⅱ, pp.976-7 참조.]
2) ‘긴자까와사타(Giñjakāvasatha)’를 ‘연와(煉瓦)의 가(家)’ 혹은 ‘연와당(煉瓦堂)’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벽돌 회관’으로 옮겼다. Rhys Davids에 의하면, ‘벽돌 회관’은 여행자를 위한 공중 휴게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대부분의 건물은 나무로 지어졌는데, ‘벽돌 회관’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이 단어를 ‘Brick Hall’로 번역했다.[T. W. and C. A. F. Rhys Davis tr., Dialogues of the Buddha, Part Ⅱ, p.97, no.1.]
3) Rhys Davids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어떤 장소에 여행자가 도착했다는 것을 기술하는 관용구적인 어법이라는 것이다. 즉 X라는 곳에 도착하여 Y에 머물렀다. X는 도시 혹은 마을의 이름이고, Y는 여행자가 사용하는 숙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디까’ 마을에 도착하여 ‘벽돌 회관’이라는 숙소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4) ‘여래(如來, Tathāgata)’라는 호칭은 붓다께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 No.1 : “Tathāgata is the title used when he speaks of himself. Etymologically it means ‘he who has gone(or come) thus’, but the exact sense is disputed.”;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 Gordon Fraser, 1959), p.1 No. 3: “Tathāgata lit. means ‘One who has come to truth’, i.e., ‘One who has discovered Truth’. This is the term usually used by the Buddha referring to himself and to the Buddhas in general.”] 이를테면 천자(天子) 혹은 왕(王)이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 ‘짐(朕)’이라고 자칭(自稱)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제자들이 붓다를 ‘여래’라고 부른 예를 초기경전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불교의례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수정되어야만 한다. 현행의 여래십호는 사실상 열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즉 ①여래(如來, Tathāgata), ②응공(應供, Arahant), ③정변지(正遍知, Sammāsambuddha), ④명행족(明行足, Vijjācaranasampanna), ⑤선서(善逝, Sugata), ⑥세간해(世間解, Lokavidū), ⑦무상사(無上士, Anuttara), ⑧조어장부(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⑨천인사(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m), ⑩불(佛, Buddha), ⑪세존(世尊, Bhagavā)이다. 여기서 여래를 제외하면 정확히 십호(十號)가 된다.
5) Dīgha Nikāya(PTS), Vol. Ⅱ, p.165.
6) DA. Ⅱ, p.519.
7) Dīgha Nikāya(PTS), Vol. Ⅱ, p.96; Anguttara Nikāya(PTS), Vol Ⅲ, p.239.
8)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779.
9) ‘유수행(留壽行)’으로 옮긴 팔리어 원어는 Jīvita-sankhāram adhititthati이다.
10)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 Dīgha Nikāya(PTS), Vol. Ⅲ, p.58, 77; “atta-dīpa(bhikkhave) viharatha atta-saranā anañña-saranā, dhamma-dīpa dhamma-saranā anañña-saranā.” 여기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은 ‘자주(自洲, 자기의 섬) 법주(法洲, 법의 섬)’로 옮겨야 한다. 이수창(마성),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제6호 (서울 : 불교학연구회, 2003), pp.157-184 참조.
11) Dīgha Nikāya(PTS), Vol. Ⅱ, p.100-101; Dīgha Nikāya(PTS), Vol. Ⅲ, p. 58, 77.
12) 임승택, “경전에 나타나는 위빠사나”, 『2004년 여름연수회 자료집: 고집멸도(DSNM)명상상담』(명상상담연구원, 2004), pp.23-38 참조.
붓다의 마지막 여로(3)
– 입멸의 예고 –
1) 짜빨라 영묘(靈廟)에서
붓다께서 벨루와(Beluva) 마을에서 우기(雨期)의 안거(安居)를 보내고 있을 때, 심한 병에 걸려 격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정진을 통해 자신의 병을 잘 극복하였습니다. 우기가 끝나고 붓다는 다시 베살리(Vesālī)로 돌아왔습니다. 붓다께서 베살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짜빨라 쩨띠야(Cāpāla cetiya)로 자리를 옮겼습니다.1) 그곳에서 붓다는 아난다에게 우데나(Udena), 고따마까(Gotamaka), 삿땀바까(Sattambaka), 바후뿟따(Bahuputta), 사란다다(Sārandada), 짜빨라(Cāpāla) 등의 쩨띠야(cetiya, 制多, 支提)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쩨띠야(cetiya, Skt. caitya)는 원래 ‘성스러운 나무 혹은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을 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붓다 당시의 제띠야는 ‘노천의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었다고2) 합니다. 이기영(李箕永)은 쩨띠야를 흔히 ‘묘(廟)’ 또는 ‘예당(禮堂)’이라고 한역되지만, ‘신성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석조(石造) 혹은 벽돌로 된 것들은 대개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석조 또는 벽돌로 된 탑파(塔婆) 모양의 것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붓다 당시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것은 죽은 사람의 유골 위에 만들어진 토총(土塚) 또는 그 위에 세상을 떠난 성자의 유골이나 유품 위에 총(塚)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쩨띠야는 스투파(Stūpa, 塔婆)와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고 했습니다.3) 이 쩨띠야를 영어로는 ‘tumulus’(古墳), ‘sepulchral monument’(무덤의 기념물), ‘cairn’(돌무더기) 등으로 번역하는데,4) 우리말로는 ‘영묘(靈廟)’ 혹은 ‘사당(祠堂)’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쩨띠야를 불교의 사찰로 이해하면 잘못된 것입니다.5)
붓다는 이곳 짜빨라 쩨띠야에서 아난다에게 수행이 진전되어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을 획득한 사람은 그가 원한다면 일겁(一劫)6)이나 그 이상도 이 세상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래는 이미 신족(神足)을 닦은 자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원하기만 하면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음을 아난다에게 암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 의해 마음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간의 자애를 위해, 인천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처럼 세 번씩이나 암시했는데도 아난다는 이미 악마에게 홀려 있었기 때문에 세존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아난다에게 물러가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가 물러난 뒤, 악마가 세존 가까이로 다가와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바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선서(善逝)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이제 열반에 드셔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제가 세존께 열반에 드시도록 권했을 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사옵니까?”7)
“‘악마여! 나에게 비구제자들이 있고, 또 그들이 총명하여 가르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받들어 지니고, 가르침을 바르게 행하고자 하며, 바른 방향으로 행동하며, 스승의 말씀을 잘 파악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설명하고 표현하며, 알리고 납득시키며, 이해시키고 분별하게 하며, 명백하게 하고, 또 외도의 삿된 설이 나타날 때는 그 삿된 설을 진리로 제지할 수 있고, 기적을 일으키는 가르침을 설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결코 열반에 들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세존이시여! 지금 이러한 바람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지금이야말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시옵소서. 세존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가 온 것이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열거하면서 열반에 들도록 유혹받으신 세존께서는 마침내 악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나의 입멸(入滅)에 대해 더 이상 마음 괴로워하지 않느니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2) 지진이 일어난 까닭
이리하여 세존께서는 짜빨라 쩨띠야에서 바르게 사념하시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셨던 지금까지의 유수행(留壽行,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을 중지하셨던 것입니다.8) 세존께서 유수행을 버렸을 때,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너무 무서워서 온 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습니다.
한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난다 존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벗이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벗이여!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참으로 이 지진은 대단하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무서워 몸의 털이 곤두섰다. 또 하늘의 큰 북도 갈갈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다.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因), 어떤 간접적 원인(緣)이 있기에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서 아난다 존자는 그 이유를 묻고자 세존의 처소로 갔습니다. 세존의 처소에 가 세존께 인사드리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큰 지진이 오늘 있었사옵니다. 이 지진은 매우 격심하고 두려워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사옵니다. 또 하늘의 큰 북이 찢어질 정도로 울려 퍼졌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직접적 원인, 어떤 간접적 원인이 있기에 이런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이옵니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 가운데 어떤 것이 있는 경우이니라. 그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아난다여! 이 대지는 수계(水界) 위에 있고, 수계는 풍계(風界) 위에, 또 풍계는 허공(虛空) 중에 있다. 그런데, 아난다여! 풍계에 어떤 원인으로 큰 바람이 불면, 그 큰 바람은 수계를 진동하게 한다. 수계가 진동하면 대지도 진동한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1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다음으로 아난다여! 이곳에 한 사람의 사문 혹은 바라문이 있다고 하자,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능력(神通力)이 있어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자. 혹은 대단한 초능력(大神通力), 대단한 역량을 가진 영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자. 아난다여! 그가 대지의 관상(觀想)을 행하고, 혹은 한없이 수(水)의 관상을 행할 때, 그것은 이 대지를 대단히 그리고 격심하게 진동하게 하고, 격렬하게 진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지진이 일어나는 제2의 직접적 원인, 간접적 원인이니라.”
그리고 붓다는 이어서 나머지 여섯 가지의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는 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어머니가 되는 사람의 태 안에 들 때입니다. 넷째는 이 보살이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로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입니다. 다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때입니다. 여섯째는 여래가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法輪]를 처음으로 굴리셨을 때입니다. 일곱째는 여래께서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지닌 채 유수행을 버리셨을 때입니다. 여덟째는 여래께서 남김없이 완전한 안락함의 세계(無餘依涅槃)에 드실 때, 이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대단히 진동하며, 격심하게 진동하고 격렬하게 진동합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의 직접적 원인과 여덟 가지의 간접적 원인이 있을 때 대지진이 일어난다고 붓다는 아난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아난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입멸을 예고했습니다. 그때서야 아난다는 붓다께서 입멸하시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고, 열반에 드시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이제는 너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느니라. 허나 어쨌든 아난다여! 나는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것이라고 곧 이별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하겠느냐? 태어나고 살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해 ‘무너지지 말라’고 막더라도, 그것은 이치에 부합되지 않느니라. 이러한 것을 아난다여! 여래는 이미 내던지고 배제하며 방출하고 버렸으며 벗어났다. 그리고 유수행도 나는 버렸다. 이리하여 여래는 결정적인 말을 했느니라. ‘머지않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니라’라고. 이제 와서 생명을 영원토록 하겠다고 하여 그 말을 취소한다는 것은 존재의 도리(道理)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문을 아난다에게 설하신 다음, 붓다는 아난다에게 마하와나(Mahāvana, 大林)의 꾸따가라(Kūtāgāra, 重閣講堂)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베살리 주변에 있는 비구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라고 당부했습니다. 비구들이 모이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를, 잘 알아 지녀 배우고 수행하며 많이 닦아야만 하느니라. 그리고 이 청정한 행이 이 세상에 오래오래 존재하며, 그 결과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의 바탕이 되고, 세상 사람들을 연민하여 신들과 인간의 복리가 되고, 이익과 안락이 되도록 하여라.
그러면 비구들이여!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이익과 안락한 진리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예컨대 네 가지 바르게 사념하는 경지(四念處), 네 가지 바르게 노력해야만 하는 것(四正勤), 네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四神足), 다섯 가지 선한 과보의 뿌리(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지분(七覺支),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八聖道) 등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비구들이여! 이것이 내가 진리에 대해 깨닫고 설했던 여러 가지 진리이니라.”
이상과 같은 가르침을 설하신 다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비구들이여! 지금이야말로 나는 너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알려야만 하리라. 명심해서 들음이 좋으리라. 비구들이여! 만들어진 것(有爲)은 결국 멸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여 수행을 완성하여라. 여래는 머지않아 열반에 들리라. 여래는 이제부터 3개월 후, 열반에 들 것이니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만한 이 큰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다시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하셨습니다.
이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퍼지니,
자,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여, 끝없이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바르게 사념하여
선계(善戒)를 지키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이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시한 법(法), 율(律)을
결코 게을리 말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은 다하리.
이상에서 살펴본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우기의 안거가 끝나자 붓다께서 베살리로 탁발을 나갔습니다. 그때 아난다에게 여래는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일겁(一劫) 혹은 그 이상으로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악마에게 마음이 사로잡혔기 때문에 붓다께 일겁 동안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악마의 권유를 받아들여 3개월 후 입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역본(譯本)에서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붓다께서 빨리 입멸하게 된 까닭은 아난다가 붓다께 요청하지 않은 과실 때문이라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드워드 제이 토마스(Edward J. Thomas)는 “이러한 질책의 가혹함은 붓다에 의한 것이 아님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러한 전설이 창작된 후, 교단에서 일으킨 느낌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1결집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이것에 의하면 아난다는 승단에서보다 먼저 자신의 과실을 시인했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학자들도 이 내용의 의미를 각자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에 의하면, 짜빨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대반열반경] 중에서도 하나의 절정을 이룹니다. 붓다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신자들에게도 있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 밑바닥에는 인간의 자연사(自然死)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 원시적 심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이 일어나는 데에는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는 매우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물며 붓다와 같은 비범한 존재의 입멸이라고 생각할 때, 특별한 원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짜빨라 사당에서의 ‘생명력의 포기’는 붓다의 입멸에 있어서 필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수하여, 시자(侍者) 아난다의 허물과 악마의 유혹이 곁들여집니다. 붓다의 입멸 후 아난다는 다른 제자들로부터 몇 가지 허물을 문책 당하게 되는데, 짜빨라 사당의 사건이 가장 큰 것이었다. 아난다는 그러니까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며, 이것도 민속학에 많은 사례가 있는 일반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입니다.”9)
Notes:
1) Cāpāla cetiya는 베살리 근처에 있었다. Anguttara Nikāya 주석서에서는 붓다께서 전도를 시작한 후 전반기 20년 동안 종종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곳은 한때 약카 짜빨라 (Yakkha Cāpāla)의 거처였지만, 나중에는 붓다께서 사용할 수 있도록 그 옆에 사찰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법현(法顯)은 그곳에서 탑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탑은 짜빨라 쩨띠야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Ⅰ, p.863.]
2)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서울 : 김영사, 1984), p.236.
3) 李箕永, [석가](서울 : 지문각, 1965), p.257.
4)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The Pali Text Society’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 PTS, 1921-1925), p.272.
5) T. W and C. A. 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Fourth edition (London : PTS, 1959), p.100, n.2.
6) 겁(劫, kappa)는 한없이 긴 시간의 단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겁은 이러한 본래 의미로 쓰인 것이다. Mahāvastu(大事), iii 225에서는 분명히 이 의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Buddhaghosa(佛音)는 당시 인간의 완전한 생애 100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46. n.2.]
7) 여기서 인용한 말은 붓다께서 처음 염소지기의 니그로다(Nigrodha) 나무 밑에서 열반의 기쁨을 즐기고 난 뒤, 말씀하신 것이다.
8) 이 부분의 원어는 ‘āyu-sankhara ossaji’이다. ‘āyu-sankhara’는 수행(壽行)이고, ossaji는 ‘해방되다’, ‘버리다’, ‘제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ossajati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생명 연장의 포기’라고 번역할 수 있다.
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38.
마지막 공양-수까라 맛다바
1) 베살리와의 이별
붓다께서 베살리(Vesālī, 毘舍離)에 머물고 계실 때, 근처에 있던 모든 비구들을 모아 놓고 석 달 후에 입멸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붓다는 베살리의 거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베살리를 바라보고 아난다에게 “이것이 베살리를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경전에서는 붓다께서 ‘코끼리처럼’ 뒤돌아보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코끼리처럼’이란 커다란 코끼리가 뒤를 돌아볼 때 몸 전체를 천천히 돌리는 모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이가 많고 또 병색이 짙은 붓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역 경전에는 “대상왕(大象王)처럼 온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광암성을 바라다보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현장(玄奘) 스님도 이를 기념하여 세워진 스투파(Sthūpa, 塔)의 옆에 서서 지난날을 회상했다고 합니다.1)
먼저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베살리를 뒤로 하고 반다가마(Bhandagāma, 반다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반다 마을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머물면서 비구들에게 네 가지 가르침2)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가르침이란 성스러운 계율[聖戒], 성스러운 정신통일[聖定], 성스러운 지혜[聖慧], 성스러운 해탈[聖慧]를 말합니다. 즉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네 가지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동안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유전하고, 끝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닌다고 말씀했습니다. 붓다는 또한 반대로 이러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 그것에 통달한 사람은, 생존에 대한 갈애를 단절하고 생존의 원인을 멸진함으로써 다시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다 마을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붓다께서는 핫티가마(Hatthigāma, 象村, 코끼리 마을), 암바가마(Ambagāma, 菴婆羅村, 망고 마을), 잠부가마(Jambugāma, 閻浮村, 장미사과나무 마을)를 거쳐 보가나가라(Bhoganagara, 善伽城)에 도착하였습니다.
[대반열반경]의 여러 이본(異本)들에서는 모두 빠딸리가마(Pātaligāma)에서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3)에 이르는 사이에 붓다께서 통과한 마을이나 도시, 강의 명칭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효와 순서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팔리어로 씌어진 [대반열반경]에는 베살리를 지나서 벨바, 반다 두 마을을 거쳐 핫티, 암바, 잠부 마을을 통과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산스끄리뜨어 단편에서는 바이살리 다음에 도르나 마을 등 네 마을을 들고 있으며, 또 이어서 찾아간 마을들의 순서도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4)
2) 사대교법(四大敎法, Mahāpadesa)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보가나가라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있는 아난다 쩨띠야(Ānanda cetiya, 靈廟)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사대교법(Mahāpadesa)이란 ①이것은 붓다로부터 친히 들었다. ②이것은 규정에 맞는 교단에서 들었다. ③이것은 많은 장로들로부터 들었다. ④이것은 한 사람의 유능한 장로로부터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붓다 입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불설(佛說, Buddhavacana)에 관한 분쟁을 예견하고 설한 것입니다. 즉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처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붓다 입멸 후 일어난 분쟁을 계기로 사대교법의 가르침을 만들고 붓다의 유훈으로 가탁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붓다 입멸 후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음은 틀림없을 것입니다.5)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3개월 후 입멸할 것임을 알리고 나서 사대교법을 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대교법은 불교 경전이 어떻게 불설로서 성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대교법은 불설과 비불설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낱낱의 말을 잘 생각한 끝에 성전(聖典)의 문구와 비추어본 다음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
어떤 견해가 불설이라고 주장될 때, 네 가지 종류의 근거가 제시된다는 것입니다. 즉 붓다, 승가, 일군의 장로, 한 사람의 장로의 이름을 들어 불설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진위 여부는 경(經)과 율(律)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느 누가 주장하는 내용이 경과 율에 합치하면 불설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불설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7) 안양규의 견해에 의하면, “이 사대교법은 비구승가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붓다의 사후 그를 대신하게 될 권위적인 표준 경전을 만들기 위한 장치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8)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대교법의 성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사후, 법과 율은 붓다를 대신하는 각각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했다. [대반열반경]에 보이는 사대교법(Mahāpadesa)은 바로 법과 율을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진실한 법과 율을 경전화함으로써 교단 내에 있을 수 있는 교리와 계율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사대교법이다. 구전 전통에서 표준적인 텍스트를 만드는 작업은 비구들이 승원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승원이라는 조직은 비구들이 이러한 작업을 물리적으로 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9)
3) 쭌다의 공양
한편 붓다께서 보가나가라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빠바(Pāvā)10)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빠바 마을에 도착하여 대장장이 쭌다(Cunda, 純多, 淳陀)의 망고 동산에 머물렀습니다. 대장장이 쭌다는 붓다와 비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식물 중에 ‘수까라-맛다바(Sūkara-maddava)’라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준비한 음식 가운데 ‘수까라-맛다바’가 있는 것을 아시고, 대장장이 쭌다에게 “이 음식은 나에게만 주고, 비구들에게는 다른 음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수까라-맛다바는 구덩이를 파 그곳에 모두 묻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이것을 먹더라도 완전하게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악마와 범천, 신들과 인간들, 사문과 바라문을 포함하더라도 붓다 이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쭌다에게 법을 설하여 기쁘게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쭌다가 공양한 음식을 먹고, 붓다는 중병에 걸려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을 정도의 격심한 고통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정념(正念), 정지(正智)로써 그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통도 차츰 치유될 무렵, 붓다는 비구들과 함께 꾸시나라로 향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붓다는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물을 드시고, 질병에 걸려 입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음식이 붓다의 마지막 공양이었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이 음식물을 드시고 ‘붉은 피가 쏟아지고 죽음에 가까운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고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에 의하면 붓다는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 때문에 격렬한 설사를 겸한 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쭌다가 올린 음식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취한 마지막 음식물과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모든 불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한 논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와 담마빨라(Dhammapāla, 佛護)와 같은 대주석가들의 해석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11) 그런데 대부분의 논문에서는 붓다가 취한 마지막 음식물, 즉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안양규는 “많은 논문들이 이 음식물은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고 밝히려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육식보다 채식을 높이 평가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특히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나 육식을 금지하는 불교도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다”12)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때 붓다께서 드신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이 무엇이었는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수까라-맛다바’를 ‘연한 어린 돼지고기’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도 소개했는데, 첫 번째 견해는 마치 우유가 음료수의 총칭이듯이, 수까라-맛다바는 소에서 생산된 5종의 액체와 부드럽게 익힌 쌀을 섞어 만든 요리들의 총칭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수까라-맛다바가 일종의 불사약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13)
또한 주석가 담마빨라는 또 다른 두 가지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즉 첫째는 돼지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돼지들이 짓밟은(maddita) 죽순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돼지들이 밟고 다니는 장소에 생긴 버섯이라는 것입니다.14) 산스끄리뜨본에서는 ‘정결하고 훌륭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15)
또한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해당하는 한역본들에서는 각기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대반열반경](대정장1, p.197a)에서는 다미음식(多美飮食)이라 하고, [반니원경](대정장1, p.193b)에서는 농미(濃美)로, [유행경](대정장1, p.18b)은 전단수이(栴檀樹耳)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대정장24, p.390b)에서는 종종상묘향미음식(種種上妙香美飮食)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반니원경](대정장1, p.167c)에서는 음식 이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까라-맛다바’가 무슨 음식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붓다 입멸 이후부터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습니다. 주석서에서조차 여러 가지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석을 한 5세기경에는 이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오늘날 프랑스 요리에 사용하는 알 버섯[松露]이라는 설도 있습니다.16) 어쨌든 ‘수까라-맛다바’는 매우 특별난 음식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무슨 음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여러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수까라-맛다바’는 돼지고기류이거나 버섯류 둘 중 어느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채식주의자들은 굳이 이 음식을 버섯이라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까라-맛다바’라는 음식으로 인해 붓다께서 입멸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반대로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17)이를테면 팔리어 [대반열반경]을 주석한 붓다고사는 쭌다가 올린 마지막 공양물은 결코 붓다의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즉 붓다고사는 후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수까라-맛다바’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야사까 유우소우(宮坂宥勝)의 견해에 의하면, 붓다의 사인(死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수까라-맛다바’라는 특별한 음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일으킨 ‘수까라-맛다바’는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가공의 음식이라고 해도 좋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18)
“요컨대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래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음식이라면 야생돼지의 고기, 버섯 그 외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이를 병에 걸리게 한 소화불량에 의해 드러나게 된 여래의 불완전성이 역설적으로 법신의 영원성을 멋지게 논증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수까라맛다바 전설의 비밀은 이와 같이 이해될 수 있다.”19)라고 미야사까 유우소우는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4) 뿟꾸사와의 만남
한편 꾸시나라로 가던 도중에 붓다께서는 길옆에 있는 어떤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물을 길어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지금 막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기 때문에 물이 흐려서 도저히 마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다시 아난다에게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난다는 붓다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시냇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방금 5백 대의 수레가 지나갔으므로 물이 흐려져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은 깨끗하게 맑아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러한 현상은 붓다의 신통력 혹은 위신력 때문이라고 경탄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알라라 칼라마(Ālāra Kālāma)의 제자이며 말라족의 아들인 뿟꾸사(Pukkusa)가 꾸시나라에서 빠바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붓다를 친견하고 선정(禪定)의 깊이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자신의 경험담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화들은 부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Notes:
1) 中村元 著, 金知見 譯, [佛陀의 世界] (서울 : 김영사, 1984), p.236.
2) 이것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가르침은 지계(持戒, sīla), 선정(禪定, samādhi), 지혜(智慧, paññā), 해탈(解脫, vimutti)를 의미한다.
3) 붓다의 入滅地인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는 Kuśinagara(拘尸那擖羅), Kuśinagarī, Kuśigrāma, Kuśigrāmaka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Kusinārā의 말라족 사람들은 자신들을 Kosinārakā(D.Ⅱ, p.167)라고 불렀다.
4) 中村元, 앞의 책, p.238.
5)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韓國佛敎學] 제34집(서울 : 한국불교학회, 2003), p.49.
6)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339.
7)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p.51.
8) 안양규, 「佛說과 非佛說의 구분: 불교 표준 경전의 시도」, p.64.
9) 안양규, 「개인의 자율과 승단의 유지: 붓다의 유훈을 중심으로」, [불교문화연구] 제1집(경주 :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 2000), p.29.
10) 빠바(Pāvā, Skt. Pāpā, 波婆)는 현재의 Patna 지역의 Pāwapuri 마을과 동일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자이나교의 개조 Mahavīra가 죽었다고 한다.[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First Indian edition (New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2), p.149, n.1.]
11) R. Gordan Wasson, “The Last Meal of the Buddha”,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Vol. 102, No.4(1982). 이 논문에서서는 마지막 음식과 관련된 최근까지의 논문 목록들을 수록하고 있다.
12)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伽山學報] 제9호(서울 :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출판부, 2002), pp.12-13.
13) Dīghanikāya-atthakathā(PTS), Vol. Ⅱ, p.568.
14) Udāna-atthakathā(PTS), p.399.
15)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p.13 참조.
16)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부처님의 생애] 만다라총서 2 (서울 : 불교시대사, 1992), p.232.
17) 안양규, 「붓다의 마지막 공양과 그의 入滅」, pp.13-14.
18)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앞의 책, p.234.
19) 宮坂宥勝 지음, 안양규 옮김, 위의 책, p.234.
입멸의 땅-꾸시나라
1) 꾸시나라의 살라 숲에서
붓다께서 빠바(Pāvā) 마을에서 대장장이 쭌다가 올린 음식으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뒤,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히란냐와띠(Hiraññavati)강(江) 맞은편 언덕 꾸시나라(Kusinārā, 拘尸那羅)에 있는 말라족의 우빠왓따나(Upavattana)동산의 살라(Sālā, 紗羅) 숲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신 붓다께서는 한 쌍의 살라 나무[紗羅雙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도록 침상을 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붓다께서는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발을 겹치고, 사자가 누운 것과 같은 자세[獅子臥]로 누워서 정념(正念)과 정지(正智)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라 숲은 때 아닌 꽃이 만발하고, 그 꽃잎이 붓다의 온몸에 떨어졌으며, 허공에서는 만다라바(mandārava) 꽃과 짠다나-쭌나(candana-cunnā, 栴檀의 粉末)가 흩뿌려졌습니다. 또한 천상의 악기와 음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러한 것들이 여래를 존경하고 공양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이 진리와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것을 향해 올바르게 행동하며, 진리에 수순하여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깊게 여래를 경애, 존경, 숭배하며 공양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때 우빠바나(Upavāna) 존자가 정면에서 붓다께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우빠바나 존자에게 정면을 피해 비켜서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이 붓다를 뵙고자 몰려 왔지만, 우빠바나 존자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허공의 신들과 지상의 신들은 붓다의 입멸을 슬퍼하여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탐욕을 떠난 신들만은 ‘조건지어진 것은 모두 덧없는[無常] 것이다. 변해가는 것을 어찌 머물도록 하겠는가?’1)라고,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하여 슬픔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안거를 마친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비구들이 붓다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붓다를 친견하고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여래 사후에는 신심 돈독한 양가의 자제들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깊은 종교심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네 곳이란 붓다의 탄생지(誕生地), 성도지(成道地),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 입멸지(入滅地)를 말합니다. 후일 이 네 곳이 붓다의 사대성지(四大聖地)가 되었습니다.2)
한편 아난다는 붓다께 출가한 사람은 여인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붓다께서는 여인을 가능한 한 보지 않는 것이 좋고, 보았더라도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으며, 말을 걸어올 때에는 바른 사념을 보전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2) 붓다의 유해와 장례법
아난다 존자는 붓다의 사후 세존의 유해를 어떻게 모시면 좋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너희 출가자는 여래의 유해를 모시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말라. 너희들은 단지 출가 본래의 목적을 향하여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정진하면서 지내야 하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에 대해 각별하게 깊은 숭경의 생각을 품고 있는 현자가 왕족이나 바라문, 자산자들 가운데 있을 것이니라. 그러한 이들이 여래의 유해를 모실 것이니라.”
이어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장례 절차에 대해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3)의 장례법(葬禮法)에 따라 다비(茶毘)를 행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비가 끝나면 큰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 중앙에 여래를 기념하는 탑을 건립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탑에 꽃다발과 훈향(薰香), 말향(抹香) 등을 공양한 다음, 합장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면 오랜 동안 안락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탑을 건립하여 공양할 만한 하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네 종류의 사람이란 바른 깨달음을 얻은 자[正等覺者], 홀로 깨달음을 얻은 자[獨覺], 여래의 제자[聲聞], 전륜성왕 등을 가리킵니다.
한편 아난다 존자는 세존의 입멸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난다 존자에게 붓다는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아난다여! 너는 나의 입멸을 한탄하거나 슬퍼해서는 안 되느니라. 아난다여! 너에게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일지라도 마침내는 달라지는 상태, 별리(別離)의 상태, 변화의 상태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여! 태어나고 만들어지고 무너져 가는 것, 그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무너지지 말라’고 만류해도, 그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라.
아난다여! 너는 참으로 오랜 동안 사려 있는 행동으로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게으름피우지 않고 일심으로 시봉하였느니라. 너는 또한 사려 있는 말과 사려 있는 배려로써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게으름피우지 않으면서 일심으로 시봉하였다. 아난다여! 너는 많은 복덕을 지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게으름피우지 말고 수행에 노력하여 빨리 번뇌 없는 경지에 도달함이 좋으리라.”
이어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아난다는 훌륭한 시자였으며, 특별히 네 가지 훌륭하고 뛰어난 점이 있다’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붓다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꾸시나라와 같은 외진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열반에 드시지 마시고, 짬빠(Campā), 라자가하(Rājagaha), 사왓티(Sāvatthi), 사께따(Sāketa), 꼬삼비(Kosambi), 바라나시(Bārānasi) 등과 같은 큰 마을에서 열반하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난다 존자는 큰 마을에는 왕족, 바라문, 자산가의 대집회장 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래께 깊은 숭경(崇敬)의 생각을 품고 있는 이도 많이 있으므로 여래의 사리[遺骨] 공양도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제지했습니다. 비록 꾸시나라가 지금은 이처럼 작은 마을이지만, 옛적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한 전후 사정을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3) 마하수닷사나왕(大善見王) 이야기
옛날 마하수닷사나(Mahā-Sudassana, 大善見王)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로운 왕이었으며, 사방의 세계를 평정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고, 그의 영토는 안정되어 있었으며, 그는 전륜성왕의 상징인 일곱 가지 보물[七寶]4)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하수닷사나 왕의 수도였던 꾸사와띠(Kusāvati)가 바로 이곳 ‘꾸시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왕궁은 동서로 12요자나(yojana, 거리의 단위), 남북으로 7요자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꾸사와띠 수도는 매우 풍요롭고 번창하였습니다. 많은 백성을 거느려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또 그만큼 풍부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신들의 왕궁인 아랄까만다(Ālakamanda)는 매우 풍요롭고 번성하여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또 거리가 약카(yakkha, 夜叉)5)들로 붐비니, 그만큼 풍요로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꾸사와띠 도읍지도 아랄까만다처럼 풍부하고 번성하며, 또 많은 백성을 거느리니 그만큼 풍부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꾸사와띠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열 가지 음향, 즉 코끼리 울음소리, 말 울음소리, 수레 굴러가는 소리, 큰북 소리, 작은북 소리, 비나(vīna)6) 소리, 노래 소리, 요(鐃) 소리, 바라 소리, 그리고 ‘먹고 마시고 먹어치워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예전의 꾸사와티는 이처럼 번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꾸시나라가 결코 외진 시골 마을이 아님을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지금 곧장 꾸시나라 마을로 가서,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에게 오늘 밤 세존께서 이 마을의 외곽에서 열반에 드실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나중에 세존께서 자기 마을에서 열반에 드셨는데, 그 마지막 순간에 세존을 뵙지 못하였다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붓다의 분부대로 아난다 존자가 꾸시나라 마을에 도착했을 때, 꾸시나라 말라족 사람들은 마침 마을의 일로 집회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서 입멸하고자 하니, 입멸 전에 친견하라고 말라족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말라족 사람들은 세존의 입멸을 안타까워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존의 처소로 찾아와서 모두 세존의 발에 머리를 대고 마지막 예경을 드렸습니다. 말라족 사람들의 친견은 그날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4) 수밧다의 귀의
그때 마침 꾸시나라 마을에는 수밧다(Subhadda)라는 편력행자(遍歷行者)7)가 머물고 있었는데, 편력행자 수밧다는 오늘 밤 사문 고따마께서 열반에 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편력행자 수밧다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나이든 스승 가운데 스승이라고 할 만한 편력행자들이 여래, 존경받을 만한 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께서 예전에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문 고따마는 바로 그 여래, 존경받을 만한 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인데, 그 사문 고따마께서 오늘 밤이 깊어 열반에 드실 듯하다. 나에게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는데, 나의 믿는 바로는 저 사문 고따마라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것이고, 진리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라고.
그래서 편력행자 수밧다는 서둘러 살라 숲으로 달려가서 붓다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세상에는 사문, 바라문으로서 모임이나 교단을 가지거나 혹은 교단의 스승으로 잘 알려지고 명성도 있으며, 교조(敎祖)로 불러지는 매우 존경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 예를 들면 뿌라나 깟사빠(Pūrana Kassap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ī), 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tthiputta),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haputta)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어느 누구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아니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깨달았고, 그 밖의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옵니까?”
이러한 수밧다의 질문에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밧다여! 그 어떤 법(法)과 율(律)이든지, 거기에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正道]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없을 것이다.8) 그렇지만 그 어떤 법과 율이든지, 거기에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발견된다면,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이다. 수밧다여! 이제 내가 가르쳐주는 이 법과 율에서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발견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가 있다. 다른 스승들이 가르치는 종교 체계는 진정한 수행자가 없다. 수밧다여! 만약 비구들이 바르게살기만 한다면, 세상에서 존경받는 아라한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수닷다는 곧바로 붓다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몸담고 있던 사람의 개종은 4개월이 경과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시기가 오면 수밧다를 출가시켜 구족계(具足戒)를 수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리하여 편력행자 수밧다는 세존으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 후 수밧다 존자는 구족계를 받았으며, 곧바로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홀로 머물면서 게으름피우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윽고 훌륭한 집안의 아들들이 바로 그 때문에 집을 나와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출가한 목적인 위없이 청정한 행(行)의 완성에 스스로 눈뜨고 알며 달성하여 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수밧다 존자는 ‘나의 생존 조건을 다했다. 나의 청정한 행[梵行]은 완성되었다. 내가 해야 할 바는 모두 끝났다. 나는 이제 다시 윤회의 생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밧다 존자는 존경받을 만한 이[阿羅漢]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밧다 존자는 세존의 마지막 직제자(直弟子)가 되었던 것입니다.▣
Notes:
1) Dīgha Nikāya(PTS), Vol. Ⅱ, p.140; “Yā pana tā devatā vīta-rāga, ta satā sampajānā adhivāsenti: ‘Anicca Samkhārā, tam kut’ettha labbhā?’ ti.”
2) 사대성지(四大聖地)의 탄생지는 까삘라밧투 근처의 룸비니이고, 성도지는 비하르주의 붓다가야이다. 초전법륜지는 베나레스(현재의 사르나트) 근처의 이시빠따나이고, 입멸지는 꾸시나라(혹은 꾸시나가라)이다.
3) 전륜성왕(轉輪聖王): 인도의 이상적인 제왕. 이 제왕이 출현할 때는 허공에서 마차가 나타나 이 마차의 先導에 의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를 평정한다. 불교에서는 전륜성왕 역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三十二相(32가지의 큰 특징)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소유하며, 세속세계의 지배자로서 진리세계의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4) 전륜성왕이 소유하고 있다는 일곱 가지 보물[七寶]은 다음과 같다. 즉 ①주권의 상징인 신비한 수레바퀴[輪寶], ②참으로 출륭한 코끼리[象寶], ③말[馬寶], ④아름다운 아내[女寶], ⑤진귀한 보석[珍寶], ⑥재상[主兵臣寶], ⑦조언자[居士寶] 등이다.
5) 야차(夜叉, yaksa)는 용건(勇健)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①팔부중(八部衆)의 하나. 수미산 중턱의 북쪽을 지키는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의 권속으로, 땅이나 공중에 살면서 여러 신(神)들과 불법(佛法)을 수호한다는 신(神). ②사람을 괴롭히거나 해친다는 사나운 귀신.
6) 비나: 하프와 유사한 현악기로서 베다시대부터 사용했다는 전통악기. 때로는 ‘비파(琵琶)’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7) 편력행자(遍歷行者): 일정하게 머무는 곳 없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수행하는 자.
8) 제1, 제2, 제3, 제4의 성인다운 진정한 수행자란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성자를 일컫는 말이다.
다비와 사리의 분배
1) 붓다의 마지막 말씀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너희들 가운데 일부는 ‘스승의 말씀은 끝났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스승은 없다’라는 생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떠나면 너희들을 위해 내가 설하고 가르쳤던 법(法)과 율(律)을 스승으로 삼아라.
아난다여! 지금까지는 비구들이 서로 ‘벗이여!’라고 부르지만, 내가 떠나면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선배 비구는 후배 비구를 이름이나 성, 혹은 ‘벗이여!’라고 불러도 좋지만, 후배 비구는 선배 비구를 ‘존자시여!’ 혹은 ‘구수자(具壽者)여!’라고 불러야 한다.
아난다여! 내가 떠난 뒤 만일 승단이 원하면 사소한 계[小小戒]는 버려도 상관없다.
아난다여! 내가 떠나면 찬나(Channa) 비구에게는 브라흐마-단다(brahma- danda, 梵壇罰)을 부가하라. 세존이시여! 그러나 브라흐마-단다란 무엇입니까? 아난다여! 찬나가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비구들은 그에게 말하거나 훈계하거나 충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브라흐마-단다이니라.”1)
위에서 인용한 경전의 말씀은 붓다께서 입멸 직전 아난다 존자에게 직접 지시한 내용입니다. 먼저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멸한 뒤에는 법과 율이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불멸후에는 오직 법과 율이 불교교단을 지탱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붓다는 상가 내부의 선배와 후배간의 호칭을 개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서 ‘벗이여!’는 팔리어 ‘아부소(āvuso)’를, ‘존자시여!’는 ‘반떼(bhante)’를, ‘구수자(具壽者)여!’는 ‘아야스마(āyasmā)를 번역한 것입니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또한 붓다는 자신이 입멸한 후 승단이 원한다면 사소한 계[小小戒]는 파기해도 좋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교단의 계율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그때 사소한 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붓다께 여쭈어보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 입멸 후 아난다는 장로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왜 그때 좀 더 분명하게 붓다의 의향을 여쭈어보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승단에서는 붓다 입멸 직후 이 안건에 대해 심사숙고했는데, 붓다의 의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계의 항목은 하나도 없애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2)
이어서 붓다는 찬나 비구에게 브라흐마-단다(brahma-danda, 梵壇罰)3)을 부가하라고 아난다 존자에게 지시했습니다. ‘브라흐마-단다’는 어떤 한 사람에게 전체의 다수가 일체 말하거나 권고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벌칙 가운데 가장 무거운 중벌(重罰)에 해당됩니다.
찬나 비구는 고따마(Gotama)와 같은 날 태어난 친구로서 고따마의 마부였습니다.4) 그는 출가 후에도 단체정신이 결핍하여 이따금 승단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는 고집 센 외고집의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마지막 훈육상의 법령인 브라흐마-단다를 찬나 비구에게 부가하였던 것입니다. 팔리어 『율장』「소품」에 의하면, 나중에 아난다 존자는 이 사실을 승단에 보고하였으며, 승단에서는 그 집행을 아난다 존자에게 위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Kosambī)의 고시따라마(Ghositārāma)에 머물고 있던 찬나 비구를 찾아가서, 붓다의 지시에 따라 승단에서 브라흐마-단다를 부가한다고 통고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찬나 비구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고 합니다. 찬나 비구에게 이러한 사회적 형벌이 정식으로 부가되었기 때문에 그는 대중과 떨어져 혼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해졌으며, 더욱 정진하여 궁극의 목표인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합니다.5)
다시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부처이건 법이건 교단이건 도(道)이건 수행 방법이건, 의문이 있는 사람은 서슴지 말로 물어라. 뒷날에 가서,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물어라.”
이렇게 말하고 두 번, 세 번 질문이 없는가 하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비구들은 어느 누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붓다는 다시 “여래를 존경한 나머지, 걱정하여 묻지 않아서는 안 된다. 벗이 벗에게 묻는 것과 같은 기분으로 질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질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붓다는 모두 의심 없음을 확인하고,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붓다께서는 비구들에게 최후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말하노라.
‘모든 현상(諸行)은 소멸해 가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이다.”6)
붓다께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씀은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2) 붓다의 입멸
이처럼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훈을 남기고, 곧바로 선정(禪定)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초선정(初禪定)에 들고, 초선정에서 일어나 제2선정에 들고, 다시 제3선정를 거쳐 제4선정으로 명상을 높여 갔습니다. 그리고 제4선정에서 일어나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으로, 공무변처정에서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으로, 식무변처정에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으로, 무소유처정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으로, 비상비비상처정에서 상수멸정(想受滅定)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존자에게 붓다께서 벌써 입멸하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누룻다 존자는 붓다께서 입멸하신 것이 아니라 상수멸정에 드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붓다께서는 반대로 상수멸정에 잠시 머문 다음,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고, 무소유처정, 식무변처정, 공무변처정, 제4선정, 제3선정, 제2선정, 초선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초선정에서 제2선정으로, 제2선정에서 제3선정으로, 제3선정에서 제4선정으로 들어갔습니다. 제4선정에서 나오자 곧 입멸하셨습니다.
붓다께서 입멸하시자 대지는 크게 진동하고 천둥이 울렸습니다. 그 모습은 매우 두려워 털끝이 곤두설 정도였습니다. 그때 범천 사함빠띠(Brahma Sahampati)가 시를 읊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마침내 육신을 버리게 되리라.
마치 세상에서 비할 바가 없는 사람,
이와 같은 스승, 힘을 갖춘 수행실천자,
정각(正覺)을 얻은 그 분이 사라지듯이.
또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帝釋天)도 시를 읊었습니다.
아아! 모든 현상은 무상하다.
생멸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은
생하고 멸한다.
이것들의 진정이 평온이다.7)
아누룻다 존자와 아난다 존자도, 신들에게 화답하여 각각 게송을 읊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구들은 스승이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보고 슬퍼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탐욕을 떠난 비구들은 정념(正念), 정지(正智)하고 슬픔을 견디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 어떻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3) 붓다의 유해 화장
그날 밤 아누룻다 존자는 아난다 존자에게 꾸시나라로 가서 말라족에게 붓다의 입멸 사실을 알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한 사람을 데리고 집회 중인 말라족의 의사당으로 가서 붓다의 반열반 소식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스승이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난 것을 한탄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고, 팔을 벌리고 울고, 바위처럼 엎어져 울고, 데굴데굴 굴러서 울며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스승은 너무나도 빨리 세상을 떠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은 모든 향과 꽃장식, 악기를 모아 공양하였습니다. 말라족의 공양은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7일째 되던 날 꾸시나라의 남쪽 교외에서 다비를 하기로 하고 말라족의 족장 8명이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붓다의 유해를 옮기려고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아누룻다 존자에게 여쭈었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신들에게 다른 의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들은 마꾸따-반다나(Makuta-bandhana)라는 말라족의 영묘(靈廟, cetiya)에서 다비(茶毘, jhāpeti)할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말라족 사람들에게 전륜성왕의 장례법에 따라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 존자는 오백 명의 대비구와 함께 빠바(Pāva)에서 꾸시나라로 오고 있었습니다. 큰 길을 따라 오는 도중에 만다라 꽃을 손에 들고 오는 어떤 아지바까(ājivaka, 邪命外道) 교도를 만났습니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그에게 붓다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는 붓다가 7일 전에 입멸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만다라 꽃은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탐욕을 떠나지 못한 비구들은 울며 소리 지르고, 탐욕을 떠난 비구들은 무상의 이치를 되새기며 참았습니다. 이때 수밧다(Subhadda)8)라는 늙은 비구가 이제 대사문이 떠났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망발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하깟싸빠는 불멸후 곧바로 제1결집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말라족의 네 명의 족장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도저히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이것은 신들의 뜻이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마하깟싸빠 존자가 붓다의 발에 정례하지 않는 한 불붙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하깟싸빠 존자와 비구 무리가 도착했을 때 비로소 화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 사람들은 다비를 마친 세존의 유해[사리]를 자기네 공회당에 안치하고, 7일 동안 세존의 사리에 정중히 예배 공양하였습니다.
4) 사리의 분배
마가다(Magadha)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왕은 붓다의 입멸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냈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은 “세존은 무사계급이고, 나 또한 무사계급이다. 그러니 나는 세존의 사리 일부를 받아서 그 분을 기리는 축제를 열 자격이 있다”라는 전갈을 보냈습니다. 또한 베살리(Vesāli)의 릿짜비(Liccavi)족, 까삘라왓투(Kāpilavatthu)의 석가(Sakya)족, 앗라깟빠(Allakappa)의 부리(Buli)족, 라마가마(Rāmagāma)의 꼴리(Koli)족, 베타디빠(Vethadīpa)의 바라문도, 빠바(Pāva)의 말라(Malla)족도 똑같은 이유로 사리의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꾸시나라의 말라족은 세존께서 우리 마을에서 입멸하셨기 때문에 사리를 나누어 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도나(Dona) 바라문이 중재에 나서, 사리를 평등하게 8등분하여 각 종족에게 배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리를 담았던 항아리는 도나 바라문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삡팔리와나(Pipphalivana)의 모리야(Moriya)족도 붓다의 입멸 소식을 듣고 뒤늦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분배를 끝낸 뒤였기 때문에 그들은 재를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붓다의 유골[사리]는 8등분 하여 각 종족에게 나누어졌으며, 또한 유골을 담았던 항아리와 재를 가지고 가서 여러 곳에 사리탑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8개의 사리탑(舍利塔)과 병탑(甁塔), 회탑(灰塔) 등 모두 10개의 탑(塔, stūpa)이 각지에 건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팔리어 『대반열반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한역의 여러 자료를 대조해보면, 사소한 점에서는 전승의 다름이 있지만, 큰 줄거리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팔리문 『대반열반경』에는 최후에 시가 실려 있습니다.9)
1898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펩페(W.C. Peppé)가 까삘라왓투 옛터 근처 삐프라와(Piprāhwa)에서 납석(蠟石)으로 된 완전한 한 개의 항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사리호(舍利壺) 뚜껑에 새긴 명문(銘文)에는 붓다의 유골을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붓다의 유골을 수습한 뼈항아리[骨壺]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1957년 알테카르(A.S. Altekar)가 베살리의 옛터에서 사리호를 발견했는데, 명문은 없지만 붓다의 유골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사리팔분(舍利八分)의 기사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Notes:
1) Dīgha-nikāya(PTS) Vol. Ⅱ, p.154.
2) T.W. and C.A.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London : Pali Text Society, 1910), p.171, no.2.;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법정 옮김, 『불타 석가모니』(서울 : 샘터, 1990), p.359.
3) 브라흐마-단다(brahma-danda, 梵壇罰)는 형벌의 한 종류인데, ‘가장 무거운 벌’(the highest penalty)이다. 이것은 ‘잠깐 동안의 사형 선고’에 해당된다. [Vinaya Pitaka(PTS) Vol. Ⅱ, p.290; Dīgha-nikāya(PTS) Vol. Ⅱ, p.154; Dhammapadatthakathā(PTS), Vol. Ⅱ, p.112; T.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 ed., Pali-English Dictionary(PTS), p.493.]
4) G.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First Indian edition(New Delhi : Oriental Books Reprint Corporation, 1983; Originally Published in 1937), Vol.Ⅰ, p.923.
5) Vinaya Pitaka(PTS), Vol. Ⅱ, p.292; T.W. and C.A.F. Rhys Davids tr., Dialogues of the Buddha (London : Pali Text Society, 1910), p.172, no.1.
6) Dīgha-nikāya(PTS), Vol. Ⅱ, p.156;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m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Ayam Tathāgathassa pacchimāvāca.”
7) Dīgha-nikāya(PTS), Vol. Ⅱ, p.157; “Aniccā vata sam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m vūpasamo sukho’ti.”[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8) 이 수밧다는 붓다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던 편력행자 수밧다와 다른 인물이다.
9) 주석서에 의하면, 이 시는 탐바빤니(Tambapanni) 섬, 지금의 스리랑카의 장로들이 지은 것으로 여긴다.
붓다의 뛰어난 비구 제자들
1) 훌륭한 스승과 그 제자들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문하에 어떤 제자들이 있는가를 살펴보면 그 스승의 인물됨과 인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는 반드시 훌륭한 제자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스승이신 붓다의 제자 중에는 매우 특출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가르침은 끊어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잘 전승되어 왔습니다.
붓다 재세시(在世時)의 초기교단에서는 뛰어난 출가 제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훌륭한 재가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초기교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훌륭한 업적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명성은 이미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특히 초기교단에서 출가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하여 거의 대부분 깨달음을 이루었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붓다께서 교화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미 훌륭한 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 상가(Sangha, 僧伽)는 당시 사회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의 훌륭한 장점들을 여러 대중 앞에서 칭찬하였습니다. 팔리어로 씌어진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와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는 그 제자들 중에서 여러 가지 점에서 각각 제일가는 모범적인 제자들의 이름과 그 장점들을 열거하고 격찬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제자들의 장점을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들
먼저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출가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내 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출가한 사람은 안냐꼰단냐(Aññākondañña, 憍陳如)이다. 지혜제일은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1)이며, 초능력의 으뜸은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2)이고, 청빈으로 으뜸은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3)이고, 세속을 초월한 눈을 가진 이는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4)이고, 가장 높은 가문의 출신은 밧디야 깔리고다야뿟따(Bhaddiya Kāligodhāyaputta)이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제일은 라꾼따까 밧디야(Lakunttaka-bhaddiya)이다. 사자후(獅子吼)를 하기로 제일인 자(者)는 삔돌라 바라드와자(Pindola Bhāradvāja)이며, 설교자(說敎者)로서 제일인 자는 뿐냐 만따리뿟따(Punna Mantāniputta)5)이고, 짧게 설해진 것을 상세하게 해설하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은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6)이다.”7)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생각으로 형상(形相)을 나타내기를 제일 잘하고, 마음을 해탈하는데 있어 교묘(巧妙)하기로 제일인 자는 쭐라빤타까(Cullapanthaka, 周利槃特)이다. 지(智)에 있어 해탈하는데 교묘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빤타까(Mahāpanthaka)이다. 평화로운 마음에 머물기로 제일이고 보시를 받을만하기로 제일인 자는 수부띠(Subhūti, 須菩提)8)이다. 숲 속에 살기로 제일인 자는 레와따 카디라와니야(Revata Khadiravaniya)이다. 마음의 평안이 제일인 자는 깡카레와따(Kankharevata)이다. 싫어함이 없이 부지런히 노력하기로 제일인 자는 소나 꼴리위사(Sona Kolivīsa)이다. 아름다운 말을 하기로 제일인 자는 소나 꾸띠깐냐(Sona Kutikanna)이다. 탁발을 잘 받기로 제일인 자는 시와리(Sīvali)이며, 믿는 마음이 굳기로 제일인 자는 밧깔리(Vakkali)이다.”9)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로 제일인 자는 라훌라(Rāhula, 羅睺羅)10)이다. 신심으로써 출가한 제일인 자는 랏타빨라(Ratthapāla)이다. 맨 처음으로 음식표를 탄 자는 꾼다다나(Kundadhāna)이다. 제일가는 시인은 방기사(Vangīsa)이며, 모든 사람을 분기(奮起)시키기로 제일인 자는 우빠세나 방간따뿟따(Upasena Vangantaputta)이다. 숙소 배정의 제일인 자는 닷바 말라뿟따(Dabba Mallaputta)이다. 제천인(諸天人)이 좋아하기로 제일인 자는 삘린다왓차(Pilindavaccha)이며, 기민(機敏)한 천분(天分)을 가지기로 제일인 자는 바히야 다루찌리야(Bāhiya Dārucīriya)이다. 설법이 정성스럽기로 제일인 자는 꾸마라깟싸빠(Kumāra-kassapa)이며, 지장(支障)없는 배당(配當)을 찬양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꼿티따(Mahākotthita)이다.”11)
“비구들이여! 내 제자로서 가장 많이 설법을 듣고 깊이 깨닫고, 기억력도 좋고, 태만하지 않고 그리고 또 내 옆에서 시봉하기로 제일인 자는 아난다(Ānanda, 阿難陀)12)이다. 많은 제자들로 둘러 쌓여있는 자는 우루벨라깟싸빠(Uruvela-kassapa)이며, 집집마다 기쁨을 주기로 제일인 자는 깔루다이(Kāludāyī, 迦樓陀夷)이며, 앓지 않는 것으로 제일인 자는 밧꾸라(Bakkula)이다. 전생에 관한 투시력이 제일인 자는 소비따(Sobhita)이며, 승단의 규율을 지키기로 제일인 자는 우빨리(Upāli, 優波離)13)이다. 여성 수행자들을 가르쳐 인도하기로 제일인 자는 난다까(Nandaka)이며,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등 제근(諸根)의 문(門)을 잘 지키기로 제일인 자는 난다(Nanda, 難陀)이다. 제자들을 교도하기로 제일인 자는 마하깟삐나(Maha-kappina)이며, 불에 관해 교묘하기로 제일인 자는 사가따(Sāgata)이며, 문제를 내세우기로 제일인 자는 라다(Radha)이며, 녹의(鹿衣)를 입기로 제일인 자는 모가라자(Mogharāja)이다.”14)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들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출가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내 성문(聲聞) 중의 첫째 비구로서, 너그럽고 어질며 아는 것이 많아, 능히 잘 권하고 교화하여 성스러운 무리[聖衆]들을 붙들어 기르면서 그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 이는 바로 아약구린(阿若拘隣)15) 비구요, 처음으로 법 뜻을 듣고 네 가지 진리[四諦]를 생각한 이도 바로 아약구린 비구요, 능히 잘 권하고 인도하여 사람들을 복으로 제도하는 이는 바로 우다이(優陀夷) 비구요, 빨리 신통을 이루어 중간에 후회가 없는 이는 바로 마하남[摩訶男]16) 비구요, 항상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발로 땅을 밟지 않는 이는 바로 선주(善肘) 비구요, 허공을 타고 다니면서 교화하되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이는 바로 파파(婆破)17) 비구이니라.
천상에 살기를 좋아하고 인간에 살지 않는 이는 바로 우적(牛跡) 비구요, 항상 오로(惡露)의 더럽다는 생각으로 관하는 이는 바로 선승(善勝) 비구요, 성스러운 무리[聖衆]들을 붙들어 기르되 네 가지로 공양하는 이는 우유비가섭(優留毘迦葉)18) 비구요, 마음이 고요하여 모든 결박을 항복 받는 이는 강가섭(江迦葉)19) 비구요, 모든 법을 밝게 관찰해 조금도 집착이 없는 이는 바로 상가섭(象迦葉)20) 비구이니라.”21)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로서, 얼굴이 단정하고 걸음이 조용한 이는 바로 마사(馬師)22) 비구요, 지혜가 끝이 없어 모든 의심을 푸는 이는 바로 사리불(舍利弗)23) 비구요, 신령스런 발을 가볍게 들어 시방으로 날아다니는 이는 바로 대목건련(大目揵連)24) 비구요, 용맹스레 노력하여 고행을 견디는 이는 바로 이십억이(二十億耳) 비구요, 열두 가지 두타(頭陀)의 얻기 어려운 행을 행하는 이는 바로 대가섭(大迦葉)25) 비구이니라.
하늘눈이 제일[天眼第一]이어서 시방을 두루 보는 이는 바로 아나율(阿那律)26) 비구요, 좌선해 삼매에 들어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이는 바로 이왈(離曰) 비구요, 능히 두루 권해 재강(齋講)을 베푸는 이는 바로 타라파마라(陀羅婆摩羅) 비구요, 승방을 세워 승려를 초대하여 베풀어 주는 이는 바로 소타라바마라(小陀羅婆摩羅) 비구요, 귀하고 큰 종족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이는 바로 라타파라(羅吒婆羅)27) 비구요, 진리를 잘 분별해 도를 펴 연설하는 이는 바로 대가전연(大迦旃延)28) 비구이니라.”29)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로서, 중대[籌]를 잘 받아 금하는 법을 어기지 않는 이는 군두파막(軍頭婆漠)30) 비구요, 외도(外道)를 항복 받고 정법(正法)을 행하는 이는 바로 빈두로(賓頭盧)31) 비구요, 병을 잘 보아 약을 주는 이는 바로 식(識) 비구요, 옷과 음식 등 네 가지로 공양하는 이도 바로 식(識) 비구요, 게송을 잘 지어 여래의 덕을 찬탄하는 이는 바로 붕기사(鵬耆舍)32) 비구요, 언론으로 밝게 가려 의심이 없는 이도 바로 붕기사 비구요, 네 가지 변재를 얻어 어려운 질문에도 곧 대답하는 이는 바로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33) 비구이니라.
깨끗하고 한가한 곳에 머물고 대중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바로 견뢰(堅牢) 비구요, 걸식하고 욕을 참으면서 비바람을 피하지 않는 이는 바로 난제(難提) 비구요, 혼자 고요히 앉아 알뜰히 도를 생각하는 이는 바로 금비라(金毘羅) 비구요, 한 번 앉아 한 번 먹고 자리를 옮기지 않는 이는 바로 시라(施羅) 비구요, 세 가지 옷을 가지고 먹고 쉬기를 떠나지 않는 이는 바로 부미(浮彌) 비구이니라.”34)
이 외에도 수많은 비구들의 이름과 그 특징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였습니다. 한역의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제자들의 이름 중에는 전혀 원어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의 출가 제자 부분과 한역의 [증일아함경] 제3권 제4 제자품(弟子品)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한역 [증일아함경]은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이 거의 확실하며, 현재의 형태는 대승불교 성립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증일아함경] 제1권 서품(序品)과 제2권 광연품(廣演品)에는 대승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법신상주설(法身常住說)과 정토사상(淨土思想)의 편린(片鱗)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35)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께서 제자들의 이름과 장점을 언제 설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증일아함경]의 첫 번째에는 우루벨라 깟싸빠(Uruvela-kassapa, 優樓頻螺迦葉), 나디 깟싸빠(Nadi-kassapa, 那提迦葉), 가야 깟싸빠(Gayā-kassapa, 伽耶迦葉) 등의 삼형제가 나란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붓다께서 당시 결발(結髮)의 행자(行者)였던 깟싸빠(Kassapa, 迦葉)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이 이끌고 있던 천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전도선언(傳道宣言)’ 직후였습니다. 그때는 아직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와 같은 2대 제자들이 승단에 들어오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어쨌든 붓다의 제자들은 각기 타고난 능력과 기질을 살려 그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한 몫을 다했습니다. 이처럼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은 각자 자기의 특색을 살려가며 수행과 교화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승단이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방불교에서는 붓다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열 명을 가려 뽑아 십대제자(十大弟子)36)라고 하여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십대제자로 정형화 된 것은 후대일 것입니다. 원래 붓다께서 제자들의 장점을 강조한 것은 각자의 능력과 특질을 높이 평가한 것일 뿐, 결코 제자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십대제자들만이 붓다의 최고 제자였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붓다께서 언제 제자들의 이름과 장점을 언급했느냐에 따라 그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록 십대제자의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Notes:
1)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는 십대제자 중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이다. 원래 목갈라나와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최초의 다섯 비구 중 한 사람이었던 아삿지(Assaji, 阿說示, 馬勝)로부터 붓다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2)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는 십대제자 중 신통제일(神通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이다. 원래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사리뿟따와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바라문교도들이 던진 돌에 맞아 입적하였다.
3)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는 십대제자 중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알려져 있다. 마가다국 출신으로, 엄격하게 수행하였다. 바라문의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가정생활을 싫어하여 아내와 함께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 때, 의장이 되어 그 모임을 주도하였다.
4)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는 십대제자 중 천안제일(天眼)제일(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난다(Ānanda, 阿難), 난다(Nanda, 難陀) 등과 함께 출가하였다. 붓다의 마지막 입멸을 지켜보았다.
5) 뿐냐 만따리뿟따(Punna Mantāniputta)는 십대제자 중 설법제일(說法第一)로 알려져 있다. 바라문 출신이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인도의 서쪽 지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거기서 입적하였다.
6)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는 십대제자 중 논의제일(論議第一)로 알려져 있다. 인도의 서쪽에 있던 아반띠(Avanti) 나라의 끄샤뜨리야 출신이다. 왕의 명령에 따라 붓다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하였다. 깨달음을 이룬 후 귀국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교리 해석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7)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3.
8) 수부띠(Subhūti, 須菩提)는 십대제자 중 해공제일(解空第一)로 알려져 있다.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 출신이다. 그는 공(空)의 이치를 설하는 경(經)에 자주 등장하여 설법하였다.
9)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4.
10) 라훌라(Rāhula, 羅睺羅)는 십대 제자 중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친아들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 출가하였다.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켰다고 한다.
11)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4.
12) 아난다(Ānanda, 阿難)는 십대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알려져 있다.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 난다, 아누룻다 등과 함께 출가하였다. 붓다의 나이 50여 세에 시자(侍者)로 추천되어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시봉하면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었다. 붓다께 여성의 출가를 세 번이나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개최된 제1차 결집 때, 법을 송출하였다. 이때 아난다 존자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세존의 법을 암송하면, 여러 비구들은 아난다의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정정한 후, 모두 함께 암송함으로써 경장(經藏)이 결집되었다.
13) 우빨리(Upāli, 優波離)는 십대제자 중 지계제일(持戒第一)로 알려져 있다. 우빨리는 노예계급인 수드라 출신이다.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아난다, 난다, 아누룻다 등이 출가할 때, 그들의 머리털을 깎아 주기 위해 따라갔다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계율에 엄격하였다. 붓다가 입멸한 직후, 라자가하 밖의 칠엽굴에서 행한 제1차 결집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함으로써 율장(律藏)의 성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4)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p.24-25.
15) 아약구린(阿若拘隣)은 팔리어 안냐꼰단냐(Aññā-kondañña)의 음역이다. 안냐꼰단냐를 아약교진여(阿若憍陳如) 혹은 지자교진여(智者憍陳如)라고도 번역한다. 안냐(aññā)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6) 마하남[摩訶男]은 팔리어 마하나마(Mahānāma)의 음역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7) 파파(婆破)는 팔리어 밧빠(Vappa)의 음역이다.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이다.
18) 우유비가섭(優留毘迦葉)은 팔리어 우루벨라 깟싸빠(Uruvela-kassapa)의 음역이다. 우루벨라 깟싸빠는 우루빈나가섭(優樓頻螺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9) 강가섭(江迦葉)은 팔리어 나디 깟싸빠(Nadi-kassapa)의 음역이다. 나디 깟싸빠는 나제가섭(那提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팔리어 나디(nadi)는 강(江)을 뜻한다. 따라서 강가섭은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20) 상가섭(象迦葉)은 팔리어 가야 깟싸빠(Gayā-kassapa)의 음역이다. 가야 깟싸빠는 가야가섭(伽耶迦葉)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팔리어 가야(gayā)는 코끼리[象]를 뜻한다. 따라서 상가섭은 위의 강가섭과 마찬가지로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21)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上)
22) 마사(馬師)는 최초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앗사지(Assaji, 阿說示, 馬勝)를 가리키는 것 같다.
23) 사리불(舍利弗)은 팔리어 사리뿟따(Sāriputta)의 음역이다.
24) 대목건련(大目揵連)은 팔리어 마하 목갈라나(Mahā-moggallāna)의 음역이다.
25) 대가섭(大迦葉)은 팔리어 마하 깟싸빠(Mahā-kassapa)의 음역이다.
26) 아나율(阿那律)은 팔리어 아누룻다(Anuruddha)의 음역이다.
27) 라타파라(羅吒婆羅)는 팔리어 랏타빨라(Ratthapāla)의 음역이다.
28) 대가전연(大迦旃延)은 팔리어 마하 깟짜나(Maha-kaccāna)의 음역이다.
29)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中)
30) 군두파막(軍頭婆漠)은 군두파한(軍頭婆漢)이라고도 표기한다.
31) 빈두로(賓頭盧)는 삔돌라 바라드바자(Pindola Bhāradvāja)의 음역이다.
32) 붕기사(鵬耆舍)는 방기사(Vangīsa)의 음역이다.
33)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는 마하꼿타따(Mahā-kotthita)의 음역이다.
34) [增一阿含經] 3권, 제4 弟子品(大正藏 2권, p.557中)
35) 한글대장경 [증일아함경] 1권, pp.3-6 참조.
36) 십대제자는 ①지혜제일(智慧第一)인 사리뿟따(Sāriputta, 舍利弗), ②신통제일(神通第一)인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lāna, 大目犍連), ③두타제일(頭陀第一)인 마하깟싸빠(Mahākassapa, 大迦葉), ④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부띠(Subhūti, 須菩提), ⑤설법제일(說法第一)인 뿐냐(Punna, 富樓那), ⑥천안제일(天眼第一)인 아누룻다(Anuruddha, 阿那律), ⑦논의제일(論議第一)인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 ⑧지계제일(持戒第一)인 우빨리(Upāli, 優婆離), ⑨밀행제일(密行第一)인 라훌라(Rāhula, 羅睺羅), ⑩다문제일(多聞第一)인 아난다(Ānanda, 阿難)를 일컫는다.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들
1) 초기의 비구니 상가
불교의 상가(Sangha, 僧伽)는 비구와 비구니의 이부중(二部衆)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상가는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구 상가와 비구니 상가에 우열(優劣)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불교교단사에서 비구니 상가가 성립된 것은 특기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도사회에서 여성이 집을 나와 집 없는 유행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유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당시 바라문들의 반발이었습니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게 되면 바라문의 사회제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양모(養母)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의 간청을 받아들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였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비구니 상가가 탄생했기 때문에, 아주 특출한 비구니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의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 상가가 없어졌지만, 붓다시대에는 비구니 상가가 잘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불교 교단에서 비구니들의 활동상황은 여러 문헌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2) 팔리 니까야에 언급된 비구니들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nikāya, 增支部)]에는 붓다의 뛰어난 제자들에 대해 붓다께서 직접 언급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서 비구니 제자들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의 여성문(女聲聞, sāvikā) 비구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다린 이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비구니요,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케마(Khemā) 비구니요, 초능력을 갖춘 이는 웃빨라완나(Uppalavannā) 비구니요, 계율에 능숙한 이는 빠따짜라(Patacāra) 비구니요, 설법을 매우 잘한 이는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요, 선정에 뛰어난 이는 난다(Nandā) 비구니이니라.
지칠 줄 모르고 정진한 이는 소나(Sonā) 비구니요, 투시력을 가진 이는 사꿀라(Sakulā) 비구니요, 속히 통달한 이[速通達]는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 비구니요, 과거의 생을 기억한 이는 밧다 까삘라니(Bhaddā- kapilānī) 비구니요, 대신통력을 얻은 이는 밧다 깟짜나(Bhaddā-kaccānā) 비구니요, 조잡한 가사를 두른 이는 끼사고따미(Kisāgotamī) 비구니요, 믿음을 실현한 이는 시갈라마따(Sigālamātā) 비구니이니라.”1)
위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에 언급된 열세 명의 비구니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비구니는 붓다의 양모이며,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아내였습니다. 그녀가 최초로 상가에 들어옴으로써 비구니 상가가 형성되었습니다.
② 케마(Khemā) 비구니는 빔비사라(Bimbisāra) 왕의 왕비로서 외모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습니다. 붓다는 신통력으로 아름다운 요정(妖精)을 불러내어, 그 요정이 늙어가는 과정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만심을 꺾고 붓다께 귀의했습니다.
③ 웃빨라완나(Uppalavannā) 비구니는 몸이 푸른 연꽃의 색깔과 비슷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에 그녀가 남긴 시 12편이 실려 있는데, 참으로 눈물겹습니다.2)
④ 빠따짜라(Patacāra) 비구니는 율장의 숙련자(vinaya-pitake cinna-vasī)였습니다. 그녀는 많은 여성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테리가타]에 그녀가 남긴 시 5편이 실려 있으며,3) 그녀의 제자들이 읊은 시들도 많이 실려 있습니다.
⑤ 담마딘나(Dhammadinnā) 비구니는 비사카(Visākha)의 아내였는데, 남편의 동의를 얻어 출가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황금 가마에 아내를 태워 비구니 승원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적한 곳에 머물며 정진하여 네 가지 무애해(無碍解, patisambhidā)와 함께 아라한과를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붓다께 예배드리기 위해 라자가하로 돌아갔는데, 전 남편 비사카가 그녀에게 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과 답변이 [쭐라웨달라 숫따(Cūlavedalla Sutta, 有明小經)]4)에 실려 있습니다.5) [테리가타]에 그녀의 시 1편이 남아있습니다.6)
⑥ 난다(Nandā) 비구니는 순다리 난다(Sundari Nandā) 또는 자나빠다 깔랴니(Janapada-kalyānī)로 불렸습니다. 자나빠다 깔랴니는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라의 미인[國美] 또는 ‘지방의 미인’ 으로 번역됩니다. 그녀도 케마 비구니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신통력에 의해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⑦ 소나(Sonā) 비구니는 열넷 명이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던 때문에 바후뿟띠까(Bahuputtikā)라고 불렸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자식들에게 넘겨준 뒤, 자식들의 박대에 충격을 받고 출가하였습니다. 그녀는 늦게 출가하였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법구경] 제115게7)는 소나 비구니에게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입니다.
⑧ 사꿀라(Sakulā) 비구니는 빠꿀라(Pakulā) 또는 바꿀라(Bakulā)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제따와나(Jetavana, 祇園) 봉정식에 참석했다가 붓다를 뵙고 믿음을 일으켜 재가 신자로 신행하다가 나중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녀는 명상을 통해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붓다로부터 천안(天眼)제일로 칭송받았습니다.
⑨ 밧다 꾼달라께사(Bhaddā Kundalakesā) 비구니는 처음 자이나교에 입단하여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렸습니다. 그런 뒤 다시 빽빽하게 곱슬머리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곱슬머리’라는 뜻의 꾼달라께사(Kundalakesā)가 그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이나교도들의 지혜가 빈약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자이나교를 떠나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 승단에 들어왔습니다.
⑩ 밧다 까삘라니(Bhaddā-kapilānī) 비구니는 [아빠다나(Apadāna, 譬喩經)]에 의하면,8) 그녀의 어머니는 수찌마띠(Sucīmatī)였고, 그녀의 아버지는 까삘라(Kapila)였습니다. 그래서 ‘까삘라의 딸’이라는 뜻의 까삘라니(Kapilānī)로 불렸습니다.9) 그녀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 의해 승단에 들어왔습니다.
⑪ 밧다 깟짜나(Bhaddā-kaccānā) 비구니는 그녀의 머리까락이 황금색이었기 때문에 깐짜나(Kañcanā, 黃金)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녀는 라훌라(Rāhula, 羅睺羅)의 어머니, 즉 야소다라(Yasodharā)라고 합니다. 하지만 야소다라라는 이름은 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고, [테리가타]나 [아빠다나]에도 이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아빠다나]10)에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한번 나옵니다.11)
⑫ 끼사고따미(Kisāgotamī) 비구니는 고따마족 출신이었는데, 죽은 아들과 그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겨자씨를 구하고자 쓸데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12)
⑬ 시갈라마따(Sigālamātā) 비구니는 미얀마 필사본에서는 삔갈라마따(Pingala-mātā)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테리가타]에는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확히 ‘시갈라(Sigāla)의 어머니’로 불렸습니다. [아빠다나]13)에서 그녀는 싱갈라까 마따(Singālaka-mātā)와 시갈라까 마따(Sigālaka- mātā)로 불렸습니다. 시갈라는 여섯 방위에 예배했던 청년이었는데, 붓다께서 그에게 설한 가르침이 바로 [시갈로와다 숫따(Sigālovāda Sutta, 敎誡尸迦羅越經)]입니다. 그녀는 믿음에 의해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비구니들의 명단은 비교적 초기에 두각을 나타낸 비구니들입니다. [테리가타]에는 92명의 장로니(長老尼)들의 이름과 시구(詩句)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소개한 13명은 이 중에서 극히 일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명의 비구니 중에서 밧다 깟짜나와 시갈라마따를 제외한 나머지 비구니들이 남긴 시가 [테리가타]에 실려 있습니다.
2) [증일아함경]에 언급된 비구니들
다음은 한역의 [증일아함경] 제5 비구니품(比丘尼品)에 나타난 붓다의 뛰어난 비구니 제자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내 성문(聲聞)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오랫동안 집을 나와 도를 배워 국왕의 존경을 받는 이는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14) 비구니요, 지혜롭고 총명한 이는 식마(識摩)15) 비구니요, 신족(神足)이 으뜸이어서 모든 신들을 감동시키는 이는 우발화색(優鉢華色)16) 비구니요, 두타법의 열한 가지 제한에 걸림 없이 행하는 이는 기리사구담미(機梨舍瞿曇彌)17) 비구니요, 하늘눈이 으뜸이어서 걸림 없이 비추는 이는 사구리(奢拘梨)18) 비구니이니라.
앉아 참선해 선정에 들어 마음이 흩어 지지 않는 이는 사마(奢摩) 비구니요, 이치를 분별해 널리 도를 펴는 이는 파두란사나(波頭蘭闍那) 비구니요, 계율을 받들어 가져 범하지 않는 이는 파라차나(波羅遮那)19) 비구니요, 믿음의 해탈을 얻어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 이는 가전연(迦旃延) 비구니요, 네 가지 변재를 얻어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최승(最勝) 비구니이니라.”20)
(2)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자기 전생의 수없는 겁의 일을 아는 이는 발타가비리(拔陀迦毘離) 비구니요, 얼굴이 단정하여 남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이는 혜마사(醯摩闍) 비구니요, 외도를 항복받아 바른 교를 세우는 이는 수나(輸那) 비구니요, 이치를 분별하여 널리 갈래를 설명하는 이는 담마제나(曇摩提那)21) 비구니이니라.
더러운 옷을 입고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이는 우다라(優多羅) 비구니요, 모든 감관이 고요하고 그 마음이 한결같은 이는 광명(光明) 비구니요, 옷을 잘 바루어 언제나 법다운 이는 선두(禪頭) 비구니요, 여러 가지를 논의하되 의심이나 걸림이 없는 이는 단다(檀多) 비구니요, 게송을 잘 지어 여래의 덕을 찬탄하는 이는 천여(天與) 비구니요, 많이 듣고 널리 알며 은혜와 지혜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이는 구비(瞿卑) 비구니이니라.”22)
(3)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항상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사람 속에 살지 않는 이는 무외(無畏) 비구니요, 몸을 괴롭혀 걸식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는 이는 비사거(毘舍佉) 비구니요, 한 곳에 한 번 앉아 쉽게 자리를 옮기지 않는 이는 발타바라(拔陀婆羅) 비구니요, 두루 다녀 구걸하면서 사람을 널리 제도하는 이는 마로가리(摩怒呵利) 비구니요, 도의 결과를 빨리 이루어 중간에 지체하지 않았던 이는 타마(陀摩) 비구니요, 세 가지 옷을 가져 끝내 버리지 않는 이는 수타마(須陀摩) 비구니이니라.
항상 나무 밑에 앉아 뜻을 쉽게 바꾸지 않은 이는 협수나(拹須那) 비구니요, 늘 노지(露地)에 머물면서 덮개 있는 집에 머물기를 생각하지 않는 이는 사타(奢陀) 비구니요, 호젓하고 고요한 곳을 즐겨 사람 속에 있지 않는 이는 우가라(優迦羅) 비구니요, 항상 풀 자리에 앉아 옷차림을 하지 않는 이는 이나(離那) 비구니요,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고 차례로 걸식하는 이는 아로파마(阿奴波摩) 비구니이니라.”23)
(4)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쓸쓸한 무덤 사이를 즐기는 이는 우가마(優迦摩) 비구니요, 생물들을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많은 여행을 한 이는 청명(淸明) 비구니요, 도에 이르지 못한 중생을 슬피 여기는 이는 소마(素摩) 비구니요, 도를 얻은 이를 기뻐하고 소원이 일체에 미치는 이는 마타리(摩陀利) 비구니요, 모든 행을 단속하여 뜻이 멀리 떠나지 않는 이는 가라가(迦羅伽) 비구니이니라.
공(空)을 지키고 빈 것을 잡아 ‘없음’을 깨달은 이는 제바수(提婆修) 비구니요, 마음이 생각 없음을 즐겨해 모든 집착을 버린 이는 일광(日光) 비구니요, 구함 없기를 닦아 익히어 마음이 항상 넓은 이는 말나바(末那婆) 비구니요, 모든 법에 의심이 없어 한량없이 사람을 제도하는 이는 비마달(毘摩達) 비구니요, 진리를 널리 설명해 깊은 법을 분별하는 이는 보조(普照) 비구니이니라.”24)
(5) “내 성문 중의 첫째 비구니로서, 마음에 욕됨을 참는 것을 품어 땅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하는 이는 담마제(曇摩提) 비구니요, 사람을 잘 교화해 시주 모임을 만들게 하는 이는 수야마(須夜摩) 비구니요, 자리를 준비하는 이도 또한 수야마(須夜摩) 비구니요, 마음이 아주 평온해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이는 인타사(因陀闍) 비구니요, 모든 법을 밝게 관찰하되 만족할 줄 모르는 이는 용(龍) 비구니이니라.
뜻이 굳세고 용맹스러워 물들지 않는 이는 구나라(拘那羅) 비구니요, 물 삼매[水三昧]에 들어 일체를 두루 적시는 이는 바수(婆須) 비구니요, 불꽃 빛 삼매[焰光三昧]에 들어 모든 중생을 두루 비추는 이는 항제(降提) 비구니요, 오로(惡露)의 더러움을 관하여 연기(緣起)를 분별하는 이는 차바라(遮婆羅) 비구니요, 그의 모자람을 주어 여러 사람을 기르는 이는 수가(守迦) 비구니요, 내 성문 중에서 최후로 제일가는 비구니는 발타군타라구이국(拔陀軍陀羅拘夷國)25) 비구니이니라.”26)
위에서 인용한 한역 [증일아함경]의 제5 비구니품의 첫 번째 부분이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와 그 내용이 가장 비슷합니다. 그 나머지 부분에 언급된 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그 원래 이름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Notes:
1) Anguttara-nikāya(PTS), Vol. Ⅰ, p.25.
2) Therīgāthā, v.224-235.
3) Therīgāthā, v.112-121.
4) Majjhima-nikāya(PTS), Vol. Ⅰ, p.299ff.
5) G. 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Ⅰ, pp.1142-3.
6) Therīgāthā, v.12.
7) Dhammapada v.115; “성스러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라도 부처님의 위없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알고 사는 것이 훨씬 낫다.”
8) Apadāna(PTS), Vol. Ⅱ, p.583 (vs.57).
9) G.P. Malalasekera,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Vol. Ⅱ, p.354, no.1.
10) Apadāna(PTS), Vol. Ⅱ, p.584.
11) F. L. Woodward, The Book of The Gradual Sayings(Anguttara-nikāya), London: PTS, 1932, p.22, no.3.
12) DhpA. Ⅱ, 270; SA. on S. I, 129.
13) Apadāna(PTS), Vol. Ⅱ, p.603f.
14)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는 팔리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의 번역이다. 대애도(大愛道)는 마하빠자빠띠(Mahāpajāpatī)의 의역이고, 구담미(瞿曇彌)는 고따미(Gotamī)의 음역이다. 그러므로 대애도구담미(大愛道瞿曇彌)는 의역과 음역의 혼합형이다.
15) 식마(識摩)는 참마(讖摩)의 오식(誤植)으로 보이며, 이것은 팔리어 케마(Khemā)의 음역이다.
16) 우발화색(優鉢華色)은 팔리어 웃빨라완나(Uppalavannā)의 번역인데, 음역과 의역의 혼합형이다. 이것을 연화색(蓮華色)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팔리어 웃빨라(Uppala)는 푸른 연꽃[靑蓮]이고, 완나(vanna)는 색(色)이다. 그러므로 연화색은 완전한 의역이다.
17) 기리사구담미(機梨舍瞿曇彌)는 팔리어 끼사 고따미(Kisā-gotamī)의 음역이다.
18) 사구리(奢拘梨)는 팔리어 사꿀라(Sakulā)의 음역이다.
19) 파라차나(波羅遮那)는 팔리어 빠따짜라(Patācārā)의 음역이다.
20)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8下)
21) 담마제나(曇摩提那)는 팔리어 담마딘나(Dhammadinnā)의 음역이다.
22)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上)
23)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上-中)
24)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中)
25) 발타군타라구이국(拔陀軍陀羅拘夷國)은 팔리어 밧다 꾼다라께사(Bhaddā Kundalakesā)의 번역이다.
26) [增一阿含經] 3권, 제5 比丘尼品(大正藏 2권, p.559中-下)
[출처] 마성스님/붓다의 마지막 여로|작성자 양벌리영어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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