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

스리랑카 불교 법난사 [마성]

수선님 2020. 4. 5. 11:20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

 

마성 지음


머 리 말

'스리랑카의 불교법난사'는 주간불교신문사에서 기획한 세계불교법난사(法難史) 시리즈 가운데 스리랑카편만을 별도로 묶은 것이다. 세계불교법난사의 스리랑카편은 1997 10 14(505)부터 98 5 12(532)까지 1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매회 마다 별도의 소제목을 붙였다.

이 글은 남방 상좌부 불교와 스리랑카의 불교와 문화에 관한 상식이 전혀 없는 한국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쉽게 쓸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 방면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그래도 생소한 감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인명(人名)과 지명(地名) 등은 부득이 원음 그대로 표기했는데, 이 때문에 난해한 글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한편 이 글은 신문에 연재한 것이기 때문에, 불충분한 점이 많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충분하게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고, 둘째는 신문 제작 특성상 자세한 주석과 출처를 밝히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차후 자세한 주석과 내용을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신문에 연재한 그대로의 글일지라도 스리랑카의 불교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소책자로 묶어서 널리 보급하게 되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1998 8 15

가야사에서
이마성 합장


차 례


1. 法難 극복한 스리랑카불교 (제505호, 97.10.14.)
2. 불교전래 이전의 세일론 (제507호, 97.10.29.)
3. 세일론불교의 公認 國敎化 (제509호, 97.11.11.)
4. 싱할라불교 민족주의 (제511호, 97.11.25.)
5. 大寺 無畏山寺 대립 (제513호, 97.12.09.)
6. 포르투갈인에 의한 법난 (제518호, 98.01.20.)
7. 네덜란드인에 의한 법난 (제520호, 98.02.10.)
8. 영국인에 의한 법난(1) (제522호, 98.02.24.)
9. 영국인에 의한 법난(2) (제527호, 98.04.07.)
10.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운동 (제532호, 98.05.12.)


1. 法難 잘 극복한 스리랑카불교

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다. 옛날에는 땀바빤니(Tambapanni, 銅葉洲랑카디파(Lankadipa, 楞伽島사자주(師子洲, Sinhala)·사자국(獅子國세일론(Ceylon, 錫蘭)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현재의 국명인 스리랑카(Sri Lanka) 19726월부터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세일론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나라는 일찍이 사자와의 인연에 의해 건국되었다. 세일론의 고대 역사서인 <마하방사(Mahavamsa, 大史)>에 의하면, 이 나라는 붓다의 입멸 당시인 서력기원전 5세기경 인도의 위자야(Vijaya) 왕자가 세일론으로 건너와 사자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후예를 싱할라(Sinhala)족이라 하는데, 싱하(Sinha)는 사자(Lion)를 의미한다. 현재 스리랑카의 상징인 국기도 사자가 칼을 물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으로 세일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세일론은 싱할라인들을 지칭하는 서양식 발음이다. 따라서 자존심이 강한 싱할라인들이 이 이름을 좋아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원래의 자기 나라 이름 가운데 하나인 '랑카 디파(Lankadipa)'에서 섬이라는 의미의 디파(dipa)를 빼 버리고 길상 혹은 영광이라는 의미의 스리(Sri)를 첨가하여 '스리랑카'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원래의 국명으로 환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국명에 사용된 '랑카(Lanka)'의 어원도 사자(lion)에서 유래된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국명변경 이전을 가리킬 때는 '세일론'이라 칭하고, 국명을 변경한 1972 6월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지칭할 때는 '스리랑카'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세계불교 국가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스리랑카이다. 사실 스리랑카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방 상좌부(上座部) 불교의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오늘날의 세계불교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스리랑카불교는 화려한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때는 상가(Sangha, 僧伽)가 단절되는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되겠지만, 이러한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태국과 미얀마 스님들을 초빙하여 상가를 복구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세일론은 16세기부터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통치하에 들어갔다. 1505년부터 1658년까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고, 1658년부터 1796년까지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으며, 1815년부터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1948년 독립했다. 이와 같이 세일론은 440년간 식민지 통치를 받으면서 과거의 찬란했던 불교문화와 전통은 무참하게 파괴되고 짓밟혔다.

 

이런 와중에서 상가를 유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상가의 법맥이 단절되고 만다. 현재의 스리랑카 상가는 그 이후 복구한 것으로써, 씨암(Siam-Nikaya), 아마라푸라(Amarapura-Nikaya), 라만냐(Ramanna- Nikaya) 3개의 종파가 있다.

 

씨암파는 1753년 태국스님을 초청하여 비구계를 받은 계통이며, 일명 우빨리(Upali)파라고도 한다. 씨암이란 태국의 옛 국명이다. 이것은 태국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았기 때문에 남의 나라 이름이 그대로 종파명이 된 경우이다.

 

아마라푸라는 1802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아마라푸라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계통이다. 라만냐파는 아마라푸라파와 마찬가지로 버마의 페구왕조 때 전승해 온 승단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상가를 복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고수해 왔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스리랑카불교는 이러한 비운(悲運)의 법난을 겪었기 때문에 불교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더 불교를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법난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된 셈이다.

 

한편 세일론불교는 처음 인도 아쇼까(Asoka)대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장로를 통해 상좌부(Theravada) 불교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세일론의 옛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위치한 마하 위하라(Maha-vihara, 大寺)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그런데 그 후 서력 기원전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왕이 아비야기리 위하라(Abhiyagiri-vihara, 無畏山寺)를 건립하여 마하팃사(Mahatissa)장로께 헌납함으로써 세일론의 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둘로 나뉘어졌다.

 

대사파는 지금의 상좌부 불교이고, 무외산사파는 대중부의 사상을 받아들인 개방적인 승단이었다. 역대의 왕들 가운데 나중에 들어온 무외산사파를 지지한 사람도 많았다. 특히 마하세나(Mahasena, 334-362년 재위)왕 집권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의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다.

 

오늘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가 팔리어로 전해진 팔리삼장(巴利三藏)이다. 이 팔리삼장(Pali Tipitaka)이 전승되게 된 배경은 대사파와 무외산사파의 대립 시기에 대사파쪽에서 정법수호의 차원에서 이룩한 것이다. 당시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팔리삼장을 싱할리어(세일론어)로 편찬, 서사하였는데, 이러한 경전 편찬 사업은 왕의 지원없이 순수한 대사파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훗날 이 싱할리어로 씌어진 팔리삼장은 다시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에 의해 팔리어로 번역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지만, 그 배경은 법난 극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수확이다. 마치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몽고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장경판을 조성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사파와 무외산사파의 갈등은 오래 계속되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대승을 표방한 무외산사파는 세일론 땅에서 영원히 추출된다. 그리하여 세일론 불교는 순수한 상좌부 전통을 고수하게 되는데, 상좌부의 입장에서 보면 법난을 잘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세일론 불교사에서 법난 극복에 실패한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11세기 초엽 시바교도인 남인도의 촐라(Chola)인들이 침입하여 왕도(王都) 아누라다푸라가 함락되고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비구니 상가는 절멸되고 만다. 이후 세일론에서는 비구니 상가를 복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스리랑카에는 비구니 교단이 없다.

 

비구니 교단이 없는 것은 태국·미얀마·캄보디아 등 다른 남방불교국도 마찬가지이다. 세일론에서 비구니 상가가 단절될 무렵 다른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비구니 상가의 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는 상좌부의 비구니 상가는 영원히 복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일론 불교는 흥망과 성쇠를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왔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극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법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것이다. 이런 법난 극복의 과정에서 영웅적인 인물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에는 세일론 출신 스님도 있지만, 올코트(Henry Steele Olcott, 1832-1907) 대령과 같은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올코트와 같은 외국인의 헌신적인 불교부흥 운동에 자극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던 싱할라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다시 불교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이러한 법난 극복의 경험을 살려 인도불교의 부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의 인도불교를 회생시킨 것은 스리랑카 출신의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Anagarika Darmapala, 1864-1933)에 의해서 였다. 그가 창립한 대각회(大覺會, Mahabodhi Society)는 지금도 스리랑카의 스님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법난과 관련된 스리랑카 불교사를 훑어보았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에 대해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보다 자세하게 살펴볼 생각이다.

 

2. 불교전래 이전의 세일론

스리랑카는 지리적으로 인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반분야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양국간의 오랜 유대로 말미암아 스리랑카는 인도와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했다.

기원전 3세기경 인도의 전도사들이 세일론에 불교를 가지고 들어올 때,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불교인도(Buddhist India)의 문화와 문명까지 이식시켰다. 처음 세일론에 불교를 전한 전도사들은 당시 세일론의 토착문화를 무시하고,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인도의 풍습을 유지했다. 불교의례·의식·축제와 세일론의 관례 등은 모두 이때 변화하거나 수정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와 세일론을 연결시켜 준 고리였다. 특히 불교사적으로는 인도와 세일론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불교사를 논할 때 세일론의 역사를 배제할 수 없고, 세일론불교사를 다룰 때 인도불교의 당시 사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세일론의 전승 기록에 따르면, 붓다의 입멸은 마가다국의 아사세왕(Ajatasattu, 아사세왕)이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해였다고 한다. 아사세왕은 부왕 빔비사라(Bimbisara)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영명한 군주로서 중인도의 각지를 정복하여 마가다의 왕권을 굳건히 했다. 이 왕조는 그 후 몇 대에 걸쳐 존속되었지만 나가다사카(Nagadasaka)왕 시대에 백성들에 의해 쓰러지고 대신인 수수나가(Susunaga)가 왕위에 올라 수수나가 왕조를 건설했다고 한다. 이 시대에 아반티(Avanti)도 마가다에 정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수나가 왕조도 멀지 않아 멸망하고 난다(Nanda) 왕조로 교체되었다. 난다 왕조는 인도의 보다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고 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과 22년의 통치 끝에 이 왕조도 멸망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대군을 이끌고 서북인도에 침입한 것은 B.C.326년으로서, 바로 이 왕조의 시대였다. 그러나 대왕은 서북인도를 정복했을 뿐이며, 군을 되돌려 돌아가던 중 323년에 바빌론에서 객사했다. 그 때문에 인도의 중원(中原)은 그리스인에게 정복되는 것을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인의 침입이라는 혼란 뒤에, 청년 찬드라굽타(Chandragupta)가 군사를 일으켜 재상 카우틸야(Kautilya)의 도움으로 난다 왕조를 넘어뜨리고 마우리야(Maurya, 孔雀) 왕조를 창시한 것이다. 그는 서북인도에서 그리스인의 세력을 일소하고 전인도를 정복하여 강대한 왕국을 건설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지방의 비천한 계급 출신이었다고 한다. 당시 정통 바라문이 정식으로 크샤트리아로 인정하지 않은 마우리야족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전란의 와중에 판잡(Panjab)지방에서 거병하여 난다 왕조의 9대 다나난다 왕을 격멸하고 마우리야 왕조를 수립하였다. 마우리야 왕조의 세력은 매우 강대했다. 북으로는 히말라야산맥에서 남으로는 빈디야(Vindhya)산맥을 넘어 남인도의 일부, 동으로는 벵갈만에서 서로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찬드라굽타왕은 기원전 317년부터 293(24년간)에 걸쳐 통치하였으며, 그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 B.C.293-268)이다. 그는 28년간 통치하면서 각지에 잔존하던 반란세력을 진압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 빈두사라왕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아쇼카(Asoka, 阿育王)대왕이다. 그가 왕위를 계승한 것은 B.C.268년경이다.

주지하다시피 인도불교사에서 불교가 크게 발전하였던 시기는 아쇼카왕의 재위(B.C.268-232년경) 기간이었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인도와 세일론의 국교로 만든 최초의 왕이었다. 세일론은 아쇼카 왕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은 이래 싱할라인의 통치권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불교국가였다. 이처럼 아쇼카왕이 불교에 기여한 업적은 대단하다. 아쇼카왕의 업적 가운데 세일론불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건은 인도의 변방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한 것이다.

세일론의 고대 역사서인 <大史(Mahavamsa)>의 기록에 따르면, 아쇼카왕의 스승이었던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장로는 아쇼카왕의 원조아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에서 제3결집을 행하여 정법을 확립하고, 세일론을 포함한 9개국에 전도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이때 파견된 전도사와 지역 혹은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1)맛잔티카(Majjhantika, 末單提)는 캐시미르(Kasmira)와 간다라(Gandhara), 2)마하데바(Mahadeva, 大天)는 마히삼만달라(Mahisamandala), 3)락키타(Rakkhita)는 반나바시(Vanavasi)에 파견되었다. 4)담마락키타(Dhammarakkhita)는 아파란타카(Aparantaka)에 파견되었는데, 그는 그리스인이었다고 한다. 5)마하담마락키타(Mahadhammarakkhita)는 마하랏타(Maharattha)에 파견되었고, 6)맛지마(Majjhima)는 히마반타파데사(Himavantapadesa)에 파견되었다. 7)소나카(Sonaka)와 웃타라(Uttara)는 수반나부미(Suvannabhumi, 金地國)에 파견되었으며, 8)마힌다(Mahinda)는 랑카디파(Lankadipa, 세일론섬)에 파견되었다. 그런데 맛잔티카는 개시미르와 간다라 두 곳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도합 9개국이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일론에는 아쇼카왕의 친아들 마힌다 장로가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일론의 팔리 전승 기록에 따르면,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의 지시로 아쇼카왕은 불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때까지는 단지 필요한 것을 보시하는 자(Paccayadayaka)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황제 자신이 불법의 상속자(Sasanadayada)가 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밋타(Sanghamitta)를 상가(Sangha, 僧團)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승단에 들어온 마힌다와 상가밋타를 특별히 세일론으로 파견한 것은 당시 인도의 아쇼카왕과 세일론의 데바남피야 팃사(Devanampiya Tissa)왕 사이의 각별한 친분 때문이었다.

세일론의 전도사로 결정된 마힌다는 세일론으로 가기 위해 산치(Sanchi)부근의 베디사산(Vedisagiri) 정사에서 여장을 갖추고 어머니께 작별을 고한 다음, 다른 4명의 비구와 함께 세일론으로 갔다고 한다. 그들의 행로는 웃제니(Ujjeni)에서 인도 서해안으로 나와 해안을 따라서 배편으로 남하하여 인도반도의 첨단을 돌아 세일론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힌다 장로 일행이 세일론에 도착할 당시, 기원전 3세기경 세일론의 수도는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였다. 처음 판두카바야(Pandukabhaya, B.C. 377- 307년 재위)왕이 처음 이곳에 수도를 정한 이후 12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불교 전래 이전의 세일론은 국가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이 아니었다. 지방과 연결된 중앙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우두머리를 왕이라고 볼 수도 없다. 초기 싱할라 왕족의 호칭으로 가장 공통적으로 많이 사용한 말이 가마니(Gamani)인데, 이 말은 지방 자치제의 수령을 뜻하는 고전범어(Vedic) 가라마니(Gramani)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세일론의 왕들은 크샤트리야(Ksatriya)가 아니고, 바이샤(Vaisya) 계급이었는데, 그들은 크샤트리야 계급이라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유명한 왕족 가운데에도 바이샤 태생이 있었다.

세일론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인 데바남피야 팃사왕 이전에는 왕들의 즉위식, 즉 대관식도 없었다. 아마 가마니(Gamani)에 불과한 초기의 왕들은 완전한 왕의 즉위식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통치자로서의 권한을 인수했을 때, 통치자로서 직무를 수행한다는 간소한 의식뿐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왕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신성화하기 위해서 즉위식 때 인도의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의 처녀를 왕비로 삼았다.

<마하밤사 티카(Mahavamsa-tika, 大史註釋書>에는 아쇼카왕이 세일론에 대관식의 완전한 절차를 전해주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데바남피야 팃사가 왕위를 계승하자 곧바로 파탈릴풋타에 있는 아쇼카왕에게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선물을 보냈다. 아쇼카왕은 그의 왕족과 친분이 있는 세일론에 답례로 보낼 적당한 선물을 고르기가 어려웠는데, 당시 세일론에는 왕의 즉위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 주었다. 아쇼카왕이 보내준 물건과 절차에 따라 데바남피야 팃사는 두 번째로 완전하게 대관식을 거행했다.

세일론왕의 원래 이름은 '팃사'였는데, 아쇼카왕이 세일론의 왕을 황제로 대접하여 '데바남피야(Devanampiya)'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세일론에서 데바남피야 팃사 이전에는 이 칭호를 사용한 왕이 없다. '신의 은총'이라는 데바남피야는 아쇼카왕 이전까지 인도의 왕들에 의해 사용된 호칭이다.

이와 같이 두 나라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이미 건국 초기부터 유지되었다. 세일론을 건국한 비자야(Vijaya, 483-445B.C)는 남인도 판디야(Pandya) 지방의 마두라(Madura)로부터 온 처녀를 아내로 삼았다. 마두라의 왕은 코끼리 마차 장인(匠人)을 포함한 18조합의1,000명이나 되는 가족들을 사위에게 보냈다. 비자야는 그의 장인에게 가치 있는 진주와 같은 선물을 보냄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지속했다. 비자야의 조카 판두바수데바(Panduvasudeva)는 북인도에서 온 사카(Sakya) 공주와 결혼하는데 성공했다. 나중에 그녀의 오빠가 세일론에 와서 섬의 여러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 불교 전래 이전의 세일론왕 가운데 가장 훌륭했던 판두카바야(Pandukabhaya)는 북인도에서 온 여섯 삭카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인 디가유(Dighayu)의 손자였다. 판두카바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싱할라왕들의 혈통을 추적하면 붓다의 혈통이었던 삭카족과 통한다.

이와 같이 인도와 세일론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고대 인도와 세일론 사이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때가 데바남피야 팃사 통치 시대였다. 아쇼카왕은 데
바남피야 팃사와의 친분에 의해 그의 친아들 마힌다와 친딸 상가밋타를 세일론에 보내 불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이것은 아쇼카왕의 염원이었던 '법의 정복(Dhamma-vijaya)'을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세일론불교의 公認 國敎化

세일론의 불교전래는 기원전 3세기 중엽 랑카섬으로 건너온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의 덕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록 이것이 세일론불교의 공식적인 전래로 여긴다 할지라도, 일찍이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 그리고 인도의 강력한 불교황제의 위대한 활동에 대한 소식이 전혀 섬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위자야(Vijaya)의 시대로부터 인도와 세일론 두 나라 사이의 유대는 변치 않고 지속되었다. 남인도의 빤디얀(Pandyan)들은 부처님의 일생동안 활동 무대였던 중부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전통 아리얀의 크샤트리아 종족이었다. 빤디얀 가족들이 처음 세일론에 왔을 때,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왔을 것이며, 그들 중의 몇 명은 이미 불교도였을 것이다. 세일론을 껴안고자 했던 아쇼카왕의 사회적 활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쇼카왕의 외교 사절들은 이미 마힌다가 섬으로 오기 전에 세일론을 방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록 국민들이 이처럼 불교를 알고 있었고, 그들이 섬의 여러 곳에 불교도로 흩어져 있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조직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마힌다가 도착하기 전에는 일정한 종교의 구성 요소가 되는 비구가 없었다.

마힌다는 다른 4명의 비구와 함께 세일론으로 왔다. 마힌다가 그들을 데리고 온 목적은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구족계(Upasampada)를 수여하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다.

붓다재세시의 초기교단에서는 10명의 비구로 상가를 구성토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마하캇차나(Mahakaccana, 대가전연)가 자신의 출신지인 인도 서해안 지방의 아반티(Avanti)와 닥키나파타(Dakkhinapatha)에서 교화할 때, 변두리 지방에서 10명의 비구를 모으기가 어려워 상가를 구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 소나쿠티칸나(Sonakutikanna, 億耳)를 보내 계율에 관한 다섯 가지 예외[五事]를 허가해 주도록 부처님께 요청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변방지역에서는 5명의 비구로 상가를 조직하여 구족계를 수여할 수 있도록 요청했는데, 부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 이후 타지방으로 전도를 떠날 때는 5명의 비구가 한 조를 이루게 되었다.

마힌다 일행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그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수나마(Sumana)라는 사미(沙彌, samanera)는 그의 누나 상가밋따(Sanghamitta)의 아들이었으며, 반두까(Bhanduka)라는 남자신도(Upasaka)는 그의 이모 딸의 아들이었다. 그들을 일행에 포함시킨 것은 세일론에 대한 특별한 친교와 우정을 의미한다.

팔리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 따르면, 마힌다와 데와남삐야 팃사왕과의 첫 만남은 왕이 아누라다푸라로부터 동쪽으로 약 8마일 떨어진 지금의 미힌딸레(Mihintale)로 알려져 있는 밋싸까-빳바따(Missaka-pabbata)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데와남삐야 팃사왕은 그의 친구 아쇼카왕으로부터 항상 불교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들의 첫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마힌다는 왕의 지성과 이해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언뜻 보아서 간단하고 쉬운 질문이었지만, 왕의 대답은 명쾌했다. 마힌다는 이 시험을 통해 왕이 매우 영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힌다는 데와남삐야 팃사왕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성을 갖추었다고 확신하고, 곧바로 그에게 <상적유소경(象跡喩小經, Culahatthipadopama-sutta)>을 설했다. 마힌다가 그의 첫 설법에서 이 경을 선정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이 경은 불법승 삼보의 개념이 명료하게 설해져 있으며, 어떤 사람이 어떻게 불교로 개종하여 비구가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경은 간소하고 성스러운 비구의 생활과 수행의 발전 단계, 그리고 불교의 최종 목표인 아라한과에 이르는 방법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경은 사성제(四聖諦)와 같은 붓다의 근본교설을 거의 전부 싣고 있다. 일반적인 불교의 지식은 별문제로 하고, 상가의 이념과 삶의 방식, 불교적 실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왕에게 마힌다가 이것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왕이 그의 새로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설법이 끝나자 왕과 수행원들은 자진해서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데와남삐야 팃사왕이 그의 친구 아쇼카왕의 아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면서 얼마나 행복해 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마힌다 일행을 수도로 초청했지만 그들은 산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다음날 아침 마힌다와 그의 일행은 왕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아누라다푸라에 들어갔다. 마힌다 자신은 왕의 환대가 틀림없는 진심이기 때문에 분명히 불교는 견고하게 건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공양을 마친 마힌다는 왕과 왕실 가족들을 위해 소부경전에 수록된<아귀사(餓鬼事, Petavatthu)> <천궁사(天宮事, Vimanavatthu)>를 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마힌다와 그의 일행은 도시에서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마하메가와나(Mahameghavana, 大雲林) 공원의 왕실 별관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은 쾌적하고 편안한 장소였기에 장로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데와남삐야 팃사왕은 그 공원을 상가에 헌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세일론에 불교를 건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마힌다는 즉시 이곳을 불교의 본부로 삼았는데, 후일 이곳이 저 유명한 상좌부의 본거지이자 세일론의 교육과 문화의 거대한 중심지였던 마하위하라(Mahavihara, 大寺)가 된다.

얼마 뒤에 데와남삐야 팃사왕은 마힌다에게 지금 세일론에 불교가 설립되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한 마힌다의 대답이 팔리 자료들에서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도사(島史)> <대사(大史)>에 의하면, 마힌다는 왕에게 포살(uposatha)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제정된 승가의 계율을 위해 계(, sima)를 설정한다면 불교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원래 승가는 현전승가(現前僧伽)와 사방승가(四方僧伽)의 둘로 구분된다. 현전승가(sammukhibhuta-sangha)는 지금 눈앞에 성립해 있는 상가를 말하고, 사방승가(catuddhisa-sangha)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갖지 않는 이상적인 승가를 의미한다. 즉 지역적으로도 얼마든지 확대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도 영원한 미래에까지 존속해야 할 승가이다. 그런데 현전승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떤 장소에 4명 이상의 비구가 집합해 있어야만 한다. ()란 이 현전승가의 지역적 한계를 말한다. 이 계 안으로 들어간 비구는 반드시 그 승가의 회의, 즉 포살과 자자(自恣) 등에 출석할 의무가 있다.

당시 왕으로부터 공원을 증정 받은 마힌다는 도시 주변을 경계로 계(sima)를 설정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세일론에 공식적으로 불교교단이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세일론 불교의 공인(公認)인 셈이다.

그런데 데와남삐야 팃사는 도시를 계에 포함시켜달라고 마힌다에게 요청했다. 이것은 왕 자신은 물론 왕실 수행원과 신하(국민)들 모두가 붓다의 명령의 범위 안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곧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일론에 불교가 공인된 그때부터 불교는 국가 종교[國敎化]가 되었다.

데와남삐야 팃사가 마힌다에게 요구하여 계에 도시를 포함시킨, 기원전 3세기부터 19세기 싱할라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오직 불교도만이 세일론의 정통적인 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10세기경에는 이러한 믿음이 매우 강대해서 세일론의 왕은 불교도이어야 함은 물론 보살이 되어야만 했다. 제따와나아라마(Jetavanarama, 祇陀林寺)에 있는 마힌다 4(Mahinda IV, 956-972A.D.)의 평석(平石) 비문에 '일체지자인 부처님으로부터 증명 받은' 그리고 ' 보살 외에 아무도 스리랑카의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대목이 이것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불교도만이 세일론의 왕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타밀이 집권한 시기도 많았다. 이를테면, 기원전 2세기에 타밀(Tamil) 침입자들이 아누라다푸라에서 분명히 불교도였던 싱할라인들을 지배했다. 그때 싱할라 왕조는 닥키나데사(Dakkhinadesa)로 불리었던 세일론의 서쪽과, 로하나(Rohana)로 불리었던 남동쪽에 있었다. 로하나로부터 둣타가마니(Dutthagamani, 101-77B.C.)에 의해 나라를 되찾았다. 그는 왕조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고 불교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도 하는데, 왕은 자신의 창에 불사리를 넣고 싸웠으며, 스님들은 필요에 의해 상가를 떠나 군인이 되었다. 이 전쟁은 상할라인으로 유명한 두뚜가무누(Dutugamunu)가 아누라다푸라 입구에서 타밀왕과 일대일의 결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끝났다. 이러한 사건들은 싱할라 불교 국가주의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 후 싱할라왕들은 신앙의 옹호자로 생각했으며, 불교는 공식적인 예복과 같았다.

또한 기원전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Abhaya) B.C. 44년경에 왕위에 올랐다가, 타밀인 때문에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러다가 15년 후에 왕위를 되찾고 12년간(29-17 B.C.) 통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족과 타밀족과의 갈등은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의 스리랑카 내전은 타밀반군과 싱할라정부군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앞으로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민족과 종교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도 싱할라인들은 불법수호를 위해 타밀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4.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

마힌다 장로가 활동했던 48년간 세일론의 불교는 공식적으로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나라의 여러 곳으로 불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 다음 세기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불교라는 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 드렸다.

<대사(大史)>에 따르면, 이 시기동안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데와남삐야 띳싸 왕 이후 나라를 성공적으로 통치했던 4명의 동생들도 비구들을 위해 새로운 사찰을 건립하고, 스님들의 생활 필수품 등을 지원해 주는 등 불교의 포교에 최선을 다했다. 까까완나 띳싸(Kakavanna-Tissa)와 로하나(Rohana)의 다른 지도자들도 수많은 사찰들을 지었다.

띳싸마하라마(Tissamaharama)와 명상 센터로 유명한 찟따라빱바따(Cittalapabbata), 그리고 까따라가마(Kataragama)에 있는 끼리웨헤라(Kirivehera)와 같은 사찰들은 이때 건립된 것이다. 깔야니(Kalyani)의 띳싸는 서부지역(지금의 켈레니야)에서 그의 의무인 불교 포교에 전념했으며, 까까완나의 막내였던 띳싸는 디가와삐(Dighavapi)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부지역에서 불교를 전파했다.

싱할라인들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평화와 화합을 위해 일했으며, 나라는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곧바로 남인도로부터 침입자들이 세일론 섬으로 들어와 섬의 평화와 발전을 파괴했다.

지난 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기원전 2세기 중엽 인도 촐라(Chola)의 왕자, 에랄라(Elara)가 쳐들어 와서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세워 약 45년간 통치했다.

이와 같이 남인도에서 건너온 침입자로부터 통치를 받으면서 싱할라인들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세일론의 국가와 불교 둘 다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하나의 까까완나 띳싸의 아들 둣타-가마니(Duttha-Gamani)는 초기 세일론 불교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면서, "왕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불교를 위한 것이다"라는 선전 구호를 내세웠다. 싱할라족 전체는 젊은 가마니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다. 이것은 싱할라 민족주의의 시작이었다. 싱할라 민족주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조직된 혈기 왕성한 민족이었다. 싱할라인들은 거의 전부가 광신 상태에 이른 일종의 민족주의는 전체 싱할라 사람들을 분발케 했다. 그들은 불교도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싱할라인들은 예외 없이 불교도가 되었다. 이것은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의 태동을 의미한다. 지금의 스리랑카 불교도도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대부분 싱할라인들이다.

남인도 출신의 침입자 에랄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둣타-가마니는 수천의 인명을 살상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삐양구디빠(Piyangudipa) 출신의 여덟 명의 아라한들은 후회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왕을 안심시켜 주었다. 이 아라한들이 주장한 논리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五戒)를 지킬 때 비로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잘못된 믿음(micchaditthi, 邪見)으로 계율을 어긴(dussila, 破戒) 사람은 동물(pasusama)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은 이 전쟁에서 사람은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반인간 혹은 동물을 살해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견해가 정설(正說)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불교 민족주의는 더욱 고무되었다. 불교사에 있어서 비구들이 공식적으로 정치분야와 세속적인 관심에 관여했던 첫 번째 경우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현재의 스리랑카 스님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한다.

둣타-가마니가 비구들에게 나라와 불교를 위해 싸워 달라고 요구했을 때, 비구들은 자진해서 해방군에 동참했다. 비구들은 불교와 나라를 위해 기꺼이 가사를 벗고 군대에 합류하였던 것이다.

둣타-가마니 휘하의 열 명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테라뿟따-아바야(Theraputta- Abhaya)는 그 전에 불교 승려였는데, 주위의 권유로 가사를 벗고 군대에 들어가 싸웠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 장군은 다시 승단에 들어갔으며, 나중에는 아라한이 되었다.

우리 나라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서산 사명 스님을 비롯한 승병들이 자진해서 전쟁에 참가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차이점은 우리 나라의 경우는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구국(救國) 호국(護國)의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일론의 경우는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보다 불교를 위한다는 명분을 더 앞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둣타-가마니 자신은 부처님의 사리를 자신의 창 속에 넣고 싸웠다. 그는 외국인의 통치하에 있는 조국을 해방시키고,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일반 대중들의 종교적 국가적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켰던 것이다.

한편 둣타-가마니(107-77 B.C.) 왕은 마하투빠(Mahathupa; 지금의Ruvanvalisaya), 마리짜왓띠(Maricavatti; 지금의 Mirisavatiya), 마하 위하라(大寺)의 로하빠싸다(Lohapasada)와 같은 종교적 건축물들을 세웠다. 특히 로하빠싸다는 9층으로 된 포살당(布薩堂)이었다. 둣타-가마니는 불교를 백성들의 자랑거리로 만들었으며, 외국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마하투빠의 헌당식(獻堂式) 축제를 보기 위해 왔다고 {대사(大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웨싹(Vesak) 축제(우리 나라의 불탄일과 같다)의 원형은 처음 이 기간에 시작된 것이다. 둣타-가마니는 24번이나 웨싹 축제의 공양을 제공했다고 한다.

둣타가마니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그의 동생 삿다-띳싸(Saddha-Tissa, 77-59 B.C.)는 불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닥키나기리 위하라(Dakkhinagiri-vihara)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사찰들을 건립했다. 닥키나기리 위하라는 세일론 불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찰로 활용되었다.

기원전 1세기 초반에는 비구들이 국사(國事)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적인 왕위 계승의 관습과는 달리 끵다-띳싸의 장남 랏지-띳싸(Lajji-Tissa) 보다는 차라리 아우 투라타나(Thulathana, 59 B.C.)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랏지-띳싸(59-50 B.C.)는 아우의 왕위를 폐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는데, 상가를 몹시 불쾌하게 여겨 3년간 후원하지 않았다.

기원전 1세기 후반에는 세일론의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로하나에 있는 띳싸(Tissa) 혹은 띠야(Tiya)라고 하는 한 바라문이 왓따가마니, 43 B.C.) 왕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한편 남인도로부터 타밀(Tamil)이 마하띳타(Mahatitha)에 상륙하여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돌진해왔다. 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순식간에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이르기까지 황폐해졌다. 왓따가마니 왕은 이 기간 동안 먼 곳에 숨어 있었다.

이 전화(戰禍)로 나라 전체가 전례 없는 대기근(大饑饉)으로 황폐화되었다. 이때의 기근을 브라흐마나 띳싸(Brahmana-Tissa) 혹은 바미니띠야싸야(Baminitiyasaya)라고 부른다. 먹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했다. 이러한 참혹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던 비구의 육체까지 먹었다. 수천의 비구와 평신도들이 비명(非命)에 죽었고, 많은 사찰들은 버려졌으며,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 위하라(Mahavihara)는 아주 돌보지 않아서 안뜰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리고 마하투빠(Mahathupa)도 완전히 방치되었다. 많은 비구들은 섬을 떠나 인도로 들어갔다. 나라는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장로와 싱할라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불교는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불교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싱할라의 왕은 불교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이러한 역경(逆境)의 상황 아래에서는 지금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입을 통해 전해 온 삼장(三藏)의 구전(口傳) 전통을 지탱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비참한 기간동안 상가의 첫째 걱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이 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장로들은 긴 안목으로 지방 수령의 비호 아래, 마딸레(Matale)의 알루위하라(Aluvihara)에 모여서 "정법의 보전을 위해" 주석서를 포함한 삼장 전체를 필사(筆寫) 했다.

이것이 불교사에 있어서 최초로 삼장을 문자로 기록한 경우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팔리삼장은 이러한 세일론의 극한적인 상황에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만일 이때 팔리삼장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불교도들은 팔리삼장을 전승해 준 스리랑카에 정신적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마침내 왓따가마니-아바야(Vattagamani-Abhaya, 29-17 B.C.) 왕은 타밀을 패배시키고, 14년간의 극한적인 전투를 치르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다시 차지했다. 그는 니간타(Nigantha; 자이나교)의 기리(Giri) 사원을 부수고, 자신의 이름을 앞에 부친 거대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를 지었다. 왕은 이 사찰을 그가 불행했던 과거에 자기를 크게 도와준 마하띳싸(Mahatissa) 장로께 헌납했다. 후일 이 사찰은 세일론의 대승불교 총본산이 되어 상좌부의 대사와 대립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일론에서는 불교와 나라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즉 나라[싱할라 왕조]가 흥할 때 불교는 발전했으며, 싱할라 왕조[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 불교는 쇠퇴했다. 다시 말해서 세일론의 불교는 싱할라 국가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하였던 것이다.

5. 大寺 無畏山寺 대립

기원전 3세기경 마힌다 장로가 처음 세일론에 전한 불교는 상좌부(上座部)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스리랑카의 불교는 상좌부(Theravada)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세일론에서는 불교를 '분별설(Vibhajjavada)'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세일론상좌부를 '분별설부(Vibhajjavadin)'라고도 한다.

마힌다 장로가 세일론에 왔을 때는 이미 인도에서 '3결집'이 이루어진 이후일 것이라고 보아진다. 물론 제3결집은 세일론 상좌부만의 전승이기 때문에 제3결집 자체를 의심하거나, 3결집이 있었다 하더라도 상좌부 1부파 내에서의 결집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세일론전() <도사>, <대사>, <선견율> 등에 의하면, 목갈리뿟따-띳싸(Moggaliputta-Tissa) 장로가 아쇼카왕의 지지를 받아 '분별설부'를 확립하기 위해 제3결집을 단행했다고 한다. 즉 불교를 '분별설(分別說)'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상가로부터 추방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3결집을 주도한 목갈리뿟따-띳싸 장로의 제자인 마힌다는 자연적으로 분별설부인 상좌부불교를 세일론에 전했다. 그 후 기원전 1세기까지 약200여 년 동안에는 상좌부 불교뿐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경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 無畏山寺)가 건립되면서 불교 내부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무외산사의 성립 배경과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월포라 라훌라 박사가 지은 <세일론불교사>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무외산사의 성립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타밀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숨어 지내던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Abhaya, 29-17 B.C.) 왕이 14년간의 전투를 치루고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돌아왔다. 왕은 불행했던 과거에 자신을 도와준 마하띳싸(Mahatissa) 장로께 자신의 이름을 부친 '아바야기리'라는 사찰을 지어 헌납했다.

왓따가마니 왕이 타밀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동안, 왕의 급한 성격 때문에 실망한 몇몇 대신들은 격분하여 왕을 버리고 타밀과 합류하기 위해 도망갔다. 이때 나라는 무질서와 기근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강도들이 횡행했다 도망가던 대신들은 길에서 강도들을 만나 이를 피하기 위해 당시 학승으로 알려져 있던 띳싸(Tissa) 장로의 사찰인 함부갈라까-위하라(Hambugallaka-vihara) 안으로 들어갔다. 띳싸 장로가 대신들로부터 전후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걱정하였다. 나라와 불교가 침입자의 통치로 인해 황폐화되었는데, 여기에 왕과 대신들 간에 불화가 있다니! 지혜로운 띳싸 스님은 대신들에게 "타밀 혹은 왕 둘 중에 누구가 붓다의 교설을 미래에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이 물음으로 말미암아 대신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자멸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띳싸와 마하띳싸 장로는 대신들을 왕에게 데리고 가서 불미스러웠던 지난 일들을 화해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왕과 대신들은 장로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그 은혜의 보답으로 왕은 무외산사를 지어 마하띳싸 장로에게 헌납했고, 다섯 대신들도 각자의 사찰을 건립하여 띳싸 장로께 바쳤다. 이것은 사찰을 마치 개인적인 선물인양 어느 특정한 스님에게 헌납한 첫 번째 기록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왕과 대신들이 개인적인 감사의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마하띳싸는 처음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외딴 곳에 살았는데, 나중에는 왕의 특별 초대로 아누라다푸라에 머물기 위해 왔다. 그리고 그는 통치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마하위하라(大寺) 스님들의 명성과 권위를 실추시켰다. 뒤에 대사의 스님들은 속인과 교제하는(Kulasamsattha) 마하띳싸 장로를 비난했으며, 빱바자니야깜마(Pabbajaniyakamma, 驅出갈마)로 알려져 있는 제명의 징계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구출갈마는 승가에서 파문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마 왕과 대신들의 행위에 대한 간접적인 항의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하띳싸의 제자 중에 바하라맛쑤-띳싸(Bahalamassu-Tissa)라는 스님이 있었다. 바하라맛쑤란 긴수염이라는 뜻인데, 그는 실제로 수염을 길게 길렀던 것 같다. 그는 스승의 비난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대사측에서는 '더러움'의 측면을 들어 바하라맛쑤-띳싸를 비난했으며, 율장에 따라서 죄가 열거되어야 할(Ukkhepaniya) 계율, 즉 거죄갈마(擧罪갈마)를 받을 것을 그에게 강요했다. 바하라맛쑤-띳싸는 매우 화가 나서 추종하는 많은 스님들과 함께 무외산사로 들어간 후 대사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대사의 영향 아래로 하나가 되기까지 상가에서의 분쟁의 시작이었다. 초기에는 무외산사의 스님들이 비록 대사로부터 분리하여 별도의 무리를 지어 살았지만, 이론과 실천면에 있어서 두 파 사이의 차이점은 없었다. 다만 무외산사의 스님들은 대사측을 비난하는 명목이 율장에 의해서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인도의 밧지뿌뜨라(Vajjiputra, 犢子部)에 속하는 담마루찌(Dhammaruci, 法喜)의 제자 몇 명이 세일론으로 건너왔는데, 무외산사에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무외산사파()는 담마루찌파(法喜部)라고도 불린다. 무외산사파가 강력한 대사파와 싸워 이겨서 그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한 것으로 이해된다. 밧지뿌뜨라파의 교설과 해석 가운데 몇 가지는 대사파의 상좌부 견해와 달랐다.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견해에 따르면 독자부(犢子部, Vajjiputtaka)가 신봉하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 가운데 하나는, 상좌부에서는 무아설(無我說, anatta)를 취하는데, 이 무아설과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개인의 실재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아라한도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고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반대되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붓다고사는 독자부를 불교의 한 부파로 인정했다.

띳싸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 교단에 들어오는 스님들을 좋아했다. 그 때부터 무외산사의 스님들은 담마루찌파(法喜部)로 알려졌다. 분명히 말해서 당시의 왕인 왓따가마니-아바야는 무외산사의 스님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부파 혹은 그들의 견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무외산사의 비구들은 인도의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도입하고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대사파는 상좌부불교의 분별설부(Vibhajjav?da)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하리까-띳싸(Voharika-Tissa, 269-291) 왕의 시대에는 인도에서 건너온 대승계통의 베뚤라와다(Vetullavada, 方廣部)의 무리가 무외산사에 잠입했는데, 곧 왕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무외산사는 방광파의 무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부는 무외산사를 떠나 닥키나기리(Dakkhinagiri, 南山)에서 다른 파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제따와나-위하라(Jetavana-vihara, 祇陀林寺)로 불리기도 하는 사가리야(Sagariya, 海部)파이다. 이것은 고따바야(Gothabhaya, 309-322) 왕 시대의 일이다. 이로써 세일론 불교는 3파로 나뉜 것이다. 왕은 무외산사에 살고 있던 60명의 방광비구를 붙잡아 그들을 파문하고 인도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2() 아래인 마하세나(Mahsena, 334-361) 왕은 대사를 탄압했기 때문에 그 후 대사파는 쇠퇴하고 무외산사의 황금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시리-메가완나(Siri-Meghavanna, 362-409) 왕의 시대에 인도 칼링가로부터 불치(佛齒)가 도래하여 무외산사에 안치되었다.

그 후에도 대사와 무외산사는 오랫동안 서로 대립했는데, 역대의 왕들은 무외산사를 지지한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 대사는 고난을 잘 극복하고 청정한 상좌부의 교학과 계율을 유지했던 것이다. 8세기 전반에는 세일론에 대승불교, 특히 밀교가 성행하여 금강지(金剛智)나 불공(不空)이 내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11세기 초엽 마힌다 5세의 시대에 시바교도인 남인도의 촐라(Chola)인들의 침입으로 왕도(王都)와 정사(精舍)가 폐허화하였다. 그러나 비자야바후(Vijayabahu) 1(1059-1113)는 반세기 동안에 걸쳐 세일론을 점령하고 있던 촐라인들을 격퇴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버마로부터 장로를 초빙하여 불교를 부흥시켰다. 또한 12세기에는 빠락까마바후(Parakkamabahu) 1(1153-1186)가 나와 대사, 무외산사, 기타림사 등의 승려 중 퇴폐한 자를 환속시키고 교단을 정화했다. 그리고 대사의 불교가 올바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대숙정을 단행하여 정순(正純)한 상좌부의 불교를 흥륭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숙정에 의해 무외산사의 불교는 완전히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000여 년에 걸친 대사와 무외산사의 싸움은 끝나고 대사의 정통 상좌부불교로 통합된 것이다. 아바야기리(無畏山寺)는 황폐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사와 무외산사의 대립을 불교 내부의 종파간의 갈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통 상좌부 입장에서는 붓다의 진실한 가르침, 즉 분별설부를 보존한다는 차원이기 때문에 법난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대사파는 무외산사파를 이교도와 같이 취급했다. 결국 대사파의 승리로 끝나 스리랑카는 완전한 상좌부 불교국가로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상좌부측에서 보면 법난을 잘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스리랑카에 한국의 사찰을 짓겠다고 들어가는데, 이것은 세일론불교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미래의 세계불교를 위해 스리랑카는 순수한 상좌부불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6. 포르투갈인에 의한 법난

지난 호까지는 세일론 불교 자체 내부의 갈등과 타밀에 의한 법난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번 호부터는 서양세력에 의한 본격적인 의미의 불교 박해(The Persecution of Buddhism), 즉 법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최초로 스리랑카에 들어 온 서양세력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은 비라 빠라끄라마바후(Vira Parkramabahu) 8(1484-1508) 왕이 꼿떼(Kotte)에서 통치하던 1505년이었다. 포르투갈 인들의 세일론 도착과 불교박해에 대해서는 페레라(H. R. Perera) <스리랑카의 佛敎略史(Buddhism in Sri Lanka: A short History)>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8)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을 가능한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엄청난 불교 박해 사실을 필자가 보태거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포르투갈인의 도착과 불교박해

빠라끄라마바후(Parakramabahu) 2세와 후계자에 의해서 약 15세기까지는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지만 15세기말부터는 약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꼿떼(Kotte)에서 통치하던 싱할라 왕은 매우 좁은 영토의 우두머리였다. 나라의 내륙지방은 종교 혹은 국민의 복지에 대해서는 돌보지 않았던 소규모의 여러 족장들의 수중에 있었다. 한편 이슬람교도인 무어(Moor)인들이 해안 지역의 무역을 지배했다. 경제적으로는 나라 역시 최악의 상태로 침몰하였는데, 당시 스리랑카는 식량조차 인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동방 무역을 찾아서 동양의 발견과 정복에 착수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비라 빠라끄라마바후(Vira Parakramabahu) 8(1484-1508)가 꼿떼에서 통치하던 1505년 스리랑카에 상륙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왕에게 경쟁자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 원조를 해주기로 약속했으며, 그들은 무역을 통해 거부(巨富)가 되고자 교역(交易) 제도의 제정을 기도했다. 그들은 그 당시 콜롬보의 바위로 된 해변 위에 요새를 세우고, 많은 무역 정착지를 세움으로써 스리랑카에서의 발판을 얻었다. 오래 전에 전체의 해안지역은 포르투갈인의 손에 넘어갔고, 꼿떼의 왕들은 완전히 그들의 동맹국에 좌우되었다. 그들은 세일론 섬의 전체 주인이 되기 위해서 나라의 내륙을 수 차례 강습하기도 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1505년 콜롬보에 도착한 후, 점차적으로 전체 연해주를 점령했으며, 1658년까지 그들의 영토로 삼았다. 자기편인 역사가들의 기록뿐 아니라 스리랑카의 연대기에 그들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탐욕스럽고, 편협하며, 그리고 야만적인 불교의 박해자들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스리랑카의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이었던 로마 카톨릭교를 믿도록 강요했다.

포르투갈 인이 도착한지 수십 년 뒤, 꼿떼에서 통치했던 브후바네까바후(Bhuvanekabahu) 6(1534-1551) 왕은 동맹국의 원조를 구했는데, 포르투갈 인들은 후계자인 왕의 손자 다르마팔라(Dharmapala)를 카톨릭 주교의 자리에 앉히는 조건이었다. 이것을 위해 다르마팔라의 상아상()을 포르투갈 황제가 개최한 주교 서품식에 보냈다. 싱할라 특사들이 포르투갈의 지휘 하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일행과 함께 돌아왔다. 이때 꼿떼 왕의 허락을 받아 스리랑카에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기독교 단체가 스리랑카의 연해주에서 조직되었다. 다르마팔라는 Don Juan Dharmapala라는 이름의 기독교 주교가 되었다. <아이러니 컬 하게도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주교가 된 다르마팔라(Dharmapala)라는 이름은 '불법의 수호자' 혹은 '법호(法護)'라는 뜻이다. 필자주> 그의 주교 취임 후 포르투갈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했다. 선물 내용은 켈라니야에 있는 달라다 말리가와(Dalada Maligawa, 佛齒寺)와 세일론 섬에 있는 모든 사찰의 소득을 카톨릭교 전도를 위해 용도를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꼿떼 왕조로부터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 인들은 싱할라의 민족종교를 억압하고, 그들 자신의 종교인 카톨릭교를 전도했다. 이 지원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인 싱할라 인들을 개종 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싱할라 인들을 개종 시킴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방법을 채택했다. 즉 하나는 공적 혹은 다른 일시적인 호의에 의해 권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권유가 실패했을 때에는 잔인하게 응징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인들 밑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사람과 힘있는 그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도 성경에서 따온 것으로 새로 바꾸었다. 반면 자신들의 민족적 신앙인 불교를 포기할 수 없어서 망설였거나, 저항을 보였던 사람들은 잔인 무도하게 처형했다.

그것은 사람들을 강으로 던져 악어들이 먹도록 만들었으며, 부모들이 가로막기 전에 아기들을 병사들이 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혹은 고문을 받아 나중에 결국 죽게 되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기들을 맷돌(연자매)에 갈아서 죽였다는 전율적인 기사다. 또한 공식적으로 감히 예배하거나 혹은 황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은 모조리 죽였다. 불교 사원과 교육기관은 모두 파괴했으며, 보물들을 약탈해 갔다. 도서관들도 불질러졌다. 이와 같이 스리랑카의 불교가 가장 암울하게 되었던 시기 중의 하나가 바로 포르투갈의 통치 기간이었다.

라자싱하 1세에 의한 불교 박해

이 기간에 불교의 적은 포르투갈 사람들뿐만 아니었다. 불교의 적은 포르투갈 인들이 꼿떼에서 힘을 장악했을 때, 브후베네까바후(Bhuvenekabahu) 6(1581-1592)의 형이며, 마야둔네(Mayadunne)의 아들이었던 라자싱하(Rajasinha) 1(1581-1592) 왕이었다.

라자싱하는 포르투갈의 지배에 반대했던 싱할라 인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으며,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싸운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던 용감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인기는 잠시 뿐이었다.

바보스러운 왕은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자신의 손으로 늙은 아버지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 나중에 라자싱하는 죄악의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는데, 그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스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스님들은 그것은 용서 받기에는 너무 큰 죄악이라고 왕에게 설명했다. 이 말은 들은 왕은 크게 분개했다.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스님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대답을 듣자 그는 이교도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불교의 적이 되었다. 불교의 최고 장로는 돌로 쳐서 죽였으며, 다른 많은 스님들은 땅을 파고 목만 내놓고 묻은 상태에서 쟁기로 갈아서 목을 잘랐다. 몇몇 다른 스님들은 칼로 목을 배었다. 성스러운 건축물과 사찰들은 허물어 뜨였으며, 성스러운 책들은 불에 태워 재로 만들었다. 그 전에 사찰 건립을 위해 기증되었던 토지도 몰수했으며, 붓다의 성스러운 발자국이 남아 있는 스리 빠다(Sri Pada)도 이교도들에게 넘겨주었다. < 그 이전까지는 이곳이 불교의 성지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부처님의 발자국'이 아닌 '아담의 발자국'이라는 아담스 피크(Adam's Peak)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불교도들은 이곳을 '스리 빠다'라고 부르고, 다른 종교인들은'아담스 피크'라고 부른다. 현재 스리랑카의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필자주> 왕의 격노를 피해 도망갔던 스님들도 살아 남기 위해 스스로 환속하여 숨어버렸다.

이와 같이 15세기에 세일론에서 당한 불교의 수난과 박해는 너무나 큼직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다시 글로 옮기고 있는 자체가 필자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록 15세기에 남의 나라인 스리랑카에서 일어났던 일이지만, 출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다.

특히 포르투갈 인들의 침입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라자싱하 1세 왕이 저지른 행위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사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모든 법난에는 내부의 동조자가 있기 마련이며, 외부의 적보다도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 마치 사자의 몸 속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몸을 썩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한 통치자의 잘못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불교도들은 이러한 불교법난사를 읽으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소중한 불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이처럼 혹심한 불교 탄압과 박해를 받은 경험은 없다. 그렇지만 스리랑카의 불교는 이러한 수난과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불교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희생과 고통을 지불하고 소중한 불교를 얻었다. 우리가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둠 뒤에는 밝음이 오기 마련이다. 라자싱하 1세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비마라 다르마수리야(Vimala Dharmasuriya) 왕은 정반대로 라자싱하가 파괴한 불교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7. 네덜란드인에 의한 법난

다르마수리야 왕의 불교부흥을 위한 시도

포르투갈의 통치 기간(1505-1658)에 포르투갈인과 라자싱하 1(1581-1592)에 의해 불교는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라자싱하 1세 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비마라 다르마수리야(Vimala Dharmasuriya) 1(1592-1604) 왕이 불교의 부흥을 위해 헌신했다.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1세 왕은 포르투갈인에 의해 교육받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처음부터 좋아했던 왕이다. 그는 왕위에 즉위한 후 나라와 불교에 대한 애정으로 다스렸다. 그런데 자신과 같은 그런 애정이 없는 포르투갈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선왕인 라자싱하 1세 왕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불교 박해자 혹은 불교의 파괴자였다. 반면 후계자인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1세 왕은 당시의 위대한 불교의 수호자였다. 그는 포르투갈과의 전쟁 이후 라자싱하에 의해 손상되었던 불교를 재건하는데 온 정열을 다 쏟았다. 몇몇 불교 유적들을 복구하기도 하였다.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1세 왕의 불교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승단을 재건한 것이다. 전대의 불교 박해로 비구의 맥이 단절되었다. 당시에는 나라 전체에 구족계(비구계)를 수여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스님이 오직 1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왕은 자신의 노력으로 파괴된 불교 유적은 복구할 수 있었으나, 끊어진 법맥을 이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왕은 세일론의 불교승단을 복구하기 위해 외국의 스님들을 초빙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은 락캉가(Rakkhanga) 나라로 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락캉가국은 지금의 미얀마 일부인 아라칸(Arakan)이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락캉가의 난디짝까(Nandicakka)와 짠다위쌀라(Candavisala) 장로가 몇몇 스님들을 이끌고 수도 캔디(Kandy)에 왔다. 1592년 캔디 근처의 게땀베(Getambe)에 우다꾹케빠(Udakukkhepa) 경계(境界, Sima)를 정하고, 구족계 수계식을 개최했다. 이때 많은 왕실 가족들이 승단에 들어갔다. 또한 왕은 단층 누각을 지어 델가무(Delgamu) 사원에 숨겨 두었던 성스러운 부처님의 치아 사리[佛齒]를 옮겨 이곳에 맡겼다. 쓰리 빠다(Sri Pada)의 관리권도 이교도로부터 빼앗아 불교 승려들에게 넘겨주었다.

네덜란드인의 세일론 도착

네덜란드 인들이 세일론에 나타난 것은 서기 1602년이었다. 싱할라 왕들이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세일론에 들어오게 되자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싱할라 인들과 네덜란드 인들이 함께 합심하여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반세기 넘게 싸웠다. 세일론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라자싱하(Rajasinha) 2(1634-1684) 왕의 통치 시기였던 1658년에 완전히 소탕되었다.

일찍이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1세 왕 치세인 1602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캔디의 왕실을 방문했었다. 이때 비밀리에 동맹을 시도했다. 1612년 네덜란드와 당시 캔디 왕조의 쎄나라뜨(Senarat) 왕 사이에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서1638년 라자싱하 2세는 포르투갈과 싸우기 위해 네덜란드에 원조를 구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두 유럽 국가는 세일론에서 1658년까지 싸웠다. 결국 포르투갈은 세일론 밖으로 추방되었고, 네덜란드가 전에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통치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대영 제국에 의해 쫓겨났던 1796년까지 세일론을 점령했었다.

포르투갈의 통치시기에 불교의 부흥을 시도했던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1세 왕은 종교적 사업에 열성적이었던 쎄나라뜨(Senarat)에게 갠디 왕조를 넘겨주었다. 그의 재임 기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수도 캔디까지 침입해 왔다. 왕은 불치(佛齒)를 안전하게 멀리 마히얀가나(Mahiyangana)로 옮겼다. 세나라뜨 왕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라자싱하(Rajasinha) 2(1634-1687)는 강력한 전사(戰士)였으나 종교에는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의 치세에 세일론의 해안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비록 네덜란드의 힘을 빌리어 이룩한 일이지만 왕의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인들은 처음에는 싱할라 인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을 패배 시키면 전체 해안 요새들을 싱할라 왕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인들을 좇아 버렸을 때 네덜란드 인들은 그들의 약속을 저버렸다. 그들은 계속해서 요새들을 차지했고, 해안 지방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싱할라 인들은 다시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672년에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네덜란드 인들을 몰아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2(1684-1706) 왕에서부터 스리 비자야 라자싱하(Sri Vijaya Rajasinha, 1739-1747) 까지의 60여년 동안에는 나라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주목할만한 국내의 불화도 없었고, 네덜란드와의 전쟁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간에 국가의 경제 상황뿐만 아니라 불교와 문학이 어느 정도 발전하게 되었다.

라자싱하 2세 왕의 전체 통치 기간에는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나라 혹은 불교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따라서 불교의 상황은 매우 나빠지게 되었다. 당시에 구족계를 받은 덕 높은 비구 5명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비마라 다르마수리야 2세 왕은 다르마수리야 1세 왕과 같이 대사를 아라칸으로 급파했다. 그리하여 33명의 비구들을 얻어 세일론에서 구족계 계단을 재건했다.

하지만 외국인이 나라를 지배함으로 말미암아 정치와 경제가 허약해졌고, 아울러 청정을 유지했던 원래의 불교도 타락하였다. 계율을 지키지 않고 흐트러진 생활을 하는 스님들은 나라는 물론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대체로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었다. 그들은 스스로 농업과 주술(呪術), 점치는 일에 종사했으며, 심지어 가족의 생계까지 부양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재가자의 삶보다 못한 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 하나 나라의 발전과 해방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강력한 사고와 추진력을 가진 와리비따 삔다빠띠까 싸라낭까라(Valivita Pindapatika Saranamkara)라는 이름의 한 젊은 사미승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그는 국가의 교육과 도덕을 향상시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여 나라와 불교의 해방을 위해 양질의 시민 그룹을 양성하는데 열중했다. 이것은 싸라낭까라 스님에 의해 전개된 종교적 국가 회복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세일론 최고의 스님과 족장, 그리고 왕이 이 운동에 반대했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불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싸라낭까라 스님은 결연히 끈기 있게 추진하여 불교와 국가적 자존심, 문화와 문학을 회생시킬 수 있었다. 끼르띠 스리 라자싱하(Kirti Sri Rajasinha, 1747-1798) 왕은 사라낭까라 스님의 모험을 기뻐하여, 1750년 몇몇 비구들을 세일론으로 모셔오기 위해서 씨암(Siam, 지금의 태국)으로 대사를 보냈다. 대사는 우빨리(Upali) 장로를 우두머리로 하는 비구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 후 왕은 청정한 구족계를 복구하고 와리삐따 삔다빠띠까 싸라랑까라 스님을 세일론의 상가 라자(Sangha Raja, 僧王)로 임명했다.

네덜란드인의 종교 정책

네덜란드 사람들의 종교는 개신교(Protestant Christianity)였으며, 시행했던 정책도 포르투갈과는 현저히 달랐다. 무역의 확대만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기에 그 근본적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들은 싱할라 인들이 무례하거나 자극하든지 겸손과 인내로 자제하며 견디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싱할라 인들이 스리랑카의 비구 계단 설립을 위한 승려를 얻기 위해 두 대사를 씨암(Siam; 지금의 태국)으로 보내는 것까지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점차 세일론에 개신교를 전도하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특히 그들은 교육 제도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전영토에 걸쳐서 교육 제도를 확립했다. 학교 건물은 교회와 학교를 겸했고, 학교 교사는 선생과 종교 사절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사로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혼 등록 계원이었고,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싱할라 인들이 배정된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을 때에는 범죄자로 취급하여 징계할 수도 있었다. 모든 시민의 공민권과 상속 재산은 교회의 가입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정부 산하의 작은 기관에 조차 취직할 수 없었으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합법적으로 결혼하거나 자녀의 출생 등록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강제적인 법률로 정했다.

공식적으로 개신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시골의 매우 낮은 직급의 공무원을 임명하는 것조차 근본적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많은 불교도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이유 없이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런 방식으로 네덜란드 인들은 불교를 기독교로, 싱할라-불교문화를 전해 맞지 않는 기독교 문화로 바꾸고, 싱할라 사람들이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사랑, 존경심을 파괴해 버림으로써 그들의 힘을 견고하게 하려고 시도했었다. 네덜란드가 1658년부터1796년까지 13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일론의 해안 지방을 통치하는 동안 싱할라 문화와 불교는 활동 불능의 상태로 억압 받았다. 하지만 불교의 스님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불교와 문화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으로 힘이 미치는 한 불교를 가르쳤다. 이러한 스님들의 노력으로 세일론에서 간신히 불교의 소멸을 면해 살아 남게 되었던 것이다.

8. 영국인에 의한 법난(1)

영국인의 세일론 도착

영국이 세일론을 정복하고자 처음 계획을 세웠던 것은 서기 1763년 일 듯 싶다. 이때까지 인도의 캘커타(Calcutta), 봄베이(Bombay), 마드라스(Madras)는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1763년 마드라스의 영국 총독 phybus는 특사를 캔디의 끼르띠 쓰리 라자싱하(Kirti Sri Rajasinha, 1747-1782) 왕에게 보냈다. 그가 자진해서 세일론 왕을 도와 네덜란드와 싸우겠다는 내용이었다. 특사가 싱할라 왕을 만나 논의한 후 동의를 얻어 마드라스로 돌아갔지만, 왕은 마드라스에 있는 영국 총독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1782년 마드라스의 총독 Lord McCartney는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해안 지방을 공략할 작정으로 영국 함대 1척에 병력을 실어 세일론으로 급파했다. 그들은 트린코말레(Trincomalee)의 요새를 공격했다. 영국의 편에서는 이 기회에 싱할라 왕과 새로운 조약을 맺고자 노력하였지만 실패했다. 끼르띠 쓰리 라자싱하 왕이 처음 계획을 묵살했던 영국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1783년 유럽의 평화 조약의 결과로 트린코말레 요새는 네덜란드에 반환되었다.

1795년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유럽 전쟁이 다시 야기되었다. 이 해에 마드라스의 총독 Lord Hobart는 군대를 세일론으로 보내 트린코말레 요새를 공략했다. 한달 뒤 영국은 자프나(Jaffna)를 공략했다. 그 다음 달에는 네곰보(Negobo)를 함락 시키고, 1796 2 16일에는 영국이 콜롬보(Colombo) 항구를 정복함으로써 세일론에서 네덜란드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었다.

싱할라 왕조의 종식

1796년부터 전에 네덜란드가 했던 것처럼 영국이 이들 모든 영토를 지배했다. 영국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전임자들과 같이 세일론에서 불교와 싱할라 문화의 토대를 침식 시키기 위해서, 기독교와 서양 문화의 보급을 위해서, 정부를 향한 국민들의 마음속에 불만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리고 싱할라 인들이 자신의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일들을 했다. 그들은 많은 싱할라 인들의 내부적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전체 섬의 패권을 얻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싱할라 인들과 영국인들은 자주 싸웠다. 그리고 1803년 영국은 싱할라 왕을 향해 선전 포고를 했다. 그때부터 영국은 싱할라의 군주제를 절멸시키기 위해 모두 수단을 다 동원했다.

싱할라 국가의 자유와 세일론에서 불교의 자유는 캔디에서 1815 3 2일 영국에 의해 상실되었다. 이와 같이 영국은 역사상 외세에 의해 세일론 전체를 점령한 첫 번째 경우이다.

그 이전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주로 해안 지방을 점령했었지만, 그래도 싱할라 왕조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815 1월 영국의 군대가 수도 캔디를 공격해 왔는데, 이때 싱할라 왕은 포로가 되었다. 1815 3 2일 캔디 왕조의 대표자들과 스님들로 구성된 식민지 의회의 엄숙한 자리에서 왕은 폐위되었고, 왕의 통치권은 영국 왕실로 귀속되었다. 이와 같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얼마 동안의 영국의 침략과 공격에 잘 견디었던 캔디의 화려했던 왕조가 종식되었다. 이렇게 해서 B.C. 486년 위자야(Vijaya)가 왕위에 오른 이래 그들의 나라와 불교에 영광과 명성을 안겨 주었던 2301년 동안 이어져 왔던 스리랑카의 불교 왕조가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싱할라 왕조 멸망의 정치적 배경

서양 세력이 세일론에 들어온 이후 캔디 왕조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하였다. 특히 영국이 세일론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왕과 귀족들간의 대립 반목은 심각한 상태였다. 전투 지휘도 두 곳에서 별도로 이루어졌다. 귀족들은 여러 당파로 나뉘어졌다. 왕의 명령이 전체에 미치지 못했다. 온전히 힘을 한 곳으로 결집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해안 지방은 유럽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캔디의 왕들이 해안 지방에서 사실상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이 기간에 식민지 통치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만연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는 잠시 뿐이었다. 해군력이 없으면 다시 그들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캔디 왕조가 해안 지방을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므로 이 해안 지방들은 사실상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한 유럽 국가의 해군력의 손아귀에서 다른 국가로 전달되는 것일 뿐이었다. 즉 포르투갈로부터 네덜란드로, 다시 네덜란드로부터 영국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두 유럽 국가 사이의 힘의 성쇠에 의존하여 변화하였을 뿐, 이곳은 외국인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다시 영국의 도움으로 네덜란드를 좇아 버렸는데, 갠디 왕들은 순수한 자신들의 힘을 증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은 실현되지 않았다.

세 유럽 국가들은 캔디 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캔디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 그리고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 천연적인 요새 도시였기 때문에 군대가 진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내부적 갈등을 조장시켜 스스로 멸망하도록 조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왕과 귀족간의 대립 반목이었다.

그런데 캔디 왕조는 두 정치 체제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는 전제주의 체제로 이끄는 왕의 손에 힘이 집중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과두[소수] 독재 정치 체제로 이끄는 귀족 파벌에 의한 압도적인 패권이었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정치 체제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한쪽이 힘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갠디의 마지막 왕이었던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Sri Vikrama Rajasinha, 1798-1815) 왕의 통치 시기에는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당시 나이가 18살이었다. 그는 경험과 힘이 없었다. 정치는 주로 아디까람(Adikaram) 혹은 아디가르(Adigar)라는 총리 체제로 움직였는데, 때때로 삘리마따라웨(pilimatalawe)라는 아디까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 왕은 그의 아디가르(Adigar) 삘리마따라웨와 동맹국의 음모를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전전긍긍하였다. 그는 이러한 걱정거리를 잊기 위해 술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모든 그의 적들에게는 섬뜩하리만큼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왕조는 전체적으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불교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자디 라자싱하(Rajadhi Rajasinha, 1782-1798) 왕의 통치 시기였던 1796년 전투에서 패배했던 네덜란드는 그들의 영토를 영국 식민지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프레데릭 노오트(Sir Frederick North) 경은 첫 번째 영국 총독으로 세일론에 파견되었다.

오래지 않아 노오트는 세일론 섬 전체를 순식간에 차지하는 행운을 실현했는데, 캔디의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의 아디가르인 삘리마딸라웨를 위해 왕을 파멸시켜 영국 총독인 자신에게 통치권을 넘겨주는 계획을 꾸몄다. 하지만 삘리마딸라웨의 이 계획은 왕에게 누설되었다. 그리고 아디가르는 1812년 참수 되었다. 왕은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잔인하게 고문하기도 했다. 그 결과 불안과 혼란이 유행되었다. 다음의 아디가르가 된 에헤레포라(Ehelepola)는 왕을 배반하기 위한 전체적인 조직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에헤레포라가 영국의 도움을 청해서 1815 1월 영국의 군대가 수도 캔디로 공격해 왔다. 이때 싱할라 왕이 체포 되었다. 이로써 세일론 왕조가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인의 음모가 적중된 것이었다.

한편 끼르띠 쓰리 라자싱하(1747-1782) 왕의 통치 기간에 불교는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는 동생 라자디 라자싱하(1782-1798)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라자디 라자싱하는 그의 조카였던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 1798-1815)에게 왕위를 인계했다. 이 쓰리 위끄라마 라자싱하가 비운의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이었다.

불교에 대한 영국의 태도

영국은 1796년 해안 지방 일부를 장악했다가 1815년에는 세일론 전체를 점령했다. 이때부터 1948년까지 세일론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1815년 영국과 세일론 간에 체결한 캔디 조약은 나라를 영국에 넘기지만, 영국은 불교를 보호하기로 약속했고, 불교의 성스럽고 신성한 의례와 의식 등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일론의 대표자들이 나라를 영국에 넘긴다는 매우 중요한 조약에 있어서 불교와 관련하여 이 조항이 포함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싱할라의 지도자들이 불행한 시기에서도 미래의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염려하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이 불교를 소홀히 하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백하게 숙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영국의 태도는 곧바로 많은 싱할라 지도자들의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지도자들과 불교의 스님들은 영국이 불교와 관련된 조약의 조항을 존중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고, 그들은 국민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로 개종 시키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영국의 식민지 기간에 있었던 구체적인 불교 박해 사항은 다음 호에서 살펴볼 계획이다.

9. 영국인에 의한 법난(2)

영국인의 불교말살 정책

영국인들이 세일론의 불교를 탄압했던 방법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박해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국인들은 겉으로는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매우 지능적이고 치밀하게 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영국은 1차적으로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으로 세일론에서 불교를 완전히 절멸시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영국인들이 불교를 말살하고자 했던 목적은 종교적으로 세일론을 기독교화 하는데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는데 불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인들은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했다. 그 첫째가 불교도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스님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둘째는 기독교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세일론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교육을 통해 불교는 저속한 종교라고 비하시키고, 기독교는 문명화 된 종교라고 세뇌시킴으로써 개종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즉 교육의 기독교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넷째는 제도적으로 불교도들에게 불이익을 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도에 대한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정책과 음모를 통해 불교를 말살하고자 시도되었다.

불교 내부의 분열 정책

1815년 영국과 세일론간에 체결한 캔디 조약은 나라를 영국에 넘기지만, 영국은 불교를 보호하기로 약속했고, 불교의 성스럽고 신성한 의례와 의식 등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처음부터 이 캔디 협약을 준수할 생각이 없었다. 캔디 협약은 단지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스님들은 불교도가 아닌 외국인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스님과 싱할라인들은 나라와 불교를 해방시키기 위해 영국에 대항하여 몇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1818년 캔디 지역을 통해 파급된 반란을 비롯하여, 1834년과 1843년의 반란, 그리고 1848년 담불라(Dambulla) 지역에서 일어났던 반란들은 대부분 비구들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영국 정부는 스님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지 않으면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세일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구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평신도들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첫째는 싱할라 왕조와 승단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미 캔디 조약 당시 세일론의 왕위 계승 제도를 없애고, 의회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왕실과 승단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치아 사리 의식과 왕실에서 최고 장로들을 임명하는 행사였다.

캔디 협약에 "영국은 불교의 성스럽고 신성한 의례와 의식 등을 보장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캔디 조약에 서명한 첫해에 영국 총독은 그 전에 싱할라 왕들에 의해 실시되어 온 것과 같이 성스러운 치아 사리 의식과 최고 장로들을 임명하는 연례 행사에 참가했다.

이 사건은 스리랑카의 기독교 선교단과 영국의 기독교 당국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래서 이내 두 행사는 중지되었고, 불교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중단되었다. 1847년부터 비구들은 최고 장로들을 자신들이 선출하여 임명하도록 요구 받았고, 1853년 영국 정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치아 사리를 디야와다나 니라메(Diyawadana Nilame)와 말왓떼(Malwatte), 그리고 아스기리야(Asgiriya) 사원의 주지 스님께 넘겼다.

이 두 행사는 왕실과 승단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예로부터 세일론의 왕들은 왕권과 불교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불치아(佛齒牙) 사리를 보관해 왔으며, 왕실에서는 최고 장로를 임명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을 영국 정부가 중단했다는 것은 곧 왕실과 승단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승단 내부는 물론 스님과 신도간의 갈등을 조장시키는 것이었다. 세일론에서 불교 승려가 갖고 있는 정치적 힘은 영국 정부의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스님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우선 승단 내부적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평신도들이 스님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있다. 당시 마딸라(Matala) 지역에 까라또따(Karatota)와 보왈라(Bovala)라고 하는 두 장로가 있었는데, 두 스님 모두 큰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보왈라 장로는 수많은 민중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 보왈라 장로의 힘이 영국 정부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판단한 마이트랜드(Maitland) 총독은 까라또따 장로를 승정(Nayaka thera)으로 임명함으로써 보왈라 장로를 이기도록 했다. 그 후 까라또따는 지역의 수장과 다른 지도자들, 그리고 평신도와 스님들의 반대편에서 대항하는 음모에 연루되고 만다.

이와 같이 영국의 관료들은 불교의 조직을 분열시키기 위해 스님과 신도 사이를 이간질시키기도 하고, 신도들이 스님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스님들과 평신도들은 오랫동안 하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독교 선교 활동과 교육 정책

영국의 통치자들은 기독교 전도를 실현하기 위한 교육과 선교사의 활동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해 주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처음부터 기독교 선교 단체들은 스리랑카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침례 교도들은 이미 1792년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814년에는 웨즐리(John Wesleyan, 1703-1791; 영국의 신학자로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감리교도, 1816년에는 미국의 선교단, 1818년에는 영국 교회에 의해 선교가 실시되었다. 이들 선교사 단체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스리랑카의 여러 곳에 선교 학교를 설립한 것은 이들 선교사 단체의 기본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 학교들은 선교 협회의 각별한 혜택과 영국 정부의 원조를 받았으며, 일부는 공립이었다.

이 학교에서의 교육은 기독교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관계 당국은 입학 전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생 개개인이 기독교 교리를 배우도록 함과 동시 학교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독교 종교 활동에 참가하도록 요구했다. 불교도인 학생들은 자신들의 고유 종교 의식에 참가할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학교는 그들 소유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이들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던 학습 내용은 불교의 근본을 침식 시키는 것으로 짜여져 있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비판되었고, 불교도의 실천행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불교는 문명화 된 기독교와 반대되는 저속한 집단의 종교라고 가르쳐 졌다.

이러한 불교 비난이 계속됨에 따라 예상했던 결과가 초래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보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이라고 훈련 받았던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민족 신앙인 불교를 버리기 시작했다.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식 이름과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불교도에 대한 차별 정책

영국의 지도자들은 1815년의 조약 체결 이후 불교도들이 누리고 있던 약간의 특권을 금지시켰다. 그러한 특권은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예를 들면 1805년 이후 사전에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이는 합법적으로 등록(출생 신고)을 할 수 없었고, 세례를 받지 않은 개인들의 결혼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직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영국의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수많은 불교도들이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없는데도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독교 학교들은 고급 공무원 양성을 위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불교도 자녀들을 끌어들였다. 지금까지 사찰에서 운영하던 시골 학교와 스님들은 시골 어린이들의 세속적인 배움은 물론 정신적인 지혜를 담당하는 교사였다. 하지만 영국의 지배 하에서의 사찰 교육은 공무원이 되는데 필요한 학습을 대비할 수가 없었다. 자식들이 고급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불교도인 부모들은 자진해서 자녀들을 새로운 선교 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불교말살 정책으로 영국 식민지 치하의 불교는 침체되었고, 스님들도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다. 반면 식민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던 기독교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한편 선교사 단체들은 불교라는 종교를 비판·조소하고, 기독교를 극구 칭찬한 내용의 책들과 팜플렛을 배포함으로써 개종을 얻어내려고 했다. 기독교의 설교자들은 공공연히 불교를 비난하고, 기독교의 유래와 우월성을 들어낸 이러한 책들과 팜플렛의 배포를 위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불교의 승려들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1860년 젊은 사미승 모홋띠왓떼 구나난다(Mohottiwatte Gunananda)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기독교인과 공개 토론을 실시하여 크게 승리함으로써 불교도의 자존심을 되찾고, 이를 계기로 불교도들이 자각하고 분발하여 불교를 회생시킨다.

10.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운동

구나난다 장로와 불교도의 재각성

이번 호로 세계불교법난사 스리랑카편을 마감하면서, 스리랑카의 불교를 재생시킨 불교부흥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스리랑카의 불교부흥운동은 1873년 모홋띠왔떼 구나난다(Mohottivatte Gunananda) 장로가 빠나둘라(Panadula) 대토론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을 상대로 구나난다 장로가 벌인 공개 논쟁은 세 번 개최되었다. 첫 번째는 1866년 우단비따(Udanvita)에서, 두 번째는 1871년 감뽈라(Gampola)에서, 세 번째는 1873년 빠나둘라(Panadura)에서 실시됐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 실시되었던 빠나둘라 논쟁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영자 신문 {The Ceylon Times}는 토론의 진행 과정을 특별히 묘사하여 보도했다. 논쟁은 불교도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기독교인들이 논쟁에서 패배하고 물러났을 때, 불교도들은 몹시 기뻐했다. 불교도들은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어느 사찰에서나 축제 행사를 실시하였고, 구나난다 장로의 초상은 마을마다 행렬을 지어 운반되었다.

이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불교도들은 자신감과 활력을 갖게 되었고, 불교도들이 재각성 하게 되었다. 결국 이 논쟁이 스리랑카의 불교를 회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물론 구나난다 스님 이전에도 나라와 불교의 재생을 위해 영웅적인 활동을 전개한 몇몇 스님들이 있었다.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불교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올코트(Olcott) 대령과 불교 활동

이 빠나둘라 논쟁이 있었을 때쯤 우연히 스리랑카를 방문했던 미국 학자는 이 토론에서 크게 감명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토론의 진행 상황을 책으로 출판했다. 헬리 스텔 올코트(Henry Steele Olcott) 대령은 이 토론의 보고서를 읽고, 불교 교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880년 불교의 지식을 얻기 위해 직접 블라바츠키(Blavatsky) 여사와 함께 스리랑카로 건너왔다. 그가 불교를 공부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불교에 귀의했고 스리랑카 불교도들의 정신 앙양을 위해 헌신했다.

올코트는 기독교 선교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린이들을 교육시킬 불교 학교를 개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1880년 불교신지협회를 창립했다. 이 협회에서 많은 불교 학교를 설립했다.

올코트가 도착했을 무렵 정부의 승인을 받은 불교 학교는 3곳밖에 없었다. 협회를 설립한지 12년이 지난 1897 25개의 남자학교와11개의 여자학교, 10개의 남녀공학 학교가 설립되었다. 1903년에는 협회 산하에 174개의 학교와 약 3만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1940년에는 429개가 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콜롬보에 있는 아난다(Ananda)와 나란다(Nalanda) 칼리지를 비롯한 그 밖의 우수한 불교 학교들과 콜롬보에 있는 박물관은 그가 이룩한 걸출한 업적들이다.

올코트는 불교와 나라의 견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신문과 잡지도 발행했다. 1880년에는 싱할라어 신문을, 나중에는 {The Buddhist}라는 영어 신문을 발행했으며, YMBA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또한 올코트 대령은 싱할라인들이 잃어버렸던 권리를 되찾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불교 행렬이 재개되었고, 웨싹(Vesak) 만월일이 국가 공휴일로 선포되었다. 현재의 불교도기 역시 올코트의 창작물이다. 또한 불교도도 결혼 등록 계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싱할라 불교도들을 눈뜨게 하고, 그들에게 길을 제시했던 이 고귀한 인물은 1907년 머물고 있던 인도에서 생애를 마쳤다.

빠나둘라 토론과 잇따라 일어난 올코트 대령의 도착, 이 두 사건은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 암울했던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광명의 시대를 예고했다.

불교부흥을 위한 다른 활동들

구나난다 장로와 그의 동료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의 반불교적인 선전을 차단하고, 나라에 불교를 되살리기 위한 다른 계획으로 출판사를 설립했다. 싱할라 불교도들에 의해 관리되었던 첫 번째 출판사는 Lonkopakara라는 이름으로 1862년 설립되었다. 이것은 태국의 국왕이 보시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몇 개의 출판사가 더 설립되었다.

그 사이에 당시의 박식한 스님들은 평신도들의 원조를 받으며 불교 학문의 부흥을 일으켰다. 그들 가운데 선구자들은 콜롬보 말리가깐다(Maligakanda)에 위됴다야 삐리웨나(Vidyodaya Pirivena) 1873년 설립했던 힉까두웨 수망갈라(Hikkaduve Sumangala) 대장로와 콜롬보 근처의 빠리야고다(Paliyagoda)에 위댜랑까라 삐리웨나(Vidyalankara Pirivena) 1875년 설립했던 라뜨말라네 다르마로까(Ratmalane Dharmaloka) 대장로이다. 이 두 거대한 학문 센터에서 배출된 학자들은 나라의 다른 곳에 여러 삐리웨나들을 개설했다. 또한 수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편집함으로써 불교의 학문연구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때쯤 우연히 스리랑카에 왔던 외국 출신의 헌신적인 학자들은 불교와 불교의 문화 및 문헌에 큰 흥미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가치 있는 학술 논문을 통해 서양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르마팔라와 불교문화 부흥운동

바로 이때, 다른 유형(類型)의 불교 부흥 활동은 재가 불교 지도자의 그룹에 의해 실행되었는데, 이 그룹의 최초에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가 있었다. 이 위대한 인물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전에 David Hewavitarana로 알려져 있던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는 1864년 실업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조부는 힉까두웨 쓰리 수망갈라 장로와 매우 가깝게 교제하고 있던 헌신적인 불교도였다.

그는 어린 시절 불교적 환경에서 자랐지만,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모홋띠왓떼 구나난다 장로가 기독교 선교 활동에 대항하여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을 당시, 청년 다르마팔라는 이 대웅변가의 연설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찰에 열심히 다님으로써 스님들의 총애를 받았다.

올코트 대령과 발라바츠키 여사가 1880년 스리랑카에 도착했을 때, 다르마팔라는 그 당시 16세의 젊은이였는데, 자연적으로 그가 교류하고 있던 구나난다 장로를 통해 두 외국인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올코트 대령의 연설과 활동들은 젊은 광신자를 더욱 분발하게 했다. 1883년 꼬따헤나에서 행한 불교도의 행렬을 카톨릭 폭도들이 잔인하게 습격하는 것을 보고, 다르마팔라는 그가 다니던 카톨릭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 다음해 그의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던 콜롬보 소재 불교신지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20세 때 다르마팔라는 그가 원했던 대로 그의 전 생애를 불교의 번영을 위해 헌신하고자 집을 떠나 독신 생활로 지내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허락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불교신지협회의 본부에 머물렀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되고, 영어와 다른 관련된 주제들을 공부하고, 외국식 이름을 받아들이고, 싱할라인의 관습과 예절을 버리고 서양 사람들의 의상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는 자신의 공식적인 연설과 신문과 잡지에 투고한 수많은 기고문을 통해, 외국인의 종교와 이름, 관습을 모방하는 습관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이름을 '데이빗(David)'에서 '다르마팔라(Dharmmapala)'로 개명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거나 잡지와 신문에 실린 그의 글을 주의 깊게 읽고, 그의 철학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자신들의 언어, 그리고 자신들의 관습에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와 인도, 그리고 세계의 다른 곳에서 불교의 부흥을 위해 끈질기게 봉사했던 이 위대한 인물은 말년에 승단에 들어가 '데와밋따 담마빨라(Devamitta Dhammapala)'로 불리었다. 그는 1933년 인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20세기 초반의 스리랑카 불교

20세기초기에 불교 단체의 지도자들은 아나가리까 다르마팔라에 의해 분발하게 되었고, 그들은 불교부흥운동의 촉진을 위해 여러 단체들을 결성했다. 이러한 단체의 회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불교부흥은 곧 나라의 부흥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또한 상당한 양의 학문적 연구도 이 기간에 이루어졌다. 위됴다야와 위댜랑까라, 그리고 이들 산하의 약 200개의 교육 기관에서 20세기초기에 여러 정전(正典)과 주석서를 편찬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약 1930년부터 현대의 학자들은 많은 팔리 불교의 경전들을 편집하고 출판했으며, 또한 불교에 대한 다른 견해들에 대한 이차적인 연구 업적들도 발표되었다.

또한 스리랑카의 옛 수도에 있는 고대 불교 성전들의 재건축을 위한 작업에도 매우 열성적이었다. 루완웰리(Ruwanveli Dagaba) 대탑은 제일 먼저 주목을 받은 곳이었다. 다른 성전 역시 하나하나 보수 되었고, 고대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도시에 있던 카톨릭 교회와 상업 단지를 다른 장소로 옮김으로써 다시 한 번 성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스리랑카는 불교활동을 위해 국내의 조직을 재편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진리의 사자(使者)' 즉 전법사(Dhammaduta)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WFB와 같은 국제기구도 스리랑카 불교 지도자들의 제안으로 설립되었다.

20세기초기에 있었던 이 불교부흥운동은 20세기 중반으로 가속화되었으며, 그 결과 당시 싱할라 불교 지도자들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1948년 스리랑카는 133년간의 영국 통치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불교의 큰 목적을 위해 끈질기게 일했던 불교의 지도자들은 또한 외국인의 통치로부터 정권을 되찾았을 때, 그들은 나라의 신앙과 문화를 마음에 두고, 올바른 일에 마음을 쏟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불교는 다시 한 번 정당한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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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및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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