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논총 제67집 (2012), pp. 3∼47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4 인문논총 제67집 (2012)
역사적 모델로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동시대 및 후대의 제왕들이 모델 로 삼은 것은 양 무제 자신이라기보다는 양 무제가 모델로 삼았던 인도 역사의 실제적인 제왕이었던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 King Asˊoka)이었 지만, 아육왕을 모델로 한 양 무제의 전승도 역시 또다른 중요한 역사적 모델로서 지속되었다. 특히 강남지역의 정권에서는 양 무제의 불교적 제 왕관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던 경우가 많다. 양 무제의 숭불 행위 중에서 그의 불교적 제왕관과 관련하여 가장 주 목되는 것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아육왕탑의 발견과 공양이다.2) 양 무제 연간부터는 부처의 진신사리 공양이 황실의 주도 아래에서 적극적 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중에서도 회계(會稽) 무현(鄮縣)의 아육왕사와 금 릉(金陵) 장간사(長干寺)의 아육왕탑 공양이 가장 중요하다. 이 두 아육 왕탑은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성물로서, 공양자인 제왕의 성덕을 입 증하는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상징물로서 기능하였다. 아육왕 탑의 발굴과 부처의 진신사리 공양은 바로 양 무제가 인도의 아육왕 전 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치세에서 구현해낸 가장 중요한 숭불 행위이다. 불교의 이상적 제왕관인 전륜성왕 사상은 이미 남북조시대 초기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양 무제는 각종 불교 경전에 나오는 보편 적인 인도의 전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인도 역사상의 실제 菲(2009), 烽火與流星, 北京: 清華大學出版社. 그 외 양 무제 관련 국내 연구로는 양은경(2009), 양 무제시기 불교사찰, 불교조각과 사회변화 , 미술사학 23호, 한 국미술사교육학회; 소현숙(2009), 梁 武帝의 佛敎政策 , 韓國古代史探究 2집,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 제왕의 진신사리 공양은 아쇼카왕 이후 정치적 성격이 강한 불교 의례로 행해져왔다.
周炅美(2003a), 中國 古代 皇室發願 佛舍利莊嚴의 정치적 성격 - 易姓革命의 선전 물로서의 眞身舍利供養 , 東洋學 33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363-382쪽; 주 경미(2009a), 고대 국왕의 진신사리 공양과 정치적 함의 , 인문사회과학연구 10 권 2호,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7-50쪽.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5
전륜성왕으로 추앙되던 인도의 아육왕을 모델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불교적 제왕관을 발전시킨 점이 중요하다. 양 무제가 아육왕 전승을 적 극적으로 차용하여 자신의 불교적 제왕관으로서 구현하게 된 데에는 당 시 해로를 통해서 접하게 된 인도 및 동남아시아 불교의 영향이 크다. 양 무제와 동남아시아 불교와의 관계는 중국 사서에 기록된 동남아 출신 승려들과의 교류 및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확인된다. 그렇지 만 아직까지 동시대의 동남아지역에 대한 연구가 다소 미진하여, 양나라 와 동남아와의 교류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를 중심으로 다소 막연하게 논 의되었을 뿐이다. 양서(梁書)와 한역경전에서는 양 무제의 즉위 이후 동남아시아의 승 려들이 양 무제의 후원을 받으며 활발한 역경 사업을 벌였으며, 양 무제 의 불교 개종에도 이러한 동남아시아 승려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확인 된다. 중국측 기록에서는 양나라에 왔던 동남아 승려들이 모두 부남(扶 南, Funan)국의 승려로 전하고 있으므로, 당시 부남국의 존재가 양나라의 남해로 교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양 무제 연간의 중국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부남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아시아의 불교 문화의 성격과 양 무제와의 관계에 대 해서 진신사리 신앙과 전륜성왕 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겠다. 먼저 불교의 이상적 제왕관인 전륜성왕 사상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받아들여 지는 과정을 한역경전을 중심으로 살펴 본 후, 양 무제가 전륜성왕의 모 델로서 적극 차용했던 아육왕 전승의 실제와 전래 과정 및 구현 과정을 재검토하겠다. 이러한 논의와 함께 당시 양 무제가 받아들였던 실제 동 남아시아 불교 문화의 상황에 대해서도 비교하여 함께 그 시대의 불교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높이고자 한다. 6 인문논총 제67집 (2012) 2. 불교 전륜성왕 사상의 중국 전래 불교의 전륜성왕은 고대 인도의 보편적인 제왕관과 결부된 이상적 제 왕관이다. 석가모니도 전생에는 여러 번에 걸쳐 전륜성왕으로 태어났었 다고 하며, 불교 경전에는 여러 명의 다양한 전륜성왕의 존재가 기술되 어 있다. 이에 비해서 아육왕은 고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왕인 아쇼카 왕으로서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다. 이러한 역사상의 실존인물을 전륜성 왕에 비견하는 것은 좀더 뒤늦게 나타난 전승이다. 중국에서는 역사상의 실존 인물인 아쇼카왕보다는 전륜성왕으로서 신비화된 아육왕 전승이 널리 알려졌는데, 사실 아육왕 전승은 전륜성왕 사상의 한 예에 불과하 다. 아육왕 전승이 신비화되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유 포되는 것은 바로 양 무제 연간이다. 여기에서는 중국 불교 전래 초기의 주요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전륜성왕 사상과 아육왕 전승을 구별하여 중 국으로의 전래 과정을 간단하게 고찰하겠다. 2.1. 불전을 통한 전륜성왕 사상의 중국 전래 불교의 이상적 제왕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다. 전륜성왕은 칠보를 성취하고 4덕을 갖추어 세계를 통일하고 정법 (正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을 일컫는다.3) 글자 그대로 의 뜻을 보면 전륜성왕은 정법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성스러운 제왕이다.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정법의 수레바퀴, 즉 법륜(法輪, sk. Chakra, 차크라) 3) 전륜성왕은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차크라바르티 라잔’(Cakravarti-ra˜jan)을 한역한 말 로서, ‘차크라바르틴’(Cakravatin)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 한역어로는 전륜성왕 이 외에도 斫迦羅伐刺底, 斫迦羅伐辢底遏, 遮迦羅跋帝, 斫迦囉跋底, 遮迦越, 轉輪王, 轉輪聖帝, 飛行轉輪帝, 飛行皇帝, 혹은 輪王 등이 있다. 전륜성왕의 기본적인 정의 및 개념에 대해서는 望月信亨(1973), 佛敎大辭典 제4권, 東京: 世界聖典刊行協 會, 3826-3827쪽 참조.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7 전륜성왕상. 석조. 인도 안드라지방 자가야페타 불탑 출토. 기원전 1세 기-기원후 1세기경. 인도 첸나이 국 립박물관 소장. 이 제왕의 상징이자 동시에 깨 달음을 얻은 부처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인도에서의 전 륜성왕 사상은 불교만의 고유한 통치관이라기보다는 힌두교와 자 이나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 에서도 보이기 때문에, 불교 이전 부터 전해지던 고대 인도의 제왕 관이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4) 각종 초기 불교 경전에서는 전륜성왕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은 아함경 계통에 보이는 기록 이다. 특히 장아함경 권 6의 「전륜성왕수행경」과 권 18의 「전 륜성왕품」에서는 전륜성왕의 칠보와 그 성취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전륜성왕의 칠보는 금륜보(金輪寶), 백상보(白象寶), 감마보(紺 馬寶), 신주보(神珠寶), 옥녀보(玉女寶), 거사보(居士寶), 주병보(主兵寶)이 다.5) 칠보 중에서 첫 번째 보물이자 가장 중요한 금륜보는 천개의 바퀴 살을 가진 하늘의 바퀴로서, 지름이 14척이나 되는 거대한 법륜이다. 이 법륜은 전륜성왕의 치세에 나타나서 성왕의 통치를 돕다가 성왕의 치세 4) 인도의 전륜성왕 사상에 대해서는 U. N. Ghosal(1966), A History of Indian Political Ideas,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山崎元一(1994), 古代インドの王權と宗敎, 東京: 刀水書房 참조. 5) 長阿含經 권 6, 轉輪聖王修行經 , T1, 1:39a-42b; 권 18, 轉輪聖王品 , T.1, 1:119b-121b (T···는 大正新修大藏經의 수록번호와 권:쪽 표시임. 이하 표기는 모 두 이와 같이 약칭함). 8 인문논총 제67집 (2012) 가 끝날 때에 사라진다고 한다. 법륜은 전륜성왕의 주요한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바른 정법을 설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상징하는 상징 물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안드라 지방의 자가야페타(Jaggayyapeta) 불탑 유적의 부조 중에는 장아 함경에 기록된 것과 유사하게 전륜성왕의 칠보를 갖춘 전륜성왕상이 표현되어 있어서 주목된다(그림 1). 이 부조에서 전륜성왕의 오른손 뒤쪽 에 기둥에 올려진 법륜이 있고, 왼쪽 뒤의 기둥에는 신주보가 놓여져 있 다. 경전에 의하면 전륜성왕이 오른손을 들어서 통치할 방향을 가리키면 법륜이 그쪽으로 날아가서 그의 통치를 돕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전륜성 왕을 표현할 때에는 법륜을 오른쪽 손에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양 쪽 발 아래에는 각각 코끼리와 말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상보와 감마보를 표현한 것이다. 전륜성왕의 앞쪽에는 여인, 즉 옥녀보가 표현 되어 있고, 그 뒤에는 두 명의 남자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은 거사보와 주병보에 해당한다.6) 이러한 전륜성왕의 표현은 석가모니의 전생인 전 륜성왕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7) 인도 불교계에서의 보편 적인 전륜성왕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장아함경 이외에도 증일아함경, 잡아함경, 비화경 등 여러 경전과 자타카에는 여러 명의 전륜성왕이 나오는데, 불교 경전의 전륜성 왕 사상에서는 전륜성왕의 칠보와 4신덕의 성취 및 사방의 통치가 중요 하다. 불교의 이상적 제왕으로서의 전륜성왕 사상은 이러한 초기 경전들 6) 肥塚隆⋅宮治昭 編(2000), 世界美術全集 東洋編 13 インド(1), 東京: 小學館, 400쪽, 圖 106의 설명 참조. 7) 宮治昭는 이 도상이 전륜성왕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타카 중에서 전륜성왕인 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宮治昭(2010), 第五章 南インドの轉輪 聖王の圖像 - マ-ンダ-タ王說話圖を中心に , インド佛敎美術史論, 東京: 中央公論 美術出版, 274-293쪽.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9 의 전래와 함께 중국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한역 경전에 나타나는 불교 의 전륜성왕 사상에서는 전륜성왕이 부처와 마찬가지로 32상을 가지고 있으며, 칠보의 소지와 4신덕의 성취, 4병을 거느리고 4천하를 다스리는 이상적 제왕으로 이해된다.8) 여러 경전들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5세기초 구마라즙에 의해 서 한역된 대지도론에서 논해지는 전륜성왕과 부처의 비교론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전륜성왕과 보살의 32상의 차이점을 묻기도 하고, 전 륜성왕과 부처의 대력광명위덕의 차이도 논하며, 권 25에서는 전륜성왕 과 부처는 어떤 점이 비슷한지를 직접 묻고 답하기도 하였다. 대지도론 중에 서술된 전륜성왕과 부처의 차이점, 혹은 유사점 등은 이후 중국적 세계관에서의 전륜성왕관을 성립하는데 다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 다. 또한 대지도론에서는 한 시대에 전륜성왕이 두 명 나올 수 없다고 여러 번 설하고 있는데,9) 이러한 통일된 국가를 통치하는 전륜성왕 사상 은 이후 중국의 여러 황제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한편 대지도론이 번역되고 널리 읽혀졌던 중국의 북조 지역에서는 이 경전에 나타나는 전 륜성왕 사상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왕과 부처의 차이보다는 동일성을 강 조한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10) 중원지역과 북조 불교계에서는 장아함경이나 대지도론과 같은 초 기 한역 경전에 서술된 전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5세기경 번역된 미륵하생경의 영향이 중요했다. 미륵하생경에서는 미래불인 8)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朴京俊 (1996), 轉輪聖王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東國論叢 35집, 동국대학교, 1-29쪽; 윤세원(2006), 전륜성왕의 정치사상적 의미에 관한 연구–통치자질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 불교학연구 14호, 불교학연구회, 287-316쪽. 9) “如四天下世界中 無一時二轉輪聖王出.” 大智度論 권 4, T1509, 25:93. 10) 북위의 왕즉불 사상은 승려 법과가 북위 태조를 當今의 如來로 칭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鎌田茂雄(1993), 章輝玉 譯, 中國佛敎史 제3권–南北朝의 佛敎 (上), 장승, 277쪽. 10 인문논총 제67집 (2012) 미륵이 하생할 때에 이 땅을 전륜성왕이 통치하고 있다는 전륜성왕 사상 이 나타난다.11) 특히 북조 불교계에서는 미륵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전륜 성왕 사상과 중국의 성왕(聖王) 전통이 결합되면서, 황제의 권위를 강조 하는 독특한 제왕관을 형성하였다. 낙양으로 천도하여 용문석굴을 개착 했던 효문제(471∼499 재위)와 같은 북위 황제들은 불교적 전륜성왕 사 상과 왕즉불 사상을 함께 받아들였지만, 아육왕 전승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북위 제왕들의 전륜성왕 사상은 불교적 통치 이념의 활용과 미 륵상의 조성 등으로 구현되었으며, 불상과 석굴 조형이 중심을 이루는 물질문화적 특징을 보인다.12) 남조의 양 무제는 이러한 일반적 전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인 도의 아육왕 전승을 모델로 채택하여 나름대로 독특한 전륜성왕 사상을 발전시킴으로써, 북조 왕실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아육왕 전 승을 구현하고자 한 양 무제 연간에는 진신사리 공양을 위한 불탑의 조 성을 중시하면서 사리신앙이 발달하였다. 남조를 중심으로 발달한 아육 왕상과 같은 서상 제작의 전통도 역시 양 무제 연간의 아육왕 전승 구현 과 관련된 것이다.13) 북조 불교와는 달리 양 무제가 아육왕 전승을 구체 11) 미륵 하생시의 전륜성왕에 대해서는 각종 미륵하생경 계통의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미륵하생경을 비롯한 미륵계 경전 및 사상에 대해서는 松本文三郞(1911), 彌勒淨土論, 東京: 丙午出版社. 북위시대 미륵 신앙의 발전 및 미륵상 조성 양상 에 대해서는 강희정(2006),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학연문화사; 고혜련(2011), 미 륵과 도솔천의 도상학, 일조각. 12) 인도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기원후 1∼2세기경으로 알려져 있기 때 문에, 기원전 3세기의 아쇼카왕 시대에는 불상의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당 연하다. 그러므로 인도의 아육왕 전승에서는 불상의 제작이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 탑과 사리 신앙이 강조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불상 제작에 힘썼던 북위 불교계 에서는 초기에 전래된 아육왕 전승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13) 아육왕이라는 구체적인 모델을 상정한 양 무제의 전륜성왕 사상은 왕즉불 사상을 구현한 북위 불교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남북조 왕실의 숭불 활동에서 보이는 조 형활동의 차이는 바로 이러한 왕실의 불교적 제왕관과도 관계가 있다.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11 4사자 주두. 석조.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시대. 기원전 3세기. 인도 사르나트 출토. 사르나트 박물관 소장. 적인 모델로서 채택하게 된 것은 당시 동남 해로를 통한 동남아시아 및 인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서 받아들인 새로운 불교 문화의 영향이다. 양 무제는 중국적 불교 전통에 당시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통해 새롭게 전래된 불교 문화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불교적 제왕관 을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2.2. 아육왕 전승의 실제와 중국 전래 불교경전에는 수많은 전륜성왕의 이름이 나오며, 석가모니도 전생에 전 륜성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본생담에도 전한다. 그러나 경전상의 전륜성왕 중 에서 역사상의 실제적 존재로 확인되 는 인물은 드물다. 이러한 역사상의 실 제 전륜성왕에 비견되는 중요한 인물 이 바로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제 국을 통치했던 아쇼카왕, 즉 아육왕이 다.14) 한역경전에서의 ‘아육왕’은 고대 인도의 실존인물인 ‘아쇼카왕’에 비해 불교의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으로 서 신비화되고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 려진 경향이 강하다.15) 14) 아쇼카왕의 생존연대는 기원전 304∼232년경으로 전하고 있다. 아쇼카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현대의 주요 업적으로는 다음 글 참조. John S. Strong(1983), The Legend of King Asˊoka,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Harry Falk(2006), Asˊokan Sites and Artefacts. Mainz am Rhein: Verlag Philipp von Zabern; 이거룡(2009), 전륜성왕 아쇼까, 도피안사. 15) ‘아쇼카’라는 고대 인도의 실존 인물과 한역 경전상의 ‘아육왕’은 같은 인물을 지칭 12 인문논총 제67집 (2012) 고대 인도의 아쇼카왕은 전쟁의 비극을 보고 불교도로 개종하여 불교 를 제국의 종교로 삼고 여러 가지 불사를 했다. 특히 석가모니의 근본 팔탑 중에서 7개의 탑을 열어서 전국 각지에 진신사리를 나누어 보내어 팔만사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하는 유명한 고사는 아쇼카왕의 숭불 행위 를 대표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당시 아쇼카가 세운 탑 중에서 상당수는 현재까지도 인도에 남아 있 으며, 이 탑들과 함께 아쇼카의 칙령을 새긴 아쇼카 석주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아쇼카 석주는 보통 반질반질하게 마연한 큰 기둥면에 칙 령을 새기고, 그 위에 연꽃 모양의 주두를 얹은 후, 사자나 소와 같은 상 징적인 동물들을 올려놓는다(그림 2).16) 아쇼카 석주는 아쇼카의 석가모 니 진신사리 공양과 팔만사천탑의 건립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물 론 아쇼카가 세운 탑의 숫자는 실제로 팔만사천개였다기보다는 무수히 많음을 뜻하는 상징적인 것이지만, 이렇게 다수의 불탑과 석주를 세운 그는 이후 내내 숭불황제로서 알려졌다. 아쇼카왕의 진신사리 공양과 불탑의 건립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불교적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선전의 의미가 강하다.17) 아쇼카왕이 진신사리 공양을 위해서 건 하는 말이긴 하지만, 한역되는 과정에서 전승의 신비화가 다소 일어났으므로 미묘 한 어감의 차이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두 용어를 그러한 차이 를 고려하면서 혼용한다. 16) Harry Falk, op.cit. 아쇼카왕의 석주와 석칙의 비문 내용은 다음 글 참조. Vincent A. Smith(1992), The Edicts of Asoka,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reprinted); 츠카모토 게이쇼(2008), 호진․정수 번역, 아쇼까왕 비문, 불교시대사, 2008. 사르나트 출토 4사자 주두의 도상에 대해서는 이주형(2000), 사르나트 출토 4사자 주두의 네 가지 동물과 그 역사적 전개 , 인도연구 5호, 한국인도학회, 1-34쪽. 17) 아쇼카의 불교 개종 및 팔만사천탑 건립과 그 정치적 의의에 대해서는 John S. Strong, op.cit. 최근 불교사학계에서는 아쇼카왕의 실존과 마우리아 시대 문화에 대 한 국제학술대회가 여러 차례 열렸으며, 그 결과물의 일부가 출판되어 주목된다.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13 립한 불탑과 석주는 불사리에 대한 공양과 장엄이라는 단순하고 기본적 인 의미를 넘어서서 그것을 후원하는 제왕으로서의 자신의 권위와 성덕 을 드러내는 상징적 조형물이다. 아쇼카왕의 전기에서는 그가 전국 각지에 팔만사천탑을 건립했을 때 에 똑같은 규모와 양식으로 제작한 팔만사천개의 사리장엄구를 각지에 배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아쇼카왕이 만들었다는 팔만사천 개의 사리장엄구 중에서 실제 유물이 발견된 예는 하나도 없다.18) 또한 문헌상에 기술된 사리장엄 방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 에, 당시의 사리장엄구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19) 오히려 아쇼카왕의 사리장엄구로 전하는 독특한 유물, 즉 ‘아육왕탑’ 이라고 하는 유물들은 대체로 중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20) 그렇지만 중 국에서 출토되거나 알려진 아육왕탑들은 실제 제작연대와 제작지가 기 Patrick Olivelle, ed.(2009), Asˊoka: In History and Historical Memory, Delhi: Motilal Banarsidass; Patrick Olivelle․Janice Leoshko․Himanshu Prabha Ray(2012), Reimagining Asˊoka: Memory and History,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8) 인도에서는 아쇼카왕 시대에 해당하는 기원전 3세기경의 바비콘다 대탑에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바비콘다 대탑이 아쇼카왕의 후원과 관련 되었다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바비콘다 대탑의 사리장엄구에 대해서는 주경미 (2003b), 중국 고대 불사리장엄 연구, 일지사, 35-38쪽. 19) 아쇼카왕의 전기는 현재 한역본 2종과 산스크리트어본 1종 등 모두 3종이 전한다. 산스크리트어본 아쇼카바다나(Asˊoka¯vada¯na)와 漢譯經典 阿育王傳(T2042, 50: 99a-131a), 阿育王經(T2043, 50:131b-170a) 참조. 이들 문헌에 기술된 사리장엄방 식에 대해서는 주경미, 위의 책, 26-28쪽. 20) 중국의 아육왕탑은 아쇼카왕이 만든 탑이라는 의미로서, 남북조시대 이후로 상당수 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 탑들은 실제로 아쇼카왕이 만든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역사적인 기념물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형식은 탑형사리장엄구인 경우와 대형 전탑, 혹은 토탑인 경우 등 다양하다. 唐代까지의 중국 아육왕탑 전승에 대해서는 주경미(2007), 中國의 阿育王塔 전승 연구 , 東 洋古典硏究 28집, 동양고전학회, 369-408쪽 참조. 현대 중국에서 아육왕탑으로 불리는 것은 영파 아육왕탑을 모델로 한 탑형사리장엄구가 많으며, 대체로 강남 지역에서 유행하였다. 14 인문논총 제67집 (2012) 원전 3세기경의 인도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중국의 아육왕탑은 한역 경전을 통해서 아육왕의 존재가 중국 불교계에 알려지면서 나타난 중국 불교적 특색을 보이는 유물이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아쇼카왕의 호불행위에 대한 불교 설화들 이 아육왕경이나 아육왕전과 같은 불교 경전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 중에서도 아육왕전은 서진대인 306년에 번역되었으므로,21) 동아시아 에 아육왕 전승이 처음으로 전해진 것은 4세기경이다. 그러나 양 무제 이전의 동아시아 제왕 중에서는 전륜성왕 사상은 받아들였어도 아육왕 전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아육왕 전승은 역사적 실존 인물인 아쇼카왕보다는 경전을 통해서 알 려진 불교적 전륜성왕으로서의 이상화된 아육왕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이상화된 중국의 아육왕 전승은 남조 양 무제(502∼549 재 위) 연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했으며, 곧 동아시아 불교계의 독특한 전 통으로 자리잡았다.22)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제왕들은 아육왕과 같이 부 처의 진신사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성물을 공양하고 그를 위한 성대한 의례를 베풀고 거대한 불탑을 건립함으로써 그 성물을 후원할 불교의 이 상적 전륜성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제왕들 21) 阿育王傳은 西晋 光熙元年(306) 安法欽이 한역한 경전으로, 7권 11품으로 이루 어져 있다. 22) 아쇼카왕 이후 제왕의 진신사리 공양이 보이는 정치적 성격에 대해서 필자는 이미 여러 논문을 발표해왔다. 다음 글 참조. 周炅美(2003a), 위의 논문, 363-382쪽; 주경 미(2003c), 隋文帝의 仁壽舍利莊嚴 硏究 , 中國史硏究 22집, 중국사학회, 81- 127쪽; 주경미(2005), 遼 興宗年間(1031-1055)의 佛舍利莊嚴 硏究 , 中國史硏究 35집, 197-221쪽; 주경미(2008a), 李成桂 發願 佛舍利莊嚴具의 硏究 , 美術史學 硏究 257호, 한국미술사학회, 31-65쪽; 주경미(2008b), 스리랑카의 佛齒精舍와 동아시아의 求法僧 , 역사와 경계 69집, 부산경남사학회, 133-165쪽; 주경미 (2009a), 위의 논문, 17-50쪽; 주경미(2009b), 쿠빌라이 칸과 대성수만안사의 백탑 , 미술사와 시각문화 8호,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68-97쪽; 주경미(2009c), 百濟 彌勒寺址 舍利莊嚴具 試論 , 역사와 경계 73집, 1-32쪽; 周炅美(2012), 吳越國 王 錢鏐의 寧波 阿育王塔 공양과 그 의의 , 中國史硏究 77집, 35-69쪽.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15 의 아육왕 전승 구현은 불사리 및 아육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성적(聖跡) 의 공양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숭불활동은 역시 정치적 선전의 목적이 강하다. 아육왕 전승을 계승한 제왕들의 후원 아래에서 각지에서 는 아육왕탑과 그 안에 봉안된 부처의 진신사리가 재발견되고 불탑이 중 수되기 시작했으며,23) 아육왕과 관련된 불교조상의 발견과 공양도 이루 어졌다.24) 즉 동아시아 미술사에서의 아육왕탑과 아육왕상은 바로 이러 한 불교의 이상적 제왕으로서의 아육왕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한 역대 제 왕들의 노력에서 나타난 독특한 불교 문화적 산물이다. 동아시아에서 아육왕 전승을 처음으로 구현하기 시작한 양 무제는 아 쇼카왕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불교도가 아니었다가 후에 불교로 개종 한 인물이다. 그는 즉위 초기에는 도교신자였으나 504년 을 저술하면서 불교도로 개종하였으며, 이후 내내 독실한 불교도로 활동하였다.25) 불교 개종 이후 양 무제는 활발한 불사를 했으 며, 아육왕에 비견하는 불교적 전륜성왕으로 칭송되었다. 이후 그는 역 사상의 전륜성왕의 또다른 전승이 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아육왕상이나 아육왕탑의 기원은 문헌기록에서는 대체로 4세 기경부터 등장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 시기부터 이러한 성물이 존재했 23) 주경미(2007), 위의 논문 참조. 24) 아쇼카왕 시대에는 인도에서 불상이 제작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역사상에서는 아육 왕이 만든 불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아육왕상은 아육왕의 이름에 가탁한 서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아육왕상에 대한 주요 연구로 는 다음 글 참조. 金理那(1989), 皇龍寺의 丈六尊像과 新羅의 阿育王像系 佛像 ,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一潮閣; 金子典正(2003), 中國四川省出土阿育王像 に關する調査硏究 - 阿育王像說話の成立と南北朝時代の造像を中心に , 鹿島美術 財團年報 20號, 鹿島美術財團; 蘇鉉淑(2011), 위진남북조시대 阿育王像 전승 과 숭배 , 불교미술사학 11호, 통도사성보박물관; 소현숙(2012), 政治와 瑞祥, 그리고 復古: 南朝 阿育王像의 形式과 性格 , 美術史學硏究 271․272호. 25) 양 무제의 불교 활동에 대해서는 諏訪義純(2007), 中國南朝佛敎史の硏究, 京都: 法藏館 참조. 16 인문논총 제67집 (2012) 는지는 다소 불확실하다. 아육왕상과 아육왕탑과 관련된 비교적 이른 현 존 기록은 6세기 중엽경 양의 혜교가 찬술한 고승전에 의거한 것이 며,26) 그 외의 아육왕상과 아육왕탑 관련 기록은 대부분 수대와 당대에 편찬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아육왕상과 아육왕탑의 전승은 모두 양 무 제 연간에 크게 발달한 것이다. 양 무제가 아육왕 전승을 적극적으로 받 아들이게 된 계기는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 남방 불교의 영향이 크다. 양 무제의 즉위보다 훨씬 이른 414년 법현(法顯)은 인도와 스리랑카를 거쳐 해로를 통해 중국 산동성으로 귀국했다. 법현은 인도에서 실제로 아쇼카왕의 석주를 보고 왔으며, 아육왕 유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또 한 그는 아육왕 전승을 계승한 스리랑카 국왕의 석가모니 불치사리의 공 양과 불치제도 보고 왔다. 남조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구법승들을 통해서 인도와 스리랑카 왕실의 진신사리 공양과 사리신앙에 대해서 비교적 자 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27) 양 무제의 개종 및 아육왕 전승의 수용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모두 동남아시아의 부남국에서 온 승려들이다. 502년 양 무제가 즉위했을 때, 그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 동남아시아의 부남국에서는 사신과 함께 승려 만다라(曼陀羅)가 당시 수도인 남경으로 왔다. 만다라 는 즉위 이듬해인 503년 7월에 양 무제에게 경전을 바치고 남경에서 승 가파라(僧伽婆羅)와 함께 경전을 번역했다.28) 만다라와 함께 역경을 한 26) 高僧傳은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한대부터 양나라 天監 18년(519)까지 의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책이다. 本傳에 257명, 附傳에 243명 등 총 500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백명성(1998), 해제-고승전 , 한글대장경 高僧傳外, 동국 대학교부설 동국역경원, 21-26쪽. 고승전의 원문은 T2059, 50:322c-433a 참조. 27) 이주형 책임편집(2009), 동아시아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유적, 사회평론; 주경미 (2008b), 위의 논문. 28) “天監年初 扶南國沙門曼陀羅···大齎梵本經來貢獻 雖事飜譯未善梁言 其所出經 文多隱質 共僧加婆羅於揚都譯···.” 歷代三寶記 권 11, T2034, 49:98b.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17 승가파라도 역시 부남국의 승려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명의 부남국 승려 들이 새로 번역한 경전 중에는 아육왕경과 아육왕전이 포함되어 있 었는데, 이중에서 아육왕경의 번역은 512년에 이루어졌다.29) 이러한 경전의 번역 이후, 양 무제는 아육왕 전승을 구현하면서 본격적인 불교 적 제왕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양 무제의 전륜성왕 사상은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 불교를 통해서 전 해진 아육왕 전승을 구현하면서 구체화되어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북조 황실의 불교와는 다른 특색을 가진다.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에서 는 부처의 진신사리 공양과 불사리탑의 건립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일 반적인 전륜성왕 사상에서는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숭불행위이다. 물론 북조에서도 탑을 만들고 사리공양을 하기도 했으며, 남조에서도 미륵하 생신앙에 의한 전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여 미륵불을 조영하기도 했다. 그 러나 대체로 북조 황실에서는 거대한 불상 제작과 석굴 조영에 힘쓴 반 면, 양 무제는 불상의 조영보다는 진신사리의 공양과 불탑의 건립에 큰 힘을 기울였다. 즉 남조와 북조 황실의 전륜성왕 사상은 각 제왕이 추구 하는 이상적인 모델의 차이로 인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었던 것 이다.30) 양 무제 이후 그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의 여러 제왕들은 아육 왕 전승을 차용하여 정치적 선전의 성격을 띤 진신사리 공양을 적극적으 로 행하게 된다. 양무제 연간의 불사 중에서도 그의 전륜성왕 사상 및 아육왕 전승 구 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516년 완공된 섬현 석성사(石城寺)의 미륵 대불 완공과 522년 재건된 영파(寧波) 아육왕탑이다. 먼저 양 무제의 석 29) “阿育王經十卷 天監十一年六月二十六日 於揚都壽光殿譯 初飜日帝躬自筆受…” 위의 책. 30) 남조와 북조의 전륜성왕 관념의 차이에 대해서는 정치학계에서의 논의가 선행된 바 있다. 윤세원(2008), 전륜성왕의 개념형성과 수용과정에 관한 연구 , 동양사회 사상 17집, 동양사회사상사학회, 183-184쪽. 18 인문논총 제67집 (2012) 성사의 미륵대불 조성을 살펴보고, 이후 여러 제왕들에게 큰 영향을 미 친 아육왕 전승 구현의 가장 중요한 실례인 영파 아육왕탑 공양에 대해 서 고찰하겠다. 3. 양 무제의 석성사 미륵 공양과 전륜성왕 사상 중국 초기의 일반적인 전륜성왕 사상은 미륵신앙과 깊게 연결되어 있 다. 이러한 미륵신앙과 전륜성왕 사상의 관계는 초기에 한역된 미륵하 생경 계통의 경전 내용에 의한 것이다.31) 미륵하생경 계통의 경전에서 는 모두 도솔천에 있던 미륵보살이 염부제로 내려와 태어나서 성불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으며, 미륵이 하생할 당시에 그 땅을 전륜성왕이 통 치하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각 경전별로 전륜성왕의 이름은 약간씩 차이가 있어서, 상구(蠰佉), 향구(餉佉), 양구(穰佉), 승라(僧羅) 등으로 기 술되어 있다.32) 즉 미륵이 내려올 때인 새로운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 전 륜성왕이라는 관점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륵하생 신앙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전륜성왕 사상에서는 미 륵을 보살이 아닌 불상 형식으로 표현하여 조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러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대부분 미륵이 보살상으로 조형화되었 31) 미륵신앙은 크게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으로 나누어지며, 하생신앙과 관련된 하생경 계통은 하생경과 성불경 계통으로 다시 세분된다. 상생신앙은 미륵보살이 있는 도 솔천과 관련된 신앙인 반면, 하생신앙은 현세에 내려오게 될 미래불로서의 미륵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미륵신앙의 개설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松本文三 郞(1911), 위의 책, 1-91쪽; 金三龍(1983), 韓國彌勒信仰의 硏究, 同和出版公社, 32-73쪽; 법회연구원 편(1998), 미륵삼부경, 정우서적, 177-197쪽. 32) “爾時法王出現 名曰蠰佉.” T453, 14:421b; “其國爾時有轉輪王 名曰蠰佉.” T454, 14:424a; “國中有聖主 其名曰餉佉 金輪王四洲 富盛多威力.” T455, 14:426b; “其 國爾時有轉輪聖王 名曰穰佉.” T456, 14:429c; “國王名僧羅 四海內皆屬僧羅 行卽 飛行.” T457, 14:434c.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19 다.33) 중국에서는 5세기 전반경부터 미륵을 부처의 형상으로 조형화하 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바로 중국 불교미술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 색이다.34) 이러한 미륵불 도상의 성립은 미륵하생경 계통의 경전이 번역되기 시작한 402년 이후로 추정된다.35) 남조에서도 역시 일찍부터 미륵불이 조영되었으나,36) 이러한 미륵불 의 조영이 전륜성왕 사상과 관련된 예는 많지 않다. 남조의 미륵불 중에 서 전륜성왕 사상과 관련된 보기 드문 중요한 예가 바로 양 무제 연간에 완공된 절강성 섬현 석성사의 미륵대불이다(그림 3).37) 이 미륵대불은 양 무제 연간인 516년 승우가 완공한 것으로, 현재 신창(新昌) 대불사(大 佛寺)의 대불이다. 대좌를 포함하여 20 m에 이르는 거대한 선정인의 좌 상으로, 강남 지역에 개착된 보기 드문 거석불 중 하나이다. 상호나 법의 형식 등으로 볼 때, 현존하는 불상의 양식은 양대로 보기는 어려우며 청 대 이후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33) 인도 및 중앙아시아의 미륵 도상에 대해서는 宮治昭(1992), 涅槃と彌勒の圖像學 - インドから中央アジアへ, 東京: 吉川弘文館 참조. 34) Junghee Lee(1993),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Pensive Bodhisattva Images of Asia.” Artibus Asiae vol. 53, no. 3/4, Artibus Asiae Publishers, pp. 317-320. 35) 5세기 전반경부터는 중국 특히 북조지역에서 미륵의 명문이 새겨진 불상이 상당수 제작되었으며, 현존하는 예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은 443년에 제작된 북위 태평진군 4년명 금동여래입상이다. 북위 및 남북조시대의 미륵불에 대해서는 강희정(2006), 위의 책, 200-221쪽 참조. 그렇지만 당시 조영된 미륵불은 대부분 도솔천 왕생과 관련된 명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륜성왕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예를 찾기 는 힘들다. 36) 남조의 현존하는 미륵불상으로 가장 이른 예는 제 영명원년(483)에 조성된 사천성 茂縣 佛碑像이 있다. 이 불비상은 한쪽면에 무량수불을 다른면에는 미륵불상을 조 영했으며, 현재 사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袁曙光(1992), 四川茂縣南齊永明 造像碑及有關問題 , 文物 2号, 67-71쪽. 37) 섬현 석성사 미륵대불은 현재 절강성 新昌縣 大佛寺에 있는 대형 석불이다. 석성사 와 미륵대불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小野勝年(1985), 新昌․石城寺 彌勒 像 - 江南巨大石佛史的遍歷 , 佛敎藝術 163號, 每日新聞社, 11-27쪽 및 주경미 (2012), 위의 논문 참조. 20 인문논총 제67집 (2012) 석조미륵대불. 양대 완공. 청대 중수. 절강성 신창현 대불사. 그러나 이 석상을 조영할 당시에 세워진 양대의 비문 및 문헌기록을 통해서, 양 무제 연간의 미륵석상의 조영이 당시의 전륜성왕 사상과 관 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중요 하다. 상의 완공을 기념하여 양나라 의 유명한 문인인 유협이 찬술한 (梁建安 王造剡山石城寺石像記)는 현재 비문 만 회계철영총집(會稽掇英總集) 권 16에 전하고 있다.38) 이 조상기 이외에도 고승전에는 이 석상의 기 원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39) 조상기와 고승전의 기록에서 보 이는 중요한 사실은 이 상의 조영이 양 무제 513년 2월 12일에 본격화되 어,40) 516년 3월 15일에 완공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 불상은 부남국의 승려 만다라가 양 무제를 위해 아육왕경을 새로 번역하여 완성한 이듬 해에 본격적으로 착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조상기에서는 이 상의 크기가 전륜성왕인 아육왕이 만든 상보다 크므로 양 무제의 공덕이 더 38) 양나라 연간의 원래 비석은 현존하지 않지만, 비문의 내용은 欽定四庫全書 集部 會稽掇英總集 권 16, pp. 3-10에 전한다. 비문을 지은 유협은 문심조룡을 저술 한 남조때의 저명한 문인으로, 이 석불의 완공에 직접 참여한 南京 定林上寺의 僧祐 아래에서 수학했다. 유협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민나(2005), 문심조룡 – 동양 문예학의 집대성, 살림출판사, 46-64쪽 및 370-373쪽. 39) 高僧傳 권 13, 釋僧護 條, T2059, 50:412a-b. 40) “以大梁天監十有二年歲次鶉尾二月十二日 開鑿爰始 到十有五年龍集涒灘 三月十 五日 粧畵云畢···.” 劉勰, 梁建安王造剡山石城寺石像記 , 會稽掇英總集 卷 16.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21 크고 높음을 강조하고 있으며,41) 이 미륵상의 완공을 통해서 당시 양 무 제 연간이 미륵이 올 새로운 세상임을 언급하고 있다.42) 즉 이 조상기는 당시 승려와 문인들이 양 무제를 전륜성왕으로 추앙하고 있었으며, 이 미륵불이 새로운 세상의 전륜성왕인 양 무제를 칭송하기 위한 상징적 조 형물로서 건립된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미륵불 신앙을 바탕으로 한 전륜성왕 사상은 인도의 아육왕 전승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중국 초기 불교계의 미륵사상, 특히 미륵하생 신앙과 관련된 것이다. 즉, 양 무제 연간에 석성사에 조성된 대형의 미륵불좌상은 북조에서 먼저 발 달한 중국적 미륵불 신앙 및 그 영향을 받은 전륜성왕 사상과 관련된 것 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석성산 미륵대불의 완공 이후, 양 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아육왕 전 승을 차용하면서 전륜성왕으로서의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그 이후에 행 해진 영파 아육왕탑의 발굴과 공양 및 재건은 양 무제가 아육왕 전승을 차용하여 그의 전륜성왕 사상을 구체적으로 구현화한 중요한 예로서 주 목된다. 4.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진신사리 공양 양 무제 연간의 아육왕 전승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처의 진신 사리 공양이다. 512년 이루어진 아육왕경의 번역과 516년의 석성사 미 륵대불 조영 이후, 양 무제는 본격적으로 진신사리 공양을 행했다. 현재 41) “···像身坐高五丈···從地隨龕 光燄通高十丈 自涅槃已后一百餘年 摩竭提國始制 石像 阿育輪王善容羅漢 檢其所造 各止丈六 鴻姿巨相 興我皇時 自非君王願力之 至 如來道應之沈 豈能成不世之寶 建無等之業哉 ···.” 위의 책. 42) “竊惟慈氏鼎來 拯斯忍刹 惟我聖運福慧相符 固知翅城合契于今晨 龍華匪隔內來 世釋尊隱化···慈氏現力.” 위의 책. 22 인문논총 제67집 (2012) 까지 확인되는 양 무제의 진신사리 공양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은 522년에 이루어진 절강성 영파에 위치한 아육왕사의 아육왕탑 공양이다.43) 이 진 신사리는 동진의 승려 혜달이 땅속에서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아육 왕탑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아육왕사는 양 무제가 진신사리 공양을 하 면서 대대적인 중수를 하여 강남의 중요한 사찰로 새롭게 자리잡았다.44) 양 무제 연간에는 영파 아육왕사 이외에도 남경 장간사에서도 아육왕 탑과 진신사리를 발굴하였으며, 동남아시아의 부남국에서는 부처님의 머리카락 사리, 즉 불발(佛髮)을 요청해서 받아오기도 하는 등 부처의 진 신사리 신앙이 크게 발달했다. 이러한 진신사리 신앙은 무제 자신이 주 도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황제 자신의 본격적인 의례 참여 및 귀족들의 참여까지 이끌어낸 대규모의 진신사리 공양 의례는 아육왕 전승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이루어진 독특한 남조 불교의 전륜성왕 사 상의 구현 행위이다. 양서에 의하면 양 무제는 521년에 영파의 아육왕사에서 사리를 발 견하고 궁전으로 모셔와서 공양을 드렸다.45) 이 진신사리와 아육왕탑은 43) 문헌에 나오는 영파 아육왕사는 옛 지명의 변천에 따라서, ‘會稽 鄮縣의 阿育王寺’, ‘鄮山 阿育王寺’, ‘四明山 阿育王寺’, ‘明州 阿育王寺’ 등으로도 기록된다. 아육왕 탑은 이 절에 내려오는 소형의 탑형사리장엄구이지만, 현재 사찰내에는 아육왕탑 으로 전하는 후대에 건립된 대탑도 있다. 영파 아육왕탑의 연혁 및 연구사에 대해 서는 주경미(2009d), 北宋代 塔形舍利莊嚴具의 硏究 , 中國史硏究 60집, 71-78 쪽 참조. 44) “梁祖 普通三年 重其古跡 建木浮圖 堂殿房廊周環備滿 號阿育王寺.” 集神州三 寶感通錄 卷上, T2105, 52:405a. 45) “先時二年 改造會稽鄮顯塔 開舊塔出舍利···高祖禮拜竟 卽送還縣入新塔下···.” 梁書 권 54, 列傳 제48, 第夷 扶南國條, p. 172. 이하 본고에서는 양서 외국전 부분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역주본을 참조하여 기술한다. 동북아역사재단 편 (2010), 譯註 中國 正史 外國傳 6 南齊書․梁書․南史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 재단 참조(이하 양서 역주본으로 약칭). 양 무제의 영파 아육왕탑 공양 연도를 양서 역주본에서는 大同 2년, 즉 536년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에서 연대가 “先時二年”으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연도에 대해서는 ‘普通 2년(521)’설,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23 영파 아육왕탑. 소재미상. 제 작연도 미상. 절강성 영파시 아육왕사 소장. 이듬해 완성된 새로운 목탑 안에 봉안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발 견된 아육왕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탑, 즉 탑형 사리 장엄구로 추정된다.46) 양 무제 연간의 아육왕탑이 구체 적으로 어떤 형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대 이후의 문헌기록에는 이 탑의 형태에 대한 묘사가 꾸준 히 보인다. 물론 이러한 기록에 나 오는 탑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조 금씩 변화하기 때문에, 현재 아육 왕사에 모셔진 탑의 형태와 양 무 제 연간의 탑의 형태가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47) 현재 사찰에 소 장된 아육왕탑의 형태는 오월국시 대 이후부터 고정화된 형식을 따르고 있다(그림 4).48) ‘大同 2년(536)’설, ‘大同 9년(543)’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필자는 집신주삼보감 통록 기록과의 관계 및 양 무제의 장간사 아육왕탑 공양과의 관계 등으로 볼 때, 521년으로 추정한다. 이에 대해서는 周炅美(2009d), 위의 논문, 74-75쪽 참조. 46) 고대 인도에서는 이미 초기부터 사리장엄구의 형태가 탑의 형태를 모방하였다. 탑 형 사리장엄구의 변천에 대해서는 주경미(2006a), 탑형 사리장엄구: 건축 이미지의 공예적 변용 , 미술사와 시각문화 5호, 224-249쪽. 47) 무현 아육왕탑의 형태가 양나라 연간과는 달리 현재의 형태로 변화된 것은 오월국 시대이다. 이러한 탑 형식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된바 있다. 周炅美(2006b), 中國 浙江省 杭州 雷峰塔의 佛舍利莊嚴 , 佛敎美術史學 4호, 359-360쪽; 大島幸代(2008), 鄮縣阿育王塔の形狀に關する基礎的考察 , 奈 良美術硏究 7호, 奈良美術硏究所, 141-154쪽; 주경미(2009d), 위의 논문, 72-77쪽. 48) 오월국시대의 영파 아육왕탑의 위상 및 변화에 대해서는 주경미(2012), 위의 논문 24 인문논총 제67집 (2012) 영파 아육왕탑의 진신사리를 공양한 이후 양 무제는 당시 수도였던 남경의 장간사에서 옛 탑을 중수하면서 또다시 부처의 진신사리를 발견 하였다. 장간사의 아육왕탑이 발굴된 것은 537년 8월이며, 탑이 중수된 것은 그 이듬해이다.49) 이 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밤톨만한 사리, 작은 사 리, 부처의 머리카락, 손톱 등 여러 가지 종류였다. 이 사리들을 위해서 양 무제는 쌍탑을 건립하고 한쪽 탑에는 사리를, 다른 탑에는 머리카락 과 손톱을 각각 나누어 봉안하였다. 당시 만들어진 사리장엄구는 금앵 (金罌), 옥앵(玉罌), 칠보탑, 석함 등 4중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였다. 이 중에서 칠보탑은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중국 황제에 의해서 처 음으로 만들어진 탑형 사리장엄구로서 주목된다. 또한 장간사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리를 봉안한 쌍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동아시아의 쌍탑 관련 기록으로서도 비교적 이른 예에 해당한다. 장간사의 진신사리는 그후 수나라 양제에 의해서 발굴되어서 일부가 장안의 일엄사(日嚴寺)로 옮겨졌다가 다시 당대 도선에 의해서 재발굴되 어 숭의사탑에 매납되었다. 도선은 수나라 때에 일엄사로 옮겨온 사리가 진신사리가 아니고, 장간사에 남아 있는 사리가 진신사리일 가능성이 있 다고 전하기도 하였다.50) 장간사에 남아 있던 사리는 당나라 말기에 절강성의 관찰사를 지냈던 당시의 고관인 이덕유(李德裕)에 의해 또다시 발굴되었다. 이덕유는 장 간사의 아육왕탑에서 사리 21립을 발굴하여 그중 11립을 824년 강소성 진강시의 감로사탑에 새로 매납했다. 당시 제작된 9세기의 사리장엄구 참조. 오월국시대의 영파 아육왕탑은 오월국이 송에 귀순하면서 송나라의 수도 개 봉으로 가져갔으며, 이후 개봉의 개보사탑에 봉안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탑은 남송연간 이후에 제작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49) 양 무제의 장간사 사리 공양에 대해서는 梁書 권 54, 列傳 제48, 第夷 扶南國條, 양서 역주본, pp. 165-171; 주경미(2009d), 위의 논문, 75-76쪽 참조. 50) 集神州三寶感通錄, T2106, 52:405-406.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25 는 송나라 때인 1069년에 다시 발굴되어 1078년에 세워진 감로사 철탑 에 다시 봉안되었다. 감로사 철탑 출토 장간사 사리기는 현재 진강시박 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녹정형의 장방형 석함과 은곽, 금관, 소금관 등 4중 용기로 구성되어 있다.51) 한편 장간사에도 계속 탑과 사리장엄구는 남아 있었다. 최근에는 남경 장간사지의 명대 전탑의 지궁 유적에서 송 대에 제작된 탑형사리장엄구가 출토되어 주목되기도 했다.52) 장간사의 진신사리는 양 무제 연간에 수도에서 발견된 아육왕탑의 봉 안품으로서, 아마 양나라 연간에는 가장 중요한 성물로 여겨졌을 것이 다. 당시 도성 내에서 이루어진 본격적이며 대규모의 불교 의례였던 장 간사탑의 중수는 양 무제의 전륜성왕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 양제가 장간사의 진신사리를 장안으로 옮 겼다는 기록은 당시 장간사의 진신사리의 위상이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높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수나라 양제에 의해서 진신사리가 이운되었 던 탓인지, 수나라 이후의 장간사 아육왕탑의 위상은 영파 아육왕탑의 위상에 비해 상당히 격하되었다. 영파 아육왕탑과 남경 장간사의 아육왕탑은 모두 양 무제에 의해서 진신사리가 발견되고 공양되었으며 탑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당시 재건 된 탑은 모두 목탑으로 추정되며 현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리를 봉 안했던 영파의 탑형사리장엄구는 지속적으로 “아육왕탑”으로 불리면서 51) 감로사 철탑 지궁 출토 장간사 사리장엄구에 대해서는 江蘇省文物工作隊鎭江分隊 ․鎭江市博物館(1961), 江蘇鎭江甘露寺鐵塔塔基發掘記 , 考古 6号, 中國社 會科學院考古硏究所, 302-315쪽 및 주경미(2003b), 위의 책, 306-312쪽 참조. 52) 남경 장간사는 명나라 때에 대보은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명대 탑의 지궁은 2008 년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송나라 1011년에 제작된 것으로 역 시 오월국시대 이후 영파 아육왕탑의 형태를 닮은 탑형 사리장엄구이다. 南京市博 物館(2009), 聖塔佛光, 南京: 南京市博物館; 주경미(2009d), 위의 논문, 96-99쪽; 祁海寧․周保華․龔巨平(2011), 南京大報恩寺遺址北區考古發掘 , 國家文物局 主編, 2010 中國重要考古發現, 北京: 文物出版社, 178-186쪽. 26 인문논총 제67집 (2012) 강남 지역에서 그 형식이 전승되었다. 양 무제 연간에 공양된 두 개의 아육왕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공양함으로써 성덕을 드러내 보이는 아 육왕 전승을 모방하여 이루어진 독특한 남조의 전륜성왕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양 무제 이후 영파 아육왕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신이를 나타내 보이는 제왕이 불교의 이상적 제왕인 전륜성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드러내보이는 정치적 상징물로서 존숭되었다. 양 무제 이후 영파 아육왕탑의 진신사리를 공양했던 황제들로는 진(陳)의 선제(宣帝), 당의 중종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양 무제의 불사와 전륜성왕 사상을 가장 적 극적으로 차용한 제왕은 9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오월국의 창시자 전류 (錢鏐)이다. 또한 그의 손자인 전홍숙과 그 뒤를 이어서 강남에서 정권을 유지했던 남송의 황실에서는 양 무제와 전류의 뒤를 이어 지속적으로 정 치적 목적을 가진 진신사리 신앙과 의례를 이어갔다.53) 양 무제의 아육 왕 전승을 바탕으로 한 전륜성왕 사상은 중국 불교 전통과 동남아 불교 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다음으로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불교 적 상황과 양 나라의 교류 관계를 고찰하겠다. 5. 양 무제와 고대 동남아시아 불교 양 무제 연간에는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부처의 진신사리와 불상이 여 러 차례 전래되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양서 외국전의 기록을 중심으 로 당시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전래된 진신사리 관련 기록을 살펴본 후, 양나라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부남국의 상황을 고찰하겠다. 53) 주경미(2012), 위의 논문 참조.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27 5.1. 기록을 통해서 본 양 무제 연간의 동남아시아 불사리신앙의 전래 502년 즉위한 양 무제는 즉위 직후부터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과 교류 를 가졌다. 양 나라 이전부터도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꾸준 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사서에는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 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54) 삼국지에서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 로 임읍(林邑)과 부남만 기록했지만, 양서에는 해남제국으로 임읍, 부 남, 돈손(頓遜), 비건(毗騫), 제박(諸薄), 반반(盤盤), 단단(丹丹), 간타리 (干陁利), 낭아수(狼牙脩), 파리(婆利), 중천축(中天竺), 사자(師子)국 등 12개의 나라 이름이 보인다.55) 이중에서 국왕이 니건도(尼乾道)를 받들 었다는 임읍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불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서에 의하면, 양 무제 연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를 통해 부처의 사리가 전래되었다. 이때 전해진 사리는 보주형사리와 골아 형사리가 모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부처의 머리카락 사리, 즉 불 발(佛髮)도 전래된 기록이 있다.56)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양 무제 의 즉위 직후에 사신과 승려를 보냈던 부남국일 것이다.57) 앞서 고찰한 양 무제 연간에 이루어진 두 아육왕탑 발굴에 대해서도 역시 부남국조의 54) 동남아시아 고대사와 관련된 중국 기록은 중국의 각 시대별 正史 外國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09년부터 국문 번역 및 역주를 포함한 譯 註 中國 正史 外國傳을 시리즈로 발간하여 국내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현재까지는 史記부터 新五代史까지의 외국전이 번역되어 있다. 55) 양서 역주본, 136-232쪽. 56) 사리의 종류와 기원은 주경미(2003b), 위의 책, 14-21쪽 참조. 57) 扶南國의 원래 국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국제 학계에 서는 “푸난(Funan / Founan)”으로 통용되고 있다. “푸난”이라는 “山”을 뜻하는 고대 크메르어인 “banam(현대어 phnom)”에서 온 단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남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에 대해서는 Lauwrence Palmer Briggs(1951), “The Ancient Khmer Empire.” Transaction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vol. 41, no. 1, p. 13. 28 인문논총 제67집 (2012) 맨 뒷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양 무제 연간의 아육왕 전승 구현은 부남국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58) 부남국은 양나라 이전부터 남조와 교류를 했으며, 양 무제가 즉위한 직후인 천감 2년(503)에는 당시 부남국의 왕 교진여 사야발마(憍陳如 闍 邪跋摩)가 양 무제에게 산호로 만든 불상을 보내어 통교를 시작했다.59) 또한 사야발마의 뒤를 이어서 천감 13년(514)에 왕이 된 사야발마의 아 들 류타발마(留陁跋摩)는 519년 사자를 보내 전단서상과 파라수엽을 바 치기도 했다. 그 이후 부남국에 불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양 무제는 사자와 승려 운보를 보내어 이 불발을 양나라로 맞이해왔다.60) 양 무제 가 부남국에서 가져온 불발의 소재는 확실하지 않으나, 장간사에서도 불 발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보주형 사리뿐만 아니라, 부 처님의 이빨이나 머리카락같은 육신의 일부도 진신사리로서 공양했음을 알 수 있다. 반반국에서는 양 무제 중대통 원년(529)에 사자를 보내서 ‘아상(牙像)’ 과 탑을 보냈으며, 그 이듬해인 중대통 2년(530)에는 단단국에서 역시 아 상과 탑을 각 2구씩 보내왔다고 한다. 한편, 양 무제는 중대통 5년(534) 에 보리국에 사신을 보내어 진사리와 탑 그림을 가져왔다.61) 이중에서 반반국과 단단국에서 보내온 ‘아상’에 대해서는 ‘상아로 만 든 불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송서(宋書)의 기록 및 법 현의 여행기를 통해서 알려진 스리랑카의 불치와 같은 골아형 사리의 모 형이거나 혹은 스리랑카의 불치 정사의 모형일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58) 부남국 불교에 대한 개설로는 강희정(2009), 푸난(扶南) 불교조각의 연원과 전개 , 미술사와 시각문화 8호, 40-67쪽 참조. 59) “天監二年 跋摩復遣使送珊瑚佛像幷獻方物…” 梁書 권 54, 양서 역주본, 163-164쪽. 여기에서 ‘산호불상’은 ‘산호로 만든 불상’, 혹은 ‘산호와 불상’으로 보 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60) “(扶南國) 又言其國有佛髮 長一丈二尺 詔遣沙門釋雲寶隨使往迎之.” 위의 글. 61) 이상의 내용은 양서 역주본, 176-177쪽 참조.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29 있다.62) 만약 이것이 ‘불아상’(佛牙像)이었다면, 스리랑카에서 전래된 골 아형사리신앙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동남아에서 가져온 아상의 단서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이 말의 정확 한 의미를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고려하여 연구 할 필요가 있다. 보리국에서는 진사리와 탑 그림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진사리는 아마 보주형의 진신사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리는 보리국에서 바친 것이 아니라 부남국의 불발과 마찬가지로 양 무제가 사신을 보내서 가져 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양 무제는 부남국과 보리국에 부처의 진신사 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사신을 보내어 그 사리를 양 나라로 가져온 것 이다.63) 이러한 강제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불사리신앙은 역시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관련이 깊다. 아쉽게도 양 무제의 불교 및 전륜성왕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부남국 에 대해서는 양서를 비롯한 중국 기록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중국 사서에서 부남국은 기원전 1세기경에 건국하여 7 세기경까지 있던 베트남 남부 지역과 캄보디아 일대 지역의 왕국으로 알 려져 있다.64) 또한 3세기경부터 중국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시작했으며, 62) 宋書 권 97, 師子國條에 의하면 송 元嘉 5년(428) 스리랑카의 국왕이 송나라에 표문을 보내면서 ‘牙臺像’도 보냈다고 하는데, 스리랑카 및 외국 학자들은 이 ‘아대 상’을 ‘불치정사의 모델’로 추정한다. 그러나 중국 불교조각 연구자들은 ‘아대상’도 ‘상아로 만든 불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주경미(2008b), 위의 논문, 157-158쪽. 63) 사실상 이러한 사리의 강제 전래는 서양 중세 기독교에서 보이는 “거룩한 도둑질 (Furta Sacra)”의 선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패트릭 J. 기어리, 유희수 옮김, (2010), 거룩한 도둑질 - 중세 성유골 도둑 이야기, 도서출판 길. 기어리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에서 성인의 유골을 종교적 숭앙의 이유로 강탈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 라 거룩한 행위로 추앙되었다고 한다. 양 무제의 동남아 사리 전래는 이러한 선례가 이미 동아시아의 불교에서도 일찍부터 행해졌음을 알려준다. 64) 푸난의 역사에 대한 주요 개설로는 다음 글 참조. Paul Pelliot(1903), “Le Fou-Nan.”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eˆme-Orient, Tome 3, L’École, pp. 248-303; Briggs, op.cit., 30 인문논총 제67집 (2012) 6세기의 양나라 연간에는 수도에 부남관이 설치되었었다. 부남국은 특 히 5∼6세기경에 그 세력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강 역이나 도시 유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양서에서는 부남국의 남쪽 삼천리 아래에 있는 돈손국도 부남국에 속해 있는 나라라고 전하므로,65) 부남국은 당시 중국과 국가 체제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까지는 양 무제 연간에 교류했던 부남국의 중심지가 어느 지역인 지, 당시 부남국의 불교 문화의 중심지가 어디에 대해서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대체로 양나라 연간의 부남국은 인도차이나반 도 남부지역에서 태국 남부지역과 말레이반도 중부지역까지 이르렀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66) 다음으로는 이 지역에 현존하는 고대 불교유적을 중심으로 전륜성왕 사상과 불사리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5.2. 인도차이나반도 남부의 주요 불교 유적 20세기 초반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진 동남아시아의 고고학적 조사는 부남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베트 남 남부 지역에서 캄보디아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옥에오(Oc Eo) 문 화권 유적들은 대부분 부남국의 강역에 속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7) pp. 12-36; Michael Vickery(2003-2004), “Funan Reviewed: Deconstructing the Ancient.” Bulletin de l’École Française D’extreˆme-Orient, Tome 90-91, pp. 101-143; James C. M. Khoo, ed.(2003), Art & Archaeology of Fu Nan: Pre-Khmer Kingdom of the Lower Mekong Valley, Bangkok: Orchid Press. 65) 양서 역주본, 154-155쪽. 66) Vickery, 위의 논문 및 강희정(2009), 위의 논문 참조. 67) 최근까지 발굴조사된 부남국 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해서는 Khoo, op.cit. 다만 이 유적들에서는 아직까지 나라 이름으로 볼 수 있는 명문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국사서에 나오는 부남국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異見이 많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현대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고대사에 대한 베트남과 캄 보디아, 태국의 입장이 서로 다르므로, 각 나라에서는 이들 문화권이 동일한 문화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31 남부 베트남에 위치한 옥에오 유적은 1944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서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옥에오 주변 지역에서 유사한 고대 문화 유적 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68)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 베트남 남부의 옥에 오와 캄보디아의 앙코르 보레이(Angkor Borei) 유적지가 부남국의 중요 한 고대 도시 유적으로서 주목되었다. 그중에서도 앙코르 보레이는 부남 국의 정치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69) 양 무제 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의 부남국의 정치적 중심지, 즉 수도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당시 부남을 다스렸던 왕은 “교진여 사야발 마”, 즉 “콘디냐 자야바르만”(Kaundinya Jayavarman)이었다. 이 왕은 475 년부터 514년까지 오랜 기간 동안 부남국을 통치했으며, 양 무제가 즉위 했을 당시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70) 아쉽게도 자야바르만의 행적에 대 권임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중국 사서에 기록된 “부남”으로 통칭하지 않는 경향 이 강하다. 그 대신 고고학적 문화권 설정에 의해 가장 올라가고 중요한 남부 베트 남의 옥에오(Oc Eo) 유적의 이름을 따서 옥에오 문화권으로 비정하는 경우가 많다. 68) Louis Malleret(1959-1963), L’archeˊologie du delta du Meˊkong, 4 volumes. Paris: Publications de l’École Française d’Extreˆme-Orient. 69) 부남국의 정치적 중심지, 즉 수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대체로 남부 베트남 옥에오 근처의 바프놈(Ba Phnom)과 앙코르 보레이를 유력한 도시 유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新唐書에서는 부남이 진랍(Chenla, 첸라)에 의해 서 침공을 당했을 때 수도가 “特牧(Temu, 테무)城”이었으며, 이후 남쪽으로 내러서 “那弗那(Nafuna, 나푸나)城”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북아역사재단 편(2011), 譯註 中國 正史 外國傳 11, 新唐書 外國傳 譯註 下, 동북아역사재단, 996-998쪽. 이 책에서는 일본 학계의 견해를 인용하여 특목성을 비야다푸라(Vyadhapura)이자 바 남(Banam)으로 비정하고, 나불나는 옥에오로 비정했다. 그러나 서구 학계에서는 특목성과 나불나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는데, 뒤에 옮겨간 수도인 나불나성을 현재의 앙코르 보레이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비야다푸라는 후대 명문에 나오는 도시 이름으로 특목성과 동일한 지역으로 보지만, 바남, 즉 옥에오 위쪽의 바프놈 지역이 비야다푸라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부남국의 수도에 대한 서구 학계의 여러 설에 대해서는 John N. Miksic(2003), “The Biginning of Trade in Ancient Southeast Asia: The Role of Oc Eo and The Lower Mekong River.” in Khoo(2003), op.cit., pp. 11-12 참조. 70) “扶南王 憍陳如 闍邪跋摩”로 기록된 왕으로, 제나라 영명연간에도 중국에 사신을 32 인문논총 제67집 (2012) 해서는 양나라에 산호로 만든 불상을 보냈던 것 이외에는 자세하지 않 다. 현존하는 비문 중에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쿠라프라바바티 왕비 (Queen Kulaprabhavati)와 그의 아들인 구나바르만(Gunavarman)의 이름 이 보이는데, 이 비문에 보이는 부남국 왕실의 인물들은 힌두교의 비슈 누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1) 양서에서 의하면 자야바르만의 사후에 적자인 왕자가 배다른 형 류 타발마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며, 동생을 살해한 서자인 형이 왕이 되었다 고 한다. 아마도 현존하는 비문에 나오는 구나바르만은 양서에 기록된 적자로 추정되며, 그의 배다른 형이자 왕이 된 류타발마는 또 다른 비문 에 이름이 등장하는 루드라바르만(Rudravarman)으로 추정된다.72) 양 무 제가 부남국으로부터 불발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 왕 때이다. 이것은 단 순한 불교 성물의 전래도 볼 수 있지만, 양 무제가 그의 전륜성왕 사상에 따라 정법에 어긋나는 왕인 루드라바르만으로부터 성물을 보호하기 위 해서 자신이 가져왔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루드라바르만의 아버지인 자야바르만의 종교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 의 부인과 적자인 구나바르만은 힌두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그러므로 당시 부남국의 왕실에서는 양 무제 만큼 독실하게 불교 를 숭앙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부남국 유적지에서 출토 되는 유물 중에는 부남국 왕실의 종교와는 상관없이 부남국에서도 전륜 성왕 사상이 있었음을 알려 주어 흥미롭다. 남부 베트남의 안쟝(An Giang)성 다노이(Da Noi) 유적에서 출토된 금 보냈으며, 514년에 죽었다고 한다. 梁書 권 54, 列傳 제48, 양서 역주본, 162-164쪽. 71) 쿠라프라바바티의 이름이 보이는 명문은 닉 타 담방 덱(Neak Ta Dambang Dek)에서 출토되었으며, 구나바르만의 이름이 보이는 명문은 프라삿 프람 로벵(Prasat Pram Loveng)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Briggs, op.cit., p. 28. 72) Vo Si Khai(2003), “The Kingdom of Fu Nan and the Culture of Oc Eo,” Khoo(2003), op.cit., p. 43 및 Briggs, op.cit.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33 금제원형판. 3∼6세기. 부남국 시대. 베트남 다노이 유적 출 토. 안쟝성박물관 소장. 제 원형판들은 힌두교 신앙과 관련 된 종교적 성물로 추정된다.73) 이 원형판들 중 한 점에는 오른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남성상이 새겨 진 예가 있는데(그림 5), 남성의 오 른손 아래에는 법륜이 표현되어 있 다. 베트남 학자들은 이것을 힌두 교의 비쉬누 신상이라고 설명했지 만, 오른손에 법륜을 들고 서 있는 남성의 도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금 륜을 오른손으로 움직여 사방을 통 치한다고 하는 전륜성왕 도상을 표현한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남인도 자가야페타 불탑 출토 석조부조에서도 역시 오른손 쪽에 법륜을 표현해 놓았는데(그림 1), 대부분의 인도 전륜성왕상에서는 언제나 오른손 쪽에 법륜을 놓아둔다. 즉 이 상은 남인도의 전륜성왕 도상을 따른 것으로, 부 남국이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려준다. 다노이 유적에서는 이 금판 이외에도 법륜이나 비쉬누 신상이 새겨진 예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으므로 힌두교 신전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아 직까지 다노이 유적의 성격이나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부분 이 많지만, 여기에서 출토된 전륜성왕 도상을 새긴 금판은 인도를 통해 받아들인 부남국의 전륜성왕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인도에서는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모두 공통된 전륜성왕 사상이 있 었기 때문에, 부남국의 왕실에서는 이러한 복합적인 전륜성왕 사상을 가 지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양 무제에게 아육왕 전승을 전한 부남국의 자 73) Le Thi Lien(2005), “Gold Plaques and Their Cultural Contexts in the Oc Eo Culture.” Bulletin of the Indo-Pacific Prehistory Association, vol. 25, Bulletin of the Indo-Pacific Prehistory Association, pp. 145-154. 34 인문논총 제67집 (2012) 야바르만은 아마도 힌두교와 불교를 복합적으로 숭앙하면서 인도의 전 륜성왕 사상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남국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옥에오와 앙코르 보레이 지역에서는 불 교 유적이나 유물이 출토되고 있긴 하지만, 힌두교 유적에 비하면 수가 적은 편이다. 옥에오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스투파 유적은 벽돌로 쌓은 인도식 건축물로서, 거소아이(Go Xoai) 유적의 경우에는 내부에서는 금 판으로 싼 재와 금제 장식판, 장신구 등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가 발견 되기도 했다.74) 또한 옥에오 인근의 쯔워 링 썬에서는 중국계 조형 양식 을 보여주는 동제불입상이 출토되어 부남과 양나라의 교류관계가 쌍방 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75) 이외에도 앙코르 보레이에서는 인도 사르나트 불상 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6세기 전반경의 불상들도 출 토되어, 이 지역의 불교 문화가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6) 그러나 전반적으로 부남국의 중심지였던 남부 베트남과 캄보 디아 지역에서는 불교 문화보다는 힌두교 문화가 더 발달했던 것으로 보 인다. 한편, 부남국의 서쪽에 해당하는 현재의 태국 경내의 고대 유적에서는 비슷한 시기의 부남국 유적들에 비해 훨씬 더 불교 문화가 발달한 양상 을 보여 흥미롭다. 지금도 불교와 불탑 신앙이 중요한 태국과 미얀마 일 대에서는 남부 베트남 일대보다 이른 시기의 고대 불탑 유적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양나라와의 교역시기를 고려하여 당시 부남 국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국 중부 지역에서는 우통(U Thong) 지 역과 나콘파톰(Nakhon Pathom) 지역을 중심으로 고대의 불교유적이 다 수 발견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콘파톰 지역의 왓 프라 멘(Wat Phra 74) op.cit., pp. 150-151. 75) 강희정(2009), 위의 논문, 54-55쪽. 76) 강희정(2011), 고대 동남아 종교미술에 끼친 인도 미술의 영향 , 인문논총 65집,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189-219쪽.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35 Men) 유적과 왓 프라 파톰(Wat Phra Pathom) 유적은 벽돌을 쌓아서 건 립한 불탑 유적으로서 중요하다. 이 두 유적은 모두 193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되었으며, 적어도 3개 이상의 고고학 적 층위가 확인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층위는 4-5세기경으로 추 정되므로,77) 아마도 부남국 시대의 제일 중요한 불사리 신앙 관련 유적 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4세기 이후의 부남국은 말레이반도 지역까지의 영 토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하므로, 중국 기록을 중요시한다면 나콘파톰 일 대의 초기 불탑 유적지는 부남국의 불교 유적으로 볼 수 있다.78) 그러나 태국 학계에서는 나콘파톰 유적지를 부남국 시대로 편년하지 않고, 수완 나부미(Suvaṇṇabhūmi) 시대, 프리 드바라바티 시대, 혹은 돈손 시대로 분 류하고 있다.79) 이러한 시대 추정 문제는 현대 국가의 역사적 개념 및 중국 사서의 신빙성 문제 등과도 결부되기 때문에, 쉽게 논의하기 어려 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나콘파톰 지역과 인근의 우통 지역의 초기 불교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이 부남국시대 유적인 앙코르 보레이나 옥 에오 지역의 유물들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77) Pierre Dupont, translated by Joyanto K. Sen(2006), The Archaeology of the Mons of Dva˜ravatī Volume I–Text, Bangkok: White Lotus Press, pp. 17-74. 78) Briggs, op.cit., p. 23; 강희정(2009), 46쪽. 79)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Ian Glover(2011), “The Dvaravati Gap–Linking Prehistory and History in Early Thailand.” Bulletin of the Indo-Pacific Prehistory Association, vol. 30; Nicolas Revire(2011), “Facts and Fiction: The Myth of Suvaṇṇabhūmi and Early Buddhist Archaeological Data in Mainland Southeast Asia,” unpublished paper presented at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Buddhist Linkages in South and Southeast Asia: Perspectives and Prospects, University of Delhi. 이안 글로버와 니콜라 르비어는 태국의 드바라바티 이전 시대를 부남국으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에, 필자와는 견해가 약간 다르다. 이 시기를 부남국으로 보는 학자로는 브와스리에(Boisselier)와 브론슨(Bronson)이 있다. 각 시대 설정에 대한 사학사적 검토는 이안 글로버의 논문 참조. 필자는 이 지역의 문화를 부남국에 속한 돈손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논의 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36 인문논총 제67집 (2012) 은화. 4∼6세기. 태국 우통 유 적 출토. 태국 나콘파톰 국립 박물관 소장. 은화. 4∼6세기. 베트남 안쟝성 출토. 베트남 하노이 국립역사 박물관 소장. 특히 나콘파톰과 우통 지역의 고대 유적에서 종종 출토되는 은제 장 식들은 부남국의 은화로 추정되기도 한다(그림 6). 작은 원형에 두드려서 만들어내는 이러한 은화들은 인도 쿠샨시대의 동전 제작방식을 따라서 만든 것으로, 독특한 부남국 시대의 여러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수 레바퀴와 비슷한 문양이나 삼보 문양들을 새긴 유사한 은화들은 부남국 의 중심지인 앙코르 보레이나 옥에오 지역에서도 출토되고 있으며(그림 7), 미얀마의 고대 유적지인 베익타노(Beikthano)에서도 출토되었다.80) 이러 한 인도식 은화의 제작은 당시 무역과 상업이 발달했던 부남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나콘파톰 지역에는 지금도 태국왕실에서 아육왕탑으로 숭앙하는 프라 파톰 체디(Prapathom Chedi)가 있다(그림 8). 프라파톰 체디는 19세기말 태국의 국왕이 아육왕탑의 유적지로 발견하여 재건한 것으로서, 현존하 는 불탑 중에서 가장 큰 불탑이다.81) 불탑은 스리랑카의 불탑들과 유사 80) Betty Gosling(2004), Origins of Thai Art, Bangkok: River Books, pp. 38-39. 81) Jean Boisselier(2000), “La Reconstruction de Phra Pathom Chedi: Quelques preˊcisions sur le site de Nakhon Pathom,” Aseˊanie. vol. 6, Bangkok: Éditions du Centre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37 프라파톰 체디. 19세기말. 태국 나콘파톰. 한 복발형 탑형식 이며 높은 상륜부 가 있고, 불탑 주 변에는 불상이 봉 안된 감실들이 다 수 배치되어 있다. 물론 프라파톰 체 디는 현대에 재건 된 것이지만, 나콘 파톰 지역은 동남 아시아의 여러 지역 중에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불사리신앙 및 전륜성왕 사상이 전해졌던 지역으로써 주목된다. 프라파톰 체디 주위에 위치한 나콘파톰 지역의 여러 불교 유적에서는 6세기 이후 드바라바티시대의 유물로 편년되는 석조 법륜이 상당수 남아 있다(그림 9). 이러한 석조 법륜은 전륜성왕과 불법(佛法)의 상징물로서, 불교 문화의 전래를 알려주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법륜은 전륜성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처의 상징물로서 존숭되었다. 특히 기원전후 의 인도 불탑 부조에서는 법륜을 숭앙하는 장면이나, 법륜을 얹은 석주의 모습 등이 표현되기도 했다. 나콘파톰의 법륜과 석주들은 부남국시대보다 는 조금 늦은 드바라바티시대의 작품이지만, 이 지역이 일찍부터 인도 불 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82)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나콘파톰의 프라파톰 체디를 제외하고는 아육 왕탑의 유적으로 알려진 예가 매우 드물다.83) 프라파톰 체디를 태국 황 d’anthropologie Sirindhorn, pp. 159-189. 82) Betty Gosling, op.cit., pp. 52-59; Robert L. Brown(1996), The Dva¯ravatī Wheels of The Law and the Indianization of South East Asia, Leiden: E. J. Brill. 83) 태국 이외에 아육왕 전승이 전해지는 곳으로는 미얀마 지역이 주목된다. 특히 11세 38 인문논총 제67집 (2012) 석조 법륜. 6∼7세기. 태국 나 콘파톰 출토. 나콘파톰 국립박 물관 소장. 실에서 아육왕탑으로 비정한 것은 현대의 일이긴 하지만, 이 지역에 현존하는 고대 불교 유적지의 존 재들은 여기에서 일찍부터 인도를 통해서 불사리신앙과 전륜성왕 사 상을 중시하는 독특한 불교 문화 를 받아들여 발전시켰음을 알려준 다. 즉 나콘파톰 지역은 4세기 이 후 지속적으로 동남아시아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왔으며, 부남국의 영역 중에서 가장 불사리신앙과 불탑 건립이 활발했던 지역에 해 당한다. 아마도 인도의 아육왕 전 승은 남인도에서 해로를 통하여 스리랑카로 전해져 스리랑카 왕실의 불치사리 공양으로 발전했으며, 다 시 스리랑카의 불사리신앙은 동남아시아의 거소아이와 나콘파톰 등 부 남국의 여러 지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양 무제 연간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져간 부처의 머리카락이나 사리 중 어떤 것은 이 나콘파톰 지역의 유적에서 전해진 것일지도 모른 다. 또한 불사리신앙과 전륜성왕 사상을 양나라에 전한 부남국 승려들 중에서도 부남국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태국 중부의 나콘파톰 지역에서 온 인물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을 현재로서는 증명 하기 힘들지만, 이후 나콘파톰을 비롯한 태국 중부 지역에서는 부남국이 기 이후의 미얀마 지역에서는 진신사리 신앙과 불교적 전륜성왕 사상, 아육왕 전승 이 모두 발달했으며 불탑 유적도 많다. 그러나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양 무제보다는 후대에 부회된 전승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동남아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과제이다.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39 쇠퇴한 이후에 불교를 숭앙하는 드바라바티 왕조가 발전하게 된다. 즉 이 지역의 숭불왕조의 등장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아래에서 재검토될 필 요가 있다. 6. 맺음말 남조 양 무제는 동아시아의 불교적 제왕인 전륜성왕 사상을 아육왕 전승에 기초하여 독특하게 구현해낸 최초의 숭불 황제로서 매우 중요하 다. 그가 아육왕 전승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당시 남방 해 로를 통해서 전래된 동남아시아의 문화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 한 국제 관계 속에서 그는 독자적인 정치적 위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양 무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그의 치세 아래에서 활발 한 역경 사업을 펼쳤던 부남국 출신의 만다라와 승가파라라는 두 명의 승려였지만, 전반적으로는 동남아시아 문화, 특히 부남국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양나라에 승려를 통해서 아육왕 전승을 보냈던 부남국 왕실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전륜성왕 사상을 모두 받아들였으며, 이것 은 인도 문화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부남국의 중심지역인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는 불교 유적이나 불사리신양보다는 힌두교가 좀 더 활발하게 숭앙되었던 것 같으며, 오히려 부남국의 서쪽에 해당하는 태국 중부 지역에서는 불사리신앙 및 불교적 전륜성왕 사상 등의 인도의 불교 문화를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아마도 양 무제 연간의 부남국 왕인 자야 바르만왕은 고대 인도의 전륜성왕 사상을 계승했던 동남아시아의 제왕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야바르만의 사후, 그 아들들의 정권 다툼 속에 서 양 무제가 부남국으로부터 불발을 획득했던 것은 양 무제가 동남아 시아까지 아우르는 전륜성왕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던 것 40 인문논총 제67집 (2012) 으로 추정된다. 양 무제의 전륜성왕 사상은 아육왕 전승의 구현을 통해서 발전되었는 데, 그의 아육왕 전승 구현은 부처의 진신사리 공양으로서 완결되는 점 이 특징이다. 양 무제 이후 동아시아의 여러 제왕들은 아육왕 전승과 양 무제의 전승을 모방하여 정치적 목적을 가진 부처의 진신사리 공양을 성 대하게 행했으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전륜성왕에 비견하 며 높였다. 그리하여 아육왕 전승을 차용하여 양 무제 연간에 숭앙되었 던 여러 불교 성물들은 이후 역대 제왕들에 의해서 또다시 반복적으로 공양된다. 이러한 성물의 재발굴과 공양 행위의 반복은 이 성물들의 위 상을 원래의 종교적 기능에서 벗어나 정치적 선전물로 변화시켰다. 특히 강남 지역에서는 영파 아육왕탑의 진신사리가 제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정치적 상징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송대까지 지속적으로 여 러 제왕들에 의해서 공양되었다. 양 무제는 정치적 선전을 목적으로 한 진신사리 공양과 숭불 활동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활성화시켰으며, 인도 및 동남아시아, 특히 부남 국과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불교 문화를 받아들인 적극적인 숭불황제 로서, 동아시아의 고대 불교사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아육왕 전승으로 대표되는 양 무제 연간의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는 당시 중국 뿐아니라 한반도까지 연결되면서 고대 아시아의 불교 및 정 치, 사회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양 무제 연간의 문화 연구에서는 이러한 동남아시아 문화와의 교류에 대 해서 좀 더 고찰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긴다.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41 참고문헌 大正新修大藏經. 欽定四庫全書. 강희정(2006),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학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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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the Aśokan tradition was transmitted to Emperor Wudi in China, the character in the tradition was more idealized than the real historical King Aśoka in India. Emperor Wudi reenacted some important Buddhist offerings to the Buddha’s relic after the Aśokan tradition. He discovered two Aśokan stupas in his land, each enshrining the Buddha’s relic, and then built new pagodas for these relics. Such Buddhist relic 주경미 / 양 무제의 아육왕 전승 구현과 고대 동남아시아 47 worship by Emperor Wudi was performed as a political propaganda for his status as a Buddhist ideal Cakravartin after King Aśoka. The first revivalism of the Aśokan tradition by Emperor Wudi was again spread to the Buddhist world of East Asia after him. This Aśokan revivalism of Emperor Wudi was a very characteristic ruling theory in East Asian Buddhism. It might have been transmitted from ancient Southeast Asia, which interacted with Liang China at that time. During the reign of Emperor Wudi, some famous monks of Funan came to Nanjing, the capital of Liang, and translated many Buddhist Sutras including the story of King Aśoka at the court of Liang sponsored by the emperor. According to the Chinese historical records, Funan kingdom is the most important and influential region in Southeast Asia on Aśokan revivalism of Emperor Wudi in China. However, the territory and religion of Funan Kingdom have not been identified yet. Although many archaeological sites and artifacts of Funan period have been discovered, many scholars in the Southeast Asian study have been disputed on these themes regardless of the importance of ancient Chinese historical records. To search on the material evidences for the Cakravartin ideas during Funan period related with Liang Wudi is one of the principal but ongoing challenges for understanding the early Southeast Asian history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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