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티벳의 지관 수행체계 연구-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 양승규

수선님 2020. 6. 14. 13:19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양승규

[국문 초록]

?수습차제?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차제적인 측면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특히 대승불교의 측면에서 지관을 실천하는 방법을 구체 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수습차제?에서 설명하는 지관의 수행체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승불교의 핵심은 대비심, 보리심, 수습 셋이다. 대비심은 ‘일체 중생이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대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일체 중생이 동등하다는 동등심을 일으 켜야 한다. 일체 중생은 모두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원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이런 중생들이 윤회하는 동안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라는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소중한 나의 어머니가 지금 생로병사 등의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대비심이 생길 수 있다. 대비심이 생기면 그 일체 중생을 내가 건지겠다는 증상심(增上心)이 생기 고, 증상심이 생기면 ‘일체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보리심이 생긴다. 원의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율의를 수지하여 육바라밀과 같은 행의 보리심을 실천한다. 행의 보리심은 지혜와 방편을 닦는 것이다. 이 지혜와 방편을 통해서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둘째,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를 통해 지관으로 나아간다. 지혜는 수습하 154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는 것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듣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지혜가 생긴다. 특히 지관을 닦을 경우에는 듣고 생각하는 지혜가 없으면 지관의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론의 말씀을 설해주는 선지식의 가르 침을 듣는 것에서 문소성혜(聞所成慧)와 이를 깊게 생각하는 것에서 사소성 혜(思所成慧)를 일으켜 수소성혜(修所成慧)에서 지관을 닦는다.

셋째, 지를 통해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성취하고, 몸과 마음의 가벼움을 성취한 다음 관을 행한다. 관을 실천하면서 먼저 일체법은 외경(外境)으로 성립하지 않고 마음에 인식된 것에 불과하다는 유심지(唯心知), 소취가 없으면 능취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무이지(無二知), 그 다음 불현지(不現知) 를 통해 승의의 무자성공을 깨닫는다. 이와 함께 세속제에서 일체법이 존재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한다. 불현지에 머물면서 방편과 반야를 함께 실천하면서 유가사는 신해행지에서 보살십지, 마침내 불지를 성취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수습차제?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중생이 불지를 증득하는 전체적인 체계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대승지관법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문서가 한문으로 번역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 지 그 가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주제어: 대비심, 보리심, 지관, 문사수(聞思修), 심일경성(心一境性), 유심지 (唯心知), 무이지(無二知), 불현지(不現知)

Ⅰ. 머리말

티벳불교에서 전승되고 있는 기본적인 수행방법은 지관(止觀) 수행 이다. 이 지관수행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전승된 가장 보편적인 수행방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방불교에는 위빠사나로 전승되고 있고, 대승불 교에서도 유식(唯識)학파 등에서 지관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중국불교 에서 지관수행은 천태(天台)에서 체계화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승 지관의 전통은 티벳불교 외에는 거의 단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따라서 한문문화권에서 대승교학은 교학의 이해로만 그치고 실천 으로 증험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유식(唯識)과 중관(中觀)과 같은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55 교학은 수습하여 증득하지 않으면 본질을 체득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 서 대승지관의 전통을 다시 정립하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 승의 정신에 입각한 지관수행은 남방의 위빠사나와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티벳불교의 지관수행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까말라 쉴라(Kamalaśīla)의 수습차제(修習次第)?를 통해 대승지관의 수행체 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티벳인들의 저술 속에서도 지관을 체계적 으로 설명하고 있는 훌륭한 저술들이 있지만, 먼저 티벳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있는 ?수습차제?를 살펴보는 것 이 순서일 것 같고, 특히 ?수습차제?는 대부분 ‘지관’만을 한정하여 설 명하기 때문에 지관수행체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필요한 많은 요 소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습차제?에 대한 연구는 몇 편의 학위논문과 허 일범의 번역과 중암의 ?수습차제 연구?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성과물 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번역은 번역일 따름이고, 중암의 저술 역시 역 사적인 배경에 대한 충실한 자료를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 에 본 연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국외의 연구 성과도 다수 있 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본 논문은 ?수습차제?를 통해 티벳의 지관수행 의 체계를 정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원문을 충실하 게 읽고, 그것을 통해 지관수행을 정리하고자 했다. Ⅱ. ?수습차제?의 지관(止觀)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는 티벳불교 초기의 저술이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읽히고 있는 몇 안 되는 문헌 중의 하나이다. 14대 달라이라마 도 이 ?수습차제?를 대중들에게 자주 강설하고 있다. 티벳불교에서 이 156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렇게 ?수습차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습차제?의 저자 까말라 쉴라는 스승 샨따락시따(Śāntarakṣita)를 대신해서 ‘쌈예의 종론(宗 論)’에 참가하여 중국의 선불교를 대표하는 마하연(摩訶衍) 선사와 대 론을 벌여 승리한 인물이다. 이 대론의 결과로 수행의 방법적인 부분 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설하는 마하연 선사의 선불교를 비판하면 서, 한편으로는 티벳인들에게 가장 전통적이면서 인도불교적, 대승불 교적인 수행체계를 하고 있는 것이 ?수습차제?이다. ?수습차제?는 ?수 습차제초편(修習次第初篇)?(이하 ?초편? 등으로 약칭함), ?중편?, ?하 편?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량적인 면에서도 ?초편?이 가장 많 고, 그 다음 ?중편?, ?하편?의 순서이다. ?수습차제? 세 편 모두 제목에 서 보여주는 것처럼 수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초편?에서는 수행의 전반적인 차제를 언급하기 때문에 분량이 많고, ?중편?, ?하편?으로 갈수록 지관에만 설명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다. 티벳불교는 현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수행방법은 지관이다. 따라서 수행의 문제를 언급할 때에는 까말라쉴라의 ?수습차 제?가 널리 인용된다. 쫑카빠(Tshong kha pa)의 ?보리도차제광론(菩 提道次第廣論)?, ?보리도차제약론(菩提道次第略論)?에서도 ?수습차제 ?는 특히 지(止)를 정의하고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기 때 문에, 티벳불교 전체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1. 도의 세 가지 핵심과 지관(止觀) ?수습차제?에서 지관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지만, 지관을 바르게 이 해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지관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까말라쉴라는 ?초편?과 ?중편?의 서두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성 취하고자 하는 이는 요약하면 비민(悲愍), 보리심(菩提心), 수습(修習)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57 의 세 가지에 힘써야 한다”1)라고 하여 도의 핵심을 셋으로 요약하고 있다. 까말라쉴라가 일체지를 성취하는 원인으로 비민, 보리심, 수습 셋을 제시한 것은 이 셋이 대승행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대비심(大 悲心)을 일으키지 못하면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보리심을 일으키 지 못하면 보살행을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편?에서는 보리심을 원(願)의 보리심과 행(行)의 보리심으로 구 분하고,2) ?중편?에서는 보리심을 세속(世俗)의 보리심과 궁극적인 깨 달음인 승의(勝義)의 보리심으로 구분한다.3) 원의 보리심은 세속의 보 리심과 같이 ‘일체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을 구족하겠습 니다’라고 하는 원심(願心)이다. 원의 보리심을 일으키고, 보살의 율의 를 받아 행의 보리심으로 나아간다. 행의 보리심을 통해 궁극적인 진 리를 완성한 것이 승의의 보리심이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보리 심의 완성이다. 이런 보리심은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비심을 일 으켜야 한다. 대비심은 보리심에 선행하는 전제가 된다. ?법집경(法集經)?에서 “세존이시여, 보살은 무수히 많은 법을 배우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하나의 법을 지니고 깨달으면 일체의 불법이 보살의 손에 있게 됩니다. 그 하나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대비(大悲)입니다”라고 한다.4) 무엇 때문에 대비를 보살이 가질 수 있는 단 하나의 법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대비심이 보리심을 낳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대비심이 없으면 보리심이 생기지 않는다. ‘일체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으 면’하고 바라는 마음이 대비심이다. 대비심은 일체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생기기 1) D.3920, 22a2. 2) D.3920, 25a2. 3) D.3921, 44a2-5. 4) D.3920, 22a3-4. 158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위해서는 일체 중생을 똑같이 평등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 쪽도 없고, 남의 쪽도 없어야만 평등한 마음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 에 “모든 중생들은 행복을 원할 뿐 고통을 원치 않고, 무시이래의 윤회 에서 모든 중생들은 백 번도 넘게 나와 가족이 되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다”5)고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일체 중생을 나의 소중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모든 중생이 한 번 정도가 아니라 백 번 정도 나의 가족이었 다고 생각해야 한다. 대비심은 고통 받는 중생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이다. 따라서 이런 대비심이 일어나면 보리심이 저절로 생긴다. 보리심 을 일으키면 보살이 된다.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보살의 율의(律儀) 를 수지하여 행의 보리심으로 나아간다. 행의 보리심이 곧 보살행이다. 보살행을 ?초편?에서 “보살의 행도 요약하면 방편(方便)과 반야(般若) 를 본성으로 한다. 반야만도 아니며, 방편만도 아니다”6)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보살행을 줄이면 방편과 반야 둘이 된다. 방편과 반야는 새의 양 날개처럼 하나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다. 보리심은 원만한 부처님 의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행 역시 원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은 복덕과 지혜 둘을 구족한 분이기 때문에 결과를 성취 하는 원인을 인행(因行)에서 구족해야 한다. 이것을 보살행으로 완성 한다. 방편은 복덕의 자량을 성취하는, 반야는 지혜의 자량을 성취하는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편과 지혜 어느 하나만으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 방편은 엄격한 것을 실천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시적으로 제시되는 방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까말라쉴라는 “여기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 羅密多)를 제외한 보시 등의 바라밀과, 사섭법(四攝法), 청정한 불토, 5) D.3921, 43a1. 6) D.3920, 25b2-3.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59 광대한 수용(受用), 무량한 권속 등 중생을 성숙시킴, 신변(身變) 등의 신통법을 포함한 모든 선법이 방편이다”7)고 하는 것처럼, 보살이 행하 는 바라밀행 중에서 반야바라밀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수승한 선업 이 방편이다. 청정한 불국토를 건립하고, 중생을 성숙시키고, 신통력을 얻어 셀 수 없는 부처님을 친견하여 법을 듣고, 공양하는 모두가 방편 이다. 따라서 방편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고 광대한 행 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실천은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방편 때문이다. 따라서 올바른 방편을 정립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방편을 행함으로써 완벽한 이타의 행을 완성하고, 완전한 깨 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야(般若)는 무엇인가? 반야에 대해서는 “반야(般若)는 그 방편의 본질을 전도되지 않게 아는 원인이다. 이것으로 바르게 방 편의 갈래를 구분하여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자리이타를 여실하게 증 득한다. 따라서 진언의 힘을 불어 넣은 독을 먹은 것과 같이 절대 번뇌 와 같은 것이 되지 않는다”8)라고 한다. 반야는 세간과 세속의 지혜가 아니라, ‘수승한[般] 지혜[若]’이다. 이 수승한 지혜를 통해 방편의 본질 을 전도되지 않게 안다. 보살은 올바른 방편을 행해야 한다. 올바르지 않은 방편으로는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 방편행이 올바른 방향성과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반야를 통해 일체법의 무자성을 보고 있을 때 보살은 어떤 행을 하더라도 번 뇌에 물들지 않는다. 반야의 힘이 없으면 보살은 법의 실체를 집착할 수 있고, 번뇌를 일으킬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보살이 방편과 반야를 닦아야 하는 이유를 ?가야경(伽 倻經)?에서는 “보살의 길이란 요약하면 둘이다. 이 두 가지가 보살들 7) D.3920, 25b5-7. 8) D.3920, 25b7-26a1. 160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에게 있으면 신속하게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현증(現證)하여 성 불한다. 이 둘은 무엇인가? 방편과 반야이다”9)라고 설명한다. 방편과 반야를 닦는 것은 신속하게 무상정등정각을 현증하는 길이기 때문에 방편과 반야를 닦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반야와 방편을 닦는 것이 신속하게 무상현정등각을 현증하는 길이 되는가? 이것에 대해 까말라쉴라는 “이 반야와 방편을 본성으로 하는 도(道)로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양 극단을 끊은 뒤에 중도의 길을 보여준 다. 반야로 증익의 극단을 끊고, 방편으로 손감의 극단을 끊기 때문이 다”10)라고 답한다. 보살이 보살의 행을 완성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 하기 위해서는 증익과 손감의 양 극단에 얽매이지 않는 중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중도의 길이 아니고서는 구경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익과 손감의 양 극단은 견해와 행의 두 가지 측면에서 생 기기 때문에 이를 없애기 위해서 반야와 방편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 다. 반야는 일체의 상변(常邊)인 증익(增益)의 극단을 끊는다. 상변을 끊지 않고서는 업과 번뇌의 뿌리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변을 끊는 것이 무변(無邊)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방편으로 손감의 극 단을 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까말라쉴라는 “반야를 여읜 방편과 방편 을 여읜 반야는 보살의 결박이다”라고 하는 ?무구칭경(無垢稱經)?을 인용하여11) 방편과 반야는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와 방편을 함께 닦아야 하지만 방편이 올바른 방편이 되기 위해 서는 반야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까말라쉴라는 “여기서 반야에 의해서 섭수된 보시 등이 바라밀다란 이름을 얻는다. 다른 것에 의해 얻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보시 등이 청정해지기 위해 9) D.3920, 25b4-5. 10) D.3920, 27b2-3. 11) D.3920, 25b3-4.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61 서는 등지(等至)에 안주해야 하고, 반야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 다”12)라고 한다. 2. 삼혜(三慧)와 지관(止觀) 보살행의 핵심인 방편과 반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어느 하나로 는 완전할 수 없다. 쌍운(雙運)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반야가 없이는 궁극적인 완성이 불가능하고, 방편도 올바른 방편이 될 수 없기 때문 에 반야가 근본이 된다. 반야의 완성을 ?수습차제?에서는 삼혜로 설명 한다. ?초편?에서 “먼저 문소성혜(聞所成慧)를 일으켜 경의 의미를 이 해한다. 그 다음 사소성혜(思所成慧)로서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를 구분한다. 그 다음 그것에 의해 구분된 의미를 토대로 제법의 진실 한 의미를 수습하고, 진실하지 않는 것은 수습하지 않는다”13)라고 한 다. 따라서 ?수습차제?에서 반야의 완성은 결국 문소성혜, 사소성혜, 수소성혜의 삼혜를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삼혜 중에서 먼저 문소성혜를 통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경전 의 의미를 선지식을 통해 듣고 그 경의 의미를 이해한다. 문소성혜에 서는 요의경(了義經)과 불요의경(不了義經)의 구분 없이 폭넓게 부처 님의 말씀을 듣는다. 사소성혜에서는 경설 중에서 요의경과 불요의 경 을 결택한다. 요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궁극적인 진리이 고, 불요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편적인 진리이다. 요의 는 그 자체로 깨달음의 길일 수 있기 때문에 요의와 불요의를 결택하 는 것은 수소성혜를 완성하는 근거가 된다. 결택하는 방법은 “진실한 사물의 본성은 승의에서는 무생일 따름이다. 논리와 경설로 결택한 12) D.3920, 28a2-3. 13) D.3920, 28a3-4. 162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다”14)라고 하는 것처럼, 논리와 경설로 결택한다. 논리와 경설로 결택하는 것도 먼저 경설로 결택하고, 그 다음 논리 로 결택한다. 경설로 결택하는 것이 논리로 결택하는 것의 근거가 되 기 때문이다. 경설로 결택하는 것은 ?법집경(法集經)?에서 “무생(無生) 은 진실이며, 생(生) 등의 여타의 법들은 진실이 아니다”15)라고 설한 것처럼, 무생은 요의의 말씀인 승의제를 수순하기 때문에 진실이며, 생 등은 불요의의 말씀인 세속제를 수순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다. 논리 로 결택하는 것은 ?중론? 등에서 다양한 논리로 분석하는 것이다. ?수 습차제?에서 까말라쉴라는 발생의 측면과 존재의 측면 둘로 무생(無 生)과 무자성(無自性)을 설명한다.16) 발생의 측면에서는 원인 없이 발 생하는가, 아니면 원인이 있어 발생하는가. 원인이 있어 발생하는 것은 항상한 원인에서 발생하는가. 무상한 원인에서 발생하는가 등으로 분 석하면서 궁극적으로 무생임을 밝힌다. 존재의 측면에서는 제법을 유 색(有色)과 무색(無色)으로 구분하여 유색의 병 등의 사물이 자성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무색의 인식(認識)이 하나인가, 여럿인가를 구분 하여 제법이 무자성임을 밝힌다. 무자성을 결택하는 것이 무자성을 체득하는 것은 아니다. 까말라쉴 라는 이를 “따라서 사혜(思慧)로 진실한 의미를 분간하고, 또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수혜(修慧)를 일으킨다. 문혜(聞慧)만으로는 의미를 실 증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보운경(寶雲經)?을 인용하여 수소성혜가 필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17) 사소성혜를 통해 일체법이 무생임을 알 고,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결택하더라도 그것은 분별해서 아는 것이지 체득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체득하기 위하여 수소성혜가 필요하 14) D.3920, 28a6. 15) D.3920, 28a6-7. 16) D.3920, 28b6-30b2. 17) D.3920, 30b2-3.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63 다. 수소성혜를 실천하는 것이 지관(止觀)이다. 3. 지관(止觀) ?수습차제?에서는 ‘수습하는 차제’를 다루고 있지만, ?초편?에서 ? 중편?, ?하편?으로 갈수록 지관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따라서 까말 라쉴라가 말하는 ‘수습차제’는 결국 지관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까 말라쉴라는 대승불교의 세 가지 핵심을 대비심, 보리심, 수습이라고 정 의하고, 수습을 통해 궁극적으로 승의의 보리심을 완성한다고 설명한 다. 승의의 보리심은 번뇌와 소지의 장애를 넘어선 궁극적인 진여 그 자 체이다. 따라서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의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止)와 관(觀)의 수행이 필요하다. 이를 까말라쉴라는 “지 하나만을 닦는 것으로는 유가사의 장애를 없애지 못하고, 단지 번뇌를 잠시 억 누를 뿐이다. 반야의 광명이 발생하지 않고서는 잠복된 번뇌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18)라고 한다. 번뇌와 소지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지의 실수로는 일시적인 번뇌를 없 앨 수 있지만, 미세한 번뇌를 없애지 못한다. 미세한 번뇌는 아집에서 생기기 때문에 아집을 없애기 위해서는 관의 실수가 없이는 불가능하 다. 그렇기 때문에 지와 관을 차례로 닦아야 한다. 1) 지(止)의 실수(實修) 지를 실수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위해 지의 소연(所緣), 지를 닦 18) D.3921, 44b1-2. 164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음, 지의 장애, 지의 성취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지 소 지(止)는 티벳어로 ‘gzhi gnas’라고 하여 ‘고요하게 머묾’이고, 관(觀) 은 ‘lhag mthong’이라고 하여 ‘올바로 봄’이다. ‘고요하게 머묾’과 ‘올바 로 봄’은 다르기 때문에 지와 관의 행상은 다르다. 행상이 다르기 때문 에 지와 관이 대상을 반연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편?에서 는 지는 일체법의 영상과 여래의 상호 등을 신해(信解)하여 반연하는 것이 다. 이것을 무분별영상(無分別影像)이라고 한다. 이것에는 진실의를 분 별하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고 한다. 또 그와 같이 듣고 수지하는 제법의 영상(影像)을 신해하여 반연하기 때문에 ‘영상’이라 한다.19) 라고 하여 지는 무분별 영상을 반연한다고 설명한다. 무분별영상은 특 별한 대상이 아니다. 대상을 반연하는 방식에서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고, 외경에 존재하는 일체법이 그 자체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구성한 것을 떠올리기 때문에 ‘영상’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무분별영상으로 반연하는가? ?중편?에서는 ?해심밀경?에서 미륵보살이여, 내가 법을 시설하여 건립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계경(契 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誦), 자설(自說), 인연(因緣), 비유 (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유(稀有), 논의(論義)이다. 보살들에게 설한 이것을 보살들이 잘 듣고, 잘 수지하고, 외우고, 마음으 로 잘 분별하고, 봄으로써 확연히 통달한 뒤 보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 19) D.3922, 56a4-5.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65 머물면서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잘 사유한 법들을 작의(作意)하며, 마음 으로 작의하는 마음을 안으로 지속적으로 작의하는 것으로 작의한다. 그와 같이 행하고 그것에 오랫동안 머물 경우 몸의 가벼움[輕安]과 마음 의 가벼움이 발생하는 것을 지(止)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보살은 지를 온전히 추구한다.” 라고 설명한다.20) 위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를 실천하기 위해 서는 먼저 문소성혜와 사소성혜를 통해 계경에서 논의까지 십이분교 (十二分敎)를 듣고, 기억하고, 외우고, 분별하고, 보고, 통달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문소성혜와 사소성혜로 듣고 분별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를 실천하는 수소성혜이다. 수소성혜를 실천하기 위해서 보살은 홀로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통달한 법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잘 사유한 법을 작의하고, 내심에서 연속적으로 작의하고 작의해야 한 다. 여기서 작의(作意)는 무분별영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문소성혜와 사소성혜를 통해 확연히 통달한 십이분교를 무분별의 영상으로 세워 놓고 작의하는 것이다. 십이분교를 무분별영상으로 설정하여 지를 실천하는 것은 초행자들 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교법을 형상화하여 영상으로 떠올리 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편?에서 “간단한 실사는 유색(有 色)과 무색의 갈래로 인해 둘이 있다. 초보자는 산란해지는 잘못을 없 애기 위해 일단은 간단한 것을 반연하는 것이 옳다”21)라고 한다. 간단 하게 줄이는 것을 ?중편?에서는 먼저 ‘계경과 응송 등 모든 경교가 진 여로 향하고, 진여로 취착되고, 진여로 귀결된다’고 하여 모든 것을 섭 수하는 진여에 마음을 집중하고, 그 다음 모든 법을 섭수하는 온(蘊) 등에 마음을 집중하고,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몸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20) D.3921, 47a3-7. 21) D.3920, 31a4. 166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간단하게 줄인다.22) ?하편?에서도 부처님의 몸 에 대하여 “여래의 색신은 황금빛이며,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 호(八十種好)로 아름답게 장엄되고, 대중이 에워싼 가운데 계시고, 갖 가지 선교방편을 베풀어 중생들을 교화하고 계심을 끊임없이 관상(觀 想)하여”23)라고 하여,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구족한 여래가 사부대중 속에서 갖가지 선교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라고 한다. 부처님의 형상을 떠올리는 것은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할 수 있다 는 점에서 다른 여타의 소연보다 수승하다. 일반적으로 티벳 수행자들 이 지를 명상할 때 부처님의 형상을 떠올려 명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지를 닦아 소연을 작의(作意)하는 것이 원활하 면 온(蘊), 계(界) 등의 종류로 확대해서 반연해야 한다고 한다.24) 이 것은 관의 실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래의 색신 과 같은 간단한 대상을 억념하여 지를 닦지만, 궁극적인 수행은 관에 의해서 완성되기 때문에 지를 닦을 때에도 온, 계 등 일체법을 소연으 로 한 지를 닦는 것이다. 지 닦 지를 닦기 위해서는 먼저 지의 자량(資量)을 구족해야 한다. 지의 자 량을 구족하면 큰 장애 없이 지를 성취할 수 있다. 지의 자량을 ?중편? 에서는 의복과 식량 등의 조달에 어려움이 없는 곳 등 적절한 처소, 욕 심이 적음, 만족을 앎, 잡사(雜事)를 버림, 청정한 율의를 가짐, 탐욕 등 22) D.3921. 47b2-4. 23) D.3922, 57a4-5. 24) D.3920, 31a5.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67 의 생각을 버림의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25) 여섯 가지 자량 중에 서 가장 근본은 다섯 번째 청정한 율의를 가짐이다. 청정한 율의를 가 지면 나머지 자량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초편?과 ?하 편?에서는 지의 자량을 설명하면서 “계율 등”으로 줄여 설명하는 것에 서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지를 실수하기에 앞서 먼저 예비수행을 실시한다. ?도 차제(道次第)?에서는 이를 가행육법(加行六法)으로 설명한다. ?수습차 제?에서는 ?중편?과 ?하편?에 비슷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가사(瑜伽師)가 수습할 때 먼저 하던 일을 모두 마치고, 화장실을 갔다 와 소음이 없는 안락한 곳에서 ‘나는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의 핵심으로 인도하리라’라고 생각하고, 모든 중생을 건지려는 생각으로 대비를 일으 킨다. 그리고 나서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께 절하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존상이나 탱화 등을 정면이나 또는 다른 곳에 모시고, 힘닿는 대로 공양하고 찬탄하여,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일체 중생들 의 공덕을 기뻐한다.26) 예비수행은 지관을 행하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다시금 일깨우는 의 미에서 일체 중생을 연민하는 대비심을 토대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제 불보살을 공양하고 찬탄하는 방식으로 자량을 쌓고, 자신의 죄업을 참 회하여 맑히고, 일체 중생의 선업과 복덕에 대해 기뻐하는 수희로 수 승한 선업을 키우는 마음을 닦는다. 지를 닦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자세로 앉아야 한다. 올바른 자세 로 앉지 않으면 쉽게 피로해지고 집중할 수 없어 지를 실천하는데 장 애가 된다. 올바른 좌법을 ?수습차제?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의 25) D.3921, 45b1-46a3. 26) D.3921, 46b2-5. 168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좌법’이라고 하여 ?중편?과 ?하편?에서 동일한 내용을 설명한다. 편안한 방석에 비로자나(聖毘盧遮那)의 결가부좌나 반가부좌 어느 것이 나 가능하다. 눈은 크게 뜨지 말고 감지도 말고 코끝을 바라보며, 몸은 뒤로 젖히거나 앞으로 숙이지 말고 곧게 펴서 세우고, 의념(意念)은 안으 로 거두어 머물러야 한다. 어깨는 나란히 하고, 머리는 들거나 숙이지 말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고, 코끝과 배꼽이 수직이 되게 한다. 이와 입술은 평상시처럼 한다. 혀는 윗니 뒤에 붙인다. 숨을 쉴 때 숨소리가 나거나, 거칠거나, 산란하지 않게 느끼지 못하도록 천천히 자연스럽게 내쉬고 들이쉬어야 한다.27) 비로자나의 좌법은 요약하면 일곱 가지이다.28) 다리는 결가부좌나 반가부좌 등으로 앉는다. 또는 편안한 책상다리로 앉아도 무방하다. 손 은 수평으로 놓고 배꼽 앞에 왼손이 밑에 오른손을 위로 올려 엄지손 가락을 붙인다. 상체는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일직선이 되어 기혈의 흐 름을 방해하지 않게 한다. 양 어깨는 나란히 한다. 눈은 반개로 유지하 고 코끝을 바라본다. 입이 마르지 않도록 입을 다문다. 혀는 윗니 뒤에 가볍게 붙인다. 이상과 같은 좌법을 유지하면서 호흡은 너무 크거나 빠르지 않고 편안하게 내쉬면서 불편하지 않게 호흡한다. 이런 상태에 서 앞에서 설명한 소연을 듣고 앉아 마음을 그 소연에 집중한다. 지 장 지(止)를 실천하는 것은 고요하게 머무는 것이다. 소연에 마음을 두 고 흔들림 없이 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지를 닦는 수행이다. 그렇다 27) D.3921, 46b5-7. 28) 룬둡 소빠 지음/ 지산 옮김, ?티베트 불교문화?(서울: 지영사, 2008), pp.79-80.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69 면 효과적으로 마음을 소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편?에서는 “떠올림[憶念]과 알아차림[正知]의 끈으로 마음의 코끼 리를 소연(所緣)의 기둥에 묶어야 한다”29)라고 설명한다. 떠올림은 무 분별영상인 지의 소연을 바르게 떠올리는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을 바 르게 떠올리지 못하면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알아차림이 필요하 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소연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의미가 없다. 이런 점에서 ?초편?에서도 “떠올림은 소연을 잊 어버림을 대치하고, 알아차림은 마음이 가라앉거나 들뜸을 대치한 다”30)라고 한다. 대치하는 것은 지의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다. ?중편?에서는 그와 같이 원하는 소연에 마음을 안주(安住)하고, 그것에 연속해서 마음 을 안주시킨다. 소연에 마음을 안주시키고 나서 다음과 같이 관찰해야 한다. ‘소연을 잘 잡고 있는가, 아니면 가라앉은 것인가, 아니면 바깥의 대상으로 달아나 산란한 것인가?’라고 분별해야 한다.31) 라고 설명한다. ?수습차제?에서는 떠올림과 알아차림을 대부분 지의 장애를 없애는 대치로 설명한다. 하지만 장애가 생기기 전부터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떠올림과 알아차림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소 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면 곧바로 알아차림으로 알아차려 본래의 소연으로 되돌아 와야 한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장애를 없애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그 장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장애가 생기기 전부터 미리 방지하는 것이 훨씬 쉽게 장애를 대치하는 방법이다. 29) D.3921, 48a2-3. 30) D.3920, 32a7. 31) D.3921, 47b5-6. 170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떠올림과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소연에 묶어 놓아도 마음은 슬그머 니 소연을 떠나 버린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본래 끊임없이 움직 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우 리 마음은 안팎을 살피느라 분주하다.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소연을 들고 있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머무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이 지의 장애가 된다. 지의 장애를 적절하게 없애지 않고서는 지를 성취 할 수 없기 때문에 ?수습차제?에서는 지의 장애를 설명한다. 지의 장애 중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은 가라앉음[昏沈]과 들뜸[掉擧] 이다. 가라앉음과 들뜸이 생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초행자에게는 이러한 장애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앉음과 들뜸 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대치해야 한다. 가라앉음과 대치 에 대해서 ?중편?에서는 몽롱한 것과 졸음에 눌려서 마음이 가라앉거나 가라앉는 것으로 의심이 들 때, 가장 좋아하는 여래의 색신(色身) 또는 광명상(光明想)을 생각해 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가라앉음을 없앤 뒤, 할 수 있는 한 그 소연을 마음으로 잡은 것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그와 같이 해야 한다. 시각장애인 또는 어둠 속에 들어간 사람 또는 눈을 감은 것처럼 마음으 로 소연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면 그때 가라앉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32) 라고 한다. 대상을 집지하는 힘이 약해 의식이 몽롱하거나, 음식 등을 많이 먹어 졸려서 마음이 가라앉을 때에는 장님이나 어둠속에 있는 것 처럼 대상을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 이런 가라앉음이나 가라앉음과 유 사한 것이 생겼을 때에는 일시적으로 마음을 고양시키는 것이 중요하 다. 마음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환희처인 여래의 색신이나 일월(日 32) D.3921, 47b6-48a1.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71 月)의 밝은 광명상을 명상해야 한다. 가라앉음을 어둠에 속하는 것이 기 때문에 밝음으로 대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뜸과 그 대치에 대해서는 ?중편?에서 바깥의 실사 등에서 그것의 장점을 분별하여 달려가기 때문에, 다른 것 을 생각하거나 또는 과거에 경험한 대상들을 원하기 때문에 마음이 들뜨 거나 또는 들뜬 것으로 의심될 때에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 등 출리(出離)하게 되는 실사들을 [떠올려야] 한다.33) 라고 한다. 가라앉음과 달리 들뜸은 마음이 들떠 바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들뜸은 주로 바깥의 아름다운 사물을 생각하거나, 과거에 좋았 던 경험들이 떠올라 마음이 들뜨게 된다. 들뜬 것으로 의심이 갈 때에 는 애착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백골관 등의 부정한 것이나, 무상한 것과 괴로운 것 등을 떠올려 들뜬 마음을 대치해야 한다. 가라앉음과 들뜸이 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보편 적인 장애이지만, 처음 지를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지를 완성하는 단계 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을 수 있다. ?초편?과 ?하편?에서 는 지의 장애를 요약하여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그것을 없애는 여덟 가지 방법[八斷行]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모든 선정의 과실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게으름, 소연을 잃음 [所緣遺失], 가라앉음[昏沈], 들뜸[掉擧], 애쓰지 않음, 애씀이다. 이것을 대치하여 없애기 위해 팔단행(八斷行)을 닦는다. 믿음, 바램, 애씀, 가벼 움[輕安], 떠올림[正念], 알아차림[正知], 생각함, 내버려둠이다.34) 33) D.3921, 48a1-2. 34) D.3920, 32a4-5. 172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지의 여섯 가지 과실은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의 차례로 제시한 것 이다. 먼저 게으름은 믿음, 바램, 애씀, 가벼움의 넷으로 대치하고, 소 연을 잃음은 떠올림, 가라앉음과 들뜸은 알아차림, 행하지 않음은 생각 함, 애씀은 내버려둠으로 각각 대치한다.35) 게으름은 삼매를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의 믿음을 토대로 희구하여 근수하여 궁극적으로 가벼 움[輕安]을 성취함으로써 없앨 수 있다. 거친 게으름 즉 지를 싫어하는 마음은 지의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도 없앨 수 있지만, 미세한 게으 름은 가벼움을 통하지 않고서는 없앨 수 없다. 가라앉음과 들뜸을 직 접적으로 없애는 것은 광명상과 부정상이겠지만, 이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알아차림으로 가라앉음과 들뜸을 없앤다 고 한다. 가라앉음과 들뜸에 있는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없애 려고 생각하는 것으로 없애고, 가라앉음과 들뜸이 더 이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애려고 애를 쓰는 것은 오히려 삼매를 방해할 수 있기 때 문에 이때에는 내버려둠으로 없앤다. 지 성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의 소연에 마음을 모아서 생길 수 있는 지 의 장애를 적절하게 대치하여 지를 성취한다. ?상편?에서는 이 지를 닦아 완성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지의 길을 ?반야바라밀다경? 등에서 “이것에 마음이 머물고, 지속적 으로 머물고, 잘 머물고, 가까이 머물고, 조복하고, 없애고, 완전히 없애 고, 일경(一境)이 되고, 동등하게 머문다”라고 아홉 단어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머문다’는 소연에 묶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머문다’는 소연에 35) D.3920, 32a5-32b2.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73 연속적으로 머무는 것이다. ‘잘 머문다’는 산란한 것을 알고서 그것을 없애는 것이다. ‘가까이 머문다’는 산란함을 없애고서 다시 애써 소연에 머무는 것이다. ‘조복한다’는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다. ‘없앤다’는 산란한 과실을 보고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완전히 없앤다’는 혼몽과 수면 등이 생기는 것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일경(一境)이 된다’는 행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머무는 것에 힘쓰는 것이다. ‘동등하게 머문다’ 는 마음이 평등하게 되면 내버려둠을 닦는 것이다.36) 아홉 가지 마음으로 지를 설취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지의 장애를 대치하면서 지를 성취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특히 지의 가장 큰 장애인 가라앉음과 들뜸을 없애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초편?에서도 아홉 가지 마음에 대한 설명에 이어 곧바로 여섯 가지 과실과 여덟 가 지 단행을 설명하고 있다. 아홉 가지 마음 중에서 먼저 ‘머문다’와 ‘지 속적으로 머문다’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소연에 두는 것과 지속적으로 마음을 두는 것이다. ‘잘 머문다’와 ‘가까이 머문다’는 마음이 대상에 어 느 정도 집중할 때 제일 먼저 생기는 장애인 거친 들뜸과 가라앉음을 없애는 과정이다. 들뜸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면 알아차림으로 즉각 알 아차려 없애고, 지속적으로 마음을 소연에 묶어두면 거친 가라앉음이 생기지 않는다. ‘조복한다,’ ‘없앤다,’ ‘완전히 없앤다’는 미세한 장애를 없앤다. ‘조복한다’는 미세한 가라앉음을 없애기 위해 선열(禪悅)을 일 으키는 것이고, ‘없앤다’는 가벼운 탐욕 등의 미세한 산란이 있기 때문 에 삼매의 염오심을 없애고, ‘완전히 없앤다’는 지를 성취한 것으로 여 겨지는 미세한 혼몽과 수면을 없앤다.37) ‘일경(一境)이 된다’는 더 이 상 가라앉음과 들뜸이 작용하지 않아 저절로 마음이 소연에 머무는 것 36) D.3920, 31b6-32a3. 37) 宗喀巴大師 造/ 昻旺郞吉堪布 釋, ?菩提道次第略論釋?(台北: 福智之聲出版社, 中華 民國八十三年), p.928. 174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이고, ‘동등하게 머문다’는 가라앉음과 들뜸을 없앴기 때문에 평등하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내버려둠을 닦는 과정이다. 아홉 번째의 마음인 등지(等持)를 성취했다고 해서 지를 성취한 것 은 아니다. ?중편?에서는 “그와 같이 지를 익힌 유가사의 몸과 마음이 가볍게[輕安]되고, 그와 같이 원하는 대로 소연의 대상에 마음을 안주 시켜 자재함을 얻게 되는 그때 지를 성취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38)라 고 하는 것처럼 몸의 가벼움과 마음의 가벼움을 성취하게 되면 원하는 대로 소연의 대상에 마음을 안주시키는 자재함을 얻게 된다. 이것을 얻게 되면 초선미지정(初禪未至定)에서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 (三禪), 사선(四禪), 무색정(無色定), 해탈 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39) 그 러나 가벼움을 성취하면 더 이상의 선정을 성취하지 않더라도 관(觀) 을 행할 수 있는 토대가 완성되기 때문에 관(觀)의 실수로 나아갈 수 있다. 2) 관(觀)의 실수(實修) 지의 실천은 선정바라밀이고, 관의 실천은 반야바라밀이다. 따라서 승의의 보리심을 완성하는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는 관을 행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중편?에서도 지(止)만으로 지혜가 청정해지지 않고 장애의 어둠도 없애지 못한다. 반야로 진여를 잘 수습한다면 지혜가 청정해진다. 반야만으로 진여를 깨닫고, 반야만으로 장애를 바르게 없앤다. 따라서 ‘나는 지(止)에 머물 러 반야로 진여를 추구할 것이다. 지(止)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38) D.3921, 48a3-4. 39) D.3920, 32b1-2.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75 라고 사유한다.40) 라고 한다. 심일경성의 지(止)는 외도들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지만 으로는 진여를 깨닫는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 반야의 지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관을 행해야 한다. 관 실 하 이 관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편?에서는 ?수습차제?를 저 술하게 되는 배경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수 습차제?는 중국의 마하연 선사와 인도의 까말라쉴라와 벌어진 논쟁의 결과물로 저술된 것이다. ?초편?과 ?중편?에서는 마하연 선사의 주장 을 별도로 언급하면서 반박하고 있지 않지만 문사수(聞思修) 삼혜(三 慧)와 방편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마 하연 선사의 주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마하연 선사는 마음의 분별로 일으킨 선과 불선의 업력으로 모든 유정들은 천상 등의 과보를 받으며 윤회에서 윤회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윤회에서 해탈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전혀 사유하지 마라. 보시 등의 선행도 행하지 마라. 보시 등의 행위는 단지 우둔한 자들을 위해 설한 것일 따름이다.41) 라고 주장한다. 까말라쉴라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대승 전체를 버리 는 것이다”42)라고 하여 마하연 선사의 견해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 40) D.3921, 48a6-7. 41) D.3922, 61b1-2. 42) D.3922, 61b2-3. 176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다. 마하연 선사는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 것’ 즉 무념무상(無念無想) 을 통해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보시 등의 선행도 과보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선행이든 악 행이든 일체의 행을 하지 않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고 한다. 까말라쉴라는 사유하지 않는 것은 여실한 지혜가 생기지 못하게 막는 것이고, 보시 등의 선행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방편행을 부정하는 것이 기 때문에 방편과 지혜를 근본으로 하는 대승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까말라쉴라의 반박은 무념무상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음을 얻 지 못한다는 것과 오로지 관찰을 통해서만 무분별지를 성취할 수 있다 는 것에 집중된다. 전자에 대해서 까말라쉴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부정 한다.43) ‘나는 이런 법들을 떠올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수습 하는 것은 오히려 그런 법들을 더욱 더 떠올리고 생각하게 만든다. 만 약 떠올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무념무상이라고 한다면, 무념무 상임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이때 무념무상이 그 대상이 된다. 무 념무상이 무분별이라면 혼절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것도 무분별이어 야 한다. 일체법을 기억할 줄 모르고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은 우매한 것 일 뿐 무분별이 아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까말라쉴라는 관찰만으로 무분별에 들어간다 고 주장한다. 관찰은 결국 분별이기 때문에 분별을 통해 무분별로 들 어가는 것이다. 마하연 화상이 무념무상이라는 무분별을 통해 무분별 도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까말라쉴라는 “그러 므로 여실하게 관찰하라. 이것은 분별이지만, 여리작의(如理作意)이기 때문에 이것에서 무분별지가 발생한다. 따라서 무분별지를 얻고자 하 43) D.3922, 62a3-62b7.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77 는 이는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을 의지해야 한다”44)라고 한다. 분별 자 체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무소성혜와 사소성혜가 성립하는 것도 분 별 때문이고, 수소성혜도 분별 때문에 가능하다. 분별에는 타당한 분별 과 타당하지 않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타당한 분별은 여리작의의 본성 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찰을 통해 무분별에 들어가는가? 까말라쉴라는 이와 같이 유가사가 청정한 반야로 분별할 경우 진실로는 삼세에 제법이 생기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떠올리고 생각하겠는가? 진실 로는 삼세도 없기 때문에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떠올리고 생각 하겠는가? 따라서 모든 희론을 적멸하여 무분별지에 들어간다.45) 라고 설명한다. 관찰에서 무분별을 증득하는 것은 관찰을 통해 승의에 서 제법의 무생을 보게 될 때 자연스럽게 증득되는 것일 뿐 의도적으 로 무분별에 들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실하게 관찰하면 승의에서 삼세도 존재하지 않고, 삼세에서 경험할 것도 존재 하지 않는다. 따라서 떠올릴 대상도 없고, 생각할 대상도 없다. 떠올릴 대상이 없으면 분별할 대상도 없고, 분별할 대상이 없으면 분별이 없 는 무분별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세속에서 분별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마하연은 세속과 승의를 구분하지 않는다. 승의뿐만 아니 라 세속에서도 무분별이라면 위에서 설명한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 다.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은 무분별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여실 한 관찰을 통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이다. 까말라쉴라 44) D.3922, 64a3-4. 45) D.3922, 62b7-63a1. 178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는 “무분별지에 들어감으로써 빈 것을 깨닫는다. 빈 것을 깨달음으로 써 모든 악견(惡見)의 그물을 완전히 부순다. 방편을 가진 반야를 의지 함으로써 세속과 승의의 진실을 여실하게 안다. 그래서 걸림 없는 지 혜를 얻기 때문에 모든 불법을 성취한다”46)라고 한다. 여실하게 관찰 하는 것으로 일체의 희론을 없앤다. 일체의 희론은 잘못된 견해에서 생기기 때문에 여실한 관찰이 아니고서는 희론을 없앨 수 없다. 일체 의 희론이 없으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에 무분별지에 들어가고, 무분 별지에서 빈 것을 증득한다. 그러나 유가사는 방편과 반야를 별개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과 승의의 진리를 여실히 통달하여 걸림 없 는 지혜를 증득한다. 따라서 여실지의 근본이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임 을 알 수 있다. 관 실 소연을 분별하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는 지와 달리 관(觀)은 대상을 분별하기 때문에 소연은 동일하지만 행상(行相)은 다르다. ?보은경(報 恩經)?에서 “지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고, 관은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이다”라고 하고,47) ?해심밀경?에서도 지로 몸의 가벼움과 마음의 가벼움을 얻은 다음 지에 머물면서 마음의 산란함을 없앤 뒤, 사유한 그 법들 안에서 삼매의 경계인 영상(影像)을 관찰하고 승해(勝解)한다. 그와 같이 삼매의 경계인 그 영상에서 소지 (所知)의 의미를 사택(思擇)하고, 잘 사택하고, 심사(心思)하고, 사찰(伺 察)하고, 참고, 원하고, 구분하고, 보고, 분별하는 그 일체가 관이다. 그와 같다면 보살은 관을 통달한 것이다. 46) D.3922, 63a1-2. 47) D.3921, 47a2.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79 라고 한다.48) 관은 여실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할 대상은 지의 소 연으로 언급한 십이분교 등의 일체법이다. 이 일체법을 삼매의 영상으 로 떠올리고, 그것에서 소지의 의미를 관찰하는 것이 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의 대상에도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관의 대상도 일체법이 그 대상이 된다. 관의 대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관하는 방식을 ‘사택하 고, 잘 사택하고, 심사하고’ 등으로 설명한다. 쉽게 알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거친 대상은 보고, 분별하는 것으로 알 수 있겠지만, 무상(無 常)이나 빈 것, 연기(緣起) 등과 같이 미세한 것은 잘 사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대상을 심사하고 사찰하는 등으로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 관을 실수하는 것이다. 일체법이 관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까말라쉴라는 관하는 구체적인 대상과 방법을 한정하여 “진실이란 무엇인가? 승의에서 모든 실사는 인법(人法)의 두 자아가 빈 것이다. 그것도 반야바라밀다로 깨닫는 것 이고, 다른 것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49)라고 인무아와 법무아 둘로 한정하여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관을 실천하는 것은 반야바라 밀다를 실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다에서 ‘반야’는 수승한 지혜를 의미하고, 수승한 지혜는 다름 아닌 ‘승의에서 모든 사물들은 인법(人法)의 두 자아가 빈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존재한 다고 고집할 경우 분별이 발생하고, 분별에서 허망한 견해가 발생하고, 이 견해에서 번뇌가 일어난다. 이 번뇌에서 행이 일어나기 때문에 중 생들은 끊임없이 유전한다. 따라서 이 유전하는 흐름을 끊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되는 자아가 존재함을 없애야 한다. 그 자아는 인아와 법아 로 현현하기 때문에 먼저 거친 인아를 없애고, 그 다음 미세한 법아를 없앤다. 그러나 성문처럼 인무아만을 닦는다든가, 유식학파처럼 삼계 48) D.3921, 47a6-b2. 49) D.3921, 48a7-48b1. 180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가 오직 의식임을 닦아 외경무아(外境無我)의 법무아를 닦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까말라쉴라는 중관학파에서 제시하는 인 무아와 법무아를 실천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먼저 인무아를 관찰하는 방법을 ?중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유가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해야 한다. 사람은 온(蘊)․계(界)․ 처(處)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온(蘊) 등의 본성도 아니다. 온(蘊) 등은 무상하고 다수의 본성이기 때문이고, 항상하고 하나 의 본성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것 또는 다른 것으 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의 실사가 존재할 수 없다. 실사가 존재하는 다른 행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나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착란일 따름이다’라고 분석해야 한다.50) 인무아를 관하는 것에서 사람은 오온 등과 같은가, 다른가. 진실로 존재하는 사람이 오온과 같다고 한다면 몇 가지 문제가 발생된다. 오 온이 무상하고 고통인 것처럼 사람도 무상하고 고통이어야 한다. 그러 나 사람의 실체를 인정하는 이들은 사람을 항상하다고 여길 뿐, 무상 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또 사람이 오온(五蘊)과 같다면 사람이 하나인 것처럼 오온도 하나이거나, 오온이 다섯인 것처럼 사람도 다섯이어야 한다. 따라서 사람이 오온 등과 같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 람이 오온과 다르다면, 오온을 떠난 별개의 곳에 사람이 존재해야 하 기 때문에 나무와 돌에도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 로 관찰하면 자아가 존재한다는 희론을 없앨 수 있다. 법무아를 관찰하는 것은 인무아를 관찰하는 것보다 복잡하다. 법아 가 인아보다 훨씬 미세하기 때문에 법무아를 관찰하기 어렵고 증득하 50) D.3921, 48b2-4.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81 기 어렵기 때문이다. 까말라쉴라가 제시하는 법무아의 관찰은 기본적 으로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한다.51) 유심(唯心)에 의지하여 외경(外境)을 분별하지 마라. 진여의 소연에 안주하여 유심도 벗어나라. 유심에서 벗어난 뒤 불현(不現)에서 벗어나라. [무이(無二)]불현(不現)에 머무는 유가사는 대승(大乘)을 본다. 적멸을 저절로 성취하고, 원(願) 등으로 정화하며, 수승한 지혜인 무아를 불현(不現)으로 본다. ?능가경?에서는 법무아의 관찰을 유심지(唯心知), 무이지(無二知), 불현지(不現知)의 셋으로 구분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법무아를 관 찰하는 것은 ?수습차제?에서 한결같이 설명되고 있다. 특히 까말라쉴 라는 유가행(瑜伽行) 중관학파에 속하기 때문에 이 학파의 교학적인 배경을 근거로 유심지에서 출발하여 무현지와 궁극적으로는 불현지로 완성한다는 차제를 세운 것이다. 첫째, 유심지는 유심에 의거하여 외경(外境)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다. ?중편?에서는 법이란 요약하면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와 십팔계(十八界)이다. 여기서 온, 처, 계, 유색(有色)의 모두는 진실로 마음의 상(相)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극미(極微)로 분해되고, 극미도 부분 의 본성을 관찰할 경우 본성을 절대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시이래로 색(色) 등 진실하지 않은 법을 집착해 왔기 때문에 꿈에 51) D.3920, 33a2-4. 182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본 색 등이 현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에게 마음은 색 등이 바깥에 단절된 것으로 현현하지만, 진실로는 ‘이것에 색 등은 마음의 상을 떠나 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라고 분석해야 한다.52) 라고 설명한다. 유심에 의거하여 외경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 유가행파 에서 설명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온처계의 일체법은 인식대상 즉 경(境)이 될 수 있다. 인식대상이 주어지면 인식[識]이 생기기 때문 에 인식의 본질은 인식대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인식 대상을 잘 살펴보면 인식의 본질이 그 인식대상에 있다고 확신하기 어 렵다. 오온 중에서 색은 지수화풍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지를 나누면 미진, 미진을 나누면 극미로 분해된다. 따라서 색은 ‘색’이 아니라 미진 과 극미의 결합에 불과하다. 색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색이 아니라 미 진과 극미의 조합인 셈이다. 따라서 색을 색으로 인식하는 것은 인식 즉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지 색 자체가 아니다. 우리들의 몸도 마찬가 지다. 몸은 머리와 양팔, 양다리로 나누어지고 그 중에서 팔은 팔목, 팔 꿈치, 손 등으로 구분된다. 또 손은 손가락, 손바닥, 손등 등으로 구분 되고, 손가락을 나누면 지, 수, 화, 풍의 대종(大種)과 대종은 다시 미진 과 극미 등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은 결국 마음 으로 인식한 것에 불과하고 본래의 자성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 유심 지이다. 둘째, 무이지로 관찰하는 것은 외경뿐만 아니라 유심의 마음까지도 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중편?에서는 진실로는 마음도 진실할 수 없다. 허망한 본성인 색(色) 등의 형상을 파악하는 마음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현현할 때 그것이 어떻게 진실한 52) D.3921, 49a1-3.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83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색 등이 허망한 것처럼 마음도 색 등을 떠나 별도 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허망하다. 이와 같이 색 등은 여러 가지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와 다수의 자성이 아닌 것처럼, 마음 또한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하나와 여럿의 본성도 아니다. 그 러므로 ‘마음은 단지 환술 등의 성품일 따름이다. 마음이 그와 같은 것처 럼 일체법도 환술의 본성과 같다’고 분석한다.53) 라고 한다. 무이지는 외경과 유심 즉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도 진실 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소취의 인식대상이 없으면 능취의 인식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취에 의해 능취가 결정되기 때 문이다. 따라서 소취의 색이 허망하면 능취의 마음도 허망할 수밖에 없다. 만약 능취의 마음이 허망하지 않다면 소취의 색 등이 제시되는 그대로 능취의 마음이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색을 보 고도 다수의 마음이 생기고, 다수의 색을 보고도 하나의 마음이 생기 도 한다. 따라서 마음은 하나와 다수의 본성을 여의었기 때문에 진실 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환술사의 주문에 걸린 구경꾼들이 실재 한다고 믿는 환술과 같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환 술처럼 마음도 대상에 따라 나타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만 실체가 없다. 셋째, 궁극적인 관찰은 불현지로 관찰하는 것이다. ?초편?에서는 그와 같이 유식을 벗어나서 둘로 현현하는 것이 없는 인식에서도 벗어난 다. 자타(自他)에서 사물이 발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능취와 소취는 허망할 따름이다. 이것을 떠나서도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분별한다. 둘이 없는 인식을 실사라고 집착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둘이 없는 지혜가 현현하는 것이 없는 지혜에만 머물 53) D.3921, 49a1-3. 184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러야 한다’라고 확정한다.54) 라고 설명한다. 무이지를 뛰어넘는 불현지는 능취와 소취의 긍정에도, 부정에도 머물지 않는다. 능취와 소취는 궁극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에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둘을 떠나 실사가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승의와 세속의 측면에서 능취와 소취는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불현지로 보고 머물러 야 한다. 이 불현지에 머무는 것이 무분별정이다. 불현지에 머무는 것에서 지혜와 방편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초편? 에서도 까말라쉴라는 “일체의 법은 진실로 본성이 없지만, 세속에서 유가사의 인식 또는 범부의 인식은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 다”55)라고 한다. 유심지와 무이지로 관찰하는 것은 승의에서 자성이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야로 관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 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일체법의 존재성을 믿고 집착한다. 그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먼저 유심으로 외경에 존재하는 법이 자성으로 성립 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그 다음 그 외경을 인식하는 내면의 마음도 결국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찰한다. 이것은 승의에서 내외의 일체법의 자성이 없음을 관찰하는 과정이다. 승의에서 자성이 없다고 해서 세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방편으로는 존재하기 때문 이다. 세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가사와 범부의 인식은 세속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유가사와 범부의 의식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유가사는 환술사와 같이 그 환술을 여실히 알아서 진짜라고 집착하지 54) D.3920, 34a3-4. 55) D.3920, 37a2.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85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유가사’라고 부른다. 어린아이가 구경꾼 처럼 환술을 진짜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된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모순되지 않는다.56) 환술사가 구경꾼을 모아 놓고 환술을 부릴 때, 나무막대기와 작은 돌 등으로 코끼리와 말 등을 나타내 보일 때 환술사도 구경꾼도 모두 코끼리와 말을 본다. 보는 것은 동일하지만 환술사는 보이는 것을 진 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구경꾼은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탄성을 지르고 환호한다. 유가사는 환술사와 같아서 일체법을 보는 것은 범부 와 똑같지만, 범부는 일체법을 보고 진짜라고 생각하고 집착하지만, 유 가사는 진짜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유가사가 일체법을 무자성으로 보는 것은 관을 실천하면서 보는 것 이고, 관의 실천에서 일어나 세속으로 나올 때에는 일체법을 환술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정에서 나올 때에도 견고한 발 원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나서 원하면 삼매에서 일어난다. 가부좌를 풀기 전에 ‘이 일체법 은 진실로는 자성이 없지만, 세속에서는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업과 과보의 연결 등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세존께서도 사물이 발생 하는 것은 세속이고, 승의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범부의 생각을 가진 이는 자성이 없는 실사를 존재하는 것 등으로 증익 함으로써 마음이 전도되어 오랜 세월을 윤회 속에서 떠돈다. 그렇기 때 문에 나는 진심으로 위없는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완성해서 일체지의 지위를 얻고, 그리고 나서 일체지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그 법성을 이해 하겠습니다’라고 사유한다.57) 56) D.3920, 37b1-2. 57) D.3921, 51a4-6. 186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선정에 들 때에도 ‘일체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일체지를 증득하겠습 니다’라고 발원하는 보리심을 떠올려 가행을 실천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선정에서 나올 때에도 보리심을 떠올려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마 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선정에서 무이불현지를 관찰한 것 을 잊지 않고 염두에 둠으로써 세속에서 작용력을 가지는 법을 보더라 도 실체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범부들은 이 실사 의 법을 실체로 집착하기 때문에 행을 지어 윤회한다. 이런 중생들을 위해 위없는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쌓아 일체지를 증득하겠다는 발원 을 거듭 세워 세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청정한 지혜와 방편을 구족해야 한다. 관 성 유가사는 지를 성취하여 관에 들 때부터 지관쌍운(止觀雙運)을 실 천한다. 관을 실천하면서 마음이 산란해지면 다시 지를 실천하고, 어느 정도 마음이 고요해지면 다시 관을 실천하기를 반복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제법의 자성이 없음을 보면서 들뜸과 가라앉음을 여의고, 애씀이 없이도 저절로 선정에 들게 될 때 지관쌍운의 도가 완성된다. 선정의 단계에서 유가사는 지관쌍운을 실천하고, 선정에서 나와서는 지혜와 방편의 쌍운을 실천한다. 이를 위해서는 “또한 이 모든 법들이 승의에서는 자성이 없을 지라도 세속에서는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 다”58)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사유한다. 일체법의 무자성을 오로지 관 찰하면 세속법의 존재를 잃고, 세속법의 존재를 생각하면 일체법의 무 자성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사는 승의의 무자성과 세속법의 존재성을 항상 같이 동등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지 58) D.3920, 37b5-6.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87 혜와 방편의 쌍운이다. 세속법에서 방편행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은 일체 중생을 보고, 그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대비심을 일으키 고 증상심(增上心)을 일으켜 “‘일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을 주 는 그 모든 행을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사유해야 한다”59) 왜냐하면 후 득지에서 보살은 끊임없이 방편행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반야를 수습하는 때이거나 또는 등지(等至)를 수습할 때에는 보시 등의 방편을 의지할 수 없지만, 그것을 가행하는 것과 그것의 후득 지(後得智)에서는 방편을 의지할 수 있다. 따라서 방편과 반야 둘을 함께 행한다.60) 지와 관을 행할 때에는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일체법의 무자성을 오로지 수습하기 때문에 보시 등의 방편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선정 에서 나온 후득지에서는 관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관찰한 일체법의 무 자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보살의 방편을 실천해야 한다. 선정에서 일체법의 무자성을 수습하는 것도 어렵지만, 후득지에서 방편을 실천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세속에 실재하는 일 체법을 보면서도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체법의 무자성 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편?에서 “방편을 의지할 때에는 보살은 환술사와 같이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61)라고 하는 것 처럼, 후득지에서 방편을 닦을 때 보살은 환술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는 환술사와 같아야 한다. 보살은 지혜와 방편을 함께 닦기 때문에 공덕을 성취하고 궁극적으 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수습차제?에서는 중생의 단계인 신해행지(信 59) D.3920, 38b3-4. 60) D.3921, 53b3-4. 61) D.3920, 39a1-2. 188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解行地)에서 보살십지, 불지에 이르기까지 그 단계를 12단계로 구분하 여 설명한다.62) 신해행지는 가행도이기 때문에 사종순결택분(四種順 決擇分)이다. 외경이 붕괴되는 난위(暖位), 정위(頂位), 외경을 보지 않 고 의식에 안주하는 것이 인위(忍位), 능취와 소취의 두 상을 여의고 무이지(無二知) 마저 붕괴되는 때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보살의 초지에서는 인법무아의 진여을 증득하여 모든 것이 빈 진리를 보는 견 도(見道)에 들어간다. 초지에서는 견소단(見所斷)인 112가지 번뇌를 끊는다. 나머지는 수도(修道)이다. 불지(佛地)는 법신(法身)에 머물면 서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통해 일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성취 한다. Ⅲ. 맺음말 ?수습차제?에서 지관의 수행체계는 대승불교에서 이 지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특히 대승불교의 측면에서 지관을 실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한국불교가 대승불교 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대승의 가르침에 입각한 엄밀한 수행의 전통 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습차제?에서 제기되고 있는 마 하연 선사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 한국불교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 서 ?수습차제?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수습차제?의 지관사상을 검토하면서 결론적으로 몇 가지를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승불교의 핵심은 대비심, 보리심, 수습 셋이다. 대비심은 ‘일 62) D.3920, 39a3-41b3.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89 체 중생이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마 음이다. 대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체 중생이 나와 남의 구분 없 이 똑같다는, 일체 중생은 모두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원한다는 점 에서 똑같다는, 그런 중생들이 셀 수 없이 윤회하는 삶속에서 나를 낳 아주고 길러준 어머니라는 생각을 일으켜 평등심을 일으켜야 한다. 이 렇게 소중한 나의 어머니가 지금 생로병사 등의 고통을 받는다고 거듭 해서 생각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대비심이 생길 수 있다. 대비심이 생기면 그 일체 중생을 내가 건지겠다는 증상심(增上心)이 생기고, 증상심이 생기면 ‘일체 중생을 위해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 겠습니다’라고 하는 보리심이 생긴다. 원의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율 의를 수지하여 육바라밀과 같은 행의 보리심을 실천한다. 행의 보리심 은 지혜와 방편을 닦는 것이다. 이 지혜와 방편을 통해서 부처님의 원 만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둘째,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를 통해 지관으로 나아간다. 지혜는 수습하는 것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듣고 생각하는 것에서도 지혜 가 생긴다. 특히 지관을 닦을 경우에는 듣고 생각하는 지혜가 없으면 지관의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경론의 말씀을 설해주 시는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는 것에서 문소성혜(聞所成慧)와 이를 곰곰 이 생각하는 것에서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켜 수소성혜(修所成慧) 에서 지관을 실천한다. 셋째, 지를 통해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성취하고, 몸과 마음의 가벼 움을 성취한 다음 관을 행한다. 관을 실천하면서 먼저 일체법은 외경 (外境)으로 성립하지 않고 마음에 인식된 것에 불과하다는 유심지(唯 心知), 소취가 없으면 능취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무이지(無二知), 그 다음 불현지(不現知)를 통해 승의의 무자성공을 현증함과 동시에 세속 제에서 일체법이 존재하는 것을 함께 보아야 한다. 불현지에 머물면서 190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방편과 반야를 함께 실천하면서 유가사는 신해행지에서 보살십지, 마 침내 불지를 성취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수습차제?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중생이 불지를 증득하는 전체적인 체계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대승지관법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문서가 한문으로 번역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91 참고문헌 ?수습차제 초편(Gom pa'i rim pa)?, D.3920. ?수습차제 중편(Gom pa'i rim pa)?, D.3921. ?수습차제 하편(Gom pa'i rim pa)?, D.3922. 宗喀巴大師 造/ 昻旺郞吉堪布 釋, ?菩提道次第略論釋?, 福智之聲出版社, 中華 民國八十三年. 룬둡 소빠 지음/ 지산 옮김, 宗喀巴大師 造/ 昻旺郞吉堪布 釋, ?菩提道次第略 論釋?(台北: 福智之聲出版社, 中華民國八十三年), p.928, 지영사, 2008. [Abstract] A Study of the Śamatha-vipaśyanā System in Tibetan Buddhism Yang, Seung-kyu As the title of the text shows, Kamalaśīla's Bhāvanākrama explains the practicing steps systematically. In particular, it has a significant meaning in showing how to practice śamatha-vipaśyanā based on Mahāyāna Buddhism. It's because Korean Buddhism didn't set a very strict practice tradition though it is Mahāyāna Buddhism. The practicing systems of śamatha-vipaśyanā of Bhāvanākrama is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the essences of the Mahāyāna Buddhism are the great compassion, the mind of enlightenment (bodhicitta) and the practice. The great compassion is to have a mind of 'how nice it would be if all sentient beings are free from sufferings'. To cultivate the great compassion, we should arouse equanimity that all sentient beings are equal. All sentient 192 불교사상과 문화 제2호 beings are all the same in disliking suffering and wanting happiness. We need to recognize them as our mother who gave birth to us and raised us in the eternal cycle of birth, death and rebirth. When we think that our beloved mother is suffering, we would have the great compassion naturally. Once we have it, an unusual mind of assuming the burdens of all sentient beings and saving them all is the next to arouse. Once we have it, then the mind of enlightenment (bodhicitta) of attaining Buddhahood in order to help all sentient beings is the next to follow. The bodhisattva who has the bodhicitta of determinative (praṇidhi) puts the bodhicitta of practicing (pratipatti) like six pāramitā into practice by observing bodhisattva vows. The bodhicitta of practicing (pratipatti) is to practice wisdom and means. Through wisdom and means, Buddha's enlightenment could be attained. Secondly, we go forward to śamatha-vipaśyanā by means of three wisdoms of hearing, thinking and meditating. One gains wisdom not only through meditating, but through hearing and thinking. The wisdom of hearing consists in study and learning to ascertain the meaning of the truths. The wisdom of thinking penetrates the true meaning of the truths by means of logic and reference to authority. The wisdom of meditating is completed by practicing śamatha-vipaśyanā. Thirdly, once gaining one-pointed mind and the lightness of mind and body by means of śamatha, then we practice vipaśyanā. While practicing vipaśyanā, we have to bring up the mere mind knowledge that all dharmas or the material things are not existed as external objects, but these are just not different from consciousness. Non-dual knowledge that without objects, there can be no subjects is next to be realized, and then one grasps that all dharmas are devoid of essence in ultimate truth through 티벳의 지관(止觀) 수행체계 연구 :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 193 non-representational (nirabhāsa) knowledge. With this, one has to see all dharmas or the material things exist in conventional truth. In non-representational (nirabhāsa) knowledge, the yogin practices both the knowledge and the means and gets to attain the stage of adhesion (adhimukticaryābhūmi), ten boddhisattva-stage and buddha-stage finally. In this point, Bhāvanākrama explains the system clearly how to attain the buddha-stage based on the teachings of the Mahāyāna Buddhism. Therefore Bhāvanākrama can be said an introduction to the practice of śamatha-vipaśyanā. I feel so sorry that we didn't notice this introduction's value even though it already had been translated in Chinese. Key Words: Tibetan buddhism, śamatha-vipaśyanā, Kamalaśīla, Bhāvanākrama, bodhicitta, compassion, one-pointed mind 양승규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 국대학교와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중관학을 강의하고 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벳불교를 공부하고, 티벳불교의 중요한 저술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진 행하고 있다. 역서로는 ?보리도차제약론?, ?도의 세 가지 핵심?, ?티베트 금강 경? 등이 있다. [2010. 11. 5. 투고; 2010. 12. 15. 수정; 2010. 12. 17. 채택]

 

 

[출처] 티벳의 지관 수행체계 연구- 까말라쉴라의 수습차제를 중심으로|작성자 양벌리영어에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