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사
1. 고구려의 불교수용
2. 백제의 불교수용
3. 신라의 불교수용
4. 신라불교의 전래
5. 통일 신라의 불교
6. 고려의 불교
7. 조선의 불교
8. 근 대 불 교
9. 5,60년대 불교
10. 7, 80 연대 불교
11. 90년대 불교
12.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13. 한국불교사 연표
1. 고구려의 불교수용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서기 4년 혹은 5년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사 기술론자들은 서기 4년으로 잡고 있다. 서기 4년으로 본다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후 약 4백여년이 흐른 뒤이다. 우리나라의 최초불상으로 석가여래 부처님 금불상 53구를 신라 제 2대 남해왕 원년에 지금의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는데 얼마뒤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하여 지금의 금강산 유점사에 점안하여 모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왕은 그 사실을 고을 수령 노춘으로부터 전해 듣고 절을 지어 금불상을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그런일이 있은후 38년이 지난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임시 궁전을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며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 오른지 6년 후, 서기 48년 7월에 서역 중인도의 옛나라 아유라국의 공주 허황옥이라는 여인이 석탑을 싣고 바다를 거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하였다. 김수로왕은 허황옥을 신부로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으므로 아들 열을 낳았다.
장남인 거등은 대를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둘째 아들은 허황후의 성씨를 따라 석이라고 불리웠으며 그 외 아들들은 가야산에 입산케 하여 불교와 선도를 수업케하였으니 이것이 불교포교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조선시대불교통사]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전래에서 시작되었다는 북방 전래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372년(소수림왕 2년), 전진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보냄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고승전(梁高僧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동진(東晋)의 고승 도림(道林)이 고구려 승려에게 청담격의(淸談格義)불교의 대표자인 법심(法深)을 소개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372년 이전에 이미 문화교류의 방편으로 민간경로로 전파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 당시의 왕권은 민중에 대한 지배의 필요성과 자기네 지위를 신성시 해주던 재래 신앙(자연신과 조상신 숭배)의 기능이 약화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이념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372년 왕실이 불교 수용의 주체가 되어 중앙 집권적 지배 체재를 정비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한편 전진왕이 불교를 전하게 되는 것은 당시 중국 북방을 정복하고 남방의 동진과 대치한 상황에서 후방인 동북방의 견제의 필요에서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위한 문화 교류의 한 방편이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들어온 전진 불교는 도안의 새로운 불교였다.
따라서 고구려의 불교는 민간 경로를 통한 격의적 불교와 왕실을 통한 도안적 불교의 두 가지 형태로 발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사회에 토착화되어 민간 사회나 지방 사회의 신앙적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공식적인 불교가 왕실의 지원 아래 순도에 의해 포교되면서 중앙 왕실이나 지식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 나갔다. 따라서 다른 삼국에 비해서 아주 두드러진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의 대표적인 예로 고구려에서는 승려 학자 승랑을 배출하였는데 그는 섭산의 고구려 승랑 대사라고 불리었으며 그는 고구려 불교의 주체적인 수용에 앞장서면서 존재와 無의 변증법적인 지향을 밝혔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인식론도 관념론적 제약으로 인해 변혁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봉건 지배자에게 봉사하는 한계를 극복치 못했다.
그 후 불교의 주류는 삼론종이라는 학문적인 경향으로 기울었고 그 당시 고구려의 불교가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이었고 그런데도 계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이는 기복신앙적인 호국불교의 최초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호국불교는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진리를 말하라.]는 석가모니불의 본 뜻과는 달리, 거짓말과 시기와 간첩을 하면서까지 철저히 지배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익을 위해 민중을 배신하고 수탈에 일조하는 이른바 호국불교의 허구성과 모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당 태종 침략시에 나타난 승려들의 반외세 투쟁으로, 최초 승군이 있기도 했지만, 이것도 또한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정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중생을 위한 것이었는지, 또한 호국불교라는 말이 팔만대장경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인데 도대체 언제부터 어디에서 나온 말인가? 말만 호국불교라 외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음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말년에는 불교, 유교와 함께 도교가 당에서 전래되어 성행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말 영류왕( 榮留王 ), 보장왕 시대에는 사람들이 다투어 도교의 일파였던 오두미도(五斗米道) 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기복을 위한 기도 불사로서 왕실에서 수용한 불교는 국민의 정신 통일의 크나큰 역할을 했지만 말기에 이르러 특히 연개소문에 의해 배불정책이 일어났고 재차 당에서 도교가 들어오자 백성들은 다투어 오두미도( 五斗米道 )를 신봉하였고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훌륭한 불교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삼국 시대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재래의 토착신앙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고 천지신을 그 정점으로 하여 대중화되어 있는 가운데 외래신앙인 불교가 전래되었다. 따라서 재래신앙인 토착신앙과 외래신앙인 불교는 갈등을 벌이게 된다. 종래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무불교대(巫佛交代)라는 입장으로 단순화시켜 보아 왔다. 그것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의 전래와 수용을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외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것과 이것을 그 사회가 수용하는 것, 국가가 이를 공인한 것과는 개념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종래 연구는 이를 간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불교가 전래된 것이 그렇게 많이 늦은 것이 아니다. 이미 눌지왕대에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 사람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양나라 사신이 왔을 때 왕실에 들어가 불교에 대해 이해를 시켰던 것이다. 더구나 소지왕대에는 이미 내전에 분수승(焚修僧)자리잡고 있었다. 신라는 다만 국가적 공인 조치가 늦었을 뿐이다.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과 대립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구려나 백제는 이미 중국문화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신라는 중국문화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적어 불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사상적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라가 토착신앙에 의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천지신을 모신 신궁을 설치하여 사상을 통일을 하였으므로 외래신앙인 불교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이 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제장인 천경림에 사찰을 지으려다가 강력한 저지에 직면하였으며 그러한 경험이 신라인으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부진통을 겪게 됨으로써 독특한 신라의 불교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타협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산신각과 장승이라 하겠다. 즉 불교가 처음 전래되어 수용되는 단계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대립과 갈등을 겪게 되었으나 일단 그 과정을 거치면서 융화되어 가는 문화접변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공인 이후를 무불교대로 보아서는 안되며 무불융화의 입장에서 신라사상의 흐름을 파악하여야 한다.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빚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 이차돈의 순교설화이다. 이차돈의 순교설화는 [삼국사기] · [해동고승전] · [삼국유사] 및 금석문에 실려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법흥왕이 본디 불법을 존중하여 흥교(興敎)할 뜻이 있었으나 군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이차돈에 의해 창사의 결심을 하고 이차돈에게 왕명을 내리어 창사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군신들은 절을 지으라는 왕명에 대하여 내심으로 반발하였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창사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창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고 보니 이차돈이 왕의 허락도 없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군신들의 의견을 도외시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기와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고 천경림에 창사한 이차돈을 왕의 입장에서 교명죄(矯命罪)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의 온건파인 법흥왕은 흥법문제에 있어서 군신들이 촉각을 워낙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차돈이 군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가며 천경림에 창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창사를 할 바에는 아예 토착 신앙의 본거지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흥법의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군신들의 반발이 거세게 나오고자 왕은 군신들의 반발을 일단 완화시키고 왕명의 준엄함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단 것이다. 즉 흥법에 대해 온건파인 법흥왕과 강경파인 이차돈의 의견 차이와, 흥법 자체에 대한 반대파인 군신들과의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아직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불교세력이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지배 이데올로기화되어 가고 불교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불교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종래 토착신앙이 갖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
었지만 이것은 통치이념의 변화일 뿐 사상적으로는 두 개의 신앙이 마찰과 갈등을 겪으며 융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토착신앙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지속되어 오히려 불교에서 배워온 것도 있고, 반대로 불교가 토착신앙의 제요소와 융화하여 독특한 한국불교로 토착화되어 갔다. 불교는 지배층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토착신앙이 일반적 추세였다. 따라서 통치이념의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볼 때는 무불교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하여 토착화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2) 토착 신앙과 불교와의 융합
전국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뷸교 본연의 불사를 드리는 본당 이외에 토착신을 모시는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에 있어서 각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 나라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모습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또한 산문 근처나 사찰 입구에서 장승이나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산신각이나 사찰입구의 장승은 한국사찰의 특징이며, 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가람의 배치에서뿐만 아니라 사찰연기설화 ·연등회·팔관회·탱화 등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토착신앙 내에도 무당의 무의 ·무구 ·무신도 ·무속용어 등에 불교적 요소가 융화되어 있다. 이렇게 토착신앙과 불교는 상호 영향을 끼치며 융화되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토착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환인천제가 불교의 제석천 곧 제석환인의 신앙으로 변화한 것과 국조 단군이 독성님이나 불교적 산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불교신앙이 토착신앙화 한 경우로는 불교의 미륵신앙이 화랑국선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토착신앙과 불교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토착신앙의 성역과 불교사찰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아도본비를 인용하여 신라는 그 서울 안에 일곱개의 가람의 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天鏡林이)요, 둘째는 삼천기(三川岐)요, 셋째는 용궁(龍宮)의 남쪽이요, 넷째는 용궁의 북쪽이요,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요,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이요, 일곱째는 서청전(壻請田)이니 모두 전시에 가람의 터로 법수가 길게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여기서 천경림, 삼천기, 용궁 남, 용궁 북, 사천미, 신유림 및 서청전 등은 토착신앙의 신성지역들이다. 사원 건립 이전부터 토착신앙의 종교적 공간으로 여기에 불교사찰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러나 토착신앙의 신성지역에 불교사찰이 들어섰지만 불·보살에 대한 숭배와 의례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토착신에 대한 숭배와 의례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삼국유사]의 선도산 성모수희불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선도산에 산신과 신모의 신사(神祠)가 있었는데 이들 산신과 신모의 도움으로 새로 불전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모가 불상과 더불어 벽상에 53불(佛)과 6류(類) 성중(聖衆) 제천신과 오악신군을 그려 받들며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풀어 이를 항규로 삼으라 하였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려시대에도 이와 같은 일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주기하였다. 진평왕대(579∼631)의 이 기록은 산신과 비구니, 신사와 불전, 불상과 천신, 산신탱화가 융화하고 있는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일연이 주기한 오악에 대해 살펴보면 산신과 불사와의 관계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일연은 여기의 오악을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으로 보았으나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가 모신 오악신군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오악에 있는 산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경주 산천조에 의하면 선도산이 서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의상이 전교활동을 하던 화엄십찰이 오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의상이 부석사를 지을 때 이미 이교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의 이교도는 바로 토착신앙을 믿는 무리들인 것이다. 결국 삼국시기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한 지역의 오악과 남북국시기의 [삼국사기] 제사지에 보이는 오악 모두 토착신앙과 불교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종이 수용된 9세기 이후 산지가람으로 발전하면서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는 보다 긴밀하게 된다. 산신이 사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러한 산지의 가람건립 과정에서 보다 확대되어 갔다.
토착신앙의 성소는 산신각과 장승의 형태로 불사와 융화하거나 민간에서는 계속 신성지역으로 숭배되어 산신당 ·서낭당 ·장승과 솟대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위치 상으로 보아 산신각이 상위, 불당이 중위, 장승이 하위에 위치하는 우리 나라 가람의 삼중구조는 상당으로 관념되는 산신당, 중당으로 관념되는 서낭당, 하당으로 관념되는 장승과 솟대의 동제당의 삼중구조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산신각과 장승은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 성역의 구조 안에 불단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 형태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신당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융화되어 토착신앙의 가람 건립화에 따라 사원내에 존재하며 현세구복, 기복불교의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3) 토착 신앙과 불교의 교대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하늘 ·땅 ·해 ·산 ·바람 ·비 ·동물 등 여러 자연신에 대한 신앙과 제의가 이루어졌다. 공동체가 해체되고 계급이 발생하고 정치체가 형성되면서 여러 신들의 위계화가 이루어져 자연신의 하나인 천신이 여러 자연신의 최고 정점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대사회의 지배자는 만신들의 하이어라키의 최고 정점에 위치한 천신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천신을 지배이데올로기로하여 계급사회의 정당성을 사상적으로 보장받고자 하였다. 고대국 가가 발전하면서 시조묘를 세워 천신신앙과 조상숭배신앙을 결합시켜 다른 정치체보다 우월함을 보였으며,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지역신을 중앙집권적 구조 속에 재편성하면서 천지신을 신앙하고 제의를 받들었다.
노동력의 수취보다 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복전쟁이 확대되고 많은 군사력이 요구되어 양인화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분체제의 변화는 새로운 사상과 신앙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미 전래 수용된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하였다. 이는 불교가 천신신앙보다 평등주의적이며 보편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는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지배충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필요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은 현실적 어려움, 특히 전쟁에 참여하면서 현실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 수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광범위하게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피지배층이 믿는 불교를 이용하여 전쟁에 승려들을 참여시키고 전몰장병을 위해서 팔관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불교를 국교로 하여 대승통을 임명하였고 국가사원인 성전사원(成典寺院)을 건립하였다. 토착신앙에서 불교로의 변화는 보다 평등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의 변화라 할 수 있으며,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에 대한 제사로의 변화는 중국적 예제로 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백제의 불교수용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 384년 (침류왕 원년)에 동진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백제 불교가 시작되었다. 인도의 승려이거나 중앙 아시아 출신으로 생각되는 마라난타는 해동고승전에 의하면 신통한 이적을 가진 사람으로서 백제왕은 그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를 다하여 공경했다. 이는 왕실이 그의 신통력 주술에 의지하여 왕실의 안녕을 빌고자 하고 또한 재래신앙에 대신하여 전란에 동요하는 민중을 통제할 지배이념으로써 불교를 수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야 사상과 정토 신앙이 봉건 지배층에 의해 사용되어 그들의 착취를 은폐시키고, 민중의 저항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왜곡된 불교 신앙으로 적극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392년(아신왕 원년)에는 왕이 불교 신앙을 대대적으로 권장하였다. 그는 불법을 숭상해서 복을 구하라는 소칙을 내렸고, 민중에게 불교의 신봉을 권유했다.
그 후 170여년간 백제는 대외적으로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약했다. 하지만 불교의 발전은 그 동안에도 계속 이루어 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표적으로 겸익의 `미륵 불광사 사적의 편찬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율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그러한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불교 업적의 축적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불교가 매우 성행했는데 그것은 당시 미륵 정토신앙과 결합하여 실천 불교로서 민중 속에 뿌리 내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중에게는 미륵신앙이 뿌리 깊었고 왕실 측에서는 계율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 인해 왕실의 지지아래 율종과 계율 연구가 매우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왕의 살생 금지령을 통한 국민적 계율 실천이 가능했었던 것 같다.
1) 불교의 전래와 국가불교(國家佛敎)로의 발전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이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모시고 예의를 갖추어 공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서울에 절을 짓고 승려 열명을 두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전해진지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절을 짓고 백제인을 출가(出家)시키고 또 성직자까지 배출했다는 것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류왕 이전에 백제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때에 불교가 성행(盛行)한 사실에 대해서는 {주서(周書)}에 승려와 절과 탑(塔)이 매우 많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신왕(阿莘王)이 백성들에게 불법(佛法)을 믿어 복(福)을 구하라라고 하교(下敎)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백제에는 왕실의 보호하에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음을 짐작하겠다.
백제에 전해진 초창기의 불교사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초창기인만큼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인 내용과 종교적(宗敎的) 신성(神性)을 강조한 신이적(神異的)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백제불교의 한 특성으로 국가불교(國家佛敎)로서의 발전을 들수 있다. 그것은 대단위 규모의 사찰을 조영(造榮)한다는 것이다.
왕흥사(王興寺)의 경우 법왕(法王) 2년(600)에 일단 준공되었다가 그 뒤 35년간이라는 세월을 걸친 증측공사 끝에 무왕(武王) 35년(634)에 완성었다. 이 절은 무왕의 대외적인 웅략(雄略)의 웅지(雄志)가 어린 호국의 도량(道場)이었던 것이다. 왕이 이를 예불(禮佛)하려고 할 때에는 먼저 인근의 바위에서 부처를 경배할 정도로 신성시하였으며, 국왕의 임석하에 자주 행향의식(行香儀式)이 베풀어졌다.
2) 계율의 성행과 승직제도(僧職制度)
계율(戒律)이란 몸(身)과 입(口)과 뜻(意)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일체의 악(惡)을 방지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歸依)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또한 계율은 성불(成佛)의 길에 들어가는 기본바탕이 되는 것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있어서는 자신의 도덕적 자비의 방향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계(戒)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불교도덕이며, 율(律)은 출가자(出家者)만을 위한 통제규칙으로 정의된다.
백제에서 계율이 성행(盛行)하게 된 것에는 불교가 전래되던 초창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본격적인 전파는 승려 겸익(謙益)의 활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도에 유학하여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한 다음 성왕(聖王) 4년(526)에 귀국한 뒤, 왕명에 따라 국내의 승려 18인과 함께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종사하였다. 이때 번역된 것이 율부 72권으로서 승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로서 볼 때 백제에서는 계율학이 일찍부터 발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성왕 스스로도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같이 전래된 백제의 계율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 가서 경전(經典)을 직접 구해와 번역 보급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백제의 계율이 중국과 고구려 신라에 전래된 것과는 다른 내용이기 떄문이다. 백제가 중국에 전래된 율전(律典)을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백제불교는 율종(律宗)을 중심으로 커다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계율의 학문적 발전과 더불어 실천도 강조되었다. 법왕(法王)이 전국에 교지(敎旨)를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고기잡이와 사냥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없애게 하고 나아가서는 민가에서 기르는 날짐승까지도 놓아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실천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계율의 실천을 생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같은 불교계율의 강조는 백제에서 승직제도(僧職制度)가 일찍부터 발달하게 되었음을 생각케 해준다. 백성들이 계율을 생활화하고 있었으므로, 성직자인 승려들은 더할나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려들을 감독하는 승직제도가 만들어져 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승직제도에 대해서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일본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추고천황(推古天皇)이 백제 승려 관륵(觀勒)을 승정(僧正)으로 삼아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들을 검교(檢校)토록 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3) 미륵신앙(彌勒信仰)
경전(經典)에 따르면, 미래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미륵불(彌勒佛)이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하생(下生)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난뒤 출가하고 수행하여 성불(成佛)한 뒤에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이상사회(理想社會)로 이끌게 된다고 한다. 미륵신앙이란 미륵불이 이끄는 그러한 이상사회에 살 것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경전에 설명된 미륵이상세계는
온 세상이 오직 평화로워 도둑의 근심이 없고, 도시나 시골이나 문을 잠글 필요가 없다. 또 늙고 병드는 데 대한 걱정이나 물, 불로 인한 재앙이 없으며 전쟁과 가난이 없고, 짐승이나 식물로 인한 독(毒)과 해(害)가 없느니라. 또 서로 자비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듯, 어미가 아들을 사랑하듯, 언어와 행동이 지극히 겸손하니, 이는 다 미륵 부처님이 자비하신 마음으로 깨우치고 이끌어주시는 까닭이니라. 살생하지 않는 계행(戒行)을 지켜, 고기를 먹지 않으니 저 세상 사람들의 감관은 조용하고 평온하다({미륵대성불경(彌勒大成佛經)}).
라고 한 바와 같이, 중생들에게 있어 모든 걱정이 없는 사회다. 그러므로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에게 있어 더 이상 기대할 바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공경효애(恭敬孝愛)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불교의 계율(戒律)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이상사회의 출현은 중생들이 계율을 잘 지켜서 평화로운 세상이 전개될 때에 비로서 가능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훌륭한 왕이 다스리는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미륵이상사회는 중생들의 계율수지(戒律受持)와 국왕의 통치 모두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백제의 불교에서 계율이 성행하게 된 것이 미륵신앙의 발전과도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백제때에 미륵신앙이 유행한 것은 일찍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실상은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왕(武王)의 미륵사(彌勒寺) 창건 설화는 그것이 번성하였던 사실을 잘 알려준다.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함께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연못가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출현하였다. 이에 왕과 왕비는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고, 이때 왕비가 그 곳에 큰 절을 지을 것을 소원한다. 왕이 이를 들어주기로 하였으나, 연못을 메워야 하는 큰 장애가 있었다. 그래서 그 일을 사자사에 있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의논한 바,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 밤사이에 산 한쪽을 허물어 연못을 메워 주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조영하고는 미륵사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미륵사의 창건에 얽힌 설화의 대략이다. 당시에 건립된 미륵사는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옛날의 모습을 잘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설화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용화산 중턱에는 지금도 사자암이 남아 있어서 미륵사 창건 설화에 얽힌 연기(緣起)를 실감할 수 있다.
이같은 미륵사 창건 설화에서 용화산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으며, 세 개의 건물을 세웠다는 것 또한 미륵불이 3회에 걸친 설법(說法)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자사는 미륵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았다는 사자상좌(獅子床座)를 상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무왕이 용화산 아래를 지나다가 미륵불의 출현을 목도하게 된 것은 전륜성왕이 미륵불의 처소에 나아가 설법을 듣는다고 한 경전의 기록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은 바로 경전에 나오는 전륜성왕에 비길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미륵사창건 설화를 통해 볼 때에 백제인들은 신앙공덕(信仰功德)으로 미륵불이 하생하고, 그래서 머지 않아 미륵이상사회가 도래(到來)할 것이라고 믿어왔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보아 백제인들은 매우 현실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4) 관음신앙(觀音信仰)과 [법화경(法華經)] 신봉(信奉)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일심(一心)으로 염불(念佛)하여 그 원력(願力)으로 현세(現世)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靈驗)을 얻고자 하는 신앙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로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經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법화경}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화재나 홍수의 위험에서도 이를 벗어나며, 칼과 몽둥이는 부서져 없어지고, 또한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사례들을 살펴 볼 때 백제의 관음신앙은 대부분이 {법화경}의 내용에서 비롯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승려 현광(玄光)은 지금의 공주(公州) 사람으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혜사(慧思)에게서 {법화경}의 내용을 수업 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證得)하였으며, 스승으로부터 귀국해서 불법을 베풀으라는 가르침을 받들어 귀국하였다. 귀국도중 용궁(龍宮)에 들어가 설법하였으며, 고향 공주에 들어와 절을 짓고 교화(敎化)를 펼쳤는데, 제자들은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한다.
승려 혜현(惠現)은 어려서 출가한 뒤 {법화경} 독송을 한결같이 하였는데, 그가 기도함에 영험이 많았다고 한다. 만년에 그가 산 속에서 수도하다가 입적(入寂)하였는데, 그의 시신을 호랑이가 먹어버렸으나, 오직 혀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승려 발정(發正)은 중국에 유학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참배하였다고 전한다. 무왕(武王)이 세운 제석사(帝釋寺)에 화재가 나서 법당과 부속 건물들을 불태웠을 때에 그 탑 속에 넣어 두었던 사리(舍利)와 {금강경(金剛經)}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법화경} 보문품(普門品)에 있는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으로 불에도 능히 타지 않는다고 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덕산(聖德山) 관음사(觀音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 따르면, 효녀 홍장(洪莊)이 중국의 황후가 되어 많은 불사(佛事)의 공덕(功德)을 지었는데 이로 인해 장님인 아버지의 눈이 뜨이게 되었다. 또 관음상(觀音像)을 조성하여 고국 땅으로 보낸 것이 옥과(玉果) 지방의 처녀 성덕(聖德)을 통하여 성덕산 관음사를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이 때의 효녀 홍장과 옥과 처녀 성덕을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의 내용은 {법화경} 보문품에 설명된 내용 즉, 관세음보살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고 해탈케 할 때에는 많은 방편력(方便力)으로 몸을 변화시켜 나타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백제에서 믿어진 관음신앙은 {법화경} 보문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천을 위주로 하는 현세이익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5) 미타신앙(彌陀信仰)
불교에서 정토(淨土)란 부처나 보살(菩薩)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수많은 정토 가운데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신 곳을 미타정토(彌陀淨土)라고 부르는데, 서방정토(西方淨土) 혹은 극락(極樂)이라고도 한다. 미타신앙은 아미타불이 계시는 정토에 가서 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미타신앙이 행해진 사례로, 먼저 27대 위덕왕(威德王)이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해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기를 원한다.고 하여 이를 신하들이 말리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위덕왕은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따라 백명의 백성들을 출가(出家)시키고 갖가지의 불사공덕(佛事功德)을 지어 그것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억울하게 전사하여 원혼(寃魂)이 된 부왕을 위해 출가 수도하고자 함은 부왕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것은 부왕의 명복을 빌고자 하는 왕생기원(往生祈願)의 신앙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선광사연기(善光寺緣起)}에 따르면, 선광사의 생신아미타여래(生身阿彌陀如來;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의 아미타불상을 가리킴)는 옛날 인도의 월개(月蓋)라는 장자(長者)의 청(請)으로 이 세상에 와서 출현한 본존불(本尊佛)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대림정사(大林精舍)에 계실 때에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월개장자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마침 그 지역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의 딸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월개장자가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하며 자비(慈悲)를 구하였고, 부처님은 그에게 서방(西方)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있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의 명호(名號)를 부르면서 간청하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에 월개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서방을 향해 온갖 정성을 갖추고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불하였다. 그의 정성이 감응(感應)되어 월개의 딸은 물론 모든 환자들의 병이 낳게 되었다. 그후 1300년(혹은 500년)이 지난 뒤 월개장자는 환생(還生)하여 백제의 왕이 되었으나 다시 악업(惡業)을 짓고 있었다. 이에 생신미타여래가 다시금 그를 구제하고자 백제에 날아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백제왕은 지난 날을 생각해내고 참회(懺悔)하여 나라 안에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
이 설화를 통해 생각해 볼 때 백제인들은 미타정토에 왕생(往生)하고자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가 바로 정토임을 믿으려 했다고 하겠다. 이것은 백제인들의 미타신앙이 매우 현세위주로 현실이익적인 신앙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 백제 불교의 일본 전수(傳授)
백제의 문화가 일본에 전파되어 그들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여러가지 문헌에 전하는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성왕(聖王) 때에 전래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백제는 일본에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등을 파견하면서 여러 경전(經典)과 론소(論疏)들을 보내었고 또한 공장(工匠)들을 보내어 사원건축을 전수(傳授)해 주었던 사실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전수에 힘입어 추고천황(推古天皇)때에는 사원 46개소 승려 860인 비구니 569인에 이르게 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백제 승려 혜총(慧聰)도 일본으로 건너가 대신 소아마자(蘇我馬子)에게 계법(戒法)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위덕왕(威德王)때에는 선신니(善神尼) 등 3인의 비구니가 백제에 와서 계학(戒學)을 공부하고 3년만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와 일본 사이에서 불교의 전수는 양국이 서로 오가며 이루어졌음도 알겠다.
그리고 추고천황때에는 한 승려가 조부(祖父)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승정(僧正)과 승도(僧都)를 두어 사찰과 승려들을 감찰(監察)토록 하고 있다. 이 때의 초대 승정에 임명된 승려가 바로 백제 승려 관륵(觀勒)이었다.
이상에서 살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 있어서 불교는 초기의 전파과정뿐만 아니라 교학(敎學)의 발전 승직제도(僧職制度)의 수립 등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겠다. 이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바 그것은 현존하는 유물들을 통해서 더욱 확실히 자세히 알 수 있다.
3. 신라의 불교수용
신라의 불교 공인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가량 늦은 법흥왕(528년)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러 자료를 통해 이미 그 이전부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 온지 40 - 80년 후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가 들어온 듯 하며 그 경로가 공식적이지 못한 터라 은밀하게 포교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불교는 기복 신앙의 형태였고 공인되지 못한다. 그러다가 향의 전래를 계기로 왕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신라에서 나타난 불교 수용 과정에서의 갈등은 두 가지로 파악된다. 첫째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들 수 있다. 이차돈 등의 불교도의 불교 공인 요구와 왕권 신장 및 중앙 집권적인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배 이념을 필요로 하는 왕권의 요구가 상응한데 반해, 부족 합의제의 고수를 지향하는 전통 귀족 세력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불교 승인요구를 극력 거부하였던 것이 그 형태이다. 둘째로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들 수 있는데, 법흥왕의 불교 승인 요구에 대하여 귀족층과 전통 부족 세력을 대표하는 대신들이 승려들의 머리모양, 옷차림새 그리고 그들의 언변에 상당한 비난을 가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신라에서 공인되었는데 그 과정상 결코 순조롭지는 못했다.
법흥왕 때 (527년) 귀족들의 봉불(奉佛) 반대 주장에 대하여 이차돈(異次頓)은 자신의 목을 베어 분분한 의견을 결정토록 자청했고, 이차돈은 죽음에 임하여 나는 불법을 위해 형을 받는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당신께 신(神)이 있다면 나의 죽음을 통하여 이적을 행하소서. 이런 말을 끝으로 처형되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피가 솟구쳤고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등 이적이 나타나 중신 귀족이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의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을 그대로 종교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일연은 정치적인 이유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주체는 대왕(大王) 이었고 그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은 군신(群臣) 들이었다. 즉 법흥왕이 그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로써 그 일을 벌였고 봉불을 반대하던 군신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게 하여 그네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흰 젖빛의 피 는 신화적 기술 양식의 일종으로 당대 왕 측근들에 의해 조작된 풍문으로 간주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법흥왕은 불교 수용 정책을 강력히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부족합의제를 지향하던 귀족층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하고 중앙 집권적인 왕권 전제 통치를 강화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왕실에서는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신장하기 위하여 부족 연맹체 사회의 지배 이념이었던 재래 신앙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수용 과정상의 갈등은 왕권의 지원과 불교도의 재래 신앙과의 융화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무마되고 극복되었고, 재래 신앙은 대체로 불교 신앙에 흡수 통합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용 과정상 중국 불교가 직수입 되는게 아니라 고구려를 거치면서 한층 더 토착화되었고, 다른 나라에 비해 어느 정도 민중화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둘째로 불교 수용 공인을 둘러 싸고 지배권력 내부에서 이해 관계를 달리 하여 갈등이 치열하였으나 대체로 민주적 합의에 의해 외래 종교가 받아들여졌다는데 있다.
비록 신라는 삼국 가운데서 가장 뒤늦게 불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밀접하게 불교를 국가와 정치면에 직결시켜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신라의 불교-전래와 공인
1. 불교의 전래
신라불교 전래에 관한 원 사료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이다. 눌지왕(417∼58년) 때 고구려로부터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 모례(毛禮)의 집에 와 있었는데, 양(梁)나라(502∼57년) 사신이 가져온 향(香)의 용도를 왕실에서 모르자 이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4세기 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눌지왕대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사는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을 통하여 민간에 전해진 것이 잘 남아 있는 경우일 뿐이며, 유물·유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와 통하는 또 다른 경로인 영주(榮州)·안동(安東) 쪽으로도 불교는 전해졌다.
그리고 신라왕실이 불교를 접한 시기가 고구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았음은 5세기 초엽의 신라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왕족이 직접 가져왔거나 신라왕실에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묵호자를 통하여 신라왕실이 처음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제동맹(羅濟同盟) 이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외교나 군사면에서 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밀접하였다. 신라가 선진(先進) 불교문화를 어느 한 경로로만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 사실(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지방에 숨어 있던 묵호자가 왕실에까지 불교를 포교하였다거나, 이때 시대상으로도 맞지 않는 양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계통의 불교가 전래된 사실이 하나로 중첩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라는 521년(법흥왕 8)에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서 양나라에 처음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볼 때, 신라는 백제를 통해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것은 외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북조불교의 성격으로 추정되는 초전불교(初傳佛敎)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사적에 대한 아도비(阿道碑 혹은 我道碑)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263년(미추왕 2)에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조위인(曺魏人) 아굴마(我掘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아도를 묵호자와 동일인으로 보고,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위(魏)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일연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아도비로서, 각훈은 고구려·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본 것이다. 아도비는 시대 착오가 심하며 설화의 인위적 구성이 짙은 사료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아도는 진(晋)나라에서 왔다는 고려본기(高麗本記)의 기사가 있으므로,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생존연대로 보아 고구려에 온 아도가 말년 무렵 신라에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 초전승이 아도라고 하는 사료는 아도비 밖에 없는데, 고기(古記)에 의하면 아도는 정방(正方)과 멸구비(滅垢批) 다음에 세 번 째로 왔으며,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는 아도가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하고 다시 온 승려였다고 하였다. 아도는 신라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으므로, 아도를 반드시 초전승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소지왕대(479∼500년)에 모례의 집에는 몇 명의 승려가 신도들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이러한 교세(敎勢)는 왕경(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는 내불당(內佛堂)이 있고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이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보인다. 이 사건은 불교를 비방하는 세력의 모함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들이 처형을 받은 사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과 위배된다. 이것은 국가적인 불교수용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일률적으로 통용될 수 없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법흥왕 이전의 불교실태는 불교전래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듯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순흥(順興) 어숙묘(於宿墓)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소재가 많은데, 피장자(被葬者)의 활동연대는 불교공인의 해(527년) 전후가 된다. 이것은 법흥왕 자신이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신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도 불교가 공공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 때 막연히 사용되는 ‘공인’(公認)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2. 불교공인의 실상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527년(법흥왕 14, 丁未年)이라 하지만, 이해에 이차돈은 처형당하고 흥륜사(興輪寺) 창건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법흥왕 정미년은 공인의 해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은 해이며, 실질적 불교공인은 법흥왕 22년(乙卯年) 즉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던 해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차돈에 얽힌 이야기는 그것이 비록 종교사화(宗敎史話)라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흥륜사는 을묘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544년(진흥왕 5)에 초창(初創)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 둘째, 이차돈 설화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법흥왕의 신행(信行), 즉 잠시 정사(政事)를 멈추고 삼보(佛·法·僧)의 노예가 되어 입사수도(入寺修道)한 사신(捨身)의 행적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왕사신(帝王捨身)의 예는 진흥왕 말년의 행적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셋째, 법흥왕이 사신한 장소는 을묘전 이전부터 있었던 흥륜사이며 이 때문에 흥륜사는 대왕사(大王寺)라고도 불렸다.
법흥왕의 사신은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고, 이에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법흥왕이 주재(主宰)하였지만 그도 귀족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이차돈의 순교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창건 명령을 전한 것이므로, 법흥왕의 사신에 대한 비난은 왕의 신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왕의 사신을 도왔던 이차돈이 처형되고 왕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이즈음은 아직 왕호(王號)를 매금(寐錦)이라 칭하던 시절로서, 왕이 명실공히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은 현재의 사료상으로는 대왕(大王)을 칭하기 시작했던 갑인년(甲寅年, 534년) 이후가 된다.
왕 자신의 사신은 국가의 불교정책과 직결된다. 순교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던 법흥왕의 의욕은 일단 꺾였지만, 왕권의 신장에 따라 그것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간과할 때 을묘년의 흥륜사 중창(重創)을 실질적 공인의 연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미년은 왕이 불교에 대한 태도를 천명한 해이며, 이해에 조정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제외하더라도 정미년은 신라불교사에서 하나의 기원이 되는 해이며, 『삼국사기』에서 이해에 “처음 불법을 행했다”(肇行佛法)고 한 기사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3. 진흥왕대의 불교
진흥왕(540∼76년)의 불교정책은 정치와 불교 양면을 관장하여 집권적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남조, 특히 양무제(梁武帝)의 정책을 본받은 바가 많다. 그는 재위중 몇 번의 사신을 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은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을 순수(巡狩)할 때 승려를 대동하였는데, ‘사문도인 법장 혜인’(沙門道人法藏慧忍)이 진흥왕순수비문에 보인다. 수행(隨行)한 신하들 가운데 이들 승려의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할 때에는 새로 정복한 곳의 지역민으로부터 충성을 약속 받고 왕과 신하는 이들을 보살필 것을 맹세하는데, 여기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회맹(會盟)의 정신이 불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제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의 새로운 지도이념이 되어 가는 것이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하여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였고, 국가적인 불교의식이 이곳에서 베풀어짐으로써 황룡사는 신라사회의 정신적 중추가 되었다.
진흥왕은 전몰사졸(戰沒士卒)을 위하여 팔관회를 베풀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팔관회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신도(在家信徒)가 경전에 입각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수행의 하나로서 남조에서 유행·발전한 것이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유학갔던 승려가 속속 돌아왔다. 이들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진신(眞身)을 모시게 되어 신앙면에서 차원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고, 함께 가지고 온 경전은 교학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진(陳)나라에서 명관(明觀)을 시켜 경론 1,700여 권을 보내오게 됨으로써(565년) 신라는 한역경전(漢譯經典)의 대다수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수용의 단계를 지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어나갔고 또한 자국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이 시기의 승려 중에는 학덕면에서 중국의 고승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그들 중 『고승전』에 실린 이가 몇 있다.
4. 고승과 국가
1) 원광
원광(圓光, 541∼630년 추정)이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승려의 신분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섭취하기 위한 유학생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황제의 칙허를 얻어 승려가 된 그는 양무제의 사우(師友) 장엄사(莊嚴寺) 승민(僧旻)의 제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속고승전』 혜민전(慧旻傳)에 의하면 “혜민이 15세(587년) 때 회향사의 신라 광법사에게서 성(실)론을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 상으로 보아 ‘광법사’는 원광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이름을 날리던 원광은 수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가서(589년)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연구하고, 본국의 요청에 의해 600년(진평왕 22)에 조빙사(朝聘使) 2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진평왕 30년,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쓰라고 하자 원광은 그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신라의 신민임을 이유로 명령을 받들었다. 세속법과 불법을 이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원광의 고민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인 호국활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세속오계를 가르칠 때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다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살생유택(殺生有擇)과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불법의 길이 따로 있었다. 진평왕 35년에 황룡사에서 1백 명의 승려를 모시는 법회인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을 때, 원광은 거기서 경전을 강의하였다. 백고좌회는 『인왕경』 호국품(護國品)에 근거한 것인데, 이 경전을 강의함으로써 나라를 지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수·당대 이후의 호국, 즉 밀교적 주술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법력(法力)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남조불교의 한 특징으로서, 『인왕경』은 호국경전사상(護國經典史上) 정법치국사상(正法治國思想)과 밀교적 치국(治國)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왕은 원광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참회하였다. 계율과 참회의 병행은 중국적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의 특징으로서, 그 목적은 계행(戒行)에 있다기보다 참회에 의한 죄의 소멸과 현세에서 복을 받는 데 있다. 계를 받은 왕, 즉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왕이 원광에게 의식을 손수 마련해드렸다는 일화는 과장이나 꾸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국가와 국왕에 대한 원광의 태도는 양무제 때의 숭불 태도와 흡사한 것으로서, 원광의 초기 유학시절의 견문은 귀국 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저서에는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와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가 있다.
2) 안홍
안함(安含)으로도 알려진 안홍(安弘, 579∼640년 추정)은 601년(진평왕 23)에 수나라에 유학가서 5년 만에 호승(胡僧)과 함께 돌아왔다. 안홍의 저서에는 참서(讖書)라고 하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한 권이 있다. 『해동고승전』에 이 책의 일부가 실려 있지만, 원문과 후대의 해석문이 섞여 있어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원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머지않아 이웃나라로부터 침공을 받을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중국에 적극적인 외교를 펼칠 것, 그리고 비록 이러한 시련이 있더라도 희망찬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까닭은 선덕왕이 도리천녀(悼利天女)이므로 신라는 곧 불국토(佛國土)로서 불력(佛力)의 가피(加被)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안홍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구한(九韓)의 침공을 막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유학시절에 보았던 수나라 서울의 국찰(國刹) 대흥선사탑(大興善寺塔)의 건립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隋文帝)는 새 왕조의 무궁한 발전을 빌고 아홉 오랑캐(九服)가 평정되었음을 스스로 칭송하는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당시 수나라에는 천하통일의 당위성을 논하는 참서가 유행하였다. 즉 수문제는 사천왕(四天王)의 보살핌과 도리천 덕분에 천자가 되었다고 하는 불국토설 등이 그 내용인데, 안홍은 이러한 견문을 그대로 신라에 원용하였다. 신라 불국토설은 자장(慈藏)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지만, 자장의 이 사상은 안홍의 그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9층탑 건립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그뒤 통일이 되자 이 모든 것을 예언했던 안홍과 그의 참서가 새삼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비록 불교계측의 예언이기는 하지만, 신라인은 자신들의 나라가 불국토이기 때문에 외적방어의 차원을 넘어 성역(聖域)의 보전, 더 나아가 신라를 중심으로 욕계(欲界)의 인간세상을 이룩하고자 한 것이다. 수문제 때의 참문(讖文)은 이미 성취된 것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지만, 신라의 불국토설은 미래상의 제시로서 이것은 전적으로 안홍의 공적이다.
3) 자장
자장의 아버지 소판(蘇判, 제3관등) 무림(武林)은 진덕왕대(647∼54년)까지도 국사(國事)를 논의하였던 진골귀족이다. 자장은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재상의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마다하고 출가하였다. 638년(선덕왕 7) 당나라에 유학 갔을 때 자장의 나이는 25세를 조금 지난 때였다. 당나라에 갔을 때나 귀국할 때 당태종(唐太宗)으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자장이 유학한 데에는 국가적으로 대당(對唐) 외교사절의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자장은 먼저 법상(法常)을 찾아뵙고 보살계를 받았으며 종남산(終南山)에서 3년 간 수도하였다. 당시 종남산에는 중국 계율종의 종주(宗主)인 도선(道宣)이 강의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자장이 도선과 상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으나 자장의 저서에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 磨私記)·『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등이 있다는 사실로 보아 도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자장과 도선과의 법맥(法脈)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데, 그것은 자장전에 나오는 설화를 그대로 믿어 자장의 나이가 도선보다 훨씬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장은 귀국하여(643년) 궁중에서 『섭대승론』을 강의하였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어 승려의 규범을 바로잡고, 지방사찰을 다니며 계율을 지키도록 일깨워주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나라사람으로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자가 10명 중 8,9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계율존숭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승단(僧團)에는 출가득도나 의식에 있어 일정한 규범이 필요하였고, 동시에 그러한 계율이 만들어진 의의를 알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가나 사회적으로는 계율을 일상적인 행동규범, 즉 예나 율로 인식하여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자 도덕가인 승려에게서 그러한 지침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다. 원광에게 세속의 계율을 얻어듣고자 한 것도 그러한 예이지만,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아 많은 백성이 계를 받도록 한 것도 예속(禮俗)의 진작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자장의 저서에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와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가 있는 것을 볼 때, 정토교에 대한 관심 또한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을 화엄사상가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후대에 점차 나타나고 있는데, 어떻든 그를 어느 한 종파로 국한시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교종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그의 사회적 활동면을 함께 보면 ‘율사’(律師)라는 전통적 호칭은 타당하다.
자장은 불국토인 신라에서 문수보살을 친히 보고자 태백산·오대산 등지를 순례하였다. 이것은 감통(感通)을 중시하는 자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인데, 절대적인 신앙에 귀의함이 없이는 계를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도선의 태도와 서로 통한다. 자장은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았다. 그리고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고 당나라 연호를 쓰도록 건의하는 등 구체적인 사대(事大)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5. 불교의 대중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전도승을 후원했던 모례를 모례장자(毛禮長者)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처음 포교의 주요 대상은 지방유력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왕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선진문물의 수입이라는 점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민중에게도 불교는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불교의 평등주의 이념, 구원(救援)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피지배계급의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다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나라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고등종교에 의해 공통된 도덕률을 가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것이므로 계율 등 일부 교설(敎說)의 전파에는 적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광이 대중포교를 위해 점찰법회를 연 것은 길흉을 점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참회를 시킴으로써 중생의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무한한 공덕을 갖춘 여래장(如來藏)임을 깨달아 지장보살의 원력(願力)에 의해 죄를 소멸시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진평왕대(579∼632년)에 안흥사의 비구니 지혜(智惠)도 점찰법회를 열었다. 지장보살은 땅속에 감추어진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 교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혜가 지은 불전(佛殿)의 지장보살상은 선도성모(仙桃聖母), 즉 산신의 신사(神祠) 밑에서 캐낸 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불교의 보살과 재래신앙의 산신이 이렇게 맺어짐으로써 지장보살이 어떻게 친근하고 쉽게 이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설화이다.
그렇지만 원광의 대중법회는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는 측면이었지 민중 속에 살면서 그들과 같은 길을 가는 보살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국가의 여망(輿望)을 받았던 고승들이 민중을 멀리하였던 것은 자장의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사(居士)가 자장을 보고자 하였으나 문전에서 쫓겨나자, 그 거사는 “아상(我相)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사자보좌(獅子寶座)를 타고 가버렸다. 이 거사는 문수보살의 진신이었다.
진평왕대의 승려 혜숙(惠宿)은 국선(國仙) 구참공(瞿○公)이 사냥을 즐기는 것을 나무랐으며, 왕의 부름도 거절하였다.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 하녀의 아들이었는데, 천진공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이름 없는 절에서 살았던 혜공은 거리와 골목을 누비면서 민중교화에 힘썼다. 대안(大安)은 언제나 시장바닥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외쳤다. 왕이 대안으로 하여금 흐트러진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꿰어맞추라고 궁궐로 불렀으나, 그는 이것을 시장에 벌여놓고 정리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교화에 힘을 쓴 승려들은 권력을 멀리하였고, 쉬운 말로 불교의 뜻을 풀이해주었으며, 간단한 의식(儀式)을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몸소 모범을 보였다.
4. 신라불교의 전래
1>신라 왕실의 호국 불교
법흥왕에 이은 진흥왕은 왕권의 확립 및 신장과 국토 확장에 힘쓰면서 불교의 국교화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 예로
① 법흥왕이 착공했던 홍륜사 완성(554년)
② 사람들의 출가 공인(544년)
③ 고구려 침략 때 귀화해 온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삼음(551)
④ 부족적 축제를 팔관회의 형식으로 계승 발전
⑤ 승관제를 확립하여 불교의 국교화,제도화에 주력
⑥ 황룡사의 건립으로 용으로 상징되는 신라 왕권의 신장을 반영하며 왕권 신성화의 도구 구실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정신적인 면을 통합하여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체가 되게 하는데 기여한 면도 없지 않다.
삼국 통일에 이바지 한 대표적인 승려로서 원광이 있다. 그는 불교적인 여러 측면에서 보았을때 큰 획을 긋고 간 사람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도 신라의 지배 권력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승려 귀족으로서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원광뿐만 아니라 자장에게서도 나타난다. 자장의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원광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우리들이 원광이라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세속5계] 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나라(임금)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고, 세째, 벗은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살생을 가려서 하라. 의 내용이다. 언뜻 보면 둘째, 세째 계명이 유교적인 사고인것 같으나,이는 육방례경(六方禮經)과 같은 초기 경전에도 나오는 세속인에 대한 불교의 핵심적인 교훈이다. 그리고 다섯째 계명은 자연숭배의 샤머니즘적 의식이 불교와 혼용된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첫째, 넷째 계명은 불교적인 윤리와 무관한 왕실 옹호의 윤리이며, 당시 귀족들의 요구에 규합하는 윤리이다. 이러한 원광의 임전무퇴의 계율이 고구려, 백제와의 싸움에 큰 힘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힘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도 왕실 호국불교를 이끈 한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자장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박는 결정적인 시기에 이와 같이 신라 땅이 결코 불교와 무관한 낯선 땅이 아니라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불교에 귀의하게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자장이었다. 그는 선덕 여왕 때 활약한 승려로서 원광에 이어 신라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층 왕실과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엄격한 계율과 의식을 갖추고 대국통으로서 전국의 승려들을 감찰하고 포살, 자자의 의식을 시행했으나, 거대한 절이나 탑등을 건설하는데 민중을 동원하여 혹사시켰다. 그러니, 당연히 민중들도 그러한 귀족 불교의 위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당시 지배층의 억압과 전쟁과 노역의 시달림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결국 귀족의 편에 서서 그들의 민중에 대한 억압이나 수탈을 합리화 시켜 주던 자장은 더 이상 민중의 스승이 되지 못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불 불교는 계급적 권위를 타파하고 억압받는 민중에게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일깨우고자 했으나, 중국 불교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결국 왕권이나 신성화하고, 지배층을 위해 일하는 귀족 불교로 되어 민중을 무시하는 종교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렇듯 신라 불교가 귀족 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했지만, 세속민중과 살면서 자기의 삶과 진리를 중생에게 바치면서 진정한 불교를 실천하는 승려 - 혜숙, 혜공, 대안, 사복 - 들도 있었다.
2>신라 불교학의 발전-의상
의상은 원효와 함께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서 한국 화엄의 기초를 닦은 승려이다. 그는 학문을 대성함과 동시에 제자를 양성하고 대중 교화에 힘쓰며, 불교의 사회적 실천에도 힘쓴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사물은 차별될 수 없다는 평등 사상과, 상호 연관성을 중시 하는 - 홀로 존재 할 수 없다.-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에 고려의 화엄종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적 실천이 관음 신앙을 대중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토 및 동해 용왕 신앙과 결합시킨 의상의 민족적 관음 신앙에 힙 입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장의 문수 보살, 불국토 신앙이 사대주의적 요소로 인해 민중에게 외면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는 권력을 멀리하고 완고한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였고 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직접 요구하는 등 지행일치의 실천에 앞섰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3>신라의 통불교적 발전-원효
통일 신라 초기에 불교계에서 화려하게 활약을 한 사람 중 특히 원효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실천자였다.
삼국 통일 이후의 신라 불교학은 원효에 의해 불교 각 경전의 이론이 통합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통불교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원효는 [정토신앙] 을 대중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틀에 매이지 않는 생활로 대중속에 들어감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최대의 고승으로 자리잡았다. 원효의 정토 구원관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하고 귀족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하였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는 엄격한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보다는 정토를 지향하는 염원을 가지고 삶을 이어나갈 의지가 더욱 절실하였다. 이러한 원효의 노력으로 신라의 불교는 점차로 귀족 불교에서 민중 불교로 넘어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원효가 비록 지배 계급의 소유물이었던 귀족 불교를 타파하고 민중 불교로 이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의 제도적 왕권 불교에 대응하고 정토 실현을 위한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정할 수 있는 민중 불교 결사와 같은 조직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아미타불 타력 신앙에 의해 숙명적이고 체념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신앙으로 오도될 가능성을 남겼다.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신라 불교학으로서의 원효의 불교학은 중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의 저술은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불교의 존숭(尊嵩)을 받고, 그의 실천적 불교 대중화 운동은 일본의 불교 민중화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화엄학, 대현(大賢)등도 외국에 영향을 끼치는 데, 이는 신라 불교의 자주적인 발전과 대외적인 영향력을 반영한다.)
5. 통일 신라의 불교
신라불교의 타락과 선종의 수용
이 시기의 불교는 대규모의 사찰, 불상, 탑,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 보이고 왕실 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해 주었다. 그 대가로 승려들은 엄청난 땅과 노비를 기부 받았는데, 그러한 행위가 너무 심해져 한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신라 불교가 봉건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떨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신라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 내부의 권력 다툼이 생기는 한편 지방의 호족 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지방 호족의 성장과 함께,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깨달을 것을 주장하는 지방의 새로운 불교 종파로 선종이 성장해 왔다. 이 당시 9세기의 신라는 골품제가 신분체재의 모순을 드러내 봉건 체제가 점차 흔들리고 있었고, 지방의 호족세력이 사회 모순을 극복할 주체로 떠오르면서 선종은 그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선종은 직설적이고 간명한 방법과 평등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당시 귀족 불교인 교종이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지배자의 복을 비는 일만 일삼던 때에 비하여, 상당히 지방민중에게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선종도 하나의 착취자였던 호족의 이념적 기반에 불과 했다. 호족들에 의해 농민들은 땅을 잃어 유랑하였고 마침내, 그 착취자들에 대항하여 맞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도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산간에 은둔하며 참선에 전념하는 산중불교로 자리 잡는다.
신라 봉건 사회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귀족들 사이의 내분과 민중 봉기가 극에 달한 9세기에는 미륵 신앙과 도참사상이 민중들에게 크게 호응을 받았다. 미륵 신앙은 백제 말, 고창 지방 검단에 의해 일어났고 민중적인 실천 불교로써 민중속에 파고들기 쉬웠다. (( 그리고 삼국 시대에는 비록 왕실과 귀족층의 주도하에 전개되었으나 민중의 고난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여 개인적인 구원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인 구원, 민중 구제를 위한 집단적인 신앙이었다. 특히 진표의 미륵 신앙이 대표적이었는데, 그는 소외된 지방에서 - 신라의 중심지가 아니라 - 미륵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참고 : 5교 9산
신라불교는 열반종(무열왕때 보덕), 율종(선덕왕때 자장), 법성종(경덕왕때 진표율사), 화엄종(원효와 의상),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구산은 신라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왔는데 고려초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9산선문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지리산 실상사. 곡성군 죽곡동 동리산 태안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사굴사. 영월군 수주면의 사자산 흥녕사.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 창원군 상남면 봉림산 봉림사. 해주군 금산면 수미산 광조사 이다.
6. 고려의 불교
1. 왕실 호국불교
송악의 호족 세력이었던 왕건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 정권을 세우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시대는 시작된다. 건국기에 왕건은 동요하는 민심을 무마하고 지방 호족 세력을 회유하기 위해 일련의 회유 정책으로써 불교를 숭봉하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즉위 원년(918)에, 신라 봉건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연례행사로 치러졌던 왕실 주체의 호족불교 행사인 팔관회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조가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 [훈요십조]에 나타나듯이 - 훈요 십조의 제 1조에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은 것이므로 선 . 교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보내 분향 수도하게 할 지어다. 하며 불교 숭봉을 표방하면서도 동시에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승려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종파가 서로 사찰을 뺏는 다툼을 벌일 것이니, 이를 엄금할 지어다. 라고 하여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의 안녕과 복을 빌어 주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고려 왕권의 기만적 불교 통제 정책아래 소외되었고, 왕권의 비호 아래 날이 갈 수록 불교는 점점 썩기 시작했다.
불교의 부패는 광종 때 가장 혹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왕실의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 호족 세력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선종을 버리고, 화엄종을 선택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시책으로 과거 제도를 실시하고 특히 승과를 개설, 시행하였다. 한편 광종은 승과의 선발 기준으로 균여의 화엄학을 채택할 정도로 균여를 숭봉하였다. 그리고 균여 또한 화엄종의 남악파, 북악파의 갈등을 해소하여 통합된 지배이념으로써 광종의 왕권 강화 정책에 이바지하였다. 이렇게 전제 왕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불교의 대중화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그가 지은 [보현 십원가]를 보면 잘 나타나듯이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렸다. 이는 원효가 그의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민중속에 퍼뜨린 것과 같이 균여에 의해 불교 대중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매우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귀족 불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한계는 벗을 수 없다.
그러던 중 성종 때의 정치 사상가 최승로는 [시무책] 을 통해 왕권의 불교 비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권력의 후광을 믿고 횡포를 부리던 귀족 불교 승려들을 규탄하였으며, 그 대신 현실주의적인 유교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였다. 성종은 그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으나, 그것도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다.
현종에 이르러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가 다시 부활되었고 황룡사9층탑을 재수리하고 고려대장경이 조판되었다. 이것은 당시 거란 침략에 맞서 호국불교 행사를 통해 국민단결을 꾀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기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2. 천태종의 개창
화엄종은 신라 의상의 화엄종을 계승하여 고려 역대 왕권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귀족 불교로 발전했다. 그리고 법상종은 유가종이라고도 하는데 대현(大賢)등의 신라 유가종을 계승한 것으로 왕권과 밀착하여 발전하였다. 화엄종과 법상종이 왕권과 결탁하여 위세를 떨치던 이 시기에 선종은 그에 비해 9산 선문으로 분열되어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까지 중앙 집권화가 완성됨으로써 서서히 9산 선종도 왕권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종과 선종이 서로 대립 분열하고 있는 상황에서 왕권은 각 종파 불교의 융화와 통일된 지배이념을 요구하게 되었다.
문종의 왕자로서 11세기에 승려가 된 의천은 그러한 왕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이것은 왕자를 츨가 시켜 승려 지도자로 앉힘으로써 불교 세력을 적당히 통합하고 왕권의 통제 아래 두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1085년 중국(송)에 건너가 새로운 통합의 지도이념으로 천태학을 배우고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그리고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화와 교종과 선종의 융화를 꾀하여 통일적 지배이념을 요구하는 왕권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원효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민중불교 보다는 철저한 왕실 불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이러한 왜곡된 반민중적 불교의 전통은 조선을 거쳐 해방 후에 거치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나라의 주체인 민중을 외면하고 현실에 등 돌리고 참선을 일삼는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3. 무신정권 아래에서의 불교
이 시기에 불교는 왕실만을 위해 존재하였고, 왕실에 의해 대표적인 착취자로 등장하면서, 왕실과 함께 타락했다. 특히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승려들과 함께 방탕하게 놀음과 잔치로 세월을 보내고, 사찰을 곳곳에 세워 향락 장소로 이용하곤 했다. 이러한 왕실의 부패와 함께 민생고가 날로 가중되어 가고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나가기 시작할 때 승려들은 약해진 왕권을 위해 무신정권에 항변하여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권력에 빌붙어 또 하나의 착취자로 군림해 오던 불교 대사찰들도 민중들의 새로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무신정권의 옹호를 받으며 선종은 성장해 나갔고, 선종은 선. 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교종을 포용함으로써 불교계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지눌(知訥;1158-1210)과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지눌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과 밀착 해 온 귀족 불교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였다. 이 결사는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 유교, 도교에까지 문호를 개방하였고 세속적 명리를 추구해온 불교의 자기 비판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농민들이 지배자의 착취에 못 이겨 곳곳에서 봉기하고 지방하층의 승려까지 이에 참여하는 상황에서, 그가 결성한 결사는 도탄에 빠진 현실을 무시하고 오직 내적 수행의 길에만 정진하고자 하여, 현실 도피적인 지식층의 결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 그러나 지눌은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청정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을 지향하였고, 무신정권에 자력이든 타력이든 이용되긴 했지만, 선교융합의 창조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고려 불교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지눌과 혜심에 의한 간화선(看話禪), 그 외에 지눌에 의한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 節要幷入私記), 그리고 선(禪)문학을 집대성한 혜심의 선문염송(禪門念頌)은 불교강원의 교과목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불교의 주류가 선과 교를 병행하면서, `마음을 찾는 내적 수양에 치중하고, 사회 참여보다는 은둔 수도를 지향하는 것이 약간은 그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천태종의 요세(了世;1163-1245)는 지눌과 같은 시기에 백련결사를 결성하여 불교계 내부의 분열대립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중앙 집권력에 결탁하지 않고 오직 지방민중의 기반 위에서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백련결사의 성장은 이내 지배계층의 눈에 띄어 요세(了世)도 말년에 중앙 지배 권력층의 회유책에 휘말려 끝내 부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백련결사는 지눌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불교의 중요한 신앙결사로서 자리잡았고 불교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했다.
4. 민중불교 항쟁과 귀족불교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중 불교의 항쟁으로, 충주성과 개경에서의 노비와 승려들의 항쟁이 있었고, 특히 승려 김윤후의 투쟁을 들 수 있다. 그는 명리와 계율을 뛰어 넘어 민중을 구제하는 민중 불교적 입장에 서서, 몽고침략군 철수에 앞장섰다. 그에 비해 이 시기의 귀족 불교는 대장경 조판과 호국기도등의 기복불사로 몽고 침략에 대처하였는데 이 때 새겨진 대장경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팔만 대장경 인 것이다.
공민왕에 이르러서도 불교 숭상 정책이 계속되는데, 초기에 보우(普愚1301-1382)를 왕사로 추대했다. 보우는 현재 선종의 종조로 받아들여지는 승려로서 당시 대립. 분열하고 있던 선종 각파의 통합을 꾀하였다. 그는 승직임명권을 차지하여 고려 불교 전체를 장악,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구산선(九山禪)을 통합하고 임제선 계승하였으며 많은 시와 노래를 제작했다. 그리고 보우도 당시의 정치와 불교의 개혁을 절감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5. 고려의 미륵신앙
고려의 미륵 신앙은 건국 초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차원에서 왕실의 지원으로 미륵불이 많이 만들어 졌던 옛 후백제 땅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고려의 어수선한 정세와 함께 말세 의식과 관련되어 미륵불이 땅 속에서 솟아 나오기를 기원하는 하체 매몰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것은 대부분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실적인 생활상 요구에 따른 신앙대상이 되었다. 득남(得男)을 기원하거나 자연 재해, 전쟁 따위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등의 기원으로 밀교 신앙은 전개되었다. 그리고 운주골의 천불천탑은 아직 수수께끼적 요소가 많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미륵 신앙을 배경으로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민중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채상식, 고려시대 불교의 전개와 성격 {한국사: 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1
1. 중세불교의 이해방향
“한국사에서 불교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실마리를 풀어간다는 것은 막막하기 그지없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에 서지 못하면 정확한 답을 내리기란 대단히 힘들 수밖에 없다. 종래에 불교사를 이해하는 분위기는 크게 양분되어 있었고, 그 수준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가령 불교학 방면에서는 불교라는 종교 그 자체에 매몰되다시피하여 대체로 불교를 옹호하려는 방향으로 치닫기 마련이었고, 반면에 역사학에서는 불교를 일반사의 범주에 넣지 않고 특수사로 취급하여 전근대사회, 그것도 고대사회에서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나 신앙으로서 가장 꽃을 피운 것으로서만 취급할 뿐 그 실체에 대한 정확한 접근을 기피해온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고서 불교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사는 크게 보면 사상사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불교사의 인식태도는 사상사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종래에 사상사 연구를 표방하면서 발표된 글들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사상 그 자체를 밝히고자 하는 노력, 또 하나는 사상을 일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 아래서 배태된 산물이나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양자의 경우 어느 한쪽의 입장만 극단적으로 고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방법론상 여러 가지 문제점이나 한계가 지적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물론 심화된 사상체계와 세계관을 표방한 공시성·보편성·독창성을 갖는 사상을 과거에 존재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사상사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역사의 무대(場)가 설정되어 역사인식의 문제가 전제될 때는 특정 사상이 어떻게 수용, 이해될 수 있었으며 또 역사발전의 방향에(실천면·운동면) 어떠한 성격을 지니면서 기여하였는가, 또 그 기능은 어떠하였는가라는 제측면이 사상(捨象)되면 사상사로서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가령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나 사상가라고 하더라도 이를 수용, 이해할 수 있는 집단이나 사회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역사의 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대체로 사회적 여건이나 사회공통의 가치, 집단의 목적, 사회적 기능면을 중시하면서 그 기준을 인간들의 생활상과 연결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상 자체를 사회의 산물로 인식하면서도 분비물로 표현할 정도로 몰가치적으로 가볍게 취급한다든가, 또는 특정 사상이나 신앙과 연결된 인간집단의 모습과 사회상을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부분)을 이룬다는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은 재고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경향에서 지적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시각상의 오류는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여부는 차지하고라도 사상 그 자체를 역사구조의 하나의 단면으로만 파악하려는 태도이다. 적어도 사상은 역사상의 하나의 단면이면서 동시에 전체상이라는 명제를 간과한 것이다. 심지어 사상(신앙)과 관련된 인간집단을 추적한다고 표방하면서도 특정 신분계층만을 개별화시켜 정치·사회적 이해관계에만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기 일쑤였다.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뚜렷한 대안을 갖기는 힘드나, 다만 방법론상 양자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이를 보완하는 선에서 사상사에 접근하고 또 사상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특정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함과 동시에 각 시대마다 어떠한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사상체계를 수용,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응용·발전시켜 나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상이나 신앙이 전래되었을 때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 정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래·수용하는 단계와 나름대로 해석·평가하는 단계, 그리고 재해석하여 자기의 것으로 응용하는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어떠한 내용이 특정 시기에 강조되고 유행하였는지, 또 사회전반의 발전과정 속에서 어떠한 기능과 작용을 하였는지, 아울러 새로운 사상이 정착되면서 기존의 사상과는 어떠한 상호 대응방식이 야기되었는지 등의 문제를 전체 역사상과 관련시켜서 유기적·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상 자체를 다루더라도 철학면(교리면)으로만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사상과 연계되어 있는 신앙이나 의례(의식), 이들을 신봉하고 따르는 각 계층의 존재양태라든가 사회발전의 문제까지도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특정 사상의 의미를 역사의 장에서 찾으려면, 사상은 전 사회구조 속에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면서 전체상을 투영할 수 있는, 즉 다른 구조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전제하에서 문제를 검토하고 인식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중세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향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때 무엇보다도 불교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종파의 성립은 단순하게 종파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볼 성질은 아니다. 종파가 성립된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발전의 단계를 말해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 전반의 문제를 해명하는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은 무엇인가. 종파성립은 특정 사상이 교학면(哲學面, 體)·의식면(儀禮面, 相)·신앙면(實踐面, 用)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매체, 즉 사원(집회처)을 중심으로 조직적·체계적으로 행해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사상이라고 할 때 세계성·보편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며, 종파성립의 산물로 조직된 승정체제(교단)의 확립을 무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또한 교학면·의식면·신앙면 등을 기반으로 한 일정한 체계를 갖추어가는 주체가 특정 계층이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독점(전유)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때 종파의 성립이란 결국은 특정한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계층적으로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불교가 발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역사발전의 단계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사에서 어느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까. 대체로 신라통일기 전후에 나타나는 제양상을 살펴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즉 교학·의식체계를 단순히 수용하는 단계에서 이해하고, 평가·재해석하는 단계로의 전환, 신앙을 왕실·귀족들만이 전유하는 단계에서 일반민들도 함께 공유하는 단계로의 전환, 또한 왕도(王都) 중심에서 지방사회로 확산되어가는 과정인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가 종파성립의 단초를 연 단계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종파성립은 통일전쟁기라는 당시 정치·경제·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종파성립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지표를 들면 여러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불교대중화 문제라고 생각한다. 불교대중화 문제는 사회계층적인 측면과 지역성을 포괄한 개념으로서, 다음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두고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지배층이 그들의 권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민(民)을 파악하는 방식과 민에 대한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을 매개로 한 불교대중화의 이면에는 일반 민들이 성장함으로써 그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를 지배층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단계와 현실이 개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교계의 전반적인 현황 즉 교학 체계의 양상, 신앙과 의식의 성격, 주도 승려층의 정치·사회적 성향 등도 유기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령 불교대중화 문제는 특정 몇몇 승려들의 활약상과 관련된 기념비적 소산으로만 파악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의 경우, 그가 남긴 저술을 통해 알다시피 통일적인 교리체계를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대중화의 선봉에 서서 활약한 인물로서 그의 개인적인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원효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거의 200여 년 전에 수용된 불교가 중국으로 유학했던 원광·자장·의상 등의 승려들이 귀국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교학불교로서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고,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과 병행하여 불교대중화를 통해 일반 민들도 신앙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한 혜공·혜숙·대안 등의 교화승들이 출현하고 있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학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문제와 불교대중화 문제는 별개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불교가 전래, 수용된 이래의 전반적인 발전양상과 유기적으로 관련된 현상으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교대중화를 기반으로 한 종파불교 즉 중세불교가 성립되어 가는 시기는 언제일까. 대체로 신라 중고기의 진평왕대를 기점으로 하여 서서히 그 단초를 열어가기 시작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신라 중대에는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파불교가 더욱 세련되고 한 단계 성숙된 형태로서 그 빛을 발한 시기는 물론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종파불교의 성립단계를 중세불교로 인식할 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는 신라 하대에 전래, 수용된 선사상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세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래에 불교학 방면의 연구자들은 선사상의 전래가 갖는 역사상의 의미를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선사상이 변혁사상으로서 신라 말의 사회변동기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음을 밝힌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역사학 방면에서 이룩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미주 4]. 이는 나말려초를 고대에서 중세사회로의 전환기로 파악한 논의에 힘입어 거의 개설화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되는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선사상 자체를 변혁사상으로 파악한 점과 또 하나 이를 수용한 주체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사상 수용의 주체를 지방호족과 6두품족으로 파악하면서 탈골품제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당시 사회변동을 주도하면서 수용·표방한 선사상은 변혁사상이라는 견해인데, 과연 지방호족·6두품족을 변혁주체로 또 선사상을 변혁사상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이 견해를 따른다면 이들과 일반 민들과의 관련은 어떠했으며, 또 선사상은 일반 민들의 신앙을 어떠한 방향에서 포용했을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필자가 몇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점은,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사회변동기라고 전제할 때 선사상을 변혁사상의 주된 지표로 파악한 점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또한 선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전래·수용된 시기에 따라 그 내용과 성격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한편으로 지방호족으로 불린 세력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범주로 취급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세력기반과 성격은 다양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각각 수용하고 신봉한 사상이나 신앙은 반드시 선사상만은 아니지 않았는가라는 의문 등과도 관련될 것이다.
또 하나는 나말려초기를 변동기로 파악하더라도 사회전반의 변혁을 수반할 정도로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의문은 1960년대 이후 일제시기에 식민지 역사학에서 제기되었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성과에 의해 왕조교체기를 사회전반의 변동기로 강조한 경향이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가령 나말려초기는 호족·선사상, 여말선초기는 사대부·성리학수용이라는 등식으로 대비시킨 견해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결론적으로 말해 첫째, 신라 말의 사상사의 흐름이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사상 일변도로만 파악하고 있는 현 학계에 대한 반성의 의미와, 둘째, 당시 선사상이 보수적인 교학불교의 경향에 의해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메워준 역할을 수행한 점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선사상과 기존 교학불교와의 관계를 대립적으로만 파악하려는 견해에 대한 반성의 의미, 셋째, 사상 자체의 문제로만 한정짓는다면 선사상의 전래·수용이 가져다준 불교계의 파장은 컸다고 할 수 있으나 사상(교학·신앙·의례)의 사회적 기능면을 기준으로 할 때 선사상의 전래·수용에 따른 선종의 성립보다는 진평왕대 이후의 불교대중화를 단초로 하여 신라통일기에 종파불교가 수립되는 과정을 더욱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 넷째, 선사상뿐 아니라 선사상과 함께 수용되었던 사상과 신앙 등의 선진문화가 중세사회 내부의 발전과정에 끼친 영향 등을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기한 것이다.
다음은 중세불교의 중요한 지표로 이해한 불교대중화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한 봉건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봉건지배층이 서서히 보수화됨으로써 종파불교는 이미 성장한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보수화된다는 것은 특정한 지배계층과 집단이 장악하고 있는 종파가 지방토호층이나 피지배계층인 일반 민의 신앙과 별개로 떨어져나간다는 것이다. 이는 민의 입장을 수용하지 못하는 단계이며, 서울과 지방사회, 지배층과 일반 민과의 간격이 벌어지는 단계이다. 이러한 단계에 접어들면 새로운 사조,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여 새로운 단계로 묶어주는, 그럼으로써 다시 합(合)의 형태로 돌아가고, 합(合)의 형태에서 다시 보수화되어가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역사의 발전과정 속에서 변화해나가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설명한다면 가령 신라 말·고려 중기·고려 말의 불교가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발전의 방향에 발맞추어 새로운 사조인 선사상을 수용하기도 하고 또 불교계 자체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불교가 스스로 자기모순을 치유할 수 있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렸을 때인 고려 말에는 불교의 역할이 성리학(주자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신라 말에 진골귀족을 비롯한 지배층은 역사발전의 방향을 몰각하고 대단히 사치화되었다. 이러한 점은 불교 수용 이후의 산물인 석탑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7세기 말∼8세기 초의 대표적인 탑으로서 경주 감은사지탑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은 규모도 크고 균형미도 갖추고 있다. 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석가탑처럼 정형미과 균형미를 갖춘 탑으로 발달되다가, 9∼10세기가 되면 탑신에다가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넣는 등 화려한 조각 일색의 탑으로 변화해간다. 바로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탑의 변화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한 가지 든다면 13세기 말에서 14세기에 고려의 왕실, 권문귀족들이 금은으로 화려하게 불경을 베끼고 또 여러 형태의 관음보살상을 주조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보수화된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고수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민들의 신앙은 교리적으로 체계가 없이 신비화되었고 원래의 신앙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져갔던 것이다. 불교계 자체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성공했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극대화되었지만, 극복하려는 노력이 미진했거나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때에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를 염두에 두고 한국 중세불교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주목되는 바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교사의 한 단면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러 현상 속에서, 즉 전체 사회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불교사를 특수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반사의 범주에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입장에서 불교사를 인식할 때 구체적인 지표는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그 잣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표를 가지고 각 시대별·인물별로 불교대중화의 문제를 어떤 각도에서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 실천하고 있었는가를 정리해간다면 불교의 모습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고려 전기 불교계의 재편과 추이
신라 하대에는 정치·사회적 변동과 관련하여 사상적 측면, 특히 불교 방면에서도 그 전환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신라 중대 이래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까지도 포괄하면서 왕실과 진골귀족층에 의해 체제이념으로 받아들여진 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신인종(神印宗) 등 교종 계통의 종파세력이 8∼9세기에 사상적으로 차츰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사회적 기반을 상실함에 따라 불교대중화 과정에서 피지배층에까지 확산된미타·미륵신앙 등의 정토신앙(淨土信仰)이 특정 종파와의 관련없이 지방사회의 토착세력과 농민·천민층을 중심으로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신앙결사(信仰結社)라든가 향도조직(香徒組織), 그리고 지방토호층이 주축이 되어 조성한 미륵불(彌勒佛)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신라 하대의 불교계의 변동양상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벌어진 사회적 간격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며, 이로 인해 야기된 사상적·신앙적 공백을 새로운 사조로서 전래된 선사상이 메워주었던 것이다. 선사상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신라왕실의 왕권강화책과 관련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지만, 신라 말에는 차츰 지방호족이 지방사회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게 되자, 선사상은 이들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심지어 선사상에 바탕한 일부 선문(禪門)은 그들이 소재하고 있던 지방사회를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 장악함으로써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성립된 이후 집권체제를 구축하면서 사상적 측면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개편대상은 지방호족과 결합하고 있었던 선문세력이었다.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대단히 숭상하여 각 종파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접촉하였으며, 특히 선종 승려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후삼국의 통일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건국 이후에도 왕권강화를 위하여 개경의 10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사원을 건립하였다. 왕건의 이러한 불교정책은 훈요10조로 나타나고 있지만 난립된 교단을 정비하고 조직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불교 교단에 대한 정비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왕은 광종이다. 그는 승과(僧科)와 승계(僧階)제도를 마련하고, 국가에서 승려와 교단을 일체 관리하는 기관으로 승록사(僧錄司)를 설치하였다. 또한 광종은 왕권강화를 시도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개편작업을 추진하였는데, 선종의 분권적 경향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면서, 선교일치론과 선정일치론(禪淨一致論)을 표방한 연수(延壽)의 법안종(法眼宗)을 중국에서 받아들였다. 당시 광종이 정토신앙을 선사상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한 연수의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점은 호족세력을 억누르고 일반 민을 기반으로 하여 왕권체계를 확립하려는 정치·사회적인 의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 중대 이래로 확고한 기반을 유지해온 교종에 대해서도 화엄종의 균여(均如)를 발탁하여 후삼국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균여가 신라 중대 이래의 화엄종과 법상종간의 대립을 ‘성상융화’(性相融會)라는 각도에서 극복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이념적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으며 아울러 실천신앙을 통해 왕실과 기층사회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하려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광종대에 천태학(天台學) 승려인 체관(諦觀)과 의통(義通) 등이 고려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태종이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고려불교의 전반적인 수준이 당시 중국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경종대의 반동정치에 의한 탄압과 성종이 최승로(崔承老)를 등용한 이후에는 유학이 집권적 귀족사회의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불교가 가졌던 체제이념으로서의 기능은 축소되고, 그 결과 각 종파별·신앙별로 특정 집단만을 대변하는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다. 특히 11세기 이후 현종·문종대를 지나면서 집권적 귀족사회의 골격을 갖추고 차츰 문벌귀족층이 형성됨에 따라 불교계도 이들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정은 문벌귀족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많은 원당을 건립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사원 자체를 장악한다든가, 심지어 그들의 자제들을 대대로 출가시켜 교단 자체를 움직일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른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문벌귀족과 결탁되어 있던 대표적인 교단은 화엄·법상종으로서 불교계의 중심교단이었다. 이들 세력은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무리하게 각종 교단의 장악을 시도하면서 불교계 전반의 부패를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 이들과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대다수의 농민·천민층은 특정 종파와는 괴리된 채 독자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한 조탑(造塔)·주종(鑄鐘)에 참여하기도 하고 팔관회·연등회 등과 같은 정토신앙과 전통신앙이 결합하고 있는 형태의 신앙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들에 의해 조성된 유물로서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 있는 예는 예천 개심사(開心寺)와 약목 정도사(淨兜寺) 석탑, 거제 북사(北寺)의 종을 들 수 있다. 물론 지방의 대사원을 중심으로 많은 농민층과 부곡민들이 긴박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이런 경우 이들이 예속된 사원과는 달리 독자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면서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을 때, 왕자 출신인 의천(義天, 1055∼1101년)이 출현하여 문벌귀족과 결탁된 불교세력에 대한 자각, 나아가 고려왕실의 가장 암적인 존재인 문벌체제에 대하여 왕권강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의천이 활약한 당시의 왕실과 문벌세력, 또 문벌 상호간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은 대단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단적으로 의천은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는 승려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숙종연간의 천태종 개창을 단순하게 새로운 종파가 하나 탄생한 것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진정벌을 둘러싼 왕실의 입장이라든가, 여진정벌을 명분으로 하여 문벌이 장악한 각 사원이 언제든지 군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승군(僧軍)·수원승도(隨院僧徒) 등을 공적인 군사조직인 항마군(降魔軍)으로 개편한 조처와 함께 이해한다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의천이 왕권강화에 부응하여 보인 일련의 노력은 광범위한 경전의 섭렵을 통한 속장경의 조판과 천태종의 개창으로 나타났으며, 내적으로는 원효의 계승을 자처하고, 대외적으로는 송에 유학하여 흡수한 다양한 불교를 통해서 이념적 기반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의천은 기존의 보수적 성향을 띤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면서 불교통합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그의 출신종파였던 화엄종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개혁방안은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와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의 방향으로 안목을 돌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사회의 불교현실과 기층사회의 신앙면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가지지 못한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당시의 사원들이 귀족의 원당으로서 재산도피나 정권싸움의 수단이 되었던 불교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는 정신세계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귀족불교를 끌어내려 대중화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비록 의천의 불교통합의 노력이 일시적으로 왕권을 바탕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기도 하였지만, 그의 사후 문벌체제가 강화되는 추세에 따라 각 종파의 분립, 대립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던 점은 당시의 사정을 잘 반영해준다. 심지어 의천의 문도들조차도 균여 이래의 기존 화엄종과 맥락을 달리하는 계통과 천태종 계통으로 분리되기도 하였다
화엄종·천태종 외에 이 당시 가장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개경 현화사(玄化寺)를 본찰로 한 법상종세력이었다. 법상종은 현종년간에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번성하였으나 뒤에 경원 이씨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즉 이자연(李子淵)의 아들인 덕소(德素)가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법상종 교단을 장악한 것이라든가, 이자겸(李資謙)의 아들인 의장(義莊)이 현화사 교단의 유력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문벌귀족과 결탁된 12세기의 불교사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정에서 와해된 선종 계통은[미주 22]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학일(學一, 1052∼1144년)과 사굴산문에서 탄연(坦然, 1070∼1159년), 지인(之印, 1102∼58년) 등과 또 거사인 이자현(李資玄, 1061∼1125년), 윤언이(尹彦 , ?∼1149년), 권적(權適, 1094∼1146년) 등이 출현하여 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들 중 이자현이 청평산에 들어가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이라 고치고 선법(禪法)을 선양한 사실은[미주 23] 차츰 선종의 세력이 부각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학일은 의천이 송에 유학하여 귀국한 뒤 천태종을 개창할 때 이에 참여하기를 권유받았으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선종 나름의 독자성을 지키려 하였다. 또 그는 1122년(인종 즉위년)에 왕사가 되고 1129년(인종 7) 이후에 운문사에 은퇴하여 이곳에 모여든 많은 승려들을 가르친 인물이다. 학일이 말년까지 운문사에 주석한 사실은 물론 운문사 일대가 고려 초 이래로 가지산문과 관련된 지역이지만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 지역이 가지산문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13세기 초반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야기되었던 대대적인 농민항쟁이 무신정권의 불교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미주 24]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일연(一然)의 출현과도 관련되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준다.
이와 같이 고려 중기에도 선사상이 부흥되고 또한 서서히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렀으나 당시 사회구조의 보수적인 추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당시 거사들의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점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있지만[미주 25], 무신란 이후 수선사 계통의 선종이 부각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방사회와 기층사회의 요구에 부응한 현상일까. 당시 사회에서 농장이 서서히 구축되는 현상과 이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하고 유이민이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일까.
이러한 측면도 어느 정도 관련이 되겠지만 중요한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 방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하나는 중국의 북송대에 이르러 선사상이 크게 발전한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 하나는 당시의 문벌귀족체제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 정치일선에서 밀려난 문신관료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반감이나 회의적인 성향에서 찾아야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북방 여진족이 금이라는 강대한 세력으로 결집되어 무력적으로 압력을 가해오는 국제정세 속에 북송으로서는 고려와의 연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문화적·사상적으로 선사상과 성리학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 사상계 조류가 고려에 전해져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가령 북송대 임제종(臨濟宗) 계통의 승려 계환(戒環)이 주석한 『능엄경』(楞嚴經)이 고려에 전해져 성행한 예라든가[미주 26], 예종대에 활약한 선승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의 경우를[미주 27] 통해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선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 사정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12세기 후반의 무신란 이후 불교계가 재편될 때 선종계가 부각되고, 수선사 계통이 중심교단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2세기 전반기에 선사상이 유행하게 된 저변에는 의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문벌체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은 당시 선사상에 심취한 부류들의 은둔적이고 개별분산적인 성향과 일반 민들이 신봉하고 있던 정토신앙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는 12세기 말, 13세기 초반에 결성되는 신앙결사의 단계에 가서야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생각한다.
3. 고려 후기 불교사의 전개와 신앙결사
신앙결사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 내용상·성격상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4세기 말에 동진의 혜원(慧遠, 334∼416년)이 중심이 되어 백련사를 결성한 것을 신앙결사의 시초로 본다. 따라서 이후 혜원의 백련결사를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신앙결사로 파악하여 이의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 관념적인 단계에 머문 경우가 많았으며, 이에 비해 사회계층적으로 일반 민들을 포용하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거나, 아니면 일반 민들이 주체가 되었던 예는 드물었다.
신앙결사는 종파불교 성립 이후에 전 사회계층이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로 지역적으로 지방사회에까지 불교가 확산되어가는 추세에 따라, 지방사회의 토호세력, 독서층과 그 이하의 신분층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종의 신앙공동체까지도 넓은 의미의 신앙결사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8∼9세기 이래 종파불교 성립의 산물로서 불교대중화가 계층적으로, 지역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주로 지방의 소규모 사원을 주근거지로 하여 결성된 향도조직은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향도조직은 단순한 신앙공동체에서 출발하였으나 지방사회의 지역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신앙결사는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거나 아니면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신앙공동체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러한 양면적인 양태는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기도 하지만 사회변혁기에는 변증법적으로 합일되어 운동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개념으로 신앙결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앙결사는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앙결사와 결사운동은 엄밀히 말한다면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개념이다.
신앙결사운동 조직화과정의 특징은 중앙집중적인 교단체제에 대해 개별적·독자적인 형태로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또 그 주도세력 및 구성원은 주로 신앙상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개인적 차원에서 참여했으며, 대체로 지방의 중간신분층과 독서층, 그 이하의 신분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성립
앞에서 신앙결사라고 할 때는 사회변혁운동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개념으로서 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경우를 지칭한다고 언급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 입각한다면 12세기 후반의 무신란을 기점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과 관련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전개된 수선사(修禪社)·백련사(白蓮社) 등의 신앙결사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엄밀히 말해 신앙결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운동의 차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왕실과 귀족에 의해 지원되던 결사라는 형식의 신앙활동과 지방사회의 토호층에 의해 주도되던 향도조직에 의한 신앙활동은 서로 괴리된 채 공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신라 하대에 성행하던 화엄 계통의 결사라든가, 고려 인종대에 지리산에서 행해진 법상종 계통의 수정사 등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8∼9세기 이래로 지방사회에서 소규모의 사원을 중심으로 조탑·주종·불상건립 등의 신앙활동이 광범위하게 행해진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이 주요 신앙형태였다.
그러면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신앙결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12세기 말에서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변동과 함께 다양하게 전개된 신앙결사를 들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지눌(知訥, 1158∼1210년)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로 사액되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라 할 수 있다.
이들 양대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운동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갖고 출발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서 지방불교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고, 또 이들의 성격을 불교개혁운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었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선에 힘썼다. 특히 거조사에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 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며, 몇 년 뒤인 1204년 최충헌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고려왕실에 의해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수선사는 1196년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당시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시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崔瑀)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수선사를 크게 부각시킨 이유는 수선사가 당시 사회에서 기존의 여타 종파에 비해 크게 호응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최우정권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慧諶)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당시 사회에서 수선사가 서서히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둘째, 수선사는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하면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수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미주 29]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어 있던 지방사회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종래의 학계에서 간과한 내용이지만,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염불인유경』(念佛因由經)이 발견됨에 따라 이 자료가 지눌의 저서는 아닐지라도 지눌 계통의 정토사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논의는 주목된다[미주 30]. 그리고 혜심은 그의 대표적 편저인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나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진각국사어록』(眞覺國師語錄) 등을 기준으로 하면 간화선의 최고봉에 도달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그가 남긴 단편적인 자료로서 「금강반야바라밀경찬」(金剛般若波羅蜜經贊)과 「금강반야바라밀경 발문」(金剛般若波羅蜜經 跋文)이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금강경』(金剛經)을 수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이와 영험을 강조한다든가, 또한 정통 선사상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법화경보문품』(法華經普門品), 『화엄경보현행원품』(華嚴經普賢行願品), 『범서대장신주』(梵書大藏神呪) 등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혜심은 선사상만을 견지하였다기보다 넓은 의미에서 실천공덕신앙과 밀교적인 요소도 포용하는 탄력성을 가진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의 사상적인 내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수선사가 독서층과 지방사회의 향리층, 일반 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선사가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일반 민들의 지원을 받던 결성 초기의 단계에서 차츰 독서층의 지지를 받게 됨에 따라 사원의 규모도 확대되고, 나아가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이들의 의도와도 맞아떨어져 최우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전 불교교단을 통괄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의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요세는 지눌에 의해 수선에 대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부터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은 1208년 봄에 영암의 약사암에 거주할 때이다. 이때 홀연히 생각하기를 만약 천태묘해(天台妙解)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영명연수(永明延壽)가 지적한 120병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수가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에서 지적한 120가지의 수행상의 제약을 극복하려면 천태의 묘해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요세는 수선 이전의 천태교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러한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향을 수참(修懺 : 참회법)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그 이론적 근거를 『법화경』(法華經)에 바탕한 천태지자의 『천태지관』(天台止觀),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와 지례(智禮)의 『관무량수경묘종초』(觀無量壽經妙宗 )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계기로 하여 요세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지원에 따라 약사암에서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백련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 민들을 주요 단월(檀越)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하여 최우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수선사와는 달리 1230년대 이후에 와서야 최우정권이 백련사의 단월로 부각된[미주 31] 까닭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몽고군의 침입과 관련하여 백련사가 강력한 대몽항전을 표방한 것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은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2.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13세기 전후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주도세력의 출신성분이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는 13세기 전후 시기가 고려 불교사의 전환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령 지눌과 요세의 경우, 각각 황해도 서흥군의 독서층과 경상도 합천의 호장층 출신으로서 불교계를 주도한 인물들인데, 이는 이전의 문벌귀족이나 왕족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눌과 요세를 계승한 다음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수선사의 2세 주법인 혜심(1178∼1234년)과 백련사의 2세인 천인(天因, 1205∼48년)과 4세인 천책(天 , 1206∼?) 등을 들 수 있다. 혜심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그의 부는 향공진사였다. 1201년(희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그의 모친 배씨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1202년 지눌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이러한 혜심의 경우에서도 그가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인의 속성은 박씨이며 충남 연산 출신인데, 1221년(고종 8) 17세 때 진사과(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고예시(考藝試)에 제일로 뽑혔으나 그 뒤 예부시를 포기하고, 1228년에는 동사생 허적, 진사로 뽑혔던 신극정과 더불어 요세에게 입문하였다. 이 사실로 보아 천인도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천책의 경우에서도 동일한 출신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천책은 바로 천인과 함께 요세에게 입문한 진사 신극정이다. 그는 경북 상주 관내의 산양현(지금의 문경군)에서 출생했으며, 이 지역의 토호세력인 신씨 가문 출신으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그 뒤 예부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관로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포기하고 1228년 23세 때에 요세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의 자제들이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거 불교계에 투신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현상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통해 볼 때 이 시기에만 보이는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附庸)적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설적으로 이들 유학자들이 수선사와 백련사 등의 결사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면에는 사상적으로 당시의 유학의 분위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상체계를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에서 표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사상내용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피할 생각이지만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가장 선진성을 지닌 사상을 표방한 인물들이 바로 지눌과 요세를 비롯한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신앙결사를 지원한 단월의 출신을 살펴보면 비록 수선사가 최우 집정기 이후에 가서 최씨정권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들 결사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는 결사의 주도세력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토호층과 독서층이 중심이었다. 백련사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층인 최씨가의 지원에 의해 강진의 만덕산에 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수선사의 경우도 결성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향리와 지방의 민들이 주요한 단월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문벌귀족이나 왕실에 의해 독점되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 나아가 일반 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게 된 것은 13세기 전후에 야기되었던 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신앙결사운동은 13세기 중반의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하였다. 수선사는 최충헌 집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최우 집정기에 이르러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사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당시 수선사를 주도한 인물은 혜심이었다. 혜심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어 수선사 제4·5세인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단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에는 가지산문의 일연 계통이 부각됨으로써 서서히 퇴조하였다[미주 33].
백련사도 요세 이후 천인, 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지배기인 1284년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인 묘련사가 건립됨으로써 백련사의 사상적인 전통이 변질되었다[미주 34]. 백련사 출신인 경의(景宜)와 무외(無畏)가 묘련사에 참여한 것을 볼 때 백련사의 본래적인 성격이 변질·해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묘련사를 뒤에 원지배기에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趙仁規) 가문이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원지배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수선사 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 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적인 저력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긴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명승(名僧)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경도되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한 사상적인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 주조는 다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4. 고려 말의 불교계 동향
13세기 초반의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불교계는 대내외적으로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원지배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의 결과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원지배기라는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 다른 하나는 13세기 전후에 이룩한 신앙결사 계통을 계승하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수선사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부각된 가지산문(迦智山門), 백련사(白蓮社)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 그 계승을 표방한 묘련사 계통, 또 주로 원에 사경승(寫經僧)을 파견함으로써 부각된 법상종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무신란 이후의 최씨집정기에 수선사·백련사 계통의 인물들이 대부분 국사·왕사로 책봉 또는 추증된 것에 비해 충렬왕대 이후에는 대체로 가지산문, 묘련사 계통, 유가업(법상종) 출신들이 국사·왕사로 책봉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묘련사를 중심으로 한 경의(景宜)·정오(丁午)·의선(義璇) 등 백련사 계통의 출신 인물들은 요세·천인·천책·무기(無寄)로 이어지는 본래 결사의 경향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즉 이들이 비록 백련사 계통에서 출발한 승려라고 하나 왕실과 원황실의 원찰로 건립된 묘련사와 관련을 맺었다는 점, 또 묘련사는 뒤에 원지배기의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 가문에서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 또한 조씨 가문에서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만의사·청계사 등의 원찰까지도 확보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나아가 천태종 교권을 장악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측면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 전반에 신앙결사에 의해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계의 모순을 척결하고자 했던 시도는 무너지고, 불교계는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을 아우르지 못하는 단계로 후퇴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단운영에 부응하여 각 사원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종교외적인 기능만을 극대화하는 온상으로 변모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불교계 내부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게 된 것이 결국 주자성리학이었다.
원지배기하에서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가지산문이었다. 가지산문이 부각된 경위는 13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일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일연은 정치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는 1258∼70년대의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는 1258년의 왕정복고에 참여한 주체세력에 의해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가지산문의 등장배경과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연(1206∼89년)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大雄長老)의 제자가 됨으로써 가지산문에 입문하였는데, 이후의 생애는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상도 현풍의 비슬산의 여러 사원에서 머물던 시기(1227∼48년), 둘째, 정안(鄭晏)의 초청에 의해 남해 정림사에 머물기도 하고, 또 지리산 길상암에 거주하던 시기(1249∼60년), 셋째, 원종의 명에 의해 강화도의 선월사에서 주석한 이후 경상도 지역의 오어사·인홍사·운해사·용천사에서 주석하던 시기(1261∼76년), 넷째, 충렬왕의 명에 의해 운문사에서 주석하다가 연이어 국존(國尊)에 책봉되었으며 그 뒤 입적한 말년까지의 시기(1277∼89년)로 나눌 수 있다.
일연의 생애를 통해서 다음의 몇 가지 문제가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일연은 최씨집정기·대몽항전기에는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서 잠적, 은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2세기 초에 학일이 말년을 운문사에서 보내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세력권을 형성한 가지산문이 무신란 이후, 특히 최충헌 집정기에 ‘운문’(雲門), ‘운문적’(雲門賊)으로 불린 농민항쟁으로 인하여 그 세력이 위축된 것과 관련지어 파악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정안의 초청에 의해 정림사에서 주석한 것을 계기로 하여 대장경 조판에도 참여하였으며, 특히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갖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연은 수선사의 2세인 혜심의 『선문염송』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수선사의 3세인 몽여(夢如)와는 직접 교류를 통해서 깊은 교분을 맺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씨정권 몰락 후 1261년 원종에 의해 강화도 선원사(禪源社)에 초청되었을 때 민지(閔漬)의 표현대로 ‘요사목우화상’(遙嗣牧牛和尙), 즉 ‘멀리 목우화상 지눌의 법맥을 계승했다’라고 하여 수선사의 계승자로 자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일연이 원종에 의해 선원사에 초청된 이후, 원종을 중심으로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한 세력의 배려에 힘입어 경상도 지역의 여러 사원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때 일연은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에서 선·교종의 명승을 모아 대장낙성회를 주관한다든가, 1274년에는 비슬산 인홍사를 충렬왕의 사액에 의해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하고, 또 같은 해에 비슬산 용천사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삼는 등 일련의 활약을 통해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던 것이다. 넷째, 일연은 1277년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에 주석하고, 그 뒤 1281년 6월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의 격려차 경주에 왔을 때, 행재소에 부름을 받게 됨에 따라 승려로서는 화려한 승직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수선사를 이끌어가던 충지(沖止, 1226∼92년)는 일연과는 달리 왕의 부름도 거절한 채 여러 사찰을 순력하면서 당시 동정군 준비를 위해 압박받는 민중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일련의 시를 남길 정도로 대조적인 길을 걸었다. 이러한 충지와 비교할 때 일연이 불교계의 타락상과 사회의 제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왕실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신중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일연의 말년 행적을 비추어볼 때 그가 소속된 가지산문은 이전 시기에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수선사와 백련사에 대신하여 원지배기에 등장한 불교계의 주요세력으로 파악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1283년 국존이 된 이후 일연은 인각사(麟角寺)를 하산소로 하여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그를 중심으로 가지산문이 선종계, 나아가서 전 불교계의 교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래 일연의 문도는 아니었지만 일연의 문도로 영입된 청분(淸 )의 사례에서도 일연 중심의 가지산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청분은 바로 혼구(混丘)인데, 일연을 계승하여 가지산문을 주도하였으며, 뒤에 일연의 『삼국유사』를 간행하면서 몇 개의 주를 보충한 무극(無極)이다.
이와 같이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됨에 따라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지배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에 의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 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나옹혜근(懶翁慧勤) 등이 출현할 정도로 불교계의 중심세력으로 존속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 보우가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면서 한때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했던 기반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원지배기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보수적 경향의 세력에 의해 불교계가 장악되고 있을 때, 이들과 대항하면서 당시 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안고 있는 모순과 불교계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일련의 인물들이 출현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백련사 계통의 사상적 경향을 계승한 운묵무기(雲默無寄)를 들 수 있다. 무기는 14세기 초반기에 활약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의 뚜렷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단지 그가 남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을 통해서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무기는 이 저술에서 당시 사회를 말법시대로 인식하고 원지배기의 참담한 현실 속에 처해 있던 대다수 일반 민들에게 염불을 통한 공덕을 강조함으로써 실천신앙으로의 정토신앙을 제시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권문들과 원당이라는 명목하에 정치적·경제적으로 결탁하고 있던 당시 불교계의 보수적인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이들의 일반 민들에 대한 자각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보수적인 불교계에 대항한 진보적인 세력들의 노력은 참담한 현실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일반 민들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나 나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들이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문제를 철학면(세계관)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못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 중 실천신앙적인 측면과 공덕신앙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한계성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의 제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과 그 추진세력의 결집이 불교계 자체에서 구축되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특히 14세기의 화엄종에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이 신앙형태도 차츰 신비적인 영험과 공덕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화엄종의 승려인 체원(體元)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특히 체원이 간행을 주선하면서 스스로 발문을 지은 일종의 위경(僞經)인 『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의 성격을 검토하면 당시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경향은 천태종의 요원(了圓)이 찬술한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이라든가, 또 당시 왕실과 권문귀족에 의해 제작된 많은 수의 사경·불화류, 심지어 미륵하생신앙에 바탕한 매향신앙(埋香信仰)이 해안이나 도서 지역에서 유행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밀교 계통으로서 신비적인 성격이 강한 원의 라마불교의 말폐적 영향임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는 바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던 단면을 말해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원지배기의 불교사를 보수적인 경향과 이를 비판하는 진보적 세력으로 대별해 보았다. 그렇지만 원지배라는 현실 속에서 불교계의 핵심적인 교단세력은 보수적인 경향으로 일관하였고, 단지 이에 대응하여 당시 사회와 불교계의 제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각에서 시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향까지도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신앙적 측면만을 강조한 결과, 사회사상으로서의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계 내부에서 13세기 전후의 신앙결사 단계에 이룩하였던 사상적 기반까지도 계승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까지 손을 대는 등의 사회경제적 모순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불교계가 사회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서 그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기치로 내세운 신진 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말선초에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약 1세기 후에는 명실상부한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7. 조선의 불교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흔히 지적되는 것이 산중불교(山中佛敎)라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산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멀리하는 불교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유수한 사찰들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현상의 설명적 표현이다.(그러나 황룡사나 불국사는 절 이 아니라 제정 일치 시대에 현저하게 대중의 신앙 생활과는 유리된, 그리고 국가권력의 철통같은 비호속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특수권력조직이며 오늘날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것이 바로 청와대이며 중앙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왜 합천 가야산 촌구석에 그다지도 거대한 해인사가 있으며 왜 승주군 조계산 허리에 그다지도 거대한 송광사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규모의 장대함과 거기에 들어간 인간 예술품의 에너지가 후대 조선왕조이 한양 한복판안의 궁궐의 규모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가 산속에 들어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할것이다. 고대 사찰규모의 장대함에 있어서 가장 반동적인 사실은 당대 그 사찰이 성립하고 있었던 場인, 민중의 삶의 현실이다. 당시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정말 형편없는 것이었다. 주변은 모두 황량한 들판의 논밭뿐이며 그 대중들이 사는 집이란 나무 마루도 없이 땅을 파고 짚이엉을 얹은 매우 소략한 토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지은 그 엄청난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 건축물을 짓게 한 지배자의 어마어마한 권세와 그 영력에 벌벌 떨 뿐이었고 당대의 왕이 사는 건물이 사찰에 비하면 매우 소박할 정도였으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 과연 {원래 사찰은 중생의 교화를 사명으로 하고 있음으로 번창한 도시보다는 가까운 아름다운 자연속에 자리잡는다.} 라는 말로 받아 들여야하는 것이 옳을까?) 어찌되었건, 우리의 경우 대찰(大刹) 뿐만 아니라 군소 암자까지 산 속에 위치한다는 것은 조선조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자연히 사찰이 산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 건국 초기의 불교
고려 시대에 전성의 극에 달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 졌다. 건국 초부터 유교국가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계획적인 불교 정비사업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즉 유학 자체를 진흥하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주의자들의 열의에 찬 숭유정책( 崇儒政策 )에도 불구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는 좀처럼 청산되지를 않아 때로 유교주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고려말기에 있어서의 유교의 진흥운동은 불교 배척을 계기로 그 척불 운동이 정치적 또는 행정적인 방면의 주장에 의해서 힘을 얻었던 것이며 결코 순전한 학문적인 이론 투쟁과 같은 정신 운동의 소산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는 유교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불교를 완전히 물리치고 사상과 행정의 여러면에 완전히 독점적인 지위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불교의 폐해가 지적되고 의론이 있을 적에는 민심에 큰 충격을 주지 않을 한도내에서 척불정책을 채용하려 했으나 그의 개인 생활이나 종교적 신앙 면에선 오직 한 사람의 불교도로서 일관했다.
이성계는 즉위 초에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모시는등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군역의 면제자인 승려의 수를 억제하는 한편 승려의 질적인 향상도 아울러 꾀하기 위해 태조때 부터 도첩제(도첩은 국가가 승려에게 그 신분을 인정해 주는 증명서인 동신에 군역의 면제증이기도 했다.)를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이렇듯 태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불교의 부패청산에 손을 대었지만 일부 유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불교의 근절이라는 것은 그로서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그것도 그런것이 삼국시대로부터의 불교는 국가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복되게 하여 주는 신앙으로서 여전히 대중에 대한 교화력을 유지하여 가고 있었고 특히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시된 수륙회(水陸會)(물이나 땅위에 음식을 던져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법회)만 보더라도 그의 유연성을 알 수 있다.
2. 억불정책 (1) - 태종과 세종
태종이 왕에 즉위하면서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태종은 태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결국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방침을 시종 견지하여 정책상으로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역(役)의 부담자인 민정(民丁)의 확보와 공천(公賤)의 보충이라는 인적 물적 국가 재원(財源)의 재확보를 위해 도징(道澄)과 설연(雪然)의 비행(사노간음사건)을 기회로 불교사원의 정리에 손을 대었다. 이리하여 사원의 재산을 동결시키고 사전(寺田)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남겨둘 공인사찰(公認寺刹)로 242사(寺)를 정하였고 여기에 상주(常住) 할 승려의 정원수도 책정하여 그 정원수에 따라 전지(田地)와 노비가 책정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지배층에서는 오히려 조세원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환속당한 승려들과 사원의 노비들은 양인이 되어 부역과 조세의 부담을 져,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결국 전국에 242개의 사찰만이 남게 되었고 왕사. 국사 제도도 폐지 되었으며 능사(稜師)의 제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종전의 11개의 불교 종단을 7개로 축소시킨 것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세종에 이르러서는 억불보다 더한 훼불(毁佛)정책이 강행되었다. 태종 때의 불교 종단이 11개에서 7개로 통폐합되었던 것이 세종 때 다시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 수도 제한 하여 태종 때의 242寺 법정 사찰에서 36寺로 축소되어 선. 교 양종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세종은 한성부내에 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수도의 경영을 위해 한때는 승려들을 노동에 참여하게 하여 노동력을 이용했지만 그 이후로는 승려의 파계를 이유로 도성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 때 세종의 친형이 효령대군이 불교를 숭신하여 천태종 승려 행평(行平)에게 사사, 제자가 되어 노승의 사실(師室)에 귀의하고 승려들이 하는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탑등의 사찰건립이나 중수에 사용할 기부금을 모았다. 세종이 이를 묵과해 준 까닭은 왕실에서 불교 신앙에 젖은 대비(大妃)를 비롯한 여성뿐만 아니라 궁녀들이 삭발하고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적인 불교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집안의 복을 위해 재를 올리고,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제사 때에는 승려를 초청하였다. 그리고 민중들사이에서는 초파일 연등행사가 나라의 억제 조치에도 불구하고 매년 행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감화 받은 세종은 점차 숭불의 왕으로 변신해 갔다.
말년에는 세종도 불교를 신봉하게 되어 석가불의 일대기를 엮도록 명하였고 우리글자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사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3. 세조의 불교 장려정책
조선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 할 수 있는 세조는 유신(儒臣)들의 반발을 억누르고 독실한 신자로 자처하며 불교를 중흥시켰다.
세조가 호법 사업을 편 이유는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파악될 수 있는데 첫째, 세조의 집권과정에서 친족과 정적을 많이 살해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일수도 있고 둘째, 그의 집권과정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야당격이었던 불교를 수용하는 측면 셋째, 정변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불교의 보호와 장려로서 수습하고자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불교 신자였던 세조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법화경, 선종영가집, 금강경, 반야심경등의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의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이 김수온(金守溫)과 승려들의 후원으로 귀중한 불교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세조는 금강반야경을 직접 썼으며 대규모의 왕실 원찰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세종때 금지했던 승려의 도성출입을 재허용하는등 많은 호법사업을 했다.
4. 억불정책 (2)
성종은 세조 당시 불교를 신봉하던 훈구파(勳舊派)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교정치를 지향하고 사림파를 대거 등용 하였다. 성종의 즉위로 억불정책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도첩을 가지지 않은 승려들이 증가하는 것은 - 군역제도의 문란으로 국역을 기피하려는 수단으로 승(僧)이 된 양민이 많았다. - 민정(民丁)의 확보라는 점에서 국가의 중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유신(儒臣)들은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도첩제를 엄격히 시행하고 불교 자체도 뿌리 뽑아 없애려는 급진적인 억불책을 서둘렀고 급기야 성종 23년에 도첩제 자체를 폐지(승려가 되려는 자의 길을 국가가 공적으로 말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시킨다.
성종은 간경도감을 폐지하고 출가를 완전히 금했고 승려들을 환속시켜 절이 텅텅비는 사태가 곳곳에서 도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불교 억압정책으로 인해 사대부 양반들의 개인적 불교 신앙마저도 극도로 위축되어 그나마 유지되던 불교식 장례나 제사법은 점차 사라져 갔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도 억불정책을 폈다. 그는 사찰에 있던 승려들을 쫓아내어 관노로 삼았고 토지도 몰수했으며 승과(僧科)도 폐지하였고, 선. 교 양종의 본사도 폐지 시켰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불교의 부패상에 대한 의식적인 조치보다는 단순히 성종의 불교 배척정책을 계승했던 것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연산군에 이어 중종에 이르러 억불정책은 최고조에 다달았다. 그는 지난날의 사화(士禍)로 거세되었던 사림파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하여 그들에 의한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불교는 더욱 억압 받게 되었다. 그는 승과를 합법적으로 폐지 시켜 선.교 양종의 종단 자체까지 그 존재가 무의미 해졌고 마침내 선명치 않은 無종파의 혼합적 현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히도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는데 - 봉건 지배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등이 절(寺)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불교 억압정책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과 착취당한 민중들이 이해관계를 같이 하여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불교의 적극적인 반항이었다. 이에 대해 지배층에서는 유교의 이른바 [미풍양속]을 퍼뜨리고 [미신]을 타파하려는 명분으로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 지배이념을 지방까지 퍼뜨려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불교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민중의 오랜 신앙이었던 민중의 불교적 공동체 생활조직인 향도(香徒)나 계를 말살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지배층의 억불책에 의해 끝내는 거의 말살되고 말았다.
5.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불교부흥
인종의 재위 8개월만에 승하한 탓으로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문정대비가 섭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불교는 다시 부흥의 기운이 감돌았다. 대비는 지나친 억불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불법적인 불교의 반항이 커짐을 알고 불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약간 부흥시켜 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불정책을 바꾸어서 6년(1551년)에는 중흥불사의 대임을 보우에게 맡기고 보우의 진언에 따라 양종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고, 도첩을 주어 봉은사를 선종으로, 봉선사를 교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승과를 통해 휴정(서산대사), 유정(사명대사)등의 후대의 뛰어난 불교 지도자를 발굴했다.
명종때 활약한 보우(普雨)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과 아울러 선교일치론(禪敎一致論)을 주장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다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禪은 行의 철학이며 華嚴은 理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꾀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친히 정사에 임하고, 보우를 탄핵하는 여론을 받아들여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그후 보우는 창살당하여 목숨을 잃었고, 그 다음 해에 양종의 승과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연산군 이전의 제도를 부활시켜 왕이 승하한 15년간은 조선불교의 중흥기라 할 수 있으며 보우의 업적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6. 청허휴정(淸虛休靜)과 당시의 구국흥법(救國興法)
산간총림에 축소된 불교는 그 속에서 수도와 전법에 힘쓰면서 자활의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문정대비의 승하 후 배불정책은 날로 심해 갔다.
그러던 중 조선 후기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계기로 의승군들이 왜적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자, 선조는 조직적 역량이 있는 승려들을 전투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때 휴정과 유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휴정은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33세에 승과에 급제했었고 임진왜란때 나라의 부름에 부응하여 73세의 노승으로 승군 오천여명을 이끌고 유정과 함께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실천으로 보여준 현실 참여 의식과 민중 구제의 사상은 [청허집]과 [선가귀감]등의 저술로 나타났고 억불로 쇠퇴의 극에 달하던 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은 휴정과 마찬가지로 명종 때의 승과출신으로, 휴정을 도와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는 전란 후에도 민생문제와 국력회복에 관한 방침을 건의하였고, 사명집(四溟集)등의 저술을 남겼다.
휴정이나 유정은 당시 선종의 대표자의 지도자였다. 그들 둘다 승과에 합격하여 명리를 누릴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참선 수도의 길을 걸었다. 이는 이전의 선사들과 다르게 형식주의적, 계율주의의 속박과 지배이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자유인의 경지로서 사회참여와 실천에 앞장 선 것이라 할 수 있다.
7. 조선 말기의 불교
청허휴정과 유정 이후 중흥된 교단은 조계임제(曹溪臨濟)계통의 선종이었다. 그렇다고 선수(禪修)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교학연구에도 힘써 화엄대가(華嚴大家)가 많았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조선불교에서 원효이래로 그를 뛰어 넘는 인물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의 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어수선한 정세와 맞물려 민중의 편에 서서 왕실에 저항하기도 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있는 한가지 형태와,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배층의 불교 배척에도 불구하고 상류지향적 문화를 추구하면서 지배층에 아부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후자는 나중에 참선과 염불을 구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사무와 제반 역입에 종사하는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뉘어 교단의 명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억불 정책은 국가적 귀족적 불교를 소멸시키고 대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미륵 신앙이 민중과 밀착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末法 시대의 고통을 구제할 당대 불교로서의 미륵 하생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깊숙히 침투하였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조선의 임꺽정의 난,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홍경래의 난등의 민중 세력과 불교세력의 형태로 그 흐름이 이어졌다. 그리고 줄곧 승려들이 입성금지의 법령에 묶여 있던 것이 일본승려의 상서(上書)에 의해 1895년 입성 금지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8. 근 대 불 교
1. 불교의 영향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 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산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은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 이다. 주지 임명 방법으로는 相承, 法類相續,招待 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藷般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 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주지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 -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두 무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政.敎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종지(宗旨),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태고사(현, 조계종)를 세워 31本山의 총 本山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2. 항일 불교운동
이 시점에서 조선 불교의 당면 과제는 두 가지로 분류시킬 수 있다. 즉 한일 합방의 현실에서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일본불교의 영향에 대해 조선 불교의 주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와, 급변하는 사회정세 및 세계조류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 였다. 이를 둘러싸고 조선 불교는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망각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일를 위해 일제와 타협하는 매불적인 행위를 하는 반민족적 세력과, 소위 산중 불교의 맥락을 이어 은둔 생활을 일삼는 무기력한 보수 세력, 나머지 하나는 민중의 소통에 귀 기울이고 외세의 침입에 맞서 구국투쟁의 대열에 동참하는 세력으로 3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 불교의 사회 운동이 표면화하여 업적을 남긴 것은 독립운동에의 참여와 청년 운동의 촉진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때 나타난 조선 불교의 선구자가 만해 한용운이었다. 그는 일제 침략기인 그 시점에서 유신을 외치면서 그의 혁신 이념을 알리고 실천했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발견하는 계기 역시 실천적 투쟁속에서 이루어 졌는데 그것이 바로 해인사 주지였던 친일파 승려 이회광 일당의 음모를 분쇄하는 운동이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회광은 불교 확장이라는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결탁하여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종교의 분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만해는 여러 해 승려 대회를 열어 일본 불교와의 연합 획책을 규탄하여 결국 친일 흉계를 백지화 시켰다. 또한 그는 구국 독립 실현을 위해 지극히 인도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불교의 근본이념을 실천으로 보여 주면서도 총 종교적인 이념구현에 앞장섰다.
그야말로 조선 불교의 은둔주의와 몽매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열렬한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독립운동가였으며 지눌과 원효의 사상과 전통을 이어받은 진정한 인물이었다.
불교는 3.1운동과 신간회등의 항일 투쟁에 동참한다. 3.1운동의 민족대표의 자격으로 백용성,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참여하고 전국 사찰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민족 연합전선인 신간회가 만들어지자 조선불교 청년회와 불교 여자 청년회의 회원들은 신간회와 그 자매 단체의 근우회에 각각 참여했다. 또한 비합법적 비밀결사운동으로 만당(卍黨)을 결성했다.
***참 고***
日帝下에서의 대처승
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소위 內鮮一體라는 구호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화 경향이 노골화된 것이다. 일본 불교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 육식등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는 참담한 현실속에서도 청정한 율행(律行)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또 당시의 33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이 시도된 적이 있다. 그때 한국에서 파견된 이들의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야기된 이른바 비구 대처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45년에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가 있었다. [왜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 ]는 내용이었다. 왜색 승려는 구체적으로 대처승을 가리킨 용어였다. 그 해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는 승려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의 유시내용 대로 전국의 사찰에서 대처승을 몰아 내기 위한 결의 대회였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들로는 曉峰(효봉), 金鳥(금조), 東山(동산), 靑潭(청담)등을 들 수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당시 비구의 숫자는 전국을 통틀어 200여명을 넘지 못했으리라는 추정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국 사찰 1천2백여개소를 관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기성교단과의 타협이 불가피했다.
당시 태고종(지금의 조계종) 종무원 (지금의 총무원)에서는 중재안을 냈다. 즉 전국의 사찰을 궁극적으로는 비구승들에게 양도하지만 현재의 대처승들에게 그 당대만은 사찰 거주를 허용할 것, 비구승들의 수도처를 20여군데 지정하여 단독으로 수행에 전렴토록 할 것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찰을 비구 도량으로 선뜻 내 놓는 이가 없었다. 양측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계속 벌여 나갔다. 1960년의 불국사 난투극은 이 갈등의 절정이었다. 드디어 양자는 결별을 선언하고 비구승들은 통합 종단으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한편, 대처 승단은 태고종으로 발족하게 된다. 이 때가 1962년 이였다. 이 와중에서 망실된 재산과 토지는 그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에 대한 정부 관권의 개입이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를 낳게 된다. 또 5.16 쿠데타 직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서 불교계의 여러 종파들을 등록시킨 것도 문제였다. 비슷비슷한 종풍(宗風)을 내건 불교 단체들이 문공부에 등록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한국 불교에는 26개의 종파가 난립하게 된다. 조계종의 첫번째 수행 과업은 태고종이 소유하던 사찰들의 합법적인 접수였다. 정화라는 기치아래 거의 모든 사찰들이 조계종으로 등록하게 된다. 이 접수 과정에서 무자격한 승려들이 대거 조계종 안으로 스며든다. 이들은 수행이나 사회제도에는 관심이 없고 재산권의 이득만을 노리는 이들이 승복을 걸치게 된 것이다. 조계종단 안에서 폭력이 활개를 치게 된 것이다. 오늘의 비극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악연(惡綠)이 뿌린 인과응보이다. 정화불사를 주도했던 청담(淸潭) 스님은 이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다음으로 조계종에 주어진 문제는 총무원의 재정적인 독립이었다. 분규에 따른 소송은 해당 사찰이 감당하는 것보다는 총무원이라는 대표성 있는 단체가 맡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총무원에는 자금 동원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각 본사를 통한 분담금 납부 제도가 실시된다. 특히 전국의 명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막대한 입장료 수입이 생겼다.
물론 그 돈의 일부는 문화재 보수등을 위하여 지방 단체장이 관리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사찰의 운영에 쓰이게 된다. 이 이권을 둘러 싼 잡음들도 끊일 사이가 없었고 그래서 조계종 총무원의 자리는 늘 단명(短命)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18년 동안 24명이 총무원장직을 거처 갔다. 평균 수명이 8개월 밖에 안되는 것이다. 본사 주지의 임면권을 총무원장이 장악하지만, 돈은 본사 주지가 쥐고 있기 때문에 이 마찰은 피할 길이 없다. 서의현 총무원장은 86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현대 조계종사에서 유일하게 임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연임을 거쳐 3선까지 바라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재직한 8년은 아마 당분간은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을 듯 싶다.
9. 5,60년대 불교
1.정화운동(잘못 끼워진 단추)
1) 정화운동의 태동 - 1차 혁신운동
일제국주의의 대한(對韓)불교정책은 한국불교의 왜색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이양책을 그 골자로 하였으며 이는 대처승의 육성과 사찰령의 실시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조치를 통하여 일제국주의는 불교를 식민통치의 수단으로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불교는 자율성이 말살되고 전통성이 거세되어 갔다. 사찰령은 주지전횡제도를 가능케 하였으며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지님으로써 종권을 완전 장악하는 수법이 관철되던 상황이 바로 해방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방후 불교계의 과제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불교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친일매국, 보수파 타락승, 매교승의 제거와 교단의 정화, 또한 불교계에 뿌리 박혀 있는 일제 불교정책의 잔재청산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불교내의 반민족적, 반불교적 요소들은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하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불교정화운동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어진 1차 혁신운동에서 그 태동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1차 불교혁신운동을 살펴보자. 제1차 불교혁신운동은 불교 혁신회,불교혁신동맹.불교여성 총동맹,혁명불교도연맹,선학원,불교청년회의 7개 단체가 모여 결성된 불교혁신 총연맹에 의해 전개되었는바 그들이 내세웠던 목표들은 네가지로 압축 요약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
둘째, 불교의 대중화
셋째, 부패된 교단의 혁신
네째, 사찰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상 확립
이와 같은 1차 혁신운동의 주요 목표들을 살펴보면, 이 운동이 민족적 각성과 종교적 양심을 자기 출발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차 혁신운동은 ,불교혁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일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파악해 내었다. 자연히 혁신운동은 주체적 실천으로 전개되었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 세력을 넓혀 갔다. 이러한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자 위협을 느낀 미군정과 보수, 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가하였으며 불교혁신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하고 만다. 관권의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하게 됨으로써 1차 불교혁신운동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2) 정화운동의 왜곡및 변질 -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지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 지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 유시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3) 정화운동에서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의 변질
불교 내의 비민족적, 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 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이다.
4) 비구 - 대처의 종권분규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 왜곡되면서 종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 대처로 두 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1960.4.27) 실패로 돌아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 (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판결을 내리자 비구, 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 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론 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 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 종지 등에 완전히 합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 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 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그라 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지게 되었다.
5) 정화운동의 실패와 그 폐해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 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 데모, 할복, 법원난입, 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 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 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 이제 비구 종단내의 분규를 살펴보자.
10. 7, 80 연대 불교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분규
50년대 정화운동에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는 통합종단이 들어 선 이후에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불교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구-대처 분쟁을 통해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조계종 내의 종권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계종 분규의 전체적 양상은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으로 일관된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분규는 청담스님계와 경산스님계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규는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종권분규를 이 양자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1) 60년대 말 - 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통합종단 조계종은 종정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그 출범을 알렸다.(1962.4.11)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대처측 임석진 총무원장 이하 집행부는 취임 5개월만에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 의원의 구성비율(비구 32 : 대처 8)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원 사임했다.(1962.9.10) 이로써 통합종단의 초대 총무원장은 그 해 12월 30일자로 퇴진하게 되고 비구측은 바로 당일 대처측의 김법룡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신속성을 발휘했다. 김법룡 충무원장은 계속되는 비구-대처의 알력 속에서도 3년 3개월이라는 조계종 사상 최장수의 재임기간을 채우고 66년 4월 물러갔으며 김법룡스님의 후임으로 비구측의 손경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66.4.12) 이로써 그 동안 - 외형적으로나마 - 균형을 이루어 오던 비구-대처의 균형은 무너지고 조계종의 실권은 완전히 비구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조계종의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손경산 스님은 통합종단 조계종에 가담한 대처측 화동파(和同派)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온건론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초대 종정인 이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잦은 의견대립을 보이면서 청담-경산 이라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서서히 표면화시키기 사작하였다. 조계종 14회 중앙종회(1966.11.30)는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스님을 재추대하게 되고 종정-총무원장의 잦은 의견대립은 문중,파벌의식이 개입됨으로써 종권다툼의 양상으로 번질 기운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급기야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종회에서는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여기서 당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동국대학교 재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된데 대한 규탄이 있었고 청담스님은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산스님이 이에 불응하자 청담스님은 사표를 던졌으며 이에 경산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해인사 종회를 계기로 청담,경산 두 거두가 종권의 정당에서 물러가자 조계종은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을,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하였다.(1967.8.9)
1969년 8월 12일 한동안 조계종권에 멀어져 있던 청담스님이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 불사가 부진함을 참회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탈퇴한다. 고 하여 조계종 탈퇴선언을 함으로서 조계종단은 다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청담스님의 조계종 탈퇴선언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에 의해 자신의 불교유신재건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총무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탈퇴선언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난 후 (1969.8.23) 청담스님의 탈퇴선언에 자극을 받은 선학원(청담스님 지지파)측은 9월 1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측과 총무원측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청담스님탈퇴의 책임 문제에 대한 선학원측의 강력한 공세를 받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은 사퇴할 뜻을 밝혔다(1969.8.26) 이처럼 청담스님 탈퇴선언으로 본격화 된 종단분규는 청담스님측과 경산스님측의 총무원 실권장악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 9월 1일 개최된 제21회 비상종회는 선학원측의 최월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츨하였으나(1969.9.13) 봉은사 땅 매각사건으로 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월산 총무원장 후임으로 다시 청담스님이 선출되어 청담 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970.7.22)
새롭게 구성된 청담 집행부는 총무원장 외유중에 김경우 총무부장이 관악산 염주암을 임의로 매각해 버림으로 인해 집단사퇴하게 되고 청담 총무원장만이 임시중앙종회(1971.7.27)에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청담스님이 갑자기 입적함으로써 조계종 내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입적 후 그 후임을 놓고 조계종단은 다시 파란이 이는 듯 하였으나 비교적 파벌색이 적은 강석주 스님을 후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고(1971.11.23) 강석주 집행부는 청담스님 입적 열흘 후인 11월 25일 출범하게 되었다. 강원장은 재임 1여년만인 1973년 1월 25일 손경산 총무원장에게 종권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2)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종권분규
봉은사 염불암 땅 매각사건으로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때 손원장은 젊은 승려들의 옹립을 받으며 등장했다. (1973.1.25) 그러나 손원장 집행부는 73년 5월 윤고암 종정의 사회국장 해임 거부를 발단으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종권다툼을 시작했다. 윤종정이 물러나고(1974.7) 문중배경도 없고 대처측 출신이라 종권을 전혀 넘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파벌색이 없는 이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1974.8.3) 지루한 종권다툼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서옹 종정은 예상을 뒤엎고 종정 친정체제를 주장하면서 종단 실무를 관장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이에 손경산 집행부는 정면 도전했다. 이 종정과 손 원장의 종권다툼은 종정취임 두달만인 1975년 9월 30일 손 원장의 구속사태를 빚었다. 손 원장은 경기도 양주 대성암 토지 매각 대금을 다른 항목에 전용해 썼다는 유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현직 원장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첫 사례를 남겼다. 손 원장의 구속사태로 새 총무원장에 송서암스님이 선출되었다.(1975.10.6) 그러나 종권안정 여망과는 달리 송서암 집행부는 종단 행정 경륜의 일천함으로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어 박기종 스님(1975.12.5 - 1976.10.4) - 고경덕 스님 (1976.10.4 - 1976.12.3) - 김자운 스님(1976.12.3 - 1977.3.23)등이 차례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물러나게 됨으로 종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김자운 집행부에 이어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다.(1977.7.23)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는 서옹 종정측으로서 실무친정의 근거지가 되고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야세력은 김혜정 집행부에 강경히 맞섰다.
종권다툼의 양상은 종회측의 이 종정 불신임안 통과(1977.10.7),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1977.11.9), 이 종정의 종회 해산 명령(1977.11.11)의 공방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종회측은 해인사 종회후 채벽암 스님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달게 되었다.(1978.3.10) 마침내 조계종단이 조계사 총무원(종정)측과 개운사 총무원(종회중심의 재야)측으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양분된 조계종의 내분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과 승단 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대립구도 탈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협상에 임한 결과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게 되었다.(1980.3.30) 합의에 따라 제 6대 종회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1980.4.17) 새로 구성된 제 6대 의원의 표대결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과 종회의 정.부의장을 선출하였는데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하였다(1980.4.26 - 4.27) 이에 조계사측이 반발하여 종정추대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이라는 성과를 얻은 당시 상황은 3년동안 계속된 조계사,개운사 만의 종권분규를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조계종단은 법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종정 추대에 실패한 종회가 다시 5월 7일 종회를 열어 종정추대를 재시도했으나 총무원장,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한 것에 반발한 조계사측이 다시 송월주 총무원장의 자격미달을 들고 나와 당선 무효를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공식 대회는 두절되고 와해 상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5월 13일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면서 양 조계종단은 다시 내분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었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사찰 당국은 조계종단이 더 이상 자체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조계종단을 정화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불교 1600년 사상 가장 치욕적인 10.27법난이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1980년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켜 법통을 잇고 이어 종헌을 개정하고 이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이성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81.1.7) 조계종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의 종헌을 탄생시킴으로써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는 여러 형식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총무원장은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파벌,문중의식을 확대,재생산해 내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 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로써 81년 이후 1년동안 4번이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난맥상(성수 > 초우 > 법전 > 진경)을 노출하였다. 1982년 4월 6일 총무원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황진경 스님 역시 - 10.27법난이후 실력파로 부상해 있었던지라 종권불 안정을 종식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서의현 종회의장으로부터 종권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전대미문의 승려살인 사건을 유발하였다. 이에 황원장은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1983.9.3) 이에 앞서 원로스님들은 봉은사에서 원로회의를 열어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흥사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종회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총무원과 종회를 해산키로 결의하였다.(1983.8.27)
1983년 9월 5일에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설치가 결의되었다. 신흥사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출범한 비상종단은 김서운 총무원장을 내세우고 평화적 종권 인수인계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봉은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그 동안 소장승려와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개혁안을 토대로 개혁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작업은 혁신적이고 구체적이었으나 종단 내의 보수기득세력과 권력의 공작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즉 1984년 8월 1일 재야측이 이성철 종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집한 전국승려대회가 만장일치로 비상종단을 불신임하고 오녹원 총무원장을 선출하였고 2일에는 총무원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11. 90년대 불교
90년대초 불교
3)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4)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 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이상에서 본 고는 한국현대불교사를 다루면서 청산해야 할 역사를 조명해 보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국불교는 종권다툼의 각축장화 되었고 그것은 끊임없는 종단분규, 종권불안으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과히 현대한국불교사는 종단분규사라는 명제를 실감할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종단분규의 양상을 좀 정리하고 넘어가자. 종단분규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다. 즉 주지임명에 관한 분규, 총무원장 선출 혹은 정통성에 관한 분규, 종정선출 혹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 수행, 포교 등 제도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정, 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다.
3.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한국불교의 모순은 한국의 민족모순이 불교적으로 전이된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의 민족모순은 일제국주의와 미국의 뿌리깊은 식민정책에 의해 그 골은 깊고 넓어만 갔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문화정책에도 일관되게 흐르며 문화정책은 종교정책을 포함시킨다.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에 의해 민족종교인 불교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왔다. 그 모순들의 현실태로서의 종권분규를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모순의 또 다른 현실태인 탄압과 훼불을 개략해 보려한다.
탄압은 주로 자체 정화능력의 결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개입하면서 불교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성,의존성 심화를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정화유시와 10.27법난이다. 뿐만 아니라 탄압은 민족세력화, 진보세력화의 조짐을 보일때 정권은 철퇴를 가함으로서 민족,민중의식 고양의 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원각사 법당 난입사건, 각종 집회방해로 나타난다. 훼불은 ① 제반정책에 있어서 소외시키는 유형 ② 기독교 편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왜곡,변질 시키는 유형 ③ 군 내의 불교탄압 유형 ④ 이교도들에 의한 불교비방, 훼불유형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은 근본적으로 불자 대중의 각성을 바탕으로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혁신, 민족문화의 고양을 통해 극복되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중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중흥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불교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과 그 전개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 - 서의현 반대투쟁
종단개혁투쟁은 서의현 반대투쟁을 그 촉발지점으로 하여 개혁회의의 출범과 해체, 개혁종단의 출범, 개혁종단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을 포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단개혁투쟁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종단개혁투쟁의 촉발지점으로 작용하였던 서의현 반대투쟁을 살펴본다. 1994년의 벽두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유용에 대한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1994.1.27)가 있은 다음 날 조기현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되었다. 이를 전후로 하여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과 관련하여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당 정대철의원이 상무대 비자금 조성의혹문제를 폭로하였다. 폭로의 내용인 즉,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종합건설대표 조기현이 상무대 이전사업의 대금으로 받은 금액중 2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80억원은 서의현을 통해 대선시기에 김영삼후보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상무대 비리사건은 ①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② 여전히 불교계 종단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정치권력 역시 종단권력과의 모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 났으며 ③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부패,비리 기득권 세력의 제거가 필연적이며 ④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인하여 불교의 개혁이 필연적이라는 불자대중의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 서의현은 상무대 비리사건이 자신의 차기 종권장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 예상하고는 이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3월 18일에 차기 총무원장선거를 3월 30일 개최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같은 불교개혁을 꾸준히 모색해 온 종단개혁세력은 이와 같은 서의현의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3월 30일 종회개최설에 반대하여 하나로 세력화 되는 바, 그 세력화의 결과가 바로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범.종.추)의 결성(1994.3.23)이었던 것이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3월 30일 종회개최발표는 범종추를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점이 된 범종추는 3월 26일부터 구종법회를 이끌어 나아갔으며 이에 앞서 3월 25일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동국대 불교학생회 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종단개혁의 열기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자대중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이다. 3월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며 서원장 3선음모 결사반대를 결의하고 상무대 80억 비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서의현 총무원장은 조직 폭력배 300여명을 사주하여 총무원에서의 농성스님및 재가불자들을 습격하였으며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강제연행하기에 이르렀고 종단개혁세력은 이 날의 강재연행,폭력을 3.29법난으로 규정하고 불교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력과의 일대격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하였다.
3.29법난 당시 범종추 소속스님들 뿐만 아니라 대불련 소속법우들 역시 (대.경지부에서도 30여명이 참가하였다.)강제연행,폭행을 당하면서 불교자주,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호를 받은 서의현 세력은 3월 30일 제 112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서의현의 3선을 결의하였다. 바로 다음 날 재가불자들의 조직적이고 한층 더 강력한 투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이 창립을 선언하고(1994.3.31)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완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몇번의 양심선언이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이에 맞서 서의현 세력의 강제로 추측되는 서암스님의 승려대회 중지교시가 발표(1994.4.9) 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4.10 전국승려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전국승려대회에서는 ① 서암종정 불신임 결의 ② 서의현 원장 공직박탈 결의 ③ 개혁회의 출범선언 ④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스님 선출 등이 이루어졌고 곧 이어 총무원 접수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다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스님및 재가불자들을 강제연행하였다. 이에 원로스님 6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4월 11일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개혁회의는 3.29, 4.10법난을 책임지고 김영삼 정부 퇴진, 최형우 내무장관 구속을 촉구하였다. 4월 13일에는 공권력이 철수하였고 개혁회의는 총무원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새벽 5시에는 서의현 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조계사에서는 1만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개혁회의 현판식이 이루어졌다. 원로회의는 4월 10일의 전국승려대회의 결정을 추인함으로써 서의현 반대투쟁은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2) 종단개혁투쟁의 전개 - 개혁회의의 출범과 개혁작업
개혁회의는 ① 불교의 근본정신 회복및 승단 위계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관련 악법폐지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공개 ④ 여법한 주지인사 실시 및 무분별한 불사 지양 ⑤ 파벌적 문중의식 타파 및 승가 후생복지 증대 ⑥ 승가교육제도 정립 ⑦ 의식,법복,의제 정비 및 통일 ⑧ 포교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모색 ⑩ 인권,환경 등 사회역할 증대 등 10가지 공약을 제시하면서 출범하였다.(1994.4.13)
개혁회의의 출범은 개혁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의현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혁의 토대를 일정부분 이루어 놓았으며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몰락 그 자체가 불교개혁의 완수일 수 없을 뿐더러 서의현 반대투쟁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기득권세력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종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부는 시기를 노리며 잠복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불교개혁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서의현 반대투쟁을 촉발로 전개 된 불교개혁투쟁은 종단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 동안 축적되어온 모순의 총체적 해체와 그를 통한 한국불교중흥이라는 불자대중의 염원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되어야한다. 그러하기에 개혁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총체성은 제도개혁, 인적 청산 ,의식개혁 등 모든 개혁의 내용과 대상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자기 임무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회의였고 개혁의 총체성은 개혁회의의 임무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6월말까지 ① 개혁회의의 존립근거를 마련해 줄 개혁회의법 마련 ② 월하스님을 종정으로 추대 ③ 훼종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기간의 부패승려에 대한 조사와 사찰에 대한 감사실시 ④ 대체 권력체계에 대한 법안 마련과 공청회 개최 ⑤ 재적 본사별 승적 재정비 ⑥ 법난 책임을 물어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요구 운동 전개 ⑦ 동화사,은해사,선본사,보문사 등의 기존의 반개혁세력이 잔존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직할사찰 운영 등의 일들을 해 왔었다.
개혁회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불자대중과 국민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종단의 출범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혁회의는 1차부터 마지막까지 공개회의의 원칙을 지켰으며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방청하게 한 것이며 법제화의 과정에서 각종 공청회의 개최를 통하여 불자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열린마당을 통하여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 그리고 개혁회의의 진행과정을 개혁회의 뉴스, 불교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공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것 등은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혁회의는 산하에 법난 대책위를 설치하여 법난에 대한 대 정권 규탄투쟁을 멈추지 않으며 불교 자주화의 당위를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의 개혁작업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개혁회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등의 비아냥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잠복해 있던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개혁작업이 중도에서 표류하게 된 원인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며 그것은 개혁완수를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개혁표류의 원인은 종단개혁투쟁에 참여했던 진보세력이 종권을 얻어내면서 변절을 시작했고 재가불자들의 고립이 결국 대중이 아닌 소수세력에 의한 종단 운영을 유도하였으며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식결여 등등의 개혁회의의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나 세부적인 평가들은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경위들을 먼저 살펴보자.
개혁회의가 다각도로 개혁을 추진하긴 하였으나 개혁의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개혁세력은 자신들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혁회의가 반개혁세력이 온존하며 그들의 물적토대가 되고 있는 사찰을 직영사찰로 하여 새로운 주지를 발령한 것에 대해 반개혁세력이 집단적인 소송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이 (1994.8.11) 원로회의에 의해서 인준이 보류(1994.8.23)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범하면서 기존 종회를 끌어안기 위해서 기존 종회의원 39명을 포함함으로 인해서 내부적 진통에 시달리던 개혁회의가 외부적 도전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원로회의의 개혁회의 입안 종헌에 대한 인준거부는 개혁회의의 입지를 위축시킨 결과로 작용하였다.
3) 개혁종단의 출범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결정적 위기를 맞은 개혁회의는 9월 1일 개최된 원로회의가 제안한 내용을 9월 3일 , 제 8차 개혁회의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수용함으로 인해 위기를 일정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이어 9월 27일에는 제 9차 개혁회의의 본회의가 개최되어 개정종헌이 심의, 의결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개정종헌이 인준되고 개혁회의 의장은 개정종헌을 선포하였
다. 새 종헌 ,종법에 의해 11월 7일에는 11대 중앙종회의원 55인이 각 교구별로 직접 선출되고 8일에는 직능별 중앙종회의원이 직능선출위에서 선출되었으며 11월 14일에는 각 교구별로 총무원장 선거인단 24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319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월주스님)되었고, 개혁회의의 뒤를 이어 개혁작업을 수행해 나갈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2. 종단개혁투쟁의 성과와 한계
서의현 반대투쟁으로 촉발되어 개혁회의의 출범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개혁종단의 출범에까지 이르는 종단개혁투쟁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오류들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 성과와 오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냄으로서 여전히 미완인 개혁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서의현 반대투쟁이 촉발될 당시 국민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불교대중들의 눈에도 종단개혁투쟁은 새로운 종권다툼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그들의 눈에 서의현 반대투쟁에 결집한 세력들(보수, 기득권이나 진보를 막론하고)은 곱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였으며 미리 개혁을 모색한 개혁, 진보세력들의 주도면밀함으로 인해 획득되어진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의현 반대투쟁은 서의현 독재체제의 해체라는 직접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킴으로서 개혁의 지속적 추진을 가능케 했다. 개혁회의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의 추진은 ① 제도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 냄으로서 이후 종단운영의 여하에 따라 제도개혁의 큰 틀을 만들 수 있는 시안을 마련하였다는 점 ② 불자대중의 불교개혁에 대한 염원과 열의가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점 ③ 불자대중의 개혁에 관한 관심과 염원은 향후 불교중흥의 인적토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점 ④ 개혁과정에서 개혁은 불교의 자주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확인함으로서 불자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졌다는 점 ⑤ 개혁과정에서 개혁적, 진보적 승려들이 종단 내로 대거 진출함으로서 개혁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함은 물론, 전체 승가의 세력재편이 진보적으로 이룰 소지를 제공한 점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혁회의가 개혁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오류와 한계점을 드러냈는 바, ① 개혁 초기 주도세력이 분열함으로서 제도개혁의 불완전(총무원장 직선제 관철 실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진전에 차질을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가 또 다른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으로 오인 받기도 했다는 점 ② 구종회의원 39명을 개혁회의에 끌어안은 것은 끝끝내 개혁회의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일정부분 개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내줘야 했던 점 ③ 개혁세력의 물적토대의 부족 ④ 불교개혁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된 것은 불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대중의 종단운영참여를 배제했던 점(재가대중과 비구니 스님들의 배제는 앞으로 개혁회의의 한계로 집중적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⑤ 그로 인하여 출가비구대중들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던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12.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불교근대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온 불교는 많은 혼란과 번창을 반복하면서, 근세를 맞이하게 된 불교계는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정도 관권의 예속으로부터 자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해 12월 말에는 10/27법란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게 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 바람과 불교계 내부의 응집된 대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참혹한 배불정책과 일제치하에서의 사찰령이 이 땅의 불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면 1954년5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이승만의 유시로 점화된 소위 불교정화정책의 회오리는 다시 한번 관권이 불교계를 유린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었고, 그 여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계가 자립의 분수령을 이루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된 직후인 1989년부터 1997년 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논하기로 한다.
불교방송의 시작
이 시기에 일어난 불교계의 가장 큰 변화는 불교방송,불교T.V개국, 성철스님의 입적, 서의현 스님체제의 총무행정의 붕괴와 개혁종단의 출범을 들 수 있다.그리고 또 다른 관건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 등이 대종을 이룬다. 1990년 5월 이땅의 불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불교방송이 개국을 하고 첫 방송을 하게 되니 동토에 전래된 이후 가장 큰 경사가 되었다.초기의 가청권은 서울과 그 인접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부산,광주,대구,청주의 지방 방송국이 잇따라 설립되어 전국을 가청권으로 하는 전국방송망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불자들은 가정에서 방송을 통하여 조석으로 예불을 하고, 고승대덕의 설법과 저명한 법사,교수의 불교학 강의를 앉아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교방송국의 대작불사를 이룩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 땅의 모든 불자들이 원력이 하나로 결집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조계종을 비롯한 많은 종단과 불교진흥원이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을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즉 방송의 의결기구인 이사회의 이사장은 승려중에서 보하고 방송경영의 책임자인 사장의 추천권은 불교진흥원이 가진다는 원칙을 합의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승단과 재가가 조화롭게 의결기구의 수장과 경영의 책임을 양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불교방송이 개국을 한 지도 10여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불교방송은 그 동안 교리강좌,법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불자의 신앙심 고취는 물론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 자립기반이 취약한 것이다. 사실 방송국은 개국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진흥원으로부터 매년 5억원 내지 10억원의 지원금을 받고 있음이 사실이다. 시설투자비까지 합하면 70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은 셈이다. 불교방송국이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임직원 전체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불교방송이 음성만을 전달하는 라디오 매체인 데 비하여 1995년3월 개국한 불교T,V 방송국은 영상매체라는 점에서 크게 대조를 이룬다. 통도사와 각급 본사 그리고 많은 종단이 참여하여 자본금38억원의 주식회사로 출범한 불교T,V 는 수차에 걸친 주식공모를 통하여 170억원의 자본금을 확보한 것이다.개국특별프로그램으로 종정스님과 특별대담,한국사회와 불교의 역할에 대한 특별좌담회 등의 방영을 시작함으로써 하루10시간씩의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불교텔레비젼은 가톨릭, 기독교와 동시에 케이블T,V로서 채널을 허가받았으나,현재 불교T,V는 타 종교보다 시청률면에서 앞설 뿐 아니라 30여개 일반 채널 중에서도 우수방송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불교T,V가 우수한 영상물을 방영하고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경영부문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초기 케이블T,V 각급 채널의 인,허가와 설립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케이블T,V는 유선방송이므로 각 가정에 케이블이 설치되어야 수신이 가능한 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치밀한 계획없이 허가 설립에 대한 일정을 앞당겨 놓은 것이다. 케이블T,V는 이러한 당국의 오판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을 떠맡게 되었고 불교T,V도 예외없이 자금의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최저200만 가구 이상의 유료 시청자가 확보되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케이블T,V프로덕션의 입장에서는 97년말 현재 유료시청자 80여만 가구로서는 경제적 자립을 감당할 수 없음이 자명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불교T,V는 케이블T,V프로덕션 연합회와 연대하여 정부를 상대로 계속 이러한 난제를 풀어가고 있지만 구조적인 적자요인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어쨌든 불교방송과 불교T,V가 각각 음성과 영상을 통하여 전국의 불자가정을 찾아 법음을 전하고 있음은 교계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불교방송과 불교T,V가 현재 제반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불교계의 전 사부대중이 지혜와 힘을 모아 위법망구의 자세로 임한다면 1600년 불교역사에 우뚝한 초공간의 법당이 더욱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성철스님의 열반
1993년 11월4일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추앙을 받아 온 조계종 종정 성철 큰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열반은 불교계 뿐 아니라 전 국민의 비통을 몰고 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1년 조계종 종정직을 수락하고 추대식장에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신 채 사자후한 이 법어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가슴 속에 화두로 남아 있다. 스님은 1912년 경남산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영주, 1030년 진주중학을 졸업한 뒤 일제하 젊은 시절을 사상적 방황기로 보냈다. 이 시기 스님은 승찬대사의 신심명과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읽고 캄캄한 밤중에 태양을 만난 듯 환희하고 생가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 대원사를 찾아 평생수행의 외로운 길에 들어선다. 불가의 예법을 잘 모르던 스님이 속복을 입은 채 대원사 방 한칸을 차지하고 수행에 들어가자 본사인 해인사에서는 이인이 나타났다는 공론이 돌고 결국 스님은 해인사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게 된다. 당시 해인사에는 백용성, 송만공 스님등 선지식들이 계셔서 훌륭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성철 큰스님은 1935년 인연을 맺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말년을 보냈다. 스님은 10여년간의 장좌불와, 묵언 등의 수행에 추호의 빈틈이 없었으며 기존 불서의 해석은 물론 영,독,일,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여 현대물리학,심리학,심령학 등 외전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스님은 수행하는 일 외에는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는 특징 있는 삶을 사셨다. 성철스님을 친견하려면 3천배를 해야 했다. 정계나 재계의 거물급 인사도 예외는 없었다. 이렇게 스님은 승속간에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스님은 이따금 산은 산,물은 물 등의 법어를 내림으로써 국민정서를 깨우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를 강조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자신의 수행관을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수행법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불교계에 공부하는 분위기를 일신시키기도 했다. 스님이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추대된 것은 1981년1월 바로 전해 불교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10/27법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다. 5공을 출범시킨 신군부가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불교를 탄압한 10/27법란은 불교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님은 이런 와중에 종정으로 추대되어 실추된 불교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회 일각에서는 스님이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는데 너무 소극적이지 않았으냐는 지적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님은 종정에 취임하던 해에 종단의 간부들에게 출가자에게는 출가자의 본분이 있다. 치열한 구도정신을 가지고 견성성불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실현하라. 그리고 올해부터는 싸움을 하지 마라. 싸움으로 인하여 타율적인 정화를 당하게 된 것 자체가 잘못이다. 출가자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일대사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라고 밝힌 견해는 그러한 세간의 오해를 씻어 주고 있다고 본다. 영결식에서 당시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추도사를 통하여 스님은 병든 세상에 조각으로 기운 누더기 한벌로 몸을 가리고 장좌불와와 묵언정진으로 뼈를 저미는 수행자의 생활로 일관했다. 고 추모했다. 또 이민섭 문화체육부장관은 정부를 대표해 스님은 한국불교계의 큰 별이었으며, 이땅과 겨레의 위대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스님은 우리 시대의 뛰어난 선승으로서 국민의 정신적 귀의처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도했다. 이날 영결식장에서는 전국 3천여명의 스님과 10만 여명의 신도들이 운집했고, 정계,재계,주한외교사절,종교계 등의 대표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법구는 영결식장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으로 운구되었고 곧 바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스님은 110과의 오색 투명한 사리를 남겼다. 성철스님의 열반은 각종 매스컴의 유래없는 취재경쟁을 촉발하였고,이런 여파는 비디오계와 서점가를 강타하기도 했다. 비디오계에는 스님의 생애,입적,다비 등의 장면을 영상다큐로 제작하여 다투어 출시했고,서점가의 대형 매장들은 성철스님 코너를 신설,발빠른 상업성을 보이기도 했다. 스님은 가셨으나 스님의 치열했던 구도난행과 일의일발의 승가상은 오늘을 사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귀감이 된 것이다.
종단의 분규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93년3월 종권을 둘러싼 종단의 분규가 일기 시작했다. 총무원장 3선을 둘러싼 서의현 총무원장과 이를 결사반대하는 실천승가회,선우도량,중앙승가대,전승련 등 8개 단체가 결성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이 사건의 발단은 표면적으로는 종헌에 명시된 총무원장이 임기는 4년이며 중임할 수 있다.는 자구의 해석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원장측은 중임을 단2번이 아니라 거듭할 수 있다는 뜻으로 결론짓고 3월30일 경찰 병력의 보호속에서 임시중앙종회를 개최,서원장의 3선을 의결했다. 이에 앞서 범종추등 재야불교에서는 조계사에서 단식과 비폭력 구종농성에 들어갔고,집행부측은 이를 해산하기 위하여 폭력배를 동원 농성중인 스님들을 무차별 공격했다.이를 빌미로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범종추 소속 승려,신도 등 476명이 연행되었고 연행과정에서 도각 스님등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폭력배 동원과 경찰병력 투입등의 초강수를 쓴 서원장측의 악수로 말미암아 모든 불교도는 범종추의 대열에 합류케 되었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서원장의 사퇴로 일단락되었고 4월15일 제113회 임시중앙종회는 10대 종회를 해산하고 전권을 종단개혁회의에 일임한다. 존단개혁회의(월하스님)는 서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기 사흘전인 4월10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대회는 서원장 공직박탈과 동대회의 개최를 반대한 서암 종정 스님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했다. 서원장측과 범종추측의 대결은 결국 종단개혁회의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이 사건은 2가지의 문제를 남기게 된다. 하나는 부당한 공권력이 또 한번 불교계를 탄압한 사례를 더했고 또 하나는 전국승려대회가 현직 종정 스님을 불신임한 선례를 만든 점이라 하겠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종단개혁회의는 정법종단의 구현,불교자주화의 실현,종단운영의 민주화,청정교단의 구현,불교의 사회역할 확대라는 5대 지표를 설정하고 8개월 동안 차기 종단구성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1994년 11월21일 조계종은 316명의 선거인단에 의하여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송월주 스님을 선출하고 이보다 앞선 11월16일에는 제11대 중앙종회가 개원되어 설정 스님이 의장에 선임된다. 종단개혁회의가 8개월간의 작업끝에 마련한 새로운 종단 출범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종단의 권력구조라 할 수 있다. 서 전원장 체제으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총무원장의 종권 독점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총무원, 포교원, 교육원의 3원이 각각 독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집행부서로서 업무를 분장하게 된다. 또한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등 주요 직책은 겸직이 금지되었다. 어쨌든 1994년11월 조계종단은 과거의 권위주의와 독선적 운영형태를 지양하고 제도개혁등의 새로운 과제를 안고 출범하게 된다.개혁종단은 출범과 동시에 중앙신도회의 구성과 중앙승가대학 정규대 승격 및 학사이전,그리고 선학원,대각회 등 문제해결과 태고종과의 분규사찰문제 해결을 제일의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현재 뚜렸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앙신도회 결성에 대한 문제는 2~3차례나 그 결성시기를 늦추어 왔다.재가 신행단체에서는 신종헌 종법에서 규정한 중앙신도회법이 신도들의 자율성을 배제하였을 뿐 아니라 승단과 재가의 관계를 종속적으로 만든 악법임을 문제점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지난 40년간 종단의 실질적 외호세력으로 관계를 종단이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것도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부정적으로 비쳐지고 있다.
중앙승가대학은 종단과 대학의 여러 가지 노력 끝에 정규대학으로 승격하였으나 학사 이전문제는 몇차례의 번의와 진통 끝에 김포 금정사 부지로 이전할 것을 결론 지은 외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승가대학의 이전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예산확보가 급선무인데 종단은 94년에 20억원, 96년에 50억원을 예산 책정하였으나 실제 확보된 금액은 미달이라는게 주위의 시각이다.
또한 선학원 등의 문제도 별 진전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조계종단이 형님된 입장에서 크게 포용하는 입장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학원 이사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는 등 초 강경책을 고수한 데 따른 반작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태고종과의 분규사찰 해결에 대한 노력도 원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잇다. 개혁종단은 과거의 개인적 독선적인 경영방법을 탈피, 대화와 인내로 제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본래의 의지와는 달리 앞서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너무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또한 청정한 계율을 생명으로 삼는 종단의 승풍이 벼랑 끝에 와있음을 인식한 안목있는 스님들이 중앙종회를 통하여 승풍쇄신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이마저 한계에 부딪혀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종단 협의회
28개 종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는 이제까지 전 불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구였는데 1996년7월 드디어 분열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즉 조계종단과 이에 동조하는 소수의 종단에 대항하여 다수의 종단이 종단진흥회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것이다. 종단진흥회가 창립을 선언하고 기자회견에서 조계종단의 독선을 비판하고 나선 것으로 보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분열은 조계종의 포용력이 너무 적지 않았느냐는 풀이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조계종 개혁종단은 출범 이후 개혁의 의지를 달성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문민정부의 탄압
한편 문민정부를 자칭하고 나선 김영삼 정부(1993~1996)는 출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 등 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억지논리를 전개,일신교적 흑백사상으로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누를 범했다. 단군성조이래 5천년 역사를 싸잡아서 비난 매도하는가 하면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곳곳에서 죄없는 연꽃이 뽑혀 나가는 수난을 당하고,이 시대에 편승하여 일부 몰지각한 종교단체들이, 각급 학교교정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우리민족의 뿌리이자 근원인 단군상을 파괴하고,훼손하는 등의 민족성이 의문되는 어이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1993년1월4일 육군 제17사단 전차부대장이 불교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부대 내 법당을 폐쇄하고 불상을 유기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경남지사가 부임 직후 관사에 모셔져 있던 미륵반가상을 창고에 폐기처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달에 공보처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5개소의 불교방송 지방국 설립 약속을 깨고 2개소의 지방국 신설만을 허가했다.
1995년 12월에는 김영삼 씨가 국방부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보며 인접해 있는 중앙법당의 불자들에 대하여는 경호상 문제라 하여 출입통제를 하는 등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졌다.
1996년 4월에는 수유동 소재 삼성암과 본원정사가 이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방화로 인하여 대웅전,나한전,범종각이 전소된 데 이어 이웃에 위치한 화계사 대웅전이 전소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계속하여 불교를 말살하려는 의도적인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부의 불교편향정책과 이에 따른 훼불사건들은 위정자의 일신교적인 뱉타사상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되며 여기에 반사작욕이 가세함으로써 기독교 광신자들의 사찰방화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이 계속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에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하다른 일반 상식을 뛰어넘어 정권의 수장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타종교를 박해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어 냈으며 또 한번 불교계는 관권으로부터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
1970년대 초반에 일반 불자들의 교육기관으로 대원불교교양대학이 첫 출범을 한 이후 80년대에는 40여개의 불교교양대학으로 늘어났고, 96년말 현재로 보면 1백수십여개에 달하는 교양대학이 생겨 학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들 불교교양대학은 교리와 의식은 물론 설법실수 범패 등 전문분야까지 교육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일반불자들의 불교이해수준은 전례없이 높아졌다고 하겠다.
1992년2월에는 불교진흥원이 불교문화센타를 개원하여 다도,꽃꽂이,건강강좌 등 40여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불교교리만 아니라, 생활강좌 등으로 그 폭을 넓히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교양대학 개설른 신행단체 등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90년대 들어서는 도심포교원인 강남포교원,은평포교원,능인선원,구룡사 등이 합세하여 불자교육의 상당부분을 떠맡게 된다. 이 시기에 불교 장의는 불자의 손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광주의 능인상조회, 서울의 연화상조회 등이 뿌리를 내리고 불교문화센타에서는 염습을 포함한 장의 교육을 무료로 시작하게 된다. 불교계의 수련장은 주로 일반 사찰에서 이루어졌으나 80년대 초기 직지사 수련원이 개원을 한 이후 화성군 소재 신흥사 청소년수련원,불교진흥원이 설립한 괴산의 다보수련원 등이 명실상부한 불교수련도량으로 일익을 담당하기 시작한다.또 이 시기에는 송광사,해인사,통도사 등이 일반 불자들이 수련을 직접 유치하여 사찰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수행방법을 활용,적극적인 자세로 겨울과 여름 수련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한 사찰이 한 철에 5~6차례 수련대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일반 불자들의 호응이 높았다.
불교단체
1994년7월에는 한국불교재가연합회가 창립되어 개혁종단과는 수레의 양바퀴 같은 역할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한상범교수,안동일변호사,이문옥 전 감사관 등의 주도로 이루어진 재가연합은 종단이 중앙신도회를 조계종 예속단체로 별도 설립하겠다는 뜻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초창기 창립의도와는 달리 독자성을 잃게 된다.
다음해인 1995년 1월에는 교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새로운 재가 신행단체인 한국불교재가회의가 공식출범한다. 서돈각 불교진흥원 이사장,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장,이윤근 금정학원 이사,김종서 한국교육개발원 이사,고은 시인 등 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공동대표로 선임된 이 모임은 순수 재가 신행단체임을 표방하고 이 시대의 안일한 불교계를 대승적 현실참여의 불교로 이끌어 올리자는 취지하에 창립되었다. 재가회의 사업 중 특기할 만한 일은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 반대운동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 운동은 전국민의 절대적인지지 속에서 고속전철 경주진입을 막아내는데 성공을 이루었다. 이보다 앞선 1993년 7월에는 실천불교승가회,경제정의 실천불교운동연합회,조국평화통일불교연합회 등 17개 단체가 연대하여 전국불교운동연합이 탄생된다. 전불련은 승가와 재가 및 시민운동단체를 포괄하고 불교 사회운동의 적극적인 활성화를 도모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인 인권 노동 통일 등 다방면의 시민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단체는 개혁종단의 출범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된다.이 시기에 소설 우담바라의 작가 남지심 씨와 서강대학 박광서 교수가 공동대표로 창립한 신행단체 우리는 선우가 신선한 신행운동을 표방,불교계에 뛰어 들었고 불자가수회,기사불자회,보이스카우트불자회 등 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사)한국불교법사회,교사불자회 등이 전국조직으로 발돋움을 시작한 것도 이 때를 전후한다.
이 시기에 사회를 향하여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불사가 있으니 이는 무소유의 상징 법정 스님이 제창하고 전 불교계가 호응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이라하겠다. 이 운동은 우리의 마음과 세상,자연을 본래 모습대로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순수시민운동으로 연꽃스티커의 대량보급,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등의 확산을 통하여 97년말 현재3천여명의 회원이 이 일에 봉사하고 있다.
1996년 1월 불교진흥원과 청년회,우리는 선우,재가회의 등 7개 단체가 연대하여 시작한 깨끗한 마음 깨끗한 세상운동 또한 순수 사회정화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참신한 불사라 할 수 있다. 96,97 두해 동안,부산,광주 등 전국10여개 도시 순회강연회를 비롯한 기타의 행사는 많은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으며 이 운동의 실질적 대표인 청정운동연합회 서돈각총재은 이 불사를 계속 사업으로 할 것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한편 1995년 개혁종단은 거국종단적으로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을 제창하고 각종 이벤트 등의 대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깨사운동본부는 2년 동안 8억여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구호사업에 1억원,단체운영지원 등에 3억5천만원,연구비,인건비 등 7천만원이 쓰여졌다.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성된 기금과 쓰여진 사업비의 규모가 엄청난 것은 개혁종단의 새로운 의지를지지하는 불자들이 많았음을 반증했다고 볼 수 있다.또한 승풍진작을 기치로 내걸고 1990년 출범한 소장 및 중진 승려들의 승가결사단체인 실상사의 선우도량은 서둘지 않는 가운데 종단 내외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처방법을 연구,대안제시 등에 주력하고 있다. 선우도량은 그 동안 개혁종단에 대한 평가와 종단의 방향모색,현대문명의 흐름과 불가의 대응방안,승단질서의 축을 이루는 계율문제 등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특히 계율문제에 대하여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청규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청규의 범위는 계율을 근간으로 하되 환경문제에 대한 실천규범,향락,소비문화에 대한 불교적 처방과 대책,소유에 대한 불교의 입장,남녀평등 관계 등 광범위한 부분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중론이다.
1992년 2월 조국평화통일추진불교인연합회(평불협)가 내외의 관심 속에 창립되어 초대 회장에 송월주 스님이 선임되었다. 평불협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대북 불교활동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취지와 불교적 통일이념의 발굴 및 보급,성지순례와 문화재교류 등 사업목표를 설정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보다 1년 앞서 북한을 수차례 방문한 바 있는 신법타스님의 중재로 남북의 불교계 대표들이 분단 47년만에 미국의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첫 대좌를 하게 된다.1991년10월29일 남쪽의 대표로는 송월주,전운덕,서의현,도안 스님등이 동참하고 북측 대표로서는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인 박태호선사와 조불련고문,황화두선사,심상연 조불련서기장,리동철 조불련 평양시지부장 등이 참석했다.
1996년5월에는 중국베이징에서 두 번째 남북한 불교계 대표들의 모임이 성사되었다.3년 반만에 송월주 스님과 박태호위원장이 다시 만난 것이다. 평불협은 설립 이후 북한과 관련한 각종 세미나와 공청회를 개최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이념 정립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고 협회 회원간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정기간행물을 발간 보급하는가 하면 북한불교의 자료수집 등을 위하여 산하에 북한불교연구소를 설립,단행본 북한의 사찰을 발간하기도 했다.
1992년 신법타 스님이 검찰에 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재판결과 무죄가 확정되는 넌센스가 있기도 했다.
김영삼정부 출범을 전후한 이 시기에 남북문제는 정책의 일관성 상실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었으나 불교계는 평불협이라는 하나의 기구를 통하여 의연한 대응을 해왔다고 보여진다.
1996년말 북한 기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범종교계의 합의가 있은 후 불교계는 북한 쌀 보내기운동본부를 설립,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이 운동은 법륜스님의 원력이 큰 힘으로 작용했음이 사실이다.
해외포교
한국불교의 해외포교는 1996년 재일본 홍법원의 설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나 조직적인 면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스님이나,법사,개인이 현지와 인연이 되어 자신의 안목과 역량에 따라 포교당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 할 수 있다. 물론 독자적인 개척이므로 어려움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 이제는 세계각국 곳곳에 한국사찰이 세워졌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부처님 성지인 인도에 까지 그 힘이 미치고 있다. 네팔 품비니 국제사원지역에 대성석가사(도문스님),사르나트의 녹야원(도웅스님),부다가야의 고려사(월우스님),쿠시나가라의 대한사(성관스님) 등이 이미 세워졌거나 한창 공정 중에 있다.또한 영국,독일, 등 서유렵 일대는 불교계가 꾸준히 늘어 1천여개의 불교단체와 3백만명을 육박하는 불교신도가 있다는 것이 현지소식이다. 기존의 미주지역 불교계 또한 양적인 성장을거듭하고 있으며 최근의 특기할 사항은 미주한국불교방송(담오스님)과 한미불교방송이 전파를 통한 포교활동에 들어갔고,캐나다 토론토에서도 불교방송이 전파를 발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중국,러시아 등 폐쇄 사회주의국가에도 적지 않은 한국사찰이 건립되어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천태종,진각종,한마음선원의 중국 등 해외포교 진출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독도영유권 문제,정신대할머니들에 대한 보상문제 등으로 계속 갈등을 빚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하여 불교계는 재일본 고려사와 연계하여 한일과거청산범국민운동본부(태연스님)를 발족, 각종 세미나 등을 개최하고 정부와 일본에 공식입장을 표명하는 등 현실문제에 직접 나서고 있다. 기존의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홍파스님) 또한 1981년 이후 한,일 공동관심사에 대한 학술발표회 등을 통하여 양국의 이해도를 높여 가고 있다.
세계학술교류
1995년 5월 창립된 삼국불교우호교류회의도 한,중,일 동양 삼국의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로 가장 잘 알려진 세계불교우의회(W,F,B) 한국본부는 1989년5월 서울에서 제17차 대회를 마친 후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해외포교 역사는 숭산스님이 1996년 도쿄에 재일본 홍법원을 설립하면서 부터이다. 숭산스님은 지금까지 세계32개국 112곳에 선원을 개설하고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불교를 전파했다. 스님으로 부처 인가를 받은 외국인 납자,법사가 1천명에 이르고 세계 도처에 5만여 불자가 한국식 참선 수행을 하고 있다. 1996년6월 숭산스님의 해외포교30년을 결산하는 기념대법회가 성황을 이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지금도 화계사 내에 위치한 국제선원에는 벽안의 납자들이 이 뭣꼬의 화두를 틀고 면벽에 열중하고 있다. 이 시기에 한국불교학계는 큰별 불연 이기영박사를 잃게 된다.1996년11월9일 오전 이기영 박사는 불교진흥원이 주최하고 자신이 주관하는 국제학술세미나장에서 기조연설을 마친 후 선사의 좌탈입망같이 홀연히 떠났다. 그는 불교에 미치고 원효에 미친 분이었다. 누가 뭐라해도 이 시대 이 땅의 불교학연구에 새 지평을 개척한 분이다. 문헌학 위주의 불교학에 역사적 방법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해박한 산스크리트어,프랑스어,일어,영어,한문 실력은 사상 정립에 밑거름이 되었고 비교종교라는 관점에서 동서양을 넘나든 학문적 혜안의 경지는 이 땅에 우뚝했다. 그는 원효의 귀일심원,요익중생그리고 화쟁의 화두를 들고 한평생을 미친 듯이 살았다. 학자로서 학문에 우뚝했고,불교대중화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여 신행단체 구도회와 원효학당에 신명을 바쳤으며 말년에는 재가불자회의 공동대표로서 누구를 이끌고 경주고속전철 도심통과반대를 외치며 이의 관철을 주도하기도 한다. 불연 이기영박사의 타계는 불교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나 후학들에게는 그들의 안일함을 꾸짖는 더없는 경종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3년10월에는 해인사에서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장에서 한국의 서여 민영규박사와 전 일본 교토대학교수 야나기타 세이잔 박사가 만났다. 한,일 두 원로 라이벌은 각자의 스승들에 의해 반세기 전에 촉발했던 논쟁 초기 선종사의 계보문제로 다시 부딪쳤다. 중국의 호적과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쓰 사이에 벌어진 국제적학술논쟁이 재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에서도 서로의 입장이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시기에는 학술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보존과 전산화를 위한 장경연구소의 설립, 지관스님의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설립은 특기할 사항이다.
1993년3월 제1회 입학식을 가진 진각종의 위덕대학개교는 불교계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위덕대학은 불교학과를 신설함으로써 능력있는 불교계 소장학자를 활용한다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지난 64년부터 팔만대장경 역경사업을 추진해 온 동국역경원은 한동안의 부진을 씻고 1994년 정부의 지원재개를 계기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국고지원12억원과 자체조달14억원 합계26억의 예산으로 4년간에 걸쳐 매년26권씩 114권을 간행 총250권의 국역 팔만대장경을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93년말 역경원 제4대 원장으로 월운스님은 재임 중에 이 모든 불사를 회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있어 기대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출판/문화사업
1990년대의 불교출판계는 역경원의 역경사업 활성화와 함께 다방면에서 발전을 이룬 시기라 할 수 있다. 불교방송 인기프로인 고승열전시리즈10권 완간,불교진흥원 발행의 통일불교성전,청소년불교성전,설법자료집 그리고 해방후 처음으로 펴내진 한국불교총람,학술정보지 계단 다보 등은 특기할 사실이다. 불교학술 전문출판사로 이미지를 구축해 온 민족사는 깨달음 돈오점수인가,돈오돈수인가를 펴냄으로 불서 단행본 1백권 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송광사 학인스님들과 보조사상연구원을 중심으로 펴낸 아함경,법구경,해인사 무비스님과 김무두씨가 펴낸 화엄경 그리고 성보문화재연구원이 펴내기 시작한 화보집 한국의 불화,미술사학회 최완수씨가 펴낸 명찰순례,김호성끼의 천수경이야기,일타스님의 백일법문집 등은 큰 수확이라 여겨진다. 이 시기에 현대불교가 주간지로 창간되었고 국내유일의 어린이 월간지인 동쪽나가가 폐간을 맞는다. 어린이 포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사비를 바쳐 가며 애써 온 발행인 김형균 불지사 실장은 수억원을 빚진채 두손을 들고 말았다. 96년 폐간을 전후하여 이를 살리고자 하는 그의 몸부림은 주위불자들의 눈시울을 달구기도 했으나 끝내 불교계는 어린이 유일의 포교지인 동쪽나라의 폐간을 외면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소설에세이로는 석용산스님의 여보게 저승갈 때 월 가지고 가지.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최인호씨의 길없는 길. 고은씨의 화엄경,남지심씨의 우담바라등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번역서인 환생,전생요법 등 윤회사상과 밀접한 책들이 일반인의 호응을 얻어냈다. 1994년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번역하고 사회과학출판사가 간행한 팔만대장경해제(전15권)가 중국을 거쳐 국내에 시판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1995년 불교방송국이 주최하고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한 세계불교문화대전이 9개월 동안 용인자연농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받기도 했다.이 전시회에는 동남아 각국의 국보급 불교유물이 전시되었을 뿐 아니라 72년 인도정부에 의해 공식 발견되고 공표된 바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가 국내 첫 공개되는 계기가 되었다.96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라승 김교각 스님의 유품전시회도 주목을 끈 행사였다.
1991년 경주군 소재 기림사 문화재전시관의 개관을 전후하여 양산통도사,밀양표충사,보은법주사,김천직지사,영주부석사 등의 성보전시관이 문을 열었으며 개인 박찬수씨가 여주에 목아박물관을 건립 일반에 공개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96년 충북진천에 건립된 보탑사(지광스님)는 1천년만에 재현한 목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화재전문위원인 신영훈씨가 5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우리의 것을 되살린 것이다.
1995년말 세계적인 작곡자 윤이상씨가 독일의 베를린자택에서 별세했다. 생전에는 알지 못하던 그이 불교적 삶이 재조명되나 불교계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49재등 추모의식을 주도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쾌거로는 세계문화유산위원회가 종표를 포함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팔만대장경판 및 판고를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공식 등록한 것이라 하겠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날로 훼손되고 사라져가는 문화 자연유산 등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설립한 국제기구로서 등록유산에는 많은 혜택이 주어지게 된다. 영구보존을 위한 전문가의 기술지원과 상당하는 재정지원이 뒤따른다. 이웃의 중국,일본 등에 비하면 늦은 감이 있으나 불교계는 이를 계기로 용의 주도한 문화외교와 유적보존차원의 자체정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같은 시기 송광사에 모셔진 고려조 16국사 영정(국보56호)도난 사건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불교계 문화유산이 이토록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나,어찌하여 이런 불상사가 있을 수 있는가 아연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환경적인 문제
한편 골프장,대형아파트군,위락시설 등이 천년고찰 경내까지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불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하겠다. 물론 불교계가 이들 이권단체들과 맞서 힘든 투쟁을 벌이고는 있으나 정작 이를 보호해야 할 관권은 뒷짐을 지고 방관하느 태로를 일관함으로써 불교계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경내지의 골프장 건설,범어사 입구의 고층아파트 건설, 봉은사 옆 터의 초고층빌딩건설 등의 위협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예술/사회복지 문제
불교연극,불교음악계는 꾸준한 발전을 보여왔다. 민예극단,극단둥지,온누리극단,어울림극단,치악무대 등이 공연을 이어가는가 하면 음악은 불교방송합창단을 필두로 박범훈,정옥녀,연정숙,김성국 씨 등의 리더가 각급단체의 합창단을 맡아 수시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다.또한 봉원사에서는 옛소리를 살리자는 취지아래 영산재 등을 재현,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90년대 들어서 불교계의 복지 부분이 특별히 눈에 띄게 신장세를 이룬다. 양양에 건립된 사회복지업인 보리수마을은 360가구가 입주할 수 있는 유로양로원으로 입주가 시작되었다. 가평의 성라실버타운(법성스님)또한 100가구의 입주가 시작된다. 능인종합사회복지관(지광스님) 또한 청소년,노인 장애자들을 위한 메머드회관이 준공되고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도선사가 20년간 운영해 오던 시흥의 혜명양로원과 보육원도 면모를 일신하고 청담종합사회복지관으로 규모도 커졌다. 서울 길음동의 길음복지관,예천 연꽃마을이 건립한 희망의 집, 통도사 자비원,목동 청소년회관,양천구민체육회관,삼전종합복지관,합동마을복지관 등 가히 종합복지관 러시를 이룬다. 불교계는 이들 종합복지관 외에도 소규모의 단위 고아원,양로원,수화,점자교실,요양원이 늘어나게 되었고, 자비의 전화 등 상담기관,봉사단체가 급격한 증가추세를 이루었다. 종단의 원로 석주스님이 평생의 원력을 모아 온양에 양로원 불사를 시작한 것도 기억할 일이다.청주,성남 등 7개처의 무료불교병원을 개설하고 용인의 연꽃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각현 스님의 봉사활동 또한 주목할 대상이다.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어 고통받던 정신대할머니들의 안식처이인 나눔의 집 개관 또한 역사의 아픔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불교계의 큰 보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 시기에 원주 소쩍새마을 원장의 원생 성추행사건이 돌발하여 교계의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소쩍새마을을 중앙승가대학이 인수 운영함으로써 실추된 위상을 회복한다.
납골당/생명문제
한편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묘지난 해소문제를 둘러싸고 교계는 화장장려,납골제도 활성화방안 등에 대한 대안제시를 위하여, 십수차례의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개최하였고, 음성,군포 등지에 납골시설이 자리잡는다. 불교교리상 주검이 헌옷을 벗는 것이라 한다면 매장고수와 호화장례 호화분묘를 구태여 고집할 이유가 없으며 기왕 놓고 갈 육신 깨끗이 화장하여 작은 공간에 안치하자는 일련의 운동은 많은 불자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납골시설의 확대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육신을 살아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뜻에서 각막 및 장기기증본부가 설립된다.이어서 생명공양실천본부가 활동에 들어간다. 감로심장재단의 출범도 이런 맥락에서 이어졌다고 보여진다. 이 시기 보육사교육,간병인교육 등 각종 단위교육과 실제적인 봉사활동이 크게 일어났으며,재소자를 위한 연합기구가 발족되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보호와 복지 등을 위한 외국인 노동자마을의 활동도 돋보였던 시기가. 복지분야에 좀처럼 눈을 돌리지 않던 불교계가 이처럼 능동적으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사회참여를 시작하게 괸 것은 90년대 일반 시민단체와 타 종교단체 등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바도 적지 않겠으나 그보다도 불교인들 스스로 불교의 이상인 차방정토사상 즉 예토인 이 땅을 바로 불국정토화 해야겠다는 의지들이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풀이된다.
추록
이상 개괄적으로 1989년부터 1997년 말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약술해 보았거니와 불교계 전반이 이 시기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도약을 이루지는 못했다 할 지라도 뜻있는 이들의 원력과 신심에 의하여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큰 흐름을 보였다고 하겠다.
개혁종단의 출범이 그러하고 순수신행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난 것 또한 긍정적이라 하겠다.
조선조의 지독한 배불의 시대와 일제치하에서의 민족정기말살이라는 암울한시대를 지나 갑자기 맞이하게 된 광복,그리고 이와 함께 몰아닥친 외래사조에 불교계는 그 대응력을 잃고 표류한 것은 사실이다. 그라나 광복50년을 전후하여 이 땅의 불가는 한가지 한가지씩 제몫을 챙기는 일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불교정화의 회오리도 지났고,법란의 상처도 그런대로 잊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 승단은 선우도량이 지적하는 바 그대로 새로운 청규를 이 시대에 맞도록 정비 개선해 나가고, 재가는 자발적인 신행과 봉사활동을 통하여 승단을 외호함으로써 승단과 재가가 새의 양날개처럼 상호 보완관계를 유지해 나갈 때 이 땅의 불가는 찬란했던 옛 모습을 다시 회복하리라 본다.(자료:한국불교총람)
13. 한국불교사 연표
<삼국시대>
372 고구려 소수림왕 2 전진왕이 순도를 통해 불경,불상 전함.
384 백제 침류왕 1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함.
391 고구려 광개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392 고구려 광개토왕 2 평양에 절 아홉군데를 지음.
392 백제 아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417~458 신라 눌지왕 고구려 승 묵호자가 불교를 전함.
452 가야 질지왕 2 수로왕의 왕후 허왕후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를 세움.
479~500 신라 소지왕 고구려 승려 아도가 불교를 전함.
512 고구려 문자왕 21 고구려 승랑, 양무제가 보낸 고승 10명에게 삼론학을 가르침.
526 백제 성왕 4 겸익, 인도에서 율장을 가지고 귀국.
527 신라 법흥왕 14 박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공인.
549 신라 진흥왕 10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양나라에서 귀국.
551 신라 진흥왕 12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혜랑 국통이 됨.
552 백제 성왕 30 일본에 금동불,불경,미륵석불을 보내 불교를 전함.
565 신라 진흥왕 26 유학승 명관, 진나라에서 불경 가지고 귀국.
576 고구려 평원왕 18 의연, 북제에 건너가 불교역사 질의.
577 백제 위덕왕 24 검단, 선운사를 세움.
577 백제 위덕왕 24 일본에 경론과 율사,기술자 등을 보내 일본불교 지원.
576~59 신라 진지왕 진자, 백제에서 미륵화신 미력랑을 맞이함.
595 고구려 영양왕 6 고구려 혜자와 백제 혜총, 일본 쇼오토쿠(백제 위덕왕 42) 태자의 스승이 됨.
601 백제 무왕 2 미륵사 세움.
608 신라 진평왕 30 원광, 수나라더러 고구려 쳐달라는 걸사표를 씀.
(612년,수나라 113만대군 고구려 침략)
610 고구려 영양왕 21 담징, 일본에 불교,유학,그림,제지법 등을 가르치고 법흥사 금당벽화 그림.
612 고구려 영양왕 23 살수대첩에 일곱 승려 공헌.
613 신라 진평왕 35 수나라 사신을 위해 황룡사에서 원광을 우두머리로 백고좌회 개최.
643 신라 선덕여왕 12 자장, 왕의 요청에 따라 당에서 귀국.
643 고구려 보장왕 2 당에 사신을 보내 도사,도덕경 들여와 도교 장려
645 신라 선덕여왕 14 황룡사 9층탑 세움.
650 고구려 보장왕 9 보덕, 백제에 망명.
660 백제멸망 후 도침, 복신과 함께 주류성에서 일어나 백제 국권회복투쟁을 벌임.
671 신라 문무왕 10 의상,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당군침략 정보를 알림. 명랑, 당군 침략 물리치는 밀교의식.
676 신라 문무왕 15 의상, 부석사 세움. 왕의 논,밭,노비 기부를 거절.
<남북국시대>
697 발해 고왕 1 당나라와 불교 외교.
713 발해 고왕 16 발해 사신, 당나라 사찰 참배 허용 요구.
740 신라 효성왕 4 심상, 일본에 화엄종을 일으킴.
751 신라 경덕왕 10 재상 김대성,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53 신라 경덕왕 12 대현, 대궐에서 금강명경 강의.
754 신라 경덕왕 13 법해, 황룡사에서 왕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
763 신라 경덕왕 22 신충, 왕을 위해 단속사 세우고 왕의 복을 기원함.
764 신라 경덕왕 23 진표, 금산사에서 미륵불 조성.
821 신라 헌덕왕 13 도의, 당에서 돌아와 선을 전함.
826 신라 흥덕왕 1 홍척, 당에서 돌아와 실상산파 개창.
845 신라 문성왕 7 무염, 당에서 돌아와 성주산파 개창.
847 신라 문성왕 9 범일, 당에서 돌아와 사굴산파 개창.
864 신라 경문왕 4 도선, 옥룡사 세움.
873 신라 경문왕 13 순지, 당에서 돌아와 오관산파 개창.
875 신라 헌강왕 1 도선, 송악지방 호족 왕륭과 친교.
891 신라 진성여왕 5 궁예, 기훤의 농민봉기군에 참가.
894 신라 진성여왕 8 최치원, 해인사에 은둔.
895 신라 진성여왕 9 궁예, 새 나라를 세움.
898 신라 효공왕 2 궁예, 팔관회 개시.
900 신라 효공왕 4 진훤, 후백제를 세움.
922 신라 경명왕 6 진훤, 미륵사탑 복구, 선운사에서 승려 지도자 선출.
<고려시대>
918 태조 1 왕건 즉위, 팔관회 개시.
921 태조 4 이엄을 왕사로 책봉.
927 태조 10 발해 승려 재웅 등 고려에 망명.
936 태조 19 후삼국 통합, 개태사 세움.
958 광종 9 승과 개시.
961 광종 12 체관을 중국에 보내 천태종 서적 전함.
964 광종 15 균여를 귀법사 주지에 임명.
982 성종 1 최승로, 시무책에서 부패 불교 비판.
987 성종 6 팔관회 폐지.
1010 현종 1 팔관회 재개.
1011 현종 2 거란 침략 물리치기를 기원하여 대장경 간행.
1067 문종 21 흥왕사 세움.
1070 문종 24 의천, 15세에 승통에 임명됨.
1085 선종 2 의천, 송나라에 몰래 건너가 다음해 귀국.
1086 선종 3 의천, 교장도감을 두어 속장경을 조판.
1090 선종 7 의천, 최초의 불교도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작성.
1096 숙종 1 천태종을 열고 국청사를 세움.
1101 숙종 6 참사상 퍼뜨린 광기와 각진을 처벌.
1107 예종 2 여진 정벌, 옛땅 회복 투쟁에 승군 참전.
1107 예종 2 함경도 정복지에 호국인왕사, 진동보제사 세움.
1129 인종 7 묘청 등,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 건의.
1131 인종 9 묘청, 서경 대화궁에 팔성당 지음.
1135 인종 13 묘청, 서경에서 혁명. 새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함.
1174 명종 4 귀법사 승려 봉기, 개경 승려 반란, 왕정복고투쟁.
1176 명종 6 공주 명학소 민중봉기, 사찰습격.
1177 명종 7 서경 민중봉기, 담화사 근거로 투쟁, 승려들을 봉기군으로 징발함.
1181 명종 11 농민봉기군, 왕실 원찰 봉은사 습격.
1190 명종 20 지눌, 정혜결사 조직.
1202 신종 5 대구 동화사, 부인사 승려들, 농민봉기에 참가.
1217 고종 4 최충헌 타도를 위한 승군 반란.
1231 고종 18 충주 노비해방투쟁 지도자 우본이 몽고 침략군에 항쟁하여 물리침.
1232 고종 19 요세, 백련결사 조직.
1232 고종 19 우본이 이끄는 노비, 승군 2차 노비 해방 투쟁.
1232 고종 19 개경 노비, 승려 봉기.
1232 고종 19 김윤후, 처인성에서 몽고 원수 살리타이 사살.
1236 고종 23 강화도에서 대장경 새김. (1251년 완성)
1253 고종 40 김윤후, 노비군 이끌고 충주성 사수.
1275 충렬왕 1 일연, 삼국유사 저술.
1328 충숙왕 15 무기, 석가여래행적송 지음.
1348 충목왕 4 원 왕실의 장수,행복을 빌기 위해 경천사 대리석 탑 세움.
1356 공민왕 5 보우, 왕사가 되어 승직 임명 관장.
1365 공민왕 14 신돈, 국정의 전권을 맡아 개혁정치.
1366 공민왕 15 신돈, 전민변정도감 설치, 권문세족이 강탈한 토지 환수, 노비해방.
1371 공민왕 20 신돈 처형후 보우를 국사로, 혜근을 왕사로 책봉.
1388 우왕 14 신조, 이성계의 참모로써 위화도 회군에 주요 역할.
1388 창왕 1 이성계 심복 조인옥, 불교배척 상소.
1391 공양왕 3 박초,김초 등 불교배척 상소 잇따름.
<조선왕조시대>
1392 태조 1 도첩제 강화로 승려 출가 억제. 무학을 왕사로 임명.
1402 태종 2 사찰 토지 몰수 시작.
1406 태종 6 사찰 수 제한 조치.
1406 태종 6 성민 등 탄압조치 시정 호소.
1406 태종 6 해선, 지붕개량사업 자청.
1424 세종 6 불교종파 통폐합 조치.
1427 세종 9 천우 등 온천치료 기금 설치 청원.
1433 세종 14 태평관 짓는 일에 승려 동원.
1461 세조 6 간경도감을 두어 주요 경전 번역,간행.
1464 세조 9 왕실 원찰 원각사 세움.
1471 성종 2 염불소 금지.
1492 성종 23 도첩제 폐지, 무단출가 승려 환속조치.
1503 연산군 10 승과 폐지.
1516 중종 11 사찰 토지,노비 몰수.
1535 중종 30 태안반도 운하 공사에 승려 동원.
1550 명종 5 보우 등용, 불교 부흥.
1552 명종 7 도첩제,승과 부활.
1559~ 명종 14~17 임꺽정의 봉기. 1562
1565 명종 20 보우, 제주도에 유배되어 살해됨.
1566 명종 21 도첩제,승과 폐지. 승려 출가 금지.
1589 선조 22 정여립의 혁명 모의에 구월산,지리산, 송광사 불교 세력 참가.
1592 선조 25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승군이 일어남. 공주 의승군의 청주성 탈환, 휴정의 전국 승군 조직.
1593 선조 26 의승군, 평양성 탈환,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
1593 선조 26 윤눌 등 의승군, 이순신의 수군에 참여
1597 선조 30 의승군, 울산,석주관 전투 참가.
1598 선조 31 의승군과 수군 협동작전으로 노량대첩.
1598 선조 31 이몽학의 민중봉기에 승려들 참가.
1604 선조 37 유정, 일본에 가서 강화회담, 포로 송환.
1623 인조 1 승려 도성 출입 금지.
1624 인조 2 평양성 재건에 승려들 동원.
1627 인조 5 후금이 침략하자 명조, 의승군 일으킴.
1636 인조 14 청이 침략하자 각성, 의승군 일으킴.
1669 현종 10 대흥사에 휴정의 사당 표충사세움.
1688 숙종 14 여환의 미륵혁명 운동.
1687~ 1697 숙종 13~23 장길산 유격대의 투쟁.
1696 숙종 22 뇌현 등,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 영토권 확인 소송.
1697 숙종 23 장길산과 연대한 민중불교혁명운동 발각.
1728 영조 4 이인좌의 반란에 지리산 승려들 참가.
1758 영조 34 황해도 농민들의 존경을 받던 `생불 여인 처형 당함.
1763 영조 39 황해도 미륵신앙자 처형.
1785 정조 9 함경도 거사 집단과 미륵교도의 봉기모의.
1785 정조 9 용파, 관리들의 사찰 수탈 시정 호소.
1826 정조 26 백파, 선문수경 지음.초의,김정희와 논쟁.
1851 철종 2 성월, 구월산 봉기에 참가.
1867 고종 4 순성, 명화적을 조직하여 서울,경기의 양반 부호,관가 습격
1870 고종 7 이필제, 지리산 대원암을 근거로 혁명운동.
1892 고종 26 선운사 마애미륵불 비결사건.
1892 고종 26 승려출신 서장옥, 동학 삼례집회 주도.
1893 고종 27 서장옥, 서울에서 대자보 등으로 반외세운동 주도.
1893 고종 27 동학 보은집회 당시 남접진영에 호남 승려들 참가.
1894 고종 28 갑오농민전쟁에 민중불교세력 참가.
1895 고종 32 일련종 승려과 옴. 승려의 도성출입금지해제를 청함.
1897 고종 34 승려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함.
1899 고종 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하여 각 사찰에 분배함. 동대문밖 원흥사를 세움.
1902 고종 39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삼고, 사찰령36조를 정함.
1908 순종 2 원종종무원을 건립함.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임명함.
1910 순종 4 승려들의 취처의 자유를 의논함. 임제종을 창설함.
<일제시대>
1911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 사찰령 시행규칙을 분류함. 30본사를 설정함.
1912 조선불교선교양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함.
1913 스리랑카승려 달마파라가 옴. 불교흥릉회를 발족함.
1917 불교진흥회를 설립.
1920 불교청년회를 설립.
1921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립.
1922 불교유신회를 만듬. 사찰령 폐지 등을 조선총독부에 제출.
1924 불교 지 창간. 원종호법회를 설립.
1927 조선불교중흥회를 설립. 금강산 유점사에서 금강불교청년회를 설립.
1928 사법개정. 각사에 평의원회를 설치. 불교 시찰단을 일본으로 파견함.
1929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함.
1931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동맹의 발기대회를 개최함.
19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함.
1942 조계종법을 발포.
1945 사찰회.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등의 폐지를 결의. 대한민국 불교신종단의 출발
1946 대한민국 성립.
<대한민국>
1947년 선학원에 조선불교 총본원설립(교정 장석상), 태고사 인도 요구.
1948년 5월 제헌국회에 승려 출신 유성갑. 최범술 당선.
1948년 6월 조선불교 제2대 교정에 방한암 추대.
1948년 12월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장에 박원찬 발령.
1949년 9월 유엽. 한보순. 장도환 등 총무원에 난입. 원장 박원찬 등을 감금. 사직 강요
1949년 10월 제3대 총무원장에 김구하 취임.
1950년 5월 제2대 국회에 승려 출신 이종욱. 허영호. 박성하 당선 진출.
1950년 6월 인민군을 따라서 남하한 김해진에 의해서 총무원이 점령당했으나 곧 수복. 불교계 주요인사 납북됨.
1952년 7월 제4대 총무원장에 이종욱 취임.
1954년 5월 이승만대통령 제1차 정화유시 발표.
1954년 6월 조선불교를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개칭
1954년 6월 불교정화운동 발기인대회 개최
1954년 11월 비구측 태고사 강제 점거. 대처승 축출
1955년 1월 종정 송만암, 비구승이 환부역조(換父易祖 : 보조종조론을 가리킴) 한다고 종정을 사퇴하고 대처승측에 가담.
1956년 6월 서울지방법원, 비구측의 종헌 무효 선고. 비구측 항소
1957년 9월 서울고등법원, 비구측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고 판시
1958년 12월 장성 백양사. 비구.대처승간 난투극 연출
1960년 11월 비구들 400여명 대법원 청사에 난입. 6명의 비구 할복 기도
1962년 1월 비구측 종정 하동산과 대처승측 종정 국성우 문교부에 출두하여 통일종단 구성에 서명 날인
1962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 제정 공포
1962년 9월 통합종단 결렬
1970년 4월 대처승측,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
1978년 3월 조계종 재야측,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 조계종 양분.
1980년 10월 개운사측, 조계사측 총무원을 강제 점거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 조계종 총무원 및 전국주요 사찰에 계엄군 투임. 10.27법란.
1983년 8월 설악산 신흥사 신임주지 부임 과정에서 폭력사태 발생. 사망 1명, 중경상 6명.
1986년 6월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창립
1986년 8월 조계종 제 25대 총무원장 서의현 취임.
1988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분종과 창종 사태(30개 가량의 신생 불교 종단 출현)
1993년 11월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 입적
1994년 3월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 3선
1994년 3월,4월 범종추, 구종법회
1994년 4월 13일 서의현 총무원장 전격 사퇴
1994년 4월 13일 조계종 개혁회의 출범.
1994년 11월 21일 송월주 스님 총무원장 당선
1998년 고산스님
1999년 정대스님(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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