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수행이 부족한 승려들의 패싸움 - 간택 때문이다
위 제목의 글은 중국 선종(禪宗) 제3대 조사 승찬(僧璨, ?~606) 대사가 지은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신심명>은 승찬 대사가 수행자들이 마음에 새기라는 뜻으로 남기신 딱 한권의 선시집이다. 선가에서 가장 회자하는 수행 지침서를 꼽으라면 아마도 영가(永嘉玄覺) 스님의 <증도가(證道歌)>와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일 것이다.
<신심명>의 핵심사상은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가르치고 있다. 글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대(對對)를 40대(對)로 갖추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대대(對對)’란 곧 미워함과 사랑함[憎愛], 거슬림과 다름[逆順], 옳고 그름[是非] 등 일상생활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생들이 가진 상대 개념, 즉 변견(邊見)을 말하는 것이다. <신심명>은 간단한 법문이지만 대대(對對)를 떠난 중도법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신심명>은 일관된 논리로서 선(禪)이나 교(敎)를 막론하고 불교 전체를 통해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사상임을 표현하고 있다. 성철(性徹) 스님은, “부처님이 한평생 동안 말씀하신 중도를 이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중도에 대해 <신심명>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신심명>을 총괄적인 ‘중도총론’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신심명>에서는 상대적인 개념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철저하게 부정하고, 상대성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따르게 돼 있지만 그 상대성이 소멸된 곳에 지극한 도(至道)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분별의 기준이 되는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본다면, 이것은 나에게 득이라서 좋고, 저것은 손해가 돼서 싫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신심명>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극락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으랴, 다 내 마음이 모두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승찬 대사의 출생 연도나 가계(家系)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나라 양제 때인 606년에 입적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스님은 출가하기 전 이미 거사로서 불교에 입문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병에 걸려 온갖 고초를 다 겪다가 2조 혜가(慧可) 선사를 찾아가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 대풍질(大風疾-나병)에 걸려 있습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 그런가 봅니다. 어떻게 참회를 하면 병이 낫겠습니까? 스님께서 참회시켜주십시오.”
이에 혜가 대사가 말했다.
“그대가 죄가 많아 그런 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그 죄를 가지고와서 나에게 보인다면 그 죄를 참회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승찬으로서는 그 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승찬의 말에 혜가 선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됐다.”라고 했다. 혜가 선사의 말은 죄를 찾을 수 없다면 다 공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혜가 선사는 말했다.
“그러니 그대는 불ㆍ법ㆍ승 삼보에 귀의해 안주하라.”
“지금 화상(和尙)을 뵈옵고 승보(僧寶)는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 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며 마음이 법이니라.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또한 그러하니 그대는 알겠는가?”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이에 혜가 선사께서 그가 뛰어난 법기(法器)인 줄 알아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손수 머리를 깎아 주면서, 불교의 근본은 오직 ‘마음’에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서서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리하여 그해 3월 18일 복광사(福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졌다고 한다.
따라서 승찬 대사가 <신심명>에서 강조하는 것도 오직 ‘마음’이다. ‘신심(信心)’은 믿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승찬 대사 말하는 신앙심은 우리가 아는 그런 신앙심이 아니다. 부처님 전에 절을 많이 한다든지, 공양을 많이 올린다든지, 불사를 잘 한다든지, 염불을 많이 한다든지 하는, 그런 차원의 신앙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의 근본문제, 그 마음의 문제를 통해 이상적인 삶을 어떻게 엮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신심의 가르침이다. <신심명>의 첫 구절을 좀 더 검토해보자.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지극한 도를 체득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분별하는 마을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깨달음의 경지는 환하게 명백해질 것이다.」
지극한 도는 결코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고도의 학식이나 풍부한 경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간하고 선택하는 일만 그치면 된다는 것이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는 것처럼,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근심ㆍ걱정이나 갈등ㆍ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진리는 이처럼 단순한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애착하거나 증오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이 지극한 도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道)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 그러나 지극한 도에 대한 정견(正見)이 없이는 <신심명>을 배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설명을 해 나갈 수밖에 없다.
글로써 말을 다 표현할 수가 없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뒷사람에게 전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말로써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지극한 물이다. 물고기와 물은 분리될 수 없으니까. 물고기와 물은 한 몸이다. 그러나 물고기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 허공으로 보인다.
우리가 배우려는 지극한 도(道) 또한 그와 같다. 우리는 도(道) 속에 있다. 도라는 것은 쫓아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인가, 저 길인가' 하고 따진다면 이미 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도는 이상적인 어떤 세계가 아니라 바로 시장 바닥에서 평범하게 움직이는 삶 속에 있다. 단지 어리석음에 덮인 중생이 그것을 깨닫지 못할 따름이다. 그런데 도에는 안과 밖이 없다. 원융무애하기 때문에 안팎이 있을 수가 없다. 그냥 본래의 ‘나’이다. 그래서 승찬 대사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깊은 뜻을 알아야 한다. 도에서는 물과 허공이 다르지 않을뿐더러 일체가 ‘원융무애’하다. 승찬 대사에게는 지극한 도가 삶이 돼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지극한 도는 사람 사람마다 온전히 갖추어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들은 사족을 붙이고 설명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일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본심에 계합해 일체 법이 평등하게 되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다 쉬어버린다.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가 저런가 하는 여우같은 의심이 다 끊어지면 바른 믿음이 곧게 생긴다. 공부하는 우리로서는 불법을 어떻게 믿어야 바른 믿음이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바르게 믿으면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이다. 믿음은 초보자들의 몫이고 깨달음은 부처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분별망상을 떠난 데서 나오는 것이므로 견성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경지에는 모든 법이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예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허물을 안고 들어가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도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직접 체험해서 자기 삶이 돼야 하는 일이다. 지극한 도는 도에 대해서 체험한 만큼, 즉 믿는 만큼 보인다. 요즈음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다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견(正見), 즉 바른 믿음이다.
본래 부처임을 바로 믿는 것이다. 모자라서 보태거나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 함을 바로 보는 ‘정견’을 말한다. 그 게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이다.
도(道)란 진리를 탐구하는 길이니, 지도(至道)라 하면 더 이상 높을 수도 없고, 더 깊을 수도 없으며, 더 넓을 수도 없는 가장 지극한 진리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위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도 하며, 극락세계로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층(心層) 중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아(眞我)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간택(揀擇)’이라 함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가려내고 - 분별하고 택하는 마음이다. 가려내는 것은 몹쓸 것을 가려내는 것이고, 택하는 것은 쓸모 있는 것을 택해서 갖는 행위이다. 예컨대, 쌀과 뉘가 섞여 있을 경우, 쌀을 취하는 것은 택(擇)이고, 뉘를 가려서 내버리는 것은 간(揀)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택하고 버리는 작용을 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 대상을 찾을 때, 신중한 간택심을 가진다. 너무 간택심을 발하다가 혼기를 놓지는 수도 있다. 그리고 종교를 택하거나 자기가 다닐 절을 택하고,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도 간택심이 작용하고, 작게는 먹는 음식을 앞에 놓고도 간택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마음이다. 어쩔 수 없이 간택을 해야 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즉, 지도(至道)를 방해하는 간택이 극심한 환경에 놓여있으므로 도를 이루기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그 역으로, 그러하니까 지극한 도를 이루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나쁘고 싫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취하려는 간택의 마음만 버리면, 지도(至道)가 무난(無難) 해지는 것이다.
‘유혐(唯嫌)’이란 오직 싫어하다, 오직 꺼리다, 오직 혐오하다, 그런 뜻이다. 따라서 ‘유혐간택’이란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취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라는 말이다. 모든 사물과 일을 대할 때 중도적인 안목으로 이해하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삶을 처리해갈 때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자기 좋은 것만 택하고 싫은 것을 함부로 배척할 때 거기에 갈등과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다. 무엇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無上大道)에 계합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다가 보니 문제가 생기고 평화가 무너져서 행복한 삶이 달아난다.
거사 승찬은 나병을 앓았기에 누구보다도 혹독한 차별과 천대를 받는 시련을 겪다가 혜가 선사를 만나 마음의 눈을 뜬 분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삶이란 싫다고 함부로 버리고, 자기 좋은 것만 택하려 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환하게 명백하리라.」
「우리는 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나의 틀을 가지고 본다. 지금까지 살아온 상황들이 나의 기준과 잣대와 틀을 형성해 내 잣대, 내 틀, 내 경험을 가지고 본다. 누구나 이런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 틀에 세상을 맞춘다. 한마디 들으면 바로 평가하고, 이것이 내 기준과 내 잣대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밝히는데 단 몇 초도 안 걸리다. 그리하여 마음에 드는 것은 애착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싫어한다. 미워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이 처음에는 작지만 나중에는 커져서 극과 극으로 치닫게 된다. 거기에서 지옥과 극락이 갈라진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런 점이 심하다. 보수다, 진보다, 하면서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간택이 심하고, 간택이 결국 증애심을 불러오고 증애심이 너무 심해서 결국 귀에 담을 수 없는 비난과 음모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됐다.
“환하게 명백하다”라고 했는데 무엇이 명백해지는 것일까? 지극한 도, 즉 가장 멋진 삶이 증애심 때문에 이상적인 삶이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온갖 것이 마음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이 찌꺼기처럼 우리 팔식(八識)에 다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마음에 들었던 것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떠오르고, 오늘뿐 아니라 어제나 과거 몇 십 년 전에 있었던 것까지 떠올려서 공연히 미워하는 마음이나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한 것들 때문에 우리의 이상적인 삶, 행복한 평화가 있는 지극한 삶이 명백해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것(증애심)만 없으면 환하게 명백하다고 이야기 한다.」- 무비 스님
그래서 대주 혜해(大珠慧海) 선사는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심이 없으면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두 공해 자연히 해탈한다.”고 했다. 즉,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中道正覺)을 이룬다는 말이다.
<신심명>에 여러 구절이긴 하지만 이상의 네 구절이 바로 근본 골자이다. 예전에 낭야각(瑯揶覺) 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낭야각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해 자세한 주해(註解)를 내려 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낭야각 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는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뒤의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다.
그렇게 한 뜻은, <신심명>의 근본 골자는 크게 쓴 구절(앞 네 구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구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구절들은 모두 이 구절의 주해일 뿐,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나머지 구절은 주해 또는 사족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돼버렸다. 그러니 첫 네 구절이 핵심이고 뒤 구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므로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간택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르게 된다. 특히 간택심 중에서도 증애심을 버려야만 한다. 이 증애심만 버리면 구경각(究境覺)은 저절로 성취된다고 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특히 무비 스님과 성철 스님의 글을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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