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육바라밀-지혜

수선님 2020. 10. 1. 11:37

육바라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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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연기·무아·무상에 대한 깨달음 의미
다섯 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의 완성 위한 방법

육바라밀의 마지막 여섯 번째는 지혜바라밀이다. 지혜는 연기, 즉 무아, 무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의 기능은 우리들이 하는 일상의 삶과 인간관계속에서 집착하지 않는 구체적 행위로 드러난다.

적어도 한번쯤 마음공부를 치열하게 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마음작용 가운데 최대의 특징이 “자아”를 창조하는 기능이라는 사실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온갖 사람들, 갖가지 외부적 원인과 사건들에 부딪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결국 마음의 마지막 지점에서 만나지는 것은 우리 자신, 바로 ‘자아’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타인이나 사건,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창조한 ‘자아’를 통해서 그들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행복과 불행의 순간, 사랑과 미움, 질투, 분노 등 모든 심리적 상태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아’가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자아’가 왜 생겨났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상처받고 아파하고 분노하는 ‘자아’를 어쩔 줄 몰라서 수시로 파괴적인 행위에 내몰리게 된다.

불교의 유식 심리학에서는 자아를 창조하는 심리적 과정이 바로 8식 가운데 일곱번째인 마나식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마나식은 스스로 창조한 ‘자아’에 대한 집착, 사랑, 자만, 착각, 무지가 그 특징이다. 지혜바라밀은 바로 마나식의 실체에 대한 명료한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마나식의 실체에 대한 자각은 진정한 자아,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아, 그 자아는 바로 ‘무아’임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창조한 ‘자아’의 실체가 ‘무아’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짜 ‘자아’가 만들어지는 기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아가 만들어지는 심리적 기제와 원인들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 연기나 무아, 무상에 대해 깨달았다고 한다면, 필시 그 깨달음은 불완전한 것이고 궁극의 깨침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변계소집성(偏計所執性). 즉, 요모조모로 계산하고 따져서 만들어진 현상적 자아를 통하지 않고 그 자아 너머의 본질을 자각하는 일은 이치적으로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육바라밀에서 뒤의 다섯 바라밀은 첫 번째 보시바라밀을 온전하게 완성하기 위한 방법들이라고 했다. 지혜바라밀 역시 보시바라밀을 완성하기 위한 최종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지혜바라밀은 보시행이 마나식이 창조한 ‘자아’에 대한 자만을 강화하는지 아니면 그 자아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정화하는 해독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자각력을 높이는 기능을 담당한다.

또 ‘자아’ 중심적인 보시, 즉 ‘자아’의 만족과 충족, 또는 ‘자아’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지의 여부를 명료하게 알아차리도록 돕는다. 이를테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운 보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자아’의 작용, 즉 아만, 집착, 착각, 무지 등과 맞물리면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성과 고통을 양산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조종하고, 억압하고, 심지어는 살인도 한다.

 

서광스님

상대가 준비되어 있을 때, 상대에게 합당하고 꼭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상, 연기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무아를 바탕으로 해야만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금강경’에서 “45년간 설법을 하시고도(법보시) 한 법도 설하신 바가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 궁극의 깨달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서광 스님 동국대 겸임교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