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수선님 2020. 10. 25. 12:05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시각적 동물..인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감각을 통하여 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그러나 동물의 종류에 따라 주된 역할을 하는 감각기관을 서로 다르다.대표적 감각기관으로서 시각,청각,후각 등을 들 수 있는데 새(특히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나 파충류는 주로 시각에 의존하고 포유류의 경우는 주로 후각에 의존하며 박쥐의 경우 주로 청각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 주된 감각기관은 무엇일까?여기에 대해서는 아마 대부분 동의하리라 생각하는데 바로 시각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metaphysica) 서두에서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알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그 증거로써 감각의 애호를 들 수 있다....특히 그 가운데 가장 애호하는 것은 눈에 의한 것(즉 시각)이다....그 이유는 본다는 것은 어떤 다른 감각보다도 우리들에게 사물을 가장 잘 인지할 수 있게 하고 그 각종의 차이를 명확히 해 주기 때문이다."고 해서 이러한 상식을 대변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감각기관중에서 가장 본질적 변화를 겪은 것은 시각이며 반면 다른 감각기관은 퇴행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이러한 눈의 진화는 손의 진화와 함께 나무위에서의 수상생활을 경과하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획득한 것으로 보아진다.수상생활은 지상생활에 비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해 비교적 안전하다.따라서 넓은 시야를 요구하지 않는다.대신에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자재로 건너 뛸 수 있기 위해서는 공간적 거리에 대한 정확한 지각이 요구된다.이것에 대한 적응으로 눈이 얼굴의 전면으로 이동하고 (지상동물의 경우 눈이 얼굴의 측면에 있다.이것은 넓은 시야의 확보를 위해서 필요하다.말은 360도,개는 250도,고양이는 287도를 보지만 인간의 경우 180도이다) 두 눈이 동일평면상에 놓이는 "양안시"(binocular vision)를 갖게 되었다.이것을 통해 사물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입체시각의 최대잇점은 길이,너비.폭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애꾸눈의 경우 이 거리감각에 지장이 생긴다.)이러한 특유의 시각작용이 손의 진화와 병행하면서 정교한 도구를 교묘히 다루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이 시각을 얼마나 중시하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는 언어이다.많은 단어들이 시각적 은유로서 형성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비시각적 대상들 조차 시각적 표상으로 변형되어 있다.예컨대 소리는 "크거나,작거나"하며 생각은 "깊거나,얕거나"하며 시간은 "흐르거나 멈추거나"한다.이 술어들은 소리나 생각이나 시간의 실재적 표상이 아니며 시각적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그송은 대상을 공간적으로 표상할려고 하는 이 태도를 인간지성의 고유하면서도 특이한 경향으로 본다.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장( extension)으로서 사물을 지각하지만 그 때 공간에 대한 관념은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이러한 공간표상은 도구제작자로서 인간이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획득된 것이다.이 논의가 맞다면 인간의 공간표상은 인간이 세계에 던지는 한 가설이며 실재라기 보다는 실재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다.베르그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간이란 등질의 허공이고,무한하며 또한 무한히 분할가능한 매체로서 이러한 종류의 매체는 결코 지각되지 않으며 다만 관념으로서 생각될 뿐이다.지각되는 것은 색깔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물로서 일 뿐이다.그런데 우리가 물질에 대한 우리의 능력,즉 그것을 원하는 대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표상할 때 우리는 그러한 가능한 모든 해체와 재구성을 통틀어 상상적인 확장의 배후에 투영하고 그 확장의 기초가 되는 공허하고 무차별한 공간의 형태를 생각하게 된다.따라서 이 공간은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 인간의 사물에 대한 가능한 행동의 도식인 것이다."(『창조적 진화』)

그러므로 공간적 표상은 실재 그 자체는 아니다.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세계를 3차원상(즉 양안시에 의한 입체시각)으로 표상하지만 세계는 어떠한 차원도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어떠한 차원도 가능하다.전자는 시각을 정보수용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경우이며 후자는 인간과 다른 시각정보 처리시스템을 가진 존재의 경우이다.요컨대 공간표상은 주관적이다.

일찍이 칸트는 공간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시간과 함께)그것을 인간의 세계인식의 주관적 형식으로 보았다.공간은 인간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수용하고 정리하는 틀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경험을 가질 때 는 이미 그 경험은 세계를 순수한 형태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실재의 인식은 불가능한데 칸트는 이것을 "물자체"(Ding An Sich) 라고 불렀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칸트의 추리에는 논리적 비약이 있다.공간표상이 주관적이라는 전제에서 실재의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직접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엄밀히 말해서 칸트의 전제에서는 실재를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 실재의 공간표상이 불가능하다는것 만이 귀결될 뿐이다.그러나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데 주로 시각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꼭 시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또 하나의 세계지각의 중요한 단서는 청각 즉 '소리'이다.여기서 청각에 의한 실재의 인식가능성의 문제를 검토해 보자.

 

또 하나의 세계...들리는 세계

 

1905년 아인시타인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도입,빛을 입자(광자)로 보는 입장에서 광전효과를 설명하는데 성공한 이후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뉴턴이래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재연되었다.그후 드브로이는 "물질파"라는 혁신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입자를 파동의 한갖된 현상태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그후 슈뢰딩거에 의해서 빛은 그 "본질에 있어서" 파동이지만 관찰자의 개입을 통해서 입자로 현상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실증과학인 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양자는 서로 등가이다.)

이 슈뢰딩거의 해석은 좀더 일반적인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다.물질이 파동상으로 파악되는한 세계의 근원적 실체(substance)는 없으며 입자상으로 파악될 때만 그것이 존재한다.그러므로 슈뢰딩거의 해석이 함축하는 바는 근원적 실체는 없으며 단지 관찰이 근원적 실체가 현상(representation)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때 현상하는 실체는 "실재"이라기 보다 인간에 의해 해석된 "가설"일 뿐이다.(물론 필자의 이 서술은 슈뢰딩거의 관점에 대한 너무 지나친 단순화다.그러나 이 논의가 여기서의 주관심사가 아니므로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

칸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 실체는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며,인간이 '공간'이라는 인식의 틀속에서 재구성한(관찰한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공간과 시간속에 포착하는 것이므로) 실재의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재의 인식은 불가능한가? "시각"의 인식의 틀속에 갇혀 있는 이상 그렇다.실재가 실체가 아니라 파동이라면 그것을 파동으로서 지각하는 감각기관만이 실재에 닿을 수 있다.(슈뢰딩거의 "파동"은 우리가 지각하는 바로 그 파동은 아니다.그러나 그 둘이 동일한 파동방정식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그 둘 사이에 어떤 대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각적 지각은 그렇지 않다.

시각적인 지각은 빛이 망막에 닿는 순간,전기적인 성질과 화학적인 성질을 겸한 신호로 전환함으로써 얻어진다.그 신호는 빛에 기인하여 발생하지만 이미 빛의 성질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빛은 실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망막의 후부에 있는 광수용체에서 파동은 디지털신호로 바뀐 다음 뇌에 전달되고 뇌는 이 신호를 미리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재구성해서 이미지의 형식으로 출력한다.

요컨대 시각적 지각은 실재의 재구성이지 실재 자체가 아니다.여기에 반해 청각적 지각은 파동으로서의 실재를 파동으로서 수용한다는 점에서 실재의 "이미지"에 한층 접근해 있다.청각적 지각은 실재와의 공명 (resonance)즉 동조의 방식에 입각하고 있다.좀 난폭하게 말하자면 재구성이 아니라 카피이다.2대의 바이올린을 똑같이 조율하여 그 중 한 바이얼린의 G선을 켜면 다른 바이올린의 G선도 똑같이 울린다.이 원리는 간단한데 첫 번째 바이올린에서 발생한 공기의 파동은 두 번째 바이올린에 가서 부딪힌다.방출된 음과 똑같이 조율된 두 번째 바이올린의 선은 우선적으로 그 파동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 파동의 진동수와 자신의 고유한 진동수가 같기 때문이다.이러한 체계 즉 2개 이상의 동조된 진동자로 이루어진 체계를 공명체계라고 하는데 우리의 귀가 외계를 지각하는 방법은 원리적으로 이와 다를 바가 없다.이것은 "보이는 세계"에 비해서 "들리는 세계"가 훨씬 실재의 본연의 그것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결론은 눈과 귀가 진화해온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눈,귀...그리고 정보의 차이

 

인간은 눈으로 빛을 지각하고,귀로 소리를 지각하지만 빛이든 소리든 그 실재는 파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물론 구체적 성질은 다르다.) 파동은 2가지 기능을 하는데 첫째는 에너지의 운반통로이며 둘째는 정보의 운반통로이다.

빛은 그것이 전달하는 에너지의 양은 엄청나지만 파장이 짧다.그러므로 생명체는 그 구조상 그 파장에 동조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슈뢰딩거가 말했듯이 생명체는 열교란에 안정적일 수 있는 크기 이상이어야 한다.더 이상 작으면 생명체의 형성이 불가능하다.그러나 빛은 훨씬 작다.)그러므로 원시적 생명체의 경우(예컨대 박테리아나 유글레라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 빛에너지는 이용되나 그 정보는 무용지물이다.그러므로 최초의 눈 즉 안점은 에너지 흡수기관이었지 정보수용기관은 아니었다.고등생물체의 진화와 더불어 빛이 주는 정보도 점차 이용되게 되었는데 짧은 파장,즉 높은 진동수의 파동의 경우 불가능한 동조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혁신적 방식이 채용됨으로써이다.즉 연속적인 파동을 불연속적인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서 공간이라는 가상적 장속에 재구성하는 방식 즉 "상"(image)으로써 출력하는 방식의 채용이다.이 방식의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진정한 공간의 의미를 창출한 것이 인간의 "시각"이다.

이것은 동조의 방식에 비해 단위시간당 운반되는 정보의 량이 엄청나게 더 많다는 점에서 극히 효율적이다.(그러므로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장님 보다는 귀머거리가 가혹한 생존환경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크다.)그러나 이 때 얻어지는 정보는 실재의 시뮬레이션이지 실재 자체는 아니다.

여기에 비해 소리는 그것이 전달하는 에너지의 량은 미소하지만 대신에 빛에 비해 파장이 길며 그래서 생명체가 그 파장에 동조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귀는 원시생물에서 최초의 평형기관으로 출현했지만 곧 소리를 수용하는 기관으로 진화했다.(귀의 더 원시적 형태는 모든 감각기관의 모체가 되는 피부이다.)

이러한 논의가 귀결하는 바가 무엇인가?시각은 실재와 간접적으로 매개되어 있지만 청각은 실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왔다는 것이다.보이는 세계 보다 들리는 세계가 실재의 "상"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원래 시각적 사고이며 그래서 시각에 의존하는 인간의 존재파악은 여타 생명체에 비해 특히 간접적이다.그 간접성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연계에 특이한 존재가 되었고 자연이 부여한 원초적 탯줄을 끊을 수 있었다.인간은 "세계내 존재"이면서 세계를 초월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해서 세계의 의미를 묻는 존재이고,필연성을 박차고 자유의지로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이다.세계의 초월은 물질의 영역에서는 도구제작자로서 나타나고 신을 닮은 "세계건설자"로서 나타난다.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마저 초월할 수 있으며 그래서 자신을 꼴똘히 생각하는 자기의식적 존재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긍정적일 수 만은 없는데 결국 인간은 자신을 출현시킨 그 실재에서 분리된 존재임이 드러난다.세계초월은 이념이지 현실이 아니다.그러나 이 이념을 현실로 간주함으로써 자신을 실재에 대립시키는 "오만" (hubris)을 범하게 된다.여기서 자신은 자신과 대립하고,자아는 타아와 대립하며,인간은 자연과 대립한다.모든 것은 팽팽한 전쟁상태에 있으며 소외는 인간본질에 뿌리 박고 있는 심연이다.

실재와의 원초적 접촉을 회복시키는 것만이 인간의 존재조건에 주어진 괴리를 메꾸는 길이다.실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의 회복,그러나 이것은 실재와 자신을 대립시키고 실재를 재구성함으로써 세계를 인식할려고 하는 시각적 지성으로서는 불가능하다.실재에 동조하며 실재에 합일하는 그러한 인식이어야 하며 이것은 "들리는 세계"로 귀를 열음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

 

선,명상,황홀경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실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파동,그 주파수에 자신을 동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의미에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과학이나 철학 보다 훨씬 더 실재에 가까이 다가 있으며 실재의 보다 근사한 "그림"이다.좋은 음악을 듣고 있으면 가끔씩 자신이 실재와 동조되고 있는 듯한 비일상적이고 범상치 않은 체험을 하게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귀는 실재가 현현하는 파동의 대부분을 수용하지 못한다.파동의 극히 일부만이 소리의 형태로 받아들일 뿐이다.그러나 이것은 극복불가능한 한계는 아니다.인간은 실재의 한 편린이며 따라서 인간자체가 하나의 파동이다.우주란 파동이 서로 동조하며(정보를 교환하며),합주하고 있는 거대한 오케스트라이다.그렇다면 인간의 몸자체가 우주의 파동에 대한 공명장치 즉 "귀"인 셈이다.박테리아나 원생동물과 같은 단세포 동물은 따로 귀를 갖고 있지 않다.그들은 몸전체로 공명한다.진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초적 연결을 상실해 버렸다.

 

몸전체를 우주의 율동속에 동조시킴으로써 제한된 주파수에만 반응하는 청각의 기능을 넘어서서 실재와 동조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30억년전 태초의 생명의 탯줄로 거슬러가는 구도의 과정이다.몸전체가 실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잘 조율되어 있어야 한다.이러한 실재와의 조율을 위한 몸의 단련방식이 선이며,명상이며,요가가아닐까?동조를 통해서 자신을 실재에 합일시킨 상태가 "황홀경"(ecstatic state)이며,이것을 일상의 습관으로 까지 끌어올린 것이 "각",즉 깨달음이 아닐까?이러한 깨달음에 든자들의 경우 하나같이 실체를 부인하며 개체를 하나의 환상,미혹으로 간주한다.그들은 언어를 거부한다.언어로 표현되는 일체의 것은 실체의 미혹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은 사상사속에서 "신비주의"의 이름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출현해 왔다.과학은 이것을 비합리주이며 몽매주의라고 매도한다.그러나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매도의 근거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오늘날의 과학이 종래의 종교의 위치를 떠맏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비난은 "그것은 이단이다!"고 외치는 종교재판의 냄새마저도 풍긴다.

과학은 분명 세계의 어떤 측면을 밝혀 주고 있다.그러나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조용현)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시각적 동물..인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감각을 통하여 외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그러나 동물의 종류에 따라 주된 역할을 하는 감각기관을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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