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

불교의 인과성과 시공간의 문제: 현대 과학과의 비교 / 노원앙마블로그

수선님 2020. 7. 19. 11:40

불교의 인과성과 시공간의 문제:

현대 과학과의 비교

이 논문을 제2회 전국 학인논문

공모전에 제출함

2006

 

운문 승가대학 사교과

정 문

 

목 차

I. 서론 2

II. 연기론과 인과성 4

1. 인과성에 대한 고찰 4

2. 불교의 인과론으로서의 연기 7

1) 초기불교의 연기 7

2) 화엄의 법계연기 11

3. 현대과학의 인과성 14

III. 시공간론 18

1. 불교의 시공간론 18

1) 부파불교의 공간론 - 색분제(색분제) 19

2) 부파불교의 시간론 - 시분제(시분제) 20

2. 물리학의 시공간론 23

1) 뉴턴 역학의 시간과 공간 23

2) 특수상대성 이론의 시공간 24

3) 일반상대성 이론의 시공간 25

4) 초끈 이론에서의 시공간 29

3. 불교의 시공간론과 물리학의 시공간론 비교 32

IV. 인과성과 시공간의 관계 34

V. 결론 37

I. 서론

“크다고 말하고 싶으나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김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 싶으나 밖이 없는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욕언대의 입무내이막유 욕언미의 포무외이유여)”라고 원효스님이『대승기신론소』에서 한 말은 현대물리학이 기술하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특징을 그 옛날에도 마치 눈으로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불교와 현대과학과의 현상적인 유사점을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불교계나 과학계 모두의 숙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학문체계와 추구하는 가치대상이 다름으로 인해, 또 각자의 영역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의 부족으로 서로가 서로의 개념체계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끌어다 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현대과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서양의 철학은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이 설명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인 인과개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또한 탐구방법으로서 원자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방법론을 고수하여 왔다. 전자는 물질을 아무리 작게 쪼개어도 결국은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가 존재한다는 실체개념이고 후자는 비물질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작용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생각 일반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불교의 연기론은 초기불교의 연기공식에서 보이듯이, 단순히 선형적인 단일방향의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와 동시성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1) 뿐만 아니라 불교의 시공간론을 보면 색(색), 즉 형상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식이 세계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것이라고 한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 즉, 형상의 우주를 인식이 인지하는 것인 반면, 연기법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에서 형상의 우주, 시공간의 우주가 일어나는 것이다. 탐구하는 대상 자체에 대해 고찰해 보더라도, 불교의 인과론은 정신적 도덕적인 것을 수반하는 윤리적 우주의 인과관계를 다루는 데 비해 현대과학은 가치중립적이고 무도덕적인 우주를 다룬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연기론은 현상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양자역학의 기본이 되는 불확정성 원리나 비선형동력학의 혼돈 이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고, 혼돈 이론은 초기조건에 민감한 시스템을 기술하는 이론인데 이러한 시스템은 초기 조건에 극도로 민감하여 약간의 차이만으로도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인 인과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특히 현대 테크놀러지의 필수 불가결한 되먹임(feedback) 현상은 결과가 원인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상호적인 인과개념이 필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양자역학과 더불어 현대물리학의 두 축을 이루는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전까지 독립된 개념이었던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시공간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하는 유력한 이론으로 손꼽히는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에서는 시공간의 실체 개념이 부정되고 4차원 시공간 이외의 6개의 숨은 차원을 전제하여 상호성과 동시성의 인과개념 이외에도 다른 차원간의 중층적 인과개념까지도 필요로 하게 된다.

아래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불교의 연기론에는 상호의존성과 동시인과의 개념, 그리고 현상계와 본체계간의 중층적 연기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 인과 개념을 뛰어넘는 것으로서 가역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결과가 원인에 역행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 다양한 인과적 요인들의 작용,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통해 연기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다소 신비적인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현대과학의 제 문제와 더불어 심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보다 더 잘 드러난다. 특히 미시세계에서는 강한 인과적 결정이 부정되고 반드시 정신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이 배제되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는 심리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적인 유사점과 그것을 해석해보려는 시도로서 불교 등 동양의 여러 사상을 차용하고 있지만, 현대과학은 탐구방법으로써 여전히 환원주의적 방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경험을 통해서 본질을 규명하려는 과학 자체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점에 불교의 연기론은 물리적인 세계와 심리적인 세계, 현상계와 본체계와의 불연속성을 극복하는 가장 매력적인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불교의 인과법으로서의 연기와 시공간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과법이라는 것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리이며 구조이다. 즉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행위를 하는 세계관은 세계에서 작동하는 인과법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는 것이다.

또한 시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안에서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규정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시간을 규정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공간을 인식하고 있다. 이렇듯 시공간론은 사람의 사고의 바탕체계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II장에서는 불교의 인과론을 대표하는 연기론을 재해석하기에 앞서 첫째, 서양철학에서의 인과성 개념을 살펴볼 것이며, 둘째, 초기 불교의 연기공식에 나타난 연기의 계기성(계기성)과 구기성(구기성)을 동시인과성과 상호의존성으로 나누어 고찰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른 차원 간의 중층적 인과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법계연기설을 검토해 볼 것이다. 셋째로는 앞에서 살펴본 불교의 연기론에 포함된 인과성을 가지고 현대과학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인과성 위배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해볼 것이다. III장에서는 불교의 시공간론과 물리학의 시공간론을 비교할 것이다. 불교의 시공간론은 특히 부파불교의 시분제와 색분제에 대한 개념을 위주로 살펴보고, 물리학의 시공간론은 뉴턴 역학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특수 및 일반상대성 이론을 거쳐 최근에 가장 각광 받고 있는 초끈 이론이 기술하는 시공간론을 검토하고 나서, 마지막으로는 불교와 물리학의 시공간론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고찰할 것이다. IV장에서는 이러한 인과성과 시공간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볼 것이다.

II. 연기론과 인과성

1. 인과성에 대한 고찰

우리가 무엇을 하든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가정들은 우리의 모든 선택에 기본이 된다. 또한 그 가정들은 우리의 예상과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일상생활에서의 ‘왜’ 그리고 ‘어떻게’라는 질문 자체가 인과이론의 본질이며, 그 질문은 사물들은 왜 지금처럼 존재하며, 그것들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근원적인 인간의 욕구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과관계에 대한 가정들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것들은 모든 세계관에 내재하며, 모든 기획에서 작용하고 있다. 과학에서는 경험적 데이터를 선택하고 선택된 데이터를 적용해서 실험하는데 영향을 준다. 의학에서는 그것들은 질병의 진단과 치료를 위한 처방에 대해 알려 준다. 그것들은 종교적 신념 체계의 목적과 그 목적이 부과하는 실천을 고취한다. 그것들은 한 문화의 힘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그 힘을 성취하고 발휘하는 수단 또한 구성해 준다.

서양에서는 2000년이 넘도록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인 인과 패러다임이 지배하여 왔다. 먼저 단일 방향적이라는 것은 원인 A에서 결과 B로의 작용을 말한다. 인과적 효과의 방향은 행위자의 행위에서 피행위자에게 나타난 결과로 향해 있다. 이 인과 모델이 의미하는 것은 결과 B에는 그것의 원인 A로 역추적할 수 없는 새로운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A 속에는 바로 B속에 있는 만큼의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탐구에 작용하고 있는 이 가정의 귀결은 결과 B 속에 있는 차별적 특징들은 반드시 원인 A 속에 있는 유사한 특징들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사한 원인들은 유사한 결과들을 산출하고, 서로 다른 결과들은 서로 다른 원인들로부터 나온다고 가정된다.

동일한 논리에 의해서 B가 C에 작용하고, 다시 C는 D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계속되는 인과의 고리들이 나타난다. 이 고리들은 마치 명령 계통처럼 일련의 결과들 속에서 인과적 추진력이나 효과를 계속해서 전달한다. 이 원인과 결과의 고리들에 의해 설명과 예측이 이루어진다. 설명이란 그 연결 고리를 역추적하여 무엇이 그 모든 것을 출발시켰는지를 발견하도록 계획된다. 예측이란 그 고리를 앞으로 추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가정은 현재에 관한 완전한 지식으로부터 과거와 미래가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일 방향적 인과의 흐름은 '선형적(linear)' 이라고도 불린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선형적’이라는 용어는 그 공식을 도식화했을 때 직선을 그리는 균일한 진행을 의미한다. 정보 용어로 말하자면 선형적 인과관계에서는 입력이 전달한 정보의 양에 비례해서 출력을 결정한다. 통속적인 용례에서는 ‘선형적’이라는 용어는 ‘예측 가능한’ 그리고 ‘기계적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선형적인 패러다임이 서양 사상에서 구심점을 이루게 된 것은 그리스인에 의해서이다. 특히 후대의 주요한 사상가들을 지배했던 것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견해였다.2) 엘레아(Elea)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은 항구불변이라고 주장했으며, 존재의 충만함은 너무나 완벽하고 영원불변해서 변화는 그 자체가 사실상 거부되었다. “만일 어떤 것이 변화한다면,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다. 비존재(not-being)는 존재하지 않는 것(nonexistent)이므로 변화는 불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의 원인 속에 선재(선재, pre-exist)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의 취지는 실재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실재를 무변화성과 동일시하는 데 동의했으며, 그것을 서양사상사에 깊은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정착시켰다. 플라톤은 변화라는 경험을 거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관념적 형상(이데아)들을 가정함으로써 변화를 영원성 속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이데아들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실재성을 가졌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는 현상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며, 현상들의 모습은 단지 이데아들의 희미하고 불완전한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설사 변화의 세계에 실재의 지위가 부여된다 할지라도, 여기에는 결과는 원인 속에 선재한다는 가정 속에서 단일 방향적 인과관계가 토대를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전개된 인과관계의 원리도 마찬가지로 파르메니데스적인 개념을 유지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세계에 좀 더 주목하면서 변화의 실체성을 부여했다. 사물들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변성이나 영원성이 일차적이며, 변화는 불변성으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가정했다. 물질 자체는 수동적이며 자발성이 없으므로 운동하는 모든 것은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술한 원인의 유형들은 이후 서양적 사고의 범주들을 형성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현상의 네 가지 결정 요인을 설정했다.

질료인(material cause): 어떤 것을 만드는 재료, 즉 항아리의 진흙.

형상인(formal cause): 사물이 취하고 있는 형상, 즉 항아리의 모양.

동력인(efficient cause): 도공이 진흙에 가하는 것과 같이 외부에서 사물에 가해 지는 작용

목적인(final cause): 사물의 목적, 즉 도공이 마음속에 가졌던 목적.

이 네 가지 원인 가운데서 단지 동력인만이 운동한다. 처음의 두 가지 원인, 즉 질료인과 형상인은 움직일 수 없고 변화할 수 없으며, 네 번째 원인(목적인)은 그 자신은 운동하지 않으면서 단지 유도하는 작용을 한다.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분명히 동력인에 의해 실존(existence) 속으로 밀려 왔거나, 목적인에 의해 존재(being) 속으로 끌려간 것이다. 양자 모두 운동은 일방적이며 단일 방향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단일 방향성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논리에 의해 현상의 궁극 원인으로 부동의 원동자를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때로는 사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수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때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단정했다. 이것은 단일 방향성이 너무 철저하고 비타협적이어서 어떠한 외적 운동에도 의존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이 신은 더 작은 존재들에 반응할 수 없으며, 신 자신을 제외한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다.

현대과학의 출현과 함께 부동의 원동자와 이데아적인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과 목적인도 마찬가지로, 모두 불필요하고 비경험적인 것으로 거부되었지만, 그것은 단일 방향의 모델을 구체화했다. 오직 질료인과 동력인만이 과학적 탐구에 적절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각각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산출한 상태에 대해 일방적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요소들의 상태의 변화는 그것들에 작용하는 동력인이나 외부의 작인에서 유래한다고 가정되었다. 뉴턴의 관성의 법칙에 의해 운동은 더 이상 부차적인 성질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속도와 방향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외부의 힘이 요청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선형적 인과 개념은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과학적 방법을 구체화해 왔다. 연구 영역은 인과의 고리가 가정되고 발견될 수 있도록 선택되고 한정되었다. 변수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되고 통제될 수 있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근본 원인 또는 ‘능동적인 요소’를 찾기 위해서 그것들 상호간의 작용을 무시하거나 깨닫지 못한 가운데, 변수들은 인위적으로 분리되어 한 번에 하나씩 실험되었다. 과학자는 실험을 할 때, 비록 그 가정이 경험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지만, ‘다른 모든 조건들이 같을 때’라는 단서를 붙인다.

이러한 방법론은 유력한 결과들을 낳았다. 그 결과들은 적어도 최근까지는 예측가능성과 통제라는 분석의 목표에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도구와 탐구가 확장되면서 세계가 항상 예측에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사건들이 상호작용하고 패턴들이 서로 겹쳐지면, 그것들은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비선형적인 결과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예들은 고전 물리학에 속하는 결정론적 카오스 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상대론과 양자역학 등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인과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 인과율을 가지고 있는 서양철학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인과론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 불교의 인과론으로서의 연기

1) 초기불교의 연기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연기(연기)란 말의 빨리(Pali)어 어원은 paṭiccasamuppāda이다. paṭicca-sam-upāda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복합어는 불교 이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불교 고유의 용어이다. paṭicca는 ‘연(연)해서’란 의미이며, samuppāda는 ‘일어남(기)’, ‘함께 일어남(집기)’ 또는 ‘발생’, ‘생성’, ‘생기’의 뜻을 지닌다. 그러므로 연기란 ‘조건적 발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연기란 말 중에 ‘sam’이 무시간적 상의성(상의성)을 내포하고 ‘uppāda’가 시간적 인과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연기에는 ‘연이어 일어남(계기)’와 ‘함께 일어남(구기 )’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순서대로 일어나는 두 법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인데, 연기의 발생 원리에는 계기성(계기성)과 구기성(구기성)의 양면이 갖추어져 있어서 인과론적인 종적 관계로의 해석은 계기성에 착안한 것이고 인연론 중심의 논리 관계로의 해석은 구기성에 착안한 것이라 한다.3)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연기에 관한 정의를 초기 경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원시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아비달마불교나 대승불교에서도 그 근본이 되는 연기사상에 대한 정의로 유명하다.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게 되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4)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라는 것은 실체적이며 자기 동일적인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구체적인 수레를 ‘이것’이라고 할 때 초기불교의 경전 상에서는 수레의 단일한 실체성이 부정되고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듯이 ‘이것’이라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단일한 어떤 불변의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성을 지닌 사건으로서의 인과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빨리어나 산스끄리뜨어로 표현된 ‘연기 공식’에서는 다른 곳에서보다 분명하게 반대칭관계는 물론 대칭관계에 의한 해석도 동시에 할 수 있음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은 논리적 이유에 한정될 뿐 인과적 조건성은 결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칭관계를 내포한다는 것은, 인과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연기’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런데 한문 번역본에서는 연기에 관한 정의가 ‘이것’을 ‘이것(차)’와 ‘저것(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5) 여기서는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들 간의 관계만으로 표면상으로 나타나 보이므로, ‘이것’에는 ‘원인’, ‘저것’에는 ‘결과’를 대응시켜서 ‘연기 공식’을 ‘인과’로 해석하였다. 그 결과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대칭관계보다는 반대칭관계를 더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동진의 승가제바(승가제파)가 번역한『중아함경』의「설처경(설처경)」에서는 인과적 조건성을 반영하는 번역도 있다.

약유차즉유피 약생차즉생피 약무차즉무피 약멸차즉멸피

여기서 ‘약유차즉유피’는 사건의 논리적 관계만을 나타낸다. 즉 상호관련의 법칙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김동화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의 관계를 동시적 상호관계로서 공간적인 상의상자(상의상자)의 논리적 관계라고 정의하였는데 여기에는 시간의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6)

상호관련의 법칙은 인과법칙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어진 사건이 다른 사건의 변화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단지 두 사건의 결합법칙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상호 의존하는 두 사건을 기계적이고 정태적인 의존관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두 사건의 의존성이 성립하는 상호조건적인 인과관계의 성립으로 간주하고 있다.7) 이로써 불교에서는 엄밀한 실제적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상호연관의 범주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연기의 범주 속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약유차즉유피’는 ‘만약 이것이 있으면 곧 저것이 있게 된다.’라는 뜻으로 ‘있다’와 ‘있게 된다’의 동시적이면서도 존재상의 계기가 인정되는 상호관련의 수반성을 내포하게 된다.

중현논사에 의하면 ‘약유차즉유피’는 조건성보다도 함께 생성되는 병발(병발)의 수반적인 원리인 구생(구생)의 관계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이 관계를 단순히 정태적인 논리적 관계로 환원시키지 않고 논리적 관계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과정적인 구체적 존재의 수반적 생성을 보여준다.8)

지금까지 살펴본 초기의 연기론은 상호의존적 성격과 동시적인 존재상의 계기인 인과성의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상호의존성과 동시인과성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가. 연기의 상호의존성

연기법을 상호의존적 인과율로 규정하는 견해가 있다.9) 이중표에 의하면 인과율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는데 하나는 선형적 단일방향적 인과율이고, 다른 하나는 역동적 상호의존적 인과율이다. 선형적 단일방향적 인과율에서는 원인에서 결과로의 흐름이 일방적이다. 즉 원인은 결과에 영향을 주지만 결과는 원인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시간적으로는 원인이 항상 결과에 선행한다. 이러한 인과율에 의하면 인과의 고리는 A→B→C→D... 와 같이 직선의 형태가 된다. 신화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이래로 인류를 지배해온 사상은 바로 이러한 직선적 인과율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호의존적 인과율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A는 B, C, D, ...등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B는 A, C, D, ...등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들은 상호간에 원인이 되며 동시에 결과가 된다.

이렇게 연기론을 상호 의존적 관계로 보는 유명한 비유는 갈대 묶음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벗이여, 마치 두 갈대묶음이 상호 의지하여 서 있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벗이여,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육입이, 육입을 조건으로 접촉이...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요소가 생겨난다.10)

연기론을 상호의존성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갈대묶음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이 존재는 이들이 단순히 모인 것 이상의 존재라는 점이다.

이중표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을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이론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왔으며,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유가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희망을 갖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시스템 이론은 정신과 물질과의 상호작용을 상향적 결정 관계, 즉 수반에 의해 설명하는 환원주의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나. 연기의 동시인과성

연기가 사실적 세계의 실재적 연관을 나타내는 존재론적 속성을 지닌다면 인과의 관계는 존재론적 계기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과관계가 시간적 계기가 아님을 말한다. 초기경전에는 연기법의 무시간성(akalika)이 언급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가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발생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을 알고, 이와 같이 늙고 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안다면, 이것이 그의 법에 대한 지식이다. 그는 보여진 것이고 알려진 것이고 무시간적으로 성취되는 심오한 이 법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에 관해서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낸다.11)

연기법은 감각적 지각이나 초감각적 지각에 의해 보여진 것이고 알려진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경험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다 보여지거나 알려진 것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의 유(유)나 무(무)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중도적이고, 인과원리와 관계된다는 측면에서 연생적인 존재론을 뜻한다.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성은 그것의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과거․현재․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적 시간의 무(무)를 뜻하는 것이다.

러셀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시공)으로 대체하여 실체의 범주를 더욱 적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전에 실체의 본질은 시간을 통해 지속했지만 이제는 보편적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흄이나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인과문제에 관심을 갖는 많은 학자들은 원인이 시간적으로 결과보다 앞서는 것을 인과성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전재성에 의하면 ‘약유차즉유피’와 ‘약생차즉생피’에는 원인의 시간적 우선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12)

그것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시간상의 계기를 수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과성은 공간상의 어떤 특정한 점에서든, 아니면 공간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계들 사이에서든 상관없이 동시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아무런 시간지연을 포함하지 않는 원격작용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적이고 무시간적인 연기는 시간지연을 포함하지 않는 동시적 인과관계를 함축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여기에서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인과관계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2) 화엄의 법계연기

앞에서 우리는 초기불교에 나타난 연기(연기:paṭiccasamuppāda)의 다양한 어원에 대한 해석을 검토하였다. 여기에는 계기성(계기성)과 구기성(구기성)의 양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계기성을 동시적인 존재상의 계기의 관계로 보았고 구기성을 연기의 상호의존적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연기에 내포된 인과성과 상호성을 다른 범주로 취급한 결과이다. 그러나 상호의존성이나 동시인과성이나 둘 다 무시간성을 내포하므로 구체적인 과학적 사실에 적용할 때에는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된다. 다만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뒤에서 살펴보게 될 EPR실험에서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입자가 상호작용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인과관계를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붓다고싸는 연기의 어원적 해석으로 paṭicca는 조건성을, samuppāda는 수반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는데 원인의 조건성과 수반성 가운데 수반성이 압도적일 경우에는 상호적 인과관계와 인과적 되먹임(feedback)의 원리까지도 넓게 연기의 원리적 측면에 수용할 수 있다고 본다.13)

물론 두 입자나 두 사건간의 평면적인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인과문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초기불교에 나타난 연기의 두 가지 의미로도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테크놀러지에서 반드시 필요로 하는 피드백(feedback) 개념에서는 단순히 같은 차원간의 인과나 상호작용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 즉 지각과 활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수정하게 되어 기본적인 유기체의 모델에 가까워진다. 여기서는 입력과 출력이 중중무진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피드백 되어 돌아오는 입력은 상호작용하는 A, B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시스템과 인과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정신과 신체, 또는 본체계와 현상계의 상호작용을 기술할 때와 흡사하다. 이러한 다차원적인 인과를 기술할 필요와 함께, 인과 작용의 장(장)으로서 시공간을 같이 나타내기 위해서 화엄의 법계연기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불교의 연기론은 현상계의 생기, 원인, 순서, 그리고 본체와 현상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우주생성론과 본체론이라는 이중의 내용을 포함하며 인식론과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동시적인 것이기도 하다.14)

연기론은 초기불교의 십이연기설로부터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설, 유식불교의 아뢰야연기설, 기신론의 진여연기설, 그리고 화엄의 법계연기설까지 시대적으로 변천해 갔다. 십이연기설에서는 사물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였고, 업감연기설에서는 세계와 인생이 모두 업의 결과이며, 이 업의 기원을 밝힌 것이 아뢰야식연기설이다. 아뢰야식은 개인의 본성에 의해 결정되며 이 본성은 진여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연기의 설명이 요청되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의 생성에 미치는 상호 연관성, 즉 ‘보편적인 연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하는 물음에 대해, 진실의 세계에는 독립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법계연기설(법계연기설)이 나타나게 된다.

법계(법계)란 모든 존재의 총칭으로 존재의 종류, 본성 등 다양한 뜻을 지녔다. 이를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는 세계 또는 우주 전체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 자체인 진여(진여)이다. 이 가운데 인과론적인 입장에서 법계를 논할 때에는,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인 우주를 가리킨다.

연기론에 의하면 일체의 존재는 단독으로 생기하거나 존재하지 못한다. 법계 연기설 역시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상호 의존하여 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연기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즉 모든 차별적인 존재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원융무애)함으로 모든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가 전 우주[일체즉일(일체즉일)]라는 뜻에서 ‘연화장(연화장) 세계’라고도 한다. 이러한 법계를 설명하는데 사(사)와 이(이)의 구별을 세워 논한 것이 사종법계설이다.

사종법계는 사(사)법계, 이(이)법계, 이사무애(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사사무애)법계이다. 이 네 가지 법계설은 모든 우주는 일심에 통괄되고 있으며, 이 통괄되는 것을 현상과 본체의 양면으로 관찰하면 네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화엄의 무진법계는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사(사)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를 가리킨다. 사(사)란 현상, 사물, 사건 등을 말한다. 낱낱 사물은 인연에 의해 화합된 것이므로 제각기의 한계를 가지고 구별되는 것이다. 개체와 개체는 공통성이 없이 차별적인 면만을 본 것이다. 이(이)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말한다. 이(이)는 원리, 본체, 법칙, 보편적 진리 등을 가리킨다. 궁극적 이(이)는 총체적 일심진여이며, 공(공)이며 여여(여여)이다. 우주의 사물은 그 본체가 모두 진여라는 것으로 개체와 개체의 동일성, 공통성을 본 것이다. 이사무애(이사무애)법계는 이와 사,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법장은 <금사자장>에서 금사자의 비유를 들어 금이라는 금속은 이(이)의 미분화된 본체를 상징하며, 사자라는 가공품은 분화된 사(사) 즉, 현상인데 사자가 금에 의존하여 표상되고 있음이 바로 이사무애의 경계라는 것이다. 사사무애(사사무애)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제법은 서로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무진연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화엄의 법계연기이다. 이 사사무애(사사무애)의 세계는 이사무애(이사무애)를 바탕으로 하여 의지의 전환이 있어야 가능한 직접적인 깨달음의 세계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인 것이다.

이상의 사종법계를 구별하여 설명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여법성(진여법성)에 불변(불변)과 수연(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수연하여 만법이 되는 방면에서 사법계를 세우고, 불변하는 만법의 체에서는 이법계를 세운다. 그리고 불변과 수연의 교섭 관계에 대해서는 이사무애법계를 세우며, 수연의 법이 상호 교섭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사사무애법계를 세운다. 이것은 각각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보는 사법계와, 차별적인 개개의 사물에서 동일성 또는 공통성을 보는 이법계, 그리고 전체 속에 개체가 있고, 개체 속에 전체가 있다는 이사무애법계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별적인 존재들은 서로를 포함하고 포함되어 조화를 이룬다는 사사무애법계를 진여의 불변과 수연에 관련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법계의 모든 사물은 차별적 관계를 가지지만, 서로 인과관계 속에 있음으로 어느 것 하나라도 독립적이거나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만유를 모두 진공(진공, 무실체)의 관점에서 볼 때, 대립하던 차별적인 존재들은 실제로는 동등한 것이 된다. 이런 관계를 원융무애(원융무애)라 하며, 일즉일체(일즉일체), 일체즉일(일체즉일)로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독의 하나가 아니라, 그대로 전 우주가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 입각한 하나의 사물을 연기의 법으로 보고 이것을 우주 성립의 체(체)인 동시에 전 우주를 말미암아 성립된 것으로 본다면, 우주 만물은 각기 하나와 일체가 서로 연유하여 있는 중중무진(중중무진)한 관계이므로 이것을 법계무진연기(법계무진연기)라 한다.

화엄의 무진법계는 사사무애(사사무애)법계로 귀결되는데 천차만별의 상을 가지로 있는 사(사)와 사(사)가 어떻게 무애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징관(징관)은 『연의초』권1에서 ‘이(이)로써 사(사)를 융(융)한다.’, ‘ 이(이)에 의해서 사(사)를 이루기 때문에 일(일)과 다(다)의 연기가 성립한다.’, ‘ 이사무애(이사무애)에 의지해서 사사무애(사사무애)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을 시공간의 구조와 연관된 인과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현대물리학의 인과성에 대비해 본다면, 두 사건 또는 두 입자 상호간의 인과관계는 사사무애(사사무애)법계로 볼 수 있고 시공간의 구조와 연관된 다른 차원간의 상호작용은 이사무애(이사무애)법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사무애법계는 이사무애법계에 의하여 때에 따라 동시성과 상호성, 그리고 중층적인 다양한 모습의 인과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공간은 이(이)법계와 사(사)법계 즉 본체계와 현상계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구실을 한다. 본체계와 현상계는 이 시공간이라는 무대를 매개로 하여 공즉색 색즉공(공즉색 색즉공)의 연기로 펼쳐졌다 감추어졌다 하는 것이지 시각적으로 계층이 나누어져 위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이는 4차원의 시공간이외의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III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3. 현대과학의 인과성 문제

현대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과 같은 획기적인 이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막대한 양의 자료들이 정확하게 이론적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고, 생물학 분야에서도 물리학적인 연구방법을 통한 새로운 이론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단 상대론과 양자역학에서 뿐만 아니라, 고전 물리학에 속하는 결정론적 카오스 이론이나, 전자기학 등에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인과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선형적이고 단일방향적 인과율을 가지고 있는 서양철학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인과론으로 접근해 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초기불교의 연기 공식에는 상호의존성과 동시인과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화엄의 법계연기에는 시공간의 구조를 포함하여 다른 차원간의 상호작용이 중층적으로 연결된 인과관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아래에서 제기되는 제 문제에 대해 위의 개념들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과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항상적 결합과 같은 규칙성이 요청된다. 그리고 우연적인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인하는 것을 피하고 사건 발생들 사이의 관계가 인과관계이기 위해서는 규칙성뿐만 아니라 일반법칙과 직접․간접적으로 관련되어야 함이 요청된다. 또한 인과관계의 존재에 대한 기준은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조건이 아무리 단순하고 우리의 측정 장비가 아무리 정교하다고 할지라도, 측정 결과를 절대적으로 정밀하게 예측한다는 것, 즉 소수점 이하의 모든 자릿수까지도 측정된 숫자와 일치하도록 계산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엄밀한 인과관계를 부정하든지 아니면 인과관계에 대한 개념 자체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15) 양자역학을 지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엄밀한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고전 물리학적인 입장은 대체로 인과관계에 수정을 가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양자역학은 근본적으로 결정론적 이해체계라고 볼 수 있으나 그것의 바탕이 되는 불확정성 원리로 인하여 질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결정할 수 없으므로 엄밀한 인과율을 적용시키기 어렵다. 고전전자기학 이론에서, 복사 반작용을 고려한 하전입자의 운동 방정식에서는 하전입자가 외부의 힘이 정지한 그것에 작용하기도 전에 미리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선가속(preacceleration)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가해준 힘을 원인이라 하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가속 운동 상태를 결과라고 한다면, 원인보다 결과가 먼저 일어나는 예기치 못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전역학으로 기술되는 결정론적인 혼돈(chaos)이론에서도 장기적인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하여 서술세계와 현실세계가 서로 일치한다는 보장을 할 수 없어서 인과성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블랙홀 근처에서 물리법칙을 적용할 수 없다거나, 초기 우주에서 시간이 소멸됨으로 인하여 물리법칙을 적용시킬 수 없는 것, 등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론 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인과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전자기학이나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인과성 위배 문제가 제기되면 물리학자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문제를 회피해 나가려고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고전역학이나 전자기학 등에서 논의되는 많은 물리 법칙은 시간에 대해서 대칭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인과성 문제에 관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발생 시간 순서 등에서 반대칭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것의 간단한 예는 맥스웰 방정식이다. 이것은 시간에 대하여 대칭이므로 과거에서 미래로 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현재 및 과거로 신호가 전파하는 것도 고려해야 하나 후자의 경우는 안 된다고 보고 있다. 특히 입자 물리학의 경우에는, 어떤 입자가 미래에서 과거로 진행하는 것을 그것의 반입자(antiparticle)가 과거에서 미래로 진행하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해석이지 근본적으로 문제를 모두 해결하였다고는 볼 수 없다.

1) 동시인과나 상호작용으로 볼 경우

앞에서 보았듯이 물리학 이론의 여러 분야에서 반대칭 관계만을 가지고 인과관계를 논한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문제점을 야기시킴을 알 수 있었다. 특정한 시공간 영역에서는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인과성 문제가 발생되고 있으므로 대칭관계에 의한 논의도 필요하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자기학에서 2체 문제로 알려져 있는, 서로 접근하고 있는 같은 부호의 전하를 띠고 있는 두 입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서로 가까워짐에 따라 그 두 입자들은 감속되므로 전자기파를 내게 된다. 이때 어느 한 입자만이 전자기파를 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전자기파를 발생시키며, 또한 상대 입자가 낸 전자기파를 서로 흡수한다. 즉, 전자기파가 어느 한 입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두 입자가 동시에 대칭적으로 발생된다고 해석된다.

고전역학이나 고전전자기학 이론에서는 장론(field theory)이나 원격작용설에 의해서 물리 이론을 각각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장론에서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상호작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나 원격작용설에서는 그러한 제한이 필요하지 않다. 즉 장론에서는 장이 발생되고 흡수된다는 논의가 필요하나 원격작용설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둘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뉴턴의 중력이론이나 정전기학에서의 쿨롱의 법칙에서와 같이 장(장)이 공간의 함수만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장론과 원격작용에 의한 설명을 통일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한다.16)

양자역학의 경우에는 1935년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이 제기한 이른바 EPR 사고실험에 의하면, 초기 상태에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으나 그 이후로 서로 분리된 전자 S1과 S2의 두 입자 체계를 상정하였다. 두 입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여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S1만을 자기장에 통과시켰을 때 S1의 스핀 변화량만큼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S2가 동시적으로 S1의 변화량만큼 변한다는 것이 이 실험의 요지이다. 이 결과는 당시로서는 사고 실험이었으나 1982년 프랑스의 아스페(Aspect)의 세 번에 걸친 실험에 의해 결정적으로 판명된 실험이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분리된 두 입자에게 알지 못할 상관성이 있고 서로 간에 상호작용한다는 결과이다.

위에서 살펴본 인과성 위배의 예들에 의하면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 또는 장론에서 매개입자에 의한 상호작용을 논할 때 시간적인 간격 없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음을 보았다. 이때의 상호작용은 ‘서로가 어느 것에는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하고 다른 것에는 결과가 되었다’라고 하기가 곤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상호작용이라는 용어 자체가 ‘동시 인과’의 내용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2) 중층적 인과로 볼 경우

위에서는 동역학에서 제기되는 선형 인과의 인과성 문제에 대하여 기존의 관점과는 달리 논의할 필요성이 있음을 논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대칭관계보다는 대칭관계에 의한 인과성 분석이 더욱 필요함을 보았다. 현남규는 이것을 동시인과로 보았는데 상호의존성의 관점이나 동시인과의 관점 모두 시간성이 배제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테크놀러지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피드백(feedback) 개념에서는 비대칭적 인과관계의 부적절성을 더욱 극명하게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한 차원의 인과나 상호작용으로는 적절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피드백은 시스템이 자신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말한다. 이전의 활동에 관한 데이터는 한 시스템이 받아들이는 입력의 일부분으로 송환되며(feed back),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스템은 스스로를 감시(monitor)하고, 스스로의 활동을 지도할 수 있다. 모터나 난방코일(작동체, effector)의 활동이 레이더 스크린이나 광전관(감수기, receptor)에 되돌아와 감시되듯이 근육의 활동도 감각기관에 되돌아와 감시된다. 이런 식으로 활동을 지배하는 토대가 되는 지각 내용들은 바로 그 활동에 의해 변경된다. 따라서 피드백 개념은 본래 순환적이며 자기 지시적이다. 원인과 결과는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 즉 지각과 활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를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지각과 행동간의 상호작용은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조직하는 유기체의 능력에 기본적이다.

여기서는 입력과 출력이 중중무진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피드백되어 돌아오는 입력은 상호작용하는 A, B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시스템과 인과관계를 맺는 것이다. 피드백, 즉 되먹임은 말 그대로 상호작용하는 A와 B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데이터를 넣어 줌으로써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수정하고 이 수정된 값이 다시 피드백에 영향을 주는 중층적 인과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사례이다. 이것은 마치 정신과 신체의 관계와 같은 종적인 인과의 개념을 가질 수 있으며, 이사무애(이사무애)법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입력과 출력은 어떤 한 시스템이 작용할 때 상호작용하는 것과 똑같이 여러 시스템 사이에서도 상호작용한다. 즉 실행에 관한 데이터가 다른 시스템을 통해 되돌아온다. A로부터 나온 출력이 B를 수정하고, B의 반응은 A가 뒤이어 받아들인 입력의 일부분이 된다. B가 A에 반응하는 방식은 A의 자기 감시의 일면이다. 따라서 B의 반응은 A에게 A 자신과 목표에 대한 A의 진행 상태를 알려 준다. 이렇게 정보를 처리하고 교환하는 가운데 A는 B에게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것들은 각각의 내적 코드에 따라 주어진 데이터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지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이 각기 상대에게 끼친 영향을 지각함으로써 둘 다 변화한다.

인과관계의 복잡한 상호성은 고리들과 같으며, 이 고리들은 정보나 에너지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인과적으로 변화하는 것들은 연결하면서, 전기회로들과 마찬가지로 출력을 입력에 연결하는데, 일정한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도 그렇게 하고 여러 시스템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한다. 이 고리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호작용 이상의 것, 즉 쌍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호작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한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은 사법계와 사법계 사이의 연기의 횡적인 관계인 사사무애(사사무애)법계에 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여러 시스템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가질 때에는 인다라 망처럼 무한한 연쇄를 이루게 될 것이다.

피드백 되는 시스템에서의 중층적 인과관계는 피드백 되는 입력과, 상호작용하는 A와 B 사이의 관계가 정신과 육체, 또는 본체계와 현상계 사이의 인과관계와 유사함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비선형적이고 중층적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영역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사고와는 좀 동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시공간론에서도 언급되겠지만 이것은 시공간의 구조와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중층적 인과의 개념이 필요한 곳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4차원의 시공간 연속체가 아니라 숨은 차원을 포함한 또다른 영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과율이 적용되는 곳은 비단 현대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사건을 다룰 때 더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과거와 미래의 뒤섞임, 인과율의 파탄,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등을 융은 동시성(Synchronicity)라고 정의하였는데, 동시성 현상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은 현존하는 인과적 시공구조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화엄의 법계연기가 다른 차원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유력한 개념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III. 시공간론

1. 불교의 시공간론

불교의 시공간론은 물질론과 관계되어 있다. 물질과 물질이 모여 공간을 이루며 이것은 유위법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천을 피할 수 없어 시간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불교의 물질론은 원시경전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오온(오온) 가운데의 색온(색온)과 십이처(십이처) 가운데 5근(오근)과 5경(오경) 등의 이론이 물질론에 속한다. 이러한 원시적 물질론이 소승불교에 들어와서는 더욱 확대되어 설명되었고 물질의 본성과 물질이 형성되는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17)

소승불교는 유위의 오온(오온)에 의하여 시분을 정하게 되었다. 논전에 의하면 소승불교에서는 물질과 시간을 철저하게 관련시켜서 그 단위를 정하고 있는 기록들이 많다. 『대비바사론』과 『구사론』등에서 그러한 기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색분제(색분제)’와 ‘시분제(시분제)’라는 말이 있다. 색분제는 물질의 단위 즉, 공간적인 길이의 단위를 말하고 시분제는 시간의 단위를 뜻한다. 이러한 단위가 정해질 수 있는 것은 여러 인연이 집합하여 한 개체가 형성된 물체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색분제와 시분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인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1) 부파불교의 공간론 - 색분제(색분제)

색분제(색분제)는 물질의 단위를 의미하며 이것이 있다는 것은 유위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위법은 물질계와 정신계에 모두 해당되는 것으로서 물질계를 색법(색법)이라 하고 정신계를 심법(심법)이라고 한다. 색법은 지수화풍의 4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지)는 견성(견성)이고, 수(수)는 습성(습성)이며, 화(화)는 난성(난성)이고, 풍(풍)은 동성(동성)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성질이 모든 물질계에 두루 두루 포함되며 만물의 성질이 되고 바탕이 된다고 해서 4대라고 한다.

이와 같이 물질계에는 4대가 포함되어 있고, 또 4대에 의하여 물질의 개체가 형성된다고 해서 4대를 인(인)이라 하고 개체는 과(과)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인과 관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들에 대한 인과를 5인(오인)과 5업(오업)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4대는 물질을 윤택하게 하고 성숙시키며 변천하고 파괴하는 업력이 있다. 이러한 업력으로 말미암아 개체가 형성되며 성주괴공(성주괴공)의 4상이 생기게 되고 또 시간도 정할 수 있게 된다.

4대에 의하여 형성된 개체의 단위를 구사론에 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소승불교에서 분류하고 있는 물질의 단위이다.

극미(극미), 미진(미진), 금진(금진), 수진(수진), 토모진(토모진), 양모진(양모진), 우모진(우모진), 극유진(극유진), 기(기), 슬(슬), 광맥(광맥), 지절(지절), 주(주), 궁(궁), 구로사(구로사), 유선나(유선나)

극미에서 시작하여 12번째인 지절에 이르기까지는 앞에 것의 7배씩 증가한다. 이를테면, 7극미를 1미진이라 하고 1미진이 일곱 배 쌓인 것이 1금진이다. 이렇게 하여 7광맥을 1지절이라 하고 3지절을 1지라고 한다.

나아가 24지가 옆으로 나란히 있는 것을 1주라고 하며, 4주가 가로로 쌓여 있는 것을 1궁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심(심)’을 말하는데 여덟 자 혹은 열 자의 한 길을 의미하는 단위이다. 다시 가로로 5백 궁이 쌓여 있는 것을 1구로사라고 하는데, 1구로사는 바로 마을로부터 아란야(아련야: aranya, 수행자들이 머무는 적정처(적정처)에 이르는 중간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8구로사를 1유선나라고 한다. 이 유선나는 유순(유순)이라고도 표현하며 인도에서 거리를 표시할 때 흔히 쓰는 말이며 1유순은 약 50리의 거리를 말한다.18)

이와 같은 단위로 이루어진 물질을 심도 있게 관찰하면 물질 내에는 공간이 있고 또 공(공)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4대가 극미의 형상을 나타내고 그 극미가 여러 개 모여 점점 큰 물체가 되기 때문에 극미와 극미 사이에는 공간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4대는 지대, 수대, 화대 그리고 풍대 등 사이에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물체든지 자체 내에 공간이 있는 것이며 그 공간을 『대비바사론』에서는 공계색(공계색)이라고 한다. 공간에 있는 것을 하나의 모습으로 취급하여 색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도 일종의 물질이라고 본다. 『구사론』에 의하면 공계는 밝고 어두운 명암으로 체성을 삼는다고 하였으며 그 체는 낮과 밤에도 불구하고 항상 있기 때문에 이를 인아가색(인아가색)이라고 한다. 아가(아가)는 여러 인연이 집합한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집합하였기 때문에 물체에 장애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적집색(적집색)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집의 현상을 나타낸 공계도 하나의 물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공계색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계는 장애의 성질도 있지만 장애가 비교적 다른 물질보다 덜한 것이 현실이다. 공계는 대부분 밖으로 나타난 공간을 먼저 연상할 수 있으나 물체 내에도 얼마든지 공간이 있는 것이며 그 영역은 무한한 것이다.

외부의 공간은 무한하게 헤아릴 수 있고 또 볼 수 있지만 물체 내에 있는 공간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볼 수 없는 공간이 무한하게 존재한다. 여러 경전에서는 무견(무견)과 유견(유견) 그리고 무대(무대)와 유대(유대) 등으로 표현하며 인식의 가능성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물질의 세계는 무견이라고 표현하고 볼 수 있는 물체는 유견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직접 접촉하여 알 수 없는 경지는 무대라고 표현하고 또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체에 대하여는 유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에 의하여 내부의 공간과 공계는 무한하기 때문에 더욱 알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부파불교의 시간론 - 시분제(시분제)

『구사론』에서는 유위법(유위법)을 세로(세로)라고 표현하며 세로는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중현논사는 유위(유위)는 여러 인연이 집합하여 공동으로 출생한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유위법은 여러 인연의 법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시간을 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유위법에는 삼분제(삼분제)가 있으며 이것은 시분제(시분제)와 색분제(색분제)와 명분제(명분제)를 말한다. 즉 시간의 극소를 일찰나(일찰나)라 하고, 공간의 극소를 일극미(일극미)라 하며, 명칭의 극소는 일자(일자)에 의지한다.

이와 같은 시간과 물질과 명칭의 삼분제는 여러 인연이 극소화할 때 극미와 같은 극소의 분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이미 인연이 집합하였다고 하면 변천이 가능한 유위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극미라는 물질은 유형의 모습에서 더욱 분석되면 공(공)이 되는 것이며 공에서는 변천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시간도 정하지 못하게 된다. 물질의 본성은 부증불감(부증불감)한 것으로서 변천하지 않으며 변천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시간을 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유위법 상에서는 시간은 가립(가립)하여 발생하는 것이므로 유위법에 의한 시간의 분류가 가능하다. 『대비바사론』에 수록된 시간의 분류인 시분제의 단위는 다음과 같다.

찰나(찰나), 단찰나(단찰나), 납박(납박), 모호율다(모호율다), 일주야(일주야), 세월(세월), 겁(겁)

찰나는 가장 짧은 시간을 말하는데, 한 장사가 손가락을 튕길 때 60찰나가 지나갈 만큼의 짧은 시간을 말한다. 그리고 단찰나는 찰나보다 20배 더 긴 시간을 말하며, 납박은 단찰나의 60배 한 시간을 말한다. 모호율다는 30 납박을 합한 시간을 말하고 일주야는 30 모호율다를 합한 시간을 뜻한다. 세월은 30일을 1월로 하고 12월을 1세로 하는 것을 뜻한다. 겁은 매우 긴 시간을 말하나 유한한 시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겁의 시간을 개자(개자)겁 또는 반석겁이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개자겁은 40리 둘레의 성에 겨자씨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백년에 한 알씩 들어내어 모두 없어졌을 때의 시간을 말한다. 찰나는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7십5분의 1초를 말하는데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하루가 64억9만9천9백80 찰나라고 하므로 찰나를 초로 계산하면 7만4천7십5분의 1호가 된다. 그리하여 개자겁을 대략 계산하면 1겁은 10억의 1억곱 년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러한 1겁이란 현대 물리학적으로도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이다.

소승불교의 시간론을 살펴보면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시간설에 대해 시는 시분을 뜻하며 그 체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온으로 체성을 삼는 것이며 십이처와 십팔계의 유위법을 성으로 한다고 하였다.19)

대승불교에 가서는 중관학파와 유식학파가 시간설에 대해 다양한 학설을 전개한다. 용수보살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 중관학파에서는 숫자와 시간은 체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이들 법에 의하여 시간과 방향과 이별과 화합과 동일(동일)과 별이(별이)와 장구(장구)와 단(단)과 명자(명자)가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범부들이 마음으로 집착하여 실제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착․세친보살의 유식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유식학파에서는 숫자와 시간은 유위법 상에 분립하여 가립(가립)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24종의 불상응행법(불상응행법) 가운데 수와 시가 이에 해당하며 오온 가운데서는 행온에 시간과 숫자가 포함되며 십이처 가운데서는 법처에 포함되며 십팔계 가운데서는 법계가 의식의 경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법계에 시간과 숫자가 포함되는 것이다. 『불지론』에 의하면 시간과 숫자는 심상에 분립된 것에 불과하며 심상에 분립된 영상이 색법과 심법에 의거하여 모두 가립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론들은 불상응행법의 논리와 유식도리에 의거하여 성립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시간은 체성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소승불교는 온․처․계가 변천하는 유위법에 의거하여 시간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대승불교에서는 온․처․계 등의 자체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견해가 다른 것 같으나 중관학파는 외도들이 실제로 숫자와 시간이 있다고 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시간의 체성이 없다고 한 것이고 유식학파는 대승의 법상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2종파는 유무가 서로 다르지만 상위한 것이 아니며 다만 서로 별립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부파불교의 물질론을 바탕으로 중관학파에서는 범부들의 무지를 제거해 주기 위해서 물질은 곧 공(공)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지혜로 공성(공성)을 관찰하여 물질에 무애자재하며 색(색)이 곧 공(공)이고 공(공)이 곧 색(색)이라는 유일경계(유일경계)를 관찰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유식학파에서는 산하대지가 극미(극미)의 집합이며 이러한 극미가 더 분석되면 공으로 돌아간다는 이론을 전개하여 만법은 유식(유식)이라는 사상을 토대로 색법관(색법관)을 정립하였다.

불교의 물질론 중 특히 부파불교의 그것은 현대물리학의 소립자론이나 우주론에서 단위를 정하여 우주를 기술하는 것과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물질론 보다는 시공간의 구조에 더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러한 비교는 생략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부파불교의 물질론을 다룬 것은 시공간의 기본을 이루는 단위가 물질론에 기초하기 때문이며 그 작동원리는 오히려 화엄의 법계연기관(법계연기관)과 십현연기관(십현연기관)에 더 잘 기술되어 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추후로 기약하기로 하고 이제 물리학이 기술하는 시공간론에 대해 알아보겠다.

 

2. 물리학의 시공간론

물리학의 목적은 시간과 공간의 진정한 모습과 그 결과로 나타난 이 우주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지난 300년간 물리학의 발달과 함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난제로 군림해 왔으며, 지금은 이 우주의 구조를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서 밝혀줄 후보로 각광받고 있다. 이제 뉴턴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최신의 우주론인 초끈 이론에서 어떻게 시공간을 기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1) 뉴턴 역학의 시간과 공간

근대 물리학의 기초는 뉴턴(1643-1727)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으며 그 핵심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 운동법칙에 의해 기술되어 있다;

제1법칙: 힘이 가해지지 않은 물체는 등속도 운동을 한다.

제2법칙: 물체에 힘이 가해지면 물체는 힘의 방향으로 힘의 크기에 비례하는 가속도를 갖는다.

제3법칙: 물체 A가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B는 A에 같은 크기의 반대 방향의 힘을 가한다.

위의 기술에서 제1법칙이 제2법칙의 특수한 경우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항상 의문스러웠다. 왜냐하면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제2법칙에 의해서 가속도는 0이고 따라서 등속도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턴이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고 제1법칙을 별도로 기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1법칙을 생략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제2법칙이 일반적으로 성립되는 법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장 막 출발하고 있거나 급정거하고 있는 자동차 안에서 물체의 운동 실험을 해 보면 제2법칙은 성립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제2법칙은 제한된 관측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고 제1법칙이 그 제한된 관측계를 지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제1법칙이 성립되는 계, 즉 힘이 가해지지 않은 물체는 등속도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계를 ‘관성계’라 부른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이라 부르는 이 제1법칙을 통하여 공간의 모든 점에 대해서 성립하는 관성계, 즉 전공간(global) 관성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역학체계를 세웠다. 뉴턴은 나아가 물질의 존재와 전혀 무관하고 항구적인 성격의 ‘절대공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절대 공간에 대해서 정지해 있는 관측계는 관성계로 보았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관한 한 어느 한 관성계를 물리적으로 특징 지워 구분해 낼 방법이 없다. 모든 관성계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며 어느 계가 정지해 있고 어느 계가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물리적인 기준이 없다.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그가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고 기차에 같이 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정지해 있다고 말한다. 이 때 누구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가를 가릴 수 있는 물리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도의 개념에는 절대적인 의미는 없고 상대적인 의미만 남는다. 갈릴레이 좌표변환에 대해서 꼴이 변하지 않음을 갈릴레이 상대성 원리라고 부르며 뉴턴 역학에는 갈릴레이 상대성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2) 특수상대성 이론의 시공간

19세기 후반 맥스웰(1831-1879)에 의해 완성된 맥스웰 방정식에 의하면 진공 중에서 전파되는 전자기파는, 그 파가 발생할 때의 파원의 운동 상태에 관계없이 또 파의 진행방향에 관계없이, c = 3*

m/s 로 주어지는 속력으로 진행한다. 이 사실은 갈릴레이 좌표변환식을 적용할 경우 모든 관성계에 다 성립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두 개의 관성계 S와 S'을 생각하고 S'계가 S계에 대해서 x축 방향으로 V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자. S계에서 맥스웰 방정식이 성립한다면 S계에서는 전자기파의 진공 중에서의 전파속도는 모든 방향으로 c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S'계에서는 전파속도가 방향에 따라서 +x축 방향으로는 c-V, -x축 방향으로는 c+V로 달라야 되며, 맥스웰 방정식은 성립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맥스웰 방정식이 성립되는 S계는 모든 다른 관성계와 물리적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특수한 계이며, 이 계를 절대정지계로 이름붙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속도에도 절대적인 개념을 부여할 수 있고, 전자기 법칙까지 포함하는 물리 이론에는 앞에서 언급한 상대성 원리가 깨어지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마이클슨과 몰리의 실험 결과로부터 전자기파의 전파 속도가 어느 관측계에서나 똑같이 c임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것과 갈릴레이 좌표변환식이 함께 성립할 수 없으므로 전자기파의 불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좌표변환식이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밖에 없다. 이 새로운 변환식은 아인슈타인의 1905년 논문에 유도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여기서

 

이다. 이 변환식은 로렌츠 변환식이라고 한다. 로렌츠는 맥스웰 방정식을 불변으로 유지하는 좌표변환식으로서 이 변환식을 찾아냈으나 물리적인 해석을 가하거나 더 이상의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변환식의 물리적인 해석을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뉴턴 역학을 수정한 상대론적 역학을 세웠다. 전자기 법칙에 관한 한 모든 관성계는 로렌츠 좌표변환에 의하여 동등한 자격을 회복하였지만, 거꾸로 뉴턴 운동방정식은 로렌츠 좌표변환에 의하여 그 꼴이 바뀌므로 뉴턴 역학에 관해서는 관성계간에 차별이 생긴다. 아인슈타인은 이 차별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뉴턴의 운동방정식에 수정을 가하여 로렌츠 변환에 대해서 불변인 운동방정식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이 상대론적 운동방정식이다.

나아가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모든 물리법칙은 로렌츠 좌표변환에 대해서 불변인 꼴이어야 한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로써 모든 물리법칙은 어느 관성계에서나 동일한 꼴로 기술되며 관성계간의 차별성은 없어지고 절대정지계의 개념은 물리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물리법칙에 상대성 원리가 처음 도입되었다기보다는 전자기 법칙에 의해서 상대성 원리가 깨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좌표변환을 갈릴레이 변환으로부터 로렌츠 변환으로 바꿈으로써 상대성 원리를 회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로렌츠 좌표변환식을 자세히 보면, 갈릴레이 변환에서는 시간좌표가 변환되지 않는데 비하여, 로렌츠 변환에서는 S'계의 시간좌표 t'이 S계의 시간좌표 t 뿐만 아니라 공간좌표 x에도 의존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서 인식되지 않으므로 상대성 이론에서는 절대 시간의 개념을 포기한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이 혼합된 개념인 시공간이란 표현이 자주 쓰인다. 시공간 상의 두 점 사이의 좌표 차이에 대한 변환식은,

이다. 이 변환식으로부터 유도되는 다음 몇 가지는 고전물리학 이론과는 다르게 특수상대성 이론에 고유하게 제시하는 사항들이다.

가. 동시의 상대성: S계에서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동시에 발생하여

인 경우,

이다. 즉, S계의 동시가 S'계에서는 동시가 아닌 것이다. 동시의 개념이 더 이상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 되었다. 어느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였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관측자를 지정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은 질문이며 관측자에 따라 답이 다른 질문이 된다.

나. 시간 지연: 1초에 한 눈금씩 움직이는 시계가 S계에서 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하자.

이므로

이고,

초일 때

초이다. 예를 들어 V=c/

인 경우

이므로 이 시계가 한 눈금 움직이는 시간이 S'계에서는 2초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물체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그 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경우보다 느리게 진행한다. 우주선(cosmic ray)의 높은 에너지 입자나 대형 가속기에서 가속된 입자의 속도는 빛의 속도에 근접하므로 시간 지연 효과는 매우 크게 나타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들의 반감기는 정지상태보다 훨씬 긴 것이 실험적으로 확인된다.

다. 길이 수축: S'계의 x'축에 고정되어 있는 길이 1m의 막대를 생각해 보자. 이 막대의 길이를 S계에서 측정하기 위해서는 막대 양끝의 x좌표를 동시에 읽어서 서로 빼주면 된다. 따라서

를 변환식에 대입하면

를 얻는다. 위의 예와 같이 V=c/

인 경우, S계에서 측정하는 길이는 0.5m이다. 일반적으로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정지 상태 때에 비해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줄어든다.

 

3) 일반상대성 이론의 시공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뉴턴의 중력 이론을 자신의 특수상대성 이론의 틀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시도는 애초의 목표를 벗어나서 1916년에 최종적으로 정리 발표된 일반상대성 이론의 개발로 발전하였다. 이 이론에서는 시공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이 도입되었는데, 그것은 중력장의 효과가 시공간의 휨(curvature)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질의 분포와 운동 상태가 시공간의 휨을 결정하고 시공간의 휨이 물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을 개발하는 과정에는 자신이 1907년 발표한 ‘등가 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가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그 내용은 중력장의 효과와 관측계의 가속도 운동의 효과는 국부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등가 원리의 더 단순한 형태는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의 동일함이다. 질량의 개념은 서로 다른 두 경우에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중력의 원천으로서의 질량이고 다른 하나는 힘과 가속도 사이의 비례상수로서의 질량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는 중력질량(

), 후자는 관성질량(

)이라고 부른다. 만약 중력질량과 관성질량의 비가 물체마다 다르다면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들은 서로 다른 가속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실험이래로, 실제로는 모두 동일한 가속도를 갖는다는 것이 실험을 통하여 검증되어 왔다.

이제 중력장이 없는 상황에서 관측계 자체가 -a의 가속도로 운동하면 이 관측계에서는 힘이 가해지지 않은 모든 물체들이 a의 가속도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관측계에서 물체들이 모두 a의 가속도를 가지고 운동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이것이 중력장의 효과인지 관측계 자체의 가속도 운동의 효과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중력장의 효과와 관측계 가속운동의 효과간의 동일성을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만 적용하면 이를 약 등가원리라고 부른다. 아인슈타인은 이 동일성을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해서 제한 없이 확장 적용하였으며 이 경우 강 등가원리라고 부른다. 강 등가원리에 의하면, 균일한 중력장에 대해서 자유낙하하고 있는 관측계에서 보면 모든 자연 현상은 중력장이 전혀 없을 때와 똑 같은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균일하지 않은 중력장의 경우 공간상의 각 점마다 중력장의 세기와 방향

그림 1. 중력에 의한 시공간의 휨

(a) 2차원 개요도 (b) 3차원 개요도

그림 2. 회전하는 물체는 그 주변의 공간을 소용돌이 형태로 왜곡시킨다.

이 다를 수 있으므로 그 각 점에 대해서 자유낙하하는 관측계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어느 한 특정한 점에 대해서 자유낙하하는 관측계에서 보면 그 점 주위에서 중력장이 거의 균일하다고 볼 수 있는 작은 영역에 대해서만 중력장이 없어지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이 어느 한 점에 대해서만 자유낙하하는 관측계를 그 점에 대한 국소 관성계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균일하지 않은 중력장이 존재하는 경우, 공간상의 모든 점에 대해서 공통인 관성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각 점에 대한 국소 관성계들만 존재한다.

4차원 시공간의 각 점을

라는 좌표로 기술하면, 등가원리에 의하여 임의의 점

에 대한 국소 관성계가 존재하고 그 점에서의 고유시간(

)은 국소 관성좌표계

를 사용하면, 특수상대성 이론에서와 같이, 민코프스키 메트릭(

)을 통하여

로 주어진다. x 좌표계에서는 고유시간이

로 표현되므로, 점 x에서의 메트릭스 값은

로 계산된다. 함수

의 구체적인 모양은 시공간 각 점에 대한 국소 관성 좌표계와 x 좌표계 사이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데 이 관계는 다시 중력장의 모양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결국 메트릭은 중력장에 의해서 결정되고 중력장에 대한 정보는 메트릭에 기록되는 것이다.

한편 메트릭은 시공간의 기하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최종적으로는 중력장의 효과가 시공간의 기하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중력장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는 포텐셜

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는 메트릭

로 대치되고,

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대치하는

에 대한 미분방정식이 아인슈타인 장방정식이다.

시공간의 모든 점에서 이 메트릭을 민코프스키 메트릭으로 변환시키는 좌표변환이 존재하면 이 시공간은 본질적으로 평평한 민코프스키 시공간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휜 시공간에 해당한다. 중력장 내에서 자유낙하하는 물체나 빛은 이 휜 시공간의 축지선(geodesic)을 따른다. 이 메트릭이 주어지는 공간에서의 축지선을 조사함으로써 알려진 일반상대론적 효과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태양 주위를 스쳐 지나오는 별빛은 태양 쪽으로 휘어 온다, 수성의 공전 궤도는 세차운동을 한다, 먼 천체로부터 오는 복사는 적색편이를 일으킨다, 등이 있다.

이 현상들은 모두 실제 관측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는데, 먼 천체로부터 오는 복사의 적색편이 현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똑같이 만들어진 시계 두 개를 준비하여 하나는 어느 별 표면에 놓고 다른 하나는 관측자가 가지고 별로부터 멀리 위치하였을 때, 별 표면에 있는 시계가 매 초 신호를 보내고 관측자가 그 신호를 받을 때, 관측자가 지니고 있는 시계는 신호와 신호 사이의 간격을 1초보다 큰 값으로 기록한다는 것이 일반상대성 이론의 결과이다. 따라서 관측자는 별 표면에 있는 시계가 느려져서 1초보다 큰 시간간격으로 신호를 보낸다고 판단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중력장 내에서 똑같은 시계가 하나는 중력포텐셜이 낮은 곳에, 또 하나는 중력포텐셜이 높은 곳에 있다면 낮은 곳에 놓여 있는 시계가 높은 곳에 놓여 있는 시계보다 느려지는 것이다. 블랙홀의 경우에는 이러한 적색편이가 무한대로 일어난다. 블랙홀의 바깥에서는 그 안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신호도 유한한 시간 내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비행체가 블랙홀을 향하여 여행한다면 그 비행체는 그 안에 싣고 가는 시계로는 유한한 시간 내에 블랙홀에 진입할 수 있지만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그 비행체가 블랙홀에 진입하는 것을 관찰하려면 무한대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4) 초끈 이론에서의 시공간

아인슈타인은 1916년에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1917년에 리이만 시공간의 개념에 입각한 새로운 우주모형을 제시하였다. 이 모형에 의하면 우주 공간은 4차원 유클리드 공간 내의 구의 표면으로 주어지는 3차원 공간에 해당하며, 이 3차원 공간 내에 물질이 대체로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본다. 4차원 구의 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우주 공간의 크기는 유한하며, 어디에도 우주의 끝이라고 할 만한 경계가 없는 모형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 모형을 기폭제로 하여 일반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우주론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결국 ‘표준모형 우주론’의 개발로 이어졌다. 표준모형 우주론에서는 ‘우주론적 원리’를 가정하는데, 그 내용은 우주 공간이 거시적인 척도로 볼 때 거의 균일하고 등방적이라는 것이다. 우주론적 원리의 가정 하에서 우주의 시공간은 다음의 로버트슨-워커 메트릭으로 기술될 수 있다;

여기서

는 우주척도 인자라고 불리며

는 상수이다. 어느 주어진 t의 순간에 우주공간의 기하는

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0인 경우는 3차원의 평평한 공간이고

>0인 경우는 4차원의 평평한 공간 내의 구의 표면에 해당하는 3차원 공간으로서 양의 곡률을 갖는 닫힌 공간이다.

<0인 경우는 음의 곡률을 갖는 무한대 부피의 열린 공간이다.

의 구체적인 함수 꼴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의 해로써 구해내야 하는데, 그 해는 현재 우주공간의 밀도가 임계밀도보다 크냐 작으냐에 따라 현저히 다른 모양을 보인다. 임계밀도보다 더 큰 경우, R은 증가하다가 유한한 시간 내에 증가를 멈추고 다시 감소한다. 즉 우주공간은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게 된다. 임계밀도보다 더 작은 경우에는 R은 계속 증가한다. 임계 밀도와 같은 경우는 위의 두 경우의 경계이다. 실제 우리의 우주는 이 세 경우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아직 확정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 경우 모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R값은 계속 감소하여 유한한 시간 내에 영으로 된다. 즉, 유한한 시간 전에 우주는 물체들이 극한적으로 밀집되어 무한대 에너지 밀도와 무한대 온도의 상태에서 폭발적인 팽창을 시작하여 아직도 그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표준모형 우주론은 일명 ‘대폭발(big-bang)우주론’이라고도 불린다.

대폭발 특이점은 모든 물리법칙의 적용이 불가능해지는 점으로서, 이는 일반상대성 이론이 그러한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유효하다고 가정하였을 때 도달하는 점이다. 대폭발 특이점에 접근하면 일반상대성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의 믿음이다. 이것은 양자론과 상대론을 모두 포용하는 통일장 이론이라고 이름 붙여졌지만 이 방면에 아직은 확립된 이론이 없다. 현재로서는 초끈(superstring) 이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고 또 우주 시공간이 3+1차원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기술될 수 있는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그림 3. 진동하는 끈의 처음 몇 가지 사례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은 입자들이 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부

정하고 있다. 끈이라는 단 하나의 개체가 진동패턴에 따라 온갖 입자들을 양산해 내고 있으므로, 모든 만물은 초끈 이론이라는 하나의 이론체계 속에 자연스럽게 통일되는 것이다. 이러한 초끈 이론에 의하면 이 우주의 시공간이 3차원 공간과 1차원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존의 관념을 폐기하고 ‘9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이라는 황당무계한 가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여분의 차원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즉, 초끈 이론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진정한 실체가 아니라 실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셈이다.

이 여분의 차원은 아주 작은 영역 속에 구겨져 있어서 현재의 관측기구로는 측정할 수 없거나, 아니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방대한 영역에 퍼져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여분의 차원이 작은 영역 속에 구겨진 채 숨어 있다면 이 우주에 지금처럼 별과 행성이 존재하는 이유 등 매우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며, 여분의 차원이 방대한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면 여분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공간 근처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초끈 이론에서는 시공간이 상대성 이론에서처럼 근본적인 개념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이론으로는 우주의 구조를 홀로그램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홀로그램은 2차원의 평면 필름에 레이저 광선을 쏘아 만드는 3차원 영상인 홀로그램인데 이것은 필름을 잘게 쪼개더라도 상이 희미해지기만 할 뿐, 동일한 영상을 재생해 낸다. 즉 일반적인 정보의 저장방식과 달리 아무리 작은 조각 안에도 전체의 정보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의 단초는 블랙홀에서 잡을 수 있다.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가장 밀도가 높은 천체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블랙홀의 엔트로

그림 4. 숨은 차원의 모습. 멀리서 바라보면 밧줄은 1차원의 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확대해서 보면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차원, 즉 밧줄을 감고 돌아가는 원형차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피, 즉 무질서도가 그 가장자리(사건지평선)의 면적에 비례한다는 사실로부터 우주가 홀로그램적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20) 즉, 주어진 영역의 최대 엔트로피가 그 영역의 부피가 아닌 면적에 비례한다면, 무질서도의 원인이 되는 근본적인 자유도는 영역의 내부가 아닌 표면에 존재하게 되고, 그렇다면 우주의 물리적 과정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표면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셈이며,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이 과정이 투영된 영상, 즉 가상현실에 불과하게 된다. 결국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3차원 홀로그램 영상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무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과 “무언가의 변화를 야기하는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은 서로가 결합된 일종의 시공간 복합체로서 뉴턴의 법칙에서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에 이르는 모든 이론들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게 되어 우주는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을 배제한 채 근본적인 단계에서 다시 기술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봄에 의하면 시공간은 일종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미세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미세 차원에서는 위치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공간 속의 모든 지점들이 다른 모든 지점들과 동등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비국소성, 초공간성을 띠게 된다.

3. 불교의 시공간론과 물리학의 시공간론 비교

불교의 시공간론과 현대 물리학의 시공간론을 비교할 때, 구체적인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여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크게 보았을 때에는 서로 매우 유사한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부파불교의 물질론을 현대의 소립자론 및 우주론과 비교해 보면 그것이 쉽게 드러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물질과 물질이 모여 공간을 이루고 이것은 유위법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천을 피할 수 없어 시간의 개념이 도입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소립자론과 우주론은 바로 극미로부터 광활한 우주의 공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한 이론이고 시간과 공간은 상대성이론에 의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비교는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시공간론을 비교하는데 있어서 기본 개념이 될 수 밖에 없다.

먼저 부파불교의 색분제를 살펴보면 그 단위는 극미, 미진, 금진, ..., 구로사, 유선나 등 16종류로 분류되었다. 이는 자연 과학에서 쿼크, 양성자, 원자, 분자, 콜로이드 입자, ..., 등과 같이 작거나 큰 물체에 대하여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21) 또한 극미는 미립자이지만 입체적으로 둘러싼 면을 갖지 않으므로, 이는 수학에서 말하는 점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극미는 물질의 공간적 연장을 극한적으로 분석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공간적인 연장을 갖지 않으나 그 집합은 공간적 연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극미는 전혀 지속성을 갖지 못하며 다만 순간적으로 생멸할 뿐이다. 이와 같은 여러 성질은 소립자 물리학에서 논의되는 쿼크와 그 성질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쿼크도 물질을 이루는 최소 입자들 중 하나에 속하고, 점에 가까운 입자로 보고 있으며, 순간적으로 쌍생성과 쌍소멸을 계속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극미의 집합인 물체는 여러 인연의 집합으로 인하여 조성되었기 때문에 물체가 조성된 다음부터 곧바로 변천하게 된다. 모든 물체는 변천하는 것이므로 그 변천 과정에 따라 시간도 발생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물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절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는 뉴턴 역학에서와 같이 절대 공간이나 절대 시간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상대론적으로 4차원의 시공간 연속체를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상대론에서는 상대속도에 따라서, 시간에 따른 운동의 변화량과 공간에 따른 운동의 변화량이 서로 직접적으로 교환가능한 양임이 드러나지만 불교에서는 시공간의 직접적인 연관을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불교에서의 시공간론을 보면 십이연기에서 알 수 있듯이 색(색) 즉, 형상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식(식)이 세계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특정의 시간과 공간 즉, 형상의 우주에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

그림 5.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원자핵과 전자들

라, 인식에서 특정의 시간과 공간 즉, 형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 즉, 형상의 우주를 인식이 인지하는 것이지만,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인식에서 형상의 우주, 시공간의 우주가 일어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상대성 이론에서의 시공간은 비록 시간과 공간이 연관된 시공간 연속체로서 이것을 규정하지만, 아직도 시공간이 양자적으로 우주를 이루는 실체적인 관념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화엄의 법계연기를 보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인 중중무진한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생성소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기본단위로서의 실체를 부정하는 관점이고 전체로서의 역동적인 관계성을 법계연기로 규정하는 것이다. 또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초끈 이론에 의한 다차원을 가진 미세구조로 이루어진 미묘하고 역동적인 우주의 구조와 상당한 유사점을 가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초끈 이론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드라망’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그물망‘을 뜻하는 말로 만물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 연결돼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또한 이 끈이 매우 짧은 순간적인 상호작용으로 입자의 성격을 띠는 것은 물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속적인 현상으로 보는 화엄의 사사무애의 세계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22) 이것은 ‘초끈 이론’이 화엄의 법계관과 유사점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IV. 인과성과 시공간의 관계

불교에서는 우주적인 인과의 세계를 법계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세계에 대한 정신적 수행을 통해서 우주의 보편적 법칙인 인과적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불교의 이러한 심오한 진리는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한계나 구속을 초월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불교적 인과론은 모든 현대과학의 인과율의 법칙과 매우 유사한 이론적 구조를 갖고 있으나 전자는 정신적 도덕적인 것을 수반하는 윤리적 우주의 인과관계를 다루는데 비해 후자는 무도덕적인 우주를 다룬다. 현대과학의 가치중립적 무도덕성과 그 폐해는 인과원리에 대한 보다 철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초기불교에 나타난 연기(연기:paticcasamuppada)의 다양한 어원에 대한 해석을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paticca는 조건성을, samuppada는 수반성을 의미한다고 한다.23) 수반(수반:superveniense)은 원래 무어(G. E. Moore)의 도덕철학에 주로 거론된 것으로 가치적 속성과 자연적 속성의 의존관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김재권에 와서 어떠한 속성이든 간에 함께 변함(covarience)와 의존(dependency)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다.24)

이러한 연기는 조건적 발생이므로 거기에 인과의 근접성이 반드시 수반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 동시적 관계, 공간적으로 원격적인 인과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살펴보지 않았지만 연기와 인과성은 엄밀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연기를 ‘상호 의존적 발생’, ‘동시 인과’, ‘상호적 기원’ 등으로 해석할 때 이것은 서양과학의 선형적인 인과 개념을 수정하는 포괄적이고 대안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물리학의 인과성에 대해 고찰해 보면, “과거와 미래의 모든 정보는 현재의 순간에 모두 각인되어 있다.”이다. 이것은 특수 및 일반 상대성이론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상대론적 시간은 고전적 개념보다 한층 더 미묘하게 꼬여 있긴 하지만, 현재의 상태로부터 모든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논리는 상대성이론이나 고전역학이나 다를 것이 없다.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르다 보면 어떤 물체의 지금 상태를 제아무리 정확하게 측정한다 해도 그 물체의 과거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나 미래에 그 물체가 처할 때 물리적 상태를 확률적으로 짐작하는 것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EPR 실험에 의하면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는 공간을 초월한 양자적 연결고리가 형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다 해도 신호가 즉각적으로 전달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물체는 마치 하나인 것처럼 행동한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시공간(spacetime)이라는 하나의 객체로 통합되었으므로 양자적 연결고리는 시간을 감지하는 측면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두 물체가 양자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으면 그 영향은 공간을 초월하여 즉각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은 공간의 비국소성을 나타내는 예이고, 일종의 동시인과율로 볼 수 있다.

시공간의 특성에 대해 살펴보면,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시간과 공간은 빛의 속도가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각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극단적으로 광속으로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에 따른 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 버린다.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경험은 여러 장의 시공간의 단면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마치 필름을 비추는 프로젝터처럼, 우리의 의식이 과거의 특정 시간 단면을 비추면 그 부분이 되살아나면서 현재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이 때 떠오르는 영상을 우리는 기억이나 추억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면 모든 순간들이 똑같이 현실적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무언가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변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과거․현재․미래가 똑같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이 느끼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하였다.25)

이렇게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었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아직도 시공간을 양자적 실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이론은 각각 거시적인 세계와 미시적인 세계를 성공적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한데 섞어 놓으면 거의 재난 같은 일대 모순이 발생한다.26)

이러한 모순을 피하고 체계적으로 통합할 이론으로 현재로서는 초끈이론이 가장 유력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가 점의 형태가 아니고 끈의 형태를 이루고 있어 진동패턴에 따라 다양한 입자들을 양산해 낸다. 즉 아무리 작더라도 입자라는 실체개념은 부정되는 것이고 시공간도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으로 숨겨진 차원을 6개나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보통의 인식으로는 파악되기 어려운 경험들과의 연결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으로서 현대과학은 지금까지 환원주의를 취해왔다. 환원주의 하에서는, 현상계가 드러내는 중층적 세계의 모든 현상을 물리적 동력인으로 환원하여 본체계와 현상계의 상하 두 차원간의 환원을 가능케 해 주는 교량원리(bridge principle)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27) 이러한 교량 원리는 상위 차원이 새롭게 출현시키고 있는 창발적 속성과 하위차원의 고정적인 공변 관계가 성립하리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공변 관계는 사실상 상향적 결정 관계, 곧 수반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28)

그러나 환원주의의 설명과 달리 실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상향적 결정관계와 하향적 결정 관계가 모두 경험되는 세계이다. 몸의 조건이 마음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마음의 의지력이 몸의 질병을 치유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적 결정 관계를 포착하는 교량 원리는 현상계와 본체계의 두 차원 간에 성립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표현해 주어야 하므로 외연적으로 단순한 쌍조건문으로 기호화할 수 없다.

중층적 세계가 갖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 같이 설명해 보려는 시도는 선형적 인과 개념을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연기론에 접근하게 된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연기공식에 나오는 조건성과 수반성을 확장하여 두 사건 또는 두 입자간의 상호간의 인과관계뿐만 아니라 시공간의 구조를 포함하여 다른 차원간의 상호작용이 중층적으로 연결된 화엄의 중중무진 법계연기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갖는 본체계와 현상계의 관계가 공즉색 색즉공(공즉색 색즉공)의 연기론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는 것이다.

이것은 본체계와 현상계가 이원론적으로 나뉜 서양철학의 개념으로는 현대과학이 직면한 다양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과성 위배나 동시인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이법계와 사법계가 서로 차원을 달리하여 있지만 원융무애하여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는 불교의 연기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V. 결론

불교에서의 인과의 원리는 ‘연기’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표현된다. 불교의 연기론은 현상계의 생기, 원인, 순서, 그리고 본체와 현상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렇게 ‘연기’라는 개념은 인과성이라는 하나의 단면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사상체계이다.

현대과학의 제 영역에서는 이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선형적이고 단일 방향적인 인과율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인과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이 글에서는 연기론에 대해 자세히 고찰하였다. 먼저 초기불교의 연기공식에 드러난 ‘연기'의 어원적 해석으로부터 연이어 일어나는 계기성(계기성)과 함께 일어나는 구기성(구기성)의 양면을 살펴보았다. 붓다고싸는 이것을 조건성과 수반성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연기의 공식에는 동시적이면서도 존재상의 계기가 인정되는 상호관련의 수반성을 내포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계기성을 동시적인 존재상의 계기의 관계로, 구기성을 연기의 상호의존적 성격으로 규정하여 검토해 보았다. 철학적인 개념의 고찰에 의하면 인과성과 상호성은 다른 범주에 속하는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앞에서 살펴본 현대과학의 인과성 위배의 문제에서는 동일한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연기론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인과성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현대 테크놀러지의 피드백(feedback) 개념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피드백 되는 입력과, 상호작용하는 A와 B사이의 관계가 정신과 육체, 또는 본체계와 현상계 사이의 인과관계와 유사하여 중층적인 인과의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의 개념처럼 이원론적이거나 수반론적인 것이 아니며 대등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유연하게 관계를 맺고 있어서 화엄의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 사이에서의 관계와 아주 흡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중층적 인과의 구조는 시공간의 구조와도 연결되는 것이기에 불교와 현대과학의 시공간론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의 시공간론은 물질론과 관계되어 있다. 이것은 원시경전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오온(오온) 가운데의 색온(색온)과 십이처(십이처) 가운데 5근(오근)과 5경(오경) 등의 이론이 물질론에 속한다. 소승불교에서는 물질과 시간을 철저하게 관련시켜서 그 단위를 정하고 있는데 대비바사론과 구사론 등에는 물질의 단위, 또는 공간적인 길이의 단위로서 색분제(색분제)와 시간의 단위로서 시분제(시분제)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 유식학에서는 만법은 유식(유식)이라는 사상을 토대로 색법관(색법관)을 정립해 나간다.

물리학의 시공간론의 기본개념은 뉴턴의 역학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100년이 채 못 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에 의해 시공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중력장에 의해 비틀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도 시간의 비대칭성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한 것이 빅뱅(bigbang) 이론을 포함한 우주론이다. 시간의 비대칭성은 우주가 탄생하던 순간에 존재했던 고도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29) 이러한 우주론조차도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으니 거시적 영역을 기술하는 상대성이론과 미시적 영역을 기술하는 양자역학이 결합하자 일대 모순이 발생하였다. 이 모순을 피하고 체계적으로 통합하는 이론으로 앞에서 초끈 이론을 살펴보았는데, 이 이론이 기술하는 우주의 시공간은 4차원 이외에도 6개의 숨은 차원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공간이 인과성과 연관될 때, 두 사건 또는 두 입자 상호간의 작용은 사사무애법계로 볼 수 있고, 시공간의 구조와 연관된 다른 차원(숨은 차원)간의 인과관계는 이사무애법계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여기서는 시공간의 구조와 인과성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화엄의 법계연기 중 4종법계에만 배대하여 위의 문제를 해석하였지만 법계연기는 구체적으로 육상원융론(육상원융론)과 십현연기법문(십현연기법문)으로 설명되어진다. 특히 십현연기는 제법의 원융무애(원융무애)와 시공간적 상즉상입(상즉상입)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사무애법계와 사사무애법계 사이에 공즉색(공즉색)이고 색즉공(색즉공)인 구체적인 작동원리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며, 여기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추후의 과제로 남겨놓겠다.

지금까지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현상적인 유사점을 연기론적 접근방법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불교와 과학은 그 출발점과 지향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교를 하는 이유는 현대과학의 성과를 지식의 범주에서 포괄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적 세계관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과학문명의 병폐를 풀어갈 수 있는 우주적인 혜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C 본체계(진제)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

A(원인)/입자 a B(결과)/입자 b

 

그림 6. 시공간의 구조와 법계연기와의 관계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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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 윤종갑,「용수의 상의성의 연기에 대한 연구」(『실학논총』22, 2000)

♣ 이중표,「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불교학 연구』2, 2001)

♣ 한자경,「불교의 생명관과 자비의 마음」(『불교학 연구』11, 2005)

♣ 선후,「능엄경에서 바라본 불교의 우주관」(『동학』66, 2000)

♣ 현남규,「인과성 문제와 연기」(『과학철학』2, 1999)

♣ 현남규,「현대물리학자와 고대 불교학자가 본 우주의 기원」(『과학교육』11, 1994)

♣ 박소정,「연기를 통해서 본 인과 확장론」(『공과 연기의 현대적 조명』, 1999)

♣ 이행구,「화엄경에 나타난 연기사상」(『불교학보』34, 1997)

♣ 허정화,「화엄사상과 현대 물리학의 비교연구」(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동 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 이종철,「불교의 시간관」(『사회비평』21, 1999)

3. 인터넷

♣ 이시우,「상의적 수수관계와 연기법」(≪http://www.buddhapia.com≫, 1988)

♣ 신용국,「연기법, 우주의 진실」(≪http://www.naver.com≫, 2006)

♣ 곽윤항,「칸트 입장에서 본 상대론적 시공간」(≪http://www.naver.com≫, 2006)

♣ 연미소,「현대물리학과 과학사상」(≪http://mulli2.kps.or.kr≫, 1988)

♣ 최종덕,「우주는 움직이는 하나의 그물」(≪http://www.naver.com≫, 1988)

♣ 양형진,「불교의 우주론」(≪www.sejon.or.kr≫, 2006)

♣ 전 철,「시간이란 무엇인가-우주론의 문제를 중심으로」

(≪http://www.naver.com≫, 2006)

♣ 전 철,「칼 구스타프 융의 동시성 이론과 그 의미」(≪http://www.naver.com ≫, 2006)

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2) 조애너 메이시,『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불교시대사, 2004, pp.29-51)

3) 전재성,『초기불교의 연기사상』(한국빠알리성전협회, 1999, pp.63-97)

4) 빨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uppadā idaṁ uppajjati. imasmim asati idaṁ na hoti, 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 (SN. II. p.28) (전재성, 같은 책 p.80에서 재인용)

5)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차무고피무 차멸고피멸)

6) 김동화,『원시불교사상』(보련각, 1992, p.63) (전재성, 같은 책 p.85에서 재인용)

7) 윤종갑, 「용수의 상의성의 연기에 대한 연구」(『실학논총』22, 2000) 여기서 ‘상호의존성’ 또는 ‘상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살펴보면, 근래에 들어 상의성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우정백수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연기를 상의성으로 해석한 데에는 2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화엄경의 법계연기를 연구하면서 법계연기가 다름 아닌 상의성의 연기에 토대하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둘째는 당시 서구 불교학계에서 활발히 연구되었던 “중론”연구에 힘입어 “중론”에서의 연기가 상의성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우정백수의 견해는 전체적으로 보아 “중론”의 연기가 상호의존적 관계인 상의성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입장을 더욱 발전시켜 연기는 상의성이며, 이때의 상의성이란 논리적인 관계임을 분명히 하여 기존의 전통적 연기 해석, 즉 십이지 연기의 시간적 인과관계를 반대하였다. 우정백수는 12연기의 각 지분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단지 개념상의 구별로 보아 이것을 상의상관적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중론”의 연기는 상의성만으로 번역되고 있지는 않다. 학자에 따라서는 ‘의존성(의존성)’, ‘상대 연기(상대 연기)’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의존성’으로 연기를 표현할 때, 이때의 연기는 ‘관계성’ 일반을 의미한다. 이에 의하면 연기는 인과관계 뿐 만이 아니라 동시적인 상호작용과 공존의 관계, 나아가서는 동일성․상대성 등의 논리적 관계도 포함하게 된다.

8) 전재성, 같은 책 p.86

9) 이중표,「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불교학 연구』2, 2001, pp.77-100)

10) SN. II. p.114

11) SN. V. p.343

12) 전재성, 같은 책 p.104

13) 전재성, 같은 책 p.87

14) 선후,「능엄경에서 바라본 불교의 우주관」(『동학』66, 2000, pp.34-37)

15) 현남규, 「인과성 문제와 연기」(『과학철학』2, 1999, pp.39-64)

16) 현남규, 같은 논문

17) 오형근,『불교의 물질과 시간론』(유가사상사, 1994, pp.293-320)

18) 권오민 역주,『아비달마구사론』(동국역경원, 2002, p.551 주7)) 이상의 공간적 길이의 최소단위인 극미에도 길이나 부피(방분)가 있을 것인가 하는 논의에 대해 만약 극미가 부피를 갖는다면 그것은 다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극미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부피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간적 점유성[애성]을 본질로 하는 색이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많은 극미가 취합하여도 역시 부피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중현논사는 극미를 실제적[실] 극미와 가설적[가] 극미라는 이중의 구조로 해석하여, 전자는 감각[5식(오식]으로 인식되는 물질의 극소, 후자는 관념[각혜, buddhi]적으로 더욱 분할되어 추리에 의해 알려지는 물질의 극소라고 하였다. 즉 연장을 갖는 색법[가석법(가석법)]은 분석되어 궁극에 이르게 되면 세간에서 볼 수 있는 취색(취색)이 되며, 그것이 다른 어떤 취색에 의해 다시 쪼개어질 경우 미세한 취색[세취]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세한 취색은 더 이상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쪼개지지 않는다 할 지라도 관념으로써 다시 분석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극소의 극미는 이미 최극소의 시간으로 설정된 찰나처럼 더 이상 분할 불가능한 관념적 소산[각혜소지]이기 때문에 또 다른 관념으로 분석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설적 극미이다.

19) 신라의 원측법사는 숫자와 시간에 대해 매우 관심이 깊어 『해심밀경소』와 『인광경소』등에서 소승불교의 시간론과 대승불교의 시간론을 함께 소개하면서 시간에 대한 안목을 열어주고 있다.

20) 브라이언 그린,『우주의 구조』(승산, 2005, pp.644-649)

21) 현남규,「현대물리학자와 고대 불교학자가 본 우주의 기원」(『과학교육』11,1994, pp.129-147)

22) 프리초프 카프라,『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 2002)

23) 붓다고싸의 해석으로 연기론을 경험적 차원에서 존재론적으로 다루고 있다.

24) 전재성, 같은 책 p.501

25) 이렇게 시공간의 단면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단지 그 단면들을 매 순간 떠올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미 정해져 버린 우주에 대해 우리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이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해답으로는 도이치(Deutsch)의 다중우주 해석론을 들 수 있다. 다중우주 해석론은 양자적 파동함수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관측을 통해 하나의 값으로 정해질 때마다 이 우주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행된다는 이론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특정한 시간에 우리가 느끼는 우주는 관측을 통해 갈라진 무수히 많은 다중우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우주들 중 어떤 우주에 편승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26) 물리학의 역사는 통일의 역사이다. 지난 수세기 동안 물리학자들은 외관상 전혀 다르게 보이는 다양한 자연현상들을 최소한의 물리법칙으로 통일해 왔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자연을 기술하는 4가지 모든 힘을 통합하는 야심찬 이론을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이라 이름하였다.

27) 박소정,「연기를 통해서 본 인과 확장론」(『공과 연기의 현대적 조명』, 1999, pp.329-342)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과학의 탐구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현상의 결정 요인 중, 동력인과 질료인만을 유효한 인과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선형적 인과 모델에서는 동력인만을 에너지 전이의 추동력을 가진 것으로 본다. 현대 환원주의는 넓게 표현할 때, 목적인과 형상인이 질료인과 동력인에 대해서 제거되어야 할 것이거나, 아니면 이들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생각 일반을 가리킨다.

28) Kim, J (1996), Philosophy of Mind, Colorado: Westview Press, p.10 (박소정, 같은 논문, p.333에서 재인용)

29) 브라이언 그린, 같은 책 pp.218-261

[출처] 노원앙마블로그/불교의 인과성과 시공간의 문제: 현대 과학과의 비교|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