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덴 닥빠 스님의 <반야심경> 강설 - 정토마을
부처님께서 행복, 고통이라 할때 선업을 쌓으면 행복, 악업을 쌓으면 고통이라고 인과법(因果法)에 따라 행복하고 그리고 힘든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주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불행해지는 것이 착각, 뒤집힌 생각,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각에도 수없는 착각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착각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 삼독도 따지고 보면 뿌리가 아집(我執),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 무명(無明), 무지(無知), 어리석기 때문에 집착, 분노를 일으키고 모든 고통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착각을 우리가 다스리기 위해 무엇보다 무아(無我)인 반야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반야의 지혜없이 무지,무명을 소멸할 수 없고 소멸을 못하면 탐.진.치 번뇌가 계속 되고 착각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착각에서 못 벗어나면 계속 윤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거기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오늘 반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하는 목적은 일시적인 목적, 궁극적인 목적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목적들은 다 반야심경을 통해서 듣고 배우고 생각함으로써 문.사.수를 통해서 일시적인것과 궁극적인 모든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세제불 또한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성불하셨다' 고 나오는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반야의 지혜로 인해서 이 경지에 오르신 것이고 아라한, 성인 모두가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각자의 경지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 문.사.수를 공부하는 것이 공덕으로 표현하자면 한량없는 오랜 시간 동안 모든 불보살님께 공양 올린 공덕 보다 반야의 지혜에 대해 한 찰나라도 조금씩이라도 배울려고 생각하는 그 공덕이 더 큽니다.
모든 부처님께 공양올린 공덕 보다 반야의 지혜를 듣고 배우는 것이 공덕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야의 지혜를 배우면서 업장소멸 할수 있는 것 보다 더 나은 업장소멸 할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반야의 지혜를 듣고 배우고 수행을 하면 공덕도 한량없이 많고 업장도 한량없이 소멸할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일일이 말씀드릴수는 없지만 부처님 경전에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반야심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불자님들이 반야심경을 거의 외우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큰 보배이고 여러분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수희찬탄드립니다.
불자님들이 무엇이 중요한지 핵심을 잘 알기 때문에 복 받으실 거라고 생각하고 반야심경을 통해서 우리가 일시적인 장애, 업장을 모두 소멸할수 있고 아픈 사람에게도 돌아가실 무렵에 반야심경,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이라도 들을 수 있도록 하면 그 환자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삼악도에 절대로 안 떨어진다고 경전에 나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이 아픈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환자가 아프고 돌아 가실 무렵에 주변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울고 그러한 것은 안좋습니다.
환자가 평소에 자주 염불했던 불보살님이라든지 환자가 반야의 지혜(공성)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 환자에게 반야의 지혜인 반야심경을 독경해주면 도움이 됩니다.
티벳에서도 늘 반야의 지혜를 수행해서 마지막 돌아가실 무렵에 반야의 지혜(공성)을 생각함으로써 그 상태에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1주, 2주, 3주 동안 몸이 썩지 않고 그대로 삼매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성을 생각했기 때문에 돌아가실 무렵에 주변에서 가실 분에게 마음을 복잡하게 흔들리게 다른 쪽으로 들어가지 않게
평소에 믿었던 부처님이나 보살님 또는 반야의 지혜 쪽으로 마음을 이끌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 환자가 삼악도에 안 떨어지고 더 좋은 곳으로 갈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주요 내용을 근(根), 도(道), 과(果) 세 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根) 또는 근본은 이성제(二聖諦: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二諦)는 진제(眞諦), 속제(俗諦)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승의제(勝義諦), 세속제(世俗諦) 두 가지 이치를 말합니다.
이성제의 속제(세속제)를 말할때 인과(因果)의 모든 부분이 여기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진제(승의제)라고 할때 주로 공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도(道)라고 할때 지혜(智慧)와 방편 두 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근본(根)의 바탕이 승의제하고 세속제이기 때문에 그와 맞는수행의 방편도 지혜와 방편 두 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결과(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법신(法身), 색신(色身) 이신(二身)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근(根)은 진제(眞諦), 속제(俗諦)
도(道) 는 지혜와 방편
과(果) 는 법신(法身), 색신(色身)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광대한 반야경, 간략한 반야경 등 대.중.소 세 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반야심경은 간략한 반야경(소)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부처님 같은 제자라도 반야심경을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 제자도 있습니다.
테라바다(소승불교, 빨리어 전통의 남방불교)의 주장에 따르면 반야심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때 무슨 말이냐고 하면 반야심경을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인정하는 불교학파 가운데도 예를 들면 용수보살(나가르주나), 월칭보살(찬드라키르티) 이런분들이 반야심경을 해석하는 방법하고 무착보살,세친보살의 유식쪽으로 반야심경 주장하는 대승불교, 나란다 전통(후기불교), 그 학파들이 반야심경을 부처님 말씀으로 주장하면서 또 반야심경 내용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용수보살, 월칭보살님의 중관사상으로 반야심경을 풀고
무착보살 ,세친 보살님의 유식으로 반야심경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티베트에서는 주로 월칭 보살의 [입중론] 논서를 통해서 반야심경의 중관사상(중론)을 용수보살의 견해에 따라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학파들의 주장이 다르냐고 혼란에 빠질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틀리다', '안 틀린다' 라는 말은 아닙니다.
'초기불교의 입장은 틀리다', '대승불교의 주장은 올바르다'라는 문제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깊은 견해에 이끌기 위해 방편으로 대략 이해할수 있는(거친)것에서 깊은 견해에 까지 이끌수 있는 방법입니다
'유식이 틀리다''중관이 올바르다' 이렇게 제자들이 구분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큰 수술 예를들면 심장수술을 하기 위해 처음부터 바로 수술에 안 들어 갑니다. 검사도 해야 되고 작은 수술부터 시작해서 점점 더 큰 수술 하는것처럼 부처님께서 아주 뛰어난 방법으로 제자들을 이끌기 위해 유부,경량부를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유식 그 다음에 중관을, 이렇게 계단처럼 이끄는 방법입니다. 틀린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월칭 보살께서 설하신 [입중론]을 티벳어로 번역함으로써 [중론]을 따르는 티벳의 여러 학파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큰 스님께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 쫑카파 대사님의 논서 해석을 바탕으로 공부 해왔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쫑카파 스승님이 중론, 공성에 향하는 방식을 토대로 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반야심경]책 10 페이지 보시면 <반야심경> 의 구성 목차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해석하는 4가지
1. 제목의 의미
2. 역자가 경의를 표함
3. 본문의 주제
4. 결론
으로 반야심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3.본문의 주제에서 4가지 원만함은 때(시간),설법자,장소,듣는 이의 원만함으로 모든 경전에서 4가지 원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깊은 삼매에 들어계셔서 삼매의 힘으로 관세음보살님하고 사리불 존자 두 분께서 문답식으로 반야심경을 설하신 것입니다.
한 반야심경에서 서문이라든지 마지막이 안 나오고 법문의 주제만 나오고 그 과정을 부처님께서 삼매에 들어가시고 부처님의 힘으로 사리불 존자가 관세음보살님께 여쭈어 보고 관세음보살님께서 사리불에게 대답하고 부처님께서 다시 삼매에서 나오셔서 두분의 문답이 '옳도다,옳도다' 라고 칭찬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마무리,이런식으로 반야심경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리불께서 관세음보살님께 여쭈어 볼때 육도중생 모두에게 이롭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해야 되느냐고 여쭈어 보시고 거기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반야심경은 모두가 근기가 되어 있는 분들께, 그 안에서 근기가 되는 사람중에서도 가장 근기가 높은 분, 조금 근기가 높은 분, 두 가지로 나눌수 있고 근기가 약한 제자들을 위해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 로 해서 반야의 지혜를 닦는 방법을 설하시고 가장 근기가 높은 제자에게는 만트라만(진언)으로 '떼아따 가떼 가떼 바라까떼 보디 스와하'지혜를 닦는 부수적인 법을 설하시고 이를 중심으로 반야심경을 구체적으로 볼수 있습니다.
큰 스님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기 5도(자량도,가행도,견도,수도,무학도)단계 위치 수행법을 통해서 반야의 지헤를 닦을 때에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라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삼승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이 대승경전이기 때문에 보살의 5도의 반야바라밀을 닦는 방법을 주로 설하시고 성문 연각의 반야바라밀의 지헤를 닦는 5도의 방법을 같이 설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 자신이 해탈하려면 성문,연각의 아라한의 경지 5도를 갈려면 꼭 자량도,가행도,견도,수도,무학도를 반드시 차례대로 닦아 나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보살의 도를 닦을 때도 5도를 반드시 순서대로 닦아야 합니다.
아라한의 경지와 성불을 하려해도 5도를 닦아야 됩니다.
대승의 5도를 설명해드리자면 일체중생 위해 큰 마음(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순간 대승의 자량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이 마음속에서 생기면 닦고 닦고 탐.진.치 처럼 '일체중생 위해 성불해야 겠다' 는 간절한 보리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그때는 대승의 자량도의 해당됩니다.
그리고 그 보리심의 마음을 수승해서 공성을 그 전에도 깨달을 수 있지만 공성을 대상으로 삼아서 사마타,위빠사나를 동시에
할수 있는 경지에 오르면 대승의 가행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의 가행도에는 4가지 단계를 점점 밟아서 공성을 눈으로 현실을 보듯이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깨달아서 볼때는 대승의 견도라고 합니다.
대승의 견도에 도달하고 또 공성에 대해 확실하게 깨달았지만 그래도 습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수류라고 해서 대.중.소로 나누고 각자에게도 대.중.소 로 해서 9가지로 나눕니다.
그 9가지 하고 견도까지를 보살의 10지라고 합니다.
초지(환희지歡喜地)부터 마지막 법운지(法雲地)까지 보살의 10지를 하나 하나씩 올라가고 10지를 넘어서 대승의 대보살에 도달하면 구체적인 경지라고 5도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자량도,가행도,견도,수도, 보살의 10지, 그 다음에 부처라고 이렇게 단계들을 차제대로 꼭 봐야 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보리도차제(람림)입니다.
그 차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차제대로 수행해야 수행의 결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차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5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 보시면 사리불께서 관세음보살님께 일체중생 성불을 위해 도를 닦을려면 어떻게 닦아야 합니까?
여쭤 볼때 공성(반야의 지혜)을 깨달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에서 공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온(색.수.상.행.식)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쉽지만 궁금하지 않으면 오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색오온이라 할때 주로 몸을 생각하고 '수'라고 할때는 느낌 '상'이라 할때 인식 '행'이라 할때 '색.수.상.식' 이 포함 되지 않은 모든 유위법 '식'이라 할때 의식으로 이해합니다.
오온에 대해 우리가 색.수.상.행.식은 이름으로는 쉽지만 오온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해야 합니다.
아비달마 구사론을 공부하면 오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공부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불교를 공부할때에 논리, 이치, 왜 무엇때문에?
이유를 묻고 따지고 토론하는 불교의 논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맞다,맞다 이런 식으로 배우면 불교에 대해 정확한 이해와 확신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오온에 대해 말만 하는 것은 쉽지만 아비달마 구사론을 배워서 오온에 대해 공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공성은 불교 사대학파에서 모두 인정을 합니다. 설일체유뷰, 경량부에서 말하는 공성은 우리가 '법공(法空)' '아공(我空)'에 대한 공성,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할때 '무아'를 똑같이 주장합니다.
하지만 무아의 깊은 뜻을 풀을때 가 학파마다 조금씩 틀립니다.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 경량부의 견해에 따르면 '무아'라고 할때 자동차 운전할때 운전기사가 있어야 자동차가 달립니다. 그런것 처럼 '나'라고 할때 운전기사처럼 우리 마음속에 뭔가 주체(주인공)가 있다라는 그런점에 대해 영혼 또는 아트만, 자아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학파들이 말하는 그것이 설일체유부, 경량부가 똑 같습니다. 그런것이 자기들 나름대로 '무아'를 설명하는 견해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이 되십니까?
우리는 옷을 벗고 갈수 있잖아요. 이옷 벗고 다른옷 입고 갈수 있잖아요?
'나'라고 할때 이안에 뭔가 있고 몸둥이가 옷처럼 벗고 어디 갈수 있는것처럼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학파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틀립니다.
이렇게 옷을 벗고 '나;라는 주체가 뭔가 어디로 가는것 처럼 생각하면 틀린생각입니다.
그런것이 없습니다.
벌레라든지 일반적인 유정 또는 중생에게 이런것이 있다라고 절대로 생각 안 합니다.
견해를 갖고 있는 자, 학파들이 '나'라고 할때 뭔가 벗고 어디로 갈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반 중생에게는 그런 견해가 없습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인정하는 대승학파 역시도 무안의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 없다고 '무'라고 하잖아요. 색이 없다라고 할때 '색'이 구체적으로 나누면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색온을 나누면 안색, 밖의 색, 안색도 나누고 밖의 색도 또 나누고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큰 스님께서 복잡한거 일단 나두고 색온이라 할때 몸둥이만 생각하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색'이 '몸이 없다'라고 할때 일단 법공을 인정하는 유식학파, 중관학파 두 가지 학파가 있습니다.
유식의 견해로 설명드리자면 '몸이 없다' '색이 없다'라고 할때 몸을 따져 보면 미세한 원자(먼지)로 부터 몸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먼지가 또 나눌수 있는지 없는지, 유식의 견해로 하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그런 물체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물질로 모아서 몸둥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우리가 몸이라고 할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처럼 말이 생각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몸자체 내에서 나눌수 없는 물질로 부터 모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의해서 몸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유식의 견해는 그렇습니다.
외경(外境)이 없습니다.
그러한 학파들이 '색이 자체내에서 독립적으로 있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식의 사상에 대해 더 말하면 복잡해집니다.
간추리면 유식사상하고 중관사상에서 유식의 입장은 어떤 물질이라고 미세해지고 더 이상 나눌수 없는 그런 물질은 없다' 라고 그런 '물질로부터 이루어지는 큰 몸둥이 같은 것이 없다' 그것이 '색공'이라고 하는 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큰 스님께서 우리가 공부하는 바대로 주로 용수보살, 법칭보살의 견해 대로 말씀드리면 '어떤 물질도 자체 내에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있다'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대상 자체 내에서 뭔가 있다는 것이 없습니다. '뭔가 있다' 라는 그 생각은 착각입니다.
현실로 그러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 공' 이라고 할때 큰 스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 티벳말로 '랑춥툭빠' 우리가 볼때는 '좋다'라고 하면 자체 내에서 스스로 뭔가 좋은것 처럼, '예쁘다'라고 하면 자체 내에서 예쁜 것처럼 '맛있다' 라고 하면 자체 내에서 맛있는 것처럼, 각자의 여의주에서 예쁘고 맛있고 변하는 것처럼 생각 안하고 자체 내에서 뭔가 맛있고 예쁘고 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입니다. 자체 내에서 예쁘고 맛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로 스스로 독립된 것이 없기 때문에 중관의 사상은 연기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자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연기법으로 인해 이루어 지기 때문에 자체 내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중관의 사상, 그것이 바로 월칭 보살이 중론에서 말하는 공사상 또는 큰 스님께서 배우셨던 견해입니다.
이런 내용을 모르면 나머지 내용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만 풀리면 다른 문제점들이 다 풀립니다.
큰 스님께서 다시 비유해 드리겠습니다.
비유를 통해서 여러분들께서 이해할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처음 심은 나무들이 스스로 못 섭니다. 서있기 위해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심은 나무들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지지대에 의지해서 서있다' 라고 생각이 들잖아요.
나중에 몇년 지나면 그 지지대 필요없이 스스로 설수 있잖아요.
우리는 오래된 나무들은 지지대 필요없이 스스로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래된 나무 역시 지지대에 의지하진 않지만 뿌리, 공기라든지 다른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한다 라고 할때 거친 의지 방식 부터 미세한 의지 방식까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 심었던 나무들이 스스로 서 있지 못하고 오래된 나무는 스스로 서 있다 하는 것도 이런 비유를 통해서 '스스로 서있다' 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결국 오래된 나무 역시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뿌리,땅, 공기, 물 라든지 여러 가지에 의지해서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서 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뭔가 있다는 생각은 다 착각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 해보시면 여기서 말하는 '색즉공' 이라 할때 연기이기 때문에 '공'하다 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또 비유하자면 큰 스님께서 병원에 계시 잖아요.
스스로 일어나시지 못하고 스스로 어디 가시고 싶어도 못가시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시 잖아요.
또 우리가 볼때는 환자는 스스로 못 가고 못 일어나고 못 먹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먹고 일어나고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까 나무처럼 스스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자는 거기에 비하면 우리에게 의지하지만 우리 또한 마찬가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서 있고 뭔가 스스로 다 할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뭔가에 의지해서 연기법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인연에서 벗어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스스로 자체 내에서 독립적으로 실재로 뭔가 있다 라는 그 생각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이 법당을 보세요.
이 법당이 스스로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스스로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 법당이 뭔가 자체 내에서 튼튼하게 있다라고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스스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별, 해, 달이 라든지 자체 내에서 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우주 과학자들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지구에서 땡기는 힘하고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불교를 요약하면 두 가지로 요약할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견해하고 행입니다.
견해는 연기의 견해, 공성의 견해이고
행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비폭력입니다.
이 두 가지에 불교의 모든 핵심 내용들이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사상의 견해는 과학과 잘 어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비폭력, 남에게 될수 있으면 돕고 돕지 못하더라도 해는 끼치지 말아야 되는 비폭력은 세계평화하고 연결되어 있다'고 얼마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는 연기 사상하고 비폭력 , 연기 사상은 과학하고 잘 어울리고
비폭력은 세계평화하고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생각 좀 해보세요.
아주 중요합니다.
존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 드리자면 이 모든 것이 신기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꿈과 같습니다.
신기루와 같고 꿈과 같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다 가짜라고 하는것입니다.
진실이 아니다,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거짓이라고 하냐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바대로 다 없다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범부 중생들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속에서도 큰 스님께서 비유하나 들으셨습니다.
가짜라고 할때 잘 속이는 거짓말 잘 하는 사람 있잖아요.
거짓말 잘 하는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믿잖아요. 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 볼 때는 '이 말 그렇지 않다'라고 바로 알 잖아요.
그와 마찬가지 우리는 착각인줄 모르고 진짜라고 해서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착각속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것만 깨치면 다 착각이고, 신기루, 꿈과 같다고 볼수 있습니다.
'색즉공'이라고 할때 색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릇안에 물이 없는 것처럼 비어 있는 것처럼 색안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뜻도 아닙니다.
'색즉공' 이라고 할때 색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그릇안에 물이 없는 것처럼 비어있는 것도 아니고 색이 공하다고 할때 조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스스로 '나는 색입니다' 스스로 색이라고 존재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색즉공,공즉색이라고 할때 연기법으로 원인,조건에 의지해서 색이라고 이름짓고 색이라고 생각하는것 뿐입니다.
색 자체 내에서 스스로 뭔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색즉공 공즉색'의 내용은 그렇습니다.
'색이 공이다'라고 할때 색이 아까 말씀드린것처럼 아예 없거나 그릇에 물이 없는 것처럼 비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법으로 색이 존재하다, 공이 색이다,
색즉공, 공즉색이라고 할때 색하고 색의 공성(법공)은 '이것은 색이다' '이것은 공이다'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색즉공, 공즉색이라고 할때 색하고 색의 공성은 둘이 아닙니다. 어떤 관점에서 둘로 보이지만 따져보면 얼음과 물처럼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즉공, 공즉색 설명할때 불교의 기본논리의 토대가 없으면 자세하게 설명을 드릴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티벳말로 응오찍라 독빠타데, 응오찍이라고 하면 자성이 하나, 성품이 하나 독빠타데는 여러 가지 입장에서 둘이 라고 볼수 있는 것, 둘이 있기도 하고 하나 있기도 합니다.
자성이 하나 다른면에서 여러 가지면에서 둘입니다. 이런 표현이 불교의 논리를 배우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스님께서 얘기할수 있을 정도로 간략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어렵지만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여기 계신 주지스님께서 비구니 스님이다.
그리고 한국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람입니다.
스님한테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구니 스님이라고 부를수 있고,
한국사람이라고 부를수 있고,
또는 출가자라고 부를수 있고,
동양인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름을 붙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여러 면에서 이름 붙이더라도 스님은 한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은 하나인데 여러 가지 관점에서 둘로 볼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즉공 공즉색'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이 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반야심경을 지금까지 말씀드린 중에서 '색즉공 공즉색' 그 내용의 부분입니다.
또 한 가지 비유를 드리자면 한국의 대통령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임무를 받고 있을 때 대통령의 입장에서 말할수 있는 부분도 있고 못하는 부분도 있고 또 다른면에서 대통령의 입장에서 말 못하지만 다른 여자로서, 다른면에서 말할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대통령은 하나인데 어떤 관점에서 말할수 있고 어떤 관점에서 말할수 없는 것처럼
'색즉공 공즉색' 이라고 할때도 마찬가지 연기면에서 볼때 색이고 공성면에서 볼때는 공으로 보고 관점이 다른것 뿐이지 색하고 공 또는 연기하고 공성은 어떤 관점에서 표현만 다를 뿐이지 '공은 이것이다' '연기는 이것이다' 라고 둘로 나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색즉공 공즉색' 이라고 할때 한 가지 더 비유를 들자면 이 법당이 안에 컵이라든지 돌이라든지
가득 꽉 차있으면 법당이라고 말할수 없잖아요. 안에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공간 자체가 법당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즉공 공즉색'이라고 할때 이런 비유로도 이해할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스스로 실제로 독립적으로 뭔가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원인, 조건에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가 존재합니다.
인과가 있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선업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고 악업을 지으면 나쁜 결과를 피할수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인과이기 때문에 발전시킬수 있습니다.
윤회세계에서 벗어 날수 있고 해탈, 성불할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발전시킬수 있는 과정이 반야심경에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까지 마지막 결국 성불할때까지 연기쪽으로 마음을 발전시킬수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할때 자체내에서 뭔가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성을 이해한다고 하면 연기법에 대해 더 믿음이 깊어지고 더 강해지면 공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하다고 '아무것도 없다, 허무하다' 이런 식으로 빠지면 단견에 빠지고 그렇기 때문에 공하다라고 하면 인과를 더 중요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공,연기, 인과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반야심경 공부 - 광성사 법회(소남 스님)
반야심경 (광성사,16.11.26~27.) >>> http://www.koreatibetcenter.com/main/board.php?board=tb52&command=body&no=247
테크노트 PHP
www.koreatibetcenter.com
테크노트 PHP
www.koreatibetcenter.com
티벳어 반야심경 - 광성사 기도집
'티벳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티샤의 명상 요결 (0) | 2020.12.06 |
---|---|
켄뽀 졸덴 스님의 로종수행<4>“관심을 가질 것은 나의 마음 가꾸기” (0) | 2020.11.22 |
[샘이 깊은 물] 티베트 문화와 불교 / 주민황 박사 (0) | 2020.11.08 |
티베트 불교 경전 (0) | 2020.11.08 |
티벳의 지혜와 삶: 석혜원 스님의 티벳불교 수행이야기 (0) | 2020.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