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
불교에 입문하는 길은 크게 세가지로 볼 수 있다. 첫 째는 신앙을 통해서 이고, 두 번째는 교학을 통해서 이며, 세 번째는 수행을 통해서 가는 길이다. 이를 각각 다른 말로 하면 신앙문(信仰門), 교학문(敎學門), 수행문(修行門)이다.
신앙은 예경(禮敬)이 중심이다.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인데, 참회, 절, 공양 등 많은 예배와 공경의식이 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신심이 한결같아야 하는 것이다. 신심에 해이가 생긴 다던지 나태해지던지 하면 신앙문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믿는 마음이 항상 견고하여야 한다.
교학을 하다 보면 용어가 많이 나온다. 전문 용어나 특수 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그 용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어렵다. 교학은 해행문(解行門) 이라고도 하듯 먼저 이해를 하여야 하는데,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행(行)에는 접근하지도 못한 체 해(解)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수행문은 수증문(修證門)이라고도 하는데, 잘 닦아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이에는 청정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하는 것이 중요한데, 생각이 자꾸 달라질 수가 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그 생각을 붙잡게 되는데 그것이 오만이다. 이러한 오만을 어떻게 물리치느냐가 핵심이다.
본인도 공부를 할 때에 용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 중에서 특이하게 어렵게 느꼈던 것이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이었다. 이를 이해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경험이 있어 지금도 깊이 세기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용어들을 이해하여야 불교의 전체적인 것이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세간법이라 하면 세상과 세상사이, 즉 세속법, 출세간법이라 하면 세속을 떠난 세계로 이해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야심경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말의, 그 오온법(五蘊法)이 바로 세간법이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사람의 몸을 지칭하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육체를 이루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생각을 이루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이 합쳐져 인간을 이룬다고 본다. 또 12처라 하여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나누기도 한다. 더 나아가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경(六境)으로 분류하고 이를 18계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오온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몸과 몸을 중심으로 감각되어지는 인식의 대상을 모두 합쳐서 세간법이라 하는 것이다. 오온색신(五蘊色身) 즉 오온으로 보이는 몸이다.
그렇다면 출세간법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 계향(戒香), 정향(淨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의 오분향(五分香)을 올린다. 이 하나 하나는 공덕법신(功德法身) 이라는 것인데, 색신(色身)이 색으로 나서 색으로 소멸하면 색신인데, 이 색신이 부처님의 교법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 법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으로는 오온색신은 세간법이고, 오분법신은 출세간법이다.
본인이 젊은시절 공부를 할 당시에는 어른스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대게 스스로 고민을 하고 또 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민하던 끝에 절의 담장을 두고 담장 바깥의 세상은 세간법이고, 담장 안쪽의 세상이 출세간법일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색신은 무엇인가? 생로병사 삼세윤회 하는 것이 색신이다. 이것이 세간법이고, 해탈, 열반, 불생불멸 이것이 출세간법이다.
사성제(四聖諦)라는 것이 있는데,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가 그것인데, 이 중 고성제과 고집성제는 세간법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을 관찰하실 때,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있다고 보셨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것이 있는데 부처님께서 보신 것은 바로 괴로움이다. 그것만 보고 말았다면 불교를 염세주의이고 비관론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해결책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훌륭한 종교일 수 있는 것이다. 그 해결책은 멸(滅), 즉 고멸(苦滅)이다.
고를 몸의 병으로 본다면,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을 고멸이라 할 것이다. 도(道)라는 것은 건강한 세계로 가기 위한 치료이다.
그러므로 고(苦)와 집(集)은 세간법이고, 멸(滅)과 도(道)는 출세간법이다. 사성제 안에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다 있다. 또 세간법의 기본동력은 어리석음, 무명, 탐욕, 분노 등이고 출세간법은 계정혜(戒定慧) 이다.
정신적인 구조에서 보자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은 세간법이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은 출세간법이다. 삼세[前生, 今生, 來生]윤회(三世輪廻)는 세간법이고, 해탈열반(解脫涅槃)은 출세간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세간법과 출세간법은 같이 있는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냐, 세간법 속에 출세간법이 있느냐, 출세간법 속에 세간법이 있느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또 생사와 열반이 있는데, 생사를 세간법이라 하고, 열반을 출세간법이라 한다면, 생사를 윤회할 때에 열반은 어디에 있었느냐, 또 열반을 했을 때에는 생사가 없느냐? 또 나고 멸함이 반복되는 생멸법은 세간법이고, 불생불멸의 나고 죽음이 없는 적멸법은 출세간법인데, 생멸할때에 적멸은 어디있었으며, 적멸할 때에 생멸은 없는 것인가? 고민은 계속 커지게 된다.
법화경에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 우주만법칙이 항상 불생불멸이다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 불자가 계속해서 닦으면 내세에 부처가 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보면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따로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생로병사와 불생불멸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는 제법의 형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진실을 깨닫는 종교다. 탐진치를 가지고 보면 모든 것이 생멸법 즉 세간법이고, 계정혜로 보면 모든 것이 출세간법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계정혜로 보느냐, 탐진치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를 얻으면 적멸법(寂滅法)이고, 지혜를 얻지 못하면 생멸법(生滅法)인 것이다. 지혜를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사망이고 윤회이며, 지혜를 얻고 죽음을 맞이하면 해탈이고 열반이다. 그러므로 죽음 그 자체에서 해탈과 윤회가 있는 것이지 죽음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같은 생로병사를 하더라도 깨달으면 해탈열반이요, 깨닫지 못함면 생사윤회라는 것이다.
해인사 장경각으로 가는 문에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河處)’라는 편액 있다. 또 다른 쪽 문에는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라고 씌어있다. 즉 ‘원만히 깨달은 도량 즉, 원각도량이란 것은 바로 지금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즐겁다가 괴롭고 나고 죽는 생사,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글귀이다. 이 글귀는 남전스님께서 깨닫고 나서 하신 오도송(悟道頌)으로, 불교를 꿰뚫은 표현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계정혜를 닦은 이에게는 어디를 가더라도 출세간이고, 탐진치에 빠져있는 이에게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간법인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이 장소에 따라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밝은 것은 낮이고, 어두운 것은 밤이라고 하면, 낮과 밤의 장소가 다른가? 밤이란 밝음이 없음이니, 밝음이 오면 어두움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 밝음이라면 그 밝음이 오면 생사가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여래자 무소종래(如來者 無所從來) 역무소거 고명여래(亦無所去 故名如來)’즉, 여래는 오는 곳이 없고 역시 가는 곳도 없다. 그래서 여래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해가 안될 뿐 이 대로가 불생불멸이고, 이 대로가 출세간인 것이다. 다만 보지 못할 뿐이다. 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없을 뿐, 즉 지혜가 부족할 뿐이지 생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공포를 느낀다. 밝을 때에나 어두울 때에나 장소가 바뀐 것이 아님에도 어둠 속에서는 두려워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다. 밝음만 나타나면 어둠은 사라진다.
혜명(慧明)과 무명(無明)이라는 말이 있는데, 혜명이란 밝은 지혜가 있음이요, 무명이란 그 밝음이 없음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체험하고 자족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고 성불이다. 세간법으로서 죽음이 없고, 아픔이 없고, 늙음이 없는 대명천지의 어두움이 없는 세계를 깨닫는 알고 보는 것을 성불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출가를 하시게 된 동기가 바로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셨는데, 부처님도 80세에 돌아가셨다면 죽음과 생사윤회를 해결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해결을 하셨다.
죽지않는 것으로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해결을 하신 것이다. 깨달음으로 보면 죽는 그대로가 죽지 않는 것이다. 밝은 낮의 세계를 알면 어두움이 와도 어두움이 없는 것이므로 불생이며, 어두움이 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불멸이다.
깨달은 사람이 보면 모든 것이 불생불멸법이고, 해탈열반법이고, 극락법이다. 그것을 알았으면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익혀야 한다. 시간 시간 무엇을 하건 항상 죽고 삶이 없는 그 참 세계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생활이다. 죽고 늙음 또 아픔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모두가 어둠인 것이다. 걱정 근심 없이 순간 순간을 잘 닦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탐욕과 나태를 조심하여야 한다. 탐욕은 이 몸을 중심으로 생겨나므로 아플 걱정, 죽을 걱정 하지 말아야 한다. 또 부지런히 닦는 사람은 탐욕에 빠지기 쉽고, 탐욕이 없는 사람은 나태해지기 쉽다. 게으른 사람이 성불할 수 없고, 욕심 많은 사람이 성불 할 수 없다. 욕심부리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끝까지 신심으로 닦아 나가면 모두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세간법을 다 이루는 길이다.
신심을 항상 간직하여야 한다. 자동차가 연료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듯이 불자에게 있어서 연료란 신심이다. 그 신심이라는 연료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채워져 있는지를 점검하면서 게으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항상 닦으면 그것이 복 받는 길이고, 극락 가는 길이고, 성불하는 길이다. 많이 닦아야 한다.
[출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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