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화엄신앙과 간화선 수행
“한국불교의 전통은 화엄신앙에 근거한 간화선이다”
지난 5월26일 본교 대학원에서 주최한 특강에서 총장 종범스님
이“ 한국불교의 화엄신앙과 간화선 수행”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교수님들과 대학원생은 물론 학부생들까지 참석하여 총장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이 내용을 녹취하여 정리한다. 〈편집자주〉
한국불교는 화엄신앙을 근거해서 조명해야 정체성이 드러난다
태안 마애삼존불… 법화신앙 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 주불은 석가모니불
한국불교신앙의 규식(規式)은 법화이고, 본질은화엄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불상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삼존불의 형식면에서만 접근하여
한 분은 석가모니불이고 한 분은 아미타불이며 복판
의 작은 체구의 보살상을 주불로 해석했습니다. 그게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한 분은 석가모니불이고 한 분은 다보여래불입니다. 중
심에 조각된 보살상은 주불이 아니고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불
께 공양을 올리는 관세음보살상인 것입니다. 이것은『법화경』보문
품에 근거한 법화신앙의 삼존불입니다.
다음은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주불이 어떤 부처님이겠습
니까? 협시보살을 보면 한 쪽은 관세음보살상이고 한 쪽은 반가사
유상입니다. 문헌적으로 반가사유상이 어느 불상이라는 확실한
명문은 없습니다. 흔히‘미륵반가사유상’이라고 하는데, 문헌에
서 반가사유상이 미륵이라고 하는 문헌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불
교경전을 위주로 해서 보면 주불은 석가모니불이고 협시불은 관
세음보살과 미륵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화신앙에 의하면 관
세음보살과 미륵불을 협시로 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했을 것이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가 지나서 아주 걸작으로 이루어진 불상이 석굴암 부처
님입니다. 석굴암 부처님은 완숙미가 넘칩니다. 석굴암 불상을 아
미타불로 보느냐 석가여래불로 보느냐는 논란이 있습니다. 이 문
제를 살펴봄에 있어 주불만 볼 것이 아니라, 석굴암에 안치된 전체
의 존상을 보면 십대제자상이 봉안되었는데, 흔히 십대제자상은
법화경에 의해서 조성한 불상입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석굴
암에 안치한 불보살상의 구성은 법화경의 영산회상에 기본을 두
고 조성한 것입니다.
법화신앙이 후대에 오면 화엄신앙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불상의 조성에서도 석가모니불상의 중심에서 비로자나불상이 조
성되기 시작합니다. 766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비로자나
좌상이 있는데 현재로서는 한국에서 조성한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상으로는 최초가 됩니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도 무척
앞서는 연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8세기가 되면 거의가 비로자나
불상으로 조성합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한국불교가 법
화경 신앙이 기본이 되어서 점차로 화엄신앙으로 재편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람의 당탑(堂塔)배치를 보면, 본존불을 모신 전당을 대웅전이
라고 하는데 대웅이란 말도『법화경』「종지용출품」의‘대웅세존’
이라는 경문에 의한 것입니다. 대웅전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의한
명칭이 아니고 법화경에 의한 명칭입니다. 화엄경에 의한 명칭은
대적광전이라든지 비로전, 보광전의 명칭이 화엄경에 의한 법당
명칭입니다.
한국불교의 법당을 보면 주로 가람의 본당이 대웅전인데, 법화
경 신앙이 사원규식(寺院規式)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
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성행하는 불탑신앙이 어느 경전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불탑신앙은 화엄경에는 별로 명문이 없
습니다. 화엄경에서는 만법계 시방에 상주하는 부처님이기 때문
에 불탑신앙이 중요시되지 않고 법화경에서 불탑신앙을 많이 설
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장(慈藏)스님에 의해서 불사리를 봉안하고 불탑
을 수호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근거한 것으로서 한국불
교의 큰 초석을 놓은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이렇게 법화경에 의해
서 설계와 양식을 갖추어 놓고 신앙의 본질은 점점 화엄신앙을 형
성하였으니, 신앙의 규식(規式)은 법화이고 신앙의 본질은 화엄입
니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국불교의 특색을 이해할 수 있습니
다. 자장스님이 친히 지으신 다음의 게송이 있습니다.
萬代輪王三界主雙林示滅幾千秋眞身舍利今猶在普使群生禮不休
(만대륜왕 삼계주께서 쌍림에서 열반을 보이신 지 몇 천 년인가.
진신사리가 지금도 현존하여서,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예배를 끊
이지 않게 하도다.)
이것은 자장스님의 불탑게(佛塔偈)입니다. 바로 법화신앙의 게
송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영산교주이며 삼계교
주로 봅니다. 화엄경에서는 백억화신이고 시방상주하는 부처님입
니다. 삼계의 주인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화엄에서는 열반에 들고
나고 하는 게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기본은 의식(儀式)과 교리와 실천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 의식과 교리와 실천이 다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
교가 전래될 때도 경전만 오는 게 아니라 불상과 스님이 함께 옵
니다. 불상은 의식(신앙)이고, 경전은 교리이며, 스님은 실천을 의
미합니다. 이 세 가지를 조화롭게 해야 됩니다.
요즘은 의식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
니다. 어떤 분은 교리만 강조하고 어떤 분은 실천만 강조하는데,
교리 없이 실천될 수 없고 의식 없이 교리가 전해질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형성과정을 보면 아주 중요한 걸 다 갖춘 것입니다. 법
화경에서 교설한 불탑신앙에 의해서 전국의 곳곳에 불사리를 모
셨는데 불교의 터전을 확고하게 다진 것입니다.
자장스님에 관련된 게송이 또 하나 전해집니다. 『삼국유사』권
제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에 보면,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일체법을 요달해서 알면, 자성이 있는 데가 없다. 이렇게 법성
을 이해하면, 바로 노사나불을 친견한다.)
이러한 게송이 있습니다. 이 게송은 자장스님께서 중국 오대산
에 가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게송입니다. 그런데 이 게송은 80화
엄경에 수록된 게송입니다. 한국불교의 오대산신앙이 성립되는
기본이기도 합니다. 한국불교의 오대산신앙은 화엄신앙입니다.
불탑신앙은 법화신앙인데 불사리를 봉안한 오대산신앙에서는 화
엄신앙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자장스님의 두 가지 게송이 한국불교의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봅니다. 같은 자장스님과 관련된 게송
이지만, 하나는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받은 게송이고, 하나는 자장
스님이 직접 지은 게송인데, 직접 지은 불탑게는 법화신앙이고, 문
수보살로부터 전해 받은 게송은 화엄신앙입니다.
오대산 신앙은 철저한 화엄신앙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굉장히
깊어지는데, 노사나불이 어디 있느냐? 법성을 알고 보면 법 하나
하나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법 하나하나에 자성이 없다 보니까
전부 마음의 현전(現前)이 법입니다. 마음의 현전이 노사나불의
현신입니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법화경에서 신앙의 규범과 의례
가 성립되고, 나중에는 모든 의식이 화엄으로 재해석되고 재편성
됩니다.
만대륜왕 삼계주라고 해도 한국불교에서 만대륜왕 삼계주는 법
화경에 의해서 삼계에 국한된 삼계주가 아니고 비로자나불(노사
나불)이 삼계주로 현신한 삼계주입니다. 이것이 한국불교입니다.
아미타불을 모셔도 서방정토 교주로서의 아미타불이 아니라 비로
자나불이 아미타불로 현신한 아미타불입니다. 십대제자라고 해도
석가모니의 상수제자(常隨弟子)로서 법화회상의 십대제자가 아니
라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 십대제자로 현신한 것이고, 화엄신장
도 석가화현 금강신장입니다. 법화경에서 교설한 옹호성중 금강
신장이 아닙니다.
화엄신앙을 근거로 해서 한국불교를 조명해야 한국불교의 진실
이 보입니다. 한국불교를 볼 때 정토신앙에 의해서 아미타불을 보
거나, 초기불교의 지식에 의해서 아라한상을보면 실체가 보
이지 않습니다.
다른 종파불교의 지식으로 한국불교를 보아도 보이지 않습
니다. 화엄신앙에 근거해서 볼 때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법화경에 의해서 사원규식과 신앙의범이 형
성되었고, 나중에는 화엄신앙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자장스님, 원효스님, 의상스님에 의해서 기초가 마련되어서 9세기
에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불상조성의 사례만 보아도 7세기를 지나
서 8세기가 되면 비로자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해서 9세기에 이르
면 비로자나불상이 보편화됩니다.
이처럼 한국불교의 보편화된 화엄신앙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800년대 이후에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수행의 실체가 잘 안 보이는 것도 한국불교의 신앙의 기
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실천입니다. 그런데 실천은 신
앙과 교학이 없이 독자적으로 별행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빼고 실
천 쪽으로만 빠져들면 앞뒤가 답답하게 됩니다. 의식불교, 교리불
교, 실천불교를 같이 봐야 합니다. 화엄신앙에 의한 수행가풍을 보
려면 원효의『대승육정참회』와 의상의『법성게』를 면밀히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육정참회와 법성게를 면밀히 보면 수행이 뭐라는 게 보이
기 시작합니다. 또한 삼국시대와 신라 중대 이후의 수행의 기본을
알려면 삼국유사를 수행 입장에서 봐야 합니다. 삼국유사를 미술
사 하는 사람은 고고학적으로 열심히 보는데요, 스님들은 수행 쪽
에서는 잘 안 보는 것 같습니다. 수행의 실패한 사례와 성공한 사
례가 삼국유사에 다 나타났습니다.
고려시대 목우자 지눌선사의『법집별행록절요』를 보면, 절요만
큼 잘 종합해서 수행의 기본과 방향을 제시한 저술이 없습니다. 첫
번째 불교수행의 기본이 뭔가? 여실지견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
막에 여실지견에 대한 해애(解碍)를 떨어내는 것까지 자세히 서술
했습니다. 그래서 보조선(普照禪)에서도 간화선을 수행합니다. 그
러나 보조의 간화선은 깨닫기 위한 간화선이 아니라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돈오를 통해서 깨달았는데, 마지막 관문인 깨달음
에 머무는 장애를 떨어내기 위해서 간화선법을 합니다. 대혜(大慧)
선사의 간화선과는 전혀 다른 간화선의 가풍입니다.
대혜는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들어라 했는데, 부처라는 것을 벌
써 깨달았는데 마음의 그림자와 마음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그
걸 해애의 알음알이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해애가 남아 있으면 보
긴 봤는데, 손에 잡지를 못했습니다. 신급(信及믿음이 미쳤다)은
했는데 입수(入手손에 넣었다)가 안된 것입니다. 해애가 남아 있
으면 아직까지 남의 살림이고, 해애가 끊어져야만 자기의 살림살
이로서 자유자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체계가 절요의 수행
지침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간화선이 형성되기 이전의 수행이 어디까지 내
려오느냐 하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선사대까지 내려옵
니다. 일연선사가 1206년에 태어나셨는데 1200년대까지는 간화
선법이 보편화 되지 않고 한국식으로 수행을 해왔습니다. 1300년
대에 와서 몽고의 정치적인 간섭이 불교에까지 영향을 줘서 1300
년대부터 많은 분들이 중국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1300년대에 중국풍의 간화선법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것이 조선시대로 이어지는데, 이어지기는 해도 역시 똑같은 간화
선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식 화엄신앙에 기초한 간화선이었습니
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어디 있느냐? 서산(西山)
스님의『선가귀감』만 자세히 읽어봐도 임제종의 간화선은 아닙니
다. 조선시대에는 불가의 수행지침으로 목우자 지눌선사의『계초
심학인문』과 선가귀감을 합본으로 간행한 책들이 많은데 전부 한
국식입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기에 경허선사를 비롯하여 많은 선사들
이 출현해서 간화선풍이 중흥하게 됩니다. 경허스님의 수행가풍
은『중노릇하는 법』등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허스님의
선풍도 실제로 보면 중국 초기의 간화선과 비슷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형식화된 간화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수행가
풍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항상 새롭고 절실하게 실천
되어야 합니다.
정리: 〈여학〉sukyeohak@hanmail.net
종범스님은?
종범스님은 1963년 통도사에서 벽안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9년 구족계를 수지, 현재 중앙승가대 제4대
총장, 승가원 이사장, 선어록연구회 회장 재직 중
<승가대신문> 183호 불기2549년 6월7일 (화요일)
[출처] 한국불교의 화엄신앙과 간화선 수행|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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