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수선님 2021. 1. 3. 12:02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6. 정관 19년 봄 정월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22년 여름 6월 임금이 지은 경서(經序)에 감사하여 답하기까지

 

정관 19년(645) 봄 1월 7일에, 경성유수(京城留守) 좌복야(左僕射)양국공(梁國公) 방현령(房玄齡) 등은 법사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말을 듣고 우무후대장군후막(右武侯大將軍侯莫)1) 진식(陳寔)2)과 옹주(雍州)3) 사마(司馬)4) 이숙권(李叔眷)과 장안 현령(長安縣令) 이건우(李乾祐) 등을 보내어 받들어 영접하게 하였다. 그들은 운하를 통해 들어와 도정역(都亭驛)5)에서 법사 일행을 쉬도록 했는데, 법사를 따라온 사람이 구름처럼 많았다.

1) 당초(唐初)에 경성(京城)에서 황제의 경위를 맡았던 고급 군관이다.

2) 동한(東漢)의 허(許) 지방, 즉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허창현(許昌縣)사람(104- 186)으로, 

   자는 중궁(仲弓)이다. 환제(桓帝) 때에 태구장(太丘長)을 지냈는데, 정사가 청렴하고 덕이 

   높아서 백성들이 평안했기에 민심을 평정하고 송사를 잘 판정하였다. 시호는 문범선생(文範先生)이다.

3) 옛날 9주(州)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섬서(陝西), 감숙(甘肅) 두 성의 대부분과 청해(青海)와 액제납

   (額濟納) 등의 지역을 포함한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관중(關中) 지구이다. 

4) 당대(唐代)에 주(州) 자사(刺史) 아래에 있던 보좌관이다.

5) 장안의 중심역이다.

 

이날 유사(有司)는 모든 절에다 휘장과 수레[帳輿]와 꽃과 깃발[花幡] 등을 나눠 주어서 경전과 불상을 홍복사(弘福寺)로 모시는 데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 뛰면서 서로 다투어 장엄하였다.

 

다음날 주작가(朱雀街)6)의 남쪽에 법사가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물건을 모아 진열해 놓았다. 법사가 서역(西域)에서 가지고 와서 안치해 놓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6) 당(唐) 나라 장안성(長安城) 안에 남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있던 중심 도로이다.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개

마갈타국(摩羯陀國) 전정각산(前正覺山)의 용굴유영(龍窟留影)의 금불상 1구(軀)[광좌(光座)까지의 높이는 3척 3촌이다.]

바라니사국(婆羅痆斯國) 녹야원(鹿野苑)의 초전법륜상(初轉法輪像)을 모조하여 단나무[檀]에 조각한 불상 1구[광좌까지의 높이는 3척 5촌이다.]

교상미국(憍賞彌國)의 출애왕(出愛王)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나무에 실재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불상을 모조하여 다시 단나무에 조각해 가지고 온 불상 1구[광좌까지의 높이는 2척 9촌이다.]

겁비타국(劫比他國)으로 여래께서 천궁(天宮)에서부터 보계(寶階)7)를 밟고 내려오는 모습을 모조한 은불상 1구[광좌까지의 높이는 4척이다.]

마갈타국 취봉산(鷲峰山)에서『법화경』등을 설하시는 모습을 모조한 금불상 1구[광좌까지의 높이는 3척 5촌이다.]

나게라갈국(那揭羅曷國)에서 독룡(毒龍)을 항복시킨 모습을 본떠서 단나무에 조각한 불상 1구[광좌까지의 높이는 5촌이다.]

폐사리국(吠舍釐國)에서 성(城)을 돌며 행화(行化)하는 장면을 본떠서 단나무에 조각한 상(像)

그리고 법사가 서역에서 가지고 와 안치한 대승경(大乘經) 224부

대승론(大乘論) 192부

상좌부 경률론(上座部經律論) 15부

대중부 경률론 15부

삼미저부(三彌底部) 경률론(經律論)8) 15부

미사색부(彌沙塞部) 경률론 22부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 경률론 17부

법밀부(法密部)9) 경률론 42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경률론 67부

인론(因論) 36부

성론(聲論) 13부

7) 삼도보계(三道寶階)를 말한다. 중인도 산카샤 있는 이 삼도보계는 삼도장제(三道場梯), 

   또는 천제(天梯)라고도 한다. 삼도(三道)의 보배계단이란 뜻으로 부처님이 어머니 마하마야

   (摩訶摩耶)를 위해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설법을 하시고 하늘을 내려올 때 제석천

   (帝釋天)이 만든 금과 은과 유리로 만든 세 길의 계단을 말한다. 

8) 불교 부파 가운데 정량부(正量部)의 범어 음역이다.

9) 법장부(法藏部)라고도 하며 소의(所依) 율전(律典)은『사분율』이다.

 

이렇게 무려 520협(夾) 657부나 되었는데, 이것들은 20필이나 되는 말에다 실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날 관사(官司)는 널리 모든 절에다 보장(寶帳)과 당번(幢幡)과 공양할 도구를 비치해 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28일 아침에 모두 주작가(朱雀街)로 모여서 새로 모셔온 경전과 불상을 홍복사로 영접하게 했다. 

이에 사람들은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해 각기 앞 다투어 장엄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절에서는 따로 당장(幢帳)과 번개(幡蓋)와 보안(寶案)과 보여(寶輿)를 내어 와서 거리마다 나누어 설치해 놓았다. 승니(僧尼)들은 가사를 갖춰 입고 그 뒤를 따랐는데, 승려는 앞에 서고 향로를 든 사람들은 뒤를 따랐다. 

여기에 이르자 길에는 무려 수백 명이 모여들어 경전과 불상을 운반해 갔다. 구슬과 패옥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금화(金花)는 빛을 반짝이니 운반해 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드문 장관을 노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자욱한 먼지도 피로함도 다 잊고 평생 처음 보는 의식에 감탄할 뿐이었다.

행렬은 주작가에서 시작해서 홍복사 문 앞까지 뻗어 있었다. 그 사이 수십 리에는 성안의 사람들과 내외 관료들이 길 양쪽으로 열을 지어서 행렬을 우러러보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이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유사(有司)는 서로 밀치다가 밟히기라도 할까 걱정해서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향을 피우고 꽃을 뿌려야 하며, 이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향불 사르는 연기가 구름 같이 피어오르고 찬미하는 노래의 메아리 소리가 곳곳으로 이어져 갔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가비라성(迦毘羅城)에 강림하셨을 때나 미륵보살이 처음으로 도사천(覩史天)에 오르실 때, 용신(龍神)이 공양하고 천중(天衆)이 에워쌌었다. 비록 그때만큼은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시 부처님이 남기신 법의 성대함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오색 비단구름이 태양의 북쪽에서 나타나더니 서서히 경전과 불상 위에 와서는 매우 분분하게 몇 리나 되는 둘레를 맴돌면서 마치 영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송하는 것 같기도 한 것을 보았다. 경전과 불상이 절에 이르자 오색구름도 사라졌다.

 

석언종(釋彦悰)10)의 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 역사책을 고찰해 보건대, 이것을 일러 하늘의 희기(喜氣)라고 하면서 식자(識者)들은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겼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 가비라성에 탄생하실 때나, 자씨(慈氏)가 도리천으로 오르려 하실 때에 용신(龍神)이 공양하고 천신[天衆]이 봉영(奉迎)하였다고 한다. 이날의 행사는 그 때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교가 동쪽으로 유입(流入)된 이래로 이같이 성대한 일은 없었다.”

10) 중국 당 나라 때 현장(玄奘) 문하의 승려 언종(彦琮)과는 다른 사람으로, 생몰 연대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장 법사 밑에서 수학하고 홍복사(弘福寺)에 거주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당호법사문법림별전(唐護法沙門法琳別傳)」,「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

    三藏法師傳)」,「집사문불응배속등사(集沙門不應拜俗等事)」을 찬술했다. 본「대당대자은사

    삼장법사전」은 혜립(慧立)이 지은「현장전(玄奘傳)」5권에서 빠진 것을 모아 보완하여 새롭게 

    10권으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4일(壬辰)11)에 법사는 문무성황제(文武聖皇帝)12)를 낙양궁(洛陽宮)에서 배알하게 되었는데, 2월 1일[己亥]에 의란전(儀鸞殿)에서 뵈었다.

황제는 법사를 매우 정중하게 영접하고 위로했다. 

법사가 자리에 앉자 황제가 말했다.

“법사께서는 떠난 뒤로 어째서 편지도 보내지 않았소?”

법사가 말했다.

“제가 떠날 때에 재삼 표문(表文)을 올렸었습니다. 그러나 지성스런 서원[誠願]이 얕아서인지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사모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어 갑자기 몰래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 마음대로 떠난 죄에 대하여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법사께서는 출가하였으니 속인과는 다르오.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했으니 짐은 참으로 경하를 드리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은 없소. 오직 서역의 산천은 험하고 멀며 풍속과 인심도 달라서 법사께서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이 기이할 뿐이오.”

법사가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는 질풍(疾風)을 타는 자는 천지(天池)에 가는 것도 그리 멀지 않고, 용주(龍舟)를 저어가는 자는 강의 물살을 건너기도 어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천자가 되실 상서(祥瑞)를 타고 나셨기에 폐하가 사해(四海)를 다스리고서부터 성덕(聖德)은 구역(九域)13)에 미치고 인(仁)은 8구(區)14)에까지 뻗쳤습니다. 도타운 정사는 날씨 무더운[炎景] 남쪽에까지 불었으며 성스러운 위엄은 총산(蔥山) 밖에까지 떨쳤습니다. 

이 때문에 오랑캐의 군장(君長)들은 매번 하늘을 나는 새가 동방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면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몸을 움츠리며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현장은 사지가 멀쩡하고 직접 폐하의 기름과 교화를 받은 사람이니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폐하의 위광(威光)을 입었기 때문에 왕복하는 길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것은 법사께서 장자(長者)다운 말씀을 하는 것일 뿐, 짐이 어찌 그런 힘이 있겠소?”

11) 이 책에 기록된 간지(干支)에는 오류가 많다. 명상(冥祥)의「대당고삼장법사현장법사행장

    (大唐故三藏法師玄奘法師行狀)」에 따르면, 현장이 낙양에서 장안으로 돌아온 날은 3월 1일

    이었다고 한다.『본전(本傳)』에 의하면 그날이 기사(己巳)라 하였다. 임진(壬辰)은 1월 24일, 

    2월 을해(乙亥)는 2월 1일이 된다.

12)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말하는데, 태종은 사후의 묘호(廟號)이다. 문무성황제는 

    고종(高宗) 때에 추증하여 올린 존호이다.

13) 구역은 구주(九州)와 같은 뜻으로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14) 여덟 방위의 구역이라는 뜻으로, 온 천하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는 널리 인도에 관한 일을 물었다. 

설령(雪嶺)의 서쪽 인도의 경계 지역과 사철의 기후와 인심과 산물과 풍속과 8왕(八王)15)의 고적(故迹)과 4불(四佛)의 성적(聖跡) 등과 아울러 박망(博望)16)도 전하지 못했던 것과 반초(班超)나 마원(馬援)17)도 기록하지 못했던 것들을 물었다. 법사는 이미 직접 그 지방을 여행하고 여러 나라를 보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질문에 따라 모두 조리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대단히 기뻐하며 시신(侍臣)에게 말했다.

“옛날에 부견(符堅)18)은 석도안(釋道安)19)을 신기(神器)라고 칭송하여 온 나라가 그를 존중하였다. 지금 짐이 법사를 보니 말이 전아(典雅)하고 풍채(風采)와 절조(節操)가 곧고 바르다. 오직 옛사람들에게 미안함이 없지는 않으나 그들보다 더욱 뛰어나다고 할 만하다.”

이때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長孫無忌)20)가 말했다.

“참으로 폐하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은 일찍이 진국(晋國)의『춘추(春秋)』를 읽고 석도안의 일을 기록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석도안은 참으로 덕행이 높고 박식한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불법이 들어온 지가 얼마 안 되어 경론(經論)도 많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깊이 연구를 하였다고 해도 모두 지엽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사처럼 몸소 인도에 가서 온갖 오묘함의 근원을 찾고 열반[泥洹]21)의 유적들을 구명(究明)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의 말이 옳다.”

그리고 황제는 법사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나라는 멀고멀어서 신령스런 유적이나 불법의 가르침[敎法]에 대해 이전까지는 상세하게 기록한 책이 없었소. 법사는 이미 직접 가보았으니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 하시오.” 

15) 8왕자(王子)를 말하는 것으로 범어로는 aṣṭaurāja-kumārāḥ라고 한다. 즉 과거 일월등명불

    (日月燈明佛)이 아직 출가하기 전의 8분 왕자를 말한다. 

16)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사람 장건(張騫)을 말하는 것이다. 장건은 건원(建元) 2년(B.C.139)에 

    서역(西域)의 대월지국(大月氐國)에 사신(使臣)으로 갔는데, 수행원 1백여 인을 거느리고 장안

    (長安)을 떠났으나 흉노(匈奴)에 잡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몇 차례의 탈주 끝에 대월지를 

    거쳐 원삭 3년(B.C.126)에 간신히 귀국했다. 장건의 견문은 한 무제의 서역 경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이후에 한(漢) 나라와 서역(西域) 여러 나라 사이에 비로소 교통(交通)이 되었다. 

    박망후(博望候)에 봉해졌다.

17) 한(漢) 나라 때에 남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원이 가서 평정하였다.

18) 생몰년은 338-385, 재위 기간은 357-385이며, 전진(前秦)의 3대 임금으로 이름은 문옥(文玉), 

    자는 영고(永固). 시호(諡號)는 세조(世祖)이다. 2대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 농경(農耕)을 

    장려하고 법제(法制)를 정비 확립하는 등 내치(內治)에 힘썼고, 376년 화북(華北), 즉 황하 

    중․하류 지방)을 평정하고 전진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국력이 신장되자 천하 통일의 

    야망을 품고 383년 동진을 쳤으나 비수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석도안(釋道安)에게 귀의하였다.

19) 중국 동진(東晋) 시대의 스님으로 상산(常山) 부류(扶柳) 출신이며 12세 때 출가하여 불도징

    (佛圖澄)에게 사사 받았다. 385년 2월 72세 때 입적했다. 세간에서는 미천도안(彌天道安)이라고 

    불렀다. 스님의 성씨를 석(釋)으로 삼은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반야경 등의 여러 경전에 

    대한 주석서와『종리중록(綜理衆錄)』,『서역지(西域志)』를 비롯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다. 

20) 중국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659)로, 자는 보기(輔機)이다. 태종을 잘 보필하여 천하를 안정

    시켰으며, 고종이 황후 왕씨(王氏)를 폐하고 무소의(武昭儀)를 들이려는 것을 반대하다가 

    유배당하여 죽었다. 저서에『당률소의(唐律疏議)』등이 있다. 

21)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니르바나는 열반(涅槃)의 원음이다.

 

그리고 황제는 다시 법사가 공적인 보직[公輔]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인재임을 알아보고, 법사에게 환속하여 정무(政務)를 도와달라고 권했다. 그러나 법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어려서부터 치문(緇門)에 들어가 불도(佛道)만을 지키면서 현묘(玄妙)한 종지(宗旨)를 익혀왔습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불교를 버리고 속세의 직무를 따르라 하시면, 물 위에 떠가는 배를 물을 버리고 뭍에서 저어 가라 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공덕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패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목숨을 마칠 때까지 불도를 행하는 것으로 국은에 보답할 수 있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이와 같이 굳게 사양하였다. 이 당시 황제는 요하(遼河)를 정벌하기 위해 천하의 병사들을 이미 낙양에 모아 놓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군사 문제가 바쁘고 급했으나 법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조정으로 맞아들여 잠시 배알토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 보니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조국공 장손무기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법사는 홍려시(鴻臚寺)22)에 묵고 있습니다. 해가 지면 돌아가기 어려울까 걱정이 됩니다.”

황제가 말했다.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속의 말을 다하지 못한 것 같소. 짐은 법사와 함께 동쪽 지방을 순행[東行)하면서 각 지방의 풍속도 구경하고 지휘하는 여가에 따로 이야기도 나누고 싶소. 법사의 뜻은 어떠하오?”

법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느라 병까지 걸렸습니다. 폐하를 따라다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법사는 오히려 혼자서도 절역(絶域)을 유람하였소. 그러나 지금 이번 행차는 어가(御駕)와 함께하기에 전혀 걸을 필요도 없는데 어째서 사양한단 말이요?”

법사가 대답했다.

“폐하의 동정(東征)길에는 6군(六軍)23)이 호위하여, 천하를 어지럽히는 나라[亂國]을 벌하시고 적국의 신료를 토벌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목야(牧野)24)의 공25)과 후한(後漢) 유수(劉秀)26)가 곤양(昆陽)에서 크게 승리했던 것27) 같은 전과를 거두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스로 생각하건대 저는 끝까지 행군을 할 만한 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부질없이 노자나 허비하는 부끄러움만 더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다 군대의 전투는 보아서는 안 된다고 불가의 율(律)에 정해져 있습니다. 이미 부처님의 이러한 말씀이 있으셨으므로 저는 감히 받들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천자의 자애로써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저는 더없는 다행으로 여기겠사옵니다.”

황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22) 홍려시(鴻臚寺)를 말하는 것이다. 조정에서 내빈을 접대하거나 외교 의식을 치르는 관서이다. 

23) 중국(中國) 주(周)나라 때의 군대(軍隊) 편제(編制)로서, 천자(天子)가 통솔(統率)한 여섯 개의 

    군(軍)이다.

24) 중국 주(周) 나라의 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한 곳이다.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기현(淇縣) 남쪽의 땅이다. 

25) 주(周) 무왕(武王)이 목야(牧野)에서 은나라 주왕(紂王)과 결전을 벌인 일을 말한다.

26) 중국 후한의 제1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BC. 6-AD 57)의 본명이다. 전한(前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9세손이다. 전한은 1세기 초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으며, 

    왕망은 신(新)이라는 왕조를 세웠다. 그 신의 말년에 각지에서 군웅(群雄)이 거병(擧兵)하였을 때, 

    유수도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의 호족(豪族)과 손을 잡고 봉기하였다. 각지로 전전(轉戰)한 끝에 

    하북(河北)ㆍ하남ㆍ호북(湖北)에서 세력을 폈으며, 하남의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25년 하남의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漢王朝)를 재건하였다. 

27) 신(新) 왕망(王莽) 때에 녹림군(綠林軍)이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꺾고 크게 승리를 거둔 

    것을 곤양지첩(昆陽之捷)이라고 한다. 곤양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섭현(葉縣) 북부에 있다.

 

법사가 다시 말했다.

“제가 서역에서 가져온 범본(梵本) 경전 6백여 부를 아직 한 글자도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숭악(嵩岳)28)의 남쪽, 소실산(少室山)의 북쪽에 소림사(少林寺)라는 절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곳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고 샘물과 암석뿐이어서 맑고 고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은 후위(後魏)의 효문황제(孝文皇帝)가 건립한 것이며, 곧 보리유지(菩提留支)29) 삼장께서 경전을 번역한 곳이라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 그 절에 가서 번역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간대 칙명(勅命)을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그 산에까지 갈 필요가 없겠소. 법사가 서방으로 떠난 뒤에 짐은 목태후(穆太后)30)를 위해서 서경(西京)에다 홍복사(弘福寺)를 지었소. 이 절에는 선원(禪院)도 있고 아주 고요한 곳이오. 법사는 그곳으로 가서 번역하도록 하시오.”

법사가 다시 말했다.

“백성들은 지견(知見)이 없어서 제가 서방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부질없이 서로 보려고 다투어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면 절은 바로 저잣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국법에도 저촉될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에도 방해가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문지기를 세워서 모든 출입을 막아주십시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법사의 이러한 말은 참으로 보신(保身)의 말이라 하겠소. 마땅히 그렇게 처리하겠소. 법사께서는 3~5일간 쉬셨다가 서경으로 돌아가 홍복사에 안거하도록 하시오.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일일이 방현령(房玄齡)과 상의하도록 하시오.”  

28) 숭산(嵩山), 즉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경계에 있는 산이다.

29) 위(魏) 나라 때의 승려로,『능가경』 등을 번역하였다. 

30)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황후 두씨(竇氏)이며, 이세민(李世民)의 생모이다.

 

이렇게 하여 법사는 하직하고 돌아왔다. 3월 1일[己巳]에 법사는 낙양에서 장안으로 갔다. 그리고 홍복사에 머물면서 번역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번역 작업에 필요한 증의(證義)31)․철문(綴文)32)․필수(筆受)33)․서수(書手)34) 등을 조목별로 작성하여 유수(留守) 사공(司空)35) 양국공(梁國公) 방현령에게 보내었다. 방현령은 관리를 정주(定州)36)로 보내서 계주(啓奏)토록 하였고, 그러면 황제는 필요한 것을 두루 갖추어서 공급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여름 6월 무술일(戊戌日)에 대승과 소승의 경론을 암기하고 번역한 문장을 고증할 수 있는 증의(證義)를 맡을 대덕(大德)으로서 당시 사람들이 추천하는 12명이 모였다. 

12명의 이름은 장안 홍복사의 사문인 영윤(靈潤)과 사문 문비(文備), 나한사(羅漢寺)의 사문 혜귀(慧貴), 실제사(實際寺)의 사문 명염(明琰), 보창사(寶昌寺)의 사문 법상(法祥), 정법사(靜法寺)의 사문 보현(普賢), 법해사(法海寺)의 사문 신방(神昉), 곽주(廓州)37) 법강사(法講寺)의 사문 도심(道深), 변주(汴州)38) 연각사(演覺寺)의 사문 현충(玄忠), 포주(蒲州)39), 보구사(普救寺)의 사문 신태(神泰), 면주(綿州)40) 진향사(振嚮寺)의 사문 경명(敬明), 익주(益州)41) 다보사(多寶寺)의 사문 도인(道因) 등이었다.

그리고 문체(文體)를 통일시키는데 능한 철문(綴文)을 맡을 대덕 9명이 모였다. 

그들은 장안 보광사(普光寺)의 사문 서현(栖玄), 홍복사의 사문 명준(明濬), 회창사(會昌寺)의 사문 변기(辯機), 종남산(終南山) 풍덕사(豊德寺)의 사문 도선(道宣), 간주(簡州)42) 복취사(福聚寺)의 사문 정매(靜邁), 포주 보구사의 사문 행우(行友), 서암사(捿巖寺)의 사문 도탁(道卓), 빈주(豳州)43) 소인사(昭仁寺)의 사문 혜립(慧立), 낙주(洛州)44) 천궁사(天宮寺)의 사문 현칙(玄則) 등이었다.

그리고 자학(字學)45) 대덕이 1명 왔는데, 그는 장안의 대총지사(大總持寺) 사문 현응(玄應)이었다. 

또 범어(梵語)와 범문(梵文)을 고증할 증의 대덕이 1명도 왔으니, 즉 장안 대흥선사(大興善寺)의 사문 현모(玄暮)였다.

이밖에 필수와 서수, 심부름하는 사람과 필요한 물품 등이 다 갖추어졌다.

31) 문장의 번역과 고증 작업을 말한다.

32) 문장의 문체를 통일시키고 연결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33) 경전 번역 과정에서 구술한 내용을 받아 적는 작업을 말한다.

34) 번역한 문장을 정서(淨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35) 당대(唐代)에 상당히 지위가 높은 대신에게 내리던 일종의 명예직함이다.

36) 지금의 하북성 정현이다. 당시 태종(太宗)이 이곳에서 요(遼)를 정벌하러 갈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37) 중국 산서성 월현 지역이다.

38) 중국 하남성 개봉현 및 그 주변 지역이다.

39) 중국 산서성 포주 및 그 주변 지역이다.

40) 중국 일천성 양현 지역이다.

41) 중국 사천성 성도현 지역이다.

42) 중국 사천성 간양현 지역이다.

43) 중국 협서성 빈현 지역이다.

44) 중국 하남성 낙양현 지역이다.

45) 역장(譯場) 중에서 한자로 범어를 기록하는 번역음을 책임지는 승려이다.

 

정묘일(丁卯日)에 법사는 드디어 패엽(貝葉)을 가지고 범문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먼저『보살장경(菩薩藏經)』․『불지경(佛地經)』․『육문다라니경(六門陀羅尼經)』․『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등 4부(部)부터 시작하였다.『육문경(六門經)』은 당일로 번역을 끝냈고『불지경』은 신사일(辛巳日)에 끝냈으며,『보살경』과『현양론』등은 세모(歲暮) 무렵이 되어서 끝냈다.

정관 20년(646) 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는 또『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을 번역하기 시작하여 2월에 끝내고, 다시『유가사지론』을 번역하였다. 그 해 가을 7월 신묘일(辛卯日)에 법사는 새로 번역이 완료된 경론을 진상(進上)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기로 8정(正:正道)의 뜻은 실로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징검다리이고 1승(乘)의 종지(宗旨)는 진실로 열반으로 오르는 사닥다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물의 기미를 알아차리는 일에 미숙하여 비록 몸[蘊]이 총산(蔥山)의 서쪽에 이르러 여러 나라의 뜰[胥庭]을 거쳤어도 들은 것이 없고, 주(周)와 진(秦)을 두루 편력하였어도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섭마등(迦葉摩騰)이 낙양에 들어와서 비로소 3천(川)을 덮었고, 강승회(康僧會)46)가 오(吳)에 유학하여 비로소 형초(荊楚)를 윤택하게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마침내 사람들은 해탈의 인(因)을 닦고 집안에서 보리(菩提)의 업을 심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법을 전하는[傳法] 이익이 두텁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엄(智嚴)과 법현(法顯)이 경(經)을 구하고, 불도징(佛圖澄)47)과 라집(羅什)48)이 이어서 번역했습니다. 비록 깊고 그윽한 풍취[玄風]로 태양을 부채질한다 해도 모두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현장만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홀로 현명한 성군[明聖]을 만나 가지고 온 경론을 모두 폐하께 아뢸 수가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성스러운 말씀[聖言]을 숭상하고 존중하시어 번역하라는 은혜를 내리시니, 이에 의학(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과 함께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촌음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번역 작업을 관장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아직 종결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미 번역을 끝내어 보여 드릴 수 있는 것은 5부 58권입니다. 

번역된 경전의 서명은『대보살장경(大菩薩藏經)』20권과『불지경(佛地經)』1권,『육문다라니경(六文陀羅尼經)』1권과『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20권, 그리고『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16권입니다.

그리고 이 책들을 묶어서 8질(袟)을 만들어 정서(淨書)한 것은 따로 보내 드립니다. 삼가 궐(闕) 앞에 나아가 봉진(奉進)합니다.

또 현장이 보기로는, 홍복사의 존상(尊像)이 처음 조성될 때에 폐하께서는 친히 천자가 타는 수레인 난여(鸞輿)를 내리시어 상서로운 청련(靑蓮)49)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처음으로 번역한 경론(經論)들은 성대(聖代)의 새로운 글[新文]입니다. 감히 지난번에 보여주신 후의[前義]를 믿고 다시 더 부탁을 드립니다. 폐하께서 신한(神翰)을 내리시어 제(題)하고 서문을 지으시어 종극(宗極)을 찬앙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깊은 말씀 심오한 뜻[沖言奧旨]이 일월(日月)과 더불어 밝음을 함께 하시고 옥구슬 같은 글자와 은구슬 같은 문장[玉字銀鉤]은 건곤(乾坤)과 더불어 그 굳음을 같이 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백대(百代)에 걸쳐 길이 칭송이 이어지도록 하시며, 천 년 만 년 끊어짐이 없이 우러르게 하여 주십시오.”

46) 강승회(康僧會, ?-280)는 강거국(康居國) 사람으며 그의 선조는 대대로 인도에 살았다. 

    아버지가 장사하면서 교지(交趾)에 와서 그를 낳았으나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출가하여 

    삼장과 6전(典)에 통하였다. 또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회계

    (會稽)의 진혜(陳慧) 등에게 도를 배웠다. 오(吳)나라 적오(赤烏) 4년(241)에 건업(建鄴)에 

    오니 손권(孫權)이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머물게 하였다. 이곳에서『육도집경(六度集經)』등 

    7부 20권을 번역하여 오(吳) 나라에 불교를 포교하는 모범이 되었다. 후세에 초대선사

    (超代禪師)라 칭하였으며 천기(天紀) 4년에 입적하였다.『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6․13 

   「강승회전」에 나온다. 

47) 축불도징(竺佛圖澄, 232-348)이라고 한다. 인도 구자국(龜滋國)의 승려로 성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경문(經文) 수백만 자를 외우고 문리에 통달하였다. 310년 중국 낙양(洛陽)에 

    와서 대법을 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신이한 일을 나타내어 교화하다. 그때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이 귀의하여 대화상이라 일컬으며 아들을 보내어 양육케 하였다. 석륵이 죽고 

    석호(石虎)가 왕이 되자 스승으로 섬기며 대전에 올라 정사에 참여케 하였다. 건무(建武) 14년 

    12월에 업궁사(業宮寺)에서 나이 117세로 입적하다. 문하에 승랑(僧郞), 도안(道安) 등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진서(晋書)』「열전(列傳)」과『고승전』9에 나온다.

48) 동수(童壽)라고 번역한다. 아버지는 구마라염(鳩摩羅炎), 구자국왕(龜玆國王)의 누이동생 

    기파(耆婆)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7세에 출가하여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고, 북인도 

    계빈국(罽賓國)에서 반두달다(盤頭達多)에게 소승교를 배우고 소륵국(疏勒國)의 수리야소마

    (須梨耶蘇摩)에게 대승교를 배웠다. 귀국하여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 율(律)을 배우고 후에 

    주로 대승을 홍포(弘布)하였다. 383년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여광(呂光)을 시켜 구자국을 

    쳐서 라집(羅什)을 모셔오게 하였으나, 부견이 패했으므로 여광이 양왕(凉王)이 되어 양주

    (凉州)에 머물렀다. 그뒤에 후진(後秦) 요흥(姚興)이 양(凉)을 쳐서 401년 법사를 장안(長安)

    으로 모셔와 국빈으로 대우하고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서 여러 경을 번역하게 

    하였다. 번역서로『성실론(成實論)』․『십송률(十誦律)』․『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중론(中論)』․『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등 총 98부 

    425권에 달한다. 그는 삼론종(三論宗)의 조사이며 그의 3천여 제자 가운데 도생(道生), 

    승조(僧肇), 도융(道融), 승예(僧叡) 등을 집문사철(什門四哲)이라 한다. 『출삼장기집

    (出三藏記集)』12, 14에 나온다.

49) 인도(印度)에서는 청련(靑蓮)이 솟는다는 것은 상서롭다는 뜻으로 표현한다.

 

또 일찍이 낙양에서 천자를 배알했을 때, 천자는 법사에게『서역기(西域記)』를 쓰라고 명을 내렸었다. 이 책이 완성되자 법사는 을미일(乙未日)에 또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반목(蟠木)과 유릉(幽陵)50)의 운관(雲官)51)은 헌황(軒皇)의 영역52)을 기록하였고, 유사(流沙)53)와 창해(滄海)54)의 하재(夏載)는 이윤과 요임금[伊堯]의 강역[域]을 나타냈습니다. 서모(西母)의 백환(白環)55)은 수의(垂衣)의 주(主)에게 보내졌으며, 동이(東夷)가 조공으로 호시(楛矢)56)를 보내어 형벌도 필요 없는 치세[刑措]57)의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진실로 꽃봉오리를 전시대[曩代]에 날리고 아름다움을 전 법전[前典]에 따랐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때에 맞춰 기강[紀]을 잡으시고, 규범을 제정[提衡制範]58)하셨습니다.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어 천하를 이롭게 하심[刳舟絃木]59)으로써 천하를 위엄에 승복하게 하고 군생(群生)을 구제하셨으며, 거북의 다리로 하늘을 받치고 갈대를 태워 범람하는 강물을 막으시어[鱉足蘆灰]60) 방여(方轝)를 막아 둥글게 덮으셨습니다[圓蓋]. 

군대를 경영하시어 7덕(德)61)에 빛내시고, 문장과 교육을 베풀어 10륜(倫)62) 널리 퍼뜨리셨습니다. 샘의 근원[泉源]까 두루 윤택하게 하시고 교화와 양육[化育]으로 숙위(蕭葦)를 적셨습니다. 지방(芝房)63)에 상서로운 싹이 돋게 하시고 낭정(浪井)64)에 꽃을 피우셨습니다. 낙유반(樂囿班)을 길들이시며 소아률(巢阿律)을 울리시고, 자고(紫膏)를 패궐(貝闕)65)에 띄우고 백운(白雲)을 옥검(玉撿)에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허약한 나무[弱木]가 동산이 되게 하고 가랑비 고인 물[濛氾]을 못으로 만들었으며, 타오르는 불꽃[炎火]을 크게 일으키어 쌓여 있던 얼음[積冰]을 비추었습니다. 

적판(赤坂)66)을 사다리 삼아 천자의 정령[朔]을 받들었고 푸른 물결 출렁이는 나루[滄津]에 배를 띄워 문서를 맡으셨습니다. 역사[史]로 전대의 어진 사람[前良]을 빛내주고 사실[事]을 고부(故府)의 기록에 넣으셨습니다. 

이것이 어찌 한(漢) 나라의 장적(張棭)67)을 열어 금성(金城)68)을 가까이 접하게 하고, 진(秦) 나라의 계림(桂林)69)을 지켜 주포(珠浦)로 통하게 하는 것뿐이겠습니까.

현장은 다행히 중국과 주변 나라들이 다 평온한[華夷靜謐] 세상인 정관(貞觀)70) 시대에 속하였기에, 마음이 인도 쪽[梵境]으로 깊이 빠질 때 감히 호사(好事)를 이루었습니다. 

생명은 아침 이슬 같고 힘은 가을 메뚜기와 같은 것입니다. 오직 황령(皇靈)에 의지하였기에 몸을 날리고 그림자를 앞세워, 막배(膜拜)71)의 마을[鄕]을 전전하고 여러 역참[驛]을 지나 멀리 밖을 정처 없이 떠돌았던[流離]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지(條支)72)의 거각(巨㲉)으로 예전에 들었던 것들을[前聞]을 증험하였고 계빈(罽賓)

73)의 외로운 수레를 타고 돌아와 이전의 결실을 생각하였습니다.

때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사람의 원(願)을 하늘이 따라 주었나 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설수(雪岫)를 내려가서 제하(提河)74)를 건넜고, 학림(鶴林)75)을 찾아가다가 취령(鷲嶺)76)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원(祗園)77)의 길에 아직 비슷하게 본 따 만든 조상[髣像]이 남아 있었고, 왕성(王城) 터에는 파타(坡陀)78)가 아직 있었습니다. 

찾아서 구하고 두루 보다 보니 세월이 흘러서 황제께서 계시는 서울[帝京]에 돌아가려고 말은 하면서도 머문 지 1기(紀)79)를 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말로 전해들은 곳과 직접 가본 곳은 1백 28국이나 되었습니다. 

장언(章彦)이 밟았던 길은 부질없이 동서남북을 헤매었던 것이며, 과보(夸父)80)는 그저 내닫기만 했을 뿐 풍토를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반초(班超)81) 같이 후(侯)로 봉해지는 일이 멀지 않고 장건(張騫)82)처럼 되기를 바라는 일이 허황된 일이 아닙니다. 

지금 기술한 것에 예전에 들었던 내용[前聞]과 다른 데가 있습니다. 제가 비록 온 세상의 강토를 다 들르지 못했을지라도 그래도 총령 밖의 국경 지대는 모두 가 보았습니다. 이 나라들에는 모두 실록(實錄)이 있기 때문에 제가 감히 꾸며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삼가 갖추어 12권으로 편집하여『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 이름 하였습니다. 정서(淨書)한 책은 별도로 상정(上呈)합니다. 

바라옵건대 이를 우필(右筆)83)에게 반포하도록 시키시고 좌언(左言)84)에게 꾸미게 하시어,『박물(博物)』85)이 진(晋) 나라를 덮었듯이『구구(九丘)』86)가 황대(皇代)에 펼쳤듯이 하여 주소서. 

다만 현장은 자질과 식견이 미천하고 짧아서 미진한 데가 많고 게다가 문장[筆語]에 서툴러 폐하께서 보시는 데에 부족하실까 두렵습니다.”

50) 중국 동해(東海) 건너 섬에 있는 명산(名山)을 가리킨다.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 때의 중국의 

    지경(地境)이 북(北)으로는 유릉(幽陵), 남(南)으로는 교지(交趾), 서(西)로는 유사(流沙), 동(東)으로는 

    반목(蟠木)에 이르렀다. 

51) 일기를 예점하는 관원인 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을 말한다.

52) 헌황은 황제(黃帝) 현원씨(軒轅氏)로, 그의 치세에 천지의 기운이 조화되어 풍기(風氣)가 정대하였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영륜(伶倫)으로 하여금 12율려(律呂)를 만들게 하였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서(漢書)』21권「율력지(律曆志)」에 나온다.

53)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54)『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에 의하면 한 무제 때에 팽오(彭吳)가 조선(朝鮮)에 길을 뚫고 

    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여기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는 동쪽 먼 

    바다 밖의 땅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55) 후한(後漢) 양보(楊寶)가 어릴 적에 산에 가서 솔개가 덮쳐 땅에 떨어진 참새 새끼를 오랫동안

    키워서 날려 보냈는데, 꿈에 황의 동자(黃衣童子)가 나타나 “나는 서왕모(西王母)의 사자(使者)인데 

    그대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니 고맙다” 하고 흰옥[白環] 네 개와 보물을 주면서 장차 자손이 

    현달할 것이라고 했다는 고사이다.

56) 두만강 근처는 옛날 숙신(肅愼)이란 나라였는데, 옛날 중국 기록에 숙신 나라에서 호나무로 만든 

    화살인 호시(楛矢)를 조공으로 보냈다는 말이 있다.

57) 형조(刑措)라는 말은 “형조이불용(刑措而不用)”이라는 말로써 즉 형법(刑法)은 갖추어 놓았으나 

    민중이 잘 교화되어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58)『한서』「두주전(杜周傳)」에 “관작과 지위가 높고 현명한 이들이 대대로 조정에서 서로 

    제형(提衡)한다” 하였고, 주에서는 “형(衡)은 균평(均平)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59)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어 세상에 편리하게 한다는 뜻으로,『주역(周易)』「계사(繫辭)」에 

    “나무를 도려내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베어서 노를 만들면, 배와 노의 편리함은 지나가지 못하던 

    강을 건너게 하여 멀리 천하를 이롭게 한다.[刳木爲舟 剡木爲楫 舟楫之利 以濟不通 致遠以利天下]”

    고 하였다.

60) 별족로회(鱉足蘆灰)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여와(女媧)가 하늘을 보수하는 과정을 

    말한다. 어느 날 수신(水神)인 공공(共工)과 화신(化神)인 축융(祝融)이 큰 싸움을 하였는데, 

    싸움에 진 공공이 너무나 속이 상해서 그만 자기 머리를 부주산(不周山)에 부딪쳤다. 부주산 

    꼭대기에는 하늘을 떠받드는 하늘기둥과 대지를 이어 매는 땅줄이 있었는데, 공공이 난폭한 

    짓을 한 덕분에 하늘기둥이 부러지고 땅줄이 끊어져서 하늘은 서북으로 땅은 동남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구멍이 뚫린 하늘로부터는 큰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하천은 대홍수로 범람하여 

    산림이 서식하고 맹수와 흉조들이 발악을 하며 뛰쳐나와 인간을 마구 잡아먹으려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것을 본 여와는 급히 강 속에서 오색 돌을 따서 불에 녹여 반죽을 한 다음, 

    하늘에 뚫린 큰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사는 거대한 거북의 네 발[鱉足]을 잘라 

    부러진 천주의 대신으로 삼고, 또 물가에 난 갈대를 베어 모아서 그것을 태워[蘆灰] 그 재를 

    쌓아 범람한 강물을 막았다고 한다. 

61)『좌전(左傳)』선공(宣公) 11년에, “무릇 무(武)란 것은 금포(禁暴)ㆍ집병(戢兵)ㆍ보대(保大)ㆍ

    정공(定功)ㆍ안민(安民)ㆍ화중(和衆)ㆍ풍재(蘴財)를 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고, 그 주에 

    “이것을 무(武)의 칠덕(七德)이라 한다” 하였다.

62) 제사를 지내어 나타내는 열 가지의 윤리를 말한 것으로, 즉 첫째는 귀신(鬼神) 섬기는 도리를 

    나타내는 것, 둘째는 군신(君臣)의 의리를 나타내는 것, 셋째는 부자(父子)의 윤리를 나타내는 것, 

    넷째는 귀천(貴賤)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다섯째는 친소(親疎)의 등급을 나타내는 것, 여섯째는 

    작상(爵賞)의 시행을 나타내는 것, 일곱째는 부부(夫婦)의 분별을 나타내는 것, 여덟째는 

    정사(政事)의 균평함을 나타내는 것, 아홉째는 장유(長幼)의 차서를 나타내는 것, 열째는 

    상하(上下)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등이다.『예기(禮記)』「제통(祭統)」에 나온다.

63) 지방가(芝房歌)를 줄인 말로, 재방가(齋房歌) 또는 재방(齋房)이라고도 한다. 한 무제 원봉(元封) 

    2년에 감천궁(甘泉宮)에서 지초가 났는데, 줄기는 아홉에 금빛이 나고 여섯 잎에 붉은 열매가 

    달렸으며, 밤에 빛이 났다고 한다. 한 무제는 이를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지방가를 지었다.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에 기록되어 있다.

64)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서쪽에 있는 우물 이름이다. 이 우물이 깊고 강처럼 커서 파도가 

    치기 때문에 낭정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우물이 막혔다가 다시 열리는 것을 서상으로 삼았다. 

    『심양기(潯陽記)』에 나온다.

65) 자색(紫色)의 조개껍질로 장식한 궁궐. 수신(水神) 하백(河伯)이 산다는 곳으로, 속칭 용궁

    (龍宮)을 말한다. 

66) 중국 섬서성(陝西省) 양현(洋縣)에 있는 지명이다. 양현 동쪽 20리 지점에 용형산(龍亨山)이 

    있는데, 이 산은 자오곡(子午谷)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 산의 비탈이 붉은 색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67) 중국 감숙성 장적현이다.

68) 중국 감숙성 관현 서북 40리에 있다.

69) 중국 광서성 계림현이다.

70) 중국 당나라 태종 때의 연호(627-649)이다.

71) 배례(拜禮)의 일종으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말한다.

72) 중국 한․위(漢魏) 시대의 사서(史書)에 나오는 먼 서방의 나라 이름이다. 

73) 서역(西域) 국가 중의 하나로, 당대(唐代)에는 가섭미라(迦濕彌羅)라 하였고, 지금의 캐시밀 

    지역이다. 

74) 중인도 구시나국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를 말한다.

75) 부처님께서 북인도의 구시라성(拘尸羅城) 서북쪽으로 흐르는 발제하(跋提河) 물가의 사라수

     여덟 그루가 둘씩 마주 서있는 사이에 자리를 깔게 하고 열반에 드시자 그 숲의 나무가 말라 

    죽어 학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그 곳을 학림(鶴林) 또는 학수(鶴樹)라고 하였다.

76) 중인도(中印度)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범어(梵語)의 

    음을 따서 기사굴산(耆闍堀山)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취봉(鷲峰)․취봉산(鷲峰山)․취암(鷲巖)․취악(鷲嶽)․취대(鷲臺)․영산(靈山)․영취산(靈鷲山)․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는데, 산정에 독수리가 많아서 왕사성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77) 고대 중인도의 교살라국(憍薩羅國) 사위성(舍衛城)의 남쪽에 자리했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을 

    말한다.

78) 마가다국의 수도인 화씨성(華氏城)의 원어인 파탈리푸트라의 음역을 줄인 말이다.

79) 고대에는 12년을 1기로 하였고, 지금은 1백년을 1세기로 한다.

80) 과보는 고대 신화의 인물이다. 과보가 태양을 쫓아가다가 목이 말라서 하수(河水)와 위수(渭水)의 

    물을 먹고, 다시 북쪽의 대택(大澤)을 먹으려고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목이 말라 죽었으며, 그가 

    버린 지팡이가 살아서 등림(鄧林)의 숲이 되었다고 한다.『산해경(山海經)』「해외북경(海外北經)」에 

    보인다.

81) 후한(後漢)의 반초(班超)는 원래 관청의 대서(代書) 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장부가 별다른 지략(智略)이 없으면, 그래도 부개자(傅介子)나 장건(張鶱)처럼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워 봉후(封侯)가 된 일이라도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서역(西域)의 사신으로 가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던 고사가 있다.『후한서(後漢書)』「반초전(班超傳)」에

    나온다. 

82) 한 무제(漢武帝) 때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과 동맹을 촉진할 목적으로 사신으로 떠나 

    서역(西域)을 두루 돌아다니며 동서(東西) 교역의 길을 열었다.『사기(史記)』111권, 

   『한서(漢書)』 61권에 보인다.

83) 국왕의 곁에서 기록을 맡는 관리이다.

84) 역사 기록을 맡은 관리이다. 

85) 진(晉) 나라 혜제(惠帝)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지냈던 장화(張華)가 지은 지리서이다.

86) 중국 구주(九州)의 토산품이나 기후 조건 등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병신일(丙申日), 천자는 스스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답서를 썼다.

“그대가 올린 글을 보고 모든 뜻은 다 알았소. 법사는 일찍이 고행(高行)을 나타내서 속진(俗塵)을 떠나, 보주(寶舟)를 띄워서 피안(彼岸)에 오르고 묘도(妙道)를 찾아서 법문(法門)을 열었으며, 널리 대도(大道)를 밝혀 중생의 죄[衆罪]를 씻어내게 하였소. 그래서 부처님의 자운(慈雲)을 펼쳐서 4공(空)87)을 덮고 혜일(慧日)이 장차 어두워지려 할 때에 8극(極)88)을 비추었으니,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오직 법사뿐이오. 

짐은 배움이 얕고 마음이 좁아 사물에 미혹됨이 있으니 하물며 불교의 깊고 세밀한 뜻을 어찌 감히 우러러 헤아릴 수 있겠소. 법사는 지금 경전에 붙일 서문[經題]를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오. 그리고 또 새로이 편찬한『서역기』는 당연히 내가 직접 읽어볼 것이오. 현장화상에게 칙명을 내리오.” 

87) 4무색(無色)이라고도 하며, 무색계(無色界)의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등 4공처를 말한다. 또는 중생이 집착하는 

    유(有)를 깨뜨리는 네 가지 공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에는 법법상공(法法相空)ㆍ무법무법상공

    (無法無法相空)ㆍ자법자법상공(自法自法相空)ㆍ타법타법상공(他法他法相空) 등을 말한다. 

88) 팔방(八方)의 끝으로 우주(宇宙)를 말한다.

 

정유일(丁酉日)에 법사는 거듭 표(表)를 올렸다.

“사문 현장은 아룁니다. 엎드려 글을 받들고 생각해 보니 제가 외람되게도 폐하께 장유(奬喩)를 내리시게 한 듯합니다. 현장은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정밀하게 지켜서 더욱 떨치고 나아가겠습니다.

현장은 업행(業行)이 모자라고 박한데 어쩌다 잘못 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사표(四表)89)에 근심이 없는 시대에 중국[九瀛] 땅에 태어났고, 게다가 신령한 황제 폐하가 계셨던 덕분에 멀리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우리나라의 위력만을 믿고 도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험난한 고생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면서 비록 우매하나마 저의 정성을 다하긴 했지만, 그러나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고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아 저술하는 일은 모두 조정의 교화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인도에서 가지고 돌아온 경전을 번역하여 이에 두루마리 책[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경전에는 아직 서문[詮序]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밝은 사상을 구름처럼 펼치시어[叡思雲敷] 하늘 꽃이 밝게 흐드러지게[天花景爛]하셨습니다. 이치는『주역』의「계사(繫辭)」와「상전[象傳]」을 포괄하고, 조리[調]는 꽃봉오리를 이루었습니다. 천고(千古) 세월을 넘도록 명성을 날릴 것이며 백왕(百王)을 덮도록 결실(實)을 올릴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신력(神力)에 비할 수 없는 신은(神恩)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그 이치를 알 수 있으며 성교(聖敎)의 현원(玄遠)함과 성조(聖藻)가 아니었다면 어찌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황송하게도 위엄(威嚴)을 범하면서까지 감히 경전의 제목(題目)을 써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천자께서 깊고 먼 사려로 돌아보시어 기꺼이 허락을 내려 주시지 않으시어, 몸소 위무하시기를 그치신다면 서로 생각한들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현장이 듣기로는 일월(日月)이 하늘에서 빛나면 그 빛을 창문에까지 나누어 주며, 또한 강하(江河)가 땅에서 실오라기처럼 나와서는 그 윤택함을 바위 끝까지에 흘려보낸다고 합니다. 구름이 화합하듯 널리 퍼지는 즐거운[雲和廣樂] 울림을 귀머거리에게도 감출 수 없으며, 황금과 벽옥의 기이하고 진기한[(金璧奇珍] 그 광채는 봉사에게도 숨길 수 없습니다. 감히 이러한 이치에 인연하여 거듭 빕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은택의 비가 굽어 드리우고[雷雨曲垂] 천문(天文)이 굽어 비추시어, 오래도록 하늘과 땅을 짝하시어 해와 달과 함께 높이 비추어 주십시오. 그리 하시면 취령(鷲嶺)을 넘어 가지고 온 은미한 말씀[微言]이 신령스런 필력[神筆]을 빌려 널리 멀리 퍼질 것이며 계원(鷄園)90)의 오묘한 경전이 꽃처럼 아름다운 문장 덕분에 펼쳐질 널리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구구한 승려[梵衆]만 혼자 은택의 영광을 입으려는 것이겠습니까? 어리석어 미혹한 중생들도 티끌세상의 번뇌를 벗어나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89) 28수(宿)의 밖에 상ㆍ하ㆍ동ㆍ서가 각각 1만 5천 리로서 사유(四維)의 끝이 되는 곳을 말한다.

90) 중인도 마게타국(摩揭陀國) 파타리자성(波咤釐子城:Pāṭaliputra)에 있는 계원사(雞園寺)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계사(鷄寺)․계작사(鷄雀寺)․계림정사(鷄林精舍)․계작정사(鷄雀精舍)․계두말사

    (鷄頭末寺)․계마사(鷄摩寺)․계원승가람(鷄園僧伽藍) 등으로도 부른다. 아육왕(阿育王)이 건립한 

    것으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99권의 기록에 의하면 대천(大天)이 일찍이 이 절에서 

    출가하였는데, 후에 포살(布薩)을 할 때에는 높은 자리에 앉아 5사(事)의 망언을 하는 바람에 

    성범(聖凡) 양중(兩衆)이 밤새도록 쟁론을 벌이다가 왕이 절에 온 다음에야 겨우 다툼을 멈췄다고 

    한다. 그래서 상좌(上座)와 대중(大衆) 2부의 분열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아육왕이 일찍이 

    여기에서 천승(千僧)과 성범(聖凡) 양중을 소집하여 4사공양(事供養)을 베푼 곳이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윤허를 받았다. 정관(貞觀) 22년(648) 봄 천자는 옥화궁(玉華宮)91)에 행차하였고, 그 해 여름 5월 갑오일(甲午日)에는『유가사지론』1백 권의 번역이 끝났다.

그러자 황제는 6월 경진일(庚辰日)에 조칙을 내려 법사를 옥화궁으로 초청하였다. 법사가 절을 출발하여 옥화궁으로 가는 도중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서 법사가 피로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으라고 보살피게 하였다. 옥화궁에 이르러 천자를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면서 황제가 말했다.

“짐은 장안의 무더위가 고통스러워 이 산속의 궁[山宮]으로 옮겨왔소. 샘물과 바위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니 짐도 기력이 차츰 호전되어 이제 정사(政事)를 볼 수 있게 되었소. 그래서 법사가 생각나기에 사람을 보내 모셔 오도록 한 것이오. 걸어오시느라 고생이 컸을 것이오.”

법사가 말했다.

“사해(四海)의 백성들은 폐하께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폐하의 옥체가 편안하지 않으시면 온 천하의 백성들이 당황하여 걱정할 것입니다. 엎드려 듣자하니 폐하께서 이곳에 오신 후로 건강을 되찾으셨다니 온 백성들이 어느 누가 기뻐 춤추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목숨을 길이 보전하시고 숭고(嵩高)함이 하늘과 더불어 무궁무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용렬하고 박학한 재주에 외람되게 나이만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임무를 받들기에는 피로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91) 당초(唐初)의 이궁(離宮)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의군현(宜君縣) 서남쪽 50리에 있다. 

    당 고종(高宗) 때에 불사로 개조하였다.

 

황제는 법사가 학문이 해박하고 예의가 깊고 품격이 있으므로 늘 그에게 환속하여 자신의 옆에서 함께 조정(朝政)의 정사를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법사가 낙양궁(洛陽宮)에 가서 배알했을 때에도 직접 그런 말을 하였는데, 이번에도 천자는 또 말했다.

“옛날 요(堯)․순(舜)․우(禹)․탕(湯)과 같은 임금이나, 주(周) 나라를 번영케 하고 한(漢) 나라를 다스렸던 군주들도 천하를 위해 힘쓰지 않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정무라는 게 너무 광범위하고 일이 많은 것이라 나의 두 눈으로는 두루 볼 수가 없고 한 사람의 마음으로는 살피기가 어려운 것이오. 

그래서 주(周) 나라는 10란(亂)92)에게 의뢰하고, 순(舜) 임금은 5신(臣)93)에게 맡겨서 조정을 돕게 하고 나라를 보필케 하였던 것이오. 

그런 명왕(明王)과 성주(聖主)도 오히려 여러 현인(賢人)들의 도움을 받았었는데, 하물며 짐 같이 과문한 사람이 사리에 밝은 여러 현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짐의 뜻은 법사가 비구[須菩提)의 먹물 들인 법복을 벗고 유마힐(維摩詰)94)의 평상복[素衣]을 걸치기를 바라오. 삼공(三公)의 반열에 올라 방법과 계책을 펴고 조정에 앉아 도를 논해주기를 바라오. 법사의 뜻은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다스리는 정무가 많아서 3황(皇)95)과 5제(帝)96)같은 임금도 혼자서는 다스릴 수가 없어 여러 현철(賢哲)들과 함께 정사를 이끌었다고 하셨습니다. 

공자(孔子) 또한 말하기를 ‘임금이 잃은 것을 신하가 찾게 해준다. 그러므로 임금은 원수(元首)이고 신하는 팔과 다리인 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은 중용(中庸)의 평범한 사람에 대한 말이지 높은 지혜를 가진 상지(上智)를 위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신하만 있으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걸(桀)97)이나 주(紂)98)같은 포악한 임금은 신하가 없었다는 말이옵니까? 이로써 미루어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줄 압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상지(上智)의 임금이시니 혼자서도 능히 만사의 기강을 스스로 풀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천운(天運)을 따라오시어 천지가 태평하고 나라 안과 밖이 다 평안합니다. 

이는 모두 폐하께서 거칠지 않으시고 음란하지 않으시며 화려하지도 않으시고 사치하지도 않으시고,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쉴 때에도 쉬지 않으시고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시어 선(善)을 행함이 하늘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아니면 다른 어떤 분이 이러하겠습니까? 

두세 가지의 사례를 논하여 밝혀 보게 해주십시오.

폐하께서는 팔굉(八紘)을 다스리는 지략(智略)과 영웅호걸을 호령하는 재주를 가지고 계시며, 화란(禍亂)을 평정하신 공과 옹희(雍熙)99)의 업(業)을 높이고 넓힌 덕이 있으며, 총명하고 도덕을 갖춘 덕과 체원(體元) 합극(合極)하시는 자태 등을 가지셨으니, 이것은 모든 하늘이 주신 것이요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첫째의 뜻입니다.

근본을 돈독히 하시고 말단은 버리시며 인(仁)을 숭상하고 예(禮)를 존중하시어, 말세의 경박한 풍속을 없애시고도 선정(善政)을 상황(上皇)에게 돌리셨습니다. 세금 제도를 약하게 하고 형벌 규정을 가볍게 하시어 구주사해(九州四海)에 사는 중생이면 누구나 다 그 은혜를 입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이것도 또한 성심(聖心)의 지극히 아름다운 교화 때문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의 뜻입니다.

지극한 도[至道]는 두루 통하게 되어 있고 어짊이 깊으면 멀리서도 은택을 입습니다. 동쪽으로는 일역(日域)100)을 넘고 서쪽으로는 곤구(崑丘)101)를 지나고 남쪽으로는 염주(炎洲)102)에 미치고 북으로는 현새(玄塞)103)까지 다했습니다. 그리고 고리를 만들어 코에 걸고 다니는 풍속을 가진 사람들이나 초복(草服)104)을 입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左衽]105) 백성들까지도 폐하의 교화와 교육을 바라여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며, 진귀한 보배를 공물로 바치고 영토마저 맡기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천제의 위엄에 감복해서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니옵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의 뜻입니다.

오랑캐[獫狁]들이 환난을 일으킨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입니다. 오제(五帝)도 그들을 신하로 삼지 못했고 삼왕(三王)도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수와 낙수[河洛] 일대를 피발(被髮)106)한 오랑캐의 들판으로 만들었으며, 풍호(酆鄗)107)를 화살이 날아다니는[鳴鏑] 땅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은 차츰 쇠퇴해지고 흉노(凶奴)가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은주(殷周) 이래로 그

들을 물리치지 못하다가 한 무제(漢武帝)가 병력을 거느리고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108)과 함께 힘을 다하여 그나마 지엽적으로 수습은 되었으나 본거지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는 좋은 계책을 듣지 못했었는데, 폐하께서 직접 도모하시게 되어 한 차례의 원정으로 이를 섬멸하시고 소굴까지 파헤쳐서 다시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한해(澣海)와 연연(燕然)109)의 땅은 모두 중국 영토로 들어왔으며 화살 들고 말 달리던 북방의 유목민들도 모두 폐하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위업이 신하로 비롯된 것이라면 우하(虞夏) 이래로 현명한 신하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찌하여 정벌을 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도(道)가 있어야 얻어지는 것이지 남에게서 빌려 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의 뜻입니다.

고려(高麗)라는 작은 오랑캐 나라는 중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서 수(隋) 나라 양제(煬帝)가 천하의 대군을 통솔하여 세 번이나 친히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성(城)을 공략하여도 성첩(城堞)을 반도 부수지 못하고 들판을 공략하여도 사람 하나도 잡지 못한 채, 헛되이 6군(軍)만 잃고 낭패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짧은 기간에 수만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가셔서 주필(駐蹕)110)의 강력한 진영을 꺾고 요동(遼東)의 철통같은 성을 쳐부수어, 군대의 위엄을 떨치며 개선하셨으며 끌고 온 포로도 3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병사를 사용하는 일이나 장수를 부리는 그 길이 다르지 않은 것이기에 수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망하고 당나라는 큰 전과(戰果)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폐하의 힘에 의한 것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의 뜻입니다.

그리고 천지가 태평하니 해와 달이 화려하게 빛나고 화기(和氣)가 가득하니 경사의 구름이 피어오릅니다. 오령질(五靈質)111)이 나타나는가 하면 일각수(一角獸)112)도 나타나고, 그 밖에 흰 이리[白狼]와 흰 여우[白狐]와 붉은 난새[朱鸞]와 빨간 풀[朱草] 등이 수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상서가 나타난 것도 모두 천자의 덕(德)에 감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남에게서 빌린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전왕(前王)에 비유하면서 10란(亂)의 공(功)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으나, 생각해 보면 폐하를 위해 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설령 사람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윤(伊尹)113)과 여상(呂尙)114) 만큼이나 현명한 신하들이 많이 있는데 저같이 용렬한 사람이 어찌 정사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불문(佛門)에서 계를 지키고 불법을 선양하는 것이 저의 원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자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끝내 저의 소원을 저버리지 마소서. 

92) 난(亂)은 치(治)의 뜻으로, 주 무왕(周武王)에게 난신(亂臣) 10인이 있었다고 한다.『서경(書經)』 

   「태서(泰誓)」에 나온다.

93) 우(禹)ㆍ직(稷)ㆍ계(契)ㆍ고요(皐陶)ㆍ백익(伯益)의 5신을 말한다.

94) 보통 유마(維摩)라고 부른다. 범명은 Vimalakīrti인데 음역하여 비마라힐리제(毘摩羅詰利帝)

     라고도 한다. 또 비마라힐(毘摩羅詰)ㆍ무구칭(無垢稱)ㆍ정명(淨名)ㆍ멸구명(滅垢鳴)이라고도 

    한다. 불타의 재가(在家) 제자이며 중인도 비사리성(毘舍離城)의 장자이다. 

95)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세 명의 임금으로, 천황씨(天皇氏)ㆍ지황씨(地皇氏)ㆍ인황씨(人皇氏)로 

    보는 설과 수인씨ㆍ복희씨ㆍ신농씨로 보는 설이 있으며, 복희씨ㆍ신농씨ㆍ황제(黃帝)로 보는 설 

    따위의 여러 학설이 있다. 

96)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聖君).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을 이르는데, 

    소호 대신 황제(黃帝)를 넣기도 한다. 

97) 걸은 하(夏) 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극도로 포악하였다. 은(殷)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대명사가 되었다.

98) 은(殷) 나라 주왕(紂王)은 하(夏) 나라 걸왕(桀王)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포악무도(暴惡無道)한 

    임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99) 나라 전체를 화락하게 하는 정치로 요순시대의 정치를 찬양하는 말에서 연유되었다.

100) 일역은 극동(極東) 지역으로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다.

101) 곤륜(昆侖), 곤산(崑山)이라고도 한다. 신비를 간직한 산으로 전하는 말로는 황하(黃河)의 

     근원이라고도 하고 아뇩달지(阿耨達池)가 있다고도 한다. 혹은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으로 

     서주(西周) 목왕(穆王)이 서왕모를 방문하여 요지(瑤池)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도 한다. 이 산은 

     천지의 중심으로 진귀한 보배와 황금이 많이 나며, 5백 나한이 산속의 굴에서 산다고 한다. 

     혹은 아뇩달왕(阿耨達龍王)이 여기에 산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선종(禪宗)에서는 불법의 

     내면과 근본을 나타내기도 한다.  

102) 도교에서 말하는 전설 속의 신선이 산다는 곳을 말한다.

103) 장성(長城)을 말한다.『문선(文選)』조식(曹植)의「구자시표(求自試表)」에 “서쪽으로는 

     옥문관을 바라보며 북으로 장성을 나선다[西望玉門,北出玄塞]”라는 구절이 있다.

104) 농부나 촌로의 복장을 말한다.

105)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 중국과 다른 풍습을 가진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방 민족을 

     비하하는 말이다.『서경(書經)』「주서(周書)」필명편(畢命篇)에 나온다. 좌몌(左袂), 

     피발좌임(被髮左衽)이라고도 한다. 

106) 머리를 늘어뜨린다는 뜻으로, 피발좌임(被髮左衽)의 준말이다.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킨다. 

107) 중국 협서성 하북의 한 부(部)이다.

108) 서한(西漢) 무제(武帝) 때의 명장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말한다. 둘 다 무제 때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109) 산 이름이다. 후한(後漢) 영평(永平) 원년(元年)에 두헌(竇憲)이 북선우(北單于)를 격파하고 

     이 산에 올라 비석을 새겨 공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이때 반고(班固)가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지었다.『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몽고이다.

110) 임금이 거둥하는 중간에 어가(御駕)를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것을 말한다.

111) 기린(麒麟)과 봉황(鳳凰)과 거북[龜]과 용(龍)과 백호(白虎)를 말하는 것으로, 이 다섯 가지 

     신령한 동물은 왕의 상서로움을 뜻하는 것이다. 

112) 기린(麒麟)을 가리킨다.

113) 은나라 탕왕(湯王) 때의 명재상이다.

114) 주나라 문왕의 명신이다.

 

황제가 몹시 기뻐하며 법사에게 말했다.

“법사께서 앞에 말한 일들은 모두 하늘이 도움을 내린 덕분이며, 아울러 종묘의 영(靈)과 신하들의 공이오. 짐 혼자서 어찌 그렇게 이룰 수 있었겠소. 법사께서 이렇게 오묘한 도[妙道]를 선양하겠다고 하니 이것 역시 높은 뜻을 품은 것이 틀림없소. 부디 노력해주시오. 짐도 오늘 이후로는 법사를 도와서 불법을 널리 펴도록 하겠소.”

 

석언종(釋彦悰)은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재주는 내외(內外)의 학문을 겸하였고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대답하는 그 언변의 넉넉함이 이와 같았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옛날 도안(道安)이 간(諫)하였으나 부견(符堅)의 남정(南征)을 멈추게 하지 못했고, 도항(道恒)115)과 도표(道標)는 애써 사양하였으나 요흥(姚興)116)의 마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끝내 군대가 패망하는 치욕과 도망가 숨어 살아야 하는 고통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법사가 짧은 아론(雅論)으로 황제의 마음을 채워 맑은 황제의 마음을 더욱 깨끗하게 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뜻을 더욱 굳게 한 일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굳이 번거롭게 일월(日月)까지 끌어다 인용할 것도 없이, 그 우열을 알 수 있겠다.”

115)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 문하의 승려로, 그의 3천여 제자 가운데 도생(道生)ㆍ승조(僧肇)ㆍ

     도융(道融)ㆍ승예(僧叡) 등을 집문사철(什門四哲)이라 한다. 담영(曇影)ㆍ혜관(慧觀)ㆍ도항ㆍ

     담제(曇濟)를 4영(英)이라 불러 집문팔준(什門八俊)이라 한다.

116) 후진(後秦)의 임금(366-416)으로 남안(南安) 적정(赤亭), 즉 지금의 감숙(甘肅) 강(羌) 사람이다. 

     자는 자략(子略)이다. 아버지 요장(姚萇)이 부견(苻堅)을 배반하고, 관중(關中)을 거점으로 황제를 

     칭하였으니 이것이 후진(後秦)이다. 요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하고 옹(雍)․양(梁)․진(晉)․예(豫) 등을 다스리며 22년 간 재위하였다. 요흥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불교를 신봉하여 스스로 강경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구마라집을 장안(長安)으로 들이고 

     승도 수만 명을 모아서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때 중서령(中書令) 저수량(褚遂良)117)이 이렇게 아뢰었다.

“지금 사해(四海)가 넓혀지고 정비된 일[廓淸]과 구역(九域)이 편안하게 된 것은 모두 폐하의 성덕(聖德)이니, 법사의 말과 같습니다. 신(臣) 등은 자리만 채우고 있을 뿐이니, 해와 달 아래에서 빛을 내는 반딧불이나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좋은 가죽옷[珍裘]은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 밑의 가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큰 집은 반드시 많은 재목들이 모여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군주 혼자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법사께서는 자신의 곧은 지조를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짐을 칭찬했을 뿐이다.”

117)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596-658)로, 우세남(虞世南)ㆍ구양순(歐陽詢)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으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書風)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였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법사께서는 요즘 어떤 경론(經論)을 번역하고 계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요사이『유가사지론』의 번역을 마쳤는데 모두 백 권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논은 참으로 대작(大作)이라 하겠소. 어떤 성인(聖人)의 말씀이며 또 어떤 뜻을 밝힌 것이오?”

법사가 대답했다.

“이 논은 미륵보살의 설로서 17지(地)118)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황제가 또 물었다.

“무엇을 17지라 하는 것이요?”

법사가 대답했다.

“오식상응지(五識相應地)․의식상응지(意識相應地)․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무심유사지(無尋唯伺地)․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비삼마희다지(非三摩呬多地)․유심지(有心地)․무심지(無心地)․문소성지(聞所成地)․사소성지(思所成地)․수소성지(修所成地)․성문지(聲聞地)․독각지(獨覺地)․보살지(菩薩地)․유여의지(有餘依地)․무여의지(無餘依地)를 말합니다.”

여기서 법사는 대강의 제목[綱目] 만을 들어 대의(大義)를 늘어놓으며 설명하였다. 황제는 대단히 애정을 갖고 사신을 경사(京師)로 보내어『유가론』을 가져오게 하였다.

논이 도착되자 황제는 친히 자세히 열람하고는, 그 말의 뜻이 심원하여 지금까지 들어본 것과는 다르다고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은 불경을 보면 마치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법사가 이역(異域)에서 이처럼 뜻이 깊은 법을 얻어 왔는데, 짐이 요사이 군사 관련 국정이 바빠서 불교에 대해서 찬찬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경론을 보니 종지(宗旨)의 근원이 광대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다.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나 그 밖의 9류(流)119)는 여기에 비하면 마치 작은 연못을 바다에 비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유(儒)․불(佛)․도(道) 3교(敎)의 뜻이 일치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망령된 말이다.”

그리고 관리에게 명하여 비서성(秘書省)120)의 서수(書手)를 뽑아서 새로 번역한 경론을 필사하게 하여 9본(本)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옹(雍)․낙(洛)과 더불어 병(幷)121)․연(兗)122)․상(相)․형(荊)․양(楊)․양(凉)․익(益) 등 9주(州)의 각지에 보내 유통시켜서 전국토의 백성들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경론의 뜻을 알 수 있게 하였다. 

118) 17종의 경계를 말한다. 유가행(瑜伽行)을 닦을 때에 수행자의 행에 17종 경계가 있다는 말이다. 

     17종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ㆍ의지(意地)ㆍ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ㆍ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ㆍ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ㆍ삼마희다지(三摩呬多地)ㆍ비삼마희다지

     (非三摩呬多地)ㆍ유심지(有心地)ㆍ무심지(無心地)ㆍ문소성지(聞所成地)ㆍ사소성지(思所成地)ㆍ

     수소성지(修所成地)ㆍ성문지(聲聞地)ㆍ독각지(獨覺地)ㆍ보살지(菩薩地)ㆍ유여의지(有餘依地), 

     무여의지(無餘依地)이다.

119) 아홉 가지 학파로 유가(儒家)ㆍ도가(道家)ㆍ음양가(陰陽家)ㆍ법가(法家)ㆍ명가(名家)ㆍ

     묵가(墨家)ㆍ종횡가(縱橫家)ㆍ잡가(雜家)ㆍ농가(農家)를 말한다.

120) 도서와 문적(門籍)을 관장하는 관서이다.

121)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및 그 주변 지역을 말한다.

122)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연주(兗州) 및 그 주변 지역이다.

 

그때 사도(司徒) 조국공(趙國公) 장손무기와 중서령(中書令) 저수량 등이 아뢰었다.

“신 등이 듣기로는 불교는 공허하고도 현묘하여서 천인(天人)도 헤아리지 못하고 근본은 대단히 깊어서 입문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지극하신 도가 밝으시고 위광(威光)이 빛나시어 은택이 먼 세계까지 적시고 교화가 중토(中土)에 넘치었고, 5승(乘)123)을 옹호하시고 삼보(三寶)를 건립하셨기 때문에 법사를 얻게 되었습니다. 

불법이 쇠약한 이 시대에 자질이 빼어난 사람이 나오니, 천 년 동안에 한 번 나올 만한 인물입니다. 첩첩 험한 고개를 넘어서 경전을 구하러 떠났고 위험한 길을 걸어서 도를 찾아 떠났습니다. 진기한 풍속을 보았고 참된 경전을 갖추어 얻었습니다. 

그래서 귀국하여 번역한 것은 암원(菴園)124)에서 부처님이 처음 설하신 것과 같으며, 그 정교한 글의 깊은 뜻은 마치 부처님의 입에서 새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두 폐하의 성덕에 감응한 것입니다. 

신 등은 어리석음으로 눈이 멀었으나 이런 경전을 보고 듣게 되니 고해(苦海)의 파도에 허덕이고 있을 때에 의탁할 배를 만난 듯합니다. 그리고 천자께서의 자비로우심이 넓고도 멀어서 이제 구주(九州)에까지 펼치시어 어리석은 백성이 다 함께 묘법을 알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억 겁을 두고 만나기 어려운 일이라 이 깊은 행복을 이길 수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이것은 법사의 대비원력(大悲願力) 때문이고 또 공(公)들의 전생의 복으로 만난 것이지 짐 혼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오.”

123) 승(乘)은 범어 yāna를 번역한 것으로 도(道)․선(船)․거(車)를 가리키는 말로, 실어 나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이상적인 세계로 실어 나르는 5종의 법문을 5승이라고 

     부른다. 보통 인승(人乘, manuṣya- yāna), 천승(天乘, 범 deva-yāna), 성문승(聲聞乘, 범

     śrāvaka-yāna), 연각승(緣覺乘, 범 pratyeka-buddha-yāna), 보살승(菩薩乘, 범 bodhisattva- 

     yāna)을 가리킨다.

124) 암라수원(菴羅樹園), 즉 암라나무 숲에 지어진 정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제는 앞서 새로운 경전의 서문을 짓기로 허락하였으나 정무에 바빠서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법사가 다시 한 번 아뢰자, 마침내 황제는 붓을 들어 얼마 뒤에 완성하였다. 그리고「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라고 제목을 붙였다. 모두 781자로서 황제가 직접 필사(筆寫)하고 조칙을 내려 모든 경전의 머리에 놓게 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경복전(慶福殿)에서 백관(百官)이 배석한 가운데 법사를 좌정케 하고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125)인 상관의(上官儀)로 하여금 여러 군신들 앞에서 어제(御製)의 서(序)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노을빛이 비단결처럼 펼쳐진 것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법사를 찬양하는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125) 당초(唐初) 중앙에 홍무노간을 설립하고, 관 안에 학사(學士)를 두어 도서의 교정과 학생들의 

     지도를 맡게 하였다. 아울러 조정의 예의 제도 등의 수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대개 들으니 천지(天地)에는 법도가 있어서,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줌으로써 생(生)을 낳고, 4계절은 형체가 없으나 춥고 더운 날씨에 잠기게 함으로써 만물을 화육(化育)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을 살피고 땅을 거울로 삼으면 용렬하고 어리석은 무리도 모두 그 단서를 알게 될 것이지만, 음(陰)을 밝히고 양(陽)을 살피면 현철(賢哲)도 셀 수 없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천지(天地)가 음양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알기 쉬운 것은 형상이 있기 때문이며, 음양이 천지에 처해 있으나 알기 어려운 것은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상이 밝게 드러나서 징험할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미혹(迷惑)되지는 않고, 형상이 없어 보지 못하게 되면 지혜로운 자라도 오히려 미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불도는 빈[虛] 것을 숭앙하여, 유현(幽玄)하고 적멸(寂滅)한 것으로 널리 만물을 제도하고 시방(十方)을 전어(典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위엄 있는 신령[威靈]을 받들면서도 위[上]가 없고 신통한 힘[神力]으로 누르면서도 아래[下]가 없으니, 이를 크게 하면 우주에 가득 차고 작게 하면 털끝에도 용납된다. 그렇게 멸함도 없고 생함도 없어서 천겁(千劫)을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숨은 듯 나타난 듯도 하면서 백복(百福)을 실어 나른 지 지금까지 오래이다.

오묘한 법도[妙道]는 그윽하고 깊어서 그것을 따르려고 해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불법의 유전[法流]은 고요하고 깊어서 그것을 찾고자 하나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어리석고 용렬한 중생이라도 그 취지(趣旨)를 알기만 하면 능히 의혹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가르침[大敎]은 서방(西方)에서 터를 닦아 일어난 것으로, 한나라 조정[漢庭]으로 옮겨 와서 꿈126)을 밝히고 동쪽 땅을 비추어서 자비를 전하게 된 것이다. 옛적에 형상[形]이 나뉘고 종적[跡]이 나눠질 때, 언어는 달랐어도 교화는 이루어졌고 범상(凡常)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덕을 숭앙하여 따를 줄을 알았다. 

그러나 그림자를 감추어 진(眞)으로 돌아가고 위의(威儀)가 바뀌어[遷化]127) 세상을 초월함에 미쳐서, 금용(金容)은 색을 감추어 삼천(三千)세계에 광명을 비추지 않고 아름다운 존상[麗像]은 그림으로 공연히 32상(相)만을 만들어 냈다. 

이때에 은미한 말씀[微言]이 널리 퍼져 3도(途)128)에서 유정을 제도하고 남기신 가르침[遺訓]을 멀리 펴서 군생(群生)을 10지(地)129)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眞敎]은 우러르기 어려운 법이라 그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왜곡된 교학에 쉽게 따라서 사(邪)와 정(正)은 여기에서 얽혀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비었다느니[空] 있다느니[有]130) 하는 논란을 습관과 풍속에 따라 시비를 따지기도 하고, 대승과 소승도 잠깐씩 때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였다.

여기 이 현장 법사라는 사람은 법문(法門)의 영수(領袖)로서, 어려서부터 절개가 굳고 영민하여 일찍 3공(空)131)의 마음을 깨달았고 자라서는 신령스런 마음[神情]에 계합하여 먼저 4인(忍)132)의 행을 닦았다. 소나무를 건드리는 바람이나 물에 비친 달빛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에는 족히 비교할 수 없으며, 신선이 먹는다는 이슬이나 밝게 빛나는 구슬인들 어찌 그의 밝고 윤택함을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통달한 지혜는 얽매임이 없고 신령한 헤아림[神測]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 6진(塵)133)을 초월하여 멀리 나가서 홀로 천고(千古)를 마주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마음을 내경(內境)134)에 모아서 정법(正法)이 사라짐을 슬퍼하였고, 생각을 현문(玄門)135)에 두어 글에 오류가 있는 것을 깊이 개탄하였다. 또 생각은 항상 사물의 조리(條理)를 분석하여 이전에 들었던 견

문[前聞]을 넓히고, 거짓을 버리고 참됨을 이어서 후학(後學)의 길을 열어놓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음이 정토(淨土)로 날아가 서역(西域)에 유학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말을 채찍질하며 홀로 갔던 것이다. 쌓였던 눈이 날리는 새벽에는 눈 때문에 길을 잃고, 어지러운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저녁에는 쓸데없이 하늘 밖에서 헤매었다. 

만 리 밖 낯선 산천을 지나 구름 안개를 헤치고 그림자를 내몰아 나아갔고,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정성은 무겁게 여기고 수고는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심오한 법(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면서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정교(正敎)를 구하였다. 

쌍림(雙林)136)과 팔수(八水)137)에서 도풍(道風)을 음미하였으며, 녹원(鹿苑)과 취봉(鷲峰)에서 기이한 성적을 우러러보았다. 

선성(先聖)에게서 지극한 말씀[至言]을 이어받았고 상현(上賢)에게서 진교(眞敎)를 전해 받아서 묘문(妙門)을 탐색하여 오업(奧業)을 자세히 궁구(窮究)하였다. 

1승(乘) 5율(律)의 도로 마음 밭[心田]을 달리게 하고, 8장(藏)138) 3협(篋)139)의 글로 말씀의 바다[口海]에 파도를 일게 하였다.

그리하여 지나며 방문하는 나라들에서 삼장(三藏)의 요체가 되는 문장 657부를 가져왔다.

이것을 번역하여 중국[中夏] 땅에 펼쳐서 수승한 업적[勝業]을 선양하고, 자애의 구름[慈雲]을 서쪽에서 이끌어 와서 불법의 비[法雨]를 동쪽에 내리게 했다. 

성스러운 가르침[聖敎] 가운데 빠져 있었던 것을 다시 온전하게 채워 넣어서 창생(蒼生)의 죄를 복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불타고 있는 집[火宅]140)의 메마른 불길을 촉촉하게 적셔서 함께 미혹된길을 벗어나게 했으며, 애욕의 물에 이는 어두운 파도를 잠재워서 함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악은 업(業)으로 인하여 추락하고 선은 연(緣)으로 인해서 올라가니, 오르고 추락하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에게 달린 것임을 알겠다.

이것은 대개 계수나무가 높은 언덕 위에서 나서 구름과 이슬을 만나 그 꽃을 피우는 것이나, 연꽃이 푸른 물결 속에서 나왔기에 날라 다니는 티끌도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그것은 연의 성품이 스스로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성질이 본래부터 곧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고결하므로 미천한 물질들이 더럽히지 못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것이 깨끗하면 탁류(濁類)가 더럽힐 수가 없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지(知)가 없는 저 풀이나 나무도 선(善)의 도움을 받으면 선을 이룰 수 있는데, 하물며 식(識)이 있는 인륜(人倫)으로서 경(慶)에 인연하여 경을 이루지 못할 것인가.

이제 이 경전이 널리 유통되도록 보시하여 해와 달과 함께 다함이 없게 하고, 이 복덕을 멀리까지 펼치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히 커지기를 바란다.” 

126)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7년(62)에 명제는 밤중에 꿈속에서 금인(金人)을 보고 

     사신을 천축(天竺)으로 보내 불교(佛教)를 전수 받게 하였는데, 사신들은 월씨(月氏)국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사문을 만나 중국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그것이 

     중국에 불교가 전한 시초라는 설이 있다.  

127) 천화(遷化)를 줄여서 화(化)라고도 한다. 승려의 시적(示寂)을 가리키는 말로, 천이화멸

     (遷移化滅)의 뜻이다. 덕 있는 사람이 이 땅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인연이 다하여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고도 한다. 열반(涅槃)․원적(圓寂)․멸도(滅度)․순세(順世)․

     귀진(歸眞) 등과 같은 뜻이다.『속고승전(續高僧傳)』 14권에는 당대(唐代) 혜지(慧持) 법사가 

     임종할 때에, “나는 다른 곳에 가서 교화를 하련다[吾欲往他方敎化]”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28) 대승불교에서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의 세 길을 말한다.

129)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10지(地)라고 한다. 10지는 환희지

     (歡喜地)․이구지(離垢地)․발광지(發光地)․염혜지(焰慧地)․극난승지(極難勝地)․현전지(現前地)․

     원행지(遠行地)․부동지(不動地)․선혜지(善彗地)․법운지(法雲地)이다.

130) 공(空)과 유(有)를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막는 것을 공이라 하고, 세우는 것을 유라 한다. 

     유무(有無)와 같은 뜻이다. 제법(諸法)이 인연(因緣) 때문에 생겨나고 존재하므로 유라고 하고, 

     제법이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나지만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한다.

131) 언공(言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3해탈(解脫)이다. 이 세 가지는 다 공(空)의 이치를 밝힌 

     것이므로 3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132)『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1-4권「인법품(忍法品)」에서 말하는 네 가지 인(忍)을 

     말한다. 인(忍)이란 보살이 지혜로써 참을 수 있거나[忍可] 혹은 참으면서도 편안하다는[安忍] 

     뜻이다. 즉 보살이 수행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모욕과 방해를 만나도 성내는 마음을 갖지 않고, 

     혹은 고난을 만나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 인(忍)의 진리를 깨달으면 

     금계(禁戒)를 범하는 죄를 초월할 수 있다. 4인이란 무생법인(無生法忍), 무멸인(無滅忍), 

     인연인(因緣忍), 무주인(無住忍)을 말한다.

133)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6경(境)을 말한다.

134) 마음을 안의 경계(內境)와 밖의 경계(外境)와 구별할 때에, 내경은 곧 마음이 발생한 상분

     (相分)을 말하는 것이고 외경은 흔히 말하는 물질계의 경계를 말한다. 

135) 현문은 현묘한 법문이란 뜻으로 불교를 뜻한다.  

136) 부처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137)『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인도에는 8줄기의 큰 강이 있다고 한다. 긍하(恆河, Gaṅgā), 

     염마라하(閻摩羅河, Yamunā), 살라하(薩羅河, Sarabhu), 아이라발제하(阿夷羅跋提河, 

     Aciravatī), 마하하(摩訶河, Mahī), 신두하(辛頭河, Sindhu), 박차하(博叉河, Vakṣu), 실타하

     (悉陀河, Śīta) 등이 그것이다.『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3권「장수품(長壽品)」에 나온다.

138) 부처님께서 설한 성교(聖敎)를 8종으로 나누는데, 그 8종은 태화장(胎化藏)ㆍ중음장(中陰藏)ㆍ

     마하연방등장(摩訶衍方等藏)ㆍ계율장(戒律藏)ㆍ십주보살장(十住菩薩藏)ㆍ잡장(雜藏)ㆍ

     금강장(金剛藏)ㆍ불장(佛藏) 등이다. 혹은 대승과 소승에 각기 경․률․론․잡(經․律․論․雜) 등 

     4장이 있으므로 합하면 8장이 된다고도 한다.

139) 삼장(三藏)과 같다. 범어 비다가(比多迦, Pitaka)로, 장(藏), 혹은 협(篋)으로 번역한다. 

     경․률․론의 세 가지라고도 하고, 성연보(聲緣菩)의 세 가지라고도 한다.

140) 불가에서는 번뇌에 시달리는 이 속계(俗界)를 불타는 집, 즉 화택(火宅)으로 비유한다. 

    『법화경(法華經)』「비유품(譬喩品)」에 “편안치 못한 이 삼계, 불타는 집과 같도다.

     [三界無安 猶如火宅]”라고 하였다.

 

법사는 황제가 직접 지은 글을 받들고 나서 은혜에 감사하는 내용의 표문[表]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사물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기로는 6효(爻)141)가 깊은 이치를 담고 있으나 생멸(生滅)의 장(場)에 국한되어 있어, 온갖 물상[百物]의 이름을 바로잡는 데에는 진여(眞如)의 경지를 따르지 못합니다. 더구나 오래된 희책(羲冊)142)을 징험해 보더라도 오묘하다는 것만 볼 뿐 그 신령스러움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멀리서 헌도(軒圖)를 생각하오니 거듭 선별하여 아름다움으로 귀의하게 하소서.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옥호(玉毫)143)의 자질을 타고 나시어 금륜(金輪)으로 하늘을 제어하시고, 선왕(先王)의 구주(九州)144)를 넓혀서 모든 세상[日月]을 덮으셨습니다.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구역(區域)을 넓혀 항하수 모래 수[恒沙] 만큼 거대한 법계(法界)를 간직하시고, 드디어는 급원(給園)145)의 정사(精舍)를 중국[隄封] 안으로 들이시어 패엽(貝葉) 경전의 영험한 글[靈文]들을 모두 책부(冊府)로 귀속되게 하셨습니다. 

현장이 옛적에 이런 인연으로 석장(錫杖)을 떨치고 떠나 굴산(崛山)146)을 찾아뵈었던 것입니다. 오직 천자의 위엄[天威]을 믿었기에 만 리 먼 길을 마치 지척의 거리인 듯한 달음에 달릴 수 있었고, 천엽(千葉)147)에 타지 않아도 순식간에 쌍림(雙林)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삼장을 찾아다닐 때에는 용궁(龍宮)에 저장된 것을 모두 찾아냈고, 1승(乘)을 연구할 때에는 취령(鷲嶺)의 남은 종지[遺旨]를 다 궁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백마(白馬)에 싣고 돌아와 황제 폐하[紫宸]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폐하의 명령[下詔]을 받들어 그 책들을 번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장은 식(識)이 용수(龍樹)148)보살에게는 많이 떨어지는데도 어쩌다 잘못 전등(傳燈)의 영광에 끼게 되었고, 재주가 마명(馬鳴)과는 사뭇 다른데도 사병(瀉甁)149)의 총명함을 인정받았으니 심히 부끄럽습니다. 

번역한 경론은 오류가 매우 많은데도 불구하고 마침내 천은(天恩)을 입게 되어 마음에 두셨다가 서문까지 지어주셨습니다. 문장은『주역』「상전(象傳)」과「계사전(繫辭傳)」의 표현을 넘어섰고 이치는 온갖 신묘한 법문[門]을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미한 중생[微生]들로 하여금 홀연 범문의 메아리[梵響)를 직접 듣게 하셨으니, 마치 수기(受記)를 받든 것 같아 뛸 듯이 기쁠 뿐입니다. 참으로 무량한 이 기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삼가 표문[表]을 받들고 궁궐 앞으로 나아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141) 역(易)에서, 점괘(占卦)의 여섯 가지 획수를 가리킨다. 

142) 복희(伏羲)가 황하(黃河)에서 얻은 그림을「하도(河圖)」라고 하며, 이것에 의해 복희는 

    『역(易)』의 팔괘(八卦)를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 희책(羲冊)이라고 하는 것은 

    『주역』, 또는「하도(河圖)」의 의미로 보인다

143) 부처의 양 미간(兩眉間)에 있는 흰 털로서 그곳에서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는 광명을 

     발한다 한다. 부처의 32상호의 하나이다.

144) 중국 고대에 전국을 나눈 9개의 주를 말한다.

145)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을 말한다.

146) 중인도(中印度)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崛山)을 

     가리킨다.

147) 천엽이란 여러 겹으로 포개진 꽃잎의 연꽃, 즉 천엽연화(千葉蓮花)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48) 용궁에 들어가서 『화엄경(華嚴經)』을 송출(誦出)하였다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을 말한다.

149) 한 병의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그대로 다른 병에 쏟아 붓는다는 뜻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교법을 조금도 남김없이 전해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황제는 이 표를 보고 다시 직접 이렇게 편지를 썼다.

“짐의 글재주[才藝]는 출중하지 못하고 말솜씨[言]도 해박한 달변이 아니오. 더구나 불전(佛典)으로 말한다면 더욱이 배운 적이 없소. 그러므로 짐이 지난번에 쓴 서문은 매우 졸렬한 문장이어서, 공연히 훌륭한 책에 먹칠을 하여 더럽힌 것이나 아닌지, 구슬 더미 속에 기와나 벽돌을 던진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었소. 그런데 보내온 글을 받아보니 자못 칭찬이 

자자하여, 스스로 반성해보게 되어 더욱 얼굴이 뜨거워질 따름이오. 일부러 감사의 편지를 보내주어서 그 고마움 말로 다할 수 없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6권 6. 정관 19년 봄 정월 서경(西京)으로 돌아와 22년 여름 6월 임금이 지은 경서(經序)에 감사하여 답하기까지 정관 19년(645) 봄 1월 7일에, 경성유수(京城留守) 좌복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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