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師三藏法師傳)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수선님 2020. 12. 20. 11:58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5. 니건자(尼乾子)에게 귀국(歸國)에 관한 점을 친 때부 터 제성(帝城)의 서조(西漕)에 이르기까지

 

구마라왕(鳩摩羅王)1)의 사신이 오기 전이었다.

맨몸을 드러낸 벌사라(伐闍羅:Vajra)라고 하는 한 니건자(尼乾子)2)가 갑자기 법사의 방으로 찾아왔다. 법사는 전부터 니건자들이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있었으므로 자리에 앉게 하고는 즉시 의문되는 것을 물었다.

“나는 지나국(支那國) 승려입니다. 이곳에 와서 공부하다 보니 세월이 많이 흘러서 지금 귀국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떠나는 것과 여기 머무는 것 중에 어느 길이 더 좋은지, 그리고 수명이 긴지 짧은지에 대해 그대가 점을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니건자는 흰 돌 한 개를 찾아오더니 땅에다 그림을 그리면서 점을 치고 나서 법사에게 말했다.

“법사께서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매우 좋을 것입니다. 5인도(印度)의 승려들과 속인들 모두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귀국하신다 해도 무사할 것이고 역시 존경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계시는 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법사님의 수명은 지금부터 10년 남았습니다만, 만약 복(福)을 넉넉히 쌓으신다면 더 사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다시 물었다.

“마음으로는 귀국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경전과 불상이 이렇게 많으니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니건자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계일왕(戒日王)과 구마라왕께서 사람을 보내 법사님을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돌아가실 수 있으며 수고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법사가 말했다.

“그 두 왕과는 아직까지 안면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은혜를 내리신단 말입니까?”

니건자가 말했다.

“구마라왕께서는 이미 사신을 보내 법사님을 모셔오도록 했으니 2~3일 내로 도착할 것입니다. 구마라왕을 뵙게 되면 반드시 계일왕도 뵙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는 떠나갔다.

1) 카마루파국의 왕으로 자(字)는 일주(日胄:Bhāskara-varman), 호(號)는 구마라(拘摩羅)이다.

계일왕과 연합하여 설상가왕(設賞迦王)을 멸망시켰다. 뒤에 현장의 단월(檀越)이 되어

그 나라에 초빙하였다.

2) 노형니건자(露形尼乾子), 즉 노형외도(露形外道)를 말한다. 남아시아의 종파 가운데 하나로,

니건자는 이 종교의 신도들을 부르는 칭호이다. 이 종파의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고 맨몸을

드러내고 다녔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법사는 귀국할 생각을 굳히고 많은 경전과 불상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대덕(大德)들이 알고는 찾아와서 더 머물기를 권하며 말했다.

“인도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입니다. 대성(大聖)께서는 비록 가셨지만 유적은 모두 남아 있습니다. 이곳저곳 순례하시면서 평생을 즐겁게 보내시면 되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오셨다가 다시 떠나려 하십니까?

또 지나국은 멸려차(蔑戾車)로서 성인을 경시하고 불법을 천하게 여기므로 모든 부처님이 태어날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좁고 매우 추악하므로 성현(聖賢)은 그런 곳에 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다 기후도 차고 땅도 험준한데 왜 그런 곳을 그리워하십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교의(敎義)를 세우신 것은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마음속으로만 만족을 얻고 깨닫지 못한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나국은 의관(衣冠)이 엄숙하고 위의(威儀)가 있으며 법도(法度)를 잘 준수하는 나라입니다. 임금은 성스럽고 신하는 충성하며,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를 다합니다. 인의(仁義)를 귀하게 여기고 연장자와 현인을 받들며 숭앙하는 나라입니다. 게다가 뜻은 도심(道心)을 밝히고 지혜는 신(神)과 계합되었으며 천체(天體)를 본받아 법칙을 만들었으니, 칠성(七星)의 빛남도 그 문화를 덮을 수 없습니다. 기계를 설치하여 시간을 재므로 여섯 가지 음률[六律]3)의 관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나 짐승을 이용해 귀신이 감응하여 오게 하고, 음양(陰陽)을 알아서 만물을 이롭고 편안하게 합니다.

부처님의 법이 중국에 들어오자 모두 대승(大乘)을 믿어서 마음이 안정되기가 맑고 깨끗한 물과 같으며, 계(戒)를 지키는 공덕의 향기가 사방에 가득합니다. 발심(發心)하고 행하여 10지(地)의 공력과 같기를 원하고, 단정히 수행하고 연마하여 3신(身)4)에 이르는 것을 궁극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大聖)께서는 강령(降靈)하시어 친히 법화(法化)로 부르시니 귀로는 묘설(妙說)을 듣고 눈으로는 금용(金容) ='5)을 뵙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마가 길거리에 이어져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어찌 부처님께서 그곳에 가시지 않았다고 가볍게 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그렇지만 경전에도 ‘여러 하늘은 그 복덕에 따라서 먹는 것도 다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법사께서는 이 섬부(贍部)6)에 계시고 부처님께서도 이곳에서 출생하셨고 중국에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좋지 않은 변방 땅이라 한 것입니다. 중국 땅은 이미 복이 없기 때문에 돌아가시기를 권하지 않는 것입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무구칭(無垢稱)은 ‘저 태양은 어찌하여 섬부주(贍部洲)로 가는가?’ 하는 물음에 ‘그것은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귀국하려는 생각도 이런 뜻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3) 12율(律) 중의 양음(陽音)에 속하는 황종(黃鐘)ㆍ태주(太簇)ㆍ고선(姑洗)ㆍ유빈(蕤賓)ㆍ

이축(夷則)ㆍ무역(無射)을 말한다.

4) 불신(佛身)을 3종으로 구분한 것으로, 논의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써 설명된다. ①자성신

(自性身)ㆍ수용신(受用身)ㆍ변화신(變化身). ②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 ③법신

(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 ④진신(眞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 ⑤법신(法身)ㆍ

지신(智身)ㆍ대비신(大悲身). ⑥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

5) 부처님의 황금빛 얼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6) 수미산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인간 세계를 가리킨다.

 

여러 대덕들은 이미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 부르며 계현 법사에게로 가서 자세히 법사의 뜻을 전하니 계현 법사는 법사를 불러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뜻을 정했는가?”

법사가 대답했다.

“이 나라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니 어찌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여기에 온 뜻은 대법(大法)을 구하여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저는 스승님의『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가지 의심을 풀었으며, 성적(聖跡)도 순례하며 친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部)의 심오한 학설을 듣고 제 마음은 즐겁고 행복하니 참으로 헛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중국에 돌아가서 제가 들은 것들을 번역하여 인연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듣고 보게 해서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계현 법사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보살의 마음이다. 내 마음에도 역시 그대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그대 역시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그대 생각대로 어서 짐을 꾸리도록 하게. 모두들 억지로 만류하지 말도록 하여라.”

말이 끝나고 법사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서였다. 동인도의 구마라왕이 보낸 사신이 친서를 받들고 와서 계현 법사에 드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지나국의 대덕을 뵙기를 원합니다. 바라건대 법사를 보내주어 나의 흠모하는 마음에 위로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계현 법사는 이 편지를 보고 대중에게 말했다.

“구마라왕이 현장 법사를 초빙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계일왕(戒日王)에게로 가서 소승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기로 되어 있다. 만약 지금 구마라왕에게로 가고 난 다음에 갑자기 계일왕의 편지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 법사를 보낼 수는 없다.”

그리고는 사자에게 말했다.

“지나국의 승려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니 왕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신이 왕에게로 돌아가 그대로 아뢰자 다시 보내어 이렇게 청했다.

“법사께서 꼭 귀국하려 하신다면 잠시 내가 있는 곳을 들렀다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시어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계현 법사는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구마라왕은 대단히 화가 나서 세 번째 사신에게 편지를 보내어 계현 법사에게 전했다.

“나는 범부로서 세상의 쾌락에만 물들어 불법으로 마음을 돌릴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외국의 승려 이름을 듣고 신심(身心)으로 기뻐하며 겨우 도의 싹이 돋아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현 법사께서는 다시 그분이 오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중생들로 하여금 길이 암흑 속에 빠져 있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어찌 대덕(大德)께서 불교의 유법(遺法)을 이어 융성하게 하고, 만물을 이끌어 포용하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애타게 우러르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오니 삼가 거듭 보내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나는 본래 악인입니다. 근래 설상가왕(設賞迦王)은 불법을 파괴해 버리려고 보리수를 잘라냈다고 합니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법사께서는 내가 그럴 만한 힘이 없다고 보십니까?

반드시 잘 훈련된 코끼리 군대를[象軍]을 이끌고 구름처럼 그곳에 쳐들어가 나란타 절을 짓밟고 부수어서 티끌로 만들겠습니다.

이 말은 태양과 같이 분명하니 법사께서는 잘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계현 법사는 편지를 읽고 법사에게 말했다.

“저 구마라왕에게는 본래 선심(善心)이 없어 나라에도 불법이 성하지는 않는 편이오. 그러나 왕은 법사의 이름만 듣고 깊은 발심을 낸 것 같소.

그러니 그대와는 어쩌면 숙세(宿世)의 좋은 벗[善友]이었을지도 모르겠소. 가도록 노력해 보시오.

출가는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본분인데,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럴 때라고 믿소. 지금 해야 할 일은 비유하자면 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소. 만약 뿌리를 자르면 가지와 이파리도 저절로 말라죽어 버릴 것이오. 그 나라에 가서 왕을 발심하게 한다면 백성들도 따라서 교화될 것이지만 만약 명을 어기고 가지 않는다면 혹 불길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조금의 수고를 귀찮게 생각하지 마시오.”

 

그래서 법사는 사신과 함께 나란타 절을 떠나 그 나라에 이르렀다.

왕은 법사가 오는 것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마중 나와 예배하고 찬탄하였다. 법사를 데리고 왕궁으로 들어가서 매일 음악과 음식과 향화(香花)를 공양했으며, 모든 공양이 끝나면 청하여 재계(齋戒)를 받곤 했는데, 이렇게 한 달이 지났다.

 

한편 계일왕은 공어다국(恭御陀國)을 정벌하고 돌아왔는데, 법사가 구마라왕의 처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면서 말했다.

“내가 전에 그렇게 청해도 오지 않더니 지금은 어째서 구마라왕에게로 갔다는 말인가?”

그는 구마라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급히 지나국 승려를 보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마라왕은 법사를 매우 존경하고 연모하는 정이 깊었기에 법사를 떠나보낼 수 없어서 사신에게 말했다.

“나의 머리를 가져갈 수 있을지언정 법사는 보낼 수가 없다.”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니 계일왕은 크게 진노하여 시신(侍臣)에게 말했다.

“구마라왕은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 어찌 한 승려 때문에 이런 거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다시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였다.

“당신이 머리는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다. 즉시 사신에게 그 머리를 주어 가져오도록 하겠다.”

 

구마라왕은 자신의 실언에 대해서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즉시 명을 내려 상군(象軍) 2만과 배 3만 척을 이끌고 법사와 함께 출발하여 긍가강을 건너 왕의 처소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갈주올기라국(羯朱嗢祇羅國)7)에 이르렀을 때 마침 왕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구마라왕은 출발하기에 앞서 사람을 시켜 긍가강의 북쪽 언덕에 행궁(行宮)을 짓게 하고, 이날 강을 건너 행궁에 법사를 모셔 놓은 다음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강 남쪽 언덕에 있는 계일왕을 만나러 간 것이다.

계일왕은 구마라왕이 온 것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구마라왕이 법사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 한 말에 대해서는 문책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물었다.

“지나국의 승려는 어디에 있소?”

구마라왕이 대답했다.

“나의 행궁에 있습니다.”

계일왕이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 오지 않았소?”

구마라왕이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현인을 흠모하고 도를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어찌 법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왕을 뵙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계일왕이 말했다.

“좋소. 돌아가 있으시오. 나는 내일 직접 가겠소.”

7) 지금의 인도 남부 나지마하르 지역이다.

 

구마라왕이 돌아와서 법사에게 말했다.

“왕이 비록 내일 오겠다고 말했지만 아마 오늘 밤에 올 것 같습니다. 감시병을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만약에 대왕이 온다 해도 법사께서는 가만히 계십시오.”

법사가 말했다.

“나는 불법의 이치로 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밤 1경(更)이 되자 과연 계일왕이 오고 있었다.

감시병이 보고했다.

“강 가운데 수천 개의 횃불이 보이고 사람소리와 북소리도 들립니다.”

구마라왕이 말했다.

“계일왕이 왔구나.”

즉시 불을 밝히게 하고 친히 여러 신하들과 함께 멀리 나가 맞이했다.

 

계일왕이 행차할 때에는 언제나 금고(金鼓) 수백을 거느리는데,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북을 한 번 치게 했으니 이것을 절보고(節步鼓)라 불렀다.

이것은 오직 계일왕에게만 국한되고 다른 왕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였다.

계일왕이 도착하자 법사의 발에 절을 하고 꽃을 뿌리며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한없이 칭송하고 찬탄한 뒤 법사에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법사님을 청했는데 어찌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내가 먼 곳에서 와서 불법을 연구하는 것은『유가사지론』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대왕의 명을 받았을 당시에는 청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왕명에 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법사께서는 지나국에서 오셨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진왕(秦王) 파진악(破陣樂)8)과 가무곡(歌舞曲)이 있다 하는데 진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어떤 공덕이 있기에 그토록 칭송을 하는 것입니까?”

법사가 말했다.

“나의 나라에서는 성현(聖賢)의 덕을 사모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하여 흉한 일과 포악한 자들을 제거하여 백성을 널리 윤택케 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는 종묘(宗廟)의 음악에서부터 아래로는 길거리에서 부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를 위해 노래 부르고 찬양합니다.

진왕이란 지금 지나국의 천자(天子)입니다. 그가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진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 당시 중국은 천하가 시끄럽고 군주도 없이 정치가 문란하였습니다. 들판에는 사람의 시체가 쌓이고 냇가와 골짜기는 사람의 피로 물들었으며, 괴이한 별[星]들이 밤이 되면 모여들고 악기(惡氣)는 아침이 되면 응결되곤 했습니다. 3하(河)9)는 탐욕에 찬 돼지[封豕]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사해(四海)는 장사(長蛇)의 독(毒)에 곤욕을 당하고 있습니다10).

이때 왕은 제(帝)의 아들로서 천자의 명에 따라 무기를 정돈하여 각지를 전전하면서 악당의 괴수를 죽이고 병사를 지휘하여 천하를 숙청하고 온 세상을 평정하여 다시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빛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백성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여 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곧 하늘이 보낸 만물의 주인이다.”

그리고 법사에게 말했다.

“저는 이만 돌아갔다가 내일 법사님을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동안 편히 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돌아갔다.

8) 당 태종(唐太宗) 때 만들어진 악무(樂舞)의 이름으로,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유무주

(劉武周)를 쳐부순 공을 기리기 위하여 군중(軍中)에서 만든 악곡(樂曲)이다. 칠덕무(七德舞)

라고 한다.

9) 중국의 하남(河南)ㆍ하동(河東)ㆍ하북(河北)을 가리킨다.

10) 장사는 뱀이고 봉시는 돼지인데, 잔인하고 탐욕이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또는 그런 부족으로

오랑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좌전』의 “오가 장사 봉시가 되어 상국을 거듭 잠식한다

[吳爲封豕長蛇荐食上國]”에서 따온 말이다.

 

다음날 아침 사신이 찾아왔다. 법사는 구마라왕과 함께 떠나 계일왕의 행궁(行宮) 가까이에 이르자 왕이 승려 20여 명과 함께 마중 나왔다. 행궁으로 들어가 앉자 진수성찬을 베풀고 음악을 울리고 꽃을 뿌리며 공양한 뒤 왕이 물었다.

“들으니 법사께서『제악견론(制惡見論)』을 지으셨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법사가 책을 내밀자 한참동안 읽어 보더니 대왕은 매우 기뻐하며 승려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햇빛이 나면 반딧불과 등불은 빛을 잃고, 천둥이 울리면 망치나 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종지(宗旨)는 이것으로 모두 논파되었다. 여러분들 중에 논을 구제할 자가 있겠는가?”

여러 승려들 가운데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왕이 말했다.

“여러분들의 상좌(上座)인 제바서나(提婆犀那:Devasena)는 자신의 해석이 군영(群英)에서 으뜸이고 모든 철학의 핵심이라며, 앞장서서 이견(異見)을 내세워 대승을 논파하겠다고 항상 말해왔다.

그런데 중국의 대덕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폐사리(吠舍釐)로 가서 성적(聖跡)을 순례한다는 핑계로 도망가고 말았다. 이로써 여러분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알겠다.”

 

대왕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정량부(正量部)11)의 뜻에 정통했다. 대왕의 누이가 왕의 뒤에 앉아 있다가 대승의 종지는 심오하고 광대하며 소승의 가르침은 좁고 얕다는 법사의 서론(序論)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말했다.

“법사의 논은 매우 훌륭하오. 나와 이 자리의 여러 승려들도 모두 믿어 굴복하였소. 그러나 다른 나라의 소승 외도들이 아직도 우매한 것을 믿고 있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이제 곡녀성(曲女城)12)에서 법사를 위해 큰 법회를 열 것이니, 5인도의 사문과 바라문과 외도 등에게 대승의 미묘한 이치를 가르쳐 주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마음을 끊고 법사의 성덕을 높이 현양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아만심을 꺾어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날로 조칙을 내려 여러 나라의 논사들에게 곡녀성에 모여 지나국 법사의 논을 듣도록 하였다.

법사는 초겨울에 대왕과 함께 긍가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12월에 법회장에 도착했다.

5인도 가운데 18개국의 왕이 참석했고, 대승과 소승에 통달한 승려 3천여 명과 바라문과 니건외도(尼乾外道)13) 2천여 명이 참석했다. 그리고 나란타 절의 승려 1천여 명도 참석했다.

11) 소승 20부파의 하나이다. 독자부로부터 갈라져 나온 4부 중의 하나로, 교의는 대체로 독자부와

같고,『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이 있다.

12) 고대 중인도에 자리했던 도성의 이름이다. 7세기경에 계일왕(戒日王)이 중인도 일대를 통치할

당시에 도읍으로서 융성했으나, 계일왕이 죽은 뒤에는 점차 쇠미해졌다. 현장 스님이 방문했을

당시의 정황이『서역기』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서역기』에 따르면, 그 당시 곡녀성은

무역의 중심지로서 외국 물품이 풍부하였고 사람들의 생활도 넉넉하였으며, 불교도와 이교도의

수는 비슷하였고 불교와 관련된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3) 6사 외도 중 한 사람인 니건타(尼犍陀)를 줄여 부르는 말이다.

 

이들 여러 현승(賢僧)들은 모두 문의(文義)에 두루 통달하고 변론에 능한 사람들이었는데, 법사의 덕음(德音)을 듣고자 모두 다 법회장으로 온 것이다. 거기에다 수행원도 있었고, 혹은 코끼리나 가마나 당기[幢]나 번기[幡]들이 법회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높이 솟아오른 깃발들이 마치 구름이 일듯 하고 안개처럼 퍼져서 수십 리 길을 가득 메웠다.

비록 육제(六齊) 사람들의 옷소매를 모아 천막을 만들고, 삼오(三吳) 사람들이 땀을 뿌려 비[雨]를 만든다 해도 이 같은 광경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왕은 미리 법회장에다 두 개의 초전(草殿)을 지어 한 곳에는 불상을 안치하고 한 곳에는 사람들이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미 다 완성되어 있었다.

그 초전은 굉장히 넓어서 각각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

 

7왕의 행궁은 법회장에서 4~5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날마다 행궁 안에다 금불상 1구(軀)를 만들어 큰 코끼리 위에 보장(寶帳)을 쳐 놓고 그 안에 안치하였다.

계일왕은 제석천(帝釋天)의 형상으로 치장하고 손에 흰색 불자[白拂]를 든 시종을 오른편에 세웠으며, 구마라왕은 범왕(梵王)14)의 형상으로 치장하고 보개(寶蓋)를 든 시종을 왼편에 세웠다. 그들은 모두 천관(天冠)과 꽃다발을 쓰고 패옥(佩玉)의 띠를 드리우고 있었다.

또 두 마리의 큰 코끼리를 장식하여 보화(寶花)를 싣고 불상(佛像)의 뒤를 따르면서 뿌리게 했다. 그리고 법사와 문사(門師)15) 등은 각기 큰 코끼리를 타고 왕의 뒤를 따르게 했다. 또 3백 마리의 큰 코끼리에 여러 나라의 왕과 대신과 대덕 등을 타게 하여 길옆으로 줄지어서 찬미하며 행진하게 했다.

14) 사바세계를 지키는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왕이다.

15) 재가(在家) 선남선녀가 불법에 귀의하여 예배하는 스승을 문사라고 한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행장을 꾸려 행궁에서부터 법회 장소로 향해 갔다. 원문(院門)에 이르러 각자 탈 것에서 내려 불상을 받들고 초전(草殿)으로 들어가 보좌에 안치하였다. 그러고 나서 왕과 법사 등이 차례로 공양한 뒤에 18개국의 왕에게 명하여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승려들로서 이름이 가장 높고 문의(文義)에 해박한 1천여 사람을 들어오게 했다. 이어서 바라문 외도로서 이름과 행실이 뛰어난 자 5백여 명을 들어오게 하고 뒤이어 여러 나라의 대신 등 2백여 명을 들어오게 했다. 그 밖의 도속(道俗)들은 각기 원문(院門) 밖에 열을 지어 앉게 하였다.

 

왕은 안팎의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식사를 마친 뒤에 불상에다 금쟁반 한 개와 금 발우 일곱 벌, 금주전자 한 개와 금젓가락 한 벌, 금전(金錢) 3천과 상전의(上衣) 3천 벌을 바쳤다. 또 법사와 여러 승려들에게도 각각 차등을 두어 바쳤다.

보시가 끝나자 왕은 따로 보배로 장식한 상(床)을 펴고 법사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논주(論主)가 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대승을 찬양하고『제악견론(制惡見論)』을 지은 취지를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란타 절의 사문 명현 법사(明賢法師)에게 읽도록 명하여 대중에게 듣도록 하고, 따로 한 벌을 필사하여 법회장 문 밖에 걸어놓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법사가 말했다.

“만약 이 내용 중에 한 자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 이를 논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목을 끊고 사과하리라.”

이렇게 하였지만 저녁때가 되도록 한 사람도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계일왕은 매우 기뻐하며 법회를 끝내고 행궁으로 돌아갔으며, 여러 왕과 승려들도 각자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 다음에 법사도 구마라왕과 함께 역시 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에도 다시 와서 불상을 모시고 법회장으로 왔는데 사람이 모인 것은 첫날과 같았다.

이렇게 5일이 지났다. 소승과 외도들은 법사가 자기들의 종지(宗旨)를 허물어뜨린 데 대해 앙심을 품고 법사를 해치려고 모의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영을 선포했다.

“삿된 무리들이 참됨을 어지럽혀온 지가 오래되었다. 바른 가르침을 감추고 중생을 오도하여 미혹되게 해왔으니 덕 높은 현인(賢人)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 거짓을 바로잡겠는가?

지나국의 법사는 신우(神宇)가 광대(廣大)하고 학문과 수행이 매우 깊다. 모든 삿된 것을 설복시키기 위해서 이 나라에 유학을 와서, 대법(大法)을 현양(顯揚)하고 미혹되어 어리석은 사람을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요망한 무리들은 부끄러워하고 참회할 줄 모르고 모반(謀反)을 꾀하여 도리어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내고 있다. 이러한 일은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법사를 해치는 자가 있다면 그 목을 벨 것이며, 비방하고 욕하는 자는 그 혀를 자를 것이다. 그러나 논지를 펴서 자신의 의(義)를 구제하려는 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삿된 무리들은 자취를 감추고, 18일간의 법회가 끝날 때까지 한 사람도 의논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법회를 해산하는 날 저녁에 법사는 다시 대승을 찬양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미하며, 무량한 사람들을 사도(邪道)로부터 정도(正道)로 들어오게 했으며 소승을 버리고 대승에 귀의하게 하였다.

계일왕은 한층 더 숭앙하며 법사에게 금전 1만과 은전 3만과 상모전 1백 벌을 보시하였다. 18개국의 왕도 역시 각각 진보(珍寶)를 보시했으나 법사는 일체 받지 않았다.

왕은 신하에게 명하여 큰 코끼리를 장엄하여 깃대를 꽂고 법사를 태우고 귀족과 신하들을 뒤따르게 하였다. 그렇게 대중 사이를 돌면서 그가 세운 논의[立論]가 떳떳했음을 큰 소리로 외치며 알리려 하였다.

인도에서는 쟁론(諍論)에 이기면 이렇게 하게 되어 있었으나 법사는 사양하고 행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법이니 이 일은 어길 수가 없소.”

그러면서 법사의 가사를 잡고 이렇게 외쳤다.

“지나국의 법사는 대승의 의(義)를 세워서 모든 이견(異見)을 논파하였다. 18일이 지났으나 반론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사실을 두루 알아야 한다.”

모든 대중들은 기뻐하며 법사의 아름다운 이름을 다투어 찬양했다.

대승을 믿는 사람들은 법사를 마하야나제바(摩訶耶那提婆:Mahāyāna- deva)라 불렀는데, 이는 대승천(大乘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소승을 믿는 사람들은 목차제바(木叉提婆)라 불렀는데 이는 해탈천(解脫天)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은 향을 피우고 꽃을 뿌리면서 예경(禮敬)을 드리고는 돌아갔다. 이로부터 법사의 명성은 더욱 멀리까지 전해졌다.

 

왕의 행궁(行宮) 서쪽에 가람이 하나 있는데 왕이 공양하는 곳이다. 그 안에는 길이 1촌 반이 되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황백색으로 언제나 광명을 나타내고 있다.

이 부처님의 치아에 대한 전설이 있다.

옛날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흘리다종(訖利多種)16)이 불법을 없애고 승려를 해산시킨 일이 있다. 이때 한 비구가 멀리 인도로 간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게 되자 도화라국(覩貨羅國)17)의 설산하왕(雪山下王)은 여러 천종(賤種)들이 불법을 없애버린 데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3천 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많은 진기한 보물을 가지고 가서 봉헌(奉獻)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흘리다왕은 본래 탐욕스러운 사람이라서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맞이하였다.

설산하왕은 천성이 용맹하고 위엄은 신과 같았으므로 그곳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모자를 벗어들고 왕을 꾸짖기 시작했다. 흘리다왕은 이를 보고 놀라 쩔쩔매면서 땅에 엎드렸다. 설산왕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베어버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나는 설산하왕이다. 네놈들이 불법을 파괴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와서 너희들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잘못은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너희 모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니 각자 안심하도록 하라. 단 선동하여 미혹케 만든 주모자를 다른 나라로 추방할 것이며 여죄(餘罪)는 묻지 않겠다.”

이래서 악인을 섬멸하여 가람을 세우고 승려들을 소집하여 보시한 뒤에 돌아왔다.

16) 매득(買得)이라는 뜻이다.

17) 범어 Tukhāra의 음역이며 도화라(覩貨邏)라고도 쓴다.

 

한편 앞서 인도로 갔던 비구는 본국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지팡이를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길에서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코끼리 떼를 만나자 비구는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하였다. 그러자 코끼리들은 물을 들이마신 다음 나무에 뿜어대고 이로 물어뜯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나무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코끼리는 코로 비구를 말아 올려 등 위에 올려놓더니 그대로 싣고 가는 것이었다. 얼마 뒤 큰 밀림에 이르렀는데 거기에는 병든 코끼리가 상처가 곪아 누운 채 앓고 있었다. 그런데 코끼리가 비구의 손을 끌어다가 아픈 곳으로 가져갔다. 상처 난 곳을 보니 대나무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 가시를 뽑아내고 피고름을 제거한 뒤 옷을 찢어 감싸주었더니 코끼리는 점점 안정되어갔다.

다음날 여러 코끼리들이 다투어 맛있는 열매를 구해서 비구에게 보시하였다. 비구가 먹고 나자 한 마리의 코끼리가 금상자를 가지고 와서 병든 코끼리에게 주었고 병든 코끼리는 받아서 다시 비구에게 주었다.

비구가 받고 나자 여러 코끼리들은 비구를 태워 밀림을 빠져나와 처음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서 무릎 꿇어 절을 하고는 돌아갔다. 비구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 부처님의 치아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공양하였다.

 

한편 계일왕은 가습미라국에 부처님의 치아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몸소 국경까지 와서 부처님의 치아를 친견하고 예배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여러 대중들은 아까워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꺼내어 다른 곳에다 감춰버렸다.

그러나 가습미라왕은 계일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곳곳을 뒤지고 찾아 마침내 얻어 가지고는 부처님의 치아를 그에게 바쳤다. 계일왕은 부처님의 치아를 보고는 깊이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계일왕은 자신의 강력한 힘만 믿고 그것을 빼앗아 돌아가서 공양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부처님의 치아이다.

법회가 끝난 뒤에 계일왕은 주조한 금불상과 의복과 금전 등을 이 가람에 보관하게 하고 승려들로 하여금 수호하게 했다.

 

이제 법사는 먼저 나란타 절의 여러 대덕에 인사하고, 경전과 불상을 다 모은 다음 논강이 끝난 19일에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귀국하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종묘(宗廟)를 이어받아 천하의 주인이 된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항상 복덕(福德)이 더하지 않고 법인(法因)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소.

그래서 재보를 모아 발라야가국(鉢羅耶伽國)18)의 두 강(江) 사이에 대회장을 세우고 5년에 한 번씩 5인도의 사문과 바라문, 그리고 빈궁하고 고독한 사람들을 청하여 75일간의 무차대회(無遮大會)의 보시를 행하고 있소.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대회를 열었고 지금은 여섯 번째의 대회를 열려고 하고 있소. 그러니 법사께서 잠깐이라도 보시고서 기뻐해 주시지 않겠소?”

법사가 대답했다.

“보살은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 행하고, 지인(智人)은 과(果)를 얻고 나서도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진기한 재물마저도 아끼시지 않는데 제가 잠시 머물러 있는 것쯤이야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을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18) 옛적부터 유명하여 마하바라타(Mahabharata) 등의 고전에서도 종종 보인다. 지금의 인도

북부 간가강과 암나강의 합류점으로 Allahabad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이다.

 

21일에 출발하여 발라야가국을 거쳐 대시장(大施場)에 이르렀다. 이곳은 긍가강의 북쪽, 염무나(閻牟那)강의 남쪽에 있는데, 두 강이 서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와 이 나라에 와서 합류하게 된다.

그 두 강이 합류하는 곳의 서쪽에 대시장[大墠]19)이 있다. 둘레는 14~15리 정도이고 평탄하기가 거울과 같았다. 옛날부터 여러 왕이 모두 이곳에 모여 보시를 행했기 때문에 시장(施場)이라 부르게 되었다.

19) 선(墠)은 종교 활동에 사용되는 정결한 자리를 말한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1전을 보시하면 다른 곳에서 백천 전을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예로부터 다 함께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왕은 칙명으로 이 터 위에 시장(施場)을 건립하고 갈대를 꽂아 사방으로 각각 1천여 보나 되는 울타리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초당(草堂) 수십 칸을 지어 금․은․진주․붉은 유리[頗梨寶]․제청주(帝靑珠)․대청주(大靑珠) 등의 여러 가지 보물을 저장해 놓았다.

그 곁에다 또 수백 칸의 긴 집을 짓고 교사야의(憍奢耶衣)․반전의(斑氈衣)․금은전(金銀錢) 등을 저장해 놓았다. 울타리 밖에는 따로 취사장을 만들고, 보고(寶庫) 앞에는 다시 백여 채나 되는 긴 집을 지었다.

이 모습은 흡사 나라의 수도에 늘어선 시가지와 비슷하고, 그 긴 집 한 채 한 채 마다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었다.

이미 왕은 5인도의 사문과 외도와 니건자와 빈궁하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포고하여, 시장(施場)에 모여서 보시를 받도록 해 놓았다. 어떤 이는 법사의 곡녀성 법회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시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다. 18개국의 왕들도 대왕을 따라갔다.

 

법사가 대회 장소에 이르렀을 때는 50여만 명의 도속(道俗)들이 모여 있었다.

계일왕은 긍가강 북쪽 언덕에다 막사를 치고, 남인도의 왕 두로바발타(杜魯婆跋吒)는 강이 합류하는 곳의 서쪽에다 막사를 쳤다. 구마라왕은 염무나(閻牟那)강 남쪽 화림(花林) 옆에 막사를 쳤고, 그리고 보시를 받을 모든 사람들은 발타왕(跋吒王)의 막사 서쪽에 자리 잡았다.

다음날 아침 계일왕은 구마라왕과 함께 군선(群船)을 타고, 발타왕은 상군(象軍)을 거느리고, 각각 의위군(儀衛軍)을 정렬하여 법회장으로 모였다. 18개국의 왕들은 그 뒤를 따랐다.

첫날에는 대시장의 초전 안에 불상을 안치하고 최상의 보물과 옷과 좋은 음식을 보시하고 풍악을 울리며 꽃을 뿌렸다. 그런 다음 해가 어두워져서야 각자 막사로 돌아갔다.

둘째 날에는 일천상(日天像)20)을 안치한 뒤 보물과 옷을 첫날의 반 정도 보시하였다.

셋째 날에는 자재천상(自在天像)21)을 안치하고 보시는 일천상 때와 같이 했다.

나흘째는 백 줄로 줄지어 앉은 만여 명의 승려에게 보시를 했다. 금전 백문(百文)․구슬 한 개․전의(氈衣) 한 벌과 음식․향화 등이었는데 공양을 마치고는 나갔다.

다섯째 날에는 바라문에게 보시했는데 20여 일에 걸쳐 두루 보시했다.

여섯째 날에는 외도에게 보시했는데 10일에 걸쳐 두루 보시했다.

일곱째 날에는 먼 곳에서 온 구도자에게 보시했는데 10일에 걸쳐 두루 보시를 했다.

여덟째는 모든 빈궁한 사람과 고독한 사람에게 보시를 했는데 1개월에 걸쳐 두루 보시했다.

이렇게 하여 5년 동안에 걸쳐 쌓아온 창고가 다 바닥나고 말았다. 오직 남겨둔 것은 코끼리․말․병기(兵器)뿐이었는데, 이는 폭도를 정복하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왕은 그 밖의 보화나 몸에 걸치고 있는 의복과 영락(瓔珞)22)․귀걸이․팔찌․보만(寶鬘)․목걸이, 그리고 머리에 장식한 명주(明珠) 등까지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보시하였다.

일체를 다 보시한 왕은 그 누이동생으로부터 허름한 옷을 얻어 입고 시방불(十方佛)에게 예배하며 기뻐 어쩔 줄 몰라 합장하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축적했던 재보를 언제나 견고한 창고에 저장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는데, 이제 복전(福田)에다 저장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잘 저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어느 세상에서나 항상 재물이나 법을 갖추어서 중생에게 보시하고, 10자재(自在)23)를 이루고 2장엄(莊嚴)24)을 충만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여 법회는 끝났다.

여러 왕은 각자 모든 보물과 금전을 가지고 대중에게로 가서 왕이 보시한 영락과 머리에 장식한 구슬, 어복(御服) 등을 사서 도로 왕에게 바쳤다. 이렇게 해서 수일이 지난 뒤 왕의 의복과 패물 등은 전처럼 되찾게 되었다.

20) 바라문교에서 신봉하는 태양신을 말한다.

21) 마혜수라(摩醯首羅)의 번역으로 곧 대자재천(大自在天)을 가리킨다. 마혜수라천궁(摩醯首羅天宮)에

머무는 천왕이라고 한다. 눈은 셋, 팔은 여덟으로 흰 소를 타고 흰 불자를 들고 큰 위덕을 가진

신이다. 외도들은 이 신을 세계의 본체라 하며, 창조의 신이라 하여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로우며, 온갖 물건이 죽어 없어지면 이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 신을 "비자사"라 부르기도 하고, 초선천(初禪天)의 임금이라하며, 혹은 이사나(伊舍那)라

하여 제 6천주(天主)라고도 한다.

22) 구슬이나 옥 같은 보석을 꿰어서 만든 장식품으로, 지금의 목걸이 같은 물건을 말한다.

23) 보살이 구족한 10종 무소부달(無所不達)의 자유를 말한다.

24) 2엄(嚴)이라고도 한다. 2종 장엄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도가 수행으로 성취하는 지혜와

복덕이다.

 

법사는 비로소 인사하고 귀국하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법사와 함께 불교를 널리 펴고자 하는데 어찌 그리 일찍 돌아가려 하오?”

이렇게 해서 다시 10여 일을 더 머물게 되었다.

구마라왕도 은근히 바라면서 법사에게 말했다.

“법사께서 저의 처소에 머물면서 공양을 받으신다면 마땅히 법사님을 위해 1백 개의 절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법사는 여러 왕들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에 고언(苦言)을 하였다.

“지나국은 여기서부터 거리가 매우 먼 나라로서 불법도 늦게 들어왔습니다. 비록 큰 줄기는 알고 있으나 세부적인 것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에 온 것은 그 세부적인 다른 점을 공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저의 원을 이루게 된 것은 모두 이 나라 여러 현인들의 갈망과 깊은 성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히 잠깐이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경전의 말씀에도 ‘인법(人法)을 방해하는 자는 대대로 눈[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더 머물게 된다면 저 수많은 수행인들에게 법을 알 수 있는 이로움을 잃게 하는 것이 될 터이니 눈이 없게 되는 그 과보를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법사의 덕을 경모하므로 항상 우러러 받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갈 이익을 잃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가시든지 머무시든지 법사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런데 법사께서는 어느 길을 따라서 돌아가시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께서 남해(南海)를 택해서 가신다면 사람을 시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법사가 말했다.

“나는 지나국에서 올 때 이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고창(高昌)이라는 나라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 왕은 총명하고 불법을 좋아했는데 내가 인도로 올 때 길을 묻는 것을 보고는 깊이 수희심(隨喜心)을 내어 후한 대접을 해주며 내가 귀국하는 길에는 꼭 들러주도록 부탁했으니 정리로 보아 그 약속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돌아갈 때는 북로(北路)로 갈까 합니다.”

왕이 말했다.

“법사께서 필요한 노자는 얼마면 되겠습니까?”

법사가 대답하였다.

“그럴 것 없습니다.”

왕이 또 말했다.

“하지만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왕은 명해서 금전 등의 물건들을 보시하게 하였고, 구마라왕 역시 많은 보배를 보시하였다 그러나 법사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오직 구마라왕이 준 갈라리피(曷剌釐帔)[큰 털 아래 작은 털로 만든 덮개를 말한다.]만을 받았는데 도중에 비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왕과 대중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들은 수십 리 밖까지 전송하고 돌아갔는데 서로 헤어질 무렵에는 모두 오열을 금치 못했다.

 

법사는 경전과 불상 등을 북인도의 왕 오지다(烏地多:Udīta)의 군사에게 맡기고 코끼리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 계일왕이 오지다왕에게 큰 코끼리 한 마리, 금전 3천, 은전 1만을 주어 법사의 여행 경비에 쓰도록 했다.

헤어진 지 사흘째 되던 날 계일왕은 구마라왕과 발타왕(跋吒王) 등과 함께 각기 몸이 날랜 말 수백 마리를 끌고 다시 따라와 이별을 나누었으니 그들의 간절한 마음은 이와 같았다.

그리고 마하달라(摩訶怛羅:Mahāmātra)[중국의 산관(散官)과 같은 류이다.]라고 하는 달관(達官) 네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흰 천에다 편지를 써서 붉은 진흙으로[紅泥]으로 봉인해 주었다. 그리고 달관을 시켜 이 편지를 받들어 법사를 전송하게 하였다.

편지에서는 법사가 지나가게 될 모든 나라에 탈 것을 내주도록 명하여 법사가 무사히 중국의 경계에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법사는 발라야가국을 떠나 서남쪽을 향해 대밀림을 지나 7일 만에 교상미국(憍賞彌國)25)에 이르렀다.

성 남쪽에 구사라(劬師羅:Ghoṣila) 장자가 부처님께 보시한 동산이 있었다.

법사는 그 성적(聖跡)에 예배한 뒤 다시 오지다왕(烏地多王)과 함께 서북쪽으로 1개월을 가면서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천제(天梯)의 성적을 다시 한 번 더 예배하였다.

25) 교상미는 카우샴비의 음역이다. 고대 중인도에 자리했던 나라 이름으로, 석가모니의 생존 당시

인도의 16대국 중 하나이다.

 

다시 서북쪽으로 3유선나를 가서 비라나나국(毘羅那拏國)26)의 도성에 이르렀다.

여기서 약 2개월 머물면서 사자광(師子光)․사자월(師子月)의 두 동학(同學)을 만났는데『구사(俱舍)』․『섭론(攝論)』․『유식론』등을 강의하고 있었다.

법사가 도착하자 모두 와서 영접하며 매우 기뻐했다.

법사는 여기서 또『유가결택(瑜伽決擇)』과『대법론(對法論)』 등의 강의를 열고 2개월 만에 마치고 떠나게 되었다.

26) 지금의 인도 북쪽 지방의 아이타 부근이다.

 

다시 서북쪽으로 약 1개월을 가면서 여러 나라를 경유하여 사란달국(闍蘭達國)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북인도왕의 도성이다.

여기서 다시 약 1개월 동안 머물렀다.

오지왕은 사람을 보내서 법사의 길잡이가 되어 전송해 주도록 하였다.

 

서쪽으로 20여 일을 가서 승하보라국(僧訶補羅國:Siṁhapura)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그 당시 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북방 사람들이어서 경전과 불상 등을 가지고 법사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이렇게 또 20여 일 동안을 산길을 따라가게 되었다.

법사는 이곳에는 산적이 많아 약탈당할 것을 걱정하여 항상 승려 한 사람을 먼저 보내서, 만약 산적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설교하라고 했다.

“멀리서 불법을 구하러 왔소. 지금 갖고 있는 것은 경전과 불상과 사리뿐이니 여러분께서는 우리들을 옹호해 주고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오.”

그리고 법사는 승려들을 거느리고 뒤쳐져서 따라갔다. 역시 이때 여러 번 산적을 만났으나 끝내 해를 입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20여 일을 여행하여 달차시라국(呾叉尸羅國)27)에 이르러 월광왕(月光王)28)이 천두(千頭)를 버렸던 곳에 다시 한 번 예배하였다.

27)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과 같다. 범어 Takṣaśilā, 파리어 Takkasilā의 음사이다. 옛날에는

인도와 서아시아와 중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지로서 번성하였다.

28) 중인도 교살라국의 사위성의 왕인 파사닉(波斯匿)의 번역 이름이다.

 

이 나라의 동북쪽 50유선나의 거리에 가습미라국이 있는데, 그 나라의 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사를 청해 맞으려 하였다.

그러나 법사는 코끼리가 많은 짐을 싣고 가므로 갈 수가 없었고, 달차시라국에서 7일 동안 머물렀다.

 

다시 서북쪽으로 3일 동안 걸어서 신도대하(信度大河:인더스강)에 이르렀는데 강폭은 5~6리나 된다.

경전과 불상 및 동행한 사람들은 모두 배를 타고 건넜고, 법사는 코끼리를 타고 건넜다.

이때 한 사람을 배로 보내서 경전과 인도에서 나는 여러 가지 기이한 꽃씨를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배가 강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풍에 파도가 일어나 배가 흔들리며 곧 뒤집히려 하였다. 그러자 경을 지키고 있던 자가 놀라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람을 구하기는 했으나 50권의 패엽경 및 꽃과 과일의 꽃씨 등은 잃어버리고 나머지만 겨우 보전했을 뿐이다.

 

이때 가필시왕(迦畢試王)29)은 먼저 오탁가한다성(烏鐸迦漢茶城)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왕은 법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몸소 강가에까지 마중 나와서 이렇게 물었다.

“법사께서는 강에서 경전을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법사께서는 혹 인도의 꽃씨를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닙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가지고 왔습니다.”

왕이 말했다.

“격랑으로 배가 기울어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도의 꽃씨를 가지고 이 강을 건너가려 하면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법사와 함께 도성으로 돌아왔다. 법사는 한 절에서 50여 일을 머물면서 잃어버린 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사람을 오장나국(烏長那國)30)으로 보내서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31)의 삼장을 베껴 오도록 하였다.

가습미라왕은 법사가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몸소 와서 참배하고 여러 날 만에 돌아갔다.

29) 가필시는 카피샤의 음역이다. 고대 북인도의 나라 이름으로 건타라국(健駄羅國)의 서쪽에

자리했던 나라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kabul) 지방에 해당한다.

30) 범어 Udyāna의 음역이다. 지금의 파키스탄 서북 변경 주의 스와토강 지역이다.

31) 불교 부파 음광부(飮光部)의 범어 음역이다.

 

법사는 가필시왕과 함께 서북쪽으로 약 1개월을 가서 남파국(藍波國)의 국경에 이르렀다.

그 나라의 왕은 태자를 먼저 보내 주었고, 도성 사람들과 모든 승려들에게 조칙을 내려 당번(幢幡)을 갖추고 성 밖으로 나가 마중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가필시왕과 법사가 점점 그곳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승려와 일반인 천여 명과 당기와 번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법사를 보고 환희하며 예배하고 앞뒤로 둘러싸 찬미하면서 나아갔다.

도성에 들어가 한 대승사(大乘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왕은 75일간의 무차대시(無遮大施)를 베풀었다.

 

이곳에서 다시 정남쪽으로 15일을 가서 벌랄나국(伐剌拏國:바라나국)32)에 이르러 성적에 예배하고, 다시 서북쪽으로 가서 아박건국(阿薄健國)33)을 지나 다시 서북쪽으로 가서 조구타국(漕矩吒國)34)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불률시살당나국(佛栗氏薩儻那國)35)에 이르렀다.

32) 범어 varaṇa, varṇa의 음역이다. 바라나국이라고도다. 페샤와르 남서 약 160km의 반누(Bannu)

지방으로 추정된다. 반누는『법현전』에 나오는 발나(跋那)일 것이다. 반누지방에는 Kurram강이

흐르며 이것은 인더스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여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크람지방에서 Jalalabad․

Kabul․Ghazni지방으로 갈 수 있다. 옛날부터 천축국으로 가는 승려들이 이용하던 방법의

하나이다. 도중에서 왼편으로 꺾어들면 바바이 고개(Babai Pass)에서 Chazni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현장이 돌아온 길과 간 길은 서로 중복되어 있다. 즉 중인도에서

한 달 남짓으로 사란달라국(闍爛達羅國)에 이르고, 다시 20여 일 가면 승하보라국(僧訶補羅國),

다시 20여 일 가면 달차시라국(叉始羅國), 또 서북으로 한 달 남짓 가면 남파국(藍波國)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15일을 가면 바라니국에 이른다. 다시 아박건국(阿薄健國)을 거쳐 아프

카니스탄의 자구다(Chazni)로 가게 된다.

33) 원음은 확실하지 않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서역기』에도 이름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Bannu와 Chazni를 잇는 선상의 나라인 듯하다.

34) 범어 jaukuṭā의 음역이며 사후란이라는 뜻이다. 소위 사브리스탄(Zaburistan)에 해당된다.

당대(唐代)의 사율국(謝䫻國)으로 도성은 가즈나(鶴悉那)라 하며 가즈니(Ghazni, Ghazni)로

추정된다.『자은전』에는 “다시 서북으로 나아가 아박건국, 자구다국을 지나고, 또 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부리지스타나국에 이르렀다”라고 하여 아주 수월하게 통과한 것처럼 쓰여

있다. 그러나『서역기』에는 “조구타국은 둘레가 7천여 리가 되는데, 대도성은 가즈나(鶴悉那)라

부르며 둘레 30여 리가 된다, 혹은 학살라(鶴薩羅:헬만드강 하류의 Guzar)성에 도읍했다. 이

성은 둘레 30여 리로서 견고하고 위험하다. 산도 강도 높고 전답도 높고 건조한 곳에 있다.

초목은 가지를 뻗고 꽃과 과일이 풍성하다. 금향(金香)에 적합하고 흥구초(興瞿草)를 산출한다.

이 풀은 나마인도천(羅摩印度川)에 무성하다. 학살라성(鶴薩羅城)에는 솟는 물이 가지처럼 흘러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논밭에 관개(灌漑)하고 있다. 기후는 추위가 심하고 설상(雪霜)이

대단히 많다”라고 되어 있어 적어도 며칠간은 체류하면서 여러 가지로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자은전』에 의하여 행려(行旅)의 대강은 알 수 있으며, 각 나라의 내용은 대당『서역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35)『서역기』에는 불률시살당나(弗栗恃薩儻那)라고 되어 있다. 위치는 자세하지 않다. 부리지스타나를

높은 곳이라는 뜻의 portasthana 대음(對音)으로 보고, 이것과 Strabo․Ptolemy 등에서 볼 수 있는

Ortostana와 일치한다 하여 지금의 카불(Kabul)이라고 하는 설과,『당서』․『서역기』등에

사율국(謝䫻國, Cazui)의 북쪽에 호시건국(護時健國)이 있다는 기사가 있어서 이 호시(護時)와

불율씨(佛栗國, 弗栗恃)의 음이 비슷한 점으로 보아 호시건국이라고 한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나 모든 카불강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미상이다. 카불에 대해서는『자은전』과

『서역기』에 모두 기록이 없다. 카불의 고대와 중세는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아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그리고 여기서 동쪽으로 나아가 가필시의 국경에 이르렀다.

왕은 또 여기서 7일간의 대시(大施)를 행하였으며, 대시가 끝나자 법사는 곧바로 출발했다.

 

동북쪽으로 1유선나(踰膳那)를 가서 구로살방성(瞿盧薩謗城)에 이르러서는 가필시왕과 헤어져서 북쪽으로 갔는데, 왕은 대신(大臣) 하나에게 백여 명을 인솔케 하여 설산(雪山)을 넘을 때까지 식량과 꼴을 짊어지고 가며 공급해 주도록 했다.

7일을 행진하여 어느 높은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 산은 첩첩의 위험한 봉우리가 여러 가지모양으로 들쑥날쑥하게 되어 있었다. 어떤 곳은 평평하고 어떤 곳은 치솟아서 산세가 한결같지 않았기에 오르는 데에 고생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말도 탈 수 없었고 지팡이만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7일을 지나서야 한 높은 고개에 이르렀다. 그 고개 밑에는 백여 호가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으며, 마을에서는 양을 기르고 있었는데 양의 크기가 당나귀만 했다.

그날은 이 마을에서 쉬고 밤이 되어서야 출발했는데 마을 사람이 산낙타[山駝]에 법사를 태우고 길을 인도했다. 그 지역은 눈 쌓인 계곡과 얼어붙은 골짜기가 많아서 그곳 사람들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자칫하면 눈 속에 파묻히거나 추락할 위험이 있는 곳이었다.

다음 날 낮에는 험준한 산의 빙판길을 건너게 되었다. 이때는 오직 승려 7명, 고용인 등 20여 명과 코끼리 한 마리, 노새 10마리, 말 네 마리뿐이었다.

다음 날에는 고개 아래에까지 내려가서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가다가 다시 어느 고개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 고개는 멀리서 볼 때는 눈이 쌓인 것 같았으나 와서 보니 모두 하얀 바윗돌로 이루어진 산이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구름이나 눈이 날리더라도 그 표면에 남아 있지 않는다고 한다.

이날 저녁 무렵에야 산 정상에 도착했는데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와서 일행 가운데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에 초목이라고는 없고 오직 바위가 겹쳐 이루어진 봉우리만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산이 높고 바람이 세차서 새가 넘어가려 해도 날 수가 없어 이 고개의 남쪽이나 북쪽으로 수백 보 밖으로 가서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고 한다.

섬부주(贍部洲) 안에 이보다 더 높은 산봉우리는 없다.

서북쪽으로 몇 리를 내려오니 다소 평평한 곳이 있어서 천막을 치고 하룻밤 묵은 뒤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였다.

 

5~6일 만에 산을 내려와 안달라박바국(安怛羅縛婆國)36)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도화라(覩貨羅)의 옛 땅으로 3개의 가람이 있고 10명의 승려가 대중부(大衆部)의 법을 배우고 있었으며 무우왕(無憂王)이 세운 탑이 하나 있었다.

법사는 여기서 5일 동안 머물렀다.

36) 원음은 자세하지 않다.『서역기』에는 안달라박(安怛羅縛)이라 한다. 수곡씨(水谷氏)는

원음을 antarāva로 추정한다. 현재 지도의 Andarāb은 Khawak고개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Doshī강에 연한 지역으로 일찍이 10세기에 Andarāb는 도하리스탄 제3의 도시였다고 한다.

현장은 부리지스타나로부터 카피시국을 거쳐 북진(北進)하여 Parandu 고개나 Salang 고개를

넘어서 이 나라에 도달했던 모양이다.

 

이 나라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내려가서 4백여 리를 행진하여 활실다국(闊悉多國)37)에 이르렀는데 역시 도화라의 옛 땅이다.

37) 쿤드스강 지류의 하나인 호스트의 상류부이며, 지금의 Narin부근일 것이다.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산길을 3백여 리쯤 가서 활국(活國)38)에 이르렀는데 박추강[縛芻河]옆에 있는 나라로 도화라의 동쪽 경계이다.

도성은 강의 남쪽 언덕에 있는데 법사는 여기서 섭호가한(葉護可汗)의 손자를 뵈었다. 그는 도화라의 왕이 되어 스스로 섭호(葉護)라고 하였다.

여기서 1개월간 머물렀는데 섭호가 호위를 보내어 전송해 주었다.

38) 쿤두스(Kunduz) 지방을 가리키며 요새라는 뜻이다. 활국은 서돌궐의 중요한 근거지의 하나로서

일찍이 섭호가한(葉護可汗)의 장남 달도설(度設)이 국왕이 되고, 고창왕의 누이동생 가하돈

(可賀敦:왕비)이 되어 있었다. 그 왕비가 서거한 후 왕은 젊은 왕비를 맞았는데, 그녀는 왕의

장남의 사주를 받아 왕을 독살하고 새로 장남이 왕위에 올라 젊은 왕비를 자기의 처로 삼았다.

현장은 이미 가는 길에 이 말을 들었는데, 그는 귀국할 때에 고창국에 3년간을 머물기로

고창왕과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아마 이곳에 들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정관 14년

(640년)에 고창이 당나라로 말미암아 멸망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고창에 다시

들러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남쪽 길을 따라서 귀국하기를 결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사꾼과 함께 동쪽으로 이틀을 가서 몽건국(瞢健國)39)에 이르렀다.

이 나라 곁에는 아리나국(阿利尼國)과 갈라호국(曷邏胡國), 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 발리갈국(鉢利曷國)이 있는데 모두 도화라의 옛 땅이다.

39) 쿤두스의 동쪽 백 리(40km)로 khanabad 부근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러나 현재 몽건과 비슷한

지명은 이 부근에는 없다. 문칸국에 이어 네 개의 전해들은 나라의 이름이 있다. 쿤두스 북쪽

약 42km에 위치한 아리니국(阿利尼國)과 바다후샨의 수도인 Faizabād 북쪽의 Rāgh로 추정되는

한다갈라호(曷邏胡), 현재의 kishm 또는 kashm으로 Taliqun과 Faizabād 사이에 있고 kokcha강에

연한 마을인 흘률슬마(訖栗瑟摩), Parighar의 번역이거나 아니면 암강 오른쪽 언덕의 Parkhar이거나

혹은 암강 굴곡부 최북단 Kalaikhumb 동남방의 parkhar일 것으로 추정되는 발리갈(鉢利曷), 이

네 개의 전문국(傳聞國)은 암강 오른쪽 언덕의 교통로를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길은 당대

(唐代) 때는 많이 이용되었으며 오공(悟空)․혜초(慧超) 등 많은 순례승들이 이용한 길이었다.

 

몽건국에서 다시 동쪽 산으로 들어가 3백여 리를 가면 희마달라국(呬摩怛羅國)40)에 이르는데 역시 도화라의 옛 땅이다.

이 나라 풍속은 돌궐(突厥)과 비슷한데 오직 다른 것은 부인들의 머리에 높이 3척(尺) 남짓한 목각(木角)의 관을 얹었다는 것이다.

앞에 두 개의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남편의 부모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위의 가지는 아버지를 나타내고 아래 가지는 어머니를 나타낸 것이다. 먼저 누가 한 사람 죽으면 가지 하나를 빼버린다는 것이다. 만약 시부모가 다 죽으면 관(冠) 전체를 버린다.

40)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의 달라이무이다.

 

여기서 다시 동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발창나국(鉢鐸創那國)41)에 이르렀는데 역시 도화라의 영토이다. 추위와 눈 때문에 여기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41)『서역기』에는 발탁창나(鉢鐸創那)로 기록되어 있다.『고승전』에는 파라차나(波多叉拏)라

기록되었다. 그 도성은 지금의 바닥샨의 파이사바드(Faizabād)일 것이다.

 

여기에서 또 동남쪽으로 산길로 2백여 리를 가서 음박건국(淫薄健國)42)에 이르렀으며, 다시 동남쪽으로 위태롭고 험한 길을 따라 3백여 리를 가서 굴랑나국(屈浪拏國:Kuraṇa)43)에 이르렀다.

42) 수곡씨(水谷氏)는 음박건(淫薄健)의 원음을 Yambagān으로 추정한다. Beal, Le Strange 등

많은 사람들이 Kokcha강 상류인 Jurn(Jarum)보다 더 상류인 Yamgan(Hamakan)으로 추정하였다.

43) 지금의 Kokcha강의 상류인 쿠란강 유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은 안쥬만(Anjuman) 고개를 지나

와한지방으로부터 카피시국에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당대(唐代)에는 종종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신당서(新唐書)』「서역전(西域傳)」에도 구란(俱蘭)․구라노(俱羅弩)․구란나(俱爛那)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또 동북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5백여 리를 더 가서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Dharmasthiti)44)[호밀(護密)이라 부르기도 한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위치해 있고 박추(縛芻:Vaksh)강을 끼고 있다. 이곳에서는 체구는 작으나 건강한 좋은 말[馬]이 난다고 한다.

이 나라 풍속은 예의가 없으며 성격도 난폭하고 모습도 비루하다. 눈동자의 색깔은 거의가 벽록(碧綠)색으로 다른 나라들과는 특이하게 달랐다.

이곳에는 가람은 10여 개가 있고, 혼타다성(昏馱多城:Kundhata)이 이 나라의 도성이다.

도성 안에 가람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 세웠다고 한다. 가람 안에 석불상(石佛像)이 있는데, 불상 위에는 여러 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금동(金銅)의 둥근 덮개가 저절로 공중에 떠서 불상의 정수리 위에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배하면서 불상의 둘레를 돌면 둥근 덮개 역시 따라 돌고, 사람이 서면 둥근 덮개도 멈추었는데 그 영험이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이 절이 세워지게 된 인연은 별전(別傳)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다.]

44) 법(法)의 위치라는 뜻이다. 『서역기』에서는 이 나라에 대해서 “쿠나라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가서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험악한 길 5백여 리를 가서야 비로소 이르렀다”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아마 누리스탄 산지의 북단을 넘어서 제박(Zebak)을 경유하여 아슈카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도성 혼태다(昏駄多, Khandāta)는 Ishkashim, 현재도 Khandūd라고 불리우고 있다 한다.

달마스디티라는 이름의 유래는 와한계곡의 남쪽인 Mastuj(Chitral 동북방 약 90km)에 포함되는

부분이 Darah-i-Mastūj(Mastu에의 門)라 불리면서 그것이 지역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나라에서 큰 산의 북쪽에 있는 시기니국(尸棄尼國:Shigni)에 갔다가 다시 달마실철제국을 지나 상미국(商彌國)45)에 이르렀다.

45) 지금의 지트랄(Chitral) 및 Mastūj 지방에 해당한다. 예로부터 한나라 서적에 쌍미(雙靡)․

사미(舍彌)․사미(賒彌)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나라의

이름일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7백여 리를 가서 파미라(波䜝羅:Pāmir)강에 이르렀다. 이 강은 동서 1천여 리, 남북 1백여 리로서, 두 설산(雪山) 사이로 흐른다. 또 총령(蔥領)46) 가운데 있으므로, 봄․여름이 되어도 눈보라가 휘몰아쳐서 그치지 않는다. 이곳은 한랭하여 초목도 드물고,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스산할 뿐 인적마저 없는 곳이다.

이 강 가운데 큰 용지(龍池)가 있는데, 동서로 3백 리, 남북으로 50여 되며, 섬부주의 중심이 된다. 지세가 높고 험하여, 바라보면 망망하여 그 끝을 볼 수가 없다. 물속에 사는 동물의 숫자도 수천 종이나 되어서 그 울음소리가 요란한 것이 마치 온갖 장인들이 모인 장터와 같다. 그리고 많은 새가 있었는데, 크기가 1장(丈)이나 되었고 새 알은 옹기만 했다. 옛날에 조지(條支)의 거란(巨卵)이라고 한 것이 아마 이곳일 것이다.

못의 서쪽에서 한 가닥 물줄기가 분출하여 서쪽의 달마실철제국의 동쪽 경계에서 박추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빠지는데, 오른쪽의 여러 물줄기도 함께 모여든다.

못 동쪽에서도 하나의 큰 강이 동쪽으로 흘러 거사국(佉沙國)의 서쪽에서 사다하(徙多河:Sitā, 알칸드강의 원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 왼쪽에서 여러 물줄기도 함께 합류한다.

46) 티베트 파미르(Pamirs) 고원(高原)을 말한다.

 

이 강의 남쪽 산 밖에 발로라국(鉢露羅國)47)이 있는데 금과 은이 많이 생산되며, 거기서 나는 금의 빛은 불꽃처럼 빛났다. 그리고 이 용지의 남북쪽은 아뇩지(阿耨池)48)에 상당(相當)한다.

47) 원음은 balūra․balora이다. 길기트(Gilgit) 동남쪽의 발지스탄 지방을 가리킨다.『한서(漢書)』에는

발로륵(鉢盧勒)․발로(鉢露)․파로(波路)․포로(布露)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역시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나라의 이름이다.

48) 아뇩지(阿耨池), 즉 아뇩달지(阿耨達池)를 말한다. 남섬부주의 북쪽에는 세 겹의 흑산이 있고,

흑산 북쪽에는 대설산(大雪山)과 향취산이 있으며, 그 사이에 Anotatta, 즉 무열뇌(無熱惱) 혹은

무열(無熱)이라고 부르는 큰 연못이 있다. 무열은 청량(淸涼)이라는 뜻이다. 이 못에서 갠지즈

등의 네 강이 흘러나와 동남북서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 강에서 동쪽으로 나와 위태로운 길에 올라 눈을 밟으며 5백여 리를 가서 걸반다국(朅槃陀國)49)에 이르렀다.

성(城)은 험준한 고개에 의지해 있으며 북쪽으로 사다강을 등지고 있다. 이 강은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들어갔다가 지하로 스며들어 흐르고, 다시 적석산(積石山)50)에서 나오는데 이 나라를 흐르는 강의 원류가 된다.

또 걸반다국의 왕은 총명하여 건국 이래 오랜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왕위를 지켜왔다. 그는 스스로 원래 지나제바구달라(脂那提婆瞿怛羅:China- devagotra)[당(唐) 나라 말로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왕의 옛궁에는 돌아가진 존자 동수 논사(童壽論師:Kumārarāta)51)의 가람이 있다. 존자는 달차시라국(怛叉始羅國) 사람으로 총명함이 빼어나 매일 3만 2천 언(言)을 암송하고 3만 2천 자를 썼으며, 모든 법에 통하였고 저술도 많이 하였다. 그리고 수십 부의 논을 썼는데 모두 세상에 널리 유행 되었다. 말하자면 경부(經部)의 본사(本師)인 셈이다.

당시에는 ‘동쪽에는 마명(馬鳴)52)이 있고 남쪽에는 제바(提婆)가 있으며, 서쪽에는 용맹(龍猛)이 있고 북쪽에는 동수(童壽)가 있어서 네 개의 태양[四日]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능히 세상의 미혹비추어 밝혀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수 논사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선왕(先王)이 몸소 달차시라국을 정벌하고 그를 맞아들여 공양하였다고 한다.

성의 동남으로 3백여 리를 가면 큰 석벽(石壁)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에 두 개의 석실이 있고 그 안에는 각각의 나한(羅漢)53)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다.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는데 보기에는 야윈 사람 같으나 7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기울거나 썩지 않았다. 법사는 이 나라에서 20여 일 동안 머물렀다.

49) 원음은 Khabandh, 혹은 Garbana로 추정된다. 산길이라는 뜻의 이란어 Yarpand에서 유래된

것이다. 지금의 타슈클건(Tashkurghan:山塞이라는 뜻)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당나라 시대에 중국의 세력이 이곳까지 미쳐, 여기에 총령 수착(蔥嶺守捉)을 두었다. 얄칸드강의

상류에 해당되며, 동쪽으로 가면 얄칸드․칼가릭, 북쪽으로 가면 카슈갈에 이른다. 희랍시대부터

파미르고원을 넘는 중계지로 유명하며 동서교통의 요충지이다.

50) 적석(積石)은 산 이름이기도 하고 주(州) 이름이 되기도 한다.『원사』「지리지」하원부록

(河源附錄)의 주에는, 주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금(金) 나라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임하현

(臨河縣)의 서쪽에 적석주를 둔 일이 있고, 또 서하(西夏)의 일을 기록한「송사(宋史)」하국전

(夏國傳)에, “황하 밖에 적석주가 있다[河外有積石州]”고 했는데, 동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51) 동수(童首)라고도 쓴다. 구마라다, 혹은 구마라집의 번역 이름이다.

52) 아슈와고샤의 번역이다. 1-2세기경에 생존한 중인도 사위국(舍衛國) 사람인데, 본래 외도

(外道)로서 불법을 비난하다가, 협존자(脇尊者)를 만나서 논파당한 뒤 불교에 귀의하였다.

두루 편력하면서 불법을 널리 선양하였고,『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의 탁월한 저작을 남겼다. 그 외 저서로『니건자문무아의경(尼乾子問無我義經)』,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대종지현문본론(大宗地玄文本論)』,『사사법오십송

(事師法五十頌)』,『십불선업도경(十不善業道經)』,『육취윤회경(六趣輪廻經)』 등이 있다.

53) 아라한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5일 동안 행진하다가 산적 떼를 만났다. 장사꾼들은 놀라 산으로 도망가고 코끼리들은 산적 떼에게 쫓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산적들이 지나간 뒤에 상인들과 만나서 차츰 동쪽으로 내려갔다.

추위를 무릅쓰고 험한 길을 밟으며 8백여 리를 행진하여 총령을 빠져 나와 오살국(烏鎩國)54)에 이르렀다. 성 서쪽 2백 리 되는 곳에 큰 산이 있는데 그 봉우리는 매우 험준하고 그 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는 탑이 하나 있다.

수백 년 전에 지진으로 인해 산이 무너져 내렸다. 산중에는 깡마른 한 비구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져 어깨를 덮었다. 어떤 나무꾼이 보고는 왕에게 와뢰니 왕이 찾아와서 예배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원근에서 모여들어 서로 공양하고 바친 꽃이 산처럼 쌓였다.

왕이 물었다.

“이 분은 누구인가?”

어떤 비구가 대답했다.

“이 분은 출가한 나한으로서 멸진정(滅盡定)55)에 들었습니다. 세월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길어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어떻게 깨워서 일어나게 할 수 없겠는가?”

대답했다.

“단식(斷食)하고 있는 몸은 정(定)에서 나오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선 수유(酥乳)를 부어서 몸을 적신 다음에 건추(犍槌)56)를 두들기면 그 소리에 감응하여 깨어나 혹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게 해보자.”

마침내 승려의 말에 따라 연유를 붓고 건추를 두들겼더니 나한은 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법복을 입은 자는 또 누구인가?”

대답했다.

“저는 비구입니다.”

나한이 말했다.

“나의 스승 가섭파(迦葉波)57) 여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비구가 대답했다.

“열반에 드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나한은 이 말을 듣고 숙연해지더니 다시 말했다.

“석가모니[釋迦文] 부처님은 무상등각(無上等覺)58)을 이루셨는가?”

대답했다.

“이미 이루시어 중생을 이롭게 하신 뒤에 역시 돌아가셨습니다.”

나한은 이 말을 듣고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있더니 손으로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일어나 허공으로 올라 대신변(大神變)을 일으켰다. 즉 불을 일으켜 몸을 태우고 그 유해는 땅에 떨어졌다.

왕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 유골을 모으고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이 탑이라는 것이었다.

54)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Yangi Hissar[Cunningham], Chihil Gumbaz

[Yule], Yangi Hissar 남쪽의 Ighiz Yar 또는 Yarkand 등의 설이 있다. 지도에는 우선 Yangi Hissar

부근에 그 위치를 기록하였으나『자은전』과『서역기』에서는 모두 이 나라는 갈반타국

(渴槃陀國)으로부터 동쪽으로 8백여 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다하(徙多河)의 북쪽에 있고

또 여기서 북쪽으로 5백여 리에 거사국(佉沙國)이 있다고 하였다. 오살(烏鎩)에 가장 가까운

국명은 오간(烏秆)․오모어휘(烏耗於麾)로서 이 나라는 Tisnab강의 유역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한(漢)․당대(唐代)의 Karghalik로부터 Tashkurgan에 이르는 길은 얄칸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외에 Karghalik에서 Mamuk를 거쳐 Tashkurgan에 이르는 길도 있어서 법현(法顯)과 송운

(宋雲) 등 인도에 가는 많은 승려들이 이 길을 이용하고 있다. 현장도 아마 이 길을 동쪽으로

가서 오모국(烏耗國)을 방문했을 것이다.

55) 불상응법(不相應法) 중 하나로 심(心)과 심소(心所)를 모두 끊어 버린 경지의 선정을 말한다.

56) 건타의 음역이다.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의 일종이다. 죽비라고 한다.

57) 가섭은 석가의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가섭파(摩訶迦葉波)로 석가가 죽은 뒤 불교의

장로(長老)가 된 사람이다.

58) 등각(等覺)은 부처의 별칭으로, 부처의 깨달음이 평등(平等) 일여(一如)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한다. 또는 보살의 52위(位) 중 하나인데, 부처의 깨달음과 동등한 것으로, 묘각(妙覺)의

불과(佛果)에 가장 근접한 지위이다.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거사국(佉沙國)59)[전에는 소륵(疏勒)이라 했다. 곧 성(城)의 이름이다. 정음(正音)은 실리흘률리다저(室利訖栗利多底)이고 소륵이라는 말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다.]에 이르렀다.

59) 가사길려(迦師佶黎)․가사기리(伽師祇離)․가사(伽師) 등의 이자역(異字譯)이 있다. 타림 분지 서쪽

끝의 요충인 카슈갈(Kashgar)을 가리킨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서 사다(徙多)강을 건너고, 큰 산을 넘어서 작구가라국(斫句迦羅國)60)[전에는 저거(沮渠)라 했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남쪽에 큰 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감실(龕室)로 만든 불당이 많다. 인도에서 깨쳐서 과위(果位)를 증득한 많은 사람들이 신통력으로 이곳에 와서 살며 적멸(寂滅)에 들어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세 나한이 암굴에 살면서 멸심정(滅心定)에 들어 있다고 한다. 이 나한은 머리털이 점점 길어지기 때문에 여러 승려들이 가끔씩 가서 깎아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대승의 경전이 많아서 10만 송(頌)이 한 부(部)로 된 것이 수십 종류나 있었다.

60) 주구파(朱駒波)․주구파(朱俱波)․주거(朱居)․자합(子合)이라고도 한다. 카슈갈로부터 동남쪽

5백여 리의 사다하(徙多河:Yarkand darya)를 건너 큰 고개를 넘어서 이 나라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의 칼가락(Karghalik) 지방인데, 새가 모여드는 거리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부터 동쪽으로 8백여 리를 가서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61)[당(唐) 나라 말로 지유(地乳)라고 한 것은 속가에서 듣기 좋게 하는 말[雅言]이다. 보통 환나국(渙那國)이라고도 한다. 흉노(凶奴)는 이곳을 우둔(于遁)이라고 하고, 여러 오랑캐 나라들에서는 감단(監旦)이라 하며, 인도에서는 굴단(屈丹)이라 한다. 옛날에 우전(于闐)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사막[沙積]이 태반인데도 오곡이 풍성하고 과일도 많다. 모포와 모직물 등을 산출하며, 공인(工人)들은 고운 명주를 짠다. 또 땅에서는 수정[白玉]과 호박[瑿玉)이 많이 난다. 기후도 온화하다.

풍속을 보면, 예의를 알고 학문을 숭상하며 음악을 즐긴다. 이곳 사람들은 풍채가 단정하여 다른 오랑캐 나라들의 풍속과는 다르다. 문자는 멀리 인도의 글자를 따르되 약간 개정하여 쓴다.

불법을 존중하여 나라 안에 가람이 1백 개, 승려는 5천여 명이나 되고, 대승을 배우는 이가 많다. 이 나라의 왕은 지혜가 있고 용감하며, 덕 있는 선비를 존경하여서 스스로 비사문천(毘沙門天)62)의 후예라 한다.

왕의 선조는 무우왕(無憂王)의 태자로서 달차시라국(怛叉始羅國)에 있다가 뒤에 설산의 북쪽으로 귀양을 와서 유목민(遊牧民)으로 살게 되었다. 그리고 물과 풀을 따라 유랑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게 된 것이다.

왕은 오래도록 자식이 없기에 비사문천의 묘당(廟堂)에 가서 빌었더니, 어느 날 묘신(廟神)이 이마가 갈라지면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리고 또 묘당 앞의 땅에서 이상한 물이 솟아났는데, 물맛이 달고 향기롭기가 젖[乳]과 같았다. 그래서 이 물을 떠서 태어난 아이를 길렀다고 한다.

마침내 어른이 되어 왕이 별세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위덕(威德)을 멀리까지 떨쳐서 그 힘으로 여러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금의 왕은 바로 그의 후예가 된다. 그 선조가 당초에 땅에서 나는 젖, 즉 지유(地乳)를 먹으며 자랐다 해서 우전(于闐)의 바른 음은 지유국(地乳國:쿠스타나)이라 한다.

61) 원음은 카로슈디이며 문서에 Kustana․kustanaka로 쓰여 있다. 수곡씨는 gostāna로 추정하며

타림분지 남부의 요충지 호탄(khotan)지방이다. 도성은 백옥하(白玉河)에 가까운 지금의 호탄의

한성(漢城)의 서쪽 8km에 있는 요트칸(Yŏtkan)의 폐허 자리였다. 한성(漢城)은 호탄의 서쪽에

있고 동쪽에는 회성(回城)이 있다. 현장은 쿠스타나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왕성(王城)의

서쪽 8백 리인 발가이성(勃伽夷城)에 이르렀다. 발가이의 원음은 Bhagal․Bhāgya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타인은『가침도리기(賈耽道里記)』(『당서』43권「지리지(地理志)」하)의 제5

「안서입서역도(安西入西域道)」에서 볼 수 있는 “우전(于闐)의 서쪽 45리에 위관(葦關)이 있다.

또 서행하여 발해를 지나 서북쪽 예관하(繄舘河)를 건넜다”라고 한 기록 가운데 발해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파이만(帕爾漫:Piālma) 부근이라 한다. 원문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장은 이곳에

7일 간 유숙한 다음, 우전왕(于闐王)의 마중을 받아 3일 후에 호탄에 도착하였다.

62) 비사문천(鞞沙門天)으로도 적는다. 욕계(欲界) 6천(天) 중 4천왕천(天王天)을 주재하는 4천왕 중

북방의 천왕, 또는 이 천왕의 세계를 말한다. 수미산왕(須彌山王)의 동쪽으로 4만 리 떨어진 곳에

비사문천왕의 성곽이 있는데, 그 넓이와 길이는 각각 24만 리이며, 일곱 가지 보배로 지어진 성에는

숲과 연못 등이 가득하다고 한다.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여 설법을 들으므로 다문천

(多聞天)이라고 번역한다. 힌두교의 구비라(俱毘羅), 즉 쿠베라 신과도 동일시되어 복을 베푸는

신으로 간주된다.

 

법사는 그 국경으로 들어가 발가이성(勃伽夷城)에 이르렀다.

성안에 좌불상(坐佛像)이 있는데 높이는 7척(尺) 남짓하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얹었으며 얼굴의 형상은 원만(圓滿)하다. 전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불상은 원래 가습미라국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하는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한 나한이 있었다. 그런데 천연두를 앓고 있던 한 승려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초미병(酢米餠)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나한은 천안(天眼)으로 그 초미병이 구살단나(瞿薩旦那)에 있다는 것을 알고 몰래 신족(神足)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얻어다가 승려에게 주었다.

그 승려는 다 먹고 나서 대단히 기뻐하며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했다.

그 원력(願力)은 어긋나지 않아 목숨을 마친 뒤에 곧 지유국(地乳國)의 왕가에 태어났다. 그래서 왕위를 물려받은 뒤로 뛰어난 재략(才略)과 웅대한 뜻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설산을 넘어 본래의 자기 조국을 치려고 했다.

이때 가습미라왕도 역시 군사를 선별하여 훈련을 시켜서 대항하려고 하였다.

“칼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 나라에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구살단나왕에게로 가서 그의 조상이 불상의 이마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탐욕과 포악을 부리면 어떻게 잘못 되는지를 설명해 주면서, 전생(前生)에 사미였을 때 입었던 의복을 내보였다.

왕이 그것을 보고는 숙명지(宿命智)63)를 얻고, 깊이 부끄러워하며 가습미라왕에게로 가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런 다음 옛적에 공양하던 불상을 모시고 군사를 따라 귀국하려 하였다. 그런데 불상은 이 성에까지 와서는 그 자리에 머물며 나아가지를 않았다. 왕과 여러 군사들이 힘을 다해 옮기려 했으나 끝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불상 위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승려를 초빙하여 모셔오고 평소 애용하던 왕관을 희사하여 부처님의 머리에 장엄하였다. 그 왕관은 지금도 있는데 귀중한 보석이 많이 박혀 있어서 보는 사람들마다 모두 감탄한다.

법사는 여기서 7일간을 머물렀다.

63) 6신통의 하나로, 숙명, 즉 과거생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서, 1세(世)부터 천만 세의 전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우전왕(于闐王:구살단나왕)은 법사가 국경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몸소 나와 영접했으며 나중엔 길 안내자까지 내주었다. 왕은 먼저 도성로 돌아가면서 법사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하인을 남겨 놓고 떠났다. 법사가 동쪽으로 이틀을 더 가자 왕은 또 달관(達官)을 보내서 마중했다.

일행은 도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에서 숙박했다.

다음날 왕은 승려와 속인들을 거느리고 음악을 울리고 향화(香花)를 사르면서 길 왼쪽에서 영접했다. 그리고 법사를 데리고 도성으로 들어가 소승살바다(小乘薩婆多)의 절로 모셨다.

왕성의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큰 가람이 있는데, 이것은 이 나라의 선왕이 비로절나(毘盧折那:Vairocana)[당나라 말로 변조(遍照)라고 한다.] 아라한을 위해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에 법의 가르침이 들어오기 전에 아라한은 가습미라국에서 이곳으로 와서 숲 속에 앉아 있었다.

이때 이를 본 사람이 그의 생김새나 옷차림을 수상히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듣고는 직접 가서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는 사람이기에 홀로 숲 속에 살고 있는가?”

아라한이 대답했다.

“나는 여래의 제자입니다. 법에 따라 한거(閑居)하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아라한이 대답했다.

“여래라는 것은 불타(佛陀)의 덕호(德號)입니다. 옛날 정반왕(淨飯王)의 태자 일체의성(一切義成)

64)께서 모든 중생이 고해(苦海)에 빠져 있지만 구제받을 수도 없고 귀의할 데도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7보(寶) 등의 많은 재산과 4주(洲)65) 윤왕(輪王)66)의 지위를 버리시고 한림(閑林) 속에서 수도한 지 6년 만에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황금색의 몸이 되어 무사(無師)의 법을 증득하시어 감로를 녹야원(鹿野苑)에 뿌리고 마니(摩尼)67)를 취봉산(鷲峯山)68)에 빛내셨습니다.

80년 동안 가르침을 보이시어 이로움과 기쁨을 주시다가 화현한 인연이 이미 다한 후에는 진리[眞]에 귀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남긴 불상[遺像]과 남긴 전적들[遺典]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전생의 복이 있어서 지위는 인주(人主)가 되셨으니 마땅히 법륜(法輪)을 널리 펴시고 식자(識者)들의 귀의처가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하시니 이 무슨 이치란 말입니까?”

왕이 말했다.

“나는 죄업(罪業)이 두텁게 쌓여 아직 부처님의 명호도 들어보지 못했소. 이제 성인(聖人)이 베푼 덕을 입었으니 오히려 이것은 여복(餘福)입니다. 이미 남기신 불상과 남기신 전적이 있다 하셨으니 받들어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라한이 말했다.

“즐거움을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가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신령스런 불상[靈像]은 스스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왕은 곧 돌아와서 여러 신하와 함께 의논하여 빼어나게 좋은 터를 택하고 장인(匠人)을 뽑아다가 나한에게 가람의 양식을 물어서 이 절을 짓도록 명령했다.

절이 완성되자 왕은 다시 청하여 물었다.

“가람이 이미 다 완성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상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아라한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그저 정성을 다하시기만 하면 불상은 머지않아 이르시게 될 것입니다.”

왕은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각기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며 일심으로 서서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공중에서 갑자기 불상이 날아와 보좌(寶座)에 앉았는데, 환한 광채가 나며 얼굴은 숙연했다.

왕이 보고는 환희하며 더없는 경사라 칭송하고는, 나한에게 대중을 위해 설법해 주도록 간청했다.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널리 공양을 베풀었다.

그래서 이 가람은 이 나라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것이 되었다.

64) 실달태자(悉達太子)를 말한다. 실달은 싯다르타의 음역인 실달다(悉達多)의 줄임말이다.

일체의성은 한역한 것이다. 원뜻은 모든 것을 성취한 이라는 뜻이며, 석가모니가 출가 전

태자였을 때의 이름이다.

65) 수미산(須彌山) 사방에 있는 4개의 큰 섬인 남섬부주(南贍部洲)․동승신주(東勝身洲)․서우화주

(西牛貨洲)․북구로주(北瞿盧洲)의 4주(洲)를 말한다. 4주 가운데 동방이 가장 수승하다고 한다.

66) 윤보(輪寶)를 굴리면서 일체를 굴복하고 수미(須彌) 4주(洲)를 통솔하는 대왕, 즉 전륜성왕

(轉輪聖王)을 말하는 것이다.

67) 번역하여 주(珠)ㆍ보(寶)ㆍ무구(無垢)ㆍ여의(如意)ㆍ보주(寶珠)ㆍ여의주(如意珠)라고 한다.

이 구슬은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68) 중인도(中印度)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산으로, 범어(梵語)의

음을 따서 기사굴산(耆闍堀山)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취령(鷲嶺)․취봉(鷲峰)․취암(鷲巖)․취악(鷲嶽)․취대(鷲臺)․영산(靈山)․영취산(靈鷲山)․기사굴산

(耆闍崛山)이라 하는데, 산정에 독수리가 많아서 왕사성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법사는 앞에서 신도강(信度江)을 건널 때 경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전국(于闐國)69)에 있으면서 다시 굴지국(屈支國)70)과 소륵국(疏勒國)으로 사람을 보내서 경본(經本)을 구해오도록 했다.

게다가 우전왕이 계속 만류하였기 때문에 빨리 귀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사는 당나라 임금에게 올리는 표문(表文)을 써서 고창(高昌)의 소년 편에 보냈다. 소년은 상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법사는 일찍이 바라문국으로 가서 법을 구하였고, 지금은 귀국하는 길에 우전국으로 오게 되었다는 내력을 상주하였다. 그가 올린 표문은 다음과 같다.

“사문 현장은 아뢰옵니다. 제가 듣기로는 마융(馬融)71)이 해박하였기 때문에 정현(鄭玄)72)은 부풍(扶風)의 스승에게 배웠고, 복생(伏生)73)이 명민(明敏)했기 때문에 조착(晁錯)74)은 제남(濟南)75)으로 가서 배웠다고 합니다.

이로써 가까이는 유림(儒林)에서조차 옛사람들은 멀리까지 가서 학문을 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제불(諸佛)께서 만물을 이롭게 하신 현묘한 발자취와 경․율․논 삼장의 묘설(妙說)을 감히 길이 멀다고 꺼려하여 찾아가 숭모(嵩慕)할 자가 없겠습니까?

일찍이 불교가 서역(西域)에서 일어나 그 가르침이 동방으로 전파되면서 훌륭한 경전이 전래되었다고는 하나 원만한 종지(宗旨)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인도에 가서 배울 생각에 신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정관(貞觀) 3년 4월에 국법을 어기고 몰래 천축(天竺)76)으로 향했습니다. 망망한 사막을 밟고 높은 설령(雪嶺)을 넘고 철문(鐵門)의 험준한 길과 열해(熱海)77)의 파도를 지나, 비로소 장안(長安) 신읍(神邑)에서부터 왕사성(王舍城) 신성(新城)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간에 경유한 거리는 5만여 리였고 풍속은 천차만별이며 간위(艱危)는 첩첩으로 쌓였으나 천위(天威)를 믿고 의지했으므로 가는 곳마다 막히는 일 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후한 대접 덕택으로 몸이 고달픈 일 없이 마음속 서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기사굴산(耆闍崛山)을 보게 되었고 보리수에 예배할 수 있었으며, 보지 못했던 불적(佛迹)을 보았고 들어보지 못했던 경전을 들었습니다. 우주의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다 보았고 음양(陰陽)의 화육(化育)을 터득하였으며, 그리고 우리나라 황제의 정사[皇風]의 덕과 은택을 선양했으며 풍속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흠모하는 생각을 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루 지나면서 보고 다닌 지 17년 만에 지금은 발라야가국(鉢羅耶伽國)78)을 출발하여 가필시(迦畢試) 국경을 지나 총령(蔥嶺)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파미라(波䜝羅)강을 건너 귀환하는 길에 우전국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끌고 오던 큰 코끼리들이 익사하는 바람에 경본(經本)을 많이 싣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잠시 더 머물러야 하겠기에 급히 달려가서 빨리 폐하를 배알할 수 없습니다.

우러러 앙모하는 마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삼가 고창의 속인 마현지(馬玄智)로 하여금 상인들을 따라 표문을 받들어 가서 먼저 아뢰게 하는 것입니다.”

69) 고대 서역(西域)에 자리했던 왕국으로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ㆍ우둔국(于遁國)ㆍ우치국(于眞國)ㆍ

지유국(地乳國)ㆍ굴단국(屈丹國)ㆍ우전국(于塡國)이라고도 한다. 우전국의 임금이 석존을 무척

사모하였는데 석존이 삼십삼천(三十三天)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우두전단(牛頭旃檀) 나무에 석존의 상(像)을 조각하여 모셨다. 이것이 불상의 시초가 되었다.

70) 굴지는 쿠차의 음역으로 고대 서역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71) 중국 후한(後漢)의 유학자(79-166)로, 자는 계장(季長)이고, 섬서성(陜西省) 무릉(茂陵) 출생이다.

안제(安帝) 및 환제(桓帝) 때에 관직에 나가 태수가 되었다. 수경(數經)에 통달하여 노식(盧植),

정현(鄭玄) 등을 가르쳤다. 『춘추삼전이동설(春秋三傳異同說)』을 짓고,『효경』과 『논어』ㆍ

『시경』ㆍ『주역』ㆍ『삼례』ㆍ『상서』ㆍ『열녀전』ㆍ『노자』ㆍ『희남자』ㆍ『이소(離騷)』

등을 주석했다. 문집 21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단편(斷片)만이 남아 있다.

72)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127-200)이며, 자는 강성(康成)이고 북해(北海:山東省)

고밀(高密) 출생이다. 마융(馬融) 등에게 사사하여,『역(易)』ㆍ『서(書)』ㆍ『춘추(春秋)』

등의 고전을 배운 뒤 40세가 넘어서 귀향하였다. 그가 낙양을 떠날 때 마융이 “나의 학문이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떠나는구나” 하고 탄식하였을 만큼 아끼던 제자였다. 시종 재야(在野)

학자로 지냈지만,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73) 복생은 곧 복승(伏勝)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 진시황(秦始皇)이 불태워 없애버린 경전을

복원할 당시 제남에 사는 복생(伏生)이 90여 세의 나이로 『상서(尙書)』를 구술(口述)하여

세상에 전하게 되었는데, 그의 생전에 그 지방의 장생(張生)과 구양생(歐陽生)에게『상서』의

학문을 전수하였다.『한서(漢書)』88권에 나온다.

74) 한(漢) 영천(潁川) 사람으로, 조착(鼂錯)이라고도 한다. 문제(文帝) 때에 태상장(太常掌) 직에

있었었기 때문에 왕명을 받아 복생에게『상서(上書)』를 받아 왔다.

75) 제남은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땅이름으로, 복생(伏生)이 제남사람이다.

76) 인도를 말한다. 인도를 동서남북, 그리고 중으로 나누어 5천축이라고 부른다.

77) 천산(天山)의 서쪽, 총령(葱嶺之北)에 위치하며, 또는 대청지(大淸池)․전지(闐池)․염해(鹹海)라고

한다. 서역에 있는 큰 호수이며, 우즈베키스탄의 이식쿨 호수를 말한다. 동서 길이가 182킬로미터,

남북의 너비가 60킬로미터나 되며, 면적은 6,332 평방킬로미터이다. 호수의 물이 짠맛을 띄고 있어서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고 한다.

78) 범어 Prayāga의 음사이다. 이곳은 옛적부터 유명하여 마하바라타(Mahabharata) 등의 고전에도

종종 보인다. 강가강과 암나강의 합류점으로, Allahabad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이다.

 

그 후로 법사는 우전국의 여러 승려를 위해『유가(瑜伽)』․『대법(對法)』․『구사』․『섭대승론』의 4론(論)을 주야로 쉬지 않고 번갈아 강의했다.

왕도 승려와 속인들과 함께 귀의하여 강의를 들었으며, 강의를 듣는 사람이 매일 천 명이 넘었다. 이렇게 7월과 8월이 지나자 사자(使者)도 돌아왔다. 다행히도 은혜로운 칙명이 내려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하셨다.

“들으니 법사께서는 멀리 이역(異域)을 두루 방문하고 지금 귀국길에 올랐다고 하니 기쁘기가 그지없다. 빨리 돌아와 짐(朕)과 상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나라의 승려로서 범어(梵語)와 경의(經義)를 잘 아는 사람도 데리고 오도록 하라.

짐은 이미 우전국 등 연도의 모든 나라로 하여금 법사를 전송하도록 칙명을 내렸으니 인력이나 탈 것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돈황(燉煌)79)의 관사(官司)에게도 사막에서 영접하도록 했고, 선선(鄯善)80)의 관리에게는 저말(沮沫)81)에서 영접하도록 명하였다.”

79)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도시이다.

80) 옛터가 지금 신강성(新疆省) 약강현(若羌縣) 경내에 있다.

81) 지금의 차말(且末)의 서남 지역이다.

 

이에 법사도 조칙을 받들어서 곧 출발했는데, 우전왕은 매우 성대하게 전별(餞別)해 주었다.

우전국의 도성을 출발하여 3백여 리를 동쪽으로 가서 비마성(媲摩城)에 이르렀다.

성안에는 단(檀)나무로 조각한 불상(佛像)을 세워 놓았는데 높이는 2장(丈) 남짓하고 얼굴 모습과 자태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매우 영험이 많다고 했다. 만약 사람이 질병에 걸렸을 때는 그 사람의 아픈 부위에 따라 불상의 같은 부위에다 금박을 얇게 붙이면 병은 곧 나아버린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고 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교상미국(憍賞彌國)의 오다연나왕(鄔陀衍那王:Udayana)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그 나라에서 날아와 이 나라의 북쪽에 있는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에 이르렀다가, 뒤에 다시 스스로 이동하여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다.[이 인연에 대해서는 별전(別傳)의 기록과 같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가의 법이 멸하게 되면 이 불상은 용궁(龍宮)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이 비마성에서 동쪽의 사막으로 들어가 2백여 리를 가서 니양성(泥壤城)82)에 이르렀다.

82) 한대(漢代)의 정절국(精絶國)으로서 카로슈디 문서에는 챠도타(Cad’ota)로 기록되었다. 지금의

민풍현(民豊縣) 북방 약 130km인 사막 중의 니아 유적지를 가리킨다. 비마천(媲摩川)은 아마

게리야강이며, 니아 유적지는 여기서부터 동쪽 80km 남짓쯤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의 큰 사막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물처럼 흐르고 땅에는 물이나 풀이라곤 없으며 열독(熱毒)과 도깨비의 병이 많다. 길이 나 있는 것이 아니라서 행인들이 가고 올 때에는 사람이나 동물의 유해(遺骸)를 바라보며 표지로 삼아야 한다. 메마른 모래와 자갈땅이라서 걷기도 어렵다. 자세한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4백여 리를 가서 도화라(覩貨邏)의 고국(故國)83)에 이르렀다. 여기서 다시 6백여 리를 가서 절마타나(折摩馱那)84)의 고국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바로 저말(沮沫)의 땅이다.

83) 현장은 여기서 카로슈디 문서를 발견했는지 니아 유적지와 출춘(cherchen) 사이의 폐허를

도카라 고국(故國)이라 불렀다. 지금의 엔데레(Endere) 유적으로 추정된다.

84) 원음은 calmadāna 또는 calmadana이며. 한나라 이름 차말(且末)․좌말(左末) 등은

Calmad[ana]를 번역한 것이다. 지금의 Cherchen(Charchan)이다.

 

다시 동북쪽으로 1천여 리를 가서 납박파(納縛波)85)의 고국(故國)에 이르렀다. 즉 누란(樓蘭)86)의 땅이다.

여기에서 길을 구불구불 돌아서 중국의 국경에 이르렀다. 그간 타고 왔던 말도 여기서 놓아주고 우전국 사인(使人)과 타마(馱馬)도 돌려보냈다.

조칙대로 수고에 대한 보수를 주었으나 모두 받지 않고 돌아갔다. 법사는 사주(沙州)87)에 이르러 또 상표문을 올렸다. 당시 황제는 낙양궁(洛陽宮)에 있었는데 상표문이 이르자 법사가 점차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서경(西京) 유수(留守) 좌복야(左僕射)88) 양국공(梁國公) 방현령(房玄齡)89)에게 칙서를 내려 유사(有司)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하였다.

85) 지금의 로프지방을 말하며, 옛날의 선선국(鄯善國:樓蘭)의 옛터이다. 그러나 현장이 통과한

지역이 로란 유적지를 거쳐서 로프호의 북쪽을 경유했는지 미란지방에서 로프호의 남쪽으로

직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당서(唐書)』「지리지(地理志)」

말미에 있는「가침도리기일문(賈耽道里記佚文)」에서는 “또 하나의 길은 사주(沙州) 수창현

(壽昌縣)으로부터 서쪽 10리인 양관(陽關) 고성(故城)에 이른다. 다시 서쪽으로 가서 포창해

(蒲昌海) 남쪽 기슭에 이르는 데 천 리이다. 포창해 남쪽 기슭에서 서쪽으로 칠둔성(七屯城)을

지나면 한나라의 이수성(伊修城)이다. 또 서쪽으로 80리에 석성진(石城鎭)이 있으며, 한(漢)의

누란국(樓蘭國)이다. 이곳을 선선(鄯善)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면서 로프호 남쪽 기슭을 거쳐

미란지방으로부터 돈황으로 직행하는 길을 기록하고 있는데, 틀림없이 이 길을 따라 서둘러

귀국했을 것이다.

86) 선선(鄯善)을 말한다.

87)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을 말한다.

88) 중추기구(中樞機構) 상서성(尙書省)의 장관으로, 당초(唐初)에는 상서성 좌우 복야와 중서성

(中書省) 시중(侍中)이 함께 재상을 맡았다.

89) 중국 당나라 때의 재상으로, 당나라가 일어나자 태종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제주(齊州)

임치(臨淄) 출생으로, 대대로 북조(北朝)를 섬기는 집안이었다. 18세에 수(隋) 나라의

진사(進士)가 되었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세력에 가담,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다. 정치에 밝고, 공평한 태도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두여회(杜如晦)와 더불어 현상

(賢相)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정관지치(貞觀之治)는 그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태종의

신임이 지극하여 고구려 공격 때에는 장안(長安)에 남아 성을 지키기도 하였다. 태종의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법사는 천자가 요하(遼河) 지방의 죄를 물으러 정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늦어져 이르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길을 더욱 재촉해서 행진했다. 그래서 너무 빨리 운하에 도착했으므로 관리는 영접이 늦어져 환영 의식(儀式)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소문을 듣고 달려와 법사를 보고 예배하려는 사람들이 길을 가득 메워, 서로 밟고 오르고 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법사는 운하 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5권 5. 니건자(尼乾子)에게 귀국(歸國)에 관한 점을 친 때부 터 제성(帝城)의 서조(西漕)에 이르기까지 구마라왕(鳩摩羅王)1)의 사신이 오기 전이었다. 맨몸을 드러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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