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와 佛敎思想(불교사상)

수선님 2021. 2. 28. 13:03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와 佛敎思想(불교사상)

敎育(교육)의 本質(본질)은 自己本來(자기본래)로의 再轉換(재전환)

 

◇이 글은 지난 4일 韓國敎育學會(한국교육학회) 韓國敎育史硏究會(한국교육사연구회)가 ‘韓國敎育(한국교육)의 思想的(사상적) 淵源(연원)’이라는 主題(주제)아래 本校(본교) 교수회의실에서 개최한 年次(연차) 學術大會(학술대회)에서 筆者(필자)가 發表(발표)한 논문의 要旨(요지)이다.

1.韓國佛敎思想(한국불교사상)의 敎育哲學的(교육철학적) 特性(특성)

佛敎(불교)에 있어서 바람직한 人間形成(인간형성)의 이론은 ‘ 깨달음’의 형식을 통해 無實體(무실체)한 존재의 實相(실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데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自主人(자주인), 즉 밝고 따뜻한 주체적 인간’으로 표상되는 불교의 교육적 인간상의 형성도 본질적으로는 깨달음에서 구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佛敎思想(불교사상)은 그 사상적 독자성과 영향력의 두 관점에서 볼 때 元曉(원효)와 知訥(지눌)의 그것으로 대표될 수 있다.

신라의 元曉(원효)는 一心(일심)을 우리들 각자의 본래적인 마음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본체라고 보았다. 一心(일심)은 본래 참되고 뚜렷한 것인데 언제인가 알 수 없는 어둠(無明(무명))의 영향에 의해 그릇된 인식작용을 일으켜 我執(아집)과 獨善(독선)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참된 一心(일심)의 회복이야말로 元曉(원효)에게 있어서 바람직한 인간형성의 이론적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 누구나가 본래 갖추고 있는 참된 一心(일심)의 內因(내인)에 선각자의 外緣(외연)을 만나 자신이 본래 참된 一心(일심)임을 확신하고 자아완성의 大願(대원)을 세워 一大修行(일대수행)을 감행해갈 것을 권하고 있다. 그 수행방도로 元曉(원효)는 施(시)․戒(계)․忍(인)․進(진)․止觀(지관)의 五門(오문)을 말하고 있다.

이 五門(오문)의 수행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밝아져 본래의 一心(일심)을 기능적으로 회복해 가는바, 이 수행은 主客(주객)의 분별과 대립을 넘어선 無念(무념)의 수행 즉 無我(무아)의 수행이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元曉(원효)는 바람직한 인간형성을 自他(자타)의 대립을 초월한 자기연수와 사회건설참여의 통합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본 점이다.

고려의 知訥(지눌)은 존재의 본체를 眞心(진심)․自心(자심)․ 또는 空寂靈知之心(공적령지지심)이라는 말로 많이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또한 인간존재의 본체로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本來面目(본래면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知訥(지눌)에게 있어서 인간형성의 요체는 우리 각자의 본래면목인 自心(자심)을 그 자체의 빛으로 조명하여 空寂靈知(공적령지)한 그 본래의 기능을 회복․실현의 과정에 대한 이론이 그의 人間(인간)형성이론으로서 주목되는 ‘頓悟漸修(돈오점수)’設(설)이다. 頓悟(돈오)란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을 바르게 알지 못하여 그릇된 생활속에 방황하다가 선각자의 가르침을 만나 홀연히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됨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비연속적이며 비약적으로 나타나는 명료한 자기통찰이요 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까지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일대전환이 온다. 그러므로 頓悟(돈오)는 인간형성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그 頓悟(돈오)만으로 人間(인간)형성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頓悟(돈오)한 내용이 삶에서 완전히 구현되기 위해서는 돈오한 힘에 인도되면서 끊임없이 점진적인 수행(漸修(점수))을 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頓悟(돈오) 없는 漸修(점수)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수행이 아니라 迷路(미로)의 방황에 불과하다는 것이 知訥(지눌)의 견해이다. 이 漸修(점수)는 구체적으로는 定(정)과 慧(혜)의 수행이며, 그 수행은 無念(무념)의 수행 즉 無我(무아)의 수행이어야 한다.

이 無念(무념)(無我(무아))의 수행은 곧 자타의 분별을 초월한 ‘同體慈悲(동체자비)의 利他的(이타적) 수행’과 ‘자아완성의 自利的(자리적) 수행’의 통합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은 그 과정에 있어 止(지)(定(정))와 觀(관)(慧(혜))을 그 방법으로 하고 있으며, 자아완성과 理想社會(이상사회)건설의 두 이념이 자타의 분별을 넘어선 無念(무념)(無我(무아))의 실천속에 통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 인간형성의 시간적 차원은 元曉(원효)에게 있어서는 연속적 인간형성의 색체가 강하나, 知訥(지눌)에 이르러서는 비연속적 각성을 전환점으로 하여 연속적 형성을 기함으로써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통합되고 있다.

Ⅱ.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에 있어서 佛敎思想(불교사상)

본래 교육은 삶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광의의 교육은 사람이 삶의 과정속에서 삶을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人間形成(인간형성)에 영향하는 모든 작용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가 우리민족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바로 불교가 우리민족에게 크게 敎育的(교육적) 작용을 했다는 것이 된다.

孫仁銖(손인수)는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불교가 形式的敎育(형식적교육)(學校敎育(학교교육))은 확립하지 못하였지만 非形式的(비형식적) 교육(생활속에서의 無意圖的 敎育(무의도적 교육))의 면에서 볼 때 유교의 모방교육과는 달리 독창성과 창작적 기능을 계발하여 주었다고 지적한바있다. 그러면 일보 전진하여 불교의 어떤 사상이 이러한 독창성을 가능케 했을까.

本(본) 論者(논자)는 분석적 사유를 초월한 無我(무아)의 경지에서가 아니면 그것이 불가능했을 만큼 위대한 예술품을 과거 우리민족이 수없이 창조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불교사상은 원래 자각을 그 알맹이로 하므로 인간 각자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각을 구현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 元曉(원효)와 知訥(지눌)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사상에서는 止(지)(定(정))와 觀(관)(慧(혜))의 결행이었으며, 이 止(지)와 觀(관)은 無念(무념), 즉 無我(무아)의 경지에서 행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의 분별을 넘어서서 一心不亂(일심불란)의 삼매경에서 그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지에서 우리민족은 수많은 고도한 예술작품을 창조해 왔다고 하겠다.

특히 內憂外患(내우외환)의 어려운 시대에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고려대장경과 고려청자가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止(지)와 觀(관)의 실천사상의 영향이 아닌가 하고 추리해본다.

그밖에 한국인의 사상적 심층을 형성하는 데에 어떤 불교사상이 작용했는가. 여기에 있어서 문학작품의 분석을 통한 접근은 하나의 유효한 방법일 것이다. 金起東(김기동)은 방대한 자료의 검토를 통해 국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을 知恩報恩(지은보은)의 倫理思想(윤리사상)․因果思想(인과사상)․輪廻思想(윤회사상)․誓願思想(서원사상)․淨土思想(정토사상)․來世思想(내세사상)․靈驗思想(영험사상)의 7가지로 분석해낸 바 있다. 本(본) 論者(논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러한 7가지는 모두 因果業報思想(인과업보사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이다. 이 因果業報思想(인과업보사상)은 한국인의 심층적 가치관에 있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本(본) 論者(논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가 긍정된다면 因果業報(인과업보)의 구속으로부터도 해탈하려는 - 元曉(원효)나 知訥(지눌)에게서 보이는 -고도의 大乘思想(대승사상)보다는 因果業報(인과업보)의 小乘的(소승적) 가치관이 오히려 민중의 인간형성에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한편, 형식교육의 면에서 볼 때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불교사상이 어떻게 작용해 왔는가.

한국불교는 開港(개항)이후 교육근대화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세속적인 학교교육으로는 전개되지 못했다. 단지 寺院(사원)에는 승려들을 위한 超(초)세속적인 교육제도만은 있었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불교를 세속의 단순한 학문이나 윤리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종교로 수용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佛敎思想(불교사상)자체가 고도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형식적 틀을 초월코자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불교는 형식적 교육에 전연 관련이 없는 것인가. 종래 그렇게 보아온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라고 本(본) 論者(논자)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한국교육사에 있어서 한국교육은 어디까지나 유교교육이었고 불교와는 관계가 없었다고 보는 한국문화사에 있어서의 儒(유)․佛(불)교섭관계를 통하여 학교교육에 직․간접으로 불교사상이 영향했을 가능성을 무시한 短見(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에 있어서 문헌상 최초의 학교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太學(태학)은 불교의 전래를 계기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太學(태학)은 불교와의 깊은 관계속에서 출발하고 있다. 신라에 있어 儒學(유학)의 大宗(대종)인 薛聰(설총)이나 崔致遠(최치원) 등은 모두 불교에 대해 깊이 연구했던 사람들이다. 고려에 있어서도 거의 모든 儒學者(유학자)들이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고, 일보 전진하여 고려의 많은 儒者(유자)들도 寺院(사원)에서 승려들에게 배웠던 것이다. 이점은 고려사 李齊賢傳(이제현전)에 나오는 忠宜王(충의왕)과 李齊賢(이제현)의 대화의 한 대목에서도 분명하게 입증된다. 또 고려의 學堂(학당)이 초기에 寺院(사원)을 學舍(학사)로 이용했으며, 고려사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崔沖(최충)의 九齊學徒(구제학도)들이 여름에는 僧房(승방)에서 夏季講習(하계강습)을 실시했음은 이미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러한 불교와 유교 내지 불교와 학교와의 교섭관계를 볼 때 비록 外顯的(외현적) 또는 明示的(명시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內顯的(내현적) 또는 黙示的(묵시적)으로는 불교사상이 형식적 교육에 영향한바 적지 않을 것임을 推理(추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사상 가운데 어떤 것이 형식적 교육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보다 면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는 儒敎(유교)에 의해 一敗塗地(일패도지)되어 前朝(전조)에 비해 불교가 유교 내지 형식적 교육에 영향한바가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이 문제도 그렇게 간단히 단정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중국의 性理學(성리학) 자체가 불교사상에 크게 영향되어 확립된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本(본) 論者(논자)의 견해로는 중국의 性理學(성리학) 자체가 修養論(수양론)에 있어서는 불교의 止觀(지관)(定慧(정혜))법이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이점 한국의 性理學(성리학)에 있어 예외일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栗谷(율곡)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周知(주지)하는 바와 같이 栗谷(율곡)은 少時(소시)에 佛經(불경)을 널리 읽었고 한 때는 입산하여 禪學(선학)을 공부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는 外顯的(외현적)으로는 조선조에 있어 排佛(배불)의 기수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으나 그의 性理學(성리학)의 심층에는 도처에 불교적 영향이 깃들여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있어 교육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교육서라고 할 수 있는 栗谷(율곡)의 擊蒙要訣(격몽요결)과 學校模範(학교모범)에 보면 居敬(거경)과 存心(존심)의 방법은 元曉(원효)에게서는 止觀(지관)으로 표현되고 知訥(지눌)에게서는 定慧(정혜), 또는 寂寂惺惺(적적성성)으로 표현되는 修行方法(수행방법)과 同一(동일)하다. 다만 論理構造(논리구조)로 볼 때 元曉(원효)와 知訥(지눌)은 自覺(자각)을 목적으로 함에 비하여 栗谷(율곡)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正心(정심)을 위한 漸進工夫(점진공부)-따라서 지눌에게서 보이는 人間形成(인간형성)의 비연속적 비약성은 배제되어 있다-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 방법은 동일하다.

이상에서 볼 때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에 있어서 불교사상은 非形式的(비형식적) 敎育(교육)은 물론이려니와 형식적 교육에도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주된 것은 止觀(지관)즉 定慧(정혜)(寂寂惺惺(적적성성))이었고, 因果業報思想(인과업보사상)도 민중의 가치관의 형성에 또한 큰 영향을 미치었다고 하겠다. 이 이외에도 不殺生(불살생)으로 상징되는 불교의 철저한 慈悲思想(자비사상) 그리고 한국불교사상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統佛敎(통불교)및 호국의 전통이 형식적 및 비형식적 교육면에서 어떻게든지 작용하였을 것임이 想定(상정)되나, 그에 대한 면밀한 교육학적인 연구는 앞으로 또한 남은 과제라 하겠다.

Ⅲ. 弘益人間(홍익인간)의 敎育理念(교육이념)과 佛敎思想(불교사상)

현재 우리나라의 敎育理念(교육이념)은 敎育法(교육법) 제1조에 ‘弘益人間(홍익인간)’으로 명시 되어 있다.

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의 교육이념으로서의 합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弘益人間(홍익인간)의 이념에 대한 哲學的(철학적)배경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예는 별로 없다. 本(본) 論者(논자)는 ‘弘益人間(홍익인간)’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내지 사상적 배경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불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自然科學的(자연과학적) 실험의 객관적 記述(기술)에 있어서도 기술자의 무의식적 주관이나 가치관이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더욱이 弘益人間(홍익인간)의 이념이 등장하는 檀君神話(단군신화)가 국난의 시대에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적 생명력을 更生(갱생)시키고자 불교계의 高僧(고승)에 의하여 撰述(선술)된 三國遺事(삼국유사)속에 실려 있는 것이고 보면 三國遺事(삼국유사)의 檀君神話(단군신화)가 아무리 예부터 전해오는 神話(신화)라 해도 거기에는 撰者(선자)인 普覺國師(보각국사) 一然(일연)의 불교적 사상과 가치관이 役影(역영)되었을 것임은 넉넉히 예상된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檀君神話(단군신화)에서 대번에 농도 짙은 불교적 色調(색조)를 발견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文獻(문헌) 가운데 ‘弘益人間(홍익인간)’과 의미상 같고 표현상으로도 비슷한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元曉(원효)의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의 ‘弘益人間(홍익인간)’이라는 말은 원시불경인 增一阿含經(증일아함경)의 인용문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미의 용어인 ‘饒益中生(요익중생)’․‘利益中生(이익중생)’은 大乘經典(대승경전) 到處(도처)에 나온다.

불교에서의 ‘인간’이란 말은 크게 보아 두 가지 意味(의미)를 가진다. 中生(중생)의 輪廻(윤회)하는 範圍(범위)라고 할 수 있는 地獄(지옥)․餓鬼(아귀)․畜生(축생)․人間(인간)․天上(천상)․阿修羅(아수라) 等(등) 六道(육도)의 하나로서의 意味(의미)가 그 하나이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세간으로서의 의미가 또 그 하나로 보는 경우에서는 인간은 衆生(중생)에 내포되는 것이어서 인간과 중생을 代替(대체)하는 것은 論理上(논리상) 때로는 誤謬(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排除(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간의 의미로 파악할 때에는 인간의 槪念(개념)은 衆生(중생)의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사람이 살고 있는 世間(세간)이란 사람이 삶속에서 유형․무형 및 직접․간접으로 因緣(인연)을 맺고 있는 世間(세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世間(세간)은 衆緣所生(중연소생)의 모든 존재 즉 ‘衆生(중생)’이라는 말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특히 大乘佛敎(대승불교)의 思想(사상)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따라서 佛敎(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弘益衆生(홍익중생)’과 ‘弘益人間(홍익인간)’은 크게 보아 같은 말이라고 하겠다.

이상과 같은 佛敎的(불교적) 접근을 통해 볼 때 인간을 자연 또는 동물과는 대립되는 존재로서 파악하고 그러한 인간을 本位(본위)로 하는 西洋(서양)의 Humanism과 弘益人間(홍익인간)의 理念(이념)을 종래에 同質視(동질시)해온 것은 참으로 牽强附會(견강부회)요 지극히 피상적 견해라고 하겠다.

Ⅳ. 結論(결론)

이상의 이론에서 본 바와 같이 元曉(원효)와 知訥(지눌)로 대표되는 한국불교의 人間形成理論(인간형성이론)은 그 초점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빛에 의해 자기 자신의 존재로 비추어보고 그 빛을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 다시 말해 자각과 그 자각의 삶속에서의 실현이었다. 그 과정이 방법론적으로는 元曉(원효)에게서는 止(지)와 觀(관)을 核(핵)으로 한 六波羅密(육바라밀) 즉 자기연수와 이상사회건설인바 無念(무념)(無我(무아)))의 실천을 통해 自(자)와 他(타)의 分別(분별)․對立(대립)관계가 통합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知訥(지눌)에게서도 본질적으로는 같다. 단지 표현상으로 볼 때에는 止(지)와 觀(관)이 知訥(지눌)에게서는 定(정)과 慧(혜)또는 寂寂(적적)과 惺惺(성성)이라는 말로 되어있음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인간형성이론을 敎育哲學的(교육철학적)으로 번역해 볼 때 새로운 敎育本質觀(교육본질관)이 도출된다. 즉 교육은 바람직한 사람으로 ‘만듦’이나 ‘기름’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빛에 의해 스스로를 밝혀 그 빛을 삶속에서 실현해가는 것, 바꾸어 말하면 자기 본래모습에로 스스로의 ‘再轉換(재전환)’이라는 교육관이 도출된다. 여기에서 교사는 工匠(공장)이나 園丁(원정)이 아니라 학생의 빛의 內因(내인)에 發光(발광)의 계기를 주는 外緣(외연)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사상은 근래 크게 제기되고 있는 人間化(인간화)교육문제에 대하여 유익한 새로운 視野(시야)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또 知訥(지눌)이 제시하고 있는 頓悟漸修論(돈오점수론)은 현대교육학에 있어서 人間形成(인간형성)의 飛躍性(비약성)과 漸進性(점진성)에 대한 理論的 相衝(이론적 상충)을 극복하여 統合(통합)할 수 있는 地坪(지평)이라 하겠다.

本(본) 論者(논자)는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에 있어서 佛敎思想(불교사상)이 形式的(형식적)으로나 非形式的(비형식적)으로나 많은 作用(작용)을 했으리라고 推定(추정)했다. 특히 止(지)(定(정))와 關(관)(慧(혜))의 실천사상과 因果業報思想(인과업보사상)은 한국인의 인간형성에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因果業報的(인과업보적)인 가치관은 오늘날에도 韓國人(한국인)의 교육관을 심층에서 지배하고 있다고 本(본) 論者(논자)는 생각한다. 因果業報思想(인과업보사상)은 쉽게 말해서 콩 심은 데서 콩의 열매를 거두고 팥 심은 데서 팥의 열매를 거둔다는 사상이다. 예나지금이나 韓國(한국)의 남다른 교육열은 교육을 그 자체의 귀중함 보다는 내일의 행복이라는 열매를 거두기 위해 그것을 결과하리라고 믿는 씨앗으로서의 敎育(교육)을 심는다는 가치관에 밑받침되어 있다고 해석된다.

또 慈悲思想(자비사상)과 한국불교의 統佛敎(통불교) 및 護國的(호국적) 전통도 한국인의 인간형성에 깊이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視點(시점)도 提起(제기)했다. 형식적 교육에도 直(직)․間接(간접)으로 불교사상이 작용했으리라는 가능성도 암시했다. 또한 弘益人間(홍익인간)의 敎育理念(교육이념)은 그 의미에 있어 같고, 그 표현에 있어 유사한 것으로서 우리 민족의 문헌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元曉(원효)의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의 ‘弘益衆生(홍익중생)’이라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홍익인간의 ‘人間(인간)’만이 아니라 사람과 직․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世間(세간)의 ‘모든 존재’를 뜻하는 것도 지적했다. 또 弘益人間(홍익인간)의 교육이념에 대한 교육철학적 논의를 함에 있어서 불교적 접근의 필요성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韓國敎育史硏究(한구교육사연구)에 오히려 새로운 시야의 端緖(단서)와 方法論的(방법론적) 과제를 제기하는 것들로서 본격적인 연구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종래 官撰史料(관선사료)에 나타나 있는 학교제도의 시대적 羅列(나열)만을 能事(능사)로 삼던 한국교육사의 연구태도는 극복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의 전반적인 시야 속에서 多元的(다원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며 따라서 佛敎(불교)의 韓國敎育史(한국교육사)에 있어서의 의의와 비중이 새롭게 인식되고 중시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朴先榮(박선영) <師大敎授(사대교수)>

 

 

 

 

 

 

 

[출처] 한국교육사와 불교사상|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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