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3호(2014년 6월 5일자) 아함경 강의
제법을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 등으로 분류한 것은
결국 제법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임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
“범부들은 눈·귀·코·혀·몸·마음이 바깥 대상인 빛깔·소리·냄새·맛·감촉·생각을 만나 일어난 알음알이[識]가 영원하고 즐겁고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눈·귀·코·혀·몸·마음으로 들어온 외부 세계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고, 해탈했다는 지견[解脫知見]이 생긴다. 범부들은 육근(六根) 혹은 육내처(六內處)를 통해 들어온 육경(六境) 혹은 육외처(六外處)에 집착하여 나와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성자들은 이러한 육외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
수성유경(手聲喩經)
[원문]
(二七三)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時, 有異比丘獨靜思惟: ‘云何위我? 我何所위? 何等是我? 我何所住?’ 從禪覺已, 往詣佛所, 稽首禮足, 退住一面, 白佛言: “世尊! 我獨一靜處, 作是思惟: 云何위我? 我何所위? 何法是我? 我於何住?”
佛告比丘: “今當위汝說於二法. 諦聽, 善思, 云何위二? 眼色위二. 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위二, 是名二法. 比丘! 若有說言: ‘沙門瞿曇所說二法, 此非위二, 我今捨此, 更立二法.’ 彼但有言數, 問已不知, 增其疑惑, 以非境界故.
所以者何? 緣眼·色, 生眼識. 比丘! 彼眼者, 是肉形·是內·是因緣·是堅·是受, 是名眼肉形內地界. 比丘! 若眼肉形, 若內·若因緣·津澤·是受, 是名眼肉形內水界. 比丘! 若彼眼肉形, 若內·若因緣·明暖·是受, 是名眼肉形內火界. 比丘! 若彼眼肉形, 若內·若因緣·輕飄動搖·是受, 是名眼肉形內風界.”
“比丘! 譬如兩手和合相對作聲. 如是緣眼·色, 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此等諸法非我·非常, 是無常之我, 非恒·非安隱·變易之我. 所以者何? 比丘! 謂生·老·死·沒·受生之法.
比丘! 諸行如幻·如炎, 찰那時頃盡朽, 不實來實去. 是故, 比丘! 於空諸行當知·當喜·當念: ‘空諸行常·恒·住·不變易法空, 無我·我所.’
譬如明目士夫, 手執明燈, 入於空室, 彼空室觀察. 如是, 比丘! 於一切空行·空心觀察歡喜, 於空法行常·恒·住·不變易法, 空我·我所. 如眼, 耳·鼻·舌·身·意法因緣生意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此諸法無我·無常, 乃至空我·我所.
比丘! 於意云何? 眼是常·위非常耶?” 答言: “非常. 世尊!” 復問: “若無常者, 是苦耶?” 答言: “是苦. 世尊!” 復問: “若無常·苦, 是變易法, 多聞聖弟子寧於中見我·異我·相在不?” 答言: “不也, 世尊!” “耳·鼻·舌·身·意亦復如是. 如是多聞聖弟子於眼生厭, 厭故不樂, 不樂故解脫, 解脫知見: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耳·鼻·舌·身·意亦復如是.” 時, 彼比丘聞世尊說合手聲譬經敎已, 獨一靜處, 專精思惟, 不放逸住, 乃至自知不受後有. 成阿羅漢.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어떤 비구가 홀로 고요히 사색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제 너를 위해 두 가지 법에 대해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눈과 빛깔이 둘이요, 귀와 소리·코와 냄새·혀와 맛·몸과 감촉·뜻과 법이 둘이니, 이것을 두 가지 법이라고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어떤 이가 ‘사문 구담(瞿曇)이 말하는 두 가지 법은 둘이 아니다. 내가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두 가지 법을 세우리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 질문하고 나면 알지 못하고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니, 그것은 대경(對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눈[眼]과 빛깔[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비구여, 그 눈이라는 살덩어리이고, 그것은 안[內]이며, 그것은 인연(因緣)이고,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눈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지계(地界)라고 한다. 비구여, 눈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촉촉하고 윤택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눈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수계(水界)라고 한다. 비구여, 그 눈이라는 살덩이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밝고 따뜻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눈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화계(火界)라고 한다. 비구여, 눈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가볍게 요동하는 것이고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눈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풍계(風界)라고 하느니라.
비구여, 비유하면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감촉[觸]이니, 감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내가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무상한 나요, 영원하지 않고 안온하지 않으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니라. 왜냐하면 비구여,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며 태어남을 받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비구여, 모든 행(行)은 허깨비와 같고 불꽃과 같으며 잠깐 동안에 다 썩는 것으로써 진실로 오고 진실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구여, 공(空)한 모든 행에 대해서 마땅히 알고 마땅히 기뻐하며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공한 모든 행은 항상 머무르고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니다. 공(空)에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눈이 밝은 사부(士夫)가 손에 밝은 등불을 들고 빈 방에 들어가서 그 빈 방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여, 일체의 공한 행과 공한 마음을 관찰하여 기뻐하면 공한 법과 행은 항상 머물러 변하거나 바뀌는 법이 아닐 것이니, 나와 내 것이 공하였기 때문이다.
눈[眼]에서와 같이 귀[耳]·코[鼻]·혀[舌]·몸[身]도 마찬가지이며, 뜻[意]과 법(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이니, 접촉이 함께하면 느낌·생각·의도가 생긴다. 이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고 무상한 것이며, ……(내지)…… 나와 내 것이 다 공한 것이니라.”
“비구여, 네 생각은 어떠하냐? 눈은 영원한 것인가, 무상(無常)한 것인가?”
대답하였다. “무상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물었다. “만일 무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물었다. “만일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이 과연 그런 것에 대해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느냐?”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귀·코·혀·몸·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눈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解脫)하고, 해탈지견(解脫知見)이 생겨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쳤으므로 후세에는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아느니라. 귀·코·혀·몸·뜻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이때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합수성비경(合手聲譬經)의 가르침을 듣고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사유(思惟)하면서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는 아라한이 되었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11권 제273경(<대정장> 2, pp.72b-73a)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경의 이름인 ‘수성유경(手聲喩經)’은 ‘손뼉 소리에 비유한 경’이라는 뜻이다.
이 경에서는 먼저 두 가지 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두 가지 법이란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뜻[마음]과 법[생각]이다. 이른바 두 가지 법이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십이처(十二處)’라고 부른다. 십이처란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마음[意根] 등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根]과 그것에 대응하는 여섯 가지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色境]·소리[聲境]·냄새[香境]·맛[味境]·감촉[觸境]·생각[法境] 등을 합친 것이다.
보는 작용은 눈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듣는 작용은 귀를 통해서, 냄새 맡는 것은 코를 통해서, 맛보는 것은 혀를 통해서, 감촉은 몸(피부)을 통해서, 생각은 마음[意]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意]을 육근(六根)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부른다.
육근의 근(根)은 기관(器官)이라는 의미 이외에 기관이 가지고 있는 기능까지를 포함한다. 안근(眼根)이라고 해서 안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육근에서 여섯 번째의 의근(意根)은 기능만 존재하지 실제로 구체적인 기관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식(意識)이 생기므로 일종의 기관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육근에 대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 즉 빛깔과 형태[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 생각[法]을 육경(六境)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부른다. 정신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각기관과 거기에 상응하는 대상이 만나야 된다. 즉 눈에는 빛깔 혹은 형태가, 귀에는 소리가, 혀에는 맛이, 몸[피부]에는 접착할 수 있는 것이, 마음[意]에는 생각[法]이 만나야 한다. 여기에서 법을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십이처 가운데 ‘11처에 포함되지 않는 모든 현상’이다. 이 십이처를 ‘일체(一切)’라고도 한다. 붓다는 십이처 밖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말뿐이라고 했다.
이 경에서는 십팔계(十八界)를 손뼉 소리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십팔계의 분류법은 근(根)·경(境)·식(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의 기관[根], 인식의 대상[境], 인식의 작용[識]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눈을 통해서 빛깔이나 형상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식별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을 안식(眼識)이라 한다. 귀로써 소리를 듣기 때문에 이식(耳識)이, 코로써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식(鼻識)이, 혀로써 맛을 보기 때문에 설식(舌識)이, 몸을 통해서 감촉을 느끼기 때문에 신식(身識)이, 마음[뜻]으로 무엇을 생각[法]하기 때문에 의식(意識)이 일어나게 된다.
비유하면 두 손이 서로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와 소리를 인연하여 이식(耳識)이 생기며, 코와 냄새를 인연하여 비식(鼻識)이 생기고, 혀와 맛을 인연하여 설식(舌識)이 생기며, 몸과 감촉을 인연하여 신식(身識)이 생기고, 뜻과 법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생긴다. 여기서 한 손은 기관[六根], 다른 한 손은 대상[六境], 손뼉 소리는 인식[六識]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붓다가 이 비구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결국 존재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였다. 왜냐하면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 육식(六識)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 하는데, 이때 제일 먼저 감촉[觸]이 생긴다. 그 다음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뒤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생긴 모든 법[諸法]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없고 무상한 것이며, 나와 내 것이 다 공한 것이다.
붓다가 제법을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 등으로 분류한 것은 결국 제법은 무상·고·무아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눈·귀·코·혀·몸·마음이 바깥 대상인 빛깔·소리·냄새·맛·감촉·생각을 만나 일어난 알음알이[識]가 영원하고 즐겁고 나와 내 것이라고 집착한다. 그 때문에 온갖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들은 눈·귀·코·혀·몸·마음으로 들어온 외부 세계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고, 해탈했다는 지견[解脫知見]이 생긴다. 이와 같이 범부들은 육근(六根) 혹은 육내처(六內處)를 통해 들어온 육경(六境) 혹은 육외처(六外處)에 집착하여 나와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성자들은 이러한 육외처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은 처음 어떤 비구가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을 붓다께 물었다. 그에 대한 붓다의 답변을 듣고 홀로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정진해 결국 나중에는 아라한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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