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제 625호(2014년 7월 22일자) 아함경 강의
붓다는 인연법과 연생법을 바르게 알고 잘 보아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또한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지도 말라고 가르쳐
“인연법, 즉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행을 조건으로 식(識)이,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老]·죽음[死]·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일어난다. 반대로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이 소멸하고, …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연기법은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이 항상 머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여래는 이것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이 되어서 사람들을 위해 설했다. 붓다가 설한 연기법은 법주(法住)·법공(法空)·법여(法如)·법이(法爾)이다. 이것은 법여를 여의지 않고, 법여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연기(緣起)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연생법(緣生法)이라고 한다”
인연경(因緣經)
[원문]
(二九六)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我今當說因緣法及緣生法.
云何?因緣法? 謂此有故彼有, 謂緣無明行, 緣行識, 乃至如是如是純大苦聚集.
云何緣生法? 謂無明·行. 若佛出世, 若未出世, 此法常住, 法住法界, 彼如來自所覺知, 成等正覺, ?人演說, 開示顯發, 謂緣無明有行, 乃至緣生有老死. 若佛出世, 若未出世, 此法常住, 法住法界, 彼如來自覺知, 成等正覺, ?人演說, 開示顯發, 謂緣生故, 有老·病·死·憂·悲·惱·苦.
此等諸法, 法住·法空·法如·法爾, 法不離如, 法不異如, 審諦?實·不?倒. 如是隨順緣起, 是名緣生法. 謂無明·行·識·名色·六入處·觸·受·愛·取·有·生·老·病·死·憂·悲·惱·苦, 是名緣生法.
多聞聖弟子於此因緣法·緣生法正知善見, 不求前際, 言: ‘我過去世若有·若無? 我過去世何等類? 我過去世何如?’ 不求後際: ‘我於當來世?有·?無? 云何類? 何如?’ 內不猶豫: ‘此是何等? 云何有此?前? 誰終當云何之? 此?生從何來? 於此沒當何之?’
若沙門·婆羅門起凡俗見所繫, 謂說我見所繫·說?生見所繫·說壽命見所繫·忌諱吉慶見所繫, 爾時悉斷·悉知, 斷其根本, 如截多羅樹頭, 於未來世, 成不生法. 是名多聞聖弟子於因緣法·緣生法如實正知, 善見·善覺·善修·善入.”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을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인연법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行)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 이러이러하게 하여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무명(無明)과 행(行) 등이니,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이러이러하여 저 여래께서 스스로 깨닫고 알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고, 열어 보여 나타내시며, 드날리시는 것이니, 이른바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건 간에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이러이러하여 저 여래께서 스스로 깨닫고 알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고, 열어 보여 나타내시며 드날리신 것이니, 이른바 ‘태어남[生]을 인연하기 때문에 늙음[老]·병듦[病]·죽음[死]과 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법은 법주(法住)·법공(法空)·법여(法如)·법이(法爾)이니라. 법여를 여의지 않고, 법여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연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연생법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접촉[觸]·느낌[受]·갈애[愛]·집착[取]·존재[有]·태어남[生]·늙음[老]·병듦[病]·죽음[死]·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니, 이것을 연생법이라고 하느니라.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이 인연법과 연생법을 바르게 알고 잘 보아, 과거를 구하여 ‘나는 과거 세상에 있었던가 혹은 없었던가? 나는 과거 세상에 어떤 종류였으며, 나는 과거 세상에 어떠하였던가?’ 하고 말하지 않고, ‘나는 미래 세상에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어떤 종류일까, 어떠할까?’ 하고 미래를 구하지도 않으며, ‘이것은 어떤 종류인가, 어떻게 이것이 앞에 있게 되었을까? 누가 마침내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중생들은 어디서 왔는가? 여기서 사라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마음으로 짐작하지도 않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바라문이 범속(凡俗)한 소견을 일으키고 거기에 얽매인다면, 이른바 나라는 소견에 얽매여 말하고, 중생이라는 소견에 얽매여 말하며, 수명이라는 소견에 얽매여 말하고, 꺼리고 싫어하며 길(吉)하고 경사스럽다는 소견에 얽매인다면, 그때 거룩한 제자는 그것을 다 끊고 다 알아 다라(多羅) 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법으로 만드나니, 이것을 일러 ‘많이 들어 아는 거룩한 제자는 인연법과 연생법에 대해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아 잘 보고, 잘 깨닫고, 잘 닦고, 잘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권12 제296경(『대정장』 2, p.84b-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12:20 Paccaya-sutta(SN Ⅱ, pp.25-27)이다. 이 경의 핵심 키워드는 인연법(因緣法)과 연생법(緣生法)이다. 여기서 두 단어의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이 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한역과 니까야를 대조해 보아야만 그 원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에서 말하는 인연법(因緣法)은 ‘연기법(緣起法, paticcasamuppada)’을 말하고, 연생법(緣生法)은 ‘연기된(paticcasamuppanna) 법’을 말한다. 여기서 ‘연기된’ 것이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연이생(緣而生), 연이생(緣已生), 연이생(緣以生) 등으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 경에서는 연생법(緣生法)이라고 번역하였다.
이 경에서 말하는 인연법, 즉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행을 조건으로 식(識)이,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老]·죽음[死]·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일어난다. 반대로 무명(無明)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소멸하고, … 태어남[生]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老]·죽음[死]·근심[憂]·슬픔[悲]·번민[惱]·괴로움[苦]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한다.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이 경에 의하면, 연기법은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있으며, 법이 항상 머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 여래는 이것을 깨달아 등정각(等正覺)이 되어서 사람들을 위해 설했다. 붓다가 설한 연기법은 법주(法住)·법공(法空)·법여(法如)·법이(法爾)이다. 이것은 법여(法如)를 여의지 않고, 법여(法如)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는다. 이와 같이 연기(緣起)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연생법(緣生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한역에서는 “이 법은 항상 머물며,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라고 한다(此法常住, 法住法界)”라고 하였다. 이것은 연기의 특징을 말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법으로 확립된 것이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며, 이것에게 조건이 되는 성질[此緣生]이다(thitava sa dhatu dhammatthitata dhammaniyamata idappaccayata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존재하는 요소(thitava sa dhatu)’란 이 연기의 고유성질(paccaya-sabhava)은 확립되어 있다(thito va)는 뜻이다. 여기서 요소[界, dhatu]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하는 늙음·죽음의 조건(paccaya)을 뜻한다. 이 연기는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해 있었지만 붓다가 세상에 출현하기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붓다는 통찰지로 그 사실을 보고 깨달았을 뿐,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요소는 존재해 있었다’라고 한다.
‘법으로 확립된 것(dhammatthitata)’이란 ‘법주성(法住性)’이라는 뜻으로 확법(確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법으로 결정된 것(dhammaniyamata)’이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는 조건 혹은 고유성질이 그렇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에게 조건이 되는 성질[此緣生]’은 idappaccayata를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ida(이)+
ppaccayata(조건의 성질)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는 연기의 정형구 전체를 지칭하는 술어이다. 여기서 ida(이것)는 열두 가지 연기 각지(各支)들 각각을 지칭한다.
이어서 이 경에서는 “저 여래께서 스스로 깨닫고 알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어 사람들을 위해 연설하시고, 열어 보여 나타내시며, 드날리시는 것이다(彼如來自覺知, 成等正覺, 위人演說, 開示顯發)”라고 하였다. 이 대목을 니까야에서는 “여래는 이것을 완전하게 깨달았고 관통하였다. 완전하게 깨닫고 관통한 뒤 ‘보라!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라고 알게 하고 가르치고 천명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니까야의 이 대목은 연기구조를 설명하는 핵심 문장으로 <청정도론>에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또한 이 문장은 <앙굿따라 니까야>(AN3:134)에서 “비구들이여,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라는 것은 여래들께서 출현하신 후거나 출현하시기 이전에도 존재하는 요소[界]이며, …” 등으로 모든 형성된 것들[諸行]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대목은 붓다가 없는 법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나 제법의 무상·고·무아와 같은 세상의 진리를 드러내 가르쳤을 뿐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붓다는 없는 진리(법)을 만들어 낸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낸 분이요, 그분의 제자들은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이다.
또한 이 경에서는 “이러한 모든 법은 법주(法住)·법공(法空)·법여(法如)·법이(法爾)이니라. 법여를 여의지 않고, 법여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고, 이와 같이 연기를 그대로 따르나니 이것을 연생법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는 “이와 같이 여기서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 이것의 조건을 짓는 성질,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역에서는 “모든 법은 법주(法住)·법공(法空)·법여(法如)·법이(法爾)이니라.”라고 천명한 뒤, 다시 법여를 여의지 않고, 법여와 다르지 않으며, 분명하고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는 것을 연기라고 하였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는 ‘진실함(tathata)’, ‘거짓이 아님(avitathata)’,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님(anannathata)’, ‘이것의 조건을 짓는 성질(idappaccayata)’을 연기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를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진실함 등은 조건의 모습(paccaya-akara)에 대한 동의어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각각의 조건들에 따라 각각의 법들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함[如如, tathata]’이라 했다. 조건들이 모일 때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조건]으로부터 법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avitathata)’이라 했다. 다른 조건으로부터 이 법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anannathata)’이라 했다. 앞에서 말한 늙음·죽음의 조건이기 때문에 혹은 조건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것의 조건을 짓는 성질(idappaccayata)’이라 했다.”(SA.ii.41; Visuddhimagga XVII.6)
끝으로 붓다는 이 인연법과 연생법을 바르게 알고 잘 보아,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또한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나’라는 소견, ‘중생’이라는 소견, ‘수명’이라는 소견에 얽매여 집착한다. 그러나 거룩한 제자는 그러한 근본을 끊어 미래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법을 만든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제자는 인연법과 연생법에 대해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아 잘 보고[善見涅槃], 잘 깨닫고[善覺涅槃], 잘 닦고[善修涅槃], 잘 들어간다[善入涅槃]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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