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행자는 항상 선정을 닦고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해야
생경(生經)
[원문]
(六六)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常當修習方便禪思, 內寂其心. 所以者何? 修習方便禪思, 內寂其心已, 如實觀察. 云何如實觀察? 如實觀察此色·此色集·此色滅; 此受·想·行·識, 此識集·此識滅.
云何色集? 云何受·想·行·識集? 比丘! 愚癡無聞凡夫不如實觀察色集·色味·色患·色離故, 樂彼色, 讚歎愛著, 於未來世色復生; 受·想·行·識亦如是廣說.
彼色生, 受·想·行·識生已, 不解脫於色, 不解脫於受·想·行·識. 我說彼不解脫生·老·病·死·憂·悲·惱·苦純大苦聚, 是名色集, 受·想·行·識集.
云何色滅, 受·想·行·識滅? 多聞聖弟子如實觀察色集·色滅·色味·色患·色離, 如實知. 如實知故, 不樂於色, 不讚歎色, 不樂著色, 亦不生未來色; 受·想·行·識亦如是廣說.
色不生, 受·想·行·識不生故, 於色得解脫, 於受·想·行·識得解脫. 我說彼解脫生·老·病·死·憂·悲·惱·苦(純大苦)聚, 是名色滅, 受·想·行·識滅. 是故, 比丘! 常當修習方便禪思, 內寂其心, 精勤方便, 如實觀察.”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고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고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사실 그대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실 그대로 관찰하는가? ‘이것은 색이다. 이것은 색의 발생이다. 이것은 색의 소멸이다. 수·상·행도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식이다. 이것은 식의 발생이다. 이것은 식의 소멸이다’라고 사실 그대로 관찰하느니라.
어떤 것이 색의 발생[色集]이며, 어떤 것이 수(受)·상(想)·행(行)·식(識)의 발생[集]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색의 발생[色集]과 색에 맛들임[色味]과 색의 재앙[色患]과 색에서 벗어남[色離]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색을 즐거워하고 찬탄하며 애착하여 미래 세상에서 색이 다시 생긴다. 수·상·행·식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할 수 있느니라.
그 색이 생기고 수·상·행·식이 생기고 나면 색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수·상·행·식에서 해탈하지 못하나니,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과 같은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에서 해탈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이것을 색의 발생이라 하며 수·상·행·식의 발생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색의 소멸[識滅]이며, 수(受)·상(想)·행(行)·식(識)의 소멸[滅]인가?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색의 발생과 색의 소멸과 색에 맛들임과 색의 재앙과 색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고 사실 그대로 안다. 사실 그대로 알기 때문에 색을 즐거워하지 않고, 색을 찬탄하지 않으며, 색에 애착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색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수·상·행·식에 있어서도 또한 이렇게 자세히 말할 수 있느니라.
색이 생기지 않고, 수·상·행·식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색에서 해탈할 수 있고, 수·상·행·식에서 해탈할 수 있나니, 그러면 ‘그는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에서 해탈하였다’고 나는 말한다. 이것을 색의 소멸이라 하며, 수·상·행·식의 소멸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는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고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고, 방편을 부지런히 닦아 사실 그대로 관찰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3권 제66경(<大正藏> 2, p.17b-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22:7 Up?d?paritassan?-sutta(SN Ⅲ, pp.15-18)이다. 그러나 한역 아가마와 니까야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의 핵심 내용은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항상 선정을 닦고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부지런히 닦아 사실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대로 관찰한다는 것은 곧 ‘이것은 오온(五蘊)이다. 이것은 오온의 발생(원인)이다. 이것은 오온의 소멸이다.’ 라고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오온의 원인과 오온에 맛들임과 오온의 재앙과 오온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오온을 즐거워하고 오온에 집착한다. 그 때문에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오온의 원인과 오온에 맛들임과 오온의 재앙과 오온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기 때문에 오온을 즐거워하지 않고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괴로움에서 해탈하게 된다.
요컨대 범부들은 오온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해탈하지 못한다. 반면 성스러운 제자들은 오온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해탈한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는 항상 선정을 닦고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부지런히 닦아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관경(觀經)
[원문]
(七五)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有五受陰. 何等위五? 謂色受陰, 比丘於色厭·離欲·滅·不起·解脫, 是名如來·應·等正覺; 如是受·想·行·識, 厭·離欲·滅·不起·解脫, 是名如來·應·等正覺. 比丘亦於色厭·離欲·滅, 名阿羅漢慧解脫; 如是受·想·行·識, 厭·離欲·滅, 名阿羅漢慧解脫. 比丘! 如來·應·等正覺, 阿羅漢慧解脫有何差別?” 比丘白佛: “如來위法根·위法眼·위法依, 唯願世尊위諸比丘廣說此義, 諸比丘聞已, 當受奉行!”
佛告比丘: “諦聽! 善思! 當위汝說. 如來·應·等正覺未曾聞法, 能自覺法, 通達無上菩提, 於未來世開覺聲聞而위說法, 謂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八道. 比丘! 是名如來·應·等正覺, 未得而得, 未利而利, 知道·分別道·說道·通道, 復能(=能復)成就諸聲聞, 敎授敎誡; 如是說正順·欣樂善法, 是名如來·羅漢差別.”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오수음(五受陰)이 있으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이른바 색수음(色受陰) 등이니라. 비구들이여, 색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고, 일으키지 않고, 해탈하면 이런 이를 여래(如來)·응공[應]·등정각(等正覺)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고, 일으키지 않고, 해탈하면 이런 이를 여래·응공·등정각이라 하느니라.
비구 또한 색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면 이런 이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라 하며, 이와 같이 수·상·행·식을 싫어하고, 탐욕을 떠나며, 소멸시키면 이런 이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비구들이여, 여래·응공·등정각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법의 근본이요, 법의 눈이며, 법의 의지처이십니다.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그 뜻을 자세히 설명해 주소서. 모든 비구들은 그것을 듣고 마땅히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여래·응공·등정각은 일찍이 법을 듣지 못하고도 능히 스스로 법을 깨달아 위없는 보리를 통달하고, 미래 세상에서 성문들을 깨우쳐 설법하나니, 그 법은 이른바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七覺)·팔도(八道)이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이를 여래·응공·등정각이라 하나니, 그는 다른 이가 얻지 못한 것을 얻고, 다른 이가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롭게 하며, 도를 알고 도를 분별하며, 도를 설명하고 도를 통달하며, 다시 능히 모든 성문들을 성취하여 가르치고 훈계하느니라. 아라한은 이러한 말씀에 바르게 순종하고 그 훌륭한 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이것이 여래와 나한(羅漢)의 다른 점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3권 제75경(<大正藏> 2, p.19b-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22:58 Sambuddha-sutta(SN Ⅲ, pp.65-66)이다. 이것은 등정각경(等正覺經)이라는 뜻이다.
이 경의 핵심은 여래(如來)·응공(應供)·등정각(等正覺)과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阿羅漢)이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한 것이다. 이 경은 분량이 많지 않은 단경(短經)이지만, 교리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 처음 붓다가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제자들을 교화했을 때, 붓다는 스스로 “그때 세간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었다.
(Vin Ⅰ, p.14,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고 선언했다. 이처럼 초기승가에서는 붓다와 아라한을 크게 구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는 붓다와 아라한을 구별할 필요가 제기되어서 이 경을 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니까야에서는 “여래·아라한·정등각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를 일으킨 분이고 아직 생기지 않은 도를 생기게 한 분이고 아직 설해지지 않은 도를 설한 분이고 도를 아는 분이고 도를 발견한 분이고 도에 능숙한 분이다. 그리고 지금의 제자들은 그 도를 따라가면서 머물고 나중에 그것을 구족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아라한·정등각자와 통찰지를 통한 해탈을 한 자의 차이점이고, 특별한 점이고, 다른 점이다.”(SN Ⅲ, pp.65-66)라고 설해져 있다. 한마디로 붓다는 최초로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제시한 분이고, 아라한은 붓다가 제시한 길을 따라 진리를 체득한 분이다. 이것이 붓다와 아라한의 다른 점이다.
이 경에 나오는 불교용어의 의미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여래(如來)는 따타가따(tathagata)를 번역한 말이다. 따타가타(tathagata)는 따타(tatha)와 아가따(agata)의 합성어이다. tatha는 ‘이와 같이’, ‘그렇게’, ‘그런 방법으로’, ‘마찬가지로’의 뜻이고, agata는 오다(來)의 뜻이다.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여실히 왔다[如來]’는 의미가 된다. 즉 진리와 하나가 되어 왔다는 뜻이다.
또한 한역의 ‘응(應)’은 ‘응공(應供)’의 약자다. 응공(應供)은 응수공양(應受供養)의 줄임말이다. 응공은 아라한트(arahant, Sk. arahat)를 번역한 말이다. 아라한트는 사람과 천인[人天]으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응수공양(應受供養)이라고 번역했다. 원어 아라한트(Arahant)를 중국의 역경승들은 진인(眞人), 살적(殺敵), 불생(不生), 지진(至眞) 등으로 의역하기도 하였다. 진인(眞人)은 글자 그대로 ‘참사람’이라는 뜻이고, 살적(殺敵)은 일체 번뇌의 적을 죽였다는 뜻이며, 불생(不生)은 다시 윤회하여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고, 지진(至眞)은 진리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한편 등정각(等正覺)은 삼마삼붓다(sammasambuddha)를 번역한 말이다. 정변지(正遍知) 혹은 정등각자(正等覺者) 또는 등정각자(等正覺者)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른바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여실히 통달한 자라는 뜻이다.
다음은 이 경에 나오는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를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bodhipakkhiyaddhamma)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서른일곱 가지 특질’이라는 뜻이다.
첫째,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na)는 ‘네 가지 마음 집중의 형태’를 말한다. 둘째, 사정근(四正勤, sammappadhana)은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을 말한다. 셋째, 사여의족(四如意足, iddhipada)은 ‘네 가지 초월적 힘의 근거’를 말한다. 다섯째, 오근(五根, panca-indriya)은 ‘다섯 가지 감각 기관’ 혹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다섯 가지 뛰어난 능력’을 말한다. 여섯째, 오력(五力, panca-balani)은 오근(五根, panca-indriya)의 내용과 동일하다. 일곱째, 칠각(七覺)은 칠각지(七覺支)의 약자다. 칠각지(七覺支, bojjhanga)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를 말한다. 여덟째, 팔도(八道)는 팔정도(八正道)의 약자다. 팔정도(八正道, ariya-atthangika-magga)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聖八支道]’을 말한다.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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