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各理V] 대승의 길
3) 대승의 길
1. 기원
석가모니(Sakyamuni)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수 세기가 지나면서,
특정한 교의(敎義)나 지역에 따라 수많은 불교의 학파와 부파(剖派)들이 생겨났습니다.
여러 가지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마침내 ‘큰 수레’라는 의미를 가진 ‘대승(大乘, Mahayana, Theg Pa Chen Po)’불교가 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불교 학자들 사이에도 여러 이견(異見)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승불교의 문헌들로 묶을 수 있는 경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보통력(C.E.: Commom Era, *전문 학자들은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서기(A.D) 대신에 이 용어를 사용하여 연대를 표기합니다.) 1-2세기 무렵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수뜨라(Sutra, 顯敎 經典)’라고 불리며, 부처가 입멸한지 수 세기가 지난 다음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설(佛說: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으로 표기합니다.
초기 대승교도(大乘敎徒)들의 기록을 보면, 이 대승의 가르침이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는 아주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설해졌다고 하는데, 주로 성문(聲聞)들이었던 당시의 제자들은 이렇게 수승한 교의를 따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승의 경전들은 그것을 설명하고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나가(Nagas: 龍王)’들의 세계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2세기 초에 이르러 여러 위대한 불교의 스승들이 나타났고,
이 대승의 경전들은 다시 인간들의 세계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분은 용수(龍樹, Nāgārjuna) 보살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보살도(菩薩道)와 공성(空性)에 대한 대승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중관사상(中觀思想, Madhyamaka)’은 용수 보살께서 정립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몇 학자들은 대승의 기원이 ‘2차 결집(結集: 두 번째 결집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이후 100년 뒤에 바이샬리(Vaiśali)에서 개최되었다고 한다.)’의 영향으로 초기 불교의 부파 시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좌부(上座部, Sthavira)’에서 ‘대중부(大衆部, Mahasamghika)’가 분리 되면서 라고 믿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대중부였지만, 기존에 ‘인간 부처’에 중점을 두었던 다른 부파들과는 달리, 이들은 ‘부처(Buddha)’라는 용어를 좀 더 초월적인 힘을 가진 보편적인 용어로 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기원상의 여러 가지 모호한 점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1500여년을 흥망성쇠(興亡盛衰) 하던 불교가 티벳에 이르게 되면, 이미 독특한 모습으로 발전한 대승 불교가 다시 꽃을 피우게 됩니다.
티벳에서 자리 잡은 대승 불교는 인도 불교의 발전된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였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불교들 보다 더 정교하고 잘 정제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특별한 대승의 길인 ‘금강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먼저 일반적인 대승의 가르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대승교의(大乘敎義)
소승의 길
대승의 가르침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불교의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가르침과 불교적 생활양식들을 보여주는 소승의 교의(敎義)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소승(小乘)’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수행의 폭이 개인적인 해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입니다.
서장(序章)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소승의 길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승가를 이루고 있던 대부분의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용했던 수행 방법이자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소승은 대승의 수행 관점에서 보면,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獨覺)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문은 원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제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부처님의 말과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따르고 수행하였습니다.
성문과 연각은
(1) 수다원과(須陀洹果, Srotapamaphala, 깨달음의 흐름으로 들어선 入流),
(2) 사다함과(斯陀含果, Sakrdagami, 한 번 다시 돌아오는 一來),
(3) 아나함과(阿那含果, Anagami,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不來)의 세 단계를 거쳐,
세상의 과보를 다하고 번뇌를 완전히 물리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4) 아라한과(阿羅漢果, Arahat, 不生)의 지위를 수행의 최종 목표로 합니다.
연각 또는 독각은 어떠한 가르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해탈을 얻는 경우입니다.
대승의 설명에 따르면, 연각들은 이전에 부처님께 가르침을 듣고 따랐지만,
그들의 마지막 생에서는 스승을 못 만납니다.
그래서 홀로 개인적인 해탈을 구하며, 수행을 통하여 윤회를 넘어 가능한 한 빠르게 열반에 들어 갑니다.
가끔씩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자비를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자신만의 해탈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소승에서 강조하는 수행방법은 생활을 단순화하고 홀로 머무르는 등의 물리적 계율 행를 지키는 것이며,
감정과 그것을 일으키는 조건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독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소승 수행자들은 ‘오온(五蘊)’과 ‘사성제(四聖諦)’를 주로 관(觀)합니다.
모든 존재들은 고통을 지니고 있으며, 고통의 원인은 마음의 장애들을 수반하는 데,
이 마음의 장애는 갈증과 욕구를 근본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과 그 원인에서 해방되는 것만이 멸(滅)의 진리이며, 이것을 멸하기 위한 수행의 길인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Skt. bodhi-paksika; 四念處, 四正勤, 四神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를 따라 사성제의 바른 의미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승의 수행자들이 사성제의 수행을 모두 마치게 되면,
제 5제(諦)인 아라한(Arahat; 마(魔)의 정복자)의 과위(果位)를 얻게 됩니다.
대승(大乘)의 수승함
여기서 논하려고 하는 대승의 수승함은 ‘남방 상좌부’의 불교 체제보다 대승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앞에서 설명한 소승의 길과 구별되는 대승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대승은 소승에 비해 그 (1) 동기나 (2) 목표 그리고 (3) 이해의 수준에서 좀 더 수승한 면이 있습니다.
대승은 먼저 동기가 수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승의 길을 가는 이들이 자신만의 해방을 구하는데 비해,
대승의 보살들은 모든 중생들에게 위대한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또 부처의 경지를 이루려는 목표가 소승의 해탈보다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번뇌의 조악한 특성들을 제거하여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으로 윤회를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지만,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비와 지혜의 실천 행을 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비록 소승의 아라한들이 공성을 직접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공성의 경지는 너무나 심오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성을 성취하는 수준은 실제 근기에 따라 다양한 차원의 깊이로 나누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소승이 한정된 소수의 깨달음에 머물러 있다면,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마음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여는 것이 대승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닫고자 하는 보살도의 수행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의 보살도(菩薩道)
보살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모습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대승에서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은
먼저 ‘보리심(菩提心, Boddhicitta)’을 일깨우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보통 아주 친절하고 자비심이 넘치는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로 자신의 이익이나 흥미를 위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떠한 선행을 할 때도 순수한 이타심 보다는 자기만족이나 기쁨을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보살들은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편적인 자비심으로 움직이며,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보살이 이런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은 먼저 마음속에 간절한 보리심이 일어나면서부터 입니다.
보살은 보살의 길에 들어선 처음부터 자신의 한계와 부족한 능력의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고통도 어찌하지 못함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극복하고 중생들을 돕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고뇌 속에서,
보살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직 부처의 경지만이 무한한 지혜와 자비의 근원이며,
개인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펼 수 있는 완전한 깨달음의 목적지입니다.
따라서 대승의 길인 보살도에서는 중생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자비심을 기르기 위한 절박한 마음으로 수행에 들어갑니다.
대승의 보살은 자비심을 이용하여 성냄을 제거하고, 윤회계의 특성인 무상과 고를 통해 욕구를 제거하며,
공성에 대한 명상과 연기법에 대한 반조를 통해 무지(無知)를 제거합니다.
이렇게 해서 상대적인 보리심을 일깨운 후에 보살은 다시 부처의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을 밟기 시작합니다.
대승의 보살은 자신만을 위하는 삶에는 어떠한 만족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중생을 위해 봉사하려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보살도의 가장 중요한 수행 방법인 ‘육바라밀(六波羅密)’ 또는 ‘십바라밀’을 수행합니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Dana, 아낌없이 주고 베풀면서도 주었다는 생각마저도 버림),
(2) 지계(持戒, Sila, 청정의 기본인 계율 행을 닦음),
(3) 인욕(忍辱, Ksanti, 수행에 있어서나 외적인 관계에 있어 잘 참아내는 힘),
(4) 정진(精進, Virya, 위의 바라밀행들을 꾸준히 하여 善과 복덕을 증장시키는 노력),
(5) 선정(禪定, Dhyana, 마음이 침몰하여 산란해지는 것을 막고 평정을 유지함),
(6) 지혜(智慧, Prajna, 어리석음과 무지를 벗어나 모든 것의 본성인 밝음을 아는 지혜),
(7) 방편(方便, Upaya,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
(8) 원(願, Pranidhana,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원),
(9) 역(力, Bala, 바르게 판단하여 수행하는 완전한 힘),
(10) 지(智, Jnana, 깨달음의 즐거움을 향수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은 바라밀행을 하면서, 보살들은 좀 더 구체적인 수행의 단계들을 거칩니다.
‘보살의 삼십칠 수행법(三十七道品)’과 ‘오도(五道: 資粮道, 加行道, 見道, 修道, 無學道)’ 그리고 ‘십지(十地: 보살의 열 가지 계위)’ 등의 단계를 거쳐 완전한 부처의 경지를 이를 때까지 수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대승의 수행 방법은 수행자 개개의 경험이나 학자적 인식수준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배열상의 차이나 깨달음의 경험에서 오는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수행 각 단계들이 가지는 의미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대승의 수행을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전체의 내용과 ‘십지(十地)’에 대한 각각의 항목을 살펴 본 후, 이들을 ‘오도’의 과정에 따라 정리해 볼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대승의 수행을 형식화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리한 방법은 그 중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먼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은 불교의 최종 목적지인 완전한 깨달음을 일구기 위해 밟아야 할 37가지의 수행 단계들을 말합니다. 대승의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은 다음과 같은 일곱 과목(科目)에 37항목으로 나누어집니다.
I. 사념처(四念處): (1)신(身), (2)수(受), (3)심(心), (4)법(法)
II. 사정근(四正勤): (1) 율의단(律儀斷), (2) 단단(斷斷), (3) 수호단(隋護斷), (4) 수단(修斷).
III. 사신족(四神足 또는 四如意足): (1)욕(欲, 誓願),(2)정진(精進), (3)심(心), (4)혜(慧).
IV. 오근(五根): (1) 신(信), (2) 정진(精進: 勤) (3) 념(念), (4) 정(定), (5) 혜(慧).
V. 오력(五力): (1) 신력(信力), (2) 근력(勤力), (3) 념력(念力), (4) 정력(定力), (5) 혜력(慧力).
VI. 칠각지(七覺支): (1) 자각지(自覺支) (2) 판별지(判別支) (3) 정진지(精進支)
(4) 환희지(歡喜支) (5) 적응지(適應支) (6) 정념지(定念支) (7) 평등지(平等支).
VII. 팔정도(八正道): (1) 정견(正見) (2) 정사유(正思惟) (3) 정어(正語) (4) 정업(正業)
(5) 정명(正命) (6) 정정진(正精進) (7) 정념(正念) (8) 정정(正定).
또 보살의 단계는 보통 열 가지로 구분합니다.
경전마다 조금씩 다르게 구분하기도 하지만, 한 단계를 기본으로 다음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과 방법을 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보살이 수행의 과정 속에서 거쳐야 할 단계들입니다.
여기서는 신역(新譯) 화엄경(華嚴經)의 서른 네번째 권에 담긴 보살의 명칭을 중심으로 ‘십지(十地)’를 열거하고 그 간단한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1) 환희지(歡喜地, Pramudita Bhumi): 처음으로 보살의 경지를 체험하는 지위로 공성의 직접 적 체험을 경험하는 기쁨이 일어나는 자리.
(2) 이구지(離垢地, Vimala Bhumi): 더 이상 계율에 어긋나지 않고, 그로 인한 번뇌를 떠난 자 리.
(3) 발광지(發光地, Prabhakari Bhumi): 선정에 들어 지혜의 빛을 발하는 자리.
(4) 염혜지(焰慧地, Acrimati Bhumi): 앞의 세 가지 지(地)를 통해 얻은 지혜를 깊이 체득하여 번뇌가 타서 불꽃으로 변한 자리.
(5) 난승지(難乘地, Sudurjaya Bhumi): 확실한 지혜를 얻어 중생 구제를 위한 방편에 익숙해지는 경지로 아주 도달하기 힘든 자리.
(6) 현전지(現前地, Abhimkhi Bhumi):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큰 지혜가 드러난 자리.
(7) 원행지(遠行地, Durangama Bhumi): 세간을 뛰어 넘어 방편이 구족한 자리로, 자칫 무상적 멸(無想寂滅)에 빠져 수행이 멈출 수 있는 경지로 더 나아가 다음 단계로 향하도록 힘을 내야 하는 자리.
(8) 부동지(不動地, Acala Bhumi); 무상(無相)의 지혜를 얻어 번뇌로부터 전혀 동요되지 않는 자리.
(9) 선혜지(善慧地, Sadhumati Bhumi); 보살이 이타 행을 완성하여 지혜에 걸림이 없는 자리.
(10) 법운지(法雲地, Dharmamegha Bhumi); 대법신(大法身)을 얻어 자재력(自在力)을 갖춘 자리.
이와 같은 각각의 수행 단계들은 다시 대승의 수행자인 보살이 부처가 되기까지의 과정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오도(五道) 또는 오위(五位)’의 다섯 가지 길로 보살의 수행을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1) 자량도(資粮道, Sambhara: 깨달음의 준비, 밑천)
자량도는 깨달음을 준비하는 단계로, 그 원인과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복덕을 쌓는 길을 말합니다.
자량도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데, 수행자는 ‘삼십칠도품’의 처음 세 과정을 먼저 수행합니다.
초급 단계에서는 사념처를 수행하는 데, 이것은 신(身, 몸)의 부정(不淨)함, 수(受, 감각)의 고통, 심(心, 마음)의 무상(無常), 법(法, 현상)의 무아(無我)를 관하는 것을 말하며, 상락아정(常樂我淨, 변함없이 즐겁고 나라는 생각 속에 깨끗하다는 착각)의 네 가지 전도(顚倒)된 견해를 전환하는 수행을 통하여 사성제의 본래 의미를 깨닫는 수행을 합니다.
(1) 신념처(身念處); 고제(苦諦)에 대한 명상으로, 이 몸은 고통의 주요한 원인이자 결과이다.
(2) 수념처(受念處); 고통의 원인인 집제(集諦)에 대한 것으로, 느낌은 갈망(욕구)의 원천이며, 최고의 감성적 장애이다.
(3) 심념처(心念處); 멸제(滅諦)에 대한 것으로,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자아의 개념을 일으키는 마음을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4) 법념처(法念處); 도제(道諦)에 대한 것으로, 이는 고통을 멸하고 윤회를 이해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중급 단계에서는 사정근을 과정을 수행합니다.
이 단계는 사념처를 수행한 결과에서 생긴 적극적인 수행의지를 좀 더 갈고 닦는 자리입니다.
(1)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든 악을 끊고(律儀斷),
(2) 이미 나타난 모든 악을 끊으며(斷斷),
(3)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일으키고(隋護斷),
(4) 이미 나타난 선을 공고히 한다(修斷).
고급 단계에서는 사신족 (또는 사여의족)을 수행하는데, 이것은 수행을 원을 세우는 욕심(欲)을 가지고, 정진(精進)하여 마음(心)이 지혜(慧)롭게 되도록 수행하여, 서원(誓願)과 노력(努力)과 심념(心念)과 관혜(觀慧)의 힘으로 정(定)에 들며, 이 정(定)의 힘으로 여러 가지 신변(神變:如意)을 나타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정근에서 수행한 바른 노력의 결과로, 사신족의 수행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수행의 방편들이 됩니다. 사신족에는 (1) 욕(欲:서원(誓願) (2) 정진(精進) (3) 심(心) (4) 혜(慧)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2) 가행도(加行道: 方便道)
가행도는 모든 현상에 대한 공성을 관하면서 거기에 지(止)를 결합한 수행의 단계를 이루는 과정으로,
존재의 본성이 점점 확연히 드러나도록 하는 길입니다.
여기서는 ‘삼십칠도품’을 난(煖), 정(頂), 인(忍)
그리고 세제일법(世第一法: 內自證智)으로 이루어진 가행위(加行位)의 네 가지 단계에 따라 수행합니다.
이것은 번뇌를 끊고 자유로운 선근(善根)을 일으키도록 하는 방법들입니다.
가행위의 네 가지 단계에서는 ‘삼십칠도품’의 열 가지(五根과 五力)를 수행합니다.
‘난(煖)과 정(頂)’으로 알려진, 이 길의 처음 두 단계 수행에서는 ‘오근(五根)’을 수행합니다.
이 수행은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뛰어난 힘이 있기 때문에 근(根)이라고 한다.
오근은 (1) 신(信), (2) 정진(精進:勤), (3) 념(念), (4) 정(定), (5) 혜(慧)의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다음의 두 단계 수행인 ‘인(忍)과 세제일법(世第一法: 內自證智)’에서는 ‘오력(五力)’을 수행합니다.
오근(五根)이 선근을 일으키는 수행이라면, 오력(五力)은 더 강력한 힘을 일으켜 온갖 장애를 제거 하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수행입니다.
따라서 역(力)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여기에도 (1) 신력(信力), (2) 근력(勤力), (3) 념력(念力), (4) 정력(定力), (5) 혜력(慧力)의 다섯 가지가 있다.
3) 견도(見道)
공성에 대한 명상을 계속하여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는 수행을 반복함으로서, 공성을 직접 체험하는 수행의 길입니다. 이 길에서 수행자는 ‘삼십칠도품’의 ‘보살도의 칠각지(七覺支)’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지혜의 힘으로 사성제의 궁극적 본성과 자성(自性)을 깨닫고, 생각으로 이름붙인 것(槪念化)들에서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즉, 현상계의 본성을 바로 보는 것이지요.
이 견도(見道)에 이르면, ‘십지(十地: 보살의 열 가지 계위’의 첫 번째 과위(果位)인 ‘환희지(歡喜地)’를 얻게 됩니다.
보살도의 칠각지(七覺支)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각지(自覺支): 본성에 대하여 본 것을 잊지 않고 지혜로 살피는 것.
(2) 판별지(判別支): 자아의 개념에 집착하는 특성을 부수는 지혜.
(3) 정진지(精進支): 깨달음을 향한 노력의 즐거움.
(4) 환희지(歡喜支): 진리에 대한 깨우침과 선정의 기쁨.
(5) 적응지(適應支):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물리적ㆍ정신적 성숙의 가피.
(6) 정념지(定念支):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한 곳에 집중.
(7) 평등지(平等支):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성(自性)에 머무름.
더불어 티벳불교에서는 보살도의 칠각지(七覺支)를
(1) 염각지(念覺支), (2) 택법각지(擇法覺支), (3) 정진각지(精進覺支), (4) 희각지(喜覺支), (5) 경안각지(輕安覺支), (6) 정각지(定覺支), (7) 평등지(平等支)로 나누고 있습니다.
4) 수도(修道)
견도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행자는 본성을 가리고 생각으로 이름 붙여진 것들을 제거 하였지만,
본래의 성품과 동일시(同一視)하기에는 아직 미세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수도(修道)의 과정은 그것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제거하는 길입니다.
여기서 수행자는 ‘삼십칠도품’의 팔정도(八正道)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팔정도는 대승적 수행단계에 적용되는 것으로 견도에서 얻어진 깨달음을 완성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길은 수행이 오래지속 된 후에도 계속 따라다니는 업의 훈습(熏習)등을 정화해 나가는 과정에도 해당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은 사성제의 법성(法性)에 대한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홉 단계를 거치는데, 팔정도의 각 단계와 그것을 모두 완성한 상태인 아홉 번째 단계, 즉 ‘십지(十地)’의 아홉 번째 단계인 ‘선혜지(善慧地)’까지 완성합니다.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한 팔정도의 수행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정견(正見): 이미 얻은 지혜의 실현.
(2) 정사유(正思惟):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선한 생각.
(3) 정어(正語): 입으로 짓는 부정한 네 가지 행의 정화.
(4) 정업(正業): 몸으로 짓는 부정한 세 가지 행의 정화.
(5) 정명(正命): 잘못된 생활의 정화.
(6) 정정진(正精進): 장애들을 정화하기 위한 노력.
(7) 정념(正念): 게으름이나 아만(我慢)같은 부수적 감정들을 정화하고 부단히 관조하는 것 .
(8) 정정(正定): 지금까지 걸어온 네 가지 수행의 길들의 각 단계들을 충만하게 하여, 수승한 덕을 얻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
팔정도의 처음 둘은 지혜와 관련 된 것이고, 다음의 셋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일으키는 도덕적 계행과 관련된 것이며, 마지막 셋은 장애를 정화하기 위한 수행의 집중입니다.
이것을 마명(馬鳴, Asvaghosa) 논사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해석분(解釋分)」의 ‘오염된 마음(染心)과 청정한 마음(淨心)’에 대한 풀이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작도 없는 무명(無明)에서 훈습되어 일어나는 식(識)을 모든 범부들의 분별적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해행지(解行地 화엄경의 十住, 十行, 十回向의 단계에 있는 보살)보살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관찰하기를 배우고, 법신(法身 화엄경의 十地의 단계에 있는 보살)보살은 약간 알며, 구경지(究竟地 화엄경의 等覺에 있는 보살)보살의 단계에서도 다 알지 못하며, 오직 여래(如來)만이 모든 것을 밝게 안다 본래의 마음은 항상 청정하지만, 무명의 힘 때문에 오염된 형상이 나타나는 것일 뿐, 비록 현상계가 오염으로 나타난 가현(假現)된 것일지라도 본래 마음의 본성은 항상 밝고 청정하여 변질되지 않는 것이다.(無始無明熏所起識. 非諸凡夫二乘慧之所能知. 解行地菩薩始學觀察. 法身菩薩能少分知. 至究竟地猶未知盡. 唯有如來能總明了. 此義云何. 以其心性本來淸淨. 無明力故. 染心相現. 雖有染心而常明潔無有改變).”
( 마명(馬鳴, Asvaghosa) 著, 실차난타(實叉難陀, Siksananda) 譯).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이와 같은 내용은 각 단계의 수행을 거치면서 청정 본성을 향한 정화의 과정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최후의 얼룩까지도 정화된 상태라야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상의 모든 대승 수행의 길을 거친 보살들은 시방의 부처님들께 가피를 받고, 부처님들의 완전한 지혜에 이르기 위해 장애가 되는 단 한점의 얼룩도 모두 제거합니다.
보살은 이 단계의 마지막 순간, ‘지(止)의 금강(金剛) 혹은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부르는 선정 상태에 들어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티끌을 완전히 제거합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단계를 모두 완성하게 되면, 등각(等覺)과 묘각(妙覺)을 성취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들은 모두 부처의 수승한 경지를 표현하는 말일 뿐입니다.
5) 무학도(無學道)
사성제와 십지를 모두 완성한 후에, 그에 따른 수행의 힘으로 내면과 지성에 불확실한 두 가지의 불명료함을 모두 떨쳐버린 수행자는 사신(四身)과 오지혜(五智慧)를 갖춘 완전한 부처의 경지인 제 5의 길을 완성하게 됩니다.
부처의 사신(四身)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성신(自性身): 이는 본래청정하고, 오욕으로부터 청정하여, 두 가지 모두가 완전히 청정한 몸.
(2) 법신(法身 또는智慧身): 이는 오염되지 않는 모든 지혜를 갖춘 몸.
(3) 보신(報身): 다섯가지 확실성을 지니고, 32상(相) 80종호 (種好)를 갖춘 부처의 궁극적 형상의 몸.
(4) 화신(化身): 끊임없이 모든 중생들의 이익을 위하여 화현(化現)하는 다양한 몸.
부처의 오지혜(五智慧)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법계성지(法界性智): 법의 성품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편만한 지혜이다.
이는 자성신과 지혜신이라 불리는 근거이다.
(2) 대원경지(大圓鏡智): 거울에 비춘 것처럼, 모든 것을 명료하게 알지만,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없다.
이는 다음 세 가지 지혜의 원천이며 보신(또는 수용신)이라 불리는 근거이다.
(3) 평등성지(平等性智): 윤회와 평화의 극단을 넘어 평등함에 머무르며,
모두 동등하게 적절한 부처의 몸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4) 묘관찰지(妙觀察智): 잘못없이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이며, 모든 것에 법의 비를 내리게 한다.
(5) 성소작지(成所作智): 부처님들의 신ㆍ구·의로 하는 깨달음의 행위를 통하여
우주 법계의 모든 가능한 이익을 이룬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승의 수행 요체는
중생구제의 큰 서원을 이루기 위한 부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련의 수행이 끝나더라도 그대로 자기 지복(至福)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선행을 모두 닦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소승적 자기완성에만 관심을 갖는 이들의 의문에 대하여,
마명(馬鳴) 논사께서는자신의「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에서 다음과 같이 문답(問答)하고 있습니다.
“일제중생(一切衆生)과 일체제법(一切諸法)은 모두가 하나의 법계이기 때문에 그 모양이 둘이 아니므로, 바른 이치에 따라 진여(眞如)만 바로 보면 될 터인데, 왜 다시 일체선행(一切善行)을 닦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해야 하는가?”( 一切衆生一切諸法. 階同一法界. 無有二相. 據理但應正念眞如. 何假復修一切善行. 求一切衆生.)라는 의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마니보석은 본성이 밝고 깨끗하나, 더러운 티가 돌 속에 많이 들어 있듯이, 누군가가 생각만을 가지고 방편의 힘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청정해지기를 바란다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진여의 법도 그와 같아 본래는 밝고 맑아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나, 다만 오염되어 있을 뿐인데, 만약 누군가가 열심히 생각만 하고, 방편을 통해 모든 것을 행하지 않고서 청정해지기를 바란다면, 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당연히 일체선행을 통하여 모든 중생을 구하고 이 한량없이 오염되어 있는 것들을 맑히어 벗어나야 한다.(不然. 如摩尼寶 本性明潔. 在鑛穢中. 何使有人. 勤加憶念. 而不作方便. 不施功力. 欲求淸淨. 終不可得. 眞如之法亦復如是. 體雖明潔具足功德. 而被無邊客塵所染. 假使有人. 勤加憶念. 而不作方便. 不修諸行. 欲求淸淨. 終無得理. 是故要當集一切善行. 求一切衆生. 難彼無邊客塵垢染.)”
더불어 「대승기신론에」서는, 그에 따른 방편의 종류들을 나열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대승의 길은 마지막에 방편의 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에 이어질 금강승의 길은 바로 이러한 방편의 길이 특별하게 발달한 대승의 길입니다.
[출처] 티베트 불교/밀교 : 대승불교,소승불교,자량도,가행도,견도,수도,무학도|작성자 whitec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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