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 만암종헌
도제양성.총림 개설로 한국불교 위상 제고
조선 팔경의 하나로 으뜸 경치를 뽐내는 장성 백암산 백양사. 사계절 언제나 아름다운 도량이다. 백양사가 지금의 사격(寺格)을 갖춘 것은 만암종헌(曼庵宗憲, 1875~1957)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부분 전각이 만암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사한 건물이다. 또한 광성의숙과 심상학교, 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왜색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조선불교 교정과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는 등 불교중흥의 원력을 실천했다. 한없는 자비심으로 대중을 인도한 만암스님의 삶을 지난 16일 영광 불갑사에서 전법제자 수산스님(고불총림 방장)에게 들었다.
도제양성.총림 개설로 한국불교 위상 제고
백양사 방화 ‘불 속으로’ 뛰어들어 도량 수호
왜색불교 반대 순리와 화합으로 조선불교 수호
보는 마을 사람들 금고
○…매년 음력 2월15일 부처님 열반재일이면 백양사 인근 마을 주민들은 큰절로 올라왔다. 법회가 끝나고 떡국을 먹은 후 백양사 계곡의 보(洑)를 보수하기 때문. 만암스님 지시로 이뤄진 일들이다. ‘보릿고개’를 앞둔 주민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자존심 건드리지 않는 방법을 찾은 것이 보를 보수하는 일 이었다. 일거리를 주고 정당한 임금을 지급했다.
이 일은 매년 반복됐다. 어느 해는 멀쩡한 보를 허물기도 했다. “백양사 보는 마을 사람들 금고”라는 말까지 나왔다. 백양사 살림도 어렵지만 대중을 위한 자비심은 이 뿐만이 아니다. 섣달그믐이면 쌀과 두부를 마을에 나눠 주게 했다.
이밖에도 사찰 주변에 유실수를 심는 등 주민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스님들도 직접 경작활동을 통해 수행하게 했다.
1950년 3월에는 많은 비가 안 왔는데, 멀쩡한 ‘보’가 터졌다. 만암스님은 “3개월 내에 변고가 일어나겠다”고 했다. 그해 6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졌다.
화마에서 백양사 구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가을. 국군의 명령으로 모든 대중이 절을 비워야 했다. 하지만 만암스님은 떠나지 않았다. 운문암 등 산내암자를 불태운 국군이 큰절에도 들이 닥쳤다. 빨치산 거점이 된다며 소각해야 한다고 했다. 천년고찰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 만암스님은 “절에 불을 지르려면 나부터 죽여야 한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공비가 거(居)할 수 있다고, 불을 질러 백양사가 타버리면 소중한 문화재가 사라지고, 국민들의 정신적 귀의처가 없어져서야 되겠냐.”
하지만 명령 집행을 앞세운 국군은 “불을 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스님에게 감명 받은 장교는 “그러면 향적전이나 극락전만 태우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스님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각들이 닿을 만큼 가까운데, 한 곳에 불이 나면 도량 전체가 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절대 안 된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장교는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추수가 끝나 절 마당에 쌓아 놓은 볏짚을 향적전 대중방으로 옮기고 불을 댕겼다. 그들은 곧장 백양사를 빠져 나갔다. 불났다는 소식에 마을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도착하니 만암스님이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스님을 구한 주민들은 “우리 부처님 타 죽는다”며 울었다. 그러나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었다. 연못과 계곡의 물을 퍼서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도량 전소(全燒)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편 만암스님에게 감화 받은 국군이 향적전에만 불을 놓은 직후 철수해 불길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연기가 올라가게 하여 절에 불을 냈음을 상부에서 인지하도록 하는 한편, 백양사를 곧바로 떠나 자연스럽게 봉쇄망을 풀어 주민들이 진화 작업에 들어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순리와 화합 ‘강조’
○…스님은 누구보다 정화(淨化)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왜색불교에 맞서 만해.석전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臨濟宗)을 만들고, 불교 인재양성을 위해 불교전문학교(이후 혜화전문, 지금의 동국대) 교장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해인사 주지 이회광 등 친일파의 영향력이 확대될 때 혜화전문 학생들 앞에 선 만암스님은 “너희들이 부처님 시은(施恩)을 입고 공부하는데, 어찌하여 ‘난리’가 났는데도 모른척 하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며 조선불교의 왜색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백양사 주지도 독신승만 소임을 살도록 원칙을 정한 것도 이같은 원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교단 갈등이 빚어지자 스님은 통탄했다. “비록 국토는 분단 됐지만 우리 민족에게 서광이 비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졌는데, 종단만 구태의연함을 벗지 못하고 왜정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중앙교무회(지금의 종회에 해당)는 방한암 스님의 입적으로 후임 교정(敎正)을 추대해야 했다. 다섯 명의 스님이 만암스님을 만나 추대의 뜻을 전했다. “내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수락 못한다”며 거절했지만, 종단 구성원이 자신의 뜻을 따라 달라며 수락했다.
한암스님에 이어 교정이 된 스님은 불국사에서 모임을 갖고 종명을 조계종으로, 교헌과 교정 명칭도 종헌과 종정으로 바꾸는 등 혁신에 나섰다. 이일은 중앙부터 시작됐다. 문제 있는 간부부터 물러나게 했다. 사찰을 갑.을.병.정 등 네 등급으로 분류한 후 수행 토대 마련을 위해 총림(叢林) 건설에도 나섰다. 백양사에 고불총림이 세워졌고, 가야산 해인총림, 통도사 영축총림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화합과 순리로 원칙을 지키며 혁신을 하려던 뜻은 수용되지 않았다. 또 다시 백양사로 돌아왔다.
“너 말고 먹을 놈 있다”
○…만암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영광 포교당에 머물던 수산스님이 백양사로 달려왔다. 창승스님이 오랫동안 만암스님 시봉을 들고 있었다. 방석 두 개와 군용 모포를 이불로 쓰는 모습을 보고, 깨끗하고 좋은 이불을 드렸지만 만암스님은 “불편하다”며 사용하지 않고, 입적후 서옹스님을 통해 수산스님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청빈한 삶을 엿볼 수 있다.
수산스님이 찾아온 날 저녁공양 때였다. 만암스님은 “재도 갖다 주어라”고 말했다. 공양하라는 소리로 알아들은 수산스님이 “스님, 저는 밥을 먹었습니다”라고 답했다. 만암스님은 “너 말고 먹을 놈이 있다” 며 손가락으로 지붕 쪽을 가리켰다.
방 한쪽 선반 위에 작은 그릇이 있어 그 안에 음식을 담아주니 쥐가 와서 먹는 게 아닌가. 만암스님은 “저놈도 먹어야지, 조용해. 그래야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어.” 밥을 다 먹은 쥐는 그릇을 방바닥으로 떨어 뜨렸다. 비록 사람들이 싫어하는 쥐였지만, 스님의 자비심은 모든 생명에게 편견 없이 적용됐다.
영광=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만암스님 행장
1876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목포 정혜원에서 만암스님을 시봉한 고불총림 방장 수산스님은 “만암스님의 생신은 음력 1월17일이 아니고, 음력 1월7일”이라고 밝혔다.
1886년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 선사 문하로 출가 뜻을 밝히고, 백양사 강원에서 환응(幻應)스님에게 사미과와 사집과를 이수했다. 이어 구암사에서 영호(映湖)스님에게 사교과를 마치고, 해인사에서 대교과, 선암사에서 수의과를 마쳤다. 23세 때 운문암에서 환응스님에게 전강 받은 후 운문암, 청류암, 해인사 강백으로 후학을 지도했다.
스님은 운문선원에서 5하안거를 성만하는 등 선교(禪敎)를 겸비했다. 1916년 백양사 주지 취임 후 중창불사로 지금의 가람을 일궜다. 평생 도제양성과 인재양성에 매진했으며, 조선불교 왜색화를 저지하는 정진을 계속했다.
생산불교를 주창해 전남여객버스회사, 동광유지 회사 등을 설립 운영했다. 조선불교 교정과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며 원융살림을 추구했다.
1957년 1월 제자들과 차 한 잔 나눠 마신 뒤
“마지막 입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며 좌탈입망했다. 세수 81세, 법납 71세였다.
■ 만암스님이 남긴 시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방화에서 백양사를 지킨 만암스님은 ‘국군입산명화사암음(國軍入山命火寺庵吟)이란 제목의 시를 통해 안타까운 심경을 밝힌바 있다. 이 시는 ‘만암문집’에 게재되어 있다. 풀이는 백양사 승가대 학장 법광스님.
국가동란심어산(國家動亂甚於山)
도의수분시가정(道義誰分時可定)
천고문명일화간(千古文明一火間)
온정내무사방한(溫情乃務事方閒)
곡운탄토비수색(谷雲呑吐悲愁色)
부왕태래의유재(否往泰來宜有在)
설월우다냉정안(雪月尤多冷靜顔)
갱기영일운회환(更期寧日運回還)
국가의 동란이 산사에도 극심하니
어느 때 그 누가 바로 잡으리오.
천년의 문명이 한 가닥 불에 달렸으니
온정으로 녹여 편안케 할 지어다.
계곡을 삼킬 듯 토하는 구름은 슬픔만 더하노니
어려움 가면 태평한 날 반드시 오리라
눈 속 달이 찰수록 얼굴은 더 온화하여
안녕된 날 돌아오길 기약하노라.
영광=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395호/ 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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