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 경허성우 -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수선님 2021. 4. 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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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 경허성우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가수 방실이의 노래 ‘서울탱고’ 가운데 일부다. 투병 중인 그녀는 지난 연말 한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동료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보였다. 동료와 시청자들도 눈물을 훔쳤다. 누구도 부럽지 않은 명예와 재산을 가졌던 그녀의 쓸쓸한 모습은 한번 뿐인 인생에 집착하며 다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동학사.천장암 정진후 호서 영호남 돌며 선풍 다시 일으켜
혜월.수월.만공.한암 스님 등 법맥 계승 한국불교 ‘중흥’ 
 

 

<사진> 범어사에 봉안된 경허스님 진영

 

근현대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은 선지식으로 존경받는 경허(鏡虛, 1846~1912)스님이 주는 메시지는 덧없는 인생에 집착 말고 수행정진하라는 것이다. 경허스님이 지은 ‘참선곡’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마음을 밝혀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경허스님 가르침이다. 2600년전 카필라 성을 나와 길에서 법을 전하고,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중생제도를 위해 ‘조선의 길’에 몸과 마음을 나툰 것이 경허스님의 삶이다. 때로는 범부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산천을 주유(周遊)하며 그 어떤 차별도 두지 않고 법을 전했다.


스님은 1846년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났다. 자동리는 일제 강점기 이전 지명으로 현재는 전주시 교동 향교 근처이다. 속명은 송동욱(宋東旭). 어려서 선친을 잃고 의왕 청계사에서 계허(桂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아홉 살이었다. 한암(漢巖)스님이 쓴 ‘선사 경허화상 행장’에 따르면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큰 사람 못지 않았고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 없이 나무하고 물 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스님을 모셨다”고 되어 있다.


출가후 첫 번째 전환점은 열네살 되던 해였다. 청계사에 머물던 선비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면서다. “뒷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을 제도하리라”는 칭찬을 들으며 공부했다. 은사 계허스님 소개로 동학사 강원의 만화보선(萬化普善)스님 문하에서 교학을 배웠다. 23세에 동학사 강원에서 후학을 지도한 것이 우연은 아니었다. 10년 가까이 계속된 연찬은 훗날 불법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는 방편이 되었다. 문자에 집착하지 않았지만 교학의 뿌리가 튼튼했다.

 

교학으로 명성을 얻은 스님이 참선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사건이 일어났다.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된 것이다. 어느 여름날 환속한 계허스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경허스님은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들어섰다. 하루밤을 묵으려고 청했지만 누구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염병이 돌아 서 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어떤 사람이기에 죽는 곳에 들어왔는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죽음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門과 文을 閉하고 정진


동학사로 돌아온 스님은 생과 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몰두했다. 학인들을 돌려 보낸 후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조도(祖道)를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는 원력을 세우고는 정진에 몰입했다.

 

스님은 ‘참선곡’에서 “사람되야 못 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라고 했다. 사람 몸 받아 불법을 배우지 않으면 언제 또 다시 공부할 인연을 만날지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정진했다. ‘바로 지금’ 마음 찾는 공부에 모든 힘을 다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문(門)과 문(文)을 폐(閉)한 스님은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턱밑에 괴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수마를 항복받는 방편이었다. 바깥 출입을 금한 채 3개월간 화두와 겨루던 어느 날 “어찌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라는 말을 듣고 지혜의 눈을 떴다. 스님은 “백천가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기와가 깨어지듯”했다고 한다. 이때가  1879년 동짓달 보름께였다.

 

<사진> 경허스님이 모친을 위한 법회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며 무상의 도리를 설한 서산 연암산 천장암 법당.

 

이듬해(1880년) 속가 친형인 태허(太虛)스님이 주지로 있는 서산 연암산 천장암으로 주석처를 옮기고 거듭 정진에 들었다.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평도 안 되는 방의 문을 걸었다.


공양도 대소변도 방에서 해결했다. 누더기 한 벌로 만족했다. 이가 들끓고 몸은 수척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천장암은 아직도 그때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마나 나아졌지만, 절해고도(絶海孤島) 같은 곳이다. 스님도  “한쪽은 바다이고, 다른 한쪽은 절벽인 곳에 천장암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생사 해답을 확인한 스님은 드디어 오도송를 불렀다. 1881년 6월로 세수 36세 되던 해였다.

 

■ 오도송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 (忽聞人語無鼻孔)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頓覺三千是我家)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巖山下路)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

 


무애경지 보이며 수행


스님은 이후 20여 년간 호서지방에 불법을 폈다. 수덕사, 개심사, 문수사, 마곡사, 태고사, 갑사, 법주사 등을 돌며 선풍(禪風)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몸을 낮추고 있던 조선불교가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숱한 기행(奇行)과 일화를 남긴 것도 이때였다.

 

모친을 위한 법회에서 벌거숭이 몸을 보인 것도, 문둥병으로 온몸이 짓무른 여인과 보름간 침식을 같이하며 무애의 경지를 보인 것도 이 무렵이다. 천장암은 경허스님이 혜월.수월.만공스님을 지도하며 한국불교의 동량을 만든 성지이다.


어느덧 세수가 50을 넘어서고 있었다. 외세의 침탈로 조선은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남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1898년 부산 범어사에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하고 납자들을 지도했다. 이듬해인 1899년에는 가야산 해인사 조실로 추대됐다.

 

해인총림 방장실인 퇴설당(堆雪堂) 편액이 경허스님 친필이다. 또한 화엄사, 송광사, 천은사, 백장암, 태안사 등 호남을 유력(遊歷)하며 선원을 개설하고 수좌들의 발심을 도왔다. 1903년 스님은 국한문 혼용으로 ‘참선곡’ ‘가가가음’을 지었다. 또한 순 한글로 ‘법문곡’과 ‘중 노릇 잘하는 법’을 지어 누구든 안목을 열수 있도록 했다.

 

 

출가도량인 의왕 청계사의 현재 모습.


‘입전수수’의 삶


1904년 천장암으로 돌아온 스님은 만공스님에게 법을 전한후 북녘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도(悟道)를 이룬 뒤 30대 중반에서 40대말까지는 호서에서, 50대는 영호남에서 법을 편 스님이 북녘으로 향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친 스님은 안변 석왕사에 잠시 머문 뒤 자취를 감췄다.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머리를 기르고, 승복조차 벗어버린 경허스님은 유생의 모습으로 저자에 들어갔다. 마치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와 같은 삶을 보여 주었다. 독립운동가인 김탁 집에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조선의 미래를 기약했다.


스님은 1912년 4월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했다. 풀 뽑는 학동들을 보다 자리에 누운 다음날 해 뜰 무렵 임종게를 쓰고 원상(圓相)을 그린 후 원적에 들었다. 세수 65세, 법납 48세였다.

 

■ 임종게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心月孤圓)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光呑萬像)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光境俱忘)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復是何物)”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수월스님의 연락을 받은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은사의 법구를 난덕산으로 운구해 다비를 모셨다. 진영은 예산 수덕사 금선대, 공주 동학사 조사전, 부산 범어사, 서산 천장암 등에 봉안돼 있다.

 

서산 천장암에 머물 때 경허스님이 정진하던 방. 


조선 말기에 태어나 생사의 경계를 열은 스님은 자유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나와 남을 구하는 근원이 ‘나’에 있으며, ‘나로부터’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치열한 정진과 전법은 조선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다.


법을 이은 침운(枕雲).혜월(慧月).수월(水月).만공(滿空).한암(漢巖) 스님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법맥(法脈)은 지금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후학들이 한국불교의 개화(開花)를 성취한 것도 경허성우라는 대선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입적 후 행장을 묶은 <경허집> 발간에 성월(性月).석상(石霜).석우(石友) 스님 등 35명의 수좌들이 동참했으며 만해(卍海)스님이 머리글(序)을 지었다. 스님이 남긴 ‘빈거울(鏡虛)’에는 ‘깨달음을 찾는 수행자(惺牛)’들이 선사(先師)의 가르침을 계승하며 정각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비추고 있다.

 

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391호/ 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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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 경허성우 -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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